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늑대 신랑
환의 예고대로 눈은 정말 뒤집어지게 쌓이기 시작했다. 이젠 마당을 건너 창고로 가려고 해도 설피를 주워 신어야 할 판이었다. 몇 발자국 걷기만 해도 무릎까지 눈 속으로 푹푹 파묻혔다.
완전한 한겨울이었다.
다행히 연은 그 겨울, 추위에도 굶주림에도 시달리지 않았다.
연이 행여나 배고플세라 다칠세라, 몇 발자국도 되지 않는 거리에 그녀를 보필하는 늑대가 셋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완전히 환 무리의 머리 늑대 취급을 받는 연은 어딜 가나 보호받았다. 심지어 이쪽 방에서 저쪽 방 가는데도 누군가 따라붙었다. 진팔도 군길도, 그녀를 환만큼이나 극성스럽게 모셨다. 아주 말로 다 못 할 수준이었다.
뒷간까지도 따라붙는 환을 보고 연이 심통을 내었다.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환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허허실실 웃었다.
“그야 연 님께서….”
말을 못 잇는 사내가 수상쩍어 연은 꼬치꼬치 캐물었다.
“제가 뭐요?”
“그야….”
환의 시선이 제 아랫배로 향했다. 연은 발정기 직후의 일을 떠올리며 그다음 말을 유추해냈다.
연은 뾰로통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 뒷간 잘 갑니다.”
혹시나 지나치게 격했던 관계로 인해 제 생리 현상에 문제가 생겼을까 봐 환이 저러는 것이라 착각했다.
그 말에 환이 입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이는 게 보였다.
왜 저러시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표정을 관리한 환이 손을 내리고 진지한 목소리로 연의 어깨를 쥐었다.
“계속 그렇게만 귀엽게 있어 주세요.”
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연은 눈썹을 찌푸린 채 불만을 표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까지 저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던 사내가 얄궂어 보이던 차였다.
아침만 해도 야차같이 굴던 사내지 않나.
문득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연은 한쪽 다리를 완전히 위로 젖혀 줄줄 흐르는 교합지가 다 보이도록 뒤에서부터 그에게 박히고 있었다.
“아, 가, 갈 것… 갈 것 같아…!”
“가세요. 대신 이번엔 흘리지 말고 다 드시깁니다?”
“이, 이미 먹을 만큼 먹었…! 이 나쁘…!”
미친 듯이 수축하며 말도 잇지 못하는 여체의 고개가 달랑달랑 흔들릴 지경까지 안에 깊숙이 품게 하고 또 품게 한다. 엉치골을 타고 흐르는 액 때문에 첩첩 소리가 날 지경까지 지독히 힘주어 당겨댄다.
“안쪽이 존나게 씹어대서 미친 듯이 좋아. 하, 연 님. 진짜 제가 처음 맞아요?”
“처, 처음 마, 맞…! 흡!”
“거짓말.”
“너야말로…!”
“너어? 서방님께 너가 뭡니까. 하씨, 귀여워. 더 예뻐해 줘야겠네.”
“아아, 학…! 미워 죽겠… 흡…!”
“응, 나도 좋아요.”
벌을 주듯 행위가 더 격해졌다. 그러다가도 정말 연이 숨이 넘어갈 듯싶으면 금방 허리를 뒤로 물렸다. 어디까지 가도 되고 안 되는지를 기가 막히게 잘 알아서 더 얄미웠다. 아주 사람 괴롭히는 것에 도가 튼 수인이다 싶었다.
불과 몇 시간도 안 된 일을 생각하니 연은 그의 앞에서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게 되는 것이었다.
숫총각은 건드리는 게 아니라더니.
은근슬쩍 허리를 붙여오는 환에 연은 그의 가슴팍을 확 밀쳤다.
“따라오지 마세요. 이번엔.”
이러다 정말 뒷간께에서도 그 짓 하자고 덤빌까 봐 무서웠다. 늑대 일은 모르는 거니까.
“하아, 눈꼬리 새초롬해서 미치겠어요. 이리 와요, 입술 한 번만 빨자.”
동문서답도 이젠 도가 튼 연이었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연은 결국 한숨과 함께 허락했다.
“…두 번은 안 돼요.”
어차피 몸도 마음도 이 사내에게 다 준 거, 몇 번 더 준다고 뭐가 다를까 싶었다. 그러니까 횟수나 좀 조절할 요량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환이 허리를 끌어당겼다.
매번 경험하는 거지만 정말 게걸스럽게도 빨았다. 한입에 다 삼킬 듯 물었다가 다디단 복숭아 빨듯 촘촘거리며 입 안 연구개와 혀를 쓸어 당긴다. 종지엔 입술을 젖 빨듯 쭉쭉 빤다는 표현이 차라리 맞았다. 어쩔 수 없는 숫총각이었다. 정신없이 그녀의 머리통을 쥐고 부술 듯 열정만 가득했다.
“우, 음… 부, 부드럽…! 게…!”
숨 막히겠다며 환의 가슴을 퉁퉁 치고 나서야 행위가 조금 누그러졌다. 환이 입술을 붙인 채로 웃었다.
“이렇…게요?”
“우움…. 응….”
한결 편안해진 입 안에 그의 혀를 물고 빨았다. 연은 두 팔을 들어 올려 그의 목에 감았다.
문득 그들의 이런 모습을 진팔이나 군길이 보면 어찌하나 싶었지만, 그 걱정은 곧 날아가 버렸다. 어차피 한껏 수그린 환의 덩치에 연은 가려 보이지도 않을 터였다.
한참을 서로의 타액을 주고받길 반복하던 두 수인은 천천히 입을 떨어트렸다. 한 번만이라고 선을 그었더니 그 한 번을 지독히도 길게 해버렸다.
저를 내려다보는 환의 눈빛이 어찌나 애틋한지 말도 못 했다. 입맞춤보다 더 떨렸다.
환은 한 손으론 허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론 연의 손을 가져와 꽉 잡았다. 그래놓곤 왜 이렇게 차갑냐 호들갑이었다.
“…밖에 있었으니까 그렇죠.”
연은 제 신랑을 향해 눈을 흘겼다.
애초에 이 밖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입맞춤한 사내가 누구시냐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연의 모자를 더욱 꼭 여며준 환이 이마에 한 번 입 맞췄다. 이젠 거의 습관이 된 것 같았다.
오늘 환은 군길과 함께 떨어진 쌀을 사러 간다고 했다. 장작을 패다 몸살이 나버린 진팔은 작은 방에서 끙끙 앓고 있었다.
“저 이제 뒷간 좀 보내주시죠.”
연은 볼과 코를 발갛게 물들인 채 말했다.
저를 쳐다보는 환이 이러다 아예 저를 호주머니에 넣고 가겠다 싶어 급히 꺼낸 말이었다.
“혼자 두고 간다고 울고 계시면 안 돼요.”
그 말을 하는 환이 더 울상이었다. 누가 누굴 보고 울지 말래. 참 나. 어이가 없어서.
“겨우 반나절이잖아요. 진팔 님도 계시고요.”
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대꾸했다.
“그리고 저 그런 거로 안 울어요.”
무리에서 쫓겨날 뻔했을 때도 눈물 한 방울 아니 흘린 터였다.
물론 그 후에 환이 떠나갈까 봐 눈물 한 바가지 흘리긴 하였으나 그건 불가항력이었다. 아무튼, 그랬다. 연은 지나간 일은 모르는 척했다.
“그래도요. 모르는 사람이 와서 따라오라고 하면 가면 됩니까, 안 됩니까?”
“…….”
“막 약과 사주고 구운 인절미 떡 준다고 하면 따라가실 거잖습니까?”
“…자꾸 그러시면 따라가 버릴 겁니다?”
어이없어하는 연의 눈살 찌푸림에 환이 금세 꼬리를 내렸다. 꼬리도 튀어나오지 않았는데 축 처져 있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아아, 알았어요. 내가 잘못했습니다. 따라가지 마세요. 계속 제 곁에 계세요.”
그러면서 은근슬쩍 다시 입술을 뺨에 비비려고 하기에 연은 냉큼 벗어났다.
“어, 어여 다녀오세요. 이러다가 해 지겠습니다.”
“연 님, 저 좀 한 번만 더 안아주시면 안 될….”
“안 돼요.”
연은 내칠 땐 사내를 확실하게 내쳤다. 정말 저러다 끝도 없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마침 연은 그날 또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신랑의 궁둥이를 토닥토닥하며 보내었다. 직접 보내지 않으면 이렇게 뭉그적거리다가 한나절이 다 지날 게 뻔했다.
“얼른 다녀오세요! 그렇다고 너무 일찍 오진 마시고요!”
그렇게 연은 군길과 함께 어거지로 발걸음을 떼어내는 게 여실히 보이는 환을 배웅했다.
* * *
“탁월한 선택이셨습니다.”
작은 방에서 끙끙 앓고 있던 진팔이 바깥에서 난 소란을 들은 모양이었다. 물을 떠 와 내미는 연에게서 잔을 받아 든 그가 골치 아프단 소리로 얘길 꺼냈다.
“기왕 저희 형님의 아내가 되신 거, 제가 형님 다루는 법을 잘 알려드리겠습니다.”
형님을 다루는 법?
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뭘 알려주려나 싶었다. 과거에 워낙 당한 일이 많은 터라 좋은 쪽으론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연은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진팔 님이 환 님의 무리에 더 오래 계셨으니 텃세를 부리시려나 보다.’
어디 한번 부려보시라, 하는 심정으로 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크흐, 하고 물을 단번에 들이켠 진팔이 가부좌를 틀곤 진지한 태도로 말을 꺼냈다.
“일단 형수님은 저희 형님을 어떤 분이라 생각하십니까?”
연은 진팔이 알고 보니 환보다 연치가 적은 형제란 사실을 들었다. 무엇보다 놀랐던 건 군길이 그들 사이에서 막내라는 점이었다. 연은 그날로 군길에게 사과했다. 다행히 군길이 충분히 이해한다며 손을 내저어 사태는 훈훈하게 마무리 지어졌었다.
“환 님이요?”
연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대답했다.
단어를 신중히 골랐다.
“느긋하고, 태연하시고, 다정하시고, 아는 것도 많으시고….”
그런데 진팔의 표정이 이상해져서 연은 말을 멈췄다.
‘저 표정은….’
경악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마치 저를 미친 여자 보는 듯한….
도리질을 하던 진팔이 입을 떡 벌리곤 되물었다.
“환 형님 말씀입니다. 환, 환. 환이 형님이요. 지금 우리가 같은 사람 얘길 하는 게 맞는 거지요?”
“네, 네에…. 맞는데요. 환 님이요.”
연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연이 아는 환은 그랬다. 느긋하면서도 재주가 좋고 태연자약한 듯하면서도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사내.
멋있는 제 신랑.
그 생각을 하니 저도 참 염치없다 싶어 연은 괜스레 볼을 붉혔다.
신혼이니까, 뭐. 진팔도 이해해 주겠지.
진팔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팔짱을 끼었다. 일단 계속하라는 듯, 손을 공중에 휘휘 내저었다.
연은 계속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아무튼, 잘생기시고, 머리도 좋으시고, 차분하시고….”
진팔의 표정이 점점 창백해졌다.
“와, 이거 어디서부터 오해를 풀어드려야 할지.”
진팔이 눈과 입을 손으로 가린 채 신음했지만, 연은 꿋꿋이 이어나갔다.
“…인정 많으신 분이잖아요.”
아무 연고도 없는 절 이 초가에 묵게 해주셨으니까.
진팔은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글쎄요. 너희 댁 행수 성질머리 개차반이란 소린 저잣거리 살 적 지겹도록 들었는데.”
그쯤 되니 연도 슬슬 진팔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매사에 침착하시고.”
“불같으신 분은 한 분 알고 있는데요.”
“…남 챙기기 좋아하시고.”
“세상만사 저 혼자 사는 것 같은 분은 한 분 압니다.”
진팔이 허, 하는 소릴 내며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내뱉었다.
“대체 저랑 같은 분을 뵙는 게 맞으십니까?”
그러고 보니 환이 마냥 느긋하고 순하기만 한 사내는 아니란 게 떠올랐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가 부부간 잠자리를 가질 때였다.
확실히 그때만큼은 성질 더럽기가 진팔이 말하는 환 님 같긴 한데. 도련님 되는 진팔에게 그런 걸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기가 또 뭐했다. 연의 볼이 확 붉어졌다.
결국, 연은 입을 딱 다물었다.
진팔이 그런 그녀를 두고 큰일 났다는 식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잘 들으십시오, 형수님. 광랑(狂狼)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광랑이요?”
미친 늑대란 소린가.
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처음 들었다.
“최근 이 무산 근처에 도깨비 귀신 같은 수늑대 한 마리가 이끄는 무리가 어슬렁거린다는 소문은 또 못 들으셨고요?”
연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도 모르는 소리였다.
그렇게 듣고 보니 또 기분이 상했다. 맥락상, 지금 진팔이 말하는 치가 죄다 환이란 소리 같은데. 미친 늑대에, 도깨비 귀신 같은 수컷이라고?
“제 남편 그런 분 아니십니다.”
연은 부루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진팔은 연의 그 말을 들은 후로는 더는 반박하기를 포기한 듯 보였다.
“네. 네. 두 분께서 아주 천생연분이십니다. 백년해로, 아니, 천년해로 하십시오.”
눈을 가시처럼 가늘게 뜬 진팔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그가 도끼눈을 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진팔이라서 그다지 무섭진 않았다.
“나중에 형님의 진짜 모습을 보시고도 도망치기 않으시깁니다?”
연은 진팔이 제게 겁을 주는데도 눈 하나 깜박 안 했다.
환의 진짜 모습이 설사 연을 실망시킨다 하더라도 이미 두 사람은 부부였다. 늑대끼리 짝을 맺을 때 자고로 신혼 땐 좋아도 결국 나이 들어 새끼 낳고 주름지면 그 모습 보고 살아가는 거다 싶었다.
왜, 혼례는 현실이란 말도 있잖은가.
“웬만한 큰 실수 안 하시면 나중에 못나지셔도 그냥저냥 평생 데리고 살려고요. 어쩌겠어요, 이미 제 신랑이신 것을요.”
연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런 연이 함께 가져온 물을 홀짝이는 모습을 보며 진팔이 입을 떡 벌렸다.
“…부창부수라더니.”
무섭다, 무서워. 혀를 내두르는 진팔의 혼잣말이 연의 귓가에 다 들렸다. 연은 그러려니 했다.
* * *
환이 군길과 함께 일을 하러 갔어도 연에겐 남은 할 일이 있었다. 진팔을 도와 밀린 집안일을 싹 다 하고―물론 진팔이 제발 환 님껜 제가 도와달라 했다고 말하지 말아달라 싹싹 빌었다. 연은 알았다고 했다―간밤에 환에게 시달린 팔다리를 통통 두드리며 뜨거운 물 한 잔을 홀짝였다.
그러곤 정오가 될 즈음 연은 홀로 얼음낚시를 나갔다. 근처의 계곡으로였다.
‘물 반찬에 환장하신댔지….’
환을 위해 오늘 저녁에 올릴 밥반찬 때문이었다.
한겨울이라 고동이나 가재 같은 건 어려워도 송사리 정돈 구할 수 있을 거다. 어쩌면 덩치 큰 민물고기를 잡아 포식하게 될 수도 있다.
‘분명 환 님이 좋아하시겠지.’
신랑한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어느 신부나 같은 법이었다.
늘 저에게 가장 좋은 옷, 좋은 반찬만 챙겨주려고 하는 환에게 저도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어차피 어쩌다 한 번 있는 일이니까.’
매일 해 줄 생각도 없었다. 그냥 이번 한 번만. 저도 어쨌거나 새색시지 않나.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잘해드려 보는 거지, 뭐.’
그렇게 속으로 변명을 늘어놓으며 계면쩍음을 달랬다.
‘나도 참….’
요즘 연은 제 성격이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덜 까칠해지고 둥글둥글해졌다고 해야 하나. 어쩌면 원래 이런 성격이었는데 그간 억눌려 사느라 몰랐던 걸 수도 있었다.
사랑도 받아 본 늑대가 줄 줄도 안다고. 요즘 신랑에게 분에 넘치는 애정을 받으니 저도 이리 유순해지고 너그러워졌나 싶었다.
필시 그런 거겠지. 제 신랑이 저를 이리 바꿔 놓은 거다. 그가 저를 초가에 들여줬을 때부터 저는 구원받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 생각을 하니 또 눈가가 시큰해졌다. 연은 고개를 하늘로 들어 올려야 했다.
‘그런데 진짜 이 기시감은 뭐지…’
요 며칠 참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발정기 이후 몇 주나 흘렀다. 환과의 관계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러나 분명 정상으로 돌아오고도 한참 남았어야 할 몸이 여전히 삐거덕거렸다.
허리가 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가슴도 뭉치고. 솔직히 손끝 발끝도 저릿저릿한 게 고뿔 증상 같기도 한데 환에겐 차마 말을 못 했다. 말했다간 오늘 얼음낚시도 못 나오게 집에 붙들어 놓으려 할 것 같아서였다.
‘발정기 후폭풍이 있단 소린 못 들었는데….’
문득 환의 무리에 제 또래의 발정기를 겪는 젊은 암컷이 없는 게 좀 아쉬워졌다. 한 마리라도 있다면 원래 다 이런 것인지 물어나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원체 적응이 빠른 연이라 고민은 뒷전으로 밀어두고 일에 착수했다.
연은 코를 훌쩍이면서도 열심히 창고에서 챙겨 온 낚시 도구로 얼음을 둥그렇게 뚫었다. 환과 같이 만든 겨울옷도 잔뜩 낑겨 입고 온 참이었다. 영차, 영차, 하며 가져온 소쿠리 가득 물고기를 낚을 생각에 힘차게 낚싯대를 던졌다.
‘너무 맛있어서 환 님 감동받으시면 어떡하지.’
곤란했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숨만 쉬어도 감동하는 남잔데 말이다.
아직 잡지도 않았는데 물고기로 반찬 만들고, 그 반찬으로 환을 놀라게 해줄 생각을 하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짭조름한 생선을 그렇게 좋아하신다고 했는데.’
어디선가 흘려들은 진팔의 말을 계속 담아두고 있던 연이었다.
‘그때가 언제였지. 다 같이 복분자 술을 먹었을 때였나.’
당시를 떠올리니 다시 한번 환과 술을 마시고 싶었다.
물론 복분자 술 말고. 그 술을 먹으면 남편이 밤에 좀 흥분하는 것 같았다.
코끝이 빨개진 게 추위 때문인지, 쌀 사러 장에 나가신 신랑 생각 때문인지 몰랐다.
‘벌써 보고 싶네….’
연은 인정했다. 주책이라는 것을. 하지만 신혼이니까 이런 제 자신을 봐주기로 했다.
연은 다시 열심히 낚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제가 얼음낚시를 쉽게 본 모양이었다. 아무리 낚싯대를 던져도 물고기 한 마리 잡힐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이러다 반나절을 낭비한 채 돌아가겠다 싶었다. 결국, 연은 늑대 모습으로 변했다.
훌쩍 변한 검은 늑대 한 마리가 치마폭에서 쏙 빠져나왔다.
짐승의 몸을 하고 연은 두 앞발만 사용해 낚시를 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은 얼어붙은 강가에 작게 뚫은 구멍으로 송사리 몇 마리를 건져내는 데 성공했다.
‘됐다…! 된다…!’
연은 신이 나서 기쁨의 꼬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인간이 도구를 잘 써도 사냥엔 역시 짐승 몸만 한 게 없었다.
‘역시 늑대 모습이 더 사냥이 잘돼.’
기왕 이렇게 된 거 송사리 말고 커다란 물고기도 한 마리 건져 올렸으면 싶었다. 이따 밥상머리 보고 좋아할 환을 생각하니 피싯피싯,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연의 꼬리가 둠칫둠칫 움직이며 신나게 물고기를 건져 올리고 있을 때였다.
연의 주둥이가 킁킁, 움직이기 시작했다.
낯선 냄새였다.
하지만 아주 낯설진 않았다. 분명 어디선가 맡아 본 듯한….
‘핫…!’
연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재빨리 늑대의 시야로 수풀 우거진 부분을 살폈다.
연은 그곳에서 짐승 한 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뭔가 시커멓고 커다란 게 저를 지켜보고 있었다.
연은 본능적으로 아는 늑대임을 직감했다.
타앗-!
연이 움직인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녀는 가지고 있던 송사리며, 낚싯대며 할 것 없이 죄다 버려두곤 도망치기 시작했다. 완전 헐레벌떡 도망갔다. 진짜 걸음아 나 살려라 달렸다.
‘대광이다…!’
저건 분명 대광이었다.
‘저 털 색깔에, 저 덩치…. 대광이 아니고서야…!’
잡히면 끝난다.
허겁지겁 달리는 연의 머릿속엔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대광이 폭포 가에서 저를 겁탈하려고 했던 기억밖엔 나지 않았다.
저 남자가 싫었다. 저 사내의 시야에 저가 들어간단 사실조차 끔찍했다.
게다가 지금 잡힌다면 대광에게 끌려가 랑의 무리에서 뭔 짓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 그렇게 달렸는데도 연은 결국 붙잡히고 말았다.
타악, 팟-!
“컥, 컹, 크르를…!”
다리 한쪽이 물렸다. 살짝 스친 것뿐이지만 피가 났다.
한 바퀴 공중에서 데구루루 구른 연이 울부짖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거대한 수컷 늑대 한 마리가 그녀를 깔고 뭉갰다.
아니나 다를까 끔찍할 만큼 익숙한 수컷 늑대의 얼굴이 크르르, 소리를 내며 저를 위협했다.
연은 그가 지금 저에게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잘 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연은 지금 환의 무리에 속해 있는 늑대였다. 예전처럼 대광과 늑대의 모습으로 평이하게 의사소통을 나눌 수 없었다.
결국, 그 사실을 대광 역시 깨달은 것인지 주둥이로 그녀의 뒷덜미 같은 예민한 부위를 치기 시작했다.
그녀를 사람으로 변환시키려는 듯했다.
연은 기겁하며 낑낑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실랑이가 이어졌을까.
결국, 그녀를 사람으로 만드는 데 실패한 대광이 먼저 변신했다.
순식간에 거대한 남자 사람이 연의 위를 깔고 뭉갰다. 기겁한 연이 날카로운 이와 발톱으로 인간으로 변한 대광을 공격했지만, 수인 남자의 힘에 미칠 리가 없었다.
“연아, 헉, 나다, 대광 오라비다…!”
사람으로 변한 대광이 무턱대고 소리쳤다. 하지만 연은 들리지도 않는 척, 대광을 물어뜯었다.
‘그걸 누가 몰라…!’
대광이 그냥 저를 놔줬으면 했다. 하지만 대광은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얘기 좀 하자, 연아! 왜 말을 안 하는 거니! 너 혹시 다른 무리에라도 들어간 거냐! 그래서 내 말을 못 듣는 거냐…!”
대광의 짐작에 연은 짜증만 날 뿐이었다. 지금 와서 그게 대체 뭐가 중요한 건지 몰랐다.
따지고 보면 늘 그랬다. 대광은 항상 자신의 감정과 안위가 더 중요했다. 그에 피해를 보는 건 연뿐이었다.
대광은 아무리 해도 연이 사람으로 변하지 않자 결국 그녀의 목을 손으로 잡아 조르기 시작했다.
“컥, 컥…!”
연은 결국 항복했다.
스르륵, 하고 사람 모습을 한 연의 나체가 드러났다.
“연아…!”
대광은 연의 인간 모습을 보자마자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연은 그런 대광을 걷어찼다.
“하, 하지 마…! 으윽!”
그러거나 말거나 대광은 완전히 죽은 줄 알았던 아내를 찾은 남편이라도 된 것처럼 억척스럽게 그녀를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거의 눈물까지 뚝뚝 흘릴 태세였다.
“연아…! 내 너를 찾아다니느라 가슴이 시커멓게 탔다! 지금까지 대체 어디 있었던 거냐…!”
대광이 연을 끌어안고 닭똥 같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연은 질색하며 그를 밀어내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하지만 대광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을 붙들었다. 킁킁대며 연의 냄새를 맡던 대광의 눈이 별안간 시뻘겋게 변했다.
“근데 이 냄새는 뭐냐…! 지독한 수컷 냄새잖느냐!”
대광은 심지어 밑으로 내려가 연의 다리 사이 냄새까지 맡으려고 했다.
환이 아닌 사내가 자신을 그렇게 더듬자 연은 본능적으로 구역질이 올라오고 전신에 소름이 쫙 끼쳤다.
연은 대광의 대가리를 내리쳤다.
“하, 하지 마…! 이 미친놈…!”
하지만 대광은 눈에 뵈는 게 없는 듯했다. 그가 벌건 눈을 하고 연을 윽박질렀다.
“너 설마 나 몰래 다른 수컷과 살림을 합친 것이냐!”
마치 자신의 아내가 외도라도 한 듯한 반응이었다.
연은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렸다.
“내가 다른 수컷과 살림을 합치든말든, 그게 오라버니와 무슨 상관이야! 일단 비, 비키세요!”
제게 온갖 모욕을 주고, 무리를 떠나게끔 만든 사내가 자신을 마치 자기 여자 대하듯 하니 연은 머리가 무쇠로 달궈지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그런 연의 반응은 아랑곳없이 대광은 씨근덕거리며 중얼거렸다. 그의 코에서 콧김이 슉슉 나왔다.
“그 수컷은 나중에 처리하도록 하고 일단 나와 함께 돌아가자!”
그러면서 덧붙였다.
“난 네가 이리저리 궁둥이를 접붙이고 다니는 음란한 암컷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내가 다 용서하마, 연아!”
뭐?
연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분노가 치밀었다. 지금 누가 누굴 용서해? 대체 대광이 무슨 자격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가.
애초에 연은 잘못한 적이 없었다. 음란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대광이 저를 용서할 만한 짓은 손톱만큼도 한 적 없었다.
“오라버니는 미쳤어요…!”
연은 바락 성을 내었다. 이 미친 수컷을 당장이라도 떼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대광은 소유욕이 넘실거리는 얼굴로 연의 두 팔을 땅에 묶었다.
“연아, 연아! 일단 내 말 좀 들어봐라! 내가 랑이를 다시 설득했다. 널 다시 데려오기로 했어. 왜냐하면, 이번 발정기에도 랑이에게 소식이 없었거든, 연아. 랑이가 또 임신을 못 했어.”
지금 와서 연은 랑의 소식이 궁금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 어쩌라고…! 윽!”
반항하며 벗어나려는 연의 팔을 대광이 다시 한번 손자국이 날 정도로 세게 짓눌렀다. 연은 숨이 막혀 컥컥거렸다.
제 밑에 깔려 헉헉거리는 암컷을 바라보는 대광의 눈이 탐욕스럽게 넘실거렸다.
“그러니 랑이가 너를 다시 데려오는 걸 허락했다. 너를 통해 새끼를 보자고 내가 제안했어. 씨받이 말이다.”
지금 뭐라고…?
연은 눈을 부릅떴다.
씨받이?
그녀는 제가 잘못 들었나 다시 한번 되물었다.
“지, 지금 뭐라고….”
“어감이 좀 이상하구나. 하지만 다 같은 의미다, 연아. 무리의 대는 이어야 하지 않겠니? 그러니 이 틈에 다시 돌아오거라. 모르는 척하고 다시 오라고! 랑이도 허락한 일이야!”
연은 너무 한심하고 고까워 말도 잇지 못했다.
이런 늑대를 지금껏 친오라비처럼 생각하고 살았던 저 자신을 원망해야 하는 것인지, 어렸을 때 조금이나마 이런 사내에게 설렜던 저 자신을 응징해야 하는 것인지 몰랐다.
대광은 연의 심정도 모르고 계속 구구절절 중얼거렸다.
“이젠 너만 돌아오면 된다. 내가 네 자릴 다 마련해 놓았어. 다 너를 용서해 줄 거다! 모두 너만 기다리고 있다.”
용서…?
‘누가 누구를…!’
연은 그 순간 미칠 것 같은 감정에 시달렸다. 대광 때문에 제가 겪어야 했던 모든 응어리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 같았다.
연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야! 이, 이 미친놈아…!”
대광이 눈을 크게 뜨고 연을 내려다봤다.
“뭐라…? 너, 지금 오라버니한테 무슨….”
“난 돌아갈 이유도 없고, 새 무리에 들어갈 필요도 없어!”
연은 입에서 불이 튀어나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소리쳤다.
대광이 저를 어벙한 얼굴로 쳐다봤다.
“난 이미 좋은 신랑을 만나 결혼했고, 곧 아이를 낳아 새 무리를 이룰 거다! 대광 오라버니니, 랑이 언니니 모두 다 잊고 새 출발 했다고! 날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마!”
퉤-!
연은 마지막 말을 끝낸 순간 대광의 얼굴에 대고 침을 뱉었다.
“악…! 연이 너…!”
튀긴 침 세례에 오만상을 찌푸린 대광이 눈을 부릅떴다.
연이 제게 침을 뱉었다는 사실보다 그녀가 한 말이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뭐…? 새 출발? 좋은 신랑? 아이?
대광의 눈빛이 싹 돌변하기 시작했다.
대광은 제 아래에 깔린 부드러운 여체를 바라봤다.
연. 연, 아름답고 좋은 냄새가 나는 연이.
꿈에서나마 바라볼 그 연이.
으레 늑대 수컷이 그렇듯 대광 역시 첫 여자를 잊지 못하는 지독한 상사병에 걸렸다. 대광의 첫 발정기는 연 때문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대광은 부푼 좆을 연이 아닌 그 언니의 안에 밀어 넣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랑의 눈 밖에 날 것이고, 그러면 무리 생활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비겁한 수컷의 전형적인 예였지만, 대광 자신은 그렇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뼛속까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었다.
‘연이 네가 나를 배신해…?’
그 누구도 약속한 적 없었지만, 대광은 늘 마음속으로 자신의 진짜 암컷은 연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대광의 시선이 마구 흔들렸다.
무리에서 더 높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랑을 선택했지만 언제나 대광의 시선 끝에 있었던 연.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연아.”
광인처럼 빛나는 대광의 눈이 연의 육체를 핥았다. 그 시선 끝에는 초점이 없었다.
“연이 너는…. 너는 처음의 처음부터 내 여자였다. 그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야. 처음부터 내 누이였고, 내 여자가 될 뻔했던 암컷이다.”
연은 뒤척이며 대광의 손아귀에 벗어나려 발악했다. 그러나 무용한 힘이었다.
대광이 소리 지르며 연에게 손을 뻗었다.
“연이 넌 처음부터 내 거였어…!”
“미, 미쳤어…!”
“난 널 지금이라도 가져야겠다…!”
더는 피할 구석이 없었다.
눈이 뒤집힌 대광이 연을 포박하듯 붙들었을 때였다.
바로 그 순간 대광의 대가리가 퍽 하고 날아갔다.
천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대광의 몸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떨어졌다.
“헉, 허억…!”
오만상을 찌푸리고 갖은 악을 쓰며 대광을 피하고 있던 연은 갑자기 풀린 속박에 데구루루 옆으로 나뒹굴었다.
“헉, 헉, 헉…!”
겨우 정신을 차린 연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계곡 주변에서 벼락과 우박이 치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연은 늑대 두 마리가 서로 엉겨 붙어 있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어느새 늑대로 변한 대광이 거대한 갈빛 털을 가진 또 다른 늑대 하나와 미친 듯이 싸우고 있었다.
‘환 님…!’
반려를 한눈에 알아본 연은 경악했다.
그러나 두 수컷의 싸움에 쉽게 끼어들 수 없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뼈가 부서지기 십상이었다.
당연히 우세한 쪽은 환이었다. 덩치도 그가 더 컸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몇 번 하던 환이 드디어 대광의 가랑이를 물어뜯었다.
“크아아아앙-!”
엄청난 울부짖음이 울리고 피가 공중에 솟구쳤다.
연은 충격 속에서 그 장면을 바라봤다.
눈이 쌓인 갈대밭에 대광이 흘린 붉은 피가 뚝뚝 뿌려졌다. 컥컥거리며 숨을 몰아쉬던 대광이 한 번 짖었지만, 환이 마주 울부짖자 깽깽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의 천둥 같은 울부짖음에 대광은 결국 비틀거리며 도망쳤다.
환은 그를 쫓아갈 법한데도 단숨에 연에게 돌아왔다.
“연 님…!”
인간으로 변한 환이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습인 그녀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고요…!”
연은 낭군의 얼굴을 보자마자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혀를 깨물면서 참았다.
환은 자신의 옷을 주워 와 일단 연부터 입혔다. 그리고 자신도 남은 옷을 걸치고는 다시 다가와 그녀를 한 번 꽉 안았다. 일단 그녀를 품에 안고 냄새부터 맡았다.
연 역시 풍겨오는 환의 냄새로부터 그의 감정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반려의 특권이었다. 상대의 감정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것.
그의 감정에 불안함이 읽혔다. 행여나 연이 다쳤을까 봐, 저 수컷에게 상해라도 입었을까 봐.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분노 역시 들어 있었다. 기름이 절절 끓는 것 같은 분노의 온도에 연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 순간 배에서 미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연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했다.
“화, 환 님….”
“어디 아프십니까?”
환이 황급히 연을 다시 내려놓았다. 저를 부축하는 환의 손길에서 연은 좀 전과 확연히 다른 감정을 느꼈다.
아마 조금 전 극한의 상황을 경험해 반려와 더 강하게 연결된 탓일 수도 있었다. 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미약하나마 정신을 좀 더 집중해보았다. 확실히 환의 감정과 생각을 더 세세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연에 대한 걱정. 그리고 아주 미세하지만, 정말 미세하지만 어렴풋한 이건….
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입을 막았다.
‘어…?’
연은 숨을 들이켠 채 참았다. 잠시간 호흡이 불가능해진 것 같았다.
“왜 그럽니까? 속이 안 좋으신 거예요?”
환은 그런 연을 두고 미치려고 했다. 그가 정신없이 그녀를 더듬으며 답지 않게 횡설수설했다.
연은 경황이 없는 와중에 중얼거렸다.
“환 님, 저….”
“네, 네. 듣고 있습니다. 말씀해보세요.”
연은 완전히 넋이 나간 채로 중얼거렸다.
“…저 아이를 가진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러자 환이 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연은 환의 표정을 보고, 환이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세상에.
저만 왜 지금까지 몰랐던 걸까.
아니, 그것보다도.
‘행복해.’
연은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제가 느끼는 감정을 환 역시 공유하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벅차오르는 감정에 목이 막혀왔다.
다른 그 어떤 것보다 그 사실이 연에게 지금 가장 중요했다.
연은 환을 끌어안았다. 환 역시 그녀를 뜨겁게 마주 안아주었다.
* * *
환은 연을 보따리 싸듯 꽁꽁 싸매서 세상 소중하게 집으로 데려왔다. 중간에 연의 무릎이 까진 걸 보고 그녀가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욕을 해대기도 했다. 대충 대광의 창자를 끄집어내서 젓갈로 담근다는 소린 것 같은데 사실 정확히는 잘 못 알아들었다.
“늑대가 원래 첫정을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환은 연의 무릎에 적신 천을 덧대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병신 같은 게 예쁜 건 알아 가지고 말입니다. 이런 쳐 죽여도 아까울 오라질 놈.”
연은 사실 좀 즐거웠다. 그처럼 대광을 시원하게 욕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이미 연에게서 대광에 대한 모든 전적을 직접 들은 환이었다.
“필시 총각 때 연 님의 발정향을 맡고 처음 세웠겠죠. 수컷이 첫정을 잊지 못한다는 건 그런 걸 뜻해요.”
그 말을 하는 환의 낯이 싸늘하게 변했다.
연은 충격을 받았다. 대광이 랑에게 장가를 들고 나서도 제게 자꾸 치근덕거리고 끈질기게 못살게 굴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연 님이 아니면 못 세운다는 거야.”
랑이 쉽게 임신하지 못했던 이유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연은 구역질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환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수컷은 내가 죽입니다.”
“주, 죽이다니요.”
“모르셨습니까? 수컷끼리는 발정기 때 서로 물어뜯고 자주 죽어요, 연 님. 남의 여자를 건드린 건 중죄입니다.”
환이 당연한 걸 설명하듯이 말했다. 연은 우물쭈물 대꾸했다.
“그건 알지만….”
환이 어물쩍 당황스러워하는 연을 붙잡고 매서운 눈빛을 했다.
“그 새끼는 제 새끼를 밴 암컷을 건드렸습니다. 이건 금기를 범한 거예요.”
늑대 세계에서 환의 분노는 당연한 일이었다. 남의 암컷, 특히 한 무리의 머리를 건드리는 건 무리 간 전쟁을 불사한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내 여자를 건드린 놈의 좆은 발로 밟아 뭉개도 시원찮습니다.”
어디선가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환이 손에 쥐고 있던 호두껍데기가 으스러지는 소리였다.
맨손으로 딱딱한 호두 서너 알을 한꺼번에 부숴버린 그가 연에게 손을 뻗었다.
환은 연을 바라봤다. 그녀의 음전한 눈빛에 돌아버릴 것 같았다.
뭐가 저리 청초하시담. 저러니까 애먼 수컷이 미쳐 가지곤 껄떡거리지.
불과 몇 주 전에 매듭짓기까지 끝낸, 완벽한 반려 사이인 그들이었다. 지금 환은 연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미친 짓도 할 수 있을 만큼 고양된 상태였다.
“애초에 늑대 수컷은 다 그러합니다. 암컷은 그들의 첫 규율인걸요. 그 규율을 어기고 살아남은 개체는 애초에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아요.”
환은 연의 입술을 검지로 건드렸다.
“연 님은 내 여자예요.”
입술선을 따라 그리는 환의 손가락이 더없이 느릿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았는걸요.”
다른 쪽 손이 연의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환이 서서히 다가왔다.
연의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제 수컷의 소유욕이 담긴 손짓을 도무지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벌컥-!
“찾았습니다!”
문이 세차게 열렸다.
그다음 순간, 연은 환의 가슴팍을 손으로 확 밀쳤다.
그리고 사색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
“지, 진팔 님 오셨어요…! 우리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그야말로 도둑이 제 발 저린 꼴이었다.
진팔은 연의 얼굴에 손을 댄 채 그대로 얼어버린 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그 뒤에 서 있던 군길 역시 입가를 움찔거렸다.
좆됐다는 생각이 두 수컷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어쨌건 문을 잘못 연 건 분명했다.
어쩐지 오늘따라 형님의 뒷모습에 살짝 비추는 등 근육이 화를 내듯 꿈틀꿈틀하는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눈치를 보던 진팔은 슬금슬금 다시 문을 닫았다.
“제가 다시 오겠습니다. 두 분, 하던 거 마저 하시죠.”
“아, 아닙니다!”
연은 연대로 진팔을 다시 불러들였다.
“랑이 언니 무리를 찾았단 소리죠?”
그 말에 진팔이 다시 문을 열었다. 환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방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
“네, 네…. 요즘 무산의 개구리 바위 근처에 터를 잡고 겨울을 나고 있는 듯싶더라고요.”
환의 명령으로 진팔과 군길은 랑 무리의 위치를 순찰하러 다녀온 참이었다.
그 말을 들은 환이 눈을 부라렸다. 부부간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건 괘씸했지만 꽤 좋은 정보를 물어 온 건 사실이었다.
“좋은 선택이었군. 그 근처엔 숨을 바위도 많으니 겨울철을 보내기 한결 수월할 테지.”
환 역시 한 무리의 수장이었다. 그는 그 와중에도 연의 언니인 랑의 선택을 꽤 높이 샀다.
연은 곰곰이 고민하였다.
조금 전 대광과 있었던 실랑이를 기억해 냈다.
“랑이가 또 임신에 실패했어. 네게서 아이를 봐도 좋다고 했다.”
그 말을 떠올리니 다시 생각해봐도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제가 대광과 아이를 낳기 위해 랑의 무리로 돌아가야 한단 소린가?
‘어림도 없는 소리.’
연은 코웃음 쳤다. 웃기지도 않았다. 마지막 언사에 연은 거의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했다.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생애 이런 모욕은 다시는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아무런 잘못이 없는 연이었다. 그런 연에게 계속해서 껄떡거리다가 결국 랑과 사이가 틀어지고 무리를 등지게 만든 건 대광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무리에 들어오라고? 그것도 미안하다는 사과 한 번 없이?
그리고 그 발언.
랑의 아이를 제가 대신 낳으라니?
대광은 이번에 확실히 선을 넘었다.
연은 제 배를 감쌌다.
그간 너무 갑작스러운 심경과 환경의 변화에 몰랐던 사실들이 보였다.
‘이 안에 아이가 있어. 환 님과 내가 함께 만든.’
조금 웃기기도 했다. 암수 간에 함께 발정기를 보냈다면 당연히 새끼가 들어서는데 말이다. 그것도 임신 확률이 아주 높은 발정기에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해댔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저만 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생애 처음 느껴보는 모정이 그녀의 전신을 강타하는 기분이었다. 짜릿했다. 동시에 하염없는 물줄기 같은 사랑이 그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적시는 듯했다.
‘이 아이를 반드시 지킬 거야.’
연은 이를 악, 물었다. 결심했다. 그 무엇도 이 아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리라.
그때 누군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남편인 환이었다.
미간을 좁힌 그가 걱정을 담아 그녀를 향해 애정의 눈길을 보내왔다.
갑자기 억울함이 폭포수처럼 쓸려 내려가고, 연은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원래 힘들 때 곁에서 위로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더 눈물이 나는 것같이.
환 님은 참, 늑대 마음을 약하게 하신다니까. 연은 생각했다.
하지만 연은 고였던 눈물이 금세 마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호승심이 차지했다.
“이렇게 당하고만 있기 싫어요.”
연은 제 남편을 보며 중얼거렸다.
“환 님, 도와주세요.”
“뭘 어떻게 해드릴까.”
말만 하라는 듯, 환이 연의 두 손을 냉큼 잡고 끌어당겼다.
그 눈에 열의가 가득했다. 연을 향한 확고한 믿음과 저와 제 아이, 그리고 무리를 지키고자 하는 수컷의 확신이 있었다.
감히 제 아이를 가진 암컷더러 씨받이나 해달란 말을 한 수컷이 있는 무리였다.
태백의 환을 얕잡아 봐도 너무 얕잡아 본 것이다.
사실 환은 연의 부탁 없이도 대광의 무리를 찾아가 깽판을 쳐 놓을 요량이었다. 그냥 깽판이 아니라, 아주 뼛속부터 잘근잘근 씹어 뼛가루로 만들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상냥하신 마님께서 그렇게까진 용납하지 않으실 것 같아 입 다물고 있었다. 한데 먼저 말을 꺼내주시니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었다.
“일 처리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연 님. 말씀만 하세요.”
환의 대답에 연은 조금 더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환의 웃는 모습을 본 군길과 진팔이 움찔했다.
왜냐하면, 저건 환이 일치기 바로 직전에나 짓는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연은 머리를 굴렸다.
우선 대광과 랑이 이끄는 무리에 환과 연이 새로 이룬 무리의 존재를 확실히 알려야 했다. 일종의 선포였다.
“우선 우리가 무산의 새 무리로 결성된 점을 퍼트려야 해요.”
환은 그런 연을 사랑스러워 마지않는다는 듯 바라봤다. 똑 부러지기도 하시지. 확실히 제가 아내 하난 잘 얻은 것 같았다.
“그렇다고 무작정 새 무리의 존재를 공표하는 건 영역 다툼이 생길 여지가 있어요….”
연은 군길과 진팔, 그리고 환 세 사람에게 그녀가 알고 있는 랑 무리의 전력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렇다면 우두머리 수컷 부부를 포함해서 싸울 수 있는 그쪽 전력은 여덟에서 아홉 마리 정도 된다는 거군요.”
군길이 답했다.
“네. 발정기로 임신했을 가능성이 높은 암컷들은 제외했어요. 그 밖에는 다 늙거나 어린 개체들뿐일 겁니다.”
“한 마리당 두셋씩 맡으면 되겠군.”
군길이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렸다. 자신 있는 태도에 연은 눈을 크게 뜨며 재빨리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리세요? 전 제 서방님을 그런 위험한 전장에 보내자고 이 말을 한 게 아니에요.”
그 말에 진팔과 군길뿐만 아니라 환의 눈까지 커졌다.
“예…?”
환의 얼굴에 벙긋 웃음이 퍼지기 시작했다.
분명 서방이란 단어에 반응한 거였다. 환과 달리 진팔과 군길은 ‘위험한’이라는 단어에 좀 더 초점을 맞췄다.
위험하다니, 누가?
설마 자신 둘을 가리킨 것일까, 진팔과 군길은 서로 손가락질을 하며 상대방을 가리켰다.
환이 위험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저 수컷이 어디 가서 위험해질 수컷인가? 말이 안 되지.
하지만 연은 쐐기를 박았다.
“환 님이 어떻게 세 명을 동시에 상대하십니까! 말이 되는 소릴 하세요!”
“네, 네에?”
연은 혼자서 펄쩍 뛰어오르며 심각하게 소리쳤다.
“환 님 얼굴에 생채기라도 나면 어쩌려고요. 저 얼굴에 상처라니 말이 되세요? 제가 환 님과 함께 사는 중한 이유 중 하나가 사라지는데 어느 부인이 달갑게 반기겠습니까!”
진팔과 군길은 입을 떡 벌렸다.
뭔진 몰라도 연이 참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환만이 좋다고 실실 웃고 있었다.
아주 그냥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어쨌든 신혼이었다.
“제 얼굴이 그리 좋으십니까. 알고는 있었지만, 연 님 입으로 들으니까 더욱 좋습니다.”
진팔과 군길은 어이가 없었다.
심지어 진팔은 연 님이 농담하시는가 싶어서 다시 한번 물었다.
“여, 연 님. 장난치시는 거죠?”
“네? 아니요. 진심인데요.”
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예전부터 생각하건대, 군길과 진팔은 환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좀 있었다.
연은 환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뽀얗고 하얗기만 한 얼굴에 저를 향해 생글생글 짓는 웃음은 순하기만 했다. 조금 전 대광과의 결투도 봤지만, 연의 눈에 여전히 환은 공부만 한 반듯한 사내처럼 보였다.
‘아무리 남들에 비해 머리 하나가 크시다고 해도, 한꺼번에 셋을 상대하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연은 속으로 소리쳤다.
‘그러다 까딱 잘못해서 남편 잃으면 누가 보상하냔 말이다!’
한편 진팔과 군길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뭐라 말하진 못했다. 바로 코앞에서 환이 생글생글 순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데 무슨 말이 떨어지겠나.
환은 저를 향한 제 부인의 걱정이 아주 흐뭇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가부좌에 팔짱을 끼고 고개까지 주억거렸다.
암암. 내가 좀 순하긴 하지.
진팔과 군길이 혀를 내둘렀다. 지독하다 싶었다. 대체 어디까지 내숭을 떨어야 환을 싸움 한 번 못 하는 샌님으로 볼 수 있는 걸까?
물론 환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앞에 앉아 있었기에 차마 연 님께는 본인이 속고 계시다곤 말 못 했다.
연은 진팔과 군길이 왜 저렇게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연은 더 자세한 설명을 위해 얼른 덧붙였다.
“그래서 무산의 식살 곰을 자극할 생각이에요.”
연의 말에 방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식살 곰을요?”
환이 연에게 되물었다. 흥미가 돋은 얼굴이었다.
“네.”
연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식살하는 곰은 무산의 짐승들에게 가장 호된 적이자 살육자였다.
“그 곰을 자극시켜 겨울잠에서 벗어나게 하면 됩니다.”
하필이면 그 곰의 거주지가 개구리 바위 근처였다. 그 일대가 따스해서 겨울에 짐승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연의 계획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직접 몸을 움직일 필요 없이 미친 곰을 자극하여 랑의 무리를 교란시키고 그 틈을 타 자연스럽게 일대를 장악하는 방식이었다.
“이 계획이라면 저도 도울 수 있어요.”
임신을 한 탓에 싸움에 동참할 순 없지만 곰을 자극시키는 데에는 동원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무리를 흐트러트린 다음에 랑이 언니와 맞닥뜨리면 분명 승산이 있을 거예요.”
연은 확신에 차 말했다.
랑은 아주 대범한 성격이었다. 화끈하고 뒤끝이 없다. 싸움을 할 때도 마릿수로 화력을 보태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런 교묘한 전략에는 많이 당황할 것이었다.
“…왜 다들 말이 없으세요?”
연은 제 계획을 늘어놓고 나서 다들 반응이 없자 무안했다.
“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별로였나요?”
물어보자 환이 눈을 빛내며 냉큼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주 멋지고 똑똑한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아무래도 연 님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서요.”
“차질이요?”
“아, 저…. 네.”
환이 머쓱해하며 이실직고했다.
“제가 이번 늦가을에 그 곰의 목을 물어뜯어 죽여놔서요.”
환의 말에 다른 두 마리 늑대 진팔과 군길 역시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연 님.”
“죽은 곰은 살릴 수 없으니까요.”
“…….”
연은 황망하게 눈을 깜박였다.
세상에.
* * *
“연 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그 미친 곰 없이도 셋이서 잘하고 오겠습니다.”
연은 낭군님의 말을 상기하며 방 안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환은 꼼짝도 하지 말고 여기 계시라며 아궁이의 숯까지 다 돌보는 여유를 부렸다.
출타 나가실 때도 마치 개선장군처럼 당당한 태도였다. 어디 마실이라도 가는 태세였다. 임신한 암컷 두고 사냥 나가는 수컷인 양 연을 붙잡고 진하게 입맞춤까지 하고 갔으니 할 말 다 한 거였다.
하지만 어디 연이 가만히 있을 성격인가.
결심한 연은 옷을 다 챙기곤 늑대로 변했다. 앞발로 문을 살짝 열곤, 옷가지를 입에 물고서 냉큼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개구리 바위 근처였다.
연은 달리면서 생각했다.
‘세상에, 그 곰을 환 님의 무리가 처치했었다니…!’
전혀 몰랐다. 그들 셋이 아무리 젊은 수컷이라고 한들 그저 그런 한량들이라고 여겼다. 솔직히 진팔과 군길은 조금 무시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하고 보니 진팔도 매우 영리한 모습을 자주 보여줬었다. 군길도 매일매일 네 식구가 먹을 음식을 조달할 정도로 사냥 능력이 뛰어났다.
무리의 머리인 환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어쩐지 가을 내내 곰이 잠잠하다 싶었어…!’
연은 환의 대답에 자신이 얼마나 놀랐는지 새삼 회상했다.
호승심 많고 거칠 게 없는 성격인 랑 언니도 그 곰만큼은 피해 다녔다.
무엇보다 그 곰은 자매의 부모를 물어 죽인 원수였다.
‘곰을 해치운 게 환 님이셨다니…!’
달리면서 연의 입에서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대체 이 남자는 제 인생에서 어쩌면 이렇게까지 선물 같을 수 있을까.
눈발이 휘날리며 연의 눈에서 눈물도 같이 흩날렸다.
임신해서 그런 걸까, 확실히 감정이 쉬이 격해졌다. 연은 청승맞게 훌쩍이지 말자고 다짐하며 눈물을 꼭 참았다.
계속해서 발을 놀려 도착한 곳은 개구리 바위 근처였다.
연은 거대한 바위 뒤에 일단 숨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위 아래에서 늑대 한 마리가 나오는 걸 목격했다.
연은 단번에 그 늙은 암컷이 순이 할멈임을 발견해냈다.
순이 할멈 역시 연의 기척을 느끼고 흠칫 놀라더니 이윽고 켕켕거리는 소리를 냈다.
알은척이었다. 연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무리가 달라져서 순이 할멈이 아무리 컹컹거려도 늑대 상태로는 할멈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연은 인간으로 변했다.
그녀가 인간으로 변하자 순이 할멈은 물론이고 소리에 나와본 다른 늑대 무리까지 매우 놀란 눈치였다.
연은 언니 랑이 무리의 늑대들이 인간화하는 것을 지독히도 혐오했던 일을 기억했다.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무리의 다른 어떤 늑대가 인간으로 변하면 대놓고 짖어대며 이를 드러냈었지.
“할머니, 저예요. 연이에요. 우리 사람 말로 대화해요.”
연은 천천히 순이 할멈에게 다가갔다.
분명 사람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 거였다.
순이 할멈은 뒤로 멀찌감치 물러난 무리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서성이더니 우물쭈물 앞으로 나왔다.
그러곤 천천히 매우 나이 든 노파의 모습으로 변했다.
연은 그런 할멈에게 냉큼 여분으로 가져온 치마를 감싸드렸다.
오들오들 떨며 킁킁 냄새를 맡다 그녀가 연인 걸 확인한 순이 할멈은 경악했다.
“어이쿠, 이 기 센 수컷 내음은 대체 뭐냐…! 보, 보통 놈이 아니잖니!”
이제 보니 랑 무리의 다른 늑대들 역시 죄다 뒷걸음질 친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모양이다.
“여, 연아. 너 대체 지금까지 누, 누구랑 함께 있었길래 이래! 심지어 냄새가 다 섞였잖아!”
머리 늑대 중의 머리 늑대인 환의 냄새와 그에 섞여 완전히 바뀌어 버린 연의 냄새에 다들 질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연은 당황하고 말았다.
환과 지내는 내내 향낭으로 코가 막혀 있었던 데다 향낭을 제거하고 나선 환과 바로 짝을 맺어버려 그 사실을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환 님 냄새가 그렇게 무서운가.’
연은 혼자 생각했다. 처음엔 저 역시 그의 냄새를 맡고 두려워했던 건 감쪽같이 잊고 말았다.
“아, 아마 남편 냄새일 거예요.”
연은 수줍게 대꾸했다.
남편이란 말에 순이 할멈 눈이 솥뚜껑만 하게 커졌다.
순이 할멈은 용기를 내 다가와 연의 냄새를 더 킁킁 맡았다.
이윽고 그녀가 임신했음을 알아차린 순이 할멈의 손이 벌벌 떨렸다.
“홑몸이 아니로구나, 너…!”
연은 조금 얼굴을 붉혔다.
“말 안 하고 가버려서 죄송해요, 할머니. 그냥…. 사정이 좋지 않았잖아요. 최근에.”
연은 말을 얼버무렸다.
다행히 순이 할멈은 연을 이해했다. 순이 할멈은 자매의 부모가 곰에 물려 죽었을 때 두 사람을 다독여 준 이해심 넓은 늙은 암컷이었다. 끝까지 랑의 무리에서 연을 감싸준 몇 안 되는 늑대 중 하나이기도 했다.
순이 할멈은 자초지종을 얘기해주었다.
“곰이 죽는 바람에 먹이가 늘어날 거라고 예상했지만 예기치 않은 표범의 습격이 있었어. 무리가 몇 차례 공격을 당했단다. 그때 무리 내에서 사냥이 가능한 수컷들이 몇 마리 다쳤어.”
할멈은 아무리 랑이 사방팔방으로 노력했음에도 먹이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염치 불고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지내는 건 어떠냐 물었는데 랑이가 어찌나 기겁을 하던지.”
순이 할멈은 그간의 고충을 털어내며 눈물을 지었다.
연은 무리의 얘기를 듣고 일단 물었다.
“지금 랑 언니는 어디 있나요?”
“우리를 이곳에 숨겨두고 그 세 마리 늑대를 상대하러 갔어.”
연은 골똘히 생각했다.
랑이 저와 등을 졌을 때, 그나마 같은 꼬리 늑대들은 랑의 눈치를 보면서도 자신을 돌보아 주려고 했었다.
지금 꼬리 늑대들의 꼴은 말도 아니었다.
표범의 습격 이후로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피골이 상접하도록 마른 모습이었다.
자기들끼리 몸을 움츠린 채 오돌오돌 떨고 있는 모습은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연은 잠시 고민한 후, 순이 할멈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할머니, 나랑 같이 가요.”
행동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연은 늑대들을 죄다 초가로 데리고 왔다.
환의 집이었으나 이젠 저의 집이기도 한 곳이었다. 환은 이제 그녀의 짝이었으니까.
연은 늑대들을 불가에 모아 놓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겨우내 환의 식구가 열심히 모은 덕에 양식이 그득 쌓인 창고 문을 열었다.
겨울 털이 자라지 못한 어린 개체 몇몇은 아예 인간으로 변하게 하여 군길과 환, 진팔의 옷을 나눠 입게 했다. 그편이 보온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모든 아이가 따듯한 인간의 옷을 잔뜩 챙겨 입은 채 불가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연을 따라 초가로 온 늑대 중엔 꼬리 늑대뿐만 아니라 무리에 별 도움이 안 되는 몸통 늑대도 끼어 있었다. 물론 그중엔 지난가을, 연의 험담을 하던 암컷도 몇몇 있었다.
그 암컷들은 연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연도 그들을 싸늘하게 대했다. 그들에겐 관심을 아예 꺼버렸다. 어차피 꼬리 늑대들만 데려올 수는 없었다. 임신한 암컷들과 어린 새끼들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환과 랑 무리의 싸움이 일단락 지어지면 전부 다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이번만 적선을 베풀 듯 그들의 행보를 눈감아 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연이 그 암컷들에게 자비롭게 굴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너희, 다 그쪽으로 몰아서 있으렴.”
연은 랑의 무리에서 제가 배척받았을 때 못되게 굴었던 암컷들만 따로 뽑아서 뒷간에 놔두었다. 먹을 것도 말린 육포 한 덩이씩만 던져주었다.
암컷들은 그것만 줘도 감지덕지했다. 연에게 연신 고맙다며 고개를 꾸벅, 수그리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재꼈다. 어떤 늑대는 눈물까지 흘리며 육포를 질겅질겅 씹었다. 정말 많이 굶었던 듯했다.
연은 그런 암컷들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환이 찢어졌다고 하는 제 눈을 한껏 흘기며 째려봐준 후 암컷들이 움찔하며 서로의 몸 뒤로 숨는 걸 봤다. 연은 당당하게 뒷간을 나갔다.
“순이 할머니. 저 아무래도 신랑한테 다녀와야겠어요. 여기 꼼짝 말고 계세요, 알았죠?”
연은 그렇게 무리를 돌보곤 환이 어쩌고 있나 다시 살피러 갔다.
걱정되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다쳤을까 봐.
‘괜찮아야 할 텐데.’
아무리 제 남편이 곰도 때려잡는 사내라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게 아내 마음이었다.
* * *
연의 예상과 달리 이쪽의 상황은 완전히 반대였다. 환은 완전히 그 일대를 주름잡고 있었다.
“상처 한 대당 모가지 하나씩이다.”
거의 시정잡배나 다름없는 말투가 그의 입에서 당연하다는 듯 흘러나왔다. 환은 냉소적인 웃음을 뿌렸다.
“나랑 군길이가 밤마다 이 산 먹거리의 씨를 말려서 그런가, 아주 피골이 상접하네. 다들.”
연이 없는 곳에서 환은 완벽히 본모습대로 행동했다. 태백에서부터 내려오며 주변 일대를 장악했던 악명 높은 광랑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환 주변의 랑 무리의 수컷들은 완전히 널브러져 있었다. 더러는 사람으로 변해 있기도 했다. 털 하나 없는 알몸으로 동상 걸리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몇몇은 무릎까지 꿇고 환의 앞에 엎드려 있었다.
환은 그 앞의 개구리 바위에 걸터앉은 채 패왕처럼 군림하고 있었다.
늑대 모습을 한 랑은 맨 뒤에 쓰러진 채였다. 인간의 외형을 한 대광이 그런 그녀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래도 반려라고 랑을 지키듯 서 있는 모습이었다.
대광이 미련한 개새끼처럼 컹컹 짖어댔다.
“비열한 새끼…!”
최근 표범의 습격으로 전력이 될 수컷들을 잃은 데다 먹이 부족으로 굶기까지 한 랑의 무리는 많이 약해져 있었다. 환 무리가 그들을 제압하는 데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군길과 진팔은 심지어 사람 모습으로 되돌아간 후였다. 더는 그들을 상대할 전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우, 어깨야. 아주 지들이 갠 줄 알아. 살거죽을 막 물어뜯네, 씨팔.”
환은 분하다는 듯 사람 모습으로 그르렁거리는 대광 앞에서 훌훌 옷을 벗어 던졌다.
연의 앞이 아니니 말투까지 변한 모습이었다.
아직 눈발이 흩날리는 추운 겨울인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래 추위도 더위도 그다지 타지 않는 괴물이었다.
이윽고 광배근과 복근이 선명하게 잡힌 사내의 건실한 몸이 드러났다.
아까의 전투로 몸이 좀 뻐근해졌는지 목과 팔을 이리저리 돌리는 환의 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 맞다. 개새끼들 맞지.”
늑대도 개니까 뭐. 환이 깜박했다는 듯, 씩 웃었다.
“생채기 하나당 모가지 하나씩이라고 했다, 난. 어디 보자….”
하면서 환이 제 어깨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어이쿠, 여기 상처가 났네. 일단 저놈 모가지 하나.”
환이 제 바로 앞에 널브러져 있던 수컷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여기 팔뚝도 누가 긁어놨네? 저놈 모가지도 하나.”
대광이 아르르, 울며 소리쳤다. 인간 모습임에도 흥분하니 귀와 꼬리가 튀어나왔다. 물론 사내놈이라 귀엽긴커녕 징그럽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환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자, 잔인한 놈! 모, 모가지를 왜 자꾸 없애는 거냐! 그깟 상처가 뭐가 대수라고!”
환은 비릿한 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우리 마님께서 나 다치는 걸 싫어하셔서 말이야. 상처 하나라도 났다가 못나졌다고 우리 연 님이 나 더는 안 데리고 산다고 하시면 어떡해.”
그러면서 대광에게 가르치는 투로 얘기했다.
“수컷일수록 몸 관리를 잘해야 하는 법이야. 평생 예쁨받고 살고 싶다면. 어? 이 염치도 없고 똥치도 없는 새끼야.”
연의 얘기가 나오자 쓰러져 있던 랑의 눈이 번쩍 뜨였다.
대광 역시 눈을 부릅떴다. 저런 욕은 생전 살면서 처음 들어봤다.
“왜, 더 해줘?”
환은 턱을 긁적이며 잘됐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간 연 님이랑 함께 살면서 어울리지도 않게 바르고 예쁜 말만 쓰느라 입이 근질거리긴 했다. 뭐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좋았지만, 어쨌든.
“이 가랑이 사이를 찢어 죽일 놈아, 어?”
몸을 일으킨 환이 대광의 앞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그를 향해 가볍게 주먹을 휘둘렀다. 랑을 지키려는 듯 꼿꼿하게 서 있던 대광이 쓰러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환은 쓰러진 대광의 머리통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어? 귀신이나 잡아갈, 이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
이번엔 앉은 채 대광의 대가리를 붙잡고 빙글빙글 돌리며 협박하는 투로 얘기했다.
“진작에 벼락에 처맞아 뒈지지 않고 말이야. 추접스럽게 남의 여자한테 세우고 지랄이야.”
서슬 퍼런 머리 늑대의 기세가 환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지켜보고 있던 같은 무리인 진팔과 군길마저 움찔 뒤로 물러갔다.
환의 얼굴은 인간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눈동자는 짐승의 것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환의 기세에 눌린 것도 잠시, 치욕스러운 대우를 받은 대광 역시 ‘남의 여자’라는 말에 돌아버렸다.
“이거 완전 도라이 새끼 아니야!”
대광은 이성을 상실하고 환에게 소리를 질렀다. 여기서 진짜 도라이는 본인이란 걸 자기만 몰랐다.
“연이는 원래 우리 무리 암컷이었다! 어! 잠시 한눈판 것뿐이고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어!”
그때 랑이 컹컹 짖었다.
사람의 모습이 아니기에 말은 못 하지만 이를 드러내고 아르르거리는데 그 표정에 노여움이 가득했다.
“아주 그냥 개판이구만.”
환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제야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것 같았다.
“지가 먹긴 아깝고 남 주긴 아쉽고, 뭐 그런 거냐? 너한텐? 우리 연 님이?”
환의 표정이 싹 변했다. 그리고 발로 대광의 머리통을 콱 밟아버렸다.
“어? 언니랑 결혼해서 권력은 붙잡고 싶은데 또 좆질은 동생이랑 하고 싶었어, 그렇게? 이거 아주 갱생이 불가능한 썩을 놈이네.”
언 땅이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대광이 아주 죽을상을 하고 뼈가 끊어져라 비명을 질러댔다.
랑 역시 미친 듯이 짖어대기 시작했다.
컹-! 크릉!
그때 늑대로 변한 대광이 단숨에 뛰쳐 올라와 환의 얼굴을 물어뜯을 듯 달려들었다.
환은 그를 가볍게 피했다. 그러나 얼굴에 살짝 생채기가 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아, 씹….”
볼이 살짝 긁혔다. 환은 손가락을 들어 올려 피가 조금 나는 볼을 스윽 훔쳐냈다.
손가락에 묻어나는 붉은 피.
그걸 확인한 환이 대광을 살벌하게 내려다봤다.
“내가 그래도 같은 사내라 불알 한 개로 봐주려고 했는데….”
저번 전투로 대광이 환에게 물린 곳은 바로 가랑이 사이였다.
환이 창백하게 질린 대광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끄아아아아!”
이윽고 대광이 난리를 치며 발광을 했다. 하지만 환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냥 서서히 대광의 가랑이 사이를 짓이겨 으깨놓듯 발을 놀렸다.
랑이 그래도 서방이라고 곁에서 쉴 새 없이 짖어대었다. 아주 눈꼴시어 못 봐줄 장면이었다.
“하, 시끄러워.”
환이 진팔과 군길을 향해 눈짓했다. 랑에게 다가간 군길이 재빨리 그녀를 제압했다.
이윽고 환이 우렁찬 목소리로 천명하였다.
“무산은 앞으로 우리 땅이다.”
환은 기절해 버린 대광을 버려두고 피가 묻은 신을 눈발에 툭툭 비벼 닦아내었다. 아주 여유로운 태도였다.
“반항하는 놈이 있으면 눈앞의 이 새끼 꼴이 날 테니 알아서 처신하도록.”
대광의 꼴을 본 늑대들은 귀와 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랑도 마찬가지였다. 으르르거리긴 하지만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걸 랑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때 누군가 도착했다.
공기 중의 냄새를 킁킁 맡던 환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환이 재빨리 옷을 벗어 피가 흥건히 묻어난 대광의 주변을 덮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풀숲에서 머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연이었다. 사람 모습을 하고 솜저고리에 목도리까지 야무지게 껴입은 연이 폴짝 뛰어왔다.
“환 님…! 괜찮으세요?”
환이 그런 연의 앞을 냉큼 가로막았다. 고압적이던 그의 목소리가 다시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돌아왔다.
“연 님! 제가 게에 계시라고 그리 일렀는데요…!”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늑대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들은 환을 보며 경악에 빠졌다.
‘같은 늑대 맞나…!’
이중인격도 아니고, 늑대 성격이 어쩜 저리 한순간에 바뀐단 말인가.
그러나 환은 아랑곳 않고 연의 이곳저곳을 뜯어보기에 바빴다.
“오느라 춥지 않으셨어요? 목도리랑 장갑이랑 모자랑 솜저고리랑 솜치마밖에 안 두르시고 오시면 어떡합니까…!”
연은 저를 붙잡고 또다시 난리를 치려는 신랑을 밀치고 재빨리 사태를 둘러보았다.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잠시 숨을 골랐다.
이게 대체 무슨 난리인가 싶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환 님이었다.
“아니, 이 추위에 옷을 홀딱 벗고 계세요!”
제 남자가 하는 꼴이 어이가 없었다. 연은 얼른 목도리를 풀어 남편의 목에 둘둘 둘러주었다.
환의 입가가 절로 올라갔다. 갯과라서 그냥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니 이것 좀 보세요. 연 님.”
당장에 제 주인에게 머리를 비비적거리듯 연을 끌어안고 환이 하소연을 시작했다.
“이 나쁜 늑대 놈들이 절 물어뜯고 할퀴었습니다. 아팠어요….”
주변의 늑대들은 어이없음에 주둥이를 딱 벌렸다.
‘어쩜 저리 염치가 없을 수가 있나…!’
아니 그보다도, 아까의 천둥 치는 듯한 목소리는 어디 가고 어디서 강아지 낑낑거리는 소리가 난단 말인가.
연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환의 꼴을 보았다. 가슴팍에 생채기 하나, 팔뚝에 하나, 볼에 긁힌 상처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까치발을 들어 환의 너머로 랑의 무리들이 하나같이 널브러져 기절해 있는 모습을 봤다.
몇 명은 아주 모가지와 다리를 분질러 놓은 건지 눈도 못 뜨고 쓰러져 있고 피까지 철철 나는 개체도 있었다. 진팔과 군길은 물론 멀쩡했다.
“…….”
연은 할 말을 잃었다.
환은 이보다 건강해 보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봐도 아프다고 울어야 할 쪽은 랑의 무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연은 곰곰이 생각하다 반대로 대답했다.
“뭐라고요! 환 님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요? 다 어디 있습니까? 그놈들 상판을 제가 다 물어뜯어 놓겠습니다!”
연은 팔까지 걷어붙이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주위의 늑대들은 하나같이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이제 우린 죽었다…!’
자비를 보여줄 줄 알았던 연이 환을 부추겼다. 저 말에 환이 자극을 받아 더 날뛰면 어떡하나.
그러나 그런 예상과 달리 환은 냉큼 연을 안아 빙그르 돌렸다. 연을 꼭 끌어안은 환이 다정스레 대꾸하였다.
“신랑을 뭘로 보시고요. 제가 다 처리해 놓았습니다. 연 님은 손도 대실 것 없어요.”
“그럼 어쩔 수 없고요.”
연은 냉큼 대답하곤 발을 뺐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함박웃음으로 보아 한 달은 우려먹을 수 있을 정도로 좋은 반응이었나 보다.
“연 님이 저를 이리 생각해주시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환이 그래도 좋다고 허실허실 웃었다. 그제야 다른 늑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오늘 다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 싶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멀쩡한 환을 보니 오는 내내 그를 걱정했던 마음에 안도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였다.
“여, 연아….”
그 와중에 연의 목소리를 들은 대광이 깨어났다. 바들바들하는 손을 들어 연을 향해 손짓했다.
그 모습을 본 랑이 컹컹, 대며 울부짖었다.
연은 그런 두 사람의 형편없는 꼴을 보곤 얼른 제정신을 차렸다. 갑자기 없던 울분이 가슴속에 차올랐다.
이제 끝이었다. 이 두 짐승을 보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 거다.
연은 환의 뒤에서 나와 허리에 손을 짚었다.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내 인생에서 꺼져요, 대광 오라버니.”
연은 그 눈을 그대로 랑에게 향했다.
“언니도요. 그리고 다신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막상 말을 뱉으니 너무 후련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아 연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입에서 입김이 훅훅 뿜어져 나왔다.
“들었지요?”
그때 환이 뒤에서 그녀를 감싸 안았다.
두꺼운 팔뚝으로 연을 제 품에 안은 환이 경고했다.
“이 산에서 꺼지든가, 내 밑으로 들어와 꼬리 늑대로 살든가. 둘 중 하나입니다. 물론 무엇을 선택하든 우리 연 님 눈엔 코빼기도 띄지 말아야 할 겁니다.”
연의 말에 아르르, 하고 울부짖던 랑이 환의 서슬 퍼런 눈빛에 움찔 몸을 떨었다.
환이 승부를 마무리 지었다.
“당신은 졌습니다, 랑.”
암컷 늑대의 흉흉한 눈빛이 푹 꺼지기 시작했다. 두 귀가 내려가고 꼬리는 하염없이 바닥을 쳤다.
랑의 저런 모습을 보는 건 연도 처음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연은 한없이 매섭고 날카롭기만 했던 언니의 예전 모습이 떠올랐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한순간에 갈 곳 없어진 무리를 이끌기 위해 두 자매가 으쌰으쌰 머리를 맞대던 시절도 떠올랐다.
갑자기 눈물이 차오르려 했다. 연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도대체…. 도대체 왜 그랬어, 언니?”
연의 입에서 속에 있던 말이 터져 나왔다. 조금 떨리지만, 저를 지탱해 주는 등 뒤 남자의 품이 하도 크고 따듯하여 무서운 줄도 몰랐다.
“왜 그렇게 날 못살게 굴었냐고. 언니는 사실 다 알고 있었잖아.”
똑똑하고 야무지고, 예로부터 상황 파악의 귀재였던 언니가 몰랐을 리가 없다. 제 잘못이 아니라 대광의 잘못이란 것도 다 알았을 거다.
“그런데 왜, 왜….”
연은 코끝이 빨개지는 걸 느꼈다.
어쨌거나 믿었던 언니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살자고 먼저 말했던 것도 언니였다.
사실 그게 더 싫었다.
더 미웠다.
“저 미친 대광 오빠가 들이대는 것보다 그걸 알면서도 방관하는 언니가 더 미웠어.”
언니가 나를 먼저 버렸다는 게.
결국, 연의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왜…. 왜….”
그때 커다란 손이 뒤에서부터 연의 눈을 가려주었다.
연의 작은 몸이 빙글 돌아가 거대한 몸에 쏙 파묻혔다. 환이 그녀를 안아준 것이었다. 훌쩍이는 연을 안아주며 환은 어둑해져 가는 하늘에 남은 빛을 받고 새파랗게 빛나는 검은 눈을 랑에게 꽂았다.
랑이 몸이 움찔하였다.
저 수컷의 눈은 모든 걸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연을 토닥거리던 환이 입술을 열었다. 중얼거리는 소리가 바람에 실렸다.
“알 것도 같은데….”
환의 말에 랑이 뒷걸음질 쳤다.
순식간에 적막이 휩싸였다.
마침내 환이 포화 같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쪽, 인간화가 불가능해졌군?”
연은 환의 품에 고개를 묻다가 눈을 크게 떴다. 정신을 차리고 있던 몇몇 늑대들 역시 충격을 받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랑은 늑대 모습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환을 향해 컹, 하고 한 번 짖었다.
그 모습을 싸늘하게 바라보던 환이 중얼거렸다.
“…이 난리가 났는데도 인간으로 변해서 자기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다는 건 그것밖에 없지. 수인 무리의 수장이 인간화가 불가능해졌으니 당연히 입지가 약해질 게 걱정되었을 테고. 그 와중에 제일 강한 수컷이 똑똑하고 무리에 잘 융화돼 있는 동생한테 미친 듯이 껄떡거리니 네 입장으론 고역이었을 테지.”
세상 이곳저곳을 다니며 별의별 일을 다 겪은 환이었다.
“무리 중에 그런 개체가 드물게 생깁니다. 원인 불명의 이유로 갑자기 인간화가 불가능해지곤 하죠. 자기도 왜 그런지 모르니까 더 답답하고 불안했을 거야. 그래서 무리의 늑대들이 인간화하는 것도 금지시킨 거고. 자기가 인간으로 변할 수 없단 사실을 들킬까 봐.”
“그, 그게 무슨….”
연은 눈을 정신없이 깜박거렸다.
미친 듯이 짖어대는 랑은 환에게 달려들듯 포효했다. 연 역시 충격 속에서 환의 가슴팍을 짚은 채 그를 올려다봤다.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이제껏 자기 성질 다 부리면서 우두머리로 떵떵거리며 살았는데, 동생한테 머리 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잖아요.”
환이 딱 진단을 내렸다. 그가 비웃음을 담아 입을 열었다.
“그대 언니는 용맹하고 호승심 강한 게 아니야. 겁 많고 옹졸하고 치사했던 것뿐이지.”
벌떡 서 있던 랑의 꼬리가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연과 환을 향해 으르렁거리며 미친 듯이 짖어대던 랑이 서서히 고요해졌다.
연은 랑을 쳐다봤다. 언제나 당당하고 우러러봐야만 했던 언니가 그 순간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정말 그런 거였어요, 언니?”
연은 마지막 확인을 위해 물어봤다.
랑이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늑대인 랑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랑의 꼬리가 완전히 추욱 내리깔아졌다. 눈을 쓸어버리는 랑의 꼬리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랑은 완전히 복종하는 자세로 환과 연의 앞에 엎드려 버렸다. 끼웅, 끼우울, 하는 소리를 내었다.
환의 목소리가 차가운 겨울바람처럼 울렸다.
“…인간화가 불가능해진 늑대는 랑 그쪽 혼자만이 아닙니다. 어떤 무리든 한두 개체 정도는 그렇게 태어나니까. 어린 시절엔 인간화가 가능했어도 크면서 능력을 잃지. 처음부터 솔직하게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했으면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을 겁니다. 연 님은 자비로우신 분이니, 어떻게든 언니인 그대를 돌보려 했을 텐데.”
환이 쯧쯧, 혀를 차며 이어 말했다.
“하지만 연 님의 손을 먼저 놔버린 건 랑, 그대입니다. 하나 있는 자기편을 먼저 버린 거지. 그대는 아주 어리석었습니다.”
눈발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환은 씁쓸한 눈으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자매를 내려다보다가 연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제 다 해결됐어요. 집에 갑시다.”
환의 다정한 목소리에 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몸이 차요. 그러게 내가 오지 말랬잖아.”
그녀의 이마에 다정하게 입 맞춘 환의 목을, 연은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 * *
무산의 수인 무리는 그렇게 환의 세력에 흡수되었다. 그렇다고 환이 온전한 머리 늑대가 된 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겠다. 너흴 다 받아들이는 건 귀찮다. 내가 싫어. 나에겐 너희 모두를 책임질 의무도, 의지도 없어. 사정을 봐주는 건 이번 겨울까지만이야.”
환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칠 것 없이 당당하게 굴었다.
연과 진팔, 군길, 그리고 새로 태어날 그들의 아이까지만 딱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나머지 무리는 그들 무리를 형님 무리로 모시는 일종의 종파로 나뉜 셈이었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종파가 한양에만 해도 서넛은 더 있습니다.”
진팔이 연의 귀에 대고 소곤소곤거렸다.
연은 놀라움에 되물었다.
“또 있다고요…?”
“예. 귀찮게 구니까 저는 좀 짜증 납니다. 힘들 때마다 형님더러 도와달라며 징징거리거든요. 저래 보여도 일단 곤란한 지경에 빠진 놈들은 또 그냥 못 두고 보셔서요. 걔들도 욕 더럽게 먹을 각오하고 형님한테 매달리는 거고요.”
그사이, 연은 환이 제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존재란 걸 알게 되었다.
전국 팔도에 사람 모습으로 긁어모은 재산이 꽤 된단 사실도 알아냈다.
일단 그 많은 무리를 졸지에 겨울까지 책임지게 생겼으니 환은 무리 중 몇몇을 사람으로 변하게 했다. 그리고 군길을 시켜 한양에 있는 창고 중 몇 개를 털어 오게 시켰다. 늑대 모습으론 고기밖에 못 먹으니, 인간 모습으로 변해 사람 음식으로 겨울을 연명하게 하는 작전을 쓰는 것이었다.
“임신한 암컷과 노약자 우선이다. 규칙을 안 지키고 창고 음식 눈독 들이는 새끼들 있으면 확씨, 불알을 떼어버리려니까.”
환이 서슬 퍼런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아는 무리의 수컷들은 벌벌 떨었다.
“그때까진 사냥할 수 있는 놈은 알아서 사냥해서 살아남아라. 엉? 일할 수 있는 놈이 농땡이 부리는 꼴 봤다간 그날로 그놈 제삿날이다, 알겠지?”
그 말에 주변 늑대들이 전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군부 못지않은 단합력이었다.
돌아서려던 환이 뭔가 생각났다는 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연 님 앞에서 훌렁훌렁 사람 모습으로 변하기만 해봐라, 대가리를 우물에 처박아 버릴 테니까.”
몇몇 인간화 교육을 받지 못한 늑대들이 남들 앞에서 훌렁훌렁 알몸으로 변하는 걸 본 후로 환은 저런 경고도 빼놓지 않았다. 풍기문란죄로 벌써 여럿이 뒷간행을 당했다.
연은 그제야 환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
‘잠자리 때 모습이 실제 말버릇이었다니….’
정말 환은 그의 말대로 성격이 개차반이였다.
욕도 잘했다. 어쩜 그리 전국 팔도의 구수한 욕지거리들을 토박이처럼 구사하던지.
턱 끝으로 이제 그의 수하가 된 늑대들을 이리 부리고 저리 부리는데 가만히 있는 연도 가끔 울컥 울화통이 올라올 정도였다. 그만큼 환은 얄미우면서도 종국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강력한 통솔력을 지니고 있었다.
‘진팔 님이 학을 떼던 이유를 알 것 같아.’
랑은 무리의 ‘꼬리’ 신세가 되어 눈에 띄지 않게 조용하게 환의 무리를 따랐다. 대광 역시 여전히 살아는 있었으나 두 불알을 모두 잃고 꼬리 중의 꼬리 늑대로 서열이 낮은 늑대들 사이에서 겨우겨우 기생 중이었다.
“오늘 몫의 식량 받은 놈들은 그만 죄다 꺼져.”
줄이 슬슬 줄어들 즈음이 되니 환이 악덕 업주처럼 손을 휘휘 내저으며 늑대들을 쫓아내었다.
“자, 자. 우리 형님이 그만 나가시랍니다…!”
진팔도 마찬가지로 늑대들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늑대들이 따듯한 불이 있는 초가에 어떻게든 얹혀살고 싶어서 눈치를 보는 게 빤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연은 그 광경을 귤을 까먹으며 보고 있었다. 귀마개와 목도리까지 하고 중무장을 한 채였다.
조금 전까지 으르렁거리며 집에 들어온 사람들을 다 쫓아내던 사내가 그녀 앞으로 다가와선 그녀의 여린 두 손을 꼭 붙잡았다. 환이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챙겼다.
“연 님, 춥진 않으시지요?”
연의 빨개진 코끝을 톡톡 건드리며 환이 그녀를 걱정했다.
“좀 들어가 계시라니까.”
들어가 있다간 랑의 무리를 대하는 환의 목소리며 행동이 더 표독스럽고 모질어지는 탓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단 소리를 연은 못 했다. 그나마 연이 나와서 이렇게 보고 있어야 상냥하게 대하는 척이라도 하는 환이었다.
연은 랑의 무리에 그다지 큰 애착은 없었다. 그래도 순이 할멈을 비롯한 몇몇 꼬리 늑대들에게 진 신세가 있어 그들의 뒤를 봐주기로 했다.
연 덕분에 순이 할멈과 다른 꼬리 늑대들은 한결 편하게 이번 겨울을 나게 되었다.
“별로 안 추워요.”
그래도 이 말은 사실이었다. 그가 지어 준 따스한 옷을 몇 겹이나 겹쳐 입는 바람에 땀까지 조금 날 지경이었다.
“환 님께서야말로 고생이 많으세요.”
고생은 실무자인 진팔이 더 하는 것 같았지만, 연은 예의상 한마디 보탰다. 그래도 서방 챙기는 건 안사람밖에 없다지 않나.
환이 저렇게 딱딱하게 구는 것 같아도 한양까지 군길을 보내 랑의 무리를 위한 여분의 식량과 돈을 구해 오라 지시를 내린 분이셨다.
‘상냥하신 분….’
환을 보는 연의 눈이 아주 따뜻하게 물들었다.
“푸엣취-!”
그때 환이 별안간 재채기를 했다.
당연했다. 저번에 이 날씨에 상처 확인하겠다고 웃통을 까신 분이 아닌가.
고뿔의 징조에 연이 놀란 눈을 하고 신랑을 쳐다보았다. 머쓱하게 고개를 들어 올린 환이 연에게 변명하였다.
“아이참, 연 님 앞에선 제가 이상하게 약해진단 말이죠.”
저 원래 진짜 고뿔 한 번 걸린 적 없는데. 그가 멋쩍게 구시렁거렸다.
“이건 저 말고 환 님한테 필요할 듯하네요.”
연은 입술을 슬쩍 올렸다. 무심하게 대꾸하며 제 목도리를 벗어 환에게 씌워주었다.
환이 갑자기 감격스러운 표정이 되어버려서 연은 당황하였다.
이러다 제 손목을 잡아끌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 적이 한두 번이어야지.
“지, 지금은 안 돼요.”
연은 얼른 방어선을 그었다.
“아니, 뭘요?”
환이 오히려 더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몸을 붙여왔다.
“어떤 짐승들은 새끼 가진 채로 둘째도 가질 수 있다는데 우리도 한번 시도해 볼까요?”
“꺅-! 미쳤어요!”
환이 연을 번쩍 들어 올렸다. 어후, 늑대는 그렇게 못 합니다! 하고 어깨를 통통 두드리는 손에 맞으며 껄껄 웃은 환은 그대로 연을 공주처럼 안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무산의 늑대들은 그런 두 사람의 애정 행각을 완벽하게 못 본 척했다.
아아, 신혼이었다.
* * *
연의 배가 더 부르기 전에 환은 그녀를 데리고 무산 곳곳의 풍경을 보여준다고 약속했다.
칼바람이 눈에 띄게 잦아든 어느 날이었다.
연은 점심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환의 등에 업혀 나들이를 나왔다.
일은 죄다 진팔과 무산의 늑대들에게 시키고 둘이서만 이렇게 놀러 나온 게 아주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다. 하지만 뭐 어떤가. 이제 무산의 주인은 환과 그의 아내 연인 것을.
그간 조금씩 불러오는 배를 붙잡고 갈 곳 없어진 무산의 무리를 챙기느라 고생 아닌 고생을 했으니 오늘 하루쯤은 괜찮겠지 싶었다.
곧이어 두 사람의 눈앞에 갈대밭이 펼쳐졌다.
“와아….”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갈대밭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풍경을 바라본 연이 환호성을 터트리자 환이 흐뭇하게 웃었다.
연은 저 먼 곳을 응시하던 시선을 움직여 제 반려자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나고 자란 늑대는 자신인데 어째 이런 좋은 곳은 환 님만 알고 계시는지.
“자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랬습니다. 일단 배 속에 뭐부터 좀 넣읍시다.”
환은 연을 내려 주곤 자리를 폈다. 바리바리 챙겨 온 온갖 음식을 연의 입에 넣어주기 시작했다. 아직도 김이 나는 깐 감자와 조청 버무린 콩떡, 달콤한 대추….
요즘 입덧 중인 연이었다. 갈수록 더 심해지는 몸살에 앓기도 했다. 그래서 근래 초가에서 연에게 그릇도 하나 못 들게 하는 군길과 진팔이었다. 옷깃만 스쳐도 오한이 일어 열감긴가 싶고, 툭하면 잠이 쏟아지곤 해서 환이 더 안달복달을 했다.
“오늘은 좀 괜찮으신 것 같아 다행이에요.”
“네. 바깥바람 쐬었더니 아기가 좋은가 봐요.”
널따랗게 펼쳐진 평야를 보니까 연의 코가 근질근질했다. 그간 잠잠한가 싶었던 욕구가 치밀어올랐다.
‘아, 달리고 싶어.’
짐승의 본능이었다.
그때 갑자기 옆에 선 환의 모습이 순식간에 변했다.
훌훌 옷가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수컷 늑대가 연의 볼을 쓱 핥았다.
연은 웃음을 터트렸다. 제 마음을 잘 알아차리는 반려가 있다는 게 이리 좋은 일일 줄이야.
환이 다정하게 제안했다.
‘나온 김에 같이 바람 잔뜩 쐬고 돌아갑시다. 연 님.’
연 역시 순식간에 늑대 모습으로 변했다.
이윽고 두 마리 늑대는 설원을 뛰놀기 시작했다.
아주 폴짝폴짝 뛰었다 서로 꼬리를 물듯 쫓았다가 우당탕 뒹굴었다. 그 와중에도 임신한 연이 밑에 깔리지 않도록 환은 사려 깊게 움직였다.
‘너무 즐거워요!’
연은 신이 나서 소리쳤다. 모든 싱그러운 바람이 제 코와 입, 귓속으로 들어오는 감각에 온몸의 혈관이 살아 숨 쉬는 듯 움틀거렸다.
‘다행이에요.’
환이 다정스레 답했다.
눈 덮인 설원에서 늑대 모습으로 변한 두 수인은 그렇게 한참을 재미있게 뛰놀았다. 입덧으로 인해 쌓인 고생을 한 방에 날려버린 반나절이었다.
그러다 연이 언덕배기를 데구루루 구르기 시작했다. 환 역시 그런 연을 힘껏 감싸고 내리막길을 굴러갔다.
두 사람은 다시 폭신한 눈밭 위에서 사람 모습으로 변했다. 꼭 끌어안은 채였다.
환이 초가에서 가져온 곰 가죽으로 얼른 그녀의 몸과 제 몸을 덮었다. 저번 무산의 식살 곰을 잡고 얻은 가죽으로 만든 커다란 담요였다.
우선 제 반려를 따듯하게 덮어준 환이 연과 눈을 마주쳤다.
당연한 순서처럼 두 사람은 입술을 겹쳤다. 한참을 입 맞추고 서로의 몸을 쓰다듬었다.
“…대낮에 보름이 떴나 했더니, 제 광대였지 뭡니까, 연 님.”
환이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을 쳐다보듯 아득하게 그녀를 바라보다 문득 중얼거렸다. 그의 표현에 연은 쿡쿡 웃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만큼 제 웃음이 끊이지가 않는단 소리예요. 연 님과 있으면.”
환의 광대뼈가 불그스름했다. 연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가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연 님께 한 가지 털어놓을 게 있어요.”
연은 환의 말에 자세를 고쳐잡았다. 환이 그런 연을 다정스레 쳐다보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고백했다.
“전 이 무산에 사실 작년부터 있었습니다. 작년 암컷들의 발정기가 왔을 때 말이에요.”
연의 동공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시절은 연의 삶에 있어서 가장 힘들었던 때였다.
그것을 잘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환이 실토하듯 입을 열었다.
“그때 연 님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 뒤로 연 님만 한참 찾아다녔었어요. 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요.”
환의 손이 연의 손을 꾹 잡아 내리눌렀다.
“미안해요, 내가 늦게 왔어요.”
연의 눈동자가 떨렸다.
“연 님이 먼저 초가로 찾아오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내가 먼저 연 님을 찾았어야 했는데. 제가 느림보였습니다.”
연이 코끝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울기 직전인 모양새였다. 환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 아니…. 연 님 울리려고 한 말은 아닌데….”
연의 볼을 타고 눈물이 계속 떨어졌다. 환이 더 거듭 사과를 했다.
“미안해요. 내가 좀 더 일찍 그대를 찾았어야 했는데. 신랑이 늦게 와 미안합니다.”
“아니, 아니에요.”
연은 환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아기 때문인가, 정말 요새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졌는지 몰랐다.
“그냥 너무 행복해서 그래요.”
연은 진심을 듬뿍 담아 말했다.
“제 신랑이 되어줘서 너무 고마워요. 환 님.”
“저도요. 제 신부가 돼줘서 고맙습니다.”
환이 대꾸하였다. 그가 그녀의 젖은 눈가에 입을 맞췄다.
환의 목소리가 다시 장난스럽게 변하였다.
“우리 같이 살면서 이미 할 건 다 한 것 같은데, 앞으로도 입이나 맞추고 아이나 낳아 기르면서 천년만년 더 행복하게만 살아볼까요.”
이래서 그가 좋았다. 아무리 힘든 일도, 슬픈 일도 한때 일이라고 훌훌 털어버리고 웃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남자라서.
연은 대답했다.
“좋아요.”
하얗디하얗기만 한 평원처럼 조용한 눈이 두 사람 위를 축복하듯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연은 더는 겨울이 두렵지 않았다. 아마 이듬해에도, 그 이듬해에도 그럴 것 같았다.
<늑대 신랑>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