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 * *
어쨌거나 이번 일로 녹턴은 깨달은 것이 있었다.
바로 자신이 라리아와 제4 황자가 가짜 데이트를 하는 모습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한 번 지켜본 것만으로도 그렇게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라리아를 힘들게 했는데, 그런 일을 두 번 이상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고.’
아직도 눈앞에는 그날 그녀의 모습이 선명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의연하려고 애쓰는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모습. 하지만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그 청록빛 눈에 눈물을 한가득 머금고 있던…….
더군다나 ‘진실을 보는 눈’에 비친 그녀는, 너무나 괴로워 보였다. 그녀의 환상적인 색채는 어울리지 않는 짙은 안개를 두른 채 고통에 점멸했다.
그 모습은 너무나 애처로워서, 녹턴은 그녀를 안아 주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그 모습에 녹턴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반적으로 관심이 아예 없는 사람은 고백을 거절할 때 울거나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으니까.
‘대체 왜 나를 거부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거절당한 것은 괴로웠지만, 이해는 됐다.
광증을 가지고 있는 그는 자신이 주변 사람들을 해칠까 봐 늘 두려워했다.
지금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사랑하고 그렇기에 곁에 두고 싶지만 사랑하기에 곁에 두는 것이 두렵다. 자신이 언젠가 그녀를 해치게 될까 봐.
지난번과 같은 일이 다시 한번 반복될까 봐. 그리고 그때는 운 좋게 끝나지 않을까 봐.
그런 사정이 있는 녹턴으로서는 라리아에게도 비슷한 사정이 있겠거니 어림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사정은…… 그녀의 정체와 관련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 그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진실을 보는 눈에 보이는 그녀의 색채는 결코 이 세상의 평범한 인간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애초에 그것은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색상이니까.
지금은 그녀에게 흠뻑 빠져서 그녀의 정체가 신이든 괴물이든 다른 세상의 존재든 놀라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지만, 그 역시 처음에는 그 색채 때문에 놀랐고 그녀에게 경계심을 품었다.
‘혹시 자신의 정체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건가? 내가 그녀의 진정한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
그렇게 생각하면 답답하기도 하고, 혼자 고민하고 있을 그녀가 안쓰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먼저 ‘사실 네가 평범한 인간이 아닌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녀가 먼저 말해 주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먼저 그녀의 정체에 대해 입에 담지 않으리라.
어쨌거나, 그것은 그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 지금 그가 신경을 써야만 하는 것은…….
‘제4 황자 놈과 라리아가 독대를 하지 않으면서 감시꾼 놈들의 눈을 속이는 것.’
바로 그때, 그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제4 황자와 라리아가 데이트를 하게 두지 않으면서 감시꾼들의 눈을 아주 완벽하게 속이는 방법.
다른 사람이라면 불가능하겠지만, 블랙웰의 주인인 데다 황가와 거의 동등한 권력을 가진 대공인 그에게는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는 입꼬리를 보일 듯 말 듯 끌어 올렸다.
* * *
그런 일이 있은 뒤로 며칠 뒤.
황제의 어명을 받아 황자 하인리히의 동향을 살피는 감시꾼은 그가 예의 그 카페에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황자가 셔우드 영애와 만나는 날이로군. 그, 블랙웰 대공의 약혼녀라고 했던가.’
하인리히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그의 24시간, 만나는 사람, 나누는 대화, 심지어 그가 주고받는 편지까지 모든 것이 감시당하고 있었다.
행여 도망치거나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은 꿈에도 꾸지 못하도록 말이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삶을 감시하고 그의 자유를 빼앗는 행위에 죄책감을 느꼈지만, 그것도 몇 년 지나니 어느샌가 죄책감에도 굳은살이 자라났다.
감시꾼에게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고,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지시를 잘 따르는지 감시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
감시꾼은 하인리히의 뒤를 쫓아 카페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황자와 그 불륜 상대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 라리아. 당신의 그 눈은 그 어느 보석보다도 값질 것 같군요. 제국 최고의 보물이라는 대양의 눈물조차 그대의 눈에 비견하지는 못할 거요.”
“어머나, 당신도 참. 허풍이 너무 심하시군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위대하신 여신조차 그대의 미모에는 질투를 감추지 못할 겁니다. 그대와 같은 여인을 손에 넣은 나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행운아라고 할 수 있죠.”
“아이, 몰라요! 더 해 주세요!”
낯부끄러운 말들을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저 남자가 내가 알던 그 하인리히 황자가 맞나?
그가 아는 하인리히 황자는 숫기가 없고 정중한 편이었다. 최소한 저런 창피한 말을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줄줄줄 쏟아 낼 사람은 아니었단 말이다.
당황스러움을 느낀 감시꾼은 상대들의 모습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하지만 아무리 관찰해도 틀림없었다. 그들은 분명 황자 하인리히이며, 셔우드 영애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하인리히를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으니까.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더니 그 황자 하인리히와 셔우드 영애가 저럴 줄은 몰랐군.’
감시꾼은 당혹스러움을 애써 숨기며 매서운 눈으로 닭살 커플을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닭살 커플은 한 시간 정도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자리를 떠났다.
주변을 살펴보자, 그들을 지켜보는 자신 외의 5명의 동료들 역시 그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감시꾼은 더 고민하지 않고 그들을 따라 카페를 떠났다.
한편.
“마지막 한 놈이 이곳을 떠났군.”
어떻게 된 일인지 하인리히와 라리아는 여전히 카페의 구석에 앉아 있었다.
심지어, 녹턴마저도!
그는 라리아의 옆자리에서 등받이에 등을 길게 기댄 채 앉아 있었다.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막 떠난 남자의 뒷모습을 흘끗 보곤 말했다.
“이제 이 카페에 감시꾼은 없다.”
“정말 신기하군요.”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 몰랐어요!”
하인리히와 라리아가 진심을 담아 감탄하자 녹턴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 픽 웃었다.
그가 한 일은 간단했다. 바로 환상 마법사를 고용한 것이다.
마탑의 마법사는 그 노동력을 빌리려면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귀중한 인재이기도 했고, 하인리히는 편지까지 모든 외부와의 접촉을 감시당하고 있었으니 직접 마법사를 고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부와 권력이라면 넘칠 정도로 가지고 있으며, 황제의 감시 정돈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녹턴이라면 가능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은 감시꾼 전원을 찾아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녹턴이라면 가능하니 누구를 대상으로 해야 할지 좌표 설정도 어렵지 않았다.
그는 마법사를 고용해서 6명의 감시꾼 전원에게 환상 마법을 걸도록 했다.
이제 그들은 진짜 하인리히와 라리아가 눈앞에 있는데도 보지 못하고, 가짜 하인리히와 가짜 라리아를 쫓아다니며 시간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혹시 마법사들이 실수를 했으면 어떻게 하죠? 저나 황자 전하의 사소한 디테일을 구현하지 못해서 발각되기라도 하면…….”
라리아가 물었다. 그녀는 몸에 있는 아주 작은 점이나 흉터 같은 것들을 간과해서 사실이 발각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그건 걱정할 것 없다. 감시꾼 놈들이 보는 환상은 술사가 직접 빚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 형태는 표적의 상상을 덧씌워 만들어 내니, 결코 감시꾼들이 눈치챌 일은 없을 거다.”
녹턴의 설명에 라리아는 그제야 이해했다.
즉, 환상의 형태는 3D 렌더링하듯 마법사가 직접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표적이 상상하는 상대의 모습이 반영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표적이 생각하는 하인리히와 라리아에게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을 테니 결코 들키지 않으리라.
“어쨌든,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반갑습니다, 대공. 제4 황자, 하인리히 브레히트입니다.”
하인리히가 먼저 살갑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녹턴은 그런 황자를 흘끗 보더니, 마지못해 그 손을 잡았다.
“……녹턴 블랙웰.”
그가 예의에 어긋날 정도로 짧게 말했다.
푸른빛과 자색빛, 허공에서 두 남자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그저 마주 보았을 뿐이지만 그 시선과 시선의 부딪침 속에서는 정전기와 같은 파장이 일었다.
그 사실을 모른 척하며 하인리히가 말했다.
“대공께서 이리 직접 협력해 주신다고 하니 그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녹턴이 딱딱하게 말했다.
“더군다나 그 녀석에게는 내게도 갚아야 할 빚이 있지.”
‘그 녀석’. 그가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는 라리아도, 하인리히도 깨달았다.
그는 바로 제국의 황제, 귄터 브레히트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대공이라고 하지만 황제를 ‘그 녀석’이라고 부르다니……. 이거 이래도 되는 건가? 황실 모독죄 뭐 그런 거 아닌가?’
라리아는 가슴이 조마조마했지만 그녀 외에는 아무도 그 호칭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인리히는 진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러시다면 다행입니다. 안 그래도 제가 대공께 갚을 방법이 과연 있기나 할지 걱정되던 참이었거든요.”
“그럼, 이제 잡담은 그만두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의자에 기대앉은 녹턴이 주의를 환기했다. 그의 자색 시선은 곧 라리아의 얼굴로 향했다.
지난번 그에게 고백을 받은 뒤로 그의 시선만 닿으면 괜히 쑥스러워지는 라리아는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녹턴은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보다가, 내뱉었다.
“영애의 계획에 대해서, 말이지.”
* * *
그렇게 세 사람은 계획에 대해 몇 번 이야기를 나누었고, 논의를 거칠수록 계획은 점점 구체화되고 선명해져 갔다.
한편, 그러한 상황을 꿈에도 꾸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황제 귄터였다.
「H와 L. S. 오늘도 만남. 5시간 소요.
점점 서로에게 쓰는 시간이 길어짐. 관계가 깊어져 가는 걸로 보임.」
감시꾼들이 보낸 전보를 확인한 귄터는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집무실 의자에 몸을 묻었다.
“온갖 언론이 입을 모아 말하던 블랙웰의 진정한 사랑도 별거 아니었군.”
고작 자신의 동생 따위의 유혹에 이렇게 쉽게 넘어오는 진정한 사랑이라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물론 보고는 감시꾼들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인리히를 통해서 들어오는 보고 역시도 언제나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그는 라리아가 직접 쓴, 밀어가 가득한 사랑의 편지나 영상구 등을 가져왔고 그것은 귄터의 자물쇠 달린 책상 서랍에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녹턴 블랙웰의 완벽한 약혼녀가 약혼자에 대한 정절을 저버리고 새로운 사랑에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너무나 즐거운 일이었다.
이후 녹턴 블랙웰이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를 상상하면 더욱더.
“블랙웰, 너도 이만하면 삶의 고난이란 것을 겪어 볼 때가 됐지. 그동안 모든 게 제 마음대로 되었으니 인생이 얼마나 만만했겠어?”
입가엔 미소를 띤 채 귄터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증거물들이 모이고 하인리히와 라리아의 관계가 충분히 깊어졌다는 확신이 들자, 귄터는 녹턴을 황궁의 응접실로 불러냈다.
“무슨 일이십니까.”
건방진 블랙웰은 오늘도 자신을 깔보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 자신의 앞에 어떤 진실이 들이밀어질지는 꿈도 꾸지 못한 채.
그 증오스러운 자색 눈동자를 보면서 귄터는 생각했다.
‘저 오만한 얼굴이 곧 어떤 절망으로 무너질지 기대되는군.’
“아, 내 친구 녹턴. 다름이 아니고, 굉장히 유감스러운 소식을 들어서 말이야. 자네를 생각하는 친우로서 이 소문을 자네도 알고 있는지 걱정이 되어서 불렀다네.”
“무슨 소식 말입니까?”
녹턴의 평이한 목소리에 귄터는 그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확신했다.
“오, 이런…… 안쓰러운 내 친구. 아무래도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나 보군.”
귄터는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감췄다.
그를 향한 악심과 가학적인 즐거움이 넘쳐나서 애써 감정을 숨긴 얼굴에 비쳐 보일 것만 같았다. 곧이어 그가 보일 절망에 일그러진 얼굴을 상상하면 희열에 가슴이 떨렸다.
귄터는 시종을 불러, 미리 준비해 둔 것을 가져오게 했다.
곧 시종은 비단 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귄터가 불길한 붉은색으로 감싸인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편지와 영상구 같은 것이 가득했다.
귄터는 그중 편지 하나를 꺼내 녹턴에게 보여 주었다.
“이걸 보게. 약혼녀의 필적쯤, 자네라면 알 수 있겠지?”
편지봉투는 연분홍색이었으며, 그 안에 있는 편지지에는 진홍색에 흰색 잉크로 자잘한 글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편지지에서는 달콤한 향수 냄새가 났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것이 사랑의 편지임을 익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바로, 라리아 셔우드가 자신의 동생 하인리히를 생각하며 쓴 연서였다.
그 내용는 어찌나 애절하고 낯부끄러운지, 일반적인 귀족 영애라면 수치스러워 입에 담지 못할 정도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까지 적혀 있었다.
귄터는 일찍이 필적 감정사를 불러 이것이 라리아 셔우드가 쓴 편지가 맞다는 사실을 검증해 놓기까지 했다.
치밀하고 빈틈이라곤 없는 계략이었다.
“자네의 약혼녀는 편지를 한두 통도 아니고 굉장히 많이 주고받은 것 같네. 더군다나 편지뿐만이 아닐세. 보게, 이 영상구에는 자네의 약혼녀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밀회가 낱낱이 찍혀 있다네. 나는 이 증거를 자네를 위해 거금을 들여 입수했지.”
귄터가 영상구 몇 개를 재생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영상구의 안에는 라리아 셔우드와 하인리히가 단둘이 만남을 가지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찍혀 있었다.
걱정을 가장해 굉장한 충격을 줄 수 있을 만한 증거물을 한꺼번에 들이밀며 귄터는 환희에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자, 어떠냐, 블랙웰? 그렇게 싸고도는 약혼녀의 비행 증거를 본 소감이?’
누구든 간에 사랑하는 약혼자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증거를 본다면 그 마음의 상처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욱 그럴 것이고.
아무리 녹턴 블랙웰이라고 해도 이 사실에서 자유로울 리가 없으리라. 그는 큰 정신적 충격을 받고 이 약혼을 당장 파혼하고 약혼녀를 내쫓을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좋아 죽던 약혼녀를 제 손으로 때리거나 죽일 수도 있겠지. 제 아비도 죽인 패륜아인데, 약혼녀한테 그 정도도 못 할까.’
그것이 귄터에게는 최고의 결과였다. 녹턴 블랙웰이 약혼녀를 제 손으로 죽이면 셔우드 백작가가 가만있지 않을 테고, 그의 평판도 땅에 떨어질 테니.
이때 백작가와 황실이 연합하면, 운이 좋으면 녹턴 블랙웰을 감옥에 처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타락한 친구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현군을 연기하면서 말이다.
‘자, 어서! 어서 분노해라, 블랙웰! 참지 말고, 어서……!’
귄터의 뚫어질 듯 강렬한, 기대감이 얽힌 시선 앞에서 녹턴은 편지와 영상구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안타깝군요.”
뭐라고? 귄터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리도 싸고돌던 약혼녀의 명백한 비행 사실에 보일 감상이 고작 이 정도란 말인가?
‘아직 상황이 완전히 파악되지 않아서 그런가 보군. 충격이 너무 강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거야.’
그렇게 생각한 귄터는 그에 말에 거들었다.
“그래, 정말 안타까운 노릇이지. 그 음전하고 점잖은 셔우드 영애가 설마 이런 짓을 할 줄이야……. 아무리 약혼 상태라고 하지만 간통은 큰 죄지. 안 그런가?”
애가 탄 귄터는 심지어 귀족들이라면 결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을 노골적인 단어까지 입에 담았다.
하지만, 그의 그런 노력은 조금도 빛을 보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녹턴의 손안에서 노란 불빛이 번쩍였다.
귄터가 채 어찌하지도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비단 상자에 불이 붙었다. 화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 탄내가 코끝을 스쳤다.
어 하는 순간, 거대한 오렌지빛 불이 상자와 그 안에 들어 있던 것들을 살라 먹고 있었다.
“이런 것도 증거물이랍시고 기대에 부풀어 있었을 폐하의 처지가 말입니다.”
녹턴의 하얀 얼굴이 불의 오렌지빛을 받아 반짝였다. 비뚤게 웃고 있는 그의 손안에 들려 있는 것은 은색 라이터였다.
귄터에게는 유감이지만 그의 수는 진작에 읽힌 지 오래였다.
그가 가지고 있던 증거물들은 전부 조작된 것이었다. 그를 속여, 자신의 계획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인리히는 뒤에서는 라리아와 녹턴에게 협력하면서 귄터에게는 조작된 증거물을 꾸준히 가져다주었다.
라리아가 쓴 연서로 보였던 편지는 전부 필체 전문가가 그녀의 필적을 흉내 내어 쓴 것이었다.
내용만 거짓으로 라리아가 직접 쓸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은 녹턴이 거짓된 내용이라도 라리아가 다른 남자에게 연서를 쓰는 것을 결코 두고 볼 수가 없어서였다.
영상구에 찍힌 것도 물론 닮은 사람을 구해 와서 찍은 대역 영상이었다. 영상구의 영상이 그리 선명하지 않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자신의 계략이 녹턴과 라리아에게 완전히 들켰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귄터는 그들이 쥐여 준 조작 증거물을 가지고 희희낙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귄터는,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의 예상과 반대로, 절망 속에서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사람은 녹턴이 아니라 바로 그였던 것이다.
‘블랙웰, 이 자식……! 이 찢어 죽일 놈의 자식이……!’
* * *
한편, 귄터와 녹턴이 황궁에서 독대하던 바로 그 순간.
하인리히는 초조한 듯 회중시계를 꺼내 보았다.
‘지금쯤이면 시간이 되었을 텐데…….’
하인리히는 시내에 홀로 서 있었다. 되도록 많은 목격자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정확히 미리 약속했던 시간이 된 그 순간.
히히히힝!
거칠게 모는 검은 마차가 시내 한복판에 나타났다. 그리고 마차에서 검은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린 괴한들이 우르르 내렸다.
누가 봐도 수상하고 위험해 보이는 그자들은 당황해 술렁이는 다른 사람들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어이! 좋은 말 할 때 따라와라.”
“저항하면 목숨은 없을 줄 알아라!”
괴한들은 거친 손길로 하인리히를 잡아당겨 마차에 태웠다. 누가 봐도 납치의 현장이었다.
“아니, 저게 대체 무슨!”
귄터의 명을 받아 하인리히를 몰래 따라다니던 감시꾼들은 경악했다.
하지만 채 그들이 방법을 취하기도 전에…….
“크윽!”
“어억!”
서로에게 연통을 넣을 틈조차 없이 감시꾼들은 자객의 손에 절명했다.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는 그들을 소리소문없이 제거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인리히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시내의 시민들은 술렁였다.
“세상에, 저게 뭐야?”
“치안 관리대를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쉿! 괜히 불똥 튈라.”
이런 인상착의를 가진 남자가 시내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당했다는 소문은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대로에서 이렇게 대놓고 귀족을 납치하는 사건은 드문 일이었기에 소문은 아주 빠른 속도로 퍼졌고, 곧이어 단 반나절 만에 수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 역시 당연히 라리아의 계획의 일부였다.
녹턴이 떠난 직후, 분노와 절망 속에서 응접실에 홀로 앉아 있던 귄터에게 불행한 소식이 닿았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심복이 다급하게 달려와 그의 발밑에 엎드리며 말했다.
“폐, 폐, 폐하! 아,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제4 황자가 나, 납치를 당했다고 하옵니다.”
“뭐, 뭐라고? 지금 납치라고 했느냐?! 감시꾼들은 대체 뭘 한 거냐!”
“가, 감시꾼들은 전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고 하옵니다. 이건 제4 황자를 노린 계획적인 범행임이 분명합니다!”
라리아와 녹턴, 하인리히는 귄터를 방심시킨 동안 하인리히를 도망치게 할 계획을 세웠다.
그를 납치해서 귄터의 손이 닿지 않는 안전한 장소로 보내는 것이다.
하인리히는 블랙웰 대공국의 눈에 띄지 않는 소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귄터는 이 모든 일들이 녹턴의 짓임을 직감했다.
사실은 라리아가 계획하고 녹턴이 행한 일들이지만 귄터는 채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자신의 적수는 오로지 녹턴 블랙웰뿐이고, 약혼녀는 남자의 능력과 권위를 상징하는 트로피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았으니까.
귄터는 목뒤가 찢어질 듯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혈관마다 울컥울컥 뜨거운 피가 역류했으며, 뱃속에서는 불꽃이 치솟는 것만 같았다.
뱃속부터 시작해 전신이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귄터는 피를 토할 듯이 소리쳤다.
“블랙웰, 이 망할 자식! 이런…… 야비하고 비겁한 개놈의 자식이!”
어째서 자신이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태어난 뒤로 자신의 계획이란 계획은 모두 그에게 저지당하기만 했다.
자신의 삶은 녹턴 블랙웰, 그가 망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격노와 복수심이 전신을 찢었다. 피눈물이라도 쏟을 것만 같은 원한 속에서 귄터는 부르짖었다.
“내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전신의 내장과 가죽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이라는 것을 알려 주겠다!”
한편, 시간을 조금만 돌려서. 하인리히가 납치되던 바로 그 순간에는.
하인리히는 자신이 괴한들에 의해 납치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녹턴과 라리아와 상의를 했으니 당연했다.
딱히 저항을 할 생각조차 없었다. 녹턴이 보낸 괴한이 나타나면 자신은 순순히 잡혀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괴한들의 손이 우르르 뻗어져 나와 그의 어깨와 팔을 틀어쥐었다.
‘생각보다 너무 거친 것 같은데……?’
그 손이 어찌나 거친지, 어깨가 비틀려 떨어져 나갈 듯이 아팠다. 코트에서는 부욱 하고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심지어 한 손은 그의 머리끄덩이까지 잡았다.
하인리히는 당황스러웠지만 꾹 참았다.
‘현실적인 납치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너무 심하군. 그 블랙웰 대공이니까 뭔가 이유가 있겠지.’
확실히 이유가 있긴 했다. 바로 녹턴의 하인리히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 말이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설마 그 ‘녹턴 블랙웰 대공’이 약혼녀와 데이트를 하고 손도 잡았다는 이유로 머리끄덩이를 잡을 정도로 쪼잔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 * *
그렇게 해서, 녹턴과 나의 관계를 파탄 내려는 황제의 계략은 파훼되고, 하인리히도 안전한 대공국으로 망명했다.
‘하인리히는 황제의 말대로 하는 꼭두각시의 삶을 벗어나 행복하게 살 수 있겠지? 정말 다행이야.’
그가 자유를 찾았고 모든 게 잘 해결되어 기뻤지만, 다만 걱정되는 것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황제가 한번 악행을 시작했으니, 앞으로 또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어.’
원작자인 나는 악행을 저지당한 황제가 그 길로 단념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녹턴에 대한 원한은 아주 오래 묵은 것이기에, 분명 앞으로도 온갖 계책을 사용해 녹턴을 방해하리라.
‘다음에는 황제가 어떻게 나올까? 그걸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원작에서는 하인리히를 이용해 여주인공을 유혹하려는 그의 계획이 이렇게 대놓고 저지되지 않는다.
이미 상황은 원작과 다른 흐름을 탔다. 앞으로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리 원작자라고 해도 알 수가 없었다.
‘뭐, 알 방법 없는 걸로 고민하지 말자. 일단은 지금까지 그래 왔듯 황제를 경계하고 되도록 그에게 접근하지 않는 걸로…….’
그렇게 생각한 나는 평소와 같이 지내기로 했다.
지내려고 했다.
녹턴이 갑자기 내게 찾아와서, 지금 당장 외출 준비를 하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네? 가, 갑자기 외출 준비요?”
“그래.”
그렇게 말하는 녹턴은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멋들어진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영락없이 지금 당장에라도 외출할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생각도 못 한 말이라 당황한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물었다.
“실례지만 외출이라니, 갑자기 무슨 일이신지…….”
“약혼한 사이의 남녀가 함께 외출하는 데 이유까지 필요한가?”
그의 뻔뻔한 대답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맞는 말이긴 한데, 우리가 한 약혼은 가짜 약혼이잖아!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사실 그와 함께 외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솔직하게 내 사정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저는 오늘의 업무를 해야 하는걸요. 공녀님과 공자님이 절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그건 걱정 마라. 오늘 하루 동안 하녀 4명을 공녀와 공자에게 추가 배정해 두었다. 영애는 오늘 휴가다.”
아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요!
당사자의 의사도 묻지 않고 강제 휴가라니!
나는 이전부터 느껴 왔던 녹턴의 지나친 행동력을 새삼 체감했다.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되니 나로선 도저히 거절할 방도가 없었다. 나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가 내 고용주라는 사실은 꽤 정확히 자각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서둘러 외출할 준비를 한 뒤 그의 손에 이끌려 대공저를 나섰다.
* * *
녹턴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모른다.
라리아와 무도회에 참가했을 때에는 둘만의 시간을 충분히 보내지 못해서 조만간 단둘이 외출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라리아와 외출을 채 하기도 전에 제4 황자라는 놈이 먼저 그녀와 데이트를 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녹턴으로서는 못내 불쾌하고 신경이 쓰였다.
최대한 빨리 그녀와 데이트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녹턴은, 중요한 일들이 마무리되자마자 라리아의 일정이 없는 날을 골랐다.
단순히 그녀와 데이트를 하고 싶었던 것도 있지만, 가능하면 이 기회에 완전히 열리지 않은 그녀의 마음을 열고 싶었다.
그녀가 대체 무슨 고민을 하는 건지, 어째서 자신을 받아 주지 않는 건지 알아내고 싶었다.
이번 외출을 준비하면서 그는 자신이 생각 외로 그녀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 외에도 그는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즐기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이 간질간질했다. 무미 무취 무채색뿐이었던 그의 삶 속에 이런 맹목적인 열정이 나타난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마차가 움직이는 내내 녹턴은 시트에 등을 기댄 채 창밖을 보는 라리아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하얀 얼굴에 웃음을 띄워 주고 싶었다. 그녀에겐 다른 어떤 표정보다 그것이 어울리니까.
“도착했습니다.”
어느 순간 마차의 움직임이 멈췄다. 녹턴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리지.”
그는 먼저 마차에서 내린 뒤 라리아에게 손을 뻗었다. 라리아는 조심스레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미술관이었다.
라리아의 취향에 대해 잘 모르는 녹턴이 준비한 이번 데이트의 컨셉은 그거였다. ‘네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다 준비해 봤어’.
그냥, 그녀와 함께 최대한 이것저것 해서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낼 예정이었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신전처럼 새하얀 대리석으로 벽과 기둥을 세운 미술관의 내부는 장엄하고 고요했다.
흰 벽에 장식된 유화 그림과 대리석 조각상들의 자태는 그것만으로도 고전적이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라리아는 원래 유아 미술이 아닌 고전 미술에는 크게 조예가 없었을뿐더러, 특히 이곳의 조형물들의 테마가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으니 더더욱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음, 아마 종교화…… 같긴 한데.’
하지만 이곳 제국의 종교는 라리아가 알고 있던 전생 세계의 종교와는 사뭇 달랐다.
‘제국의 국교는 성국을 중심지로 한 여신교였지. 유일신이자 만물의 어머니인 여신이 세계를 다스린다고 하는…… 하지만 그것 외에는 설정을 짜 두질 않아서.’
이러니저러니 해도 원작은 지름작이었으니까. 종교의 자세한 내용까지는 짜 두지 않았었다.
유화를 앞에 두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라리아는 등 뒤로 다가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넓은 어깨 위에 코트를 걸친 녹턴은 건조한 눈빛으로 그녀가 보던 그림을 훑어보았다.
“성녀 아그네스의 이적이군. 뭐, 나쁘지 않아.”
라리아는 그의 말에 무언가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아, 세인트 아그네스 광장의 그 아그네스요?”
아이들과 함께 분수 쇼를 보러 갔다가 셔우드의 사람들과 재회했던 그 세인트 아그네스 광장.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인 것 같다 싶더라니, 광장 이름에 쓰인 그 성자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녹턴은 그런 라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몰랐나?”
라리아는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인 중 성녀 아그네스를 못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하여간에 이 여자는, 어떤 분야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전문성을 보여 주면서도 어떤 분야에서는 제국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지했다.
‘그 사실을 제일 먼저 안 사람이 나라는 게 다행이군.’
그에게야 라리아가 성녀 아그네스를 알든 말든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아닐 테니까 말이다.
어떤 사유든 간에 다른 이들이 그녀의 한 부분만 보고 그녀를 얕잡아보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만일 그런 일이 생기면 녹턴은 결코 상대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녹턴은 신을 믿지 않았고, 미술을 즐기지도 않았지만 교양으로서의 종교와 미술에 대한 지식은 있었다.
그는 라리아의 비어 있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라리아는 흠칫 놀라기는 했지만 그것을 피하거나 쳐내지는 않았다.
녹턴이 자신의 품에 있는 라리아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잘 들어라, 영애. 성녀 아그네스는 빈민과 아이들, 병자와 노인의 수호자다. 이 그림은 그녀의 제일 유명한 이적을 묘사한 것인데…….”
라리아는 녹턴이 갑작스럽게 자신의 어깨를 감싸 쥐자 상당히 놀랐다. 그의 넓고 따뜻한 손바닥의 감촉에 조금씩 익숙해지자, 차차 그의 설명이 귀에 들어왔다.
녹턴은 그림과 조각상을 알아보지 못하는 라리아에게 설명을 해 주고 있었다. 미술품이 종교 속의 어떤 인물, 어떤 일화를 묘사한 것인지.
“봐라, 영애. 여기 녹색 물감이 여러 번 덧칠된 부분이 보이나? 이것은 로코포스 기법이라는 건데…….”
“참고로 여기 쓰인 푸른 물감은 청금석을 갈아 넣은 것이다. 1kg에 6000테트는 가볍게 뛰어넘지.”
“이 조각상을 만든 예술가는…… 그래서 이 천의 묘사를 보면…….”
심지어는 예술가나 예술 기법, 재료에 대한 설명까지 녹턴은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그의 따뜻한 품 안에서, 짐승처럼 낮고 관능적인 목소리로 설명을 듣는 일은…… 정말 굉장한 기분이었다. 몸과 눈과 귀가 다 행복해서 녹아 버릴 지경이었으니까.
라리아는 조각상에 대해 설명하는 녹턴의 옆얼굴을 올려다보다가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이며 생각했다.
‘세상에, 처음부터 내 취향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인간적으로 너무 멋있는 거 아냐?’
게다가 그의 상세하고 정확한 설명을 들으며 미술품을 관람하는 것은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라리아는 전혀 다른 것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눈앞에 제국은 물론 대륙 전체에 영향을 끼친 신화의 세계가 펼쳐진 듯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들어갈 때와 달리, 함께 미술관에서 나올 때 라리아는 한껏 들떠 있었다.
“정말 즐거웠어요, 전하! 이 미술품들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미술관에 와 본 건 처음인데 정말 재미있는 곳이군요.”
녹턴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흐뭇함을 숨길 수 없었다.
그동안 온갖 칭찬과 찬사를 수도 없이 들어왔고, 그때마다 별다른 느낌이 없었는데…… 어째서 그녀가 하는 말은 그렇게 기분이 좋은 것인지.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오르내리는 자신의 기분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들뜬 표정을 숨기려 애써 먼 곳을 보는 척하며 말했다.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그럼요! 전하, 설명도 정말 잘하시던걸요. 최고의 가이드였어요!”
녹턴은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꾹꾹 눌러 내렸다. 그는 라리아를 조금 더 단단히 품에 끌어당기며 말했다.
“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영애의 수준에 맞춰 초보적인 설명만 했을 뿐이다.”
‘얼씨구…….’
솔직하지 못한 그의 태도에도, 라리아는 희한하게 그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반응마저 귀엽게 느껴져 그녀는 그냥 모르는 척해 주기로 했다.
미술관 다음의 코스는 고급 잡화점이 모여 있는 시내 상점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눈부신 가게들의 모습에 라리아는 조금 당황했다.
가게들마다 창틀에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고, 무척 호화로운 인테리어와 상품이 전면유리창을 통해 비쳐 보였다.
‘부담스러워라.’
라리아는 전면유리창 앞에 진열되어 있는 구두를 보다가, 가격표를 발견하고는 심장이 철렁 떨어질 뻔했다. 그냥 예쁘다 싶던 구두의 가격은 그녀의 연봉과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다.
녹턴은 입구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우물쭈물거리는 라리아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거기서 뭐 하는 거지?”
그가 어서 오라는 듯 손짓했다. 하지만 라리아는 볼을 긁적이며 늑장을 부렸다.
“음, 우리 여기 말고 다른 데 가면 안 될까요? 제가 구두에 별로 관심이 없기도 하고…….”
녹턴은 참다못해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고 끌어당겼다. 결국 라리아는 그에게 끌려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어서 오세요!”
가게의 주인인 듯한 단발머리의 여성이 그들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직원들이 잽싸게 라리아와 녹턴의 짐을 받아 들고 그들을 자리에 안내한 뒤 차와 카탈로그를 내었다.
라리아는 그런 대접이 여전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반면, 녹턴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직원들을 눈짓으로 부렸다.
“어떤 걸 보고 오셨나요?”
주인의 살가운 말에 녹턴이 창가를 향해 턱짓했다.
“창가에 진열되어 있던 거. 그거 괜찮던데.”
‘뭐라고!’
라리아는 순간 입으로 간을 뱉을 뻔했다. 그녀는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다물려 애쓰며 녹턴과 창가의 구두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설마…… 저걸 사 줄 생각인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녀조차 확신할 수가 없었다. 녹턴이 밑도 끝도 없이 돈을 쓰는 광경을 본 것이 이미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저 구두가 비싸다고 하더라도 1,690개의 다이아몬드가 들어갔다는 드레스나 대양의 눈물에 비하면 껌값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녹턴은 구두 몇 켤레를 라리아에게 신겨 보고는, 아무런 주저나 망설임 없이 고른 것을 전부 일시불로 구매했다.
두 사람이 구두 가게에서 나올 때 라리아의 영혼은 이미 반쯤 나가 있었다.
녹턴은 라리아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이 신경 쓰였다.
‘선물을 줬는데 왜 낯빛이 저 모양이지?’
사실, 그는 이번 데이트를 계획할 때 부관의 조언을 참고했다.
본인은 데이트 경험이 없으니 여자들이 뭘 좋아하는지 잘 몰랐던 탓이다. 그와는 정반대로 자칭 ‘연애 전문가’인 페르닐은 이렇게 말했었다.
“여자들은 구두, 가방, 보석 뭐 이런 거 사주면 아주 껌뻑 죽습니다. 어떤 여자라도 예외는 없어요. 제가 만난 여자들은 다 그랬습니다.”
“정말인가? 틀림없겠지?”
“그럼요! 제 부단장 자리도 걸 수 있습니다.”
녹턴 역시 단언하는 그의 모습이 약간 못 미덥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의 주변에서 연애 경험이 많은 사람은 오직 페르닐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되니 역시 부관 녀석이 틀렸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다른 가게에 또 가 볼까.’
그렇게 생각한 녹턴은 축 처진 라리아를 이끌고 상점가를 걷기 시작했다.
‘다음엔 보석이나, 가방을 보는 걸로…….’
그때였다. 넋이 나가 있던 라리아가 정신을 차린 것은.
“아!”
그녀의 시선은 어느 한 곳에 꽂혀 있었다. 녹턴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작지만 아기자기하고 아늑한 서점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낡은 종이와 잉크의 냄새가 날 것 같았다.
“가고 싶나?”
녹턴이 묻자 라리아는 기대감 어린 얼굴을 끄덕였다. 이렇게 되니 망설일 것은 없었다. 두 사람은 서점으로 향했다.
라리아는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망설임 없이 소설 코너로 갔다. 그녀는 진지한 눈빛으로 책 몇 권을 골라내더니 빠른 속도로 읽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녹턴이 황당한 듯 물었다. 라리아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좋은 동화책을 찾으려고요.”
“좋은 동화책?”
“네. 너무 폭력적이거나 외설적이지 않고…… 흥미로우면서도 교육적인 내용의.”
이곳 제국에는 아동용 서적이라는 것이 딱히 없었다. 심지어 15세 관람가, 19세 관람가와 같은 연령 구분조차 없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그나마 쉬운 문장과 내용으로 쓰인 책을 읽혔지만 그중에는 아이들에게 적합하지 않은 내용의 책들이 많았다.
라리아는 제국에서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책을 읽어 봤다가 지나치게 자극적인 내용에 놀란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아동 교육학’이라는 개념조차 없는 곳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론도의 기사’가 아이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제국에는 쉬운 문장과 내용으로 쓰였으며 흥미로우면서도 지나치게 폭력적이지 않은 서적 자체가 드물었으니까.
라리아는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책을 읽어 보곤 몇 권을 골라냈다. 그녀의 기준에서 아이들에게 읽혀도 좋겠다 싶은 책들이었다.
“저 이거 살래요.”
라리아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녹턴은 그런 그녀를 황당하다는 눈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왜, 왜 그러세요?”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 라리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녹턴이 물었다.
“정말 그거면 되겠나?”
“네? 아…… 음, 그럼 로맨스 소설도 살래요.”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가듯이,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라리아는 여전히 로맨스 소설을 완전히 끊을 수 없었다.
라리아는 자신이 읽을 로맨스 소설 신간도 몇 권 골라 왔다. 싱글벙글한 그녀의 얼굴을 본 녹턴은 한숨을 삼켰다.
‘저깟 책이 뭐라고, 내가 준 선물보다 좋아하는지.’
물론 저깟 거라고 하기에는 책 역시 사치품에 속했고 평민들은 한 권도 구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래도 아까 그가 사 준 구두에 비하면 껌값이었다.
“주인장.”
지갑을 꺼내는 라리아를 뒤로하고 녹턴은 서점 주인을 불러 영수증에 멋대로 서명했다. 눈이 동그래진 라리아가 녹턴의 뒤에 쪼르르 따라붙으며 말했다.
“사, 사 주실 필요 없어요. 제가 사도 괜찮은데…….”
“조용히.”
녹턴은 한마디로 그녀의 말을 일축하곤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시내를 좀 더 돌아다니면서 녹턴은 라리아의 반응을 관찰했는데, 그녀가 반응을 보이는 것은 거의 아이들에 대한 것이었다.
“전하! 이 옷, 정말 귀엽지 않아요? 공녀님께 꼭 어울릴 것 같아요!”
“어린이 사이즈의 스푼이네요. 우리 공녀님, 공자님이 쓰시기엔 좀 큰 것 같지만……. 1, 2년만 지나면 쓰실 수 있겠어요.”
“어머나! 아기 신발, 귀여워라!”
녹턴이 보기에는 어차피 똑같은 신발인데 왜 그녀 자신이 신을 것엔 관심이 없고 애들 신발을 보고 좋아하는지 어이가 없었다.
“영애는 왜 자기 신발에는 관심이 없고 애들 신발을 이렇게 좋아하나?”
그의 말에 멈칫한 라리아는 볼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네? 그야 애들 신발은 귀엽고, 또……. 공자님이 신으시면 잘 어울릴 것 같으니까요?”
녹턴은 기가 찼다. 물론 그가 애들한테 돈을 아끼는 편은 아니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더 그랬다.
“미하일 녀석이 가진 구두가 영애의 것보다 3배는 될 거다. 녀석들의 옷은 내가 충분히 사 주고 있으니 영애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네에…….”
그녀가 아이들의 친엄마처럼 아이들을 아껴 주는 것은 기쁘고 고마웠지만, 그래도 녹턴은 그녀가 자신만의 것에도 더 관심을 가지고 기뻐했으면 했다.
잔소리를 하던 녹턴은 무언가 생각난 듯 회중시계를 꺼냈다.
“시간이 됐군. 다음 장소로 가지.”
‘식사라도 예약했나? 아직 저녁 식사를 하기엔 이른 시간인데…….’
그렇게 생각한 라리아가 물었다.
“다음엔 어디로 가나요?”
“가면 알게 될 거다.”
두 사람은 다시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마차에서 내린 라리아는 곧 자신들이 도착한 곳이 극장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연극이나 오페라 같은 것을 공연하는 곳이었다.
“연극을 보시게요?”
라리아의 질문에, 녹턴은 어느 한 곳을 향해 턱짓했다.
그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린 라리아는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을 느꼈다.
“아……!”
녹턴이 가리킨 곳에는 오늘 상영하는 연극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포스터에는 키는 작지만 잘생긴 얼굴의 기사가 그려져 있고, 그림 아래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연극 기사의 론도
공연 : 울새와 파랑새 극단」
일전에 라리아와 함께 인형극을 준비했던 울새와 파랑새 극단에서, 기사의 론도를 연극으로 재구성해 공연하는 모양이었다.
라리아는 어린이 파티 때가 떠올랐다. 동화 구연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던 녹턴의 모습도.
라리아가 감동에 젖은 눈으로 돌아보자, 녹턴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런 걸 과연 좋아할까 싶었는데 다행이군. 아까 책을 고르는 걸 보니 충분히 좋아할 것 같던데. 안 그런가?”
그냥 다행인 정도가 아니었다. 이미 라리아의 가슴 속에선 감동의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었으니까.
“전하! 정말 감사해요!”
그녀는 어찌나 기뻤는지, 그만 저도 모르게 녹턴을 끌어안고 말았다.
순간 두 사람 모두 굳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한 라리아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녀는 잽싸게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새빨개진 얼굴을 돌리며 그녀가 말했다.
“아, 죄송해요. 너, 너무 기뻐서 그만…….”
라리아는 그가 픽 웃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상상만 해도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한편 그녀의 붉어진 귀를 보며 녹턴은 생각했다.
‘귀여워 죽겠군.’
그는 확 달려들어서 저 작은 몸을 끌어안아 버리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러 참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녀에게 포옹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이 연극을 찾아낸 보람을 느꼈다.
그는 욕망대로 그녀를 껴안는 대신,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라리아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 반응을 내심 즐기면서, 녹턴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지.”
녹턴이 예약한 좌석은 VIP석으로, 다른 좌석들과 달리 별실에서 공연을 볼 수 있었다.
라리아는 공연을 정말 재미있게 보았다. 공연은 자네트와 미하일에게 꼭 보여 주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1부는 론도의 기사 1권의 내용이고, 2부는 2권의 내용으로 되어 있구나.’
쉬는 시간, 프로그램을 뒤적이며 라리아는 생각했다.
‘2권은 시간이 없어서 사 두고 아직 못 읽었는데, 무슨 내용일지 기대되네. 분명 재미있겠지.’
곧 쉬는 시간이 끝나고 2부가 시작되었다. 라리아는 다시 손에 땀을 쥔 채 공연을 관람하기 시작했다.
한편, 녹턴은 그녀만큼 즐거움을 느끼지는 못하고 있었다.
원래 연극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그였다. 가상의 인물, 가상의 이야기 따위 결국 몽상에 불과한데 남의 몽상을 지켜보는 게 뭐가 그리 즐거운지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공연의 원작이 애들이 좋아하는 허무맹랑한 로망스 소설이니 더했다. 이 공연은 그에게는 유치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차라리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는 게 더 재미있군.’
그런 생각으로 녹턴은 공연에 집중하지 않고 무대와 라리아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관람하고 있었다.
그런데 2부의 내용이 클라이맥스로 다다를 때였다.
「크윽! 데이빗, 너 이 자식!」
「크크큭, 웰링턴! 넌 이곳에서 백골이 되어 썩어 갈 것이다!」
기사 웰링턴은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당하고 악당의 지하 감옥에 갇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네게 나는 형제와도 같다고 하지 않았나!」
「크큭, 그건 당연히 너를 속이려고 한 거짓말이지! 난 네가 동료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데이빗은 깔깔깔 웃으며 지하 감옥에 갇힌 기사 웰링턴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 내가 그 유명한 기사 웰링턴을 사로잡다니! 슈트룅거 백작께선 내게 큰 상을 내리실 것이다. 이 공으로 나는 코난 남작으로 추대되리라!」
「제길, 데이비이이잇!」
데이빗은 높은 웃음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기사 웰링턴은 홀로 남겨졌다. 차갑고 눅눅한 지하감옥에 말이다.
처음에는 그냥 재미있기만 했던 라리아였지만, 그녀는 어쩐지 공연을 보면 볼수록 기시감이 들었다.
‘어라? 이거…… 어쩐지 낯익은 이야기인데…….’
잠시 고민하던 그녀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다급히 녹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하!”
무대에 집중하기 위해 다소 어두운 VIP석에서도 훤히 보일 정도로 녹턴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라리아가 보는 앞에서 녹턴은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손으로 감쌌다.
“빌어먹을…….”
잊고 있었던, 잊으려고 했던,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다.
폐 속에 진흙이 차오르듯 숨이 막혀 왔다.
조금 전만 해도 난방이 되어 훈훈했던 주변의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관자놀이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만 믿어! 다른 생각은 하지 마. 그저, 이 일을 해냈을 때 우리가 얼마나 행복해질지만 생각해.”
“알고 있지? 녹턴. 난 널 누구보다 믿는다. 넌 그럴 가치가 있는 인간이야.”
그 잔인할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 부드러운 눈빛의 녹색 눈동자.
잊으려고 아무리 애써 보아도 이미 영혼에 새겨진 그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저, 잠시 외면했을 뿐이다. 고개를 돌렸을 뿐이다.
‘……믿어. 셰이머스. 나 자신보다도 더 너를 믿어.’
어렸던, 어리석었던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싶다.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이미 그보다 몇십 배, 몇백 배의 고통을 지나왔으므로.
‘이 저주받은 블랙웰에서 함께 나가는 거야!’
차가운 지하 감옥. 어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그 오랜 시간의 끝에 들은 건…….
‘그가…… 그가 죽었다, 녹턴.’
‘녹터어어어언!’
귀청을 찢도록 날카로운, 고통과 원한이 가득 담긴 비명 소리…….
“……하! ……차리세요!”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 정신을 차리라고? 녹턴은 자신이 왜 그래야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현실로 돌아오면 자신에게 남은 것은 고통뿐인데. 비참함과 절망. 삶을, 세계를 통째로 잃어버린 듯한…….
“전하!”
녹턴은 숨을 들이켰다. 물에 빠져 질식한 사람이 폐에 차오른 물을 뱉어 내듯 그는 끔찍한 기억을 뱉어냈다.
“전, 전하! 제발, 정신 차리세요! 제발!”
이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폐부를 채우던 두려움과 절망, 상실감이 빠져나갔다. 녹턴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중얼거렸다.
“라리아. 날 떠날 건가?”
“네?”
“날, 날 떠날 거냐고 물었다. 너도 날 배신할 건가?”
라리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아이를 어르듯 녹턴의 머리를 끌어안고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아니에요. 전 늘 전하의 곁에 있어요. 전하께서 떠나라고 하시기 전까지는 아무 데도 안 가요.”
라리아는 그가 어째서 이러는 건지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떤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인지도.
당연한 일이다. 그의 끔찍한 과거는 모두 그녀가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냈으니까.
“저는 죽어도 전하의 편이에요. 저는 전하를 배신하지 않아요. 전하, 괜찮아요. 제가 있잖아요. 전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이 했던 짓을 돌이킬 수만 있다면 무엇을 주더라도 좋았다.
가슴이 산산조각 나는 것만 같았다. 그저 여주인공이 상처받은 남주인공을 치유해 주는 것이 보고 싶어서 만들었던 설정이, 과거의 자신이 목을 조른다.
만일 그때 그를 정말로 만나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를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전 전하를 버리지도, 죽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심호흡하세요. 자…….”
라리아는 녹턴의 등을 길게 쓸어내리며 심호흡하는 흉내를 냈다. 녹턴은 그녀가 하는 대로 따라 했다. 고통과 두려움이 빠져나가고 그녀의 향기가 그의 폐부를 채웠다.
“라리아…….”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녀의 품에 파고들었다. 라리아는 그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비록 가는 팔이지만, 결코 놓지 않겠다는 듯이 단단히.
곧, 그의 떨림이 가라앉았다. 녹턴은 몇 번이고 그녀의 향을 들이쉬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 핏기가 부족했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이성을 찾은 듯한 얼굴이었다.
“정…… 정신이 드세요?”
라리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녹턴은 다시 눈을 감고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아니.”
그가 속삭였다.
“계속 이렇게 있고 싶군.”
라리아는 그의 말이 진담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녹턴은 단단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영원히 이렇게 있고 싶었다.
그 상태로 그는 그녀가 해 주었던 말들을 되새겼다.
‘이상하군.’
녹턴은 생각했다.
‘그녀가 꼭 내 과거를…… 내 괴로움을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녀가 해 준 말들은 너무나 정확히 그가 듣고 싶었던, 그에게 필요했던 말들뿐이었다.
그 말들은 마치 빠진 퍼즐 조각처럼 그의 마음속 빈자리에 딱 맞았다.
‘우연인가? 아니면…….’
그때였다. 녹턴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매일마다 불러 주고 있는 그녀의 자장가.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마치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그것은 사실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우연히도, 그녀는 ‘그 녀석’이 자신에게 불러 주었던 노래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음유시인에게서 배운 민요라고 했지만…….’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녀석’과 그녀가 같은 노래를 알고 있을 확률이 대체 얼마나 될까?
그것도 블랙웰 대공국과 셔우드 백작령은 거의 정반대 방향에 있는데 말이다.
라리아가 자신의 예상보다 더 많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의 과거마저도.
그렇게 생각하니 전신의 신경이 쭈뼛 섰다.
‘왜 지금까지는 이것을 생각해 내지 못했던 거지?’
사실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녹턴은 종교를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의 색채를 보며 라리아는 어쩌면 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신이라면 그의 과거, 그의 모든 것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딱히 그녀에게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말하지 않은 것뿐.
하지만 신과 같이 절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기에 그가 느끼는 그녀는 너무나 작고 가녀리며…… 인간적이었다.
머리에 붙어 있던 깃털을 부끄러워하고,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슬퍼했던 그녀의 사소하고 인간적인 면모들을 녹턴은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정말로 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절대적인 존재라면 그런 식으로 행동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이 여자는,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녹턴은 라리아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언제나 그랬지만, 더더욱.
그녀는 알면 알수록 짙은 의문에 감싸여 있는 묘한 존재였다. 아무리 가까워져도 그녀를 충분히 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녀를 갈증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것에 목이 말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점이 더더욱 그가 그녀에게 빠져들도록 만들었다.
* * *
결국 우리는 2부 중간에 관람을 중단하고 극장 밖으로 나왔다.
‘뒤 내용을 모르게 된 건 아쉽지만, 그건 책을 읽으면 되니까.’
극장에서 나오면서 나는 녹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바로 돌아가는 거죠? 전하의 건강이 걱정돼요. 돌아가서 꼭 프레드릭에게 진찰을 받으세요.”
그사이에 진정한 녹턴은 굉장히 멀쩡해 보였다. 얼굴의 혈색도 돌아왔고, 내 부축을 받지 않고도 제대로 걸었다.
그래도 나는 걱정이 됐다. 트라우마가 자극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가 보통 사람의 범위를 뛰어넘을 정도로 강하고 튼튼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나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녹턴은 이렇게 주장했다.
“무슨 소리지? 저녁 식사를 예약해 놨다. 외출한 김에 식사 정도는 하고 들어가야지.”
“아이참, 편찮으셨는데 꼭 외식을 하셔야겠어요? 식사는 돌아가서 하면 되잖아요?”
내 걱정스런 말에 녹턴은 노골적인 비웃음을 흘렸다.
“영애에게 걱정을 받을 내가 아니다. 봐라. 이렇게 멀쩡하지 않나?”
“으으음…….”
하여간에 어지간한 고집이 아니었다. 양아버지이긴 하지만 자네트가 누굴 닮았는지 알 것 같달까?
‘그래, 어려운 일을 하거나 멀리 가는 게 아니고 식사를 하는 것뿐이니까. 나를 위해 일부러 식당을 예약해 주었는데 취소하라고 하긴 미안하기도 하고.’
“그럼 딱 식사만 하고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도, 어딘가 불편하시면 절대 참지 마시고 꼭 말씀해 주셔야 해요? 아셨죠?”
녹턴은 걱정하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더니 픽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그것이 동의의 뜻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마차에 타려던 도중이었다.
“지금 이런 걸 일이라고 한 거야!”
날카로운 소리가 저녁의 쌀쌀한 공기를 갈랐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느 집 대문에 서 있는 귀부인이 보였다. 그녀가 밀쳐 낸, 13살은 될까 싶은 어린 여자아이도.
꾀죄죄한 옷을 입고 있는 그 여자아이는 밀쳐져 바닥을 굴렀다. 아이가 들고 있던 바구니에서 실패와 반짇고리 같은 것이 떨어져 흩어졌다.
귀부인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옷감을 들고 흔들고 있었다.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 옷감이 완전히 걸레짝이 됐잖아! 이걸 대체 어떻게 할 거야?”
“죄송, 죄송합니다, 마님…….”
여자아이는 방금 밀쳐졌으면서도 얼른 엎드려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나는 그 모습만으로도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저 어린 몸으로 삯바느질을 했구나. 저 부인에게는 아이의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고.’
이곳 제국에서는 여자들이 품삯을 받고 부잣집의 삯바느질을 흔히 한다는 사실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았다.
‘저렇게 어린아이를 험하게 대하다니.’
귀부인은 여자아이의 앞에서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곤 등을 돌렸다.
“삯은 한 푼도 못 줄 줄 알아. 나는 이런 걸레짝 같은 것에는 돈 못 줘.”
“마, 마님!”
기겁한 여자아이가 달려갔지만 이미 대문은 닫힌 뒤였다. 여자아이는 대문의 창살을 붙들고 애절하게 소리쳤다.
“집에서 동생들이 굶고 있어요.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시끄러워! 매질을 해서 내쫓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줄 알아!”
그 말과 함께 귀부인은 집 안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여자아이는 대문을 통해 아무도 없는 정원을 멍하니 보다가, 터덜터덜 돌아와 흩어진 실패를 줍기 시작했다.
“으우우…….”
실패를 주우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여자아이를 보자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졌다.
나는 아이에게 달려가 실패를 얼른 주워 주곤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아이의 어깨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말라 있어서 더욱 마음이 아팠다.
나는 아이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며 말했다.
“애야, 울지 마. 정말 속상하겠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울지 말렴.”
“으흑, 흑……. 하루 종일 일했는데. 동생들이…….”
여자아이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속상한 마음을 쏟아 냈다. 그녀의 부스러진 말은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 슬픔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이렇게 열심이라니, 정말 좋은 언니구나. 괜찮아, 품삯은 내가 줄게. 그러니까 울지 마.”
“정, 정말요……?”
눈이 새빨개지도록 울던 여자아이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애써 웃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이제 울지 마. 오늘은 빵과 고기를 사 가서 동생들과 따뜻한 식사를 하렴.”
“그런…… 저,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자아이는 훌쩍이면서도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나는 내가 그런 감사 인사를 받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이 정도뿐인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훨씬 많은 돈을 주고 싶은데…….’
하지만 나도 알고 있었다. 이 가난하고 연약한 여자아이에게 지나치게 큰돈을 준다면 순식간에 강도를 당하고 말 것이다. 오히려 그녀의 생명마저 위험해질 수 있었다.
나는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녀를 불러 아이에게 줄 빵을 사 오게 하고 아이의 하루치 품삯을 주었다.
아이는 몇 번이고 감사하다며 허리가 접힐 정도로 인사를 하더니 골목길로 사라졌다.
나는 여전히 입맛이 씁쓸했다.
‘모든 아이들은 일을 하면 안 돼.’
집에서 재롱을 떨며 사랑을 받고, 따뜻한 식사를 하며 즐겁게 뛰어놀아야만 할 어린아이조차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현실이 마음 아팠다.
그런 내 어깨를 단단한 팔이 감싸 왔다. 녹턴이었다.
“이렇게 마음이 여려서야.”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나를 비난하는 것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그럼 갈까요?”
“그러지. 아…… 그 전에 잠깐. 그 여자가 다시 나오는군.”
나는 처음에는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까의 그 귀부인이 다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아주 고급스러운 비단 드레스를 입고 값비쌀 게 분명한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아마 외출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대문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
“히히힝!”
마차가 공회전하듯 조금 움직였다.
제국의 도로는 현대 한국과는 꽤 다르다.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데다가 하수시설이 그리 좋지 않아서, 여기저기 더러운 진흙탕이 많았다.
마차는 일부러 그러는 듯 정확히 그 진흙탕 중 하나를 밟았고, 어마어마한 양의 오물이 튀더니…….
“꺄아악!”
귀부인은 한순간에 오물 세례를 받고 말았다.
그녀의 고급스러운 옷은 순식간에 진흙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그녀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마부를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이런 멍청한 마부 같으니! 이거 어쩔 거야! 이 옷이 얼마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
“왜 마부를 괴롭히나.”
그때 녹턴이 나섰다.
“마차의 주인은 나니까 나와 이야기하지.”
악귀처럼 고함을 질러 대던 귀부인은 녹턴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아마 그 특유의 두려운 인상과 보통 사람이 아닌 듯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귀부인은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희게 질린 얼굴로나마 녹턴에게 앙칼진 소리를 했다.
“봐…… 봐요! 당, 당신의 마부가, 제 옷을 이렇게 만들었어요. 이, 이걸 어떻게 책임지실 건가요?”
녹턴은 상대를 무정한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곧, 그가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내가 왜 그런 걸레짝 같은 것에 돈을 주어야 하지?”
그의 말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귀부인도 입을 벌리고 나도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
그러고 보니, 요즘은 꽤 다정하게 굴어서 잊고 있었지만 그는 사실 굉장히 성격 나쁜 사람이었다.
여주인공 외의 인물들, 특히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에게는 하도 사정없이 비비 꼬아 대서 독자들이 ‘꽈배기남’이라느니 ‘싸가지남’이라느니 하는 별명을 붙여 줄 정도였으니까.
‘아무리 그렇다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설마 녹턴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저 귀부인은 굳이 말하자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준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녹턴은 다른 사람에게는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뭐, 뭐어…… 뭐라고요?! 이봐요! 지금 당신…… 뭐라고 했어요?!”
당연하지만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들은 귀부인은 가만있지 않았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펄펄 뛸 기세였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끼어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면서 녹턴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순간에, 녹턴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꽤 여유롭고 평이한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한순간에 주변 공기가 한 3도쯤 차가워진 듯한 기분이랄까.
그의 흉흉한 안광에 귀부인의 낯 색이 그라데이션으로 하얗게 변했다. 마치 거대한 늑대와 마주친 사람처럼 그녀는 생명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녹턴이 내뱉었다.
“귀찮군. 꺼져.”
짧은 말이었지만 어마어마한 박력이었다. 내가 그의 창조주가 아니고, 그에게 꽤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나도 겁을 먹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귀부인은 유리컵도 깰 수 있을 것 같은 째지는 비명을 지르며 쏜살같이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꺄아아아악! 살인! 살인이야! 연쇄 살인마야!”
그녀의 높은 목소리와 철컹하는 문 잠그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참았던 숨을 토했다.
“세상에나! 왜, 왜 그러신 거예요?”
녹턴은 픽 웃으며 나를 마차에 태웠다. 나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차가 레스토랑을 향해 출발하고, 나는 그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왜 그러셨던 거예요? 음, 그러니까…… 전하께서 제게…….”
이 지점에서 나는 얼굴을 붉혔다. 그가 내게 했던 고백이 떠올라서였다. 나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호의를 갖고 계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뭐랄까…… 그 사람은 저한테 직접 피해를 준 건 아니잖아요?”
좌석에 걸터앉아 나른한 눈으로 창밖을 보던 녹턴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여자가 영애를 속상하게 했지 않나.”
“네?”
“영애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나. 아니었나?”
그렇게 말하는 그는, 정말 놀랍게도……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그런 말을 해서, 나는 순간적으로 그게 당연한 건 줄 착각할 뻔했다.
나는 얼굴에 불이 붙은 줄 알았다.
얼굴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뜨거워져서 필사적으로 손부채질을 해야만 했다.
그러고 있는 동안에도 어쩐지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그의 말이 툭 떨어졌다.
“대체 뭐가 불만이라서 나를 받아 주지 않는 건가? 영애.”
싫어하다니, 그건 정말 말도 안 된다. 나는 결코 그를 싫어하거나 미워할 수 없을 것이다. 정말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제 다음 달이면 만나게 될 여주인공이 떠올랐다. 그녀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그의 운명도.
그리고……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릴 정도로 잔혹한 그의 과거도.
내가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물론 다음 달에 나타날 여주인공이었지만, 사실은 하나 더 있었다.
녹턴, 그를 평생 동안 괴롭혀 온 과거를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지금 그는 나를, 믿을 수 없게도 사랑…… 하고 있다고 한다지만.
만일 그를 그토록 끔찍하게 괴롭힌 것이, 그의 비참한 삶을 만든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를 죽이고 싶어 할지도 몰라.’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당연한 거야. 그가 지난날로 얼마나 괴로워했는데…….’
그래. 비록 지금은 그가 나에게 호의를 품고 있다지만, 그의 과거를 만들어 낸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그가 알게 된다면 그 후에도 그럴지 나는 도저히 확신할 수 없었다.
나를 사랑한다던 그가 나를 증오하게 된다면. 그리도 다정했던 자색 눈동자에 나를 향한 살의가 담긴다면…….
나는 과연 그것을 견딜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그의 곁에 있으면서 그를 영원히 속이고 싶지도 않았다. 나로서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속사정을 그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적당히 이렇게 얼버무렸다.
“그, 그냥…… 전하는 제게 너무 과분하신 분이라서요. 저로서는 도저히…….”
내 말에 녹턴이 피식 웃었다.
“저번엔 좋아하는 건 절대 아니라더니. 결국 부담스러운 것 빼곤 좋은 게 맞긴 맞나 보군?”
아차. 나는 솜사탕을 물에 씻은 라쿤 같은 얼굴로 그를 보았다.
‘한 방 먹었잖아!’
그런 내 얼굴을 보고 녹턴은 쿡쿡 웃었다.
그는 맞은편에 앉아 있다가, 은근슬쩍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신의 신경이 옆자리의 그에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영애가 어떤 사람이라도 나는 상관없다. 그저, 나를 받아들이기만 해라.”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이 앞에서 옆으로 바뀌자, 왠지 그가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한 목소리.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만 해 준다면…… 영애에게 나의 모든 것을 주지. 내 전부를…….”
‘정말 이상해. 이건 꼭…… 전부 알고 있는 사람 같잖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도저히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꼭…… 내가 바로 원작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차라리 그렇다면 좋을 텐데. 그가 모든 것을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받아들여 준 것이라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서.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아니야, 그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 그냥 우연일 뿐일 거야. 우연…….’
나는 입술을 깨물며 애써 마음을 견뎠다.
다음 달에 만나게 될 여주인공도, 죄책감도, 책임도, 전부 버리고 그에게 나를 맡기고 싶은 충동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