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꼬리 치기
평소 환의 넘치는 자신감의 원천은 애먼 데서 오는 게 아니었다.
환은 대체로 엔간한 일은 다 잘했다.
제 자랑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했다. 눈썰미가 빠르고 몸이 잽싸 곁에서 하는 일을 몇 번 보기만 해도 따라서 쓱쓱 해치웠다. 사냥은 말해도 입만 아프고, 짐승 몸뿐만 아니라 사람 몸으로 하는 다른 것들도 썩 잘했다.
그런 까닭에 혓바닥도 제법 잘 썼다. 필요할 땐 넉살도 좋았다. 어디 가서 기세로 밀리는 일도 없었다. 능글맞기론 한양의 김선달 못지않았다. 실제로 몇 달 인간 장사꾼을 따라 바다를 건넌 적도 있었다.
남이 평생을 걸쳐도 하기 힘든 경험을 어려서부터 몰아서 한 탓에 어지간해선 놀라는 일도 없었다. 당황하는 일도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 우나?’
환은 얼이 쏙 빠지고 말았다. 지금껏 당혹스러운 일이 없던 게 바로 오늘을 위함이었나 싶을 정도로.
‘환장할, 어떡한다.’
아무래도 첫 만남부터 제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훌러덩 반해버린 이 여자는 고생을 깨나 겪은 듯싶었다.
곤란했다. 어디 가서 머리 잘 돌아간다는 소리 좀 들은 환으로서도 눈앞이 깜깜해지는 퍽 다채로운 경험이었다.
‘제길, 그래서 살진 닭 부럽잖게 통통히 살 올랐어야 할 초겨울에 이렇게 빼빼 마른 건가. 대체 언 놈들이….’
대상 모를 분노가 불길처럼 솟았다가 곧 눈앞의 여자에 대한 측은함으로 바뀌었다. 그다음엔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막막함. 이름을 알게 된 후에 갈 길 잃은 감정은 배로 아련해지기까지 했다.
연이라니.
‘미친, 이름도 고와.’
일 년을 주야장천 쫓아다녔던 암컷은 그 이름마저 환의 심장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어디서부터 일을 진행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런 적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당장에 이 암컷을 갈 곳 없는 신세로 만들었다는 무리를 쥐어 패놓아야 하나. 그전에 다신 도망가지 않게 짝부터 맺고 봐야 하나.
하지만 생각해볼 것도 없는 우선순위가 존재했다.
연을 달래야 했다. 놀란 가슴일 테니 일단 따듯한 아랫목에 눕히고 다디단 조청부터 먹여야 할 듯싶었다. 지금 그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나머진 전부 그 후였다.
“일단 들어갑시다. 이것 보십시오. 손끝이 다 벌겋습니다. 대체 얼마나 바깥에 있었던 겁니까?”
환은 여자를 일으켜주며 스친 어깨에도 제 가슴께가 벌렁임을 느꼈다.
‘부드러워.’
환은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태연한 목소리를 가장하느라 진을 뺐다.
“이런, 아궁이에 불도 아직 안 붙었네…. 안 되겠다, 몸 좀 녹입시다.”
연은 아직도 함께 겨울을 나자는 제 제안을 곱씹는 듯했다. 저를 쳐다보는 얼굴이 멍했다. 그 모습을 보고 환은 저도 모르게 멍청한 표정을 지을 뻔했다.
‘환장하게 예쁘네.’
하마터면 저 작은 머리통을 쳐다보다 다음 할 말을 잊을 뻔했다. 골똘히 저와 했던 대화를 생각하는 중이라고 얼굴에 써 있는 게 말도 못 하게 귀엽고 처연했다.
“저기. 나리….”
환은 사태 파악이 덜 된 듯 허둥지둥 저를 붙드는 연을 불쑥 붙잡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정말 제가 겨우내 여기 머물러도 괜찮다는 말씀이신지요?”
“아무렴요. 아, 저기 부싯돌 좀 가져다주시겠습니까?”
환은 냉큼 대답했다. 몇 걸음 안 되는 거리의 부싯돌을 가리키며 부탁하는 것은 덤이었다.
조심성도 많고 겁도 많아 보이는 암컷이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될 것 같았다. 자꾸 이것저것 물으려 하기에 얼른 주의를 다른 데로 돌렸다.
“예…? 부싯돌이요?”
아니나 다를까 뭐라 우물쭈물 대꾸하려던 연이 환의 부탁에 얼른 부싯돌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거기 그 검정 돌멩이입니다. 갈색 말고요. 네, 네, 그거요.”
헤매는 연에게 환은 부싯돌 생김새를 가르쳐주었다.
“고맙습니다.”
환은 다정스레 웃으며 연에게서 건네받은 부싯돌을 움직였다. 그의 손에서 몇 번 튕기기가 무섭게 짚에 불이 붙었다.
연은 그 모습을 휘둥그레 바라보았다. 제가 오전 내내 몇 번을 시도해도 실패한 일이었다.
‘그걸 이다지도 쉽게….’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연을 바라보며 환이 대수롭잖게 입을 열었다.
“원래 불씨는 한번 붙여 놓기가 고역이라서요. 숙달된 자가 아니면 쉽지 않지요. 그러니 당분간 이 불씨를 살려서 쓰는 거로 합시다.”
환의 손에서 피어난 화마가 짚을 태우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타들어 가자 그가 말린 쑥을 섞어 불을 더 키웠다. 그러곤 장작이 차곡차곡 쌓인 아궁이 속으로 불씨를 훅 집어넣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곧 방까지 따듯해질 만큼 넉넉한 불길이 솟을 겁니다.”
“네, 네에.”
연은 환의 움직임을 빠짐없이 숙지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 모습이 환에게 너무나 귀엽고 야무져 보였다.
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환은 생각했다.
‘냄새 맡고 싶다.’
지금 환의 머리통을 지배하는 단 한 가지 생각이었다.
늑대의 가장 원초적이고도 기본적인 본능, 후각.
늑대들의 관계는 서로 냄새를 맡는 것으로 시작과 끝을 보았다. 냄새를 깊이 들이켜는 것만으로 상대의 성별, 발정기 유무, 더 나아가 속한 무리의 규모와 짝의 존재 여부까지 알아낼 수 있었다. 따라서 냄새 맡기를 허락한다는 건 자신의 모든 걸 허락한다는 뜻과 같았다.
한데 연의 근처에선 아까부터 쿰쿰한 향내밖에 나지 않았다.
‘목 근처에 메고 있는 저 향 주머니 때문인 듯싶은데….’
연의 냄새를 마음껏 맡을 수 없는 와중에도 환은 감탄했다.
‘똑똑하기도 하지.’
사정을 들어보니 홀로 지낸 지 좀 된 것 같은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다른 수컷들이 저보다 그녀를 먼저 발견했더라면….
환은 어금니를 드러내려던 걸 참았다. 생각만 해도 정신이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역시 내 여자다.’
아까 흔적을 지우는 모습을 보건대 똘똘하기가 보통이 아닌 여자였다.
환은 연이 보면 볼수록 마음에 쏙 들었다.
맘 같아선 바로 저 향 주머니를 뺏고 목덜미에 코를 박아 냄새를 흠뻑 들이마시고 싶었다. 할 수 있다면 혀로 굴렸다가 이도 박아넣고, 그러다가 저 옷을 서서히 한 꺼풀씩….
“나리? 저분들은…?”
애먼 상상을 해서일까.
환은 연을 향해 한껏 올렸던 제 입꼬리가 비틀리는 걸 느꼈다.
냄새만으로도 이미 알아차렸다. 그들의 뒤에 산에서부터 슬금슬금 내려온 수컷 두 마리가 쭈뼛거리며 서 있다는 걸.
환은 휙 몸을 돌렸다.
군길과 진팔이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환을 지켜보고 있었다. 둘 다 옷을 꼼꼼히 챙겨 입은 인간의 모습이었다.
환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그들의 대화를 여과 없이 느낄 수 있었다. 같은 무리이기에 정신적 소통이 가능한 터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대장.’
‘아궁이에 불은 왜 피우고 있는 거고요.’
‘늑대 모습으론 왜 변하질 않는 겁니까?’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요?’
환은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하여튼 도움 안 되는 아우들 같으니.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나 있으랬더니 기어코 이곳까지 기어 나왔다.
게다가 환을 바라보는 눈이 상당히 측은한 게 마치 딱한 짐승을 바라보듯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게 아니라고 해명할 새도 없이 아우들이 곧 한마음 한뜻이 되어 환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차인 거지…?’
‘차였네.’
‘딱 보니까 차였어.’
‘불쌍한 우리 대장.’
‘괜찮습니다. 세상에 저 암컷 한 마리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럼. 늑대들 중 반이 암컷입니다, 대장.’
아니, 이놈들이! 환은 속으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 대롱에 좆 박을 등신들아. 안 닥치냐?’
으름장을 놓자 머릿속을 채우던 두 수컷의 말소리가 순식간에 그쳤다.
“나리……?”
연은 조심스럽게 군길과 진팔을 살피다 멈칫했다.
향낭을 걸침으로써 자신을 보호했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바로 연 자신도 냄새를 제대로 맡지 못한다는 거였다.
따라서 연은 환은 물론이거니와 뒤에 나타난 사내 둘 역시 인간화한 늑대란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물론 같은 무리도 아니었기에 머리 늑대인 환이 들을 수 있는 두 수컷의 속마음 소리도 연은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연은 뒤에 나타난 사내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군길과 진팔, 두 사람 다 인간의 옷을 차려입고 있었지만, 신분이 달라 보였다. 진팔이 시정잡배나 입을 법한 후줄근한 평민의 옷이었다면 군길의 옷은 고급 비단이었다.
똑같은 환의 부하들이었지만 신분에 차이가 난 건 다른 이유가 없었다. 수중에 가지고 있던 인간 옷 중 몸집이 큰 군길에게 맞는 옷이 저 옷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졸지에 군길은 고귀한 양반이, 진팔은 그 하인 신세가 되어 있었다.
‘아! 아까 말씀하셨던 일행분들이시구나.’
연은 그들을 알아보곤 서둘러 허리를 숙이려 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고민이 생겼다.
‘세 분 중 누가 가장 윗분이시지.’
아무리 인간사에 무지하다시피 한 연이라도 예의범절이란 걸 알았다.
인간들은 보통 값비싼 옷을 입은 사람이 더 귀한 취급을 받았다.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들끼리는 더 나이가 많은 쪽이 대우받았다.
누더기나 다름없는 옷을 걸친 진팔은 바로 후보에서 빼낼 수 있었다. 문제는 나머지 두 사람이었다.
연은 똑같이 귀한 차림을 한 환과 군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이가 많은 쪽….’
고민이 조금 길어졌다. 하지만 연은 결론을 내렸다.
자신을 바라본 채 서 있는 세 사내를 향해, 이윽고 연이 고개를 숙였다.
“인사드립니다, 나리. 초가에 머물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이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한 자리에 환의 아우 군길이 눈을 끔벅거리며 서 있었다.
환보다 나이가 적은 군길이었지만 연의 눈엔 대여섯 살 연배는 더 먹어 보였던 것이다.
군길의 잘못이 아니라 그의 얼굴의 잘못이었다.
‘환 님의 형님이시겠지.’
연은 짐작했다.
익숙지 않은 인간의 예의범절에 신경을 쓰느라 그녀는 세 사내가 얼음장처럼 굳어버린 걸 눈치채지 못했다.
연은 예의 바르게 진팔에게도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예, 예에….”
진팔도 허겁지겁 연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미래의 암컷 머리가 되실 분께 가만히 인사를 받고만 있다가 환에게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그러니까 이쪽은….”
군길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연을 보며, 상황이 이상하게 굴러가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은 환뿐이었다. 환은 군길을 소개하려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연의 똘망똘망한 눈빛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환은 차마 면전에다 대고 그대 눈이 삐었다고 말할 순 없었다.
“…내 형님 되시는 군길.”
군길이 눈을 끔벅였다.
“그리고 이쪽은 제 수하 진팔이.”
진팔 역시 눈을 끔벅였다.
환이 진팔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으며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우리 겨우살이를 함께할 똥개… 아니, 식구들입니다.”
소개가 다 끝나고 나서 돌아본 군길과 진팔의 눈은 환을 다급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애원에 가까운 눈빛들이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아니, 대장. 군길이가 왜 갑자기 대장 형님이 된 거예요?’
환은 아우들의 다급한 긴급 신호를 무시했다. 눈치껏 행동하라며 신호만 보냈다.
“자자, 우리는 이만 들어갑시다. 몸 다 얼겠습니다.”
은근슬쩍 연의 어깨를 붙들고 집 안쪽으로 이끌며 환은 한 손을 등 뒤로 보냈다.
당연히 등 뒤로 보낸 그의 손은 주먹을 불끈 움켜쥔 채였다.
말은 없었으나 그 뜻은 매우 분명했다.
‘초 치면 죽는다.’
군길과 진팔은 서로를 바라보다 합죽이가 되었다. 서둘러 초가 안으로 들어가는 예비 대장 부부를 따랐다.
아직 연은 그들이 늑대인 줄도 몰랐지만, 일단 두 수컷의 마음에 연은 이미 무리의 안주인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형님이 두려워서라도.
* * *
환으로선 바로 초가에 눌러앉고 싶었다. 하루 종일 제 암컷만 들여다봐도 시간이 모자랄 듯했다.
그러나 마르고 연약해진 연을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환의 눈에 비친 연은 추위와 배고픔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한 마리 들짐승이었다.
하여 환은 두 아우를 데리고 일주일간 마을에 내려갔다. 명주와 목화솜을 사재기하고, 산을 돌며 짐승의 가죽을 잔뜩 구해 왔다.
물론 중간중간 연을 보러 초가에 들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딱 일주일 지난 후, 환은 마침내 겨우살이에 필요한 물품과 식량을 잔뜩 이고 초가로 돌아왔다.
“이제 정말 우리 네 식구서 겨울을 나는 겁니다.”
털썩. 환이 웬만한 인간 남자는 들지도 못할 거대한 짐을 바닥에 풀썩 내려놓으며 말했다.
연은 자신을 향해 싱긋이 웃는 환을 보며 입을 벌렸다.
식구. 그 단어에 가슴께에 이상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듯했다.
두근.
연은 단정 지었다.
‘요즘 고생을 많이 해서 심장에 무리가 온 게 분명하다.’
그렇게 연은 환의 무리에 새 식구로 들여져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다행히 연은 금방 적응하였다. 환이 그야말로 연을 하늘에서 강림하신 선녀인 양 극진히 모셨기 때문이었다.
같이 살게 된 첫날부터, 환은 새로운 식구가 되신 연 님과 함께 아랫목에 앉아 겨울용 덧신인 설피를 만드는 법을 몸소 전수하기 시작했다.
진팔은 제 대장을 보며 생각했다.
‘지독하다, 진짜.’
암수가 제법 다정해 보이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진팔은 감탄했다.
‘어쩜 저리 내숭을 잘 떠실까.’
진팔은 한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수컷이 떨 수 있는 재롱을 죄다 목격한 듯한 느낌이었다.
연의 근처에서 환은 말투조차 바뀌었다.
진팔은 그간 환에게 들은 욕을 엮어 사전을 만들 수도 있었다.
‘일 안 하지? 이 오줌에 씻겨 나와 똥물에 헹굴 새끼가.’
‘대갈빡 제대로 안 굴리면 행줏물에 빨아서 널어버린다.’
‘돼지같이 처먹기만 하는 놈아, 일 안 하냐?’
대장의 어휘력은 매우 조예 깊고 화려했다.
그러나 연 앞에서는 달랐다.
여전히 조예가 깊고 문장력이 우수하긴 했는데, 어쨌든 확실히 달랐다.
‘오늘따라 달이 훤합니다. 함께 보는 이의 마음 씀씀이가 훤해서겠지요.’
‘야무진 손이 곱기까지 하면 반칙이라는데, 처자 손이 딱 그렇습니다.’
‘어떤 이는 먹는 것도 복이 저절로 굴러들어오게끔 먹지요. 아니, 근데 연 님께서도 그렇게 드시네요?’
유능함과 자상함으로 무장한 환은 그야말로 다른 사람, 아니 다른 늑대가 되어 있었다.
‘늑대 성격이 바뀌면 곧 죽는다던데.’
진팔은 조만간 새 대장을 구하러 다녀야 하는 게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상대도 보통 상대는 아니었다. 진팔은 고개를 들어 환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연을 바라보았다.
‘지독하긴 저쪽도 지독하다.’
연은 한마디, 한마디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달은 원래 훤합니다.’
‘제 손이 곱든 야무지든, 환 님께서 신경 쓰실 일이 못 됩니다.’
‘배고프면 뭐든 맛있게 먹게 되어 있습니다.’
철벽도 저런 철벽이 없었다.
저쯤 되면 환이 싫어서 퇴짜를 놓는다기보단 본디 저런 성격인 듯싶었다.
연의 부모는 두 자매가 장차 무리를 이어받을 것을 예상하고 엄격히 교육하였다. 게다가 호승심 강한 랑과 늘 부대끼며 살다 보니 연 역시 다정함이나 상냥함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연은 시키는 일은 묵묵히 하였으나 천성이 살갑지는 않았다. 특히 아첨엔 재능이 없었다. 속에 없는 말은 죽어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더욱이 최근에 안 좋은 일을 당한 참이었다. 아무리 환에게 은혜를 입었어도 그의 실없는 농담에는 경계 어린 반응밖에 나올 수 없었다. 진팔이 바로 본 셈이었다.
웬만한 사내들은 저렇게 무반응에 무표정으로 관심 없다는 티를 팍팍 내는 암컷에겐 풀이 죽기 마련이었다.
한데 환은 별종인지 저런 연에게 더 헤벌쭉이었다.
‘크흐, 도도하다. 더 좋아.’
자기가 좋다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방 안에서 환과 연이 대화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늘을 보니 눈이 오기 직전이네요. 오늘 같은 날은 팥죽을 해 먹어야 합니다.”
환이 여느 때와 같이 연에게 꼬리를 치고 있었다.
‘형님이 저런 간드러진 목소리를 낼 줄 아셨다니.’
진팔은 평생을 환과 함께한 제 인생에 회의감을 느꼈다.
먹을 것 얘기에 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침 창고에 팥을 저장해두었습니다. 그럼 오늘 저녁은 팥죽으로 할까요?”
“연 님과 저는 어쩜 생각하는 것도 이렇게 같은지. 이게 바로 천생연분….”
“아궁이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환의 말을 자르고 연이 냉큼 일어났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방 안에서 나오는 연의 뒤로 처량하게 앉은 환의 모습이 보였다.
진팔은 저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인생의 의미를 느꼈다.
‘아무래도 형님께서 임자를 만나신 듯하다.’
진팔은 연에게 새삼 충성을 다짐하였다.
한편 환은 열심히 엮어가던 짚을 내버려 두곤 쩝, 입맛을 다셨다.
저를 내버려 두고 휙 부엌으로 떠난 연의 까만 뒤통수를 아련하게 쳐다봤다.
‘보통 암컷이라면 엔간히 넘어올 법도 한데, 거참.’
하지만 연은 보통 암컷이 아니었다.
환이 아무리 입술에 참기름을 둘러대고 아양을 떨어도 눈썹 하나 깜박이는 법이 없었다. 외려 음식 얘기나 초가에 관한 얘기 등 실용적인 정보에 더 관심을 가지시는 듯했다.
성격 또한 도도하기가 은도끼와 금도끼 가지고 나무꾼 안달 내는 산신령 못지않았다.
물론 그건 환에겐 어떠한 장애물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좋아.’
연은 다른 보통의 인간 여자들보다 눈꼬리가 새초롬한 편이었다. 오른쪽 눈 아래엔 눈물 같은 점도 야무지게 찍혀 있었다.
‘크흐, 요염하다.’
그 물망초 같은 눈으로 저를 이상하다는 듯 한 번씩 쳐다볼 때마다 환은 짜릿함을 느꼈다.
‘더 째려봐줬으면 좋겠다.’
그녀의 시선조차 환은 좋았다. 어쨌든 제게 향하는 것이었으니까.
환은 냉큼 연을 뒤쫓았다.
“같이 갑시다!”
* * *
연은 부엌께까지 저를 따라오는 환을 보곤 생각했다.
‘참 부담스러운 집주인이란 말이지.’
환 님의 환대에 갈 곳 없던 처지에서 겨울을 날 초가를 구한 것은 당연히 고마웠다. 겨울을 무사히 나고 제 사정이 좀 더 나아진다면, 어떻게든 은혜를 갚고 싶었다.
하지만 환 님은 좀 독특한 집주인이었다.
연은 환이 저를 하인으로 삼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당연한 생각의 흐름이었다.
인간사에 무지한 연이었지만 도움을 받은 분께 보답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늑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인간들 사는 모습을 종종 구경하던 연에게 하인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꼬리’ 같은 존재였다.
연은 인간 모습을 하고 있어도 본연이 늑대였다.
따라서 그녀는 지금 자신이 이 환이라는 사내가 거느리는 무리의 ‘꼬리’가 됐다고 여기고 있었다.
꼬리들은 머리가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했다. 때론 시키지 않더라도 나서서 수발을 자청하기도 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래서 연은 초가에서 지내게 된 후로도 궂은일을 자처했다. 지금 아궁이를 살피러 가는 것도 그래서였다.
‘한번 배운 건 잊어먹지 않는 꼬리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어.’
환은 저번에 연에게 불 지피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연은 잊지 않고 불이 꺼지지 않도록 열과 성을 다해 아궁이를 지킬 생각이었다.
‘무능력하다는 소리만큼은 들으면 안 돼.’
연은 절실했다.
꼬리를 치며 살갑게 구는 것보단 무리에 실질적 도움이 되는 것을 환이 더 좋아하리라 여겼다. 그게 여태 연이 무리에서 살아남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연의 타고난 성격상 살랑거리며 아부 떠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연은 랑의 무리에 있을 때 늘 입만 살아 아첨하는 늑대들을 경계했다. 그런 늑대들이 보이면 나중에 언니에게 살짝 귀띔을 주기도 했다.
그런 늑대들은 종류도 다양했다.
다른 늑대가 발견한 사냥감을 잡아놓곤 마치 제 공로인 양 떠벌리는 놈. 사냥감을 나눌 때 랑에게 일부러 살랑거리며 다가와 은근슬쩍 새치기를 하는 놈. 사냥할 때 있어서 늘 위험 부담 없는 편한 역할만 골라 맡는 놈 등.
연은 평소에 잘 지켜보고 있다가 그런 놈들이 작업을 개시할라치면 쓴소리를 서슴없이 뱉으며 중재를 했다.
연의 그런 면모는 분명 랑의 우두머리 자리를 공고히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모두 랑이 연과 척을 지기 전 이야기였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일 뿐이야.’
괜스레 씁쓸해졌다. 연은 서둘러 아궁이까지 다가가 배운 대로 불씨가 살아 있는지 확인했다.
환 님이 저녁에 팥죽을 먹을 생각이시라고 했으니 미리부터 불을 지펴 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연이 부지깽이에 손을 대려고 할 때 누군가의 손이 그녀를 황급히 저지했다. 환이었다.
“어어어어, 그거 이리 주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저보다 악력이 배는 센 남자가 부지깽이를 낚아채니 연은 두 눈 멀쩡히 뜨고 도구를 빼앗겨 버렸다.
“그 고운 손으로 부지깽이 같은 거 잡으시면 안 됩니다.”
연이 뭐라고 반박할 새도 없이 환이 모든 일을 착착 해버렸다.
부지깽이로 들쑤시다가 연료가 되는 장작을 쪼개 쑥쑥 집어넣고 부채질했다. 불이 순식간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제, 제가 해도 되는데요. 환 님.”
아무리 연이 나서려 해도 마찬가지였다.
“쓰읍! 안 됩니다. 손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화마엔 약도 없습니다. 가만히 계십시오.”
그러나 환은 너무 단호했다. 그는 오히려 불씨가 튀기라도 하면 위험하니 마루에 앉아 계시라고 권했다.
연은 황당했다.
정말 가지 않으면 손 붙잡고 끌고 갈 기세라서 연은 주춤주춤 두어 걸음 물러났다.
‘참 이상한 인간 사내로구나.’
연은 생각했다.
어쩌면 인간들이란 제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위계질서가 뚜렷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팔 님이나 군길 님을 대하실 땐 또 다르신데….’
환은 다른 두 사내에겐 악귀가 따로 없었다. 아주 쥐 잡듯이 잡았다.
지금도 진팔은 환의 명령을 따라 마당을 쓸고 있었다. 군길은 사냥을 간 상태였다.
형님 되신다는 군길도 환의 눈치를 보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이 인간 사내 무리의 ‘머리’는 환인 듯했다.
알면 알수록 헷갈렸다.
연은 진심으로 환이 제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눈곱만큼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쪽으로 의심을 하기에 그녀는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였다. 살아남기에 바빠 그런 쪽 눈치가 완전히 소멸한 셈이었다. 형부인 대광에게 데인 것 외엔 한 번도 다른 수컷과 엮여본 적 없는 숫처녀인 것도 한몫했다.
‘인간 사내들은 원래 다 이런가 보다….’
결국, 연은 홀로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연의 착각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지내실 방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연은 불씨를 다 살린 환에게 물었다.
그동안 세 사람이 초가를 오고 가긴 했지만 아주 잠깐 머물렀을 뿐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같이 지내게 됐으니 필요한 절차였다.
초가에는 방이 두 개 있었다.
큰 방은 아랫목에 위치해 밤마다 후끈후끈했다. 작은 방은 창고와 가까이 있었다.
오늘 밤부터가 당장 문제였다.
남자는 셋에 여자가 하나였다.
아무리 짐승이어도 암수가 유별하였다. 둘씩 섞어 자는 건 못 할 짓이었다. 그렇다고 장정 셋을 한방에 몰아넣자니 안 그래도 줄어든 연의 염치가 아예 소멸하는 기분이었다.
연은 당연히 자신은 창고를 쓰게 될 거라고 여겼다. 얼른 환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갔다.
“그럼 환 님, 제가 창고를….”
“당연히 연 님이 큰 방을 쓰셔야지요. 여인은 차가운 데 누우시면 안 됩니다.”
환의 즉답이 떨어졌다. 연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예…? 하지만 사람 넷에 방이 두 개뿐인데 어찌 제가 큰 방을….”
“그러니까 더욱 연 님께서 큰 방을 쓰셔야지요.”
환은 아예 절대 안 된다며 펄펄 날뛰기 시작했다. 외려 연에게 이런 말을 하시는 게 아닌가.
“거참. 연 님, 창고는 주무시는 데 쓰는 곳이 아닙니다.”
연도 그 정도는 알았다. 다만 제가 꼬리인 셈이니 창고에 머물게만 해줘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던 것뿐이었다.
연은 멀뚱히 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마치 해는 동쪽에서 뜬다는 듯, 연이 큰 방을 쓰는 게 당연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환과 나머지 두 사내가 작은 방에서 주무신다는 뜻인데….
“하지만 그 좁은 방에서 세 분이 어찌 주무십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 방법이 있습니다.”
환이 껄껄 웃었다. 그가 순식간에 표정을 싹 바꾸곤 얘기했다.
“진팔이랑 군길 형님을 밖에서 재우면 되지 않습니까.”
연은 환이 농담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환의 얼굴은 너무 진지했다.
“그러면 제가 그냥 작은 방 쓰겠습니다. 차라리 큰 방에서 세 분이 주무세요.”
“쓰흡! 안 된다니까요.”
연과 환은 서로 작은 방을 쓰겠노라 몇 번 더 투닥였다.
결국, 환이 퉁퉁거리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연 님이 큰 방 안 쓰실 거면 죄다 초가에서 내보내겠습니다. 연 님뿐만 아니라 진팔이 놈과 군길 형님도요.”
연은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저뿐만 아니라 진팔과 군길까지 내쫓겠다는 말에 더 우길 수가 없었다. 환의 말투는 다정했지만, 속에 담긴 뜻은 확고했다. 더 고집하다가 정말 나가라고 할까 봐 연은 냉큼 꼬리를 말았다.
‘참 이상한 인간 사내로다….’
연은 생각했다.
보통 주인이라면 하인보다 더 좋은 것을 쓰는 게 정상 아니던가?
하지만 연은 더 생각하길 포기했다.
‘인간들은 원래 다 이런가 보다.’
그렇게 연의 착각은 점점 크기를 키워갔다.
환은 불씨를 지피고 팥을 물에 담갔다.
“이렇게 불려 놓고 초저녁 때 삶기 시작하면 제때 먹을 수 있을 겁니다.”
연은 환의 말을 얼른 머릿속에 받아적었다.
‘환 님은 참 아는 게 많으시구나.’
가끔 이상하게 행동하긴 해도 역시 환 님은 좋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아는 것도 많은 사람이 무지한 연을 가르쳐 주면서 화 한 번 내는 법이 없었다.
진팔을 매섭게 다그치는 것 보면 그다지 온유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이런 사람을 집주인으로 만나다니, 참 행운이구나.’
연은 집주인에게 퍽 만족하고 있었다. 환의 과한 친절은 부담스럽긴 했지만, 뭐 대수일까 싶었다.
그들은 다시 마루로 돌아가 설피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설피는 눈 쌓인 길을 쉽게 걸을 수 있도록 만든 덧신이었다.
“앞으로 폭설이 자주 내릴 겁니다. 무산은 설녀의 고향이라고 하니까요.”
환이 설피 만드는 법을 찬찬히 설명해주었다.
피나무 껍질을 벗겨 뼈대를 만든 다음, 노끈으로 칭칭 동여매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만들어 두면 눈이 와도 두려울 게 없습니다. 푹신푹신한 눈길을 사뿐사뿐 걸을 수 있으니까요.”
환이 연을 향해 다정하게 웃었다.
“나중에 눈 오면 같이 산책하러 나갑시다. 아마 구름 타는 것 같으실 겁니다.”
두근두근.
‘어라…?’
연은 갑자기 심장에 개미가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왜 이러지….’
남녀 간의 일에 대해선 아직 아기나 다름없는 연이었다.
훤칠한 얼굴을 한 사내가 제 앞에서 주섬주섬 노끈을 엮으면서 나중에 같이 놀러 가자는데, 괜스레 등골이 따끔따끔하고 콧잔등에 땀이 났다. 저 다정스레 웃는 얼굴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요즘 날씨가 추워진 데 비해 옷이 얇아서 고뿔이 들려나 보구나.’
연은 혼자서 그렇게 단정 지었다.
“앞으로 군길 형님과 진팔이 몫까지 두 개는 더 만들어야겠습니다.”
선심 쓰듯 환이 중얼거렸다. 어느샌가 입에 붙어 그는 자연스럽게 군길을 형님이라 칭하고 있었다.
“그네들 발도 일단 발이니까요. 겨울에 돌아다닐 수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심부름도 시키고요. 물론 환은 굳이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인상을 몇 번 찌푸리며 제가 만든 설피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환이 다 됐다는 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연은 아직 제 몫의 설피를 완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만드는 것치곤 제법 손이 야무졌다.
“어디 보자, 손재주가 좋으십니다. 한번 가르쳐 드렸는데 벌써 능숙하네요. 역시 제가 사람 보는 안목이 있습니다.”
환이 연의 몫의 설피를 가져가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고칠 부분을 설명해주었다. 연은 환의 설명을 열심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다 갑자기 환이 연의 손을 불쑥 붙들었다.
“으, 으앗….”
연은 화들짝 놀라 앉은 상태로 뒷걸음질 칠 뻔했다.
뼈마디가 굵은 사내 손이 가느다란 처녀 손을 아무렇지도 않게 붙잡았다.
“어라, 이제 손이 좀 따듯해지셨네요. 처음 뵀을 땐 진짜 얼음장 같아서 걱정했지 뭡니까.”
실은 환이 같이 설피를 만들자고 연을 설득한 것도 그녀의 차가운 손 때문이었다.
본디 인간으로 변했을 때 손발이 유독 찬 개체들이 있었다. 연 님도 그런 개체 중 한 분이신 듯했다.
아궁이에 불도 지폈겠다, 기운 훈훈한 아랫목에 그녀를 앉히고 손을 계속 움직여야 하는 설피 만드는 작업을 하면 딱 맞지 싶었다.
‘나중엔 장갑도 만들어 드려야겠군.’
그런 환의 생각을 전혀 모르는 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환의 손이 너무 크고 따듯해서 그 안에 든 제 손이 아주 희고 조막만 해 보였다.
‘인간 사내들은 원래 여인네 손을 이렇게 불쑥불쑥 잡는 건가….’
물론 절대 아니었다. 웬만한 민가에서도 큰일 날 소리였다. 다만 환이 저리 거침없는 것일 뿐이었다.
인간 겉가죽을 쓰고 있어도 어쨌든 근본이 짐승이라. 남녀칠세부동석이니 뭐니, 그딴 거 신경도 안 썼다. 늑대들끼리는 일단 맘에 들면 궁둥이에 주둥이부터 들이대니 이만하면 양반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연은 오늘도 인간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쌓아갔다.
꼬르륵.
그때 환의 귀에 귀여운 소리가 하나 들렸다.
환은 손을 놓아주지 않은 채 고개를 푹 수그린 연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게 무슨 소립니까?”
연은 하마터면 늑대 귀가 튀어나올 만큼 당황했다.
“아, 그, 그것이….”
아까 설피를 만들기 전 환은 연에게 주먹밥을 나눠주었다.
그런데도 연의 배는 아직 고프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어제 거의 굶다시피 해서 그런가….’
환은 일주일 동안 초가에 하루도 빠짐없이 들러 연이 먹을 먹거리를 챙겨주었다. 물론 연이 모르게 초가 주위로 다른 짐승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수컷 내를 뿌려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방향 주머니를 차 코가 막힌 연은 그 사실을 꿈에도 몰랐지만.
환은 이렇듯 같이 생활을 함께하게 된 연을 물심양면으로 보살필 준비가 만만이었다.
문제는 연의 저장 본능이었다. 연은 오랜만에 생긴 먹거리가 너무 아까웠다. 언제 이런 음식이 또 생길지 몰랐다. 아무리 환이 돌아온다고 약속했어도 아직까진 그를 온전히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살면서 처음 뵌 분을 어찌 다 신뢰하나. 그래서 그가 나눠준 귀한 음식을 창고에 보관해버리고 말았다. 환 님께서 저 먹으라 차고 넘치게 챙겨주신 음식을 배가 차게 포식하지 못한 까닭에 연은 일주일 내내 조금 굶주린 채였다.
‘환 님껜 비밀로 해야지….’
환이 알게 된다면 그를 믿지 못한 걸 두고 서운해할 터였다. 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꼬르륵.
배가 다시 요동쳤다.
연은 창피함을 느꼈다. 그래서 손에 힘을 주어 빼어내려고 했는데 환이 놓아주질 않았다.
“이, 이것 좀 놓아주시지요.”
“아까 드셨는데 혹시 배가 또 고프신 겁니까?”
“아, 아닙니다!”
연은 얼른 대답했다.
‘그러잖아도 아직 쓸모를 증명하지 못했는데, 먹이를 자주 보채는 꼬리로 낙인찍히면 곤란하다.’
연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먹거리가 풍부하지 못한 겨울철에 먹이를 보채는 것만큼이나 무리의 머리들을 곤란하게 하는 짓은 없었다.
사실 뱃가죽이 등딱지에 달라붙을 것 같았지만 연은 얼른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까 먹은 밥이 얹혀서 그런 거겠지요. 뒤, 뒷간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분명 연 님 배에서 ‘꼬르륵’, 하고….”
“다, 다녀오겠습니다!”
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봐도 정말 뒷간이 마려워서 저러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분명 꼬르륵 소리였는데.’
하지만 환이 채 뭐라고 하기도 전에 연은 부리나케 떠나버렸다.
연은 뒷간에 가는 대신 물 항아리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제가 강기슭에서 매일 새벽마다 물을 길어 와 채운 항아리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연은 바가지를 채워 물을 헐레벌떡 마시기 시작했다.
‘푸읍, 하…!’
배고플 땐 물배를 채우는 게 딱이었다. 물론 물을 바가지로 들이켜도 헛배 부른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무작정 밥을 더 달라고 할 순 없어. 어딜 가든 밥만 축내는 늑대는 미움받는 노릇이다.’
다행히 환 님은 먹을 것에 후한 주인인 듯했다.
이따 팥죽을 먹자고 했었지.
팥죽 소리에 연은 저절로 입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팥죽. 팥죽이라니.
예전에 인간들이 동짓날에 모여서 다 같이 먹는 걸 구경만 했었다. 참 고소하다던데. 연은 언제나 그 맛이 궁금했었다.
‘조금만 버티면 팥죽이 내 배 속으로 들어온다.’
그것만으로도 연은 지금의 배고픔을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연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비록 연은 모르고 있었지만, 환 역시 늑대 수인이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귀를 쫑긋이면 초가에서 벌어지는 어지간한 소리를 죄다 들을 수 있었다.
환은 연이 뒷간에 가지 않고 물 항아리가 있는 쪽으로 가는 소리를 들었다.
물바가지로 물을 허겁지겁 들이켜는 소리까지 전부.
‘역시 배가 고프셨던 게로군.’
눈치 빠른 환은 단번에 무슨 상황인지 알아챘다.
연이 제가 준 음식을 다 먹지 않고 어딘가 저장해 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혼자서 넉넉히 드시고도 남을 음식을 매일 받으시곤 저리 배에서 꼬르륵 소리를 내진 않으실 테니까.
‘귀여우셔라.’
그와 동시에 환은 연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또 미래를 대비하는 그녀의 현명함에 다시 한번 반해버렸다.
먹을 것이야 넘쳐났다. 당장 마을에서 먹거리를 사 와 곡식 창고를 가득 채울 만큼 돈도 있었다.
하지만 연 님은 생각보다 자존심이 센 암컷이신 듯했다.
환은 그녀가 오해로 인해 제 눈치를 보고 있다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냥 적선하듯 주면 안 받으실 것 같은데…. 이거 어찌한다.’
환은 조금 고민했다.
그사이, 연은 물배를 세 번이나 더 채우고 입을 슬슬 닦고 있었다.
연 또한 인간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환 님이 제가 항아리에서 물 들이켜는 소리를 다 들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직도 배에서 소리가 나는 듯했지만 이걸로 팥죽을 먹을 때까지 버틸 수 있길 바랐다.
그때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소곤소곤 저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님. …연 님!”
연은 화들짝 항아리에서 손을 뗐다.
환 님께서 이곳까지 따라오신 걸까?
연은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물 항아리와 뒷간은 가까운 거리였다.
이윽고 찾아낸 환 님은 초가의 기둥 뒤에 숨어 계셨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신 채였다.
‘뭐 하시는 거지.’
연은 제가 있는 곳까지 튀어나오지 않고 굳이 기둥 뒤에 숨어서 저를 부르는 환을 기이하게 바라봤다.
“화, 환 님. 거기서 뭐 하세요?”
“큼, 큼…. 원래 여인이 뒷간에 가실 땐 모르는 척하는 게 예의입니다.”
점잖은 척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모르는 척하시려는 분이 거기엔 왜 서 계세요?”
연이 묻자 다시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제가 아까 연 님께 드릴 게 하나 있었는데 깜박했지 뭡니까. 기왕 뒷간에 가신 거, 진팔이 놈에게 들키지 마시고 게에서 숨어 드시라고.”
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에게 줄 게 있다고?
“그럼 여기 두고 갑니다. 대신 얼른 먹고 오셔야 합니다. 진팔이 저놈이 코가 개콥니다.”
몇 번 헛기침하더니 환이 다시 터벅터벅 사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은 눈을 크게 뜬 채 환이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천천히 그가 서 있던 기둥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한 것에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앗…!’
환의 목소리가 다녀간 곳에 천으로 곱게 싸인 인절미가 놓여 있었다.
‘이, 인절미…!’
연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아무리 무뚝뚝한 성격의 연이라지만, 음식 앞에선 마음이 흐물흐물 풀어졌다. 음식은 죄가 없지 않나.
더군다나 요새 고생을 한 탓에 환을 만나기 전까진 쫄쫄 굶다시피 한 연이었다. 뱃가죽을 칼로 쑤시는 것같이 배고픈 와중, 콩가루 솔솔 뿌려진 인절미 한 접시라니.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연의 엉덩이가 근질근질하더니, 기어코 아까부터 숨기고 있던 꼬리가 펑, 하고 튀어나왔다.
이윽고 인간의 귀도 쏙 사라지고 늑대 귀가 불쑥 튀어나왔다.
‘아뿔싸…!’
연은 허둥지둥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환 님은 벌써 저만치 사라지신 후였다.
아무리 인간화에 도가 튼 수인이더라도 지나치게 흥분하거나 겁을 집어먹으면 이렇듯 꼬리와 귀가 튀어나오곤 했다.
‘화, 환 님이 어디서 보고 계신 건 아니겠지…!’
흥분으로 벌겋게 상기된 연의 머리에 불쑥 솟은 짐승 귀 두 개가 마구 팔딱거렸다. 치마 밑으로 삐져나온 꼬리도 미친 듯이 살랑였다.
연은 서둘러 주먹을 말아 두 미간을 꾹꾹 눌렀다. 엉덩이에도 얼른 힘을 주어 꼬리를 숨겨보려 했다.
하지만 인절미를 눈앞에 두자 몸이 제 말을 듣질 않았다. 배가 고픈 상태에 먹음직스러운 인절미를 보게 되니 침이 뚝뚝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마지막까지 연은 고민했다.
‘에잇! 일단 먹고 보자.’
연은 귀와 꼬리를 그대로 단 채 얼른 주변을 홱홱 돌아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인절미를 주워 일단 한입 덥석 베어 물었다.
고소한 콩가루 맛이 입 안 가득 번졌다.
연은 눈을 감고 그 맛을 음미했다.
‘맛있다…!’
너무 황홀해서 그만 눈물이 쏙 배어 나올 지경이었다.
‘내가 배고프단 걸 혹시 눈치채신 걸까.’
연은 나머지 인절미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런데 그렇게 다 해치우고 나니 이젠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눈치채셨대도 이렇게 몰래 챙겨주신 걸 보니 기분이 나쁘진 않으셨던 모양이구나.’
연은 그렇게 결론지었다.
뭐가 어쨌든 먹을 것 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그러니 환 님 역시 좋은 사람이었다. 연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참 좋은 집주인을 만났구나.’
어쩌면 제 생각보다도 더. 괜스레 코끝이 시큰거렸다.
연은 주책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앞으로 환 님께 조금은 더 곰살맞게 굴리라 다짐했다. 꼬리로서의 충성은 물론이었고.
연은 허겁지겁 남은 콩가루를 마저 찍어 먹기 시작했다.
* * *
‘귀여워.’
물론 환은 그 모습을 창호지 뒤에서 다 지켜보고 있었다.
침을 발라 구멍을 뚫어놓은 창호지 사이로 환이 남겨준 인절미를 콩가루까지 남김없이 핥아 먹는 연의 모습이 보였다.
‘왜 저렇게 허겁지겁 먹는데도 요염하지.’
환은 진지했다. 까만 머리 타래에 불쑥 튀어나온 귀가 새침하고 어여뻤다.
치마 속에 튀어나왔을 게 뻔한 꼬리도 계속 살랑거리고 있는지, 치마 뒤쪽이 펄럭펄럭하고 있었다.
환은 점잖은 얼굴로 생각했다.
‘치마 들추고 냄새 맡으면 뺨 맞겠지.’
짐승의 본능이 환의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맘 같아선 당장에 이 거추장스러운 인간 옷 따위 벗어버리고 늑대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저 펄럭거리는 치마를 찢어발기곤, 살랑이는 꼬리와 그 주변에 코를 박고서 마구 킁킁대고 싶었다.
이게 무슨 짐승 같은 개소린가 싶지만, 늑대들 사이에선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냥 서로 친근감을 표현하는 인사 같은 거였기 때문이다. 본연이 짐승인 걸 누굴 탓하나.
‘그나저나 저 향낭은 대체 언제 벗긴다.’
요즘 환의 소원은 따로 없었다.
‘맨살 냄새 한 번만 맡아봤으면.’
희미하게 느껴지는 연의 체향은 말도 못 하게 좋았다.
‘저놈의 향낭만 아니었어도….’
환은 요즘 제 공공의 적 일 호가 된 향낭을 노려보았다. 그걸 걸치고 있는 연의 목덜미가 예쁘지만 않았어도 용서 안 했다. 당장 뜯어 발겼을 것이다.
“헉! 대, 대장 거기서 뭐 하는 거야.”
그때 뒷간을 가려다 환을 발견한 진팔이 주춤 뒷걸음질 쳤다. 이내 그가 창호지 너머의 연이 들고 있는 천 조각을 알아보곤 경악에 찼다.
“어? 내 간식! 저거 내 인절미….”
“쓰흡! 조용히 해라. 이놈아, 산통 깨지 말고. 지금 중요한 순간이다.”
환의 뒤에서 진팔이 소리 없이 좌절하고 있었다.
그러나 환은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앗, 수염까지 나왔다. 귀여워.’
환은 충분히 바빴다. 충격에 빠진 아우에게 방해받을 시간이 없었다. 인절미 콩가루 묻은 손까지 남김없이 핥아 먹는 연의 모습을 구경해야 했으므로.
* * *
인절미를 다 먹고 튀어나온 꼬리와 귀를 수습한 후, 연은 서둘러 환에게 돌아갔다. 설마 그가 뭐라 핀잔 줄까 봐 입술 주변의 콩가루까지 남김없이 핥아 먹은 후였다.
다행히 그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연을 반겼다.
“아, 오셨습니까? 그러잖아도 설피 만드는 거 다 마무리하고 팥죽 끓이려던 참이었습니다.”
그 말에 연의 입술이 벌어졌다.
‘파, 팥죽!’
환은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헤죽, 웃었다.
이제 보니 연 님은 겉으로 보기엔 도도하셔도 먹을 것에 참 약했다.
‘앞으로 어떻게 꼬셔야 하는지 가닥이 잡히는구나.’
연을 공략하는 열쇠 하나를 얻은 기분이었다.
뾰로통하니 새침한 게 매력적인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연의 성격은 오히려 반대였다.
새초롬하게 올라간 눈꼬리가 ‘팥죽’이란 단어가 나오자마자 동그래졌다. 다시 보니까 늘 무표정인 것 같던 얼굴도 세세한 감정 표현이 드러나는 게 시시각각 보였다.
‘꼭 수묵 도화 같다.’
얼굴이 희어서 그런가, 쌍꺼풀이 없어서 그런가. 짓는 표정에 따라 분위기가 확확 바뀌었다.
환은 연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한여름의 나비 짓처럼 환의 가슴이 살랑거렸다. 지금 그에게 꼬리가 달려 있다면 정신 사납게 팔랑거렸을 것이다. 연이 좋다고, 온몸으로 표현해댔을 거였다. 늑대도 결국 갯과였으니까.
“다음엔 겨울옷도 같이 지읍시다.”
환은 이미 연 몫의 설피까지 전부 만들어놓았다.
연이 제가 두고 갔던 만들다 만 설피가 완성된 모습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겨울옷이요?”
연은 놀라서 되물었다.
인간의 옷은 짓기가 까다로운데, 환은 그 방법까지 알고 있었다.
“네, 겨울옷이요. 목화솜을 잔뜩 넣어서 말입니다.”
환은 눈꼬리를 휘며 다정스레 말했다. 그러면서 남모르게 연의 얇은 옷자락을 훑었다.
얇은 모시에 가까운 옷감은 이 겨울을 나는 데 적합하지 않다.
연 님을 처음 본 순간 환은 옷부터 지어 입힐 생각이었다. 겨우내 연 님에게 저런 옷을 입힐 순 없었으니까. 늑대의 털이라면 모를까, 인간인 상태에서 연 님의 피부는 아기 피부보다 연약해 보였다.
연의 피부를 느긋하게 눈으로 쓸어보던 환은 다시 구미가 당기는 것을 느꼈다.
‘저 살갗 한 번만 핥아봐도 되냐 물으면 뺨 맞겠지.’
아주 양쪽 볼을 찰지게 얻어맞을 테다. 아까 한 애먼 생각의 몫까지 합하여.
아직 제 정체가 늑대임을 밝히지 않은 연이었다. 연을 따라 환 역시 자신을 수인이라 밝히지 않았다.
환은 연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거겠지.’
지켜본 결과 연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번 겨울을 나려고 하는 듯했다.
‘그렇담 있게 해주면 되지 뭐가 문제야. 내가 그럴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환은 모든 일을 천천히 진행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겨우내 이 첩첩산중엔 그들 두 짐승뿐이었다.
환은 습관적으로 진팔과 군길을 없는 짐승 취급했다.
* * *
두 사람, 아니 두 짐승은 완성된 설피를 가지고 몇 마디를 나눈 후, 팥죽을 쑤러 갔다.
환은 팥죽 만드는 법을 연에게 가르쳐주었다.
미리 담가놓은 불린 팥을 아궁이에 쏟고 담근 물은 버리지 않고 남겨두었다. 나중에 끓인 팥과 섞는다고 했다.
“그러면 팥죽이 더 고소해집니다.”
그 말을 꺼내며 환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아궁이 솥을 바라보고 있는 연의 머리통에 시선을 고정했다.
제 말에 하나하나 집중하는 연의 모습은 너무도 야무지고 귀여워 보였다. 단어 하나 까먹을세라 되새김질하듯 기억하는 모습이 참 어여뻤다.
“자, 주걱 드릴 테니 저어보세요.”
환은 연에게 주걱을 내밀었다.
물론 연이 받드는 순간 손이라도 한 번 더 잡아 볼 심산으로 건넨 거였다.
연은 주걱을 받아 들고 솥을 젓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환의 손이 떨어져 나가질 않았다.
“저어…. 이거 원래 함께 젓고 있어야 하는 건가요?”
“당연하지요.”
환이 허실허실 웃으며 덧붙였다.
“연 님, 음식은 정성입니다. 이러면 두 사람 몫의 정성이 들어가 팥죽이 더 맛있어지지 않겠습니까?”
연은 환을 어이없게 쳐다봤다.
이제 보니 이 사내,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부렁이었다.
아무리 제가 요리에 무지하더라도 말이다. 굳이 주걱으로 솥 젓는데 두 사람 손이나 필요할까.
‘환 님이 혹시….’
아까 처녀 손을 덥석덥석 잡는 것도 그렇고. 제가 숨 한 번 쉴 때마다 참인지 거짓인지 분간 안 가는 칭찬을 늘어놓으시는 것도 그렇고. 저와 눈만 마주쳐도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웃으시는 것도 그렇고.
그전부터 긴가민가하긴 했는데, 연은 이제 확실히 깨닫고 말았다.
‘환 님은 장난기가 심한 분이시로구나.’
연은 또다시 착각했다. 환의 모든 행동이 저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놀리는 거라고.
하지만 연은 봐주기로 했다.
‘먹을 거 주시는 분이니 이 정도 농담은 봐 드려야지.’
언제까지고 연에게 먹을 거 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었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그렇게 연의 안에 오해가 첩첩이 쌓여갈 무렵이었다.
팥죽을 어느 정도 쑤었을 때, 마당에서 진팔이 크게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군길… 아, 아니, 주인님 돌아오셨습니까!”
사냥 나갔던 군길이 돌아온 것이었다.
연은 양반 차림의 군길이, 그것도 아우 되는 환 대신 바깥에 나가 사냥을 한다는데도 그저 그러려니 했다. 인간은 제일 연장자만 사냥할 수 있다는 환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사실 환은 삐쩍 마른 연에게 일단 고기부터 먹일 심산으로 부하에게 사냥을 시킨 것이었다. 물론 그런 환의 속 깊은 뜻을 연이 알 길이 없었다.
“아직 날씨가 선선해선지 제법 사냥감이 있었습니다.”
군길이 무표정한 얼굴로 한 손에 잡힌 꿩 두 마리를 들어 올렸다.
“그래, 수고했…습니다, 형님.”
환은 습관적으로 군길의 어깨를 붙들고 ‘그래, 수고했다.’라고 하대할 뻔했다. 군길이 지금은 제 형님이란 사실을 상기했다.
군길을 치하하고, 환은 습관적으로 연에게 휙 시선을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군길의 손에 잡힌 꿩을 본 연의 눈에 감격이 차올라 있었다.
‘꿩…!’
연의 눈동자가 그렇게 소리치고 있는 듯했다.
진팔과 군길이 보기엔 여전히 침착한 표정의 연이었지만, 그녀의 미세한 감정을 구분하기 시작한 환이었다. 그에겐 연의 표정이 너무도 변화무쌍해 보였다.
‘저러다 또 꼬리 튀어나올라.’
연이 팔을 걷어붙이며 답지 않게 횡설수설했다. 흥분한 게 목소리에도 티가 났다.
“와…. 이, 이 겨울에 꿩 구하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아, 얼른 팥죽을 옮기고 아궁이를 씻어내야겠습니다. 꿩도 삶아야지요.”
환은 연의 상기되어 발그레해진 볼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런 환의 심정이 순식간에 비틀렸다.
‘어…. 갑자기 기분 나쁜데.’
꿩을 바라보는 연의 선망 어린 눈빛이 군길 쪽을 향하고 있어서였다.
물론, 연은 군길에겐 단 일 초의 시선도 주지 않고 오로지 꿩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오로지 저 백만 년 만에 마주한 꿩을 어떻게 요리할까 하는 고민뿐이었다.
하지만 환에게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연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 쪽에 군길이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내가 직접 사냥해 올 걸 그랬나.’
암컷들에게 사냥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잘 아는 바였다. 하지만 제가 직접 갔다간 연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그건 또 싫었다.
그래서 환은 재빨리 군길의 앞에 다가섰다. 군길에게, 정확히 말하면 꿩에게 꽂힌 연의 시선을 중간에서 가로막았다.
“형님한테 반하시면 안 됩니다. 사냥은 제가 더 잘합니다.”
환은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으름장 놓듯 말했다. 제 심각함을 알리기 위해 팔짱까지 꼈다.
하지만 연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환은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사내대장부가 사냥을 잘한다는 게 어떤 의민지 잘 압니다. 저도 할 수만 있다면 몸소 보여드리고 싶지요. 다만 연 님께 제가 가르쳐 드릴 게 많아 이리 함께 집에 남아 있는 것뿐입니다.”
암컷 늑대의 여심을 공략하기란 원래 쉽지 않은 법이었다. 환은 최선을 다하여 제 유능함을 강조했다.
“저 같았으면 꿩 세 마리는 더 잡아 왔을 겁니다.”
환은 척, 하고 그녀에게 제 세 손가락을 펼쳐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연의 반응은 더 시원찮았다. 연의 눈은 아까부터 꿩만 좇고 있었다.
“아, 그러시군요. 역시 환 님이십니다. 그나저나 빨리 꿩을 이리로….”
“쓰흡, 연 님. 지금 제 말 듣고 계시긴 한 겁니까?”
“물론입니다. 그런데 환 님, 꿩 깃털부터 벗겨야겠지요?”
허어. 아무리 봐도 기승전꿩이었다. 환의 사냥 가능 여부는 관심 밖이었다.
환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났다.
군길이 그런 대장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환은 군길의 정강이를 연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차 주었다.
“헙…!”
군길이 정강이를 잡고 콩콩 뛰었다. 그러자 연이 깜짝 놀라 그에게 뛰어갔다.
“아이고, 내 꿩!”
군길이 신음하건 말건 연은 바닥에 떨어진 꿩을 털어 호호 불었다. 그제야 환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네 사람은 그날 팥죽을 함께 쑤어 상을 차렸다. 꿩도 손질해 푹 고아 산더미처럼 쌓고 먹을 준비를 했다.
큰 방에 네 식구가, 특히 덩치 큰 세 남자와 함께 둘러앉으니 크지 않은 방이 더 좁다래졌다. 하지만 음식만큼은 밥상 다리 부러져라 푸짐했다.
오랜만의 진수성찬이었다.
연은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기 힘들 정도로 그 맛을 고대하고 있었다.
한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다 차려놓은 밥상에 아무도 손을 대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왜 아무도 안 드시는 거지…?’
연은 속이 타는 걸 느꼈다.
원래 무리의 꼬리는 사냥감을 먹더라도 맨 나중에 들었다. 인간들도 당연하리라 생각했다.
이 무리에서 서열이 가장 낮은 건 연이었다. 하여 연은 환이 숟갈을 먼저 들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환은 뭔가를 기다리듯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덩달아 진팔과 군길도 숟가락에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연은 이 밥상을 두고 왜 세 남자가 저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건지 이해를 못 했다.
“저…. 안 드십니까?”
결국, 안달을 참지 못한 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러자 환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연 님이 먼저 드셔야 먹지요.”
연은 깜짝 놀라 환을 쳐다보았다.
이제 보니 군길과 진팔도 입에 침이 질질 고여가는 걸 참고 제 손이 숟가락 뜨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진팔은 퍽 간절한 눈으로 연을 쳐다보고 있기까지 했다.
“제가 먼저 말입니까?”
연은 잘못 들었나 해서 되물었다.
“물론이지요.”
당연하다는 듯한 환의 대답이 돌아왔다.
조금 놀란 것도 잠시. 연은 아주 살짝 고민하곤 결국 또 저 혼자 결론을 내렸다.
‘이, 인간들은 원래 여자가 먼저 밥숟갈을 뜨는 게 예의인가 보다.’
인간들이란 원체 예의니 범절이니 하는 구닥다리 의식이 많았다. 연은 그것들을 다 이해하려고 하면 대갈통만 아프다는 순이 할멈 얘기를 기억했다.
랑의 무리에서도 암컷인 랑이 먼저 한입 뜯기 전에 사냥감엔 손도 못 대지 않았나. 연은 같은 맥락으로 이해했다.
물론 실상은 무리의 머리인 환의 암컷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었다. 또 연만 혼자 몰랐다.
결국, 연이 한 숟갈 뜨자마자 진팔과 군길이 헐레벌떡 팥죽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쓰흡! 연 님 밥맛 떨어지실라!”
환이 그 모습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숟가락으로 두 사내의 대갈통을 딱 소리 나게 내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짐승은 게걸스럽게 식사를 지속했다.
“배 속에 거지가 들었나! 하여튼 이 동네 체면은 너희가 다 떨어트린다!”
형님인 군길에게마저 호통을 치는데 연은 팥죽에 정신이 팔려 눈치채지 못했다.
연은 무시하고 저 역시 한술 뜬 팥죽을 서둘러 입에 넣었다.
‘맛있어…!’
곧이어 천상의 맛이 입 안에서 펼쳐졌다.
마지막에 넣은 진팔의 새알심이 신의 한 수였다. 아까 먹은 인절미는 지금 팥죽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연은 팥죽을 반 그릇 넘게 후루룩 해치우곤 재빨리 젓가락을 들었다.
아직 연이 손도 대지 않았던 터라 꿩고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까 깃털도 뽑지 않은 꿩에 달려들 뻔한 걸 어떻게 참았는데….
연은 재빨리 꿩고기도 한 점 집어 장에 푹 찍어 먹었다.
‘눈물 날 것 같아…!’
정말 맛있었다.
환이 파를 송송 썰어 마늘과 함께 볶아준 장에 찍어 먹으니 그 맛이 극상이었다. 말린 대추랑 통마늘과 함께 삶았더니 비린내도 안 났다.
“맛있으십니까.”
환이 연의 먹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얼굴로 물었다.
“예. 진짜, 읍, 맛있습니다.”
연은 허겁지겁 팥죽과 꿩고기를 입 안에 밀어 넣으며 대답했다.
‘인간의 모습으로 있겠다 결심하길 잘했다.’
조리된 음식의 맛에 감탄한 연은 그리 생각했다.
“천천히 드십시오. 체합니다. 나중엔 소갈비도 해드리겠습니다.”
환이 연의 뺨에 묻은 팥 부스러기를 엄지손가락으로 걷어가며 말했다.
“소, 소갈비요…?”
연은 팥죽 그릇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하다 고개를 들었다.
소라니, 그게 애초에 먹을 수 있는 짐승이었던가?
눈이 휘둥그레진 연을 귀여워 죽겠다는 듯 바라보던 환이 대답했다.
“네. 소갈비요. 아이고, 턱 떨어지십니다.”
환이 떨어진 연의 턱을 도로 닫아주며 말했다.
“꼭꼭 씹어 드셔야지요. 좌우로 오십 번씩, 네? 따라 하십시오. 옴놈놈, 옴놈놈.”
소갈비를 해주겠다는 분을 따라 연의 턱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옴놈놈. 옴놈놈.
체면이고 뭐고 다 내려놨다. 언젠가 소를 먹여 주시겠다는데 뭔 일인들 못 할까.
“자…. 꿀꺽!”
꿀꺽!
“하하, 아주 잘하셨습니다.”
환이 웃음을 참는 게 역력한 얼굴로 입을 틀어막곤 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연은 소갈비라는 미래의 반찬을 곁들여 팥죽과 꿩고기를 차례로 비워나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분명 네 사람 몫인 꿩고기가 당최 줄지를 않았다.
자세히 관찰하니 환은 물론이거니와 진팔과 군길도 꿩고기엔 일체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어라, 왜 안 드시지….’
군길은 꿩을 두 마리 잡아 왔다. 두 마리를 네 사람이서 나눠 먹어야 하니 한 사람당 반 마리씩 돌아가는 셈이었다.
물론 그건 정당하게 분배될 때의 얘기였다. 연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그렇게 녹록지 않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제 덩치의 배는 큰 사내 셋과 함께 밥을 먹는 처지였다. 당연히 먹는 양도 속도도 현저히 차이가 났다.
연은 몇 수저 들지도 못해 고기는 물 건너가겠다 여겼다. 굳이 욕심낼 생각도 못 했다. 당연히 제가 양보해야 한다고 여겼다. 어쨌든 객식구지 않은가. 그것도 서열로 따지면 제일 낮은.
연은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다 큰맘 먹고 말을 꺼냈다.
“저어…. 다른 분들은 왜 고기를 안 드세요?”
사실 연은 눈치 없는 척, 계속 꿩고기를 입에 넣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양심에 조금 찔렸다. 그래도 염치가 있지, 고기반찬을 저 혼자 독식하는 건 무리의 일원으로서 너무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올바른 꼬리로서의 행동도 아니었다.
“아! 그럼 저도 한 젓갈만….”
그러자 진팔이 반색하며 젓가락을 들었다. 마치 연의 권유를 기다렸다는 태도였다.
쾅-!
그때 식탁이 덜컹하고 흔들렸다. 온 초가가 울릴 법한 소음에 연은 깜짝 놀라 환을 쳐다봤다.
환의 주먹이 꽉 쥐어진 채로 식탁에 올라가 있었다.
“아. 제가 손이 미끄러져서. 미안합니다. 자, 어서 드시지요.”
환이 순하디순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다시 연에게 밥을 뜨길 권했다.
진팔만 손을 그대로 올린 채 굳은 모습이었다. 그의 젓가락은 이미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군길 또한 아까부터 작금의 상황을 모르는 척, 팥죽만 후루룩 들이켜고 있었다. 괜히 나섰다가 연 님 드실 거에 손댔다고 환에게 꾸지람만 들을 걸 안 터였다.
연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진팔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아, 안 드십니까…?”
진팔이 재빨리 대꾸했다.
“갑자기 생각났는데, 저는 꿩고기만 먹으면 설사를 해서.”
군길을 쳐다보자, 그 역시 조용히 대답했다.
“의원이 그러길 저는 꿩고기가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연은 당연하다는 듯 고기를 제게 양보하는 진팔과 군길에 아리송해져야 했다.
연은 마지막으로 환을 의심쩍게 쳐다봤다.
“저는 오늘 채식을 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하하.”
환이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연은 생각했다.
‘인간들이란 참 특이하구나.’
먹지 않겠다는데 그녀로선 뭐 더 권할 이유도 없었다.
오랜만에 고기를 포식할 연을 위해 다들 자의적으로, 또는 타의적으로 배려 중이란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연은 다시 수저를 뜨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날 남은 꿩고기를 바닥까지 말끔히 비워냈다. 이미 충분히 잘 먹고 있는데 더 잘 드시라는 환의 응원을 받으면서.
* * *
달이 뜬 저녁이었다.
저녁을 먹은 후, 연은 부른 배를 통통이며 마루에 걸터앉아 곁에서 환이 까주는 한라봉까지 받아먹었다. 진팔이 놈이 마침 봇짐에 숨겨놓고 왔노라며 환이 소맷자락 밑에서 스윽 꺼낸 것이었다.
환은 제 입으론 한 입도 안 넣고 깐 한라봉을 전부 연의 입에 넣어주었다.
‘겨울 다 지나고 봄이 오면 복숭아도 까드리겠습니다.’
정말이지 완벽한 날이었다.
후식까지 챙겨준 후 환은 인제 그만 들어가 쉬시라며 점잖게 물러났다. 정말 작은 방에서 장정 셋이 주무실까, 싶었는데 정말 그러고 셋이 작은 방에 들어가셨다.
‘하인들은 고생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팔자가 다들 폈었군.’
늑대 꼬리들도 인간 하인들만 같으면 서러울 일이 없겠구나.
연의 인간에 대한 오해는 깊어져만 갔다.
연은 물 떠놓은 항아리에 가서 몸을 꼼꼼히 씻곤 큰 방에 들어갔다.
방엔 환이 언제 다녀갔는지 벌써 이불까지 깔려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제 팔자가 상팔자인 것 같은데, 환은 이게 너무도 자연스럽다는 듯 굴어서 또 아리송했다.
‘어쨌든 좋은 사람이 분명해.’
아궁이는 후끈후끈하니 뜨끈했고 이불은 낮 동안 볕에 바짝 말려 곰팡이를 제거한 후라 제법 보송보송했다. 게다가 오랜만에 배가 부르도록 포식을 했더니 잠이 솔솔 쏟아졌다.
환과 함께 살게 되기 전, 연은 아궁이를 뗄 줄 몰라 창고의 곡식더미 위에서 짐승 모습으로 쭈그리고 잠을 청했었다. 그편이 조금이나마 더 아늑하고 따뜻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호강도 이런 호강이 없었다.
눈이 가물가물 감겨오는데 연은 문득 향낭을 떠올렸다.
‘언제쯤 뺄 수 있을까.’
코가 막히는 것도 불편하고 매번 향을 채우기도 거추장스러웠다. 잠잘 때만이라도 은근슬쩍 빼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야. 그래도 아직은 위험하다.’
연의 발정기는 아주 가까워져 있었다. 이달 안에 반드시 터질 것 같았다.
향낭을 차지 않으면 발정향이 온몸에서 스멀스멀 피어나와 온 산의 짐승 수컷들을 끌어들일 거다.
제 발정향을 맡고 덩치 큰 떠돌이 수컷이라도 찾아와 환 일행과 맞닥뜨리면 저분들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인간은 발톱도 없고 송곳니도 없지 않은가.
환 일행을 감쪽같이 인간이라고 믿고 있는 연이었다.
연은 작은 방에서 옹기종기 포개져 잠을 청하고 있을 건장한 세 장정을 걱정해 향낭을 더 열심히 차기로 결정했다. 연의 그 결심을 들었더라면 환이 파죽지세의 기세로 막았으리란 걸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은인 같은 분들이시다. 다른 짐승에게 변을 당하게 만들 순 없어.’
제법 기특한 이유라고 연은 스스로 생각했다.
이 정도면 짐승의 보은이지. 그럼, 그럼.
환이 그 향낭만 뺏을 수 있다면 별주부 간도 빼 올 수 있는 사내란 걸 연은 꿈에도 모른 채 생각했다.
‘어째서일까. 생판 모르는 남인데도 이 초가에 혼자가 아니란 생각을 하니까 더 안심되는구나.’
초가는 분명 바뀐 게 없는데, 사람이 셋이나 더 들어왔다고 연은 편안함을 느꼈다. 비단 무리 짐승의 본능이 아니라, 연은 진짜 환 일행에게 가족 같은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겨울에 내가 혼자가 아니로구나.’
연은 끔벅끔벅 감기는 눈에 힘을 풀며 생각했다.
어쩐지 가슴 한구석까지 온돌의 따듯함이 퍼지는 기분이었다.
* * *
“아오, 쫌! 비켜라! 안 그래도 좁은데…!”
“형님이야말로 팔 좀 내 얼굴에서 치워라. 잠을 잘 수가 없다.”
“진팔아. 군길아. 둘 다 한겨울에 벌거벗겨 내쫓기기 싫으면 입 닥치고 자라.”
“…….”
“…….”
좁디좁은 작은 방에 덩치는 범만 한 장정이 셋이었다.
환은 그나마 큰 방과 가까운 벽 쪽에 자리해 팔짱을 낀 채 점잖게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옆으로 진팔과 군길이 큰 덩치들을 한껏 굽힌 채 어떻게든 누울 공간을 마련해보려 발버둥 치는 중이었다.
“이리 엉겨 붙어 자니 어머님 굴속에서 젖 달라 낑낑거리던 시절도 기억나고 얼마나 좋으냐.”
“흐이씨!”
“뭐? 흐이씨…?”
“너무 좋아서요. 흡, 씨…!”
환의 도끼눈에 진팔이 울며 겨자 먹기로 대꾸했다.
“싫으면 나가서 자라. 말린 적 없다.”
환이 그런 진팔에게 느긋하게 훈수했다.
진팔은 이 엄동설한엔 짐승의 몸으로라도 노숙은 싫어서 입을 다물었다.
군길은 어찌하고 있나 옆을 슬쩍 훔쳐봤다.
아니나 다를까, 짐승의 모습이든 사람의 모습이든 어딜 가도 머리만 닿으면 잠드는 태평한 군길이었다.
환 역시 금방 코를 골기 시작할 게 뻔했다. 진팔은 억울한 마음을 누르며 훌쩍이는 소리를 꾹 참고 잠을 청했다.
그런 진팔의 마음을 모른 채 달은 그날따라 훤했다.
작은 방 천장엔 구멍까지 뚫려 있어 그 사이로 달 빛줄기가 흘러들어왔다. 혼자서 삼 분의 일을 넘는 자리를 차지하곤 팔로 머리를 괸 채 천장을 바라보던 환은 그 광경을 보며 생각했다.
‘저 달보다 우리 연 님 이목구비가 더 밝구나.’
어둠 속에서도 낮에 보았던 연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나저나 얼굴만 내 취향인 줄 알았는데.’
일에 열심인 점과 뭐든지 배우려고 하는 점, 그리고 단순하면서도 명민한 성격이 쏙 마음에 들었다. 얼핏 보면 쌀쌀맞은 것 같은 말투도 풍파에 치여서일 뿐, 알고 보면 속정이 깊은 게 느껴졌다.
어쩜 그리 귀엽고 예쁜 짓만 쏙쏙 골라 하시는지.
‘얼른 내 색시 삼고 싶다.’
환의 입이 침 떨어질 기세로 벌어졌다.
낮에 잠깐 잡아봤던 손은 어찌나 작은지. 잠시 먼지 털어드린다 쓰다듬어 봤던 머리통은 어찌나 동그랗던지.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떠올리다 보니 칭찬 거리가 끝이 날 것 같지가 않았다.
‘오늘 잠은 다 잤군.’
환은 자조하며 미친놈처럼 허실허실 웃었다. 연을 향한 그의 외사랑이 밤과 함께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 * *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연은 오랜만에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에 눈을 떴다.
평소라면 추위에 깼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밤새 누군가 아궁이를 떼놓은 것인지 아직도 이불 안이 후끈후끈했다. 이마에 땀까지 고여 있었다.
연은 착착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드르륵거리는 문을 열고 보니 누군가 떠 놓은 자리끼가 보였다.
‘환 님이신가….’
연은 이런 대우가 처음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역시 환 님은 이상한 인간이다.’
약 일 초간 고민하던 연은 물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설마 환 님이 저 먹는 물에 독이라도 탔을까 싶었다.
‘시원하고 달다.’
기이했다. 환이 떠다 줘서 그런지 물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연은 물을 입 안에 머금고 생각했다.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게 있어야 하는 법.’
서둘러 물 항아리 쪽으로 다가가 나무 잔 세 개에 물을 각각 떠다 작은 방문 앞에 고이 놓았다.
‘이러면 되겠지.’
아직 깨지 않으신 건지 안쪽에선 드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연은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수건을 어깨에 얹고 항아리에 물을 길으러 출발했다.
항아리에 물 긷는 일은 연이 매일 새벽마다 해 놓는 일이었다.
초가에서 몇 걸음 걸리지 않는 곳에 샘이 있었다. 멀지도 않고, 물 항아리도 작은 편이라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금세 채워졌다.
‘식구가 늘었으니 항아리 수를 늘려야 하나….’
연은 고민하며 방금 다녀갔던 물 항아리가 있는 방향으로 총총 걸어갔다.
그런데 그곳에 예상치 못한 장면이 하나 있었다.
사내의 널찍한 등판이 이고 있는 항아리를 쑤욱 내리고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무려 두 개였다.
환 님이었다.
연은 자신도 모르게 저 대신 물 항아리를 채우고 있는 환을 넋 놓고 바라봤다.
‘힘이 장사시구나….’
틀림없이 늦잠 주무실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아침잠이 없는 사내였다.
이고 온 항아리 두 개로 순식간에 물독을 채운 환이 숨을 내쉬며 천천히 뒤돌아섰다.
“이제 일어나셨습니까?”
마치 연이 그곳에 있단 걸 이미 알고 있던 눈치였다. 아침부터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가 다가왔다.
“자리끼 가져다 놨는데, 목이 아직 마르십니까? 물 한 바가지 더 드릴까요?”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연은 주춤했다.
본래 저렇게 잘해주는 이에겐 경계를 올리게 되어 있는데.
연은 이상하게 환을 대할 때 제가 좀 물러진다고 느꼈다.
“그 물독은 제가 채워도 되는데…. 원래도 제 할 일이었고요.”
“아. 연 님 일은 오늘부로 제가 뺏어야겠습니다. 어차피 식구가 늘어 물독을 두어 개 더 늘릴 생각이기도 했고요.”
환 님은 이미 저와 비슷한 고민을 마친 후인 듯했다.
연은 순식간에 일을 빼앗겨 버렸다.
그때 군길이 저만치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 역시 환과 마찬가지로 지게 가득 물독을 이고 있었다.
연은 얼른 그를 거들려고 했다. 할 일도 빼앗긴 마당에 그거라도 해야지 싶었다.
“어허이, 손대지 마십쇼. 그러다 다치십니다.”
환이 재빨리 그런 그녀를 만류했다.
연은 무안해졌다. 이것마저 못 하게 하다니. 일을 빼앗기니 갑자기 저가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원래 제 일이었는걸요.”
그러자 환의 눈썹 한쪽이 위로 휙 올라갔다.
“연 님은 다른 할 일이 더 많으시지 않습니까. 이런 자질구레한 걸 연 님께 시킬 순 없지요.”
“네…?”
다른 할 일?
연은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다. 그와 동시에 가슴이 덜컥 떨어졌다.
‘역시 뭔가 시킬 게 있으니까 잘해준 거구나.’
연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환 한정으로 풀어진 듯했던 경계심이 다시 불쑥 치솟았다.
무슨 일일까. 설마 하룻밤 잘 먹이고 재운 뒤에 어디 팔아버린다는 협잡꾼 일당이었던 건 아니겠지.
온갖 생각이 연의 머리를 스쳤다.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하나….’
연은 힐끔힐끔 도망갈 길을 모색하며 눈을 돌렸다.
그런데 환은 잠자코 항아리 채우는 걸 군길에게 맡기곤 연의 손을 꼭 붙들었다.
연은 화들짝 놀랐지만 잡힌 손아귀 힘이 세서 뿌리칠 수도 없었다.
“연 님은 이리로.”
환은 연을 집으로 데려와 예의 마루에 앉혔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다짜고짜 말했다.
“자, 아…. 하십시오.”
연은 얼떨결에 환의 입 모양이 시키는 대로 입을 벌렸다. 어제도 그렇고, 이젠 뭐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아, 아….”
그러자 입 안에 뭔가 쏙 하고 넣어졌다.
씹어보니 달달했다. 곶감이었다.
“연 님은 일단 그거 드시고 예서 앉아 계세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환이 싱긋, 하고 청량하게 웃었다. 그러곤 다시 물 항아리를 채우러 가려는지 등을 돌렸다.
연은 하마터면 입을 벌리다 곶감을 떨어트릴 뻔했다. 물론 떨어트리진 않았다. 음식을 절대 떨어트리는 법 없는 연이었다.
연은 환을 보내고 멍하니 생각했다.
참 기이한 사내다.
저를 보기만 하면 웃고, 손에선 간식이 나오고, 입만 열면 쉬란다.
‘심장이 근질근질해….’
연은 이상하게 자꾸 심장께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 기분은 특히 환 님이 눈앞에서 저리 간드러지게 구실 때마다 더 심해졌다.
고민하다 연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침부터 단걸 먹어서 그런가 보다.’
연은 인간의 음식에 너무 길들여지면 안 된다는 순이 할멈의 말씀을 기억했다. 역시 어르신들 말씀은 틀린 게 없다고 생각했다.
* * *
환은 물 항아리를 다 채우고 나서 군길을 사냥 보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사냥은 제가 더 잘합니다. 다만 연 님께 가르쳐드릴 일이 많아 집에 함께 남아 있기로 한 겁니다.”
환은 몇 번이나 연에게 거듭 반복하여 말했다.
“거짓이 아니라 진실로 참입니다. 저 정말 사냥 잘해요, 연 님.”
그러면서 환은 어딘지 자꾸 못마땅한 표정으로 군길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군길은 모르쇠로 딴청을 피웠다.
“예에. 물론입니다, 환 님.”
연은 대강 대답하였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숨길 수 없는 무관심이 담겨 있었다.
사실 그녀는 군길이 오늘은 또 뭘 사냥해 올지 기대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왜 자꾸 사냥을 잘한다고 자랑하시는 거지.’
연은 환이 평소와 같이 제게 장난을 거는 거라고 생각했다.
제가 군길에게 관심 두는 걸 질투한다고는 꿈에도 몰랐다. 연이 정작 관심을 갖는 건 군길이 아니라 군길이 잡아 올 사냥감인데도.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군길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주억이고 떠났다.
연은 사냥을 가시는 군길 님을 향해 응원의 의미로 말씀드렸다.
“이맘때는 사슴 고기가 맛있습니다!”
사슴을 사냥해 오시란 부담을 드리는 건 절대 아니었다. 물론 정말 잡아 오신다면 기쁘겠지만.
그 모습을 보며 환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보니 연 님은 남의 말을 잘 귀담아듣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뭐, 연 님같이 단아한 데다 똑똑하기까지 한 여인들에겐 종종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만.”
모든 게 완벽한 것 같은 연에게도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바로 먹을 거에 약해도 너무 약하단 점이었다. 식량에 관한 일이라면 다른 어떤 것도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으셨다. 요 근래 하도 굶어서 그랬을까. 음식에 대한 집착이 좀 남달랐다.
환은 이해하기로 했다.
단점이 너무 없는 것도 인간미, 아니, 늑대미 없지 않나.
‘이래도 저래도 귀여우시기만 한걸. 잘 못 먹어서 비실거리는 것보단 잘 먹어서 건강하신 게 좋지. 암, 그럼.’
환은 성인군자처럼 연의 모든 것을 사랑하기로 이미 마음먹었다.
하지만 먹을 것 때문에 자꾸 자신이 아닌 다른 수컷에게 눈을 돌리는 버릇은 제가 좀 고쳐줘야 할 듯싶었다.
환이 다시 한번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허어, 거참. 내 진짜 사냥 잘하는데….”
이대론 안 될 성싶었다. 환은 무슨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군길이 출발하고 연은 다시 환의 손에 이끌려 마루에 착석했다. 입엔 곶감이 하나 더 물려졌다.
“자, 다시 한번 복창하시면 곶감 하나를 더 드리겠습니다. 사냥은 누가 더 잘한다고요?”
환은 연의 눈앞에 곶감을 흔들며 대답을 기다렸다.
“하- 한 님이오.”
입 안에 든 곶감을 우물거리며 연은 대답했다.
알았다는 데도 계속 끈질기게 구는 그가 솔직히 좀 귀찮았다. 아무리 은인이라도 귀찮은 건 귀찮은 거였다. 왜 같은 말을 반복하게 만드나.
하지만 연은 환의 소매에서 나오는 곶감을 보곤 생각을 고쳐먹었다. 까짓거, 말 한마디쯤이야 못 할까 싶었다.
“사낭은 한- 님이 더 자라심니다.”
입 안에 퍼지는 다디단 곶감을 씹으며 연은 여러 번 복창했다.
주입식 교육을 끝낸 환은 수심이 가득 깃든 얼굴로 연을 쳐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후우. 제가 언제 한번 소 사냥을 다녀와야지, 이거 참…. 이리 먹을 것에 약하시니.”
연은 환이 저리 걱정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냥을 잘하는 군길이 위대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런 군길 위에 버젓이 앉은 환 역시 대단한 사람이라고 연은 생각했다.
‘환 님은 다른 걸 다 잘하시니 괜찮은데.’
물론 이런 식으로 환이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 제게 곶감을 먹이려는 사실은 결코 몰랐다.
환은 다시 연을 마루에 앉히곤 다른 일을 시작했다.
“장작을 패시게요?”
“아, 예.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이 일도 고되어지니 미리 해둬야지요.”
이제 보니 환은 사람이 능글거리는데도 은근히 성실한 구석이 있었다.
환은 연을 편하게 앉혀두곤 자긴 마당쇠처럼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연도 거기서 가만히 곶감만 받아먹고 앉을 순 없어서 제가 캐 온 도라지를 깠다.
인간들이 자주 먹는 식물을 눈여겨본 뒤 산에서 보일 때마다 저장해놓긴 했다. 하지만 정작 어떻게 먹는지 몰라 환에게 물어봐야 했다.
“도라지는 생강이랑 얇게 썰어 꿀이나 엿으로 재워 먹으면 겨울에 그만이지요. 눈 내리는 날엔 따듯한 도라지 생강 꿀차.”
환의 말을 듣고 그 상상만으로도 연의 입 안에 침이 고였다.
꿀. 꿀이란 건 늑대 주둥이로 핥아 먹어도 맛있는데. 미각이 발달한 인간의 입으로 먹으면 또 그 맛이 얼마나 기가 막힐까.
“얼음을 솥에 녹여 차를 끓여 마시면 맛이 그렇게 좋습니다. 나중에 해드리겠습니다.”
환이 또 약속을 했다.
이번엔 같이 하자고 손가락까지 내밀었다. 연은 그게 뭔가 싶었다.
그러자 환이 생글생글 웃으며 연의 새끼손가락을 제 새끼손가락에 걸어주었다.
“약속하자는 증표입니다.”
환이 제 손가락에 그녀의 손가락을 걸고 지긋하게 눌렀다.
그에게 또 새것을 배운다.
앞에 훤칠하게 생긴 환의 웃는 낯까지 더해지자 연의 심장이 또 박동하기 시작했다.
연은 생각했다.
‘역시 하루에 단 곶감을 너무 많이 먹은 게 분명해.’
환은 도라지 까는 법을 일일이 알려주었다. 몇 번 시범도 보여주었다. 보고 나니 어렵지 않아서 연은 금방 숙달된 손으로 도라지를 까기 시작했다. 한 포대를 다 까고 나면 생강도 다듬을 생각이었다.
환은 꿀에 담그는 건 나중에 같이 하자며 웃었다. 연은 어차피 방법을 모르니 알겠다고 했다.
그러고 나선 계속해서 노동이었다.
연은 마루에 앉아 때때로 환이 건네주는 곶감을 한입씩 우물거리며 도라지를 깠다. 환은 그런 연을 힐끗거리며 장작을 팼다.
“작고 고운 손이 도라지를 참 잘 까십니다.”
연은 제 손 볼 시간에 도끼가 그의 발이 아니라 장작을 제대로 잘 패고 있는지 보시라고 조언해 드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도끼 들고 저렇게 생글생글 웃으시는 건 좀 무서워 보이는데.’
하지만 연의 걱정관 별개로 환의 손에 실린 도끼는 나무를 척척 잘도 빠개갔다. 박자가 신통하기까지 했다. 하긴, 그는 뭐든지 능숙하게 잘했다.
사실, 연도 도라지를 까면서 환을 힐끔거렸다. 고의는 아니었다.
드러난 환의 힘줄과 근육이 장작과 함께 부서질 듯 움틀거릴 때마다 기이하게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눈이 제멋대로 돌아가는데 연이라고 별수 있나.
‘흠흠. 인간 사내도 멋있어 보일 수 있는 거구나.’
처음이었다. 인간의 몸이 저리 근사하다고 생각한 것이.
훤칠한 키와 길쭉한 팔다리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게 평소 보던 짐승의 몸과 달라 색다르고 다채롭게 다가왔다.
“날은 추운데 몸을 썼더니 덥네요.”
그가 갑자기 말을 거는 바람에 연은 흠칫 놀라 눈을 내리깔았다.
고의는 아니었는데 그를 넋 놓고 훔쳐본 게 된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환이 웃통을 훌렁 까버리는 게 아닌가.
‘……!’
도라지를 까던 연의 손에서 손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연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눈앞에 펼쳐지는 사내의 상체를 바라봤다.
그가 목을 좌우로 돌리며 몸을 풀듯 팔을 움직였다.
“아, 신경 쓰지 마십시오. 땀이 나서….”
환이 허리를 양옆으로 비틀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언뜻언뜻 옷깃 사이로 스치던 근육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덩치가 큰 인간 사내다,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막상 실제로 보니 짐승 못지않은 근육으로 단련까지 된 몸이었다. 무엇보다 배에 누가 칼로 후벼 파놓은 듯한 복근이 딱 새겨져 있었다. 세상에.
“추, 춥지도 않으십니까!”
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도라지 통 속에 처박듯 내리깔고 소리쳤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인간들은 원래 저렇게 겨울에도 웃통을 훌렁훌렁 까나? 털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연 님, 덥고 추운 것은 전부 다 이 마음가짐에 달린 것입니다.”
환이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넘어진 나무 조각을 세우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데 복근이 반으로 접혔다 드러났다. 그걸 보는 연의 시선이 또 홀린 듯 그를 좇았다. 앗차, 하고 냉큼 다시 눈을 깔았다. 심장이 제멋대로 박동하였다.
두근두근.
왠지 모르게 귓불이 달아오르는 듯하였다. 손을 귀에 가져다 대니 아니나 다를까, 뜨거웠다.
‘내가 왜 이런담.’
환은 그런 연의 심정도 모르고 사람 좋게 웃으며 계속 입을 열었다.
“정신과 몸을 때에 따라 알맞게 수련하면 저처럼, 이 한겨울에 웃통을 까도 춥지 안… 엣취!”
얼라리요. 연은 환의 재채기에 저도 모르게 도라지 통을 멀찍이 치웠다.
“이게 아닌데.”
환 역시 조금 놀란 듯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그럼 그렇지. 연은 슬쩍 환을 향해 눈을 흘겼다. 이 날씨에 춥지 아니할 리가 없다.
연은 언제 짐승 같은 환의 육체미에 홀렸냐는 듯 시치미를 뚝 뗐다. 그러면서도 속으론 아까 그림 같던 환의 복근을 다시 머릿속에 그렸다. 가슴이 떨리는 게 영 이상했다.
환 님도 참. 의외로 허당한 구석이 있으셨다. 처음엔 그저 무섭지만 어딘지 모르게 상냥한 사내였다면 지금은 볼수록 의외의 면모를 발견해가고 있었다.
연은 슬슬 이 환이란 사내가 편해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정이 갔다. 싫지 않았다. 제 앞에서 재롱부리듯 자꾸 어른거리는 이 남자가.
환이 머쓱하게 웃으며 다시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한때는 서릿발보다 차가운 폭포수 맞으면서 수련했던 몸인데 말입니다. 쿨쩍.”
“예, 예. 그러시겠지요.”
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환에게 천을 건넸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아차 싶었다. 저도 모르게 본래 말버릇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너무 싹퉁머리 없게 말씀드렸나.’
덜컥 겁이 났다. 아무리 제가 환을 편하게 여기기 시작했대도 여전히 그는 제 은인이었다. 이 초가에 지내는 한 연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사내였다.
랑의 무리에서도 살갑지 못하고 남 비위를 못 맞추는 성격 탓에 다른 암컷들과 곤욕을 치른 적이 몇 번 있더랬다.
그래서 그런지 연은 어려서부터 차라리 상명하복하는 관계가 더 편했다. 물론 저도 하하 호호 하는 사이에 억지로 낄 순 있었다. 하지만 그도 오래 가지 못해 다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곤 했다.
연은 긴장한 채 슬쩍 환의 눈치를 봤다.
‘버럭 화내시면 어떡하지.’
겁이 났다. 환이 당장에라도 장작 패던 도끼를 들고 으름장을 놓을까 봐. 랑이었다면 분명 그랬을 테니까. 언니이자 우두머리인 제게 기어올랐다고.
“감사합니다, 연 님.”
그러나 환은 공손히 제가 건넨 천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걸로 팽, 하고 코를 풀었다. 야무지게 뒤집어 반대쪽 면으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도 닦았다.
아. 연은 눈을 깜박깜박했다.
화를 안 내시네.
쫓겨날까 봐 전전긍긍하던 마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당장이라도 싸늘하게 표정을 바꾸고 저를 홀대할까 봐 겁이 났는데. 그런 기색은 하나도 없다. 저 큰 덩치로 무서운 표정만 지어도 다들 알아서 꼬리를 내릴 텐데, 그럴 기미도 안 보였다.
‘……다행이다.’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조금 웃음도 났다.
연은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코를 닦으신 천으로 땀도 닦아버리시면 어떡합니까.”
“아, 방에 들어갈 때는 손도 얼굴도 잘 씻고 들어가겠습니다. 집 안을 더럽히지 않을게요.”
어쩐지 공손한 대답이 돌아왔다.
연은 진심이신가 놀라 환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저를 바라보는 환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저 얼굴이 진심이 아니면 연은 손에 쥔 칼을 반대로 쥐고 도라지를 깎으래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은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혼란스럽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구름처럼 몽실몽실해지는 느낌이었다.
‘기이하다. 왜 이러는 거지.’
원인은 분명 눈앞의 이 상냥하신 분 때문인 것 같은데.
“후우, 거의 다 끝나갑니다. 장작 다 패고 나선 연 님이랑 같이 겨우내 먹을 먹거리 장만이나 도와야겠어요.”
대충 보니 그의 장작 패기도 어느덧 끝이 보이고 있었다.
“…그러세요.”
연은 덤덤하게 대꾸하였다. 얼핏 들으면 새침해 보이기도 하는 목소리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제 성격 그대로 환을 대하기로 했다. 환의 앞에서는 억지로 자신을 꾸미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 슬쩍 환의 눈치를 살폈다. 두 번 실수하는 건 아닌가 겁이 났다.
웬걸, 연의 대답을 들은 환의 입꼬리가 오히려 휙 올라갔다. 어쩐지 환도 있는 그대로의 제 반응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연은 혼자 생각했다. 사실 조금 심장이 쪼그라들었었다. 뭣도 없는 게 건방지게 콧대 높은 척한다고 싫어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연은 환이 이리 치대오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괜히 떨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좋았다. 아까도 느꼈지만, 연은 이 환이란 사내가 점점 좋아졌다.
‘정말 내가 왜 이런담.’
아까 환의 맨몸을 본 여파로 살짝 붉어졌던 볼이 다시 뜨거워졌다. 연은 시린 손으로 얼른 피부를 식혔다.
‘집주인이랑 친하게 지내는 게 뭐가 어때서.’
연은 괜히 혼자서 변명했다.
장작더미 정리를 마무리한 환이 서둘러 다가왔다. 연의 벌건 볼을 보곤 다급하게 펼쳐놓은 그녀의 도라지 바구니도 마저 정리했다.
“자자, 얼른 들어갑시다. 볼이 벌써 벌겋습니다.”
환이 그런 저를 추운 거라 오해해 일부러 장작 패는 일을 서두른 건, 연은 꿈에도 몰랐다.
‘추워서 그런 거 아닌데….’
연은 못 이기는 척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서며 생각했다.
나란히 방에 들어온 두 사람은 옹기종기 앉아 함께 도라지를 다듬기 시작했다.
환은 약속을 지켰다. 방 안에 들어오기 전에 물로 손과 얼굴을 꼼꼼히 씻었다. 연은 환이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보고 또 한 번 가슴이 이상 반응을 일으키는 걸 느꼈다.
일을 하면서도 방 안에는 계속 대화가 넘쳤다. 대부분은 환이 농담을 던지고 연은 키득키득 웃는 소리였다. 그러다 말이 끊길 때도 있었는데, 기이하게 아무 말 없어도 편안했다.
둘은 이미 연이 반 이상 까놓은 도라지를 다 까고 생강도 까놨다. 그다음은 나물 채소의 차례였다.
시래기, 고사리, 호박, 무 할 것 없이 물기 없이 바짝 말린 것을 소분해 짚과 함께 엮었다.
환은 장작도 잘 패더니 나물도 잘 다듬었다. 연의 눈엔 못하는 게 없어 보였다. 손재주가 참 좋은 사내였다.
“그…. 나쁘지 않게 하시네요.”
칭찬하려고 했는데, 해 버릇하지 못해서 그런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니 결국 한다는 소리가 밉게 나왔다.
연은 그 말을 뱉어내곤 제 입을 때려주고 싶었다.
‘으이구, 말이나 곱게 하면.’
그런데도 환은 연의 말을 듣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연 님께 칭찬을 들어서 그런가,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연은 잠시간 또 멍해졌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가 어쩐지 바로 이해가 됐다.
이런 감정을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하는 거구나.
분명 제 심장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기분을 말하는 거겠지.
어찌 됐건 연은 환과 제가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됐다. 이렇게 또다시 그와 부쩍 친밀해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환과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마음이 좀 더 편안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거북해졌다. 가슴에 누군가 장작을 넣어놓은 것 같았다.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도 같았다.
연은 이제야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이런 감정이 곶감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연의 마음이 조금 답답해졌다.
‘미쳤구나, 너. 인간을 상대로.’
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참을 말없이 손만 사부작거리는데 환이 대뜸 이렇게 말했다.
“이걸로 나중에 국 끓여 먹읍시다.”
또, 또 약속이었다.
뭔 저렇게 같이 하자고 하는 게 많은지. 다 할 수나 있을는지.
“좋습니다. 그렇게 해요, 환 님.”
그런데 그게 또 기대돼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저 약속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연은 생각했다.
환이 저 많은 약속을 다 지키지 않고 떠나버린다면. 그렇게 된다면 어쩐지 연은 조금 슬퍼질 것 같았다.
한나절을 그렇게 나물류를 손보고 두 사람은 찌뿌둥한 허리를 폈다.
“아 참, 연 님께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문득 환이 연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게 뭔데요?”
“일단 따라와 보세요.”
환은 연을 데리고 창고로 갔다. 이번에도 손을 붙잡고 끌고 갔다.
참 환은 연의 손을 덥석덥석, 마치 제 것처럼 잘 잡았다.
남 보기 조금 부끄러웠지만 군길도 사냥 나간 데다 진팔도 주변에 없는 터라 그러려니 했다. 솔직히 크고 따듯해서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창고에 도착하고 나서, 환은 연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창고에 쌓인 물건을 이것저것 가리키며 설명해주었다.
“저건 메주고, 저건 대추청입니다. 또….”
이제 보니 창고에 버려진 물건인 줄 알았던 게 전부 저장 식량이었다.
그때 뭔가를 발견한 환의 표정이 밝아졌다.
“찾았다. 이거요. 이거 보여드리려고 했어요.”
환이 어둑한 창고 구석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이게 여기서 가장 귀한 겁니다.”
그때 환이 갑자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연의 귀에다 대고 소곤소곤 귓속말을 했다. 연은 귓가에 뿜어지는 그의 더운 숨에 살짝 기분 좋은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군길이랑 진팔이 놈 몰래 담근 겁니다. 연 님한테만 특별히 알려드리는 거예요.”
연은 코를 킁킁거렸다. 향낭으로 코가 막혀 있어도 시큼한 향 정돈 아직 맡을 수 있었다.
환이 보주를 꺼내듯 극진한 태도로 연의 눈앞에 항아리 하나를 들어 올렸다.
“복분자 술입니다.”
“…복분자 술이요?”
환이 무척 심오한 표정을 지었다.
“네. 아주 귀하디귀한 것인데, 왜 귀한지 차마 설명을 할 수가 없는…. 아무튼 그런 물건입니다.”
진중하게 설명하는 환의 표정이 어쩐지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대광을 비롯한 젊은 수컷들이 인간 모습을 하고 산 아래 내려갔다가 하루를 꼬박 새우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고주망태로 취해 산 입구에 늑대 모습으로 쓰러져 있던 걸 무리 중 하나가 발견했었지.
연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 이것이 바로 그 정신을 심약하게 만들고 착란 증세와 같은 병증을 만드는….”
“네. 바로….”
“독약입니까?”
연의 말에 환이 눈을 끔벅거렸다.
뭔가 오해가 생긴 듯했다.
“허어…. 거참, 연 님 말도 틀린 건 아닌데….”
이내 그가 턱을 쓰다듬으며, 뭔가 굉장히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연은 환의 태도를 어림잡아 짐작하곤 술병에서 손을 황급히 떼어냈다.
순이 할멈이 저런 독약 같은 건 손도 대지 말라고 했던 말이 기억이 났다.
“그런데 이게 꼭 독약이라고 할 순 없는 게….”
환이 연의 눈치를 보듯 턱을 쓰다듬더니 중얼거렸다.
“술은 보통 사람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줍니다.”
연은 눈을 깜박였다.
“사람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준다고요?”
“네. 아주 좋게요.”
환이 말을 이었다.
“정신을 심약하게 하고 착란 증세와 같은 병증을 만드는 독약이라기보단…. 구름을 타고 다니는 듯,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신묘한 기분을 만끽하게 해주는…. 신선들의 이슬에 가깝지요.”
연은 눈을 끔벅였다.
“신선들의 이슬이요?”
환이 연을 향해 짓궂게 웃었다.
그 얼굴이 저를 시험하는 듯했다.
어느새 환의 얼굴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연은 괜스레 가슴이 떨리는 걸 느꼈다.
“어디 한번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제안하는 그의 표정이 썩 음험해 보였다.
연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저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에이. 해보시지도 않고.”
환이 쓰읍, 하며 혀를 찼다. 연은 그 얼굴이 참 잘생겨 보인다고 순간 생각했다.
“어떠십니까. 어떻게, 오늘 밤에 저랑 같이 한잔 나누시렵니까.”
환이 저를 향해 한 걸음 더 바싹 다가왔다. 두 사람의 코가 거의 부딪힐 만큼 가까워졌다. 눈과 눈이 마주치고, 서로의 시선이 꾹 다물린 입술로 향했다.
‘꿀꺽….’
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인간 사내가 이리 가까이서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데 왜 피할 생각은 안 들고….
“후아암-!”
그때였다. 작은방 쪽에서 드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진팔이 하품하며 걸어 나왔다.
“…씨팔.”
그와 동시에 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욕하신 건가?’
환의 입에서 분명 뭔가 상스러운 소리가 난 것 같은데. 그것도 엄청나게 구수한 욕이.
분명 제 착각일 테지. 연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치부하고 얼른 생각을 접었다. 점잖고 태평하기론 천 년 묵은 이무기 못잖은 환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연의 입장에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환은 금세 표정을 관리하고 연을 향해 새초롬히 웃어 보이고 있었다.
“진팔이 새…. 아니 놈이 일어났나 봅니다. 우리의 좋은 시간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죠.”
그가 어딘지 으득으득 이를 가는 듯한 표정으로 씁쓸하게 말을 꺼냈다.
뒤돌아 진팔에게 가는 그의 어깨가 어쩐지 축 처져 보였다.
‘맛은 궁금하긴 했는데….’
그를 졸래졸래 따라가며 연은 살짝 서운하다고 몰래 생각했다.
‘이걸 어쩐다. 이러다가 인간에게 홀라당 넘어가게 생겼구나.’
환을 꼼짝없이 인간이라 착각한 연은 낙담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심장은 아직도 작은 새의 것처럼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 * *
진팔은 간밤에 잠을 제대로 설친 모양이었다.
연은 그런 진팔의 퀭한 얼굴을 힐끗거렸다.
왠지 간밤에 큰 방을 차지한 제 탓인 것 같아 아주 조금 양심에 찔렸다.
“저리 두십시오. 어차피 먹을 때 되면 다시 살아납니다.”
환은 다 제 업보라며 그런 진팔에게 가는 연의 시선을 자기 몸통으로 차단했다.
“저놈 눈에 담으실 시간에 저나 한 번 더 봐주십시오.”
연은 그 말을 무시하고 진팔에게 말했다.
“물 떠다 놨어요. 드세요.”
연이 아침에 작은 방 앞에 자리끼 석 잔을 놔둔 걸 발견한 환이 눈을 빛냈다.
“이런,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늦잠 자는 건데요. 얼굴도 귀여우신 분이 하는 짓도 귀여우시면 어떡합니까.”
환의 주접에 연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이 남자는 왜 제가 무슨 짓을 하든 이렇게 열렬한 관심을 보이는 걸까.
진팔은 간밤 사이 연과 내외하긴 때려치우기로 했는지 퍽 편한 자세로 코를 후비며 그 석 잔을 제가 다 마셨다. 은근슬쩍 지랄도 풍년이라는 제목의 저잣거리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환이 그 노랠 듣자마자 진팔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 후로 그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진팔이 일어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군길 역시 사냥에서 돌아왔다.
이번 사냥감은 메추리 네 마리였다.
연의 눈이 먹잇감을 향해 어김없이 돌아가는 모습을 본 환이 재빨리 그녀를 붙들었다.
“흠흠.”
그리고 뭔가 받아낼 게 있는 사람처럼 헛기침을 했다.
아. 연은 그의 눈썹 한쪽이 위로 휙 올라가는 걸 보며 재빨리 뭔갈 생각해냈다.
“…사냥은 환 님이 더 잘하십니다.”
환이 흡족하게 웃으며 메추리로 향하는 길을 터주었다. 그제야 연은 군길에게서 메추리를 받아 손질할 수 있었다.
군길은 메추리 알도 찾아왔다. 환은 메추리 고기와 알을 간장에 조려 반찬을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날 저녁은 쌀밥에 간장으로 조린 장조림이었다. 온종일 둘이서 함께 다듬은 산나물도 곁들였다.
이번에도 세 장정은 연이 먼저 한술 뜨기 전에 숟가락에 손을 대지 않았다.
연은 이제 그냥 그러려니 했다. 자기들 편한 대로 하면 그만이라고 여겼다.
연은 모락모락 연기 나는 밥을 한술 크게 떠 메추리 장조림을 얹었다. 한꺼번에 입에 넣었다.
‘우와. 눈물 날 것 같아.’
역시 맛있었다. 맛있는 정도가 아니라 끝내줬다.
내적 감탄을 하는 사이 군길과 진팔이 밥에 달려들었다. 환은 여느 때처럼 흐뭇하게 연이 밥 먹는 걸 구경하며 한술씩 느긋하게 떠먹기 시작했다.
갓 지은 밥은 고슬고슬했다. 반찬도 짭조름하니 더할 나위 없었다.
환이 밥 먹다 목 막혀 하는 연에게 물 한 사발을 떠다 주며 말했다.
“다음 주 즈음에는 된장을 쓸 수 있을 겁니다. 시래깃국 곁들여 먹읍시다.”
진팔이 곁에서 거들었다.
“내일은 버섯 좀 따 올까 싶어요. 눈 내리기 전에 남은 거 싹 다 해치워야죠.”
“오는 길에 멧돼지 발자국을 봤습니다. 오랜만에 돼지고기 포식을 할 수 있겠지 말입니다.”
군길도 두 그릇째 먹으며 웅얼웅얼했다.
네 명이서 먹으니 저장해 둔 음식은 금방 동이 났다. 그러나 또 네 명이서 일하기 시작하니 그만큼 창고도 빨리 채워지기 시작했다.
‘기이하구나.’
연은 밥을 세 그릇째 해치우며 생각했다.
‘매일 이렇게 배 터지게 먹는데도 먹을 게 금방금방 채워지다니.’
혼자서 겨울 날 준비를 할 적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함께 일하는 일꾼들이 이렇게나 중요했다.
끝에는 다 같이 누룽지에 물 부어 끓인 죽으로 마무리했다.
“끄억.”
모두 마루에 앉아 통통 발을 튀기는데 진팔이 트림을 했다.
“어후, 제가 원래 채소만 먹으면 이렇게 트림이 나서.”
연은 진팔을 희한한 사내라고 생각했다.
고기를 먹으면 설사를 하고 채소를 먹으면 트림한다니. 그럼 대체 평소에 뭘 먹고 살아야 별 탈이 없단 말인가.
“옛끼 이놈, 진팔이 이 더러운 개의 새끼야. 연 님 계시는데.”
환이 진팔을 면박 주자 연은 재빨리 대꾸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내일 버섯을 따 올 귀한 일꾼을 기죽게 할 수 없었다. 연은 다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 말을 들은 환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렇게 보니 연 님은 저 말고 다른 두 놈에게 더 다정하십니다.”
“예?”
연은 황당했다. 그보다도 제가 누구에게 다정하다는 소릴 처음 들어봐 당황스러웠다.
“예…?”
진팔 역시 누가 누구에게 다정했냐는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환을 쳐다봤다. 진팔에게 죄가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하여튼 이렇게 질투가 무서웠다. 늑대 본새를 다 죽여놓는다.
연은 은근한 억울함을 담아 입을 열었다.
“제가 누구한테 다정했다고 그러십니까. 진팔 님은 버섯 따 올 일꾼이시잖아요. 그리고 군길 님은 목소리를 제대로 들은 적도 손에 꼽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색해서 그냥….”
변명하다 보니 말소리가 줄어들었다. 속마음을 얘기하자니 낯간지러웠다.
‘환 님께는 그냥… 마음이 제일 편해서 그런 건데.’
연은 원래 그랬다. 어색하고 싫으면 괜스레 더 공손하게 굴었다. 책잡히기 싫어서 그런 것도 있고, 척을 지면 끝이 더 안 좋게 날까 봐 초장부터 선을 긋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편한 환에겐 평소와 같이 무뚝뚝하게 굴고, 온갖 새침을 떨었다.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자연히 그리되었다.
어려서부터 언니 랑에게 치이고 다른 새끼들에게 치여 양보하고 포기하는 법부터 배웠다. 중간에 끼인 몸통의 삶을 살다 꼬리까지 내려갔다.
제가 아닌 저처럼 구는 게 일상이었다. 참고 도망치고 피하고.
그러다 환과 함께 있으면 오롯이 연 자신이 되는 것 같았다. 더 솔직해지고 확실하게 저 자신을 표현했다.
그렇게 좋은 늑대도 아니고, 착한 늑대도 아니고. 적당히 실리 챙기고 이득 보고 싶은 평범한 암컷으로.
‘핫….’
문득 코앞의 환을 두고 이런 생각을 떠올린 저 자신이 창피해졌다.
‘너 정말 어쩌려고 그러니.’
연은 자조하며 스스로를 책망했다. 어쩌자고 인간에게 연모의 마음을 느끼는 건가.
착각이 아니다. 이건 분명한 연모의 감정이었다. 한낱 곶감 따위의 농락이 아니라.
‘다른 수인도 아니고 하필이면 인간이라니….’
환을 두고 하는 엄청난 오해였지만 연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그녀의 고민은 날이 갈수록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연은 환을 피해서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그때 연의 표정을 살피던 환이 문득 큰 소리로 능청을 떨기 시작했다.
“압니다, 연 님. 다 알아요. 다 제가 편해서 그러신 거, 압니다. 제가 이리 잘났는데 착하고 편하기까지 해서, 우리 연 님이 나한테 반하시면 어떡하나.”
연은 뜨끔했다. 이 남자가 장난식으로 툭툭 내뱉는 말이 죄다 사실이라서.
이 사내는 어쩜 이리 제 마음을 잘 아는 걸까. 마치 펼쳐져 있는 책을 그저 읽기만 하면 된다는 듯이.
“뭘 그리 걱정하십니까.”
환이 저를 보며 씨익 웃었다. 청렴한 푸른 가을 하늘 같은 웃음이 표정에 가득했다.
“이 환에게 시집오시면 되는 것을.”
그가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하는 말이 정답이라는 듯이. 연 님만 선택하시면 된다는 듯이.
곁에서 진팔이 또 시작이냐는 듯 머리를 짚고 군길은 팔짱을 낀 채 졸고 있었지만, 아무렴 어떨까 싶었다.
정말 연의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어쩌면 진작에 그를 본 순간부터 천천히 스며들었던 걸 수도 있다.
돌이킬 수 없단 걸 이미 알고서도. 어쩌면 그를 볼 때마다 싱숭생숭하던 때부터.
환이 연에게 다가왔다. 큼지막한 손이 다시금 연의 손을 잡아끌었다. 추위에 벌게진 연의 콧잔등을 환의 뜨거운 검지와 엄지가 감쌌다.
연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엄청 빨개졌네요. 춥지요? 인제 그만 들어가 볼까요?”
그가 다정하게 웃었다.
연은 어금니를 꼭 깨물었다. 감정을 숨기고 싶었다.
괜스레 눈을 못 마주치고 있는데 환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가며 환이 중얼거렸다.
“빨리 눈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네? 어째서요?”
연은 그런 환이 이해 가지 않았다.
눈이 좋았던 건 새끼였을 때뿐이지, 지금은 그저 하늘에서 내리는 골칫거리라고 생각했다.
눈이 내리면 먹을 것도 줄어들고 춥기도 더 추워지지 않나. 게다가 그 차갑고 흰 눈 덩어리들이 쌓이면 푹푹 발이 빠져 걷기조차 힘들었다.
환이 대꾸했다. 입김과 함께 그의 시원한 대답이 터져 나왔다.
“눈이 빨리 와야 겨울이 빨리 지나고, 봄이 또 올 거 아닙니까.”
참 환다운 대답이라고 연은 생각했다.
환이 고개를 휙 돌려 연을 쳐다보며 훤하게 웃었다.
“전 빨리 연 님이랑 봄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연은 순간 멈칫했다.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함께 봄을 맞이하자니.
참 기약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함께 만든 약속이 또 늘어났다. 저러다 지키지 못하면 어쩌려고.
그런데 그게 싫지 않았다. 날씨는 한겨울을 향해 점점 얼어붙어 가는데 연의 마음은 갈수록 몽글몽글 녹기만 하고 있었다.
환장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