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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과-4화 (4/77)

4화

하지만 좀처럼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해준이 찌른 부분이 아파서 자꾸만 부인하고 싶었다. 초등학교 입학부터 지금까지 생활기록부에 빠지지 않는 담임의 평가라도 읊어 가면서.

학업 우수. 교우관계 원만.

가까스로 미숙한 충동을 억누른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진짜 학창 시절은 성적표나 생활기록부로 설명될 수 없으며, 길고 지루한 수업 시간이 아닌 10분의 쉬는 시간에 농축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정해준의 말대로 나는 친구가 없다. 그런데 그러는 저는? 누구한테 뭐라 할 처지가 되나?

“너도 친구 없으면서.”

톡 쏘아붙이고 나니 유치한 공격이었다. 전학 온 지 고작 한 달째인 정해준한테 친구 운운이라니.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을 뱉고 민망함을 이기지 못해 입술을 꾹 다물었다. 홧홧할 정도로 달아오른 귀에 즐거움에 젖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무슨 생각 하나 했더니.”

“…….”

“나 있는데, 친구.”

“그래?”

“여기. 너 있잖아.”

“…….”

이건 반칙이다. 이렇게 갑자기 허를 찌르고 들어오는 건.

말문이 막히기도 했지만, 이번에야말로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우산은 너 주려던 거 맞아. 네 거 해. 네가 들기에 좀 큰 감은 있지만.”

“…….”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변해서, 싱글거리는 정해준과 겨우 눈을 마주치는 게 전부였다.

***

우산은 무사히 주인 손으로 돌아갔다. 정해준은 한사코 거절했지만 나는 우산을 억지로 떠안기다시피 했다. 우산을 빌려준 보답으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내민 문화상품권을 꺼내 앞뒤로 살펴보던 정해준이 문득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이거.”

“왜.”

검지로 쿡 찍은 부분을 확인하곤 뺨이 달아올랐다. 무심코 얼굴에 댄 손등에 뜨끈뜨끈한 열기가 전달됐다. 정해준이 가리킨 부분에 학교 낙인이 찍혀 있었다. 무슨 선물 돌려막기도 아니고. 성의를 표시하려던 게 오히려 성의 없어 보일 게 뻔했다.

“그게.”

무어라 변명하려다 멈칫했다. 굳이 내 상황을 설명해야 하나? 실은 이러저러해서 나한텐 현금이 없다고. 그러니 이게 최선이라고. 구구절절, 구질구질. 정해준에게 그런 너절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재수가 없었으면 없었지.

“싫으면 내놔. 상품권이 다 똑같지.”

“싫은 건 아니고.”

도로 가져오려 하자 잽싸게 상품권을 앗아간 정해준이 실실 웃으며 그것을 상의 호주머니에 곱게 접어 넣었다.

“오늘은 잘 익은 사과 같네.”

“뭐?”

“너한테서 사과 냄새나. 풋사과 냄새.”

그런 냄새가 난다고? 처음 듣는 얘기에 어찌 반응할지 모르고 눈만 깜박였다. 조금은 대화에 감이 잡히기도 했다. 약간만 방심해도 정해준과의 대화는 종잡을 수 없는 쪽으로 튀게 된다고.

“재밌다.”

“뭐가.”

일반적인 대화의 흐름은 반쯤 포기한 채 건성으로 대꾸하다가 갑자기 훅 기울인 상체에 놀라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정해준의 우뚝한 콧대가 뺨에 닿을 듯 가까워져 있었다. 귓바퀴를 간질이는 숨결을 의식하자 목덜미의 솜털이 쭈뼛 섰다. 동시에 심장이 아플 정도로 세차게 뛰었다.

“빨갛게 익어도 풋사과 냄새는 똑같네.”

“뭐라는 거야…….”

다행히도 완전히 얼어붙었던 순간을 들키진 않은 것 같았다. 정해준의 어깨를 아무렇지 않게 밀어 내고 뚫어 버릴 것처럼 눈으로 책을 팠다.

당연히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그래도 눈 둘 데가 있는 게 어디냐며 위안 삼았다. 동시에 약간 초조해지기도 했다. 곧 기말고사인데 만족할 만한 목표량을 채우지 못해서.

이 지점에서 정해준 탓을 안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정해준의 존재는 꽤 신경이 쓰였다. 자고 있을 때나, 깨어 있을 때나.

어느새 반 아이들의 관심을 두루 섭렵해 쉬는 시간마다 바로 옆자리가 시끌벅적한 것도 방해 요인이 됐다. 무슨 사랑방도 아니고, 종 치면 우르르 맨 뒷자리로 몰려오는 애들을 피해 복도로 나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넌…….”

시험공부 안 하냐고 묻기 위해 옆을 돌아본 게 잘못이었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드러난 가슴팍에 본래 쳐다본 목적을 잊어버렸다. 맨살이 이 정도로 선정적이었나? 아니, 애초에 다른 사람의 벗은 몸을 볼 일이 있었나?

까마득한 기억을 더듬다가 불과 몇 시간 전에도 체육 시간 후에 남자애들이 열기를 못 이겨 한껏 앞섶을 젖히고 부채질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거슬려?”

자기 몸에 못 박힌 두 눈을 눈치챘는지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정해준이 피식 웃었다. 얼른 아닌 척했지만, 이미 은밀한 시선을 들킨 뒤였다. 정해준과 있으면 망신살이 뻗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적절한 핑계를 찾았다.

“잠그는 게 좋을걸. 잡개한테 걸려서 좋을 거 없잖아.”

“잡개?”

“……담임 별명이야.”

아직 모르나? 벌써 수십 번은 들었을 텐데. 성질 더러운 담임은 뭔가 기분 상할 일이 생기면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던져서 잡개란 별명이 붙었다. 학생들끼리는 그러고도 잘리지 않는 게 신기하다며 숙덕댔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는 노릇이었다.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진다고는 하지만 대개 허공을 날아가는 건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교과서니까. 맞는 순간 기분은 나쁘지만 크게 타격은 없는.

언젠가 교과서 대신 출석부를 던졌다가 아연하게 질렸던 담임의 표정을 떠올리며 아무리 더러운 성질머리라도 조절은 되는 모양이라고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데 의외의 말이 나직하게 흘러들었다.

“너는 그런 말 안 하게 생겨서.”

그런 말 하게 생긴 얼굴은 어떻게 생겨 먹은 걸까. 아리송한 표정으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정해준이 풀어진 단추를 차례로 끼우며 설명했다.

“단추를 한 개 풀면 지성, 두 개 풀면 야성.”

별 해괴한 소릴 다 듣겠다 싶어 쳐다보자 마지막 단추를 채우며 정해준이 질문했다.

“세 개 풀면 무슨 뜻이게?”

“모르겠어.”

“실성.”

참 실없다 싶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 했다. 겨우 볼을 실룩이는 걸로 끝났지만, 이상하게 정해준에게 진 느낌이라 시무룩해졌다. 한편으론 궁금했다.

“그럼, 단추 다 잠근 건?”

이건 예상하지 못했겠지? 수수께끼 내기를 한 것도 아닌데 왜 의기양양한 기분이 드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하지만 정해준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단추 다 잠그면 목 졸리겠성.”

“뭐라고?”

이번엔 참을 새도 없이 풋, 웃음이 터졌다. 이내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긴 했지만. 언제 웃었냐는 듯 새침을 떼고 앉아 있자니 어째 곁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뭔가 싶어 바라보니 정해준의 얼굴에 늘 걸려 있던 웃음기가 싹 지워져 있었다.

뚫어져라 박힌 시선에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손등으로 입가를 쓸어 봤지만 걸리는 건 없었다.

“어……, 왜?”

“아니다.”

다시 은은한 미소가 띄워졌지만 어색한 느낌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얼른 수업 종이나 울렸으면.

빌자마자 마치 응답이라도 내려 주는 것처럼 수업 종이 울려 퍼지며 소란을 잠재웠다. 다음 쉬는 시간에는 무조건 밖에 나가야지. 10분 내내 교실로 들어오지 않을 거야. 이상한 각오를 하며 담임 과목의 교과서를 꺼내 펼쳤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쉬는 시간에 밖에 나간 건 대단한 실책이었다. 종이 치기도 전에 한 발을 책상 밖으로 내놓고 있던 정해준 무리가 농구공을 들고 번개같이 튀어 나갔을 때 그냥 교실에 남아 있길 선택했어야 했는데, 마치 따라 나간 꼴이 되어 버린 데다가 이소원까지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짝꿍! 이해원! 뭐 해! 박수!”

딱히 구경하고 있던 것도 아닌데 연속으로 골을 넣은 정해준이 흥분에 겨워 고함을 쳐 댔다. 커다란 목소리에 근처 벤치에 있던 내게 시선이 쏠린 건 당연했다. 눈이 마주치고도 알은체하지 않던 이소원과는 정반대되는 행동이었다.

얼결에 손뼉을 치다가 열없이 그만뒀다. 아무래도 도로 들어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돌아선 순간, 뾰족한 눈으로 째려보고 있는 이소원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집에 가면 꽤 시달리겠구나.’

내 방으로 쳐들어와 뭐라고 따져 댈 이소원이 눈에 선해서, 이제 겨우 정오인데 잠들기 직전처럼 피곤해졌다.

***

“야! 이해원!”

예상대로 귀가하기 무섭게 이소원이 들러붙었다. 내가 돌아오기만을 벼르고 있던 것처럼 내 침대에 앉아 있는 대로 얼굴을 구기고 있는 이소원을 보자 숨이 턱 막혔다. 이런 표정일 때 이소원이 얼마나 못되게 구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작부터 비꼼 일색이었다.

“박수!”

“뭐 하는 거야.”

“왜? 네 대단하신 인성에 박수 보내는 건데?”

크게 외치며 얼굴 바로 앞에 대고 조롱하듯 박수를 크게 짝짝 친 이소원이 사납게 눈을 치떴다.

“넌 꼭 이런 식이더라? 뒤로 호박씨 까는 거, 얼마나 재수 없는지 모르지?”

“뒤로 호박씨 깐 적 없어.”

“웃기시네. 내가 뻔히 정해준 짝사랑하는 거 알면서 꼬리 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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