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강아지도 키웠었어?”
“응. 더비. 내가 아기 때 제 등에 올라도 귀찮아하기는커녕 오히려 조심조심 걷던 순한 녀석이야. 지금은 하늘나라에 있는데, 보고 싶다.”
사진을 만진다고 촉감이 느껴지는 것도 아닌데 부드러워 보이는 개의 털을 어루만지다 다음 장으로 넘겼다. 이국적인 풍경을 뒤로하고 비틀거리며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나, 머리통만큼 커다란 솜사탕을 든 꼬마 정해준에서 눈을 떼지 못하겠다.
“너무 귀엽다.”
정해준의 어릴 적 사진은 보고 또 봐도 새롭고 재밌다. 어지간히 애먹이는 장난꾸러기였을 거라는 게 무어 더 장난칠 게 없나 곁눈질하는 눈, 한껏 찡그린 코에서 다 느껴졌다. 후후 웃으며 다음 장으로 넘기자 젊은 커플 사진이 나왔다.
“부모님이셔?”
사진 속 남성의 서늘한 눈매와 여성의 섬세한 하관을 쏙 빼닮은 정해준이 끄덕였다.
“응. 두 분이 세미나에서 처음 만났을 때 찍은 사진일걸. 아빠가 첫눈에 반해서 사진 찍자고 했대. 한국 가서 본다고.”
“어머님도 아버님이 마음에 드셨나 보네.”
“그러니까 같이 사진 찍어 줬겠지.”
이 사진 한 장으로 태평양을 뛰어넘는 장거리 연애가 시작되었다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열정적인 두 분의 연애와 물리적 거리 때문에 순탄치 않았던 결혼, 정해준이 태어나자 아내, 아기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가업인 병원을 물려받지 않고 미국에서 살겠다고 선언했다가 정해준의 할아버지가 쓰러졌었다는 다소 심각한 이야기까지.
“지금 깨달았는데, 유전인가 봐.”
“응? 뭐가?”
“첫눈에 반하는 거.”
길쭉한 둘째손가락으로 발그레한 내 뺨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던 정해준이 자못 궁금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넌 앨범 없어? 다음에 가져와. 같이 보자.”
“이사하면서 잃어버렸어. 어딘가에 빠졌나 봐.”
거짓말이었다. 아주 아기 때, 그러니까 나를 낳아 주신 엄마가 살아계실 때는 사진이 그래도 꽤 있었다. 아빠와 둘이 살 때의 사진도 몇 장은 남아 있다. 일부러 시간을 냈을 게 분명한 둘만의 나들이가 손바닥만 한 사진 안에 남아 있다.
코끼리 앞에서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나를 목마 태운 아빠, 호랑이라도 봤는지 울고 있는 나를 달래는 아빠가.
얼마 남지 않은 사진 속의 아빠는 언제나 젊다. 어릴 때는 곧잘 아빠 사진을 보며 훌쩍이기도 했는데, 이제 나와는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아빠의 젊은 모습이 조금은 서글프다.
그런 아빠를 추억하는 것조차 죄의식을 느껴야 하는 내 처지도.
마음 저 깊숙이 억지로 욱여넣은 씁쓸한 기억들이 원망과 함께 마구 튀어나오려 해 서둘러 앨범을 덮었다.
“이제 가자. 조금 빨리 가야 돼. 문구점 들려야 해서.”
“나도 살 거 있는데, 잘됐다.”
정해준이 여러 종류의 인덱스 스티커를 비교하는 동안 나는 사물함 자물쇠를 골랐다. 윗 학번이 사물함을 비워 주지 않아서 대기가 길어졌다가 어제야 사물함을 배정받았다.
“어떤 거 사지.”
8개의 버튼 중 4개를 누르는 방식과 3개의 고리를 돌려 숫자를 맞추는 방식 중 어느 게 나은지 알 수 없어 고민하는 와중에 제 것을 다 고른 정해준이 옆에 와 섰다. 그러곤 여러 개의 자물쇠 중 하나를 단번에 골라냈다.
“이거.”
“그거? 왜?”
“비밀번호 잘 봐 봐.”
“어?”
127.
1월 27일. 우리의 졸업식 날이자 처음 사귀기로 한 날이었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신기해하는 사이 솔개가 먹이를 낚아채듯 자물쇠를 손에 꼭 쥔 정해준이 비장하게 계산대로 향했다.
긴장감이 흐르는 뒷모습에 이럴 일인가 싶어 웃음이 나다가 그만큼 나와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구나, 싶어 새삼 고마워졌다.
만족스럽게 자물쇠 사냥을 마쳐 의기양양해진 정해준과 나란히 학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자연과학대로 향했다. 수업 시작 전까지 아직 여유가 있어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운 정해준이 으레 상체를 붙여 왔다. 밀폐된 공간에서 둘이 할 일이란 뻔했다.
“벌써 시작했어?”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속옷을 더듬던 정해준의 눈썹이 실망으로 처졌다. 아차, 그게 있었지. 허둥대다 간신히 아니,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못내 의아한 모양이었다. 생리도 안 하는데 생리대는 왜 차고 있는지.
“그게, 자꾸 젖어서…….”
안에 고여 있던 게 흘러내려 걸을 때마다 가랑이 사이가 척척해 난처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거의 매일 살을 섞으니 당연한 건지도. 아무튼 불편한 건 사실이었기에 생리대의 흡수력을 이용하기로 했다.
“아.”
영문을 알게 된 정해준이 손가락을 뻗어 길게 갈라진 틈을 쓸어 올렸다.
“이렇게 음란한 몸인 걸 누가 알까. 음? 이 얼굴로.”
생리대에 채 흡수되지 않은 끈끈한 애액이 투명한 실을 자아내며 주욱 늘어났다. 흐뭇한 속내를 숨기지 않으며 점도를 확인하듯 손가락끼리 맞부딪치던 정해준이 아쉬운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진지하게 제안했다.
“오늘 자체 휴강하자.”
“절대 안 돼.”
드문드문 지나가긴 하지만, 아예 사람이 없는 곳은 아니어서 주차장에서 이러고 있는 것도 누가 볼까 봐 신경이 쓰이는데 태평한 소리나 하고 있다.
“실험은 못 빠져. 출결이 제일 중요하단 말이야.”
다시 천둥 같은 한숨이 쏟아졌지만, 정해준은 순순히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 전에 볼에 뽀뽀를 강요하긴 했지만.
“이따 봐.”
쪽 소리가 나도록, 볼이 아닌 입술에 뽀뽀하자 눈이 동그래진 정해준을 두고 서둘러 강의동 옆 실험동으로 향했다.
대학생이 됐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굳이 꼽자면 교실보다 넓은 강의실, 고등학교 도서관과는 비교되지 않는 규모의 도서관 정도? 장학금을 노려야 해서 집, 도서관, 강의실을 오가는 생활 패턴은 그대로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동기들과는 친해질 틈이 없었다. 실험이 많은 과 특성상 학번이 앞뒤로 붙어 있는 조원들과도 짤막한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어제 술자리에서 누가 주사를 부렸다느니, 누구랑 누가 손잡고 가는 걸 목격했다느니 하는 시시콜콜한 얘기가 주였지만 가끔은 어디 복사실에 가면 시험 족보를 구할 수 있다거나, 어떤 교수는 특정 참고 문헌을 쓴 리포트만 높은 점수를 준다거나 하는 정보가 쏠쏠하게 쏟아졌다.
오늘은 복학생 무리가 도마 위에 올랐다.
“그 선배 너무 들이대서 별로야. CC 하려고 눈 뒤집힌 것도 아니고.”
“그거 들었어? 우리 과방에 얼마 전에…….”
웬일로 문이 잠겨 있어서 보안업체 직원을 불러 문을 따고 들어갔는데 방금 말한 복학생 무리 중 한 명과 어떤 여자애가 얼굴이 벌게져서 나오더란 얘기가 한참 이어졌다. 후덥지근한 공기 중에 남아 있던 냄새나 의자에 점점이 뿌려져 있던 점액으로 미뤄 보아 둘이 섹스했던 게 분명하다고.
“아, 뭐야! 더러워!”
흥미진진한 눈으로 듣고 있던 임은혜가 꽥 소리쳤다가 이내 입을 막고 킬킬 웃었다.
“그래도 창피한 건 아는지 얼굴을 꽁꽁 감싸서 여자는 누군지 못 봤대.”
여기까지 말하고 주위를 살핀 유정아가 한층 목소리를 낮춰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런데 그 여자애, 우리 학번 같다더라.”
의미심장한 눈빛이 오고 갔다. 아마 애들끼리는 화제 속의 여학생이 누구인지 아는 것 같았지만, 나로서는 통 알 길이 없었다. 화제가 전환된 건, 실컷 떠들면서도 부지런히 실험 보고서에 결괏값 기입을 모두 마친 유정아가 창밖을 구경하면서였다. 무료한 기분을 반영하듯 유정아의 손에서 심심하게 돌아가던 펜이 뚝 떨어졌다.
“저기, 해원이 남자 친구 아니야?”
“어? 진짜네.”
덩달아 창밖을 확인했다. 정해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얌전히 주차되어 있는 외제 차가 이목을 끌었다. 굳이 번호판을 확인하지 않아도 정해준의 차가 맞았다.
“맨날 바래다주는 것 같던데, 맞지?”
“어? 아, 응…….”
그럴 필요 없다는 데도 정해준은 공주님을 모시는 게 제 임무라며 열심이었다. 의대는 강의 시작 시각이 타 과대보다 30분 정도 이른 탓에 1교시가 있을 땐 아침에 날 데려다주지 못하는 걸 몹시도 애석해하며.
“남자 친구 인기 많아서 좋겠다. 나라면 좀 불안할 것 같기도 하고. 벌써 여러 번 고백 받았다며.”
“해원이 긴장 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불안해도 좋으니까 연애나 하고 싶다.”
두서없이 주고받는 수다를 듣다 보니 궁금해졌다. 보통 다른 과 소식은 잘 모르지 않나? 우리 과만 해도 화학과나 물리학과와 한 건물을 쓰지만 함께 쓰는 강의실은 시간표가 다르고, 실험실은 아예 과별로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 마주칠 일이 드물었다. 자연히 다른 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깜깜할 수밖에 없었다.
한 건물을 같이 쓰는 과들과도 이럴진대 완전히 떨어진 의대에서 일어나는 일은 더욱 알 길이 요원했다. 당연히 매일 같이 보는 정해준이 벌써 몇 번이나 고백받은 것도 전혀 몰랐다. 일부 발 넓은 몇몇은 동아리다 뭐다 하면서 다른 과 학생들과 친하게 지내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그건가……?’
정해준이 워낙 튀니까 자기들끼리 알음알음 알아본 모양이라고 짐작하면서 애매한 미소를 대답 대신 띄웠다. 이대로 유야무야 넘어가길 바랐는데 지금껏 별 관심 없이 결과지만 작성하던 이지선까지 끼어들었다.
“에이, 불안한 건 피차일반 아니야? 해원이가 조용히 지내서 그렇지, 내가 남자 친구면 엄청 신경 쓰일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