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20)

(18)

* * *

다음 날 나는 아이린을 만나러 갔다.

아이린의 데이터베이스는 거리별로 열람할 수 있는 분량에 차이가 있었다. 즉 제국에서 열 수 있는 것보다 성국에서 열어 볼 수 있는 것이 더 많았다.

‘어쩌면 성국에서만 볼 수 있는 데이터 중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아이린에게 다시 한번 광증에 대한 데이터를 찾아 줄 것을 부탁했다.

아이린은 제국에서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던 과정을 통해 데이터를 열람했다.

신비스러운 하얀 빛이 잦아들었고, 그녀는 땀에 흠뻑 젖은 채 눈을 떴다.

“광증을 가진 가문들에 대한 재판 기록을 찾았어요.”

그녀가 찾아준 재판 기록에 의하면, 광증을 가진 가문들의 멸문 선고를 내린 자는 언제나 대신관의 자리에 있는 자였다.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모든 광증 소유자들은 꼭 성국까지 끌려와서 처형당했다는 것 같아요.”

가문의 구성원들은 전원 그 자리에서 처단했지만, 단 한 사람, 광증의 보유자만은 반드시 성국까지 끌고 와서 처형했다는 것이다.

‘왜 굳이 그렇게 복잡한 방법을 취한 거지?’

대륙 각지에서 죄인을 성국으로 이송하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자원과 인력이 필요하다. 더군다나 성국은 인구가 적으므로 본보기를 보여 주기 위해 공개 처형을 하려고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가문의 구성원들의 처형은 언제나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광증 보유자의 처형만은 성국에서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요.”

아이린의 설명을 듣자마자 나는 불길함이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혹시 처형이 이루어진 장소도 알 수 있을까요?”

어려운 요청일 텐데도 불구하고 아이린은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재판 기록을 좀 더 세세하게 뒤져 본 뒤 그녀가 말했다.

“으음…… 처형 장소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암호로 기록되어 있네요. 이상하네요. 왜 암호로 적어 둔 걸까?”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여태까지 성국에서 무수한 자료들을 읽어 보았지만 암호로 기록해 둔 것은 처음 보았다고 했다.

“그 암호문을 적어 주실 수 있나요?”

내 말에 아이린은 자신이 본 암호를 종이 위에 그대로 기록해 주었다.

그것은 난생처음 보는 형태의 암호였고, 나는 암호 해독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보아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암호를 적어 준 아이린이 쭈뼛거렸다.

“제가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엄청난 도움이 되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아이린.”

나는 감사의 뜻을 담아 아이린을 안아 주었다.

아이린은 내가 녹턴의 광증을 치료하려고 하고 있다는 목적은 알고 있지만, 성국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아무래도 성녀인 그녀에게 성국이 의심된다는 말을 하기에는 마음이 껄끄러웠다. 나는 아이린이 화를 내거나 상처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이린에게서 암호문을 받아 온 나는 제국으로 전보를 보냈다. 비록 나는 암호 해독 전문가가 아니었지만, 이런 일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을 한 명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정보 길드의 길드장 페트로였다. 나는 암호문을 일부 발췌해서 페트로에게 보냈다.

암호의 전문을 보내지 않은 것은 내가 그를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암호문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알 수 없는데, 권력에 약한 페트로가 그것을 보고 성국에 밀고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답장이 돌아온 것은 열흘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건 고대에 존재했던 소수민족의 암호네요. 문자 하나하나가 성국어의 문자와 동치되니까 암호해독표만 있으면 쉽게 해독하실 수 있을 거예요. 암호해독표를 함께 보내 드릴게요.」

‘페트로, 나이스!’

그는 무척이나 도움이 되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 나는 역시 정보 길드의 길드장에게 의뢰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암호문을 해독하려고 한 그 순간이었다.

“라리아!”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나를 찾아온 사람은 바로 자네트와 미하일, 그리고 아이린이었다.

“라리아아! 보고 시퍼써!”

미하일은 나를 본 순간 눈을 반짝이며 달려들어 다리를 끌어안았다. 다리 위로 미하일이 말랑말랑한 볼을 문지르는 것이 느껴졌다.

“모해, 놀자!”

자네트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달려들어 내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꼭 엄청 오랜만에 만나는 것처럼 구네.’

사실은 아까까지도 계속 아이들을 보고 있다가 한 시간 전에 페트로에게 전보가 와서 잠깐 침실로 돌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한 시간도 기다리지 못하고 나랑 놀겠다고 야단이었다.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곤란한 상황이었지만, 솔직히 기쁘기도 했다. 그만큼이나 아이들이 날 잘 따르는 것 같아서.

미하일이 내 다리를 끌어안고 종알거렸다.

“라리아, 아이린이 그러는데에, 여기서 쫌만 가면 아주 예쁜 마을이 있대! 보트도 있구, 지금 축제 하구 있대. 그러니까, 푸…… 푸…….”

“‘플로렌틴’이요, 공자님.”

“마자! 쁠로렌띤!”

“라리아, 가자! 축제 구경 가자!”

자네트도 한껏 신난 얼굴로 내 치마를 잡아당기며 통통 튀었다.

나는 아이린을 돌아보았다. 아이린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플로렌틴은 수상도시인데, 이 근처에서 제일 큰 교역 도시이기도 해요. 성국, 제국, 그라나다 왕국, 아슬란 왕국을 모두 잇고 있어서 플로렌틴의 운하에는 엄청난 양의 물류가 오가곤 하죠. 그런 곳의 축제라면 분명 재미있을 거예요!”

아무래도 아이린이 애들에게 바람을 넣은 모양이었다.

‘근교 여행이라니, 나쁘지 않네. 하긴 성국은 볼거리가 별로 없어서 아이들에겐 지루할 테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 갈 수는 없었다. 지금 내게는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그럼 모레에 가는 걸로 할까요? 모레에 모두 함께 축제를 보러 가는 거예요. 분명 녹턴도 좋다고 할 거예요.”

“쪼아!”

“난 지금 가구 시픈데…….”

자네트가 투덜거렸지만 내게 그녀를 달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자네트에게 축제에서는 간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자네트와 미하일을 아이들의 방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아이린에게 말했다.

“사실 아이린이 저번에 적어 준 암호문을 해독할 방법을 찾아냈어요.”

“정말요? 진작 말씀하시지! 어떻게 됐어요?”

“마침 지금 막 해독하려던 참이었어요.”

“저도 돕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나와 아이린은 함께 방으로 들어가서 암호문을 해독하기 시작했다.

페트로가 단언한 대로 해독표를 가지고 암호를 해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음, 아이린. 아이린의 눈엔 이게 F로 보이세요, P로 보이세요?”

내가 암호해독표의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아이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해독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으으으음…… P 아닐까요?”

“그래요? 저는 F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암호해독표의 글자를 알아보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아마 페트로는 엄청난 악필인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암호문은 성국어를 기반으로 쓰여 있었는데 나는 성국어를 몰랐다. 그래서 해독된 부분은 아이린이 읽어 주는 수밖에는 없었다.

“으음, 뭔지 알아볼 수 없는 문자를 빼면 이런 내용이에요. ‘성국에는 은O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해서, 근교의 도시 O로렌틴에 시설을 마련하였다. 그 자세한 위치는 이러하다. O로렌틴 아가사…….’ 이게 현재 해석한 곳까지예요.”

“로렌틴, 로렌틴…….”

지명을 입안에서 되뇌던 나는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무언가를 느꼈다.

“설마 플로렌틴?”

“앗! 그런 것 같아요. 라리아의 말대로 F였군요!”

아이린이 손뼉을 치며 수긍했다.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대체 왜 처형 장소를 플로렌틴에 마련한 것일까요? 비공개 처형을 하기 위해 이 먼 곳까지 데려오다니…… 대체 무엇을 위해?”

그때였다.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누님! 누님!”

“아돌프인가 봐요.”

아이린은 암호문과 해독표를 후다닥 치웠다. 나는 아이린이 정리를 마친 것을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아돌프, 무슨 일이니?”

문 너머에서 아돌프의 흥분한 얼굴이 보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두 주먹을 꽉 쥐고 외쳤다.

“꼬맹이들한테 들었어! 모레 축제에 간다면서? 나도 같이 가도 돼?”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역시 축제라는 말에 들뜨는 것은 모든 아이들의 공통점인가 보다.

“당연하지. ‘모두’ 함께 가기로 했는걸. 널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잖니?”

“좋았어!”

아돌프는 어찌나 기쁜지 입고 있는 베스트가 펄럭일 정도로 높게 뛰었다. 바닥에 가볍게 착지한 그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누님을 그 대공에게서 잘 지켜 줄게!”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 없는데……. 녹턴이 축제 한복판에서 발작을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광기 발작은 심각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말이다. 평화로운 축제 구경 중에 그가 이성을 잃을 확률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아돌프는 진지한 얼굴을 했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위험하다고.”

“응? 무슨 뜻이야?”

“누님은 순진해서 몰라. 원래 남자는 다 늑대라고. 만난 지 한 달도 안 된 여자랑 약혼에 동거까지 한 자인데, 여행을 틈타 뭔 짓을 할 줄 알고…….”

이게 대체 뭔 미친 소리란 말인가? 나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돌프!”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하지만 아돌프는 조금도 수그러드는 기세가 없이 당당했다.

대체 얘는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걸까? 전생까지 포함하면 내가 몇 살인데 엄청 순진무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취급하는 것도 그렇고, 녹턴을 무슨 짐승 취급하는 것도 그렇고…….

‘아돌프, 사실 네가 걱정하는 일을 제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바로 이 누나란다.’

하지만 얼마 전 생일이 지나서 15살이 된 애한테 이런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녹턴은 절대 안 그래. 그리고 아돌프, 네가 날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건 과도한 간섭인 것 같네.”

내가 엄한 말투로 말하자 그제야 아돌프는 조금 찔끔하는 얼굴을 했다.

“으윽, 이 정도로 뭐가……. 가족인데 이 정도쯤은 괜찮잖아?”

아돌프가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돌프한테는 미안하지만 조금 더 엄해질 필요가 있겠는걸.’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네가 계속 나와 그이의 관계에 간섭하려고 든다면…… 널 플로렌틴에 데려가지 않을 거야, 아돌프.”

사실 이건 진심은 아니었다. 플로렌틴에 함께 가자는 말에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를 놓고 갈 수 있을 리가.

그래도 이 정도로 엄하게 말하지 않으면 고집이 센 아돌프는 듣지 않을 것 같았다.

당연한 결과로, 아돌프의 반발은 거셌다.

“뭐, 뭐라고! 그런 게 어디 있어?”

불에 덴 듯 놀라는 그를 보고 나는 피식피식 웃었다. 나는 그의 코를 꼬집으며 속삭였다.

“그러니 누나의 사생활에 지나치게 관여하지 말란 말이야. 누구나 사생활은 보장받아야 하는 거야. 알겠어요, 아돌프 군?”

“으으윽……. 난 누님을 지키려고 그러는 건데.”

아돌프가 투덜거렸다. 나는 웃으며 그를 돌려보냈다.

아돌프를 돌려보낸 뒤 나와 아이린은 암호의 해독을 계속했다.

오래지 않아 암호는 완전히 해독되었고 우리는 주소지를 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바로 이틀 뒤 가기로 한 플로렌틴의 외곽 지구였다.

“이런 곳에 처형 시설이 있다니, 믿을 수가 없네요.”

“그러게요. 저 역시 성국의 죄인 처형 시설이 플로렌틴에도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어요.”

어쨌든 실마리가 하나라도 잡혔으니, 이제 할 일은 하나밖엔 없었다. 바로 그곳에 직접 가 보는 것이다.

아이린의 함께 가 주겠다는 제안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아무래도 외부인인 나 혼자 대신전의 시설을 둘러보는 것은 많은 제한이 따르는 일이니까.

성녀인 아이린이 함께 가 준다면 어느 장소든 제한 없이 둘러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모두 몰랐지만, 우리가 해독한 암호문에는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글자 한 개를 완전히 잘못 읽은 것이다.

페트로의 악필 탓에 우리가 잘못 알아본 글자는 F와 P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고로, 다음 날. 우리는 플로렌틴의 잘못된 주소지로 향했다.

* * *

나와 아이린은 함께 플로렌틴으로 향했다. 근교의 도시라 마차를 타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대신전의 죄인 처형소가 있다는 그곳은…….

“와아!”

처음으로 본 수상 도시였다. 거대한 운하 내부에 섬으로 이루어진 여러 개의 마을들이 교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축제는 야시장이 주된 구성이기에 대낮인 지금 구경할 수 있는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도시의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이런 곳에서 죄인을 처형했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내가 아이린에게 말했다. 아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소지에 거의 다 온 것 같아요. 여기서부터는 마차가 들어갈 수 없어서 배로 이동해야 한대요.”

우리는 배를 빌려서 주소지로 이동했다.

하늘이 비친 듯 새파란 강물 위로 나아가는 조각배와 새하얀 집들의 풍경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낭만적이었다.

“다 왔습니다.”

얼마나 배를 탔을까, 뱃사공이 우리에게 목적지에의 도착을 알려 왔다.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신전의 시설이니 당연히 눈에 띌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변에 그런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외곽인 이곳에서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곤 드문드문 보이는 민가와 양식장뿐이었다.

“이 주소지가 정말 이곳이 맞나요?”

“암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가 이 동네 40년 차 토박이인데, 분명 여기가 확실합니다.”

내가 확인차 물었지만 뱃사공은 몇 번이나 단언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뱃사공이 우리를 내려 주고 떠나갔다. 우리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마 민간인은 발견할 수 없도록 시설이 숨겨져 있는 게 아닐까요? 마법이나 결계 같은 것으로…….”

내가 물었지만 아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기엔 이 근처에서는 아무런 성력도 느껴지지 않는걸요.”

우리는 일단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기로 했다.

나는 속이 탔다. 아무런 수확이 없다면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괜찮아, 아직 시간은 많아. 처음부터 반년은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성국에 온 것이니까…….’

나는 그런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으며 아이린과 함께 골목골목을 둘러보았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해가 저물어 갔다. 하늘에서 시작된 오렌지빛은 강물 위에도 번져 주변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민가에도 하나둘 불이 켜지는 것이 보였다.

이쯤 되니 우리는 다리도 아프고 체력이 똑 떨어졌다.

그나마 체력이 좋은 나는 견딜 만했지만, 어릴 적부터 대신전에 내내 갇혀만 살아온 아이린은 정말 힘들어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아이린, 괜찮으세요?”

내가 아이린에게 숙소에서 챙겨 온 물병에서 물을 따라 주며 물었다. 그녀가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헥, 헥, 헤엑! 저, 저는, 괘, 괜찮아요오…….”

입으로는 괜찮다고 말하지만, 아무리 봐도 안 괜찮아 보였다. 나는 그녀를 너무 고생시킨 것 같아서 미안해졌다.

“잠깐 쉬었다 돌아갈까요? 지금 좀 쉬어도 오늘 밤 중에는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저, 저어는…… 정말 괜찮은데에…….”

“아니에요, 무리하지 마세요. 제가 식사를 할 곳을 찾아볼게요.”

다행히 근처에는 식당 같아 보이는 곳이 있었다.

사실 식당이라기보다는 주점에 가까운 모양새였는데, 이 세계에서 주점은 식당과 여관의 역할도 하는 곳이 많으니까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이린을 데리고 주점에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주점은 겉에서 보기보다 내부가 넓었으며 사람도 꽤 많았다.

주점에 들어서는 순간 많은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하긴 이 세계에서 젊은 여자 둘이 술집에 드나드는 일은 드물겠지. 더군다나 우리 둘 다 귀족 티가 나니까.’

대충 그 정도로 생각한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는 바 좌석에 앉았다. 웨이터인 듯한 사람이 우리를 힐끔거렸다.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이었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디에도 메뉴판이 없었다.

“여기, 메뉴 주세요.”

내 말에 그제야 웨이터가 바테이블 아래에서 메뉴판을 꺼내 주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꺼내 보지 않았는지 너저분하고 먼지가 쌓여 있는 데다가 군데군데 물 자국 같은 것이 있었다.

“음…… 감자튀김이랑 로스트 비프, 그리고 베이컨 샌드위치 부탁드려요.”

나는 번진 글자를 애써 읽으며 주문했다.

계속 우리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흘끗거리던 웨이터는 팡 소리를 내며 행주를 바 위에 내던지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쯤 되니 나도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뭐지? 우리가 뭐 잘못하기라도 했나?’

설마 유흥주점에라도 잘못 온 걸까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유흥주점이라고 하기에는 접대부로 보이는 사람이 없다.

나는 주점 내에 있는 사람들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이런 작은 도시의 외곽 골목길에 있는 로컬 가게치고는 정말로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그중에는 꽤나 고급스런 복장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곧 열릴 축제를 구경하러 온 관광객들인 걸까? 하지만 축제는 도시 중앙에서 치러진다고 들었는데……. 이상하네.’

곧 웨이터가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맛있게 드십시오.”

무성의한 빈말과 함께 우리의 눈앞에 요리가 하나둘씩 놓이기 시작했다.

질 나쁜 기름으로 튀긴, 눅눅하기 짝이 없는 감자튀김. 질기고 식어 빠진 로스트 비프. 베이컨은 병아리 눈곱만큼 들어 있고 빵은 뻣뻣한 베이컨 샌드위치…….

이렇게 맛없는 식사는 난생처음이었다.

“아이린, 벌써 다 드셨어요?”

내가 묻자 아이린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하하, 네. 배가 불러서요.”

아이린이 아무리 소식에 익숙하다고 해도 로스트 비프를 두 입 정도 먹고 배가 부를 리는 없었다.

하지만 식전 빵만 간신히 조금 먹은 나는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에 더 먹으라고 권할 수는 없었다.

‘최악의 식당이네. 얼른 돌아가서 숙소에서 식사를 해야겠어.’

그렇게 생각한 내가 아이린과 함께 일어나려고 하던 찰나였다.

“어, 엄마. 엄마!”

이런 술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술집 안쪽의 문 앞에서 10살 정도의 어린아이가 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엄마. 엄마 보고 싶어요! 엄마아…….”

아이는 거적때기에 가까운 허름한 옷을 입고 씻은 지 아주 오래된 것처럼 꾀죄죄했다. 그리고 그런 아이의 옆에 있는 사람은…….

“시끄러워! 입 다물어. 그러지 않으면 그놈의 주둥이를 꿰매 버릴 테다.”

“으아앙, 엄마…….”

아이의 옆에는 흉악하게 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난폭한 언행을 보아하니 아이의 보호자 같지는 않았다.

‘뭐지? 유괴? 학대하는 보호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발이 떨어지지 않아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남자가 아무리 윽박질러도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오히려 두려움 때문인지 더더욱 구슬프게 엄마를 찾았다.

“이 자식이!”

결국 남자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내 주먹의 세 배는 될 것 같은 그 커다란 손이 아이의 얼굴 내리치려던 찰나였다.

“잠깐만요!”

그건 정말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생각이 이성을 거치기도 전에 몸이 앞서나갔다. 나는 아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퍼억! 폭력적인 소리와 함께, 얼굴에 느껴지는 둔한 통증.

남자는 다급히 손을 멈추려고 한 것 같았지만, 가속도가 붙은 주먹이 완전히 멈추지 못하고 내 얼굴에 빗맞았다.

“윽…….”

빗맞았다고는 해도 꽤 힘을 쓰는 자인지라 상당히 아팠다. 입술에서 피 맛이 나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어 왔지만 여전히 신체적인 폭력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문질렀다.

“라리아!”

아이린이 깜짝 놀라 나를 불렀다.

“뭐야? 이 여자는!”

남자는 갑작스레 끼어든 나를 향해 윽박지르듯 소리쳤다.

그의 시선이 아래위로 나를 훑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굉장히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일반적으로 귀족 여성은 사용인 없이 돌아다니지 않는다. 아이린은 어떻게 봐도 시녀나 사용인으로는 보이지 않고.

그런 연유로, 나를 졸부 집안의 여자 정도로 판단했는지 남자가 위협적인 태도를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넌 뭔데 끼어들어! 더 맞고 싶냐? 엉?”

나는 훌쩍이는 아이를 좀 더 등 뒤에 숨겼다. 입술이 아파 왔지만 굴하지 않고 말했다.

“당신이 이 아이를 함부로 대했잖아요. 그건 학대예요.”

“뭐? 학대?”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학대 좋아하시네. 그 녀석은 내 소유야. 내가 때리든 죽이든, 네가 알 바 아니라고.”

끔찍한 말이었다.

가끔 이런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아이는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나쁜 부모가.

현대에도 그런 부모가 있는데, 인권에 대한 의식이 부족한 이곳 대륙에서야 하물며 오죽할까.

나는 더더욱 고개를 빳빳이 들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으니까.

“이 아이는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에요. 하나의 인격체라고요! 아이를 학대하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이곳 치안대에 당신을 고발하겠어요.”

“치안대? 하! 미안하지만, 이곳 치안대는 우리 편이야. 아주 옛날부터 그랬다고.”

‘치안대는 자기들 편이라고? 그게 무슨 뜻이지?’

그의 말을 들은 나는 멈칫했다.

‘이곳 치안대는 아동학대에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보이지만…… 하지만 뭔가 뉘앙스가 이상한걸. 그저 그 뜻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내가 잠시 생각에 빠진 찰나, 상대방 남자가 여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그러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 녀석 이리 내놓지 그래. 내가 아가씨 몸에 손대기 전에 말이야. 아가씨도 예쁘장한 얼굴에 상처 생기는 건 싫지?”

한숨이 나올 정도로 저열한 협박이었다. 아마 적당히 겁을 주면 순순히 자기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림도 없지.’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였다. 무언가가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주 가녀린, 자신이 이런 짓을 해도 되나 불안한 것처럼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작은 손길. 바로 내 등 뒤의 아이였다.

나는 아이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어린 남자아이였는데, 머리며 옷은 온통 꼬질꼬질했고 얼굴도 눈물과 콧물 범벅으로 엉망이었다. 심지어 맞은 건지, 부딪친 건지 멍과 상처 자국도 군데군데 보였다.

“제발…….”

아이가 울먹이며 속삭였다.

“제발, 저 보내지 마세요……. 저 사람, 싫어요…….”

내가 상대의 회유에 넘어가 자신을 그에게 넘길까 봐 걱정하는 것이리라.

울먹이는 아이의 속눈썹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내 옷자락을 쥔 작디작은 주먹도.

그 순간, 그 아이의 얼굴 위로 내 가장 소중한 아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자네트, 미하일. 비록 피가 이어져 있지는 않지만, 마음이 이어져 있는 그 아이들.

내 몸과 생명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 그 아이들이 이런 난폭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난 그저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나는 마음을 굳혔다. 난 이를 꼭 문 채로 상대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미안하지만 아이린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는 없겠는걸.’

물론 내가 물리적으로 저 남자를 이길 수 없다는 것 정돈 알고 있다.

하지만 아이린은 다르다. 그녀에게는 신성력이 있고, 그 힘은 황실 기사 5명에 달할 정도로 강력하니까. 저런 한량 같은 남자 정도는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전혀 겁먹거나 물러날 기색이 아닌 것을 눈치챘는지 남자의 얼굴도 험악해져 갔다.

“이게……!”

그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아이린!”

나는 아이린을 향해 소리쳤고.

“네!”

아이린은 내 생각을 눈치챈 듯 눈을 감고 신성력을 쓸 준비를 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와장창! 콰앙!

갑작스런 굉음이 가게 내부를 뒤흔들었다. 왠지 언젠가 들어 본 듯한 소리였다.

가게 내부에 두텁게 쌓여 있던 먼지가 한꺼번에 떠올라 자욱한 안개를 만들었다.

방금의 소동을 보고도 멀뚱멀뚱 구경만 하던 사람들은 모두 벌떡 일어나 두리번거리거나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이건 설마…….’

그 사이에서 나는 왠지 모를 익숙한 불길함을 느꼈는데…….

아니나 다를까.

“누가 우리 누님 건드렸어?!”

익숙한 소년의 목소리가 자욱한 먼지구름을 갈랐다.

“뭐, 뭣?”

갑작스레 들려온 소년의 목소리가 뜻밖으로 느껴졌는지, 남자가 황당한 듯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커으윽!”

뭉게뭉게 피어올랐던 먼지구름이 가라앉았다. 그렇게 열린 시야 안에 들어온 모습이란…….

“아돌프!”

나는 놀라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돌프는 목검 끝으로 자기보다 훨씬 큰 덩치의 남자를 벽에 밀어붙여 목을 찍어 누르고 있었다.

“커헉! 헉! 흐헉, 허억!”

자신보다 훨씬 작은 소년에게 밀어붙여졌을 뿐인데도 남자는 꼼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바닥에서 떠오른 그의 발이 중심을 찾지 못하고 허공을 찼다.

아돌프는 15살짜리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이냐? 감히 누님에게 손을 대려고 한 놈이?”

“커억, 사려, 살…… 려 주……! 허억!”

“죽여 버린다.”

목검 끝에 목이 짓눌린 남자는 숨을 쉬지 못하는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이내 무서울 정도로 시커멓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러다 진짜 죽겠다 싶었다. 내 동생이 외국까지 와서 살인자가 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아돌프, 그만둬! 그 사람을 놔줘.”

내가 소리치자 아돌프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뭐? 하지만, 누님…….”

아돌프가 억울한 듯 말했지만, 나는 두 손을 허리 위에 얹은 채 짐짓 엄한 태도를 취했다.

“아돌프. 누나 말 들어.”

아돌프는 분한 듯이 남자를 노려보았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순간적으로 번득이는 그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곧 아돌프는 손에서 힘을 뺐고, 목에 대고 찍어누르고 있던 목검이 떨어지자 남자가 털썩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나는 다급히 남자의 맥을 짚었다. 다행히 죽은 건 아니고, 실신한 것 같았다.

‘십년감수했네.’

나는 아돌프를 돌아보았다.

이쯤 되니 그가 어떻게 갑자기 나타났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뻔하지. 또 내 뒤를 밟았겠지!’

아돌프가 날 미행을 한 게 이제 벌써 세 번째인가? 이 못된 버릇을 어떻게 하면 고쳐 줄 수 있을지 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돌프는 마치 주인 만난 개처럼 내게 달려왔다.

“누님! 괜찮아? 다치지 않았지?”

내게 다가올 때만 해도 그의 얼굴에는 나를 구했다는 자랑스러움과 칭찬에 대한 기대감이 어려 있었는데, 내 얼굴을 가까이서 보자 표정이 변했다. 아돌프의 귀여운 얼굴이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

“다쳤잖아! 저, 저 망할 놈의 새끼가……! 아니, 제길. 더 빨리 따라왔었어야 하는 건데. 잠깐 조는 사이에 누나를 놓쳐서……!”

나는 한숨을 쉬며 입술을 손으로 훔쳤다.

“괜찮아. 이 정돈 아무것도 아냐. 그보다 아돌프, 이번엔 또 왜 따라온 거야?”

“어? 그, 그게…….”

“내가 함부로 누나의 뒤를 밟으면 안 된다고 했어, 안 했어?”

내 엄한 말에 아돌프가 바짝 굳었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데룩 굴러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보였다.

아까는 불같이 화를 내다가 이번엔 또 긴장하고, 그 단순하기 그지없는 감정표현이 신기할 정도였다.

“해…… 했어.”

그가 우물쭈물 대답하자 나는 눈을 흘기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랬는데 왜 또 누나의 뒤를 밟았을까요? 아돌프 셔우드 군.”

“그, 그야…… 당연히 누님을 지켜 주려고 그랬지.”

“그렇다기엔 오늘은 녹턴도 없었잖아? 대체 뭐로부터?”

내 말에 아돌프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단순히 치안의 위협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게 해 주기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그는 아이린이 성녀인 걸 알고 있었으니까. 단순히 거리에서 자신과 주변을 보호하기에는 성녀의 신성력이면 충분하니까 말이다.

“실은…… 나만 빼놓고 축제에 갈까 봐 그런 거야.”

“뭐?”

“누님이 나만 빼놓고 플로렌틴에 갈지도 모른다고 말했잖아? 오늘 플로렌틴에 간다길래, 나만 빼고 축제를 즐기러 가는 줄 알았지.”

그의 말에 나는 뒤통수라도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제야 내가 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만일 네가 계속 나와 그이의 관계에 간섭하려고 든다면…… 널 플로렌틴에 데려가지 않을 거야, 아돌프.’

‘그 말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니!’

하지만 지금은 아돌프와 긴 대화를 하기에 적절한 때는 아니었다. 식당 안의 모두가 보는 눈앞에서 폭력 사태를 벌인 직후니까 말이다.

누군가가 우리의 대화를 끊고 끼어들었다. 바로 아까의 그 바텐더였다.

“손님, 방금 그 사내는 이 가게의 일꾼이었다고요! 지금 손님들께서 하신 것은 영업 방해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영업? 일꾼?

‘단순히 아이와 폭력적인 부모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나?’

“영업이라고요? 이 아이를 괴롭히는 게요?”

내 질문에 바텐더가 헛기침을 했다.

“아…… 아무튼, 손님께서 상관하실 바가 아닙니다. 나가주세요, 어서요! 이 이상 곤란하게 만드시면 저희도 강제성을 사용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바텐더의 옆에서 아까 그 남자보다 훨씬 더 덩치가 큰 사내들 서너 명이 우드득 소리를 내며 손과 목의 관절을 꺾었다. 분명 우리에게 겁을 주려는 것이리라.

나는 아돌프에게만 들릴 소리로 속삭였다.

“아돌프, 도와준 것은 사실이니까, 다시는 누나 뒤를 밟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이번까지는 봐줄게.”

“정말?!”

“응. 대신에, 여길 좀 정리해 주었으면 해. 할 수 있지?”

“당연하지!”

아돌프는 신이 난 듯 앞으로 나섰다. 목검을 고쳐 쥐면서, 그가 주변을 휙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다 죽었어!”

잠시 뒤.

“히익! 죄,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살려 주세요!”

얼굴이 팅팅 부은 바텐더가 아이린의 성력에 억눌린 채 두 손을 싹싹 비벼 댔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만 해도 왁자지껄하던 식당은 온통 고요했다. 흠씬 두들겨 맞고 쓰러진 남자들만이 여기저기 널려 있을 뿐이었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도망쳐 버렸다. 이제 이곳에서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곤 나와 아돌프, 아이린, 바텐더, 그리고 꼬마 아이뿐이었다.

나는 목검을 어깨에 받쳐 들고 있는 아돌프를 돌았다.

“잘했어, 아돌프!”

이 난장판을 만든 장본인인 그는 머리카락만 좀 헝클어졌을 뿐 다친 데 하나 없이 아주 멀쩡했다.

내 칭찬에 아돌프의 입꼬리가 헤벌쭉하게 양옆으로 올라갔다.

“히히. 나 잘했어?”

칭찬을 할 때는 확실히 한다는 것이 내 신조였다. 가뜩이나 이번엔 내가 부탁한 일이니 더더욱.

나는 미소 지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아돌프의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해 주며 내가 말했다.

“그래. 잘했어. 도와줘서 고마워.”

“헤헤헤…….”

뭐가 그리 좋은지 아돌프가 실실 웃었다. 나는 단순하고 귀여운 동생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다음 나는 아이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겁을 먹었는지 아까부터 계속 내 등 뒤에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진심이 아이에게 전해지길 바라면서, 최대한 침착하고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괜찮니? 갑자기 이런저런 일들을 겪어서 많이 놀랐지?”

“…….”

“이제 걱정하지 마. 나랑 여기 이 누나와 형은 네 편이니까. 절대 무섭거나 아프게 하지 않을 거야.”

아이는 여전히 힐끔힐끔 우리의 눈치를 보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주눅 든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나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네가 안전한 곳에서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우리가 책임지고 도와줄게. 자, 우리 같이 약속할까?”

나는 아이가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오도록, 강요나 재촉 없이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아이는 한참이나 주저하는 듯싶더니…….

와락! 작은 몸의 온기가 온몸에 전해져 왔다. 아이가 날 끌어안은 것이었다.

나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내가 속삭였다.

“그래, 믿어 주어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흐흑, 흑……. 흐흐흑…….”

“괜찮아. 울어도 돼. 이제 괜찮아…….”

아이가 실컷 울 때까지 기다린 뒤, 눈물을 그치자 나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곤 말했다.

“혹시 아까 그 사람이 네 아빠나 보호자였니?”

“아…… 아니, 요. 모르는…… 사람.”

아이가 훌쩍이며 대답했다.

‘역시.’

아이 아빠와 아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그렇다면 아까 그 남자는 유괴범이었던 걸까?

“정말 무서웠겠다. 나도 그게 무슨 기분인 줄 알아, 비슷한 일을 겪은 적 있거든. 그 사람이 갑자기 여기로 끌고 왔니? 어른들이 많이 걱정하시겠다.”

“아…… 아니요.”

하지만 그다음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말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팔았…… 어요. 엄마 아빠가. 저를.”

“뭐?”

나는 물론 아이린과 미하일까지 숨을 들이켰다.

“부모님께서 널 팔았다고?”

“네. 귀리 두 자루…… 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서 발밑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유괴 따위가 아니라 인신매매였단 말이야? 그것도 부모의 손에 의해서?’

내가 너무 충격을 받아서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에 아이린이 말했다.

“말도 안 돼! 하지만…… 노예 거래는 성국에서 금지된 일인걸요! 누구든 사람을 사고파는 자는, 성국 재판에 의해 처벌당해요!”

나 역시 아이린이 말한 대로 알고 있었다. 성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전 대륙에서 인신매매가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신문에서 보았으니까.

‘하지만 성국의 의도대로 잘 이루어지지는 않은 모양이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아이를 달래 준 뒤, 이번에는 바텐더를 돌아보았다.

“이봐요.”

굳이 이 사람만 기절시키지 않고 붙잡아 둔 것은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였다.

이곳은 단순한 식당이라기엔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식당치곤 지나치게 많은 경비인력도 그중 하나였다.

‘치안대가 자기네 편이라는 말이나, 영업 방해라는 말이라든가.’

그 모든 수상한 점들이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지듯 꿰맞춰졌다.

‘그렇다 해도 더 확실한 물증이 필요해.’

우리 세 사람 모두의 시선이 한 번에 와 닿자 바텐더가 기겁했다.

“네! 죄, 죄송합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저는 먹여 살려야 할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런 말은 됐고, 이제부터 묻는 말에만 대답하세요.”

내가 냉정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바텐더가 찔끔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우리는 바텐더를 심문했다. 의심 가는 것은 전부 물어보고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뭐든지 말하도록 했다.

“알고 있는 거, 더 없냐? 하나라도 더 있으면 아주 묵사발을 내 버릴 거야!”

“네, 네! 정, 정말입니다. 정말이고 말고요! 제가 아는 건 이게 전부입니다.”

아돌프의 으름장에 바텐더가 납작 엎드렸다. 그 절박한 표정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이제 됐어, 아돌프. 그 사람에게서 알아내는 건 이 정도면 충분해.”

“알았어, 누님.”

성난 개처럼 으르렁거리던 아돌프는 내 말에 언제 그랬냐는 듯 순한 강아지가 되었다.

나는 방금 바텐더에게서 들은 말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인신매매가 이루어지는 블랙마켓이라.’

그가 말한 진실은 상상보다도 잔혹했다.

바텐더의 말에 따르면 이곳, 플로렌틴의 외곽지역에는 매달 보름밤마다 블랙마켓이 열린다고 했다.

그곳은 법적으로 금지되는 모든 것을 사고파는 곳이다. 무기와 약물, 장물, 그 외의 각종 위험한 것들…….

그리고 심지어는 인간마저도.

부모에게서 빼앗은 혹은 헐값에 사들인 어린아이는 블랙마켓의 인기 상품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식당은 블랙마켓의 숨겨진 입구 중 하나였다.

“이걸 어떻게 하지, 누님?”

아돌프가 물었다.

생각보다 큰 사건이었다. 나는 우리만의 힘으로는 이 일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돌프, 네가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녹턴을 이곳으로 불러와 줘. 부탁할게. 아 참, 그리고 이 아이도 안전한 숙소로 데려가서 보호해 주었으면 해.”

“뭐? 누나는?!”

아돌프가 깜짝 놀라 물었다. 나는 의연한 얼굴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아이린과 지금 당장 블랙마켓에 들어가서 아이들을 구출하고, 증거를 수집할 생각이야.”

“뭐라고?!”

“한시가 급해. 입구에서 소란이 일어났으니 지금쯤이면 블랙마켓에서도 이변을 감지했을 거야. 모두 도망치거나 증거를 인멸하고 있을지도 몰라. 최대한 빨리 가 봐야 해. 그러니까 부탁해, 아돌프.”

하지만 아돌프는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왜 나 대신 성녀님이야?! 서, 성녀님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무력으론 내가 성녀님보다 훨씬 세! 내가 누나랑 같이 가는 게 더 도움이 될걸?”

“아이린은 무력은 너보다 덜한 대신 성녀라는 지위와 신성력이 있잖아. 위장 잠입을 한다거나, 인질범들과 협상을 한다거나, 전투 외의 일들에는 너보다 아이린이 더 도움이 돼.”

그리고 아돌프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는 너무 어렸다. 나는 내 동생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아돌프가 뭐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내가 선수를 쳤다. 나는 한 발 다가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아돌프, 날 지키고 싶다고 했지? 지금은 네가 내 말을 들어주는 것이 날 지키는 거야. 최대한 빨리 녹턴을 데려오는 게 날 안전하게 해 주는 거고. 내 말 이해하겠어?”

“으, 으응…….”

아돌프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미소 지으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착한 아이구나. 자, 그럼 부탁할게.”

“누님, 나…… 최대한 빨리 다녀올게. 진짜 날듯이 다녀올 테니까! 그때까지 위험한 짓 하지 말고 있어. 알았지?!”

“알았다니까. 내가 누군데.”

내가 너스레를 떨며 아돌프를 보냈다. 아이와 바텐더까지 그에게 맡겼다. 다행히도 두 사람을 데려가는 데 무리는 없어 보였다.

아돌프를 보낸 뒤 내가 아이린을 돌아보았다.

“그럼 갈까요?”

“네!”

아이린이 의욕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바텐더의 말에 따르면 VIP룸의 거대한 금고가 비밀 입구라고 했다. 우리는 지키는 사람 없는 VIP룸으로 가서 암호를 입력하고 금고를 열었다.

드르르륵-

금고의 문을 열자 놀랍게도 그 뒤로 끝없이 이어진 길이 보였다. 길에는 드문드문 조명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길을 따라 들어갔다. 가는 길에 몇 번이나 보초를 만나긴 했지만 아이린의 신성력으로 무리 없이 제압할 수 있었다.

바쁜 걸음으로 거의 반 시간쯤 걸었더니 드디어 길이 넓어졌다.

그 공간은 지하 동굴을 개조한 듯했다. 공기는 굉장히 습기 찼고 이곳저곳에서 물이 떨어졌다. 심지어는 물이 고인 웅덩이나 개울마저 군데군데 있었다.

“저기인가 봐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아이린이 속삭였다.

인파가 보였다. 거의 대부분 도망간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 그야말로 시장통이었다.

“아직 마켓 내부에는 식당에서 일어난 사건이 알려지지 않은 걸까요?”

“좌우지간 잘됐어요. 사람이 많으면 잠입하기도 더 쉬우니까요.”

그런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사람들을 더 자세히 살폈다.

“어머, 이 약은 얼마인가요?”

“손님, 이것을 보고 가세요. 바로 어제 들어온 아주 따끈따끈한 신제품이랍니다.”

손님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의심을 받지 않도록 따라서 가면을 썼다.

주황색 조명으로 점점이 불을 밝힌 블랙마켓에는 정말 괴상한 물건들이 많았다.

상인의 말에 따르면 한 가문을 멸망시켰다는 저주가 깃든 초상화와 불길한 색을 띠는 물약, 밀렵한 게 분명한 희귀한 짐승들, 어떤 동물의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장기들, 심지어는 바짝 말라빠진 미라의 손까지.

독극물과 마도구, 장물과 무기들, 거의 모든 종류의 금지된 물건들은 다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물건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우리의 목적은 아이들을 구하고, 주동자들을 사로잡거나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으니까.

바텐더에게서 얻어낸 블랙마켓의 구조도가 있었기에 우리는 인신매매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어렵잖게 찾아낼 수 있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플로렌틴 블랙마켓에 잘 오셨습니다.”

“이곳인가 봐요.”

사회자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들으며 아이린이 내게 소곤거렸다.

그곳은 유난히 북적거렸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둥글게 반원을 그리고 모여 있었으며 한편에는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높은 실크햇을 쓴 신사 한 명이 진행을 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저희는 대륙 최고의 안목을 지니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30분 뒤, 특별 상품 경매가 시작될 예정이니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도 최고로 값지고 희귀하며 특별한 상품들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다행히, 아직 시작되지 않은 모양이에요.”

아이린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텐더의 설명에 따르면 블랙마켓에서 사람, 즉 노예는 특별 상품으로 분류되어 경매로 판매된다고 했다.

‘분명 블랙마켓의 상품인 아이들 역시 이 경매에서 판매될 예정이겠지.’

“……그리고 여러분께서 가장 기대하시는 노예 경매는 마지막 순서로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많은 기대 바랍니다.”

사회자의 말에 사방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아이들의 기운이 느껴지나요? 아이린.”

내가 아이린에게 속삭였다.

아이린은 신성력으로 주변의 기운을 탐지하더니 나를 향해 손짓했다.

“확연히 어린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 있어요. 약 10명 정도예요. 절 따라오세요!”

우리는 무대 뒤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경매 상품을 모아놓는 듯한 거대한 컨테이너가 5개 있었고, 그 주변을 열댓 명의 경비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게다가 몇 명은 호출용 마도구까지 들고 있었다. 우리가 조금만 수상한 짓을 했다가는 훨씬 더 많은 인원이 모여들어 상황이 복잡해지리라.

“이걸 어떡하죠?”

내가 아이린에게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아이린은 조금도 걱정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저한테 맡겨요.”

그렇게 말한 아이린은 혼자서 경비들에게 다가갔다.

“웬 놈이냐!”

그 모습은 경매 직전이라 신경을 곤두세우던 경비들의 시선을 끌었다. 경비들은 도끼와 쿠크리를 교차하며 아이린의 앞을 막아 세웠다.

바로 눈앞에 서슬 퍼런 날붙이가 있는데도 아이린은 조금도 주눅 든 기색이 없었다.

“헤헤, 안녕하세요. 죄송한데 제가 길을 잃어버려서요. 혹시 블랙마켓의 출구가 어딘가요?”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린에게서는 감출 수 없는 순진함과 무해함의 에너지가 흘러넘쳤다.

성녀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원작 여주인공’이라서?

잔뜩 긴장하고 있던 경비들마저 그 모습을 보고 맥이 턱 풀리는 듯했다.

“완전히 반대로 왔잖아. 여기는 블랙마켓의 제일 깊은 곳이라고. 출구는 저쪽이다.”

“어린 아가씨가 왜 이런 데에 있어? 아저씨들 방해하지 말고 어서 저리 가라.”

그들은 눈에 띄게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나는 상대들의 기미를 살펴보았다. 아이린의 등장에 경계심을 드러내며 호출용 마도구를 들어 올렸던 자들은, 상대가 길 잃은 어린 여자애라는 사실을 깨닫자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마도구를 내려놓았다.

아이린 역시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다.

“흐아암. 빨리 경매 끝내고 퇴근이나 하고 싶네.”

마지막 한 남자가 하품을 하며 마도구를 내려놓는 그 순간이었다.

아이린에게서 시릴 듯이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무리 추악한 존재라도 정화해 버릴 듯 신성하며, 폭발적인 빛.

“뭐, 뭐야?!”

남자들이 채 상황을 인식하기도 전에, 그녀의 신성력은 제일 먼저 내려 놓아진 호출용 마도구들을 관통했다.

‘신성력과 마력은 서로 대척점에 있으니까, 신성력을 충돌시켜 마도구를 무력화시키는 거구나.’

마도구에 담긴 마력이 아무리 많더라도 성녀의 신성력만큼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이 계집이!”

“무슨 짓이냐!”

이변을 깨달은 남자들이 황급히 마도구를 작동시키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마도구는 평범한 돌덩이가 되어 버렸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경비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아이린이 두 손을 모았다.

“얍! 주무세요!”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온 빛이 제일 가까이 있는 남자의 머리를 관통했다.

성녀의 신성력을 정면으로 맞은 남자가 쓰러지고, 다른 남자들이 도끼며 쿠크리, 나이프 등을 휘두르며 아이린에게 덤벼들었다.

“이 년이! 박살을 내어 주마!”

하지만 자신의 명만 단축시키는 행동이었다.

깡! 깡! 흉기가 투명한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한 소리를 냈다.

그때 아이린이 다시 한번 빛을 뿜었다. 아이린의 머리카락 끝에도 스치지 못한 채, 모든 경비들이 쓰러졌다.

아이린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이 사람들 죽은 거 아니죠?”

“에이, 설마요.”

컨테이너마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긴 했지만, 남자들이 떨어뜨린 무기와 아이린의 신성력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우리는 곧장 아이들의 기운이 느껴지는 컨테이너의 문을 열었다.

터엉! 열린 문 안으로 조명의 빛이 비쳐들었다.

빛 한 줄기 없던 컨테이너 안에서 가녀린 비명 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얘들아, 괜찮니?”

아이린이 신성력으로 작은 빛을 밝히며 물었다.

그 안에는 5살부터 15살 사이로 보이는 아이들이 10명 있었다. 각자 바닥에 주저앉거나 무릎을 끌어안은 채 다가올 경매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붉어진,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아이들. 그 모습을 보자 숨이 턱 막혔다.

마음이 아픈 것은 물론이고 아이들을 이곳까지 끌고 온 자들에게 화가 났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을 표현할 때가 아니었다. 아이들을 안심시켜주기 위해서는 어른이 침착해야 한다.

“얘들아, 이제 괜찮아. 우린 너희를 도와주러 왔어.”

내가 미소 지으며 손을 뻗었다.

“우리랑 함께 갈래? 너희를 집으로 돌려보내 줄게.”

다행히 내게 아이들을 달래고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제 곧 경매가 시작될 거예요! 그 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쳐야 해요.”

내가 아이들을 달래는 동안 망을 보던 아이린이 소리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가요.”

“저, 그런데……. 우리는 가면으로 정체를 숨길 수 있었지만 이 아이들은 너무 작아서 눈에 띄어요. 어떡하죠?”

주저하던 아이린이 내게 속삭였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에 대한 대책은 이미 생각해 둔 상태였다.

“제게 방법이 있어요.”

* * *

“신사 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제127회 플로렌틴 블랙마켓 특별 상품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신이 나서 떠들어 대는 사회자에게로 열화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연거푸 몇 마디의 인사말을 더 내뱉은 그가 경매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럼 첫 번째 상품을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경매장 직원이 수레를 끌고 왔다. 그 위에는 2m 높이의 무언가가 자주색 비단에 덮여 있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몬테규 백작의 저주받은 거울입니다!”

“오오오.”

사회자의 말에 몇 명의 사람들의 탄성을 터뜨렸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무엇이든 거울에 비치는 것은 저주받아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고 하죠.”

무시무시한 말이었지만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 아무도 무서워하거나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더욱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일 뿐이었다.

사회자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저주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 현재 거울의 능력은 마도구로 단단히 봉인된 상태입니다! 거울의 아름다운 양각과 백금 장식을 보여 드릴 수 있게 비단을 치워보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는 당당하게 수레 앞으로 나아가서, 비단의 끝을 잡았다.

“자, 시작가는 50만 테트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주목해 주십시오!”

촤르륵! 힘주어 잡아당긴 비단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2m 높이의 거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아아아!”

그러나 기대감 가득했던 구경꾼들의 얼굴이 굳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거울 한가득 사회자의 모습이 비쳐졌다. 하지만 거울의 능력을 봉인하고 있다던 마도구는 어디에도 없었다.

“응?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 뜻을 깨달은 사회자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곧, 거울 속의 사회자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는 눈을 희번덕 뜨곤, 거울 밖으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꺄아악!”

“큰일이다! 저주받는다!”

“자, 잠깐만! 이, 이건 정해진 거랑 다르잖아!”

구경꾼들이 깜짝 놀라 우르르 물러났다.

사회자 역시 도망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거울 속 자신의 낫처럼 긴 손가락에 붙잡히고 만 것이다.

“으, 으아아아악! 살려 줘, 살려 줘어!”

거울이 사회자를 붙잡아 끌고 가려 하자 두 사람이 그를 도와주려 잡아당겼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오히려 고통만 가중될 뿐이었다.

“제발! 살려 주세요! 으아아악!”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회자가 거울 속으로 완전히 끌려 들어가 사라졌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무대 뒤에서 쿵, 쿵, 하는 수상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신음 소리나, 동물의 울음소리 같은 것도 들려왔다.

한 직원이 뛰쳐나왔다.

“큰일 났습니다! 겨, 경매에 나올 마도구들이 풀려났습니다! 어서 대피하십시오!”

“짐승들도 전부 풀려났습니다!”

경매의 책임자가 새파래진 얼굴로 뛰쳐나와 직원의 멱살을 잡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떤 놈 소행이야!”

“커헉, 그, 그건 저도 모릅니다……!”

“여기서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어서 도망치십시오! 모든 분들!”

그 말을 끝으로…….

와드드득! 끔찍한 굉음과 함께 무대가 부서져 나갔다. 그 사이로 머리가 두 개인 거대한 코브라가 나타나 혀를 낼름거리며 4개의 눈을 굴렸다.

“으아아악!”

“꺄아아아악!”

그제야 관중들이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혀를 낼름거리며 먹잇감들을 뒤쫓는 코브라와…….

날아다니며 불을 뿜는 책, 찬란한 은빛으로 빛나는 늑대, 붕대를 질질 흘리며 걸어 다니는 미라, 손가락으로 걸어 다니는 손, 거대한 거미 등등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 사방에서 뛰쳐나왔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고함과 비명 소리. 혼란에 빠져 도망치는 사람들. 블랙마켓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그리고 일을 이렇게 만든 원흉은 당연히…….

“라리아! 혹시 천재 아니에요?”

아이린이 눈을 반짝이며 내 손을 잡았다.

“마도구와 동물들을 풀어 줄 생각을 하다니! 덕분에 속이 좀 시원해졌어요.”

물론 나와 아이린이 꾸민 짓이었다. 경매에 나올 예정인 마도구와 동물들을 풀어 준 것이다.

딱, 블랙마켓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을 정도로만.

지나치게 위험하거나 피해 범위가 큰 것은 우리까지 휘말리거나 블랙마켓을 빠져나가 인근 주민들에게 피해를 줄지도 모르기에 제외했다.

“이제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도 눈에 좀 덜 띄겠죠.”

나는 쑥스러움에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이제 가요. 딱 도망치기 좋게 혼란스러워진 것 같네요.”

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인파에 섞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얏! 도, 도와주세요!”

“이런, 괜찮니?”

급하게 도망가던 아이들 중 한 명이 물웅덩이에 발을 미끄러져 심하게 넘어졌다.

나는 다급히 아이의 상처를 살폈다. 긁힌 상처는 크지 않았지만 발을 삔 듯 발목이 붉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걷는 건 무리일 것 같아요.”

아이린이 걱정스레 말했고, 나도 동의했다.

“내가 안아서 데려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리 오렴.”

나는 이미 가장 어린 아이를 업고 있었기에, 앞뒤로 다친 아이까지 두 아이를 들었다. 내가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두 아이를 데리고 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자연히 우리의 발걸음은 확연히 느려졌다. 인파에서 눈에 띄게 뒤로 쳐지고 말았다.

그것을 빌미로 해서, 눈에 띄어선 안 되는 사람들의 눈에 띄어 버렸다.

“여기 있었군! 노예들이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결국 들키고 말았구나.’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블랙마켓의 경비들이 우리를 포위한 채 노려보고 있었다.

“어쩐지, 마도구들이 스스로 풀려날 리 없다 싶었는데. 쥐새끼들의 소행이었군.”

“아가씨들, 도둑질은 범죄라는 사실을 모르나? 응?”

그 숫자는 약 스무 명 정도. 게다가 모두가 무장을 하고 있었다.

‘아이린 혼자서라면 충분히 당해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어렵겠지.’

혼자서 적에게 맞서는 것과 열 명이나 되는 어린아이들을 지키며 싸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니까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린의 얼굴은 머리카락만큼이나 희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사내들을 노려보았다.

“아이들을 탈출시키고, 블랙마켓을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이런 귀여운 여자애들이었을 줄이야! 상상도 못 했는데.”

“한 달에 한 번 있는 마켓이 엉망이 되어 버려서 책임자님께서 굉장히 화가 나셨다고.”

“아가씨들 정말 큰일 났는걸. 우리 책임자님께선 자비가 없는 분이시니까 말이야.”

한 남자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우리를 향해 팔을 뻗었다. 금방이라도 우리를 붙들고 그 책임자라는 사람에게 끌고 가려는 모양이었다.

“자, 그럼 갈까?”

그때 아이린이 내게 속삭였다.

“제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네? 하지만, 그러다가 아이린이 다치면 어떻게 해요!”

“방법이 없는걸요. 제가 최대한 시간을 벌어 볼 테니 라리아는 아이들과 함께 도망치세요!”

‘이걸 어떻게 하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아이린을 위험에 빠뜨려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경비대장님! 큰일 났습니다!”

어디선가 또 다른 경비원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왔다.

금방이라도 내 팔을 움켜쥐려고 하던 남자가 손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뭔 호들갑이야? 노예들이 탈출하고 마도구와 짐승들이 날뛰는 블랙마켓보다 큰일이 더 있냐?”

“그, 그, 그보다 훨씬 더 큰 일입니다! 기사단…… 기사단입니다!”

“뭐라고? 신성 기사단?”

“아니요! 검은 갑옷을 두른…… 저런, 저런 괴물들은 난생처음 봅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콰앙! 엄청난 굉음이 블랙마켓을 뒤흔들었다. 비명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지금까지의 혼란 따위는 그저 전조에 불과했다는 양.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아돌프가 그를 데려왔구나.’

심장이 안도감으로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저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싸늘하게 식어 가던 손끝과 발끝에 따스한 온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상황을 눈치챈 나와 달리 아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들었어? 괴물이 나타났대!”

“엄마……!”

나는 울먹이는 아이들을 최대한 끌어안고 토닥이며 말했다.

“아니야, 안심해도 돼. 이제 우리는 모두 괜찮을 거야.”

읊조리는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신뢰감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여기 있었군.”

단단하고 냉랭하지만 내게는 한없이 달콤하게만 느껴지는 그 목소리.

주황색 조명에도 빛바래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그가. 마치 검은 기운을 두르고 있는 듯한 남자가 서 있었다.

녹턴이었다. 그가 나를 위해 찾아와 준 것이다.

그의 얼굴은 블랙마켓의 혼란스러움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하지만 무감정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는 적을 얼어붙게 할 정도의 불길함이 느껴졌다.

유난히 키가 큰 몸에 두른 검은 옷 때문일까? 손에 검을 들고 있기 때문일까?

고작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20명이나 되는 남자들을 압도하는 무게감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것을 깨달았는지 경비대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다 못해 검게 죽어 버리고 말았다.

“너, 넌 뭐냐!”

하지만 녹턴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 없다는 듯이, 그의 눈은 올곧게 나만을 향하고 있었다.

아마 내 안위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내게 닿을락 말락 하던 경비대장의 손 위에서 멎었다.

녹턴은 그제야 상대에게 시선을 주었다.

“감히 내 여자를 건드리려고 한 책임을 져야 할 거다.”

“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너 혼자서 우리 전부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경비대장이 목에 핏대가 서도록 소리쳤다.

하지만, 그 태도는 정말 당당하거나 자신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행동처럼 보였다.

그는 이미 녹턴의 위압감에 완전히 짓눌리고 있었다.

“묵사발을 내 줘라!”

경비대장이 명령했고, 경비들이 우르르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크어억! 커컥, 컥…….”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들은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상대가 되긴커녕, 눈 깜짝할 사이에 우르르 쓰러져 나갔을 뿐만 아니라…….

녹턴에게서 가장 멀리 있던 경비대장마저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의 손등에는 어느샌가 검이 박혀 있었다.

“세상에!”

아이린이 놀라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나는 서둘러 아이들의 눈을 가려 주었다.

“이건 라리아에게 더러운 손을 대려 한 값.”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한 녹턴이 경비대장의 머리를 짓밟아 눌렀다.

“이건.”

“살려 줘! 제발, 살려 줘! 다, 다신 안 그럴게. 무슨 일이라도 할 테니…… 제발!”

그가 경비대장의 손에서 검을 뽑아 이번에는 그의 목에 꽂았다.

콰직! 살과 뼈가 으스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허헉, 커컥…… 컥…….”

“내 마음에 들지 않은 값, 이라고 해 두지.”

쿵, 경비대장의 몸이 쓰러지자 녹턴이 우리를 돌아보았다.

순식간에 스무 명의 남자들을 쓰러뜨렸는데 녹턴은 머리카락이 살짝 흐트러진 것을 제외하면 너무나 멀끔했다.

심지어 그에게는 피 한 방울 튄 자국조차 없었다.

“녹턴.”

내 목소리에 담긴 반가움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견디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가서 안겼다.

녹턴과 블랙웰 기사단이 도착하자 진압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블랙웰 기사단은 아직 다 도망치지 못한 블랙마켓의 고객과 상인, 간부들까지 사로잡은 것은 물론이요, 상품이나 서류 등 불법 행위의 증거자료까지 확보했다.

녹턴의 말에 따르면, 증거물과 간부들의 자백 덕분에 도망친 사람들 역시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나와 아이린이 풀어 놓은 마도구와 동물들 역시 어렵지 않게 제압되었다.

기사들에게 아이들을 안전한 성국으로 보낼 것을 부탁하고 나니 맥이 탁 풀렸다.

‘해냈구나.’

나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떠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모두 무사해. 한 아이도 빠짐없이 구해 냈어.’

나도 모르는 사이, 내심 긴장을 많이 하고 있었던 것일까. 마치 다리가 흐물흐물 녹아 버릴 것처럼 안심이 됐다.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내 곁에는 그가 있었다.

녹턴 블랙웰. 내가 아는 한 누구보다도 강하고, 또 누구보다도 내 편인 남자.

‘그가 분명 와 줄 것이라는 것 정돈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아이린과 함께라고 해도 블랙마켓에 단둘이 뛰어드는 일은 분명 무서운 일이었다.

내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을 반드시 구해 내야겠다는 정의감과 사명감 덕분이기도 했지만…….

역시 그라면 분명 한달음에 달려와 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를 믿고 있었기에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크고 단단한 손을 잡았다.

분명 오전에만 해도 얼굴을 봤는데, 어쩐지 아주 오랜만에 만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와 주어 정말 고마웠어요.”

아까도 감사 인사를 했지만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경비원들에게 붙잡혔을 때는 솔직히 정말 무서웠는데, 녹턴을 보는 순간 마음이 탁 놓이더라고요.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몰라요. 저 자신도 놀랄 정도였어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 있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아돌프에게 소식을 들었을 때 많이 놀라셨죠? 밤늦은 시간에 이렇게 달려오느라 정말 고생하셨어요.”

녹턴은 트레이드 마크인 무심한 얼굴로 나를 빤히 보다가…… 뺨을 꼬집었다.

“잘 아는군.”

“아야야.”

녹턴은 등을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의 깊은 자색 눈은 내가 본 그 어느 때보다도 가늘어져 있었다.

“너와 성녀 둘이서 플로렌틴의 블랙마켓에 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내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대체 요 쪼끄만 몸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온 거지? 응?”

쪼끄맣다니, 평균 키는 충분히 넘는데! 하지만 남자치고도 거구인 그에게는 내가 위태로울 정도로 작아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로 반박을 할 정도로 내가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나는 반성하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됐다. 그런 말을 들으려고 한 말이 아니야.”

녹턴은 등을 펴고 마른세수를 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야 내가 위험한 짓을 한 건 사실이니까. 내가 그였어도 분명히 많이 걱정했었으리라.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다시 한번 사과했다.

“정말 죄송해요. 저도 정말로 녹턴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아이들이 금방이라도 팔려 나가거나 위험에 처할까 봐 너무 걱정됐어요.”

“…….”

녹턴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 후, 그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아는 넌 그런 녀석이지, 라리아.”

이게 무슨 뜻일까? 나는 눈을 굴리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녹턴이 말을 이었다.

“자신의 안위보다 다른 사람의 안위가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녀석 말이다. 하지만, 이제 네 안위는 너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둬라. 내가 있고, 자네트와 미하일이 있지 않나.”

그의 말에 나는 왠지 부끄러워졌다.

내 안위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말은 쑥스럽고, 미안하고, 또 기뻤다.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기억할게요.”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녹턴이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말했다.

“앞으로 또 남을 위해 네 몸을 내던지고 싶은 생각이 들면,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내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라. 내가 이성을 잃으면 어떤 꼴을 보게 될지 알고 있겠지? 결코 유쾌하지는 않을 거다.”

이건…… 협박인가? 나는 침착하게 생각했다.

‘앞으론 진짜 조심해야겠다.’

“네, 그럴게요.”

“대답은 참 잘하지.”

그가 빈정댔다. 하지만 그 비꼬는 말투 뒤에 얼마만큼의 걱정과 애정이 숨어 있는지 아는 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이린의 연락을 받은 성국의 인물들이 뒤늦게 도착했다. 범죄의 수사를 담당하는 신관과 신성 기사단원들이었는데, 그중에는 대신관도 있었다.

“이런 일을 겪게 해 드려 정말로 면목이 없습니다. 성국의 근교인 플로렌틴에서 이런 대규모의 암거래 시장이 운영되고 있었다니,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조금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암거래 시장을 운영한 범죄 조직을 소탕하는 것을 지원해주신 블랙웰 대공과 블랙웰 기사단에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과연 정말로 몰랐을까? 나는 대신관의 말에 믿음이 가지 않았다.

성국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 것은 둘째 치고, 성국의 사형 집행장과 아주 가까운 곳이 아닌가.

하필 이런 곳에 블랙마켓이 존재했다는 것이 나는 도저히 우연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녹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서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표정을 숨기는 데 도가 튼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모를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약혼녀가 위험에 빠진 것은 성국의 치안 관리 소홀에도 책임이 있소. 블랙웰은 이번 일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이번 사건은 성국과 블랙웰이 공동으로 수사하도록 하겠소.”

녹턴이 엄격한 태도로 말했다.

내가 피해를 당할 뻔했다곤 해도 진짜로 당한 건 아닌 데다가 성국은 엄연히 타국이었다. 성국의 자치권을 침해하는, 다소 외교적 결례가 될 수도 있는 요청인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저 역시 이번 일은 깊은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블랙웰 대공가에 성국을 대표하여 사죄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랙웰 대공가의 위세 때문인지, 대신관은 녹턴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블랙웰 대공가가 정말 대단하긴 하구나. 성국은 전 대륙의 문화적 중심지라고 볼 수도 있는 곳이기에 프라이드가 아주 높다고 들었는데, 그런 성국에서 공동 수사 요구를 받아들이다니.’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어쨌든 블랙웰에서 함께 수사를 한다니 안심이 됐다. 대신관이 아무리 못 미덥다고 한들, 녹턴이 개입을 한다면 대신관도 뭘 어찌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장을 블랙웰 기사단과 신성 기사단에게 맡긴 뒤 우리는 함께 블랙마켓을 빠져나왔다. 밖에 나와보니 밤하늘엔 이미 새벽별이 빛나고 있었다.

* * *

워낙 큰 사건이었기에 다음 날에도 할 일이 많았다.

라리아는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 주었고, 고아거나 보호자가 직접 블랙마켓에 아이를 팔아넘긴 아이들은 고아원으로 보냈다.

또한 블랙마켓에서 입수된 밀렵된 동물들을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플로렌틴의 축제가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자네트와 미하일, 아돌프는 굉장히 아쉬워했다. 라리아는 아이들에게 더 재미있는 관광지를 찾아 함께 가 주기로 약속했다.

“그건 그렇고 성녀와 플로렌틴에는 어쩐 일로 간 거지? 그다음 날에 축제에 가게 되어 있었지 않나.”

녹턴의 질문에 라리아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답변을 했다.

“네, 다음 날에 아이들과 함께 축제에 참석할 예정이었잖아요. 그래서 사전답사를 하려고 했었어요.”

“사전답사?”

“네. 체험학습을 하기 전에 해당 장소가 아이들의 체험에 적합한지 확인하고 필요한 정보를 조사하는 일이에요. 아동교육학을 공부할 때 배웠어요.”

하지만 그녀의 말에는 모순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간 곳이 축제가 벌어지는 중심부가 아니라 외곽 지역이었다는 거지.’

눈치가 빠르고 명석한 녹턴은 라리아가 플로렌틴에 간 이유가 사전답사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라리아가 성국행을 결정한 이유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라리아의 말대로, 그녀가 평소 성국에 관심이 있어 여행을 오고 싶었다고 하기에는 확실히 이상한 점들이 있었다.

우선은, 종교 국가인 성국에 관심을 가지기에는 그녀가 평소 종교에 너무 관심이 없고 무지했다는 것.

또 여행을 즐기러 왔다기에는 이곳에 온 그녀가 관광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까지.

성국에 온 뒤 라리아는 좀처럼 스스로는 주변을 관광하려 하지 않았다. 어쩌다 관광지에 간다고 해도 거의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성국 여행이 꿈이었다는 사람치고는 확연히 이상한 행동이었다.

그렇다면 라리아가 성국행을 결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녹턴은 그것이 라리아의 정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것밖에는 없었다. 그가 라리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그녀의 특이한 색채의 이유뿐이었다.

라리아가 플로렌틴에 온 이유, 더 나아가서 성국에 온 이유 역시 분명 그것과 관련이 있으리라.

‘문제는…….’

그가 이전에 라리아에게 약속했던 것이 있었다.

‘네가 알려 주고 싶지 않다면 앞으로 나는 결코 너의 정체에 대해 물어보거나 궁금해하지 않으마.’

녹턴은 그 약속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약속에 따르면 그는 라리아의 정체에 대해 물어보긴커녕 의문을 품어서도 안 됐다.

‘만일 그녀가 플로렌틴에 간 이유가 그녀의 정체와 얽혀 있다면…… 더 이상 그녀가 그곳에 간 이유에 대해서 물어서는 안 되겠군. 궁금해해서도 안 되고.’

불만은 없었다. 자신이 한 약속이었으니까.

더군다나…….

‘그녀가 성국에 온 것도, 플로렌틴에 간 것도 분명 이유가 있는 일일 터.’

라리아가 선택한 일이라면 결코 자신이나 아이들에게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어쩌면 영원히 그의 곁에 있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정체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려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에게 자신의 정체에 대해 설명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그래, 그녀가 하는 일이 걱정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만 그녀가 걱정되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또다시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다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정말 만에 하나…… 생명의 위협을 겪기라도 한다면.

그저 가정을 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된다면…… 이성을 유지하려고 했던 오랜 노력도 전부 물거품이 되겠지.’

그것만이 걱정이었다.

위험한 짓은 하지 말라 말해 두긴 했지만, 그녀가 한없이 다정하고 순진한 듯하면서도 본인이 결심한 일은 하지 말라고 해도 기어코 해내는 성격이라는 사실을 녹턴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안 듣는 경우 정도는 충분히 상정해 두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나로서도 어쩔 수 없지. 그녀와 했던 약속을 깨지 않는 선에서, 어떻게든 그녀의 안전을 위한 조치를 취해 두는 수밖에.’

녹턴은 그렇게 생각했다.

며칠 뒤, 녹턴은 홀로 대신전을 찾았다. 그가 찾아간 사람은 바로…….

“대공 전하! 제게는 무슨 일이세요?”

성녀 아이린이었다.

그의 모습을 본 아이린은 깜짝 놀랄 수밖에는 없었다. 대공가에서 방문자가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당연히 라리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음.”

아이린을 본 녹턴은 습관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그에게 아이린은 좀 껄끄러운 상대였다. 첫 만남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녹턴은 라리아가 자신에게 그녀를 소개시켜 주었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잘못이 없는 아이린을 위협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타인을 하대하는 것이 익숙했는데 마음 놓고 하대하기에 그녀는 라리아의 너무 친한 친구였다.

아이린을 어떻게 대해야 라리아가 불쾌해하지 않을지, 그것은 아직도 녹턴의 고민거리였다.

잠시 말을 고르고 있는데 아이린이 빙그레 웃었다.

“제가 맞춰 볼게요! 라리아 때문이죠?”

“그걸 어떻게.”

무심코 내뱉었던 녹턴은 입을 다물었다.

하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녹턴은 아이린에게 라리아의 제일 친한 친구라는 점을 제외하면 티끌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아이린에게 연락을 취한 것도 이번이 난생처음인 건 당연지사다.

‘이런 애송이 성녀한테도 허를 찔려서야.’

녹턴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이린은 혀를 쏙 빼물었다.

“뻔하죠 뭐. 라리아에 대해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고민거리라도?”

사실 아이린도 녹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첫 만남의 기억이 너무 좋지 않았던 게 컸다.

그 뒤로는 라리아가 대신 사과를 해 주기도 했고, 라리아가 좋다고 하니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그래도 그를 직접 대하는 건 여전히 좀 껄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그래도,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가 라리아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말이다.

따라서 그는 라리아에 대한 것에 한해서는 제일 믿음직한 사람이기도 했다.

녹턴은 헛기침을 했다. 그는 고르던 말을 꺼냈다.

“너와 라리아가 뭔가 작당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돈 알고 있다.”

“작당…… 이라고요?”

“그래.”

녹턴의 배려 없는 단어 선정에 아이린의 얼굴이 잠깐 뾰로통해졌다.

‘하여간에 예의라곤 반 푼어치도 없는 사람이라니까. 그래도 뭐, 라리아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하긴 했지. 타인을 대하는 방법을 잘못 배워서 그렇지 사실은 착한 사람이라고도.’

그렇게 생각한 아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요?”

“최근 둘이 뭔가 위험한 일들을 하고 다니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가? 지난번 플로렌틴에서 있었던 일만 봐도 그렇지 않나.”

취조하는 듯한 말투가 거슬리긴 했지만 아이린은 라리아를 생각해서 참기로 했다.

“으음…… 그때 일에 대해서는 정말로 죄송하게 생각해요. 저도 성녀로서 플로렌틴의 치안을 관리하는 데에 책임이 있는데, 그곳에 암시장이 형성되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또 위험한 곳에 라리아를 끌어들인 것도요. 정말 죄송합니다.”

“됐다. 미안하다는 소리를 들으러 온 게 아니다.”

녹턴은 그 부분에 대해선 별로 신경 쓰지 않는지 손을 내저었다.

“너희의 최종 목적은 플로렌틴의 블랙마켓이 아닌 것 같으니, 앞으로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지. 내 예상에 따르면 너희는 앞으로도 위험한 짓을 계속할 거다. 그렇지 않은가?”

“……네.”

아이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녹턴은 한숨을 쉬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별달리 놀라거나 화를 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게 더 불안해서 아이린이 더듬더듬 변명을 덧붙였다.

“하, 하지만 라리아의 신변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할게요. 아시다시피 저는 성녀니까요! 신성력도 가지고 있고, 또 성국 내에서의 지위도—.”

“됐다.”

아이린의 말허리를 자르며, 녹턴은 품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 그것은 검정색 벨벳 주머니였다.

“호출용 마도구다. 그것으로 나를 호출하면, 난 너희가 어디에 있든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다.”

“…….”

“너나 나와 달리 라리아는 어떠한 힘도 없다.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한 것을 제외하면, 정말 평범한 여자애지.”

그런 말을 하는 녹턴의 얼굴에는 너무나 짙은 걱정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라리아가 그 일을 하는 데 내가 아닌 너에게 의지하기로 결정했다면 나는 그녀를 막을 수 없다. 그러니…… 위기 상황에서 그녀를 지켜 줄 사람은 너뿐이다.”

자신에게는 밝히지 못하는 것을 아이린에게는 밝히고 도움을 요청하는 이유. 뭔가 사정이 있겠지 싶지만 질투가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아이린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주저되기도 했다. 이러면 꼭, 이번 일에 있어 라리아의 파트너는 자신이 아니라 아이린이라는 사실을 인정해 버리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질투심으로 속에서 천불이 난다 해도…….

그보다 훨씬 소중한 것이 라리아의 안위였기에. 녹턴은 이 길을 선택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니 블랙웰의 모든 명예를 걸고 부탁하겠다, 성녀. 너는 라리아의 곁에서 떨어지지 마라. 그녀를 지키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나를 불러 주길 바란다.”

“…….”

“만일 네가 진정으로 라리아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말이다. 라리아를 소중하게 여기나?”

녹턴이 물었다. 아이린은 놀란 얼굴로 그의 자색 눈동자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너무나도 올곧고 단단했다. 어떠한 주저함도 없는 감정. 라리아에 대한 한결같은 애정.

그것을 본 아이린은 빙긋 웃었다.

‘정말 라리아의 말대로구나.’

그녀는 벨벳 주머니를 받아들며 말했다.

“물론이죠. 라리아는 제 유일한, 그리고 최고의 친구예요.”

녹턴의 진실을 보는 눈에 보이는 아이린의 영혼에서 거짓의 기색은 없었다.

녹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고맙다, 성녀. 라리아의 안위를 무사히 지켜 준다면 블랙웰에서는 너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그런 협상의 도마 위에 오를 정도로 제 우정이 싸구려는 아니거든요? 걱정일랑 붙들어 매세요.”

성녀가 아무리 높은 지위라지만, 녹턴 같은 든든한 권력자가 차기 성녀의 뒤를 받쳐 준다면 입지 다지기에 굉장한 도움이 될 것이었다.

순진하고 철없다지만 아이린 역시 성녀였다. 이 정도도 모를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녹턴의 제안을 고민도 하지 않고 거절한 것이다.

‘이 여자의 라리아에 대한 애정은 진심이군.’

아이린의 진심 어린 우정을 엿본 녹턴은 그렇게 생각했다.

본디 녹턴은 인간의 감정을 믿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도 한때 감정을 굳게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나뿐인 형과의 우애가 영원히 변치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어린 날들.

치기 어리고 어리석었던 시절.

그때의 일은 그에게 여전히 너무나 큰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속 어딘가가 쥐어짜이는 것처럼 아플 정도로.

18세 이후로 6년 동안, 녹턴은 줄곧 ‘감정’이라는 것을, ‘관계’라는 것을 믿지 않고 살아왔지만…….

그것 역시, 라리아의 존재로 인해 달라졌다.

‘다시 누군가를 믿고, 또다시 그런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결국 그는 다시 한번 누군가를 믿는 ‘어리석은 짓’을 해 보기로 다짐하지 않았던가.

만일 예전의 그였다면 라리아에 대한 아이린의 애정 역시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린을 겁박하거나 위협을 해서라도 자신의 말을 듣게 만들었을지도.

그렇다고 마음 여린 풋내기 성녀 따위가 블랙웰 대공인 자신을 어쩌겠냐만은, 어쨌든 돌고 돌아 라리아와 갈등을 겪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녹턴은 달라진 자신을 깨닫고 홀로 피식 웃었다.

‘내 삶에서 라리아로 인해 달라진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군.’

이제 라리아가 없는 자신의 삶 같은 건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한편 녹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아이린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결국 아이린이 말을 걸기 전에, 녹턴이 먼저 말을 이었다.

“알겠다. 앞으로의 활동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부담 없이 연락하도록.”

“네, 그럴게요.”

그렇게 두 사람은 라리아에 대한 논의를 마치고 헤어졌다. 라리아, 당사자는 상상도 하지 못할 내용의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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