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과-14화 (14/77)

14화

그렇게 버티고 겨우 눈을 붙여 쪽잠을 자고 난 후에 엉망인 아침을 맞았다. 도시락을 건네던 김 여사님의 낯에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일그러진 몰골이 내가 봐도 흉했다.

어떻게든 악바리처럼 버텨 보려 했지만 1교시부터 무너졌다.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낀 것 같았다. 문제를 두세 번 반복해 읽어도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아예 문장이 머릿속에 입력되지가 않았다. 기가 막혀 실소가 흘렀다.

난생처음 받아보는 등급에 담임은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재수 생각해 보는 건 어떠냐. 많이 아까운데.”

그러니까 눈앞의 성적은 지난 3년간 내가 부은 노력이었다. 내가 처참하게 무너져도 받을 수 있는 기본값. 의대는 못 가도 상위권 대학의 일반 학과에는 무난히 입학할 수 있을 거다. 가장 밑바닥인 성적이자 재수의 출발선치곤 나쁘지 않았다. 그러니 담임도 재수를 권하는 거고.

“그건, 힘들 것 같아요.”

어차피 지원해 주지도 않겠지만, 시켜 준대도 싫었다. 끔찍했던 밤을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누가 내 인생에서 제일 떠올리기 힘든 날을 꼽으라면 아빠의 장례 날과 수능 전날 밤을 들 것이다.

더는 공부에 쏟을 게 없기도 했다. 그게 열정이든, 희망이든, 체력이든 무어든. 기세가 한풀 꺾였다고 할까.

이제는 다 지긋지긋했다. 책 같은 건 들여다보기도 싫었다. 해방감이나 고삐가 풀렸다거나 하는 유의 감정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방전에 가까웠다.

속이 텅 비어서 거죽만 남은 사람과 다름없이, 공허에 짓눌려 멍하니 시간만 죽였다.

***

졸업식에 가지 않았다. 어차피 사진 찍을 친구도 없고, 축하해 줄 가족도 없었다.

우습게도, 졸업생도 아니고 축하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닌 이소원은 졸업식에 갔다. 정해준의 마지막을 간직하기 위해서라나. 정해준 없는 학교를 1년이나 어떻게 다니냐고, 요 며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던 걸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었다.

어쨌든 집이 조용한 건 좋았다. 천천히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하자 용케 인기척을 듣고 김 여사님이 현관까지 쫓아 나왔다.

“해원 학생, 나가게?”

“네, 약속 있어서요.”

“그래, 재미있게 놀다 와. 저기, 이거.”

복도 끝이라 들리지도 않을 텐데 거실 상황을 기민하게 살피며 김 여사님이 용돈을 쥐여 주었다.

“아니에요. 이러지 않으셔도.”

“에이, 어른이 주는 건 그냥 받는 거야. 그동안 고생했어. 어서 신나게 놀고 와.”

“고맙습니다.”

몇 번 사양 끝에 겨우 받아 들자 빳빳한 지폐가 손바닥을 튕겼다. 일부러 새 돈을 준비해 두었던 것 같아 한층 고마움이 깊어졌다. 허리를 꾸벅 숙여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나자 어쩐지 김 여사님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너무 주눅 들지 말고, 응? 이렇게 나가는 거 보니까 이제 좀 마음이 놓이네.”

속정이 깊은 김 여사님이었다. 내색은 않으셨지만 다른 식구들 눈에 나지 않게 나를 챙겨 주려 노력하셨던 것도 안다. 책상 서랍에 들어 있던 독특한 디저트나, 따로 감춰 두었다가 집에 사람이 없을 때 얼른 맛보라고 내줬던 과일들이나.

맛보다 온기로 먹었다. 오도카니 앉아 그것들을 꼭꼭 삼켜 내면 뼛속 깊이 사늘하게 굳어 있던 설움이 얼마간 녹는 듯도 해서.

“……다녀오겠습니다.”

떠올리니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지려 해 서둘러 현관을 나섰다.

주머니 속 지폐의 모서리를 가만가만 긁으며 카페에 도착했다. 주말마다 정해준에게 과외를 받았던 카페였다. 늘 앉던 창가 구석 자리에 먼저 와 있던 정해준이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주 손을 흔들며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았다가 당황했다.

“아…….”

이제 나란히 앉아서 책을 보지 않아도 되는데. 엉거주춤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기려는 내 어깨를 잡은 정해준이 어딜, 괘씸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나를 당겨 안았다. 앞으로도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자기 옆이라고. 다른 손으론 탁자 위의 머그컵을 들어 입에 대 주었다.

“안 뜨거워. 따뜻해. 마셔 봐.”

초콜릿을 녹인 것처럼 진한 코코아가 혀끝을 자극했지만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머그컵을 쥐고 있는 정해준의 손에 온 신경이 쏠려서. 손을 움직일 때마다 팔의 근육이 만들어 내는 음영이나, 선명한 힘줄, 도드라진 핏줄 같은 것에.

아예 몰랐으면 모를까, 의식한 순간 눈앞의 광경이 매우 선정적으로 다가왔다. 빼앗다시피 머그컵을 건네받으면서 새끼손가락을 아쉽게 스치는 촉감을 무시하려 애썼다.

“내가 마실게.”

“그래.”

순순히 컵을 넘겨준 정해준이 이번엔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전에 공부할 땐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뭘 자꾸 만지작거리는 게 습관인가? 이렇게 밀착해서? 며칠 사이 돌변한 태도에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지분거리는 손을 잡아떼며 항의했다.

“왜 자꾸…….”

“잊었어? 서운하네.”

잊었을 리가. 마음 변하지 말라고 다짐을 받았던 게 어제처럼 생생한데.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물었다. 실은 정해준과 오늘의 약속을 잡았던 때부터. 왜 굳이 졸업식 당일에 만나자고 했을까.

“……졸업식은 왜 안 갔어?”

“아, 설마 졸업식 아직 안 끝나서? 철저하긴.”

시계를 확인한 정해준이 졸업식 끝날 때까지 30분만 더 기다리면 되나? 하고 중얼거렸다. 정확한 때를 정한 적은 없었다. 수험생 신분에 연애를 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했고, 정해준과 나는 비록 과는 다르지만 같은 대학에 나란히 합격한 상태였으니까.

정해준은 의예과에, 나는 생물학과에 붙었다. 전공에 큰 기대는 없었다. 생물학과도 생명을 다루는 과니까 대충 생명을 살리는 의학과 비슷한 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로 지원했다. 전액은 아니지만 장학금도 받아서 조금이나마 부담을 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생각하니 우울해져 억지로 슬픔을 떨쳐 내며 원래 하려던 얘길 이어 갔다.

“그게 아니라, 그냥 왜 졸업식 안 갔는지 궁금해서.”

“딱히 축하받을 사람이 없어서? 엄마는 미국에 계시고, 아빠는 환자 보느라 바쁘시고.”

“그래도 친구들 많잖아.”

“굳이? 그렇게까지 친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숭배하듯 정해준을 우르르 쫓아다니던 무리들이 떠올랐다. 의외로 냉랭한 구석이 있구나. 곧잘 어울려 다니기에 꽤 친한 줄로만 알았건만. 정해준이 말 그대로 자리를 ‘빛내 주지’ 않아서 실망할 얼굴들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당연히 이소원의 얼굴도 그 속에 껴 있었다. 그러자 자연히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정해준이 졸업생 대표로 축사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간직하겠다며 역사적 과업이라도 치를 양 이를 악물던 이소원이.

“축사한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안 한다고 해서 다른 애가 대신 하기로 했을걸? 법대 붙은 애.”

“아…….”

“이렇게 관심이 대단한데 너야말로 왜 졸업식 안 갔어?”

“나도.”

축하해 줄 사람이 없다고 했다가 말을 아꼈다. 떳떳하지 않은 가정사를, 정확히는 구차한 내 처지를 정해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나도 같았으므로.

“친구도 없고.”

친구가 없다는 대목에서 왠지 정해준이 조금 웃는 것 같았지만 모르는 체하며 적절한 이유를 찾았다.

“수능도 망했는데 갈 기분이 아니어서.”

“망하긴.”

벌주듯 볼을 살짝 꼬집은 정해준의 눈이 잠시 벌어졌다. 내 뺨이 너무 말랑말랑하다나. 슬쩍 눈을 흘기자 싱거운 웃음을 흘린 정해준이 꼬집었던 뺨을 가만가만 쓸며 위로했다.

“너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욕먹는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대학 가 놓고 망했다고 하면.”

“아니, 내 말은.”

“알아. 목표에 한참 못 미치는 거. 그래도 너무 괴로워하진 말라고.”

정해준은 결과야 어찌 됐든 다 잘될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 소식을 전해 들은 대부분이 별생각 없이 던지듯 다시 해 보라고도 하지 않았다. 낙관도 비관도 없이, 그저 괴로워하지 말라고 담담히 건넨 말이 뾰족했던 마음을 어루만졌다.

한구석이 녹아내린 눈사람처럼 허물어지듯 정해준의 어깨에 기댔다. 볼에 닿은 단단한 촉감에 막연한 희망이 살며시 솟았다.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한편으론 처음 맛보는 기이한 감정이 낯설어 당황했다. 안도와 설렘, 그 중간 어디쯤 위치한 이 감정을 무어라 정의 내려야 할지.

궁금해하며 문득 고개를 든 순간, 꿰뚫을 듯 강렬한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언제부터 그 눈동자에 담고 있었을까. 나를, 이렇게나 한가득.

정해준이랑 있으면 자꾸 궁금한 게 많아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닫히기 무섭게 뜨겁고 말캉한 무언가가 입술 위로 떨어졌다. 짧지만 생소하고 강렬한 입맞춤이었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맞물려 조심스레 탐하던 정해준의 입술은 이내 떨어졌지만, 가슴의 떨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너무 떨려서,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다시 입술이 내려오진 않을 것 같은데 얘는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까. 고막을 쿵쿵 때리는 심장 소리는 나와 마찬가지이건만. 눈을 감고 있는데도 시선만은 또렷이 느껴져서 긴장이 더해졌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쥔 순간, 이마에 깃털처럼 온기가 내려앉았다. 잠든 공주를 깨우듯 조심스러운 입맞춤에 살며시 눈을 떴다. 다정한 빛을 띤 두 눈이 까만 밤처럼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