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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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선황제 귄터를 폐위하고, 하인리히가 새로운 황제의 자리에 즉위한 뒤 그는 이번 반정의 일등공신인 녹턴과 나에게 큰 상을 수여하고 싶어 했다.

하인리히는 훈장이나, 황실 소유의 성이나, 심지어는 녹턴과 내가 주인공인 일주일 내내 이어지는 호화로운 황실 연회 등등을 제안했지만 녹턴은 그 모든 것을 거절했다.

“나는 번거로워지기 위해 이번 일에 협력한 것이 아니다. 번거롭지 않기 위해 협력한 것이란 말이다.”

녹턴 식으로 표현했지만 결국은 ‘다 귀찮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사실 이번 일에서 녹턴이 얻은 제일 중요한 것은 하인리히가 통치되는 동안 내내 지속될 황실에서의 실권이니……. 그에 비하면 다른 것들은 별것 아닐 만도 하지.’

제국의 진정한 흑막, 비선 실세가 되었는데 까짓 훈장 따위가 탐이 날 게 뭐가 있겠는가?

어쨌든 이런 일들이 마무리된 뒤에야 나는 다시 기존의 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이들을 돌보고, 그런 한편 녹턴의 광증을 낫게 해 줄 방법을 찾는 그런 일상.

다만,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선황제 귄터 때문에 늘 긴장하고 있던 것이 풀려서 그러는지 몸살기가 찾아왔다. 으슬으슬 몸이 떨리고, 현기증이 나고 근육이 욱신거렸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가씨?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메리는 또 이런 쪽 눈치는 도사라서 내가 몸살이 나자마자 알아보았다. 나는 메리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응, 몸살 기운이 좀 있네.”

“너무 과로하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저택 내 의원에게 검진을 받아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공녀님, 공자님은 저희가 맡을 테니 휴식을 좀 취하세요.”

그냥 근육통 같은 거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하필 감기라서 계속 아이들을 돌보기가 좀 그랬다.

감기는 전염성이 있는 병이고, 아이들은 어른보다 면역력이 낮아서 쉽게 전염되기 마련이니까. 내 감기를 자네트, 미하일에게 옮길 수는 없었다.

“그럼 오늘은 부탁할게.”

“걱정 마시고 맡겨만 주세요.”

솔직히 그간 귄터에게 하도 불려 다녀서 아이들을 메리에게 맡긴 적이 많았다. 싫은 티를 낼 만도 한데 메리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나를 걱정해 주었다.

‘역시 메리는 정말 좋은 친구야.’

나는 그 길로 저택 상주 의사인 프레드릭을 찾아갔다.

‘그러고 보니, 라리아가 된 뒤로 감기에 걸린 건 처음이네.’

라리아는 백작저에 거의 갇혀 살다시피 했던 귀족 영애치곤 놀라울 정도로 건강한 편이라 이제껏 감기에 걸린 적은 없었다.

‘이제 11월이고, 환절기라서 더 그런가 봐.’

내가 처음 라리아가 된 것이 아마 2월 말, 이곳 블랙웰에 온 것이 3월 초 정도였던 것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다니…….

8개월은 긴 시간처럼 느껴지면서도, 그동안 그렇게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는 걸 생각하면 또 매우 짧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시간 동안 한 남자와 두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정말로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의원실에 도착한 나는 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들어오세요.”

일전에도 신세를 진 적 있던 저택 내 의사인 프레드릭이 나를 맞이했다. 자상하고 편안한 성격인 그는 정중하게 물었다.

“오랜만입니다, 셔우드 영애.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아서요. 몸살이 나고 현기증과 두통이 있어요.”

프레드릭은 청진기와 이런저런 도구들로 나를 진찰하며 물었다.

“하루 업무 시간이 어느 정도이십니까?”

“오전 7시에 출근해서 자정이 약간 넘은 시간에 퇴근하고 있어요.”

“영양 섭취와 수면은 충분히 하고 계신가요?”

“식사는 워낙 잘 나오니 잘 하고 있어요. 수면은 하루 5시간 정도?”

진찰과 문진을 끝낸 프레드릭이 말했다.

“감기는 아니고, 과로로 인해 몸에 무리가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뜩이나 요즘 계속 큰일을 겪으시기도 했으니까요. 앞으로는 업무 시간을 줄이고 수면을 충분히 취하도록 하세요. 성인도 하루에 7~8시간은 수면을 취해야만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네…….”

프레드릭이 한 말은 모두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동안 ‘나는 건강하니까!’ 같은 이유로 일을 좀 열심히 한 건 사실이었다. 아이들도 돌보고 싶고, 녹턴도 도와주고 싶고, 시몬의 일도 돕고 싶은데 어느 것 하나 포기하기 싫기도 했고.

전생에도 일 욕심이 많다, 일이 없으면 찾아서라도 하는 타입이다 라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설마 빙의가 된 뒤에도 이럴 줄이야.

‘더 악화되지 않게 당분간은 좀 쉬엄쉬엄하는 것이 좋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 프레드릭이 말했다.

“전염성은 없을 겁니다만, 그래도 나을 때까지는 푹 쉬십시오. 면역력을 높여 주는 보약을 지어드릴 테니 식후마다 하루 세 번 드시고요.”

“네, 그럴게요.”

프레드릭은 의원실 안쪽 방으로 들어가더니 약을 몇 첩 지어 가지고 나왔다.

“일단 사흘 치를 드릴 테니, 약을 다 드시면 다시 와서 진료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이것은 지금 드시고 가시고요.”

그가 검은 물약이 한가득 담긴 대접을 내밀었다. 몸에 좋은 약은 쓰다더니, 약에서는 몹시 고약한 냄새가 났다.

‘진짜 먹기 싫은 냄새야…….’

안 그래도 쓴 약을 잘 못 먹는 나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약을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잘하셨습니다. 이 약은 하녀들에게 달여 달라고 하셔서 하루 세 번씩 꼭 드십시오.”

나는 프레드릭에게 인사를 하고 약을 받아 가지고 나왔다. 오늘은 쉬기로 했으니 푹 쉴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쌓인 피로가 하루 만에 풀리기를 바라는 건 지나친 기대였는지, 다음 날에도 내 상태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계속 쉴 수는 없어. 프레드릭이 전염성은 없다고 했으니 일을 조금씩은 해야겠다.’

게다가 아이들을 돌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귄터 때문에 오랜 시간을 뺏긴 내게는 급한 일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녹턴의 광증을 고쳐 주는 것.’

지난번에 페트로 덕에 블랙웰의 광증에 대한 정보가 성국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조사는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린의 도움이 필요했다.

성국이 가지고 있다는 광증에 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성녀인 아이린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아이들을 돌보고, 오후에 잠깐 짬을 내서 아이린도 만나러 가야겠다.’

그렇게 계획을 한 나는 약을 먹고 언제나처럼 출근했다. 아이들을 깨우고,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을 돕고, 옷을 갈아입히고 씻기고…….

하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기 때문인지 집중력이 흐려진 것을 아이들은 금방 눈치챘다.

“라리아!”

아이들과 놀아 주던 중,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에 나는 움찔 놀랐다. 자네트였다.

“네, 공녀님?”

나는 될 수 있는 한 다정하게 물었지만, 자네트는 그 정도로 넘어가 주지 않았다.

자네트는 이미 잔뜩 골이 난 얼굴이었다. 부루퉁한 얼굴로 하얀 볼따구를 빵빵하게 부풀린 채 자네트가 말했다.

“왜 딴생각해?”

“아하하, 미안해요. 이제 집중할게요.”

“흥! 라리아 바아보.”

한편, 엄지손가락을 입에 넣은 채 나를 빤히 보던 미하일이 물었다.

“라리아…… 오디 아파?”

“네?”

뜨끔한 내가 멈칫하는 순간을 미하일은 놓치지 않았다. 미하일은 덥석 달려들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이마를 짚어 보곤 말했다.

“라리아 이마 따뜻해.”

“머어! 라리아 아파?”

미하일의 말에 자네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내 머리를 짚었다. 조금 따뜻한 게 미열이 있는 모양이었다.

‘메리를 심부름 보내서 다행이야. 메리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나를 쉬라고 쫓아냈겠지.’

아무튼 어른이 애들한테 걱정을 끼칠 수는 없었다. 어른이라면 아이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줘야지, 불안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더 과장스럽게 말했다.

“아니요! 저 정~ 말 괜찮아요. 제가 얼마나 튼튼한데요! 이마가 따뜻한 건 아까 뜨거운 물로 세수를 해서 그래요.”

“우웅.”

“저엉말?”

하지만 똑똑한 아이들답게, 둘 다 믿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미하일과 자네트 둘 다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미하일이 양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라리아, 아푸면 내가 호오 해주까?”

앗…… 걱정을 시키고 싶진 않지만, 이건 너무 귀엽다. 미하일의 호오라면 백 번이라도 받고 싶다.

“공자님, 호오 해 줄 거예요?”

“웅.”

내가 기대감 어린 얼굴로 묻자, 미하일은 무릎 위에 기어올라 앉더니 내 이마에 따뜻한 입김을 불기 시작했다.

“호오~ 라리아, 아푸지 마. 아푸면 안 돼. 호오~.”

‘아…… 너무 귀여워서 현기증이 나.’

미하일이 얼마나 정성껏, 열과 성을 다해 입김을 부는지……. 그리고 그럴수록 내 심장은 얼마나 아파 오는지!

나는 지나친 귀여움에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높아져만 가는 공기 중 귀여움 농도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아이들을 걱정시켜선 안 되지만…… 그래도 아이들에게 걱정을 받는 건 정말 고맙고 기쁜 일이구나.’

왜냐하면, 그만큼 아이들이 날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내가 아이들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이나 말이다.

그러고 있는데, 빽 하는 목소리가 평화를 깨뜨렸다. 자네트였다.

“라리아! 아푸면 내가 치료해주께!”

돌아보니, 자네트는 어느샌가 반사경을 머리에 쓰고 장난감 청진기와 주사기 같은 것을 손에 들고 있었다.

프레드릭이 쓰는 물건들을 제법 그럴싸하게 구현한 병원 놀이용 장난감들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자네트에게 물었다.

“공녀님이 치료를요? 어떻게요?”

“자, 자! 내가 진찰 할꼬야!”

자네트는 내 무릎 위에 앉아 있던 미하일을 밀어내고, 자기가 무릎 위로 올라와선 내 이마에 청진기를 가져다 댔다.

몹시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로 이마를 진찰하는 자네트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청진기가 그렇게 쓰는 물건이 아닐 텐데…….’

그래도 굳이 아이의 순수함을 깰 필요는 없겠지 싶어서 그 사실을 지적하진 않았다.

“자네트 의사 선생님. 저는 대체 어떤 병에 걸린 건가요?”

내가 묻자 자네트는 몹시 씩씩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마에 충치가 생겨써!”

네, 이마에 충치요……?

“푸훕!”

나는 여기서 그만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너무 귀엽고 웃겨서 견딜 수가 없었다.

웃음을 참느라 부들부들 떨면서 내가 물었다.

“그…… 그럼, 이마에 충치가 생기면 어떻게 치료해야 하나요?”

자네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주사기를 꺼냈다.

“주사 놔 주께!”

자네트는 내 이마에 주사를 놓고는 이마를 살살 문질러 주었다.

“자네트 손은 약손! 자, 이제 다 나아써!”

“와, 고마워요, 공녀님!”

나는 뿌듯해하는 자네트를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구, 귀여워라. 비록 방법은 어린애답지만, 자기들 나름대로 나를 걱정하고 빨리 나았으면 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 같아서 나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이런 거라면…… 가끔 아픈 것은 나쁘지 않을지도?’

심지어는 이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으니까.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나는 아이들을 메리에게 맡기고 아이린을 만나러 갔다.

아이린에게 내 약혼자인 녹턴의 광증에 대해 털어놓은 나는 다음과 같은 부탁을 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녹턴의 광증을 고치기 위해 아이린의 도움이 필요해요. 혹시 성국이 가지고 있다는 광증에 대한 정보를 아이린이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네? 성국에 그런 정보가 있다고요?”

아이린의 반응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이린은 평생을 성국에서 살아왔고 아기 때부터 차기 성녀로 내정되어 길러졌으니 그 정보의 내용을 모르더라도 그런 게 있다는 것 정돈 알고 있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성국은 의학기술에 대해서도 연구하니까 그 일환으로 보유하고 있던 정보 아니었어요?”

“네, 물론 성국에서 의학에 대해 연구하긴 하지만……. 신민들을 위해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일반적인 병을 다룰 뿐, 특정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병에 대한 연구도 한다는 것은 금시초문인걸요.”

아이린은 알쏭달쏭한 얼굴로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곧 의욕 넘치는 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라리아의 부탁이니까 정보는 열람해 볼게요. 맡겨 두세요!”

“정말 고마워요!”

나는 아이린이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책을 뒤지거나 성국으로 편지를 보낼 줄 알았다.

성국이 가지고 있다는 데이터베이스를 열람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시간이 몇 주, 몇 달은 걸릴지도 모른다고 마음을 다지고 왔던 참이었다.

그런데 아이린의 다음 행동은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아기 머리만 한 커다란 수정구슬을 하나 가지고 나왔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녀는 눈을 찡긋하곤, 수정구슬 위에 두 손을 모은 채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순간, 수정구슬에서 새하얀 빛이 번쩍였다. 그것은 아이린의 손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빛났지만 놀랍게도 조금도 눈이 아프거나 괴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린은 한 손은 구슬에 얹고 한 손은 기도하듯 자세를 취한 채 계속해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 아래에 있는 구슬에서 계속 어떠한 화상 같은 것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슴푸레하게 온갖 사람이나 다양한 장소, 사물, 동식물 같은 것들을 반복적으로 비추는 그것은 꼭 몇 배속 빨리 감기라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게 성녀가 가진 능력 중의 하나인 걸까?’

나는 그 모습을 신기해하며 지켜보았다.

한 1시간 정도 지났을까? 마침내 수정구슬에서 불빛이 잦아들었다.

“휴, 다 됐어요! 광증 비슷한 것에 대한 정보가 있는지 한번 쭉 훑어봤어요.”

아이린은 어느샌가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 창문을 조금 열고 시원한 물을 건네주었다.

“어, 어땠어요?”

아이린은 물을 마시고는 고민하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에…… 제가 열람할 수 없는 보안 등급의 정보들이 많았어요.”

“네? 성녀도 열람할 수 없는 정보가 있나요?”

내가 놀란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성녀는 여신의 뜻을 인류에 전하는 숙명을 타고난 사람으로 성국에서 최고로 높은 직위였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제국 황실의 정보를 황제가 열람하지 못하는 거나 다름이 없다고나 할까.

아이린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게요. 저도 이런 건 처음 봤어요. 성녀가 되기 전이라면 모를까 된 후인데 제가 열람할 수 없는 정보가 있다니…….”

“열람할 수 있는 정보들은 어땠어요?”

나는 조급함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그런데, 아이린의 대답은 이전보다 한층 더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게, 직접적으로 블랙웰 가문과 관련되어 있는 정보는 아닌데……. ‘광증’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해 보니 여러 가문들에 대한 기록이 나왔어요. 각기 시대도 국적도 다른 가문들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모두 무척 크게 부흥했지만, 결국 마신을 소환하려고 해 성국에 의해 멸문당했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이게 블랙웰 가문의 광증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이린은 자신이 읽은 정보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설명했다. 그 가문들이 블랙웰, 그리고 광증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연결시키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설명을 들은 내 머릿속에는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저…… 그 가문들의 이름도 기억하시나요?”

“네. 먼저 제국의 크세르크세스가, 그리고 카스티야 왕국의 톨레도가, 그라나다 왕국의…….”

아이린이 읊는 가문들의 이름을 들으며 나의 추측은 확신이 되었다.

‘페트로가 알려 준 그 가문들이잖아!’

바로, 역사 속에서 블랙웰과 동일한 광증을 가졌다고 하는 그 가문들이었다.

나는 그 가문들의 이름을 메모해 두고 계속 보았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 이름들을 여기서 이렇게 들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 가문들이 전부 마신을 소환하려고 했다는 건, 대체 뭐지?!’

역사 속에 가끔 유전병인 광증을 가진 가문들이 나타난다.

그 가문들은 구성원들의 초인간적으로 뛰어난 능력과 광증에 비롯된 특별한 능력으로 인해 놀라울 정도의 명성과 권력을 이룩한다.

하지만 그 모든 가문들의 결말은 여신을 모시는 성국에서 금기시하는 마신 소환으로 인한 멸문이라니.

‘대체 어째서?’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 설마. 전혀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블랙웰도?’

혼자서 고민하는 것만으로는 답이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이린에게도 의견을 구해 보았다.

“정말 고마워요, 아이린. 그런데 그렇게 부흥했다던 가문들이 왜 하나같이 마신을 소환하려고 했을까요?”

“으음…… 마신을 소환해서 더욱 큰 욕심을 채우려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미 인간의 힘만으로는 한계에 다다를 정도의 부와 권력을 쥔 상태에서도 더욱 많은 부, 더욱 많은 권력을 바라서 그랬던 것일지도 몰라요.”

아이린의 추측은 그럴싸했다. 사람의 욕심이란 건 끝이 없는 것이라,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도 더 가지고 싶어 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미 한 가문으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기에 더욱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마신의 힘을 빌리려 했던 것일지도.

‘하지만, 블랙웰이 그럴 리가 없는데……. 녹턴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닌걸.’

그 모든 광증을 가진 가문들이 하나같이 마신을 소환한 것이 단순히 우연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마신’과 ‘광증을 가진 가문’ 사이에는 분명 무언가 상관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블랙웰이 그런 죄를 짓는 것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나는 블랙웰에 대해 이런 설정은 한 적이 없는데.’

잠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하지만 나는 곧 그 생각을 접어 두었다.

그야, 내가 직접 설정하지 않았는데도 일어난 일이 한두 번이어야지 말이다.

녹턴도 아이린도 셔우드의 사람들도 내가 설정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주어 나를 몇 번이고 놀래키곤 하지 않았던가.

‘그야 당연하지. 이제 이들은 내가 설정한 단순한 캐릭터 따위가 아니라…… 진짜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녹턴이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마신을 숭배하고 소환하려 한다니! 내가 아는, 내가 지켜본 그 녹턴이? 그것만큼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아이린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대공저로 돌아왔다.

아이린이 알려주는 ‘성국의 정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치료 방법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지끈거리던 머리만 더욱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나는 언제나처럼 녹턴의 집무실에 들렀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을 그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아픈 것도 아닌데, 그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평소처럼 녹턴에게 아이 다루는 법을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아이린에게 들은 정보들이 너무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정말 블랙웰에서도 마신을 소환하려고 하고 있을까?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 고민에 빠져 있느라, 그가 나를 부르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라리아.”

녹턴은 몇 번을 불러도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나를 빤히 보다가 내 콧잔등을 가볍게 튕겼다.

“아. 아…….”

나는 그제야 화들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녹턴은 팔짱을 낀 채 마뜩잖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습을 시켜 놓고 멋대로 다른 생각에 빠지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건가?”

“죄, 죄송해요.”

내가 황급히 사과하자, 녹턴은 코웃음을 쳤다.

“하, 그런 말을 들으려고 부른 게 아니다.”

그는 나를 소파에 앉히고, 자신 역시 그 옆에 앉았다. 그가 내 볼을 가볍게 꼬집으며 속삭였다.

“함께 있을 땐 내게만 집중하란 말이다. 그 누구도 아닌 오직 나에게.”

‘이 사람 설마…… 내가 다른 사람 생각을 한 줄 알고 질투한 건가?’

귓가를 간질이는 그의 그르렁거리는 듯한 낮은 음성 사이로,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부풀어 올랐다.

그의 목소리는 몹시 섹시했지만, 그것이 내가 자신에게 집중해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토라진 거라고 생각하니 솔직히 정말로 귀엽게 느껴졌다.

내가 잘못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애교스럽게 고개를 흔들어 그의 손에서 볼살을 빼냈다.

“알았어요.”

녹턴은 짐짓 불만스런 얼굴로 나를 빤히 보다가 인상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앗, 잠깐만요.”

나는 일어나려는 그를 도로 붙잡아서 앉혔다.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 기회가 바로 지금인 것 같았다.

“그, 여쭤볼 게 있는데요.”

“뭐지?”

녹턴은 도로 앉더니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나는 그의 숨결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을 의식하면서 말했다.

“저…… 정말 이상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요. 아니, 이상한 질문이에요. 그냥 한번 여쭤보는 거니까 너무 기분 나빠 하지 마시고 들어 주세요.”

“그러니까, 뭔가.”

내가 시원하게 물어보지 않자 녹턴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나는 내 입술을 덮치려고 하는 그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키스는 좋지만 지금 이 타이밍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저…… 그게…… 녹턴 혹시…… 마, 마신에 관심 있으신가요? 그, 그러니까…… 뭐, 마신교를 좋아하신다든가, 왠지 그쪽에 마음이 간다든가. 마신을 소환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든가…….”

아, 틀렸다. 자연스럽게 묻고 싶었는데 아무리 봐도 어마어마하게 생뚱맞고 이상한 질문이었다.

내 손바닥에 입술을 가로막힌 채로 인상을 쓰던 녹턴의 눈썹이 의아함으로 슥 올라갔다.

“……그 질문은 대체 뭐지? 웬 마신?”

“그러니까 이상한 질문이라고 했잖아요…….”

얼굴이 무지막지하게 화끈거렸다. 아마 그가 보는 내 얼굴은 완숙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잘 익었으리라.

나는 그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은 채로 시선을 피했다. 녹턴은 잠시 어이없어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없다. 그렇게 엉뚱한 질문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보는군.”

그의 너무나 뚜렷하고 단호한 대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가 설마 마신을 소환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심으로는 걱정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녹턴은 내 손목을 붙잡고 손바닥을 떼어 냈다. 그리고 다시 자기 입을 막지 못하게 하려는지 그 손을 단단하게 감싸 쥐고는 말했다.

“대체 왜 그런 질문을 하지? 내 악명 때문인가?”

“아,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저도 알았어요. 녹턴이 마신에 관심 없다는 거요.”

“그렇다면 왜.”

“그, 그게…….”

나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왜 이 질문을 했는지를 알려 주려면 내가 그의 광증을 고칠 방도를 찾아다니고 있다는 것까지 말해야 하고, 그게 녹턴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니까.

그는 자존심이 아주 세고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다.

내가 대답을 주저하자, 녹턴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도록.”

그의 뜻밖의 말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어, 어딜 가시게요?”

“보여 줄 게 있다.”

짧게 내뱉고 그는 아직 소파에 앉아 있는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녹턴은 책상 서랍 아래의 금고에서 열쇠를 꺼내더니 어느 서랍장에 있던 구멍에 열쇠를 꽂고 돌렸다.

나는 거기에 금고와 열쇠 구멍이 있는 줄도 몰랐었다.

‘비밀의 무언가 같은데……. 내가 이런 걸 다 봐도 되나?’

나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가 하는 일들을 지켜보았다.

녹턴은 집무실 사방 벽마다 가득한 책장에서 책 몇 권을 꺼내는 등 몇 가지 비밀스러운 작업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책상에 튀어나온 레버를 당기자…….

드르르륵!

집무실 사방의 벽 전체에서 거대한 기계가 움직이는듯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 방 안에 이런 장치가 되어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곧이어 책상 정면의 책장이 양쪽으로 갈라지더니, 그 뒤에 숨겨진 비밀의 문이 드러났다. 녹턴의 집무실에는 사실 비밀의 방이 있었던 것이다!

녹턴은 비밀 문의 손잡이를 당겨 열면서 말했다.

“네게도 보여 주지. 광기의 방이다.”

이 모습을 지켜본 나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내가 밥 먹듯 들락거린 그의 집무실에 이런 비밀 공간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긴, 귀족의 집에는 종종 비밀 통로나 비밀 공간이 있다고 하니까. 블랙웰 대공씩이나 되는 그의 집에 비밀 공간이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봤다가 조심스레 숨겨진 방에 들어갔다.

그곳은 일종의 비밀 서재처럼 보였다.

공간 자체는 그의 집무실의 절반 정도 크기로 넓지 않았지만 복층이었고, 사방의 벽이 천장까지 닿을 정도의 책장으로 가득했다.

블랙웰의 상징색인 검은색과 은색으로 꾸며진 그곳은 이상하게 싸늘한 느낌이 들었고, 창문이라곤 천장에 난 작은 창밖에 없어서 자연광이 별로 들어오지 않아, 등유 등만이 어슴푸레하게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우와아…….”

두 손으로 입을 감싸고 그 모습을 구경하던 나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타고 올랐다.

책장에는 책은 물론 논문 등의 다양한 자료로 가득했다.

책등을 손끝으로 훑으며 살펴보던 나는 한 권을 뽑아 들어 등불에 비추어 보았다.

“블랙웰의 광기와 가문 내 살인의 역사?”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오소소 떨리는 제목이었다.

“‘광기의 방’은 그동안 블랙웰에서 수집한 광증에 대한 모든 자료를 보관하는 곳이다. 블랙웰에서도 작위를 가진 자와 그 배우자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다. 너는 내 정혼자이니, 조금 이르긴 해도 출입해도 상관없겠지.”

아래층에서 그런 나를 지켜보던 녹턴이 말했다.

그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엔 없었다.

‘블랙웰에 그런 곳이 있었단 말이야?’

나는 이 ‘광기의 방’이라는 곳을 오늘 처음 들어보았다. 즉 내가 설정해서 생긴 곳은 아니라는 것이다.

블랙웰의 선조들은 내 설정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자신들의 광증과 광기에 대해 연구하고 조사해서 자료를 모아 두었다.

이렇게나 많은 책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녹턴 역시도 자신의 광증을 치료할 방법을 여기서 찾았겠구나.’

대부분의 블랙웰들은 녹턴과 달리 자신들의 광증을 자랑스러워했으니, 이 자료들을 모아 놓은 것은 기념하기 위해서 혹은 강화시키기 위해서였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열심히 연구했다는 사실은 대단하게 느껴져서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광기의 방 내부를 훑어보았다.

“장차 블랙웰의 안주인이 될 사람으로서 이번 기회에 자료들을 잘 살펴보도록. 나는 물론 내 어느 선조들도 마신에는 관심도 없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녹턴은 아마 나를 안심시키려 이곳에 데려와 준 것 같았다. 자신과 블랙웰이 마신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이다.

‘역시 틱틱대는 척하면서 내심 다정하다니까.’

아직 그와 결혼하지 않은 나에게 이런 곳을 일부러 보여 줄 정도로 날 신경 써 주었다는 사실이 고맙고 기뻤다.

“알았어요.”

나는 배시시 웃으며 광기의 방의 자료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곳에서 그의 광증을 치료해 줄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이곳의 자료를 다 봤을 텐데도 아직 광증을 치료하지 못한 것을 보면 그리 큰 기대는 하지 말아야겠지만…….

자료들을 빠른 속도로 읽어 나가던 나는 눈에 띄는 책을 발견했다.

「진실을 보는 눈 : 블랙웰의 광증과 초능력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눈이 확 뜨이는 제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나는 블랙웰의 광증에는 특정한 능력이 동반된다는 설정을 해놓고도 정작 그 능력이 뭔지는 결정을 못 했었다.

그래서 녹턴이 가지고 있을 그 능력의 정체를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그 책을 꺼내서 읽었다.

하지만 책에 쓰여 있는 내용은 내 예상을 한참이나 초월하는 것이었다.

「블랙웰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광증. 한 번 발현되면 피를 보아야만 해소되는 블랙웰의 광증은 몹시 위험하지만, 그 위험성만큼이나 지고한 능력을 동반하기에 경외받았다.

블랙웰 역시 그러하다. 블랙웰의 광기가 동반하는 능력은 ‘진실을 보는 눈’.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마안(魔眼)이 있었기에…….」

책에 따르면, 블랙웰의 광증에 잇따르는 ‘진실을 보는 눈’이라는 능력은 인간의 본질을 시각화하여 보여 주는 것이라고 했다.

역대 블랙웰들은 그 능력으로 유능한 이와 무능한 이, 꿍꿍이를 감춘 이와 믿을 수 있는 이를 가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영원히 들켜서는 안 될 비밀을 숨기고 있는 나는 그 사실을 도저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다른 세계에서 온, 이 세계의 창조주인 나는 그의 눈에 대체 어떤 모습으로 보이고 있는 거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손발이 차갑게 식었다. 나는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광기의 방에는 거울이 없어 내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다른 사람이 봤다면 내 낯빛은 유령처럼 창백할 것이 분명했다.

‘만일 그가 내가 원작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해졌다.

‘바로 내가 그의 인생을 망친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지금 그는 나를 사랑한다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그럴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사실, 그의 끔찍한 과거를 생각해 본다면…… 나를 죽이고 싶어 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나는 비틀거리다가 넘어지지 않으려 책장에 몸을 기댔다.

현기증이 너무 심했다. 프레드릭이 준 약은 분명 잘 먹고 있었는데…… 휴식이 부족했던 걸까.

잠시 그 상태로 숨을 고르고 있는데, 아래층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리아.”

곧 그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정돈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녹턴은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

“자료는 충분히 살펴봤나?”

그를 본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했다. 나는 그에게 애써 웃어 보였다.

“아, 네! 덕분에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내 모습을 물끄러미 살폈다.

그의 눈에 나는 지금 대체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책 내용에 따르면 그 인간의 본질은 물론, 감정까지도 어느 정도는 시각화되어 보인다고 했다.

상대가 기쁘면 그 빛이 밝고 선명해지고, 괴로움을 느끼면 빛에 안개가 끼거나 시커먼 감정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식으로.

‘그렇다면 그의 눈에 지금의 나는 분명…….’

나를 빤히 보던 그가 언제나와 같은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이제 블랙웰과 마신이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겠지.”

그건 사실이었다. 이런저런 자료를 뒤적였지만 블랙웰과 마신이 연관이 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리고 그가 내뱉은 다음의 말로 인해 나는 심장이 쿵 떨어질 뻔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무래도 내 마음이 불안과 괴로움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그는 알아차려 버린 것 같았다. 그 ‘진실을 보는 눈’이라는 능력으로 인해서.

‘평소 내 감정을 잘 읽는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냥 눈치가 좋아서 그러는 줄 알았지. 설마 이런 능력이 있을 줄은…….’

하지만 그의 능력의 정체를 알게 된 이상 이제 와서 숨겨 봤자 소용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녹턴에게 방금 찾은 책을 보여 주면서 말했다.

“녹턴, 제가 책장에서 이런 책을 찾았어요. 당신에게 ‘진실을 보는 눈’이라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차라리 이 책에 쓰여 있는 내용이 전부 거짓말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광기의 방에 있는 책이 거짓말일 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묘하게 무거워진 눈으로 나를 빤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진실을 보는 눈’이라는 능력은 사람의 본질이 보이는 것이라던데, 그것 역시 정말인가요?”

녹턴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 움직임은 아주 작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그것이 매우 큰 움직임처럼 느껴졌다.

그가 그저 작게 끄덕인 것만으로도 나는 가슴 속 어딘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렇구나. 역시 그랬던 거였어.’

나는 내 모습이 녹턴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정말 궁금했다.

내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지. 내가 원작자이자 이 세계의 창조주라는 것을 알고 있을지.

아니면 그저 약간의 위화감만 느껴지거나, 이곳의 다른 사람과 거의 다르지 않게 보일지.

무서워져서 물어보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용기를 짜내어 그에게 물었다.

“그럼…… 저는 녹턴에게 어떻게 보이나요?”

녹턴은 잠시 나를 빤히 보더니 말했다.

“내 눈에 너는…… 무척이나 특별한 존재로 보인다. 내가 널 사랑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첫 만남부터 그랬지. 너는 정말로 특별해.”

그는 아주 잠깐 주저하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이 세계의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색깔이니까. 너는 그 아무리 희귀하고 놀라운 동식물에게서도 볼 수 없고, 어떤 장소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색을 띠고 있다.”

“그 말씀은…….”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네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게 말한 녹턴은 변명하듯 덧붙였다.

“물론 그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는 모른다. 단지 네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만 알 뿐이다. 하지만, 라리아. 나는 네가 누구든 정말 상관없다. 네가 그 어떤 존재라도 너를 사랑하고, 내 아내로 맞이하고 싶은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다른 때 같았으면 너무나 달콤하게만 느껴졌을 그의 말이 가슴 아파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이 그것뿐이라는 것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것은 다행일까, 불행일까?

‘내가 어떤 존재든 상관없다고 말해 주어서 기뻐. 하지만…… 과연 내가 원작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그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숨이 턱 막혔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고작 ‘내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 정도였다.

그는 내가 원작자이며, 고작 글 몇 줄로 그의 인생을 망친 장본인이라는 것을 모른다.

만일 그가 그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그땐 그는 나를 어떤 눈으로 볼까.

그때도 내게 달콤한 말을 속삭일 수 있을까.

지금은 나를 안아 주는 그의 다정한 손길이 내 목을 조르려 들지는 않을까.

나는 말할 수 없이 불안하고 두려워졌다.

“저…… 너무 오래 여기 있었던 것 같아요. 이제 그만 공녀님과 공자님께 가 봐야겠어요. 오늘 이 방을 보여 줘서 고마워요, 녹턴.”

나는 애써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진실을 보는 눈 때문일까. 녹턴은 내 마음이 여전히 괴롭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라리아, 잠깐 기다려라. 좀 더 내 말을 들으면……!”

“아니에요. 저 진짜로 너무 오래 있어서 그런 것뿐이니까요. 그럼, 좋은 밤 되세요.”

그가 나를 붙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나는 서둘러 인사하고 광기의 방에서, 그의 집무실에서 빠져나왔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게 자신의 아이들을 맡길 정도로 믿어 주고, 사랑해 준 녹턴에게 무척이나 고마웠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혼란스럽고 두려웠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를 속이고 싶지는 않아. 그리고 그도 분명 궁금하겠지. 내가 대체 어떤 존재인지…….’

“윽!”

복도를 달려가던 나는 심한 현기증에 거의 넘어질 뻔했다. 나는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뒤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골랐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보였다.

아찔한 시야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해 버리면…… 그때는 이 관계도 정말 끝나고 말 거야.’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를 사랑하고 그는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기적 같았다. 너무나 달콤해서 영원히 끝나지 말았으면 싶은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에게 내 정체를 들킨다면…… 그 꿈도 결국에는 물거품처럼 부서지고 말 것이다.

이 관계를, 그의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에게 사랑받지 않았더라면 모를까, 한 번 그의 사랑을 맛본 지금은 도저히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내 정체를 영원히 숨길 수는 없었다.

아내가 될 사람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데 그 정체를 궁금해하지 않을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그이니만큼, 내 진짜 정체가 궁금한 것이 너무나 당연했다.

‘대체 왜 그는 진실을 보는 눈을 가졌을까. 블랙웰의 능력이 왜 그것이어야만 했을까.’

과거의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지름작이라는 이유로 블랙웰의 능력을 확실히 정해놓지 않고 방치해 두었던 나 자신이.

‘그때의 나는 대체 왜 블랙웰의 능력을 정해 두지 않았던 걸까? 그냥…… 강한 힘, 굉장한 지성, 그 정도로만 해도 괜찮았잖아? 대체 왜…….’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 작품을 쓸 때의 나는 내 남자주인공이 특별했으면 했다.

‘광증’이라는 약점이 있으니, 그 대신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도 있었으면 했다.

그러니까 그에게 광증 설정과 함께 ‘특별한 능력’ 설정을 준 것이다.

지름작을 쓰면서 아무 생각 없이 했던 그런 한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이제 와서 이렇게나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고.

벽에 기댄 채 한참이나 숨을 고르고 나서야 시야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아이들의 방으로 돌아갔다.

오늘 밤에도 녹턴을 재우러 그의 방으로 가야만 하는데, 그를 대체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 *

녹턴은 라리아에게 광기의 방을 보여 준 뒤에야 무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라리아에게 광기의 방을 보여 준 것은, 마신 때문에 불안해하는 라리아를 안심시키고, 또 블랙웰의 주인과 안주인만이 볼 수 있는 방을 보여 줌으로써 자신의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만큼이나 진지하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라리아에게 광기의 방을 보여 주면 그녀가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처음에만 해도 그랬고.

하나…… 그녀에게 방을 공개한 몇 시간 뒤, 라리아를 보러 갔을 때.

그녀의 특별하고 아름다운 색채는 불안과 두려움을 뜻하는 검은 안개를 두르고 있었다.

아까만 해도 분명히 없던 것이었다.

라리아의 질문을 듣고 나서야 녹턴은 그 이유를 알았다.

‘이전부터 자신의 정체 때문에 걱정했던 그녀이니, 내가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보군.’

그제야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녀에게 방을 보여 주지 말 걸 그랬다.

자신이 그녀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던 것뿐인데……. 아직은 시기상조였던 것이다.

“나는 네가 누구든 정말 상관없다. 네가 그 어떤 존재라도 너를 사랑하고, 내 아내로 맞이하고 싶은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해 보았지만 이 문제로 오래 고민한 그녀의 마음에는 와닿지 않은 것 같았다.

“저…… 너무 오래 여기 있었던 것 같아요. 이제 그만 공녀님과 공자님께 가 봐야겠어요. 오늘 이 방을 보여 줘서 고마워요, 녹턴.”

라리아는 그 색채에 여전히 검은 구름을 두른 채, 억지인 것이 분명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떠났다.

혼자 남은 녹턴은 황망한 기분으로 광기의 방에 남아 있었다.

이제껏 ‘진실을 보는 눈’을 특별히 싫어한 적은 없었는데…….

그녀가 알기를 원하지 않는 사실을 자신에게 보여 주는 이 눈이 갑자기 원망스러워졌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 마음이 전해질까.’

녹턴은 책장에 등을 기댄 채 생각했다.

‘그녀가 그 어떤 존재라도 내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한편으로는 그녀가 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아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내 과거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

그 경이로운 색채 하며, 그의 과거와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 하며…… 어쩌면 그녀는 정말 신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정체를 밝히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 마신일지도 모르지.’

성국을 중심으로 대륙을 평정한 종교인 ‘에일리아 여신교’는 마신을 주적으로 삼고 마신의 숭배와 소환을 엄히 금한다.

하지만 설령 그녀가 불행과 전쟁, 기아를 몰고 다닌다는 마신이라고 할지라도 그녀를 사랑하는 것을 그만둘 자신은 들지 않았다.

만일 전 대륙이 그녀를 적으로 삼는다면 그는 기꺼이 그녀의 하나뿐인 편이 되어 전 대륙을 상대할 것이다.

‘물론 그녀의 선량하고 따뜻한 색채를 보아서는, 정말 마신일 가능성은 극히 낮지만.’

어찌 됐건 그는 자신이 보는 그녀의 본질을 믿었다. 그녀는 평범한 인간은 아닐지언정 결코 악한 존재 역시 아닐 것이다.

어리고 약한 사람에게 한없이 다정한 종달새 같은 그녀가 마신처럼 악한 존재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녹턴은 남은 하루 동안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믿음을 줄 수 있을지를 계속 고민했다.

그날 밤. 평소라면 라리아가 그를 재우러 오는 시간. 녹턴은 초조한 마음으로 그녀를 기다렸다.

‘설마 오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그녀가 오면 말할 생각이었다. 그가 얼마나 그녀를 깊은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설령 그녀가 정말 이질적인 존재더라도 이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지하게 전할 생각이었다.

마침내 정각이 되었다. 라리아는 시간 약속에 철저해서 언제나 늦지 않고 나타나곤 했다.

그런데…….

“주인님! 크, 큰일이 났습니다!”

정각이 된 그때, 나타난 사람은 기다리던 라리아가 아닌 시몬이었다.

녹턴을 오랜 시간 모셔온 시몬은 그가 노크를 하지 않고 들어오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은 그답지 않게 당황한 얼굴로 벌컥 침실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녹턴 역시 그런 시몬을 탓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계속해서 가슴을 두들기던 불길함이 너무 큰 무게를 가지고 뱃속에서 쿵 내려앉았다.

시몬이 가져온 소식이 무엇이든 라리아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으면 했다. 그런 마음으로 녹턴은 집사에게 되물었다.

“큰일이라니, 무슨 일이지?”

“그게, 그것이…… 화, 황공합니다만.”

하지만 언제나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지기 마련이다. 시몬은 녹턴의 바람을 보기 좋게 배신했다.

“셔우드 영애께서…… 쓰러지셨습니다.”

“뭐라고?”

* * *

라리아는 자신의 침실에 누워 있었다. 살포시 감긴 베이지색 속눈썹 아래의 뺨에는 핏기가 없었다.

언제나 반짝거리는 듯한 생기와 종달새처럼 높은 음성 같은 것도 없었다.

그녀가 있는 방 안의 고요함은 녹턴에게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프레드릭은 라리아를 꼼꼼히 진찰한 뒤 이렇게 말했다.

“과로를 오래 하신 데다가, 최근 충격적인 사건을 연달아 겪으셔서 심적 피로까지 쌓이셨습니다. 증상을 계속 참고 계시다가 한 번에 터져 나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언제쯤 나을 수 있겠나?”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만, 앞으로 최소 사나흘은 일어나지 못하실 듯합니다. 최소한 일주일은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녹턴은 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실신한 라리아만큼이나 핏기가 없었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얼마나 참았을까. 얼마나 괴로웠을까.’

녹턴은 침대 옆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마른세수를 해도, 한숨을 크게 쉬어도 가슴 속 분노의 불길은 꺼지지가 않았다.

“분명 과로를 하지 않도록 출근 시간을 늦춰 주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차분하려고 애썼지만 분노한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안 그래도 위압감을 가진 그의 목소리에 노기가 실리자 하녀들이 움찔 놀라며 부들부들 떨었다.

하녀들 중 메리가 나서서 대답했다.

“그게 실은…… 주인님께서 출근 시간을 늦춰 주신 뒤에도 아가씨는 계속해서 기존과 같이 7시에 나오셨습니다.”

그녀의 얼굴 역시 창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라리아가 쓰러졌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과 죄책감, 그리고 녹턴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면서 메리가 애써서 대답했다.

라리아의 업무가 점점 늘어나면서, 녹턴은 계속해서 그녀의 출근 시간을 늦추었다.

처음 계약한 라리아의 출근 시간은 7시였지만, 이후 9시, 10시, 12시 하는 식으로 늦춰져 현재는 오후 1시, 오찬이 끝난 뒤부터 아이들을 돌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라리아는 여태까지 녹턴 몰래 6시간이나 일찍 출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녹턴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의 불똥이 튈 정도로 번득이는 자색 안광이 하녀들을 향했다.

“뭐라고? 그럼 내가 고용한 오전 담당 하녀들은?”

그 서슬 퍼런 눈빛에 휘감기자 하녀들은 견디지 못하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메리는 맹수의 아가리 앞에 선 듯이 너무나 두려웠지만 주저앉거나 울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아가씨는 오전에도 오전 담당 하녀들과 함께 공자님, 공녀님을 돌보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오전 담당 하녀를 고용한 이유가 없지 않은가! 라리아가 그토록 과로를 하는 동안 그녀를 보필해야 할 자네는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건가?”

“저, 저, 정말,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아, 아가씨께서 공자님과 공녀님을 꼬, 꼭 돌보고 싶어 하셔서……. 괘, 괘, 괜찮다고 하시기에, 저는 그런 줄만 알고…….”

녹턴은 화를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가 시몬에게 명령했다.

“라리아의 전담 하녀들과 오전 담당 하녀들을 전부 끌고 가 지하 감옥에 처넣어라. 그리고 열흘 후에는 블랙웰에서 쫓아내어라. 다시는 이 집에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소리를 죽여 훌쩍이던 하녀들은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며 견디고 있던 메리도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하녀들이 전부 끌려간 뒤에도 녹턴의 가슴속에서 불타는 분노는 식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알고 있었다. 하녀들에게 화풀이를 한다고 라리아가 건강을 되찾을 리는 없었다.

애초에 이 일이 하녀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일에 있어 가장 큰 죄인은 바로…….

‘내가 멍청했다. 그녀가 이렇게나 괴로워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그녀가 힘든 티를 내지 않았다든가, 그런 것은 다 변명에 불과했다.

그녀를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자신이라면 당연히 알아차려야만 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보호해야만 했다.

‘이런 내가 대체 누구를 탓한단 말인가.’

그의 죗값을 라리아가 대신 받아 버린 것이다.

녹턴은 라리아의 고통을 대신 받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줄 수 있으리라. 블랙웰이라는 가문도, 작위도, 부와 권력도…….

하지만 이 순간 그중 그 어떠한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녹턴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녀를 지켜보고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 *

라리아가 쓰러졌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대공저 내에서 인망이 좋던 그녀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사용인들에 의해 라리아의 병실에는 빠른 회복을 바라는 의미의 선물이 가득히 쌓이기 시작했다.

편지와 카드, 꽃, 간식 등이 테이블과 선반 위에 더 이상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쌓였다.

시몬과 하녀들이 열심히 다른 방에 옮겨 두어도 또 하루 정도 지나면 병실은 선물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기 시작했다.

외부인으로부터의 문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교계 이곳저곳에서 그녀를 향한 위문편지와 선물이 날아들었다.

병문안을 하고 싶다는 연락도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녹턴은 환자의 안정을 위해 문안 신청은 전부 거부했다.

다만, 단 한 사람의 문안만은 허용해 주었다. 바로 아이린이었다. 라리아가 아이린을 유독 아끼는 것을 감안한 배려였다.

“라리아!”

아이린은 양팔로 둘러 안아도 모자랄 정도의 양의 꽃을 낑낑대고 들고 왔다. 그녀는 정말 걱정하는 얼굴로 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라리아는 괜찮은가요? 언제 일어날 수 있나요?”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앞으로 일주일은 두고 봐야만 할 것 같습니다.”

프레드릭이 대답했다.

“너무 소란을 피우지 말도록.”

녹턴이 말했다.

그는 라리아가 쓰러진 뒤로 그녀의 옆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잠을 잘 때마저도 그녀의 방에 있는 소파에서 쪽잠을 잤다.

방 안에는 쓰러진 라리아와 프레드릭, 녹턴, 시몬, 그리고 라리아를 간호하는 하녀가 두어 명 바삐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이린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다가 말했다.

“저, 정말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라리아의 건강에 대한 거예요. 의사분과 대공 전하만 빼고 모두 나가 주시겠어요?”

녹턴은 의아해하면서도 그녀의 말대로 해 주었다. 시몬과 하녀들을 물린 뒤 그가 물었다.

“무슨 일이지?”

“저…… 사실은 성녀거든요. 작년에 비밀리에 임명되었고 내년 3월 레온하르트 기념제부터 공식 일정이 시작될 예정이에요.”

아이린의 말에 녹턴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블랙웰의 정보력으로 인해 성녀가 작년에 비밀리에 임명되었다는 사실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있긴 했다.

하지만, 라리아의 친구가 설마 성녀일 거라고는 그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인상착의가 비슷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성녀의 정보와 상대가 완전히 흡사하다는 점에서 반쯤 납득이 가긴 했지만, 그래도 녹턴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그가 의심을 완전히 지우지 않은 채 물었다.

“영애가 정말 성녀라면 신성력을 보여 봐.”

그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는지 아이린은 그다지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문을 외웠다.

그녀의 손끝에서 새하얗고 신성한 빛이 피어올랐다. 누가 봐도 신성력이었다.

“이제 제 말이 믿어지시나요?”

“그래, 이제 영애가 성녀라는 사실은 믿을 수 있겠군. 그래서?”

아이린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신성력은 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할 수도 있죠. 저는 아직 임명된 지 얼마 안 된 풋내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웬만한 중병에 걸린 사람도 단번에 건강하게 만들 수 있어요.”

신성력의 병을 치료하는 효과 때문에 성국은 일종의 의료단체로서 활동하기도 한다.

녹턴은 아이린의 말에 귀가 뜨이는 기분이었다.

눈앞의 풋내기 성녀가 중병 걸린 사람도 치료할 수 있다면, 라리아 역시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라리아를 제게 맡겨 주시겠어요? 제가 한번 치료해 볼게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아이린의 제안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녹턴은 라리아가 아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그녀를 낫게만 해 준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라던 바다. 만일 영애가 라리아를 낫게 해 준다면 결코 아쉽지 않을 정도의 보상을 주겠다. 또한 블랙웰은 그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에 아이린은 다정하게 웃었다.

“보상은요. 성녀는 개인 자산을 소유할 수 없는걸요. 라리아는 제 친구니까 당연한 거죠.”

아이린은 라리아의 옆자리에 앉아 기운 없이 늘어진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럼,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아이린은 평소와는 다른 진지한 모습으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서 하얗고 성스러운 불빛이 나타나더니 라리아의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녹턴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얼굴로 지켜보았다.

그렇게 한 5분쯤 지났을까, 땀으로 범벅이 된 아이린이 눈을 떴다.

“어? 이상하다. 왜 안 되지?”

“실패한…… 건가?”

녹턴이 실망이 역력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린은 굉장히 지치고 어리둥절해 보였다.

“네. 라리아의 기력은 충분히 채워 주었는데…… 이상하게 의식이 돌아오지가 않아요. 어, 정말 왜 이럴까? 여태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는데……. 저, 다시 해 볼게요.”

“아니, 됐다. 영애의 안색을 좀 봐라. 이 이상 했다가는 환자가 하나 더 생기겠군.”

녹턴은 실망감을 꾹꾹 억누르며 도로 라리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이린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상하다……. 저, 정말 죄송해요.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해서…….”

“아니, 영애의 잘못이 아니다.”

녹턴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린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 정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잠깐이나마 기대를 품었다가 실망했더니 더더욱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녹턴은 침대 옆으로 늘어져 있는 라리아의 기운 없는 손을 잡았다.

너무나 가녀린 손. 보고 있는 것만으로 가슴이 아플 정도로…….

한편 풀죽은 얼굴로 물러나 있던 아이린이 말했다.

“저…… 생각을 좀 해 봤는데요. 기력을 채워 주었는데도 라리아가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거든요. 일단 하나는 제가 고칠 수 없는 종류의 병인 경우예요. 저, 풋내기라서 아직 죽을 정도로 치명적인 병은 고치지 못하거든요. 하, 하지만 의사분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셨으니 제 생각에 이건 아닌 것 같고…….”

불길한 말에 녹턴의 눈이 희번덕 빛나자 아이린이 다급히 덧붙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저보다도 훨씬 더 강한 힘이 라리아의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경우예요.”

“인간 세상에 여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성녀보다 더 강한 힘이 뭐가 있지? 마탑주, 뭐 그 정도는 되어야 하나?”

“그럴 리가요. 마탑주보다는 제가 더 강해요. 아, 아니면 설마…….”

무언가 말하려던 아이린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건 성녀인 그녀로선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여신, 이라든가…….’

잠시 고민하던 아이린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이 생각을 흩뜨려 버렸다.

대체 자신이 모시는 여신이 자신의 친구인 라리아를 괴롭힐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튼 오늘은 죄송했어요. 전 이만 가 볼게요. 좋은 오후 되세요.”

“……그러도록. 집사가 영애를 배웅해 줄 것이다.”

“네, 안녕히.”

아이린이 사라진 뒤에도 녹턴은 계속해서 라리아의 곁에 있었다. 그녀의 손을 쥔 채, 부디 그녀가 하루빨리 눈을 뜨길 바라며.

한편, 라리아를 병문안하고 싶은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헤더, 헤더어.”

“네, 공자님.”

라리아가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아이들을 돌보게 된 하녀 헤더가 미하일을 보았다. 하녀와 눈이 마주치자 미하일은 이렇게 말했다.

“나아, 라리아 보러 가면 안 돼?”

“나두!”

라리아라는 이름이 들리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자네트가 달려와서 소리쳤다.

“나두, 라리아 보러 갈끄야!”

헤더는 그런 아이들의 반응에 당황스러워하며 말했다.

“안 돼요, 공자님, 공녀님. 의사 선생님이 라리아 아가씨를 병문안할 수 있는 사람은 성인으로 한정했거든요. 공자님과 공녀님은 너무 어리셔서 라리아 아가씨를 보러 가실 수 없어요.”

하지만 아이들이 라리아가 아닌 사람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하지마안…… 나, 라리아 보구시픈데…….”

“시러! 라리아 보러 갈끄야!”

헤더의 말에 미하일은 눈썹을 축 늘어뜨리면서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고, 자네트는 그대로 발라당 드러누워 버렸다.

“고, 공녀님! 여기 누우시면 안 돼요!”

“나 라리아 보러 갈끄야! 라리아! 라리아아아아아!”

“나아…… 훌쩍, 라리아 보구시퍼……. 히잉, 흐이이이잉—.”

아이들은 울며불며 떼를 썼고 그 덕분에 하녀는 한바탕 고생을 겪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얼마나 떼를 쓰고 고집을 피운다 해도, 의사가 금지한 일을 하녀가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녀는 끝끝내 아이들을 라리아의 병실에 데려가지 않았다.

하녀가 아주 잠깐 볼일을 보러 간 사이, 어린이방에는 자네트와 미하일, 단둘만이 남았다.

“나 라리아 보구시퍼.”

평소 좋아하던 장난감인 블럭에도 별다른 재미를 못 느끼고 있던 미하일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미하일의 옆에서 장난감 마차를 가지고 놀던 자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들은 다 바보들이야. 나두 라리아 보러 갈껀데…… 자기들끼리만 보구.”

“마자.”

미하일이 시무룩하게 동조하자, 순간 자네트의 녹턴을 닮은 자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아주 놀라운 계획이 싹을 틔우고 있다는 신호였다.

“우리 라리아 보러 갈래?”

자네트가 묻자 미하일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머? 하지만…… 어떠케? 가면 안 된대짜나?”

“몰래 가면 되자나, 몰래!”

그렇게 말하는 자네트의 요정처럼 작고 귀여운 얼굴에는 장난스런 웃음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속닥속닥, 두 아이 사이에서 놀라운 계략이 오고 갔다. 고작 5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이었지만 그 계획은 결코 작지 않았다.

작은 머릿속에서 블랙웰의 우월한 지능 유전자가 개화하는 순간이었다.

“공자님, 공녀님. 잘 놀고 계셨나요?”

헤더가 볼일을 마치고 어린이방으로 돌아왔다.

“웅!”

그때, 미하일과 자네트는 누구나 감탄할 정도의 천사 같은 모습으로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헤더는 그 모습을 보고 미소 지었다.

‘역시 공자님과 공녀님은 정말 귀여우시단 말이야. 떼만 안 쓴다면 말이지.’

헤더는 바느질할 거리를 꺼냈다. 그리고 아이들을 지켜보며 일하기 위해 가까운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도 착한 아이가 되셔야 해요. 싸우지 말고 얌전히 노셔요.”

“웅!”

인형 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헤더의 눈치를 살폈다. 헤더는 어느샌가 바느질에 열중하고 있었다.

“우리 아지트 만들자!”

“쪼아!”

자네트와 미하일은 커다란 보자기를 가져와서 의자 두 개 위에 덮어씌웠다.

그것은 일종의 오두막이나 텐트처럼 보였는데, 자네트와 미하일은 이런 아지트에서 노는 걸 매우 좋아했다.

“이히힛! 동굴 탐험이야.”

헤더는 아이들이 아지트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아이 두세 명이 들어가면 끝인 아지트 안에서 사고를 치면 얼마나 칠 수 있겠는가?

‘얌전히 아지트 안에서만 노시면 좋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헤더는 바느질을 계속했다. 아지트에서 아이들이 나오는지 지켜보면서 말이다.

아이들은 아주 오랫동안 아지트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보자기 틈새로는 아이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말소리, 노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래서 헤더는 안심할 수 있었다. 한참 뒤, 아지트에서 어른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기 전까지는.

‘어?!’

순간 헤더는 등골에 소름에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제야 무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 공자님!”

헤더는 바느질거리를 내던지고 다급하게 보자기를 걷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자네트와 미하일, 두 아이가 아니라…….

그저 한 개의 영상구뿐이었다.

<3권 끝.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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