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과-13화 (13/77)

13화

“기럭지가 기니까 확실히 옷태가 다르다. 와, 어쩜. 봐, 여기 보라고.”

복숭아뼈가 살짝 드러난 바지 밑단마저도 센스 있다고, 살짝 드러난 팔뚝의 핏줄에 기절하겠다고, 이소원은 끊임없이 종알거렸다. 사진을 확대해 핥듯이 코를 박고 있는 모습이 신인 아이돌에 푹 빠져 있을 때와 비슷했다.

‘재작년이었나?’

공개방송에서 앞자리를 맡겠다고 중간고사를 째고 방송국 앞에서 밤을 새운 바람에 이소원에게 불호령이 떨어졌었다. 그래 봤자 용돈이 끊기는 수준이지만, 노는 걸 좋아하는 이소원에게는 꽤 큰 벌이었는지 그 뒤로 그런 일은 없었다.

이소원이 아이돌에게 가졌던 선망이 고스란히 정해준에게 옮겨붙은 게 달갑지 않다. 어쭙잖은 독점욕 같은 건 아니었다. 이소원이 아니더라도 정해준의 인기를 실감할 일은 많았다.

가령 밸런타인데이 때 정해준의 자리에 산처럼 쌓여 있던 초콜릿만 봐도. 방학임에도 일부러 새벽같이 학교에 나와 자율학습 중인 정해준의 자리에 올려 둔 게 분명했다.

그중 하나는 이소원의 것이었다. 일부러 눈에 잘 띄도록 커다란 곰 인형을 붙였다고 자랑했던 분홍색 상자.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빈손이었다. 주머니 사정이 괜찮았어도 선물 따위는 하진 않을 생각이었지만, 쌓아 놓을 데가 없어 곤란할 정도인 선물 무더기를 보며 마음이 싱숭생숭하긴 했다.

분명 처음 전학 왔을 땐 한 학기만 지나면 돌아간다고 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다음 학기를 준비하며 방학 중 자율학습에 꼬박꼬박 출석하는 정해준이 못내 신경 쓰였었다. 졸업 후에 만나자는 약속, 정말 그것 때문일까? 다른 이유는 없는 걸까? 진짜로, 오직 나 때문에?

차마 묻지 못하고 덩그러니 남은 물음표를 정해준은 시간으로 증명했다. 자기 말마따나 내 곁에서 깨어 있는 시간으로.

그래서 그때 받은 초콜릿은 어떻게 했더라. 하교 시간에 맞춰 대기 중이던 외제 차에 실어 보냈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던 것 같은데. 쓸데없는 궁금증에 잠겨 있을 때 이소원이 빽 소리쳤다.

“야, 왜 대답을 안 해!”

“미안, 졸려서. 뭐라고 했어?”

“정해준 만나는 사람 있냐고. 짝이니까 잘 알 거 아냐.”

“……잘 모르는데. 모르는 문제 물어볼 때 말고는 거의 말 안 하기도 하고.”

혹시나 비밀이 들킬까 최대한 무관심을 가장하여 끊어 냈다. 다소 쌀쌀하게 들렸을까. 이소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팔짱까지 끼고선 한심한 티를 숨기지 않으며 거만하게 지껄였다.

“하여간 이해원, 넌 내 인생에 보탬이 안 돼.”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이미 심기가 비딱해진 게 눈에 보였다. 무슨 변명을 대든 제멋대로 오해하고 쏘아붙일 게 분명했다. 이쯤 했으면 이만 가 주었으면 했다. 벌써 새벽 2시였다. 하지만 오늘의 이소원은 평소보다 조금 더 집요했다.

“진짜 몰라? 정해준 여친?”

“내가 어떻게 알아.”

건성으로 받아치자 잠시 말을 멈춘 이소원이 못마땅한 눈초리로 내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그러곤 반응을 살피듯 툭 던졌다.

“너라는데.”

“…….”

쿵.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태연하자. 그냥 떠보는 걸 거야. 약간 짜증 섞인 눈초리로 시계를 한 번 흘긋거린 후,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소문, 성가시기만 하다는 듯.

“아니라고 했잖아. 나 너무 졸린데 더 할 얘기 없으면 이제 자도 될까.”

“아니라는 증거 대 봐. 3학년에 너희 둘이 사귄다는 얘기가 파다한데, 너만 몰라? 그게 말이 돼?”

“아닌 증거를 어떻게 대? 사귀었어야 증거가 있지. 그리고 나 친구 없어서 정말 몰랐어. 그런 소문, 짝이니까 계속 붙어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렇겠지.”

“진짜야?”

이소원이 안 돌아가는 머리를 열심히 굴리려 노력했다. 어디선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눈살까지 찌푸려가며 내 말을 곱씹던 이소원이 마침내 심술궂게 중얼거렸다.

“하긴, 이해원 네가 왕따긴 하지.”

친구가 없다는 내 말에 왕따라는 딱지를 붙이곤 이소원이 히죽 웃었다. 그게 만족스러웠는지 한 번 더 강조하기까지 했다.

“정해준이 미쳤다고 너 같은 왕따를 좋아하겠냐.”

그러곤 다시 히죽 웃는 모양새가 꼭 멍청한 악당 같았다. 상대하는 것도 한심해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만큼 했으면 끝내줄 때도 됐는데.

언제 돌아갈 거지? 시간을 확인해서인지 진심으로 피곤해졌다. 최대치로 잠을 줄였는데 그보다 못 자면 하루만 망치는 게 아니라 며칠은 여파가 컸다.

“내일 얘기하자. 나 너무 졸려서 자꾸 눈이 감겨.”

“넌 안 돼.”

“무슨…….”

“정해준 만나지 말라고. 앞으로도 계속. 다른 사람 다 정해준이랑 붙어먹어도 이해원 넌 안 돼. 내 말 알아들었어? 넌 절대 안 된다고!”

갑자기 왜 발악하듯 악을 지르는지, 고막을 왕왕 울리는 소음에 귀가 아팠다. 제멋대로 상상하고 내린 결론을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며 내게 확인받는 이 순간이 피곤하기만 하다. 굳이 캐물어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고. 상대 않으려 고개를 돌리자 이소원은 더욱 끓어올랐다.

“대답해! 정해준 안 만날 거라고!”

“……가서 자. 너무 늦었다.”

“왜 말 안 해? 하! 이거 봐. 이럴 줄 알았다니까. 야,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 너 뭐 있지? 어?”

“늦었다고. 그만 좀…….”

그냥 이소원이 원하는 대답 딱 한 마디만 해 주면 되는데, 그깟 거짓말 한 번 뭐가 어렵다고. 나도 참 나다 싶어 진력난 순간, 방문이 예고 없이 벌컥 열렸다.

“오밤중에 뭐 하는 짓들이야!”

할머니였다. 제아무리 편할 대로 구는 이소원이라도 할머니는 무서워했다. 나와 어울리지 말라는 따끔한 꾸중과 함께 이소원은 얌전히 제 방으로 돌아갔다. 복도를 따라 멀어지는 두 사람의 걸음 소리를 들으며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

수능이 끝났다. 누구라도 벨 것처럼 날카로웠다가 한결 누그러진 분위기, 합격 발표가 날 때까지 긴장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어우러진 복도를 지나 교무실로 향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문고리를 잡은 마음이 무겁다. 그래도 직면해야 했다. 처참한 성적의 말로를.

가채점표를 놓고 담임도 나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1교시 과목의 예상 등급은 2등급이었다.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등급이었지만 생각만큼 충격적이진 않았다. 수능 전날 갑자기 할머니가 나를 불렀을 때부터 예정되어 있던 성적인지도 모른다.

“너, 듣자 하니 의대 준비한다며. 그게 네 사정에 가당키나 한 일이냐?”

내 멋대로 상의도 없이 진로를 정하는 법이 어디 있냐며 학비고 생활비고 지원해 주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하란 말에는 그다지 상처받지 않았다. 정말 가슴이 아팠던 건 이번에도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엄마였다.

듣기평가에 영향을 줄까 봐 비행기도 띄우지 않는다는 수능이었다. 차 막힘으로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는 학생이 있을까 봐 전 국민이 출근 시간을 늦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의 지각생을 위해 곳곳에 경찰차가 배치되는 수능.

그 중요하고 절실한 시험을 앞둔 날 저녁, 누군가는 컨디션 조절을 위해 일찍 잠들고 누군가는 한 자라도 더 보기 위해 불을 밝히고 있을 시간에 나는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내 진로에 대해 할머니에게 전해 준 건 엄마일 거다. 몇 번 담임과의 면담으로 내 성적이나 희망 진로에 대해 알고 있었을 테니.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자랑스러웠을까? 이제 와서? 그게 아니라면 6년간 비싼 학비를 대 달라 할까 걱정됐을까? 갑자기? 수능을 겨우 하루 앞둔 시점에서?

모르겠다. 알 수 있는 건 엄마는 침묵하고 있다는 점, 그거 하나였다. 엄마가 막아 주지 않아서, 나라도 나를 위해 나섰다. 죄송하다고, 잘못했다고. 다 알겠으니 하루만, 딱 하루만 봐달라고.

“내일이 수능이에요,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제발…….”

“남들 다 보는 시험, 유세 떠는 게냐! 그래, 나보고 입 다물라, 그 뜻이지. 어린 것이 벌써부터 어른을 협박해? 네가 이런다고 내가 눈 하나 깜박할 것 같아? 기만도 정도껏이지!”

간절하면 하늘도 뜻을 알아준다던데. 할머니는 하늘이 아니어서인지, 아니면 하늘조차 엄마처럼 나를 외면하기로 한 건지……. 그날 밤, 경을 쳤다. 여자 등쳐먹는 내 아버지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 집도 절도 없는 걸 구해 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제멋대로 구는 나는 얼마나 배은망덕한 계집인지.

끝도 없이 쏟아지는 비난을 묵묵히 들어 넘긴 건, 정말 시험도 못 치게 할까 봐 걱정 돼서였다. 내게 다음이란 건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아서, 하나뿐인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절박감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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