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3권) (11/20)

남주의 복지를 책임지겠습니다 3권

(11)

* * *

황궁에 다녀온 날, 그날의 업무를 마치고 드디어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다.

피로감에 온몸이 녹진녹진했다. 옷을 갈아입고, 씻는 동안에도 눈꺼풀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잘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침대 위에 다이빙한 나는 포근한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아아, 좋아…… 푹신해라…….”

그렇게 달콤한 잠에 빠지려던 찰나였다. 콩콩, 작은 노크 소리 같은 것이 방 안을 울렸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만 알았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창문을 때렸다든가, 뭐 그런 걸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소리는 점점 더 잦아지고 빨라졌다. 마치 일어나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결국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일어나는 수밖에는 없었다.

“뭐야, 정말. 이 시간에 누구야?”

한데 침대에서 일어난 뒤에야 나는 깨달았다. 노크 소리가 문이 아닌 창문 쪽에서 들렸다는 사실을.

나는 깜짝 놀라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나이팅게일 한 마리가 창틀에 내려앉은 채 끊임없이 창문을 쪼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나이팅게일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손등 위로 올라왔다.

자세히 보니, 새의 다리에 작은 소포 같은 것이 묶여 있었다.

소포를 풀어 보자, 그 안에서는…… 작은 영상구가 하나 나왔다.

그 모습을 확인하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잠이 싹 달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페트로구나! 내가 의뢰한 정보를 알아낸 거야!’

브라트카르토에 ‘블랙웰의 광증’에 대한 정보를 의뢰한 뒤로, 중간 과정을 꾸준히 보고받기는 했다.

그러나 여태까지는 노력해 보았으나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다는 내용밖에 없었다.

그랬는데, 드디어 처음으로 정보다운 정보가 내 손에 들어온 것이었다.

나는 다급하게 창문을 닫고, 복도에 인기척이 없는지 확인한 다음 영상구를 재생시켰다.

재생하자마자 영상구에 모닥불 같은 붉은 머리가 비쳐 보였다. 페트로였다.

「안녕하세요, 셔우드 영애? 저예요, 페트로.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중요한 정보를 알아냈으니 잘 들어 주세요.」

「먼저 흥미로운 사실이에요. 대륙 역사상, 블랙웰과 같은 광증을 유전병으로 가진 가문이 한둘이 아니었다더군요. 해당되는 가문의 정보를 알려 드릴게요.」

‘블랙웰과 같은 광증을 가진 가문이 여러 곳이라고?’

나는 황급히 종이와 깃펜을 꺼내, 나만 알아볼 수 있는 한글로 페트로가 불러 주는 가문들의 정보를 받아 적기 시작했다.

「자, 다음은 다시 블랙웰에 대해선데요……. 그동안 저희가 블랙웰의 광증에 대해 조사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었잖아요? 저희의 정보력으로도 놀라울 정도로 알아내기 힘들더군요. 마치, 단서가 ‘씻겨 나가 있는’ 것 같았어요.」

‘씻겨 나가 있다?’

사실, 내 예상도 그랬다.

녹턴은 자신의 광증을 진심으로 혐오한다.

그러니 대공의 권력을 거머쥔 뒤, 그는 분명 전력으로 자신의 광증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보았을 것이다.

브라트카르토에 필적하는 블랙웰의 정보력이라면 어지간하면 치료법을 찾아냈었어야 할 것인데, 그는 여태까지 광증을 가지고 있다.

‘블랙웰의 대공이 진심을 다해 찾아도 그 해결법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분명…….’

내 생각에 예상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정말로 광증의 치료법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정보를 찾아낼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

만일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광증에 대한 정보를 없앴다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그야, 블랙웰의 대공조차 그 정보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상대는 블랙웰 대공가보다도 훨씬 강력한 조직임이 분명하니까.

영상구 속의 페트로가 한숨을 쉬었다.

「뭐,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영애, 답은 바로 성국이에요. 블랙웰의 광증에 대한 정보는, 아무래도 성국이 보유하고 있는 것 같아요.」

‘뭐…… 라고?’

나는 너무 놀라서 거의 영상구를 떨어뜨릴 뻔했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쿵쾅거렸다. 손에 땀이 차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런 내 기분은 아는지 모르는지, 영상구 속의 페트로가 말을 이었다.

「대체 성국이 블랙웰의 유전병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는 저희도 아직 모르지만요. 뭐, 성국은 의료기술 역시 연구하는 곳이니, 블랙웰의 광증 치료법을 연구했던 걸지도 모르죠.」

사실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성국. 대륙의 종교인 ‘에일리아 여신교’의 종주국.

‘대륙의 중심은 제국이지만, 대륙인들의 정신의 중심은 성국’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마따나, 성국은 모든 대륙인들의 정신적, 문화적 성지와 같은 곳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다.

도시국가 수준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 어떻게 보면 제국의 황실보다도 막강한 권력을 가진 곳이니, 만일 성국에서 작정하고 정보를 지웠다면 블랙웰이 찾아내지 못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야.’

「안타깝지만 성국이 가진 ‘정보’까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어요. 저희가 알고 있는 것은 성국이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뿐이네요. 성국이 가진 정보의 내용은 이제부터 조사해서 보고할게요.」

‘성국이 블랙웰의 광증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정말로? 성국이 어떻게든 광증의 치료법과 관련이 있다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내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이유는 바로…….

원작의 여주인공이, 바로 성국의 성녀이기 때문이다.

페트로가 모든 정보를 전달하고 나자, 영상구는 마치 얼음처럼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

‘녹턴의 광증을 고쳐 주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성국과 접촉해야만 해.’

영상구가 녹아서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성국과 접촉하면…… 녹턴과 여주인공이 만나는 것이 더 빨라질 수밖에는 없겠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아서 침대까지, 저 깊고 깊은 심연까지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다.

‘이상하다. 이미 정해져 있었던 일인데. 그저 어차피 일어날 일을 조금 앞당기는 것뿐인데.’

녹턴과 여주인공이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것은 정해진 일이었다. 내 손으로 자아낸 그들의, 이 세계의 운명.

그저 막연히, 미루어 두고 있었을 뿐이다. 몇 달 뒤에나 일어날 일이라고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는 날이 앞당겨져,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고 느끼는 순간.

나중의 일이라고,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미루고 미루었던, 필사적으로 외면해 왔던 감정이 물밀 듯이 밀어닥쳤다.

저릿, 하고. 가슴이 뭉그러지듯 아파 왔다.

‘싫어.’

끊임없이 미루고, 외면하고, 고개 돌렸던 나의 진짜 감정.

‘그들이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녹턴과 여주인공이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에 빠지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이들도, 녹턴도, 나를 잊게 되는 것이 싫었다. 블랙웰에서 나의 자리가 사라지는 것이 싫었다.

나는, 계속, 이렇게 지내고 싶었다. 녹턴의 약혼녀라는 자리는 사실 싫지 않았다.

위선적이지만, 그의 곁에 있는 단 한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에 내심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나조차 몰랐던, 인정하지 못했던, 나의 이기적인 본심이었다.

나는 그저 내가 아이들을 소중히 여겨서 그러는 줄로만 알았다.

계속 아이들을 돌보고 싶어서, 아이들에게 잊혀지는 것이 싫은 거라고.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아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있지만,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그들뿐이 아니었다.

녹턴 블랙웰. 내가 직접 손수 지은 그 이름.

그 이름에서 친근함과 익숙함 이상의 떨림을 느끼게 된 게 대체 언제부터였던 건지.

‘아, 그렇구나.’

몰려든 깨달음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구나.’

깨닫자 헛웃음이 나왔다. 결코 사랑하지 않기로, 남의 것은 넘보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 같은데.

예정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너무나 나의 취향이었고, 나는 너무 오래 그의 곁에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내 마음을 지켜내기에 그는 너무나 다정한 사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창문에 어스름하게 비치는 소녀의 모습.

소녀는 울고 있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이 자신의 것인지도 모른 채, 오갈 데 없는 감정을 들고 어찌할 줄 몰라 하는 내가 그곳에 있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거구나.

이 찢어지고 미어지도록 아픈 감각이.

그동안 로맨스 소설을 읽으며 기대했던 만큼 예쁘거나, 아름답거나, 낭만적인 기분은 아니었다.

그것이 우스워서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숨죽여 울면서 웃었다. 밤이 새고 아침이 올 때까지.

* * *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을 깨달았다고 해도, 내가 내릴 결정은 정해져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와 여주인공이 만나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가능하다면 영원히.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그의 광증을 치료할 수 없었다.

나는 그가 행복해지길 바랐다. 이제껏 괴로웠고 고통스러웠던 만큼 보상받아서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해지길 바랐다.

내가 그를 사랑하니까,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고 있으니까 더더욱.

그를 행복하게 만들고, 그 대신 나는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을 가져가리라.

그와의 추억. 그의 미소, 자상함, 눈빛. 그를 만났고, 사랑했다는 기억.

그 어떤 보석과도 바꿀 수 없는, 나만의 소중한 보물이었다.

나는 이 보물들을 나만의 보석상자에 담아 가져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은 채 평생을 간직할 것이다.

‘그래, 나는 그거면 돼.’

그것이 그를 만들어 낸, 그의 고통스러운 삶을 만들어 낸 나의 속죄였다.

그렇게 결심한 나는 달력을 보았다.

벌써 8월이었다. 원작의 흐름대로라면, 여주인공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은 7개월 뒤, 내년 3월의 일이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나는 팔랑, 하고 달력을 한 장 넘겼다.

‘그 시간을 6개월 당겨서, 바로 다음 달에 그녀와 접촉할 수 있어.’

내가 그녀에게 접촉하는 것은 바로 그때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도 그때일 것이다. 블랙웰에서의 삶도, 즐거웠던 약혼녀 놀이도, 내게 허락되었던 그의 다정함도.

다만, 여주인공과 만나기 전까지는 최대한 평소와 같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오히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게 되었으니 자네트와 미하일에게 더욱 듬뿍 애정을 줄 수 있었다.

‘이 아이들은 나를 금방 잊을 테니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급하게 구입해야 할 물건이 있었던 나는 혼자서 장을 보러 나왔다.

‘아, 이거다.’

사려던 물건 위로 뻗은 내 손 위로 커다란 손이 덮여 왔다. 흠칫 놀라 손을 뗐더니, 유약한 인상의 미남자가 난처한 듯 웃었다.

“이런, 숙녀분께 실례했습니다.”

그는 황금빛의 머리에 유난히 흰 피부, 바다처럼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한여름인데도 덥지도 않은지 마른 몸 위에 긴 옷을 걸친 그를,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 사람은, 설마……!’

경악하는 내 앞에서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이렇게 말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실례를 했으니, 사죄의 뜻으로 차를 한잔 사고 싶습니다.”

세상에,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그거였다. 나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그를 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 제국의 숨겨진 제4 황자잖아!’

그렇다. 원작의 서브남주 중 한 명인 제4 황자.

바로 현 황제 귄터 프란츠 크리스토프 뮌스 브레히트의 동생, 하인리히 로렐라이 지그프리트 뮌스 브레히트였다.

제국 내에서 정체가 밝혀져 있지 않다는 숨겨진 황자가 지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놀랍지만,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원작에서의 첫 등장은 바로 황제 귄터의 사주를 받아 여주인공을 유혹하는 씬이었다.

그래, 그가 딱 지금 나한테 하고 있는 것처럼!

‘황제가 하인리히에게 날 유혹하라고 사주했단 말이야? 대체 왜?’

황제는 녹턴을 질투하고 열등감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래서 녹턴을 상대로 이런저런 방해 공작을 벌이는데, 하인리히를 시켜 여주인공을 유혹하려고 했던 일이 그중 하나였다.

그 사실을 떠올리니 안개가 개듯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황제도 녹턴이 나를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있구나!’

무도회 때 우리가 연기를 얼마나 잘했는지, 무도회 이후 신문에 나왔던 기사들은 죄다 녹턴이 나에게 죽고 못 사는 것처럼 대서특필하곤 했다.

나야 곧 진짜 여주인공이 나타날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야 무도회 이후로 정말로 우리가 깊은 사랑에 빠진 줄 알고 있을 것이다.

세상에, 그 일로 인해 황제의 계략의 대상이 여주인공이 아닌 내가 될 줄이야!

‘하지만, 차라리 이게 나은 걸지도 몰라.’

하인리히가 여주인공을 유혹한 사건 역시 후반부에 녹턴이 미쳐 날뛰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녹턴의 정신건강에는 하인리히가 여주인공을 유혹하는 것보다는 나를 유혹하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녹턴을 위해서라면, 한 달 뒤 지그와 여주인공이 만날 일이 사라지도록 지그를 녹턴의 행동반경에서 되도록 떼어 놓는 것이 좋으리라.

“좋아요. 잘 부탁드릴게요. 혹시, 이름이?”

하인리히가 대답했다.

“지그라고 불러 주세요.”

지그. 그의 미들네임인 지크프리트에서 따온 가명이었다.

나는 미소로 화답하며 말했다.

“라리아예요.”

그 길로 우리는 차를 마시러 갔다. 메리에게 외출이 좀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고 말했던 게 다행이었다.

차를 마시고 나니 그는 운하에서 석양을 보며 뱃놀이를 하자고 제안했다.

배를 타고 나니, 저녁 식사를 하자고 했다. 그 역시 그의 말대로 했다.

데이트는 나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황자였고, 매우 똑똑하고 예의범절을 갖춘 사내였다.

매너가 좋고 말주변도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뛰어난 미남이기까지 했다.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트를 하면 할수록 즐겁기는커녕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데이트가 그가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꼭두각시처럼 황제의 말을 따랐을 뿐이었다.

새삼스럽게 그의 인생이 불쌍해졌다. 황제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도.

‘숨겨진 황자’로서 정체를 밝히지 못하고 숨어 살아야 하는 것도.

그리고 그의 그런 인생 역시 내가 만든 것이었다. 내 손으로 직접.

레스토랑에서 나오며 하인리히가 물었다.

“식사는 입에 맞으셨습니까?”

역시 황자는 황자인 건지,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예약하기조차 어렵다는 최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식사는 무척이나 맛있었다.

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 덕분에 즐거웠어요.”

내 대답에 그는 자상하게 웃었다.

“다행입니다. 그럼 영애, 괜찮으시다면, 함께 공원을 거니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부근에 산책하기 좋은 곳이 있는데…….”

그의 제안이 이어질수록 가슴 속에 돌덩이가 얹히는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견디지 못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그.”

“네, 영애.”

지그의 웃는 얼굴은 내 말에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즐거우신가요? 그렇게 남이 시키는 대로 꼭두각시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은?”

내게 다정하게 붙어 서 있던 하인리히는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의 얼굴은 석회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제 정체를…… 알고 계셨던 겁니까?”

이렇게 된 마당에 숨길 수는 없었다. 나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리히는 창백하게 질린 입술을 깨물었다. 곧,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제 정체는 황실의 극비일 텐데, 이미 전부 알고 계실 줄이야……. 과연 블랙웰의 정보력은 대단하군요.”

‘내가 녹턴의 약혼자라서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사실은 그게 아니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하인리히는 눈앞에서 깊이 허리를 숙였다.

“영애께 정말 큰 실례를 했습니다. 변명인 줄은 알지만,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런 짓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체를 숨기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건 그는 황자였으며, 황제의 형제였다. 나 같은 한갓 귀족에게 허리를 숙이다니,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의도를 숨기고 나를 유혹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런 그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

그야, 나는 원작자니까. 그의 사정을 전부 알고 있었으니까.

현 황제 귄터 프란츠 크리스토프 뮌스 브레히트는 황위에 오를 때 형제자매들을 전부 죽였다.

겉으로는 사고사, 적국의 암살 등으로 위장하긴 했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모두 알 수 있었다. 황제 귄터 브레히트가 권력 싸움의 상대가 될 수 있는 경쟁자들을 제거해 버렸다는 사실을.

그 와중에 살아남은 단 한 사람이 바로 하인리히였다. 귄터가 하인리히를 살려 둔 이유는 바로 그가 결코 자신의 경쟁자가 될 수 없으리란 믿음 때문이었다.

하인리히는 심각한 병을 가지고 태어나, 그 존재가 숨겨졌다. 모두가 태어나자마자 금방 죽으리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하인리히는 죽지 않고 성장했다. 성장 과정 중 병은 나았으나 여전히 허약했고, 무엇보다 숨겨져 자란 탓에 지극히 소심하고 심약하며 야심이 없었다.

실권은 없고 병약하며 야심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형제.

귄터는 자신의 이름 없는 형제를 죽이는 대신, 목숨을 볼모로 삼아 꼭두각시로 부리는 쪽이 이익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하인리히는 귄터의 얼굴 없는 꼭두각시로서 살아온 것이다.

‘원작에서 하인리히는 귄터의 명령에 따라 여주인공을 유혹하다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지. 이후, 여러 가지 사건을 겪고 이성을 잃은 녹턴의 손에서 여주인공을 구하려다 그의 손에 살해당하게 돼…….’

이러한 그의 사정을 알고 있고, 더군다나 그의 슬픈 삶 역시 모두 내 손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니 내가 그에게 화가 날 리가 없었다.

오히려 나는 그에게 동정이 갔다. 일평생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 보지 못하고, 오직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형제의 꼭두각시로 살아왔던 그에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하인리히가 말했다.

“영애의 시간을 빼앗아 죄송합니다. 그럼, 실례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등을 돌려 떠나려고 하는 그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이대로 포기하시면, 황제에게 벌을 받고 말 거예요. 그래도 괜찮으신 거예요?”

말이 좋아 벌이지, 황제의 지시를 어긴 그에게 돌아올 것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무참한 죽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나는 그의 앞날이 걱정되었다.

하인리히는 고개를 돌려 내게 슬프게 웃어 보였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영애를 억지로 붙잡아 둘 수도 없고 말입니다.”

“그러지 마시고요. 제게 생각이 있어요. 잠깐만 제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 * *

녹턴의 부관이자 블랙웰 기사단의 부단장인 페르닐 테이스벡은 개인 용무로 시내에 들렀다가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음? 저 사람, 설마…….”

녹턴의 가장 가까운 부하라고 자부하는 그가, 설마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바로 자신의 주군의 약혼녀, 라리아 셔우드였다.

그녀만 있었다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문제는 그녀가 남자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카페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굉장히 심각한 이야기 같았는데,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건지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남자 쪽은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얼굴인데…… 흠, 어쨌든 주군께 보고를 드려야겠군.”

페르닐은 그 길로 곧장 대공저로 돌아가 주군에게 자신이 본 사실을 그대로 고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녹턴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라리아가…… 다른 남자와 함께 단둘이 있었다고?’

오늘은 드물게도 그녀가 오랜 시간 외출을 한 날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간만에 외출을 해서 만난 사람이 젊은 남자라니? 그것도 단둘이 만났다니?

‘아니야, 그녀가 나를 두고 그럴 리가 없다.’

비록 계약일 뿐이지만, 녹턴과 라리아는 약혼 관계였다. 녹턴은 이 관계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라리아가 자신에 대한 신의를 지킬 것이라고 믿었다.

페르닐도 그들의 관계가 로맨틱한 무언가로 보이지는 않았다고 말했고.

그러니 설령 부관의 보고가 정말이라고 해도 그들의 만남이 부정한 무언가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분명, 무언가 사정이 있는 거겠지. 단둘이 만나야만 하는 아주 중대한 사정이…….’

하지만, 설령 지금은 데이트가 아니라고 해도 상대는 젊은 남자였다.

그러니 단둘이 만남을 가지다 보면 그 자식과 라리아의 관계가 연애적인 쪽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녀의 사랑스러움은 혈기왕성한 젊은 남자들이라면 누구라도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니까 더더욱!

생각만 해도 뱃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끓는 가슴을 억누르려 애쓰며 녹턴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 본 것은 아니겠지? 만일 잘못된 보고임이 밝혀진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페르닐.”

“여신께 맹세코, 정말입니다. 저도 잘못 본 게 아닌가 몇 번이나 확인했는걸요. 하지만 틀림없이 셔우드 영애였습니다.”

녹턴은 불쾌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가 명령했다.

“알았다. 당사자한테 확인하도록 하지. 넌 이만 돌아가라.”

하지만, 페르닐을 쫓아 보낸 뒤에도 불쾌감과 불안감은 가라앉지 않았다.

업무는 도저히 손에 잡히지 않았고, 단둘이 만난 라리아와 정체 모를 놈팡이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가 신경이 쓰여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의 상상력은 다른 사람에 비해 적다고 생각했는데, 그 적은 상상력이 폭주해 둘의 관계가 어찌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는 시나리오로 머릿속이 가득 차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주인님, 셔우드 영애가 귀택하였습니다.”

기다렸던 시몬의 보고에, 녹턴이 으르렁거리듯 명령했다.

“그녀를 불러와라. 지금 당장.”

잠시 후, 라리아가 그의 집무실로 찾아왔다.

“부르셨나요? 전하.”

녹턴은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서 있었지만 최대한 침착해 보이려고 애썼다. 그는 잔뜩 동요하고 있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일부러 시선을 허공으로 돌리며 책상을 두드렸다.

“왔군. 일단 앉지.”

라리아는 그가 시키는 대로 맞은 편에 앉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녹턴은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고, 내 부관 페르닐 말인데…….”

녹턴은 말을 하려다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어떻게 보일지 확신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의 약혼녀이긴 했지만, 그것은 거짓 약혼이었다. 그것은 그녀와 자신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실질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약혼녀가 아니라 그저 사용인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그녀의 사생활에 개입해도 되는 것일까?

그저 ‘계약 관계’일뿐인 그가 외출에서 만난 상대에 대해 묻는 것을, 그녀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지만, 그녀가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자신이 그녀의 진짜 약혼자가 아니라는 것 정돈 알고 있지만…….

그렇다 해도 그는 묻고 싶었다. 그녀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대답이 자신의 불안감을 잠재워 주었으면 했다. 설령 자신이 이상한 고용주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결국 결심한 녹턴이 말을 이었다.

“내 부관 페르닐이 방금 외출을 했다가 영애의 모습을 봤다고 하더군. 그런데 영애가 남자와 같이 있었다고 하던데.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사실 라리아가 ‘우리가 표면적으로 약혼 관계이긴 하지만 진짜 연인도 아니고 허울뿐인 약혼인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고 대답해도 그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심지어 ‘원래 약혼을 했던 목적은 달성했으니 이만 파혼하자’라고 말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라리아는 깜짝 놀란 듯하더니,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제가 블랙웰의 약혼녀라는 입장에서 신중치 못하여 블랙웰의 이름에 누를 끼칠 뻔하였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주의해서,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녹턴은 적잖이 안도했다. 그녀는 거짓 약혼이라고 해도 약혼녀로서의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명받은 마음을 냉정한 얼굴 뒤에 숨긴 채, 녹턴은 물었다.

“그래서 무슨 사정이 있었지?”

“저, 사실은…….”

라리아는 녹턴에게 자초지종을 소상히 설명했다.

숨겨진 황자로 알려진 제4 황자 하인리히를 만났다는 것과 그의 사정, 그를 돕기 위한 자신의 계획까지 전부.

물론 원작자라서 그의 정체를 알았다고 할 수는 없었으니, 그 부분은 약간의 각색을 가했다.

황제의 사주를 받은 하인리히가 직접 도움을 요청했다는 식으로.

녹턴은 라리아가 만난 상대가 숨겨진 황자였다는 사실에 놀라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역시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군.’

실로 오랜만에 외출을 한 그녀가 일부러 젊은 남자를 만나러 간 것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한편으로 감히 자신의 약혼녀를 유혹하라고 사주한 황제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가 보기보다 졸렬한 소인배이며, 자신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진실을 보는 눈’을 통해 알고 있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 명백한 공격을 해 올 줄이야.

차라리 자신만 건드렸다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라리아를 건드리려고 했다는 점에 있다.

황제가 자신에게 열등감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로 인해 가끔 속을 긁어 대도 녹턴이 그를 내버려 둔 것은 그저 대응하기도 귀찮기 때문이었다.

그만큼이나 녹턴에게 그는 안중에도 없는 인간이었다. 신경이 쓰이거나 할 것도 없는, 그저 바닥에서 꿈틀댈 뿐인 작은 버러지.

하지만 그가 라리아를 건드리려고 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바닥에서 꿈틀댈 때까지는 신경 쓸 필요도 없었지만, 주제도 모르고 기어올라 물어뜯는 벌레는 치워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어리석은 인간. 블랙웰 대공의 여자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주어야겠군.’

좀 전과 그리 다르지 않은 냉철한 얼굴 아래에서 녹턴은 그런 생각을 했다. 라리아가 알게 된다면 깜짝 놀랄 만큼 검고 질척한 계략이 그의 안에서 움트고 있었다.

“음, 그래서 이러한 사정으로 제4 황자 전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다시 한번 죄송해요.”

라리아가 설명을 마쳤다. 그런 그녀의 눈을 보던 녹턴이 툭 뱉듯이 물었다.

“제4 황자를 구하고 싶나?”

라리아는 움찔 놀라더니,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도와드리지 않으면 제4 황자 전하는 황제 폐하의 손에 억울한 죽임을 당하시게 될 거예요. 저는 도저히 그것을 두고 볼 수 없어요.”

행여 녹턴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조심스럽지만, 죽을 위기에 놓인 사람을 돕고 싶다는 의지만은 뚜렷한 그 눈빛.

그 모습은 녹턴의 눈에 단호한 병아리처럼 보였다.

‘……나도 어지간히도 중증이군.’

사실 그녀의 답변은 설명을 들은 시점부터 예상한 것이었다. 그는 그녀가 얼마나 다정하고 선량한 마음씨와 강한 책임감을 가졌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를 처음 볼 때부터 알았다. 그녀의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것처럼 기묘하며, 무엇보다도 따뜻한 색채를 본 그 순간부터.

그는 도저히 그런 그녀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꺾을 힘은 있었으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선하고 따뜻한 눈빛에 슬픔과 괴로움이 어리는 것을 볼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그녀와 제4 황자를 계속 단둘이 만나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 둘이 독대하는 것을 내버려 두면, 지금은 순수한 의도의 만남일지언정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라리아가 다른 젊은 남자와 꾸준히 만남을 가진다니, 생각만 해도 뱃속이 끓어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 그녀가 사정을 설명할 때부터, 녹턴의 결정은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 계획에 나도 협력하도록 하지.”

녹턴의 말에 라리아는 입을 떡 벌렸다.

‘물론, 녹턴이 도와준다면 좋기야 하지만……! 아니, 그 누구보다도 든든하겠지만! 하지만, 대체 왜?’

녹턴은 라리아에게 꾸준히 도움을 주었지만, 그의 도움 대부분은 그녀가 셔우드에 끌려가지 않고 블랙웰에 남아 있을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거까지야 그가 말했듯 라리아가 훌륭한 인재고 그녀의 능력을 마음에 들어 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이번 일은 다르다. 너무나 사적인 사정이고, 그녀의 업무와도 전혀 관련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일까지 도와주겠다고 하다니…… 설마?’

심장이 빠르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자각해 버린 뒤라서 그런지 설렘은 한층 강렬하게 찾아왔다.

라리아는 쿵쿵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착각하면 안 돼. 그냥, 그가 다정해서 그런 거겠지. 아니면 그가 나를 인간적으로도 마음에 들어 하고 있거나.’

만약에, 그가 자신을 좋은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라리아는 너무나 기뻤다. 그간 그를 위해 해 온 노력을 전부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여주인공과 그가 이어진 뒤에도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을지 몰라. 그렇게 되면 아이들도 종종 보러 올 수 있겠지…….’

그런 희망이 아주 잠깐이나마 고개를 들었지만 라리아는 애써 이성을 되찾았다.

‘아니야. 내가 그에게 아무런 마음도 없다면 모를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그의 곁에 머무르는 건 예의가 아니지. 게다가 그와 가까운 친구로 지내면 이 마음을 체념하기도 어려울 거야. 괴롭더라도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해.’

한편, 녹턴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집안 권력 싸움에 끼어드는 것은 질색이지만, 그녀가 걸려 있으니 어쩔 수 있나.’

제4 황자라는 놈과 라리아가 일대일로 만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는 언제라도 그녀를 돕고 싶었다. 그녀의 다정한 눈에 깃드는 것은 괴로움보다는 웃음이 훨씬 더 어울리니까.

‘더군다나 제4 황자를 돕는 것이 바로 황제 놈을 물 먹이는 길이니, 일석이조다.’

그렇게 생각한 녹턴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더니 책상을 한 번 톡 하고 쳤다.

“대답은?”

“아, 도, 도와주신다면 누구보다도 든든할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해요, 전하! 저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이 은혜 평생 잊지 않을게요.”

라리아가 황급히 말했다.

‘이런 사소한 건 잊어버려도 상관없으니, 그보단 어서 내 것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데.’

그런 본심은 여상한 얼굴 뒤에 숨긴 채 녹턴은 말했다.

“다만 조건이 있다. 협력하기로 했으니, 앞으로 모든 회의에는 나 역시 참석하겠다.”

에둘러 말했지만 결국 라리아와 제4 황자 둘이서만 독대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네? 하지만, 전하. 그건 곤란해요.”

“어째서지?”

“제4 황자 전하께는 감시꾼이 여럿 붙어 있거든요. 감시꾼에게 의심을 사서는 안 되는데, 제4 황자 전하와 전하께서 만나시면 분명 의심받을 거예요.”

황제는 제4 황자가 라리아를 유혹하는 계획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니까 말이다. 라리아의 약혼자인 녹턴까지 총 3인이 동석하면 누가 봐도 이상해 보일 것이다.

그녀의 말에, 녹턴은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는 것을 숨기지 못했다.

‘제4 황자 놈과 그녀가 또 단둘이 만나야 한다고?’

생각만 해도 속이 끓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녹턴은 현실과 타협했다.

“……그렇다면 나는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는 걸로 하지.”

거짓 약혼이라도 약혼이므로 자신이 외간 남자와 독대하는 것이 녹턴에게는 신경 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라리아는 쉽게 납득했다.

‘더군다나 감시꾼의 시선을 의식해 어느 정도는 데이트하는 척을 해야 하니까 더더욱.’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녹턴은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이 이 결정을 얼마나 후회하게 될지…….

* * *

얼마 뒤.

“아, 지그! 여기예요!”

라리아와 하인리히는 카페에서 만났다.

“잘 지냈어요? 라리아.”

그렇게 화려하진 않지만 단정한 차림의 지그는 라리아에게 인사하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는 다정한 인상의 그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건너편의 자리.

“…….”

그곳에는 녹턴이 앉아 있었다. 단단하게 발달된 체형을 가리기 위한 코트를 입고 모자를 눌러쓴 채였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손님.”

점원이 다가와 웃는 얼굴로 물었지만, 녹턴은 점원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의 정신은 온통 한곳에 쏠려 있었다.

“에스프레소.”

그는 짧게 대답하고 기계적으로 신문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녹턴은 신문을 읽는 척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멈춘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온 감각은 신문이 아닌 라리아와 제4 황자의 자리에 쏠려 있는 상태였다.

‘여섯인가.’

검술 마스터인 데다가 진실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는 녹턴은 감시꾼들의 기척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숫자와 위치, 강함의 정도까지도.

‘조무래기들이군. 소리소문없이 하나씩 제거해도 모를 것 같은데.’

사실 황제가 직접 붙인 자객이니만큼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실력자였으나, 녹턴에게는 그들 전부가 하찮은 조무래기로 느껴질 뿐이었다.

이대로 라리아와 제4 황자가 데이트하는 모습을 구경하느니, 차라리 조무래기들을 전부 제거해 버리는 편이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감시꾼들을 없애 버리면 황제가 이상한 것을 눈치챌 것이고, 그러면 라리아가 생각해 낸 계획이 어그러질 테니까.

그들이 데이트하는 척을 지켜보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 없이 단둘이 데이트하는 척을 하는 것은 더 싫었기에 부득불 이 자리에 나오긴 했지만.

문제는 그들이 마주 앉아 인사를 나누는 모습만 봐도 이미 속에서 화가 끓어오른다는 것이었다.

녹턴은 신문을 읽는 척하면서 라리아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제4 황자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제4 황자의 존재는 블랙웰의 정보력으로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녹턴 역시 그의 모습을 실물로 확인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녹턴이 제4 황자를 직접 본 감상은…….

‘보잘것없는 사내군. 얼굴은 반반하지만 몸은 빈약하기 짝이 없어.’

녹턴은 남의 외모를 평가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오히려 관심 없는 편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이런 것부터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저렇게 가느다란 팔뚝이라니. 스푼이나 제대로 들 수 있을는지 모르겠군.’

녹턴은 그의 팔뚝과 자신의 탄탄한 팔뚝을 번갈아 가며 곁눈질했다.

‘비록 얼굴은 곱상하다지만, 몸이 저래서야 어디 사람 구실이나 할 수 있겠나.’

마음속으로 혀를 차던 녹턴은 멈칫했다.

‘하지만…… 만약 저런 것이 그녀의 취향이라면?’

세상은 넓고 취향은 많기 마련이다.

얼굴이 예쁘고 병약하여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사내를 선호하는 여자도 간혹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만일 라리아 역시 그런 쪽의 취향이라면?

모를 일이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이상형에 대하여 이야기한 적이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초조해지고 애가 닳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만 봐도 속이 끓어올랐다.

딱히 스킨십을 하거나 다정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한편, 라리아는 하인리히에게 자신이 녹턴과 나눈 대화에 대해 설명했다.

그가 이 계획에 협력하기로 밝힌 것과 이 카페의 어딘가에 앉아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까지 전부.

“황자 전하의 사정을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 죄송해요. 급한 상황이고, 그분은 제 약혼자라서 어쩔 수 없었어요.”

하인리히는 여러모로 놀랐지만 불쾌한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아닙니다. 말씀대로 약혼자이시니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려 그분의 약혼녀에게 접근했으니 그분께는 큰 실례를 한 셈이지요. 그보다, 블랙웰 대공께서 저를 도와주시겠다고 하시다니 정말 기쁘네요. 혹시 저기 계신 저분이 대공이신가요?”

라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녹턴은 변장을 하고 최대한 존재감을 감추었지만, 키가 워낙 크고 그 두꺼운 코트로도 숨기기 어려울 정도로 풍채가 좋아 눈에 띄었다.

‘대공이나 되는 사람이 약혼녀가 걱정되어 일부러 이런 곳까지 따라 나오다니.’

하인리히는 감탄했다.

혼인이 정치적 도구로 쓰이는 제국에서는 연애결혼보다 정략혼이 훨씬 일반적이었다. 한 남녀가 약혼을 한다 해도 그들이 서로를 사랑할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그런데도 하인리히는. 녹턴 블랙웰 대공이 눈앞의 이 여자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음을 직감했다.

물론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아도 자신의 약혼녀가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는 척을 한다면 위신을 위하여 약혼녀의 행실을 감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공 정도의 지위를 가진 사람은 일반적으로 번거롭게 자신이 직접 하는 대신 사람을 쓰는 쪽을 선택하리라.

참석은 하지 않았지만 소문은 듣고 있었으므로 블랙웰 대공과 그 약혼녀의 황실 무도회에서의 행적 같은 것을 알고 있기도 했고.

그런 생각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은 채 하인리히는 미소 지었다.

“그럼, 영애의 계획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요.”

두 사람은 계획과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하여 본격적인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녹턴은 그 두 사람을 감시하느라, 아니 지켜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국에서도 한 손에 꼽힐 정도의 검술 실력과 블랙웰 특유의 뛰어난 신체 능력으로 인해, 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그에게는 두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똑똑히 보이고 똑똑히 들렸다.

그들은 전적으로 계획에 대해서만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온몸의 감각이 불쾌하게 곤두섰다.

제4 황자라는 놈이 웃을 때마다 라리아에게 흑심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저렇게 눈을 휘어서 웃을 필요가 있는 걸까? 이미 의심암귀로 가득 찬 녹턴의 눈에 제4 황자의 여상한 웃음은 상대를 홀리려고 작정한 교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웃는 것은 라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놈의 앞에서 웃을 때마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그녀가 이렇게 찬란하게 빛나는 이상, 상대가 언제 그녀의 사랑스러움을 깨닫고 반해 버리는 건 그저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황제에게도 화가 나고, 저 제4 황자라는 놈에게도 화가 났다.

원망의 화살은 돌고 돌아 급기야 제국 황실 전체를 향했다.

‘젠장! 빌어처먹을 황실. 왜 권력 문제가 그리 비비 꼬여서 이딴 상황을 만들어 낸 거지?’

그의 마음속에서는 그냥 감시꾼 놈들을 전부 없애 버리고 마지막으로 황제를 죽이러 가고 싶은 비이성적인 충동이 몇 번이나 끓어 넘쳤으나, 그는 일생일대의 자제력을 발휘하며 그것을 애써 참아 냈다.

녹턴이 일생의 인내심을 몰아서 시험받고 있다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라리아는 하인리히와의 회의에 집중했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던 그녀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어?’

한 남자가 카페 밖에서 자신들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남자는 어디에 있어도 배경에 동화될 정도로 지극히 평범한 인상이었으나, 단 하나. 특이한 점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살기였다.

‘저게 바로 하인리히가 말했던 감시꾼이구나.’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것을 깨달은 감시꾼은 표정을 확 바꾸더니, 갑자기 이쪽을 향해 걸어 들어왔다.

그는 평범한 손님인 척 라리아와 하인리히의 테이블 옆에 앉았다.

라리아는 등골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감시꾼이 접근했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하인리히가 귓가에 속삭였다.

“의심받고 있나 봅니다.”

“어째서요?”

“우리가 그리 로맨틱한 관계로 보이지 않은 거죠.”

라리아는 납득했다. 사실 자신이 생각해도 두 사람은 서로를 갓 알아 가는 연인으로 보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기에는 두 사람 사이에는 로맨틱한 기류나 스킨십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라리아의 귓가에 재빠른 속삭임이 닿았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참아 주시길.”

라리아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하인리히는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는 의외로 크고 따뜻한 손으로 라리아의 두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곤 꿀이라도 떨어질 듯한 달콤한 눈빛으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코와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그의 깊은 바다와 같은 푸른 눈이 시야에 가득 찰 때, 그가 말했다.

“라리아. 오늘따라 유난히 사랑스럽군요.”

평이한 목소리지만 옆 테이블에 앉은 감시꾼에게는 명백히 들릴 정도의 크기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와장창창!

“어머나! 손님!”

힘을 조절하지 못한 녹턴의 손안에서 에스프레소 잔이 터져나갔다. 유리 조각으로 인해 따끔거리고, 화상을 입었는지 얼얼했지만 그 정도는 녹턴에게 그리 큰 상처도 아니었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저 망할 놈이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는가!

라리아는 녹턴이 커피잔을 깼음을 깨달았다.

그가 놀랐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하인리히의 연기에 장단을 맞춰 주기로 마음먹었다.

“아, 아이. 부끄러워요.”

그녀가 수줍은 척 말하자 하인리히는 더더욱 다디단 눈빛으로 그녀의 뺨을 톡 건드렸다.

“오늘은 당신과 떨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안 돼요. 대공 전하께서 아시면 큰일이 날 거예요.”

“그는 알지 못할 겁니다. 모든 일의 책임은 제가 질 테니, 오늘은 저와 함께 있읍시다.”

되지도 않는 불륜 커플 연기를 좀 해 주자, 그들의 옆 테이블에 앉았던 남자는 의심을 풀었는지 큼큼 헛기침을 하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카페를 떠나자, 라리아는 마음속으로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녹턴이 걱정이네. 커피잔을 깬 걸 보니 좀 놀란 것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좀 놀란’ 정도가 아니었다.

드디어 회의가 끝났다. 감시꾼들의 눈을 의식해서, 헤어질 때에도 불륜 커플 흉내를 내 주는 것은 빼먹지 않았다.

“정말 가야만 하겠습니까? 좀 더 함께 있고 싶습니다만…….”

“가야 해요. 제게는 대공 전하가 있는걸요. 하지만, 제 몸은 대공저에 있더라도 제 영혼은 지그와 함께 있을 거예요.”

“또 만날 수 있겠습니까?”

“당연하죠. 다음에는 좀 더 오래 함께 있을 수 있기를.”

동화구연이나 오랜 애 보기 경력으로 인해 웬만큼 연기력이 받쳐 주는 것이 다행이었다.

라리아는 이 연기에 좀처럼 이입이 되지가 않았다. 녹턴의 시선도 신경 쓰이는 데다가, 무엇보다 하인리히에게서는 정말이지 아무런 이성적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차라리 황실 무도회 때 녹턴과 연인인 척하는 게 훨씬 쉬웠던 것 같아.’

하긴, 그건 그럴 만도 했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라 진짜였으니까. 그녀는 그에게 정말로 이성적 감정을 느끼고 있으니까.

그 사실을 깨닫자 괜히 뱃속이 울렁였다. 라리아는 잡념을 떨쳐 내려 애쓰며 대공저로 돌아갔다.

행여 감시가 붙을까 봐 녹턴과는 대공저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대공저에 돌아온 라리아는 잠시 아이들을 돌보는 업무로 돌아갔다가, 약속한 시간에 녹턴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전하.”

라리아는 집무실 문을 노크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라? 이상하네. 녹턴이 시간 약속을 어길 리가 없는데…….’

녹턴이 시간약속에 얼마나 엄격한지는 그를 창조한 라리아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라리아는, 무심코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가 집무실 문이 잠겨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전하. 시, 실례합니다…….”

그녀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녹턴의 집무실은 어두웠다. 처음 보았던 그의 집무실처럼.

처음 보았던 그의 집무실은 대체 어떻게 이런 곳에서 일을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어두컴컴했지만, 라리아의 설득으로 아이들이 무서워하지 않게 하기 위해 조명을 교체해 최근에는 대낮처럼 밝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의 집무실은 처음 보았을 때처럼 어두웠다.

‘그가 없는 건가?’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아니었다. 라리아는 등을 돌린 녹턴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사실 녹턴이 기분이 나빴을지도 모르겠다는 것 정돈 예상하고 있었다.

진심이 담긴 약혼은 아니라고 해도, 어쨌든 난 그녀의 약혼녀이니까.

내가 다른 사람과 데이트를 하는 일이 블랙웰에 이름에 먹칠하는 것이라고 여겨도 나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하인리히와 단둘이 만나지 못하게 하기도 했고.’

녹턴이 얼마나 기분이 상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전하. ……좋은 저녁이에요.”

나는 그의 등에 대고 치마폭을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그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는 이미 꽤 익숙해진 나였지만, 그때만은 숨을 삼킬 수밖에는 없었다.

“좋은 저녁? 그래. 그렇게 좋으셨다 이거지.”

비꼬는 기색이 역력한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그의 그렇게까지 화난 목소리를 처음 들어 보았다.

그 음성은 창조주인 나조차도 본능적인 두려움을 일게 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할 정도로.

게다가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그 눈. 안광이 형형한 그의 자색 눈동자.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그것은 평소보다 몇 배는 위협적이었다.

그야말로 어둠 속에서 맹수를 만난다면 딱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이 바짝 굳었다.

내가 도망조차 가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그 긴 다리로 몇 걸음 만에 내 앞에 와서 섰다.

그는 허리를 조금 숙여 날 내려다보았다. 어두운 집무실 안에서 작은 불빛으로 인한 긴 그림자가 내 위로 드리워졌다.

“그래서 그 황자 놈과의 만남은 즐거우셨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안광이 형형한 눈동자 아래로, 늘 단정하고 조각처럼 아름다웠던 얼굴은 말도 못 하게 굳어 있었다.

비틀려 올라간 입술은 웃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분노의 빛이 역력했다.

그는 얼어붙은 내 손을 낚아챘다. 방금 하인리히가 잡았던 그 손이었다.

“손도 잡고, 밀어를 속삭이고…… 둘이서 아주 좋아 죽던데. 응?”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그는 그냥 화난 정도가 아니었다.

‘진짜 엄청 대박 빡쳤구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른다는 것까지는 짐작했지만, 이 정도로 화났을 줄은 몰랐다.

늘 냉정한 그가 이렇게까지 화내는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머릿속의 사이렌이 미친 듯이 경보음을 울리고 있었다.

내 심장박동이 최대볼륨 5.1 서라운드 사운드로 느껴졌다. 내 귀에 내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아, 전하. 그, 그게 말이에요…….”

어떻게든 꺼내려던 사과의 말을 그가 가로막았다. 그는 분노에 찬 신음을 흘리더니 나를 벽에 밀어붙였다.

“아읏!”

등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통증에 나는 흠칫 놀랐다.

재수는 좀 없어도 자기 의지로 폭력적인 행동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그였기에, 나는 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전하!”

“영애, 뭔가 잊고 있는 모양인데, 영애는 내 약혼녀다.”

그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낮은 목소리는 그야말로 맹수의 울음소리 같았다.

갑자기 이 인간이 왜 이러나 싶어서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귓가를 간지럽히는 그의 속삭임에 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영애가 싫든, 말든…… 셔우드로 돌아가든, 말든…… 영애는 지금 내 여자란 말이다.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나? 응?”

그의 숨결이, 입술이, 너무나도 가까웠다. 심장이 두려움이나 당혹이 아닌 다른 감정으로 미친 듯이 요동쳤다.

그의 눈빛에, 목소리에 담겨 있는 감정은 그저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한 것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무언가가 있어서…….

위신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질투심과 소유욕이 그의 자색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것만 같아서.

나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니면, 응? 역시 그런 타입이 취향인가? 그런 막대기 같은 말라깽이가?”

나는 필사적으로 그의 얼굴에서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집요하도록 따라와서 부득불 눈을 맞추었다.

“이 작은 머리로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열어 볼 방법만 있다면 한번 열어 보련만.”

그의 손바닥이 불쑥 들어와 내 목덜미에 닿았다. 나는 견디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으, 전하…….”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쳤다. 좀 더 붙잡아 둘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 저항에 그는 의외로 순순히 밀려났다.

녹턴은 깊고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그는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아마 뜨겁게 일렁이는 감정을 다스리려는 것이리라.

“제기랄.”

그가 씹어뱉듯 내뱉었다. 그는 다시 내게서 등을 돌리더니 마른세수를 했다. 그의 등에는 후회감이 역력했다.

나를 거칠게 대한 것이 미안하고 후회되는 것이리라.

나는 어색하게 볼을 긁적이곤, 그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죄송해요.”

“……뭐가.”

퉁명스럽고 짧은 말이지만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냥…… 제가 전하의 심정을 잘 살피지 못한 것 같아서요. 맞아요. 저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전하의 약혼녀인데…… 화나시고 기분이 상하시는 게 당연한데, 괜한 짓을 해 버렸네요.”

“…….”

“아무리 연기라지만, 약혼녀가 다른 남자랑 손도 잡고 막 그런 일 하는데 전하의 마음이 어떠셨겠어요. 정말 죄송해요.”

최선을 다해 사과를 했지만, 그의 기분은 조금도 풀린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괴로운 듯이 그는 신음을 흘리며 제 머리털을 헤집어 댔다. 그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대체 왜!”

그가 등을 돌린 채 제 가슴을 쥐어뜯었다.

“왜 그렇게 늘 남의 마음만 신경 쓰지? 자신이 겪은 것을…… 자신이 당한 것에 집중하면, 뭐가 어떻게 되기라도 하나?”

“아뇨, 전…….”

“제기랄…… 망할! 나도 알고 있단 말이다.”

녹턴이 내 말을 끊었다. 나는 잠자코 그가 말하는 것을 듣기로 했다.

그는 한참을 주저하다가, 간신히 내뱉었다.

“이 상황에서…… 정말 사과해야 할 사람이 누군데!”

그리고, 정적.

잠시 우리 둘 모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그의 가쁜 숨소리와 나의 두근대는 심장뿐이었다.

그는 주저하듯 등을 돌리고 서 있다가, 곧 나를 돌아보았다.

“제길, 미안하다. 괜히 말이 길었군.”

그가 오른손을 들어 제 얼굴을 문질렀다.

움직이는 손 뒤에서, 붉어진 귀가 언뜻 보였다.

“오늘은 이만 퇴근해도 좋…….”

그런데 그때였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그의 오른손의 붉은 얼룩. 그제야 나는 기억이 났다. 그가 아까 카페에서 커피잔을 깼다는 것을.

나는 기겁했다.

“세상에! 전하! 그, 그 손. 치료 안 받으셨어요?”

녹턴은 생각도 못 했다는 듯이 의아한 눈으로 날 보았다.

“뭐?”

“이렇게 심하게 데이셨다니! 세상에. 왜 말씀 안 하셨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프레드릭을 데려올게요.”

녹턴은 당장에라도 집무실을 뛰쳐나갈 것 같은 나를 붙잡았다. 그가 다급히 말했다.

“아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이깟 걸로 의사는 무슨……. 이 정도는 푹 쉬면 낫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세요! 그럼, 적어도 소독만이라도 해요. 네? 감염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녹턴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제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그의 태도를 보니, 이 정도 간단한 상처는 늘 치료는커녕 응급처치조차 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서 살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 눈에 띈 이상 어림도 없지!’

나는 그를 향해 의지가 확고한 눈빛을 보냈다. 이래 봬도 난 한 고집 하는 사람이었다. 절대 그냥은 물러나 주지 않을 것이다.

날 빤히 보던 그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럼 소독만 하지. 그 이상은 안 된다.”

“네!”

그제야 난 얼굴이 환해졌다. 나는 얼른 하녀를 불러 구급상자를 가져오길 부탁했다.

곧 배달된 구급상자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나는 붕대와 소독약 등을 꺼냈다.

병설 유치원에는 보건실이 있긴 하지만, 나도 마데카솔 정도는 많이 발라 줘 봤다.

애들이 뛰어놀다 무릎 깨 먹고 혹 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셀 수도 없을 지경이니까.

꽤 능숙하게 붕대를 자르고 처치할 준비를 하는 날 보고 녹턴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직접 해 주려고?”

“그럼 혼자 하시게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 그에게 손을 내밀라는 뜻의 제스처를 취했다.

녹턴은 높이를 맞춰 주려는 듯 나를 의자에 앉게 하고 자신이 바닥에 앉았다. 그 상태에서 손을 내미니, 놀랍게도 그 높이는 내게 딱 맞았다.

“조금 쓰라릴 거예요.”

습관적인 말이었지만, 할 필요도 없는 말이었던 것 같았다. 소독약으로 닦고 고약을 바르고 붕대를 대는 동안 그는 눈썹 한 가닥 까딱하지 않았으니까.

육체적 고통에 익숙할 그의 삶이 떠올라 갑자기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자, 다 됐어요!”

내 말에 녹턴은 자기 손을 끌어당겨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가 물었다.

“……리본은 왜 묶어 놨지?”

“음, 기왕이면 예쁜 게 좋으니까…… 요?”

사실 그냥 직업병이다. 아이들은 언제나 예쁘게 장식해 주는 것을 좋아하니까.

내가 멋쩍게 볼을 긁적이자, 녹턴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말했다.

“고맙군.”

“뭘요. 이 정도쯤이야.”

녹턴은 작은 리본이 묶인 제 손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가 퇴근하라고 했던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좋은 밤 되세요.”

“영애.”

일어나려던 나를 그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다음으로 들려온 말은, 정말이지 나로선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영애는 정말로 내게 아무런 마음도 안 드나?”

내가 그 말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너무나도 내 예상에서 어긋나 있었으니까. 내 안에서 너무나 확고부동했던 ‘그’에 대한 지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애써서 이해하려고 해도, 내 입장에서는 그의 말을 해석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과부하 걸린 로봇처럼 이런 말만을 입에 담았다.

“……네? 저, 전하. 그, 그게 무슨…….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내가 착각을 한 거겠지? 잘못 이해한 거겠지, 그야 그가 그럴 리가 없잖아? 왜냐하면 그는…….

하지만 내 필사적인 합리화를 비웃듯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달랐다.

그는 제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 정말이지. 영애, 나는 영애가 눈치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어떨 때는 아주 기민하게 머리가 돌아가는 것 같으면서 이럴 땐 또 어린애처럼 눈치가 없는 것 같으니…….”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붉었다. 들릴 리가 없는 그의 심장박동이 내 귀에 들릴 것처럼.

“정말로 영애는, 내게 고용주 이상의 관심은 없느냐고 물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야, 내가 정말로 다섯 살 먹은 어린 애도 아니고. 연애 경험은 없다지만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고 직접 써 보기까지 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그는 내 손으로 만들어 낸 나의 창조물이었다. 그런 그가 내 손을 벗어났다는 생각은 창조주로서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내게 연심을 품지 않는다는 것은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만큼, 사과는 땅으로 떨어지고 연기는 하늘로 피어오른다는 것만큼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니까.

그 법칙을 만들어 낸 사람이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으니까.

“하지만, 고용주 외의 어떤……?”

내가 필사적으로 눈치 없는 척을 하자 그는 정말로 답답해진 듯이 말했다.

“영애에겐 내게 남자로서의 매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런 말을 하는 그가, 붉어진 얼굴을 목 근육이 도드라질 정도로 애써 돌리고 있는 그가 내겐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말문이 막혔다. 할 말이 없다기보다는 오히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그중 어떠한 것부터 입에 담아야 할지가 알 수가 없어서.

그런 내 침묵을 어떻게 이해한 건지, 녹턴은 다시 한번 마른세수를 하곤 말했다.

“정말이지, 내가 이런 말까지 입에 담게 하다니 영애도 정말 강적이군. 뭐, 어쩔 수 없지. 내가 이해하겠다. 원래 좋아하는 쪽이 지는 거라고 하지 않나.”

내가 아는 그는 원래 결코 수다스러운 편은 아니건만, 오늘따라 유난히 말이 많았다. 아마 그도 그만큼이나 부끄럽고, 혼란스러운 것이리라.

하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좋아하는…… 쪽이요?”

반쯤 넋이 나간 내 되물음에 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래. 그렇게 됐다.”

“…….”

“언젠가부터 영애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어. 이런 마음이 있었다고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그런 복잡한 감정이야.”

얼굴이 불타오를 것만 같아서, 차마 그에게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지만, 그의 시선만은 느껴졌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세상에 다른 것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이, 오직 나만을. 그 강렬하고 뜨거운, 하지만 어쩐지 부드러운 눈으로.

“첫…… 사랑이다. 영애. 그런 걸로 내 미숙함과 한심함을 이해받을 생각은 없다만, 영애의 대답은 궁금하군.”

떨구고 있던 내 시야 안에 그의 손이 언뜻 들어왔다.

그의 손바닥에는 땀이 배어 있었다. 그렇게나 강하고, 모든 면에서 뛰어나며, 오만하도록 자신감 넘치는 그 남자는 내 앞에서 긴장하고 있었다.

황제의 앞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한갓 귀족 영애일 뿐인 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가 거절의 말을 입에 담을까 봐, 그를 한 번도 그런 눈으로 본 적이 없다고 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 사실이, 심장이 쥐어 짜이듯 아팠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그의 두려움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 숨 막히게 괴로울 정도로.

하지만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비수로 쑤시는 듯한 아픔을 참아 내며 나는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저는 이제까지…… 한 번도 전하를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어요.”

“…….”

“전하를 존경하고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연애 감정은 아니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만, 도저히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야, 지금 그의 마음이 어떻다고 해도, 그가 곧 여주인공을 만나리라는 것은 정해진 사실이니까.

그때 그는 여주인공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 것이다. 그것은 그가 이 작품의 남주인공인 이상 정해진 운명이었다.

내가 그의 마음을 받아들여서 연인이 된 이후 그가 여주인공을 만나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나는 도저히 그 상처를 이겨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차라리 여주인공을 만날 날이 멀기라도 했으면, 미친 척하고 잠깐이라도 사귀어 볼 텐데…….’

그런 선택을 하기에 여주인공이 나타나는 것은 고작 다음 달의 일.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아마 이런 아픔은 내 삶에 다시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나도 그런데, 그의 마음은 어떨까. 차마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상처받기 싫어 이런 선택을 한 내 이기심이 너무 죄스러워서. 언제나 날 도와주기만 했던 그의 다정함이 너무 가엾어서. 미안해서.

“그런가.”

한참 후에야 떨어진 그의 목소리는 생각 외로 담담했다.

그가 조금 쉰 듯한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짝사랑이었군.”

또다시 찾아온 침묵 끝에, 그가 말했다.

“기다리겠다.”

그 말에, 나는 퍼뜩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기다리지 마세요. 제 마음이 바뀔 일은 없을 거예요.”

고개 숙인 내 얼굴에서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런가? 한데 이상하군.”

묘하게 웃음기가 어린, 그 음색. 어쩐지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달래 주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한…….

“차인 건 난데 왜 영애가 울고 있지?”

“……!”

뺨에 작은 온기가 와 닿았다. 그의 손가락은 내 뺨을 부드럽게 쥔 채 들어 올렸다.

시야는 눈물로 온통 흐린데도…… 허공에서 그의 눈빛과 내 눈빛이 맞부딪쳤다.

자존심 세고 오만한 그는, 이런 아무것도 아닌 귀족 영애에게 거절당했으니 화가 날 만도 한데. 그의 눈은 조금도 화를 내고 있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다정한 눈으로 볼 수 있는 건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이건…….”

내가 변명을 하려던 찰나였다.

톡, 하고. 그의 입술이 내 눈가에 내려앉았다. 가볍고 달콤한 그 감촉. 남자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왜 아닌 척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애.”

내 눈가에 입 맞춘 그는 오래지 않아 입술을 떼었다. 그가 속삭였다.

“기다리지. 영애가 준비될 때까지.”

이 눈치 빠른 인간. 그걸 대체 어떻게 안 거야? 나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버벅거리며 말했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정말로, 저 전하 안 좋아하는데요…….”

“그래, 그래. 그런 걸로 하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태도는 어느샌가 여유를 되찾고 있었다. 그야말로 내가 알던 오만하고 밥맛없는 녹턴 블랙웰, 그대로였다.

‘정말이지, 이런 짓을 해 버리면…….’

그의 손에 뺨을 붙잡힌 채, 나는 생각했다.

‘대체 당신을 어떻게 그만 좋아하냔 말이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영영 느려지지 않을 것만 같이, 세차게. 오직 그만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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