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관심이 지대한 탓에 좋아하는 줄은 알았지만 사랑으로까지 발전했으리라곤 맹세코 몰랐다. 눈에 띄는 외모나 집안 배경 때문에 정해준이 유명하긴 해도 그게 사랑할 이유가 되나? 둘이 얘기 한 번 나눠 본 적 없으면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감정은 또 다른 영역이니까 그냥 해명에 집중하기로 했다.
“꼬리 친 적 없어. 그냥, 어쩌다 우연히 그렇게 된 거라고.”
“어쩌다 우연히? 하! 말은 잘하네. 한 달이나 옆자리 앉아 있었으면서 나한텐 정해준 모른다고 잡아뗐잖아. 짝꿍도 한 달 동안 우연히 했니?”
“그건…….”
정말 정해준에게 관심 없다고, 그냥 귀찮은 질문을 받기 싫어서 그랬던 거라고, 어차피 사실대로 말해 줘 봤자 믿지도 않을 텐데 뭐라고 설득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기분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신랄한 욕설이 귀에 박힌 건 바로 다음이었다.
“미친년. 또 예쁜 척하고 자빠졌네.”
“뭐?”
“피는 못 속인다더니, 사실인가 봐?”
지긋지긋한 한풀이가 또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태생적으로 내가 죄인일 수밖에 없는 한풀이가.
“소원아.”
“와 씨, 소름. 다정하게 부르고 지랄이야!”
조금이라도 진정하길 바라며 이름을 불러 봤지만, 도리어 불같은 이소원의 성질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고 말았다.
“멀쩡한 아빠도 뺏어 가더니, 이젠 정해준까지 뺏어 가려고?”
이 또한 귀에 박혀 버린 멘트였다. 자신이 탐내는 걸 내가 갖고 있으면, 예를 들어 자신이 갖고 싶던 필통을 내가 들고 있다면 ‘멀쩡한 아빠도 뺏어 가더니 이젠 필통까지 뺏어 가려고?’ 하는 식이었다. 뭐든지 넘치게 갖고도 사사건건 내 걸 탐내는 건 이소원이었다. 그럼에도 입도 벙긋 못하는 건…….
“난 엄마랑 달라. 엄마는 꽃뱀 같은 네 아빠 외모만 보고 홀랑 넘어갔지만, 난 다르다고.”
이제 세상에 없는 아빠가 꽃뱀이라는 모욕을 들어도 꾹 참을 수밖에 없는 건…….
“씨발, 이해원! 도대체 넌 뭐가 문제야? 어? 거지 같은 너희 부녀 입혀 주고 재워 주고 먹여 준 거론 모자라? 왜 가만있질 못하고 나대냐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나를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줘서.
독립해야지.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바로 독립해야지. 학비까지는 어려워도 생활비를 스스로 충당하려면 과외가 잘 잡히는 명문대는 필수였다. 대학 졸업 후에도 취직을 보장받으려면 전문직이어야 할 거고. 그래서 목표 삼은 게 의대다. 이를 악물고 도서관에 처박혀 책만 파는 이유였다.
“나대지 않았어.”
서글픈 기분에 잠겨 조용히 부정했다.
“입혀 주고 재워 주고 먹여 줘서 충분히 고마움 느끼고 있고.”
“고마운데 은혜를 원수로 갚아?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거야!”
진절머리를 내며, 부르르 한차례 몸서리친 이소원이 문짝이 부서지라 여닫고 나갔다. 어렸을 때보다야 이소원이 성질을 내는 빈도도 줄고 강도도 줄어들긴 했지만, 당할 때마다 받는 상처는 비슷했다.
사실 나도 궁금하긴 했다. 새엄마는 대체 왜 날 거뒀을까. 아빠를 그만큼 사랑해서 그 핏줄인 나까지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걸까? 그리고 아빠는 정말 꽃뱀……이었을까.
처음 새엄마를 내게 소개했을 때 아빠 표정을 생각하면 아닐 것 같은데. 착하고 여린 사람이라고, 해원이에게 좋은 엄마가 생겨서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고 활짝 웃으시던 아빠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우리 아빠 아니야! 소원이 아빠는 따로 있어!”
첫 만남부터 삐걱거리기는 했다. 눈이 퉁퉁 붓도록 새엄마에게 혼나고 나서 이소원의 표적은 만만한 나로 바뀌었다.
“너 때문에 난 학교도 전학하고, 진짜 아빠도 못 만나고! 다 너 때문이야! 너랑 너네 아빠 때문에!”
다짜고짜 내게 미운 마음을 토해 내는 이소원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다. 그저 여동생이 생겼으니 무작정 잘해 줘야 한다고만 여겼다. 언니니까, 또 새 가족이 생겼으니까 잘 지내야 한다는 의무감에 한동안 이소원의 짜증과 화를 받아 주었다.
처음 맛본 엄마 품이 좋기도 했다. 나를 잘 돌봐주려고 노력은 하지만 어딘가 허술한 아빠와 이미 내 또래의 딸이 있었던 엄마의 세심하고 꼼꼼한 손길은 아무래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빨라진 하교 시간도, 훈훈한 온기가 느껴지는 집 안도, 달콤하게 풍기는 간식 냄새도,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다시 예쁘게 묶어 주는 엄마의 다정한 손길도, 모두 너무 좋았다. 그래서 발작과도 같은 이소원의 분노를 참아 넘겼다.
내가 참고 반응하지 않으면, 그럼 괜찮을 줄 알았다. 오히려 나의 인내가 이소원의 화를 더 돋우는 줄은 모르고. 가끔 이소원이 눈이 홱 뒤집혀 손톱을 세우고 내게 달려들 때마다 새엄마는 친딸인 이소원을 밀쳐내고 나를 보호했다.
나를 끌어안은 채 호되게 이소원을 혼내는 엄마의 음성이 가슴에 맞닿은 귀를 타고 고막을 둥둥 울렸다. 그러자 모순적이게도 자기 딸을 배반하는 새엄마에게 믿음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몇 번 같은 일이 반복되자 제 아빠뿐 아니라 엄마도 내게 뺏겼다고 생각한 이소원은 더욱 그악스럽고 교묘해졌다. 새엄마나 아빠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굴다가 부모님이 자리를 비우면 악다구니 지르고 꼬집다가 분을 못 이겨 발로 차는 식이었다.
그래도 참았다. 네 가족이 도란도란 얘기 나누는 저녁을, 식탁을 감도는 그 포근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몇 번 견디다 못해 아빠에게 소원이는 나를 싫어하나 봐요, 진지하게 얘기해 봤지만 난처한 미소만이 돌아왔을 뿐 바뀌는 건 없었다.
괜찮아.
정말로 괜찮았다. 여전히 이소원의 정도를 넘는 미움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그걸 상쇄해 주는 아빠와 엄마의 살뜰한 사랑이 있었으므로. 엄마가 나를 아껴 주시는 것 못지않게 아빠도 이소원을 자상하게 대하니 언젠간 이소원도 마음을 풀겠지, 막연히 낙관했다.
헛된 희망이었다.
사고는 갑작스레 찾아왔고 손 쓸 틈도 없이 아빠는 떠나 버렸다.
장례식장에서 새엄마 쪽 친척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듣고 알았다. 아빠와 혼인하기 위해서 새엄마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 아빠는 멀쩡한 가정을 깬 주범이었다. 이소원이 했던 말 그대로였다. 내 아빠 때문에 그 애는 자기 아빠를 잃고 마음대로 보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 난 이상은 마음껏 아빠의 죽음을 슬퍼할 수 없었다. 바늘처럼 따가운 눈총을 견디며 조문객이 뜸한 시간을 틈타 홀로 흐느꼈다.
아빠는 정말 꽃뱀이었을까? 이소원과 할머니가 얘기한 것처럼 작정하고 돈 많은 엄마를 물어 팔자를 폈을까? 정장을 입고 있었던 아빠의 모습은 기억나는데 그 외에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출근이 늦지는 않았는지, 어떤 직종이었는지.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갖기엔 나는 너무 어렸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가기 전까지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게 제일인 나이였으니까. 지금 와서 새삼스레 알아보기엔 이미 늦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르기도 했지만 무의미하기도 했다. 아빠가 멀쩡한 직장인이었든 꽃뱀이었든, 이해원은 재수 없는 놈의 딸년이니까. 그렇게 굳어졌다.
처음엔 매일 잠들기 전 아빠를 떠올리며 잠들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아빠 생각이 나지 않아 미안했던 마음도 희미해졌다. 스스로를 불쌍히 여길 여유도, 미워할 여유도 없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할머니, 엄마, 종종 방문하는 다른 식구들의 눈치를 살피기도 급급했다.
나를 맡는 문제로 할머니와 엄마는 크게 다퉜다. 고성이 오가기도 했고, 비밀을 나누듯 낮게 속닥이기도 했다.
“뭐 한다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의 새끼를 키워 주고 있어!”
할머니의 노성이 문밖으로 쩌렁쩌렁 울릴 때 이소원은 매우 고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연이 끊어지려나 싶어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나도 같이 살기로 했다는 말에는 줄곧 싱글거리던 낯이 차갑게 굳었다.
말 그대로 천애고아가 됐지만 어느 정도는 안심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엄마가 나를 맡는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엄마는 다른 사람이 됐다. 이소원의 부당한 괴롭힘에 내 편을 들어주던 엄마는 사라졌다. 그것도 한순간에.
본가로 들어오고 나서 엄마는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불러도 대답하는 일이 드물어서 처음엔 나를 무시하는 조건으로 이 집에 데려오기로 할머니와 약속한 걸까, 하는 의문까지 들 정도였다. 그에 따른 해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냥 방치당하는 내가 있었다.
나를 향한 제 엄마의 냉대에 이소원은 점점 기세등등해졌다. 반대로 나는 점점 움츠러들었다. 좀처럼 기를 펴지 못하고 납작해진 자아로 사는 건 버거운 일이다. 혀 차는 짧은소리에도 위축돼 벌렁거리는 심장을 갖고서는.
폐마저 움츠러들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땐 으레 생각했다. 그냥 이대로 계속 쪼그라들어서 아주 자그마한 점이 되면 좋겠다고. 티끌이 되어 그대로 사라졌으면 하고.
어차피 하찮은 건 마찬가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