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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과-24화 (24/77)

24화

“하긴…….”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안면 근육에 경련이 일었다. 익숙하지 않은 칭찬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법을 알면 좋을 텐데. 때마침 조교가 돌아다니면서 결과지를 확인하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정해준이 갑자기 여긴 무슨 일일까? 공강 시간을 맞추기 위해 정해준의 시간표와 비슷하게 짰기 때문에 지금은 빈 시간이 아닌 게 확실했다. 의아해하며 실험복을 챙겨 들고 문을 나서자마자 복도에 비스듬히 기대 있던 정해준이 나를 발견하고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수업 있잖아.”

“마침 한 과목 휴강해서.”

“그럼 집에 가서 쉬지 않고.”

몇 분 안 되는 짧은 시간이라도 나를 보러 온 건가 싶어 감동 받을 찰나, 이어지는 정해준의 발언에 긴장했다.

“너랑 같이 수업 들으러 온 건데.”

“어…….”

조금 전 정해준이 나를 향해 환히 웃은 순간 일제히 쏠렸던 이목을 떠올렸다. 본인은 늘 겪는 반응이라 무덤덤할지 몰라도 나로서는 꽤 신경 쓰였다. 한참 떨어진 단과대에서도 화제에 오를 정도의 인기인인데 한 강의실에 나란히 들어서면 무슨 뒷말이 나올지.

“안 돼?”

정해준이 서운해하며 되물었다.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찌푸린 인상에 은근한 고집이 묻어났다. 이럴 때는 어떤 이유를 대도 통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살짝 주저했다.

“마음대로 청강해도 되나? 허락도 안 받고…….”

자신이 없어 작아지는 목소리에 정해준이 씩 웃었다.

“설마 꺼지라고 하겠어? 쫓아내면 나가지 뭐.”

성큼성큼 앞장서는 정해준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해준이 생물학과고 내가 청강생 같을 테다.

강의실에 들어선 정해준의 얼굴에 예의 흥미로운 시선들이 따라붙었지만,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같네.”

“응.”

그날처럼 비는 오지 않지만 짝이 되어 앉은 자리는 비슷했다. 창가 바로 옆, 맨 뒷자리. 그땐 우리가 연인으로 발전할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는데. 새삼 신기한 기분으로 강의 들을 준비를 했다.

구부정한 허리의 나이 지긋한 노교수가 정확히 정각에 강의실로 들어섰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강단에 선 뒤에는 으레 그러듯이 하나하나 얼굴을 확인하며 출석을 불렀다. 강의실 앞뒤에 학생증을 찍어 출결을 확인하는 시스템이 있지만 완고한 노교수는 옛 방식을 고수했다.

“이해원.”

“네.”

내 차례가 되어 손을 들고 짧게 대답했는데, 어째서인지 노교수의 시선이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내 옆자리의 정해준에게서.

노교수가 한참을 응시하니 당연히 강의실에 있는 눈이란 눈은 죄다 정해준에게 쏠렸다. 덕분에 정해준이 여기 있는지 모르던 사람들도 흥미로운 눈초리로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역시, 안 되는 거였나.

긴장감에 땀이 배어난 손을 무심코 바지에 문지르는데 노교수가 정해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네는……, 왜 여기 있나?”

눈에 안 띄기 불가능한 외모긴 했다. 정해준을 알아본 교수님이 생물학과 강의실이 맞는지 안경을 추켜올려 문패를 확인했다. 씩 웃은 정해준이 넉살 좋게 답했다.

“워낙 명강의라 또 듣고 싶어서 청강 중입니다.”

“허허, 도깨비한테 홀린 줄 알았다.”

기분 좋은 너털웃음이 터졌다. 한결 훈훈해진 분위기와 함께 교수님이 별다른 말 없이 강의를 시작하자 정해준이 강의자료 위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필기인가 했는데 슥 내밀어진 종이 위에는 ‘바로 전 수업이었어’라고 적혀 있었다.

그제야 깜짝 놀란 교수님의 반응이 이해돼 살며시 웃음이 났다. 공강이면 쉬고 싶을 텐데 똑같은 강의를 또 듣겠다고 함께 있어 주는 게 고마웠다. 정해준이 쓴 글 옆에 하트를 그려 넣자 싱긋 웃은 정해준이 거기에 색을 채웠다.

약속한 것처럼 의자 밑으로 손을 내렸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엇갈려 끼웠을 때, 바로 근처에서 헛기침 소리가 낮게 울렸다. 제풀에 놀라 손깍지에 힘을 풀자 정해준이 도리어 손을 죄어 왔다. 누군가를 똑바로 응시하며.

무심코 정해준의 시선을 읽다가 그 끝에 있는 김웅진과 눈이 마주쳤다. 미처 수습하지 못한 적개심이 고스란히 드러난 눈에 속이 불편해졌다. 살갗에 달라붙는 것처럼 진득한 눈길이 부담스러워 먼저 고개를 돌렸다.

‘내가 뭘 잘못했나?’

강의실에서 대놓고 애정 행각을 벌여서? 하지만 맨 뒷자리여서 일부러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으면 알기 힘든 데다가 학번 내 CC가 많은 편이라 강의실 내에는 우리 말고도 커플이 더 있었다. 설령 그게 못마땅하다 하더라도 몇 마디 나눠 보지도 못한 사이인데 굳이 껄끄럽게 나올 이유가 있을까.

두 학번 위의 선배인 김웅진은 주로 복학생하고만 어울려 다녀서 어쩌다 나와 마주쳐도 형식적인 인사만 나누는 사이였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도 의문은 끝내 답을 찾지 못하고 찝찝한 기분만 남겼다.

“뭘 그렇게 생각해?”

“그냥.”

“아까 그놈 때문에?”

“놈이 아니고 두 학번 선배야.”

“그래? 키가 작아서 웬 초딩이 강의실에 앉아 있나 했더니.”

어깨를 으쓱한 정해준이 나에게 가볍게 알밤 먹이는 시늉을 했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 할 시간에 내 생각이나 한 번 더 해.”

“네 생각은 일부러 안 해도 저절로 나는데?”

“못 당하겠다, 진짜.”

난 진심이었는데, 의외였는지 눈을 크게 떴던 정해준이 이내 흐드러지게 웃었다.

“우리 해원이 맛있는 거 사 줘야겠다. 뭐 먹고 싶어?”

“안타깝지만 오늘은 학식 먹어야 해.”

“왜? 쭉 공강이잖아.”

“어제 배양해 놓은 미생물 확인하러 가야 돼. 사진도 찍고, 리포트도 쓰고.”

“아아, 학식.”

어쩔 수 없이 따르는 티를 팍팍 내며 마지못해 걸음을 옮기는 정해준이 꼭 투정 부리는 어린이 같다. 이럴 때 정해준이 귀엽다. 평소에는 마냥 어른스럽기만 한 모습과 대비돼 색다르기도 하고.

“대신 저녁은 고기 먹기야. 다른 건 안 돼.”

“알았어.”

선뜻 응하며 천천히 학생 식당이 있는 건물을 향해 이동했다. 걷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자연히 실험 시간에 같은 조 애들이 보였던 반응이 떠올랐다.

“우리 과 애들이 너 다 알더라. 유명 인사야, 아주.”

입방아에 오르다 못해 아예 강의실까지 쳐들어왔으니 지금쯤 무슨 말이 오가도 오갔지 싶다.

“맞아, 유명 인사야.”

선선히 인정한 정해준이 이유를 내게서 찾았다.

“우리 과에서도 유명해. 여자 친구가 여신이라고.”

“……말도 안 돼.”

날 언제 봤다고? 어찌 된 상황인지 의아하면서도 뭔가 낯간지러운 기분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평소라면 입에 올리지 않았을 지저분한 화제지만, 당장을 모면하기 위해 그렇게 됐다.

“누가 봤는데 우리 과방에서……, 그거 했나 봐.”

“그게 뭔데?”

어감상 눈치챈 게 분명한데, 정해준이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대낮부터 이게 맞나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겨우 중얼거렸다.

“잤다고.”

“피곤하면 과방에서 잘 수도 있지.”

“그게 아니라…….”

“그럼 뭔데.”

이제는 아예 실실 웃는 게 굳이 그 단어를 내 입에서 듣고 싶은 게 분명했다. 짓궂어. 살짝 눈을 흘기고 발뒤꿈치를 들어 올려 정해준의 귀에 대고 빠르게 속삭였다.

“그……, 섹스.”

비로소 만족한 표정으로, 정해준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정작 힘이 들어간 곳은 따로 있는 것 같지만, 나도 모른 척했다. 유치한 복수였다.

“저질이네.”

정해준이 미간을 찡그리며 평을 내놓았다.

“아무 데서나 흘레붙는 개새끼도 아니고.”

신랄한 평가의 끝은 자기 자랑으로 이어졌다. 문득 어깨를 편 정해준이 귀담아들으라는 듯 의미심장하게 시선을 맞췄다.

“짐승도 짝짓기를 하려면 집부터 짓는데.”

“그래서 본인은 나와 함께 지낼 집부터 마련하셨다?”

“당연.”

어깨를 으쓱하는 정해준이 어이없으면서도 귀여워 웃음이 났다. 쿡쿡 웃는 나와 달리 정해준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진짜야. 우리 집에서 통학 가능한 거리인 거 알잖아. 공부는 핑계고 너 아무 데서나 안기 싫어서 그랬어.”

“어…….”

그렇게까지? 살짝 놀란 것과 별개로 무어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어버버 거리기만 했다. 식당 메뉴판이 보이기 시작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난 이거.”

제육볶음과 잔치국수 중 잔치국수를 고르자 정해준이 미간을 찡그렸다.

“고기랑 밥 먹어야지.”

“어차피 저녁에 먹잖아. 맛있는 고기. 그리고 줄 선 것 좀 봐. 시간 없단 말이야.”

제육볶음 코너에 길게 늘어선 줄을 확인한 정해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길게 쉬며 자기도 잔치국수를 골랐다. 덕분에 빠르게 배식을 받은 것까진 좋았는데 빈자리를 찾다 보니 김웅진 일행 근처에 앉게 됐다.

자리를 옮길까 고민했지만 정해준은 이미 김웅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아 그냥 착석했다. 김웅진 일행은 식사를 거의 마친 분위기라 자기들끼리 떠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강의 시간에 분명 찝찝한 기분을 느끼긴 했지만 너무 과하게 신경을 쓰는 것 같기도 해 나도 이만 관심을 끄기로 했다.

“아, 맛있다. 우리 학식 잔치국수 유명하잖아.”

찰기 있게 삶아진 소면을 집어 들기 전에 먼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물을 한 숟가락 맛보고 엄지를 척 세우자, 정해준이 피식 입매를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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