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비스듬히 앉아 있는 정해준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대부분의 시간 잠을 자긴 하지만, 정해준도 듣는 수업이 몇 가지 있긴 했다. 수학은 담임 수업이라 어쩔 수 없이, 영어는 선생님이 무슨 실수하나 찾는 재미로, 생물은 진짜 흥미 있어서.
아버지가 의사라서 이쪽으로도 관심이 많나? 나도 의대를 목표로 하고 있기에 예과 때 필수 과목 중 하나가 생물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필기를 한 글자도 안 하는 건 여전히 이해 불가지만. 특히 생물처럼 외울 게 많고 정리가 중요한 과목에서. 하긴 수학 때도 눈으로 읽고 풀긴 했었다. 그때도 희한하단 생각은 했는데…….
너무 훔쳐봤나. 내 시선을 의식한 정해준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내 다리 길지.”
“어?”
“길어서 자꾸 책상 밖으로 나가.”
“……그렇구나.”
왜 필기를 안 하나 하고 자꾸 책상 밑에 있는 정해준의 손만 보자 오해한 모양이었다. 다리 길이가 남다르게 긴 건 사실이었기에 잠자코 수긍하고 넘어갔다. 그러다 정해준의 입가에 슬며시 떠오른 의미심장한 미소를 발견하곤 오해가 이상한 방향으로 번지기 전에 제대로 짚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는 필기 안 해?”
“필기? 아.”
그제야 내 시선이 실은 바지 주머니 속에 가려진 손에 닿았음을 깨달은 정해준이 전시하듯 양손을 쫙 펼쳐 보였다. 이번엔 긴 손가락을 자랑하려나. 자랑하면 이번에도 인정하는 수밖에 없겠다. 짧게 깎은 단정한 손톱, 길쭉하면서 마디가 도드라지지 않는 손가락,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남성적인 손에 자꾸 눈길이 갔다.
“귀찮아서.”
“아……?”
“필기 왜 안 하냐며.”
“아, 응. 궁금해서. 수학도 눈으로 푸는 것 같아서.”
“습관 되면 편해.”
검지로 관자놀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정해준이 차근히 설명했다. 어지간한 건 그냥 머릿속으로 계산해 버릇하면 거의 펜을 놀리지 않고도 풀 수 있고 그게 더 효율적이라고.
“노트 정리하느라 신경 쓰는 거 딱 질색이라. 어차피 필기하고 자주 들여다보지 않으면 꽝이잖아.”
그러면서 너도 한번 해 보라면서 권하는데 그냥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어쩐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미국에서 살다 왔으니 영어야 잘하겠지만, 다른 과목 실력은 미심쩍다고나 할까.
무엇보다 등교부터 하교까지, 학교생활의 시작과 끝을 숙면으로 시작해서 숙면으로 끝내는 정해준이니까. 점심시간에 나를 따라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용할 지경이었다.
교실에서 자면 되지 왜 도서관까지 와서 자냐는 물음에 정해준은 조용해서 그렇다는 단순한 답을 내놨다. 쉬는 시간마다 북적이는 아이들 때문에 성가신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지난번 대강당에서 일도 있고, 도서관은 나한테도 소중한 장소였기 때문에 더는 정해준을 피해 다니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옆자리에서 얌전히 잠을 자는 게 전부인데 너무 예민하게 굴었나 싶기도 했다. 이소원이 도서관을 찾을 일은 없으니 나란히 있는 모습을 들킬 일도 없는 거였는데.
어서 점심시간이 되어서 평화로운 시간을 즐기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정해준이 펼쳐 둔 교과서 페이지를 보고 혹시 착각하고 있나 해서 알려 주었다.
“거긴 기말 범위 아닌데.”
한참 앞쪽이라고 범위를 알려 주자 정해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진도가 좀 빨라.”
“…….”
“장난이고, 그냥 공부가 재미있어서.”
공부가 재미있을 수도 있나? 나한텐 대학 갈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잠시 묘한 기분에 잠겨 있다가 신경 끄자고 마음먹었다. 내 코가 석 자인데 정해준이 무얼 들여다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중간고사 때 떨어진 등수를 떠올리며 이를 앙다물었다. 집에서 성적을 신경 쓰기 때문은 아니었다. 신경은커녕 무관심한 쪽에 가까웠다. 성적이 나쁜 이소원에게는 과목별로 과외 선생이 붙어 있지만…….
“신기하지 않아? 이거, 꼭 우주선 같이 생겼잖아.”
이소원처럼 전 과목 과외 선생을 붙여 주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수학 정도는 한두 달만이라도 과외를 받았으면, 하는 아쉬움에 잠겨 있다가 정해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림을 봤다. 누군가 의도를 갖고 설계한 것처럼 인공적인 생김새를 가진 박테리오파지였다.
“내가 장담하는데.”
손가락을 톡톡 치면서 정해준이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분명 외계인이 만들었을 거야. 일종의 스파이 같은 거지.”
“뭐?”
엉뚱한 소리에 의식할 새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이 수업 중이라는 걸 깨달은 건 이미 반 아이들의 이목이 쏠린 후였다. 얄밉게도 정해준은 안면의 웃음기를 싹 지운 채 집중하는 척하고 있었다. 줄곧 놀고 있던 빈손에 샤프까지 쥐고서.
“거기, 집중 안 하나?”
“죄송합니다.”
얼른 고개를 꾸벅 숙여 사과한 후, 칠판에 적힌 것들을 따라 베끼면서 새삼 억울해졌다. 소곤소곤 떠들고 있던 게 우리만은 아니었던 거나, 웅성거림이 일시에 가라앉자 판서하느라 떠들든 말든 내버려 두던 생물이 어떻게 알고 나를 딱 집어 지적한 거나.
다신 정해준이 말 걸어도 대꾸해 주지 말아야지.
유치하다는 걸 알면서 고개도 정해준의 반대쪽으로 돌렸다. 머리카락을 정해준 쪽으로 넘겨 방어벽처럼 우리 사이에 드리우고. 하지만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 정해준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무시하자 내 책상으로 쪽지가 넘어왔다. 문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정수리는 반질반질한데 옆머리는 무성한 문어가.
‘완전 생물이잖아?’
그림을 보자마자 웃음을 참느라 볼이 실룩거렸다. 그래도 이번엔 웃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입술을 굳게 다물자 실룩이던 볼이 경련했다. 그예 입 안쪽 살을 꽉 깨물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에 눈물이 맺히도록.
***
2학기 중간고사가 코앞인데 가을 소풍 일정을 잡는 건 누구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지 모르겠다. 그런 의문을 품은 건 전교생 중에 나 하나뿐인 것 같지만.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다. 사고 치지 말고 오후 4시에 시계탑 아래서 모여 인원 체크하고 해산한다. 알았나?”
담임의 전달 사항을 귀 기울여 듣는 애는 아무도 없었다. 산재한 놀이기구에 정신이 팔려서 지겨운 잔소리가 얼른 끝나기만을 고대하는 게 눈에 보였다. 일부는 조금이라도 빨리 튀어 나가기 위해 몸이 잔뜩 기울어 있었다.
아래 학년은 단합이 좋았는지 일찍이 집합을 마치고 벌써 놀이기구로 우르르 뛰어가는 무리가 보였다. 그중에 이소원도 껴 있었다. 그새 이목을 끄는 커다란 고양이 모자를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눈도 좋지, 정해준을 발견하고 저들끼리 꺅꺅 소리 지르며 겅중거리는 게 거슬려 시선을 돌렸다.
줄서기도 바쁠 텐데 훤히 보이는 곳에 서서 훔쳐보는 양 흘깃거리는 모양새가 정해준 일행의 동선을 그대로 따를 모양이었다. 종일 쫓아다니면 눈도장은 확실히 찍을 테니 좋은 전략이었다.
‘내가 무슨 상관이람.’
어트랙션 대기 줄에서 정해준 주위를 기웃거릴 이소원을 상상하자 괜히 열이 오르는 듯해, 기분이 이상해져 그만두었다. 담임의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반 아이들이 삼삼오오 갈래갈래 찢어졌다. 일부러 천천히 걷다가 슬쩍 유아를 위한 놀이기구가 몰려 있는 구역으로 빠졌다.
예상대로 이쪽은 한산했다. 가까이 있는 패스트푸드점에 자리를 잡고 콜라 한 잔을 주문했다. 이게 내가 해마다 소풍을 보내는 방법이었다. 유별나 보일 걸 알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왁자지껄한 가운데 껴서 억지로 어울리느니 이편이 마음 편했다. 어차피 반나절, 조금만 버티면 되니까.
수학 모의고사 2회분 정도를 풀면 금방 지나갈 시간이었다. 처음 몇 문제를 풀 때만 해도 집중이 잘됐다. 공교롭게도 롤러코스터의 가속도를 구하는 문제가 나오기 전까진.
“…….”
엉뚱하게 정해준이 궁금했다. 국내에서 제일 긴 레일을 자랑하는 롤러코스터를 탔을지, 탔다면 소리를 크게 질렀을지, 여유만만하게 씩 웃고 말았을지. 아무래도 후자일 것 같다.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고함지르는 정해준은 도무지 상상되지 않았다.
그렇게 결론 내리고 무심코 시계를 확인하다 당황했다. 잠깐 딴생각에 빠졌던 것 같은데 벌써 1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눈을 의심하며 시계를 다시 들여다봤으나 마찬가지였다.
“뭐야.”
고장 났나. 아니면 건전지가 다 돼서 느려졌거나. 두리번거리다 벽면에 걸려 있는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시침과 분침이 내 시계와 같은 눈금을 가리키고 있었다. 홀린 기분으로 문제집 위의 롤러코스터 그림을 째려보다가 그냥 건너뛰고 다음 문제를 풀었다.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 건 1회를 다 풀고 오답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한참 찾았네.”
정해준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손도 안 댄 채 얼음이 다 녹은 콜라 컵과 문제집을 번갈아 보던 정해준이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이런 데 문제집 갖고 오는 건 대한민국에 너밖에 없을걸.”
지구상에 나 하나라 해도 상관없었다. 분위기 잡친다는 얘기는 이미 숱하게 들어 왔으니 새삼스럽지 않았고.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문제집에 눈을 박았다. 그래 봤자 온 신경은 정해준에게 쏠려 있었다.
“이해원.”
“왜?”
나직한 부름에 귀가 쫑긋 서는 것만 같았다. 정해준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꺾어 문제집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청량한 냄새가 훅 끼쳤다. 기분 낸다고 향수를 뿌린 것 같은데, 정해준과 무척 잘 어울리는 향이었다. 초여름 바다를 연상시키는 향.
“소원 하나만 들어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