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나한테 뭐 궁금한 거 없어?”
“어, 갑자기?”
“우리 이제 서로 알아 가야 하니까.”
응당 그래야 한다는 투에 일견 공감하면서도 선뜻 무얼 물어야 할까 떠오르지 않았다. 어물어물하고 있자 정해준이 서운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없어? 난 많은데.”
“뭐, 뭔데?”
“음, 먼저 생일.”
“…….”
이게 뭐라고, 갑자기 말하려니 부끄러웠다. 정해준도 아는 날짜여서였다. 내 생일인 줄은 몰랐겠지만.
“3월 14일이야.”
“3월 14일? 화이트데이?”
“응.”
잠시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던 정해준이 싱긋 웃었다.
“기억하기 편한 건 좋은데, 기념일이 하나 줄어든 건 좀 별로다.”
“듣고 보니 그러네.”
멋쩍게 웃자 정해준이 제 가슴을 꾹 누르며 엄살을 떨었다.
“너 웃는 건 예쁜데 아무 때나 웃으면 곤란한데. 여기가 아파서. 예고 좀 하고 웃든가.”
싱거운 농담에 슬쩍 눈을 흘겼다. 그마저도 예뻐 죽겠단 자잘한 고백에 갈비뼈 안쪽이 간질간질했다. 정해준과 함께 보내게 될 생일이 기대되기도 했다.
정해준은 두 번 축하 받을 수 있는 기회가 한 번으로 줄어서 아쉽지 않았냐고 물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화이트데이와 생일이 같은 게 좋았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다. 아무도 생일을 챙겨 주는 사람이 없어서, 거짓말처럼 엄마도 나에 대한 관심을 딱 끊어서.
화이트데이라는 명목으로 받는 사탕을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슬픔도 눈물도 달콤한 맛에 얼마간 가려졌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사탕을 깨물어 먹지 않는 이유였다. 천천히 녹여 먹어야 단맛도 오래갈 테니까.
궁색한 처지를 드러내고픈 마음은 없었다. 남자애들의 입에 숱하게 오르내렸고, 아마도 정해준도 갖고 있을 게 확실한 나의 도도한 부잣집 공주님 이미지를 깨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실상은 보안 업계 1위 기업 설립자인 할아버지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인 데다가 그 집 식모 방에 곁들어 사는 신세라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식모 방.
최근에 이소원이 알려 줬다. 예전에는 식모가 있어서 내가 쓰는 방에서 지냈다고. 왜 이렇게 거실과 동떨어져 있나 했는데 듣고 나니 납득이 갔다. 어쩌면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던 걸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식모, 라고 유난히 힘주어 말하던 이소원의 눈빛은 심술궂기 그지없었다. 속으로 내가 진짜로 의대에 갈까 봐 마음깨나 졸였던 듯 동떨어진 과의 합격 소식에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순수한 축하라고 착각할 정도로.
“이해원,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별거 없네!”
그동안 봐 왔던 모습을 생각하면 새삼스럽진 않았다. 조금 놀라긴 했다. 다른 사람의 절망을 이렇게 고소해할 수도 있구나, 하고. 원치 않게 마주한 타인의 밑바닥이 지금까지 생생한 걸 보면 꽤 기나긴 잔상을 남긴 것도 같다.
남김없이 혐오를 표출하던 이소원을 떠올리다가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났다. 현관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없던 자각이었다. 정해준을 만나러 몇 정거장을 걸어올 때까지도. 이소원이 그렇게 만나고 싶어 했던 남자가 바로 내 옆에 있다는 게.
예쁘게 보여야 한다며 새벽같이 일어나 옷을 수십 벌 갈아입고 헤어 드라이에, 화장에 야단법석을 떨던 이소원이 떠올랐다. 정해준의 전화번호를 따겠다고 ‘존경하는 선배님’ 따위의 식상한 표현을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며 인사말을 연습하던 것도.
물론 정해준의 번호는 이미 이소원의 휴대전화에 ‘이소원 남편’이라는 다소 낯간지러운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었으므로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는 건 실상 자연스럽게 말을 붙이기 위한 핑계였다.
자연히 밸런타인데이가 생각났다. 남들이 선물한 것보다 정해준의 눈에 잘 띄어야 한다고 커다란 곰 인형을 붙였던 초콜릿 상자가.
“나도 궁금한 거 생각났어.”
“물어봐 봐.”
“너, 작년 밸런타인데이 때.”
“응.”
“선물 받은 것 중에 뭐가 제일 기억에 남아?”
정해준은 모를 악의가 담긴 질문이었다. 살짝 양심이 찔렸지만 못내 궁금했다. 이소원이 선물한 곰 인형이 떠오른다고 하면 심술을 부리고 싶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정해준이 내놓은 대답은 예상 밖이어서 이소원이 그랬던 것처럼 더없이 고소한 표정으로 웃을 기회는 놓쳐 버렸다.
“음, 네가 준 거.”
“어? 내가?”
뭘 줬더라. 따로 준비한 게 없었으니 준 것도 없었다. 그래도 작은 초콜릿이나 사탕을 줬으려나? 매점에서 낱개로 파는 과자 같은 거라도.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런 적이 없었다. 과거를 되돌리려 찌푸린 이마에 대고 제 이마를 꿍 찍은 정해준이 서운한 티를 팍팍 내며 투덜거렸다.
“네가 아무것도 안 준 게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아.”
“혹시나 해서 수업 끝날 때까지 계속 기다렸는데.”
커다란 곰 인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아예 그런 게 존재했었던 사실 자체를 망각해 버린 것 같아 가슴 한구석이 시원해졌다. 유치하고 못된 심보라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통쾌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고 살며시 떠오른 미소에 오해한 정해준이 어이없어하며 코끝을 살짝 쥐었다 놓았다.
“은근 짓궂은 데가 있네, 너.”
“그런 거 아니야.”
“아니면 뭔데.”
“그냥.”
의붓여동생의 선물이 무시당해서 기분이 좋았다고 하기엔 역시 너무 고약해 보일 것 같았다. 그런 걸 털어놓을 사이도 아니지만. 관계가 깊어진다고 해도 내 안의 상흔을 낱낱이 드러낼 날이 올까?
아마도 아닐 것 같다. 그럴싸한 겉껍데기조차 없으면 곪아 터진 무른 살점이 고스란히 쏟아져 썩은 내를 풍길 테니. 막 탈피한 게의 얇은 종잇장 같은 위태위태한 껍질이라도 두르고 있는 편이 나았다. 언제 찢어질지 모른다 해도.
“앞으론 우리 사이에 그런 거 없어.”
“응?”
“마음껏 표현하자고.”
대답할 새 없이 입술이 먹혔다. 가만히 눈을 감고 응했다. 추저분한 속사정을 밝히지 않는 시작이 과연 옳은 걸까, 불현듯 떠오른 불안은 이내 아스라해졌다. 다시금 안긴 품의 온기가 너무 따스해서.
자잘한 입맞춤으로 짙은 입맞춤의 흔적을 정리한 정해준이 관자놀이에 코끝을 누르며 중얼거렸다.
“아직 나 궁금한 거 많아.”
“또 뭐?”
“좋아하는 색깔.”
“연두색.”
실은 노란색과 초록색을 좋아하는데 그 두 색을 합친 색이라 연두색이 가장 좋다는 설명에 정해준이 진지하게 눈을 빛냈다.
“거봐. 풋사과 맞네.”
그게 그렇게 이어지나? 반박할 새도 없이 정해준이 궁금한 걸 묻고 또 물었다. 대개 사소한 것들이라 평소에도 충분히 물었을 법한데 어떻게 참았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모아놓고 나니 우리는 닮은 점보다 다른 점이 더 많았다. 둘 다 O형인 혈액형을 제외하면 맞는 게 아예 하나도 없었다.
꽃샘추위가 횡행하는 초봄에 태어난 나와 달리 정해준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에 태어난 것도, 나는 가만히 앉아 책을 읽거나 사색에 잠기는 걸 좋아하는 반면 정해준은 수영이나 테니스 등, 몸 쓰는 운동을 즐기는 것도 달랐다.
‘좀…….’
맞는 게 많으면 신나서 맞장구칠 텐데. 약간 시무룩해졌다.
둘이 겹치는 점이 없어 실망한 내 반응과 달리 정해준은 오히려 달라서 좋다는 것마저도 달랐다.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응급 상황일 때 서로 피를 뽑아줄 수 있으니 그거면 충분하다는 말에 어이가 없어져 웃고 말았다.
“너무 같으면 재미없잖아. 네 생일하고 내 생일이 같다고 가정해 봐. 사람은 둘인데 케이크는 하나, 파티도 한 번, 별로잖아 그런 거.”
그런가? 논리적인지는 몰라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일단 케이크는 인당 하나씩 있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에. 그러면서도 갸웃하는 내게 정해준이 쐐기를 박았다.
“다른 만큼 우리 둘의 세계가 넓어지는 거, 난 좋아.”
우리 둘. 내게는 없을 것만 같던 단어. 순식간에 설렘으로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나도.”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나도 좋아.”
***
우리는 곧잘 새처럼 키스했다. 쪼듯이 서로의 입술을 맞추고, 겨울날 앙상한 가지 위의 몸을 부풀린 새처럼 꼭 붙어 있노라면 이마에, 정수리에, 정해준의 입맞춤이 무수히 떨어졌다.
넘치는 애정에 몸 둘 바를 모르면서도 막연히 예감했다. 어쩌면 가까운 시일 내에 정해준과 하나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사귀는 이상 예정된 수순이라는 건 알지만……. 자취할 아파트를 구하고 있다는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건 내가 너무 앞서 나간 걸까? 통학이 가능한 거리라도 귀찮다는 이유로 자취하는 사람들도 꽤 있으니까.
뽀뽀 세례를 받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정해준의 물음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벌써?”
점심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각에 만난 터라 의아해졌다. 아침을 걸렀나? 간단한 토스트라도 꼬박꼬박 챙겨 먹는다고 알고 있는데.
“너 먹고 싶은 거 먹자. 배고픈 사람한테 맞춰야지.”
“그게 아니라, 내가 너 해 주고 싶어서 그래.”
“어?”
요리를 해 주겠다고? 어디서? 집에 초대하는 건가? 이렇게 갑자기? 의아함과 당혹감이 섞인 눈길로 쳐다보니 정해준이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