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뭔데.”
너무 쌀쌀맞았나. 설령 쌀쌀맞았다 하더라도 그걸 왜 신경 쓰고 있는지.
“야간 퍼레이드 같이 보자. 막판에 불꽃놀이도 볼만하다는데.”
“……끝나면 집에 바로 가야 돼.”
살짝 마음이 동했으나 바로 거절했다. 와중에 전면 유리창 너머에 이소원의 학년 애들이 몰려다니는 게 보여 슬쩍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러다 이소원이 여기 들어오기라도 하면 어쩌지? 수시로 달콤한 음료를 물고 사는 이소원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갑자기 정해준의 존재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따지듯 물었다.
“우리, 밖에서는 아는 척 안 하는 거 아니었어?”
“우리. 우리라…….”
기분 좋게 중얼거린 정해준이 되물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러니까, 암묵적으로…….”
더 말을 맺지 못하고 얼굴만 달아올랐다. 당연히 그런 규칙 따위는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얘기를 나눈 적도 없었고. 학교에서도 다른 애들 앞에서는 데면데면하게 지내니 혼자 지레짐작하긴 했던 건데 정말 짐작으로 끝나서 문제였다.
난처해하는 내 얼굴과 창밖을 번갈아 보던 정해준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싱거워졌을 콜라 컵을 비웠다.
“그럼 열심히 해.”
가벼운 응원과 함께 정해준이 곁을 떠나갔다. 동시에 부지런히 움직이던 내 샤프도 뚝 멈췄다. 잠깐 머물렀을 뿐인데 오래 자리를 채우던 이가 떠난 것처럼 허전했다.
한참 멍하니 시간을 죽이다 무심코 컵을 집어 들었다. 덜렁, 들리는 텅 빈 잔을 보고 속으로 못마땅하게 뇌까렸다. 마셨으면 고맙다고나 하든가.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문장 밑에 줄 긋는 샤프 끝을 꾹꾹 눌러 가며.
어렵지도 않은 문제 두 개를 겨우 풀고 났을 때 누군가가 옆자리에 묵직한 새 컵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놨다. 자리가 없나?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자 기다렸다는 듯 정해준이 손에 든 것을 내 머리에 씌워 주었다. 토끼 머리띠였다.
“뭐야……?”
“콜라값.”
“…….”
“기분 내라고.”
강아지 쓰다듬듯 내 뒤통수를 쓰다듬은 정해준이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떠나갔다. 도깨비에게 홀린 기분으로 머리띠를 벗었다. 부들부들한 연분홍 토끼 귀가 손바닥을 간질였다.
“…….”
다시 쓰려니 어색해 그냥 컵 옆에 두었다. 귀가 약 올리는 것처럼 까딱까딱 움직이는 듯한 착각에 여러 번 노려보았다.
정각에 시계탑 아래 도착했으나 늦는 아이들 때문에 괜한 시간을 죽였다. 반대쪽에서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를 주고받는 정해준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자꾸만 신경은 그쪽으로만 쏠렸다.
한 번, 내 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는데 아마도 토끼 머리띠를 찾는 듯했다. 혹여 누군가에게 들킬까 가방 한구석에 얌전히 모셔 놓은 토끼 머리띠를.
다행히 담임은 반 아이들이 모두 모이자마자 눈치껏 종례를 빨리 끝내 주었다.
“자, 이만 해산한다. 집에 잘들 들어가고, 더 놀 사람들은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출구로 향하는 인원보다 도로 놀이기구를 향해 뛰어가는 머릿수가 월등히 많았다. 아무래도 마음 놓고 놀 수 있는 기회를 그냥 지나치기는 아까울 테니. 이소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혼자 쓸쓸히 출구를 향해 걸어가는 내 뒤통수에 대고 들으란 듯 얄밉게 애들을 불러 모았다.
“야, 내가 햄버거 쏜다!”
진짜? 진짜? 순식간에 여럿이 이소원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못 들은 척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걸었다. 나한테 사 준다는 것도 아닌데 허기가 졌다. 종일 콜라 한 잔을 빼고는 먹은 게 없었다. 엄마 카드는 이상하게 눈치가 보였다. 알림이 뜰 테니까. 그걸 볼 엄마를 상상하고 나면 주눅이 들어서.
내가 학용품 중 가장 저렴한 걸 골라도, 미친 척 수십만 원짜리 옷을 질러도, 엄마의 표정엔 변화가 없을 것이다. 관심 없으니까. 돈을 쓰든 말든, 뭘 먹든 말든, 너 알아서 하라는 무관심이 카드 한 장에 담겨 있었다.
나와 달리 소풍이라고 어른들을 졸라 용돈을 두둑이 챙긴 이소원이 몰려든 애들을 둘러보며 으스댔다.
“나 용돈 많이 받았거든. 가자!”
순간 유치한 오기가 발동했다.
‘소원 하나만 들어주라.’
지금이라도 정해준을 찾아 이소원 보란 듯 그 곁에 나란히 서서 퍼레이드인지 뭔지를 볼까 하는.
결연하게 뒤를 돌아보았다가 넓디넓은 테마파크를 확인하고 맥이 빠졌다. 차라리 모래 속에서 진주를 찾지. 그 흔한 휴대전화를 갖고 있지 않으니 연락할 길도 없었다. 허탈한 기분으로 걸음을 옮기다 우뚝 섰다.
‘대체.’
정해준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그런 유치한 복수극을 떠올린 게 부끄럽기만 하다. 몇 분 전의 졸렬한 자신에게서 도망치듯 걸음을 빨리했다. 뚝뚝 떨어진 미련의 냄새가 뒤를 쫓았다.
***
말도 안 돼.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밤잠을 아껴 가며 공부했는데 성적이 오르기는커녕 등수가 하나 내려가 있었다.
전교 석차 4등, 이해원.
입학한 이래 처음 받는 등수에 잠시 멍해졌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위에 있는 이름을 확인했다. 김승태, 유현지. 2등과 3등의 이름은 눈에 익었다. 지난번에도 내 위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1등은, 그래, 1등도 눈에 익은 이름이긴 한데 하필 1등이라는 글자 옆에 있어서 낯설었다. 어쩌면 내 마음이 받아들이기 힘든 건지도 모르겠다.
전학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수업 시간에 맨 잠만 자면서, 심지어 시험 범위가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그런데 네가 왜? 어째서 1등인데?
다소 분한 마음으로 정해준의 이름 석 자를 노려보다가 도서관으로 향했다. 습관처럼 걸음 했다가 뒤늦게 아차 싶었던 건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 후였다.
지금으로선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인물이 빙글거리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른 척, 평소 앉던 창가에서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자 정해준도 능청스레 따라와 말을 붙였다.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아직도 전교생 등수를 떡하니 게시하는 학교가 있다니.”
놀랐다, 놀랐어.
한심스럽다는 듯 절레절레 흔드는 고개까지 밉게 보였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입술을 꾹 다물고 있자 심각하게 눈썹을 구겨 내 표정을 따라 한 정해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일등인 게 너한텐 화나는 일이야?”
“…….”
정곡을 찔린 것 같아 움찔했다. 동시에 더욱 속이 끓었다. 얜 뭐가 이렇게 다 잘났지? 맘 편히 욕도 못 하게. 그래, 좋겠다. 아주 잘나셔서 좋겠어. 비딱한 소갈머리로 되뇌는 동안 나름의 이유를 찾은 정해준이 다시 물었다.
“등수 밀려서 그래?”
“그게 아니라, 네가 자꾸 옆에서 잠을 자니까……!”
벌컥 언성을 높이다 허튼소리가 더 나가기 전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미쳤나 봐, 이해원. 무슨 말도 안 되는 탓을 하고 있는 건지. 화를 내려면 못난 나 자신한테 해야지 왜 애먼 데 화풀이냐고. 와중에 정해준은 홧김에 던진 말을 진지하게 받아 고민했다.
“내가 잠을 자서? 아, 분위기 안 잡혀서?”
얘는 알고 이러는 건지, 모르고 이러는 건지. 사람 더 미안하게…….
자꾸만 원망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꼴불견도 이런 꼴불견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 추해지는 거 한순간이구나. 하필 그게 정해준 앞이어서 속이 진창이었다. 김승태나 유현지에게는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그냥 다음에 더 열심히 하자고 깔끔하게 넘어가 버리면 그만이었는데.
“미안해, 내가.”
뒤늦게 사과하려 하다가 말문이 탁 막혔다.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변명이 되긴 할까. 그냥, 그냥 내가 못난 건데. 그래도 뱉어 놓은 말은 수습해야겠다 싶어 거듭 미안하다고 사과하려는 순간 정해준이 부드럽게 달랬다.
“안 잘게.”
“어? 아니, 그러지 않아도.”
“늘 네 곁에서 깨어 있을게.”
“…….”
약간 헷갈렸다. 그 말이 꼭 고백처럼 들려서.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내 생각을 확인시켜 주듯 정해준이 선선히 인정했다.
“그 정도로 눈치 없진 않잖아.”
“……모르겠어.”
“뭐를?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이제 알겠어?”
“그게 아니라, 넌 나에 대해 잘 모르잖아.”
“그래서? 싫어?”
싫을 리가. 솔직히 말하면 좋았다. 정해준 정도의 남자애가 좋다고 들이대는데 좋지 않을 리가 없었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취향을 뛰어넘는 얼굴을 무시하기란 힘드니까. 우월한 외모를 배제하더라도 끌릴 만한 요소는 많았다.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음성, 시원시원한 성격, 우수한 두뇌를 증명하는 성적…….
정해준의 곁으로 꿀에 꼬인 개미들처럼 몰려드는 다른 아이들과 나도 속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정해준이 유난히 내게 다정할 때마다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괜히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애써 무시하고는 있었지만 도서관에서 나보다 먼저 와 엎드려 자고 있는 정해준의 뒷모습을 발견했을 때 가슴이 뛰었던 설렘을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더더욱, 거절하려고 마음먹었다.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마음 한구석을 온전히 내주고 일상을 전처럼 이어 간다는 게. 특히나 그 상대가 정해준처럼 압도적인 매력을 가진 인물이라면.
더군다나 난 겉만 번지르르하지 아무것도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