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늑대 나리
“이게 왜 안 된담….”
불도 못 붙인 아궁이에 볍쌀을 넣어놓고 연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연의 나 홀로 월동 준비는 나름 착착 시행되고 있었다.
온 산의 짐승들이 포동포동 살이 쪄야 할 초겨울에 홀로 홀쭉한 게 그 증거였다.
가을 내내 연은 제 입으로 들어갈 것을 죄다 이 초가에 꿍쳐두었다. 월동 준비하는 다람쥐처럼 얻는 식량마다 족족 모두 초가의 창고에 저장해 두었다. 결국 말도 살이 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에 저 혼자 살이 쪽 빠졌다.
늑대의 몸으로 먹을 수 있는 걸 다 쟁여둔 후에는 혹시 몰라 사람 몸으로 먹을 것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인간으로 변할 수 있다 한들 어디까지나 본연은 짐승이었다. 인간에 대한 지식은 순이 할멈 같은 나이 지긋한 늑대에게 주워들은 게 전부였다.
실은 초가집을 사용할 줄 몰라 애를 먹어야 했다. 아궁이를 떼는 방법부터, 누비옷 짓는 법까지 하나부터 열 죄다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새벽마다 민가에 내려가 닥치는 대로 사람들 사는 모습을 엿보았지만 알쏭달쏭한 건 마찬가지였다.
발정기가 다가오면 연은 사람 모습으로 있을 생각이었다. 늑대가 아닌 사람인 채 그 시기를 견디면 그래도 좀 낫지 않을까 싶었다.
‘다신 발정기의 고통을 견디고 싶지 않아. 그러려면 최소한 발정기가 지속되는 칠 일간 사람 모습으로 지내야 하는데….’
의욕은 충분했지만, 과정이 쉽지 않았다.
어린 시절엔 언니인 랑과 함께 자주 민가에 놀러 다녔다. 빈집에서 여자아이들 옷을 빌려다 입고선 장터에서 신나게 놀다 오곤 했다.
순이 할멈의 가르침대로 그런 식으로 인간의 물건을 빌린 다음엔 값을 치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주로 꿩이나 멧쥐 같은 작은 들짐승을 사냥해서 다음 날 대문 앞에 놔두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쓰는 물건이 눈에는 익었다.
‘그런데 정작 쓸 줄을 모르니….’
이 쌀도 마찬가지였다.
연은 눈물을 머금고 사냥한 너구리 가죽과 이 볍쌀을 바꿔 왔다.
장사꾼은 낡은 옷차림의 낯선 여인네인 연을 처음엔 경계했다. 그러나 질 좋은 너구리 가죽을 보여주니 냉큼 쌀을 팔았다.
원래는 그 가죽을 겨울옷 짓는 데 보탤 생각이었다. 인간의 몸은 털이 없어 추운 날씨를 오래 견디지 못하니까. 그런데 또 생각해보니 옷 짓는 법도 자세히 모르지 않나. 할수록 할 일만 늘어갔다.
연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벌써 가을은 가고 초겨울이 찾아왔다. 혼자 힘으로 이렇게나 한 것도 대단한 거였지만 아무래도 풍족하게 지내긴 그른 것 같았다.
‘그래도 이번 겨울만 어떻게든 버티면 다음 해엔 요령이 생겨 점차 생활이 나아질 거다.’
연은 희망을 품었다.
겨우내 얼어붙은 도토리와 말린 무만 먹고 지내게 생겼지만, 다시금 힘이 났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는 사이 연은 랑의 무리에서 완전히 쫓겨났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연은 있는 듯 없는 듯 하다 무리 내에서 서서히 사라질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시금 대광이 연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랑이 목격하고 말았다. 그길로 랑의 시퍼런 이빨에 내쫓겨 연은 무리를 완전히 떠나야 했다. 완전한 추방이었다.
이후로 연은 제 흔적을 완전히 지우는 습관이 생겼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였다.
‘이렇게 배척받게 된 이상 뒤를 밟힐 가능성도 있으니.’
랑이 그런 식으로 쫓아냈으니 무리의 젊은 수컷들에게 혈기 해소용 장난감 취급을 당할 수도 있었다. 보복성 괴롭힘은 무리의 배척자에게 흔한 처벌이었다.
대광도 여전한 문제였다. 연의 입장을 이 지경까지 몰아놓고도 그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연아, 조금만 기다려라. 이 오라비가 랑이를 어떻게든 설득해 널 다시 데려오마.”
대광은 마지막까지 그런 미친 소리를 해댔다.
연은 그 뒷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꽁지가 빠져라 대광에게서 도망쳤다. 그 후로 그를 본 적도, 냄새를 맡은 적도 없었다.
연은 대광을 생각할 때마다 산의 큰 너럭바위 밑에 깔려 지져지는 것 같은 답답함과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별수가 없어 그녀는 대광에 대한 감정을 몰아냈다. 랑이 언니에 대한 생각도 거의 하지 않았다. 분노를 곱씹어봤자 본인만 힘들 뿐이었다.
‘적어도 면전에서 괴롭힘당할 일은 이제 없잖아.’
저를 보며 키득키득하는 일도, 부러 집합 장소를 잘못 알려주는 일도, 밤마다 오줌을 참는 일도 없었다.
미친 곰을 만날까 봐 초가 밖으로 한 발짝이라도 뻗으면 간이 떨리고, 밤엔 서너 시간 이상 눈을 감고 있지 못하게 되었지만, 차라리 서러움보단 낫다.
물론 힘든 점도 많았다.
홀로 남았다는 두려움에 연은 거의 병적으로 산을 나다니면서 제 흔적을 지워댔다. 웬만한 곳은 사람 모습으로 돌아다녔고 어쩔 수 없이 늑대의 모습일 땐 필시 발자국과 냄새를 지웠다. 톡 쏘는 풀잎과 꽃잎을 빻아 만든 방향 주머니를 늘 목에 차고 다녔다. 덕분에 아직까지 어린 암컷 홀몸으로 이 산에서 버텨낼 수 있었다.
꼬르륵.
배가 주리다 못해 쓰렸다. 연은 허리를 부여잡고 배고픔을 참았다.
무리에서 쫓겨난 후 가장 외롭고 고단한 일이 바로 배를 곯을 때였다.
늘 무리로 하던 먹이 조달을 혼자 하게 된 데다 겨우살이를 대비해 많은 양을 저장해야 했기 때문에 연은 자주 굶주렸다.
‘이 불붙이는 법만 터득하고 끼니를 챙겨야겠다.’
연은 열심히 불이 붙다 만 아궁이에 부채질했다.
‘그나저나 이놈의 불이란 놈은 아주 징글징글하게도 붙지 않는구나.’
어제도 담비의 털과 고기를 말리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특히 질 좋은 가죽으로 말린다는 게 은근히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그걸로 연은 겨우내 인간의 몸으로 쓸 장갑을 만드는 데 보태고 싶었다.
‘장갑, 누빈 속바지, 솜치마….’
만들어야 하는 걸 떠올리며 연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겨울옷이 시급했다. 이제 초겨울인데도 벌써 입김이 나는 게 가만히 있다 보면 몸이 얼 것같이 추웠다. 연은 마을의 빈집을 뒤져 겨우 구할 수 있었던 낡은 옷을 두 손으로 꼭 여몄다.
‘배고프고 춥지만 않으면 될 것 같은데 그게 이리 어렵구나.’
사람 몸으로 하는 모든 게 연에겐 처음이라 작은 것 하나조차도 쉽지 않았다.
사이사이 늘 차고 다니는 향낭 주머니에 넣을 방향 가루도 빻아놔야 했고, 모아 둔 나물과 도토리를 가지고 어떻게 겨우내 버텨야 할지 고민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급했다. 생각으론 이미 일을 다 끝내놓은 것만 같은데 부채 부치는 손은 자꾸 느려졌다. 눈도 조금씩 감기는 것 같았다. 졸림과 배고픔이 번갈아 가며 찾아오는 듯했다.
‘졸려도 참아야지.’
그녀는 황급히 졸린 눈을 비볐다.
연의 까맣고 동그란 머리 타래가 아궁이를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불붙을 기색은 없다.
그렇게 그녀가 피곤과 싸우며 어떡하면 이 쌀이란 것을 먹을 수 있을지 궁리할 때였다.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닙니다.”
뒤에서부터 갑자기 목소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에구머니!”
연은 바닥에서 위로 튀어 오르듯 소리 질렀다. 너무 놀란 나머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저런, 괜찮습니까?”
저를 걱정하는 듯한 낮고 점잖은 목소리에 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간, 인간이다. 그것도 매우 젊은 사내인 듯했다.
아궁이가 있는 그늘 안쪽이 어두워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를 덮는 그림자가 거대했다.
연의 심장이 튀어나올 듯 뛰기 시작했다.
연에게 이 인간 사내의 존재란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았다. 순간 온갖 생각이 연의 머리통을 스쳤다.
‘누구지? 설마 이 집의 주인은 아닐 테고…. 떠돌이 사냥꾼인가? 하지만 이 초겨울에? 산을 타다 길이라도 잃은 외지인인가?’
연의 뒤에 나타난 인간이란 건 다름 아닌 환이었다.
환은 인간 모습으로 변한 뒤 가지고 있는 옷 중 제일 좋은 옷을 점잖게 껴입은 채였다. 그 역시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저런, 사람 말을 할 줄 모르나?’
제가 그토록 찾던 암컷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길래 그 역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접근한 것이었다.
산마다 수인화가 가능한 개체가 있고 아닌 개체가 있듯, 인간의 모습으로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개체들도 많았다.
만약 그녀가 인간의 말을 배우지 못했다면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늑대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나.’
환 나름으론 배려한 거였다. 무작정 덩치 큰 수컷 늑대 모습으로 혼자 있는 암컷에게 접근하면 위협적으로 느낄 수도 있으니까.
한데 환은 사람 모습으로도 마찬가지란 걸 잠깐 간과하고 말았다. 늑대 상태로도 환은 백 근은 훌쩍 넘어가는 수컷 머리 늑대였다. 당연히 인간 몸으로도 보통 사내들의 머리 한둘은 훌쩍 뛰어넘었다.
지금 이 여인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바로 서도 겨우 그의 가슴팍에나 올까 말까 할 정도로 작아 보였다.
연은 얼이 빠지도록 겁먹은 상태였다.
‘어쩌지? 도망가야 하나?’
연은 간덩이가 쪼들리는 기분을 느끼며 생각했다.
‘지, 지금이라도 늑대의 모습으로 변해서 훌쩍 산으로 토낄까.’
늑대의 모습으로 위협해볼까 잠깐 생각도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저런 인간 사내라면 늑대 모습으로 변해도 쫓아내기는커녕 제가 되레 사냥당할지도 몰랐다.
연의 눈이 빠르게 인간 사내를 훑었다.
사내는 흰 누빔 무명옷에 푸른빛이 살짝 도는 도포 자락을 걸치고 있었다. 갓은 벗어 목 뒤로 늘어뜨린 채 내보인 상투가 제법 단정했다.
환은 어려서부터 동서남북을 쏘다닌 탓에 겪은 것도 많고 배운 것도 많았다. 자연히 인간사에도 관심이 많았다. 늘 지니고 다니는 봇짐에도 인간의 옷을 챙겨 다녔다. 본디 흥미 가는 것은 지칠 때까지 물고 늘어져 끝장을 보는 성미기도 했다.
그런 탓에 환은 지금 당장이라도 엔간한 마을엔 터 잡고 사람 행세하며 살 수 있을 정도로 인간에 대해선 도가 튼 수인이었다.
반면 연은 달랐다. 머리가 클수록 인간 마을에 가는 걸 언니인 랑이 유독 싫어하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발을 들이더라도 잠깐 구경하는 것에 그쳤다. 눈대중과 귀동냥으로 사람 행세를 하고 있긴 해도 뭔가가 어설펐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환은 입꼬리는 웃고 있어도 눈은 짐승의 것 그대로였다. 해가 넘어가도록 찾아대던 제 암컷을 드디어 발견하다니, 조금 흥분해 짐승의 기색을 숨기지 못한 까닭이었다.
형형하고 호승심 강한 눈빛은 연이 조금만 평범한 사람들의 낯에 숙달되어 있어도 보통 사내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연은 그렇지 못했다. 그녀는 환이 그저 완벽한 인간 사내라 생각했다. 다른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곤 정말 요만큼도 생각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환이 발정기 직전의 어린 암컷을 만난 수컷이라는 것을.
그것도 제가 작년에 뿌린 발정향을 찾아 근 일 년간이나 헤매온, 혈기 왕성한 젊은 늑대임을.
‘씨발, 곱다.’
연이 땅바닥에 그대로 엎어져 있는 동안, 환은 생각했다.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벌렁이고 있었다. 애써 태연한 척, 여유로운 척 뒷짐 지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띠고 있었지만, 손에 땀이 흥건했다.
‘이래도 되는 거야? 사람 모습인데 환장하게 예쁘기는 또 처음이네.’
환은 인간 모습에 끌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작은 귀는 얼굴 위가 아닌 옆에 달린 데다 피부에 털 하나 없는 괴이한 모습을 예쁘다고 생각한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저잣거리를 나다닐 때마다 인간 여자들이 눈길을 보내고 부러 그의 곁에 손수건 같은 걸 떨어트릴 때도 코웃음 친 환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수인 암컷은 달랐다.
둥그런 머리는 작고 귀여웠다. 털 하나 없는 흰 피부는 유약을 발라 갓 구운 그릇같이 윤기가 났다.
어설프게 땋아 어깨 아래로 내린 검은 머리칼은 또 얼마나 고운지. 달래꽃 꽂아주면 잘 어울릴 듯싶었다. 아니, 뭔 꽃이든 안 어울릴까.
조금 마른 듯한 몸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거야 겨우내 잘 먹여서 포동포동하게 찌우면 그만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겁먹은 거지.’
환은 고심했다. 공포에 질린 여자의 눈이 살짝 커져 있었다.
그 와중에도 환은 살짝 치켜 올라간 연의 눈꼬리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늑대 모습일 때 저 눈으로 그를 흘겨본다고 상상하니 저절로 목젖이 바짝 말랐다.
‘나름대로 상냥하게 말 건다고 걸었는데….’
환은 억울했다.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할지라도 제 목소리에 적의가 없다는 것쯤은 알 수 있을 터였다.
부러 점잖은 옷을 입었다. 목도 가다듬고 상투도 이만하면 깔끔하게 잘 틀었다. 진팔이 고생해줬다. 마음은 급했지만 오기 전에 목욕재계한다고 근처 계곡물에 몸도 담갔다. 불알까지 얼어붙는 줄 알았지만 그게 대수가 아니었다.
좋은 첫인상 심어준다고 별짓을 다 했는데.
“꽤 크게 넘어진 것 같은데, 괜찮습니까?”
환은 큼큼 목을 가다듬고 한 번 물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여자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러자 여자는 혼비백산이 되어 주저앉은 채 네 걸음으로 뒷걸음질 쳤다.
환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한 가지뿐이었다.
‘망했다.’
아무래도 좋은 첫인상은 틀린 것 같았다.
냄새를 흘리지 않게 바람을 타고 어딘가 숨어 있을 군길과 진팔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환은 돌아가면 아우들의 목을 확 꺾어버리리라 생각했다.
한편 연은 여전히 혼이 빠진 채였다.
그녀는 엎어진 채 일어설 생각도 못 하고 꼼짝없이 굳어버렸다.
‘사람 남자도 저렇게 클 수 있구나.’
연의 두 눈은 그림자에 가려진 환의 얼굴 부분을 제외한 모든 곳을 빠르게 훑었다.
점잖은 도포 자락을 두르긴 했으나 큼직한 체격은 가린다고 가려지는 게 아니었다. 볕을 등지고 있어서 그런지 거대한 그림자가 연이 넘어진 곳까지 길게 드리웠다.
연은 사내의 그림자에 갇혀 생각했다.
‘망했다.’
연은 한눈에 인간들 사이에서 퍽 귀한 신분만 입는 옷임을 짐작했다. 뒤에 맨 봇짐을 보니 먼 길 다녀오는 게 분명했다.
양반일까? 아니면 좋은 옷을 입은 필부이려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렇게 두 암수컷이 서로 다른 이유로 ‘망했다’를 속으로 연발하고 있을 때였다.
먼저 입을 연 건 연이었다.
“누, 누구십니까?”
놀란 가슴을 달래고 가까스로 물은 것이었다. 일단 누구신지는 알아야 할 듯싶었다.
그러자 사내가 다행이라는 듯 허리를 펴고 한숨을 쉬었다.
환은 속으로 안도했다.
‘다행이야. 사람 말을 할 줄 아는군.’
같은 무리가 아닌 늑대들끼리는 정신적인 의사소통이 불가했다. 환이 지금 당장 늑대로 변해도 처음 만난 암컷인 연과 수월하게 소통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대부분의 수인이 다른 무리의 수인을 처음 만날 때 인간화를 쓰는 이유 중 하나였다.
물론 연은 그가 왜 안도하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환은 헛기침하곤 사실대로 이실직고했다.
“이 집 주인입니다.”
그러자 연의 입이 벌어졌다. 한순간에 낙담한 표정이 여자의 얼굴에 드리웠다.
‘…이런?’
환은 다시 한번 낭패감을 느꼈다.
이 여자를 만나서 입을 연 건 단 네 번뿐인데 그 네 번 만에 그녀는 저리 세상 무너진 표정을 지었다.
‘대체 어디서 실수를 한 거지?’
아까는 제 덩치가 커서 겁먹은 거라고 쳐도, 이번엔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환의 머릿속은 팽글팽글 돌아가고 있었다.
‘아, 난 이제 틀렸다.’
연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입에서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 집에 주인이 있었다니….’
연의 머릿속에 이 집 창고에 제가 그득히 쌓아 놓은 도토리며 말린 나물이 스쳐 지나갔다.
많진 않은 양이지만 그렇다고 적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걸 모으느라 연은 가을 내내 제 먹을 것도 챙기지 못해 살이 쪽 빠졌다. 그런데 갑자기 이 집 주인이란 사내가 나타났다.
연이 생각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뿐이었다.
‘여기서 내쫓기겠구나.’
행색을 보아하니 사냥꾼이나 화전민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마을에서 올라온 꽤 잘사는 양반일 듯한데 이 산까진 무슨 일일까. 가끔 잘사는 댁 아드님이 과거 공부를 한다고 이런 산 끝자락 초가에 겨우내 머문단 소문은 들었다.
갑자기 연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동안 열심히 발버둥 쳤는데….’
그간 언니 부부에게 그런 일을 당하고 무리 내에서 쫓겨나 외톨이가 되었어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이 초가 덕이 컸다.
이곳에서 적어도 이번 겨울은 살아남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희망에 차 있었다. 배고프고 졸리고 힘든 것도 잊고 살아남는 데 집중했다.
‘다 끝났구나. 난 이제 무슨 수로 살아야 하나….’
심지가 굳은 연이었다. 하지만 믿고 있던 동아줄이 썩은 동아줄이었다는 걸 알게 된 충격은 컸다.
그래도 이리 포기할 순 없었다.
연은 주섬주섬 몸을 챙겨 일어났다. 울며 지푸라기 잡는 격이었다.
일단 집의 주인이시라는 분께 인사부터 올렸다.
“죄, 죄송합니다. 나리. 집주인이 계신 줄 모르고 제가 그만 폐가인 줄 착각해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금방이라도 쫓겨날 처지라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지만, 연은 침착하려 노력했다.
환은 환대로 미친 듯이 뛰는 제 심장 소리 때문에 고역이었다.
‘미친. 목소리도 곱다.’
물론 환이 저런 생각을 하는 줄 연은 꿈에도 몰랐다. 그저 그가 때아닌 침입자에 화가 나 말도 잇지 못하는 중이라 여겼다.
환이 그녀의 목소리를 곱씹으며 감탄하는 동안 연은 머리를 굴렸다.
며칠 내면 눈이 내리기 시작할 거다. 눈이 내릴 때쯤이면 강도 얼어붙는다. 온 산이 얼어붙게 되면 갈 곳 없는 연은 그대로 추워 죽거나 배고파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
연은 엎드린 채로 입을 열었다.
“…실은 제가 산에서 나고 자란 여식이온데 부모가 무산의 미친 곰에게 물려 가 죽고 저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틀린 말은 없었다. 그 부모가 사람이 아니라 늑대란 것만 빼면. 거짓말은 아니니까.
연은 침을 꼴깍 넘기곤 그대로 사내에게 절한 채 말을 이었다.
“…가족같이 여기던 이에게 화를 당해 쫓겨나 갈 곳 없이 떠돌다 이 초가를 발견했습니다. 천운이라 여겨 이곳에서 겨울을 날 생각이었습니다.”
전부 참이었다. 대광과 랑이 언니 등쌀에 치여 무리에서 쫓겨난 것도, 이 초가에서 겨우살이 준비를 해 놓은 것도.
“…하여 제가 갈 곳이 없어….”
연은 그 말을 뱉으면서도 이게 맞나 고민했다.
그래도 제게 말 건 이가 제 생각보다 상냥하게 느껴져 이리 용기 낸 거였다. 하지만 염치없게 처음 본, 그것도 인간 사내에게 이 집에 머물게 해달란 소리가 죽어도 나오질 않았다.
다른 암컷이라면 아양이라도 한번 떨어볼 법 싶었다. 그렇지만 빈말 못 하는 연의 성격상 그것도 쉽지 않았다.
연의 코가 빨개졌다. 손도 움츠러들었다. 귀 끝도 추위로 인해 이미 벌겠다.
“…하, 하여….”
연은 차마 뒷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배는 주리고 손발은 시리고 며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머리가 울렸다.
연은 주제에 자존심은 셌다. 그 순간 제 처지가 너무 박복해 보였다. 말 못 하게 창피하였다.
연은 두 눈을 꼭 감았다.
이대로 그냥 늑대로 변신해 도망가 버릴까.
그때 남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내가.”
낮고 중후한 목소리는 급박하게 터져 나왔다. 할 말을 찾듯, 남자의 뒷말이 조금 늦어졌다.
“이 집을 비운 지가 오래라 이곳저곳 손볼 데도 많고 돌봐야 할 똥개… 아니, 사람도 둘이나 있어서 말입니다.”
연은 땅바닥에 엎드린 채 눈을 끔벅끔벅 떴다. 인간 남자가 사박사박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연은 그때까지도 사태 파악을 채 다 하지 못했다. 어느새 사내는 연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모양이었다.
연의 코가 절로 벌름거렸다.
‘인간 사내 냄새는 원래 다 이렇게 좋은가.’
인간으로 변해 있지만, 청각과 후각이 예민한 건 여전했다. 늑대 모습일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보통 사람보다는 배로 뛰어났다.
사실 연이 맡은 건 제 목에 건 향낭에 섞인 환의 수컷 냄새였지만 그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연은 자신도 모르게 다가온 사내의 향에 취해 코를 몇 번 더 찡긋거렸다. 그러다 보니 사내의 큼지막한 발이 엎드린 연의 시야에 보였다.
“이 겨울을 나는 걸 도와줄 이가 필요한데, 처자가 제격일 듯합니다.”
연은 제가 잘못 들었나 했다.
“저를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연은 사내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처음 본 제게 겨우살이를 함께하자고 청하는 것인가?
사내가 다시 한번 요청하였다.
“머리 좀 드십시오.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연은 목이 따끔한 것을 느끼며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연은 사내의 눈높이가 저와 같다는 데 조금 놀랐다. 동시에 그가 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에 당황하였다.
사내의 미려한 눈가가 웃음 짓고 있었다. 연의 심장이 콩, 콩 하고 방아질을 시작했다.
인간 사내가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한 건 맹세코 오늘이 처음이었다. 아마 꼬리가 튀어나와 있었다면 미친 듯이 펄떡거리며 좌우로 살랑였을 것이다.
“나랑 같이 겨울납시다.”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난 환이요. 그대 이름은 뭡니까?”
연은 저도 모르게 싱긋이 미소짓는 얼굴을 향해 입술을 벌렸다.
“…연. 연입니다.”
환이란 사내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