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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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런 충동을 느낀 것이 무색하게도 시간은 흘러 9월이 되었다.

바로 여주인공이 제국의 수도에 나타나는 시기였다.

원작의 시작은 내년 3월. 성 레온하르트 기념제에서 성녀인 여주인공과 녹턴은 처음으로 만난다.

하지만 나는 성국과 접촉하기 위해 여주인공에게 미리 접근할 생각이었다.

아직 원작엔 등장조차 하지 않은 여주인공에게 6개월이나 일찍 접근할 방법은 있었다. 바로 나의 원작자로서의 지식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여주인공은 성 레온하르트 기념제에 참가하기 6개월 전부터 비밀리에 제국 수도에 거주하지. 이국의 문화에 관심 있는 그녀가 제국의 언어를 배우고 제국의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서야.’

일평생을 작은 나라인 성국에서만 지낸 여주인공은 외국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그래서 기념제의 공식 참가 전 언어를 배우겠다는 명목으로 반년 동안 수도에서 홀로 지냈다.

그러므로 나는 혼자 수도에서 살고 있는 여주인공에게 접근할 생각이었다.

충동은 충동일 뿐, 결국 나는 녹턴의 광증을 고쳐 주어야 한다. 그가 광증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나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병을 고쳐 주려면, 성국이 가진 광증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내가 성국의 정보에 접근할 방법은 단 하나, 성국의 성녀인 여주인공의 도움을 받는 것뿐.

굳게 마음을 먹었지만, 역시 마음이 아팠다.

내가 그녀에게 접근한다는 건, 곧 녹턴도 그녀와 마주치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되면 원작의 설정대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리라.

결국 두 사람은 영원한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다. 미하일과 자네트 역시 새엄마가 생길 것이고.

‘아, 각오는 진작부터 했지만, 그래도 슬픈 건 어쩔 수 없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지끈거렸다.

더군다나 녹턴의 고백을 받은 이후이니 더 그랬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내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여주인공과의 진실된 사랑에 비하면 그 정도는 작은 변덕일 뿐일 것이다.

여주인공을 만나는 순간 그가 나 같은 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그의 눈에 나는 길가의 작은 돌멩이만도 못하게 되리라.

그 생각을 하자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왼쪽 눈을 더듬었다. 일전에 그가 입 맞춰 주었던 곳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그런 달콤한 고백을 들었는데, 미련이 안 생기는 건 무리지.’

나는 혼자 픽 소리 나게 웃었다.

미련과 ‘혹시?’ 하는 마음이 자꾸만 피어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가 해 주었던 달콤한 말들, 입맞춤, 일말의 다정함들이 머릿속에서 끝도 없이 부풀어 올랐다.

나는 헛된 희망을 꾹꾹 눌러 참았다.

‘정신 차리자. 이곳은 소설 속의 세계야. 소설의 내용대로 흘러갈 수밖엔 없어.’

그렇다. 녹턴이 광증과 6년 전의 ‘그 사건’으로 고통을 받았던 것처럼. 하인리히가 일평생을 귄터의 꼭두각시로 살았던 것처럼.

‘그리고 그 소설을 쓴 건 바로 너잖아?’

그렇게 마음을 먹은 나는 대공저를 벗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바로 일전에도 가 본 적이 있는 중앙 시장으로.

‘페트로의 조사에 따르면 오늘 여주인공이 시장 구경을 할 예정이라고 했지.’

나는 시장에 가서 여주인공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시장은 오늘따라 유난히 북적였고, 상인들의 호객 소리로 시끄러워 한 사람을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결국 그녀의 모습을 찾아냈다.

“와아! 이거, 이름이 뭐예요?”

시장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가녀리고 천진난만한 목소리. 나는 나도 모르게 발을 멈춰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응, 이건 석류라고 하는 거야. 언니, 석류가 뭔지 모르는 걸 보면 외국에서 왔나 봐?”

“네! 바로 얼마 전에 제국에 왔어요.”

과일 장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녀의 모습. 자외선에서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쓴 베일 아래의 머리카락과 피부는 온통 눈처럼 하얀색.

눈송이가 내려앉은 듯 새하얀 속눈썹 아래에서 빛나는 눈동자는 연하늘색. 연분홍의 입술은 과일처럼 싱그러웠다. 색소라곤 없는 듯 온통 하얗기만 한 사랑스러운 얼굴.

그야말로 수도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의 미인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이린 케드릿사.’

그녀는 바로 내 손으로 빚어낸 여주인공이었다.

“그렇구나, 이름이 석류구나! 알알이 새빨갛고 반짝반짝한 게 너무 예뻐요. 생긴 것만큼 맛도 있겠죠?”

“그러엄. 올해 햇석류라 얼마나 새콤달콤하고 맛난데. 게다가 석류는 여자들 건강에도 좋아, 언니.”

“꺄아! 꼭 사고 싶어요. 이거 얼마예요?”

나의 여주인공, 아이린은 마치 아이처럼 방방 뛰며 좋아했다.

‘언제 어떻게 말을 걸면 좋으려나?’

그런 고민을 하며 그녀를 힐끔거리던, 그 순간이었다.

“으음~ 이게 비싼 과일이라 한 개에 5테트는 받아야 하는데 말이야, 언니가 워낙 예쁘니까 특별히 4테트에 줄게.”

“와, 감사합니다! 정말 친절하시네요!”

뭐, 비싼 과일? 특별히 4테트?

과일 장수의 말을 들은 나는 기가 찼다. 하지만 아이린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호주머니를 뒤적거려 돈을 꺼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다가가 돈을 내미는 아이린의 손을 가로막았다.

“잠깐만요.”

“뭐, 뭐야? 댁은 누구야?”

신이 나서 돈을 받아 챙기려던 과일 장수는 내가 끼어들자 당황한 얼굴을 했다.

나는 아이린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말했다.

“지나가다 들었는데 황당해서요. 석류가 비싼 과일이라 원래 5테트인데 특별히 4테트를 받겠다고요? 석류는 수도에서 제일 흔한 과일 중에 하나잖아요! 가을이면 2테트에 3개는 족히 살 수 있다고요. 지금 외국인 관광객이라고 바가지 씌우시는 건가요?”

어느 세상에나 이런 일은 흔하다. 시세를 잘 모르는 손님에게 바가지를 씌워서 부당한 이익을 보는 일 말이다.

‘아이린은 외국인인 데다가 딱 봐도 맹하고 세상 물정 모를 것처럼 보이니 만만했겠지.’

하지만 내가 있는 이상 천만의 말씀이다.

아니나 다를까, 내 말에 과일 장수는 당황해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더니 말을 엄청나게 더듬기 시작했다.

“아, 아니 그게. 이, 이, 이건 그냥 석류가 아니라, 외국에서 들여온 아주 귀한 거라…….”

“외국산 석류는 여기 이 배꼽이 밖으로 벌어져 있는데 제국산 석류는 안쪽으로 오므려져 있다고요. 이건 누가 봐도 제국산 석류인데요?”

“그, 그게…….”

“아이참, 계속 오리발 내미실 거예요? 저기 쓰여 있는 내용이 무섭지 않으신가 봐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바로 옆 담벼락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가리켰다.

그리고 포스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외국인 대상 부당이익 집중 단속 주간」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희 큰 오라버니께서 법무부에서 일하시는데 간만에 일거리 하나 드릴 수 있겠네요. 뭐, 강화된 처벌이 두렵지 않으시면 계속 발뺌하시든가요.”

내 말에 과일 장수는 결국 두 손 두 발 들고 말았다.

“하하, 이거 참. 내가 잘못했어, 언니들. 이거 공짜로 한 봉지 줄 테니, 오라버니한테 말하지 말아. 알았지?”

과일 장수는 다급하게 봉투에 석류를 몇 알 넣어 내게 건넸다.

과일 봉투를 받아 돌아 나오는데, 나는 내 뒷모습을 보던 아이린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그녀의 하늘색 눈은…… 마치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 눈빛을 몇 번인가 본 듯한 데자뷔가 들었다.

‘이 눈빛은…… 메리나 시몬에게서 봤던 것 같은 느낌이…….’

아니나 다를까, 아이린은 폴짝 뛰며 내게 달려들었다.

“꺄아! 너어~ 무 멋있었어요! 바가지 쓰일 뻔한 순진한 외국인인 저를 구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해요!”

아이린은 내게 매달리듯 달라붙어 끝도 없이 떠들어댔다.

“세상에, 어쩜 그렇게 멋있으신 거예요? 그 강단! 지혜! 단호함! 게다가 상대를 한방에 K.O. 시키는 협잡까지! 저엉말 멋있었어요. 저도 닮고 싶어요!”

‘원래 이런 성격인 건 알고 있었지만, 좀 부담스럽네…….’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아이린은 키가 매우 작은 편이라 나보다 반 뼘 정도 작았다.

“영애, 혹시 이름이 뭐예요? 저는 사흘 전에 제국에 와서 이곳에 대해 잘 몰라요. 저랑 같이 석류 먹으면서 제국에 대해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네에?”

‘그거 완전 바라던 바죠.’

그녀를 어떻게 꼬실지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이렇게나 좋은 기회가 생길 줄이야……. 나는 흔쾌히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아요. 제 이름은 라리아 셔우드예요. 그쪽은?”

“아이린 케드릿사라고 해요!”

그렇게 통성명을 한 뒤, 우리는 근처의 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풍지로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공원 풀밭 여기저기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는 돗자리가 없어 그냥 풀밭에 앉았다. 그래도 잔디가 푹신해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석류를 까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린은 제국의 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았기에 내게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았다.

“제국에서는 아침 식사로 무엇을 먹나요? 저희 나라에서는 아침 식사는 늘 풀죽과 삶은 감자만 나와요. 영애도 풀죽을 먹어 본 적 있나요? 영애의 집안은 어떤 곳인가요? 정말 궁금해요!”

“영애는 황궁에 가 본 적이 있나요? 황궁엔 사방의 벽 전체를 다 금으로 바르고 보석으로 장식한 방이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정원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호수와 섬도 있다던데 정말인가요? 사계절 내내 다른 꽃이 피고 온갖 새가 찾아온다던데 꼭 가 보고 싶어요!”

“사교계에는 미남미녀가 그렇게 많다던데, 정말이에요? 영애도 미남을 본 적이 있나요? 저희 나라에는 미남은 없고 전부 다 할아버지뿐이어서 전 옛날부터 미남을 정말 보고 싶었어요.”

마치 ‘왜?’라는 질문을 입에 달고 사는 5살짜리 아이처럼……. 그야말로 물음표 살인마라는 별명을 붙여 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나는 5살짜리 20명의 질문 공세를 한꺼번에 받아 본 적도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하건 최선을 다해 대답해 주었다.

그러다 어느새 기웃기웃 해가 지고 공기가 싸늘해지자, 우리는 각자의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오늘 정말 재미있었어요! 영애, 우리 또 만나요! 다음에도 꼭 놀아 주어야 해요? 저, 이곳에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요!”

최선을 다한 보람이 있게도, 아이린은 내게 호의를 표현했다. 나는 기쁨을 숨기지 않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날 이후로도, 나는 정기적으로 아이린과 만났다. 아이린은 나의 창조물이었기에 나는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그런 그녀와 가까워지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아이린은 젖먹이 시절부터 성녀로 임명될 때까지 대신전에 갇혀 지내서 성국 밖에서의 평범한 생활에 관심이 많아. 특히, 성녀는 평생 순결을 지켜야만 하고 지키지 못하면 파문당하고 성녀의 지위를 잃기 때문에 결혼과 가정을 꾸리는 일에 호기심과 동경을 가지고 있지.’

결혼과 가정을 동경하는 아이린에게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말해 주었다. 내가 블랙웰 공녀와 공자의 시녀라는 것과 아이들이 얼마나 귀여운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물론 아이린의 반응은 뜨거웠다.

“정말요?! 저, 어린아이 정말로 좋아해요! 제가 있던 나라에는 아이가 저밖에 없었거든요. 제국에 와서 처음으로 아이를 봤는데, 정말 정말 귀여웠어요!”

“저희 공녀님과 공자님도 정말 귀여워요. 아마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아이들일 거예요.”

“세상에! 정말 만나고 싶어요! 5살짜리 쌍둥이라니, 정말로 사랑스러울 것 같은걸요!”

“그럼, 한번 만나 보실래요?”

“네에, 정말요? 정말 그래도 돼요?!”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손을 마주 잡았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공녀님과 공자님도 아이린을 좋아할 거예요.”

그것은 진심이었다. 아이린은 분명 아이들의 좋은 엄마가 될 테니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말에 아이린의 얼굴은 행복감과 기대감으로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다음 순간, 아이린은 내 예상을 벗어난 행동을 했다. 바로 나를 덥석 끌어안은 것이다!

“……!”

“와아! 너무너무 감사해요! 영애는 정말 최고예요! 영애, 사랑해요!”

아이린은 나를 부둥켜안고 폴짝폴짝 뛰었다.

‘엉겁결에 여주인공한테까지 사랑 고백을 받아 버렸네.’

그녀의 격한 반응은 좀 당황스러웠지만…… 싫지는 않았다.

다음 날, 나는 그녀와의 약속을 지켰다.

“자, 공녀님, 공자님. 이쪽은 아이린 케드릿사 영애예요. 케드릿사 영애, 이쪽은 저희 공녀님과 공자님이세요.”

나는 아이들과 소풍을 나오면서 아이린도 불러냈다.

자네트는 내 옆에, 미하일은 내 뒤에서 한쪽 눈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꺄아아! 안녕하세요! 어머, 세상에, 너무, 너무 귀여워요! 꺄아, 어떻게 해! 저 볼살 좀 봐!”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본 아이린은 너무 좋아서 방정맞게 방방 뛰었다.

“영애 말이 맞았어요! 이렇게 귀여운 어린애는 난생처음 봐요! 꺄악! 머리 쓰다듬어도 돼요? 볼살 만져도 돼요?”

마치 돌고래 소리 같은 그녀의 목소리에 미하일의 눈썹 끝이 점점 더 축 처졌다. 미하일은 울상을 지으며 날 올려다보았다.

“우으으…… 라리아. 이상한 사람…….”

나는 그런 미하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케드릿사 영애는 좋은 사람이랍니다. 좀 방정맞긴 하지만…….”

우리는 공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와 자네트, 미하일, 아이린, 그리고 메리, 이렇게 다섯 사람은 대공저에서 준비해 온 샌드위치와 간식을 나눠 먹었다.

“아 참, 공녀님. 세드릭 황자님께서 편지를 보내셨던데 보셨나요? 어떠셨어요?”

나는 어제 세드릭에게서 자네트에게로 편지가 왔다는 것을 떠올리며 자네트에게 물었다.

나는 편지의 내용은 보지 않고 자네트에게 건네주었다. 비록 8살과 5살이라지만 사생활이니까 말이다.

자네트는 머핀을 먹으며 대답했다.

“응, 헤드릭 편지 봐써. 또 놀러오래. 아님 자기가 놀러온다구…….”

“푸핫!”

그때였다. 갑자기 아이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푸흣, 푸흐흡…… 공녀님, 다시 말해 주세요! 헤드릭이요?”

이제껏 자네트의 발음에 대해 이렇게 반응한 사람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자네트는 꽤 당황한 듯 얼굴이 붉어졌다.

“헤, 헤드릭…… 떼드릭…….”

자네트는 여전히 시옷 발음을 잘 못 했다. 이 정도의 발음은 크면 교정되기 때문에 나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자네트의 혀 짧은 발음에 아이린은 그만 배를 잡고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아하하! 아하하하. 공녀님, 너~ 어무 귀여워요. 떼드릭이래! 아하하하!”

악의는 없었고, 나름대로 귀여워하는 것이긴 했지만…… 원래 어린애란 자신의 미숙함을 놀리는 것을 싫어하는 법이다.

“우씨! 놀리지 마아!”

“꺄악!”

성질이 난 자네트는 벌떡 일어나서 아이린을 밀쳤다.

자네트는 5살치곤 힘이 셌고, 아이린은 웃느라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아이린은 비틀거리다가 돗자리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메리가 엄한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 공녀님의 발음을 놀리지 말아 주세요.”

“네, 네에…… 죄송합니다아…….”

메리가 아이린을 혼내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아이린이 성국의 성녀님인 걸 메리가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지 정말 궁금한걸. 성녀는 황제보다도 높은 분인 것처럼 여겨지는데…….’

간식을 다 먹은 뒤, 우리는 놀이를 시작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 치맛자락 보일라…….”

바로 공원에서 하기 제일 좋은 놀이인 숨바꼭질. 미하일과 자네트가 정말 좋아하는 놀이이기도 했다.

“다 숨으셨나요?”

보통 숨바꼭질을 할 때 첫 술래는 내가 하기 때문에, 나는 미하일과 자네트, 아이린을 찾아다녔다.

“흐응, 다들 어디 숨으셨을까?”

나는 살금살금 돌아다니며 아이들의 흔적을 찾았다.

아이들의 흔적을 찾는 것은 사실 어렵지 않았다. 나는 단 3분 만에 조각상 옆으로 삐죽 나와 있는 미하일의 발과 나무 옆에 나와 있는 자네트의 검은 치맛자락을 발견했다.

‘하지만 3분 만에 찾으면 재미없으니까.’

“공녀님, 공자님이 어디 계실까~? 이상하다. 정말 못 찾겠네!”

나는 일부러 아이들을 위한 쇼맨십을 발휘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조각상 위로 초록 눈동자가 빼꼼 나오는 것이 보였고, 나무 뒤에서는 자네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꽃밭 사이에 나 있는 오솔길을 지나던 도중이었다.

“에…… 에, 에취!”

도저히 모른 척해 줄 수 없을 정도로 큰 소리가 꽃밭 사이의 관목 뒤에서 들렸다.

내가 관목 뒤를 들여다보자, 그곳에서는 꽃가루 알레르기라도 있는 건지 아이린이 연달아 재채기를 하고 있었다.

“에취, 에취! 에헤헤, 들켰다!”

“아하하, 이번엔 케드릿사 영애가 술래예요!”

나는 깔깔 웃으며 아이린을 일으켜주었다. 아이린은 신이 난 듯 술래의 시작 지점으로 가서 눈을 감고 소리쳤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 치맛자락 보일라! 다 숨으셨나요?”

아이린이 그러는 동안 나는 잽싸게 분수대 뒤로 달려가서 숨었다.

‘자네트와 미하일은 여전히 나무와 조각상 뒤에 있네.’

심지어 여전히 발과 치맛자락을 빼꼼히 내민 채였다.

‘좀 걱정되는데…… 아이린에게 바로 들키는 거 아냐?’

그리고 내 걱정은 바로 맞아떨어졌다.

“앗! 공녀님 찾았다! 공자님도 찾았다!”

아이린은 눈을 뜨자마자 발과 치마가 보이는 아이들을 찾아내곤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었다.

“꺄아! 제가 다 찾았어요! 신난다!”

“머야, 벌써?”

“으이씨…… 머가 이러케 빨라?”

아이들이 꿍얼거리면서 숨어 있던 장소에서 나왔다. 나 역시 분수대 뒤에서 나와서 그들에게 제안했다.

“숨바꼭질 말고 다른 거 할까요? 음, 수건돌리기는 어때요? 메리와 기사분 몇 분만 더 참가하시면 숫자가 맞을 것 같은데…….”

“쪼아!”

미하일이 신이 나서 외쳤다.

하지만…… 놀이를 바꿔 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아이들이 5살치곤 신체 능력도 좋고 똑똑하다고 해도 어른만 할 리는 없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좀 봐주어야 놀이의 균형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린은…….

“잡았다!”

“여기, 여기!”

“땡! 이제 공녀님이 술래!”

“꺄아! 제가 공자님을 잡았어요!”

나나 메리, 혹은 다른 사용인들과 달리 아이들을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자기 허리춤에나 올락 말락 하는 5살짜리 꼬맹이를 붙잡은 아이린은 정말로 방방 뛰면서 즐거워했다.

‘이건 뭐, 5살짜리들과 수준이 똑같네…….’

이렇게 되니 아무리 놀이를 바꿔도 5분을 채 가질 못했다.

잡힐 때는 1분도 안 돼서 따라잡히는데 붙잡으려고 하면 죽어도 잡히지 않는 아이린 때문에 약이 머리끝까지 오른 자네트는 씩씩거리다가 돗자리 위에 널브러져 외쳤다.

“나 안 해!”

미하일도 대놓고 말은 안 해도 눈에 띄게 시무룩해져 있었다. 아무리 해도 이길 수가 없으니 말이다.

결국 나는 타임을 선언하고 아이린을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갔다.

“아이린, 공녀님과 공자님과 놀 때는 조금 봐 드리면서 했으면 좋겠어요.”

“네에? 왜요?”

“5살이잖아요. 계속 지기만 하면 공녀님, 공자님도 실망하시거든요.”

내 말에 아이린의 눈이 커졌다. 여태까지 계속 자신만 이겼던 게 자신의 실력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앗! 정말 죄송해요. 이런 놀이를 난생처음 해봐서 미처 생각을 못 했어요. 숨바꼭질도, 수건돌리기도 처음이라, 너무너무 신이 나서…… 정말 죄송해요!”

그녀의 말을 들으니 새삼 그녀가 안쓰러워졌다.

‘아기 때부터 대신전에 갇혀서 엄숙하고 근엄한 할아버지들 사이에서 자랐으니 그럴 만도 하지. 늘 차기 성녀라는 이름에 짓눌리며 살았을 테니…….’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를 탓할 수가 없어졌다.

더군다나, 그녀의 그런 배경 역시 내가 내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그녀 역시 나의 창조물이니 말이다.

나는 웃으면서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아요, 처음이니 잘 모르면 그럴 수도 있죠. 그럼, 우리 같이 공녀님과 공자님을 달래 드리러 갈까요?”

“좋아요!”

그렇게 우리는 아이들을 달래 주어 다시 놀이를 했다.

그날의 소풍 이후로, 아이린은 매일마다 자네트와 미하일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공녀님과 공자님은 정말 너무 귀여워요. 분명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아이들일 거예요! 공녀님과 공자님을 매일 볼 수 있는 셔우드 영애가 너무 부러워요.”

‘아이린이 아이들을 마음에 들어 해서 다행이다.’

물론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정해진 여주인공이었으니까. 녹턴과 이어져서 아이들의 새로운 엄마가 되어 주어야 할 존재가 아닌가.

‘아이들이 새엄마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으면 좋겠어. 그동안 엄마가 없었으니, 그간 못 받은 사랑까지 전부 받았으면…….’

마음 한구석이 아렸지만 나는 그것을 애써 무시했다.

아이린은 내게 찰싹 붙어서 말했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어때요? 분명 엄청나게 재미있겠죠? 공녀님과 공자님과 매일 놀 수 있다니,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저도 하고 싶어요.”

나는 그녀의 말에 귀가 쫑긋 섰다.

‘마침 잘됐는걸. 딱 그런 일을 가르쳐 줄 생각이었는데.’

그렇다. 아이린은 곧 블랙웰의 안주인, 자네트와 미하일의 새엄마가 될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린에게도 아이를 돌보는 일을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녹턴과 달리 아이린은 충분히 살가운 사람이라 꼭 필요하진 않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까 말이야. 아이린 본인도 하고 싶어 하고.’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아이린에게 말했다.

“케드릿사 영애, 대공저에도 놀러 오시겠어요? 공녀님과 공자님이 정말 좋아할 거예요.”

내가 말을 꺼낸 순간, 아이린의 얼굴에 스위치라도 켠 듯 화색이 돌았다.

매일마다 자네트와 미하일에 대해 노래를 부르다시피 한 그녀였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정~ 말~ 요? 놀러 가도 돼요?!”

“그럼요.”

‘일전에 녹턴에게 친구를 데려와도 된다고 허락받았으니 아이린도 괜찮겠지.’

내 말에 아이린은 정말이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폴짝폴짝 뛰었다.

“꺄악! 너무 좋아요! 자네트와 미하일과 하루 종일 놀 거예요. 물론 셔우드 영애와도요!”

그렇게 해서 나는 블랙웰 대공저로 아이린을 초대했다.

오전 내내 신나게 논 결과 아침에 예쁘게 빗어서 곱게 땋아 준 자네트의 머리는 온통 엉망이 되어 있었다. 나는 자네트의 머리를 빗어 주기 시작했고, 옆에서 아이린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예뻐라. 공녀님, 어쩜 이렇게 귀여워요? 머리카락은 꼭 진짜 은 같고, 볼살은 정말 말랑말랑해서 꼭 마시멜로우 같아요!”

이것은 좋은 기회였다. 나는 아이린에게 빗을 내밀며 말했다.

“참, 케드릿사 영애. 한번 해 볼래요?”

“네? 뭐를요?”

“공녀님 머리 빗겨 드리는 거요. 이렇게 사악, 사악 하면서 부드럽게 빗겨 드리면 돼요.”

내 말에 아이린의 눈이 또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얼른 빗을 받아들었다.

“좋아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아플 수 있으니까 머리카락 위쪽을 붙잡고 빗으셔야 해요. 안 그러면 머리카락이 뽑혀서…….”

나는 아이린에게 자리를 비켜 주면서 머리 빗겨 주는 법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나…….

“아얏!”

의욕이 지나쳤던 건지, 아이린은 내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네트의 머리를 빗어 버렸다. 그것도 정확히 내가 하지 말라고 한 방식으로 말이다.

“아퍼어!”

“아앗, 죄, 죄송해요. 이거 어떻게 하는 거지? 이, 이렇게? 이렇게?”

“아얏! 아얏!”

아이린은…… 마이너스의 손이라고 이름 붙여도 될 정도로 손재주가 나빴다.

힘 조절을 어찌나 못하는지, 그저 빗을 몇 번 움직인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자네트의 부드러운 두피에서 머리카락을 몇 가닥 뽑아 버렸다.

‘하긴, 대신전에서 곱게 키워져서 손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 보지 못했겠지.’

결국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자네트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자색 눈으로 아이린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씨이! 하지 마!”

“죄송해요, 공녀님. 전 잘해 드리려고 했는데…….”

나는 서둘러 자네트를 안아 들고 등을 토닥였다. 나는 아이린을 향해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연습을 하면 나아질 거예요.”

아이린은 시무룩한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내 말에 금방 기운을 차렸다.

그날 오후, 아이들이 예절 수업을 듣는 시간.

늘 그렇듯 4층에 있는 방으로 가기 위해 나와 메리, 아이린은 아이들을 데리고 계단 앞으로 향했다.

그런데 홀의 계단 앞에서…… 미하일은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빤히 올려다보더니, 바로 옆에 있던 아이린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이리인.”

“네? 공자님?”

미하일이 자신을 부른 것이 반가웠는지 아이린은 기쁜 듯이 웃었다.

단, 미하일의 말이 이어지기 전까지 말이다.

“나 업어죠.”

아이린은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면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네? 뭐, 뭐라고요, 공자님?”

“업어죠오.”

미하일이 눈썹 끝을 한껏 늘어뜨리며 불쌍한 얼굴을 했다.

‘음, 끼어들어서 말리는 게 좋을까?’

그 모습을 본 나는 조금 고민했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아니야, 미하일과 지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인걸. 아이린도 미리 익숙해지는 편이 낫겠지.’

아이린은 구조를 바라는 눈으로 나와 메리를 힐끔거리다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도달했는지 엉거주춤 허리를 구부려 앉았다.

“어…… 업히세요, 공자님!”

그녀가 나름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을 본 미하일은 신이 나서 그녀의 등에 덥석 매달렸다.

“와아!”

“커헉! 헉……!”

아이린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의 얼굴에 일순 경악의 빛이 스쳤다.

‘음…… 생각보다 많이 무거운가 봐. 하긴 지난 몇 달 동안 공자님이 많이 크시긴 했어.’

나나 메리는 체력이 좋은 편인 데다 이젠 익숙해져서 미하일을 업고 계단도 오르고 전속력으로 달릴 줄도 알았지만, 아이린이 어떨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걱정스런 눈으로 아이린을 보았다. 그녀는 아직 채 일어서지도 못했는데도 벌써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헉…… 으흑…… 허억……! 끄으으으으응……!”

그녀는 힘주는 소리를 내면서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흐아……! 모, 못 하겠어요……!”

“으앗!”

결국 아이린은 발라당 엎어지고 말았다. 덕분에 등에 매달려 있던 미하일도 같이 쓰러졌다.

바닥에는 아주 두꺼운 카페트가 깔려 있기에 다치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나와 메리는 서둘러 미하일과 아이린을 부축했다.

아이린은 여전히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일어서며 말했다.

“저, 체력이 안 좋아서…… 죄송해요, 공자님!”

“히잉…….”

‘하긴, 대신전에서 거의 갇혀 살다시피 했으니까. 체력이 안 좋을 만도 하지.’

나는 아이린을 부축하며 걱정스럽게 생각했다.

‘아무래도 운동을 열심히 시켜서 체력을 키워 줘야겠어.’

미하일은 조금 시무룩해하다가 곧 쪼르르 하고 나에게 달려왔다.

“라리아, 나 업어죠.”

“알았어요.”

이럴 줄 알았다.

그가 이렇게 나올 줄은 충분히 예상했기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익숙하게 미하일에게 등을 내주었다.

그리고 나는 기합 소리 한 번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헉, 세상에나……!”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보이자 아이린이 기겁했다. 그녀는 거의 괴물을 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셔, 셔우드 영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힘들지 않아요?”

“네, 전 익숙해서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나는 내 등 뒤에 업힌 미하일을 살폈다. 그는 더없이 편한 얼굴로 내 등에 뺨을 기댄 채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수업에 늦지 않으려면 지금 바로 출발해야만 했다.

“그럼 갈까요?”

나는 그렇게 말한 뒤, 아무렇지도 않게 앞장서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보는 아이린의 눈은 점점 더 휘둥그레졌다.

“허억, 허어억, 세, 세상에……! 우와아아……!”

4층까지 오르는 동안 아이린은 이런 감탄사를 끊임없이 내뱉었다.

마침내 아이들을 늦지 않게 예절 수업 교실에 골인시키고 나니, 아이린이 감명받은 얼굴로 달려들었다.

“정말 굉장해요, 셔우드 영애! 체력이 정말 좋으시군요! 존경스러워요! 부러워요!”

“뭘, 이 정도로요. 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계속되는 그녀의 칭찬에 멋쩍어진 나는 메리에게 공을 돌렸다.

“메리는 공녀님과 공자님을 한 팔에 한 명씩 매달고 전속력으로 뛸 수도 있어요.”

“네에에에?! 말도 안 돼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아이린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돌아보자, 메리는 수줍게 웃으며 옆에 있던 긴 의자를 번쩍 들었다가 내려놓는 것을 보여 주었다.

“와아아아! 정말 대단해요!”

그리고 그날 저녁.

“공녀님, 공자님. 오늘 밤도 코 해야죠?”

나는 오늘도 자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연신 꼼지락거리던 미하일이 말했다.

“옛날얘기 해죠.”

“네, 그럼요. 자, 그럼 오늘은—.”

언제나처럼 즉석에서 만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려던 나는 떠오르는 게 있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아이린을 돌아보았다.

“케드릿사 영애.”

“네…… 네?”

어쩐지 시선을 피하면서 아이린이 대답했다. 나는 그녀에게 이리 오라는 뜻의 손짓을 했다.

“공녀님과 공자님께서 옛날이야기가 듣고 싶으시대요. 혹시 재밌는 이야기 아는 거 있으세요? 아이린이 온 나라의 민담이라거나요.”

“저, 저느은…… 옛날이야기 같은 건 잘 몰라서어…….”

아이린은 어쩐지 답지 않게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나는 그것이 엄살인 줄 알고 그녀를 데려다가 침대에 눕혔다.

“오늘 옛날이야기는 아이린이 들려주시겠대요. 와~!”

“아이린이……? 별로일 것 가태.”

자네트가 믿음이 안 간다는 눈으로 투덜거렸다. 자네트는 오늘 오전에 아이린이 자기 머리털을 잡아 뜯은 뒤로 계속 아이린을 못 미더워하고 있었다.

아이린은 가늘게 떨리는 동공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제,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해요?”

“음, 그냥 아시는 이야기 아무거나요! 즉석에서 지어서 하셔도 좋고요.”

아이린은 고민하더니 결국 굳게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그…… 그럼 이야기해 드릴게요! 자, 옛날 옛적에…… 아그네스라는 이름의 여인이 살았는데요.”

‘아그네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나는 그들의 곁에 앉아 아이린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계속 듣던 나는 그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 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녹턴이 미술관에서 이야기해 주었던 ‘성녀 아그네스의 이적’ 이야기였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평생 들어 본 이야기가 성서 이야기밖에 없었나 보구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애들은 성서 이야기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옛날이야기에 비해 지루한 이야기였으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결국 한참이나 이야기를 듣던 도중 자네트가 빼액 소리쳤다.

“재미 업써!!!”

자네트는 어찌나 화가 났는지 새빨개진 얼굴로 씨근거렸다.

“으우우…….”

한편 미하일은 어찌나 지루했는지 반쯤 졸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아이들을 재우기에 최적의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의 반응에 당황한 아이린이 허둥지둥 말했다.

“아, 앗. 공녀님. 제 이야기가 재미없으세요? 그, 그럼 다른 이야기를 해 드릴게요. 옛날 옛적에, 레온하르트라는 이름의 사내가 살았는데…….”

보다 못한 내가 끼어들었다.

“아이린, 수고 많았어요. 공녀님과 공자님한테 옛날이야기는 제가 해 드릴게요. 알았죠?”

“네에…….”

아이린은 시무룩한 기색이 역력해져서 자리를 비켰다. 나는 아이들에게 재빠르게 그동안 숨겨 두었던 비장의 이야기를 들려준 뒤 재우고 아이린과 함께 방에서 나왔다.

“아이린, 괜찮으세요?”

“네, 전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린은 여전히 시무룩해 보였다.

사실은 나도 그녀에게 미안함과 안쓰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설마 아이 돌보는 데 이렇게까지 소질이 없을 줄은 나도 몰랐지. 내가 괜한 일을 시킨 걸까?’

그렇다고 아이린이 꾀를 부리며 안 한 것도 아니고, 그녀 나름대로는 열심히 한 건데 말이다. 그런데도 결과가 영 좋지 않으니 누구라도 시무룩해질 수밖에.

나와 아이린은 함께 대공저를 나왔다.

“저, 아이린…….”

나는 아이린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나보다 그녀가 더 빨랐다.

“죄송해요, 라리아.”

“네? 아, 아니에요!”

그녀의 사과에 나는 황급히 말했다.

“아이린이 정말 열심히 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오히려 저야말로 죄송하죠. 너무 무리한 일을 부탁드린 것 같아서…….”

그러나 아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요. 저어……. 라리아한테 ‘아이 돌보는 일은 재미있을 것 같다, 매일 애들이랑 놀 수 있는 라리아가 부럽다’고 한 거요.”

“아…….”

그러고 보니 그녀가 저번에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녀에게 이 모든 일들을 시킨 것도, 그녀가 해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이기도 했으니까.

아이린은 풀죽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 아이 돌보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인지 미처 몰랐어요. 그냥 애들이 귀여워서, 막연히 ‘귀여운 애들이랑 같이 있으면 즐겁겠지’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라리아의 직업이 얼마나 힘들고 노력해야 하는 일인지는 생각도 안 하고요. 죄송해요, 라리아. 제 생각이 짧았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가슴 속에 퍼지는 온기를 느꼈다.

‘아이린이 그런 것을 신경 쓰고 있었다니…….’

사실 부럽다든가 즐겁겠다든가 했던 말은 깊이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내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는 그녀의 마음 씀씀이는 무척 고마웠다.

내가 느낀 감명과 고마움을 표현하고, 좀 더 익숙해지면 아이린도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를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가 입을 열기 전, 아이린이 먼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아이를 돌보고 싶다고 했지만…… 제가 아무래도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저는 아이 돌보기에 적성이 안 맞는 것 같아요. 제가 좋은 건 그냥 가끔 귀여운 아이들을 구경하거나 놀아 주는 정도였지 이렇게 하루 종일 붙어서 돌보는 건 도저히 못 할 것 같아요.”

……응?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설마, 농담이겠지? 진담은 아니겠지?’

그녀의 말에 이번에는 내 동공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이 돌보는 게 적성에 안 맞고 가끔 구경만 하는 게 좋다니! 장차 자네트와 미하일의 엄마가 될 사람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런 나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린은 해사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에헤헤, 저는 아무래도 엄마가 되는 건 안 맞나 봐요. 앞으로도 아이는 갖지 않고 사는 편이…….”

“자, 자, 자, 잠깐만요! 그, 그러지 말고요, 아이린. 다시 생각해 봐요!”

나는 다급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아이린이 아이를 본 건 이제 처음이었을 뿐이잖아요. 좀 더 연습하고 실력이 늘면 아이린도 이 일을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요? 네?!”

“아니에요. 전 이번 일로 깨달았어요. 전 확실히 아이 보는 일이랑은 안 맞아요. 아, 라리아는 정말 잘 맞는 것 같더라고요. 꼭 공녀님과 공자님의 진짜 엄마 같았어요!”

아이린의 티 하나 없이 해맑은 얼굴을 보며…… 나는 환장할 것 같았다.

‘댁이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지! 세상에 이물질한테 애들을 양보하는 여주인공이 어디 있어?!’

큰일이 났다. 내가 자네트와 미하일을 아이린에게 소개시켜 준 것은…… 그녀와 친해지고, 겸사겸사 장차 녹턴과 아이린을 이어 줄 밑밥을 깔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완전히 말짱 꽝이지 않은가!

‘큰일 났네. 이를 어쩌면 좋지? 꼭 녹턴과 아이린을 이어 주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줘야 하는데. 아이린이 엄마 되기가 싫다니…….’

떨리는 동공으로 생각하던 나의 머릿속에 어떤 방도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그거면 되겠다.’

“아참, 케드릿사 영애. 미남이 보고 싶다고 했죠? 제가 정말 굉장한 미남을 알거든요. 소개시켜 드릴까요?”

“네? 정말요?!”

아이린의 눈이 영롱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손을 꼭 붙잡고 물었다.

“정말, 꼭 보고 싶어요! 많이 잘생겼나요?”

“그럼요. 정말 굉장히 잘생겼어요. 아마 제국에서 제일…… 아니, 대륙에서 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걸요?”

“우와아아!”

‘비록 아이들로 아이린을 꼬시는 방법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녹턴을 직접 보면 마음이 달라질 거야.’

그것이 내 생각이었다.

‘녹턴과 사랑에 빠지면 아이린도 알게 될 거야. 자신이 얼마나 자네트와 미하일의 엄마가 되고 싶은지 말이야. 그래! 여주인공인데 당연하지. 지금 한 말은 그냥 잠깐 착각한 것일 뿐이고, 아이린은 분명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거야.’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아이린은 얼굴을 분홍색으로 물들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세상에, 대륙에서 제일가는 미남이라니! 얼마나 잘생기셨을까! 셔우드 영애가 소개시켜 주시는 분이니 틀림없을 거예요! 전 영애를 믿어요.”

다행히 아이린은 미남자에도 관심이 많았다. 성국에서 갇혀 살며 낭만적인 사랑과 연애에 대한 꿈을 키워온 그녀는 ‘첫눈에 반하는 운명적인 사랑’을 꼭 해 보고 싶다고 했다.

“저는 로맨스 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하면 귓가에 종소리가 들린다면서요? 정말 그럴까요?”

“글쎄요, 그건 그냥 관용어 아닐까요?”

“전 옛날부터 사랑이란 어떤 기분인지, 첫 키스는 어떤 기분인지 정말 정말 궁금했어요. 정말 운명적인 사랑을 하고 싶어요. 지위든, 모국이든, 전부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영원한 사랑을요! 이런 말을 하면 절 키워 주신 분께서 엄청 싫어하시지만요.”

‘성녀가 사랑을 한다는 건 곧 성녀 자리를 내려놓는다는 거니까, 그럴 만도 하지…….’

그렇게 생각하던 내게 아이린이 물었다.

“셔우드 영애는 사랑을 해 보셨나요? 느낌이 어땠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멈칫할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녀에게 나의 사랑에 대해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 티 하나 없이 순진무구했으니까.

결국 나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수밖엔 없었다.

“안 해 봤어요. 저도 정말 궁금하네요!”

내 말에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곧 내 손을 붙잡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셔우드 영애도 꼭 운명적인 사랑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영애는 정말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니까요.”

사실 사랑 때문에 마음고생을 얼마나 했는데 굳이 또 다른 사랑을 하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사랑이고 결혼이고 뭐고 그냥 유치원을 세우고 아이들을 돌보며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도 아이린의 선의는 고마웠기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요. 케드릿사 영애도 꼭, 운명적인 사랑을 할 거예요. 첫눈에 반하고…… 귓가에는 종소리가 들리고…… 그런 사랑을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꺄악! 부끄러워라.”

아이린은 새빨개진 얼굴을 마구 흔들었고,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웃었다. 우리는 다음 만남을 약속한 뒤 헤어졌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어찌나 초조한지, 아침부터 단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마차를 타고 아이린과 약속한 카페로 향할 때에도 거의 1분에 한 번씩 창문의 차양을 열었다 닫았다, 자리를 옮겼다 말았다 하면서 부산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곁에는…….

“영애.”

낮고 나직한 목소리가 좁은 마차 안에 툭 떨어졌다.

나는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는 귀찮은 듯, 권태로운 듯, 이마를 살짝 찡그린 채 좌석 시트에 등을 기대곤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어딜 간다고 이러는 건가?”

당연히, 녹턴이었다.

그의 불만스러워 보이는 얼굴에 나는 애써 웃어 얼버무렸다.

“아하하, 말씀드렸잖아요. 카페예요, 카페.”

“그러니까, 카페엔 갑자기 왜?”

“급히 드려야 할 중요한 말씀이 있다니까요. 일단, 가 보시면 알게 돼요.”

그 말에 녹턴은 쯧 하고 혀를 차면서도 도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소개팅을 주선해 보는 건 또 난생처음인데……. 왜 내가 이렇게 떨리나 몰라.’

사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내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이성을 소개시켜 주려 하고 있으니까.

‘……내게 고백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 주는 건 역시 좀 미안하긴 하지만.’

하지만 그와 그녀는 마주치는 순간 서로에게 첫눈에 반할 운명이었다.

내가 좋다고 했던 그 역시도, 그녀를 보는 순간 나 같은 건 단 순간에 잊게 되리라.

이미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런 생각을 하니 또 가슴 속 한구석이 찌르르 아파 왔다.

‘뭐, 어쩔 수 없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었으니까. 그만 슬퍼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나 생각하자.’

그런 생각을 하며 결심을 다졌더니, 어느샌가 마차가 멈추어 섰다.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뜨이는 것만 같았다.

‘드디어!’

드디어. 그토록 오랜 시간 기다리고 준비해 온 그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 * *

한편, 라리아가 함께 외출할 것을 제안했을 때…….

녹턴은 거의 혀를 깨물 뻔했다.

‘이건…… 데이트 신청인가.’

야만족을 소탕하는 전쟁을 진두지휘할 때에도 평온하기만 하던 심장이 미친 듯이 맥박쳤다.

‘정말이지 예상 밖이로군. 그쪽에서 먼저 데이트를 제안할 줄이야…….’

안 그래도 어떻게 라리아의 마음을 열어야 하나 고민하던 그였다.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할 생각만 가득했지 그녀에게서 역으로 제안을 받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주저했던 그녀의 쪽에서 먼저 외출을 제안했다는 건 역시…… 좋은 징후라고 봐도 되겠지.’

드디어,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었다니! 몇 번을 생각해도 녹턴에게는 이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분명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카페에 가자’고 했었지. 그렇다면 그 긴히 할 말이라는 건 역시……?’

스스로가 생각해도 들뜬 바람에 지나치게 앞서가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야생마처럼 날뛰는 상상력을 멈출 수가 없었다.

몸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역류하고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졌다.

그리도 고통스러운 인생이었건만, 이런 기회가…… 이런 행복이 찾아왔다는 것을 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어렵게 얻은 기회를 그는 결코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번 기회에 그녀의 마음을 단단히 잡아 놓도록 해야겠군.’

라리아에게 외출 제안을 받은 날 녹턴은 바로 옷장부터 확인했다. 평소 그는 의복에 그리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라리아에게 보일 자신의 모습은 늘 신경이 쓰였다.

그녀가 먼저 제안한 첫 데이트 날, 그리고 어쩌면 그녀와 연인이 될지도 모르는 날 입을 옷이었다. 아무거나 입을 수는 없었다.

그가 가진 옷들은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고급품이었지만 녹턴의 눈에는 어느 것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는 충실한 집사 시몬을 불렀다.

“외출용 의복을 7벌 새로 주문하도록. 일류 디자이너에게 의뢰를 맡기고 최고의 재료만 쓰라고 해라. 다음 주 금요일에 입을 예정이니 절대 늦으면 안 된다.”

주인의 주문을 재빠르게 받아 적던 시몬이 당황하며 말했다.

“하, 하지만 주인님. 다음 주 금요일까지는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수도의 일류 디자이너들은 주문이 언제나 밀려 있어서 일주일 안에 주문제작을 하는 것은 무립니다!”

“웃돈을 줘서 순서를 당기면 되지 않느냐? 몇 배를 더 얹어 줘도 상관없다. 무조건 주문을 받게만 만들어라.”

‘대체 무슨 일이시지? 주인님께서 외출용 의복을 7벌이나, 그것도 일주일 안에 제작하라고 하시다니!’

평소 자신이 입을 옷에 큰 관심이 없어, 황실 행사는 물론 대공 즉위식에서 입을 옷조차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던 그였다.

시몬은 모르긴 몰라도 일주일 뒤 어마어마하게 큰일이 있을 거라는 것을 어림짐작했다.

물론 그것이 설마 라리아와의 데이트일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해서 마침내 예정되었던 그 날.

마차가 멈추자 녹턴은 먼저 내린 뒤 라리아가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도착한 장소를 보니 예의 그 하인리히를 구할 계획을 짜던 카페였다.

‘추억의 장소라서 이곳을 선택한 건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기념으로 지난 추억들을 되새겨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언제나처럼 무뚝뚝하고 냉랭한 얼굴 뒤에서 녹턴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 이, 일단 주문부터 할까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라리아를 녹턴은 이상하다는 듯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주문은 직원이 받으러 온다, 영애.”

“아! 마, 맞다. 그랬죠. 오, 오랜만이라 까먹었네요.”

라리아는 멋쩍어하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오늘 아침부터 그녀는 어지간히도 정신이 없어 보였다.

녹턴은 그녀의 그런 태도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보고 있자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녀도 꽤나 긴장한 모양이군.’

그렇게 생각하면, 오늘의 데이트를 기다려 온 사람이 자신 혼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느껴져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라리아는 녹턴의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살짝 얹어진 그녀의 손이 가냘파서 감싸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녹턴이 그 손을 잡아 볼까, 하고 손을 뻗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셔우드 영애!”

낯선 목소리가 기분 좋은 긴장감을 깨뜨렸다.

‘어떤 놈이 눈치 없이 끼어드는 거지?’

녹턴은 짜증이 역력한 눈으로 소리가 들린 쪽을 쏘아보았다.

“케드릿사 영애! 오셨군요!”

하지만 그와 달리, 라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대를 맞이했다. 어마어마하게 반가워하는 듯한 태도였다.

“케드릿사 영애, 여기 앉으세요. 자, 전하. 이쪽은 아이린 케드릿사 영애예요. 제국의 문화를 배우러 외국에서 오셨대요. 영애, 이쪽은 녹턴 블랙웰 대공 전하세요. 제국의 단 한 분뿐인 대공이시죠.”

“안녕하세요!”

심지어 방해꾼을 자리에 앉히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어안이 벙벙해진 녹턴은 그제야 상대를 제대로 보았다. 온통 새하얀 백발의 여자.

그것이 아이린에 대한 녹턴의 감상의 전부였다.

한편 아이린은 라리아를 발견하자마자 반가움을 느끼고 달려왔다. 그런데 순간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살의. 적의. 혹은 마족들의 마력과도 비슷하게 느껴지는 힘. 굶주린 맹수의 아가리 앞에 선 것만 같은 본능적인 공포가 아이린을 덮쳤다.

‘뭐지?!’

다행히 아이린은 평범한 사람이 아닌 성녀였기에 이런 사기(邪氣)에 대한 저항력이 강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어마어마한 공포에 휩싸여 그 자리에서 얼어붙거나 도망치고 말았을 것이다.

아이린은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라리아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굉장한 미남자였으나 자신에게 이유 모를 적개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 위압감 역시도 그가 내뿜고 있는 것 같았다.

‘뭐야, 저 사람?’

당연한 결과로 아이린도 그에 대한 인상이 안 좋아졌다. 하지만 라리아를 봐서 그걸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라리아는 오랜 시간 녹턴에게 아이린을 소개시켜 줄 밑밥을 깔아 왔다.

“전하, 제가 전에 여쭤본 거 기억나세요? 제 외국인 친구가 제국 생활에 적응하는 걸 도와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으음…… 그랬었지.”

그 이야기를 대체 왜, 하필 오늘, 꺼내는 걸까.

녹턴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리고 언제나 불길한 예감은 적중하는 법이다.

“그 외국인 친구가 바로 케드릿사 영애거든요. 오늘, 전하께서 케드릿사 영애가 제국 생활에 적응하는 걸 도와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뭐, 뭣?”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고요. 그냥 같이 앉아서 제국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도 하고, 시간이 남으면 나가서 함께 거리를 둘러보시거나 하기도 하고…… 해 주시면 되니까요!”

라리아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그럼 즐거운 시간 되세요!”

“여, 영애. 라리아!”

녹턴이 그녀를 불렀으나 라리아는 쏜살보다도 빠른 속도로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오로지 녹턴과 아이린, 두 사람만이 남았다.

“…….”

녹턴은 너무 기가 막혀서 잠시 말문을 잃었다.

‘이럴 리가 없다. 이래서는 안 되는 건데.’

기대가 큰 만큼 충격도 컸다. 자신이 이리도 충격을 받는 것도 아마 6년 만에 처음 같았다.

녹턴은 멍하니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라리아의 친구를 도와주겠다고 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금전적 지원을 말하는 거였지, 설마 자신이 직접 상대하게 될 줄이야.

녹턴은 몇 번인가 눈을 감았다 떴다.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라리아 셔우드가 아니라 다른 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사람처럼.

마치 그렇게 하면 눈앞에 있는 사람이 라리아로 변하기라도 할 것처럼.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눈을 깜빡여도 눈앞에 있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녹턴이 멍한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아이린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보다가 웃었다.

“아하하,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가 좋네요.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세요?”

“……네가 알 것 없다.”

녹턴은 그제야 자신이 표정 관리를 잘 못 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한편 자리에 앉은 뒤, 아이린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녹턴이 정말이지 보통 미남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그가 내뿜는 적의 때문에 그 잘생김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조금 더 지켜보니 그 사실은 확연히 드러났다.

곧고 오뚝한 코. 다소 날카롭긴 하지만 아름다운 자색 눈. 맑고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칠흑처럼 검은 머리. 목까지 가린 옷에도 숨겨지지 않는 떡 벌어진 체격과 굴곡진 몸매.

그는 그야말로 미술관의 조각상이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은 절세의 미남이었다. 성국은 물론이고 제국에도 이런 남자는 흔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쩜! 셔우드 영애가 맞았어. 정말정말 끝내주게 잘생겼잖아!’

어릴 적부터 꿈에 그리던 미남이라는 존재를 직접 목격하게 되다니! 심지어 그는 아이린이 꿈에 그리던 미남보다도 훨씬 더 잘생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얼빠에 금사빠인 아이린은 금방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에게서 아무런 말이 없자, 그녀는 먼저 말을 걸었다.

“아하하,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가 좋네요.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세요?”

“……네가 알 것 없다.”

그녀의 말에 상대는 인상을 팍 쓰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이린은 꽤나 당황했다.

‘왜 저렇게 불친절하지?’

사실 그녀는 태어나서 불친절한 사람을 거의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아기일 때부터 차기 성녀로 예정되어 있는 존귀한 존재였으며, 어마어마한 미인이었다.

그녀를 기른 신관들 역시 엄격하긴 해도 그녀에게 호의적이었으며 그 외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그녀를 찬미하고 친절하게 대했다.

그런 그녀에게 이렇게 까칠하고,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티를 팍팍 내는 사람은 난생처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린은 당황함을 숨기고 애써 말을 붙여 보았다.

“아, 혹시 셔우드 영애가 없어서 그러신가요? 낯을 많이 가리시는 편이시구나!”

아이린에게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던 녹턴의 눈빛이 처음으로 변했다.

“라리아…… 아니. 셔우드 영애랑은 무슨 관계지?”

그가 얼굴을 감싸던 손을 거두고 미심쩍은 눈으로 말했다. 아이린은 순순히 대답했다.

“셔우드 영애는 제 친구예요! 제국에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던 저의 첫 친구가 되어 주셨어요.”

‘그녀의 친구라.’

라리아의 친구에게 심하게 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게다가 자신이 실망한 것은 모두 멋대로 기대한 자신의 잘못일 뿐 상대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기분이 굉장히 좋지 않았던 녹턴은 도저히 그녀에게 관대하게 대해 줄 수가 없었다.

녹턴은 다시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미안하지만, 영애. 셔우드 영애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영애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런 한심한 곳에서 지루한 수다나 떨면서 시간을 때우기에는 바쁜 몸이거든.”

그러기에는 너무 이번 외출을 기대한 티가 역력한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뻔뻔하게도 그런 말을 했다.

“네에에?”

아이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 정, 정말로요? 하지만…… 하지만 셔우드 영애가 약속했는데요?”

녹턴은 속으로 혀를 찼다.

“나도 안다. 말해 두건대, 이 모든 건 다 나의 변덕 때문이다. 그러니 셔우드 영애 말고 나를 탓하도록. 셔우드 영애는 잘못이 없다.”

그렇게 말한 녹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린은 우물쭈물하다가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하네요, 셔우드 영애는 대륙에서 제일로 잘생긴 데다가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라고 하셨거든요. 이렇게 괴짜에 변덕쟁이라고는 말 안 했는데.”

‘내가 대륙에서 제일 잘생긴 데다가 다정하고…… 친절해?’

녹턴은 헛웃음을 지었다. 전자는 그렇다 쳐도 후자는 정말이지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마 페르닐이나 시몬이 들으면 놀라서 뒤집어질 것이었다.

자신이 친절하고, 관대하며, 정중한 신사는 못 된다는 사실은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만일 라리아가 그를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전부…….

‘어리석긴. 내가 자신에게만 그렇게 대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그건 셔우드 영애가 잘못 안 거다. 나는 원래 괴짜에 변덕쟁이다.”

녹턴이 깔끔하게 말했지만, 아이린은 납득한 것 같지가 않았다. 아이린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셔우드 영애가 나한테 이상한 남자를 소개시켜 줄 리가 없는데……. 셔우드 영애는 정말 최고의 남자를 소개시켜 준다고 하셨거든요. 첫눈에 반하고 귓가에는 종소리가 울릴 만한 그런 사람을요.”

“……잠깐, 뭐?”

카페에서 나가려던 녹턴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아까 라리아가 카페를 나갈 때만 해도 이 이상으로 불행한 전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는 잔뜩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가 아이린의 어깨를 쥐었다.

“꺄악!”

“지금, 지금 뭐라고 했지? 다시 한번 말해 봐라!”

“이, 이거 놔요! 아, 아파요!”

녹턴은 그녀의 어깨를 놓았다. 하지만 그 험악하고 위협적인 얼굴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다시 한번 말해 봐라! 셔우드 영애가, 누굴 소개시켜 준다고? 어?”

“우으으……!”

통증에 눈물을 글썽이던 아이린이 빽 소리 질렀다.

“최고의 남자요! 제가 운명적인 사랑을 할 그런 남자요. 근데 당신은 확실히 그런 남자는 아닌 것 같네요! 당신은 최악의 남자예요!”

“…….”

“처음부터 막 노려보고, 기분 나쁘게 굴고, 멋대로 가 버리려 하더니, 이젠 막 아프게 하고!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담! 당신 진짜 최악이야! 얼굴만 잘생기면 다야?!”

하지만 아이린의 목소리는 녹턴의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녹턴은 어마어마한 충격에 빠져 있었다.

‘그냥 친구를 도와줄 사람을 소개시켜 주려고 했던 게 아니란 말인가?’

녹턴은 멍한 얼굴로 생각했다.

‘설마 그녀가 오늘 나를 부른 건, 나와 이 여자의 관계를 이어 주려고……?’

하지만 그가 멈춘 것은 한순간이었다. 잇새에서 부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아이린을 내버려 두고 카페에서 뛰쳐나왔다.

“라리아!”

녹턴이 거리를 달리며 소리쳤다.

“라리아! 라리아, 어디 있나! 라리아!”

지나가던 행인들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흘끗거렸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저 라리아를 찾아서 달렸다.

* * *

한편, 카페에서 나온 나는.

‘끝났다.’

중요한 일을 해냈다는 안도감에 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운명의 상대니까, 내가 없이도 둘이 알아서 잘하겠지? 암, 분명 다시 만날 땐 최고의 커플이 되어 있을 거야.’

나는 길을 걸었다. 이제 대공저로 돌아가 업무를 계속할 생각이었다.

조금 먼 거리였지만 마차를 탈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왠지 모르게 걷고 싶었다.

‘운명의 상대를 소개시켜 주었으니 아이린은 분명 내게 고마워하겠지. 아마 이제 곧 성국의 정보에 대해 물어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정한 사랑을 만난 녹턴은…… 분명 더 행복해졌겠지.’

그래, 분명히 그럴 것이다.

기쁜 일이었다. 계속해서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노력해 오지 않았는가.

아이들과 녹턴의 관계도 개선해 주었겠다, 여주인공과도 이어 줬겠다, 이제는 그의 광증만 고치면 나의 임무는 끝이었다. 정말로 은퇴할 수 있는 것이었다.

퇴직금으로 어마어마하게 멋진 유치원을 세우고 아이들을 돌보면서 평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분명 기쁜 일인데. 기뻐해야 하는데…….’

내 손으로 만든 내 소중한 자식과도 같은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이어진 것이다. 로맨스 소설인 이 이야기도 곧 해피엔딩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왜.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걸까.’

나는 더 이상 걷지 못하고 멈추어 섰다.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꼭 수십 개의 바늘로 상처를 후비는 것만 같았다.

비틀거릴 것만 같아서 나는 담벼락에 손을 짚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담벼락 아래에 짙은 색깔의 점이 하나둘 생겨나는 것이 보였다.

‘내가 울고 있구나.’

그제야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녹턴에게 운명의 상대를 소개시켜 주기 전까지 그에게서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다.

‘좀 더 진작 그에게서 마음을 뗐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정리해야지, 정을 떼야지. 몇 번이고 생각했으면서도 나는 끝끝내 그를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나 정말 바보네.’

사랑하는 사람에게 연인을 소개시켜 주고 슬퍼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정말 이만한 바보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이 방법밖에는…….’

나는 내 창조물인 그가, 내가 사랑하는 남자인 그가 정말로 행복하길 바랐다.

너무나 불행한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의 잘못이 아닌 나의 잘못으로 인해 너무나 고통스러운 삶만을 살았으니까.

그런 그의 앞날은 영원토록 행복하기만을. 차갑고 메말랐던 마음 깊은 곳부터 행복이 샘솟아서 결국 ‘태어나길 잘했다’라고 생각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니까.

그리고 그것은 내 사랑이 짝사랑으로 변한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변하지 않으리라.

‘그래, 그가 행복해지면 나도 행복해질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나 자신을 위로했다. 나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 내려 애쓰며, 다시 걸어서 대공저로 돌아가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라리아!”

어깨너머에서 그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목소리를 내가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것은 녹턴의 목소리였다.

‘대체 어째서? 지금쯤이면 카페에서 아이린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 할 텐데…….’

나는 엄청나게 당황했다. 내 계획대로라면 그는 오늘 아이린과 사랑에 빠져야만 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진 여자를 버리고 나오다니? 그것도 날 찾기 위해서? 내가 아는 녹턴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내가 얼어붙은 채 그 자리에서 있는 동안, 녹턴은 나를 발견한 것 같았다.

“찾았다.”

음산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오더니…….

턱! 하고 그가 내 손목을 잡았다.

나는 방금 운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얼굴을 돌린 채, 최대한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전하. 왜 이러시는 거예요?”

“너야말로, 이게 대체 무슨 짓이지? 입이 있다면 설명을 해 보지 그래?”

그가 짐승의 낮은 울음소리 같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분명 너도 날 마음에 두고 있는 게 아니었나? 그렇게 보인 것은 전부 내 착각일 뿐이었나? 응?”

“…….”

“그런 여자한테 날 떠밀다니……. 하! 정말이지 웃기지도 않는군.”

그는 웃었지만, 그 목소리에 깃들어 있는 것은 분명한 분노와 배신감이었다.

“내가 그렇게 싫었나? 말해 봐라. 마음에 안 드는 남자가 자꾸 다가서고, 매달리고 하니까 부담스러웠다 이거지? 이 나를 다른 여자한테 떠넘길 정도로!”

“아니, 그, 그게…….”

“그렇군. 전부 착각이었군! 마음은 이미 통해 있었다고, 그저 네가 준비되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던 건 다 내 착각이었던 거야. 차라리 싫다고 말을 하지 그랬나! 너 같은 건 꼴 보기도 싫다고, 이렇게 다가오는 거 기분 나쁘다고 말을 하지 그랬나!”

‘그가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여주인공인 아이린을 만난 그가. 운명의 사랑에 빠질 차례만 남은 그가…….

이토록 괴로운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지. 그 어느 때보다 고통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피를 토하듯이…….

‘……아이린을 만나면 그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었나?’

“내 마음이 그렇게 하찮고 값싸 보이나? 그저 아무 여자나 내밀면 쉽게 옮겨 갈 만한 그런 마음으로 보였나? 응? 유감이지만, 라리아. 그건 너의 착각이다. 내 눈엔 말이지, 오로지 너밖에는 안 보이거든. 이제까지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다. 네가 좋든, 싫든 영원히 변하지 않을 사실이란 말이다!”

“…….”

“그깟 다른 여자? 웃기지 마라. 세계 전부를 가져다준다 해도 변하지 않아! 어떻게 만난 사랑인데. 어떻게 가지게 된 진심인데…….”

거기까지 말하고 그는 괴로운 듯 신음을 토했다.

“……왜 그렇게 고개를 돌리고 있지? 나를 봐라, 라리아. 내가 그렇게 미운가? 꼴도 보기 싫을 정도로?”

“…….”

“라리아.”

나는 도저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대답하고 싶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곧, 뺨에 그의 따뜻한 손길이 닿았다. 그가 부드럽게 내 얼굴을 돌려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했다.

“……!”

그제야 그의 얼굴이 보였다. 괴롭고, 아프고, 너무나 깊은 상처를 받은 얼굴. 그 사실이 너무나 안쓰럽고, 미안해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니, 사실은 그의 말을 들을 때부터 계속 울고 있었다. 너무 많은 눈물이 쏟아져 그의 얼굴은 곧 흐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시야가 가려져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귓가에 와 닿는 목소리가 있었다.

“라리아.”

그 낮고 나직한 울림. 내가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크고 따뜻한 손길이 눈물을 뚝뚝 떨어지는 내 뺨을 문질렀다. 닦아도, 닦아도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몇 번이고.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 목소리엔, 그 부드러운 손길에 담겨 있는 감정은 안쓰러움과 걱정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늘, 가장 상처받은 사람은 바로 그일 텐데. 가장 잘못한 사람은 바로 나일 텐데.

그런데도 그는 나를 보고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아무리 닦아도 쏟아지는 눈물에 그는 나를 말없이 끌어당겼다. 폭 하고 안긴 그 넓은 품은 너무나 따뜻하고……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이 품을,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그리워하고 있었다. 뼈에 사무치도록 바라고 있었다. 계속 부정하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꼭 끌어안은 그의 단단한 품은, 비강 가득히 들어차는 그의 향기는 꼭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괜찮아. 걱정 마라. 모든 게 다 잘될 거다.

내가 여기 있지 않나.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 꾹꾹 눌러 참아 오기만 했던 감정의 크기에 비해 그것을 담는 내 몸은 너무나 작았다.

억누르고 억눌렀던 감정은 마침내 넘쳐흘렀다. 이 감정을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다.

나는 눈물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거짓말을 했어요. 전하를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었어요. 저도 전하를 사랑해요. 그 누구보다도요. 제가 사랑하는 전하께서 행복하시길 바라서 이런 짓을 했어요. 하지만 어리석은 생각이었어요. 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저 때문에 전하께서 이렇게 괴로워하시는데…….”

울음과 흐느낌이 섞인 내 말을 그가 얼마나 알아들었을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반도 채 전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내 말을 들은 그가.

“……라리아.”

나직한 목소리로 내 말을 끊었다는 것과.

“……?”

그 목소리에 그를 올려다보자, 눈물 젖은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겹쳐졌다는 것.

남자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그 입술. 내가 오랜 시간 바라고 또 바라 왔던, 하지만 결코 가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것.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그의 혀는 조급했지만 내 목뒤를 감싸 오는 그의 손길은 놀라울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을 다루는 것처럼.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귀중하다는 듯이.

첫 키스는 부드럽고, 따뜻하고, 조금 짠 맛이 났다.

한참이나 나를 간질이고, 두드리고, 자극하며 깊은 곳까지 빈틈없이 맛보던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술을 떼었다.

그는 빠져들 것같이 아름다운 자색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나 말고는 그 어떤 것도 관심 없다는 듯이, 오로지 나만을 올곧게.

그는 내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대었다. 그의 심장은 더없이 빠르고 강하게 뛰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내 심장과 같아서, 그의 심장과 나의 심장이 하나가 된 것 같아서…… 나는 울고 싶을 정도의 전율을 느꼈다.

그가 속삭였다.

“이제부터 너는 내 것이고, 나는 네 것이다. 이 심장이 멈추는 순간까지 그 사실은 변치 않을 것이다.”

“…….”

“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육신과 정신, 영혼의 마지막 한 자락까지 남김없이 나의 것이다. 너와 나의 이러한 관계는 어느 누구도, 신조차도 범접할 수 없을 테니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라.”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그를 미련 없이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 있을 정도로 이타적인 사람은 못 되었다.

나는 그를 가지고 싶었다. 오로지 나만의 것으로 하고 싶었다. 나는 내 생각보다 이기적이고 욕심쟁이였다.

그를 갖고자 하는 욕심은 나도 모르는 새 자라나, 내가 참거나 외면할 수 있는 정도를 이미 한참 전에 넘어 버렸다.

‘이것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으면 우리 둘 다 그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눈물 젖은 얼굴로 웃었다. 이제까지와 달리, 더 이상 억지로 지어낸 웃음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진심으로 활짝 웃었다.

“그럴게요. 이제 전하를 아무에게도 양보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그의 눈을 마주 본 채 말했다.

오랜 시간 억눌러온 괴로움이 떠나간 마음속에 새로운 감정이 들어찼다. 기쁨과 행복. 나의 진심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여 얻어 낸 충만감…….

그리고 그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

녹턴은 나를 보고 가볍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는 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한두 번 쓸어내리더니, 다시 한번 입술을 겹쳐 왔다.

그는 욕망을 주체할 수 없는 듯, 두 번째 키스는 첫 키스보다도 더욱 강렬했다.

호흡이 부족해질 정도로 그는 나를 얽어 끌어당기고, 치열을 쓸어 내며 입천장의 여린 부분을 간지럽혔다.

그저 그것만으로도 전신이 녹아내리는 것 같아서, 배 속이 뜨거워지고 호흡이 가빠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온몸이 흐물흐물해지고 숨이 부족해 머리가 어지러워질 때 즈음에야 그는 마침내 나를 놓아주었다.

어질어질한 머릿속에 이런 말이 파고들었다.

“지금부터, 전하라고 부르지 마라.”

내가 그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의 말을 받아들이자, 이미 몇 번이나 가빠져서 더 이상 빨라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심장이 더더욱 빠르게 뛰었다.

그의 말뜻을 이해하긴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그럼……?”

그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길은 한없이 달콤해서,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이의 애정과 사랑스러움이 느껴져서……. 그저 닿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뜨거워졌다.

“녹턴.”

그가 속삭였다.

“녹턴이라고 부르도록.”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내 머리를 애정 어린 손길로 쓸어내렸다.

나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녹턴. 책까지 뒤져 가면서 내가 직접 지어 준 이름.

그리고 지금 와서는 그 누구보다도 소중히 여기게 된 그 이름…….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를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도 기뻐서, 나는 애써 팔을 뻗어 그의 넓은 등을 끌어안고 활짝 웃었다.

“알았어요, 녹턴.”

그런 나를 본 녹턴은 내 머리카락을 끌어당겨 그 끝에 입을 맞췄다.

“라리아.”

머리카락 끝부터 입을 맞춘 그는 조금씩 입술을 위로 끌어당겼다. 키스 한 번에 이름 한 번씩. 그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몇 번이고 내 이름을 불렀다.

“라리아…….”

그렇게 몇 번을 불렀을까. 마침내, 머리카락을 타고 올라온 그의 입술이 다시 한번 내 입술 위에 닿았다.

입술이 포개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이번에야말로 그가 나를 영영 놓아주지 않기를 바라면서.

* * *

“저, 그래서…… 그렇게 됐어요.”

스스로도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떨리는 이 목소리는 나의 것이다.

찻잔을 들고 있는 손도 떨려서 찻잔 안의 붉은색 찻물이 자꾸만 흘러넘쳤다. 나는 들고 있던 찻잔을 은근슬쩍 소서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라니요?”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더없이 순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양심이 콱콱 찔려 왔다.

‘한 10년 치 양심통을 다 몰아 겪는 기분인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부 내가 스스로 불러온 재앙인 것을 누구를 탓하겠는가.

결국 나는 큰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저랑 전, 아니 녹턴, 정식으로 교제하기로 했어요.”

아이린은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아마 그새 이름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녹…… 턴? 아! 지난번에 소개시켜 주셨던, 그 남자분이요?”

“네.”

사실 아이린이 화를 내도, 욕을 해도, 심지어는 나를 때리고 찻상을 엎는대도 나는 전부 감수할 생각이었다.

운명적인 사랑의 상대를 소개시켜 준다더니, 자기가 직접 그 상대랑 사귀게 되다니! 이건 뭐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린 입장에선 놀아난 듯한 기분을 느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나름의 사정이 있긴 했지만 아이린은 모르니까. 아이린이 이해해 줘야 할 영역도 아니고.’

심지어 지난번 일 이후 녹턴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그가 아이린에게 꽤…… 무례를 끼친 것 같아서 더했다.

자신한테 막 대한 남자와 친구가 사귀게 되면 나라도 친구한테 꽤 화가 날 거다.

‘그 부분까지 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제대로 사과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겸허한 마음으로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이린은…….

“와아! 정말요? 셔우드 영애, 운명적인 사랑을 찾으신 건가요?!”

‘엥?’

정말이지 예상 밖의 말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혹시 비꼬는 게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고.

하나 아이린의 얼굴은 진심으로 가득했다.

심지어 그녀의 눈은 깊게 감명받은 듯이 반짝거렸고, 두 손은 깍지를 낀 채 가슴 앞에 모아쥐고 있었다.

“정말 축하드려요, 셔우드 영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영애라면 분명 운명의 사랑을 찾을 거라고! 그래서, 첫눈에 반하신 건가요? 종소리는 들으셨나요? 어쩜, 너무 낭만적이에요!”

‘에에엥?’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린은 양손으로 붉어진 볼을 감싸고 나보다 더 설레고 있었다.

“어쩜 좋아! 너무 잘 어울리셔요. 너어무 행복하시겠어요! 기분이 어떠세요, 영애? 첫사랑에 빠진 소감은? 정말로 사랑하시는 그분을 보면 뒤에 후광이 보이나요?”

정말이지 놀랍게도…… 아이린은 내가 걱정했던 것들은 하나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아이린은 이런 애였지. 정말 티 없이 순수하고 다정하며 타인의 일에 진심으로 기뻐해 줄 줄 아는.’

그녀는 내가 만든 여주인공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녹턴에 대해 잘 알듯이 아이린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순수하고 착하다고 해도 그녀도 사람이니만큼 이번 일에는 화를 낼 줄 알았다. 놀랍게도 그녀의 반응은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지만.

‘창조주인 나조차 몰랐던 아이린의 일면이라니…… 만든 사람이라고 그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아는 건 아니구나.’

하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그들은 더 이상 글자 몇 개로 이루어진 캐릭터 따위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너무나 복잡하고 다면적인 모습을 가진,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던 그런 ‘사람’.

‘하긴 그러고 보면 녹턴도 내 예상을 종종 벗어나곤 했지. 그중 제일 큰 건…… 역시 그가 아이린이 아닌 날 사랑한다는 거지만.’

괜한 생각을 했더니 또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는 헛기침을 해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애썼다.

“추…… 축하해 주셔서 감사해요.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첫눈에 반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어요. 종소리는…… 안 들린 것 같은데. 아닌가? 들렸나? 생각해 보니 들린 것 같기도 하고…….”

“꺄아악! 어쩜 좋아, 어쩜 좋아!”

아이린은 나보다 훨씬 붉어진 얼굴을 마구 흔들며 좋아했다.

“좀 더 이야기해 주세요! 어디서 처음 만났고 어떤 부분이 좋으셨던 거예요? 스킨십은 어디까지 하셨어요?”

“으음, 일자리를 얻으려고 블랙웰 대공저를 찾아갔을 때요. 그때 그분이 저를 직접 면접 보셨어요. 그냥, 녹턴은 처음부터 정말 근사했어요. 차갑지만 사실 다정함을 숨기고 있다는 것도 좋고, 솔직하지 못한 점도 귀엽고,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잘생겼으니까요. 스, 스킨십은…… 키, 키스…….”

“꺄아아! 키스라니!”

아니 잠깐, 내가 왜 이런 것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어느 순간 아이린의 페이스에 완전히 넘어가 버렸음을 깨달은 나는 아이린이 첫 키스 얘기를 해 달라고 조르기 전에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그가 케드릿사 영애에게 큰 무례를 끼쳤다고 들었어요. 정말 죄송해요. 어깨는 좀 괜찮으신가요?”

“아, 네! 다친 건 아니에요. 뭐,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보다 첫 키스 얘기 좀 해 주세요! 어떤 기분이었어요? 가슴이 막 두근두근 뛰고 설레셨나요?”

“당연히 엄청 좋았…… 아, 아니, 이게 아니라! ‘그럴 수도 있죠’라니, 그걸로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내가 묻자 아이린은 헤헤 웃었다.

“사실…… 저도 그때는 ‘뭐 이런 이상한 사람이 다 있어?’라고 생각하긴 했는데요. 그래서 막 화도 냈고 소리도 질렀거든요. 그치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다 그분이 셔우드 영애를 사랑해서 그러신 거잖아요? 그래서 막 쫓아 나가고! 꺄아악! 너무 낭만적이야!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뛰쳐나가다니~! 로맨스 소설 같아!”

“…….”

아이린……. 아이린은 지상에 강림한 천사임이 분명했다. 나는 속으로 감명의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이렇게 좋은 사람이 다 있담. 앞으로 더 잘해 줘야겠다.’

멋쩍어진 나는 뺨을 긁적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죄송해요. 아이린에게도 꼭…… 운명적인 사랑의 상대를 찾아 주고 싶었는데.”

“네? 셔우드 영애가 왜 죄송해요?”

내가 널 만든 원작자라서 그렇다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냥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괜찮아요! 저도 분명 진정한 사랑을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셔우드 영애를 보니 자신감이 생겼어요! 이 세상 어딘가에서 제 운명의 상대가 기다리고 있겠죠!”

아이린이 씩씩하게 말했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양심통은 여전히 끝나지 않고 가슴 속을 죄였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아이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일어나서 내 옆자리에 왔다. 그녀가 말했다.

“셔우드 영애, 뭐 고민이라도 있어요? 그분이랑 싸우셨어요?”

“아,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나는 일부러 웃어 보였다. 하지만 아이린은 조금도 믿지 않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녀는 나를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셔우드 영애, 저 사실은 알고 있어요.”

“네, 네? 뭐, 뭐를요?”

제 발 저린 내가 움찔 놀라며 물었다. 하지만 아이린은 더없이 사랑스럽게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영애가 절 위해 엄청 노력해 주셨다는 거요.”

“…….”

“절 위해 제국 이야기도 엄청 많이 해 주시고, 외롭고 혼자인 제 곁에 늘 같이 있어 주시고, 제가 아이들 보고 싶다고 하니까 공녀님과 공자님도 보여 주시고, 심지어 미남도 보여 주셨잖아요. 셔우드 영애는 엄청 바쁜 사람인데도요. 일부러 절 위해서.”

그리고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런 게 아니었는데.’

사실 내가 그녀에게 잘해 준 것은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녹턴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그녀와 이어 주려 했고, 또 녹턴의 광증을 치료하기 위해 그녀에게서 정보를 얻어 내려 했을 뿐이다.

죄책감이 가슴 속을 콕콕 찔렀다.

눈앞에서 아이린의 새하얀 속눈썹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코끝에 훅하고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가 끼쳐 왔다.

그녀가 소곤거렸다.

“솔직히 혼자 제국에 와서 외로웠는데요, 영애 덕에 더 이상 외롭지 않았어요. 영애는 제 인생의 첫 친구예요. 영애랑 친구가 되어서 전 너무 기뻐요.”

‘아이린은…… 친구가 갖고 싶었구나.’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아이린은 외로운 삶을 살아왔다. 평생을 대신전에 갇힌 채로, 차기 성녀로서 대륙을 구원해야 한다는 너무나도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살았다.

주위에 사람이라곤 나이대도 맞지 않는 신관들뿐.

진심 어린 마음을 나눌 사람 하나 없는 채로 살아온 그녀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아이’나 ‘사랑’ 같은 것이 아니라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며, 고민과 행복을 나눌 그런 친구.

‘왜 여태까지 몰랐을까?’

녹턴과는 훨씬 오래 함께 지냈기에 그가 몇 줄의 텍스트 따위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이린은 달랐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녀의 진심에 신경 쓰기엔 내 모든 정신은 녹턴에게 쏠려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이린 역시 사람이었다. ‘방정맞다’, ‘순수하다’ 따위의 설정 몇 개가 합쳐진 글자의 조합이 아닌, 사람.

그 사실을 깨닫자, 그녀를 녹턴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한 도구로 쓰려고 했던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녀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아이린은 내 손으로 만든 여주인공이자, 너무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내 친구인데.

나는 내게 기댄 아이린의 하얀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저도 그래요, 영애. 케드릿사 영애가 제 친구가 되어 주어서 기뻐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친한 친구로 지내고 싶어요.”

“에헤헤.”

아이린은 기쁜 듯이 웃고는 몸을 일으켜 나를 돌아보았다.

“너무 낭만적이지 않나요? 다른 나라에서 만난 첫 친구라니……! 이게 운명이 아니라면 뭘까요?”

그녀는 내 손을 끌어당겨 꼬옥 잡았다. 그녀의 눈이 별이라도 박아넣은 것처럼 반짝였다.

“우리 이제 이름 부를래요?”

“네?”

“친구인데 언제까지나 영애라고 부를 순 없잖아요. 이제 이름으로 불러요, 우리.”

나는 활짝 웃었다.

“좋아요, 아이린!”

“꺄아, 기뻐라! 우린 이제 평생 친구인 거예요, 라리아! 약속!”

그녀는 내 손을 붙잡아 당겨 새끼손가락도 걸고 도장도 찍고 사인도 했다.

“라리아, 사실 저 그동안 말 안 한 것이 있어요. 친구니까 비밀 지켜 줄 거죠?”

올 것이 왔구나!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됐지만, 최대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물론이죠. 비밀 꼭 지킬게요.”

“사실 저는 성국에서 온 성녀예요. 작년에 임명되었고, 내년 봄에 있을 성 레온하르트 기념제가 제 성녀로서의 첫 공식 일정이에요.”

아이린은 내 손을 꼭 잡은 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신분이 온 대륙에 공개되면 더 이상 자유롭게 지낼 수 없으니까 그 전에 마지막 자유를 누리기 위해 제국에 왔어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었던 내용이다.

그야, 그 성 레온하르트 기념제가 원작의 프롤로그니까.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 놀라는 척을 했다.

“아이린이 성녀님이시라고요?! 그동안의 무례에 사죄드려요.”

“아니에요! 제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라리아가 여태까지 대했던 것처럼 절 대해 주세요. 전 성녀이기 이전에 아이린이에요. 제 말 이해하시죠?”

아이린이 나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아이린.”

“헤헤, 라리아한테는 꼭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아, 속 시원하다.”

들뜬 아이린은 내게 이것저것 더 말해 주었다. 아주 엄격하고 숨 쉴 틈 없이 빡빡한 대신전에서의 생활이라든가, 임명식의 일이라든가, 성녀로서 가진 힘에 대해서.

“신성력을 쓸 수 있으시다고요?”

“네! 제가 호위 기사 한 명 없이 제국에 올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에요. 물론 대신관님은 호위 기사를 같이 보내고 싶어 하셨지만…… 제가 엄청 졸랐거든요. 꼭 혼자 가고 싶다고.”

그중에는 내가 아는 이야기도 있었고 모르는 이야기도 있었다.

뭐, 지름작이니까. 소설 내용에서 필요하지 않은 부분은 처음부터 설정을 해 두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아이린이 자신이 성녀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 것이 무척 고마웠다.

그녀가 비공식적으로 제국에 방문한 성녀라는 것은 굉장히 비밀 정보인데, 그런 사실을 가르쳐 줄 만큼이나 나를 믿고 있다는 것이니까.

나는 아이린의 손을 꼭 마주 잡고 말했다.

“저를 믿고 중요한 사실을 말해 주어 고마워요, 아이린.”

“에헤헤, 뭘요. 친구니까 당연한 거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린의 얼굴에는 티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빛나는 얼굴에서 묻어나는 것은 나에 대한 굳은 애정과 믿음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자 마음속에서 애정이 절로 솟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앞으로는 그녀의 우정에 진심으로 보답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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