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4권) (16/20)

남주의 복지를 책임지겠습니다 4권

(16)

* * *

“히히히!”

“키득키득!”

헤더의 눈을 속여 어린이방에서 빠져나온 자네트와 미하일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5살 인생 최초로 손에 넣은, 어른 없는 완전한 자유였다!

라리아는 그동안 종종 자네트와 미하일의 귀여운 모습을 영상구로 찍어 놓고는 했다.

아이들은 헤더의 눈을 속이기 위해 방문 앞에 아지트를 설치했다.

그리고 아지트 안에서 영상구를 재생해 두고, 문에 달린 애견 출입구를 통해 몰래 빠져나올 수 있었다.

“라리아 아푸니까, 선물 갖구 가자.”

“조아!”

자네트와 미하일은 병문안 선물을 준비한 뒤 라리아의 병실로 향했다. 라리아가 아이들을 몇 번 자신의 방으로 데려간 적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라리아의 방을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라리아의 방문 앞 복도에서 멈추어 섰다. 방문에 귀를 갖다 대자,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 차도는 아직인가?”

“……송합니다. 저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아이들은 그것이 양부 녹턴과 상주의사 프레드릭의 목소리임을 깨달았다.

“몰래 들어가야 하는데, 어뜨카지?”

미하일이 자네트의 귓가에 대고 속닥거렸다. 만일 저들이 병실에 있는 지금 들어가면 곧장 쫓겨날 것을 두 아이는 직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헤더와 달리 녹턴을 속이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여기서 시간을 너무 끌어 버리면 헤더가 아이들이 없어진 걸 눈치채고 찾으러 올 것이었다.

“끄으응…….”

두 아이는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뽀얀 이맛살을 한껏 찌푸리고 고민하던 자네트의 눈에, 그들의 옆에 있던 커다란 갑옷 장식품이 눈에 들어왔다.

“아항!”

자네트의 보라색 눈동자가 또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한편.

라리아가 쓰러진 뒤 녹턴은 한시도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늘을 두른 낯빛으로 그녀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거나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는 것만이 그의 일과의 전부였다.

프레드릭과 시몬은 그런 주인이 걱정되었다.

라리아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느라 밤에는 소파에서 쪽잠을 자고 끼니는 목숨만 붙어 있을 정도의 최소분량을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그였다.

씻을 때와 잘 때를 빼곤 라리아의 곁에서 일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그에게 시몬이 간청했다.

“주인님,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셔우드 영애의 곁은 저와 프레드릭이 지킬 테니 주인님께서는 부디 한 번이라도 휴식을 취하십시오. 이러다가 옥체에 손상이라도 가면 셔우드 영애께서 슬퍼하실 겁니다.”

주인에 대한 충심에서 나온 간언이었으나 녹턴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이 정돈 아무렇지도 않다. 전쟁 중에는 칠 일 동안 물 한 모금, 마른 빵 한 조각으로 버티던 나다.”

“하, 하지만 주인님…….”

“듣기 싫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 봤자, 라리아가 겪은 고통에 비하겠느냐?”

그렇게 시몬의 말을 일축한 녹턴은 다시 애틋한 눈을 라리아에게로 돌렸다.

주사로 꾸준히 영양 공급을 해 주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며칠 사이에 앙상해져 있었다.

그녀의 파리한 손을 고쳐 잡은 채 다시 석고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녹턴을 보며 시몬은 심란함을 감추지 못했다.

‘셔우드 영애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그러던 그때였다.

펑! 병실의 문 바로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프레드릭과 시몬은 기겁했다.

“으악! 이, 이게 무슨 일이지?”

펑, 퍼버벙! 펑! 펑! 펑!

그 소리는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프레드릭과 시몬은 혼비백산해서 병실에서 도망칠 준비를 했다.

“테, 테러인가?”

“이, 이게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대, 대공저가 고, 공격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주인님!”

큰 소리가 들리자마자 라리아를 보호하듯 끌어안았던 녹턴은 몇 초 뒤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레드릭과 시몬은 예장용 대포나 신호탄이 아닌 진짜 폭탄이 터지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는 듯했지만, 녹턴은 아니었다.

‘이건 폭탄이 아니라…… 폭죽의 소리로군.’

왜 지금 이 상황에서 병실 문 앞에서 폭죽이 터지는가. 녹턴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중 가장 확률이 높은 가능성은…….

“둘 다 나가 봐라.”

녹턴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프레드릭과 시몬은 펄쩍 뛰었다.

“예? 하, 하지만, 주인님과 영애님은……!”

“위험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나가 봐라.”

녹턴을 오랜 시간 모셔온 프레드릭과 시몬조차 그의 눈빛은 무서워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주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자네트와 미하일은 프레드릭과 시몬이 병실 밖으로 뛰쳐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킥킥, 성공이야!”

“이제 드러가자.”

두 아이는 창고에서 폭죽을 찾아낸 뒤 갑옷 장식품에 넣어 한꺼번에 터뜨렸다.

폭죽들이 한꺼번에 터지는 어마어마한 소리는 꼭 폭탄의 굉음처럼 들렸다.

두 아이는 드디어 라리아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푼 가슴으로, 그녀를 위해 준비한 선물들을 한가득 안고 병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은 라리아뿐만이 아니었다.

“너희가 이곳엔 무슨 일이지.”

아이들이 방에 들어가자마자 방문이 음산한 끼이익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리고 키가 아주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장신의 남자가 그 앞을 막아섰다.

“그것도 이런 소란을 일으키면서까지 말이다.”

바로 녹턴이었다.

녹턴은 자색 눈동자 위에 형형한 눈빛을 띄우며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힉.”

투두둑. 질겁한 아이들의 품에서 선물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미하일이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아…… 으아…… 아, 아버…… 지…….”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신이 나 있던 아이들의 얼굴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공포와 경악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녹턴의 표정은 정말 흉흉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어찌나 화가 났는지 지금 그의 모습은 검은 기운 같은 것을 내뿜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네트, 미하일. 너희에게 실망했다.”

그의 차갑기 그지 않은 목소리에 두 아이 모두가 움찔 놀라며 몸을 떨었다.

미하일은 물론 자네트까지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그런 애처로운 모습을 보면 동정심이 생겨날 법도 했지만 녹턴은 여전히 엄한 얼굴로 꾸중했다.

“라리아는 지금 병상에 있다. 그런데도 병실 앞에서 이런 허튼 장난질을 칠 생각을 하다니. 너희는 라리아가 걱정이 되지도 않는단 말이냐? 철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우…… 아…… 그, 그게. 아버지, 그게요오…….”

“내 이제껏 너희들이 어린 것을 감안해 어떤 사고를 치더라도 벌을 주지 않았지만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 못하겠군. 오늘의 일에 큰 벌을 내릴 것이니 각오하거라.”

“…….”

녹턴은 속이 답답한 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

“라리아가 너희를 얼마나 아끼고, 정성으로 대하는지 알고는 있느냐? 그런데도 너흰 어떻게…… 라리아의 병실 앞에서 이런 짓을.”

“걱정해써요!”

그때였다. 자네트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걱정, 해써요! 라리아, 개롭히려고 한 거 아니에요! 저힌…… 저힌…… 라리아가 너무 보구시퍼서……!”

자네트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히잉…… 아버지, 여기. 라리아, 선무울……. 저힌 그냥, 빨리 나으라고……. 라리아 너무 보구시퍼…….”

미하일도 훌쩍이면서 거들었다. 미하일은 아까 자네트와 자신이 떨어뜨린 선물들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들꽃 한 무더기와 유리병이었다.

미하일은 큰 소리로 훌쩍이며 녹턴에게 다가가 선물을 안겼다.

“아버지, 이거 선물…… 라리아에게 주새요. 꼭이요.”

녹턴은 완전히 뒤통수를 한 대 맞은 얼굴이 되었다.

아이 특유의 어눌한 발음에, 울면서 말하느라 알아듣기 무척이나 어려웠지만 자기 자식이라 그런지 녹턴은 아이들이 하고 싶었던 말을 어느 정도는 알아들었다.

아이들은 평소처럼 이유 없이 장난을 치거나 라리아를 괴롭히려 한 것이 아니었다.

라리아가 너무 보고 싶었던 나머지 이런 짓을 벌인 것이다.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 했던 녹턴은 미하일이 준 선물더미를 받아든 채 굳어 버렸다.

들꽃 무더기에서는 싱싱한 풀냄새가 났다. 라리아에게 줄 생각으로 아이들이 직접 꺾은 것이리라.

유리병에는 초콜릿과 사탕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하루에 한 번밖에 먹을 수 없는 간식이지만 꼭 먹고 싶을 때 먹으려고 미하일이 조금씩 모은 것이다.

들꽃 무더기 사이에서 카드가 한 장 나왔다. 카드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라리아 빠리 낳아야대」

「라리아 보구시퍼」

「조아해」

「라리아 조아」

“아, 이런…….”

녹턴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늘 하얗던 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붉어졌다가 다시 하얗게 돌아왔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연신 훌쩍이고 있었다.

녹턴은 제 앞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그가 상황을 수습하려고 입을 연 그때였다.

“내가…….”

벌컥! 또 방문이 노크 없이 열렸다.

기사 몇 명과 하녀 한 명이 허겁지겁 방문을 통해 들어오며 말했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고, 공자님과 공녀님이 사라지셨어요!”

“방 밖에 불에 탄 갑옷이 있었습니다! 내부인의 소행이 분명합니다!”

녹턴은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가 말했다.

“난 괜찮다. 괜찮으니…… 전부 나가!”

기사들과 하녀를 쫓아낸 뒤 녹턴은 다시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그가 말했다.

“내가 미안하다. 오해를 했다. 너희의 의도가…… 그런 것인 줄 몰랐다.”

“훌쩍, 훌쩍…….”

아이들이 훌쩍이면서 녹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녹턴은 멋쩍음을 숨기려 시선을 돌렸다.

“벌은 주겠다는 말은 취소하마. 그래도 앞으로 환자의 방 앞에서 이런 소란을 피우진 마라. 환자의 안정에 좋지 않으니.”

울면서도 그의 얼굴을 기대감 어린 눈으로 힐끗거리던 미하일이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그럼…… 저히……. 라리아 봐두 대요……?”

녹턴은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미하일의 선물들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한 팔에 한 명씩 자네트와 미하일을 안아 들곤 라리아에게로 다가갔다.

라리아는 수척한 모습으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이들의 얼굴에 반가운 빛이 번졌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이잉, 라리아…….”

미하일은 라리아를 빤히 보다가 그녀의 품에 얼굴을 폭 묻어 버렸다. 자네트 역시 슬픈 눈으로 그녀를 보다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바보 라리아. 빨리 일어나.”

자네트가 라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한편 프레드릭과 시몬은 조마조마했다. 주인이 방에서 나가라고 했지만 돌아올 시간은 지정해 주지 않은 탓이었다.

“이보게, 프레드.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한 번 돌아가 보는 게 어떠한가?”

“아무래도 그게 좋겠습니다, 집사님.”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방 앞으로 돌아갔다. 방 앞에는 까만 그을음이 잔뜩 묻어 있는 벽과 천장이 있었는데, 하인들이 이미 불탄 갑옷을 치운 것이었다.

“주인님, 저희가 왔습니다…….”

자신 없는 소리와 함께 프레드릭과 시몬은 방문을 노크했다. 안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녹턴이 라리아의 옆에 앉아 있었다. 아이 두 명은 라리아의 침대에 올라 그녀의 품에 머리를 기대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프레드릭과 시몬이 한탄했다.

“셔우드 영애께서 얼른 일어나셔야 할 텐데…….”

“그렇습니다. 영애께서 쓰러지신 것만으로도 저택 내의 온도가 6도는 낮아진 것 같습니다.”

“셔우드 영애께 여신의 가호가 있기를!”

시몬은 씁쓸한 얼굴로 기도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의 회복을 절실히 바라는 것은, 자신의 오랜 집사 인생 중 처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 * *

쓰러진 후로 라리아는 꿈을 꾸고 있었다. 누군가의 일생을 옆에서 지켜보는 듯한, 아주 길고 긴 꿈을.

블랙웰 대공가. 그 시초부터 만인의 두려움을 받았던, 일반적인 인간보다 우월한 인간이라고까지 평가받는 그들.

그들이 그렇게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블랙웰 대공가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어 통치에 큰 도움을 주었던 광증, 그리고 그에 잇따르는 능력 때문이었다.

광증은 혈통의 순수성의 지표로 평가받아, 간혹 광증이 나타나는 대에서는 어김없이 광증을 가진 자에게 작위가 돌아갔다.

또한 광증의 소유자는 한 사람도 어김없이 대공가를 크게 번영시켰다.

그로 인해 대공가에서는 대대로 광증을 대단히 중요시하고 숭배해 왔다.

그중에서도 선대공, 에리히 볼프강 프리드리히 블랙웰은 그 정도가 유난히 심했다.

에리히의 광증에 대한 집착은 지독했다. 그는 그것에 인생을 걸 수 있었다.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의 삶까지도.

그에게는 두 명의 자식이 있었다. 장남 셰이머스 블랙웰과 차남 녹턴 블랙웰.

본인은 광증이 없었던 에리히는 자신의 자식들이라도 광증을 가지기를 바랐다.

셰이머스가 10세, 녹턴이 8세가 되었을 때 에리히는 자식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블랙웰은 지난 4대 동안 광증을 가진 후계자를 갖지 못했다. 너희 중 최소한 한 명은 광증을 손에 넣어 혈통의 순수성을 증명하고, 우리 가문을 번영시켜야만 한다. 너희는 이런 내 목적에 따르겠느냐?”

어렸던 셰이머스와 녹턴은 아버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나 엄격하고 자식에게 칭찬을 할 줄 모르는 아버지를 기쁘게 만들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했다.

“예, 아버지.”

셰이머스와 녹턴이 대답했다.

광증이 정확히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이유로 나타나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었지만, 단 하나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사실은 ‘심각한 스트레스 상황’일 때 발작이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이날부터 에리히는 셰이머스와 녹턴이 광증을 일으키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들에게 강제로 스트레스를 주었다는 뜻이었다.

회초리, 채찍, 몽둥이. 아들들에게 충격과 고통을 주기 위한 물건은 무엇이든 동원되었다.

극한 상황에서 광증이 나타나지 않을까 싶어 일주일간 굶기기도 했다. 한겨울에 보온이 될 옷을 주지 않고 동사하기 직전까지 방치하기도 했다.

육체적 고통은 그나마 참을 만했다. 하지만 제일 참을 수 없는 것은 정신적 충격이었다.

“아악! 아아악! 도, 도련님, 사, 살려 주, 세, 으아악!”

“아, 아버지! 제발 그만두세요! 제,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그를 살려 주십시오!”

“자, 어떠냐! 이건 모두 아직까지 발작을 일으키지 않은 너희의 잘못이다. 이 녀석은 너희 때문에 죽을 거란 말이다!”

“아버지, 제발! 무엇이든 할 테니 제발 살려 주세요!”

아들들이 정을 붙이는 자는 사용인이든, 동물이든 할 것 없이 전부 죽였다. 그것도 그들이 보는 눈앞에서. 최고의 정신적 충격과 스트레스를 위해서였다.

에리히의 광증에 대한 집착은 그 자체로도 광기였다.

오로지 광증을 안겨 주기 위해 어린 아들들에게 지속적인 학대와 고문을 가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호호호, 오늘도 두 공자님께서 고생이 많으시군요.”

“그러니 더 고생하지 마시고 어서 발작을 일으켜서, 블랙웰의 이름을 더욱 드높여 주신다면 좋을 텐데!”

친척들 역시 매한가지였다. 블랙웰의 사람들은 누구나 광증을 자랑스러워하고 가지고 싶어 했다. 아무도 에리히의 폭력적인 집착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시몬?”

“예? 아, 예…….”

집사 시몬은 내심 셰이머스와 녹턴을 안쓰러워하고 있었지만 그로서도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제, 제 의사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집사일 뿐, 주인님의 뜻을 받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호호호! 정말 충성스런 집사로군요.”

“훌륭하기 그지없네요.”

시몬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주인의 눈을 피해 공자들에게 빵이라도 한 덩어리 몰래 넣어 주거나, 상처가 덧나지 않게 소독해 주는 것 정도였다.

대공가의 그 누구도 감히 대공의 뜻에 거역하거나 셰이머스와 녹턴의 편을 들어 주지 못했다.

그만큼이나 대공저 내에서 대공의 권력은 절대적이었으니까.

대공저에서 에리히의 행동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

셰이머스, 그리고 녹턴.

“으으윽.”

하루 종일 이어진 매질의 끝에 하루가 저물었다.

피투성이의 몸 위에 얇은 옷만을 간신히 걸친 채 셰이머스와 녹턴은 냉골방에 내던져졌다.

“……셰이머스.”

쉰 목소리가 형을 불렀다. 셰이머스는 다친 몸을 끌고 2살 아래의 동생 녹턴을 돌아보았다.

“응, 녹턴.”

“우린 왜 태어난 걸까.”

“…….”

셰이머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녹턴은 바닥에 누운 채 초점 없는 자색 눈동자로 컴컴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삶이…… 너무 비참해. 이럴 바엔 차라리…….”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공허한 목소리였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야.”

셰이머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의미가 없는 삶 같은 건 없어.”

그 목소리에는 불쌍할 정도로 떨렸지만, 왠지 모를 힘이 들어가 있었다.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빛이 들 거야. 녹턴, 그 말을 들어 봤지? ‘해가 뜨기 전의 새벽이 제일 어둡다.’ 우리는 행복해지려고 이런 일들을 겪는 거야.”

근거도 없고, 의미 없이 낙관적이며 피상적이기만 한 말들이라고 녹턴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그런 말들이 좋았다. 그것 덕분에 앞으로도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셰이머스는 나직하게 말했다.

“모든 일이 끝나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해질 거야.”

우리에게 행복이라는 건 정말 올까. 우리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지만 영원히 행복해지지 않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가 있다면.

“잠이 안 와, 셰이머스.”

“노래 불러 줄게.”

셰이머스는 줄곧 부르곤 했던 노래를 불렀다.

아주 오래전, 이들의 삶이 지옥으로 변모하기 전부터 종종 불렀던 노래였다. 그는 음유시인에게서 이 노래를 배웠다고 했다.

그 조곤조곤하고 나지막하며, 다정한 위로를 품고 있는 듯한 노래는 셰이머스의 따뜻한 목소리와 잘 어울렸다.

그의 노래는 상처투성이인 심장을 어루만져 주는 것만 같았다.

녹턴은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잠에 들었다. 잠을 자는 동안 만큼은 악몽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녹턴은 만일 자신이 혼자였다면 이 끔찍한 시간을 이겨 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일 그에게 셰이머스가 없었더라면, 결국 그는 충분히 자라기도 전에 죽고 말았으리라.

서로에게 의지하고 위로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견뎌 가며 세월은 흘렀다.

그렇게 셰이머스는 18살, 녹턴은 16살이 되던 해, 두 사람은 계획을 세웠다.

바로 블랙웰에서 도망칠 계획이었다.

“제국 전체에 블랙웰의 영향력이 퍼져 있으니 제국을 벗어나 서 왕국으로 가자. 그곳에서라면 블랙웰의 눈을 피해 살아갈 수 있을 거야.”

블랙웰 대공가의 공자라는 신분을 버리고 아무런 배경도, 신분도 없는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일.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녹턴은 상관없었다. 셰이머스와 함께라면 어떠한 형태의 삶이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제까지 늘 그래 왔듯이.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우리가 정말 블랙웰의 눈을 피해 탈출할 수 있을까?”

도망치다가 붙잡히기라도 하면 어떤 끔찍한 꼴을 당하게 될지, 생각만 해도 전신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두려움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녹턴은 순간적으로나마 약한 생각을 한 자신을 질책했다.

“아니야, 있을까? 가 아니라, 해야지. 우리가 탈출하지 못하는 일은 있을 수 없어. 탈출하지 못하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셰이머스는 그런 녹턴을 빤히 보았다. 자신과 닮은 이목구비. 검은 머리카락. 오랜 고통으로 인해 조금 초췌한 안색. 다정한 빛의 녹색 눈동자.

셰이머스는 씩 웃으며 녹턴의 등을 내리쳤다.

“아야.”

“나만 믿어!”

셰이머스는 얼굴 가득 시원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초췌하지만 잘생긴 그가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은 꽤 근사했다.

녹턴은 문득 자신들이 탈출에 성공하면 온 동네 여자들이 셰이머스를 줄줄이 따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마. 그저, 이 일을 해냈을 때 우리가 얼마나 행복해질지만 생각해.”

“…….”

녹턴은 자신의 허튼 생각에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어 풉 하고 웃어 버렸다.

“그래. 서 왕국으로 가면 뭘 할 거야? 셰이머스.”

“음, 작은 과일가게를 열거나, 아니면 음악을 배워보는 것도 괜찮겠지. 나는 교양 음악도 꽤 잘했으니까. 아니면 구두장이 기술을 배워 보는 것도 좋고.”

“……구두장이?”

“응. 나는 옛날부터 구두장이 일에 관심이 많았어. 재밌어 보이잖아.”

“이해를 못 하겠네. 대체 어디가?”

“나 참, 그러는 넌 서 왕국에 가면 뭘 할 건데? 너도 말해 봐.”

녹턴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서 왕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정말로 무궁무진했다. 이곳 블랙웰에서와는 다르게.

셰이머스가 계속해서 재촉하자, 녹턴은 마지못한 척 그동안 생각했던 일들을 하나씩 꺼내 놓기 시작했다.

“음…… 그럼 나는 미장이 일을 배워 볼까. 집을 짓는 일도 나쁘지 않겠지. 아니면 번역가도 괜찮을 것 같고. 아니면…….”

“뭐야, 나랑 별로 다를 바 없잖아?”

“다르지. 구두장이보다는 미장이가 나아.”

“어딜 봐서?”

킥킥거리던 녹턴은 문득 실감했다.

이렇게 웃는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무런 희망도, 꿈도 없었던 자신의 무채색 삶에 색깔이 돌아오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블랙웰에서 나간다고 생각하자 일어난 일이었다.

키득거리던 셰이머스가 문득 녹턴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알고 있지? 녹턴. 난 널 누구보다 믿는다.”

“…….”

“넌 그럴 가치가 있는 인간이야.”

누구보다 믿는다.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그런 말을 해 준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단지 광증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라는 폭언을 듣는 것도 어느덧 8년째였다.

다정한 말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낯설고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턴은 자신이 그런 말들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깨달았다.

일평생 들어 본 적도 없는 말들을 그는 계속 그리워하고 있었다.

녹턴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믿어. 셰이머스. 나 자신보다도 더 너를 믿어.”

셰이머스는 동생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가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저주받은 블랙웰에서 함께 나가는 거야!”

그렇게 해서 마침내 계획의 당일.

두 사람은 힘을 합쳐 대공성을 벗어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여기 있었군. 헛된 수작은 하지 마라. 너희는 완전히 포위됐다.”

대공령을 채 넘기도 전에 기사단을 이끌고 추격해온 친부 에리히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이 너희들을 위한 일이거늘, 어찌하여 너희는 이 정도의 일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말이냐? 모든 일이 너희를 위한 것이고 블랙웰을 위한 것일진대!”

블랙웰 기사단의 검은 갑옷과 말발굽 소리에 둘러싸였을 때 녹턴은 하늘이 노래지는 것만 같았다.

그 어느 때보다 가혹한 처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것을 녹턴은 알고 있었다.

기사들이 대공의 명에 따라 두 도망자들을 포박하기 위해 다가왔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형의 얼굴을 바라본 그때…….

“이, 이 모든 것은 녹턴이 계획한 일입니다! 저는 그의 계략에 넘어갔을 뿐입니다.”

“뭐라고?”

에리히는 물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경악했다.

물론 녹턴 역시 마찬가지였다.

“셰, 셰, 셰이머스? 그게 무슨…….”

“저는 조금도 아버지의 뜻에 거역할 생각이 없었지만, 녹턴이 저를 수면제로 재워 강제로 끌고 왔습니다. 대공성의 서재 서른일곱 번째 책장의 두 번째 단의 책들을 모두 뽑아 보십시오. 그곳에 제가 숨겨 둔 증거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녹턴이 꾸민 일이며 저는 죄가 없습니다!”

셰이머스는 저항의 의지가 없다는 의미에서 두 손을 들어 올리고 아버지를 향해 나아갔다. 에리히의 입꼬리가 일그러지듯 올라갔다.

“그렇군…… 중요한 때에 등을 돌리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건가.”

“…….”

“너야말로 블랙웰 대공의 자격이 있다, 셰이머스. 너는 장차 블랙웰을 부강하게 할 인재야.”

에리히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채 명령했다.

“셰이머스가 말한 책장의 증거품들을 가져와라! 그리고 이 반역자를 지하 감옥에 가두도록.”

“셰, 셰이머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대체 무슨 말이야? 셰이머스! 대답해! 셰이머스!!”

하지만 셰이머스는 끝끝내 녹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녹턴은 그대로 기사들의 손에 이끌려 대공성 지하의 지하 감옥에 감금당했다.

지하 감옥에 갇힌 뒤에도 녹턴은 셰이머스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분명 뭔가 오해가 있었던 거야. 셰이머스가 날 배신할 리가 없어. 간수! 나를 셰이머스와 만나게 해라. 그와 이야기를 해 보아야겠다.”

이전에는 공자님, 공자님 하며 깍듯하게 그를 대했던 간수는 녹턴의 말에 노골적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시끄럽다. 네놈을 누구와도 만나지 못하게 하라는 대공 전하의 명령도 듣지 못했단 말이냐?”

“뭐라고……!”

“반역자 주제에.”

간수의 말에 녹턴은 무언가가 잘못 돌아가도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녹턴이 마침내 셰이머스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나 지난 뒤였다.

차갑고 축축한 지하 감옥에 한 달 동안 갇혀 있었던 녹턴의 꼴은 거지와도 다름이 없었다.

그런 녹턴의 앞에 셰이머스가 나타났다. 대공 후계자에 걸맞은 복식을 차려입은 그는 위엄과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녹턴.”

그가 비웃음이 담긴 얼굴로 창살에 갇혀 있는 녹턴을 내려다보았다.

오랜 시간 기다렸던 형의 모습을 본 녹턴은 벌떡 일어나 창살을 붙잡았다.

“셰이머스! 무사했구나. 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이야? 네가 말한 ‘증거’란 것은 대체 뭐고?”

“말 그대로지 뭐겠어.”

셰이머스는 입꼬리를 끌어당긴 채 간수 쪽을 흘끗 보았다. 간수를 물러나게 한 뒤 그가 말했다.

“나는 탈출 사건이 전부 네 책임이라는 내용의 증거를 조작해서 책장 뒤에 숨겨 두었어. 내가 블랙웰에 얼마나 강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내용 역시 함께 말이지.”

“뭐, 뭐라고? 하지만, 대체 왜!”

셰이머스는 픽 웃더니 창살을 꽉 부여잡고 녹턴을 노려보았다. 그러는 그의 녹색 눈동자에는 여느 때와 같은 다정한 빛 같은 것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걸 아직도 모르겠어? 녹턴. 나는 말이야, 대공이 될 거야. 내가 대공이 되기 위해 가장 걸림돌이 되는 존재가 누굴까? 너야, 녹턴 블랙웰. 나는 널 제거하려고 이런 짓을 한 거야.”

“뭐어? 그, 그런……. 대체 언제부터? 나, 나랑 탈출해서 서 왕국으로 가기로 한 건? 아버지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한 건?”

“넌 정말 순진하구나, 녹턴. 당연히 처음부터지.”

셰이머스는 유쾌하다는 듯 킥킥 웃었다.

“아버지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한 거? 그건 물론 네가 광증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지. 네가 광증을 일으키면 대공위는 너에게 돌아갈 게 뻔하잖아? 서 왕국? 그건 당연히 너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던 거지 뭐겠어.”

“그런, 그, 그런……. 난 믿을 수 없어, 셰이머스. 네가…… 네가 어떻게 나한테…….”

녹턴은 전신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고 혈관 하나하나까지 얼음으로 차오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셰이머스는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난 네가 끔찍하게 싫었어, 녹턴. 언제나 방해가 되고 귀찮기만 한 너를 어떻게 하면 따돌릴 수 있을지 계속 그것만 고민하고 있었지.”

셰이머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된 것이 너무나 즐거워서 견디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너는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매일마다 매달려 왔지? 셰이머스 형아, 너무 힘들어. 괴로워. 노래 불러 줘. 형아! 형아!”

“너, 너어…… 셰이머스! 너, 너 이 자식……!”

녹턴은 있는 힘껏 셰이머스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창살이 그를 막았다. 셰이머스는 소리 내어 웃으며 창살에서 물러났다.

“셰, 이머스! 이, 이리 안 와! 죽, 죽여 버릴 거야. 정말로 죽여 버릴 거야! 이, 이 개자식아! 용서 못 해, 절대로 용서 못 해!”

창살에 갇혀 격노하는 녹턴의 모습을 지켜보던 셰이머스가 픽 웃었다.

“용서하지 말든가. 난 상관없어. 꼴이 보기 좋네, 녹턴.”

“용…… 용서 못 해! 죽여 버릴 거야, 셰이머스! 지옥까지라도 쫓아가서…… 반드시 널……!”

셰이머스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등을 돌렸다. 지하 감옥을 떠나기 직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것이었다.

“넌 이제 평생을 거기서 살면서 내가 블랙웰 대공이 되는 것을 지켜보기나 하라고.”

“셰…… 셰이머스! 거기 안 서! 셰이머스!”

쾅. 둔중한 소리와 함께 지하 감옥에 고요가 찾아왔다.

이제 이 차갑고 축축한 지하 감옥에 있는 것은 녹턴, 그뿐이었다.

그 후로 며칠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났다.

녹턴이 잃어버린 것은 삶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분하게도.

그는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잊어버렸다.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다든가, 자유로워지고 싶다든가 하는 생각마저 사라졌다.

그저 죽지 못해서 살 뿐이었다.

셰이머스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는지, 친부는 녹턴을 더 이상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공에게 있어 녹턴은 그저 반역자였다. 그렇기에 더 이상 녹턴을 신경 쓰지 않고 그를 지하 감옥에 방치했다.

녹턴은 하루 종일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채 목숨만을 부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하루 종일 갇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타인과의 접촉도 없었기에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미쳐 버렸을 만한 환경 속에서 녹턴이 제정신을 부지한 것은 분노 때문이었다.

자신을 배반한 셰이머스 블랙웰에 대한 분노.

삶의 의지를 잃고 그저 갇혀만 있는 지난 2년 동안에도 그에 대한 분노와 원한만은 잊지 않은 채였다.

그를 죽이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블랙웰이든, 자신이든 어떻게 되든 좋았다.

그 목적을 위해서 자신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이런 벌레만도 못한 목숨을 부지한 채로…….

그러던 어느 날.

“녹턴! 녹터언!”

2년 만에 처음으로, 지하 감옥의 적막을 깨고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녹턴은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 보이는 자는 자신의 아버지였다. 에리히 블랙웰. 2년 동안이나 자신을 한 번 들여다보지도 않았던 그가 시체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찾고 있었다.

녹턴은 실로 오랜만에 가슴이 죄어 오는 불안감을 느꼈다.

블랙웰이고 뭐고 다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그가 가져온 소식이 두려워 가슴이 떨리고 있었다.

녹턴의 텅 빈 자색 눈동자를 마주한 채 에리히가 말했다.

“그…… 그, 그가 죽었다.”

“예? ……그, 그라니.”

녹턴이 잔뜩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무 오랜만에 목소리를 내었더니 성대가 잔뜩 녹슨 기계처럼 제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녹슨 목에서는 자신이 듣기에도 이상한 목소리가 났다.

에리히가 고함쳤다.

“셰이머스 말이다! 너의 하나뿐인 형, 셰이머스 블랙웰 말이다!”

그 짧은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셰이머스가, 죽었, 다니.

내가 아는 그 셰이머스가?

대공이 되기 위해 나를 배신했다던, 그 찢어 죽일 놈의 셰이머스가?

“죽어 버렸어! 내가 그 녀석을 대공위에 올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했는데!”

“…….”

“결혼까지 해서 애를 밴 아내가 있는 놈이 그만, 덧없게도 죽어 버렸단 말이다!”

“…….”

“지난 10년 동안 그렇게 잘 버티더니, 대체 왜! 이제 와서!!”

그사이에 결혼을 해서 임신한 아내가 생겼다거나, 하는 사실들은 너무나 큰 충격에 잠긴 대뇌피질을 통과하지 못했다.

에리히가 맥락 없이 떠들어대는 말들을 들은 녹턴의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이 하나씩 맞춰져 나갔다.

에리히는 하나뿐인 후계자인 셰이머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셰이머스는, 블랙웰 대공이 되어 자신을 비웃어 주겠다던 셰이머스는 광증을 채 일으키기도 전에 고문의 충격으로 사망했다.

“이런…… 이, 이럴 수가…… 셰이머스가 죽다니. 이럴 순 없어…… 내가 그 녀석에게 가르치고 훈련 시킨 그 모든 것들이…… 죄다 물거품이 되어 버리다니.”

에리히는 이제껏 녹턴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으로 벌벌 떨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들을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의 손을 떨게 하고 얼굴을 창백하게 하는 것은, 필시 지금껏 쏟아부은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과 절망이리라.

에리히는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꺼내 녹턴이 갇혀 있던 감옥 문을 열어 주었다. 그가 녹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오거라. 이제…… 네, 네가. 블랙웰의 유일한 후계자다. 이제 나에게는 너밖에 남지 않았어.”

녹턴은 텅 빈 눈으로 아버지의 떨리는 손을 응시했다.

‘이런 것이 현실이라니.’

참으로 지독한 현실이었다.

자신을 배신하면서까지 대공이 되고자 했던 셰이머스는 비참하게 죽었다.

자신을 반역자 취급하며 2년간 들여다보지도 않던 아버지는 이제 와서 자신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고 있다.

이런 것이 삶일까?

이런 것도,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네가 틀렸어, 셰이머스.’

녹턴은 생각했다.

‘영원히 해가 뜨지 않는 밤이라는 것도 있어. 우리의 밤을 밝혀 줄 태양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던 거야.’

전신을 엄습하는 절망감.

“큭…… 흐으, 크으윽…… 으극…….”

소년의 목줄기에 시퍼런 핏대가 섰다. 부르튼 손등 위로 몇 번이나 힘줄이 솟았다가 가라앉는다.

“으윽, 크으으…… 하아아.”

마침내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아름다웠던 자색 눈동자엔 시퍼런 안광이 솟았으며 흰자는 붉디붉었다. 누가 봐도 그것은 제정신을 가진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아, 아니…… 녹턴! 너, 너 설마……!”

에리히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하나 남은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깨달았다.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삶은 물론 두 아들의 삶까지 광증이라는 도박에 건 자가 아니던가.

에리히는 미친 듯이 기뻐했다. 평소의 대공으로서의 체통 같은 것은 내려놓고 기뻐 날뛰었다.

“네가 드디어! 자, 잘했다, 녹턴! 정말 잘했다! 10년 동안 노력한 보람이 있구나! 장하다, 내 아들!”

녹턴은 더 이상 인간의 언어가 아닌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찢어지듯 옆으로 늘어나는 입술 안쪽으로 어금니까지 드러났다.

“하하하, 으하하하! 정말 잘했다! 녹턴, 난 네가 자랑스럽…… 크헉, 헉!”

기뻐하던 에리히가 목이 졸리는 소리를 냈다. 자랑스러운 아들이 그의 목을 틀어쥐었기 때문이었다.

에리히의 광적인 기쁨이 가득하던 얼굴은 순식간에 공포와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랑스러운 아들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이제서야 깨달은 듯한 얼굴이었다.

“꺽…… 크헉, 꺼어억……! 녹…… 트언…….”

블랙웰의 광기. 피를 보지 않는다면 결코 이성을 되찾지 못한다는 그것.

녹턴의 형형한, 하지만 초점을 잃어버린 자색 눈동자에 에리히 자신의 시퍼렇게 질린 얼굴이 비쳐 보였다. 에리히는 바르작거리며 아무런 의미 없는 저항을 했다.

“살, 려 줘. 사려…… 꺼헉, 흐그극…… 죽이, 죽이지 마. 제발 살려 줘…….”

그러나 이미 이성을 완전히 놓아 버린 그의 귀에는 부친의 목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그 눈엔 가득 담겨 있었다. 자신의 삶을 깊디깊은 나락에 처박은 장본인, 에리히에 대한 증오와 살의가.

에리히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곳에서 살아나가지 못하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녹…… 턴. 녹터어어어어언!”

절망과 공포, 분노에 찬 부르짖음이 지하 감옥을 울렸다.

그날 에리히는 아들, 녹턴의 손에 절명했다. 그는 모든 사건이 끝난 뒤에야 끔찍하게 찢겨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발작을 일으킨 녹턴이라면 에리히 한 명 정도는 즉사시킬 수 있었음에도, 한순간에 편안한 안식을 주지는 않겠다는 의미가 담긴 듯한 너무나 잔혹한 살해 방법이었다.

녹턴은 친부를 끔찍한 형태로 해하고 지하 감옥을 빠져나온 뒤, 간수와 눈에 띄는 사용인 십수 명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고 나서야 이성을 되찾았다.

이성을 되찾은 그는 스스로의 의지로 블랙웰 대공의 자리에 올랐다.

제국법상 귀족 간의 살인은 엄히 다루어진다. 그것도 보통 살인이 아닌 친족 살해, 친부를 잔혹하게 해한 이 사건에 온 제국의 여론이 들썩였다.

끔찍한 패륜을 범한 그를 엄히 벌하라는 여론이 존재했으나, 황실을 포함하여 감히 블랙웰 대공가와 직접적으로 대적할 가문은 없었다. 그것도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 십수 명을 살해한 미치광이 대공을 상대로.

그렇게 처벌은 유야무야되었고, 몇 달 후 셰이머스의 아내는 쌍둥이를 출산하고 사망했다.

꿈속에서 라리아는 계속해서 녹턴의 곁에 있었다. 마치 자신의 것처럼 그의 감정이 전해졌고, 그의 고통과 배신감, 절망을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그가 수년 동안 학대당하고, 믿었던 친형에게 배신당하고, 지하감옥에 갇혀 죽은 듯 사는 과정을 보면서 라리아는 타는 듯한 괴로움을 느꼈다.

몇 번이나 그만하라고 소리쳤다. 그들을 말리고, 어린 녹턴을 감싸 안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멈추라고 하고, 하지 말라고 빌어도 그들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유령 같았다. 자신만이 자신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는, 유령.

라리아는 그저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낸 녹턴의 비참한 삶을.

타는 듯한 고통의 시간은 끝나고, 마침내 녹턴은 대공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이미 지치고 메말랐다. 어릴 적에는 웃기도 하고, 친형을 진심으로 믿고 소중히 여기기도 했던 그는 더 이상 없었다.

한없이 냉혈하며, 그 누구도 믿거나 마음을 주지 않는 괴물만이 그곳에 있었을 뿐이다.

그의 아름답고 차가운 자색 눈동자를 마주한 라리아는 눈물을 흘렸다.

‘이게 바로 내가 만든 그야. 내가 그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었어.’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스러운 유년시절은 도저히 제정신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과오에서 눈 돌리고 싶지 않아 마지막까지 지켜보았지만, 가슴속 어딘가가 무너지는 것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녹턴은 그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 사람이 에리히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정말 그를 불행하게 만든 건…… 누구도 아닌 나였던 거야.’

다리가 떨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라리아는 무너지듯 앉으며 울었다.

과거의 자신에게 치가 떨렸다. 그의 과거를 이토록 비참하게 만든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저 그편이 재밌을 것 같았으니까. 상처 입은 남주인공이란 언제나 매력적인 존재이니까.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를 사랑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랬다면 그런 하찮은 이유로 그의 삶을 이토록 망쳐놓지는 않았을 텐데…….

이런 과거를 거쳐 괴물이 되었던 녹턴은 놀랍게도 라리아에게 조금쯤은 마음을 열었다.

그도 조금은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그녀를 믿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저 차갑기만 했던 그의 자색 눈은 지금 그녀를 향해 믿을 수 없이 다정한 온기를 품고 있다.

하지만…….

‘이런 내가…… 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걸까?’

라리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녹턴을 바라보았다. 대공위에 갓 오른 18살의 녹턴. 소년의 티를 벗고 어엿한 청년이 된 그의 모습을.

‘그를 속이고 그의 사랑을 받을 바에는…….’

라리아는 멍하니 생각했다.

‘차라리 그의 곁에서 떠나 주는 것이 그를 위한 일이 아닐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괴로운 결론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를 속일 자신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평범한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역시 분명히 자신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를 위한 좋은 사람이 어디엔가는 있을 거야. 누구든 나보단 훨씬 낫겠지.’

너무 아파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결론.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부정하거나 밀어낼 수 없는…….

‘글 몇 줄로 그의 인생을 수렁에 빠뜨린 여자보다는…….’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라리아를 감싸고 있던 주변 환경이 변했다.

라리아는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갓 대공위에 오른 녹턴도, 블랙웰의 대저택도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를 감싸고 있는 것은 오로지 새하얀 빛뿐이었다. 너무나 하얘서 눈조차도 회색으로 보이게 만들 정도로 하야며, 신성하고 따뜻한 빛.

그리고 라리아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그를 위한 길이 아니에요.》

“누, 누구세요?”

라리아는 깜짝 놀라 물었다. 다정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저는 모든 세계와 운명의 실을 자아내는 자. 저는 그대를 위해 존재하는 자. 그대와, 그대의 사랑하는 이와, 그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와, 존재하고 죽어 가는 모든 이를 위해 존재하는 자.》

목소리라곤 하지만 귀를 통해 들린다기보다는 라리아의 마음속에서 울리는 것만 같았다.

너무나 우아하고 온화한 그 목소리는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긴장을 풀게 하고 손끝부터 온기가 차오르게 했다. 라리아는 덕분에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상대가 누구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목소리의 대답도 그렇고, 라리아는 이 새하얀 빛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아이린이 신성력을 쓸 때의 일이었다.

“설마 여신님이신가요?”

《그대들은 저를 그런 이름으로 부르고는 하더군요.》

라리아는 깜짝 놀랐다. 로맨스 판타지 소설의 세계이니만큼 비과학적인 존재들이 나타나는 것은 익숙했지만 설마 신과 같은 존재를 직접 만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아니면 이것조차도 전부 꿈일지도 모르지.’

그래, 자신 앞에 신이 직접 현현했다는 걸 믿기보다는 이렇게 생각하는 쪽이 믿기가 쉬웠다. 자신은 지금도 그저 꿈을 꾸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녹턴에 대한 죄책감과 고민이 너무나 커서 이런 꿈을 꾸게 된 걸까.’

그렇게 생각한 라리아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말할 수 있었다.

“여신님, 저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 저를 용서할 수가 없어요. 이런 제가 계속해서 그를 속여도 괜찮은 걸까요? 그의 사랑을 받아도 괜찮은 걸까요?”

어차피 꿈이니까, 꿈속에서 오랜 고민을 이야기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차라리 그의 곁을 떠나는 것이 저의 잘못에 대한 속죄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를 위해 떠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계속 그를 속이고 과분한 사랑을 받을 바에는…….”

멎었던 눈물이 다시금 흐르기 시작했다. 라리아는 눈물이 뚝뚝 흐르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러자 너무나 따스한 목소리가 그녀의 다친 마음을 감싸 안았다.

《보세요, 당신의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순간 눈앞에 환영이 나타났다. 그것은 어떤 방 안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라리아는 그곳이 자신의 방이라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하지만 그 풍경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온갖 의료기기와 간호를 돕기 위한 사람들이 문턱을 넘나들고 있어, 평범한 방이 아닌 병실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침대에는 자신이 누워 있었다. 그리고 수척해진 자신의 손을 꼭 붙든 채로, 바위처럼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은…….

“녹턴.”

다시 한번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는 너무나 깊은 수심에 잠긴 얼굴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온종일 잠도 거의 자지 않고, 식사도 최소한만 하면서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의 마른 손을 꼭 쥔 채로, 오로지 그녀의 얼굴만을 눈에 담으며.

하루 종일, 오로지 자신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면서.

《이제 알겠나요? 그대가 그의 곁을 떠난다면, 그가 얼마나 슬프고 괴로워할지?》

“…….”

《그것은 결코 그를 위한 일이 아니에요. 죄책감에서 도망치고자 하는 그대를 위한 선택일 뿐이죠.》

라리아는 할 말을 잃었다.

《한 번의 배신으로 큰 상처를 입은 그는 그대마저 떠나 버리면 결코 그 상처를 이겨 낼 수 없을 거예요. 어쩌면 그의 삶은 이전보다 훨씬 불행해질 수도 있겠죠.》

그제야 라리아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할 뻔했는지 깨달았다. 생각만 하고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았지만, 이미 무척 큰 상처를 입은 그에게 더 큰 상처를 줄 뻔한 것이다.

라리아는 말했다.

“그렇다면 가르쳐 주세요, 여신님. 저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이 그를 위한 길일까요?”

《진정으로 그를 위하려면, 영원히 그의 곁에 있도록 하세요.》

목소리는 말했다.

《어떤 때라도 그를 믿고, 감싸 주고, 사랑하세요. 그것만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랍니다.》

라리아는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물론 그녀가 제일 바라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걸로 정말 괜찮은 걸까?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에요. 언제나 그를 행복하게 하도록 하세요. 그대는 그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제가 보낸 존재이니…….》

그 순간 라리아는 자신을 감싸고 있던 빛이 흐려지는 것을 눈치챘다. 이 ‘존재’와의 만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그녀는 직감했다.

라리아는 다급하게 물었다.

“하, 하지만……! 저 같은 걸로, 정말로 괜찮을까요? 저는 그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든 사람인걸요!”

빛은 어느덧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멀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라리아의 마음속에 속삭였다.

《라리아, 당신은 그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지 않았어요.》

그 속삭임을 마지막으로 나는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익숙한 천장이었다. 어느덧 너무나 편안해져 버린 블랙웰의 내 방.

그다음으로 느낀 것은 보송보송한 이불과 자신의 손을 감싼 크고 따스한 온기.

그것이 누구의 손인지는 어쩐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나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시선의 끝에 그가 있었다. 너무나 사랑하고, 꿈속에서도 그리워했던 그의 모습이.

“녹턴.”

내가 속삭였다. 며칠 만에 말을 해서 그런지 목은 바짝바짝 마르고 목소리는 갈라졌다. 나는 작게 기침을 했다.

내 손을 잡고 기도하듯 눈을 감고 있던 녹턴이 눈을 떴다. 식사와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않아서인지 그는 제법 수척해져 있었다.

“라리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듯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고 나서야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는 감정이 끓어오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내 몸을 끌어안았다.

그 품은 따뜻하고, 포옹은 으스러질 정도로 단단했다. 그 사실이 너무나 행복해서 나는 미소 지었다. 나는 조심스레 팔을 뻗어 그를 마주 안았다.

포옹을 푼 뒤 녹턴이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몸은 좀 괜찮나? 걱정했지 않나.”

“죄…… 송. 콜록, 콜록!”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기침을 하자, 그가 물을 한 잔 떠 주었다. 물을 마시고 나니 기침이 좀 잦아들었다.

“걱정시켜드려 죄송해요.”

나는 기운 없는 얼굴로 웃었다. 그 모습에 녹턴은 어쩐지 괴로운 얼굴을 했다.

“……아니, 아니다.”

그는 한 손으로 괴로운 얼굴을 감쌌다.

“제길, 오히려 나야말로…….”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녹턴은 내가 쓰러진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녹턴의 능력을 알게 된 직후 쓰러졌기 때문에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의 잘못이 아니야.’

나는 생각했다.

‘물론 그것도 내가 충격을 받은 계기 중 하나이긴 했지만, 제일 큰 원인은 내가 건강을 챙기지 못하고 일을 지나치게 많이 해서인걸.’

“저, 녹턴…….”

나는 내 생각을 말하고 그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녹턴이 먼저 선수를 쳤다.

“허기가 지겠군. 너는 엿새 동안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다.”

“엿새나요?”

나는 깜짝 놀랐다. 정말 긴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게나 오래 잠들어 있었을 줄은…….

녹턴은 종을 울리더니, 하녀에게 간단한 요깃거리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하녀가 소화기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 재료가 아주 곱게 갈린 스프를 가져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프를 보자 나는 내가 생각보다 많이 배가 고팠음을 깨달았다. 난 감사 인사를 하고 스프를 먹기 시작했다.

“먹으면서 들어라. 네가 쓰러진 동안 이런 일이 있었다.”

녹턴은 그동안 대공가 내외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특히, 집안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걱정했는지에 대해서.

“……자네트와 미하일도 너를 굉장히 많이 보고 싶어 하더군. 그 녀석들이 널 위한 선물도 가져왔다.”

녹턴은 그새 말라 버린 들꽃과 사탕과 초콜릿이 가득 든 유리병을 건네주었다.

나는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동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이들이 손수 들꽃을 꺾고, 유리병에 과자를 차곡차곡 모으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저도 공녀님과 공자님이 정말 보고 싶어요!”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녹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걸 다 먹고 얼른 회복해라. 상태가 좋아지면 바로 만나게 해 주지.”

그의 말에 난 전투적으로 스프를 해치우기 시작했다. 설거지가 필요 없을 정도로 싹싹 긁어먹는 내게 녹턴이 말을 이었다.

“그 녀석들뿐만이 아니다. 대공가 내외의 정말로 많은 이들이 네 회복을 바라더군. 너를 위한 선물과 편지는 전부 옆 방에 보관되어 있다.”

“그거 꼭 보고 싶네요.”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때의 나는 테이블 하나를 채울 정도의 양을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는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이기에 옆 방에 보관한 거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식사를 마치자 녹턴은 프레드릭을 불러 나를 진찰하게 했다.

“차도가 좋습니다. 앞으로 며칠간 영양 섭취를 잘하시고 휴식을 충분히 취하시면 완치되실 듯합니다.”

녹턴의 말로는, 내가 회복이 빠른 것은 아이린이 중간에 날 찾아와 치료해 준 덕분이라고 했다.

‘나중에 아이린에게도 감사 인사를 해야겠네.’

프레드릭을 물러나게 한 뒤에도 녹턴은 계속해서 내 곁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는 계속해서 내 손을 꼭 쥔 채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솔직히 말해 약간 부담스러울 정도로.

꼭 잠시라도 눈을 떼면 내가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같았다.

내가 쓰러진 사건이 그에게 있어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지 생각해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광증 발작을 일으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야.’

나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앞으로는 내 몸 관리를 정말 잘해야겠다. 내가 또 쓰러지면 그땐 그가 진짜로 발작을 일으킬지도 몰라.’

내가 그런 내 결심을 그에게 전하려고 입을 뗀 그 순간이었다.

“라리아.”

다시 한번 그가 선수를 쳤다.

“미안하다.”

나는 놀라 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착잡해 보였다.

그가 여전히 내가 쓰러진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싶어서 나는 손사래를 쳤다.

“네? 아, 아니에요! 오히려 저야말로 죄송하죠. 제가 몸 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라리아.”

따뜻한 온기가 내 이마를 덮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유리 세공품을 다루듯 너무나 조심스런 손길로 내 이마를 감쌌다.

‘이번 일로 내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정도로 연약하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그가 나를 그렇게 대하는 것이 몹시 민망했지만 어쩐지 싫지도 않아서 나는 말문이 막혔다.

녹턴은 걱정과 죄책감이 뒤섞인 눈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쓸었다. 그가 속삭였다.

“너를 불안하고 두렵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생각도 못 했던 말이기에, 그의 말뜻을 이해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나는 몇 초 뒤에야 깨달았다.

‘그의 능력이 나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마음이 아팠다. 그는 자신이 가진 능력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가 원해서 손에 넣은 것도 아닌 그 능력 때문에.

‘내가 과거의 나 자신을 원망했듯이…… 그 역시 자신을 원망했을까? 그 진실을 보는 눈이라는 능력을 가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건 결코 그의 잘못이 아니니까.

녹턴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이미 네가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네가 그 사실을 알려 주고 싶지 않다면…… 앞으로 나는 결코 너의 정체에 대해 물어보거나 궁금해하지 않으마. 내 생명과 블랙웰의 명예에 걸고 맹세하마.”

그렇다곤 해도, 그가 꺼낸 말은 정말로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내 감정을 사려 깊게 생각해 주고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장차 아내 될 사람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 정체가 궁금한 것은 누구라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내 정체를 알려 주기 싫다면 그것을 더 이상 묻거나 궁금해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각오와 믿음에서 나온 것인지 나는 도저히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나는 그의 말에 너무나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녹턴……. 정말로, 그걸로 괜찮겠어요?”

“물론이다.”

“하, 하지만…… 정체도 모르는 존재를 당신의 아내, 아이들의 엄마로 들이게 되는 거라고요. 만일 제가 위험하거나 나쁜 것이라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하지만 녹턴은 조금도 두렵거나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 건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너무나 단단하고 올곧은 눈으로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아니, 오히려…… 내가 제일 걱정되는 것은 네가 날 떠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네가 날 떠나지만 않는다면 난 그걸로 족하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꿈속에서 들은 목소리를 떠올렸다.

‘진정으로 그를 위하려면, 영원히 그의 곁에 있도록 하세요.’

그 목소리는 그의 곁을 떠나는 것은 그의 행복을 위해서는 최악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내가 계속 그의 곁에 있으며 그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내가 바라던 것이기도 했다. 놀랄 정도로 정확하게.

왈칵하고 목이 메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절대, 절대로 안 떠날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녹턴의 곁에 있을게요.”

“……정말인가?”

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기쁨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목에 두른 팔을 풀고, 그의 손을 끌어당겨 왼쪽 가슴에 가져다 댔다. 빠르고 강하게 뛰는 심장의 고동이 그의 손에 전해졌다.

“네, 맹세해요. 제 심장과 당신을 향한 이 변치 않을 감정에 걸고 맹세할게요.”

“…….”

녹턴은 그런 나를 내려다보다가, 내 어깨를 당겨 끌어안았다. 곧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었다.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뜨거운 입맞춤이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강렬한 키스가 끝나고, 그는 내 젖은 입술을 핥았다. 민감한 입술 위로 간질간질하면서도 묘한 느낌이 퍼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그의 가슴팍을 가볍게 떠밀었다.

“으으, 전 환자라고요. 안정을 취해야 해요.”

차마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지만 큭큭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괜히 더 민망해졌다.

그는 내 입술은 놓아주었지만, 대신 내 몸을 끌어안으며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만일 능력이 담긴 나의 눈으로 너를 보는 것이 싫다면…….”

그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시력을 포기할 수도 있다. 널 붙잡을 수만 있다면 그 정도쯤은.”

그가 닿은 부위에 열이 몰린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무시무시한 소리를 듣자 나는 기겁했다.

“네에? 그,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농담을 할 게 따로 있죠!”

“……농담처럼 들리나?”

그가 고개를 살짝 들어 내 눈과 시선을 맞췄다.

그 순간 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의 가라앉은 자색 눈동자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어 보였다.

‘진실을 보는 눈’이 없는 나조차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결코 농담을 하는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이 사람…… 내가 그의 능력이 무서워서 도망가겠다고 하면 진짜로 자기 눈을 멀게 할지도 몰라!’

위기감을 느낀 나는 황급히 말했다.

“저, 진짜로 안 싫어요. 녹턴의 약속을 믿으니까요. 어디 가지도 않을게요. 그러니까, 저, 절대 그런 짓은 하시면 안 돼요. 아셨죠?”

녹턴은 내게서 몇 번이나 앞으로도 그의 곁에 있겠다는 확언을 받았다.

“좋아.”

그는 그러고 나서야 만족한 듯 대답했다.

“내 시력의 안위가 네게 걸려 있다, 라리아. 그걸 잊지 말도록.”

협박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에야 조금쯤 안심을 한 듯 그는 다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 순간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꼭 엄마가 어디 가 버릴까 봐 무서워하는 어린애 같아.’

이상한 일이었다. 덩치로 보나 성격이나 능력으로 보나 그는 여러모로 어린애와는 거리가 멀었는데도 그 순간만큼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 직업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드물게도 그의 약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싫어하는, 자존심이 극도로 강한 그가 어리광처럼 자신의 두려움을 드러낸다.

그의 그런 모습은 마음이 아프면서도 어쩐지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꼬옥 감싸 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어깨에 내려앉은 무게감이 좋았다. 그것은 그를 사랑하는, 그를 행복하게 해 주어야만 하는 나의 책임감의 무게이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내 정체를 묻지도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겠다는 건 정말 감동적이었지만……. 그래도 그를 평생 속이고 싶지는 않아. 그가 나에게 솔직한 만큼, 나도 그에게 솔직하고 싶어.’

나는 팔을 뻗어 그의 넓은 등을 마주 안아 주며 결심했다.

그의 믿음과 결심은 너무나 고마웠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그를 속일 생각은 없었다.

‘언젠가는 꼭 그에게 이야기하자. 나의 비밀을.’

그로 인한 결과로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배신감을 느끼든, 날 미워하게 되든…….

가정만 해도 마음 아프지만, 그래도 그것 역시 내가 받아들여야 할 죗값일 것이다.

나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시력조차 포기할 수 있다고 한 그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는 나도 정말 소중한 무언가를 포기할 각오를 해야만 했다.

라리아가 깨어났다는 희소식은 순식간에 대공저 전체로 퍼져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라리아에게 회복 기념 선물을 보내왔고, 그녀를 만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프레드릭은 그녀가 아직 회복 중임을 감안해 면회자를 극히 제한했다. 며칠 동안은 충분한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핑계로 녹턴은 라리아를 독점할 수 있었다. 이틀 정도는 말이다.

라리아가 깨어난 뒤로 그는 업무를 라리아의 방에 가져와서 하면서까지 계속 그녀의 곁에 있으려고 노력했다.

라리아는 녹턴이 그렇게까지 해 주는 것에 대해 미안해하면서도 내심 기뻤다.

하나, 그녀도 곧 방에 정말로 녹턴과 프레드릭 말고는 드나들지 않는다는 점에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메리가 이틀째 안 보이네요. 다른 업무를 하고 있나?”

녹턴은 그녀의 말을 듣자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그 하녀들을 여전히 지하 감옥에 가둬 두고 있었군.’

그들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라리아가 초과근무를 하는 걸 방치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너무 화가 나서 이성을 잃었다. 라리아가 쓰러진 직후라서 더더욱 감정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열흘 동안 지하 감옥에 구금한 뒤 대공저에서 퇴출할 것을 명했었는데…….

이후로 라리아에게 온 정신을 팔린 나머지 그 사실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가 지금에서야 기억이 난 것이다.

녹턴 역시 라리아가 메리라는 하녀를 각별히 아낀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성정을 생각하면, 그녀가 초과근무를 고집해서 하녀들이 벌을 받고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자신의 탓으로 느끼고 자책을 할 가능성이 높았다.

녹턴은 자신이 하녀들을 가둔 뒤 며칠이 지났는지 꼽아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딱 아흐레째였다. 만일 하루만 더 잊고 있었으면 손도 쓰지 못하고 시몬이 하녀들을 쫓아냈을 것이다. 그랬으면 라리아의 원망을 피할 수 없었으리라.

녹턴은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네가 쓰러진 동안 잠시 다른 업무로 옮겨 두었다. 이제 슬슬 복귀시키도록 하지.”

“네에, 감사해요!”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렇게 말한 녹턴은 라리아의 침실에서 나와 서둘러 시몬을 불렀다.

“예,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아흐레 전 지하 감옥에 가두라고 했던 하녀들, 그 하녀들을 다시 불러들여 복귀시켜라.”

“네.”

시몬은 다소 놀랐다. 왜냐하면 녹턴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자신이 내린 처벌을 번복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이나 그는 상벌에 엄격했고, 이성적인 판단을 했으며, 한 번 벌을 내린 상대는 결코 동정하지 않았다.

‘셔우드 영애와 관련된 일이라 이성을 잃으셨던 게로군.’

녹턴에게 있어 라리아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 시몬으로선 어렵지 않게 그런 판단을 할 수 있었다.

시몬은 젊은 주인이 아장거릴 때부터 그를 모셔 왔음에도 요즘따라 유난히 더 주인의 새로운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놀라운 일들은 모두 라리아 셔우드, 그녀와 관련이 되어있을 때만 일어난다.

‘정말 놀라운 커플이란 말이야.’

시몬은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을 했다.

‘내 나이 예순에 이렇게 뜨거운 한 쌍은 처음 보는군. 그것도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녹턴 주인님께서 그런 사랑을 하시게 되다니…….’

시몬은 녹턴의 성장 과정을 전부 지켜 보아 왔다.

유난히 영민하고 정의로웠던 소년이 고통스런 유년시절과 충격적인 사건들을 겪으며 누구도 믿지 않는 냉혈한 괴물이 되기까지.

늘 그를 걱정했다. 그의 얼어붙고 메마른 얼음사막과도 같은 마음이 녹아내릴 날이 과연 오기나 할까 불안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런 날이 온 것이다. 실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 기적의 끝에는 라리아 셔우드가 있었다.

그녀를 생각하면 시몬은 언제나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토록 완벽한 대공비감일뿐더러 주인님의 마음마저 녹여 주신 분이시다.’

바삐 걸어가면서도 시몬은 그런 생각을 했다.

‘블랙웰의 집사로서 그런 분을 놓친다면 유명을 건넜을 때 선조들을 뵐 낯이 없지! 내 그분만큼은 온몸을 바치더라도 필히 대공비로 모실 것이다.’

시몬은 지하 감옥에 있던 하녀들을 꺼낸 뒤 씻고 옷을 갈아입게 했다. 그들을 방으로 불러들인 시몬이 말했다.

“낭보가 있다. 대공 전하께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직위 회복을 명하셨다. 이 은덕을 결코 잊지 말고, 명에 충실히 따르며 이후로는 더더욱 블랙웰에 몸 바쳐 봉사하도록!”

“네? 그, 그것이 정말입니까?”

하녀들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감옥에서 나오게 되자 영락없이 대공가에서 쫓겨나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아무리 주인의 약혼녀의 의지 때문이라지만, 주인의 명령에 오랜 시간 불복종한 것을 들켰으니 쫓겨나도 그들로선 할 말이 없었다.

명령 불복종으로 해고를 당했으니 당연히 다른 집안으로의 추천서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녀로서의 재취직도 힘들 판이라 걱정하던 차였다.

“여신님 맙소사,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공 잊지 않겠습니다!”

“내가 아니라 대공 전하께 감사하도록.”

하녀들은 모두가 진심으로 기뻐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단 한 사람,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자가 있었다. 그녀는 기뻐하긴커녕 다소 풀이 죽은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바로 메리였다.

“저, 죄송하지만 여쭐 것이 있습니다.”

“뭐지?”

“혹시…… 아가씨께서는 의식을 되찾으셨는지요?”

그녀의 말에 다른 하녀들은 물론 시몬까지도 깜짝 놀랐다.

“아…….”

“…….”

대공가에 복직한 것으로 기뻐했던 하녀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머쓱해했다.

‘자신이 복직된 것보다 셔우드 영애의 건강이 먼저라니, 정말 충성심이 강한 하녀로군!’

시몬은 흐뭇해하며 대답했다.

“영애께서는 이틀 전 의식을 되찾으셨다. 저택의에 따르면 회복되는 속도가 빠르시다고 하더군.”

“정말 다행입니다.”

메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자신이 직장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라리아의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몬은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러니 너희들이 셔우드 영애께서 더욱 빨리 건강을 회복하시도록 정성을 다해 보필하도록 하여라.”

“네!”

“이젠 셔우드 영애의 방으로 가 보도록.”

이렇게 해서 메리를 포함한 하녀들은 모두 라리아의 곁으로 돌아왔다.

녹턴이 엄중히 입막음을 했기 때문에, 그들이 하마터면 해고당할 뻔했다는 사실은 라리아만 모르는 비밀이었다.

“시장하지는 않으십니까? 아가씨.”

“보양에 좋다는 약초를 가져왔습니다, 아가씨. 지금 당장 달여 드리겠습니다.”

“몸살기가 있지는 않으신가요? 안마를 해 드릴까요?”

지난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하녀들은 더욱 정성을 다해 라리아를 보살피기 시작했다.

“약간 부담스럽긴 하지만, 간만에 모두를 만나서 정말 좋네요.”

라리아는 그렇게 말했다.

“…….”

두 사람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녹턴의 마음은 모르고 말이다.

한편, 라리아를 무척이나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또 있었다. 바로 자네트와 미하일이었다.

라리아 역시 아이들이 정말 보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진찰을 받을 때마다 프레드릭에게 아이들을 만나도 되겠느냐고 물었고…….

“기력을 많이 회복하셨으니, 이제 공자님, 공녀님과 면회를 하셔도 되겠습니다.”

마침내 라리아가 깨어난 지 나흘째 되는 날, 그녀는 아이들과의 면회 허락을 받았다.

“라리아!”

“라리아아!”

하녀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방문을 연 그 순간, 라리아는 눈물마저 핑 돌았다.

라리아를 본 순간 아이들의 눈은 휘둥그레지고, 뺨에는 능금 같은 홍조가 어렸다.

하녀의 손을 잡고 온 자네트는 한달음에 달려와서 라리아의 무르팍에 뛰어들었다. 안겨 온 미하일은 어서 내려달라고 버둥거리다가 내려 주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와 라리아를 끌어안았다.

“라리아아! 보고 시퍼써!”

“왜케 오래 자써? 나빠써, 라리아!”

아이들은 라리아에게 매달리며 칭얼댔다. 앞으로는 평생 라리아에게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그 모습을 본 라리아는 눈가가 뜨거워지고 가슴이 울렁였다.

‘아이들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엄마의 마음이란 게 이런 걸까?’

“라리아, 아프론 아프지 마. 진짜루…….”

“라리아 미어! 라리아땜에 속상해, 진짜.”

어리광을 부리다가 눈물까지 글썽이는 아이들을 라리아는 두 팔로 가득 끌어안아 주었다.

“네, 저 이제 안 아플게요. 정말이에요.”

그녀가 아이들을 따라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저도 공녀님, 공자님이 정말 정말 보고 싶었어요.”

“히이잉…… 라리아. 진짜 우리 보고 시퍼써?”

“그럼요, 정말이죠. 얼~ 마나 보고 싶었는데요.”

“진짜 보고 시펐으면 나한테 뽀뽀해!”

자네트가 훌쩍이며 씨근거렸다. 라리아는 눈물 자국이 남은 채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는 없었다.

라리아는 자네트와 미하일에게 입술이 아플 때까지 뽀뽀를 하고, 팔이 아플 때까지 끌어 안아 주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라리아가 과로로 쓰러지는 일을 겪고 난 뒤, 녹턴은 이러한 일을 다시 겪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본질적인 해결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걸 받아라.”

그가 내미는 서류 한 장에 라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뭔가요?”

“앞으로의 네 업무를 요약한 일과표다.”

라리아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가 내미는 일과표를 살펴보았다.

사실 그녀로서도 그 내용이 어느 정도 예상이 가기는 했다.

‘분명 업무가 꽤 줄어들었겠지.’

이런 일을 겪고 나니 그녀로서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녹턴의 제안을 어지간하면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과표의 내용은 라리아의 예상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것이었다.

“업무 시간이 절반이라고요?!”

일과표에는 라리아의 기존 일정과 새로운 일정이 표 형식으로 비교되어 쓰여있었다.

기존에 라리아가 자청해서 하루 업무 시간은 12시간 정도였다. 하지만 새로운 일과표에 의하면 라리아는 이제부터 하루에 6시간만 일할 수 있었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오후에만 한정되어 있으며, 나머지 시간 동안은 추가로 고용한 하녀들이 아이들을 보았다.

그녀가 놀라서 묻자 녹턴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불만이라도 있나?”

“그, 그게…… 저는 공녀님, 공자님의 시녀인걸요! 6시간은 역시 너무 적지 않을까요?”

“아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

평소라면 라리아의 의사를 존중할 녹턴이었으나, 그는 이번만큼은 딱 잘라서 말했다.

“네 몸을 생각해라, 라리아. 너는 단순한 시녀가 아니다. 장차 대공비가 되어 대공가를 이끌어갈 몸이 아닌가. 그런 네가 벌써 건강을 소모하면 앞으로는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

라리아는 할 말이 없었다. 역시 한 번 쓰러진 경력이 있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그래, 결혼을 대비해 업무를 줄이고 행정과 회계를 좀 더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건 사실이야.’

아이들을 만나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젠 옛날과 달리 여주인공에게 아이들을 넘겨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할 수 있을 때 모든 심력을 쏟아붓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언제까지나 아이들의 곁에 있어 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할게요.”

결국 라리아는 녹턴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는데…….

“그런데…… 왜 녹턴과 함께 있는 시간은 조금도 줄지 않은 거죠?”

“…….”

그녀에 말에 녹턴이 잠시 멈칫했다. 그사이에 라리아는 몇 군데를 더 짚어나갔다.

“아니, 오히려 늘은 것 같은데요.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1시간 동안 녹턴과 산책’은 뭐예요? 게다가 아침저녁 식사도 필수적으로 같이 하는 것으로 되어있네요?”

“나랑 함께 있는 건 업무가 아니지 않나? 데이트지.”

녹턴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라리아는 기가 막혔다.

“업무 시간을 줄이고 그 시간을 전부 데이트로 채우시면 어떻게 해요!”

녹턴은 라리아가 든 서류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그가 픽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싫은가?”

바로 라리아가 약한 그 미소였다. 너무 잘생기고 근사해서, 그녀로서는 사로잡힌 듯이 도무지 저항할 수가 없을 정도의 마력이 담긴 그 웃음.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라리아는 찌르르 감전이라도 당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이며 생각했다.

‘미치겠네! 이 사람, 내가 자신의 웃는 얼굴을 엄청 좋아하는 걸 잘 아는 게 분명해!’

“아, 아니요…….”

결국 라리아는 K.O를 선언했다. 그제야 녹턴은 만족스러운 듯한 얼굴을 했다.

“그래야지.”

그가 놀랄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라리아를 보는 시간이 절반 가까이 줄었다는 소식에 아쉬움을 느낀 것은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워낙 착한 아이들이기 때문일까, 그만큼이나 라리아를 걱정하고 사랑하기 때문일까, 그녀의 건강을 위해서라고 조곤조곤 설명하자 아이들 역시 결국 납득했다.

“그러케 해서 라리아가 안 아푸면…… 난 괜차나.”

미하일이 말했다.

“하수업찌. 대신 어어어엄청 재미께 놀아조야해!”

자네트도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일주일간 휴식을 푹 취한 뒤 다시 업무에 복귀했다.

녹턴이 제안한 대로 업무는 하루에 6시간으로 단축하고, 대신 녹턴과의 데이트와 회계 공부를 추가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의 과잉보호는 결코 그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까지는 다른 사용인들과 함께 사용인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사용인 식당의 식단도 상당히 훌륭하다고 느꼈지만(실제로 다른 사용인들도 그렇다고 말했다.) 녹턴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자 그 식단은 정말이지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우와아!”

레몬즙을 곁들인 뿔소라와 채소, 브리오슈 크루통을 곁들인 브로콜리 양송이 스프, 퀴노아 샐러드를 비롯해 전채요리만 15가지.

수비드로 구운 염소 허벅다리살, 메추라기 통구이, 연어와 바질 콩피, 오리 가슴살 햄, 게의 알로 만든 스프, 포르치니와 렌틸 스튜, 농어와 숭어, 장어를 비롯해 본 요리가 40가지!

마체도니아, 타르트, 파이, 체리와 레드커런트로 맛을 낸 아이스크림, 프로슈토와 멜론을 비롯해 후식은 총 20가지.

이렇게 끝도 없이 요리가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식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첫 식사만 특별히 그런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연회를 방불케 하는 식단이 계속됐다.

‘녹턴은 늘 이렇게 먹고 살았던 건가? 역시 블랙웰 대공이란 대단하구나.’

식사를 하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 맛있긴 한데 얼마 먹지 못하고 다 버리니까 아까운걸.’

하지만 나는 단 며칠 만에 내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식사는 즐겁게 하셨습니까? 아가씨.”

점심 식사를 한 나에게 메리와 하녀들이 다가왔다. 나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응. 오늘도 정말 맛있었어. 그런데 배가 불러 죽는 줄 알았지 뭐야.”

“그거 다행입니다.”

배가 불러 죽을 뻔했다는데 뭐가 다행이라는 걸까? 나는 하녀들과 함께 방으로 돌아가며 무심코 말했다.

“녹턴은 늘 이렇게 먹었는데 살이 안 찌는 게 참 대단하다니까. 검술 수련을 많이 해서 그런가?”

그러자 하녀들 중 한 명이 대답했다.

“어머, 아니에요. 주인님께서는 이전에는 늘 굉장히 간소한 식사를 하셨답니다. 다른 귀족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는걸요.”

“뭐?”

의아해진 나는 하녀들에게 녹턴의 평소 식단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알고 보니, 사실은 이러했다. 녹턴은 여태까지 혼자 식사할 때는 언제나 생존에만 의의를 둘 정도의 소박한 식사를 해왔다.

모든 면에서 황실에도 지지 않을 정도로 호화로우며 완벽한 블랙웰 대공저에 유난히 전문 셰프 숫자가 적고 부엌이 간소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주인이 사치스러운 식사를 하지 않으니 고급 요리만이 유난히 발달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 지금의 그 어마어마하게 호화로운 식단은 설마…… 다 나를 위해 준비하신 거란 말이야?!”

내가 놀라 묻자 하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께서 함께 식사를 하시게 된 뒤로 주인님께서는 셰프를 8명, 부엌 일꾼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고용하셨어요.”

설마하니, 그게 전부 나를 위한 거였다니! 갑자기 아까 먹었던 맛있었던 석찬이 돌덩이가 되어 뱃속에 얹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많은 요리 중에 반의 반의 반의 반조차 다 먹지 못하는걸.”

“그건 어느 귀족가나 마찬가지예요. 어느 집안이나 하루 세 번씩 호화로운 요리를 차리고는 대부분을 버리고는 하는걸요. 그건 아가씨의 잘못이 아니에요.”

위로를 해 주려 한 말 같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그 많은 귀족가에서 그 많은 요리를 전부 쓰레기통에 버린다니!’

비록 지금은 블랙웰에 적을 두고 있다지만, 고작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본투비 한국인이었던 내 안의 혼이 음식의 낭비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그날 저녁, 녹턴의 집무실에서 나는 이 일에 대해 말을 꺼냈다.

“녹턴, 제가 듣기로는 요즘의 호화로운 식단은 전부 저를 위해 준비하신 것이라면서요? 제 건강을 신경 써주시는 것은 정말 감사하지만 저는 그걸 다 먹을 수 없으니 조금 간소화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하지만 녹턴을 고개를 저었다.

“뭐? 그건 새로 고용한 영양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구성한 식단이란 말이다. 거기서 몇 가지를 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거 참 미치겠네. 그새 영양 전문가까지 고용하셨어요? 그것도 오로지 날 위해서?

하지만 여기까지는 사실 예상했었다. 내가 쓰러진 일이 그에게는 정말로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니.

“저, 그렇다면…… 앞으로는 공녀님, 공자님도 함께 식사를 하면 어떨까요?”

“뭐?”

“이런 맛있고 고급스런 요리를 저만 먹는 것은 역시 아까워서요.”

사실 이렇게 좋은 요리가 필요한 건 아무리 봐도 어른인 내가 아닌 성장기의 아이들 아니겠는가.

아이들의 식사를 많이 도와줬기에 그들의 식단도 정말 훌륭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요즘의 내 식단만큼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유가 더 있었다. 나는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저희 셔우드 백작가에서는 늘 조찬, 석찬은 온 가족이 모여서 하고는 했어요. 그것처럼 녹턴과 공녀님과 공자님, 그리고 저 넷이서 함께 식사를 하면 정말 단란하고 즐거울 것 같아요.”

내 말을 듣는 녹턴의 눈은 고민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그가 고민하는 것을 본 나는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안 될까요? 곧 가족이 될 사이이기도 하니까……. 미리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전 정말 행복할 거예요.”

가족. 내 입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그 말이 녹턴의 마음속에 어떤 의미로 닿은 것일까?

그것은 내가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피식 웃더니, 나를 끌어당겨 안았다는 것이다.

“꺅!”

나는 순식간에 그에게 끌려가 안겨졌다. 나를 감싸 안는 그의 체온은 뜨거웠다.

그는 내 귓가에 몇 번 입을 맞추곤 자신의 무릎 위에 나를 앉혔다. 귓가에서 느껴지는 간지러움은 꽤나 묘했다.

녹턴은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날 올려다보았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지? 너한테도 보기보다 앙큼한 데가 있었군.”

“네에?”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예전의 무뚝뚝한 모습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어쩐지 또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버리는 것만 같아 얄밉게 느껴져 나는 일부러 더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안면은 물론 귀까지 열감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내 얼굴은 온통 새빨갛게 익어 있으리라.

그는 귀엽다는 듯이 쿡쿡 웃다가, 그 긴 손가락으로 내 머리카락을 휘감아 끌어당겼다.

녹턴은 그 위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의 입술이 머리카락 위에 부드럽게 눌리는 모습이 보였다. 머리카락이 당겨지며 바스락 소리를 냈다.

“내가 너라면 결혼 전에는 그런 말은 안 할 거다.”

“그, 그러니까 저는—.”

“너는 모른다.”

그는 내 말을 딱 잘랐다.

“내가 널 볼 때마다, 얼마나 참고 있는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자색 눈동자는 너무나 깊고, 짙었다.

‘진실을 보는 눈’이 없는 나조차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 소용돌이치는 깊고 깊은 애욕과 소유욕을.

머리카락이 뺨 위를 스치고 간질이는 감각과 그의 진득한 눈빛. 마치 나를 훑고, 핥아 내리고, 통째로 집어삼킬 것만 같은…….

나는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팩 돌리고 말았다.

“아, 그. 저기……. 그래서, 대답은요?”

녹턴은 아주 탐스러운 것을 만지듯이 내 머리카락을 몇 번이나 더 쓸어내리다가 대답했다.

“뭐, 그렇게 하도록 하지.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나쁘지 않기는! 내가 보기에 그는 정말로 내 심장에 나빴다.

그를 보고 있지도 않은데 그 강렬한 눈빛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안에 깃든 짙고 아득한 욕망을 난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그 감정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오로지 나만을 향해 있다는 것은…….

나는 고개를 휘휘 저어 잡념을 흩뜨려 버렸다.

‘빨리 그의 광증을 치료해 주고 결혼해야지, 안 되겠어!’

이런 위험한 남자와 약혼 관계를 몇 달만 더 유지했다가는 내 허벅지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해서, 그다음 날부터 나와 녹턴, 아이들은 다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와아, 라리아! 가치 밥 머거?”

“네에, 공자님. 이제부턴 같이 식사를 할 거예요.”

나도 좋지만, 아이들도 너무나 좋아해 주어서 더 기뻤다.

그동안 아이들과 함께 식당을 들락인 적은 많았지만, 그땐 언제나 아이들의 식사를 돕는 시녀의 입장이었기에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아이들의 옆에는 식사를 도와주는 하녀들이 있고, 우리는 그저 즐겁게 식사를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왠지, 엄청나게 승진한 듯한 느낌인데.’

나는 쑥스러움을 숨기며 하녀에게 잘 부탁한다는 뜻의 눈인사를 했다.

그렇게 오찬이 시작되었다. 이런 호화로운 요리를 즐기며 녹턴과 또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아, 공녀님. 브로콜리도 드셔야죠. 브로콜리는 정~ 말 몸에 좋아요.”

그렇다고 단시간 안에 아이들의 식사에 신경을 쓰는 습관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자네트의 밑 접시에 쌓여 있는 브로콜리를 보며 말했다.

“브로코리 씨러.”

자네트가 투덜거렸다. 그렇게 말하는 자네트의 입술은 댓 발은 튀어나와 있어서 꼭 오리 입 같았다.

그 모습도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워 나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아유, 공녀님, 브로콜리가 싫으세요? 하지만 이를 어떡하죠? 브로콜리는 공녀님이 좋다는데…….”

나는 자네트의 접시에 담겨 있는 브로콜리 하나를 포크로 찍어 흔들며 높은 목소리를 냈다.

“‘자네트 공녀님! 절 먹어 줘요! 공녀님의 뱃속에 들어가고 싶어요!’”

“…….”

“‘공녀님의 키도 쑥쑥 크게 하고 몸을 튼튼하게 만들어 드릴 거예요! 그러니 절 먹어 줘요! 제발!’”

브로콜리 요정이 애걸복걸하자, 고집스레 입을 내밀고 있던 자네트의 마음도 약해져 갔다. 표정이 순두부처럼 흐물흐물 풀리는가 싶더라니, 결국…….

“아라써. 머글래.”

“‘야호! 감사해요, 공녀님! 다이빙~!’”

나는 입을 벌린 자네트의 입안에 브로콜리를 쏙 넣어 주었다. 자네트는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브로콜리를 꼭꼭 씹어 꿀꺽 넘겼다.

그리고 나는 물론 칭찬도 빼먹지 않았다.

“우리 공녀님, 브로콜리를 드셨군요! 이렇게 대견하실 수가!”

“……나 머시써?”

“그럼요! 공녀님 너무 멋져요. 최고, 최고!”

내가 최선을 다해 주접을 떨어 주자 자네트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녹턴이 말했다.

“어이가 없군.”

“네? 어이가 왜 없어요?”

“둘이 수준이 비슷해 보여서 하는 말이다.”

그가 비웃음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에 조금 발끈한 내가 말했다.

“부러워서 그러시는 건 아니고요? 녹턴도 제가 브로콜리 먹여 드릴까요?”

물론 내가 그 말을 진심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냥 그의 건방진 태도에 살짝, 아주 쬐끔 발끈했을 뿐이다.

녹턴의 유치한 도발에 넘어가 발끈해 말도 안 되는 말을 해버렸으니 그는 나를 더더욱 비웃을 줄 알았다.

그런데 상대의 반응이란…….

“음.”

녹턴은, 내 말을 듣자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그는 정곡이라도 찔린 듯 굳어 버리더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의 귀는 분홍색이었다.

“……?”

그리고 나는 그렇게까지 명백한 반응을 읽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나는 황당해서 입을 떡 벌렸다.

“서, 설마 정말로……?”

그런데 그때였다. 나는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조그마한 손길에 신경을 빼앗겨 버렸다.

“라, 라리아아…….”

바로 미하일이었다. 미하일은 사랑스러운 초록색 눈동자를 도륵도륵 굴리며 나와 녹턴의 눈치를 살피더니, 자기 접시를 가리켰다.

“나, 콩 못 먹게써.”

그 순간 나는 다시 유치원 선생님 모드에 돌입했다. 녹턴에 대한 것은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이 뜻이다.

“우리 공자님, 콩 드시기가 싫으시구나.”

“웅.”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을 반달 모양으로 휘면서 배시시 웃었다.

“근데에, 라리아가 먹여 주면…… 머글 수 이쓸 것 가태.”

아! 이 귀여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미하일의 말을 거절하겠는가? 나는 행복에 겨운 얼굴로 베이크드빈을 듬뿍 떠서 미하일의 입가에 내밀었다.

“자아, 공자님. 아아~.”

“아아~.”

미하일은 내가 내미는 콩을 냉큼 받아먹고는 우물거리며 행복하게 웃었다.

불평 한 번 하지 않는 미하일이 대견해서 나는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맛있죠, 공자님? 먹을 만하죠?”

“우웅. 마시써.”

“아이, 예뻐라! 어디, 좀 더 먹어 볼까요?”

“아아~.”

그렇게 나는 몇 번이고 콩을 떠먹여 주었다. 내가 먹여 주어서 그런지 미하일은 콩을 덥석덥석 잘 받아먹었다.

그렇게 한 네다섯 번은 먹였을까? 행복한 얼굴로 잘 받아먹던 미하일의 얼굴에서 갑자기 웃음이 사라졌다. 미하일의 토실토실한 뺨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어? 왜 그러세요, 공자님?”

“으우우…… 라, 라리아…….”

꼼지락대던 미하일은 내 등 뒤에 얼굴을 숨겼다. 나는 어리둥절하다가 미하일이 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범인은 바로 녹턴이었다. 그는 식사하던 포크마저 내려놓고 부릅뜬 눈으로 미하일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리 아이들이 녹턴과 친해졌다고 해도, 그렇게 노려보면 당연히 무서울 수밖에.

“녹턴!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애들 밥 먹는데!”

내 말에 녹턴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게 오냐오냐 키우기만 하니까 버릇이 없어지는 것이다. 가끔은 훈육을 할 줄도 알아야지.”

“방금 그건 훈육이 아니라 그냥 겁 주기잖아요! 정말, 오늘따라 유치하게 왜 그러세요?”

이 인간, 진짜로 나한테 받아먹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

하지만 녹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마뜩잖은 얼굴로 미하일이 있는 쪽을 빤히 볼 뿐이었다.

나는 미하일이 겁을 먹을까 봐 일부러 더 몸으로 미하일을 가렸다. 그걸 본 녹턴의 미간에는 가는 주름이 생겼다.

‘정말, 속 좁기는! 지금 아들한테 질투하는 거야 뭐야?’

발끈한 나는 일부러 더 자네트와 미하일에게 신경을 썼다. 아이들의 옆에 있던 식사 교육 하녀가 거의 할 일이 없어질 정도였다.

* * *

녹턴은 미하일의 변화를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의 ‘진실을 보는 눈’에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은 언제나 같았다.

예를 들면 장녀, 자네트는 그 속은 무르지만 뾰족뾰족한 내면을 가지고 있어 꼭 밤송이나 고슴도치처럼 보이곤 했다.

반면, 미하일은 겉도 속도 물렁물렁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놈이 대체 어떻게 블랙웰의 핏줄 속에서 태어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굳이 말하자면 미하일은 셰이머스가 본모습을 드러내기 전과 닮았다. 그 겉모습도, 내면도.

가시를 가지고 있는 자네트에겐 험한 세상을 굳건히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물러터진 미하일은 장차 대체 어떻게 살아나갈 건지 다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오죽 무르고 유약했으면 유모가 퇴직한 뒤로 매일 밤마다 악몽과 경기에 시달릴까.’

사생아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블랙웰은 그 어느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마 많은 사람들이 녀석들의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면서도 뒤에서는 사생아라는 사실을 비웃으리라.

젊은 나이에도 세상의 어둠을 너무 많이 보아온 녹턴은 그 사실이 눈앞에 뻔히 보이는 듯했다.

한데 그랬던 미하일이, 달라졌다.

그저 젤리처럼 흐물거리기만 하던 아이의 내면 속에 단단한 심지가 자라났다. 마치 핵과의 과육 속 씨앗처럼.

녹턴은 미하일의 심지가 자라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봐 왔다.

‘어린 녀석이라서 그런지, 내면의 성장도 빠른 모양이군.’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덕분에 걱정을 덜었다. 강한 부분을 가지고 있어야만 세상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을 터이니.

미하일의 변화가 언제부터였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바로 지난 봄부터였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라리아가 블랙웰에 온 때와 겹쳤다.

‘미하일 녀석이 변화한 건 그녀로 인한 것이었나.’

라리아는 미하일에게 단순히 경기를 치료해 준 것 이상의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그녀는 이곳 블랙웰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자신에게나, 아이들에게나.

단지 거기까지였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텐데…….

미하일 안의 심지가 거슬리기 시작하게 된 건, 그것이 씨앗처럼 작고 단단하다 못해 점점 커지고 검게 변할 때부터였다.

‘……점점 더 검어지는군.’

녹턴은 어린아이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기사들이나 사용인들의 아이들 중 이런 내면을 가지고 있는 녀석은 없었다.

미하일이 5살치고는 조숙한 편이라는 것 정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녹턴은 양아들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양아들에 대한 걱정이 변한 것은 아니고, 싫어하게 된 것도 아니지만…….

‘이런 점마저 ‘그 녀석’을 닮아 가는 것 같다는 것은…… 좀 묘하군.’

그리고 그 묘하고 떨떠름한 느낌은 바로 오늘 정점을 찍었다.

“부러워서 그러시는 건 아니고요? 녹턴도 제가 브로콜리 먹여 드릴까요?”

“…….”

처음으로 아이들이 함께한 오찬의 도중이었다. 라리아가 그런 말을 꺼낸 덕에 분위기가 묘해졌다.

물론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 무슨 우습지도 않은 소리란 말인가? 이 내가, 이 녹턴 블랙웰이 브로콜리 따위를 받아먹기를 바라다니.

그렇다고 그녀가 해 주겠다고 하면 굳이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직업이 그런 일인데 어쩌겠는가. 그녀의 반려이자 반쪽인 자신이 장단 좀 맞춰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 콩 못 먹게써.”

묘한 분위기는 양아들의 난입으로 뚝 끊겨 버리고 말았다.

옛날부터 쭉 그랬다. 어린 녀석들은 분위기를 파악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꼭 무드를 깨곤 했다.

‘이래서 식사는 단둘이 하려고 했던 건데.’

내심 투덜거렸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이제 와서 결정을 물리기도 꼴이 우스웠으니까.

한데, 미하일 녀석을 무심코 본 순간 녹턴은 깨달았다.

미하일은 단순히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녹턴의 시선이 닿았을 때 그는 웃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기분이 좋아서 웃는 것도 아니었다. 하녀들이나 라리아라면 그저 ‘너무 귀엽다’고 하겠지만, ‘진실을 보는 눈’을 가진 녹턴만큼은 알 수 있었다.

미하일이 느끼는 감정은 ‘기분 좋음’ 이상의 것이었다. 그의 검은 씨앗을 빛내는 감정은 명백했다.

우월감. 원하던 것을 먼저 손에 넣은 듯한 우쭐함!

미하일은 녹턴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콩을 냠냠 받아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녹턴은 깨달았다.

‘이 녀석, 이제보니 콩을 못 먹는 것도 아니었군.’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저런 어린놈이 자신에게 경쟁의식을 느끼고 있었다니. 그것도 라리아를 두고!

어린애처럼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라리아를 둔 경쟁에서 자신은 미하일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하일이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그는 5살짜리 피도 안 마른 꼬맹이였으며, 라리아는 자신의 것이었다. 그것은 저 꼬맹이 녀석이 어찌할 수 없는, 물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해는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과 같은 사실이었다.

단지 저 어린놈이 어쩌다 저렇게 되었나 싶긴 했다.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자꾸만 ‘그 녀석’ 생각이 나서 더 착잡하기도 하고.

‘이래서 피는 속일 수 없다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미하일을 보고 있었더니 꼬맹이 녀석이 갑자기 깜짝 놀라며 오들오들 떨었다. 어쩌면 눈빛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걸지도 모른다.

“녹턴!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애들 밥 먹는데!”

그 덕분에 라리아에게 꾸중을 듣기까지. 블랙웰 대공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미하일은 한술 더 떠 꾸중하는 라리아의 등 뒤에서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녹턴은 그걸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어른의 체면이 있지, 5살짜리 어린애가 이러저러했다고 라리아에게 일러바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식사를 마친 뒤, 라리아는 테이블 위를 살펴보았다.

‘4명이 함께 식사했지만 여전히 반의 반의 반도 못 먹은 것 같네. 이건 전부 버려지는 걸까? 아까워라.’

녹턴도, 아이들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역시 한국의 피가 흐르는 라리아에게는 그것이 못내 신경 쓰였다.

최상급의 재료로 만든 호화로운 요리가 음식물 쓰레기통에 담겨 버려지는 것만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테이블에서 일어나기 전, 라리아는 이렇게 말했다.

“녹턴, 이 요리들은 이제 버려지겠죠?”

“먹고 남은 음식이니 당연하지.”

녹턴은 뭐 그런 걸 다 물어보냐는 식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라리아가 아니었다.

“혹시 이 요리들을 재활용할 방법이 없을까요?”

“재활용?”

녹턴이 되묻자, 라리아는 주저하며 생각해 두었던 아이디어를 꺼냈다.

“네. 저, 생각을 해봤는데, 매 끼니 남은 요리들은 전부 황립 수도 고아원이나, 독거노인 가정에 기부를 하면 어떨까 해서요.”

사실 언제나 블랙웰을 위해 고생하는 사용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법도 생각을 해 보았지만, 제국의 풍습상 귀족들의 식사와 사용인들의 식사는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귀족들을 위한 요리는 설령 남은 음식이라도 사용인들은 먹을 수 없게 되어있었다. 먹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를 나타내기 때문에, 귀족들의 음식을 맛본 사용인들은 주인의 머리 위로 기어오르게 될 거라나 뭐라나…….

물론 라리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논리였지만 이곳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다니 어쩌겠는가.

그래서 그녀가 사용인들 대신 생각한 것이 바로 기부였다. 고아원이나 독거노인에게 남은 음식을 기부하는 것이다.

‘맛뿐만 아니라 영양까지 고려한 좋은 식품들이니 고아원의 어린아이들이나 노인들의 건강에도 좋겠지.’

그것이 라리아의 생각이었다.

녹턴은 라리아의 의견에 대해 잠깐 생각하는가 싶더니, 예상치 못했을 정도로 딱 잘라 버렸다.

“내가 고려할 바가 아니다.”

“노, 녹턴!”

라리아는 깜짝 놀랐다. 녹턴이라면 분명 자신의 뜻을 이해하고, 동조해 줄 것이라고 내심 생각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런가, 녹턴 역시 귀족이니까. 그것도 보통 귀족이 아닌 정말 대단한 사람이니까 한낱 고아들이나 독거노인들의 사정까지는 관심이 없는 게 당연할지도…….’

시무룩한 얼굴로 생각하던 라리아의 눈앞에, 이런 말이 툭 떨어졌다.

“남은 요리를 어떻게 쓸지에 대해 고려하는 건 대공의 권한이 아니다. 대공가의 안주인의 권한이지.”

“네…… 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라리아는 놀라서 퍼뜩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라리아의 이마에 무언가가 쿡 하고 닿았다. 녹턴의 검지손가락이었다.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그런 말을 하면서, 녹턴은 라리아의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그리고는 픽 웃더니 먼저 집무실로 떠나버렸다.

라리아는 여전히 그의 손길이 남아 있는 것만 같은 이마를 문질렀다. 가슴 속이 간질간질했다.

그날 이후, 라리아는 블랙웰의 이름으로 식사하고 남은 요리들을 기부하기 시작했다.

고아원, 병원, 소년소녀 가장과 독거노인의 가정 등…….

이 일을 위해서 기부받을 자의 목록을 작성하고, 기부품을 적재적소에 보내는 일을 하는 시녀까지 새로 고용했다.

덕분에 라리아도 모르는 사이에 블랙웰과 라리아의 이름은 수도의 빈민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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