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 * *
“됐다!”
암호해독표에 오랜 시간 코를 박고 있던 내가 소리쳤다.
아이들의 집을 찾아 주고 밀렵된 동물들까지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 준 다음 나는 다시 암호를 해독하는 데에 몰두했다.
페트로의 악필 때문에 다소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결국엔 암호를 완전히 풀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와, 해내셨군요!”
아이린이 함께 기뻐해 주었다.
“이번엔 틀림없을 거예요. 암호해독표를 페트로에게 보내서 다시 확인받았거든요.”
“저번에는 정말 죄송했어요. 괜히 저 때문에……. 제가 암호 해독할 때 실수를 해서.”
“에이, 아니에요! 덕분에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으니까요.”
해독을 해서 나온 주소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플로렌틴의 외곽이었으나, 방향이 정반대였다.
“그럼 이곳으로 가 볼까요? 언제쯤 갈 생각이신가요?”
두 주먹을 꽉 쥔 아이린은 지금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듯이 의욕이 넘쳐 보였다.
그 사실은 무척 고마우면서도, 마음속 어딘가가 묵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린은 아직 내가 대신관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녹턴의 광증 치료법을 찾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어.’
아이린은 언제나 내게 과분할 정도로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지만……. 하지만 그녀와 대신관의 관계는 나와 아이린의 우정보다도 훨씬 더 오래되었다.
‘평소 아이린이 대신관에 대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를 돌봐 온 아버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어.’
아이린이 대신관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실감할 때마다 더더욱 가슴에 무거운 하중이 얹혀졌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사실상 대신관의 뒤를 캐는 짓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아이린이 알게 된다면…….’
그렇게 되면 아이린이 선택하는 건 가족 같은 사람일까? 우정일까?
원작자인 나조차도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야, 아이린은 이제 내게 캐릭터가 아닌,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있는 감정과 마음을 가진 인간이니까.
‘어쨌든 이 이상 아이린을 속일 순 없어. 이젠 솔직하게 말할 때가 왔어. 설령 이 일로 인해 친구를 잃게 될지 모른다고 해도…….’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입을 열었다.
“저, 처형장으로 출발하기 전에 아이린에게 말할 것이 있어요.”
나는 아이린이 마음을 다치지 않길 바라며 평소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차근차근 전했다.
광증 보유자들을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처형한 것이 역대 대신관들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지금의 대신관인 테오도어 레마르크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
우리가 녹턴의 광증 치료법을 찾기 위해 하는 조사가 어쩌면 대신관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것.
“이런 말씀 드리게 되어서 정말 죄송해요. 아이린이 대신관님이 가족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었는데……. 저도 이러고 싶진 않지만, 아무래도 그분에 대한 의심을 지울 수가 없어요.”
내 말에 아이린은 의외로 별로 놀라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가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헤헤, 사실은 조금은 예상하고 있었어요. 라리아가 대신관님을 의심하고 있다는 거요.”
“네? 알고 계셨어요?”
“그럼요. 광증을 가진 가문들을 재판하고, 광증 보유자들에게 사형을 언도한 사람이 역대 대신관들이라는 정보를 드린 것도 저잖아요. 라리아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해요. 저 같아도…… 그런 상황이면 지금의 대신관님을 의심할 수밖에는 없을 것 같아요.”
‘알고 있었구나.’
가슴이 아파 왔다. 그럼 아이린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내 조사를 도와주고 있었던 걸까?
“……기분이 나쁘지는 않으세요? 아이린이 대신관님을 알고 지낸 지는 거의 15년은 됐다면서요. 만일 아이린이 이 이상 저를 도와주신다면…… 꼭 아이린이 대신관님에 대한 불리한 증거를 찾는 것처럼 되어 버리니까요.”
내가 조심스레 묻자, 아이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당황하긴 했어요. 제가 아는 대신관님은 뭔가 꿍꿍이를 품고 나쁜 짓을 하신다거나 그런 분은 아니거든요. 아주 자상하고 다정한 분이세요.”
아이린은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내 손을 덥썩 잡았다.
“그래서 더더욱 라리아를 도와드리고 싶어요! 라리아를 도와드려서 조사를 마치면, 대신관님의 결백도 증명될 테고, 그럼 라리아의 대신관님에 대한 의심도 풀리지 않겠어요? 그게 바로 최고의 결과일 거예요!”
아, 그렇구나. 그게 아이린의 생각이었구나.
아이린은 내 예상보다도 아주 강하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친구가 가족을 의심하는 것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이나 말이다.
“저는 라리아도 믿고, 대신관님도 믿어요. 두 분 다 제겐 너무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라리아를 도와드리는 데 주저하지 않을 수 있는 거예요.”
그녀의 말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나는 대답했다.
“고마워요.”
“뭘요! 이건 제 일이기도 하고, 저의 제일 소중한 사람 일이기도 하고, 제 가족의 일이기도 한걸요!”
싱글벙글 웃던 그녀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물론 성녀로서도, 성국이나 대신전에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면 알고 싶어요. 알아야 할 의무가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됐다. 결국, 이 일은 내 일이면서도 아이린의 일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럼 채비를 마치고 내일 오전 10시에 광장에서 만나도록 해요. 아이린이 함께라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헤헤, 저도요!”
그렇게 우리는 다음 날 목적지로 출발할 것을 약속했다. 그날 밤 나는 두근거려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 날, 나는 일찍부터 아이린과 사형 집행장에 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준비를 거의 마쳐 갈 즈음, 뜻밖의 방문자가 찾아왔다.
“라리아!”
“라리아아! 놀자!”
바로 자네트와 미하일이었다.
“공녀님, 공자님! 오늘 일찍 일어나셨네요.”
“헤헤, 잘해쩌?”
“그럼요, 정말 잘하셨어요. 우리 공녀님 공자님 다 컸네요.”
“에헤헤.”
자네트와 미하일은 둘 다 늦잠을 좋아해서 아침에 깨워도 잘 일어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 두 아이가 깨우지 않고도 스스로 이렇게 일찍 일어나다니! 대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잔뜩 칭찬해 주었다. 기쁨과 자부심으로 얼굴이 환해지는 아이들의 모습은 정말이지 숨 막히게 귀여웠다.
헤실헤실 웃던 미하일이 내 치맛자락을 쥐었다.
“우리 잘해쓰면, 라리아.”
“네?”
“오늘 소풍 가자. 웅?”
미하일은 내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며 귀여운 눈을 빛냈다.
자네트 역시 폴짝폴짝 뛰며 손에 든 걸 흔들었다.
“소풍 가자! 짐두 다 싸써.”
“네? 짐이요?”
자세히 보니, 자네트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무언가를 잔뜩 담은 보자기였다.
자네트는 히죽히죽 자랑스럽게 웃더니 보자기를 내려놓고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봐아. 곰돌이랑, 메리사, 쩨리, 베개, 공!”
‘베개는 소풍이랑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
소풍 가서 낮잠이라도 자려는 걸까? 베개와 장난감으로 이루어진 자네트의 짐은 무척이나 귀여웠다. 당장이라도 아이들을 데리고 볕 좋은 곳으로 소풍을 가고 싶을 만큼.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아이린과 약속을 해 버렸는걸. 아이린 역시 오늘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을 거야.’
더군다나 이유는 더 있었다.
‘게다가…… 나는 하루라도 빨리 녹턴의 광증을 고쳐서 그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 그래서 그에게 당당해지고 싶어. 나를 믿어 준 그에게 내 정체를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
녹턴의 광증을 고쳐 줘서, 내가 그에게 지은 과오를 조금이라도 되돌리는 것. 그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
그것만이 내가 녹턴과 아이들의 당당한 ‘가족’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아이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이를 어떡하죠? 오늘 저는 너무 바빠서 공녀님, 공자님이랑 소풍을 갈 수가 없어요.”
“머어? 왜 바뿐데?”
“아이린이랑 중요한 약속이 있거든요.”
아이들의 잔뜩 들떴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 모습이 안쓰럽고 미안해서 나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대신 소풍은 내일 꼭 가도록 해요. 자, 우리 약속할까요?”
“그치마안…….”
미하일이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그치마안…… 나…… 소풍, 진짜진짜 가구시픈데에…… 라리아랑, 가치 갈 건데에…….”
자네트 역시 가만있지 않았다.
“라리아! 아이린이 우리보다 쭝요해?”
“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공녀님. 전 물론 공녀님, 공자님이 제일 중요하죠.”
나는 웃으며 아이들을 달래 주었다. 하지만 자네트는 완강했다.
“근데 왜 요즘 깨속 아이린이랑만 놀아!”
이런, 요즘 내가 아이린이랑 자주 다니기는 했나 보다.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소홀하진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일주일에 최소 5일은 아이들과 놀아 주었는데, 그걸로는 모자랐나 봐.’
“죄송해요, 공녀님. 요즘 저와 아이린에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랬어요. 이제 곧 끝나는데, 끝나고 나면 매일매일 공녀님과 공자님하고만 함께 있을게요. 어떠세요?”
“거짓말! 둘이 가치 소풍 다니는 거자나! 저번에도 둘이 동물 보러 갔다며? 다 알아!”
동물을 보러 갔다고?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나는 자네트의 말뜻을 깨달았다.
얼마 전에 나와 아이린은 블랙마켓에서 구조한 동물들을 원래 살던 곳으로 되돌려 놓았는데, 그걸 동물을 보러 놀러 간 건 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웃으며 자네트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공녀님, 그건 동물이랑 논 게 아니라, 집을 잃어버린 동물들을 원래 집으로 돌려보내 준 거예요. 마치 기사 웰링턴처럼요. 기억나시죠? 기사 웰링턴이 드래곤에게 잡혀간 백작 영식을 집으로 되돌려 보내 줬던 일…….”
하지만 아이들은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네트는 어찌나 화가 났는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마구 저었다.
“씨이, 몰라! 라리아 미워! 아이린만 조아하구! 아이린이랑만 놀구!”
“히잉, 라리아. 아이린이 더 조아? 오늘은 우리랑 소풍 가, 응?”
미하일까지 내 치맛자락에 얼굴을 마구 비비며 훌쩍이기 시작했다.
‘이를 어쩌지, 이러다 약속 시간에 늦겠어.’
잠깐 벽시계를 보니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나는 두 아이들을 번갈아 가며 안아 주며 말했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저는 세상에서 공녀님, 공자님이 제일 좋고, 그건 앞으로도 변치 않을 거예요. 언제라도 제 최우선은 공녀님과 공자님인걸요.”
“이이잉…….”
“정말 약속해요. 내일은 꼭 모두 함께 소풍을 가요. 맛있는 쿠키와 커스타드 푸딩, 애플 파이와 라즈베리 트라이플도 가져가요. 자, 뽀뽀.”
“히잉…… 뽀뽀.”
미하일은 연신 코를 훌쩍이면서도 결국 내 뺨에 뽀뽀를 해 주었다. 나는 웃으며 미하일의 뺨에도 입을 맞췄다.
“공녀님도 뽀뽀.”
자네트는 동그란 은색 뒤통수를 보이며 등을 돌리고 있었다.
“공녀님, 뽀뽀 안 해 주실 거예요?”
“씨이, 몰라!”
자네트가 씨근거리면서 발을 굴렀다.
“아이린만 조아하는 라리아랑 뽀뽀 안 해!”
‘이런…… 정말 단단히 토라졌나 봐.’
그 모습을 보니 무척 안쓰럽고 미안해졌다.
아무리 어린애라고 해도, 아이에게 스킨십을 강제할 수는 없었다. 나는 메리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손을 흔들어 주며 숙소에서 나왔다.
나와 아이린은 광장에서 만나 다시 한번 플로렌틴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처형장을 제대로 찾아냈다.
처형장이 있는 곳은 주택가의 한복판이었다. 처형장은 몇 겹의 위장 마법이 둘러져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가정집으로 보였다.
“이 건물의 진정한 모습이 보이도록 라리아의 눈에 성력으로 축복을 걸게요.”
아이린이 눈을 감고 기도하자, 갑자기 눈이 시원하고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눈을 감싸고 있던 얇은 막이 벗겨진 듯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와!”
단순히 눈이 밝아진 것뿐만 아니라, 평범한 가정집으로 보였던 곳의 진정한 모습이 보였다.
가정집 사이에 있기에는 위화감이 들 정도로 새하얗고 각진 건물이었다. 그 건축양식은 제국의 것과도, 성국이나 플로렌틴의 것과도 달랐다.
‘아주 각지고 매끈한 표면은 꼭 현대의 건축양식 같기도 하네.’
수상도시는 일반적으로 물 위에 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건물들의 층수가 낮은 편이다. 하지만 이 건물은 성력이나 마력으로 받치고 있는 것인지 주변의 그 어느 건물들보다도 높았다.
건물은 아주 삭막해 보였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입구에 경비병은 없어 보였지만 과연 허가받지 않은 우리가 당당히 들어갈 수 있을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입구로 들어가다가 들키면 곤란해지겠죠?”
“음…… 그럼 창문으로 들어가요. 절 따라오세요.”
아이린은 건물을 빙 돌아가더니 창문 앞에 섰다. 창은 물론 잠겨 있었다.
아이린은 창문에 손을 짚더니 눈을 감았다. 곧 그녀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창문의 안쪽 잠금쇠가 덜컥덜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나는 깜짝 놀랐다.
“성력으로 이런 것도 할 수 있어요?”
“네, 조금은요. 제가 풋내기이긴 하지만, 문 몰래 여는 건 잘해요. 가끔 예배 시간에 땡땡이치곤 했거든요.”
아이린이 귀엽게 혀를 빼물었다.
“어쨌든, 들어가요.”
우리는 조심조심 창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우리의 눈앞에 대리석으로 바닥을 깐 새하얀 복도가 보였다.
“음,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이 건물의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었기에 우리는 일단 보이는 길로 걸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말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님께 연구가 거의 완성 단계에 들어갔다고 보고를 드렸어. 매우 기뻐하시더군.”
“그렇담 우리의 연구 성과도 이제 곧 인정받을 수 있겠군.”
나와 아이린은 코너에 숨어 목소리의 주인들을 훔쳐보았다. 그들은 새하얀 후드 가운을 입고 있었다.
“마침 잘됐어요.”
아이린이 속삭이더니 눈을 찡긋했다. 어쩐지 그녀가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린은 순식간에 성력으로 남자들의 목뒤를 타격해서 기절시켰다.
“윽!”
우리는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쓰러지는 남자들의 가운을 벗겼다. 꽤 크긴 했지만 그런대로 입을 만했다.
우리는 남자들을 옆 방의 커튼으로 꽁꽁 묶어 놓은 뒤 청소도구함에 쑤셔 넣었다.
우리는 후드를 꼭 눌러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게 하고 건물 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사형 집행장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이상한 분위기네요.”
아이린이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래요. 이건 꼭…… 사형장이라기보다는…….”
나는 풍경을 둘러보며 말했다.
“연구소 같아요.”
아닌 게 아니라 그랬다. 새하얀 방과 새하얀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은 둘째 치고, 이 건물의 각 방에는 각종 자료와 연구 자재들이 가득했다.
사형을 집행하거나 범죄자들을 수감하는 곳과는 아주 거리가 먼 분위기였다.
“정말 이상하네요. 왜 하필 이런 곳에서 사형을 집행한 걸까요?”
아이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는 자료가 많이 보관되어 있는 자료실 같은 곳을 찾아냈다.
“이곳을 조사해 보는 것이 좋겠어요.”
나는 자료 몇 권을 꺼내 들었다. 다행히 대부분의 기록은 내가 읽을 수 있는 문자로 되어 있었다.
“으음…… 대부분 성력이나 마법에 대한 연구자료들이에요.”
한참 동안 자료를 살펴본 아이린이 말했다.
사실 그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성력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바로 성국이 해야 할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수상한 건 그다음이었다.
“그리고 초능력에 대한 연구도 많네요.”
“초능력이요?”
나는 아이린이 건네주는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여신의 힘을 빌려 쓰는 신관들의 ‘성력’이나 인간 안의 잠재능력을 끌어내 쓰는 마법사들의 ‘마력’과 달리 ‘초능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의 범위는 극히 좁다.
바로 광증을 가진 자들이었다.
‘왜 성국에서 이런 것까지 연구를 하고 있었던 거지……?’
나는 자료를 살펴보며 생각했다.
‘이곳의 연구는 일반적으로 성국에서 할 법한 성력이나 의학에 한정되어 있는 게 아니야. 마력과 초능력이라니, 그런 것들이 성국에 대체 왜 필요했을까?’
1층 자료실은 거기까지 보는 것으로 하고, 우리는 들키기 전에 빠져나왔다.
위층으로 올라가려던 우리는 건물 로비에 초상화들이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대부분 중년의 남성의 모습이었다.
‘이 건물 책임자의 초상화인가?’
낯선 얼굴들을 둘러보던 내게 아이린이 놀라서 말했다.
“이거, 역대 대신관분들의 초상화예요!”
“역대 대신관이라고요?”
“네! 틀림없어요. 약 300년 전 재위하셨던 186대 대신관 바오로 유게니우즈 2세부터 그 이후 역대 대신관 전원이에요. 세상에! 여기 현 대신관님도 계세요!”
아이린이 맨 오른쪽의 초상화를 가리켰다. 나는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틀림없이 우리가 아는 테오도어 레마르크 대신관이었다.
나는 초상화의 아래에 붙어 있는 명찰을 읽어 보았다.
「테오도어 레마르크
대신관 겸 특별신성연구소 책임자」
“특별신성연구소……?”
내가 중얼거렸다. 아마 이 건물을 부르는 명칭인 모양이었다.
“이 건물의 총책임자가 대신관님인 건 확실해진 것 같네요. 아마 300년 전부터 대신관에서 대신관에게로 물려 내려온 모양이에요.”
아이린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대신관님이 이런 곳을 관리하고 계셨다니……. 상상도 못 했어요. 지난 15년 동안 이런 곳에 대해선 단 한 번도 말씀한 적 없으셨는걸요.”
‘역시 누구나 비밀은 있는 법이지.’
녹턴에게는 진실을 보는 눈이라는 비밀이, 나에게는 빙의자라는 비밀이 있는 것처럼.
대신관에게는 이 ‘사형 집행장 겸 연구소’라는 비밀이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계단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층을 올라갈수록 방들의 풍경은 더더욱 수상해졌다.
2층에서 우리는 실험동물들을 가둔 우리와 실험동물들의 사체, 수상한 약물들을 발견했다.
3층은 실험실보다는 자료실의 비중이 더 컸다. 우리는 다시 한번 자료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특정한 가문들의 이름이 많네요. 어떤 곳일까요? 들어 본 것 같기도 한데…….”
아이린이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거, 저에게 주시겠어요?”
“네? 네.”
아이린이 엉겁결에 자료를 넘겨주었고, 나는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틀림없어! 이건……!’
나는 놀라움에 눈을 부릅떴다.
‘페트로가 말해 준 역대 광증을 가진 가문들의 이름이야!’
이 자료실의 자료는 대부분 광증을 가진 가문들에 대한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광증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강대한 힘으로 번영했으나 결국 마신을 숭배한 죄로 멸문당했던 그 가문들 말이다.
‘어째서 대신관은 그 가문들에 대해 이렇게 집요할 정도로 자료를 모아 둔 거지?’
나는 불길함에 휩싸였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료실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자료실에는 블랙웰에 대한 자료 역시 있었다. 심지어 그 정보량은 놀랄 정도였다. 그 어느 곳에도 알려져 있지 않은 블랙웰이 가진 이능이 ‘진실을 보는 눈’이라는 사실마저 적혀 있었으니까.
‘성국에서…… 블랙웰을 감시하고 있는 건가?’
자료에 따르면 성국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블랙웰에 세작을 투입했던 모양이었다.
블랙웰은 ‘진실을 보는 눈’을 가졌기에 대부분 오래가지 못하고 처단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꾸준히 감시했으니 그렇게 쌓인 정보량도 무시할 것이 못 됐다.
갑자기 오래전 들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확실히 성국의 간섭이 점점 심해지고 있단 말이야. 레마르크 2세, 그 작자가 대신관이 된 이후로는 더더욱.’
그동안 잊고 있었던 선황, 귄터 브레히트가 녹턴에게 했던 말.
‘레마르크, 그자가 대신관의 자리에 오른 뒤로는 제국에 대한 성국의 간섭이 심해졌다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더군. 블랙웰에 대한 간섭 역시 늘었지. 그자의 정확한 목표는 몰라도 무언가에 대한 야심을 가진 남자인 건 분명하다.’
녹턴이 언젠가 나에게 해 주었던 말.
등골에 소름이 쭈볏 돋았다. 얼굴과 손발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라리아? 괜찮아요?”
그런 내 낌새가 심상치 않았는지 아이린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괘…… 괜찮아요. 그냥, 여기 블랙웰에 대한 자료가 있어서 좀 놀랐거든요.”
“그렇군요. 괜찮아요, 별건 아닐 거예요. 아마…… 블랙웰이 그만큼 권세가 강하니까 외교용으로 정보를 수집한 것이 아닐까요?”
아이린이 말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게 전부가 아닐 것만 같은 아주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다른 부강한 가문들은 제외하고 광증을 보유했던 가문들의 자료만 따로 수집해 놓은 것이 이상해.’
나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광증 보유자들만 일부러 여기까지 끌고 와서 처형한 것도 이상하고……. 대신관들은 대체 뭘 연구했던 거지? 블랙웰한테 무엇을 원하는 걸까?’
하지만 혼자 고민한다고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나는 자료를 덮어 두고 말했다.
“아무래도 좀 더 서둘러서 조사해야겠어요. 위층으로 가요.”
“네? 네!”
그리고 더욱 위층으로 올라가자…… 한층 더 끔찍해진 풍경이 우리를 맞이했다.
“세상에, 이건…… 피 맞겠죠?”
실험관 안에 들어 있는 붉은 액체를 보며 아이린이 몸서리쳤다.
“이렇게 다량의 피를 어디서 구한 걸까요? 아까 본 실험 동물들에게서 뽑아낸 걸까요?”
“글쎄요…….”
그렇게 중얼거리는 내 눈에 푸르스름한 빛이 나는 동물의 장기, 신체 일부 같은 것이 보였다.
‘으윽, 정말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광경인데.’
그 옆의 실험실에는…….
덜컹, 덜컹! 쿠웅!
“캬악! 카아악!”
실험실 문을 열자마자 들리는 괴성에 우리는 화들짝 놀랐다. 옆에서 아이린이 순간적으로 성력을 사용해 우리의 앞을 막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소리 외에 우리에게 닥쳐오는 위협은 없었다. 아이린은 성력을 거두고 주변을 살폈다.
소리의 근원지는 실험실 한가운데의 유리 상자였다.
“봐요! 쥐예요.”
아이린이 놀란 듯이 말했다.
내 눈에도 보였다.
‘이것을 쥐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
유리 상자 안에는 아까 2층에서 보았던 실험 쥐 비슷한 생명체가 들어있었다.
다만 흰쥐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잘 따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데 반해 이 생명체는 끊임없이 괴성을 지르며 몸을 유리 벽에 부딪치고 있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이 쥐가 파란빛을 내뿜고 있으며 온몸이 울룩불룩 이상한 형태로 부풀어 오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위험해 보이니까 너무 다가가지 마세요.”
유리 상자는 놀라울 정도로 튼튼해 부서질 것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내 말에 아이린이 슬픈 얼굴을 했다.
“어떡해……. 괴로운 것 같아요.”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쥐의 눈은 고통으로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쥐는 괴로운 듯이 헐떡이며 유리 벽을 긁었다.
하지만 우리가 채 도와주기도 전에, 고통스러워하던 쥐는 눈앞에서 시퍼런 빛을 내뿜으며 녹아내렸다.
“이럴 수가…….”
“이 쥐에게 여신님의 가호가 있기를.”
아이린이 기도를 올렸다. 우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설마 이렇게 무시무시한 풍경이 더 있진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우리의 오산이었다.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보이는 것들이 점차 수상하고 잔혹해지자, 나는 5층으로 올라가면서 굳은 각오를 했다.
‘이제 5층에서 뭐가 나오더라도 놀라지 말아야겠어.’
하지만 그 각오는 결과적으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침내 도달한 5층에서 눈에 들어온 것은…….
연구실과 같은 방의 벽면에 그림이 포함된 서류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또 동물 사체나 장기 같은 게 나올까 봐 걱정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네.’
나랑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아이린이 다소 긴장이 풀린 얼굴로 웃었다.
“이게 다 무엇에 대한 자료일까요?”
아이린은 벽면으로 다가가 그림들을 살펴보다가…… 우뚝 멈추어 섰다.
“이건, 설마!”
“왜 그래요, 아이린?”
그 태도에 의아해진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이린의 시선은 그림 한 장에 꽂혀 있었다.
나는 그 그림을 따라 보았다가, 함께 숨을 삼킬 수밖에는 없었다.
“녹턴!”
틀림없었다. 그 작은 흑백 그림은 녹턴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노, 녹턴의 모습이 왜 여기에?”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라리아!”
아이린이 충격을 받은 내 옷깃을 잡아끌었다.
“여기 있는 자료 전부가…… 블랙웰에 대한 것이에요!”
“뭐라고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자료들을 서둘러 살펴보았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벽면 가득 다닥다닥 붙어 있던 모든 자료들은 블랙웰, 그리고 녹턴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종의 ‘집착’이나 ‘광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팔과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대체, 왜……?”
대체 왜 대신관이 블랙웰과 녹턴에 대해 이렇게까지 관심을 갖고 있는 거지?
그것이 결코 긍정적인 이유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집요하도록 수집해 놓은 자료들에서는 어떠한 악의마저 느껴져서, 본능적인 공포심과 위기감이 들었다.
이것은 동물의 사체보다도 훨씬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이유를 알아야 해. 그들이 블랙웰에 대해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그렇게 생각한 나는 그 연구실에 있는 모든 자료들을 세세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었다.
성국의 역대 대신관들은 수백 년 전부터 마신의 힘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에일리아 여신과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인 마신을 숭배하거나 소환하거나 연구하는 것은 성국에서 엄히 금지되어 있던 일이다. 그런 성국에서 마신의 힘을 얻기 위해 연구를 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물건에 담아서 마도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마법사들의 마력과 달리, 마신의 강대한 힘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매개체가 필요했다. 바로 인간의 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신관들은 인간에게 마신의 힘을 부여하는 실험을 수백 년간 반복해 왔다.
“세상에!”
아이린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손을 벌벌 떨었다.
“이건…… 신성 모독이에요! 마신의 삿된 힘을 여신님의 완벽한 피조물인 인간의 몸에 깃들게 하다니요. 믿을 수가 없어요. 성국에서 이렇게까지 모독적인 행위를 해 오다니. 그것도 수백 년씩이나…….”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고 자료들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마신의 힘은 다양한 종류의 이능으로 나타났다. 자연을 부리거나, 허공에 떠오르거나, 타인의 속내를 읽는 등.
하지만 마신의 힘을 인간의 몸에 부여하자 뜻밖의 부작용이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마신의 힘을 인간의 정신이 감당하지 못해 나타나는 광증이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마신의 힘을 부여받은 직후 견디지 못하고 몸과 정신이 무너져 사망했다. 그러나 드물게 살아남은 초인적으로 강인한 몸과 정신을 가진 인간들이 존재했으며, 성국에서는 그런 인간들을 대상으로 관찰 연구를 시작했다.
여러 대에 걸친 관찰 연구의 결과, 성국에서는 마신의 힘에 대가 이어질수록 강해지는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성국에서는 연구 대상 가문의 힘이 충분한 수준이 되면 가문에 누명을 씌워 멸문시키고 능력의 소유자에게서 마신의 힘을 추출해 내는 실험을 반복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수백 년, 수십 대에 걸친 성국의 광기에 나는 할 말을 잃을 수밖에는 없었다.
‘가문들의 혐의가 누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악행을 성국에서 직접 일삼고 있었을 줄이야……!’
나는 그나마 성국을 의심하고 있기라도 했지, 그러지 않은 아이린은 나보다도 훨씬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마……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요. 대신관님께서…… 설마 이런 일들을 하실 줄이야. 전부 거짓말 아닐까요? 우리를 속이려는 장난이지 않을까요?”
“아이린, 그렇다면 아래층에서 본 실험동물들이 겪는 괴로움 역시 장난인가요? 이런 끔찍한 장난을 이렇게 커다란 규모로 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정신 차리세요.”
내 말에 아이린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몹시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블랙웰 역시 성국의 연구 대상이었겠구나. 이곳에 블랙웰에 대한 자료가 이렇게 많은 것 역시 그 때문이고.’
불길함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이 사람들은…… 대체 블랙웰을 어찌할 셈인 거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자료들을 더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료들에 따르면 그 사실은 이러했다. 블랙웰은 이제껏 그 어떤 연구 대상보다도 강력한 마신의 힘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었다. 성국은 이 블랙웰이 가진 마신의 힘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일 년 뒤, 누명을 씌워 멸문시킬 예정이라고 한다.
‘일 년 뒤라고! 일 년 뒤라면, 설마…….’
나는 깨달았다. 일 년 뒤 그때는, 내가 썼던 원작으로 치면 녹턴이 악녀 라리아를 살해하고 아이린을 납치 감금하는 클라이맥스 부분 직후였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내가 쓰지 않은 뒷 내용에서 녹턴이 누명을 써 처형당할 운명이었다니!’
내가 빙의되어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오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를 도우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일 년 뒤 그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피가 싸늘하게 식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두면 일 년 뒤, 블랙웰은 누명을 써 멸문당하고 그는 처형당하고 말 거야. 내가 어떻게든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결국 이곳까지 오셨군요, 셔우드 영애. 그리고 성녀님.”
낯익은 목소리에 나와 아이린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인기척도 없이 그가 그곳에 있었다.
“대신관님……!”
아이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불렀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바로 대신관, 레마르크 2세였다. 근엄한 인상을 가진 익숙한 적갈색 머리카락의 그가 우리를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본 아이린이 배신감이 역력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대신관님! 저는 이곳에서 끔찍한 악행의 증거들을 보았어요. 마신의 힘을 연구하고, 인간 세상에 끌어들이고, 인간의 육체에 부여하고 누명을 씌워 살해하는 끔찍한 일들이요. 이게 정말 대신관님, 당신이 꾸민 일인가요?”
하지만 대신관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기색이 없었다. 그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대신관’이라는 직분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과업이지요.”
“말도 안 돼……! 전 조금도 알지 못했어요!”
“그야 그렇겠지요. 성녀란 군림하나 통치하지는 않는 명예직에 가까운 것. 우리 모두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 할 성녀님께서 이런 악에 직접 손을 물들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 그런…… 어떻게 그럴 수가!”
아이린은 말문이 막힌 듯 부르르 떨더니 그를 눈물 맺힌 눈으로 노려보았다.
아이린의 말이 끝나길 기다리던 내가 물었다.
“저희가 대신관님의 뒤를 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물론입니다.”
“언제부터요?”
“성녀님께서 정보망을 열람하실 때부터 그랬지요.”
생각보다 굉장히 오래전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저는 영애님께서 이곳까지 오시도록 덫을 놓은 겁니다. 적을 사로잡을 때에 가장 좋은 전략은 적을 자신의 진 가장 깊은 곳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우리가 이곳까지 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구나. 어쩐지, 연구소를 탐색하는 데 이상할 정도로 장해가 없다고 느끼긴 했지만……. 그것도 전부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계략이었다니!’
또한 대신관의 말은 합리적이었다. 나와 아이린이 적진, 그의 연구소 한복판에 있는 지금 우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그때 아이린이 다가와 속삭였다.
“시간을 끌어 봐요. 조금만 버티면 대공님께서 오실 거예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리 녹턴이 우리의 안전을 걱정한다 해도,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는 한 그는 우리를 찾아올 수 없을 것이었다.
지난번 블랙마켓 사건 때 우리를 구해 주러 왔던 것도 아돌프가 그에게 연락을 취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 않던가.
그런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불구하고 아이린의 눈빛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절 믿어요. 함께 조금만 시간을 끌어 봐요!”
‘뭔가 방법이 있나 보구나.’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나는 다급한 눈초리로 주변을 살폈다.
우리의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곤 자료가 가득한 책장과 연구 장비가 가득 놓여 있는 책상, 그리고 몇 개의 거대한 시험관뿐이었다.
거의 사람만 한 크기의 시험관 안에는 붉고, 푸르고, 검은 기운이 소용돌이치고 있어 불길함을 자아냈다.
‘무기가 될 만한 건 없어.’
사실 무기가 있다고 해도, 이 연구실의 모든 인원이 대신관의 수하이니 우리 둘이서 그 모든 인원을 감당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럼 결국 말로 설득하는 방법뿐인가?’
흔히 소설이나 영화 같은 것을 보면 악역들은 꼭 자신이 악행을 한 방법과 이유를 길게 설명하다가 주인공에게 발목을 잡히고는 한다.
항상 현실감이 없다고 느낀 장면이긴 했지만, 여기는 소설 속이니 어쩌면 대신관 역시 똑같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내가 말했다.
“종교인이 되어서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었던 거죠? 여신님의 앞에 부끄럽지도 않으신가요?”
내 말에 대신관히 허, 하고 혀를 찼다.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여신? 신이 산 자를 구원하지 못하는데 어째서 산 자가 신께 복종해야 한단 말입니까.”
“대, 대신관님!”
아이린이 충격받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떻게 대신관님께서 그렇게 불경한 말씀을 하실 수 있으신가요!”
나 역시 충격을 받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대신관이라 하면 성국에서도 굉장히 높은 위치인데, 어떻게 저런 생각을 가지고 그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거지?’
하지만 대신관의 얼굴에서 죄책감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와 같은 온화한 얼굴로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성녀님, 성녀님께서는 모르시겠지요. 갓난아기 때부터 성보에 감싸여 모두의 축복과 보호 아래에 그저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나신 분이 바로 성녀님 아니십니까. 성녀님께서 기아와 병마에 대해 무얼 아시겠습니까? 부조리와 부당함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셨겠습니까?”
“다, 당연히 알고 있어요! 저도…… 저도, 당연히 배웠다고요. 그런 것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성녀의 본분이니까요!”
그러나, 그녀의 대답이 충분치 않았는지 대신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성녀님께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십니다. 아무도 축하해 주지 않는 환경에 태어나 빈곤 속에서 자라나는 삶을 직접 겪는 것은 책에서 읽는 것과는 억만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아주 잠깐 생각에 빠진 듯한 눈이 되었던 대신관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평소와 같은 영민함이 빛나는 눈으로 돌아왔다.
“이제 와서 제 인생에 대해 넋두리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를 구해 주지 않았던 신에게 저는 어느 정도의 진심 어린 경배를 바쳐야 할까요? 오늘날 절 구원한 것은 오직 저뿐이었는데 말입니다.”
거기까지 들은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끼어들었다.
“궤변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틀렸어요! 부당하고 탄압받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시면서, 그런 삶을 구원해 주지 않았던 신을 원망하면서, 결국 대신관님은 다른 사람들을 부당하게 탄압하고 계시잖아요!”
“영애는 참으로 어리군요. 나도 잘 살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다 잘 사는 세상? 그런 건 불가능합니다. 이제껏 단 한 순간도 그런 치기 어린 우스갯소리가 가능하다곤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대신관이 코웃음을 쳤다.
“저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저뿐인데, 지금보다 ‘더욱더 구원받고 싶다’는 마음에 어떤 문제가 있단 말입니까?”
“구원이 아니라 욕심이겠죠! 다른 사람들을 탄압하고 쥐어짜서 얻는 부강함을 원하시는 거잖아요!”
대신관은 내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우리를 돌아보았다.
“어쨌든, 두 분께서 시간을 끌고 계시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저도 쓸데없이 말을 많이 했으니 어느 정도는 두 분의 의도대로 된 듯하군요.”
‘이런, 알아차렸나?’
나는 가슴 속이 뜨끔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표정을 보니 아마 아이린 역시 그러한 것 같았다.
그런 우리의 심정을 알았을까 몰랐을까, 대신관은 무감정한 얼굴로 한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흰옷을 입은 경비원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닙니다. 두 분은 앞으로 영원히 빛을 볼 수 없을 겁니다.”
“대, 대신관님!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가!”
아이린이 분노와 배신감이 담긴 얼굴로 항변했지만, 대신관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안타깝게 됐습니다, 성녀님. 저 역시 성녀님께 어느 정도 정이 붙은 것은 사실이지만 제겐 정보다 구원이 더 중하니 이를 어쩌겠습니까? 성녀님의 존재를 아직 세간에 공표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로군요.”
대신관의 손짓했다.
“자, 붙잡아라.”
그의 명에 따라 경비원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저, 저리 가요! 저와 라리아를 건드리지 말아요! 저, 저는 성녀예요. 당신들은 이 일 전부가 신성모독 행위라는 것을 모르시는 건가요!”
“소용없습니다, 성녀님. 이들은 제 말 밖에는 듣지 않으니까요.”
“저리 가요! 다가오지 말아요! 경, 경고했어요! 물러서세요!”
아이린은 필사적으로 성력을 발해서 경비원들을 물리치기 시작했지만, 상대가 너무 많았다. 아이린의 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라리아!”
내 귓가에 너무나 친숙한…… 그리고 이곳에서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가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당연히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고, 공녀님……? 공자님?”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자네트와 미하일이 눈앞에 있었다!
“라리아아!”
싱글벙글 신이 난 얼굴의 자네트와 미하일이 경비원들의 틈 사이를 요리조리 달려와서 나에게 매달렸다.
“소풍 가치 가자!”
“가치 놀자아!”
두 아이는 잔뜩 신이 나서 치마폭에 매달리다가 뒤늦게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아이들은 조금 주눅 든 얼굴로 물었다.
“라리아, 저 사람들 모야?”
“무서워…….”
나는 이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이 아이들이 여기에?’
“고, 공녀님, 공자님. 여길 대체 어떻게?”
갑작스런 아이들의 난입에 당황했는지 경비대도 발을 멈춰서서 당혹해했다.
그리고 당황한 건 대신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라고? 공녀, 공자? 설마…… 블랙웰 대공의 아이들이란 말인가?”
나는 얼른 아이들을 경비원들에게서 보호하는 자세로 감싸 안았다. 내가 물었다.
“공녀님, 공자님!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분명 메리에게 공녀님 공자님을 부탁했었는데…….”
“낮잠 자는 척 해써.”
나는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잘 때는 언제나 침실에서 둘이서만 자게 하니까, 자는 척하고 몰래 문을 열고 나왔구나!’
“그럼 숙소에서 여기까진 어떻게 오신 거예요? 여긴 플로렌틴인데…….”
“마차 타구.”
“어떻게요? 마부가 공녀님, 공자님만 있으면 태워 주지 않았을 텐데…….”
“바부, 그거 말구.”
“라리아가 탄 마차 이짜나. 마차 짐칸.”
나는 다시 한번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나랑 아이린이 탄 마차의 짐칸에 타고 온 거야?’
순간 머릿속에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그림이 그려졌다.
나와 아이린이 단둘이서 소풍을 간다고 생각한 아이들. 나와 아이린이 함께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낮잠을 자는 척 메리를 따돌린다.
두 아이는 몸이 작은 이점을 이용해 몰래 나와 아이린의 뒤를 쫓다가, 마차의 짐칸에 몰래 탄다. 별다른 짐이 없었던 나와 아이린은 그런 줄도 모르고 아이들을 데리고 플로렌틴까지 간다.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고작 5살밖에 되지 않은 두 아이가 이렇게까지 용의주도할 줄이야.
하지만 지금은 아이들의 용의주도함에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을 품에 끌어안고 경비병과 대신관을 돌아보았다.
“저는 어떻게 하시는 한이 있더라도 이 아이들은 건드리지 마세요. 아무런 잘못도 없고 너무 어리잖아요. 게다가, 이 아이들은 블랙웰 대공의 자식이니 아이들을 해치면 대공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나는 단단한 의지를 담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실 나는 확신이 없었다.
이런 말을 과연 대신관이 두려워할까? 블랙웰 대공가를 통째로 멸문시키려고 하는 대신관이?
아이들과, 녹턴과, 블랙웰 전체를 둘러싼 대신관의 음모를 생각하면 피가 끓고 몸이 떨렸다.
나는 아직 진짜 블랙웰은 아니지만 진실된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대신관은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원수나 다름없으리라.
진심 어린 분노가 담긴 눈으로 노려보자, 대신관은 조금 주춤한 것 같았다.
“확실히 그 아이들은 지난번에 보았던 대공의 자식들이군요. 상황이 다소 복잡해지겠는데, 이를 어쩐다…….”
그는 아직 완전한 블랙웰이 아닌 나를 해치는 것보다는 블랙웰의 자식들을 해치는 것을 좀 더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신관과 경비병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내 품속에서 자네트와 미하일이 눈치를 살폈다.
“라리아, 왜 그래?”
“라리아, 저 사람들 모야?”
이제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것일까. 아이들의 표정이 불안해졌다.
하지만 내가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가까스로 웃어주는 것뿐이었다.
소리 없는 접전 끝에, 경비병 한 명이 이쪽을 향해 발걸음을 디뎠다.
“다가오지 말아요.”
나는 아이들을 감싼 채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아이린이 방패처럼 성력으로 우리의 앞을 막아 주려 애썼지만 상대가 물량공세를 펼친다면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마침내 대신관이 입을 열었다.
“본디 블랙웰의 멸문은 일 년 뒤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오늘로 앞당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대신관!”
나는 분노에 차 소리쳤다.
“어떻게 그럴 수가! 당신이 그러고도 인간인가요?”
“우리들의 교리에 따르면 속은 악마일지언정 회개의 기도를 올리면 천국에 갈 수 있답니다. 그러니까, 물론이죠. 저는 인간입니다.”
대신관이 비웃듯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기는 하지만…… 아마 지금쯤이면 충분히 블랙웰을 집어삼키고도 남을 겁니다. 당신 약혼자의 사지를 자르고 능력만을 추출해 내어 유용하게 써 드리도록 하죠. 아이들은 후환을 대비해 여신님의 곁에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유감이군요.”
“그런……! 당신!”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소리칠 수가 없었다.
“전부 잡아라! 생포하지 않아도 좋다!”
대신관이 명령했고, 경비병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꺄악! 저, 저리 가요!”
기겁한 아이린이 마구 성력을 쏘아 냈다. 열몇 명의 경비병들이 우르르 튕겨져 나갔지만 상대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라리아!”
“라리아, 나 무서워!”
심상치 않은 분위기와 경비병들의 살기를 느낀 아이들이 기겁하며 품 안에 파고들었다. 나는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아이들을 지킬 방법이 정말 없을까? 정말로?’
하지만 머릿속은 온통 새하얄 뿐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아이들을 꽉 끌어안은 채 경비병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리고 최대한 그들로부터 멀어지려고 노력했다.
‘생각해, 라리아. 생각해……. 넌 아주 많은 일들을 겪어 왔잖아. 제발, 뭐라도 좋으니까. 생각해…….’
쨍그랑!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경비병들의 공격에 아이린의 성력 방어막이 깨져나가는 소리였다.
고개를 드니 경비병들이 마구 두들기고 무기를 던지면서 아이린의 성력 방어막을 부수는 것이 보였다. 아이린은 성력 방어막이 타격을 받을 때마다 고통을 느끼면서도 최대한 그들을 막아보려 애쓰고 있었다.
“조심해, 이 멍청이들아! 여기가 어딘 줄은 아는 거냐! 여긴 제일 중요한 초능력 연구실이란 말이다!”
대신관이 경비병들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것이 들렸다.
“절대 실험도구들을 건드리면 안 돼! 특히 저 시험관은 절대로…….”
시험관? 나는 문득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거대한 시험관이 놓여 있었다. 말이 시험관이지 거의 사람 한 명쯤은 들어갈 수 있을 법해 일종의 관처럼 보이기도 했다.
시험관들의 안쪽에는 붉고, 파랗고, 검은 기운들이 마구 소용돌이치며 용솟음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도 굉장히 불길하고 강력한 힘의 파장이 느껴졌다.
그 순간이었다.
와장창창! 귀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마침내 아이린의 보호막이 무너졌다.
“으윽!”
그와 동시에 아이린이 쓰러졌고, 경비병들이 흥분에 차 들이닥쳤다.
그리고…….
깨창창! 유리 같은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까의 그 시험관에 창이 박혀 있었다. 아마 아이린의 보호막을 부수려고 던졌다가 타이밍이 어긋나 날아온 모양이었다.
쩌적, 쩍……. 시험관의 두꺼운 유리 벽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리면서 커다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연기 같은 붉고 푸르고 검은 기운이 그 틈에서 새어 나왔다.
“저런, 저, 저! 이, 이런 멍청한 것들……!”
대신관이 기겁했다.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 건지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시험관이 깨져서 기운이 새어 나오는 걸 눈치챈 나는 황급히 몸을 낮췄다.
“이얍!”
검을 든 경비병이 내게 달려들다가 그 기운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그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기운과 닿은 경비병의 몸이 푸른빛을 띠다가 괴이한 형태로 일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크, 크아아아악! 끄아아아!”
경비병은 검을 떨어뜨리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마치 살갗 아래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일그러지는 그의 모습은 굉장히 끔찍했기에 나는 아이들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펑! 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경비병은 문자 그대로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뭐,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를 붙잡으려다가 동료의 피를 흠뻑 뒤집어쓴 경비병들이 발을 멈췄다.
경비병들이 공포와 당황으로 술렁일 때 대신관이 소리쳤다.
“이 얼간이들아! 지금껏 모아 놓은 능력들이 유출됐지 않느냐! 너희 같은 평범한 인간은 마신의 힘을 감당할 수 없단 말이다!”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이게 전부…… 마신의 힘? 그러니까, 지난 수백 년 동안 추출해 낸 초능력이란 말이지?’
대단히 위험한 것으로 보이긴 했지만 그 이상이었다. 아마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그런 것을 견뎌낼 수는 없을 것이다.
“으으…….”
“나, 난 죽기 싫어…….”
대신관의 말에 경비병들이 겁을 먹고 주춤거리며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대신관은 그게 답답한 모양이었다.
“잡아! 잡으라고! 이게 모두 여신을 위한 일이다! 여신을 위해 몸 바치다 죽으면 천국에 간다. 그러니 저것들을 잡아!”
“처, 천국에 간다고 해도 지금 죽는 건 좀…….”
“집에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데…….”
그의 고성을 들으면서도 경비병들은 여전히 섣불리 우리를 잡으러 오지 못했다. 시험관에서 새어 나온 기운은 느리게 퍼져 나가며 연구실 안을 잠식하고 있었다.
‘저 기운이 우리에게 닿으면, 우리 역시 위험하겠지.’
나는 최대한 몸을 낮추고 있었지만 저 기운이 언제 내게 닿아 올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아이들을 최대한 몸으로 보호하려 애썼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어?”
기운이 마치 빨려 들어가듯 자네트와 미하일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마치 자석이 철을 끌어당기듯 아이들이 기운을 끌어들이는 것 같았다.
“라리아……!”
겁먹은 미하일이 소리쳤다. 나 역시 공포에 질린 건 마찬가지였다.
“안 돼!”
이 아이들이 아까의 그 경비병처럼 된다면……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공포가 나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채 내가 어떻게 하기도 전에 아이들의 몸은 기운을 빠르게 흡수했다. 순식간에, 수백 년분의 마신의 힘이 아이들에게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빛이 번쩍였다.
자네트에게서는 검붉은색이, 미하일에게서는 검푸른색이. 빛이 그렇게나 검고 어둡고 깊을 수 있다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부셔서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다는 것도 나는 난생처음으로 알았다.
“자네트! 미하일!”
나는 아이들을 꽉 붙잡았다. 그러나 정말 놀랍게도, 아이들은 몇 초 만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라리아…….”
자네트가 놀라고 당황한 얼굴로 날 올려다보았다. 나는 평정심을 잃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괘, 괜찮아요? 어디 아프진 않아요?”
“우웅…… 괜찮은데. 나 안 아파.”
미하일이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나는 울먹이며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아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로…….”
나는 몇 번이고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작 아이들은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는 듯 멀뚱거리고 있었다.
자네트가 내 옷소매를 잡았다.
“근데 라리아, 나 아프진 않은데…….”
“않은데?”
“뱃속이 뜨거워.”
“네?”
그 말을 하곤 자네트가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에, 에…… 에취!”
나는 다시 한번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자네트의 입에서 검붉은 불꽃이 튀었던 것이다.
당연히 나는 엄청나게 놀랐다.
“공녀님!”
그리고 자네트는 어리둥절했다.
“응? 왜애?”
“방금…… 불…… 공녀님 입에서…….”
놀라 더듬더듬 말하던 내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수백 년간 모인 모든 초능력들이 자네트와 미하일에게 흡수된 건가?’
가능성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자네트와 미하일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초능력을 가진 가문의 후계자다.
보통 사람이라면 마신의 방대한 힘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 버리겠지만, 블랙웰의 그릇은 마신의 힘을 담기에 충분했다.
지난 수백 년간 마신의 힘에 익숙해지도록 적응한 몸이니까. 대신관 역시 ‘세대가 지날수록 힘이 강해진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면 자네트와 미하일이 초능력을 가지게 된 거야? 말도 안 돼!’
나는 입을 떡 벌리고 아이들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아이들은 여전히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멀뚱거리고 있었다.
한편 나와 같은 생각을 대신관 역시 한 것 같았다.
“이…… 이런! 지난 수백 년간 모으고 정제해 온 마신의 힘이……!”
그는 분노와 경악으로 창백해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이렇게 된 거, 그 꼬맹이들에게서 마신의 힘을 추출해 되찾아야겠다! 가라! 여자는 죽이고, 어린애들은 사로잡아와!”
허공에 떠돌던 마신의 힘을 두려워하며 주춤거리던 경비병들이 정신을 차렸다.
이제 몸에 닿기만 해도 사망에 이르는 위험 물질은 사라졌다. 예상 밖의 일이 생기긴 했지만, 그들의 앞에 있는 건 여자 한 명과 아이 둘뿐이었다.
“잡아라!”
경비병들이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였다.
퍼엉! 검붉은 불꽃이 우리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경비병을 뒤덮었다.
“크아아악!”
경비병은 전신에 불이 붙은 채로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굴렀다. 하지만 불은 꺼지지 않고, 그의 육신을 더더욱 살라먹을 뿐이었다.
“라리아한테…… 손대지 마!”
자네트였다. 자네트는 작은 눈썹에 힘을 준 채 경비병들을 노려보았다.
“공녀님!”
내가 자네트를 불렀다. 자네트는 그 작은 팔로 내 등을 단단히 끌어안은 채 상대들을 둘러보았다. 그 모습은 꼭, 나를 지켜 주려고 하는 것처럼 보여서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또.
“으아악!”
콰앙! 쿠당탕탕. 한 경비병이 갑자기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큰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쳤다. 투구가 찌그러질 정도로 심하게 부딪친 경비병은 정신을 잃은 듯이 축 늘어졌다.
“라리아, 봐써? 내가 한 거 봐써?”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위아래로 움직이던 미하일이 웃었다.
“나 잘해써?”
미하일이 커다란 눈을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그 모습은 몹시 귀엽지만 소악마처럼 개구져 보이기도 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꼭 내가 아는 아이들이 아닌 것 같아.’
하지만 나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가 아는 아이들이 아닌 것 같다니, 당연히 내가 아는 자네트와 미하일이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초능력이 생기든, 어떻게 되든 이 아이들은 사랑하는 내 아이들이었다.
자네트와 미하일이 어떤 사람이 되더라도 나는 이 아이들을 힘껏 사랑하고 힘껏 응원하기로 마음먹지 않았던가.
나는 웃었다. 자네트와 미하일을 꼭 안아 주면서 속삭였다.
“정말 잘했어요. 우리 공녀님, 공자님 대단하신데요?”
“진짜? 에헤헤.”
“히히히.”
대신관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이 들렸다.
“그까짓 걸로 겁내지 마! 그래 봤자 애송이들이야! 덤벼들어! 밀어붙여!”
“으…… 으아아아아!”
“이야아아압!”
정신을 차린 경비병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자네트와 미하일은 내게 안긴 채 그들을 쏘아보았다.
휙, 하고 자네트의 작은 손가락이 가로로 선을 긋자…….
파지지직! 그 끝에서 검은 스파크가 튀더니 두 명의 경비병을 강타했다. 경비병들은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미하일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자…….
“으, 으아아악! 괴물! 괴물이야! 죽어라, 이 괴물!”
“뭐야! 이 자식, 정신 차려!”
“커헉!”
갑자기 혼동을 일으킨 경비병이 다른 경비병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의 필사적인 공격에 당한 두어 명의 경비병들이 뒤엉켜 쓰러졌다.
상대는 물밀고 들어오듯 수가 많았기에, 두 아이들은 정신없이 손을 휘둘렀다.
아이들이 손가락을 까딱일 때마다 경비병들의 발이 검은 얼음으로 뒤덮이고, 눈이 보이지 않는다며 실험기구에 걸려 고꾸라지고,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검은 박쥐 떼에 물어뜯기고, 강한 중력에 바닥에 눌어붙어 찌부러졌다.
“덤벼! 잡아! 잡으라고!!”
경비병들은 공포에 질렸고, 대신관은 고함치며 그들을 계속해서 사지로 떠밀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숫자라고 해도 끝은 있었다. 대신관은 결국 자신의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 이런……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대신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의식이 있는 경비병이라고는 자신이 딱따구리라고 착각하고 벽에 머리를 계속에서 박아 대는 사람밖에는 없었다.
나는 방어막이 깨질 때 기절한 아이린을 추스른 뒤, 아이들을 안은 채 대신관에게 다가갔다.
“이게 당신의 사악하고 반인륜적인 실험의 결과군요. 만족하시나요?”
나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다가가는 나의 발소리. 아이들의 키득거리는 장난스런 웃음소리. 대신관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내, 내, 내, 내가 어떻게. 고, 고, 고작 대여섯 살짜리 꼬맹이들에게……!”
대신관은 순식간에 20년은 늙어 보이게 되었다.
“꼬맹이들뿐만이 아니지.”
그때였다. 어두운 통로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업보다, 대신관. 너희들의 탐욕에 희생당한 수백 명의 목숨값이다.”
“이, 이 목소리는!”
대신관은 떨려서 힘도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엉금엉금 기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그가 있었다.
마치 검은 벽처럼 느껴지는 남자.
전 일생 동안 그들의 이기적인 실험에 고통받아야만 했던 남자, 녹턴 블랙웰.
얼음장처럼 싸늘한 보라색 눈동자가 주저앉은 대신관을 내려다보았다. 대신관은 그 눈빛에 닿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을 듯이 몸을 떨었다.
녹턴은 허리춤의 검을 천천히 빼 들며 말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려 주지, 대신관. 너희의 힘이면 블랙웰을 멸문시킬 수 있을 거라고 했던가? 아니, 이번 일이 아니었더라도 너희는 우리를 없앨 수 없었을 것이다. 일 년 더 준비해서 예정대로 됐더라도, 아니 십 년 백 년을 더 준비해도 그랬을 것이다.”
“히이익…… 흐으윽! 다, 다가오지 마!”
대신관이 필사적으로 뒤로 기어갔다. 하지만 그래봤자 녹턴의 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너희가 풀어 준 동안 블랙웰은 성장했다. 지금은 제국 황실 정도는 거뜬히 주무를 수 있을 정도로 자라났지. 그런 우리를 고작 부패한 성국 따위가 어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녹턴은 낮고 냉혹한 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희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간섭하고 세작을 심으며 재갈을 물리려 했지. 우리가 그것을 지금까지 용납했던 것은 너희를 막을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대신관. 그저 너희가 어디까지 하는지 보고자 했던 것뿐.”
그가 검을 들어 올렸다. 나는 아이들의 눈을 가렸다.
“우리 블랙웰을 제어하고 목에 목줄을 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우습지도 않군.”
“히익…… 히이이익!”
녹턴은 몇 걸음 걸어갔다.
마침내 웃음기 없던 그의 얼굴에 웃음이 나타났다. 대신관에게는 한없이 냉랭하고 두렵게만 느껴질, 비틀린 미소.
그는 비웃고 있는 것이다.
연금술사가 창조해 낸 플라스크 속 호문쿨루스는 마침내 창조자보다도 거대하게 자라났다. 플라스크에 들어갈 정도로 작았던 존재는 어버이를 비웃으며 그의 목을 조른다.
녹턴의 검이 허공에 높이 올라갔다. 그가 말했다.
“이것이 너희의 교만함의 값이다, 대신관. 회개의 기회가 없으니 넌 지옥에 떨어지겠군.”
깊은 절망에 빠져 부들부들 떨던 대신관이 절규했다.
“우리가 호랑이를 키웠구나! 블랙웰, 블랙웰 때문에……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실험이 이렇게 실패하고 말다니!”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인간의 살과 근육이 잘리는 끔찍한 소리. 그리고 묵직한 것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생각했다.
‘끝났다.’
이젠 정말로 끝난 것이다. 블랙웰을 둘러싼, 내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위협하던 음모가.
그때 저벅저벅 낮게 울리는 발소리가 다가오더니, 단단하고 따뜻한 체온이 내 온몸을 감쌌다.
그것이 누구인지는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를 안심시키는 남자의 향이 훅하고 비강을 채웠다.
“아부지!”
아이들 역시 그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내가 눈을 가려 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그에게 매달렸다.
그 발랄한 웃음소리에 녹턴마저 피식 웃어 버렸다. 나도 공연히 웃음이 나왔다.
“수고가 많았군. 모두.”
나직한 목소리가 나를 감쌌다. 커다란 손이 내 등을 쓸어내렸다.
“녹턴…….”
나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뒤늦게 들이닥친 블랙웰 기사단이 시체를 수습하고 쓰러진 아이린을 의사에게 데려갔다.
나는 자네트와 미하일의 건강도 걱정되었기 때문에 아이들 역시 진단을 맡겼다.
다행히 셋 모두 건강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아이린은 많이 지쳐 있지만 휴식을 충분히 취하면 회복될 것이라고 했고, 아이들은 놀랄 정도로 건강했다.
“대를 이어 갈수록 마신의 힘에 적응하여 그 힘을 담는 데 걸맞은 몸이 된다는 당신의 추측이 맞는 것 같군.”
연구소 내의 자료들을 살펴본 녹턴이 말했다.
“만일 그릇이 부족했다면 그 녀석들 역시 목숨이 위험했겠지만, 자네트와 미하일은 수백 년간 모인 방대한 힘을 담기에 충분한 그릇이었던 것 같군. 뭐, 내 자식들이니 어련하겠어.”
‘친자식도 아니면서.’
묘하게 자부심이 느껴지는 그의 말투에 나는 웃음을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녹턴과 블랙웰 기사단은 연구소를 샅샅이 조사해 대신관의, 더 나아가서 성국의 악행에 대한 증거를 수집했다.
연구소에는 지난 수백 년간 성국이 저질렀던 마신의 힘에 대한 연구와 인체실험에 대한 증거뿐만 아니라, 해당 악행을 함구하기 위한 또 다른 악행과 비리의 증거들까지 산재해 있었다.
녹턴은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한 뒤, 대응의 준비를 했다.
블랙웰 외에도 성국의 온갖 악행들에 피해를 본 가문들과 동맹을 형성하고, 하인리히가 이끄는 제국 황실에도 협약을 받았다.
제국으로 돌아온 뒤 블랙웰 기사단을 비롯, 대공가 내의 병력을 재정비한 뒤 마침내 녹턴은 성국의 악행을 널리 공표했다.
“블랙웰을 둘러싼 성국의 음모와 악행을 우리들은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지금 이 시일을 기하여 블랙웰은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무력으로 대항할 것을 알린다.”
선전포고였다.
블랙웰과 성국 사이의 전쟁을 선언한 것이었다.
이 일이 얼마나 빨리 진행되었는지, 대신관이 사망한 뒤로부터 선전포고까지는 고작 한 달 반 정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한편 성국은 대신관이라는 지휘관을 잃었으며 온 대륙에서 존경받던 명예는 땅에 떨어졌다.
더군다나 성국의 적은 블랙웰뿐만이 아니었다. 제국을 위시한 블랙웰의 동맹군들까지 한꺼번에 상대해야 할 판이었다.
지휘관과 대륙의 신임을 잃은 성국으로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 게임이었다.
“성국은 레마르크 2세를 비롯한 전 대신관들의 천인공노할 비행을 전면적으로 인정하며, 그 희생자가 된 블랙웰을 비롯한 17개 가문에 사죄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성국은 블랙웰에 대한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결국 블랙웰의 병사들이 채 성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성국은 항복하는 것을 선택했다.
녹턴은 전 대신관 외에도 이번 일의 책임자들을 엄히 추려 내어 전원 처형했다.
모든 일이 일단락된 뒤, 아이린이 새로운 대신관으로 선임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듣기로는 성국 역사상 첫 여성 대신관으로 큰 화제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