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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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아이린은 자신의 대신관 즉위식에 우리 모두를 초대했다.

안 그래도 지난 일 이후로 아이린의 건강이 걱정되기도 했기에 우리는 다시 한번 성국으로 향했다.

우리 모두는 내 친구의 즉위식을 엄숙한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대신전의 높고 새하얀 계단을 오르는 아이린.

최초의 성녀이자 대신관이 된 그녀는 내가 처음 보는 진지한 얼굴로 관을 받았다.

“정말 축하해요, 아이린!”

즉위식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부리나케 아이린에게 달려가 꽃을 안겼다.

아이린은 내가 건네준 꽃다발을 끌어안고 활짝 웃었다.

“와 줘서 고마워요. 전 제국으로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어서, 안 오실 줄 알았어요.”

“에이, 그래도 아이린의 즉위식인데 당연히 와야죠.”

고작 두어 달 만에 아이린은 몰라보게 차분해지고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그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했겠지.’

당연한 일이다. 나와 아이들도 고생을 했지만 아이린 역시 정말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다.

아버지처럼 생각하던 사람이 배신하고,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 데다가 자신이 몸담고 있던 성국이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끔찍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이린이 자랑스러워하던 성국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으며, 그 영향력과 권위를 상당 부분 실추했다.

더군다나 성국은 선전포고와 항복을 겪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숙청당했다. 그중에는 아이린이 개인적으로 친분을 갖고 있던 자들도 많았을 것이다.

나는 내심 아이린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블랙웰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마음이라는 게 늘 머리를 따라가지는 않으니까.

마음씨 착하고 순수한 그녀에게 너무 많은 고생을 시킨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 내 기분을 눈치챈 걸까? 아니면…….

“네 분이 와 주셔서 진심으로 기뻐요. 그리고, 제가 대신관이 되면 제일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어요.”

아이린이 삼중관을 쓴 채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성국의 예법대로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저 아이린 케드릿사는 성국의 차기 대신관으로서, 오랜 시간 이루어졌던 성국의 악행에 깊이 반성하며 그 피해자들에게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여신님의 충실한 신자이자 종으로서, 앞으로는 같은 일이 두 번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심력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아, 아이린!”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이번 일에 아이린이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대신관에게 속은 것에 불과하며, 피해자가 아닌가?

“저, 저흰 괜찮아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정말 괜찮아요!”

“아니에요. 비록 제가 그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것은 없을지라도 저는 이제 성녀이자 대신관으로서 성국 최고의 지도자이니 책임을 짊어져야만 해요. 그럴 마음으로 대신관이 되기로 한 것이기도 하구요.”

아이린의 말에 나는 깊게 감명받을 수밖에는 없었다.

내가 물었다.

“저…… 실례지만, 어쩌다 대신관이 되기로 결심하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이린은 빙긋 웃었다.

“실례라뇨! 라리아와 제 사이에. 그건…… 제가 여전히 성국을, 그리고 여신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성국이 부패했고 여신님의 나라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행위들을 저질러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이제 성국와 에일리아 여신교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으리라는 것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 조국을, 저의 신을 포기할 수가 없었어요.”

순간 아이린의 눈빛이 먼 곳을 보는 듯이 깊어졌다.

“저는 이곳을 버리기보다는, 이곳에 남아서 잘못된 것을 돌려놓고 싶어요. 최선을 다해 그것을 돕고 싶어요. 대륙 이곳저곳에서 불리우는 여신님의 이름이 본디 그 이름에 걸맞은 자비와 사랑, 영예, 신실한 신심으로 가득 차길 바라요.”

나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감명 받은 눈으로 그녀를 꽉 안아 주었다.

“아이린이라면 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진심으로 응원할게요!”

“고마워요, 라리아.”

아이린이 기쁜 듯이 대답했다.

내가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간 뒤, 아이린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연구소를 마저 조사하다가 라리아가 굉장히 관심을 가질 만한 연구 자료를 발견했어요.”

“네? 그게 뭔가요?”

아이린은 미소 지었다. 오늘 내내 진지한 모습만 보여주던 그녀가 처음으로 보여 주는, 아주 뿌듯하고 행복해 보이는 미소였다.

“성국에서는 마신의 힘에 적합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에게 능력을 부여했죠. 하지만 능력을 부여했다면, 제거하는 방법 역시 있지 않겠어요?”

“아……!”

나는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렸다.

“광증을 치료하는 방법을 찾아내셨군요!”

강대한 마신의 힘을 인간의 정신이 버티지 못해 나타나는 부작용이 바로 광증이었다. 그러니 마신의 힘을 제거하면 광증 역시 제거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네, 여태까지 성국이 가지고 있던 능력 추출 방식은 그 대상자를 사망에 이르게 했어요. 하지만 그동안 모아 뒀던 연구 자료를 가지고 몇 달간 연구한 결과, 저희는 마침내 대상자에게도 안전한 능력 추출 방법을 찾아냈답니다!”

“세상에나! 아이린! 정말 최고예요. 고마워요!”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아이린의 두 손을 꽉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아이린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중간에 조금 변하긴 했지만 나의 당초의 목적은 이것이었다. 녹턴의 광증을 낫게 하는 것. 그가 평생 벗어던지고 싶어 했던 그 굴레를 벗겨주는 것.

“그거면 녹턴은 물론이고 아이들 역시 치료할 수 있겠네요!”

내가 감격의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말했다.

성국에서 추출해 낸 마신의 힘을 흡수한 아이들은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초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일단 내가 세 본 바로는 자네트는 8개, 미하일은 7개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쩌면 더 있을지도 모른다.

비를 내리게 해서 꽃에 물을 주는 자네트나 중력을 조종해서 공중에 동동 떠다니는 미하일도 굉장히 귀엽긴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됐다.

‘다행히 성국에서 마신의 힘을 정제해 광기와 능력을 분리한 탓에 아이들은 광기 없는 순수한 초능력만을 얻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아이들도 치료해 주는 것이 좋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한 내 마음을 이해한 듯, 아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치료는 하루빨리 하는 것이 좋으시죠? 내일 플로렌틴의 신성 연구소에서 만나도록 해요. 오전 9시에 마차를 보내 드릴게요.”

나는 기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이린과 헤어진 나는 녹턴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녹턴.”

아이들을 데리고 날 기다리고 있던 녹턴은 내가 갑자기 안겨 오자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는 미하일을 안지 않은 팔로 내 등을 쓸어내렸다.

“공개적인 곳에서의 스킨십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나?”

그가 나직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늘만은 예외예요. 녹턴, 제가 어떤 소식을 가져온 줄 아세요? 당신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대요. 성국에서 치료법을 찾았대요. 당신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안전한 방법이라고, 읍!”

기쁨에 차 말하던 나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가 입술로 내 입을 덮어 버렸기 때문이다.

입술 사이를 가르고 그의 뜨거운 살덩이가 밀려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열정과, 애정과, 감사와, 백 마디 말보다도 뜨거운 그의 감정이 내 안으로 한꺼번에 밀려 들어오는 것 같았다.

‘대신전에서 이래도 되는 걸까? 애들도 보고 있는데…….’

하지만 오늘만큼은 나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를 있는 힘껏 받아들였다.

이 행복감을, 사랑을 그와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도록 기뻤다.

한편 자네트와 미하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릴 보았다.

“라리아, 아버지.”

자네트는 들고 있던 인형 두 개를 포개서 입을 맞추게 만들곤 킥킥 웃었다.

“…….”

미하일은 왠지 골이 난 듯한 얼굴로 손가락으로 원을 그렸다. 그의 손끝이 가리키고 있던 날벌레가 죽어서 툭 떨어졌다.

다음 날 우리는 아이린과의 약속에 따라 플로렌틴의 연구소로 향했다.

마차를 타고 가는 길이 이토록 행복하고 가슴 설렐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녹턴의 지긋지긋한 광증의 굴레를 끊어버리고 그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주는 것, 그것이 내 목적이었으니까.

“라리아, 라리아! 나는 용감한 기사 웰링턴이다!”

“그럼 나는 드래고니아 할래!”

자네트와 미하일이 건너편의 마차 좌석 위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자네트는 장난감 왕관을 쓰고 장난감 칼을 들고, 미하일은 장난감 병정을 들고 있었다.

엄격한 아버지인 녹턴은 평소라면 결코 그런 아이들을 봐주지 않았겠지만, 그도 오늘만큼은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그는 그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며 픽 웃고는 날 내려다보았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좋았다.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속삭였다.

“녹턴, 아마 저는 당신을 위해 이곳에 왔는지도 몰라요.”

녹턴의 손길이 순간 멈칫했다. 그제야 나는 내가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직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을 모르지.’

이제 곧 있으면 그에게 정말로 그 사실을 말해야만 한다. 그때를 생각하니 다시 가슴속에 무거운 돌덩이가 얹히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너무나 들떠 있는 탓일까, 왠지 그런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그라면, 이런 나라도 받아들여 줄 거라는 느낌.

나는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게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사랑 역시 나는 채 그 깊이를 재 볼 수 없을 정도로 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라면, 나를 용서해 주지 않을까.’

만일 아니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와서 그를 치료해 준 것으로 용서받기에는 그는 광증 때문에 너무나 큰 고통을 겪어 왔으니까.

그가 나를 용서하지 않는 것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베이듯이 아파 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것은 나의 업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만일 네가 나를 위해서 내 곁에 온 것이라면…….”

잠시 멈췄던 그의 손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끌어당기더니 정수리 위에 입 맞췄다. 머리카락 위로 보드랍고 따뜻한 온기가 퍼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건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겠군.”

그의 말에 갑작스레 눈물이 핑 돌았다.

‘대체 뭘 알고 그렇게 말하는 걸까.’

그의 인생을 망쳐 놓은 장본인이 나라는 사실을 그는 꿈에도 모를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믿고 싶어, 그의 말을.’

그의 말이 지푸라기라도 된 듯 매달리고 싶었다. 필사적으로 매달려 그것만을 붙들고 싶었다.

내가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을 믿고 싶었다.

지독히도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발개진 눈가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그를 보고 웃었다.

“바보, 당신은 내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녹턴은 그런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그는 내 뜨거운 눈매를 문지르며 속삭였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넌 내 삶에 있어 선물이고 기적이다, 라리아.”

“정말, 몰라요…….”

그러고 있다가 나는 뒤늦게서야 아이들이 이상하게 조용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란스럽게 뛰어놀던 아이들은 어느샌가 제자리에 착석해서 동그랗게 뜬 눈으로 우릴 보고 있었다.

“라리아 우러?”

자네트가 물었다.

“라리아 우러? 아부지가 울려써?”

미하일도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조용히 해라.”

녹턴이 짜증스런 말투로 툭 내뱉었다. 그는 좋은 분위기가 방해받은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비직비직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저 운 거 아니에요. 눈에 뭐가 들어갔어요.”

“에이~ 거짓말.”

“라리아 바보. 그걸 누가 미더.”

이제 막 6살이 된 아이들이라고 해도 이 정도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는 않았다. 나는 잠시 이를 어쩐다 하고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뽀뽀해, 뽀뽀해요! 아버지!”

자네트가 갑자기 말했다.

“라리아 우니까, 뽀뽀해조요!”

“마자. 라리아 우는 건 시러요.”

미하일도 마지못해 말했다.

“뽀뽀해! 뽀뽀해! 울지 말구 뽀뽀해!”

“어머, 공녀님, 공자님도 참…….”

또 아이들 앞에서 애정행각을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손을 마구 내저었다. 하지만…….

“읍!”

내가 주저하는 동안, 말보다 행동이 빠른 녹턴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내 입술을 덮쳐 왔다.

나는 아이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가벼운 버드키스인 줄 알았지만, 입술이 벌어지고 뜨거운 살이 파고드는 것이 느껴지자 당황해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몇 번이나 밀어내고 나서야 그는 나를 놓아주었다. 내가 아까보다 훨씬 새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녹턴, 당신도 참! 고, 공녀님과 공자님의 교육에 안 좋아요!”

하지만 녹턴은 여전히 여유만만할 뿐이었다. 그가 픽 웃으며 되물었다.

“부모가 금슬이 좋은 모습을 보여 주는데 그 자식들에게 안 좋을 게 뭐가 있지?”

그 말을 들은 나는 얼굴이 불타 버리는 것만 같았다.

“부, 부모…….”

그래, 그러고 보니 그는 내게 그런 약속을 했었다. 광증을 치료하고 나면 나에게 청혼하겠다는 약속을.

내가 그와 혼인하면…… 나는 그의 아내이자 자네트와 미하일의 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심장이 쿵쿵 빠르고 기분 좋게 뛰었다. 생각만 해도 들뜨면서도 괜히 가슴 속이 짠해지는 기분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이들의 시녀이든, 엄마이든, 이 아이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진짜 엄마가 되어 언제나 이 아이들을 지켜줄 수 있다는 건, 자랄 때까지 계속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건 생각만 해도 감동적이고, 행복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눈가가 뜨거워졌다.

‘정말이지, 내가 원래 이렇게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눈에 수도꼭지라도 생겼나 봐.’

내 눈이 다시 붉어지자 아이들은 당황함을 숨기지 못했다.

“어어! 라리아, 또 왜 우러? 왜?”

“뽀뽀해! 다시 뽀뽀해요, 아버지!”

결국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우리는 다시 한번 입술을 겹쳐야만 했다. 잊을 수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 * *

연구소에 도달한 우리는 바로 녹턴의 광증을 제거하는 치료를 진행하기로 했다.

다만 아직 광증만을 없애는 기술은 없어서, 광증을 없애려고 하면 초능력 역시 사라진다고 한다.

“정말 괜찮겠어요?”

내가 녹턴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걱정이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 치료를 받으면 녹턴의 ‘진실을 보는 눈’은 사라진다. 그리고 ‘진실을 보는 눈’은 블랙웰을 융성하게 만든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닌가.

하지만 녹턴은 우습다는 듯 코웃음 쳤다.

“까짓 눈 나부랭이가 없다고 블랙웰의 부강함에 털끝만큼이라도 영향을 미칠 것 같나?”

그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치료동의서에 서명했다.

“보여 주지. 내 능력이 그까짓 마신의 힘 따위에 의존한 게 아니라는 것을.”

그렇게 말하며 입꼬리를 끌어당기는 녹턴의 모습은 자신감이 넘치다 못 해 오만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이 근거 없는 자만심이 아니라는 사실은 나 역시 알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를 만든 사람, 그의 창조주이니까.

‘그래, 녹턴이라면 ‘진실을 보는 눈’이 없다고 해도 그 누구보다도 잘 해낼 거야.’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미소 지으며 그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런데 한 가지, 예상 밖의 일이 있었다.

“자, 공녀님, 공자님. 이제부터 공녀님과 공자님의 초능력을 없앨 거예요. 불을 뿜거나, 중력을 조종하거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것 같은 능력 있죠? 몇 달 전 성국에서 얻었던 그 능력들이요.”

“뭐어? 왜애?”

내 설명에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는데. 예상 밖에 반응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야…… 위험하니까요. 공녀님과 공자님도 자신의 능력이 무섭지 않으세요?”

“으응, 아니!”

“네에? 하지만…….”

나는 당황해서 잠시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내가 말을 멈춘 동안 자네트가 소리쳤다.

“난 이거 조아! 안 없앨끄야!”

“나두우!”

미하일 역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 능력들은 역시 너무 위험해요. 공녀님, 공자님은 이제 고작 6살인걸요. 게다가 아직 어린아이에게 초능력이 생긴 역사가 없어서, 건강이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대요.”

“그래두!”

“난 이거 조아! 계속 가질끄야!”

내가 순순히 넘어가 주지 않을 것이란 걸 아이들 역시 깨달아 버린 걸까. 급기야 아이들은 연구실 복도에 드러누워 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시러어어어! 내끄야! 내끄 뺏지 마아아아아!”

“라리아아…… 나, 이거 조은데…… 그냥 가지면 안대……? 없애기, 시른데에……. 히이이이잉…….”

자네트는 보라색 드레스가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바닥을 굴렀고, 미하일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울먹였다.

“어휴, 이를 어쩐담.”

나는 황당한 기분으로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물론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이 내 전문이긴 했지만, 이 아이들은 보통 아이가 아니라 블랙웰이었다. 다른 평범한 아이들이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집이 셌다.

결국 보다 못 한 아이린이 말했다.

“공녀님과 공자님께서 그렇게까지 좋아하시는데, 일단 그냥 두는 걸로 해요. 어쩌면 나중에 마음이 바뀔 수도 있으니까요. 행여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라리아가 언제나 옆에 두고 잘 지켜만 봐 주세요.”

그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나로서도 저렇게까지 싫다고 거부하는 아이들을 수술대에 올리는 것도 내키지 않는 참이었으니.

“아이들을 잘 지켜보는 건 제 전문이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에헤헤, 뭘요.”

결국 아이들은 치료를 받지 않고, 녹턴만이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뒤.

“어때요, 녹턴? 정말 달라진 것이 느껴져요?”

우리는 성국 숙소의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산책로는 대공저의 정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작았지만 탐스러운 초여름 장미가 잔뜩 피어나 소담한 매력이 있었다.

내 질문에 녹턴은 픽 웃더니 내 머리카락에 붙어 있던 무언가를 떼어 냈다. 어디선가 불어온 장미꽃잎이었다.

“두말하면 입 아프지. 이젠 누구를 보더라도 그 본질이나 감정이 보이지 않으니까.”

그의 ‘진실을 보는 눈’이 사라졌다는 것은 치료가 끝나자마자 알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그의 눈에는 그 누구의 영혼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이제 그의 눈이 비추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눈과 완전히 똑같아졌다.

“넌 툭하면 머리에 뭘 붙이고 다니는군, 라리아.”

그의 말에 나는 내가 블랙웰 저택에 처음 왔던 날이 떠올랐다.

모든 게 낯설었던 그날 밤. 캄캄한 복도에서 마주쳤던 그.

마치 어둠 속에 도사린 맹수를 연상케 해 다소 무서웠지만, 사실은 머리카락에 붙어 있던 깃털을 떼어주는 다정함을 품고 있었던…….

그때의 일이 떠오르자 마음속 어딘가가 간질간질해지는 것 같기도 했고, 괜히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나는 괜히 입술을 비죽 내밀며 그에게 끼고 있던 팔짱을 뺐다.

“‘툭하면’이라뇨. 이번이 겨우 두 번째잖아요.”

그렇게 말한 나는 총총총 그보다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숨을 들이켰더니, 상쾌한 덤불 장미의 향기가 허파를 가득 채웠다.

“광증은요? 광증도 없어진 것 같나요?”

나는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녹턴은 나를 보고 있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장미 덤불도, 청량한 초여름의 하늘도 아닌 오직 나만을. 나 외에는 그 어느 것도 관심도 없고 의미도 없다는 듯이.

그는 엷은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말했다.

“그래.”

“……그걸 어떻게 알아요? 느껴져요?”

내가 물었다. 사실 ‘진실을 보는 눈’과 달리 광증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없어졌다는 걸 바로 알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광증이 없어졌는지 알아보려고 일부러 스트레스를 줄 수도 없고 말이지.’

이미 그는 스트레스를 받을 만큼 받아 봤으니 말이다. 특히 최근에는 나로 인한 스트레스를 많이 겪었겠지.

“그래, 느껴진다. 말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언제나 가슴속에 도사리고 있던 어떤 불안정함이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야.”

그렇게 말하는 녹턴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해 보여서, 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기쁘고, 또 감사할 일. 나는 감격에 겨워 말했다.

“늘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시한폭탄이 사라진 기분이겠군요.”

나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한 말인데 내 말에 녹턴이 피식 웃었다.

“또 유치한 표현이군.”

“네에?”

“아무것도 아니다. 뭐, 그런 걸로 해 두지.”

그렇게 말한 그는 갑자기 발걸음을 빠르게 해서 내게 다가왔다. 그는 와락 끌어안듯 내 허리를 팔로 감싸곤 이마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건 다 네 덕분이다, 라리아 셔우드.”

그 나직한 목소리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이제는 그의 발걸음 소리, 다정한 품, 따스한 입술,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떨리게 만든다는 사실을, 그는 알까.

나는 그의 품에 안겨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는 잠시 내 등을 단단히 받쳐 안고 있다가, 속삭였다.

“이젠 약속을 지킬 시간이 됐다.”

“약속…… 이요?”

나는 되물었지만, 어쩐지 그가 이제부터 할 말

을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녹턴은 내게서 조금 떨어지더니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보라색 공단으로 감싸인 작은 상자였다.

그는 주저 없이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그의 자색 눈동자가 깊은 애정을 품은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손안에서 열린 상자에서 초여름의 햇살을 받은 무언가가 반짝였다.

그것은 반지였다. 내 손에 꼭 맞을 것 같은 사이즈의 반지가 너무나도 투명하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이젠 라리아 셔우드가 아니라, 라리아 블랙웰이 되어 주겠나?”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그를 향한 사랑이 너무나 깊고 뜨거워서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았다.

새벽별, 반딧불, 호수 위를 떠다니는 조각달, 초여름의 모든 빛나는 것을 모아 둔 것처럼 반짝이는 반지를 바라보던 나는 그의 얼굴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

그의 자색 눈동자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로지 나를 향한 열망만을 담은 채로 그의 눈이 햇살을 받아 빛났다.

행복했다. 행복했지만…….

‘이 행복은 아직 누려서는 안 되는 것이야. 내겐 아직 할 일이 남았는걸.’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오늘의 행복을 조금 유예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제가 이 청혼을 받아들이기 전에 녹턴이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내가 기쁜 얼굴로 반지를 받아 드는 대신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자 녹턴의 눈썹이 의아한 듯 올라갔다.

“뭐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노력이나 호의보다, 내 마음이 우선이었으니까. 그의 얼굴에 보이는 것은 그저 순수한 의문뿐이었다.

나는 그런 그의 배려에 보답해야만 했다.

나는 그를 따라서 무릎 꿇고 앉았다. 그리곤 그의 손을 끌어당겨 꽉 쥐며 속삭였다.

“녹턴은 궁금해하지도, 물어보지도 않겠다고 하셨지만……. 저는 반드시 말씀드려야만 해요. 저를 사랑하는 당신에게, 제가 사랑하는 당신이니까, 꼭 알려 드리고 싶었어요. 제 정체에 대해서요.”

녹턴의 눈이 조금 커졌다. 어째서일까, 내 말의 내용 때문에? 아니면 그의 손을 쥔 내 손이 숨길 수 없이 떨리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얼마나 볼썽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을지 인지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두려웠다. 내 말을 들은 녹턴이 어떤 생각을 할까. 내가 그에게 지은 죄를 안 뒤에도 그의 청혼은 유효할까.

그는 계속 날 사랑해 줄까.

손과 입술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베이지색 눈썹을 내리깔았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듯한 무게감이 혀 위에 무겁게 얹혀졌다.

“…….”

하지만 그런 나를 보면서 녹턴은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 같은 틀에 박힌 말은 하지 않았다. 아마 내 눈에 비친 의지를 읽어 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지켜볼 뿐이었다. 내가 잡은 손을 더욱 단단히, 꽉 쥐어 주면서.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그 행동은 꼭 ‘무슨 말을 해도 괜찮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네 편이다.’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을 주어서…… 나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녹턴, ‘진실을 보는 눈’에 비쳤던 제 모습은 꼭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것 같다고 하셨죠. 사실은 맞아요. 전 이 세계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에요.”

“…….”

“저는 이곳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지구의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요. 그곳에서 저는…….”

나는 나의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내가 사실 다른 세계의 존재라는 것. 그래서 이곳 사람들과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랐다는 것. 그곳에서 나는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는 일을 했다는 것.

라리아 셔우드라는 10대 귀족 영애가 아닌, 고아원 출신의 이십 대 유치원 교사 남주현이었다는 것.

“아시다시피 저는 로맨스 소설을 무척 좋아해요. 그곳에서 저는 로맨스 소설을 정말 많이 읽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저도 이런 것을 직접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나는 비참한 과거사를 가진 위험한 남자와 한없이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성녀의 비극적인 사랑에 대해 쓰고 싶었다.

그 남자의 삶을 이토록 망쳐 놓은 것 역시 오로지 그 이유 때문이었다. 어중간한 과거 정도로는 내 성에 차지 않았으니까.

“소설을 집필하던 저는 뒷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재를 중단하고 말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소설 속의 조연, 라리아 셔우드가 되어 있었죠.”

고백을 마친 뒤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게 죄스럽고, 못 견디게 슬펐다. 하지만…….

‘드디어, 다 끝났어.’

그와 동시에 홀가분함도 들었다.

이제야 겨우 나는 나의 임무를 마친 것이다.

내가 이 세계에 오게 된 이유인 ‘녹턴 블랙웰을 행복하게 만든다’를 마치고, 진실까지 전부 전했다. 나는 더 이상 그를 속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저의 정체와 당신의 삶에 대한 전말이에요. 녹턴……. 정말, 정말 죄송했어요. 아무런 자각 없이 당신의 삶을 망쳐서,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이유로 몇 번이나 상처를 줘서, 그런 주제에 당신을 속이고 당신의 곁에 있어서. 이곳에 오고 당신을 사랑하게 된 뒤로 얼마나 많이 후회하고 또 미안해했는지 몰라요. 어떻게든 당신이 행복한 얼굴로 웃는 것을 보고 싶었어요.”

눈물이 턱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그를 도저히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얼마나 짙은 배신감이 그의 자색 눈동자에 서려 있을지…….

나는 도저히 그것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역시 나는 상당한 겁쟁이인 모양이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그가 얼마나 많은 충격을 받았을까.’

나는 그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나는 그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라운 이야기를 한꺼번에 많이 들어서 힘드시죠? 혼자 계시도록 해 드릴게요. 그동안 청혼은 유예하는 걸로 해요.”

나는 뒤돌아섰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어 버릴 것만 같았다. 한숨을 꾹꾹 눌러 삼키며 나는 비틀비틀 숙소로 향했다.

‘이번 일로 그가 나를 미워하게 되어도, 어떤 벌을 받아도, 청혼도 없던 일이 되더라도 나는 괜찮아.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까.’

나는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니까.’

나는 손수건으로 눈물로 범벅인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자네트와 미하일을 만나게 될 수도 있으니까.

“……리아.”

내가 이렇게 우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이면,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들 것이다. 난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에 골몰해 있던 탓에…….

“라리아!”

나는 날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와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손목을 붙잡힌 뒤에야 나는 지척까지 다가온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아……?!”

그것이 내가 할 수 있었던 말의 전부였다. 그의 존재를 눈치챔과 거의 동시에 나는 뜨거운 체온에 파묻혀 버렸다.

중심을 잃은 몸. 그런 날 붙들어 끌어안은, 단단한 가슴팍과 팔뚝. 산뜻한 덩굴 장미의 향이 그의 성숙한 체향에 뒤덮였다.

누구인지 바로 알 수밖에 없었다.

“라리아, 어딜 가는 건가. 날…… 날 떠나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내가 아는 녹턴 같지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냉정하고, 염세적이며 비꼬는 말을 툭툭 잘 내뱉던 녹턴이 아니라…….

“제발, 가지 마라. 전부 끝났지 않나. 이젠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에 있으란 말이다.”

마치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한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꼭 내가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나는 얼떨떨해져서 그를 돌아보았다.

“녹턴을 떠나려던 게 아니에요. 전 그냥…… 혼자 계실 시간을 드리려고.”

그제야 고백을 한 뒤로 그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았다.

녹턴의 얼굴을 안타깝게 일그러져 있었다. 충격의 기색이 역력한 그의 얼굴에 내 마음이 쥐어짜듯 아팠다.

“그런데 왜 그런…… 체념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가? 마치 이별을 고하는 사람처럼.”

그렇지만…… 사실은 기쁘기도 했다.

“당장이라도 날 떠날 듯이…….”

그의 팔이 내가 어디도 갈 수 없도록 가둬 놓고 있다는 것이. 그의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감싸고 있다는 것이…….

그가 날 미워하게 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아서. 그가 나와 이별하고 싶어 하거나 사랑하지 않게 된 게 아닌 것 같아서…….

나는 간신히 그쳤던 눈물이 다시 퐁퐁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진심으로 기뻐서,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저, 정말로 어디에도 안 가요. 녹턴이 가라고 하지 않는다면요.”

“그렇다면 영원히 내 곁에 있어야겠군. 죽을 때까지.”

그가 안도한 듯 내 머리카락 위에 입 맞추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눈물로 그의 셔츠를 적시며 속삭였다.

“사실은…… 아까 그 이야기를 듣고 녹턴이 저를 미워하게 될 줄 알았어요.”

“뭐? 허튼 생각.”

그가 바로 핀잔을 주었다. 내가 알던 녹턴, 그의 모습 같아서 나는 작게 웃었다.

내 이야기에 그가 충격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그는 내 이야기를 듣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으니까.

아니, 누구라고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고, 믿고 사랑했던 연인이 자신의 비참한 과거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라면.

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 작게 말했다.

“녹턴은 궁금해한 적 없었어요? 어째서 태어났는지. 그렇게 괴로운 삶을 살아야만 했는지…….”

멈추지 않는 눈물이 퐁퐁 솟아났다. 두려움과 그를 향한 죄책감과 미안함으로 얼룩진 내 마음을 씻어 내려는 것처럼.

이 눈물이 내 마음을 씻어 내듯 그의 괴로움도 슬픔도 씻어 내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궁금해한 적, 있지. 누구라고 궁금해하지 않겠나.”

그가 헛웃음을 지으며 몇 번이고 내 뺨을 쓸어 닦아 주었다.

“녹턴을 그렇게 만든 누군가를…… 원망한 적은요?”

“원망한 적도…… 많지. 이런 집안에서 난 것을, 병을 가진 것을, 태어난 것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지. 날 이렇게 만든 자가 신이라고 생각했으니 내가 신을 사랑하지 않은 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결국 나의 신을 만나고, 사랑하게 되어 버렸군.”

내 이마에 그의 입술이 닿아 왔다. 그가 안타깝고, 사랑스러워서 나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울음을 터뜨리면서 그를 꽉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이럴 줄 알았더라면 전…….”

“울라고 한 말이 아닌데. 신이란 상상외로 눈물이 많군.”

그가 웃으며 내 등을 토닥토닥 쓸어내렸다.

“네가 내 인생을 망쳤다고, 그래서 죄책감을 가졌다고 했지, 라리아.”

“네.”

내가 애써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내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을 내려 앉혔다. 발갛게 부은 눈 위로 보드라운 온기가 와닿았다.

“내 인생이 일 년 전에서 멈추었더라면 분명 그 말이 맞았을 거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는 아무것도 없었어. 철없는 쌍둥이와 블랙웰이라는 증오스러운 이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광증만이 내가 가진 것의 전부였다.”

“…….”

“하지만 내 삶이 완전히 바뀌는 사건이 생겼지. 그래, 널 만난 거다.”

그는 손을 뻗어 내 손을 꼭 쥐었다.

“내 삶은 일 년 전에서 멈추지 않았어. 내게는 이미 지나온 것보다 훨씬 긴 시간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에는 계속, 네가 곁에 있겠지. 그렇다면 난 그것만으로도 이 삶에 만족한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자색 눈동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따뜻해서.

“내 인생은 누구에게도 망쳐지지 않았다. 라리아, 난 분명 행복해. 그러니 난 나를 만들어 낸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그 무엇보다도 맑고 투명한…… 거짓 없는 진심이 담겨 있어서.

‘어떻게 이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원작에서 녹턴은 아이린에게 구원받았기에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에게 집착했다.

내가 아는 그는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의 삶을 늪과 같은 수렁에서 건져 내어 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아는 녹턴은 구원받는 사람이지, 남을 구원하는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어떻게…….’

그런데 어떻게 내 앞의 그는, 나를 영영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끌어안아 주고 있는 그는…….

내게 구원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할 수 있었던 걸까.

아이린이나 다른 사람들이 소설 속의 글자가 아니었듯이 녹턴 역시 그렇다. 그저 글자와 설정의 집합체가 아닌, 사람이었던 것이다.

성장하고, 입체적이고, 그래서 원작자의 설정과 예상을 한껏 뛰어넘을 수 있는. 진짜 사람.

그저 그의 말 몇 마디가, 한순간의 주저도 없이 나를 용서해 주기로 한 그의 용기와 사랑이 아주 오랜 시간 나를 얽어매온 원죄를 벗기고 죄악감을 씻어 주는 것만 같았다.

이제 더 이상 불안감 같은 것은 없었다. 우린 서로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더 이상 그가 광증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걱정이나 그에게 미움받게 될 거라는 두려움도 없었다.

그도, 나도, 행복하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행복할 테니까.

숙소로 돌아오는 길, 그와 맞잡은 내 왼손의 약지에는 빛나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 * *

만일 내가 그에게 모든 사실을 고백한다면 가르쳐 주고 싶었던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광증만큼이나 오래, 그리고 강하게 그의 마음을 얽매어 오던 굴레였다.

내가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자마자 녹턴은 마음이 대단히 바쁜 사람처럼 굴었다.

“더 기다릴 것 있나? 최대한 빨리 진행하도록 하지.”

사실은 나도 그의 마음에 공감하고 있긴 했지만…… 그의 추진력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일단 우리는 바로 제국의 대공저로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가 저택에 돌아온 바로 그다음 날, 나는 습관적으로 신문을 읽다가 1면에 대문짝만하게 난 기사에 마시던 오렌지 주스를 뿜을 뻔했다.

「블랙웰 대공, 드디어 혼인 발표! 상대는 예상대로 동거 관계의 약혼녀 라리아 셔우드.」

「블랙웰 대공, “혼인은 최대한 빨리 진행하겠다” 여름을 넘기지 않을 것으로 예상」

「단독! 블랙웰 대공의 혼인 발표에 대한 셔우드 백작가 대상 인터뷰」

‘말도 안 돼! 공식 발표를 이렇게나 빨리? 난 아직 가족들에게 직접 말하지도 못했는데! 아니, 게다가 기사 낼 시간이 대체 언제 있었던 거야? 우리는 바로 어제 돌아왔는데!’

별달리 오래 걸릴 이유는 없긴 했다. 셔우드가에서 반대를 하지도 않을 것이고, 블랙웰 내외에서 우리는 거의 사실혼과 같은 상태로 인정받고 있었으니까.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아, 정말 미치겠네.’

나는 신문을 팔락이며 화끈화끈 불타오르는 것만 같은 얼굴을 애써 식혔다.

아니나 다를까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바로 그날 오후부터 수도 각지에서 아는 사람, 심지어 모르는 사람에게서까지 초대장과 흥미 본위의 질문이 담긴 편지가 잔뜩 날아왔다.

물론 셔우드 가문에서도 걱정이 가득 담긴, 조만간 이 문제에 대해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자는 내용의 편지가 왔다. 심지어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 아돌프에게서 각각 따로따로.

그리고 블랙웰 집안사람들의 반응은…….

“드디어 아가씨께서 저희 블랙웰의 안주인이 되신다니, 너무 기뻐요!”

“정말요,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좀 더 일찍 되셨어도 괜찮았을 텐데! 하지만 지금이라도 혼인 발표가 나서 정말 기쁘네요!”

사실 녹턴이 내게 청혼한 바로 그날부터 집안사람들에게는 모두 혼인 소식을 알리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공식 발표라는 말에 담긴 무게감이 있어서인지 이번 일에 모두가 함께 기뻐해 주었다.

사실 ‘기뻐해 주었다’라고 표현하면 겸손한 거고 ‘열광적이었다’에 가까웠다. 대공저 내는 거의 축제 분위기였으니까.

저택 전체가 파티장처럼 장식되고, 주방의 셰프들은 끊임없이 새롭고 호화로운 요리를 선보였다.

사용인들 모두가 들떠 보이는 것이 보기 좋아서, 나는 사용인들을 위한 파티를 열어 주기도 했다. 맛좋은 요리를 잔뜩 준비해 먹고 마시게 하고 즐겁게 놀고 푹 쉬도록 배려했다. 물론 모두가 좋아해 주었다.

그리고 또…….

“마님! 이번 파티의 반응 역시 정말 성공적이었습니다. 모두가 입을 모아 마님의 자비와 배려를 찬양하더군요.”

나와 녹턴의 빠른 결혼을 그 누구보다도 응원하고 지지해 주던 시몬은 이젠 나를 아예 마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거 정말 기쁜 소식이네요. 그런데 아직은 절 마님이라고 부르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아직 정식으로 혼인한 건 아니잖아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지시에 불응하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마님. 하지만 이번만큼은 이 늙은이의 고집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몹시 민망하고 부끄러웠지만…… 시몬이 기뻐 보이니 그냥 그렇게 하도록 두기로 했다. 역시 나는 연장자에게 약하다.

“사용인들 전원이 사기와 의욕이 높으니 업무효율 역시 높습니다. 이게 전부 마님의 덕택인 것으로 아룁니다.”

“정말…… 과언이세요, 시몬. 제가 보기엔 그 정도까진 아닌걸요.”

내가 손사래를 치자 시몬은 ‘역시 우리 마님, 정말 겸손하기까지 하시지’라고 쓰여 있는 듯한 얼굴을 했다. 나는 이제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반쯤 체념한 상태였다.

“후훗, 그럼 전 결혼식의 준비를 위해서 이만……! 역사서에 남을 법한 최고의 결혼식으로 준비할 테니 기대해 주십시오, 마님.”

아직 결혼식의 날짜도 잡히지 않았는데, 시몬은 약 42.195km 정도 앞서나가고 있었다.

한편, 아이들의 반응은 어땠느냐고?

나와 녹턴이 결혼에 대한 소식을 아이들에게 전해준 건 청혼을 받은 바로 그날이었다.

“공녀님, 공자님. 정말 좋은 소식이 있어요.”

자네트와 미하일이 낮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는 아이들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먼데?”

아이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

아이들의 눈에도 내 얼굴이 보였으리라. 도저히 새어 나오는 웃음기를 감추지 못하는 내 어느 때보다도 환한 얼굴을.

나는 호기심에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들을 꽉 끌어안아 주곤 이렇게 말했다.

“저, 대공님께 청혼받았어요! 올여름에 결혼하기로 했어요.”

청혼, 결혼. 몇 번을 되뇌어도 가슴이 벅차오는 단어였다. 나는 간질거리는 가슴 속을 견디지 못하고 아이들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그때가 되면 저, 공녀님과 공자님의 엄마가 되는 거예요. 정말 잘 됐죠?”

나는 이 소식을 전해주면 틀림없이 아이들도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부터 ‘라리아가 우리 엄마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던 아이들이 아닌가.

그런데 의외로 아이들의 반응은 담담했다.

“구래?”

아이들이 기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이들의 얼굴이 환해진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아이들은 폴짝폴짝 뛰거나, 환호성을 지르거나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상상외였다.

“공녀님과 공자님은 기쁘지 않으세요? 전 공녀님과 공자님의 엄마가 될 수 있어서 정말 기쁜데.”

내가 그렇게 물었다. 미하일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너무 조아. 그냥…….”

“그냥?”

“원래 하기루 한고 아녀써?”

그렇게 말한 미하일이 크고 둥근 눈을 끔뻑였다.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는 없었다.

‘이 아이들은 내가 자기들 아빠랑 결혼하고, 자기들의 엄마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구나. 너무 당연한 일이라 그렇게까지 기쁘지는 않은 거야.’

그런 순진한 믿음은 제국 귀족 커플들 사이에서 약혼 중 파혼률이 은근히 높다는 것을 몰라서였을까? 아니면…….

공연히 민망해졌다. 아이들의 눈에도 훤히 보일 정도로 나와 녹턴이 유난을 떨고 다녔나 싶어서.

나는 미하일과 자네트의 뺨에 번갈아 가며 뽀뽀해주곤 말했다.

“공녀님, 공자님. 만약에, 만약에 말이에요. 대공 전하께서 저 말고 다른 여자분이랑 결혼하면 어떨 것 같으세요? 저보다 훨씬 다정하고 훨씬 미인인 사람이랑요.”

“머어? 그게 머야!”

“절대 시러!”

이번엔 단박에 열렬한 반응이 돌아왔다. 나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

“저보다 훨씬 공녀님, 공자님과 잘 놀아 주고 미인인 데다가 돈도 많은 사람이면요? 그래도 싫어요?”

“시러어! 절대 안대!”

“아빠 너무해! 미어어!”

“아부지 나빠써!”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냥 만약에였어요. 대공 전하는 저랑 결혼하실 거예요.”

나는 급기야 애꿎은 녹턴에 대한 원망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아이들을 꽉 껴안고 진정할 때까지 뽀뽀해 주었다.

“제가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그냥 농담이었어요. 대공 전하는 저 말고 아무하고도 결혼 안 해요. 공녀님, 공자님의 엄마도 저뿐이고요.”

“씨익, 씨익, 씨익……. 진짜지?”

“그럼요, 진짜죠. 제가 공녀님, 공자님 두고 어딜 가겠어요.”

나는 그렇게 속삭이며 아이들의 등을 토닥였다.

미하일은 금방 진정하고 다시 엄지손가락을 빨기 시작했지만, 다혈질인 자네트는 여전히 진정이 덜 된 것 같았다. 씨근거리던 자네트가 말했다.

“진짜면, 자네트라고 불러.”

“네?”

“엄마는 ‘공녀님’이라구 안 해. 나두 그 정돈 알아!”

자네트가 내 품에 안긴 채 떼를 썼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자네트와 미하일을 ‘공녀님’, ‘공자님’이 아니라 이름으로 부르는 일……. 그리고 이 아이들에게 엄마라고 불리는 일. 물론 나 역시 바라마지 않던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은’ 이 아이들의 엄마가 아니다. 아직 나는 녹턴과 결혼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아이들을 끌어안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녹턴이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녹턴은 뭘 망설이냐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의 입가에는 엷은 웃음기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그의 뜻을 이해한 나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저절로 새어 나오는 웃음과 기분 좋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나는 자네트의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자네트에게 말했다.

“자네트.”

“…….”

“자네트, 사랑하는 우리 딸. 직접 낳진 않았지만 마음으로 낳은 내 딸. 이제부턴 엄마가 자네트를 평생 사랑해 줄게. 곁에 있어 줄게.”

자네트는 내 말에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크고 둥근 자색 눈동자는 이내 수분기로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으우우……!”

자네트가 울먹였다. 나는 그런 자네트의 뺨에 다시 한번 입 맞춰 주곤 속삭였다.

“엄마라고 불러야지.”

자네트는 부끄러운 것 같았다. 눈부신 은발 아래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내 품에 비볐다.

주저하던 자네트가 웅얼거렸다.

“으응…… 어, 어…… 마.”

늘 이름으로 부르던 날 새삼 ‘엄마’라고 부르는 것은 쉽지 않으리라. 가뜩이나 자네트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아이니까.

그러므로 나는 자네트의 모기 소리 같은 ‘엄마’도 진심으로 기뻤다. 나는 자네트를 꽉 안아 주며 말했다.

“참 잘했어요!”

한편 이 모습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었다.

“어…… 엄마! 엄마……!”

바로 미하일이었다. 미하일은 내 품을 파고들며 활짝 웃었다.

“엄마! 저도 불러 주세요!”

미하일은 자네트와 달리 꽤 자연스럽게 ‘엄마’라고 불렀다. 그의 그런 점도 사랑스럽기 그지없어서 나는 미하일의 두 뺨에 번갈아 가며 입 맞췄다.

“그래, 미하일. 우리 착하고, 사랑스런 미하일. 난 미하일의 엄마가 될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에헤헤…….”

미하일이 기쁜 듯이 활짝 웃었다. 나는 아이들이 답답하다고 말할 때까지 꽉 끌어안아 주고, 입 맞춰 주었다.

* * *

우리가 대공저로 돌아온 뒤의 일이다.

그에게 내 정체를 고백한다면 가르쳐 주고 싶었던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광증만큼이나 오래, 그리고 강하게 그의 마음을 얽매어 오던 굴레였다.

내가 알려 주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자 녹턴은 의아해했다.

“알려 줄 것이 또 있다고?”

“네. 정말 중요한 것이라서, 잠깐 시간을 내서 진지하게 들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내 말에 녹턴은 픽 웃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난번보다 더 놀라울 수가 있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녹턴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대응해 주었다. 우리는 그의 집무실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 요청으로 시원한 물을 준비하기까지 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뭘 걱정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지난번 일 이후로 내가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게 된 건 확실하다.”

녹턴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정말로 그가 걱정이 됐다.

‘아무리 준비해도 지나치지 않아. 이건 그의 역린과도 같은 화제이니까.’

마침내 모든 준비가 완료되자, 나는 입을 열었다.

“사실은…… 당신의 형, 셰이머스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 이름을 꺼내는 순간 녹턴의 눈빛이 달라졌다.

나는 보았다. 그저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의 눈가에 붉은 분노의 기색이 어리는 것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셰이머스에 대한 건 그의 역린이란 말이지.’

나는 한숨을 삼키며 생각했다. 녹턴은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있더니 제 손으로 미간을 눌렀다.

“그래, 너라면 ‘그 녀석’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당연하겠군.”

노기가 기저에 깔린 듯한 낮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나는 무거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그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고 있어요.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싫어한다는 것도요.”

당연한 일이었다. 한때 녹턴의 삶의 유일한 기둥이었고, 유일하게 마음을 연 상대였다.

하지만 중요한 때 그 상대에게 배신당한 녹턴은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 잠갔다. 그에게 품었던 애정은 그대로 거대한 배신감과 증오로 변모했다.

녹턴은 말없이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감정을 가라앉혀 보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그때 그 일 이후로는 일부러 잊으려고 하고 살았지. 그 이름을 남에게서 듣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군.”

그렇게 말하는 녹턴의 목소리는 조금 쉰 듯이 들렸다.

때때론 미움받는 것보다 미워하는 쪽이 더 힘들 때가 있다. 그 상대가 허무하게 죽어 이 세상에 없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녹턴은 오랜 시간 동안 죽은 자에 대한 증오심과 원망을 품고 살았다. 그 갈 데 없는 감정들은 녹턴 자신을 연료 삼아 타들어 갔다. 자기 자신이 새하얀 재가 되어 소진될 때까지.

그런 녹턴이 안쓰럽고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힘들어할 것을 알면서도 최대한 빨리 이 사실을 알리려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난 더 이상 그가 갈 데 없는 증오로 자신을 소진시키는 걸 두고 보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더더욱이.

나는 녹턴의 손을 잡아당겨 꼭 쥐었다.

“녹턴, 녹턴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있어요.”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셰이머스는 당신을 배신하지 않았어요.”

내 말에 녹턴은 눈을 부릅떴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지?”

부릅뜬 눈 가운데에서 자색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서, 안쓰러워서, 나는 한숨을 삼켰다.

“셰이머스는…… 당신을 그 누구보다 소중히 여겼어요. 그는 당신을 지키려고 했어요. 모진 고문으로 인해 그의 숨이 끊길 때까지…….”

“그, 그게 무슨.”

녹턴은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 녀석이 내게 무슨 말을 했었는지 너도 알 텐데? 그 녀석이 했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여태까지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었어. 그 녀석은 나를 속였다. 입에 발린 말로 나를 위로하고, 자신에게 의지하게 만들어 놓고서는 사실 뒤로는 나를 제거하려는 수작을 부리고 있었던 거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점점 흥분하기 시작하는 그의 두 손을 꽉 잡았다. 녹턴은 흠칫 몸을 떨었다.

“맞아요. 그가 그런 말을 했었죠. 하지만 녹턴, 그게 전부 거짓말이라면요? 셰이머스가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다면?”

“뭐? 대체 무엇을 위해?”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나는 목이 메어 숨을 골랐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의 자색 눈동자는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과거의 비극, 괴로운 기억과 마주하는 두려움.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배신의 상처는, 더군다나 가족에게 당한 배신의 상처는 깊게 남아 오랫동안 낫지 않는다. 나 역시 알고 있었다. 그야, 나도 엄마에게 버림받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견뎌 내야만 해.’

나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힘을 내요, 녹턴.’

“셰이머스는…… 당신과 도망칠 계획을 짜면서 이 계획이 실패할 경우의 대비책 역시 함께 준비했어요. 이 도주의 성공 가능성이 그렇게 높지 않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때 당신들은 가진 것 없는 10대 소년 두 명이었고 상대는 거대한 권력을 가진 가문이었어요. 섬세하고 치밀한 셰이머스가 그 정도를 몰랐을 리 없겠죠. 그래서 그가 준비한 대비책이란…….”

“모든 죄를 나에게 덮어씌우는 증거였지! 그 모든 게 나를 후계자의 자리에서 박탈시키기 위한 것 아닌가. 자신이 후계자의 자리를 독차지하기 위해서!”

“그래요, 맞아요. 셰이머스는 당신의 후계자 권한을 박탈시키고 싶어 했어요.”

극히 감정적이 된 녹턴은 그 말에 쉽게 납득하지 않았다.

“그런 게…… 어떻게 날 위한 일이 될 수 있지? 결국 자신의 탐욕 때문에 저지른 짓이 아닌가!”

“아니에요, 녹턴…….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떠올려봐요.”

내 말에 녹턴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고문의 충격으로 죽었지. 설마…….”

“맞아요, 선대공은 후계자에게 극심한 학대를 가했죠. 셰이머스는…… 당신을 학대에서 보호하고 싶었던 거예요. 모든 고통을 자신이 받는 것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녹턴은 머리를 거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자…… 잠깐. 잠깐! 그건, 그건 말도 안 된다. 그렇다면…… 만약 그렇다면, 내게 굳이 그런 식으로 말할 필요가 없었지 않나! 왜 나한테까지 그런 거짓말을 한 거지? 적어도 내게만은……!”

“그건 간단해요. 당신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니까요. 당신은 어떻게든 선대공에게 진실을 알려서 함께 벌을 받는 것을 선택했겠죠. 그 모든 고통과 고문을 셰이머스 혼자 감당하게 놔두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나요?”

“…….”

녹턴은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예상대로였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는데……. 셰이머스는 자신이 죽을 것을 미리 알고 있었어요.”

“뭐, 뭐라고?”

“둘이서 감당할 몫의 고문을 혼자서 받아 내다가 결국 절명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는 예상하고 있었어요.”

이런 슬픈 진실을 그에게 알려 주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파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에게만은 알려 주어야 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그이므로. 그는 셰이머스가 가장 사랑했던 동생, 녹턴 블랙웰이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는 당신이 너무 슬퍼하지 않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일부러 매정하게 대해서 정을 떼려고 한 거예요. 물론…… 그다지 효과가 있지는 않았지만요. 결국 당신은 광증을 얻을 정도로 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뒤 나는 깊게 숨을 쉬었다.

그래, 이것이 진실이었다. 셰이머스 블랙웰과 녹턴 블랙웰, 한때 사이가 좋았지만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서로를 배반한 것으로 알려진 두 형제 사이의 진실.

그 진실은 권력에 대한 욕망이 아닌 서로를 누구보다 아꼈기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그럴 수가.”

녹턴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나, 나는…….”

그는 말을 잇지 못했지만 나는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을 알 것 같았다. 그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했던, 2년이나 자신을 위해 모든 고문과 학대를 감당한 형을 7년 동안 증오하고 저주했다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나는 그의 손을 꽉 잡아 쥐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잖아요. 모든 것은 선대공의 책임이고, 당신과 셰이머스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일 뿐이라고요. 당신들에게 죄가 있다면 서로를 진심으로 믿었다는 것뿐이에요.”

거기까지 말한 나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안고 말았다.

그의 넓디넓은 어깨가 이렇게 연약해 보일 줄이야.

나는 진심으로 마음이 아팠다. 그와 셰이머스가 그런 일을 겪어야만 했다는 게, 녹턴이 이런 일로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게…….

“게다가 당신은, 언제나 셰이머스를 증오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뭐? 아니, 난…….”

“절 속일 생각 하지 마세요.”

나는 그를 끌어안은 채 애써 웃었다.

“그를 정말로 증오했다면, 그의 자식들을 양자로 들여 직접 키우지는 않았겠죠. 그의 눈과 머리색을 쏙 빼닮은 양아들을 진심으로 걱정하지도 않았을 거고요. 게다가, 녹턴은 여전히 그가 불러 주었던 노래에서 편안함을 느끼잖아요. 진정으로 증오하는 사람이 불러 줬던 노래를 듣고 편히 잘 수 있을 리가 없는걸요.”

나는 그의 등을 토닥이며 속삭였다.

“당신은 그를 증오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여전히 소중히 여기고 있었잖아요.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잖아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제 눈을 속일 수는 없어요.”

“…….”

“그렇죠, 녹턴?”

그는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그는 간신히 내뱉었다.

“정말이지…… 못 이기겠군.”

조금 쉰 듯한 그 목소리. 그 목소리가 너무나 사랑스럽고, 또 안타까워서, 나는 그의 두 뺨을 부여잡고 입술 위에 입을 맞추었다.

* * *

셰이머스의 진실을 알려 주고 며칠 뒤, 우리는 수도를 벗어나 대공령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대공성의 후원에 있는 가문 묘지였다.

“작위를 물려받은 뒤 그곳에 가 보는 건 처음이군.”

그곳으로 가는 마차 안에서 녹턴은 말했다.

“뭐, 내가 기리고 싶은 가문의 인간 따윈 한 명도 없었으니까. 여태까지는.”

그 말을 들은 나는 어떠한 예감을 느꼈다.

작위를 물려받은 뒤 7년 동안 가문 묘지에 들른 적 없다던 녹턴이, 앞으로는 일 년에 한 번씩은 묘지에 방문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

대공성의 주인이 7년 동안 들른 적 없다는 묘지는, 사용인들이 늘 관리를 하고 있는 모양인지 깔끔하고 정돈이 잘되어 있었다.

우리들은 초대 대공부터 이어지는 묘비들을 차례차례 살펴보았다.

“……여기로군.”

그의 말에 나는 묘비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셰이머스 블랙웰

1819~1839

훌륭한 후계자였던 그를 기리며」

그의 묘비는 여태까지 보아 왔던 다른 묘비에 비해 많이 수수한 편이었다. 아마 정식으로 대공위를 물려받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내 양손을 꼭 쥐고 있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자네트, 미하일. 숙부님께 꽃을 드리도록 해요.”

아이들은 각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묘비 앞에 놓았다. 언제나 명랑하던 아이들이지만, 지금은 묘지의 엄숙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제법 진지해 보였다.

묘비에 꽃을 바친 뒤 나는 녹턴에게 속삭였다.

“형님과 두 분이서 시간 보내세요.”

아마 오래 묵은 해후를 풀 시간이 그에게도 필요할 테니까. 나와 미하일, 자네트는 그에게 잠시 형과 둘만 있을 시간을 내주기로 했다.

나와 아이들은 녹턴에게서 멀리 떨어져 그가 형에게 못한 말들을 전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녹턴이 셰이머스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는 그 둘만이 알 것이다.

잠시 뒤.

“다녀왔어요? 형님과 잘 이야기하셨나요?”

충분히 이야기를 나눴는지 이쪽으로 오는 녹턴을 맞이하며 내가 말했다. 녹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잘했다는 뜻에서 그의 뺨에 입 맞춘 뒤 등을 토닥여 주었다.

‘서로를 그토록 아끼던 형제가 그렇게 오래 서로를 오해하다니. 한쪽이 죽은 뒤 7년이 지나서야 그 오해가 풀렸구나…….’

안타까움에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역시 내가 원작을 그렇게 쓰지만 않았어도…….’

어쩔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 속에 덩어리져 맺혔다.

내 얼굴에 비치는 그늘을 눈치챈 건지, 녹턴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또 자책을 하고 있군.”

“아…….”

나는 부끄러워져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녹턴은 그런 내 머리를 쓸어내렸다.

“내가 말 하지 않았나?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면 라리아, 너 역시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 때문에 셰이머스가.”

하지만 녹턴은 내 말을 끊었다. 언제나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 주는 그였기에, 흔치 않은 일이었다.

“꼭 나나 셰이머스가 자유의지 없는 꼭두각시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나는 이제껏 어느 순간이든 치열하게 고민하며 최선의 판단을 하며 살았고 셰이머스 역시 그랬을 것이다. 넌 네가 소설을 썼기에 그렇게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본 적은 없나?”

“네, 반대로요?”

그건 상상도 해 보지 못한 시각이기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녹턴이 말을 이었다.

“그래. ‘등장인물인 우리가 그렇게 행동했기에 네가 그렇게 쓴 것’이 아니냐는 거다.”

순간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그러고 보면…… 소설을 쓸 때 그런 감각을 느낀 적이 있다. 꼭 등장인물들이 자기 멋대로 움직이고, 나는 그것을 받아 적고 있다는 감각.

소설을 써본 적 없는 녹턴이 그 느낌을 어떻게 알았는지, 단지 날 위로하려다 보니 얻어걸린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완전히 새로운 시각에 나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렇다면, 녹턴도, 셰이머스도, 아이린도, 셔우드 가문 사람들도, 원작의 라리아도……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행동하고 나는 그걸 받아 적은 것뿐이라는 거야?’

내 고민을 눈치챘는지 다시 한번 그의 긴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거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알 수 없는 것만큼 네가 쓴 것이 먼저인지 우리가 행동한 것이 먼저인지는 결국 영영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그런 쓸데없는 걸로 고민하지 마라.”

“……네.”

그의 말이 진심인지, 그저 날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를 위해 그런 말을 해 주었다는 것은 진심으로 기뻤다. 그는 내 원작으로 인해 가장 고통 입은 한 사람일 텐데도.

만년설처럼 오래 묵은 죄책감이 봄눈처럼 녹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받아들여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괜찮았다.

언젠가는 이 죄책감을 완전히 이겨 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 * *

그로부터 두 달 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축복 아래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황제 하인리히는 황궁에서 식을 올리라고 제안했지만 그건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졌기에 거절했다.

‘황족도 아닌데 황궁에서 결혼식을 올리다니! 제국의 비선실세인 걸 동네방네 티 낼 일 있나.’

“너무 눈에 띄는 건 싫어요. 적당히 수수하게 식을 올려요.”

“그럴 순 없다. 3만 송이의 작약과 5만 송이의 장미로 식장을 장식하고 보석과 비단으로 버진로드를 치장해야 한다. 제국, 더 나아가 전 대륙의 모두에게 블랙웰의 새로운 안주인에 대해 강력히 인식시켜 주어야만 한다.”

식을 준비하는 내내 우리는 이런 걸로 아웅다웅했지만, 결국 우리 의견의 절충점을 찾아냈다.

우리의 결혼식은 수도 외곽의 성당에서 치러졌다.

“라리아, 결혼 축하한다.”

“라리아, 꼭 행복해야 한다. 만일 결혼 생활이 힘들면 친가로 오렴. 언제든 환영이란다.”

“누님, 대공…… 아니 매형이 짜증 나게 굴면 언제든 말해! 내가 혼내 주러 갈 테니까!”

“아돌프, 매형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면 못써.”

셔우드 가문의 사람들도 모두 와서 축하해 주었다. 아돌프는 말은 저렇게 하지만 지난 밤에 어찌나 많이 울었는지 손수건 12장을 못 쓰게 만들었다고 새어머니가 몰래 전해 주었다. 어쩐지 눈이 붕어가 다 됐더라니.

우리의 결혼식에는 황제 부부가 참석한 건 물론이고, 성녀이자 대신관인 아이린이 직접 와서 주례를 섰다. 정말이지 호화로운 결혼식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 결혼식의 스페셜 게스트는 따로 있었다.

“어머나, 세상에!”

“어쩜, 귀여워라!”

그들이 나타나자 하객들 모두가 자지러졌다.

바로, 자네트와 미하일이었다. 이 아이들은 우리 결혼식의 화동이 되었다.

자네트는 치맛자락이 나풀거리는 재질의 흰 드레스를 입고 작약으로 만든 화관을 썼는데, 마치 작은 천사처럼 보였다. 미하일은 검은 정장을 빼입었는데, 무척이나 귀여웠지만 한편 자기 아빠를 쏙 빼닮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두 아이는 꽃바구니를 하나씩 든 채 버진로드에 꽃잎을 뿌렸다.

“세상에, 너무 사랑스러워요!”

“꼭 천사 같아요.”

“저렇게 예쁜 아이들이 다 있다니!”

모든 하객들이 두 아이의 사랑스러움을 입을 모아 칭찬했다. 그 소리를 들은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한껏 뿌듯함이 차올랐다.

“라리아.”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을 엄마 미소를 한껏 지으며 구경하고 있자니, 누군가가 어깨를 건드렸다.

고개를 돌리니 그였다. 이 결혼식의 새신랑, 녹턴 블랙웰.

내가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남자이자, 나의…… 남편.

“이제 우리 차례다.”

그가 매끄러운 입술을 달싹이며 말하곤 미소 지었다. 심장이 쿵쿵 기분 좋게 뛰었다. 나는 그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어머나!”

우리가 함께 나타나자 다시 한번 하객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너무 아름다워요!”

“최고의 한 쌍이네요.”

“정말 잘 어울려요.”

아이들의 앞에 나서는 것은 익숙했지만, 이렇게 많은 어른들의 앞에 나서는 건 낯설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내 곁엔 그가 있기에. 그가 마치 나를 지켜 주듯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기에.

나는 정말 행복했다. 진심 어린 웃음이 버진로드 위에 흩뿌려졌다.

“구성원 모두가 건강하고 서로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기를. 가정에는 화합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그대들의 앞날에 여신의 가호가 있기를.”

아이린의 주례가 끝났다. 이제는 맹세의 키스를 나눌 시간이었다.

나는 녹턴을, 녹턴은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결혼식장이 이렇게 아름답고 사람도 많은데, 그의 자색 눈동자에는 오로지 나만이 가득했다. 마치 나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아마 나 역시도 그럴 것이다.

나는 배시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눈을 감았다. 내 입술 위로, 그의 따스하고 보드라운 입술이 겹쳐 오는 것이 느껴졌다.

“와아아!”

“축하해요!”

축복의 말과 박수갈채가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울려 퍼졌다.

최고의 결혼식이었지만, 나는 이것이 이 소설의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여기부터가 우리들 이야기의 시작일 것이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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