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모르겠는데.”
“아 왜 몰라? 딱 봤을 때 느껴지는 감이 있잖아!”
이소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억지를 부렸다. 오늘 처음 본 사람한테 호구조사라도 하길 바라는 건지, 설령 요구한다 해도 들어줄 마음도 없지만. 더 재촉하기 전에 그냥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생각보다 더 빈약한 내 정보력에 이소원의 낯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찌 됐든 이 건을 끝으로 더 들려 줄 얘기는 없었다. 이소원도 예상한 바였는지 정해준에 대해 더 묻지는 않았다. 대신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를 술술 풀어놓았다. 누구에게라도, 설령 그 대상이 제가 미워해 마지않는 나라도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흥분이 이소원이 뱉어 내는 음절마다 배어 있었다.
“대상 병원 알지? 거기 병원장 아들이래. 그동안 미국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의대 가서 병원 물려받으려고 들어왔다나 봐.”
“그렇구나.”
무어라고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소원이 친한 친구 대하듯 나한테까지 스스럼없이 털어놓는 이 상황 때문인지, 중요한 기밀처럼 속살거리는 게 정해준의 신변잡기여서인지.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이는 게 전부인 내 반응에도 이소원의 수다는 그칠 줄 몰랐다.
“친가 외가 다 어마어마한 부자인데 양쪽 통틀어서 손자는 정해준 하나뿐이래. 완전 금 탯줄, 아니지. 다이아 탯줄 아니야?”
“그러네.”
“참, 성격은 어떤데? 얘기 나눠 봤어?”
적극적인 이소원의 태도에 갑자기 현관에 세워 둔 장우산이 짐스럽게 다가왔다. 정해준의 짝이 나라는 사실은 나서서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별로.”
성격이 별로라는 뜻이었는데, 얘기를 별로 나누지 못했다고 받아들인 이소원은 내게서 쉽게 흥미를 거두었다. 앞으로 잘 관찰해 뒀다가 정해준 얘기를 자주 들려 달라는 강요와 함께.
“언니 좋다는 게 이럴 때 써먹는 말 아니겠어?”
이소원과 나 사이에 자매의 정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전해 줄 말이란 시시콜콜한 일과 정도가 전부일 테니.
***
정해준은 숙면을 취하기 위해 학교에 오는 사람처럼 틈만 나면 엎어져 잠을 잤다. 좀 더 조용한 곳을 찾아 자리를 옮기기도 했는데 하필 내가 주로 찾는 도서관이었다. 교실보다 에어컨 온도가 낮고 사람이 없어서 좋다는 호평까지 넉살 좋게 곁들여가며 착실하게 출입했다.
못마땅했지만 도서관이 학교의 다른 어느 곳보다 쾌적하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위에 찜통 같은 복도와 계단을 지나 도서관 문을 여는 순간 이마에 닿는 서늘한 바람은 천국에서 불어오는 것 같았으니까. 자주 도서관을 찾는다고 해서 내게 정해준의 출입을 제한할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짝꿍이라는 이유로 넓디넓은 다른 좌석들을 놔두고 굳이 내 옆에서 엎드려 자는 건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잖아도 정해준이 짝인 걸 왜 숨겼냐며 이소원에게 들볶인 후였다.
초반에는 정해준을 구경하러 교실을 찾아오는 여자애들이 적지 않았으므로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 내가 그 옆자리에 앉는다는 걸 이소원이 언제 알게 돼도 알 일이라고.
한데 의외로 수줍음을 타는지 이소원의 방문은 다른 애들보다 늦어졌다.
어쩌면 몇 번 찾아왔는데 운 좋게 나나 정해준이 나란히 자리에 없었는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내가 정해준의 짝이라는 걸 알게 된 이소원은 불같이 화를 내며 발을 굴러댔다.
“이해원 넌 항상 이런 식이야. 아, 진짜 재수 없어! 야, 이해원. 내가 웃겨? 어? 사람을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실컷 화풀이하고 난 후엔 이 상황을 이용해 먹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는지 갑자기 돌변해 사근거렸다.
“알았어. 네가 원해서 짝꿍 된 것도 아니니까 이번 일은 내가 넘어가 줄게. 대신 무슨 일 있었는지 나한테 다 얘기해 줘야 돼? 응?”
그러곤 영 내 반응이 탐탁지 않은지 저녁마다 들러붙어 정해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곤 했다. 친하게 지내는 여자애는 없는지, 즐겨듣는 음악은 무엇인지, 등등. 가끔 정해준이 미국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보라는 요구도 했다.
그런 걸 물을 정도로 친하지 않다고 답하자, 이 기회에 친해지라고 제안했다가 그건 좀 아닌 것 같았지 그저 제가 묻는 말에나 성실히 답하라고 을러대듯 눈알을 굴렸다.
집요한 이소원의 추궁에도 정해준에 대해 해 줄 얘기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살갑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종일 깨어 있는 애들과도 몇 마디 나누기가 힘든데 대부분 엎드려 자는 정해준과 무슨 수로 얘기를 주고받는단 말인가.
그래서 다소 뾰족하게 튀어 나간 말은 한 달 만의 첫 대화나 다름이 없었다.
“대체 시차 적응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데?”
그 언젠가처럼 고개만 슥 돌린 정해준이 접힌 팔 사이로 얼굴을 반만 내놓고 눈웃음을 살살 쳤다. 장난기 그득한 눈빛이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정해준이 뭐라고 변명하든 이미 반박할 거리를 다 찾은 후였다. 보통 일주일 정도면 충분히 시차에 적응한다는 사실부터, 전 세계를 돌며 경기를 뛰는 축구 선수나 촬영이나 공연차 해외를 자주 방문하는 연예인들의 인터뷰까지. 증거는 차고 넘쳤다.
“자는 건 넌데 계속 깨우라고 지적받는 건 나잖아. 성가셔.”
“아아.”
한숨인지 대꾸인지 모를 소리에 이 대화의 끝이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란 걸 예감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정해준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해 대면 바로 찾아 놓은 자료들을 코앞에 들이밀 작정이었으니까.
대답을 기다리는 내게 상체를 비스듬히 세워 턱을 괸 정해준이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뭐.”
“우산은 언제 돌려줄 거야?”
“그건…….”
이런 건 예상 질문에 없었는데. 당황해 머뭇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아무 말이나 뱉고 말았다.
“짝꿍 된 기념이라 하지 않았어?”
내가 생각해도 너무 뻔뻔한 답이라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정해준이 베푼 호의를 그대로 꿀꺽하겠다는 소리와 다름없지 않은가.
원래는 고마움의 표시로 작은 선물이라도 준비해 돌려주려 했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용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돈을 쓰려면 엄마 카드를 써야 했고, 사용 내역이 꼬박꼬박 전송되는 게 눈치 보여 평소에도 교재나 학용품 외에는 쓰지 않는 형편이었다.
하필 모아 두었던 문화상품권도 정해준이 전학 오기 직전, 문제집을 사느라 모두 써 버린 후였다. 그래도 며칠만 있으면 교내 영어 신문에 게재한 원고료가 나올 예정이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해준이 먼저 이렇게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더욱이 한 달이나 지나서 잊고 있을 줄 알았는데.
“가지란 말은 안 했는데.”
“……알아.”
그 말대로 짝꿍 된 기념이라고만 했지 가지란 말은 없었다. 축 늘어져 살갗에 들러붙던 교복, 더위와 습기가 무겁게 뒤엉킨 공기, 시끄럽게 사방을 때리던 빗방울. 아직도 선명한 그날의 기억을 아무리 뒤져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빌려준단 말도 안 했잖아.”
억지를 부렸다.
왜 이러지. 나답지 않게. 그깟 우산이 뭐라고. 연달아 정해준에게 적반하장으로 굴고 나니 달아오른 뺨의 열기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더 부끄러운 건 정해준은 순순히 인정했다는 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랬네. 내 잘못이다. 그치?”
상대가 이렇게 나오는데 언제까지 염치없이 뻗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뒤늦게 잘못을 시인했다. 못난 내 모습을 심히 창피해하며.
“그게 아니라, 작은 성의 표시라도 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좀 그래서.”
“성의.”
또박또박 두 마디를 따라 한 정해준이 예의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할게.”
“그래.”
엉겁결에 따라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뒤늦게 얼굴을 굳혔다. 이게 아닌데. 원래 하려던 얘기는 어디로 가고 완벽하게 정해준의 페이스에 휘말린 것 같아 약간 분한 마음이 들었다. 생트집이라도 잡고 싶은 마당에 마침 좋은 구실이 생각났다.
“그리고.”
“오늘은 말 많이 하네.”
“……다음부터는 도서관에서 따로 앉았으면 좋겠어.”
“아.”
재미있는 얘기도 아닌데 또 싱글거리는 걸 보니 맥이 빠졌다. 혼자만 벼르고 긴장했던 게 바보처럼 느껴져서. 그런데 이어진 정해준의 말은 다시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친구가 없지.”
“뭐, 뭐?”
“밥도 혼자 먹고, 화장실도 혼자 가고.”
“화장실은 너도 혼자 가잖아.”
“보고 있었어?”
난데없이 서로 화장실 동행인 여부에 대해 따지고 있는 이 상황이 황당해서 말문이 다 막혔다. 게다가 보고 있었냐니. 내가 자기한테 관심이라도 가진 양 구는 게 어이없어 ‘누가?’하고 되받아치려다가 ‘네가’라는 답이 돌아올 게 뻔해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너 친구 없어서 내가 대신 와 준 거라고.”
“……필요 없어.”
“그렇게 주위 사람 다 쳐내면 나중엔 아무도 안 남는다.”
나에 대해 뭘 안다고. 훈수까지 두는 꼴을 보아하니 더 말을 섞어 봤자 기운만 빼겠다 싶다. 이럴 땐 무시하는 게 상책이었다. 길 가다 미친개와 맞닥뜨리면 피하는 게 현명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