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11)

5. 첫눈

연과 세 남자의 겨울나기 준비는 척척 진행되어갔다.

홀로 했으면 굶어 죽기 십상이던 형편이 함께하니 기와집 부럽잖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날씨는 갈수록 추워져 갔다. 하지만 환은 똑 부러지게 차근차근 월동 준비를 해나갔다.

“창호지에 기름을 먹일 겁니다.”

환은 하루를 날 잡아 통째로 온 집의 창호에 기름을 발랐다. 그거 하나 했다고 온 집 안이 훈훈해졌다.

그다음 날엔 구해 온 명주와 목화솜, 짐승의 가죽으로 겨울옷을 짓기 시작했다.

일주일을 통째로 실 만드는 데 쓰고, 다음 주는 통째로 명주 천 자르는 데 썼다. 그다음은 시간이 날 때마다 바느질이었다.

“그런 것도 할 줄 아십니까?”

“못 할 이유는 또 뭡니까?”

연의 입장에서 환은 신기한 사내였다.

투박하고 거친 손으로 새끼손가락보다 짧은 바늘을 쥐고 거침없이 움직였다.

연은 곁에서 열심히 그를 도왔다.

“이건 갖저고리란 건데, 짐승의 털가죽을 안에 덧댄 저고리죠. 이건 저고리 위에 덧입는 배자, 저건 솜을 넣어 누빈 바지….”

환은 아는 것도 많고 만들 줄 아는 것도 많았다.

“이런 것들을 어찌 다 아십니까?”

“말해주면 믿으실 겁니까?”

환이 실실 웃으며 간을 봤다.

그의 장난에 연은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시든가, 표정을 지으며 관심을 끄는 척했다. 최근 환이 오냐오냐 해주는 탓에 연은 간덩이가 완전히 부어 있었다. 문제는 환이 그편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환이 제 입으로 알아서 술술술 불기 시작했다.

“옷 장사치를 따라다닌 적이 있습니다. 몇 날 며칠을 곳간에 갇혀 옷만 지을 뻔하다 겨우 탈출한 적도 있지요.”

참 겪은 일이 많은 사내였다.

환이 해주는 바다 건너 대륙의 얘기를 들으며 그들은 함께 장갑과 모자를 만들었다. 솜버선도 지었다.

그들이 그렇게 안쪽에서 훈훈한 대화의 꽃을 피울 때였다. 진팔은 바깥에서 코를 훌쩍이며 일하고 있었다.

눈이 오기 전, 헌 지붕을 헐고 새 지붕을 잇는 이엉 잇기를 시킨 것이었다.

“진팔아, 잘돼 가고 있느냐?”

환은 중간중간 문을 열어 진팔의 작업 속도를 확인했다.

“에, 엣취! 다 끝, 엣취…! 끝나갑니다! 이게 곧 들어가요.”

“어딜 들어오냐. 그거 끝나면 담벼락 수리해야지.”

“예에…?”

연은 환이 진팔에게 유독 모질게 군다고 생각했다. 저한테는 제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그 팥을 구해오겠다며 팔 걷어붙이는 양반이 말이다. 진팔 역시 같은 생각인지 바깥에서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참 너무하단 생각은 안 드십니까?”

“안 드는데. 아, 아궁이 청소도 해야 쓰겠다.”

“미치셨습니까?”

“허허, 다 끝나면 마당까지 쓸고 들어와라.”

“하씨!”

“어쭈, 빗자루 던졌느냐? 창고 정리까지 추가다.”

하지만 또 진팔이 환에게 하는 짓을 보면 사서 매를 버는 경향이 있었다. 형제같이 투덕거리는 걸 보면 마냥 싫어서 저러는 건 아니겠다 싶어 연은 두 사람에게 신경을 끄기로 마음먹었다.

겨울옷을 다 구비하고 나니 이번엔 창고 정리였다.

“도토리는 가루로 빻아 보관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대추는 더 바짝 말려야겠습니다.”

후엔 다 같이 밖으로 나가 진팔이 담벼락 수리하는 걸 도왔다.

물론 연은 진팔이 저잣거리에서부터 가져온 엿을 우물거리며 마루에 앉아 있었다. 환이 마루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서였다.

“바깥바람이 찹니다. 게서 따끈한 차나 한잔하고 계세요.”

처음엔 다들 일하는데 혼자 쉬어서 머쓱했다.

하지만 환의 말을 듣고 나서부턴 좀 납득했다.

“연 님이 우리 넷 중에 가장 작지 않으십니까. 솔직히 말하면 콩알만 하십니다. 그냥 저희끼리 하는 게 더 빠를 겁니다. 그리고….”

환이 연의 눈치를 슬쩍 보며 덧붙였다.

“콩알만 한 분 일 시키면 제 여기가 아픕니다.”

환은 그 말을 하며 제 가슴께에 넌지시 손을 얹었다.

명백한 놀림이었다. 그의 장난에 연은 혼자서 구시렁댔다.

“…콩알보단 큽니다.”

‘안 크고 싶어서 안 큰 게 아니라 못 먹어서 못 큰 건데….’

연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머니 젖을 독차지한 랑은 지금 그렇게 크지 않나.

랑 언니 생각을 하니까 갑자기 낯이 우울해져서 연은 황급히 환의 모습을 좇았다.

환은 행여나 연이 혼자 앉아 있으면서 심심할까 봐 중간중간 설명을 곁들여줬다.

“바람이 통하는 틈에 흙을 바르고, 흙벽 안쪽엔 갈대나 낙엽을 넣어서 열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진팔이야 말할 것도 없이 빨리 끝내고 들어오려고 묵묵히 일만 했다.

담벼락 수리를 마치곤 다 같이 손 걷어붙이고 김장도 했다. 며칠간 벼르고 벼르던 일이라 손쉽게 끝내버렸다.

환의 진두지휘하에 배추김치며 섞박지며 깍두기가 만들어졌다. 고들빼기에 동치미에 총각김치는 덤이었다.

김장할 때도 환은 연이 힘든 일 못 하게 눈 딱 붙이고 감시했다. 고되고 궂은일은 죄 제가 하거나 진팔을 시켰다.

연은 그냥 그러려니 했다. 참 웃긴 게, 이렇게 받기만 하는 게 처음엔 약간 죄책감이 들었는데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턴 자연스러워졌다.

‘늑대 마음이 참 간사하구나.’

어느새 연은 이런 환의 호의가 조금이라도 더 이어지길 바라고 있었다.

랑이 그랬던 것처럼, 이러다 갑자기 환의 마음이 돌아설 수도 있는 법이었으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연은 혼자 되뇌었다.

‘그때 되면 또 다른 살길이 생기겠지.’

물론 환의 마음이 변한다면 조금, 아니, 많이 슬플 것 같긴 했다.

‘생각하지 말자.’

연은 부러 그런 생각은 피하려고 애썼다. 이 초가에서 지내는 동안만큼은 마음 편히 먹고 살기로 했다. 복잡한 건 딱 질색이었다.

그날 저녁, 군길은 고기 대신 얼어붙은 나물을 잔뜩 캐 가지고 돌아왔다.

“치잇, 김장한 날엔 돼지고기 수육인데.”

진팔은 툴툴거렸지만 금세 팔 걷어붙이고 저녁 하는 걸 도왔다.

연은 환에게 배운 덕에 이제 곧잘 쌀도 짓고 국도 끓일 줄 알게 됐다.

그날 저녁은 산채 비빔밥에 버섯 된장국이었다.

“전 원래 고기파지만 한겨울에 산채 나물 비빔밥은 참을 수 없죠.”

연은 예, 예 그러시겠지요, 하고 대꾸하며 진팔의 그릇에 고추장을 한 술 더 덜어 주었다. 고기를 넣어 볶은 고추장이었다. 이것 역시 환이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

문득 진팔이 언젠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근데 예전에 꿩고기 드시면 설사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돼지나 소는 괜찮습니다.”

진팔이 연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며 대꾸했다.

도대체 돼지나 소는 되는데 왜 꿩은 안 된단 말인가. 무슨 차이가 있는지 이해는 안 갔지만 연은 그러려니 했다. 요즘 들어 꽤 많은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연이었다.

진팔의 그릇에 신경을 써 주니 곁의 남자 하나가 불쌍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환이었다.

또 서운하다느니 뭐니 지랄을 할 것 같아서 얼른 그의 밥그릇에도 고추장을 퍼주었다.

진팔보다 반 술 더 떠주니 그제야 환의 표정이 폈다.

연은 그런 환이 귀엽다고 무심코 생각했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그쪽으로 시선이 가는 걸 참지 못했다.

환은 연이 준 고추장이라며 제대로 섞지도 않고 냉큼 퍼먹었다.

‘짤 텐데.’

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컥, 컥! 여, 연 님. 저 물, 물 좀….”

아니나 다를까 환이 물을 찾길래 얼른 한 사발 가져다주었다.

환은 다른 두 사내 앞에선 위엄 넘치기 그지없으면서 꼭 제 앞에서만 저랬다. 철부지 애처럼 투정 부리고 툭하면 장난질에 일부러 저러나 싶게 덜렁거렸다.

진팔이 그런 환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또, 또 연기하신다. 저렇게 보다 보면 소름 끼치지 않으십니까, 연 님?”

환은 연이 준 물을 받으며 진팔을 보고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진팔아, 좋은 말 할 때.”

닥치거라.

연은 그런 환을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뒷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진팔의 표정만 봐도 무슨 저의가 오갔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군길은 여느 때와 같이 그들을 무시하고 산채 비빔밥을 해치우고 있는 중이었다.

연은 환을 쳐다보며 속으로 한숨을 폭 내쉬었다.

어쩜 저렇게 남자가 알기 쉬울까.

그저 자신에 대한 거라면 껌벅 죽어선.

물을 들이켜며 숨을 팍 내쉬는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저, 저 봐. 또 저렇게 웃잖아.’

어쩜 저렇게 사내가 웃음이 헤픈지.

연은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더 웃긴 건 저의 반응이었다. 저런 이상한 남자가 뭐가 좋다고 이리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지.

‘고개 돌렸다고 분명 울상이 되어 있겠지.’

진팔이 답도 없다는 눈으로 그를 째려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함께 겨울을 나는 동안 환은 점점 연의 마음 깊숙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연은 밥을 먹다 싱숭생숭한 마음이 되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두 볼은 이미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랬다. 환을 생각하면 연은 가슴에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 같다가도 별안간 벌에 쏘인 듯 따끔따끔함을 느꼈다. 서릿발 맞듯 가슴이 춥다가도 온돌 아래 푹 지지는 것같이 따스워졌다. 제 몸이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분명 발정기가 코앞으로 다가와서 그런 것이다.’

연은 발정기 탓을 했다. 이제 진짜 내일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시기였다.

‘그래서 그런 걸 거야…. 다른 이유는 없어.’

요즘 그녀의 몸이 진짜 이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환이란 사내에 한정해서 연의 몸이 고장 나 버린 것 같았다. 비단 환 한정으로 성격이 물렁해진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와 눈빛만 스쳐도, 손끝만 실수로 맞닿아도, 목덜미에서 불이 타오르는 듯한 감각이 솟구쳐 올랐다.

환을 바라보다 보면 피부가 저릿저릿하고 아랫배가 묘하게 뭉치는 게 오한이 일기도 했고, 열이 솟기도 했다.

그와 말을 섞다 보면 목은 바짝바짝 마르는데 목구멍은 되레 축축해지기도 하고, 엉덩이 사이가 근질근질하듯 가만히 못 앉아 있겠다가도 가랑이 사이가 흠뻑 젖어 주저앉을 뻔하기도 했다.

‘발정기라서 그런 거야…. 발정기라서….’

요즘 연은 의식적으로 향낭에 향을 더 많이 채워 넣고 있었다.

인간 사내들이라 제가 발정 난다 해도 그 향을 눈치채진 못할 테고, 그리 많은 양이 필요치도 않을 테지만 제 기분을 위해서라도 그리하였다.

‘이러다 내가 사람 하나 잡아먹지.’

환이 들었다면 코웃음조차 못 쳤을 애먼 생각이었지만 연은 진지했다.

“연 님, 저랑 내기 하나 할까요?”

지금도 그랬다. 마침 환이 얄궂은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히죽 웃으며 한걸음에 다가온 덩치 큰 사내가 다정스레 말을 거니 혓바닥이 절로 말라붙었다.

“네, 네?”

얼굴은 또 어찌나 훤칠한지.

인간들은 다 고만고만하게 생겼다고 여겼는데 환은 아니었다.

피부도 희고, 눈썹은 짙고 까만 데다 쌍꺼풀이 없는데도 날카로운 인상이 아주 훤하게 생긴 미남이다 싶었다.

턱선은 또 얼마나 반듯한지, 상투를 튼 이마 아래는 또 어찌나 선이 고운지.

삶이 팍팍하고 먹고살 걱정만 가득할 땐 몰랐다. 그런데 이리 팔자가 펴고 배가 부르니 다른 데 눈이 휙휙 잘만 돌아갔다.

이를테면 환의 쇄골 같은.

지금도 걷어붙인 남자의 소매 아래로 드러난 핏줄 붉어진 손목이 참 야시꾸레하다고 생각한 연이었다.

‘요망하다, 요망해.’

사람 잡아먹는 요괴가 따로 없는 인간 사내다 싶었다.

‘흰 여우가 사람이 되면 환 님 같으실 게다.’

연은 속으로 생각하며 환에게 황급히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저랑 내기 하나 하자고요.”

환이 싱긋 웃었다. 연은 다시 요동치는 제 심장을 할 수만 있으면 마구 두드려대고 싶었다.

“내기를요? 저랑 환 님이요?”

“예.”

환이 고개를 올려 싸늘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이 오묘했다.

“저는 오늘내일로 눈이 내릴 것 같은데 말이죠, 연 님은 어떠세요?”

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시리도록 새파란 겨울 하늘이다. 분명 물독의 입구도 얼어붙고 창호지에 서리도 꼈지만, 눈이 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물이 얼긴 했지만…. 저런 하늘에 눈 오기 쉽지 않을 텐데요.”

“그러니까 저랑 내기합시다. 연 님이 이기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왠지 사기꾼 냄새가 폴폴 났지만,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환이 하자는 건 웬만하면 들어주고 싶었다.

요즘 연은 이래도 되나 싶게 행복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복하기 그지없었는데 웬걸, 이젠 힘들고 외롭던 날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참으로 간사한 늑대였구나.’

어쩌다 얹혀 함께 겨울을 나게 된 이 초가의 주인이, 연을 바뀌게 했다.

‘이제는 환 님이 없는 초가는 떠오르지도 않아.’

그가 이 초가를 떠날 게 두려울 정도로.

연은 추운 공기에 벌겋게 익은 코를 하고 입을 열었다. 입김이 확 뿜어져 나왔다.

“알았어요. 내기해요.”

환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진짜로요?”

연이 제 무리수를 받아 준 것에 놀라 하는 표정이었다. 연은 배시시 웃으며 대꾸했다.

“네.”

환의 입매가 살짝 굳는가 싶더니, 이내 짓궂게 풀어졌다.

“그럼 연 님은 무얼 내기에 거실 겁니까?”

연은 침을 꼴깍 삼켰다.

무얼 내기에 걸자니 가진 게 너무 없었다.

이 초가도, 눈앞의 물컵도, 심지어 입고 있는 따듯한 겨울 저고리마저도 환의 소유였다.

그렇게 생각이 미치고 나니 꽤 민망했다. 남의 것으로 이제껏 잘도 호의호식했나 싶었다.

연이 당황해하는 기색이 보이자 환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 향낭으로 해주십시오.”

연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예?”

환이 서둘러 대답했다. 그 순간, 그는 어쩐지 조금 초조해 보였다.

“그 향낭 한 번만 벗어주세요. 그거면 됩니다.”

연은 입을 벌렸다.

향낭을 벗어 달라고? 연은 조금 당황했다. 그 부탁이 어쩐지 연에겐 옷을 벗어달라 부탁하는 것보다 더 외설적으로 다가왔다.

연은 속으로 고민했다.

‘괜찮을까? 인간이시니까 발정향을 들키지는 않겠지만.’

행여나 연의 냄새로 다른 수컷 짐승들이 산을 타고 내려오면 큰일이었다.

연이 고민하는 것 같자 환이 냉큼 덧붙였다. 그의 무릎이 약간 초조한 듯 탁탁 움직였다.

“어서요, 연 님. 그냥 향낭일 뿐이잖아요.”

왠지 그가 이 향낭을 빨리 벗겨버리고 싶어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어째서일까.’

사실은 제 앞의 늑대 수컷이 절 한입에 꿀꺽 잡아먹을 준비가 만만인데도, 순진한 암컷은 그저 말 잘 듣는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고 있다고 착각했다.

진실을 꿈에도 모르는 연은 영문 모른 채 대꾸했다.

“그, 그럼 환 님은 제게 뭘 주실 건데요?”

저도 모르게 도발적인 말투가 튀어나왔다.

연의 질문을 들은 환이 조금 놀랐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조금 염치없었나….’

하긴 연의 귀로 듣기에도 좀 그렇긴 했다.

이미 제게 다 내준 사내가 아닌가.

초가의 큰 방도 내주고, 물독도 내주고, 아궁이와 온돌도, 창고의 음식들도, 장작들도, 심지어 옷도 내주었다.

환 역시 그리 생각하였는지 곤란한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고심한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다 내드린 줄 알았는데 역시 우리 연 님은 쉬운 여인네가 아니신가 봅니다. 뭐, 그래서 더 좋지만.”

환이 잠시 고개를 내리깔더니 포부가 가득한 목소리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연 님. 내기에서 제가 진다면 이 초가를 드리겠습니다.”

“네, 네?”

연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초가를 내주겠다니.

제정신 아닌 사낸 줄은 알았지만 이다지도 생각이 없을 줄이야.

“미, 미치셨습니까?”

여과 없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하지만 환도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그 말을 하며 벌어진 입가가 그의 심중에 장난기가 다분함을 보여줬다.

“조건이요?”

연은 의심쩍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네, 조건이요.”

환이 갑자기 손을 뻗어왔다.

“제가 내기에 지면…. 이 초가를 드리겠습니다. 대신….”

연은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물리려 했다. 아니나 다를까, 환은 뒤로 물린 연의 손이 있는 곳까지 기어코 다가와 덥석 잡았다.

환이 입을 열었다.

“저를 같이 가지셔야 합니다.”

연은 황망히 눈을 끔벅였다.

지금 그가 뭐라고 했는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다만 잡힌 손이 무진장 뜨겁고 크다는 것만 머릿속에 박혔다. 크고, 뜨겁고, 열렬하고…. 동시에 애틋하고.

마치 지금 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처럼.

“들으셨습니까, 연 님? 저를 같이 가지셔야 한다고요.”

환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훤칠한 미소에 연의 입가가 절로 벌어졌다.

그녀의 손을 파고든 환의 손이 서서히 느릿하게 깍지를 끼었다. 잡아먹힐 듯 그의 손바닥 안으로 쏙 숨어버리는 제 작은 손가락들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소, 손아귀 힘이 너무 세.’

아찔하였다. 가슴에서 작은 북이 야단법석을 떨고 있었다. 손 하나를 붙든 채 눈만 마주치고 있는데 이 사내 앞에선 벌거벗은 듯 부끄러웠다. 제 손가락 사이사이에 이 남자의 손가락이 하나하나 빠듯이 들어차 있단 사실이 이토록 외설적으로 다가올 줄이야.

환이 손가락들을 서서히 연의 손등 위로 감았다. 빼지 않고 빈틈이 하나도 없을 정도까지 감겨왔다. 이내 손바닥까지, 그와 하나도 떨어진 부분이 없을 지경까지 맞닿았다.

“그래 주실 거죠?”

그 상태에서 환이 쐐기를 박았다.

연은 덜덜 떨리는 손가락 따윈 신경 쓰지도 못하고 침만 꼴깍 삼켰다.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이상했다.

‘분명 인간인데. 인간이신데.’

마치 랑이 언니가 엄청 화가 났을 때나 뿜어대던 거대한 머리 늑대의 기운이 환에게서 느껴졌다.

그것도 랑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크고 잔혹하리만치 강한.

‘내가 발정이 나도 단단히 났구나.’

연은 그렇게 여길 뿐이었다.

인간을 상대로 수컷 늑대의 기운을 느끼다니.

상상 임신 증세까지 보였던 예민한 몸이었다. 연은 그때 그 사건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다, 이건….’

하지만 그것 때문이라기엔 연은 환에게만 반응했다. 다른 인간 사내인 군길이나 진팔에겐 이러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

‘이건 내가 필시….’

연은 예전부터 주욱 부정하던 감정을 마음 밖으로 꺼내기 주저했다.

하지만 더는 쥐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내가 진정으로 환 님을 연모하고 있구나.’

그것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아주 많이.

그와 동시에 연은 초조해졌다.

감정을 깨닫고 나니 환이 한 말이 뇌리에 남아 떠나질 않았다.

이 초가를 내주신다니, 농담이시겠지? 그게 아니라면 이제 더 이상 이곳이 필요 없다는 뜻일까? 그래서 그리 아무렇지 않게 내기를 거신 것일까? 겨울이 지나면 다시 인간들 마을로 내려가시려고?

환은 ‘자신도 가져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지만, 연의 귀에는 그저 얘기 끝에 덧붙인 짓궂은 농담일 뿐이었다.

집을 주겠다는 그 말만이 계속 연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치 환 님께서 저를 두고 멀리 떠나신다는 말로 들렸다.

연의 심장이 덜컥 떨어졌다. 환이 제 앞에 없다는 상상을 하자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 휑한 찬바람이 들어찼다.

“…연 님?”

연이 대답을 안 하자, 환이 고개를 수그려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연은 한쪽 팔을 번쩍 들어 표정을 감췄다.

“아, 알겠으니까 이 손 좀 놔주십시오.”

“아, 네에….”

환의 손이 엄청 뜨작거리며 겨우 떨어져 나갔다.

평소 같았으면 ‘진짜 약속하신 겁니다? 무르기 없으십니다?’ 하며 꼬리를 쳐댔을 환이 조용했다. 연 역시 침묵을 지켰다.

‘걱정해봐야 소용없다.’

연은 애써 섭섭해지려는 마음을 달랬다. 지금은 그래도 환 님이 곁에 계시지 않나. 연은 그걸로 됐다고 여겼다. 더 바랄 게 없노라고.

그러나 연의 어깨는 눈에 띄게 축 늘어졌다. 제 마음을 깨닫자마자 환 님께서 떠나실 생각을 하니 참 싱숭생숭했다. 만약 그녀에게 지금 꼬리가 튀어나와 있었더라면 바닥을 질질 끌고 다녔을 정도로 기죽은 모습일 터였다.

‘아, 오늘 저녁 반찬은 뭐려나!’

연은 상심한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부러 저녁거리 생각을 했다. 군길이 이번엔 뭘 잡아올까, 상상하며 애써 기운을 차려보려 했다.

날은 추운데 차마 닿지 못하고 한 뼘가량 떨어져 있는 그들의 손이 차갑게 식어갔다.

* * *

“오! 이번엔 월척이구먼!”

진팔이 사냥을 다녀온 군길을 버선발로 뛰어가 반겼다.

그야말로 횡재한 날이었다.

평소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날의 수확을 말없이 들어 올렸던 군길이었다.

척-!

그러나 오늘은 양손을 번쩍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자세만 봐도 당당해 보였다.

연은 자신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진 채 뛰쳐나갔다.

“돼, 돼지…!”

군길의 양손에 번쩍 들어 올려진 건 사내 등판만 한 멧돼지였다.

그날 저녁, 초가에 잔치가 벌어졌다. 돼지 잔치였다.

늘 투덜대는 진팔도 그날만큼은 춤을 추면서 저녁 준비를 하였다. 쌈장을 만들기 위해 아껴둔 마늘과 고추도 썰었다.

연 역시 금세 기운을 차리고 돼지 보쌈 준비에 열을 올렸다. 근심과 상념도 일단 밥을 먹고 해야 했다. 그게 연의 신조였다.

그녀는 흥이 오르게 콧노래를 부르며 각종 김치를 꺼내 담았다. 환은 그런 연의 콧노래에 장단을 맞추며 군길과 멧돼지 고기 살을 발랐다.

이제 손발이 척척 맞는 네 사람이었다. 한 상이 금세 완성되었다.

“잘 먹겠습니다!”

연은 이번에도 가장 먼저 숟갈을 떴다. 흰 쌀밥에 돼지 수육에 갓 만든 김치를 싸 한입에 넣었다.

발가락부터 짜릿하게 전해지는 배추김치의 아삭함과 수육의 촉촉한 식감이 연을 기쁨에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맛있다…!’

환은 제 입에 넣기보단 연의 입에 들어갈 보쌈 만드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환은 늘 그랬다. 자기 먹을 건 안 먹고 연 챙기기에 바빴다.

양심에 찔린 연은 자기가 먹을 몫의 고기보다 조금 작은 고기 하나를 그의 입에 몰래 넣어주었다.

“여, 연 님…!”

그러자 환이 지나치게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들이대는 탓에 또 볼을 붉혀야 했다.

각자 고기를 입에 처넣느라 바쁜 군길이나 진팔이 보지 못해 다행이었다.

저렇게 작은 것에도 감동하는 환이 그저 귀엽고 좋았다. 지금 늑대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꼬리를 연신 흔들어댔을 정도로. 그와 동시에 환이 떠난다면 저 모습이 몹시 그리워질 것 같다는 우울한 생각이 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연은 다음번엔 그의 입에 조금 더 큰 고기를 넣어주었다. 심지어 연의 입에 들어갈 것보다 큰 거였다.

환은 모르겠지만 연의 딴엔 최상급의 애정 표현이었다.

‘정말 다 준 거나 다름없다.’

연은 진짜 그렇게 생각했다. 그만큼 환에 대한 제 감정은 진심이었다.

제 진심이 닿았는지, 환은 예상했던 것보다 큰 반응을 보여줬다.

“하씨, 연 님. 오늘 절 여러 번 감동시키십니다.”

그는 입까지 틀어막고 감동한 척을 했다.

환의 주접에 연은 참 몸 둘 바 몰랐다. 매번 들어도 매번 온몸이 배배 꼬였다. 그러다 저 반응을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려왔다.

연은 환을 위해 한 번 더 쌈을 싸며 자꾸 축 처지려는 마음을 달랬다. 환 역시 질세라 연의 입에 고기를 넣어주었다.

“거참, 두 분은 손도 없으십니까?”

그저 진팔만이 밥맛 떨어진다는 표정으로 두 암수컷을 바라봤다. 군길은 여느 때와 같이 묵묵히 밥그릇을 비웠다.

서로 다른 연정의 마음을 담은 쌈이 오가는 화목한 저녁 식사 시간은 금방 끝났다.

집채만 한 돼지를 다 잡아먹고 넷이서 늦겨울에 딴 사과를 아삭아삭 씹어먹었다.

마루에 다 같이 앉았는데 환이 굳이 연 님 곁에는 저만 앉아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하여 연이 마치 대장이 된 것같이 왼쪽 맨 끝에 앉고, 그다음 환이 떡하니 걸터앉았다. 그 뒤가 군길과 진팔이었다.

연은 웃었다. 덩치 순으로 하면 제가 제일 막낸데, 자리는 가장 상전이었다.

환과 함께 만든 도라지 생강 꿀차도 끓였다. 다 같이 차를 홀짝이며 그간 만든 겨울옷을 나눠 입었다.

“와, 이건 차별이십니다. 어떻게 연 님 옷이 팔 할입니까? 저희는 겨울 어떻게 나라고요?”

“시끄럽다. 니들이 추위를 타긴 하냐? 눈밭에서 자도 죽진 않고 입만 돌아갈 놈들이.”

“그럼 입은 돌아가도 된단 소립니까?”

“그렇다.”

옷 장수가 심히 편파적이었지만 다들 예상했던 바라 작은 소동으로 그쳤다.

연은 환이 꼭 여며준 갖저고리에 솜을 넣은 치마까지 입고 호호 불며 차를 마셨다.

귤도 같이 까먹었다. 배도 부르고 별도 달도 훤하고.

“저 달보다 연 님 눈, 코, 입이 더 환하십니다.”

여느 때와 같이 제게 작업을 거는 환도 곁에 있었다.

이보다 완벽할 수 없는 겨울밤이었다.

환이 연의 입에 귤을 까 넣어주며 또 약속했다.

“강이 다 얼면 같이 얼음낚시 하러 갑시다.”

이젠 그 말이 입바른 소리가 아니란 걸 알아 연은 배시시 웃을 뻔했다.

환 님은 약속은 꼭 지키시는 분이었으니까.

팥죽도, 겨울옷도, 도라지 생강 꿀차도.

그러나 그와 동시에 겨울 내내 했던 약속을 다 지키고 나면 끝내 환이 저를 떠날 거란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파 왔다.

연은 서둘러 고개를 숙여 제 표정을 숨겼다.

“얼음낚시 좋지요. 환 님이 물고기에 환장하시기도 하고요.”

침묵하는 연 대신 진팔이 끼어들었다.

기분이 좋아진 연은 그러자고 대답했다. 환이 좋아하는 거라면 뭐든 들어주고 싶었다.

“연 님, 오늘인 것 같습니다.”

그때 환이 진지한 얼굴로 제게 슬쩍 몸을 붙이며 운을 뗐다.

“네?”

연은 의심쩍은 눈초리로 그를 올려다봤다.

“오늘 같은 날은 신선주로 입을 적셔줘야지요.”

그의 등 뒤에서 복분자 술이 튀어나왔다.

언제 창고에서 가져온 걸까.

술을 발견한 진팔과 군길의 눈이 빛났다.

돼지로 위장에 기름칠도 했겠다, 마무리는 그가 신선주라 칭하는 복분자 술맛 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맛이 궁금하기도 하고….’

이윽고 환의 말대로 거나한 술판이 벌어졌다.

귤과 남은 고기 보쌈을 안주로 복분자 술이 잔 가득 채워졌다.

“일단 우리 연 님부터 한 잔!”

“저는 한 모금도 마셔본 적이….”

“에헤이, 한 모금이면 충분합니다. 더 권하지 않을 테니.”

환의 말에 연은 진짜 딱 한 모금만 마셔보자는 생각으로 술을 목으로 넘겼다.

‘어, 괜찮은데…?’

생각보다 맛이 달달하니 좋았다.

이윽고 환이 한 잔 쭉 들이켜고 다음으로 진팔과 군길이 차례로 잔을 비웠다. 그리고 다시 연의 차례였다.

그렇게 몇 바퀴를 돌자, 진팔이 자리에 벌떡 일어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상 무표정이던 군길 역시 손뼉을 쳤다. 환이 또 시작이라는 듯 그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연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정말 환의 말대로 몸이 알딸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둥실둥실 떠다니는 듯도 하고, 구름을 타는 것 같기도 하고. 몸이 노곤하고 나른한 게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나쁜 것 같기도 하고 긴가민가했다.

술맛이 좋아 그런지, 함께 술잔을 나누는 사람들이 좋아서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새 진팔의 공연이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앞으로 굴렀다 뒤로 굴렀다가 아주 날아다녔다. 연은 군길과 함께 박수를 치고 환과 함께 웃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느새 달은 중천에 떠 있었다.

연의 손이 습관적으로 빈 잔을 채우려 할 때였다.

“연 님은 이제 그만하시지요.”

술잔으로 향하는 연의 손목을 중간에서 낚아채며 환이 나직하게 타일렀다.

“나중에 또 마시면 되니까요.”

싱긋 웃는 낯 때문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얼굴에 열이 올랐다. 평소 같지 않게 정리되지 않은 말들도 마구 튀어나왔다.

“더…. 마시구 싶은, 싶은데요.”

연은 고집을 부렸다.

“나중에요, 연 님. 나중에.”

환이 점잖게 그녀를 말렸다.

느끼한 목소리로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중엔 싫다 하셔도 먹일 겁니다. 단둘이서요.”

연은 못 들은 척하며 술잔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 제 몫의 잔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넣어 한 번에 넘겼다.

정신이 몽롱하고 고개가 꾸벅꾸벅 숙어졌다.

중간중간 환이 저지한 연과 달리 마구잡이로 술독을 비워낸 진팔과 군길은 거의 빈사 상태인 듯했다. 특히 진팔은 공연이 힘들었는지 거의 기절했다.

“왜…. 환 님은…. 안 취하세요?”

그 와중에 멀쩡한 환이 이상해 연은 물어봤다.

“아. 저는 취하려면 이 정도론 턱도 없습니다.”

환이 멋쩍게 웃었다.

정말 소매에 팔을 집어넣고 점잖게 앉은 환에게 취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참 잘생겼다.’

연은 환을 보며 생각했다.

‘저렇게 잘생기지만 않았어도 내 맘이 이리 휘둘리진 않았을진대.’

비틀거리는 몸을 기둥에 기댔다. 딱딱해서 비척비척하다 결국 편한 자세를 잡을 수 있었다.

환이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왠지 귓불이 더 뜨겁게 달궈졌다.

“…왜 이렇게 귀여우십니까.”

환이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연은 쿡쿡댔다. 제가 귀엽습니까, 물으려다 낯간지러운 것 같아 참았다.

“환 님…. 눈에만…. 그렇습니다.”

눈이 비몽사몽 감겼다.

“그러면 좋겠는데요.”

환이 중얼거렸다.

연과 환의 눈빛이 공중에서 얽혔다.

‘눈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연은 차마 입 밖엔 꺼내지 못할 말을 생각했다.

눈이 오지 않으면 겨울이 끝날 일도 없을 테니.

‘그러면 환 님도 가지 않으실 테니까.’

환은 저와 함께 봄을 보고 싶다고 했지만, 연은 이 겨울이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늑대 일, 아니 사람 일이란 건 알 수 없지 않은가. 봄이 오고 환이 훌쩍 떠나버린다면 저는 다시 혼자다.

연은 그저 이 사내를 오랫동안 두고두고 보고 싶을 뿐이었다. 변하지 않은 채로.

그게 아쉬워 눈에 눈물이 고이려던 찰나였다.

“어.”

자는 줄 알았던 군길이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에서 뭔가 부슬거리는 것이 내려오고 있었다.

진눈깨비였다.

“눈 옵니다.”

진팔이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하늘에서 쓰레기가 내리는군요.”

마당 쓸기 담당인 그가 잔뜩 꼬인 목소리로 허탈하게 웃었다.

‘눈….’

연은 눈꺼풀을 들어 올려 눈을 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자꾸 눈이 감겼다.

‘결국, 오는구나….’

하늘의 일을 한낱 짐승이 바꾸진 못하는 법이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연은 수마에 사로잡혔다.

누군가 툭 떨어지는 그녀의 머리를 받쳐주었다.

든든한 손이었다.

* * *

연은 새벽녘에 잠에서 깼다.

몸이 후덥지근했다. 그리고 머리가 좀 많이 아팠다.

‘누가 나를 큰 방으로 옮겨놓았구나.’

행여나 감기라도 걸릴세라, 온돌을 활활 태워놓은 게 분명했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었으면 살이 익을 뻔했겠는데.’

진팔이나 군길은 제 몸에 손도 못 대게 하니 환이 이리 해 놓은 게 분명했다.

‘이게 숙취라는 건가….’

연은 제 옆에 놓인 자리끼를 발견하고 단숨에 들이켰다.

몽롱한 와중에도 어제 진눈깨비가 오던 장면을 기억했다.

툭툭.

그때 뭔가가 장지문을 두드렸다.

연은 흠칫 문가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연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 기다란 그림자는, 분명.

“환 님?”

창밖의 그림자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재빨리 물어왔다.

“아, 연 님. 깨셨습니까? 어떻게, 몸은 좀 괜찮으세요?”

“예, 예에….”

연은 얼떨떨한 와중 성실히 대꾸했다.

“머리는 아프지 않으시고요?”

“뭐 이 정도는….”

연은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걸 참으며 얼른 대꾸했다.

‘어제 내기에서 졌지….’

제가 어제 환에게 뭘 걸었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문 바깥에서 환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잠깐 나와보시겠어요, 연 님?”

연은 잠시 주춤했다.

환이 문밖에서 다시 한번 부탁했다.

“잠깐이면 됩니다.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요.”

연은 조금 망설이다가 무릎걸음으로 장지문을 향해 다가섰다. 손을 뻗다 멈칫했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 찬 바람이 훅 들어왔다.

문 앞에 서 있던 환이 그녀에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눈이 이만큼 쌓였어요.”

그가 비켜서자 온 세상이 온통 새하얬다.

연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와아….”

초가의 지붕이 닿지 않는 마루께며, 마당이며, 창고며, 물독까지. 전부 눈이 쌓이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온 산천이 눈에 뒤덮인 것 같았다.

“예쁘지요? 아직 발자국도 별로 안 찍혔습니다. 이거 보고 주무시라고.”

환이 어느새 그녀의 콧잔등에 떨어진 싸라기눈을 털어주며 말했다.

“아직 안 주무시고 계셨어요?”

“아니요. 잤지요. 다만 저 두 무례한 만취객들이 코를 하도 골아대서.”

환이 턱짓으로 작은 방을 가리키며 눈을 굴려댔다.

알 만했다. 연은 환을 동정의 눈빛으로 쳐다봤다.

“한번 눈 위를 걸어보시렵니까?”

환이 제게 손을 내밀었다.

연은 잠시 고민했다.

이미 환의 손길에 연은 겨울옷으로 중무장한 상태였다. 아직 발자국 찍히지 않은 곳에 제 발자국 남기는 재미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럼, 조금만….”

“아무렴요.”

연은 쭈뼛쭈뼛 눈치를 보며 슬슬 마루를 기어 내려가 환의 손을 턱 잡았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이 장갑에 싸인 조그마한 손을 꼭 쥐었다.

“와아.”

인간의 몸으로 설피를 신고 눈 위를 걷는 건 처음이었다.

연이 감탄하자, 환이 눈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신기하지요?”

“네, 네에….”

정말이었다. 눈 위를 걷는 게 아니라 꼭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소복이 쌓인 눈길을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장독대들이 줄줄이 늘어진 창고 주변과 물독이 있는 구간을 지났다. 작은 방을 지나고 뒷간도 지났다. 진팔이 수리해 놓은 담벼락도 따라 걸었다. 이엉 잇기를 마친 지붕에 쌓인 눈도 함께 털어냈다.

그다음은 환의 장난질로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몇 번 주고받다가 연이 넘어질 뻔하는 바람에 얼른 중단되었다.

그 후론 눈덩이에 돌멩이 하나를 박아놓고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건 우리 연 님, 저건 진팔이 놈, 저건 군길이 형님 놈….”

손재주가 좋은 환은 순식간에 눈사람 세 개를 뚝딱 만들어냈다. 연은 환을 만들었다. 다른 세 눈사람보다 큼직하고 정성 들여 만들었다.

환이 솔방울을 주워 왔다. 눈, 코, 입을 박아 넣으니 정말 그럴싸했다.

“이제 이놈들이 눈 녹기 전까지 이 초막을 지켜줄 겁니다.”

환이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연은 속으로 웃었다. 가진 기백은 사내 중의 사내가 따로 없으신 분이 저런 귀여운 소릴 하니 어울리지 않았다.

“아, 물론 연 님 눈사람은 일 안 하셔도 됩니다. 나머지 세 놈이 할 테니까요.”

그러면서 저희가 잘 지켜드리겠습니다, 하고 눈웃음을 살살 쳤다.

진팔이 들었다면 눈사람마저도 차별을 당하냐 빽빽 소리쳤을 말이었다.

눈사람을 다 만든 후엔 환이 그녀를 볏짚 자루에 앉히고 썰매를 끌어준다고 했다. 연은 됐다고 말리느라 진을 뺐다.

그다음엔 환이 소매에서 군고구마 하나를 꺼냈다.

“노느라 시장하시죠.”

살다 살다 노느라 배고플까 봐 밥 챙겨주는 사람이 다 있었다.

껍질을 하나하나 다 까서 그녀의 입 안에 쏙쏙 넣어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차게 식어버려서 미안하다고 그가 거듭 사과했다.

‘식어도 맛만 좋은데….’

연은 그가 주는 고구마를 남김없이 다 받아먹었다. 몇 입은 환에게 권하기도 했다. 환은 거듭 사양하다 마지막이 돼서야 한 입 정도를 베어 물었다.

눈놀이를 다 끝내고 나자 주변이 온통 그들의 발자국뿐이었다.

“어차피 또 쌓일 겁니다.”

환이 빙긋이 웃으며 다시 연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처음 눈을 밟았을 때처럼 천천히 마당 구석구석을 한 바퀴 또 돌았다.

아까는 환의 걸음이 느릿느릿하더니 이번엔 연의 걸음이 늦어졌다.

큰 방으로 돌아가기가 싫었다. 이대로 환의 손을 잡고 집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만 한대도 좋을 것 같았다.

‘내가 진짜로 미친 게 분명하구나.’

마침내 한참을 뜨작거리던 환이 연을 방문 앞에다 고이 모셔주었다.

“이 밤에 나와줘서 고맙습니다.”

차가운 바람에 벌게진 연의 코를 검지로 톡 건드리며 그가 웃었다.

들어가서 쉬시라며 환이 저를 방문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연은 깨달았다. 한밤중 둘만의 나들이가 끝난 것이다. 이젠 환 님을 보내드려야 할 차례였다.

문이 살짝 닫힐락 말락 하던 찰나였다. 지붕 위에 쌓였던 눈이 툭 떨어지며 비스듬히 세워져 있던 빗자루가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빗장을 굳게 닫고 있던 연의 마음속 뭔가도 툭 쓰러졌다.

그래서 실수하고 말았다.

연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

몸을 돌리는 환의 옷자락을 그만 붙들고 만 것이었다.

“…가지 마세요.”

환의 몸이 우뚝 멈춰 섰다.

연의 붉어진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방울이 쌓인 눈 떨어지듯 후두둑 쏟아졌다.

“…같이 들어오세요. 가지 말아요.”

그간 죽어도 아니 말하리라 했던 진실이 터진 둑처럼 연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환 님…. 제가 거짓을 고했습니다. 처음부터 다 제 잘못입니다. 제 잘못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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