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점심시간이 지나서 정해준은 다시 엎드려 잠을 청했다. 오후에는 수학처럼 깐깐한 선생이 없었기에 그대로 두었다. 설사 깐깐한 선생이 있었더라도 깨우진 않았겠지만.
선의를 베풀었다 엿 먹는 상황을 되풀이하긴 싫었다. 그래서 종례 시간이 되어서도 그냥 내버려 두었는데, 그게 담임의 심기를 거슬렀나 보다.
“정해준, 이게 전학 첫날부터 빠져 가지고.”
담임의 호통에 느릿하게 일어난 정해준이 넉살 좋게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돼서요.”
다소 건방진 태도였기에 무언가 곧 날아오지 않을까, 긴장했다. 바로 앞 시간이 문학이었는데, 지문 때문에 문학책은 꽤 두꺼운 편이었다. 혹시라도 담임이 주변에 있던 그걸 집어 던지면 불상사로 이어질 테니 사릴 수 있는 대로 몸을 사리는 게 현명했다. 하지만 불똥은 엉뚱한 데로 튀었다. 바로 옆자리인 내게.
“이해원. 너도 인마, 옆자린데 깨우지 않고. 몰인정하기는.”
쯧.
혀 차는 소리에 못마땅한 기색이 다분했다. 그걸로 꾸중은 끝이었지만 몹시도 피로해졌다. 하교 시간이 되어서만은 아니었다. 타인의 미움을 받아 내는 게 그만한 심력을 요구해서였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목 끝까지 찰랑찰랑 차오른 서글픔은 작은 설움 한 방울에도 흘러넘칠 것처럼 아슬아슬해 허겁지겁 삼키기 버겁다.
같은 상황에 자주 노출되면 무뎌진다는데, 어째서 미움받는 건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는 걸까. 이미 박힌 가시 옆에 또 가시가 박힌 것처럼, 늘 새로 찔린 듯 아프다.
괴로워하는 것도 견디는 것도 내 몫인 걸 알기에 작게 한숨을 흘리며 가방을 챙겼다. 아직도 빗물이 배어 있는 운동화에 발을 억지로 집어넣고 나섰는데 등교할 땐 잘만 쓰고 왔던 우산이 펴지지 않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우산살이 망가져 있었다. 우산대도 휘어져 있었고. 점심시간에 급식실에 가지 않고 교실에 남아 있던 무리가 책상을 밀어 놓고 공을 찼는데 그때 망가진 듯했다.
“끝내주는 하루네.”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를 쳐다보며 불만을 뱉었다. 나란히 서 있던 다른 아이는 휴대전화만 보고 있었다. 액정이 반짝여 반사적으로 눈길이 갔다.
엄마.
두 글자에 괜히 가슴이 서늘해졌다. 자동적으로 머릿속에 엄마의 휴대전화 번호가 떠오르긴 했다. 데려와 달라고 한들 거절당할 걸 알면서도.
“…….”
거절이라도 좋으니 무어라 말이라도 해 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어떤 말을 꺼내든 엄마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할 테니. 아빠의 죽음 이후로 엄마는 웃지 않는 사람이 됐다. 말 없는 사람이 됐다.
내게만.
침묵은 외면의 동음이의어라는 걸 엄마로 인해 알게 됐다. 엄마의 꾹 다물린 입술을 떠올리자 숨이 막혔다. 부러 긴 숨을 뱉어 내며 옆을 보자 그 애의 얼굴엔 서서히 안도감이 번지고 있었다.
“응, 빨리 와야 해?”
응석 부리며 통화를 마치는 여자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 처지를 떠올리곤 누군가 빗길을 뚫고 나를 마중 나와 주는 아름다운 상황 같은 건 바로 체념했다.
‘어쩌지.’
책가방으로 머리를 가리는 방법도 떠올려 보았지만, 가방도 젖고 책도 젖고 학용품도 젖을 게 분명했다. 흠뻑 젖어 못 쓰게 되는 대신 사물함에 넣어 두는 게 낫겠다 싶어 몸을 돌렸다가 누군가의 가슴팍에 이마를 세게 박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즉각 사과하자 예의 느긋하나 짓궂은 목소리가 귓가로 떨어졌다.
“이런 걸로 죄송할 것까진 없고.”
“아…….”
정해준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튼튼한 장우산을 든 채 운동장 밖을 가리키며 정해준이 선선히 제안했다.
“같이 타고 갈래?”
“어?”
“정문에 차 대기하고 있거든. 집까지 데려다줄게.”
“아니, 사양할게.”
혹시라도 정해준이 왜냐고 물으면, 수학 시간 전에도 자던 너를 깨워 주려다가 오해나 받지 않았느냐고 더는 난처해지고 싶지 않다고 대답해 주려고 했는데 정해준은 흠, 하고 가벼운 신음만 냈다. 손에 묵직한 양감이 느껴진 건 바로 다음이었다.
“짝꿍 된 기념.”
“어, 어?”
채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정해준이 빗길로 뛰어들었다. 빠르게 멀어지는 검은 그림자를 멍하니 눈으로 좇다가 받은 우산을 천천히 펼쳐 들었다. 크고 짱짱한 우산 속으론 아무리 세찬 비라도 감히 들이칠 성싶지 않았다.
***
“다녀왔습니다.”
허공에 대고 인사하는 격이지만, 빼놓지 않고 공손하게 머리까지 숙였다. 인기척에 김 여사님이 나와 아는 체를 했다.
“비 많이 왔지? 출출할 텐데 어서 씻고 식탁으로 와. 단팥죽 끓여 놨어.”
“네, 곧 갈게요.”
주방에서 나는 엄마와 할머니의 목소리를 의식하며 운동화를 비스듬히 세워 놓고 곧장 방으로 향했다. 내 방이 현관 바로 옆인 게 이럴 땐 편했다. 다른 식구들이 오가는 소리에 예민해지긴 하더라도…….
샤워를 마치고 식탁으로 가니 어른들은 어디 가고 이소원만 부루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숟가락을 세워 팥죽 그릇 모서리를 툭툭 치며 이소원이 볼멘소릴 해 댔다.
“아줌마는 센스가 없어. 비 오는 날은 부침개 아니야? 팥죽이 뭐야, 팥죽이? 아, 진짜. 먹기 싫어. 기분 완전 잡쳤다고.”
“아이, 미안해, 소원 학생. 오늘은 회장님이 팥죽을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그럼 팥죽도 하고 부침개도 하고 다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게으르게 하나만 하고. 할머니 비위는 맞추면서 나는 무시한 거잖아.”
“무시는, 아이고, 큰일 날 소리. 얼른 부침개 부쳐 올 테니까, 응? 무슨 부침개 해 줄까?”
“음, 오징어 넣은 김치부침개. 빨리 해야 돼? 빨리, 빨리빨리!”
이소원의 재촉에 김 여사님이 허둥지둥 움직였다. 김 여사님 큰아들이 얼마 전에 대학을 졸업했다고 들었는데. 자식뻘보다 훨씬 어린 이소원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니 안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김 여사님의 편을 들거나 이소원에게 한 소리 했다간 안 하느니만 못한 결말만 초래한다는 걸 알기에 묵묵히 수저를 놀려 내 몫의 팥죽을 비웠다. 새알심이 목구멍 한가운데 찐득하게 들러붙은 것만 같은 찝찝함을 느끼며.
이소원이 식탁에 앉아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하는 동안, 손 빠른 김 여사님은 재빨리 김치전 두 장을 부쳐 왔다. 한 장은 이소원 앞에, 한 장은 내 앞에. 젓가락과 간장 종지를 놓아주며 김 여사님이 상냥하게 권했다.
“해원 학생도 좀 먹어. 바삭하게 잘 부쳐졌네.”
“전 괜찮아요. 충분히 배불러요.”
독한 매니큐어 냄새를 참아 가며 팥죽 한 그릇을 비운 것만도 충분히 고역이었다. 김 여사님을 함부로 대하는 이소원을 묵묵히 보아 넘기는 것도 고약한 일이었고. 역시나 빈 그릇을 정리해 막 자리를 뜨려는데 신경질적인 이소원의 징징거림이 들려왔다.
“아 씨, 아줌마는 눈치가 없어? 손톱 다 안 말랐는데 어떻게 먹으라고 이걸 지금 부쳐 와?”
“소원 학생 배고픈 것 같아서 빨리했는데……. 정 그러면 식혔다 먹을까?”
“부침개는 식으면 맛없잖아. 잠깐, 이거 나 일부러 엿 먹이는 거 맞지? 부침개 새로 해 오랬다고?”
“아니, 아까부터 자꾸……,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럼 내가 먹여 줄까? 자, 아.”
“후후 불어 줘야지. 입 다 데라고?”
“자, 후, 후!”
“아!”
냉큼 벌린 이소원의 입으로 부침개 한 조각이 쏘옥 들어가 얼마 안 있어 자취를 감췄다. 제비 새끼처럼 다시 쩍 벌어진 이소원의 입에 김 여사님이 귀엽다며 호호 웃었다. 조금 전 이소원이 못되게 굴었던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경직됐던 분위기가 풀린 건 다행이지만, 어쩔 수 없이 씁쓸함을 느끼며 방으로 돌아왔다.
‘피곤해.’
이제 좀 쉬어 볼까 했는데 침대에 등이 닿자마자 이소원이 방으로 들이닥쳤다. 그새 손톱의 매니큐어가 다 말랐는지 한 손에는 젓가락, 남은 한 손에 부침개 접시를 든 채였다. 이런 식의 방문이 잦은 편은 아니었기에 떨떠름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정해준 너네 반이라며?”
“어? 아…….”
한 박자 늦게 오늘 새로 입력된 이름이 뚜렷하게 고막에 박혀 들었다. 별개로 종일 엎드려 잠만 청한 정해준이 하루 만에 다른 학년에 퍼질 정도로 유명 인사가 된 것도, 이소원이 먼저 내게 말을 걸어온 것도, 얼떨떨할 정도로 놀라워 한동안 눈만 깜박였다.
“그런데 왜?”
“얘기 좀 해 줘. 어떤데? 눈알 튀어나오게 잘생겼다며.”
“그냥…….”
확실히 잘생기긴 했다. 모르긴 몰라도 웬만큼 외모로 유명한 연예인 사이에 두어도 확 튀지 않을까. 별개로 그만한 외양을 묘사할 능력이 내게 없었다. 꼭 평가하는 것 같아서 섣불리 입이 떼어지지 않기도 했고. 그래서 멋쩍게 웃으며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냥 눈, 코, 입 다 달려 있던데.”
“뭐? 참 나, 야! 그런 말은 나도 하겠다.”
짜증을 댕댕 부리던 이소원이 다시 물었다. 신경질 내 봤자 얻을 게 없다는 판단을 빠르게 내린 듯했다. 그보다는 제가 원하는 정보를 구체적으로 캐묻는 쪽이 훨씬 얻을 것이 많다고.
“목소리는? 목소리도 좋다던데. 사실이야?”
“그런, 것 같아.”
듣기 좋게 울리던 중저음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좋은데? 어? 아, 쫌! 자세히 말해 보라고!”
눈으로 본 걸 묘사하는 데도 한계가 있는데 음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흉내 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멀뚱히 눈만 깜박이자 하, 씹, 욕설을 씹은 이소원은 정해준의 목소리에 대해 듣는 건 포기하고 빠르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됐고, 그럼 여자 친구는? 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