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11)

1. 외톨이 암컷

‘안 되겠다, 무리를 나서야겠다.’

발정기가 다가온 무산의 어린 암컷 늑대 연이에게 그보다 더한 결심은 생에 없었다.

‘이러다간 형부에게 겁탈당해 죽든 언니에게 물어뜯겨 죽든 둘 중 하나겠어.’

늑대는 원래 무리 종족이었다. 지금 있는 무리를 떠난다는 건 곧 혼인이나 죽음 같은 큰 변화를 의미했다.

하지만 연은 절박했다.

‘조선 팔도에 나 같은 작은 늑대 하나 받아주지 않는 무리가 또 있으려고.’

연은 작지만 똘망한 머리로 한참을 골똘히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암컷들의 발정기가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무리를 떠나는 건 위험이 컸다. 그럼에도 연이 무리를 떠날 것을 결심한 건 이유가 있었다.

‘이대론 살 수 없다.’

연은 무리 내 외톨이였다. 우두머리의 ‘머리’ 암컷이자 친언니인 랑의 눈 밖에 났기 때문이었다.

물론 처음엔 그러지 않았다.

우두머리 암수컷이던 그들의 부모가 연달아 미친 곰에게 물려 명을 달리했다. 매우 슬펐지만 우두머리 암수컷의 후계자로서 늑대 무리를 짊어지고 이끌게 된 자매는 금세 기운을 차렸다.

기가 센 언니 랑은 그날로 우두머리 암컷이 되어 무리를 호령했다.

거기까진 동생 연에게도 호시절이었다. 사이가 좋진 않아도 연의 성격상 언니와 척을 질 일이 없었다.

문제는 연의 형부 되는 수컷 늑대 대광에게 있었다.

원래 세 늑대 수인은 어린 시절 같이 자란 남매나 마찬가지인 사이였다.

아비의 구촌 정도 되는 대광은 어릴 적부터 연의 궁둥이 냄새만 졸졸 쫓아다니더니 커서도 그 짓을 했다.

연도 그 무렵엔 생각이 없어서 그저 크면 대광과 짝이 되려니 했다.

어쩌면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저와 대광의 다정한 모습을 보는 언니 랑의 시선이 표독스러웠던 것을.

대광은 머리 쓰는 일은 영 소질이 없어도 어려서부터 뼈도 굵고 기골도 장대했다. 사냥 실력도 그만하면 괜찮았다. 같은 무리 내에 솔직히 대광만 한 수컷이 없었다.

자매의 꼬리 털이 여물고 첫 발정이 오기 전까지도 대광은 연을 쫓아다녔다. 연도 적당히 대광에게 맞춰 주며 둘은 금방 짝을 맺을 준비를 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두머리 암컷인 랑이 포악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랑이 겨누는 화살 과녁의 정중앙엔 연이 있었다.

첫 발정을 앞둔 연은 여느 다른 암컷과 마찬가지로 서열에 예민해져 있었다. 사냥하다가도, 잡은 먹이를 사이좋게 나눠 먹다가도, 낮잠을 위해 모이다가도 연은 난데없이 랑에게 목을 물렸다. 발톱으로 사정없이 얼굴을 긁히고 다리를 절룩이도록 입질을 당했다.

대광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수컷들도 자매 싸움을 말려보려 시도는 해봤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암컷끼리의 서열 싸움이었기에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암묵적인 서방 경쟁에 연은 그야말로 참패했다.

원래도 랑보다 거의 반 배나 작은 덩치에 무는 힘도 약한 연이었다. 사냥할 때도 힘을 쓰는 쪽보다는 머리를 굴려 먹이를 유인하는 쪽이었다.

기질도 달랐다. 랑은 우두머리로 군림하는 게 체질에 맞았다. 지고는 화병이 나 못 사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연은 적당히 포기할 것과 확실히 움켜쥘 것을 구분 짓는 쪽이었다.

결국, 연은 대광을 포기했다.

분명 괜찮은 수컷이었지만 굳이 언니와 척을 지면서까지 연을 맺을 필요는 없다 여겼다.

게다가 정말 대광이 연을 진심으로 제 암컷 삼고 싶었다면 랑의 무리를 나와 새로운 무리의 우두머리 암수컷이 되면 됐을 일이었다.

“언제까지 언니한테 치여 살래? 너도 랑이 고년한테 한번 덤벼봐, 연이야.”

직접 나서는 대신 대광은 연을 채근했다. 귓속말로 살살 연의 불난 속을 부채질했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언니인 랑이 무리 내 가지고 있는 주도권이 워낙 셌다. 나이 든 삼촌과 이모들 역시 고집은 세도 먹이를 확실히 조달해줄 능력 있는 랑의 무리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대광 또한 마찬가지였다. 연을 차지하기 위해 이 지역의 가장 큰 늑대 무리와 척을 지고 떠나기에는 랑이 제공해주는 신원과 안전의 보장이 상당했다.

한마디로 대광에게 연은 계륵인 셈이었다. 제가 가지긴 아쉽고, 남 주긴 아까운.

대광은 용기가 없었고 연은 그가 절실하지 않았다. 대광과는 딱 그 정도의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해, 언니 랑에게 첫 발정이 왔다.

대광은 연의 뒤꽁무니 대신 랑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녔다. 그걸로 된 거라고 여겼다.

대광이 랑과 짝을 맺고도 계속 연에게 추근대기 전까지는.

“연아, 내 네 냄새를 못 잊겠다.”

랑이 모르게 대광은 연에게 계속해서 추파를 던졌다.

“아무리 다른 암컷 꽁무니를 쫓아봐도 네 냄새에 견줄 바가 못 된다, 연아.”

연은 어이가 없었다.

분명히 대광은 제대로 발정이 온 랑과 교미까지 마친 후였다. 인간으로 치면 혼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본디 건실한 수컷 늑대라면 총각 시절엔 이리저리 곁눈질하다가도 짝을 맺은 후엔 제 암컷과 훗날 낳을 새끼들에 충실해야 했다. 적어도 연은 그렇게 여겼다.

“주둥이 저리 치워요, 대광 오라버니.”

사냥한 먹이 중 실한 다리 부위를 물고 온 대광에게 연은 학을 떼며 손사래를 쳤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정신 차리세요.”

연은 당황스럽고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었다.

그해 랑은 발정기가 왔고 연은 오지 않았다. 연은 차라리 그것이 신이 내린 판결이라고 생각했다. 대광이 성(性)적으로 먼저 성숙한 언니와 짝을 맺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진심으로 말씀드리는 거예요. 대광 오라버니께서는 이미 랑이 언니의 반려가 되셨잖아요. 그런데 제게 계속 이리 치근덕거리시다니, 미치셨습니까?”

연은 언니와 짝짓기까지 마친 수컷이 자꾸 제게 들이대자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누구 랑(狼)생 막을 길 있습니까?”

그러잖아도 언니에게 호되게 서열 정리를 당한 터라 연도 예민했다.

“가서 랑이 언니나 잘 보필하시고 떡두꺼비 같은 새끼들이나 줄줄이 보십시오.”

연은 진심이었다. 대광에게 남은 미련은 쌀 한 톨만큼도 없었다.

솔직히 그가 좀 얄밉기도 했다. 대광은 랑이라는 처라도 얻었지 저는 남은 게 없는 싸움이었다.

연은 당장 올 다음번 발정기에 짝도 구하지 못할 형편이었다. 수컷 중의 ‘머리’인 대광과 암컷 중의 ‘머리’인 랑. 이 두 늑대의 등쌀에 치인 다른 ‘몸통’ 늑대들이 전부 연을 외면했기 때문이었다.

연은 한순간에 치정 싸움에 휘말려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되었다.

“그러지 말고, 연아. 내가 지금 널 어찌 해보겠다는 게 아니잖니?”

대광은 다가오지 말라는 연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치근덕거렸다.

심지어 이런 말까지 했다.

“랑이가 하도 기가 세잖니. 내가 무서워서 첫날밤다운 첫날 밤도 치르지 못했다. 랑이 안에서 내 그걸 부풀리지도 못했어.”

연은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부, 부풀리다니요? 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아직 처녀인 연이었다. 암수컷끼리 긴밀히 행하는 행위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자세히는 몰랐다.

그러자 대광이 주둥이 꼬리를 올리며 귀한 것을 알려주듯 귀띔했다.

“발정이 나면 말이다, 암컷이 시도 때도 없이 몸을 발라당 뒤집고 예민해져선 궁둥이를 수컷 주둥이에 붙이고 난리가 난다. 그러면 온 동네 수컷들이 몸이 동해 그 암컷만 줄줄이 쫓아다니지. 그러다 암컷이 짝지을 수컷을 정하면 그 수컷이 암컷 등 위에 올라타서 좆질을 어느 정도 하다가….”

부풀린단다. 좆을. 자궁에 씨가 제대로 착상할 수 있게.

“새끼줄 꼬이듯 매듭이 지어져선 두 생식기가 엉겨 붙는 거지. 그때 느낌이, 어흐, 말도 못 한단다. 그대로 한 방울도 안 남기고 죄다 암컷 안에 줄줄 싸는 거야. 그 상태로 서너 번을 더 사정하는 거지. 둘 다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몇 번이고 그 짓을 반복한다.”

생각만 해도 싸겠다는 듯, 대광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가끔 성질머리 있는 암컷은 깨갱거리면서 아프다고 지랄발광을 하는데 수컷은 목덜미를 물고 버텨야 한단다. 그래야 임신이 되니까. 그러니 내가 그 짓을 사나운 랑이, 걔랑 할 수 있겠니?”

“그, 그 말을 왜 제게 하십니까! 저리 가십시오!”

연은 웬 남사스러운 말을 지껄이는 대광을 무심코 밀쳐낼 뻔했다. 인간 모습이었다면 코끝까지 시뻘게졌을 정도로 창피한 순간이었다.

연은 인간으로 변신하여 대광을 피했다.

“쫓아올 생각 마십시오…!”

무산의 늑대들은 전부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다만 늑대의 본성이나 형질은 어디 가는 게 아니었다. 모습만 사람의 형태로 바뀌는 것이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있으면 때때로 이점이 있으나 대부분의 늑대는 짐승인 채를 더 선호했다.

인간의 모습으론 사냥하지도, 추위를 피하지도 못했다. 가끔 털 말리기 귀찮을 때 사람 겉가죽을 쓰고 폭포 가에서 씻는 늑대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단 사실 자체를 망각하고 지냈다.

“인간들이란 본래 간악하고 교활해, 늑대란 걸 알아차리는 순간 널 산 채로 잡아다 가죽을 떠 고기는 산짐승에게 버리고 꼬리털은 목도리로 만들어 버릴 거다.”

더군다나 자매의 부모는 어려서부터 그들에게 인간의 위험성을 주입했다.

천성이 산의 들짐승인 랑은 성년이 된 후 늑대의 모습을 떠난 적 없었지만 연은 달랐다.

어릴 때부터 폴짝폴짝 재주넘듯 인간으로 변신하던 연이었다. 머리가 큰 후에도 가끔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여 마을을 구경하곤 했다.

랑은 자라 머리가 굵어지면서 인간 모습이라면 학을 떼고 싫어했다. 그러니 당연히 대광도 그러려니 여겼다.

‘인간의 모습으로 도망치면 대광 오라버니도 흥미를 잃을 거야.’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연과 마찬가지로 대광 역시 인간으로 폴짝 재주넘듯 모습을 변환한 것이었다.

연은 늑대일 때처럼 붉은 기가 도는 피부색을 한 훤칠하게 큰 젊은 인간 사내를 보고 펄쩍 뛰어올랐다.

당연히 두 늑대 모두 알몸의 인간 모습이었지만 짐승이라 괘념치 않았다.

“저, 정말로 미치셨어요? 랑이 언니가 보면 어쩌시려고요?”

랑은 자신뿐만 아니라 무리의 늑대 또한 인간화하는 걸 싫어했다. 저는 이미 눈 밖에 난 탓에 상관없었지만.

“이상하다, 연아. 네가 재주넘어 인간으로 변할 때 네 인간 몸에 달린 달덩이 같은 젖가슴이 출렁이는데, 그걸 보니 내 여기가 동해.”

사람으로 변한 대광의 아랫도리에 기이하게 생긴 물건이 달려 있었다.

늑대 모습일 땐 평소에 잘 감춰져 있는 게 사람의 형상일 땐 불뚝 기립해 흉한 모습을 내보였다. 망측하기 그지없었다.

“허, 허억…! 형부, 제발 이러지 말아요!”

“그 형부란 소리 좀 더 해봐라, 연아.”

대광의 머리가 드디어 돈 것 같았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었다.

연은 냉큼 다시 늑대 모습으로 변했다. 이러다 붙잡히면 바로 저 수컷의 밑에 깔리겠다 싶었지만 그건 어차피 인간의 모습으로도 마찬가지였다.

도망치려면 차라리 빠른 늑대 쪽이 더 좋았다.

대광은 옳다거니 다시 늑대의 모습으로 변해 연을 쫓았다.

연은 걸음아 나 살려라 폭포 쪽으로 도망쳤다. 차가운 물맛을 좀 보면 형부의 저 열 뻗친 다리 사이가 좀 정리가 될 듯싶었다.

‘저 수컷이 진짜로 미쳤구나!’

형부야 저를 유희 거리로 삼는다지만 연은 딱 죽을 맛이었다.

연은 아는 욕을 다 퍼부으며 폭포로 몸을 내던졌다.

대광 역시 뛰어들듯 움찔하다 얼음물 못지않게 시린 물맛 보기가 꺼림칙한지 뒷걸음질 쳤다.

그날은 그렇게 대광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은 그 후로 완전히 곤란한 처지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광과 랑의 사이에 낀 탓에 다른 ‘몸통’ 늑대들이 연을 무리에 잘 끼워주지 않았다.

연은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혼자 있는 시간을 피하려고 갖은 수를 썼다. 잘 보이려고 노력도 해봤지만, 실세인 랑의 눈 밖에 난 처지에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저 랑이 빨리 임신해 새끼를 낳고 키우느라 정신 팔리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일 년만 참으면 된다.’

연은 인내심을 끌어모아 인고의 시간을 버텼다.

다른 무리를 찾는다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미 한 무리의 ‘꼬리’ 신세인 보잘것없는 암컷이 된 지 오래였다. 다른 무리로 가도 처지가 변할까 싶었다.

‘대광 오라버니만 아니었으면 식이 오라버니나 철이 같은 적당한 몸통 늑대들이랑 짝지어 벌써 새끼를 뱄을지도 모르는데!’

예전엔 힘은 약해도 ‘머리’인 랑의 동복 혈육인 데다 사냥에 감각이 있어 그럭저럭 연을 좋아하는 수컷들이 많았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치정에 휩쓸려 무리의 꼬랑지 신세가 된 지금은 아무도 연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광이 앞에선 랑에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도 뒤에선 자꾸 연의 궁둥이 냄새 맡는 꼴을 다 알기 때문이었다.

연에게 관심 보여봤자 대광에게 화풀이나 당할 게 뻔하니 어느 수컷이 그녀를 마음에 들일까.

이제 보니 대광은 연이 이런 처지가 될 줄 알고 랑과 짝을 맺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언니랑 짝 맺은 후에 동생이랑 재미 보려고 했단 소리였다.

‘천하의 미친놈…!’

연으로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더한 사달은 후에 일어났다. 꾸역꾸역 일 년을 또 버텨 이듬해 겨울이 되었다. 발정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암컷들이 발정이 오면 수컷들의 발정은 자연히 함께 오는 법. 지난번에 임신에 실패한 랑은 이번엔 기필코 새끼를 보겠다며 새신랑인 대광을 몰아쳤다.

연에게는 너무나 감사한 상황이었다. 차라리 저 부부가 교미하느라 바빠 제게 신경 쓰지 않던 그해 겨울이 연에겐 가장 평화로웠다.

문제는 연에게도 발정이 찾아왔단 것이었다.

생애 첫 발정이었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세상에 그보다 더한 고통은 없을 것 같던 칠 일간이었다.

연은 짐승의 몸으로 무산의 온 산간 지방을 돌아다니며 울어대고, 제 냄새를 이곳저곳에 뿌렸다. 이곳에 발정 난 암컷이 있다고, 제 궁둥이 위에 바싹 올라붙어 포궁 깊숙이 씨를 뿌려줄 건장하고 튼튼한 늑대 수컷을 찾아 정신없이 헤맸다.

같은 무리 수컷들은 도와주질 않았다. 연의 냄새에 몸이 동해 슬쩍 다가왔다가도 결국엔 연과 엮이는 게 무서워 뒷걸음질 칠 뿐이었다.

대광이 으름장을 놓은 게 분명했다. 그것도 아니면 랑이 협박을 했는지도 몰랐다. 연이 저것과 궁둥이를 앞뒤로 맞물린 채 발각되었다간 궁둥이가 이빨로 짓이겨진 후 무산에서 쫓겨날 거라고.

‘이러다 늑대 하나 죽이겠구나….’

연은 발정기 내내 잠도 자지 못했다. 고통에 눈물 바람으로 밤을 지새우고, 고열에 헐떡이다 눈뜨곤, 다시 궁둥이를 나무와 돌덩이, 풀숲 등지에 비비고 난리를 쳐대다 또 기절하기를 반복했다.

수컷과 함께 지새워도 힘겨운 게 발정인 법인데, 도와주는 수컷 없이 꼬박 칠 일간의 주야를 버틴 연은 완전히 산송장이 되어 있었다.

연이 겨우 깨어났을 때 다른 암컷들 역시 대부분 발정이 끝나 있었다.

뜨거운 성애의 기간을 보낸 암컷 늑대들은 힘들어하는 기색은 보여도 저마다 매우 뿌듯한 주둥이를 하고 있었다. 곁의 수컷들도 어찌나 정성껏 제 암컷들을 보필하던지. 어디 짝없는 늑대 서러워 살겠나 싶었다.

대광도 그 시기만큼은 랑의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세상 소중하다는 듯, 랑의 털을 정성껏 핥고 있는 대광의 모습을 본 연은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눈꼴이 시리다 못해 울분이 터져 나왔다. 저 수컷이 가랑이 사이의 것을 덜렁이며 저를 쫓던 그 수컷이 맞나 싶었다.

‘다들 고생 끝에 발정기를 버텨냈다. 한데 나만 신랑도, 새끼도 없이 다시 혼자구나.’

연은 눈앞이 컴컴해지는 걸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랑을 비롯한 몇몇 암컷들은 그 시기 이후 배가 부르기 시작했다.

임신한 것이었다.

발정기를 겪었던 암컷들의 배가 튀어나오고 젖꼭지가 부풀어 올랐다. 제 수컷들에게 힘들다며 아양도 떨고 이것저것 잔심부름도 시키는 주변 암컷들을 보며 연은 남모르게 속을 썩였다.

‘그래도 일 년만 더 참자. 새끼 낳으면 랑이 언니가 조금은 유해질 테니.’

연은 버텼다.

언니가 몸을 풀고 새끼들에게 정신이 팔리면 저에 대한 경계도 조금은 사그라질 테다. 그때가 되면 저 역시 어리바리해도 착한 수컷 하나와 잘만 하면 짝을 맺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처지는 나아질 거다. 가정도 생기고, 제 새끼도 낳아 기를 수 있을 테다.

‘그렇게만 되면 이 외로움도, 설움도 끝이야.’

그래서 연은 다시 제게 치근덕거려 오는 대광을 무시하며 일관성 있게 무리에 붙어 있었다.

그러다 일이 났다.

별안간 연의 배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엔 발정의 후유증으로 살이라도 찐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젖도 돌기 시작했다. 조금이지만 유즙이 찔끔찔끔 배어 나오고, 몸도 나른하고 시도 때도 없이 졸리고, 목 좋은 자리만 보면 땅굴도 파고 싶어졌다.

상상 임신이었다.

‘처녀가 임신이라니.’

연은 완전히 혼비백산이 되어버렸다. 천지개벽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본디 암컷 늑대들은 상상 임신이 잦은 족속이었다. 보통 늑대 무리는 우두머리 암수컷만이 짝을 맺고 새끼를 출산하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우두머리 암컷이 변을 당했을 경우, 태어난 새끼들을 돌보기 위해 무리의 임신하지 않은 다른 암컷이 가짜 임신 증세를 보이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발정기를 맞고도 짝을 맺지 못한 암컷들에게 흔히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이라고 했는데….’

그 중상이 저에게도 일어날 줄이야.

연은 너무 억울했다.

‘발정기에 교미는커녕 수컷 꼬랑지 털 한번 닿아본 적 없는데…!’

더 가관인 것은 랑이 그 사실을 오해한 것이었다.

“당신, 경고를 무시하고 기어코 내 동생이랑 궁둥이를 맞붙였구나!!”

사달이 났다. 치정 싸움이 제대로 일어난 것이었다.

랑은 임신해 배가 부푼 상태로 남편인 대광에게 덤벼들었다. 그 자리에 연도 같이 있었다.

제 새끼를 밴 암컷이었기에 랑에게 제대로 반항 한번 못 한 대광은 그대로 묵사발이 났다.

그다음 차례는 연이었다. 연은 랑에게 한쪽 귀를 거의 물어뜯기다시피 하며 소리에 소리를 질러댔다.

“언니! 다 오해입니다. 억울해요! 진짜 임신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하지만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연은 다른 임신한 암컷들과 똑같이 젖도 부풀고 살짝이지만 배도 튀어나와 있었다.

진실을 아는 건 이번 발정기 때 그 어떤 수컷과도 교미를 맺은 적 없는 연 본인뿐이었다.

“으르르, 임신한 게 긴지 아닌지 알아보려면 네 배를 갈라보면 되겠지! 만약 기라면 상간한 두 연놈을 용서치 않겠다!”

“컹컹! 컹! 끄으응, 끼웅!”

연은 제대로 오해한 언니 랑과 흙바닥에서 뒹굴며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이러다 죽겠다 싶을 정도로 물어뜯기고 있을 때였다.

대광이 일을 내버렸다.

“안 된다, 연아!”

연의 이름을 부르면서 대광이 랑에게 달려든 것이었다.

평소 랑의 기에 눌려 살았지만, 대광 역시 수컷은 수컷이었다. 거대한 덩치에 이십 관(三十貫, 75kg)은 넘는 대광이 힘을 실어 맞부딪히자 랑의 몸이 나가떨어져 버렸다.

깨갱, 하는 굉장한 소리와 함께 랑의 몸이 위로 솟구쳤다가 강하게 아래로 내리꽂혔다.

“어, 언니…!”

연은 식겁해 랑에게 달려갔다. 속으론 열불이 터졌다.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대광, 저 미친놈 같으니! 여기서 내 편을 들면 어쩌자는 거야! 언니가 더 오해하게!’

대광 딴에는 연의 환심을 사고자 한 행동이었겠지만 연에겐 환장할 짓거리로밖엔 비치지 않았다. 외려 오해를 더 키우는 멍청한 행동이었다.

바로 달려가 언니의 상태를 살피니, 의학 쪽으로 식견이 없는 연의 눈으로도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억, 아흐…!”

랑이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몰려 있던 다른 늑대들이 슬금슬금 다가와 랑을 살피기 시작했다.

대광도 그제야 천천히 랑의 곁에 다가와 주둥이를 그녀의 입가에 비볐다. 그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꼬리가 정신없이 펄떡거렸다. 일이 뭔가 잘못됐음을 느낀 것이다.

랑의 뒷다리 사이로 붉은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고 있었다.

그 사달로 인해 랑은 배 속의 첫 새끼들을 잃고 말았다.

“콜록, 콜록! 새끼를 잃는 건 슬프지만 젊은 암컷들에게 종종 있는 일이야.”

결국, 무리의 나이 지긋한 암컷이자 인간의 약초학 지식을 조금 알고 있는 순이 할멈이 사건을 종결했다.

“연이의 상상 임신 증세도 아주 흔하진 않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지. 더욱이 언니가 임신한 마당에….”

순이 할멈은 혀를 끌끌 차며 주둥이로 대광 쪽을 슬쩍 가리켰다.

“임신한 언니의 체취를 가득 묻힌 수컷이 연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면야, 뭐.”

결국, 연의 상상 임신 역시 대광의 탓이란 소리였다.

연에겐 그토록 억울한 일은 더 없었다. 속이 아주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나 방도가 없었다.

연은 랑이 회복된 이후 언니와 이 오해를 풀려 노력했다. 그즈음엔 연의 상상 임신 증세도 없어진 상태였다.

“컹컹-! 내 주변을 얼씬거리지도 마! 이 위선자!”

그러나 랑의 마음은 완전히 닫힌 후였다. 연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었다. 언니는 오해를 풀 여지도 주지 않았다.

자매는 결국 원수만도 못한 사이가 되었다.

* * *

이게 작년까지 벌어졌던 일이었다.

조금만 버티면 될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암컷 늑대들의 임신 시기가 끝나고 새끼들이 태어난 봄에도 연의 처지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외려 연은 랑의 무리에서 완벽히 도태되기 시작했다.

언니가 새끼를 잃기 전까지만 해도 연에 대한 랑의 혐오는 그래도 경고 수준에 그쳤다. ‘꼬리’ 신세이긴 했지만 그래도 언니의 무리 안에 속해 있다는 느낌은 받았다.

한데 작년에 랑이 새끼를 잃은 후부턴 완전히 상황이 뒤바뀌었다.

전에는 함께 사냥한 음식을 나눠 먹을 수라도 있었다. 가장 위험한 미끼 역을 자처하면서 겨우 낀 것이긴 해도, 그렇게 해서 제 몫의 식량을 얻어낼 수 있었다.

낮에 잠을 자거나 무리 지어 이동을 할 때도 연에게 출발한다며 귀띔을 해주는 이가 한둘은 있었다.

겉돌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연에게 대놓고 짖어대거나 공격성을 보이진 않았다. 랑도 그것을 알면서 묵인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무리는 연이 뒤처진 사이 언질 한번 없이 떠나버렸다. 그녀 몰래 밤잠 자는 구역을 바꿔버렸으며 사냥할 때도 그녀만 쏙 빼고 마릿수를 채웠다. 자고 일어났을 때 무리가 이미 저를 버리고 이동해 버려 허겁지겁 찾으러 다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평소 연을 알게 모르게 챙기던 같은 꼬리 늑대들도 그녀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몇몇 혈기 왕성한 젊은 수컷들은 연에게 대놓고 이를 드러내기까지 했다.

“저리 가! 이 무리의 골칫거리야! 너 때문에 랑이가 새끼를 잃었잖아!”

정확히 말하면 연 때문에 잃은 게 아니었다. 연의 탓이라기보단 대광의 탓이었다. 그러나 그런 진의 따위를 신경 쓸 무리의 개체들이 아니었다.

“으르르, 걸리적거리지 말고 저리 꺼져!”

“크르릉, 키웅, 끙! 끙!”

연은 평소 함께 나비를 잡고 들판을 뛰놀던 친구들에게 꼬리를 잔뜩 내리깐 채 복종하는 시늉을 해야 했다.

빈정이 상했다. 무엇보다 억울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연은 언니의 신랑인 대광이 벌인 미친 짓의 피해자일 뿐이었다. 대광과 랑 부부 때문에 피해를 본 건 오히려 이쪽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무리를 벗어날 순 없었다. 무산 깊은 골짜기를 아우르는 랑의 무리는 미친 곰과 영역이 겹쳤다. 그 곰은 초식 동물은 물론이거니와 늑대며 표범이며 할 것 없이 눈에 띄면 닥치는 대로 사냥한다는 소문이 자자한 식살 곰이었다. 그 곰에게 자매의 부모 역시 살해당했다.

무리에서 벗어난다면 안 좋은 꼴 보는 건 연 혼자일 게 뻔했다.

‘버텨야 한다…. 무리에서 버텨야 해.’

연에겐 힘들다는 표현조차 버거운 나날이었다.

제 꼴이 우스울 정도로 박복했다. 대광 때문에 제때 짝도 찾지 못하고 상상 임신까지 해버린 처지였다. 그것만으로도 창피하고 면목 없고 자존심 상했다. 그런데 이젠 무리에서 쫓겨나 홀로 죽게 생겼다.

‘그날’ 역시 연은 혼자였다.

무리는 삼삼오오 나뉘어 나무 열매를 찾아 숲 덤불을 뒤지고 있었다.

연은 랑의 무리 중 암컷 꼬리 늑대로 이루어진 작은 모임에 간신히 낄 수 있었다. 그마저도 눈치를 보며 따라다니는 신세였다.

‘으아, 쌀 것 같아.’

오줌을 참느라 연은 꼬리까지 가늘게 떨고 있었다. 구석진 곳에 가 시원하게 싸고 싶었지만, 그사이 무리가 또다시 저를 버리고 이동해 버릴까 봐 전체가 휴식할 때까지 참는 중이었다.

문득 주변 나무 열매 덤불 사이에서 어떤 암컷 두 마리가 깔깔대는 소리가 들렸다.

연의 귀가 쫑긋거렸다. 두 마리가 저들끼리 소곤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왔다.

“…어쩌면 연이 저것 말이 진짜 죄다 거짓일지도 몰라.”

“랑이가 무려 첫 새끼를 잃었어. 분명 연이, 그 암컷이 무고한 척 뒤에서 계속 수를 쓰고 있었을 거야.”

“맞아. 랑이가 제 동생이라고 어쨌든 쫓아내진 않고 있잖아.”

“그걸 이용하는 게 분명해.”

연은 그 말을 듣고 주둥이를 꽉 깨물었다. 참고 있던 오줌을 절로 실금할 것 같았다.

어쨌든 아직 랑이 대놓고 쫓아내진 않았기 때문에 연은 그나마 맨 꼬랑지에서 무리를 졸졸 쫓아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대놓고 무리를 떠나 홀로 죽으라는 명령을 들은 것과 별다를 게 없는 처지였다.

무리 내 따돌림을 당해 떠난 늑대는 다른 어느 무리에 가도 받아주지 않는다. 소문이 빠르게 퍼지기 때문이었다.

랑 역시 연이 못 버티다 나가길 바라는 것이었다. 결국, 연을 늑대 사회에서 매장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더 억울한 건 대광에 대한 처우였다.

대광은 그사이, 랑에게 또 용서를 구해 다시 무리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랑에게 알랑방귀를 뀌며 세상에서 제일 다정하고 지고지순한 신랑인 척, 한 번도 제게 치근덕대지 않은 척 구는 그를 보는 연의 가슴은 분노에 타올랐다.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은 건 연뿐이었다.

암컷 늑대 두 마리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처음엔 랑이 님 처사가 좀 박하다 싶었는데 이번 일 겪고 나니 난 연이 그 암컷도 여간내기가 아니다 싶더라고.”

“너도 그렇게 생각했어? 나도 언니가 그렇게 됐는데 표정 하나 안 바뀌는 거 보고 이건 뭔가 잘못됐다 싶었어.”

표정을 안 바꾼 게 아니라 바꾸지 못한 거였다.

경황이 없어서.

연은 원래 그랬다. 표정 변화가 크지 않았다. 아무리 속으론 까무러쳐도 감정이 얼굴 밖으로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지금도 거머리처럼 버티는 것 봐. 그렇게 무리 전체가 쪽을 주는데도. 정말 염치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나 같았으면 무리에 남느니 차라리 미친 곰의 먹이가 되었겠다.”

“교활한 년.”

키득키득하는 소리가 점차 멀어져갔다.

연이 네 발로 서 있던 자리에 지린내가 났다. 결국, 소변을 참지 못해 근처 풀밭이 오줌을 흠뻑 뒤집어쓴 탓이었다.

연은 황망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제야 제 꼴을 돌아볼 여유가 조금이나마 생겼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이대로 살 순 없어.’

연은 정신없이 달리며 생각했다.

‘늦기 전에 언니 무리를 뜬다.’

덤덤한 연의 눈에선 눈물 대신 앞날에 대한 걱정이 흘러넘쳤다.

‘최소한 겨울과 함께 찾아올 다음 발정기를 대비할 수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놓자.’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언니의 무리를 떠나지 않을 방도는 없었다.

말이 쉽지 암컷 늑대에게 한번 나고 자란 무리를 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건 보통 수컷들의 일이지 암컷이 걱정할 거리는 아니었다.

‘가장 좋은 건 새 무리를 찾거나 마음씨 좋은 젊은 떠돌이 수컷과 짝을 맺어 새 무리를 이루는 거지만….’

무산 근처의 다른 늑대 무리가 연을 받아줄 확률은 희박했다.

가끔 떠돌이 수컷들이 이 산 저 산 돌아다니며 짝을 찾기도 하지만 가뭄에 콩 나듯 벌어지는 일이었다.

‘혼자라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한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계절이었다.

지금은 늦가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정의 계절인 겨울이 찾아올 것이었다.

‘그전까지 어떻게든 혹독한 발정과 겨울을 버텨낼 안전한 장소를 갖춰야만 하는데….’

다시 그 끔찍했던 발정기를 홀로 겪을 생각을 하니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연은 귀와 코를 더욱 쫑긋대며 샅샅이 산속을 뒤졌다.

걱정이 태산이던 연을 신이 도우신 것일까, 결국 골짜기 근처의 작은 초가집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인간의 집….’

아주 오래된 버려진 초가였다.

군데군데 무너진 부분도 있고 담장에 마른 넝쿨이 우거지게 피어 있었다. 주변에 나무가 많아 얼핏 그냥 바위 지대 같아 보이기도 했다.

‘화전민이라 불리는 불을 몰고 다니는 인간들이 간혹 가다 집을 지어놓고 다른 곳에 정착하는 경우가 있다 했다.’

그것도 아니면 마을에서부터 죄를 짓고 도망쳐 산속에 칩거하는 인간도 있다고 들은 것 같았다.

어쨌든 저 집이 정말 인간에게 버려진 집이라면 연에겐 천운인 셈이었다.

연은 장장 사흘을 넘게 집 주변을 돌아다니며 초가가 빈집인지 확인했다.

깨진 장독대엔 낙엽이 쌓여 있었고 아궁이엔 먼지가 소복했다,

‘아무도 안 사는 게 확실하다.’

이런 낡은 초가라면 사람도, 짐승도 들락날락하지 않을 것이다. 주변이 사철나무로 우거져 냄새만 잘 지우고 다니면 무리에도 곰에게도 들킬 염려가 없었다.

연의 표정이 밝게 개었다.

‘이 초가를 잘만 사용한다면 이번 겨울은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거야.’

그날부로 연은 하루가 멀다고 뻔질나게 초가를 들락거렸다.

어차피 외톨이 신세였으므로 연이 늦게 도착하건 식사에 참여하지 않건 무리의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간혹 대광이 의심의 눈초리로 늦어지는 연을 바라보곤 했지만, 그는 요즘 랑을 보필하느라 바빴다. 연에게 더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그래요, 계속 그렇게 랑이 언니 곁에만 붙어 계세요.’

연은 속으로 대광이 제게 계속해서 관심을 끄길 빌었다.

이제는 독하다고 불리든, 거머리처럼 끈질기다고 불리든 아무 상관 없었다.

연은 다시 한번 결의를 다졌다.

‘어떻게든 이 산에서 살아남는 거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흘러 늦가을이 지나고 초겨울이 찾아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