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집들이하자.”
“집들이? 이사했어?”
대체 언제? 매일같이 만나면서 전혀 몰랐다. 무엇보다 시간이 없었을 텐데. 궁금하다 못해 신기할 지경이었다.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내게 정해준이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 짐이야 책 조금 하고 옷가지 몇 벌이 전부고 나머지는 다 새로 사서 채웠어. 이사랄 것도 없었어.”
“그래도…….”
이사한다고 하면 두 팔 걷고 도와주려고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는데. 큰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짐 정리 정도는 같이 할 수 있지 않을까 했다는 말에 정해준이 난색을 표했다.
“감히 공주님을 그런 허드렛일에 부려 먹으라고?”
“또 그런다. 공……주,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민망해서 혀가 떨어지지 않는데 정해준은 어쩜 낯빛 하나 안 변하고 잘도 공주님, 공주님 불러 대는지.
더 약 오르는 건 이런 내 반응을 즐기기까지 한다는 거다. 지금처럼 빨개진 볼을 가만두지 못하고 만지작거리면서 빙긋빙긋.
“마트 갈까? 장보다 보면 메뉴도 생각나겠지.”
“아, 잠깐만. 나 어디 좀 들렀다 갈게.”
“응? 어디 가게?”
“그래도 집들이인데…….”
준비를 하나도 못 했다. 하다못해 휴지나 작은 화분이라도 선물할 요량이었지만, 이마저도 속내를 간파한 정해준이 막아섰다.
“네가 와 주는 것만도 영광인데.”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나도, 나도 너한테 뭐라도 해 주고 싶단 말이야.”
내 선에서 감당할 수 있는 거면 최대한 들어줄 테니 어서 원하는 걸 말해 보라는 조름에 정해준의 두 눈이 새까맣게 가라앉았다. 마주한 검은 동자 안을 채운 음산하고 눅눅한 욕망에 어느 한 부분이 젖어 드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내가 실수했다.”
“실수? 무슨…….”
“우리 집인데 집들이는 무슨. 가자, 냉장고 채우러.”
“어…….”
의식하지 못하는 새 자연스럽게 마트로 끌려갔다. 파스타 면과 소스, 몇 가지 과일, 해물 믹스로 카트를 채우고 두부 판매 코너로 이동했다.
“종류가 진짜 많네. 찌개용, 부침용, 국산 콩, 수입 콩……. 아무것도 안 써진 건 뭐지?”
“글쎄.”
포장만 봐선 부드러울지 단단할지 알 수 없었다. 혹 그 중간 정도의 식감을 가졌는지도. 브랜드도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그동안 나는 어떤 두부를 먹어 온 건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여러 종류의 두부를 손에 들고 갸웃거리던 정해준이 시원스러운 손짓으로 그것들을 모두 카트에 담았다.
“그냥 다 먹어 보자.”
“이렇게 많이?”
“두부는 유통기한 길어서 괜찮아. 봐.”
나란히 이마를 모아 두부의 유통기한을 확인하다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꼭…….’
신혼부부 같잖아. 아까 정해준이 ‘우리 집’이라고 했을 때부터 어렴풋이 들었던 느낌이었다. 괜히 부끄러워져 카트 손잡이를 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뭉그적거리는 나와 다르게 정해준은 적극적으로 쇼핑에 임했다. 이곳저곳을 시원스럽게 누비며 필요한 물건을 질서정연하게 착착 쌓는 모습이 꼭 사냥에 나선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유제품 코너에 이르렀다.
“치즈도 필요해.”
체다 치즈, 브리 치즈, 리코타, 까망베르……. 다양한 치즈를 구경하며 뭐가 맛있을까 고민에 빠진 나와 달리 정해준은 단박에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어이없게도, 정해준이 집어 든 건 아기 치즈였다. 한눈에 보아도 하얗고 연한 질감의 말랑말랑한 아기 치즈.
“……그게 맛있어?”
설마, 하면서도 조심스레 물었다. 아기 치즈가 정해준의 입맛에 맞을 수도 있으니. 하지만 정해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먹어 본 적 없는데.”
“그럼…….”
“이거 작게 떼서 네 혀에 올려 주고 살살 녹여 먹는 거 보고 싶어. 진짜 아기 같을 것 같아.”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치즈 녹여 먹는 모습을 뚫어져라 구경할 정해준을 상상하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정해준의 표현을 빌리면 무르익은 사과처럼 홍조를 띠고 있을 뺨을 손등으로 꾹꾹 눌렀다.
“무슨 생각 했어?”
정해준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근사하게 휘었다. 야한 생각? 덧붙이는 말에 화들짝 놀라 발뺌했다.
“아니거든? 네가 이상한 소리 하니까…….”
“재밌네.”
“뭐가?”
“너 얼굴 빨개지는 거. 자주 보고 싶다.”
뭐야. 내 귀가 이상한가. 정해준이 하는 말마다 야한 뜻으로 들리니. 아무래도 귀 안에 음란마귀가 살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평범한 대화도 의미심장하게 들릴 리가…….
귀를 탈탈 털어 내고픈 충동을 꾹 참고 장보기를 마쳤다.
정해준의 자취 집은 학교 후문과 가까운 신축 아파트였다. 혼자 살기엔 넓어 보이는 실내를 눈으로 훑었다. 이사랄 것도 없었다는 얘기가 사실인 듯 가구, 가전에 잡다한 살림살이까지 모두 새것이었다.
반짝거리는 주방에 선 정해준이 꼭 새신랑 같은 모양새로 능숙하게 재료를 다지고, 다진 것을 볶아 소스를 만들고 면을 끓였다. 비는 시간 없이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정해준에게 감탄하며 물었다.
“요리 자주 해?”
“자주는 아니고.”
애매하게 얼버무린 정해준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너는? 요리하는 거 좋아해?”
“어……. 요리할 일이 없었어.”
“그럴 것 같았어.”
새삼스럽지 않다는 듯 정해준이 무심히 끄덕였다. 이것으로 ‘공주님’ 오해가 하나 더 늘었다. 그냥, 김 여사님이 다른 식구들 식사 준비하는 김에 내 것까지 같이해서 챙겨 먹는 수준이었는데 꼭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렇다고 김 여사님까지 언급하며 설명하면 더 꼬일 것 같아 그냥 가만히 있었다. 이 와중에도 요리는 착실히 완성되어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내 혀에 오를 뻔했던 아기 치즈가 막 로제 파스타 위에 얹히고 있었다.
먹음직스럽게 구운 새우 위에 파슬리 가루를 톡톡 뿌려 모양을 낸 접시를 내 앞에 내려놓은 정해준이 기대 가득한 눈으로 포크를 손에 쥐여 주었다.
“먹어 봐.”
요리의 열기에 눅진하게 눌어붙은 아기 치즈를 푸실리와 함께 푹 떠올리며 맛을 음미했다.
“어때?”
평소답지 않게 초조한 모습으로 정해준이 내 대답을 기다렸다. 이미 내 엄지는 번쩍 치켜진 채 들려 있었건만.
“와, 맛있어.”
어떻게 이렇게 맛있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중얼거리자 내심 뿌듯해하면서도 별거 아니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시판 소스에 양파랑 토마토 다진 것만 더 넣었는데. 그래도 잘 먹어 주니 좋다.”
“아니야, 진짜 맛있어.”
김 여사님도 종종 시판 소스를 이용해 스파게티를 만들어 주시긴 하지만 같은 맛은 아니었다. 한참 내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정해준이 포크로 첫입을 뜨며 만족스러워했다.
“배운 보람이 있네.”
“배웠다고?”
“어. 사실은 나 요리 처음 해 본 거야. 아, 라면은 빼고.”
처음인데 칼질이 그렇게 능숙할 수 있나? 놀라워하니 타고난 것 같다며 싱긋 웃었다.
“다음엔 더 맛있는 거 해 줄게. 처음이라 쉬운 걸로 도전해 봤어.”
정해준이 다음 요리 후보 목록을 읊었다. 전복 솥밥, 해물 잡채, 보쌈, 갈비찜……. 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정해준이 수기로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레시피를 보며 조금 미안해졌다.
“난 뭐 해 주지.”
요리 연습할 사정도 안 되는데. 심지어 라면도 끓여 본 적이 없었다. 어쩌다 끼니를 놓치면 그냥 굶었으니까. 난처해하는 내게 정해준은 요리는 둘 중 한 명만 잘하면 되는 거라고 다소 갸웃한 이론을 내놓았다.
“둘 다 잘하면 곤란해.”
“곤란할 것까지야……?”
“네가 할 일은 맛있게 먹어 주기. 내 프로젝트야. 너 살찌우는 거.”
세상에 그런 프로젝트도 있나. 의아했지만 정해준은 진지했다. 나랑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게 목표라고. 꼭 어른들 같은 얘기를 한다 싶다. 원래도 또래들보다 좀 어른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좀 결이 다르지 않나.
어쨌건 정해준이 그렇게 말하면 다 들어주고 싶었다. 보란 듯이 꼭꼭 씹어 그릇을 싹 비우자 식탁 너머로 뻗어온 긴 팔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다, 우리 해원이.”
어린애 다루듯 다정한 칭찬이었다. 잘 먹었으니 키가 쑥쑥 크겠다는 덕담도 곁들여야 할 것만 같은. 잠자코 부드러운 손길에 머리를 내맡기며 칭얼거렸다.
“신기해.”
“뭐가.”
“네가 착하다고 하면 진짜 착하게 살아야 할 것 같아서.”
“아서라. 여기서 더 착해지면 하늘로 날아가려고.”
천사가 돼서 훨훨 날아가면 자기는 어떻게 사냐는 정해준의 농담 섞인 한탄에 그냥 웃고 말았다. 나 진짜 안 착한데. 악에 받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배 속이 끓어오르는데.
문득 어릴 때 읽었던 동화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 화가가 천사와 악마를 그리라는 주문에, 천사처럼 선하고 아름다운 젊은이를 찾아 천사는 그렸지만 악마 모델은 찾지 못해 그리지 못했다는 이야기. 시간이 흘러 악마처럼 흉악하고 추한 사내를 찾아 드디어 그림을 완성할 수 있겠다고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그 사내가 바로 예전의 천사 같은 젊은이였다고.
나 또한 몇 년 후엔 아주 추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속이 이렇게 진창이어서. 자꾸만 누군가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