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바로 그 그럴듯한 겉에 대해 정해준이 읊었다. 나에 대해 잘 모른다니 딴엔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이.
“업계 1위 보안업체 설립자 손녀, 아버지는 안 계시고 어머니와 여동생 한 명. 외할머니와 함께 거주 중.”
“그런 건.”
“여기까진 누구나 다 아는 거고, 나머지는 사귀면서 알아 가려고.”
“아니…….”
“예쁘고, 착하고,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럽고. 뭐 이런 것도 다 말해야 해?”
원래 고백을 이렇게 하나? 칭찬은 둘째 치고 한꺼번에 쏟아진 직설적인 언사에 낯이 다 뜨거워졌다.
“나 안 착해.”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라고, 부정하려 했는데 정해준의 얼굴에 장난기가 어렸다.
“예쁜 건 인정하나 보네.”
“그게 아니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어물어물하다가 겨우 부담스럽다는 한마디를 내놨다.
“아무래도 수험생이니까.”
“그럼 나 차인 건 아니네?”
“어?”
얘기가 그렇게 되나? 실은 좋게 돌려서 거절한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이런 식으로 넘어가다니. 꼭 홀린 기분으로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아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는 정해준을 바라봤다. 저항 없이 그 옆에 앉았다가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그런데 너 한 학기 있다가 다시 미국 간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꼭 여우처럼 눈을 접어 웃는 정해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겠다.
“도중에 마음 변하면 안 돼.”
설마 나 때문에 여기 계속 남겠다는 뜻인가? 사귀는 것 못지않게 부담스러운 상황에 얼떨떨해졌다. 차라리 그냥 사귀자고 할 걸, 하고 후회할 정도로. 십 대의 풋사랑이 오래갈 거란 기대는 요만큼도 없었으니까. 그 연장선에서 생각하면 정해준의 마음도 얼마 안 가 시들해질 가능성도 커서 바로 안심하긴 했다.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비가 오려면 확 쏟아지든가.”
비가 내릴 듯 말 듯 먹구름만 잔뜩 낀 하늘을 바라보며 정해준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낮아진 하늘에 답답한 기분이었던 건 마찬가지라 곧바로 그러게, 하고 동의했다. 작년보다 늦은 장마는 올 때도 미적지근하더니 갈 때가 다 되어서도 시원한 맛이 없었다.
이른 장마에 만나 때늦은 장마를 함께 보내고 있다는 건 정해준과 내가 만난 지 1년이 넘어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새삼스러움에 주위를 둘러보자 본격적인 수험생 신분이 되어 긴장을 늦추지 않고 문제집을 파고 있는 애들의 모습이 보였다. 학년이 바뀌면서 반 구성원이 많이 바뀌었지만 우린 달라진 게 없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것부터가 그랬다. 여전히 나는 친구가 없고, 정해준의 자리는 쉬는 시간마다 북적였다. 작년에는 시시껄렁한 농담이 대화의 주를 이뤘다면 올해는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러 오는 비율이 늘었다는 것 정도가 달라진 점이었다.
내 등수로 말할 것 같으면 조금 오르긴 했다.
여전히 정해준 밑이긴 하지만. 바로 밑.
내신이고 모의고사고 사이좋게 위아래를 나란히 차지하고 있는 제 이름과 내 이름을 확인한 정해준은 꼭 교실에서 구석 자리를 나란히 차지하고 있는 우리 모습 같지 않으냐며 농담을 던졌다. 그럴싸한 얘기였는데도 멋쩍게 웃고 말았다.
성적이 오르긴 했지만 다른 과라면 모를까 의대를 목표로 하기에는 아슬아슬하다는 담임의 평가가 떨어진 후라서 의기소침해 있는 나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이즈음 나는 자주 불안에 빠지곤 했다.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을 아무리 쪼개도 원하는 만큼의 공부량을 채우기엔 부족했다.
잠을 더 줄여야 하나? 여기서 더? 그게 가능할까? 지금도 에너지 드링크를 들이붓고 있는데. 이따금 퓨즈가 끊기는 것처럼 정신이 깜박깜박 나갈 때마다 체력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걸 체감하고 있는데.
어쩔 수 없이 열등감이 자리 잡았다. 더없이 추한 눈길로 정해준을 관찰했다. 매끈한 피부나 쌩쌩한 활력을 미뤄 보아 숙면을 취하는 게 분명했다. 건들거리는 수업 태도도 여전했다. 딴생각에 잠긴 것처럼 책을 노려보다가 이따금 답을 적어 채점하는 게 전부인 공부법으로 잘도 틀리는 것 없이 술술 넘어갔다. 당연히 정해준은 나의 질시 어린 시선을 눈치채고 있었다.
“과외라도 받는 건 어때? 포인트만 짚어 줘도 풀릴 것 같은데.”
“갑자기 과외는 왜…….”
“네가 날 뜨거운 눈으로 쳐다보는 건 좋은데, 힘들어하는 건 나도 괴롭네.”
“뜨거운 눈은 무슨…….”
민망함에 부정하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들이는 시간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과가 없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뒷심은 있되 요령이 부족한 느낌이랄까. 정해준의 조언을 따라야 한다는 건 알지만 감히 과외를 붙여 달라고 말도 꺼낼 수 없는 처지인 게 현실이었다.
“……사교육 싫어하셔. 검소하신 분들이라.”
“한두 달도?”
“응, 아마 안 된다고 하실 거야. 많이……, 엄하셔서.”
검소하고 엄하다는 핑계는 잘 통했다. 남들 다 갖고 있는 휴대전화가 없는 것도, 학원에 다니지 않는 것도, 부잣집인데도 불구하고 용돈이 빠듯한 것도, 모두 설명이 되니까.
이럴 땐 이소원과 친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꽃뱀의 딸과 자매라는 게 알려지느니 죽겠다고 난리 치는 이소원이어서, 진짜 자매인 양 원으로 끝나는 내 이름마저 싫다고 치를 떨던 이소원이라서, 학교에서 우리 둘이 자매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몇 번, 정해준을 구경하러 우리 반 창문에 매달려 있는 이소원을 본 적이 있지만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른 척했다. 묘한 승리감을 느끼며.
학년이 바뀌고 나서도 옆자리인 걸 알고 한 번 크게 난리가 났었으나, 그냥 우연히 자리가 붙어 있을 뿐이라는 해명에 비교적 얌전히 넘어가긴 했다. 불시에 내 일기장을 뒤진 흔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다 할 증거를 찾지 못하자 더 이상 정해준에 대해 캐묻는 일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해준의 말에 따르면 ‘아직’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정해준은 선을 훌륭하게 지켰다. 처음엔 우리 둘 사이에 호기심을 갖던 애들도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는 모양이었다. 둘 다 전교권 성적이니 서로 격려하는 사이, 뭐 그쯤으로.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이소원도 그 비슷하게 생각하는 듯하고.
“그럼 내가 좀 도와줄까?”
“어?”
의외의 제안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항상 여유만만하던 정해준이 조심스럽고도 수줍어하는 게 신선했다. 최대한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하며 정해준이 다시 한번 권했다.
“너보다 조금 낫긴 하니까, 아주 조금.”
혹시 내 기분이 상했을까 봐 아주 조금이라고 덧붙이며 얕게 벌린 엄지와 검지, 그 사이로 보이는 깊은 눈빛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갑자기 왜 이러지. 지금까지 잘 지내 왔는데. 반년만 있다가 돌아가겠다던 정해준이 그 두 배가 넘는 기간 동안 말 그대로 내 곁에 있는 이 시간이 불현듯 믿을 수 없어졌다.
“늘 네 곁에서 깨어 있을게.”
한순간 오래된 책들의 매캐하고도 고루한 냄새, 무게를 갖고 드리운 듯한 공기, 창문을 사이에 두고 들려오던 에어컨 실외기의 소음 따위가 생생히 떠올랐다. 정해준의 마음이 곧 변하리라고 가벼이 여기지 않았던가. 오히려 진짜로 변해 버릴까 이제 와 두려워질 줄도 모르고.
“……일단 한번 말씀드려 보고.”
나도 정해준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성적 때문이라기보다는 욕심이 컸다. 불안과 초조가 빚어낸 소유욕.
하지만 몰랐으면 모를까, 빤히 속마음을 자각하고 있는데 덥석 정해준이 내민 손을 잡을 만큼 뻔뻔하지 못했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
그래도 고마운 마음만큼은 진짜였다. 실제 수능 점수로 이어진다는 전국 모의고사를 앞두고 한창 예민할 시기였다.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기도 때때로 벅차고 막막할 텐데 선뜻 돕겠다고 나서다니.
“너 진짜 이상해. 경쟁자를 떨어트려도 모자랄 마당에.”
“경쟁자 아닌데.”
“그럼?”
“동반자.”
“…….”
“으레 거절할 줄 알았는데, 내가 더 고맙다.”
내가 더 고마워해야 할 입장이라고 정정하려다 그냥 말았다. 명치 안쪽에 작은 새가 들어앉은 것만 같다. 포르르 날아오르려 자꾸만 날갯짓을 했다. 그럴 때마다 갈비뼈 안쪽이 새큰새큰 쑤시기도, 저릿저릿 울리기도 했다. 애써 침착을 가장하며 억지로 입매를 당겨 보였다. 걷잡을 수 없이 두근대는 속, 들키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