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과-17화 (17/77)

17화

“공주님, 디저트 드세요.”

해묵은 감정의 수렁에 빠져 걷잡을 수 없는 자책에 돌입할 찰나, 정해준이 토끼 모양으로 깎은 사과를 내밀었다.

“귀여워. 너무 귀여워서 못 먹겠어.”

“그래 봤자 사과지.”

포크로 토끼의 허리를 푹 찍어 내민 정해준이 내 사과 씹는 모양을 빤히 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왜? 왜……?”

얼굴에 뭐 묻었나? 손등으로 입가를 조심스레 훔치는 내게 정해준이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러면서 짐짓 표정을 굳혔다.

“너무 잔인하다.”

“뭐가?”

“토끼가 토끼 잡아먹는 게.”

“아…….”

내가 토끼를 닮았나. 아닌 것 같은데. 하얗고 보송한 토끼가 나랑 닮았다니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한 조각 남은 사과를 찍어 먹으며 이번에도 붉어진 뺨을 보고 정해준이 좋아할까, 멋대로 짐작하며 입 안에 문 것을 급하게 우물우물 씹었다. 서둘러 먹고 설거지라도 도울 요량이었다. 한데 포크를 내려놓기 무섭게 정해준이 앞에 놓인 접시를 싹 치워갔다.

“내가 할게.”

얻어먹기만 했는데 이마저도 못하면 너무 미안할 것 같았지만 정해준은 단호했다.

“공주는 이런 거 하는 거 아니야.”

“그럼 설거지는 누가 해?”

밀리지 않기 위해 무릎을 뻣뻣이 세워 버티며 따지는 내 허리를 아예 번쩍 안아 올린 정해준이 소파로 걸음을 옮기며 태연히 대꾸했다.

“설거지는 식기세척기가 하지. 공주님은 편히 쉬세요.”

“자꾸 공주님이라고 하지 마. 어색하단 말이야.”

“남들도 다 공주라고 부르던데. 난 안 돼?”

“대체…….”

남자애들끼리 도도한 공주니 얼음 공주니 하면서 씹어 대던 걸 아직까지 기억하다니. 으레 싸가지 없다, 냉정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져서 그게 좋은 뜻인지도 모르겠다는 투덜거림에 정해준이 싱긋 웃었다.

“그래서 내가 진짜 공주가 뭔지 알려 주려고.”

자꾸, 설레게…….

솔직히 좋았다. 진짜 왕자님 같은 정해준이 공주님처럼 대접해 주니까, 나도 진짜 공주가 된 것 같아서. 실상은 재투성이였던 신데렐라가 마법으로 공주가 되어 호박 마차에 올랐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신데렐라도 죄책감을 느꼈을까? 올라선 안 될 자리에 오른 것처럼 안절부절.

“그래도 남들 앞에선 하지 마.”

“노력할게.”

“진짜로. 나 화낼 거야.”

“진짜로 노력한다니까.”

몇 번 다짐을 받고 나선 정해준이 양치하러 간 사이 노트북을 빌려 소파에 앉았다. 과외 공고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 면에서 조금이나마 더 자유롭고 보수도 높은 과외가 아르바이트로 적당할 것 같았다.

나이, 성별, 학력, 휴대전화 번호, 원하는 과외 지역 등 기본적인 것들을 채우고 나자 약간의 고심을 요구하는 항목이 남았다. 수업 스타일, 장점, 합격 노하우 같은 것들.

“음…….”

스타일이나 장점 같은 건 대강 꾸며서 썼는데 의외로 합격 노하우가 어려웠다. 실패담이라면 쓸 수 있는데. 씁쓸한 기분에 자판에 얹어 놓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 내 어깨에 턱을 걸친 정해준이 모니터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따스한 숨결이 내 귓가를 간질였다.

“과외?”

“응…….”

청량한 민트 냄새에 눈치채지 못하도록 정해준의 숨결을 가만히 들이마셨다. 나도 참 변태 같다고 자책하면서.

“용돈 부족해서?”

“아무래도…….”

“그럼 나 과외 해 줘. 과외비 줄게.”

은밀하게 정해준의 체취를 맡던 숨이 탁 막혔다.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어서 눈만 깜박였다.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입혀 주고. 내가 다 할게. 과외 하지 마.”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입혀 주고. 정해준이 차례로 나열할 때마다 가슴 한복판에 무거운 돌덩이가 턱턱 얹히는 것 같았다. 장난이겠지만, 아무리 장난이라도 가벼이 듣고 넘어가지지가 않았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던 말이니까. 벌써부터 귀에 배은망덕, 주제 파악 따위의 비난이 환청처럼 울려 댔다.

설마 내 사정을 다 알고……?

잠깐 저의를 의심했지만, 다른 뜻은 담기지 않은 정해준의 정직한 눈빛에 지나친 억측이라는 걸 알았다.

“……싫어. 뭐야, 그게. 이상해.”

“과외 할 시간에 내 얼굴 1분이라도 더 볼 생각해. 진심이야.”

“시간 많이 뺏을 정도로는 안 할 거야. 장학금도 노려야 하고.”

“내 장학금은 날아갈걸.”

“무슨.”

“진짜야. 너 눈에 안 보이는 거 못 참겠어. 고등학교 땐 종일 붙어 있었잖아. 나 지금 분리불안 생겼다고. 응? 해원아, 나 좀 구해 줘.”

“아니…….”

“진짜야. 정해준 말고 구해준 할래. 이해원이 구해준.”

엉뚱한 소리에 긴장이 풀리려는 찰나, 목덜미에 닿은 뜨거운 감촉에 도로 몸이 뻣뻣해졌다.

잘근잘근, 이를 세워 살갗을 얕게 깨물던 정해준이 귓불 바로 아래에 코를 박고 깊이 호흡했다.

“이 썩겠다.”

“응……?”

“달아서.”

사탕가루를 발라놨나, 무심코 중얼거린 정해준이 내 목덜미를 계속 씹고 핥아 댔다. 축축한 혀와 날카로운 이가 민감한 살 위에 어지러이 낙인을 찍었다. 간지럽고 짜릿한 감각에 자꾸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모니터의 글씨 같은 건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부끄러움에 점점 고개가 아래를 향했다.

“아프겠다.”

정해준이 엄지로 내 아랫입술을 가만히 잡아당기고 나서야 겨우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랫입술을 놓아주더니 내 턱을 가볍게 쥐어 제 쪽으로 젖히게 만든 정해준이 코끝을 엇갈렸다.

자연스레 입술이 맞붙었다. 앙다문 잇새에 눌려 부풀어 있던 입술이 정해준의 입술 사이로 부드럽게 빨려 들어갔다.

치아의 개수를 세듯 입 안쪽 치열을 고르게 훑던 정해준의 혀가 곧장 목구멍 쪽으로 파고들었다. 헐떡이는 내 혀를 낚아채 집요하게 얽었다. 뽑힐 것처럼 혀뿌리가 당겨 으응, 신음이 흘렀다. 그게 신호라도 된 듯 셔츠 안으로 곧장 손이 파고들었다.

“아…….”

브래지어 위를 더듬는 손길에 여유가 있었다. 빨아 당기던 혀를 놓아준 정해준이 입술을 옮겨 내 눈 가장자리를 꾹 찍었다. 반응을 살피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은 채.

여기서 거절하면 정해준은 기꺼이 셔츠 속을 배회하는 손을 뺄 것이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게 과외 얘기나, 기타 시시콜콜한 것들로 화제를 돌릴 거고.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가를 누른 정해준의 입술을 간질였다. 브래지어 안으로 쑥 들어온 손이 가슴을 넓게 덮었다. 씻을 때 말고는 손대 본 적 없는 살덩이를 적당한 악력으로 움켜쥐었다. 동시에 만족스러운 한숨이 귓가에 탁, 터졌다.

“되게 말랑말랑해.”

이런 감각은 난생처음이라고 중얼거린 정해준이 소파 등받이를 넘어왔다. 자연스럽게 내 상체가 넘어갔다. 신기한 듯 연신 가슴을 주무르던 정해준이 잠시 겹쳐 있던 몸을 띄우고 갈급한 기색으로 빠르게 단추를 풀었다. 말릴 생각도 못 하고 양손으로 얼굴이나 가리고 말았다.

“창피, 해.”

문득 손길을 멈춘 정해준이 제가 입고 있던 상의를 휙 벗어 던지고 씩 웃었다.

“이제 덜 창피해?”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아니, 그보다…….

밋밋한 내 배와 다르게 음영이 선명한 정해준의 복부를 발견하고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와중에도 단추는 순조롭게 풀려 마침내 앞섶이 훤히 벌어졌다. 손가락 사이로 엿본 정해준의 눈빛이 너무 뜨거워서 눈을 질끈 감았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감당할 수 없는 열기에 시작도 전에 기가 질렸다. 지금이라도 멈출까. 그만하자고 할까. 그럼 어색해지지 않을까. 어떡하지, 어떡하지.

망설이는 나와 달리 정해준은 거침이 없었다. 등줄기를 감싸 안듯 돌려진 손이 브래지어 후크를 잡아당기는 느낌이 생생했다. 툭, 무언가 걸렸던 것이 풀어지는 느낌이 나면서 가슴을 조였던 브래지어가 느슨해졌다.

하. 정해준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무언가 잘못됐나 싶어 살짝 손을 내려 확인하자 밥공기를 엎어 놓은 것처럼 둥근 가슴이 연한 색 젖꼭지를 얹은 채 낱낱이 드러나 있었다.

“이렇게 대단한 걸 여태 잘도 숨겼네.”

너무 부끄러워서 어디라도 숨고 싶은데 정해준은 태연하기만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손가락에 유두를 끼고 비벼 댔다. 만져지는 건 가슴인데 이상하게 가랑이 사이가 저릿저릿 떨렸다. 무언가 질금질금 흐르는 듯도 했다.

“아, 해준, 아, 그러지 마…….”

도리질 쳤지만, 도독하게 세워진 젖꼭지는 여지없는 흥분의 증거였다. 제가 꼬집어 당길 때마다 점점 진분홍색으로 물이 오르는 유두를 보며 정해준이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상상한 그대로야.”

“상상도, 읏, 했어?”

“상상만 했을 것 같아?”

우리 해원이 순진하기도 하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