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20)

(14)

* * *

녹턴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관계가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원래 약혼한 사이였고, 늘 오랜 시간을 공유하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대공저 내외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뜨거운 커플로 알려져 있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마음을 확인하기 전부터 할 거 다 하고 있었다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낯이 뜨거워졌다.

이전에는 미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게 지내면서도 그에게 반하지 않을 것을 기대하다니, 내가 미쳤었구나 싶었다.

매일 저녁마다 녹턴에게 아이를 대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 역시 여전히 하고 있었다.

둘 다 바쁜 와중에도 이 일과는 꾸준히 해 온 결과, 녹턴은 이제 제법 아이를 잘 다루게 되었다.

“어쩜, 실력이 정말 많이 느셨어요! 몇 달 전과 비교하면 정말 몰라보겠는걸요.”

나는 손뼉을 짝 치며 감탄했다.

녹턴은 실습용 아이 인형을 든 채 나를 흘끗 보았다.

“이 정도는 별거 아니다. 어려울 것도 없더군.”

그렇게 말하는 그의 입가에는 우쭐한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칭찬을 좋아해서 내가 칭찬을 하면 꽤 만족스러워하곤 했다.

아니, ‘내가 하는’ 칭찬을 좋아하는 건가?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들을 땐 저렇게 웃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잠깐 한 나는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충분히 어려운 일이었는걸요. 이제는 ‘프로 아빠’라고 할 만하겠는데요.”

“‘프로 아빠’?”

녹턴이 눈썹을 끌어 올리며 물었다. 그의 표정에 나는 킥킥 웃었다.

“음, 그만큼 전문가가 되셨다는 뜻이에요. 아 참, 그래선지 공녀님과 공자님도 녹턴을 많이 좋아하고 따르는 것 같던데요. 지난번에 다 같이 식사했을 때 기억나세요?”

녹턴이 아이를 대하는 일에 능숙해질수록, 자네트와 미하일이 녹턴을 대하는 시간도 점점 늘었다.

집무실에 들러 과자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것부터 시작해서, 함께 식사를 하거나 정원을 산책하는 등…….

처음에는 아빠를 무서워했던 아이들은 그에게 많이 익숙해졌는지, 이젠 그를 꽤 잘 따르게 되었다. 심지어 자네트는 녹턴에게 가끔 장난을 걸 정도였다.

녹턴은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듯하더니 픽 웃었다.

“이리 와서 앉아라, 라리아.”

그는 인형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자신이 기대고 있던 책상 옆자리를 두드렸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책상에 걸터앉았다.

“왜 그러세요?”

지난 경험들로 인해 나는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뭔가 할 말이 있어서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내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다가 입을 열었다.

“궁금하지 않나? 내가 왜 그 녀석들을 양자로 들였는지.”

그렇다. 자네트와 미하일은 녹턴의 친자가 아니라 양자였다. 그것도 사생아.

사생아가 천대받는 제국에서 그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애를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들인 것이다.

혼기가 찬 혼인적령기의 남성이 아내를 들이지 않은 채 애부터 만들다니, 확실히 드문 일이긴 했다.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있었구나.’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보자, 그 침묵을 어떤 뜻으로 받아들인 건지 녹턴은 씁쓸하게 웃었다.

“일반적인 숙녀들이 애 딸린 남자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 정돈 나도 알고 있다.”

물론 나는 그가 자네트와 미하일을 양자로 들인 사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그에게 정직하게 드러내 보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할 수밖에는 없었다.

“어떤 이유든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셨겠죠. 녹턴의 결정을 존중해요. 그리고 저도 공녀님과 공자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걸요.”

녹턴은 그의 손을 붙잡은 내 손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건 알고 있다. 네가 그 녀석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정도는.”

하지만 아이들을 돌보아야 할 사용인으로서의 입장과 연인의 혼외자식을 보아야만 하는 입장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는 아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 거다.

나는 그의 말을 부정하려 했지만, 그가 먼저 말을 이었다.

“그 녀석들은…… 내 형의 자식이다.”

“녹턴의 형님이요.”

“그래, 6년 전 죽었지.”

그런 말을 하는 녹턴의 눈은 한층 깊어졌다. 그리 즐겁지 않은 추억을 되새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자식은…… 갓 그 녀석들을 임신한 아내만을 남겨 두고 죽었다. 녀석들의 엄마 역시도 녀석들을 낳다가 죽어 버렸고.”

형과 형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는 정말로 쓸쓸해 보여서, 나는 그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정말 유감이에요.”

녹턴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아니, 유감이랄 것도 없다. 나는 그 자식…… 형을 끔찍하게 증오하거든. 저승에서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다.”

“…….”

“어쨌든, 최악인 인간의 자식들이긴 하지만…… 그 핏덩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천애 고아가 된 거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내 머릿속에는 5년 전의 녹턴의 모습이 그려졌다.

친부를 살해하고 스스로 대공위에 오른 지 단 일 년밖에 지나지 않은 녹턴. 충격적인 사건들을 연이어 겪고 삭막하게 얼어붙은 그가 만난, 작디작은 생명의 불씨.

그 손바닥만 한 작고 여린 생명체들은 그저 버려두기만 해도 언제라도 생명의 불꽃을 꺼뜨릴 것이었다.

그런데, 그리도 끔찍하게 미워하는 형의 씨앗인데도, 안쓰러움을 느끼는 그가 있다. 태어나자마자 천애 고아가 된 조카들을 저버릴 수 없었던 그가.

“내부에서는 차후의 분쟁을 피하기 위해 버리거나 죽이자는 의견도 있었지.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그러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었다. 차갑고, 냉정하고, 단단하고 가시 돋친 그의 겉모습 뒤에는 누구보다도 따스하고 다정한 내면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는, 나밖에 알지 못하는 그의 다정함은 그 여린 생명들을 차마 가만두지 못했으리라.

“……이러니저러니 해도 치울 송장 늘리는 것은 번거로우니까. 귀찮은 일 늘리는 것은 사양이다.”

‘애를 죽이는 게 키우는 것보다는 훨씬 덜 번거로울 텐데.’

그가 변명하듯 덧붙였지만 그의 속마음을 알고 있었던 나는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네, 네.”

“안 믿고 있군.”

그는 인상을 쓴 채 내 잔잔한 얼굴을 보다가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아얏.”

“어쨌든 그렇게 되었다. 아직 이런 이야기는 시기상조일 수도 있지만…….”

갑자기 그가 답지 않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궁금해,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심장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만일 네가…… 블랙웰이라는 성을 달게 된다면, 네게도 사생아 자식이 둘이나 생기는 셈이니까.”

그의 말에 나는 너무 놀라서 입으로 심장을 뱉어낼 뻔했다.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단 말야?’

아니, 자식이라니! 결혼이라니! 인간적으로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닌가요? 아직 정식으로 교제하기 시작한 지 보름도 채 안 됐는데!

물론 그렇다고 싫다는 건 아니지만!!

그는 다시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내 손을 끌어 올려 가볍게 입 맞추곤 그가 말했다.

“그것이 네겐 불만족스러울 수도 있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약속하지. 사생아가 있다고 하더라도, 대공비이자 블랙웰의 안주인이라는 네 지위와 명예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남편이 사생아를 데리고 있다고 블랙웰의 대공비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리는 놈들은 결코 용서치 않으마. 내 심장에 걸고 약속하겠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는, 목소리에는, 그가 한 말이 그저 빈말 따위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나 단단한 진심이 새겨져 있어서…….

심장이 다시 한번 미친듯한 속도로 고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로 그의 눈을 보다가…….

“……!”

팔을 뻗어 그의 등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하나도 불만스럽지 않아요. 공녀님과 공자님은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제 아이처럼 소중한 존재인걸요.”

“라리아…….”

나는 고개를 들어 올리며 그를 보고 활짝 웃었다.

“제가 진심으로 바라던 거예요. 녹턴, 공녀님, 공자님과 한 가족이 되는 일……. 생각만 해도 행복해요. 우리는 최고의 가족이 될 거예요.”

“…….”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는 잠시 말문이 막힌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꺄악!”

돌연 내 어깨를 눌러 책상 위에 눕혔다. 그리고 곧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을 눌러 왔다.

포개어진 입술 사이를 부드러운 살덩이가 가르고 들어왔다. 그는 다소 거칠게, 조급하게 나를 갈구하더니 입술을 떼곤 속삭였다.

“이해할 수가 없군. 어쩌다 너 같은 존재가 내게 오게 된 건지…….”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는 그의 숨소리는 거칠었다.

녹턴은 몇 번이고 다시 내 입술 위에 입술을 포개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 그의 모습은 꼭 부글부글 끓는 어떤 욕망을 애써 참아 내는 것처럼 보여서…… 나는 괜히 그를 따라서 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참이나 그러고 나서야 겨우 진정한 듯한 녹턴이 속삭였다.

“나를 너무 자극하는 게 좋지 않을 거다, 라리아. 적어도 혼인 전에는 말이다.”

“네? 혼인 전이요?”

그는 잠시 멈칫했다가, 간신히 말했다.

“……그런 게 있다.”

그렇게 대답한 그는 내 옆에 따라 누웠다. 다행히 그의 집무실 책상은 넓고 넓었기에 우리 둘이 나란히 누워도 한참을 남을 정도였다.

그는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한 팔을 내 허리에 휘감았다. 그것이 어찌나 구렁이 담 넘듯 자연스러웠는지 내 허리가 원래부터 그의 팔받침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나는 기가 막혀서 생각했다.

‘이 인간, 원래 이렇게 능글맞았던가? 솔직하지 못한 검정고양이 아니었어?’

그래, 생각해보면 이 관계에서 달라진 것이 있긴 있었다.

바로 스킨십이 어마어마하게 늘었다는 것.

그 상태로 녹턴이 속삭였다.

“너를 한시라도 빨리 블랙웰의 안주인으로 맞아들이고 싶군. 참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

정말이지 참긴 뭘 얼마나 참았다고! 우리 이제 사귄 지 보름도 안 됐거든요?!

하지만 그의 그런 반응도 솔직히 싫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좋아 죽을 것 같았다. 얼굴은 물론 목까지 온통 빨개진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때, 그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너를 당장 맞아들이기엔 문제가 있다. 너도 잘 알다시피…….”

“아…….”

나는 그가 무엇 때문에 주저하는지 알 것 같았다.

“녹턴의 병…… 때문이군요.”

그의 광증. 블랙웰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유전병.

언제 터져서 그의 주변에 피바다를 만들어 낼지 알 수 없는 시한폭탄.

“그래. 지난번에는 운 좋게 넘어가긴 했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또, 내가 언제 이성을 잃을지 모르니 내 가장 가까운 사람일수록 위험해지기 마련이다.”

그때 나는 허리춤에서 갑자기 떨림을 느껴 깜짝 놀랐다. 시선을 내리니, 내 허리를 감싼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지금 와서는 그것이 제일 큰 두려움이다. 라리아. 만일 내가 내 손으로…… 너를 해치고 네 피를 보게 되기라도 하면.”

나는 그의 떨리는 손 위에 손을 감쌌다. 그의 떨림을 멈추는 데 내 체온이 약간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나를 꽉 끌어안은 채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던 녹턴은, 곧 결심한 듯 말했다.

“이 병을 고칠 방법을 알아보겠다. 그리고 이 빌어먹을 저주가 끝나면, 그때는 네게 정식으로 청혼하마.”

가슴이 저려 왔다.

그에게 광증을 준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다. 그런데 나의 실수로 인해 그는 이렇게나 고통스러워하고, 또 노력하고 있었다.

“네.”

나는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사랑해요, 녹턴.”

그리고 다시 한번 결심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의 광증을 고쳐 주기로. 내 지난날의 과오를 돌려 놓기로.

“…….”

그는 내 말에 말없이 내 눈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이 한결 더 깊어지고,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입술 위에 와 닿을 그의 온기를 기대하며 눈을 감은, 그때였다.

벌컥!

“라리아!”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번개 같은 속도로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바닥을 디디고 서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긋 웃었다.

“네에, 공녀님?”

노크도 없이 집무실 문을 연 것은 자네트와 미하일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쫓아온 메리도.

“헉, 헉. 정, 정말 죄송합니다, 주인님, 아가씨. 큰 실례를 했습니다.”

메리가 깊게 허리를 숙였고,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쵸, 녹턴?”

“……음.”

녹턴 역시 어느샌가 내 옆에 서 있었다. 다만 그는 엄청나게 불만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이 녀석들에게 문을 열 땐 노크하라고 가르쳐야겠군.”

“네, 시정할게요.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나요? 공녀님.”

내가 묻자 자네트가 몹시 뿌듯하고 신난 얼굴로 무언가를 들어 보였다.

“잠자리 자바써!”

“…….”

자네트의 손에는 긴 날개와 초록색 몸통을 가진 잠자리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녹턴의 얼굴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가 행여 살기라도 내뿜어서 메리에게 겁을 줄까 봐 나는 얼른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와~! 대단하시네요, 우리 공녀님. 잠자리를 다 잡으시다니!”

“히히히. 아! 아까 무당벌레도 봐써! 풍뎅이도…….”

자네트가 신이 나서 정원에서 본 곤충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그때였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랑 녹턴을 번갈아 가며 살펴보던 미하일이 말했다.

“아버지랑 라리아, 뽀뽀 해써?”

“크흡!”

그의 말에 나는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도 사레들릴 뻔했다. 새빨개진 얼굴에 애써 손부채질을 하며 내가 물었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공자님.”

“우웅…… 그냐앙…… 그런 느낌이 들어. 뽀뽀한 것 가튼 느낌…….”

엄지손가락을 입에 물고 말하던 미하일은 녹턴의 매서운 눈과 마주치자 흠칫 움츠러들었다.

‘애들의 직감이란 정말 대단하다니까.’

아이들의 눈이란 가끔 어른의 눈보다 정확하곤 하지 않던가? 그게 설마 이런 데까지 적용될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뭐어! 뽀뽀! 뽀뽀 해써? 나도, 나도!”

그때, 갑자기 ‘뽀뽀’라는 말에 꽂힌 자네트 때문에 나는 자네트에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의 뽀뽀를 해 주어야만 했다.

물론 아이들에겐 늘 공평해야 하니 미하일에게도.

정신없지만 그래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때의 나는 너무나 행복했기 때문에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바로 이 순간, 제국의 어딘가에는 나를 향한 간계를 꾸미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설상가상으로 녹턴은 내게 그런 약속을 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블랙웰 대공령으로 출장을 떠났다.

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고 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면서.

나는 언제나처럼 아이들을 돌보면서 그가 어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 * *

라리아와 녹턴에 대한 간교한 악심을 품은 자는 바로 제국의 황제, 귄터 브레히트였다.

녹턴과 약혼녀의 관계를 갈라놓기 위한 첫 번째 계략이 실패한 뒤에도 귄터는 아무것도 깨우치지 못했다.

반성하거나 뉘우치긴커녕, 그의 열등감은 더욱더 많은 원한과 분노를 먹고 그 몸집을 불렸다.

“안타깝군요.”

“이런 것도 증거물이랍시고 기대에 부풀어 있었을 폐하의 처지가 말입니다.”

그의 비뚜름한 웃음과 조롱의 말. 한순간에 불이 붙어 잿더미가 되어 버린 증거물들…….

그런 치욕의 기억이 꿈에서조차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녹턴 블랙웰! 블랙웰, 이 자식……!”

그런 꿈을 꾼 날에는 분노에 차서 이를 부득부득 갈며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귄터 브레히트. 그는 제국 전체를 손에 넣었으면서도 그의 욕심과 열등감은 도무지 만족할 줄을 몰랐다.

자신이 가진 것들은 너무나 보잘것없어 보였고, 증오하는 그 남자가 가진 것들만이 찬란하고 아름답게만 보였다.

어쨌든 이번 일로 확신했다. 녹턴 블랙웰이 가진 것 중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바로 그의 약혼녀였다.

‘라리아…… 셔우드라고 했던가.’

귄터는 녹턴 블랙웰의 약혼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 반짝이는 청록빛 눈동자.

엄청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특유의 생기발랄한 모습이 묘하게 매력적인 여자였다.

‘오랜 시간 사교계에 거의 나타나지 않은 존재감 없는 여자였지만, 어느 순간 혜성처럼 나타나 두각을 드러냈다고 했지. 지금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지명도로 사교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했던가…….’

블랙웰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처박을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그녀를 이용하는 것임을 그는 악의적인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귄터는 자신의 지난 계략을 되새겨 보았다.

자신의 숨겨진 동생 하인리히를 이용해 그녀를 유혹하려고 했던 일.

하지만 하인리히는 자신의 지시에 따르긴커녕, 여태까지 뒤를 봐주었던 은혜조차 발로 차 버리고 가증스러운 블랙웰과 손을 잡아 도망쳤다.

‘전부 블랙웰 그놈에게 발각당하거나 그 자식에게 넘어가 버리니, 믿을 수 있는 놈이 하나도 없어.’

제국의 황제인 자신보다 블랙웰 대공을 더 두려워하고, 더 믿고 따르는 인간들이 이렇게나 많았다. 귄터는 그 사실에 치가 떨렸다.

‘이렇게 된 이상, 믿을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다.’

라리아 셔우드를 건드리는 게 제일 좋은 계략이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납치하거나 해치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대놓고 블랙웰과 전쟁을 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아무리 귄터라고 해도 아직 그 정도의 이성은 있었다.

리스크는 최대한 줄이면서, 라리아 셔우드를 총애하는 블랙웰을 가장 큰 절망의 구렁텅이에 처박는 일.

그 방법은…….

그때였다. 그의 심복이 희소식을 가지고 온 것은.

“폐하! 녹턴 블랙웰 대공이 업무로 인해 대공령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그의 약혼녀를 대공저에 남겨 둔 채로 말입니다!”

너무나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심복이 가져온 소식을 들은 귄터의 얼굴 가득 환희의 웃음이 떠올랐다.

‘여신도 나를 돕는구나!’

귄터는 이것이 마침내 녹턴 블랙웰에게서 승리를 거머쥘 기회라고 확신했다.

‘블랙웰! 이번에야말로 널 가장 차갑고 비참한 절망의 구렁텅이에 처박아 주마!’

* * *

녹턴이 출장을 간 이후, 나는 언제나처럼 아이들을 돌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오래 걸린댔지? 한 한 달은 걸린댔나.’

생각해보면 녹턴과는 늘 많은 시간을 공유했던지라, 그와 이렇게 오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래선지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자꾸만 문득문득 그의 생각이 났다. 걱정도 들었고.

식사는 잘하는지, 나 없이 잠은 잘 자고 있는지…….

자장가를 불러 준 지 오래되어 그런지 그의 불면 증상은 꽤 많이 나아진 편이었지만, 그래도 한 달이나 떨어져 있으면 증상이 돌아오진 않을지 걱정이 됐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그의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깨달았을 때 나는 꽤나 놀랐다.

‘그렇구나. 그가 보고 싶은 거구나, 난.’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지만 나한테는 새삼스러웠다. 그렇게 오래 함께 지내다가 잠깐 떨어지게 된 건데 그 새를 못 참다니, 꼭 어린애가 된 것 같아서 민망하기도 했고.

‘그도 내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그를 생각하는 것처럼. 하루에도 몇 번이고 내 얼굴을 그리고 있을까? 잘 있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내 걱정을 하고 있을까?

그것이 무척 궁금해졌다.

한편, 시몬이 내게 이런 소식을 전했다.

“주인님께서 영애의 호위를 아주 철저히 하라고 전하셨습니다. 외출 시 호위 기사를 평소의 3배로 늘리고, 호위 없는 단독 외출은 자제하라고 하시더군요.”

“녹턴이요?”

처음에는 놀랐지만 곧 일리가 있다 싶었다. 왜냐하면…….

‘황제.’

그는 이미 한 번 수작을 벌이다가 실패했으니 이를 득득 갈고 있을 것이다. 그의 녹턴에 대한 원한과 열등감은 고작 한 번의 실패로 포기할 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녹턴이 없는 지금이 또 다른 흉계를 실행할 적기라고 할 수 있겠지. 나도 당분간 조심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녹턴이 출장을 간 동안에는 외출을 되도록 자제하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대장이 왔습니다, 아가씨.”

언제나처럼 내게 온 초대장 다발을 살피던 나는 깜짝 놀랐다.

‘이건…… 황궁에서 온 거잖아?’

초대장 중에서는 황궁에서 온 것이 있었다. 금색 봉투의 겉봉에는 황후 레베카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내게 온 초대장은 전부 거절하긴 하지만, 지난번 황후의 초청을 받았듯이 황궁에서의 초대까지 거절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황후가 보낸 초대장에 따르면, 황궁 별관에서 작은 회화 관람 파티를 개최할 예정이니 내가 꼭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었으면 고맙겠다고 했다.

‘이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까, 거절하는 것이 좋을까?’

나는 고민했다. 요즘은 최대한 외출을 자제하고 있던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역시 황실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사교계의 예의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파티의 개최자는 황후였고 그녀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또한 무엇보다, 여러 명이 참석하는 공개적인 파티였기에 아무리 황제라도 이런 곳에서 눈에 띄는 짓을 하진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황제가 아무리 미쳐도 날 대놓고 납치하거나 어찌할 수는 없을 거기도 하고. 그건 곧 대공가와 완전히 척을 지겠다는 거니까.’

황제는 비열하지만 겁쟁이니까 말이다.

어쩌면 파티에 참석한 신사를 매수해서 나를 유혹하게 한다든가 하는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황후에게 파티에 참석하겠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그렇게 하여 회화 관람 파티의 당일. 나는 아이들을 메리에게 부탁하고 황궁으로 향했다.

황실의 법도상 호위 기사들은 궁의 외부에서 기다리는 것이 예의였다. 따라서 호위 기사들을 궁의 내부까지 데려갈 수는 없었다.

하인의 안내를 받아 파티가 열리는 별관으로 가자 황후 레베카가 나를 맞이했다.

“라리아! 이렇게 와 주어 정말 기뻐요.”

그녀는 환히 웃으며 포옹으로 환영의 인사를 했다.

“오늘의 파티는 저의 가장 가까운 친우들을 대상으로 제 아끼던 수집품들을 전시하는 자리랍니다. 라리아도 미술을 좋아하나요?”

“그럼요. 얼마 전에 약혼자와 미술관에도 다녀왔는걸요.”

“정말 잘됐네요. 음료를 즐기면서 먼저 도착한 손님분들과 대화를 나누고 계세요. 제가 준비한 것들이 라리아의 마음에 쏙 들길 바라요.”

나는 그녀의 말에 따라 샴페인 잔을 들고 손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난번에 참석한 황실 무도회와 달리 이번 행사는 서른 명 정도가 참석하는 소규모의 파티였다.

“황후 폐하의 수집품이 기대되는군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황후 폐하는 다양한 예술 분야에 일가견이 있으시니 말이죠.”

내가 입장하자 대화를 나누던 손님들의 말소리가 멈췄다. 손님들 중 나를 알아본 사람이 말했다.

“어머, 라리아 셔우드 백작 영애 아니신가요? 블랙웰 대공 전하의 약혼녀이시던!”

“셔우드 영애이십니까? 신문에서 영애에 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저를 기억하시나요? 지난번 황실 무도회에서 인사드렸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봐서 나는 깜짝 놀랐다.

‘지난번에는 유명인인 녹턴과 함께 다녔다지만 이번엔 그도 없는데, 의외인걸.’

하긴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리 의외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신문에 내가 연 어린이 파티에 대한 기사가 실리기도 했고, 아직까지도 초대장을 여럿 받고 있으니까.

“대공 전하께서는 함께 오지 않으셨나요?”

“네, 대공 전하는 지금 대공령으로 출장을 가셔서요.”

“무척 아름다운 드레스네요. 로잘린 부인의 새 디자인인가요?”

“네, 맞아요. 영애의 드레스도 무척 아름답네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한다는 사실이 내게는 여전히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데, 아무래도 내게 긍정적인 생각만 가진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셔우드 영애께서 지난번에 개최하셨던 파티에 대한 기사는 흥미롭게 읽었답니다.”

한 귀족 영애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정말 흥미로웠어요. 유서 깊은 셔우드 백작가의 장녀이시자 차기 대공비가 되실 분께서 아이들 앞에서 극인들이 하는 것과 같은 공연을 보여 주시다니요! 저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독창적인 발상이었어요.”

그녀의 말은 얼핏 보기에는 칭찬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귀족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는 뜻의 비웃음을 돌려 말한 것이었다.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분위기가 찬물이라도 쏟아부은 듯 얼어붙었다.

‘흐음.’

나는 어디서 본 적이 있나 싶어서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하지만 역시 기억에는 없는 얼굴이었다.

“흠, 흠흠. 그, 그건 그렇고 오늘의 전시 정말 기대되는군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점잖아 보이는 귀부인 한 명이 대화 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 영애의 입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만일 제가 그랬으면 저희 아버지께선 절대 용서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어쩌면 집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르겠는걸요.”

농담 같은 말이었지만 누가 들어도 가시 돋친 속내에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정작 그 비난의 대상인 나보다도 더더욱. 괜히 내가 다 머쓱해질 정도였으니까.

‘이런 말을 들을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 주변 사람들과 분위기를 봐서 한마디 정돈 해 주려던 찰나였다.

“황자가 무척이나 좋아하던 ‘공연’이죠. 몇 날 며칠은 그 얘기만 줄기차게 해 댔을 정도로요.”

익숙한 목소리에 모두가 놀랐다.

“황후 폐하.”

모두가 예를 갖춰 갑자기 나타난 황후 레베카에게 인사했다.

하지만 제일 놀란 사람은, 아까의 그 말을 뱉은 그 영애인 것 같았지만.

“어맛! 화, 황후 폐하. 저, 저는 그저……. 그, 그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가 도로 새하얗게 변한 영애의 모습을 본 황후 레베카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우아함을 잃지 않으며 말했다.

“우리 황자의 취향을 좀 더 의심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요.”

“아,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제 뜻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저, 그, 그저 놀라움을 표현한 것뿐……. 아, 아무래도 흐, 흔히 있는 일은 아니니까요…….”

모깃소리처럼 기어들어 가는 그녀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황후는 내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

“자, 신사 숙녀 여러분. 모든 분들이 도착하신 듯하니, 저를 따라오시길 바라요.”

황후는 내게 팔짱을 낀 상태로 우리를 옆 방으로 안내했다. 옆 방으로 가면서 그녀가 내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라리아. 저는 연극도 무척이나 좋아하거든요. 저는 모든 예술을 차별 없이 공평하게 사랑한답니다.”

아무래도 그녀는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정말 아이들 앞에서 혼신의 1인 연극이라도 펼친 줄 아는 모양이다.

세드릭이 어른스럽다고는 하지만 8살짜리 아이이고 설명하는 능력에 한계가 있을 테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구구절절 설명을 할 것까지는 없으니 나는 그냥 웃어넘기기로 했다.

“아하하, 실로 감읍합니다, 황후 폐하.”

옆 방은 황후가 수집한 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마치 전시관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제국 황후의 개인 소장품들은 과연 대단했다. 미술관에서 본 것들도 무척 훌륭했지만 이곳의 것들은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와아아.”

감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황후는 전시된 물건들과 그에 얽힌 일화를 하나씩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이 도자기는 정말 구하기 어려웠던 것이랍니다. 동방의 도자기 장인의 걸작으로, 이것 하나를 손에 넣기 위해 동방의 왕실과 경매 경쟁을 해야만 했죠.”

방에 도착해서야 황후가 팔을 풀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적당히 모여 있는 사람들의 중간쯤에서 그녀의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뒤쪽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뒤에서 남녀 한 쌍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유난히 부티 나게 차려입은 안경을 낀 남자와 젊은 여성이었다.

“저 도자기, 본 적이 있는 것 같군요. 제가 동방 유학 중에 만났던 장인의 것이 분명합니다. 나쁘지 않군요. 그래도 제가 유학 중에 본 진짜 명품에 비하면 별것 아닙니다.”

“아, 네. 그렇군요.”

사실 대화를 나눈다기보단 남자가 여성한테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설명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여자는 시종일관 곤란해하는 얼굴로 억지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뭐, 로니아 영애께서는 모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저는 유학파에 대학원까지 나왔기에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요.”

듣고 싶어서 들은 것은 아니었고, 남자의 목소리가 하도 크고 자신감 넘쳐서 귓가에 꽂힌 거긴 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들은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남자…… 설마 저 영애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

그러니까 저거 설마 플러팅이라고 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기엔 듣는 사람이 너무 불편해하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전시물에 대해 설명을 해 주려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잘난 척하면서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태도가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말을 해 주는 사람의 태도도, 듣는 사람의 반응도 미술관에서 녹턴이 내게 설명을 해 줄 때와는 얼마나 딴판인지.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제법 익숙한 그림이 눈에 띄었다. 미술관에서도 보았던 ‘성녀 아그네스’의 이적을 그린 작품이었다.

화가는 다르지만 그리고 있는 인물과 일화가 동일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림을 유심히 보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등 뒤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아, 이건 세인트 아가타의 행적을 그린 그림이군요. 노인과 병자들을 제 몸처럼 보살폈던 세인트 아가타 말입니다.”

어라? 하지만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세인트 아가타가 아니라 세인트 아그네스였다.

더군다나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 것 같았다. 설명을 듣던 영애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걸 보면.

“아, 하지만…….”

“순결, 희생, 봉사 정신. 요즘 사교계에서는 정말 찾기 어려운 미덕입니다. 세인트 아가타의 미덕을 사교계의 모두가 본받아야 할 텐데요.”

남자는 자기 설명에 푹 빠져 있는지 여성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듣다 못 한 내가 끼어들었다.

“저기요, 그쪽 분. 이 그림에 그려져 있는 분은 세인트 아가타가 아니라 세인트 아그네스세요. 보세요.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 밀 이삭, 물병은 세인트 아그네스를 뜻하는 상징이죠. 병자와 노인, 아이를 돌보았던 성녀 말이에요. 세인트 아가타는 전장의 말을 이끄는 흰 머리의 노파라고요. 혹시 이름이 비슷해서 헷갈리신 게 아닐까요?”

물론 이 설명은 거의 대부분 녹턴이 미술관에서 내게 가르쳐 준 내용이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잘난 척이 무너지는 걸 제일 창피해하니까 말이지.’

남자는 내 말에 얼굴이 새빨개져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뭐, 뭐라고요? 아니요. 숙, 숙녀분이 잘못 아시고 계신 것 같은데. 세인트 아가타는—.”

여태까지 우리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노신사가 끼어들었다.

“그쪽 숙녀분 말씀이 맞소. 세인트 아그네스는 붉은 머리, 세인트 아가타는 흰 머리. 세인트 아그네스는 약자를 돌보는 자애로운 성인, 세인트 아가타는 정의의 전쟁을 수호하는 성인.”

“이 정도 차이도 모르는 채로 그렇게 큰 소리로 말씀하셨던 건가요? 어머 참, 정말 독특한 분이시네요.”

노신사와 다른 귀부인 한 명이 나를 옹호했다.

그리고 그들 외에도 꽤 많은 사람들의 눈총이 남자에게로 쏟아졌다. 그의 목소리가 크긴 컸었던 모양이었다.

“아, 그게. 전, 그것이……. 죄송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남자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시한폭탄처럼 새빨갛게 변하더니, 그 말만을 남기고 어디론가 도망가 버렸다. 왠지 오늘은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제야 황후 레베카의 설명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셔우드 백작 영애시죠? 아까 일은 정말 감사했어요.”

아까 그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젊은 영애였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별거 아닌걸요. 그분 목소리가 너무 컸으니 당연한 일이에요.”

“맞아요. 그분은 몇 달 전부터 제게 계속 만나 달라고 편지를 쓰셨었어요. 저는 계속 거절했지만, 황후 폐하의 파티에 왔더니 그분이 계시지 뭐예요. 운 나쁘게 마주치게 되어서 이를 어쩌지 싶었는데 도와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저런…… 그냥 목소리 큰 잘난척쟁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구질구질한 남자이기까지 했다니. 나는 최대의 피해자인 영애에게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느꼈다.

“정말 유감이네요. 오늘의 일로 그분이 다시는 영애께 접근하지 못하시길 바랄게요.”

“감사해요.”

영애와 인사를 나눈 뒤 전시물들을 구경하면서 나는 문득 생각했다.

‘구질구질한 남자 하니까 갑자기 생각나는 사람이 있네.’

잠깐 잊고 있었던 황제 귄터.

아까의 그 남자하고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냥 왠지 그 사람이 생각이 났다.

‘오늘 무슨 수작을 부리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별일 없이 넘어가려는 모양이네. 이런 기회에 그냥 넘어가 주기에는 보통 집요한 사람이 아닌데 의외야.’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였다.

“컥, 커헉!”

전시물을 구경하던 노부인 한 명이 갑자기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와장창!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칵테일 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귀부인의 옆에 있던 그녀의 남편이 깜짝 놀라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아니, 여보. 갑자기 왜 그러시오? 어디 아프오?”

“수, 숨이. 숨이……!”

귀부인의 두 눈은 안와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고, 얼굴색은 창백하다 못해 오히려 검게 변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허덕거리며 숨을 갈구했다.

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황후가 내게 말했다.

“궁의, 궁의를 불러와요! 별궁 서쪽 건물에 궁의의 의원실이 있어요!”

“네!”

나는 한시가 급한 상황임을 이해하곤, 재빠르게 자리를 벗어나 별궁 서쪽으로 향했다.

‘별궁 서쪽 건물이라, 저기인가?’

나는 이름 모를 건물로 들어갔다.

‘의원실, 의원실이 어디 있지?’

내가 한 시라도 늦으면 한 사람의 생명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손안에 땀이 찼다. 구두를 신은 발은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용케도 넘어지지 않은 채 건물에 다다른 내가 마주친 사람은, 궁의가 아니라—.

“어서 오시오, 라리아.”

황제 귄터였다.

“황…… 제.”

너무 놀란 나머지 존칭마저 생략해 버린 나는 곧 정신을 차리고 황도의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셔우드 가문의 장녀 라리아, 제국의 단 하나뿐이신 태양을 뵙습니다.”

“하하, 뭘 그렇게까지. 괜찮소, 괜찮소. 자, 일단 여기 앉으시오.”

건물은 도저히 의원실이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마치 실내 식물원처럼 꾸며져 있는 그곳은 다양한 꽃과 나무가 주변에 가득했고, 그 한가운데에는 티테이블과 의자가 두 개 놓여 있었다.

황제는 그 티테이블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걸로 보였다. 그가 맞은편의 자리를 권했다.

물론 나는 그의 곁에 있고 싶지 않았다. 아까의 그 노부인도 걱정이 됐고.

“저, 황제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지만, 별궁에 환자가 있습니다. 갑자기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쓰러졌는데, 부디 궁의를…….”

“아, 그래, 그래. 알지, 알지.”

황제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네? 하지만, 폐하…….”

그 순간이었다. 황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늘 유들유들하고 소탈해 보였던 그의 얼굴에 소름 끼칠 정도의 냉기가 감돌았다.

“영애, 난 두 번 말하는 걸 아주 싫어해.”

그가 말했다.

“앉아.”

나는 아직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황제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자 경비원들이 우르르 나타나 문을 닫고 그 앞을 지키고 서는 것을 보고 이것이 심상치 않은 상황이란 것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그가 꾸민 일이구나. 갑자기 아파서 쓰러진 노부인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이 파티 자체도.’

설마 이 파티 자체가 나를 이곳으로 불러내기 위해 꾸민 일인 걸까? 그렇다면 황후 레베카 역시도 그의 사주를 받았단 말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입맛이 썼다. 나는 되도록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단정한 태도로 말했다.

“폐하, 폐하의 찻자리에 저를 초청해 주셔서 황공합니다만, 저희 셔우드 백작가와 블랙웰 대공가에서는 이 초청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을까 저어됩니다.”

에둘러 말했지만 이 말은 결국 ‘나를 감금하면 셔우드 백작가와 블랙웰 대공가에서 가만있지 않을 텐데?’라는 뜻이다.

내 말에 황제가 껄껄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오? 영애. 긴장 풀길 바라오. 나는 영애의 의사에 반하여 그대를 감금하거나 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 자, 보시오. 그 증거로 문을 잠그진 않았지 않소?”

나는 그가 가리키는 문을 보았다. 그의 말대로 문은 닫아 두기만 했을 뿐 잠그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황제가 가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마음대로 떠날 수 있는 담력의 소유자가 있을 리가 없잖아. 녹턴 정도라면 또 몰라.’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나는 제일 신경 쓰이는 것부터 말을 꺼냈다.

“별궁에 있던 환자는 어떻게 된 것이온지 제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그 가엾은 노부인은 지금 궁의가 치료 중이오.”

그건 다행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던 나는 황제의 이어지는 말에 멈칫했다.

“해독제를 먹여 두었으니 당분간은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오. 당분간은 말이지.”

“해독제라면…… 그 부인의 증상은 중독이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리고, 당분간이란 말씀은……?”

그제야 빠진 퍼즐 한 조각을 맞추듯 내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역시 그 귀부인이 갑자기 쓰러진 것은 전부 황제의 소행이었다. 그녀에게 독을 먹인 것이다. 아마 칵테일에 넣었던가 했겠지.

황제는 느긋하게 찻잔을 홀짝이며 말했다.

“노부인이 마신 독은 해독제를 꾸준히 먹이지 않으면 완전히 낫지 않는 독이오. 해독제를 한 번 먹이면 한동안은 괜찮다가도 곧 다시 증상이 찾아오지. 그때마다 해독제를 꾸준히 먹여 주지 않으면 안 된다오.”

‘꼭 남이 한 것처럼 이야기하네. 자기가 한 일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기 위해 무진 노력을 해야 했다.

그 생각을 그대로 말하는 대신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앞으로 행여 황제 폐하께 불손함을 보였다간 그 귀부인의 목숨은 없겠군요.”

그렇다. 그 노부인에게 한 번에 효과를 발휘하는 독약이 아닌, 꾸준히 효과를 드러내는 독약을 먹인 것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앞으로 내가 황제의 뜻에 충실히 따르지 않으면 그녀의 목숨은 없다는 뜻의 협박 말이다.

‘나를 맘대로 하려고 남의 목숨을 장난감처럼 다루다니. 뭐 이런 악독한 사람이…….’

손끝이 싸늘해졌다. 아무리 추스르려 해도 입가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런 나를 보며 황제는 손뼉까지 치며 웃었다.

“바로 맞았소. 과연, 영민하기가 이를 데 없구려. 덕분에 내가 긴 설명을 할 수고를 덜었소.”

이런 상황에서 아까는 맘대로 나갈 수 있네, 날 억지로 잡아 둘 생각은 없네, 어쩌네, 같은 소리를 하다니!

그야 내가 여기서 벌떡 일어나 걸어 나갈 수는 있겠지. 그로 인해 귀부인이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될 테니 문제지만!

나는 분한 마음을 애써 숨긴 채 그에게 물었다.

“아뢰기에 황공무지 하옵니다만, 지고하신 분께서 미천한 귀족 영애일 뿐인 저를 붙잡아 두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둔한 소녀로서는 그 높으신 의중을 차마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이게 문제였다.

그가 오늘 나를 굳이 이곳에 붙잡아 놓은 이유.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꾸준히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 위해 죄 없는 노부인의 목숨으로 협박까지 하는 이유 말이다.

‘하인리히처럼 나를 꼭두각시로 쓸 생각인가? 나를 이용해서 녹턴에게 무언가 해를 끼치려 하는 건가?’

그러나, 나의 진지한 고민은 그의 입에서 나온 예상 밖의 말에 와장창 깨져 버리고 말았다.

“별거 아니오. 그냥, 짐이 영애에게 관심이 생겨서 그렇소.”

“……네?”

* * *

황제 귄터는 생각했다.

라리아 셔우드를 진심으로 총애하는 녹턴 블랙웰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는 것은 바로 그녀를 이용하는 것. 그중에서도 특히 그녀의 마음을 농락하는 것이라고.

이전에도 그러한 생각으로 하인리히를 보내 라리아를 유혹하게 하긴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귄터는 실패한 것이 어디까지나 하인리히가 덜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내가 직접 나서면 틀림없겠지. 제국의 군림자이자 대륙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내인 내가! 대체 어떤 여자가 이 나를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 애초 녹턴에 대한 열등감이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되었던 것도 그 여자 때문이었으니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그 여자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 녹턴을 최고의 절망에 빠뜨릴 수 있을뿐더러 그가 가지고 있던 것 중 제일 좋은 것을 빼앗는 셈이니 자신의 가슴 안에서 불타는 이 감정도 씻은 듯이 나아지리라.

그렇게 여긴 귄터는 자신이 라리아를 유혹할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단, 유혹을 하려면 그녀와 단둘이 독대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꽤 머리가 좋고 경계심도 있는 듯 보였다.

자신이 그냥 불러내면 아프다고 하든 어쩌든 무슨 핑계를 대서건 미꾸라지처럼 도망치리라.

그러니 라리아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녀를 옭아맨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지금껏 봐 온 그녀의 심성을 고려하면, 다른 사람의 목숨을 잡고 있으면 설령 상관이 없는 사람이어도 책임감 때문에 내 말에 따를 수밖에 없겠지.’

그녀가 아낀다는 블랙웰의 사생아들을 유괴하거나 독을 먹인다면 더 효과가 좋겠지만, 블랙웰은 너무 위험하니까 말이다.

군사력이 적고, 만만하며, 중독의 원인인 독의 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보력이 한미한 가문.

그 정도가 이번 일에 이용하기에 딱 적당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귄터는 마침내 라리아와 독대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의 말에 라리아의 얼굴은…… 말도 못 하게 굳어져 버렸다.

“아, 저. 노, 농담…… 이시죠? 죄송하지만, 폐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귄터는 짜증이 났지만 참을성 있게 다시 설명해 주었다.

“농담이 아니오. 내가 영애에게 관심이 생겼다고 했소. 영애와 진지한 만남을 가져보고 싶소만.”

그는 얼어 버린 라리아가 자신이 한 말의 뜻을 이해할 시간을 준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영애가 여기까지 오게 된 방법에 약간의 강압과 속임수가 있었던 것에는 사과하겠소.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대가 짐을 만나 주지 않을 것 같아 그랬소. 이게 다 그대에 대한 내 관심의 표현이니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소이다.”

라리아는 기가 막혔다.

‘남의 목숨과 경비병들로 협박해서 붙잡아 놓고 하는 말이, 관심이 있어서 그랬다고?!’

그녀는 진심으로 앞에 있던 찻잔과 찻주전자에 담겨 있던 것들을 상대방의 얼굴에 부어 버리고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저런 말 같지도 않은 말에 이렇게 진지하게 대답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웠지만, 라리아는 애써 친절하게 대답하려 애썼다.

“저를 좋게 봐 주신 은혜에 몹시 황공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 몸입니다. 제국의 유일한 태양이신 폐하께서도 하나뿐인 달을 품고 계시지 않습니까?”

“약혼자가 있는 게 대체 뭐가 문제요? 제국에서 혼외연애는 문제가 되지 않소.”

그 말은 사실이었다. 제국에서는 대부분의 결혼이 정략으로 이루어졌다.

마음 없는 결혼을 한 귀족들은 흔히 배우자가 있는 상태에서도 사랑을 나눌 상대를 찾아 나서곤 했고 그것은 사교계에서 그리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하기 싫으니까 그렇지!’

“더군다나 태양에겐 달뿐만 아니라 무수한 별이 필요한 법. 내 생각엔 그대야말로 그 별의 자리에 적임자인 것 같소만.”

황도에서 쓰는 말로, 제국의 태양은 황제를 뜻하고 달은 황후를 뜻한다. 그리고 별은 황비를 뜻하는 말이다.

즉 그의 말은 라리아에게 황비 자리를 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라리아는 그렇다 해도 싫었다. 황비가 아니라 황비 할머니가 와도 싫었다.

“황송한 제안이지만 저는 오직 약혼자 한 사람만을 바라보기만 하기로 결심한 몸입니다. 그러니 저 같은 보잘것없는 여식은 잊어버려 주시옵소서. 고귀하신 제국의 달께서 언제나 태양의 곁에 함께하시지 않습니까?”

“아, 그렇소? 그렇게 단칼에 거절하다니 정말 유감이로군. 조만간 한 가문에서 때 이른 상을 치르게 되겠구만.”

“…….”

명백한 협박이었다. 그가 그렇게 나오자 라리아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는 없었다.

입을 다물고 고민하는 그녀를 보며 귄터는 웃었다. 소탈한 웃음소리가 온실을 울렸다.

“벌써 결정할 것은 없지 않겠소. 돌아가서, 한번 깊게 생각이나 해 보시길 바라오.”

“…….”

“아시겠소?”

약간 힘이 들어간 듯한 그의 목소리에 라리아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폐하.”

“옳지. 셔우드 영애는 정말 훌륭하기 이를 데 없는 숙녀요.”

기분이 좋은 듯, 귄터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한번 잘 생각해 보시오.”

라리아를 배웅하기 위해서 귄터는 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손짓하자 경비병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문까지의 길지 않은 거리를 라리아와 함께 걸으면서 귄터가 말했다.

“제국 유일의 대공의 사랑을 받으면서 동시에 제국 주인의 사랑까지 받다니! 여인 된 몸으로 이 이상의 복이 또 어디 있겠소? 사교계의 모두가 그대를 선망하고 부러워할 거요. 어쩌면 역사책에도 이름이 오를지 모르지. ‘대공과 황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경국지색 라리아 셔우드’. 마음에 드오?”

“…….”

문 앞에 귄터는 무언가 생각난 듯 라리아의 허리를 굽혀 라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참, 당연히 알겠지만…… 이 일을 누군가, 특히 그대의 약혼자에게 밀고한다면…… 그대는 호외로 익숙한 부고를 보게 될 것이오. 알고 있겠지?”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라리아는 이를 악물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대공저로 돌아온 라리아는 이번 일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누군가한테 알리지 말라고 했지만…… 그래도 녹턴에게는 알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지만, 저렇게 나오는 이상 대공저에 오고 가는 편지 정도는 당연히 감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녹턴은 아주 먼 곳에 있다. 그녀가 녹턴에게 상황을 알린다면 그가 돌아오기도 전에 죄 없는 귀부인은 목숨을 잃고 말리라.

‘역시 녹턴이 돌아올 때까지는 황제가 날뛰지 않게 고삐를 잡고 있는 편이 안전하겠지.’

* * *

이후 한 달 동안 귄터는 라리아를 몇 번이나 불러냈다. 물론 그녀를 유혹하기 위함이었다.

귄터의 강력한 주장으로 단둘이 후원을 거닐던 도중이었다. 그는 라리아의 손을 멋대로 잡아 쥐곤 이렇게 말했다.

“영애는 손이 참 작군. 너무 가녀려서 꼭 감싸 주고 싶게 만들어.”

“…….”

라리아는 허튼수작을 거는 귄터를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보았을 뿐이지만, 귄터는 굴하지 않았다.

“이런 작고 가녀린 손으로 어떻게 그런 힘든 일을 하나? 대공도 참. 이리도 아리따운 약혼녀를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방에 고이 모셔 두지는 못할망정.”

라리아는 한숨을 쉬며 그의 손안에서 자신의 손을 비틀어 빼냈다. 그녀가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도 저를 승진시켜 주려고 하셨지만 지금 제가 하는 일은 제가 원해서, 제가 선택해서 하는 것이랍니다. 그리고 마음에 둔 여성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접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방에 가둬 놓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다면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아, 아니…….”

온화한 척하고 있었지만 본디 그리 관대하지 못한 성격의 귄터였기에 그는 라리아의 말대답에 화를 낼 뻔했다.

‘참자, 참자. 너무 거칠게 굴면 저 계집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목적을 떠올리면서 애써 화를 참았다.

‘저년의 마음을 손에 넣기만 하면 이제 이런 멍청한 짓도 전부 끝이다. 그때에는 블랙웰도, 저년도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을 만나도 라리아가 귄터에게 넘어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녹턴을 볼 때와 달리, 귄터를 볼 때의 라리아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울 따름이었다.

라리아도 그가 자신한테 왜 그러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녹턴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으니, 내가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면 녹턴에게서 이기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정말이지 한심하고 졸렬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소인배가 제국의 황제라니, 제국의 미래가 걱정될 정도였다.

하지만 라리아가 귄터에게 마음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인격적으로 보나, 능력이나 권위를 보나 외모를 보나 그 어디를 봐도 귄터는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원작 서브남주인 하인리히의 형이니만큼 귄터도 사실 어느 정도는 잘생긴 편이었다. 그의 더티블론드와 부드러운 빛깔의 갈색 눈동자는 꽤나 다정다감해 보였다.

그래 봤자 라리아는 그의 본성을 알고 있으니 그런 잘생긴 얼굴이나 다정하고 소탈한 인상까지 전부가 가증스러워 보일 뿐이었지만.

애당초 녹턴이 있는데 그녀가 대체 왜 귄터를 선택하겠는가?

따라서 라리아가 귄터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것뿐이었다.

‘대체 뭔 자신감이람?’

그리고 라리아의 싸늘한 눈빛을 눈치채지 못할 귄터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오래 그녀가 자신에게 넘어오긴커녕 호의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자 그는 초조해졌다.

‘대체 왜 내게 넘어오지 않는 거지?’

하인리히가 그녀를 유혹하는 데에 실패한 것은 그가 덜떨어진 데다가 야심이 없으며 남자답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와 정확히 반대의 특성을 가진 자신이라면 틀림없이 그녀를 유혹해 낼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애초에 제국의 황제인 자신을 거부할 여자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실제로 그는 황후 레베카를 포함해 수많은 여자를 꾀 낸 경험이 있었기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것은 자신이 매력적이라서가 아니라 황제라는 지위가 두렵기 때문이라는 사실만은 알지 못했다.

‘이미 수도 없이 많은 만남을 가졌는데. 나의 권위와 재력 역시 충분히 보여 주었는데!’

녹턴이라는 남자에 익숙해진 라리아의 눈에 귄터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지만 그는 그것 역시 몰랐다.

‘이젠 정말 시간이 없다. 블랙웰이 출장에서 곧 돌아올 터인데……!’

귄터는 초조해졌다. 애당초 그가 출장을 간 동안의 시간이면 충분히 꼬여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시작한 계략이었건만 턱도 없었다.

라리아는 그에게 마음을 허락하긴커녕 최소한의 이성에의 호감조차 전무해 보였다.

홀로 초조해하며 고민하던 귄터는…….

‘역시 관계를 빠른 시간 안에 발전시키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그는 다시 한번 초대장을 보냈다. 물론 초대장의 수신자는 라리아로 되어 있었다.

* * *

녹턴이 출장을 간 동안 나 역시 일에만 집중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황제 귄터가 시도 때도 없이 날 불러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죄 없는 사람의 목숨이라는 약점이 잡혀 있었기에 그의 초대에 매번 응할 수밖에는 없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녹턴이 돌아올 거야. 그때까지만 견디자.’

녹턴이 돌아오면 귄터가 포기를 하든가, 내가 녹턴에게 말해서 어떻게든 이 지겨운 수작을 끝낼 수 있으리라.

꼴도 보기 싫은 사람과 독대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피곤한 일이었지만, 나는 이 생각만으로 참고 견뎠다.

그런데 녹턴이 돌아올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언제나처럼 귄터에게서의 초대장을 받은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초대 장소가…… 황제의 처소라고?”

황실에서 손님을 맞이할 때는 대체로 응접실, 혹은 정원 같은 곳을 사용하기 마련이고 귄터가 나를 초대했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데 이번 초대의 장소는 놀랍게도 황제궁, 거기서도 정확히 황제의 침실로 되어 있었다.

의도가 너무나도 명백해 보이는 초대 장소에 나는 소름이 끼쳐서 팔을 벅벅 긁었다.

“우웩! 정말 미친 거 아냐?”

녹턴이 돌아올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귄터 역시 알고 있을 테니 그 역시 초조해진 것이리라.

여태까지는 초대 장소가 응접실, 정원 같은 곳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응해 주었다지만 내가 그의 침실까지 갈 수는 없었다.

그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내 발로 호랑이 굴로 찾아가겠는가?

‘아픈 척을 할까? 녹턴이 올 때까지 확 죽은 척이라도 해 버려?’

어찌나 싫었는지 급기야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걸로 봐줄 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픈 척이나 죽은 척을 하면 귀부인의 목숨까지 위험해진다.

‘그러니 내가 초대에 응하기는 해야 해.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나 혼자 갈 수는 없어. 그건 너무 위험하니까.’

나는 내가 데려갈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을 차례차례 생각해보았다.

‘황제는 이 일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귀부인을 독살시키겠다고 했지. 그러니 최대한 그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나를 물리적으로 지켜 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이 필요해.’

블랙웰의 기사들? 아니, 그들은 너무 눈에 띈다. 황궁에는 호위 기사를 데리고 들어갈 수 없을뿐더러 기사가 아닌 척이라도 시키기도 어렵다.

그들 모두가 기골이 장대하고 무인의 분위기가 넘쳐서 변장을 시켜도 기사로밖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블랙웰 기사단은 보나 마나 귄터의 감시를 받고 있을 것이다.

아돌프? 분명 무력으로는 굉장히 도움이 되겠지만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너무 흥분해서 사고를 칠 확률이 높았다.

상대는 황제다. 아돌프가 과도한 짓을 해서 셔우드 백작가가 멸문당하는 일 같은 것은 결코 바라지 않았다.

더군다나 셔우드 백작가는 내 친가니 이곳도 감시를 당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브라트카르토? 페트로가 내 노예…… 아니 인적자원으로서 도움을 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권력에 약한 그가 나를 위해 황제와 척을 지게 될 수도 있는 일을 해 줄지 의문이다.

이 일 때문에 나는 골머리를 감싸 쥐고 고민했다.

‘으윽…… 정말 누구 없나? 황제의 눈에 띄지 않고, 만일의 일이 생기면 막을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으며, 내가 정말 신뢰할 수 있는 사람…….’

그러던 내 머릿속에 불현듯 번개 같은 깨달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린!”

그렇다. 아이린은 성녀이기 때문에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지만, 아직 그 정체가 알려지지 않았기에 황제의 눈에는 평범한 외국인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내 둘도 없는 친구였다. 내가 이런 상황에서 아이린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아이린을 찾아갔다.

“아이린! 혹시 거기 있어요?”

다행스럽게도 아이린은 그녀의 숙소에 있었다. 아이린은 오랜만에 찾아온 내가 반가운 듯 나를 환대해 주었다.

“라리아! 오랜만이에요! 어서 와요. 차 드시겠어요? 아니면 물? 우유?”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싶어서 제국에 왔다더니, 그녀의 숙소에는 놀랍게도 시종 한 명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야.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그 누구에게도 새어 나가면 곤란하니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아이린에게 말했다.

“물이면 충분해요. 저, 아이린. 저는 사실 고민이 있어서 왔어요.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시겠어요?”

나의 평소보다 훨씬 심각해 보이는 태도에 아이린은 무언가를 직감했는지 따라서 진지한 얼굴을 했다.

자리에 앉아 물 한 모금을 마신 뒤에야 이야기를 꺼냈다.

황제와 녹턴의 관계, 제국의 제4 황자 하인리히와 있었던 사건, 그리고 지난 한 달간 황제가 나를 협박하며 플러팅을 걸어왔다는 사실까지.

“……그래서, 저는 내일 황제의 침소에 가야만 해요.”

내 이야기를 ‘어머, 어머’ 하면서 열심히 들어 주던 아이린은 이 대목에서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는 후다닥 내 손을 잡았다.

“라리아, 어떡해요! 절대 가면 안 돼요. 그 사악한 황제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요!”

“하지만 제가 안 가면 죄 없는 사람이 목숨을 잃고 말 거예요.”

그렇게 말한 나는 조금 주저했다. 아이린은 분명 성녀였고 나보다 훨씬 강했지만 그래도 함께 위험한 곳으로 가달라는 말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결심한 일이었다. 나는 아이린에게 도와 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 아이린. 그래서 말인데…….”

“같이 가요! 제가 라리아랑 같이 갈게요.”

아이린이 나보다 먼저 입을 떼었다.

“저, 이래 봬도 성녀니까요. 제 신성력은 정예기사 7명분은 충분히 하거든요. 라리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제가 지켜 드릴게요.”

그녀의 말에 나는 멈칫했다. 물론 그것은 싫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내가 채 도움 요청을 하기도 전에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아이린이 너무 고마웠다.

‘아이린……. 어쩜 이렇게 좋은 사람일 수가.’

찐한 감동을 받아 멍하니 그녀를 보는 내 눈앞에서, 아이린이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아…… 7명은 아닌가? 좀 지나쳤나? 한 5명? 6명? 으음, 아마도…….”

“아이린! 정말, 정말 고마워요!”

나는 아이린을 덥석 끌어안았다. 가슴이 벅차서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내게 안긴 아이린은 행복한 듯 맑게 웃었다.

“저, 라리아한테 도움이 된 건가요?”

“물론이죠! 지금 제가 얼마나 감동했는데요. 아이린은 최고의 친구예요!”

그녀를 꽈아아악 안아 준 뒤에야 나는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조금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내일 함께 입궁하는 것으로 해요.”

“좋아요.”

아까 황제의 초대장을 받았을 때만 해도 어쩌나 싶었는데 이젠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아이린이 함께 있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다음 날. 우리는 약속대로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다만, 우리가 너무 가깝게 걸으면 황제가 눈치챌 테니 조금 떨어져서 걷기로 했다. 아이린은 나와 일행이 아닌 척하면서 50m 정도 되는 거리에서 나를 뒤쫓아왔다.

‘잘 따라오고 있겠지.’

조금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아이린은 제국에 입국할 때 가져온 위조 신분과 신성력을 이용해서 황제궁까지 문제없이 들어올 수 있었다.

‘문제는 황제의 침실인데…….’

침실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녀가 방까지 따라 들어오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그래서 아이린은 황제의 침실 근처에 대기하고 있다가, 위험한 일이 생기면 내가 신호를 보내 들어오기로 약속했다.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나는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약속 장소인 황제의 침방에 들어갔다.

예상대로, 그곳에는 그가 있었다.

“왔군, 영애.”

귄터 브레히트 1세. 그 지긋지긋하고 넌더리 나는 얼굴.

그는 언제나 그럴싸하게 성장을 하고 나타났던 이제까지의 모습과 다르게 편안한 가운을 입은 채 소파에 늘어지듯 앉아 있었다.

게다가 테이블에는 와인 한 병과 와인 잔 두 개가 놓여 있고, 캐노피가 둘러진 화려한 침대에는 장미꽃잎이 뿌려져 있다.

‘저게 진짜 미쳤나.’

나는 애써 모르는 척하고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셔우드 가문의 장녀 라리아, 제국의 단 하나뿐이신 태양을 뵙습니다.”

“하하, 영애도 참 못 말리겠다니까. 대체 언제까지 그런 인사를 할 건가?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가 대체 무슨 사이지? 얼굴에 토해 버리고 싶은 사이?

불합리하지만 그는 여전히 제국의 황제였기에 나는 그의 얼굴에 토하고 싶은 욕망을 꾹꾹 참았다. 나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대답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의 깊은 뜻을 부족한 저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그저 블랙웰 대공의 약혼녀일 뿐인데요.”

에둘러 말했지만 난 녹턴의 약혼녀고 너랑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선을 그은 것이다.

그렇게 말한 순간, 아니나 다를까 황제 귄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주 순간적이었지만.

그는 금방 표정을 정돈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하 웃었다.

“짐이 이렇게까지 노력을 보였는데 아직도 우리가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니…… 그거 서운하군그래. 영애가 이만 슬슬 마음을 열어 준다면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을 텐데.”

“황송합니다. 황제 폐하의 곁을 지키기에는 너무나 모자란 몸인 여식이니 이만 재고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미소 지은 그의 입꼬리가 굳어졌다. 그는 애써 괜찮은 척하며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일단 앉게.”

나는 그의 옆자리를 마다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황제는 그런 내게 와인을 한 잔 따라서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긴 했지만 마시지는 않고 그냥 들고만 있었다.

황제가 혼자 와인을 홀짝이며 말했다.

“큰 실수 하는 거야, 영애.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짐의 옷자락 한 번 잡아 보려 애쓰고, 말이라도 한 번 붙여보려 노력하는지 아는가? 영애는 그런 여인들의 평생 염원을 제 발로 차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

“모름지기 여자의 권력은 어떤 남자에게 사랑받느냐로 결정되지. 제국, 아니 전 대륙의 지배자인 이 내가 영애를 흠모한다는데 여인 된 몸으로 이 이상의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와인 한 잔을 쭉 들이켠 황제는 한층 불그레해진 얼굴로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니 부디 알량한 고집 같은 것은 내려놓고 마음을 열게. 짐을 받아들이게. 그렇게만 한다면 영애의 앞길은 금은보화와 영광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야.”

그의 말이 마치 뱀처럼 느껴졌다. 얄팍한 이익을 흔들어 보이며 잘못된 길로 들게 하도록 나를 유혹하는 뱀.

하지만 내가 그런 말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폐하.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저는 폐하와 어울리는 몸이 아닙니다. 그 어떤 진귀한 보물을 주시고 빛나는 옥좌에 앉혀 주신다 하여도 이 마음은 바뀌지 않을 테니 소모적인 노력은 이만 그만둬 주시옵소서.”

황제는 속이 타는지 두 번째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가 말했다.

“영애도 내가 영애를 어째서 이곳으로 불렀는지 알겠지. 6살짜리 어린애도 아니니 말이야.”

드디어 본론이 나왔구만. 나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예상은 하고 있습니다만, 제 의사는 명확합니다. 저는 황제 폐하와 어떠한 종류의 접촉도 바라지 않습니다. 현명하신 분이시니 강압적인 거동은 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내가 현명하지 않다면 어쩔 텐가?”

“네?”

“내가 그대를 강제로 취하려고 하면 어쩔 거냐고 물었다.”

진짜 그럴 작정이었니? 미친 새끼…….

나는 목구멍까지 튀어나오려 하는 욕을 애써 참았다. 나는 차가운 눈으로 상대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러실 경우 저도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내 차가운 말에 얼큰하게 취해 붉어진 얼굴의 황제가 웃었다. 평소처럼 소탈하고 시원해 보이는 웃음이 아닌,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하, 그래. 그런가. 나와 단둘이 있는데도 그런 말을 하다니……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가 보군.”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만일의 상황이 오면 아이린을 부르자. 이 호출용 마도구로…….’

나는 사비를 털어 호출용 마도구를 사서 아이린과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그것은 아직까지 내 호주머니에 잘 들어 있었다.

만일의 상황이 생기면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아이린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그 마도구를 쓸 기회는 오지 않았다.

“혹시 영애가 믿는 구석이…… 이 여자인가?”

황제가 히죽 웃으며 그런 말을 하는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그가 말을 함과 동시에 침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문 너머로 열댓 명의 남자들이 나타났다.

또한 이런 상황에선 결코 보고 싶지 않은,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도.

“아이린!”

나는 기겁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들이 거친 손길로 아이린의 등을 떠밀었다. 아이린은 붉은색으로 빛나는 여러 겹의 밧줄로 칭칭 묶여 있었다.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나를 불렀다.

“라, 라리아……!”

황제가 끌끌 음험한 소리로 웃었다.

“영애가 얌전히 내 말을 들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설마 성국의 성녀를 데려올 줄이야. 이건 정말 기대 이상이었어.”

“그, 그걸 어떻게……!”

“황실 마법사들이 성녀의 방대한 신성력을 감지하는 것 정돈 일도 아니지.”

나는 이를 악물었다. 황실에서는 자체적으로 마법사들을 고용하고 있는데, 그들의 감지 마법에 아이린의 신성력이 감지되어 정체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역시 아이린을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잇새에서 까드득 소리가 났다. 황제가 기분 나쁘게 낄낄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뭐, 풋내기라도 성녀는 성녀라는 건지 황실 마법사 열 명이 달려들어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두세 시간 정도지만 말이야.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지.”

“라리아한테 못된 짓 하지 말아요! 라리아를 건드리면…… 당신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아이린은 마력이 담긴 밧줄에 괴로워하면서도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런 아이린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황제는 제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보이는 갈색 눈동자에는 오랜 세월 쌓여 온 원한과 분노가 번득였다.

‘이미 틀렸어.’

술에 취해서 그런 건지, 오래 쌓인 원한이 폭발한 건지……. 언제나 여유롭고 소탈하며 사람 좋은 척하던 황제 귄터 브레히트는 이미 이 자리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꺄악!”

그는 내 멱살을 잡더니 침대 위로 거칠게 내던졌다. 침대가 푹신해 아프지는 않았지만, 곧 그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내 몸을 움켜쥐었다.

‘기분 나빠!’

그 강압적이고 배려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손길은 너무나 소름 끼쳤다. 몸에 닿는 것만으로도 혐오스러웠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어 비명이나 신음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애썼다.

그런 것이 상대방을 즐겁게 해 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북, 부욱. 그의 짐승 같은 손길에 옷이 찢겨 나가고 어깨가 허전해졌다. 나는 맨살이 드러난 어깨를 움켜쥐고 몸을 웅크렸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만해! 라리아한테 그러지 마요! 안 돼! 제발 그러지 마! 제발!!”

“말끝마다 블랙웰, 블랙웰. 그 망할 놈의 블랙웰 대공은 외간 남자에게 순결을 잃은 약혼녀를 보고 뭐라고 할까? 응?”

아이린의 애원과 이성을 잃은 황제의 광적인 외침이 번갈아 가며 귀청을 흔들었다.

황제는 광소를 터뜨리며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그의 가운이 후두둑 떨어졌다.

“블랙웰 대공의 그 대단하신 사랑놀이도 이제 끝이겠군! 하지만 걱정은 하지 마라. 짐의 승은을 입는 것은 제국의 모든 여자들이 바라는 영광이니까!”

황제의 웃음소리와 아이린의 울음소리. 아까 황제가 붙잡은 부위가 멍이 들 듯이 욱신거렸다. 아이린에게 이런 못 볼 꼴을 보여 주게 되어서 미안했다.

그리고, 무서웠다.

‘……녹턴.’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날 리 없는 그가.

그가 날 안아 주었으면. 다 끝났다고, 이제 괜찮다고 속삭여 줬으면…….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고, 내 몸을 해일처럼 덮쳐 올 고통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의아해져서 한쪽 눈만 슬쩍 떴다. 황제는 여전히 내 앞에 있었다. 알몸으로, 금방이라도 날 덮칠 듯한 자세로 꿇어앉은 채.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었다. 그의 가슴께에 무언가가 튀어나와 있다. 향초의 불빛을 반사하는 그것의 끝에서 검붉은 액체가 뚝뚝 흘러내렸다.

“컥, 커헉…… 끄윽!”

황제는 쥐어짜 내는 듯한 소리를 뱉어 냈다.

그의 잘생겼던 얼굴은 끔찍하게 일그러져, 입술에서는 붉은 피거품이 흘러내렸다.

“커컥, 컥……! 브, 랙, 웨엘……! 커헉!”

원한과 경악, 공포로 번득이는 갈색 눈동자. 그의 가슴에 박혀 있던 칼날이 징그러운 소리를 내며 빠져나가고, 곧 황제의 몸은 기우뚱하고 쓰러졌다.

나는 멍하니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았다.

쓰러진 황제의 몸 뒤에 밝혀진 그 형형한 두 개의 자색 불빛.

피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 언제나 냉랭했던 얼굴에는 명백한 분노의 빛을 띠고 있는 그 남자는.

“……라리아.”

바로 그였다. 녹턴 블랙웰.

내가 가장 그리워했던 그 얼굴. 이 짧은 순간 수백 번, 수천 번도 더 그려보았던…….

“녹…… 녹턴!”

녹턴은 피투성이가 된 검을 내팽개치고 황제의 몸뚱이를 발로 차 침대 밖으로 밀어냈다.

그는 거의 날듯이 침대 위로 뛰어올라 내 몸을 감싸 안았다. 그의 단단한 팔이 나를 끌어안았다.

녹턴은 뜨거운 품에 나를 가둔 채 몇 번이고 내게 입을 맞췄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라리아, 괜찮나? 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만일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난…….”

그의 온기와 향기가 전신에 와 닿자, 나는 그제야 그가 정말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녹턴, 그가 내 곁에 있었다. 나는 이제 정말로 안전한 것이다…….

전신에서 긴장이 빠져나갔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았다.

“녹턴……. 정말 보고 싶었어요.”

뒤늦은 눈물이 차올라서 앞을 가렸다. 그는 몇 번이고 소매로 눈물을 닦아 주며 내 등을 쓸어내렸다.

“괜찮다, 라리아. 괜찮아. 괜찮아.”

그렇게 속삭이면서, 그는 내가 안정될 때까지 나를 꽉 안은 채 등을 쓸어 주고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한참 후에야 진정한 나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린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린! 괜찮아요?”

그녀의 주변엔 열 명의 황궁 마법사들이 쓰러져 있었다. 아이린은 여전히 붉은 밧줄로 꽁꽁 묶여 있었지만, 한 남자가 그것을 풀어 주고 있었다.

그 남자의 얼굴 역시 낯이 익었다. 그는 바로 하인리히였다.

“하인리히?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오랜만입니다, 셔우드 영애.”

하인리히는 멋쩍은 듯 웃으며 인사했다.

뜻밖의 얼굴에 깜짝 놀란 나는 녹턴을 돌아보았다. 그가 내게 설명해 주었다.

녹턴이 이번에 출장을 간 것은 바로 황제 귄터 브레히트 1세를 끌어내리기 위해서였다.

녹턴은 황제가 이제껏 벌인 온갖 악행들, 즉 형제자매를 살해하고 은폐했던 것, 하인리히를 조종한 것, 그 외에도 온갖 잔인하고 악랄한 행위들의 증거를 수집했다.

또한 하인리히를 구심점으로 삼아서 군대를 조직하고, 여러 가문과 조직들을 상대로 여론을 조성하는 물밑 작업들을 했다.

“마침내 오늘 대공저로 귀택했더니, 네가 황궁에서 초대를 받아 갔다고 하더군.”

불길함을 느낀 녹턴은 다급히 뒤를 쫓아왔다. 그리고, 나의 흔적을 뒤쫓아 온 그가 제일 처음 본 광경이 바로 아까의 그 장면이었던 것이다.

하인리히는 뒤늦게 군대를 이끌고 와서 황궁을 포위했다.

물밑 작업의 덕택인지 황궁의 병사들과 기사들의 저항은 그리 크지 않았고, 현재 황궁은 하인리히의 군대가 점령한 상태다.

이 모든 설명을 들은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녹턴이 그 길지 않은 출장 기간 동안 이 많은 일들을 해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과연 내 남주인공이야!’

하인리히가 밧줄을 풀어 주자 아이린이 내게 달려왔다. 그녀는 피로 너저분한 침대 위로 올라와 나를 꼭 껴안았다.

“라리아! 정말 다행이에요. 그리고 미안해요.”

나는 훌쩍이는 그녀를 마주 안고 토닥여 줬다.

녹턴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한 자색 눈동자로 침대 아래에 떨어진 황제의 시신을 노려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황제를 죽이고 또 죽이고, 몇 번이고 죽인 뒤 찢어발길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하지만 나와 아이린의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그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황제의 시체가 쓰레기라도 되는 것처럼 구둣발로 걷어찼다.

“버러지 같은 새끼.”

그가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침실을 나설 때, 녹턴은 재킷을 벗어서 어깨를 드러낸 내게 걸쳐 주었다.

“고마워요.”

아직 그의 체온이 남아 있는 따뜻한 재킷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가 보았을 광경은 그를 광기에 빠뜨리기 충분했을 텐데. 어째서 그러지 않았던 거지?’

실제로 원작에서도 라리아가 아이린을 죽일 뻔했을 때 격노해 광기에 빠진 녹턴이 라리아를 살해하니까 말이다.

걱정이 된 나는 녹턴을 불러세우고 그의 이마를 짚었다.

“녹턴, 괜찮아요? 혹시 너무 화가 나서 진정이 안 되고, 막 피가 보고 싶고 누굴 죽이고 싶고 그러지는 않아요?”

“무슨 소리지?”

녹턴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대꾸했지만, 그도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이해한 것 같았다. 그가 말했다.

“……실제로 황궁 마법사들과 황제를 죽일 때는 반쯤 발작 상태였다. 하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처음 방 안의 광경을 보았을 땐 너무 화가 나서 광기에 빠질 뻔했다고 한다.

지나친 분노에 광기가 이성을 잠식했다. 황궁 마법사와 황제를 죽일 때는 반쯤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져, 아이린을 죽이지 않는 데에 어마어마한 정신력이 필요했다고 한다.

하지만.

“……너를 보는 순간 놀라울 정도로 정신이 맑아졌다. 너를 끌어안는 순간, 전신의 제어력이 돌아오더군.”

“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말도 안 돼! 난 이런 설정 넣은 적 없는데? 그의 광증은 한 번 시작되면 주변에 있는 사람을 전부 죽이기 전까지는 절대 끝나지 않는단 말이야!’

아니, 그러고 보니 이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의 광증 발작이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끝났던 일 말이다.

바로…….

‘……그의 침실에서 발작을 일으켰던 날.’

그때 그는 나와 단둘이 있을 때 발작이 일어나 나를 죽일 뻔했지만, 놀랍게도 그러지 않았다.

나를 조금 다치게 하는 정도에서 그의 발작이 끝났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내가 불면증을 낫게 해 줘서 발작이 약해졌나 라고 생각했었지만, 이건 아무래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분명히 우연이 아니었다.

내 가슴속에 어떠한 희망이 피어났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광증 치료의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

하지만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복잡하고 그 역시 바빠 보였다. 그래서 나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으으음…… 아마 황궁 마법사들과 황제를 처단해서 괜찮아지신 게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요즘 광증이 호전되고 있다는 사실은 느끼고 있었으니.”

그렇게 말하고, 그는 나와 함께 중앙궁의 그랜드홀로 향했다.

황궁의 중심인 그곳에는 이미 하인리히와 그의 군대도 모여 있었다.

하인리히를 따르는 군대의 숫자는 홀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서 황궁 밖까지 도열하고 있을 정도였다.

어마어마한 수적 우세와 녹턴이 그동안 준비한 치밀한 밑 작업의 결과로 황궁 내의 사람들은 이미 귄터에게서 등을 돌리고 하인리히를 따르고 있는 것 같았다.

병사들 중 제일 높은 직위로 보이는 사람이 칙서를 든 채 선언했다.

“폭군 귄터 브레히트 1세의 죄를 여신의 이름으로 고한다! 병든 친부의 정신을 조종하여 유언장을 조작하는 패륜을 벌인 죄! 천도를 어기고 형제자매를 암해해 부당하게 황위에 오른 죄! 형제를 겁박하고 일평생을 자신의 뜻에 따르게 한 죄! 그리고…….”

그 외에도 누군가를 암살하거나 뇌물을 받거나 자금을 횡령하거나 부녀자를 유린하는 등, 귄터 브레히트 1세가 물밑에서 벌인 죄들이 끝도 없었다.

아마 그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 역시도 반정이 쉽게 이루어지게 만든 이유였으리라.

“……따라서! 여신의 뜻에 따라, 금일부로 부패했던 귄터 브레히트 1세를 폐위시키고, 하인리히 로렐라이 지그프리트 뮌스 브레히트를 우리의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노라!”

장군의 선언에 나는 깜짝 놀라 하인리히를 돌아보았다.

그는 평소와 달리 붉은 망토를 두르고 금색과 은색이 섞인 판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렇게 될 줄 예상했다는 듯 경건한 얼굴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누군가가 붉은 비단에 감싼 황제의 관과 검을 가지고 나오자, 신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직접 하인리히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세례 의식을 행했다.

황제의 즉위식치고는 굉장히 소박한 광경이었다. 화려한 장식품도, 길고 오랜 예식도 없었으니까.

다만 병사들과 황궁의 사람들, 몇 명의 가신들만이 홀을 가득 채운 채 이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짧은 즉위식을 마치고 하인리히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대공, 그리고 영애. 이번 일은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그대들의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임을 여신의 이름에 맹세합니다.”

사실 이번 반정은 하인리히, 그 혼자만의 힘으로는 결코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대부분의 일은 녹턴의 능력과 권력의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을 안 보고도 알 수 있었다.

하인리히의 말은 아마 그것을 뜻하는 것이리라.

하인리히가 황제가 되었으나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사실상 녹턴이 그를 그 자리에 올려 준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황실의 권력 구도는 어떻게 될까?

녹턴이 새로운 황제 하인리히 브레히트 1세에게 크고 작은 여러 영향을 끼칠 수 있지 않을까? 정치에 대해서는 깊이 모르는 나조차도 이 정도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걸 비선 실세라고 하는 건가?’

나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녹턴을 돌아보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별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모습이 새삼 새롭게 보였다.

‘녹턴 블랙웰 씨, 무서운 사람이었네.’

귄터가 황제일 때에도 제국의 실세는 녹턴 블랙웰이라는 둥 하던 이야기가 괜히 나왔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이 정도의 능력과 힘이 있는데 그 어느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내가 제국 사람이었어도 분명 그가 무서웠으리라. 그에게 괜히 괴물 대공이니 하는 별명이 붙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지금의 나는 이 이야기의 원작자이고, 그의 창조주인 데다가 누구보다도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니만큼 그가 무섭지 않지만.

‘멋지다, 내 남자! 잘한다, 내 남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작스레 홀 저편에서 비명 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돌아보자,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으흐흑, 어흐흐흑……. 으흑, 흐흐흑…….”

“어마마마! 아바마마……!”

병사 몇 명이 황후 레베카와 황자 세드릭을 포박해 끌고 오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끌려 나온 것 같았다.

오열하는 레베카와 세드릭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황제 귄터와 달리 그들은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으니 더더욱.

‘정황상 황후는 황제의 계략에 협력한 것 같기는 하지만…….’

하지만 황제가 원작자인 내 예상보다도 훨씬 미쳐 있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그녀 역시 피해자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유치원 선생님 일을 하던 몇 년 동안 나는 그런 집을 본 적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고,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 같던 남자가 집 안에서는 폭군으로 돌변하는 가정을 말이다.

병사들이 하인리히에게 보고했다.

“황후와 황자를 생포해 왔습니다, 폐하!”

“처형의 시일은 언제로 하는 것이 좋을까요?”

병사들은 그들을 처형하는 것을 거의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옳지 못한 왕을 폐위시키는 반정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반정에서는, 분쟁의 씨앗이 될 수 있는 폐군의 혈족은 처형하여 싹을 잘라 버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치 녹턴이 대공위에 올랐을 때 자네트와 미하일을 죽이자는 의견이 우세했던 것처럼.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도저히 이 광경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고작 8살밖에 안 된 세드릭이 엉엉 울면서 엄마를 부르짖는 모습을 내가 어떻게 지켜만 보겠는가?

나는 다급하게 녹턴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녹턴. 어떻게 안 될까요?”

“그게 무슨 뜻이지?”

“황후 폐하와 세드릭은 믿을 만한 사람이에요. 반드시 처형해야만 할까요? 적어도 먼 시골로 귀양을 보내거나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내 말에 녹턴은 잠시 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는 곧 내 머리를 긴 손가락으로 감싸고 자신의 어깨로 끌어당겼다.

“역시 마음이 무르군, 라리아. 그들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법이다, 라리아. 권력의 앞에서는 누구나 쉽게 변하고는 하니까.”

“아…….”

“또한, 선황의 핏줄을 살려 두면, 선황의 추종자들이 그를 부추겨 차후 불필요한 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

입안에 쓴맛이 감돌았다.

‘나도 그건 알지만…….’

그렇다 해도 나는 ‘기사의 론도’를 좋아하고, 친구들과 함께 크리켓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8살짜리 꼬맹이 세드릭이 귄터와 함께 목숨을 잃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역시 내가 너무 무른 것일까?

권력과 알력 싸움 같은 거랑은 상관이 없는 삶을 너무 오래 살아와서, 냉엄한 현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말했다.

“하지만…… 녹턴이 말했잖아요. 공녀님과 공자님 역시 그런 이유로 죽을 뻔했다고요. 하지만 공녀님과 공자님은 죽지 않았어요. 녹턴이 그분들을 양자로 들였기 때문이죠.”

물론 그때의 대공가의 상황과 지금의 황실의 상황이 같지는 않다. 그래서 이 비교가 적당한 비교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녹턴이 양자로 들여서 완전히 자신의 영향력 안에 넣은 탓에 녹턴 형님의 추종자들이 공녀님과 공자님을 포기했듯이, 이번에도 그런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세드릭과 황후가 완전히 하인리히…… 아니, 황제 폐하의 사람이 된다면 문제는 사라지지 않을까요?”

나는 그의 어깨에서 머리를 떼고 그의 눈을 직접적으로 보며 좀 더 강하게 주장했다. 내 말에 녹턴은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다.

“네 말이 맞다, 라리아. 만일 내가 그 녀석들을 양자로 들인 것처럼 황자와 황후가 완전히 황제의 영향력권 안에 들어가면 문제는 사라지지. 굳이 그들을 처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나는 녹턴이 ‘그러나’ 다음으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이들을 양자로 들인 것은 녹턴이 선택한 것이지만 하인리히에게 같은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미 그의 인생은 어마어마한 변화를 겪었다. 그의 인생을 또다시 완전히 바꿔 버릴 선택을 남이 멋대로 결정해 버릴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영애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흠칫 놀라며 그쪽을 돌아보았다.

“하인리, 아니, 폐, 폐하!”

갓 즉위해 뒤처리를 하느라고 워낙 바쁜 탓에 방금 감사 인사만 하고 사라졌었는데 다시 나타난 것이다.

하인리히는 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다행입니다.”

“네, 뭐가요?”

“저의 생각과 영애의 생각이 같아서요.”

부연설명 없이 짧게 말한 그는 울고 있는 황후와 황자의 앞에 나섰다. 하인리히는 늘 부드럽던 평소와는 전혀 다른 단단하게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서 여신의 앞에 선언한다. 짐, 하인리히 로렐라이 지그프리트 뮌스 브레히트는 레베카 에리히 오브라이언 뮌스 브레히트를 아내로 맞아들이겠다.”

“폐, 폐하!”

너무나 갑작스런 말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술렁였다. 그들은 하인리히의 성격상 그가 형수를 탐내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는 선황의 가족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들이 말했다.

“아니, 폐군의 폐후를 황후로 맞이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일찍이 제국 역사에는 폐후를 황후로 맞이한 전례가 없습니다. 제국에는 황후라는 자리에 걸맞은 훌륭한 영애들이 많습니다.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하지만 하인리히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레베카와 세드릭을 향해 허리를 숙이곤 부드럽게 말했다.

“고개를 드세요.”

레베카가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눈물 콧물로 범벅이었지만, 그녀는 세드릭을 팔로 꼭 안은 채 놓지 않고 있었다.

“우리 세드릭을 살려 주세요. 제발…… 폐하.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우리 세드릭을 살려 주세요.”

“어마마마…….”

하인리히는 울고 있는 모자를 향해 다정하게 말했다.

“폭군이었던 귄터 브레히트와 달리 그대들은 죄가 없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그대를 황후로 맞아들이고, 세드릭 역시 양자로 들이겠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까?”

“무, 물론입니다, 폐하.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레베카와 세드릭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제국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의 선처였다.

두 모자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하지만 이번의 눈물은 안도와 기쁨의 눈물이었다.

물론 나 역시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레베카와 세드릭이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하인리히라면 분명 그들이 안전하도록 지켜 주고, 또 그들을 새로운 가족으로서 애정으로 보살펴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하인리히의 눈부신 금발과 바다처럼 푸른 눈이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세드릭을 닮았구나.’

금발과 벽안, 그리고 부드럽고 다정한 인상을 가진 세드릭과 하인리히는 친부자처럼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었다.

나는 녹턴을 돌아보며 말했다.

“정말 잘됐어요!”

“…….”

그 역시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의 얼굴은 심각했다. 새로운 황제와 황후를 보는 그의 눈에서 빛나는 것은 안도감이나 기쁨보다는 의아함으로 보였다.

‘아무리 착한 하인리히라고 해도 형수와의 결혼을 너무 쉽게 받아들인 게 신기했나? 나도 신기하긴 해.’

우리들의 등 뒤로 병사들과 가신들의 기쁨에 찬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자비로우신 우리의 폐하, 하인리히 브레히트 1세 만세!”

“황제 폐하 만세!”

“황후 폐하 만세!”

“만세! 만세!”

* * *

녹턴은 라리아를 대공저에 데려다 놓고 의사와 하녀들의 보살핌을 받게 한 뒤 다시 황궁으로 돌아왔다. 그에게도 아직 많은 수의 할 일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한 일 중에서는…….

“보기보다 머리가 퍽 좋군.”

황궁의 어느 곳. 듣는 자라고는 새 한 마리, 벌레 한 마리도 없는 적막한 장소.

그곳에는 두 사람의 남자가 있었다.

“덕분에 가장 바라던 것을 손에 넣었으니 말이야.”

녹턴은 벽에 등을 기댄 채 내뱉었다. 온화한 하인리히와 다르게 그의 말투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라리아를 대할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새로 즉위한 황제에게 쓰는 어투로는 지극히 불손한 말을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하인리히는 얼굴에 띤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원래 그의 온화한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녹턴이 그의 은인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레베카 브레히트.”

툭 하고 내뱉은 이름에 하인리히의 온화하던 얼굴에 한순간에 보일 듯 말 듯한 잔금이 갔다.

“너는 그녀를 연모해 오지 않았나.”

녹턴의 ‘진실을 보는 눈’에 비친 하인리히는 나약하고 소심하지만 지혜로웠으며 이타적이고, 정직하여 신뢰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저 계기만 있다면 개화하여 언제든 싹을 틔울 씨앗이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에 올라앉아 있는 귄터 브레히트보다는 훨씬 황제라는 자리에 어울리는 인물. 더군다나 혈통의 정통성도 있었기에 스스로 황위에 오를 생각은 추호도 없는 녹턴이 내세우기에 더할 나위 없는 사람이었다.

녹턴은 귄터 브레히트의 첫 음모 때부터 그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황제를 올릴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구현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바로 그 과정 중에서 하인리히가 황후 레베카 브레히트를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녹턴의 눈에는 보였다. 계획의 의논 중, 레베카 브레히트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하인리히의 색채가 기쁨으로 떨리는 것을.

‘다른 이도 아니고 형수를 마음에 담다니, 이 녀석도 보기만큼 멀쩡한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행여 이 뜻밖의 사실이 계획을 실행하는 데에 걸림돌로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하인리히는 녹턴의 계획에 충실히 따랐으며, 결국 오늘 귄터를 폐위시키고 하인리히를 황제의 자리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녹턴의 질문에 하인리히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것이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형이자 황제의 아내를 연모하다니……. 그 누구에게도 내보일 수 없는 마음이니 제대로 숨겨 왔다고 생각했는데요.”

“네가 연기를 했건 어쩌건 나는 알 수 있다. 어찌 됐건, 지금 네 형은 이 세상에 없고 제국의 황제는 너다. 오랜 시간 연모하던 형수는 이제 너의 아내가 되었다. 더없이 만족스럽겠군.”

녹턴은 웃음기라고는 없는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그의 날카로운 태도에도 하인리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었다.

“이미 모든 것을 눈치채신 듯하니 솔직히 답해 드리겠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

“저는 지금 무척이나 기쁩니다. 감히 제가 황위에 앉아도 될지에 대한 의문, 두려움, 불안,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기쁨이라는 하나의 감정이 앞서고 있습니다. 자식까지 있는 폐후를 황후로 맞아들이다니, 모두가 저를 지극히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선인으로 보겠습니다만 사실 저로서는 극도로 이기적인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두 생명을 살리기 위해 삶을 바치는 이타적이며 숭고한 결정이 아닌, 오로지 저의 사랑을 위한 결정을요.”

하인리히는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분명 대공께서는 저를 뻔뻔하게도 형수를 마음에 담았다가 기회가 생기자 검독수리처럼 교묘하게 채 간 불한당으로 보고 계시겠지요. 이런 저를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려 둔 것이 후회되십니까?”

녹턴은 상대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내뱉었다.

“나는 선의나 신뢰 같은 것은 믿지 않는다. 이기심이야말로 누군가를 내 마음대로 움직이기에 제일 안전한 수단이지. 네 성미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되라는 말에 순순히 따를 때는 의아했는데, 그 이유를 알게 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군.”

“그러십니까. 만족스러우시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이제 솔직하게 말해 보지 그래. 너의 그 성정에도 불구하고 형의 여자를 사랑하게 된 이유를 말이야.”

하인리히는 웃었다.

“대공을 상대로 제가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다만, 대공께서 반대로 알고 계시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형의 여자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사랑한 여자가 형의 여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인리히가 말한 그의 사연은 이러했다.

귄터 브레히트가 황위에 오르고 하인리히는 그의 얼굴 없는 꼭두각시로 살아가던 어느 날, 귄터가 하인리히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바로 한 백작가의 영애를 유혹하라는 것이었다.

무슨 이유로 황제가 한미한 가문의 영애를 유혹할 필요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늘 그랬듯 하인리히는 이유 한 번 묻지 않고 귄터의 명령에 따랐다.

우연인 척 그녀와 첫 만남을 가졌으며, 귄터가 만들어 준 거짓 신분을 대었다. 이후로도 몇 번이고 만남을 이어 나갔다.

그 영애가 바로 레베카 브레히트였다.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다정하고 따스하지만 자신만의 주관이 있는 사람이었지요.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순진한 귀족 영애였던 레베카는 귄터와 하인리히의 계략에 넘어가, 하인리히를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하인리히 역시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이 사람에게 명령으로 인한 거짓 사랑이 아닌 저만의 진심을 속삭이고 싶어졌습니다. 미래를 약속하고 싶어졌습니다. 비록 평생을 용기가 없어 형의 꼭두각시 역할이나 하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저였지만……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결국 하인리히는 레베카에게 청혼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형 귄터에게 사실을 고하고, 그의 허락을 받는 것이다.

“저는 형에게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녀와 혼인하게 해 준다면 머나먼 외국으로 가서 죽은 듯 숨죽이고 살 테니 허락해 달라고 협상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형은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건 교섭이 통하자 하인리히는 뛸 듯이 기뻤다. 드디어 형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레베카에게 거짓 없는 진실된 자신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다.

“단, 형은 조건을 걸었습니다. 혼인 전 외국에서 마지막 임무를 수행해 달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외국에 나가 일 년 동안의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녹턴은 눈썹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겠군.”

“그냥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형의 아내, 황후가 되어 있었으니까요. 형은 그녀를 손에 넣기 위해 마법으로 그녀의 기억을 조작하기까지 했습니다. 제 신분 때문에 그녀와 저의 관계는 둘만의 비밀이었으니 그 누구도 이상한 걸 깨닫지 못했지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하인리히는 고통스러워 보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인생을 걸고 사랑했던 여자가 다른 남자…… 그 누구도 아닌 형의 여자가 되어 있었으니까요. 심지어 그녀는 저를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형의 아내 노릇을 하는 연인을 저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귄터 브레히트……. 이미 알고 있긴 했지만 구역질이 나도록 끔찍한 사내였군.”

녹턴이 씹어뱉듯 말했다.

“열등감과 악의로 뭉쳐진, 천박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야. 그런 자를 이리도 오래 황위에 있도록 내버려 두다니.”

“동방의 격언 중 사필귀정이라는 말이 있지요. 모든 일이 끝에 가서는 이치에 맞게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지금의 이 상황에 그 말만큼 맞는 말이 없군요.”

“황위에 올랐으니 여전히 그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마법을 해제할 방법도 찾아낼 수 있겠군. 하지만, 황자를 자식으로서 품을 자신이 있는가? 절반은 그녀의 피라고 해도 절반은 원수 같은 자의 피를 잇고 있을 텐데.”

녹턴의 말에 하인리히는 의뭉스러운 눈으로 빙긋 웃었다.

“왜 웃지?”

“제가 제국에 돌아왔을 때, 세드릭 황자는 이미 태어난 직후였습니다. 2개월밖에 되지 않아 배냇머리가 돋아나 있는 신생아였지요.”

그의 말에 녹턴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무언가가 있었다.

“설마……. 황자의 친부는.”

“날짜를 계산해 보았을 때 거의 확실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하인리히의 얼굴은 담담했다.

그제야 녹턴의 머릿속에 퍼즐이 짜맞춰졌다. 황제와 황후 아래에서 태어난 세드릭 황자가 외모도, 성정도 황제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던 이유를.

세드릭을 볼 때마다 친부라고 생각했던 황제보다는 삼촌인 하인리히와 닮았다고 느꼈던 이유를…….

동생의 자식을 제 자식이라고 여겼을 귄터가 우습기 짝이 없으면서도, 하인리히가 측은하기도 했다. 자신의 연인을 연인으로 대할 수 없고 자신의 자식을 자식으로 대할 수 없이 오랜 시간을 살아왔던 그의 삶이.

“이제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군.”

녹턴의 말에 하인리히가 미소 지었다.

“예, 오래 걸렸습니다만, 이제야.”

본디 녹턴은 살갑거나 외향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연인과 자식을 되찾은 것에 대한 살가운 축하의 인사도, 사소한 대화도 그에게는 결코 익숙한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보도록 하지.”

결국 그는 이 말을 축하의 인사로 대신하고 자리를 떠났다.

“다시는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소중한 것은 인생을,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용기를 내어 지키도록 해.”

의외의 말에, 하인리히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물론입니다.”

그가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중얼거렸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겠습니다.”

하인리히는 미소 지었다.

이제 야심도, 자신감도 없고 두려움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체념하던 남자는 이곳에 없었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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