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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과-6화 (6/77)

6화

정해준을 의식적으로 피해 다녔다. 정해준의 문제라기보다는 이소원이 난리 치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어렵진 않았다. 정해준이 깨어 있는 시간에 슬그머니 화장실이나 복도 끝에서 서성거리면 그만이었으므로. 다행히 정해준은 대부분의 시간 잠을 청했고, 그래서 피해 있는 시간도 길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시간을 보내던 도서관은, 아쉽지만 포기했다. 다행히 도서관을 대신할 곳이 있었다. 대강당 내부, 농구코트 앞 관중석 2층이었다. 보통은 운동장에 있는 농구코트를 이용하므로 사람이 잘 오지 않는 데다가 설사 여기까지 온다 해도 주목받을 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정해준도 여기까지 찾아오진 않았다. 어차피 자기만의 무리가 형성되어 있기도 했다. 선망과 질시가 뒤섞인 낯을 한 애들이 언제나 정해준의 주위에 북적거렸다. 연예인들의 학창 시절이 정해준의 일상과 비슷하지 않을까. 언제 어디서나 주목받는 일상.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연히 경계가 느슨해졌다. 금방 멈출 여우비라 무시한 탓도 컸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대강당에 도착한 것까진 좋았는데, 얼마 안 있어 정해준 무리가 들이닥쳤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화들짝 놀라 구석에 몸을 숨겼다. 가장 앞줄, 밑에서 올려다보면 돌출된 턱 때문에 잘 보이지 않을 자리에. 덕분에 농구코트와 가까워져 남자애들의 목소리와 공 튀기는 소리가 밀폐된 대강당 안을 쿵쿵 울리며 두서없이 귀에 꽂혀 들었다.

“그런데 애가 좀 음침하지 않아? 같이 다니는 애도 한 명도 없고.”

누구 얘기지? 누구의 얘기건 남의 험담을 듣고 있는 게 거북스러웠다.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어서 난감한 기분은 배가 됐다. 위쪽의 사정을 고려할 이유 없는 아래쪽의 수다는 계속됐다.

“완전 얼음 공주 납셨지. 찬바람 쌩쌩 불잖아. 말투도 은근 싸가지 없고. 뭐 물어봐도 단답형으로만 대답하잖아.”

“여자애들도 이해원 재수 없다고 싫어하더라. 도도하게 군다고.”

상체를 숙여서 살금살금 나가면 아무도 눈치 못 채지 않을까. 고민하는 사이 별안간 들려온 내 이름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어 걷잡을 수 없이 뒷덜미가 홧홧해졌다. 남자애들이 신나게 찧고 까부르는 대상이 나인 것보다, 그걸 고스란히 듣고 있는 정해준이 신경 쓰여서, 못내 창피해서.

기운이 쭉 빠져서 몰래 빠져나갈 생각은 접었다. 그냥 어서 시간이 흘러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를 빌었다. 퉁, 퉁, 습관적으로 튀기는 공과 함께 내 얘기도 계속해서 이리저리 튀었다.

“보안업체 손녀라 그런지 입도 철통 보안이야, 아주.”

가장 열성적으로 나에 대해 떠들어 대던 최인교를 향해 누군가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너 전에 이해원한테 고백하지 않았어?”

“아 씨, 그 얘긴 왜 꺼내?”

최인교의 격렬한 항의 끝에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정해준의 목소리가 섞였다. 흥미로워하는 듯했지만 묘하게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 물음이었다.

“정말?”

“어? 아니…….”

최인교의 거짓말은 고백하는 당시 자리에 있던 다른 남자애에게 즉각 반박당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고백하려면 조용히 하든가, 축제 때 전교생이 다 보는 앞에서 했잖아. 내가 다 쪽팔리더라.”

“걔가 핸드폰이 없으니까 그렇지! 연락할 방법이 없는데 어쩌라고!”

“그럼 그냥 슬쩍 불러내면 되잖아.”

논리적인 반박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씩씩거리는 최인교를 두고 야유 섞인 웃음이 쏟아졌다. 이쯤에서 갑자기 눈앞에 들이밀어졌던 장미꽃 100송이가 떠올랐다.

“미안해.”

꽃다발을 받을 생각도 않고 거절하자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떴던 최인교의 뒷모습도. 흥미진진한 눈으로 둘러서 있다가 달아나는 최인교와 나를 번갈아 보며 와아, 웃던 아이들의 웃음도.

와중에 정해준은 진심으로 궁금한 것처럼 최인교에게 재차 물었다.

“왜? 차였어?”

“당연히 차였지! 개망신도 그런 개망신이 있냐.”

처음 최인교의 고백 얘기를 꺼낸 박현수가 신나서 킬킬거렸다. 아픈 곳을 찔린 최인교가 헉 숨을 들이켰다가 토해 내듯 속엣말을 쏟아 냈다.

“보는 눈이 몇 갠데, 거절할 때 거절하더라도 일단 받아 줬다가 나중에 좋게 거절하면 되잖아. 걔가 그러니까 성격이 나쁘다는 거야.”

열변을 토로하는 최인교의 얼굴이 그려졌다. 내게 거절당했을 때처럼 자줏빛 얼굴색을 하고선 장승처럼 눈을 부릅뜨고 있겠지.

‘싫다.’

이런 식으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거. 대강당도 맘 편히 있을 장소가 아니었다. 다른 빈 곳이 또 어디 있을까, 궁리하는데 정해준의 가벼운 핀잔이 들려왔다.

“얼굴이 그렇게 반반한데 성격까지 좋으면 그게 사람인가.”

“어……, 네 말도 맞네.”

박현수에겐 왜 지난 일을 끄집어내느냐며 윽박지르던 최인교가 정해준의 지적에는 얌전하게 수긍했다. 무안했던지 말을 돌리기까지 했다.

“걔, 알고 보면 콘셉트 아니야? 신비주의 뭐 그런 거.”

“진짜? 사실이면 소름 돋네.”

“소름은.”

정해준이 한심하다는 듯 웃었다.

“그딴 헛소릴 믿는 네 대가리가 소름 돋는 게 아니고?”

꼭 시비 거는 투였는데 아무도 발끈하지 않는 게 신기했다. 오히려 엄청 웃긴 얘기라도 들은 것처럼 왁자한 웃음이 터졌다. 면박당한 최인교조차도 머쓱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나는 조금도 웃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험담과 마찬가지로 나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빻아대는 소리 또한 듣기 싫었다.

반갑게도, 점심시간이 10분 남았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내게는 마치 구원의 종소리처럼 들렸다. 벌써 끝났다며 아쉬워하는 탄식과 함께 발걸음 소리가 우르르 울렸다. 충분히 멀어진 걸 확인하고 천천히 허리를 폈다. 내내 웅크려 있어서 등허리가 쑤셨다.

‘다 갔겠지?’

빠트린 물건이 있나 확인한 후 1층으로 걸음을 옮기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러다 시야에 잡히는 인영에 무심코 오른쪽 아래를 확인했다가 멈칫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교실로 간 줄 알았던 정해준이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먼저 시선을 돌린 건 나였다.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못한 채 그대로 얼어 있다가 수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다시 아래를 바라보자 같은 자세, 같은 눈빛으로 그 자리에서 올려다보는 정해준이 보였다. 조금은 숨이 막히는 기분으로 걸음을 뗐다.

“언제부터 알았어? 나 여기 있는 거.”

마침내 마주 서서 한다는 말이 고작 이런 거지만. 따지는 건 아닌데, 그렇게 들릴까 봐 신경이 쓰였다. 냉랭하다, 싸가지 없다, 도도하다, 그런 평가들에 또 하나의 예시를 추가한 것 같아서.

“냄새 맡고.”

“어?”

“너한테 사과 냄새 난다고 했잖아. 향긋하고 달콤한 냄새.”

“…….”

이상한 애. 너무 이상해서 자꾸 궁금한 애.

아무리 궁금해도 선뜻 다가가지 않을 스스로를 잘 알아서 먼저 선을 그었다. 다른 이들이 내 흉을 볼 때 거들지 않은 건 고맙지만.

아니, 단순히 거들지 않은 게 아니라 보호하는 것처럼 나서 준 건 고맙지만, 거기까지라고. 솔직히 부담스럽다고, 앞으로는 하나도 고마워하지 않을 테니 그러지 말라고.

“편들어 준 건 고마운데.”

“편든 거 아닌데.”

내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정해준이 딱 잘라 말했다.

“감히 비벼 볼 깜냥도 안 되는 주제에 꼴에 눈은 달려서 어떻게든 관심은 끌고 싶고……. 구질구질한 실패담 듣기 지겨워서.”

“……아무튼 앞으론 그렇게 나서 줄 필요 없어.”

“싫다면?”

“…….”

이런 반응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당황해서 눈만 깜박깜박 감았다 뜨는 내 앞으로 한 걸음 성큼 다가온 정해준이 마침 잘 만났다는 듯 추궁했다.

“너 왜 나 피해?”

“피한 적…….”

정해준이 다가온 만큼 주춤주춤 물러나며 변명했다. 위협적인 건 아니지만 위압감이 느껴졌다.

“……없어.”

거짓말이었다. 점심시간마다 내가 차지하던 도서관의 빈자리만 봐도 눈치챌 수 있는 일이었다.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이라니, 전부터 얘 앞에선 자꾸 나답지 않은 짓을 하게 된다. 한 번 더 확인하면 사실대로 털어놓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찰나.

“그래? 믿을게.”

선선히 받아들인 정해준이 싱긋이 웃었다. 방금 전까지 음산하다가 한순간에 산뜻하게 변한 눈빛에 속이 술렁거렸다. 어수선한 기분을 갈무리하지 못하는 사이 수업 종이 울렸다. 아차, 싶어 황급히 걸음을 옮기는 나와 대조적으로 정해준은 마냥 느긋했다.

“어차피 늦었는데 천천히 가자.”

대꾸도 하지 않고 교실을 향해 뛰었다. 꼭 도망치는 사람처럼 사력을 다해서. 하지만 온 힘을 다한 게 허망하게도 금방 정해준에게 따라잡혔다. 나보다 한발 앞서선 나와 마주 보며 뒤로 뛰기까지 했다.

와중에도 여유롭게 씩 웃는 모습을 보니 은근 열 받으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결국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웃겨서 갑자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아, 힉! 하아…….”

결국 멈춰 서서 우스꽝스러운 꼴로 숨을 몰아쉬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 먼저 가라고 정해준을 향해 손짓했다. 거꾸로 뛰느라 내 쪽을 향하고 있던 정해준의 발끝이 반대쪽을 향했다. 호흡이 가라앉으면 천천히 뒤따라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무릎에서 손을 떼고 천천히 허리를 편 순간 손목이 잡혔다.

“윤리, 게을러서 분명 늦게 올라올걸.”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내 손목을 단단히 움켜쥔 정해준과 함께 내달렸다. 이미 수업이 시작된 고요한 복도에 두 사람의 발걸음이 맞춘 것처럼 하나로 울렸다. 다시금 벅차게 뛰기 시작한 심장 박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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