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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렇게 시간은 흘러, 마침내 파티 당일.
수도에 거주 중인 자네트와 미하일 또래의 귀족 어린이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아, 만 4살부터 10살까지의 어린이에게는 전부 초대장을 보내놓은 상태였다.
전원에게서 참석하겠다는 답장을 받긴 했지만 나는 회의적이었다.
‘어른의 사교 행사도 아니고 아이의 사교 행사에 신경을 쓰는 부모가 몇 명이나 될까?’
제국에서 아이들과 관련된 사교 행사라곤 아이의 생일 연회, 혹은 아이의 기념일과 관련한 파티 정도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아이를 이유로 모인 어른들의 사교 행사에 가까웠다. 제국의 어른들은 아이들의 즐거움에 큰 관심이 없었다.
‘전원이 참석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참가하는 아이는 몇 명 안 될 가능성도 있어. 만일 그렇게 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자.’
나는 미리 각오를 다지곤, 파티 직전까지 내가 준비해 놓은 모든 것들을 체크하고 또 체크했다.
마침내 예정된 시간이 되었다. 조마조마하며 창가에서 왔다 갔다 하던 나는 첫 번째 마차가 대공저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왔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부리나케 현관으로 달려갔다. 파티의 주최자로서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안녕하세요, 셔우드 영애. 저희 아이를 이렇게 파티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파티의 첫 손님은 맨슨 자작 부인과 그녀의 4살짜리 딸과 6살짜리 아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미소로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제가 준비한 파티에 와 주셔서 기뻐요. 공녀님과 공자님도 무척 기뻐하실 거예요.”
자작 부인이 내 옆에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물론 자네트와 미하일은 처음 보는 또래 친구들을 경계하며 멀뚱거리고 서 있을 뿐이었다.
“어머!”
아이들을 본 맨슨 부인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공자님과 공녀님께서 입으신 옷이 아주 특이하네요. 특별주문을 넣어서 제작하신 건가요?”
나는 오늘의 파티를 위해 아이들의 옷도 신경 썼다.
이곳 제국에서는 아이들을 단장시킬 때 일반적으로 어른의 옷을 그대로 크기만 축소시킨 듯한 옷을 입히지만, 나는 디자이너에게 아이의 체형에 맞는 편안하고 튼튼한 옷을 부탁했다.
이번 파티가 아이들은 앉혀 놓고 어른들 보기에만 좋은 자리가 아니라, 편안하고 즐겁게 뛰어놀 수 있는, 아이들을 위한 자리가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귀여우면서도 편안한 옷을 입고 있었다.
미하일이 입은 옷은 시원하고 활동성을 높이도록 재킷을 생략했으며, 크라바트와 같은 덜렁거리는 장식도 없었다.
셔츠의 안쪽으로는 튼튼한 멜빵으로 하의를 고정했으며, 특히 바지는 파격적이게도 반바지였다.
그 모습은 무척이나 시원하고 편안해 보였다.
자네트 역시 훨씬 편안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불필요한 장식을 생략하고 치마의 기장은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오도록 하여 뛰고 활동하는 데에 불편함이 없게끔 했다.
아이들이 쌍둥이라는 점에서 착안하여, 두 아이의 옷은 세트로 보이도록 색상이 같았다.
이렇게 옷 입히는 데만 해도 정성이 잔뜩 들어갔으니, 맨슨 부인의 칭찬에 한껏 뿌듯해질 수밖에 없었다.
“감사해요. 이번 파티를 위해 특별히 주문한 옷이랍니다. 아이들의 높은 활동성에 맞게 편안하고, 여름에도 덥지 않도록 시원하게 만들어 보았어요.”
사실 다소 걱정했었다. 이곳의 귀족 남성들은 체면 때문인지 한여름에도 반바지를 입지 않는다.
여자들의 옷도 마찬가지였다. 귀족 여성들의 드레스는 기장이 언제나 발목까지 오곤 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아이들에게 무릎까지 오는 바지와 드레스를 입혔으니, 너무 파격적이진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녹턴이 괜찮다고 해 주지 않았으면 이런 옷을 입힐 용기는 내지 못했을 거야.’
하지만, 맨슨 부인이 개방적인 사람인 건지, 아니면 아이들이 어려서 그런 건지, 그녀는 아이들의 옷이 매우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쩜! 무릎까지 오는 기장이 정말 귀여워요. 저는 왜 이런 스타일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요?”
“자작 영식과 영애도 이런 옷이 잘 어울릴 것 같은걸요. 한번 입혀 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어머, 그래도 될까요? 정말 마음이 넓으시네요!”
나는 고마워하는 맨슨 부인과 그녀의 아이들을 파티를 위해 꾸며 놓은 홀로 안내했다.
이후로도 파티의 손님들은 속속 도착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자네트와 미하일의 옷에 좋은 반응을 보였으며,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입히고 싶어 했다.
손님들 중에는 호위 기사를 대동한 세드릭 황자 역시 있었다.
“제국의 작은 태양,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안녕하심니까, 셔우드 영애. 블랙웰 영식. 영애.”
8살이라 그런지 상당히 그럴싸한 발음으로 세드릭 황자가 내 인사를 받아 주었다.
황제와 황후 부부는 바쁘기 때문인지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황자이기 때문일까. 세드릭 황자는 부모 없이도 의젓해 보였다.
‘아마 부모님이 곁에 없는 것이 익숙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의젓해 보이는 황자가 새삼 안쓰러워졌다.
‘황자든 뭐든, 모든 어린이는 엄마 아빠한테 맘껏 응석 부리면서 자라야 하는데 말이야.’
정각이 되자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나와 아이들이 준비한 장식은 무척 반응이 좋았다.
“우와아!”
홀에 들어서는 모든 어린이 손님들이 내뱉은 말이었다.
뛰거나 장난쳐도 다치지 않도록 모서리가 날카로운 가구는 전부 치우고, 바닥에는 푹신한 바닥재를 깔았다.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장난감을 잔뜩 배치했으며, 셋이서 만들었던 수공예품을 천장에 달았고, 벽에는 자네트와 미하일의 그림들을 액자에 걸어 전시했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창문에는 색색의 유리알들이 햇살을 반사하며 알록달록한 빛을 뿜어내는 썬캐쳐를 달았는데, 이것 역시 내가 구슬을 일일이 꿰서 만든 것이었다.
사실 파티장이라고 하기보다는 유치원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어머, 얘!”
“다니엘! 어디 가는 거니!”
이 모습을 본 어린이 손님들이 신이 나서 엄마의 품을 벗어나 뛰어나간 통에 귀부인들이 당황했지만, 나는 그녀들을 안심시켰다.
“괜찮아요. 아이들이 마음껏 놀도록 놔두세요. 결코 다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썼고, 하녀들에게도 잘 지켜보도록 지시했으니까요.”
“하, 하지만…….”
귀부인들 중 내 말에 바로 납득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제국에서 아이들은 작은 어른이었고, 귀족인 이상 아이라고 해도 체통을 지켜야만 했다.
이제껏 그런 교육방침으로 아이를 키워 왔다.
자신들 역시 그렇게 자라났으니 모든 어른들이 자신의 아이가 체통 없이 뛰어다니거나, 파스텔로 벽에 낙서를 하거나, 양동이를 머리에 뒤집어쓰는 것을 말리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곱게 키운 자신의 아이들이 망아지처럼 날뛰는 모습을 보며 조마조마해하는 귀부인들에게 내가 말했다.
“자, 옆방으로 가시겠어요? 어른들을 위한 음식과 연주회를 준비해 두었답니다.”
이 파티의 메인은 아이들이지만, 아이들을 데려온 어른들을 위한 즐길 거리도 간단히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아이들을 말리다 못해 지친 귀부인들은 내 설득에 옆방으로 이동했다. 그녀들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리라.
어른들을 위한 방은 아이들을 위한 홀에 비해서는 작았지만 꽤 평범한 파티장처럼 꾸며 놓았으며, 어른들을 위한 핑거푸드와 음료, 교향악단을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귀부인들을 옆방으로 안내한 뒤 나는 다시 아이들이 있는 홀로 돌아왔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아이들은 특유의 상상력을 발휘하며 제법 재미나게 놀고 있었다.
‘파티에 먹을 것이 빠질 수는 없지.’
나는 시종들에게 준비해 놓은 간식을 내오게 지시했다. 곧, 홀 중앙의 테이블에 맛난 간식거리가 잔뜩 진열되었다.
이 테이블과 의자 역시 아이들의 체형에 맞추어 작은 사이즈로 제작한 것이었다.
달콤한 과자들이 줄을 이어 나오자,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나, 달콤한 것을 마다하는 어린이는 없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자아, 마음껏 드세요!”
“와아아!”
아이들이 테이블로 몰려들었고, 하녀들은 바삐 접시에 간식을 담아 주기 시작했다.
7살 이상의 어린이들은 그래도 예절교육을 받은 덕분인지 제법 질서정연하게 줄을 섰고 포크와 나이프를 쓰는 데 익숙했다.
다소 흘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야 하녀들이 닦아 주거나 식사를 도와주면 해결될 정도였다.
하지만 6살 미만의 아이들은 상황이 달랐다. 파티로 인해 흥분했기 때문일까?
아이들은 머드케이크를 정신없이 손으로 퍼먹거나, 음식을 전부 흘리거나, 심지어는 과일을 서로에게 던지는 등 야단도 아니었다.
‘귀부인들이 아이와 떨어지기 싫어했을 만도 하네.’
그래도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파티에 온 아이는 40명 정도였지만 유치원과 달리 나를 도와줄 하녀들이 매우 많았고, 내가 맡았던 만 5세 반보다 나이가 많거나 어른스러운 아이들이 많았다.
‘이 정도면 바쁜 것도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는 내 눈에 한 아이와 귀부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이들과 함께 참석한 어른들은 대부분 옆방으로 보내긴 했지만, 아이와 함께 남은 부모도 몇 명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인 것 같았다.
귀부인은 5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포크를 쓰지 않고 과자를 손으로 먹으려고 하자 아이에게 타박을 하고 있었다.
“리즈! 너는 어쩜, 5살이나 된 애가 포크 하나 제대로 못 쓰니?”
그녀가 맞은편에 앉아서 간식을 먹는 아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 애를 좀 보렴, 저 애는 너보다 작은데 포크를 저렇게 잘 쓰잖니!”
“으우…… 그치마안…… 불편한데에…….”
“불편하긴 뭐가 불편하다는 거니? 그래서 계속 그렇게 상스럽게 먹겠다는 거야?”
그녀가 시끄럽게 굴자 몇 명의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그쪽으로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캐슬턴 부인. 제가 도움을 드려도 될까요?”
“어머, 셔우드 영애……. 물론이죠.”
캐슬턴 후작 부인은 자신이 소란스럽게 굴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자각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물러섰다.
나는 리즈의 옆에 앉아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엄마에게 야단맞은 리즈는 입가에 머드케이크를 잔뜩 묻힌 채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아, 캐슬턴 영애. 여길 보실까요?”
아이가 시선을 끌어올려 나를 보았다. 내가 말했다.
“영애, 이 케이크가 공주님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포크는 공주님이 탄 마차고요. 공주님은 밤이 되기 전에 마차를 타고 성으로 돌아가야 해요. 그래야 왕자님을 만날 수 있죠.”
“……왕자님은 어디 이써요?”
내가 동화책을 읽어 주는 어조로 말하자 시무룩해져 있던 리즈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리즈가 호기심이 담긴 어투로 물었다.
나는 빙긋 웃으면서 리즈의 배를 가리켰다.
“왕자님은 여기, 영애의 배 속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자, 공주님이 마차를 타고 왕자님을 만날 수 있게 해 줄래요?”
“네!”
리즈는 의자에 앉은 채로 팔과 다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나는 포크로 간식을 조금 집었다.
“그럼, 첫 번째 마차 갑니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나는 포크를 가로로 들고 마차가 흔들리는 움직임을 흉내 냈다. 리즈의 파란 눈동자가 흥미로운 듯이 포크의 움직임을 좇았다.
포크가 리즈의 얼굴에 가까워지자 나는 “아” 하고 입을 벌려 보였고, 리즈도 따라 했다. 나는 포크를 리즈의 입안에 쏙 넣었다.
“옳지! 잘했어요!”
“에헤헤.”
칭찬이 기분 좋았는지 리즈가 웃었다. 리즈가 케이크를 냠냠 씹어 삼키는 걸 보고, 나는 포크로 간식을 조금 더 떴다.
“그럼, 두 번째 마차도 보내 볼까요?”
“네에!”
그렇게 두 입, 세 입. 몇 번인가 케이크를 떠먹여 준 뒤 내가 말했다.
“자, 이제 영애 혼자서도 공주님과 왕자님을 만나게 해 줄 수 있겠죠? 어디, 한번 해 볼까요?”
“네!”
리즈는 내가 내미는 포크를 받아 들어 스스로 케이크를 떠먹기 시작했다. 조금 서툴긴 했지만 그래도 스스로 해낸 것이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캐슬턴 부인은 아이가 스스로 포크를 쓰는 모습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대…… 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혼자서는 절대 포크를 쓰지 않는 아인데…….”
“별거 아니에요. 그냥 5살짜리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주었을 뿐이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들은 어른과 달리 상상력이 정말로 풍부하니까요. 그리고 아이들은 혼낼 때보다 칭찬을 해 줄 때 더 잘 해낸답니다, 캐슬턴 후작 부인.”
그러자 캐슬턴 부인은 아까 아이를 윽박질렀던 일이 떠올랐는지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해요. 셔우드 영애께서 아이를 이렇게 잘 다루시는 줄은 생각도 못 했네요.”
“잘 다룬다기보단 좋아하는 쪽에 더 가깝답니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마음껏 먹고 즐기세요. 조금 이따 4시부터는 여러분이 굉장히 좋아할 만한 일이 기다리고 있답니다. 바로 ‘론도의 기사’ 시리즈 인형극이에요!”
“‘론도의 기사’?”
“정말?”
내 말에 아이들이 놀라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렇다. 내가 아이들을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은 간식뿐만이 아니었다. 하나가 더 있었는데, 바로 인형극이었다.
요즘 어린이들 사이에서 최고로 인기 있다는 동화책 ‘론도의 기사’ 시리즈— 기사의 모험담을 담은 로망스 장르의 동화였는데, 아주 흥미진진한 내용과 근사한 그림이 담겨 있어 서점에서는 없어서 못 팔 정도라고 한다.
그 인기는 현대 한국에 비견하자면 유통령 뽀로로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도 인기가 많아 나도 읽어 보았는데 굉장히 재미있고, 내용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수도의 몇 안 되는 인형극을 공연하는 극단에 연락해서 ‘론도의 기사’ 시리즈를 인형극으로 만들어 달라고 주문을 넣었다.
다행스럽게도 인형극은 정말 잘 만들어졌다. 며칠 전 리허설을 보고 왔는데, 그때의 감동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릴 정도였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인형극은 내 비장의 카드였다. 오늘의 파티를 최고로 재미있게 만들 비장의 카드!
“들었어? ‘론도의 기사’래!”
“인형극이라니, 재밌겠다!”
아이들 역시 한껏 기대한 것이 보였다. 아이들은 기대감에 들뜬 눈을 빛내며 인형극과 ‘론도의 기사’에 대해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 사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그러케 하는 게 아니야!”
이 날카로운 목소리. 틀림없이 자네트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파티 진행에 정신이 팔려서 자네트와 미하일에게 신경을 못 썼네.’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과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이 되어, 나는 얼른 자네트의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했다.
자네트는 다른 아이 세 명과 함께 놀고 있었다.
이들이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은 아동용 크리켓 배트와 공 세트였다.
공은 맞아도 아프지 않도록 털실을 뭉쳐 만들었으며, 크리켓 배트도 아이가 휘두를 수 있도록 속이 비어 가볍고 크기도 훨씬 작았다.
자네트는 배트를 들고 휘두르는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바, 이걸 이러케…… 이케 치는 거야.”
“한번 쳐 봐!”
자네트가 공을 치는 시늉만 하자, 한 남자아이가 놀리듯이 말했다.
“그래 봤자 진짜 치진 못하지?”
“내가 왜 못 해?”
“넌 딱 봐도 약하게 생겼잖아.”
다른 남자아이가 그 말에 히죽히죽 웃었다.
“넌 이거 말고 저기 가서 구슬치기나 해.”
남자아이가 가리키는 곳에서는 몇 명의 아이가 구슬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아이들의 무례한 말에 자네트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딱 그녀가 화내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저러다 한 대 치는 거 아냐?’
자네트가 아이들의 머리채라도 잡기 전에 끼어들어야겠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때…….
따악!
주변의 아이들이 놀라 돌아볼 정도로 큰 소리와 함께, 자네트가 배트로 공을 날렸다.
공은 털실로 이루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 10m 밖의 벽에 처박혔다.
공이 스치고 지나간 남자아이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아, 실수해따.”
자네트가 씩 웃었다.
“맞추려구 한 건데.”
자네트를 놀리던 남자아이가 입을 떡 벌렸다. 그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져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어른인 내가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속도였으니 털실 공이라고 해도 꽤 위협적으로 느껴졌을 거다.
늘 5살치곤 힘이 세다고 느끼긴 했지만, 이번에는 나도 놀랄 정도로 대단한 신체 능력이었다. 과연 블랙웰의 장녀라고 할 만했다.
‘어쨌든……. 자네트, 나이스!’
나는 짓궂은 아이에게 멋지게 한 방 먹여 준 자네트가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다들 봤지? 저 애가 우리 공녀님이야!’
혼자 소리 없는 주접을 떨고 있는데, 근처에 있던 다른 남자아이가 끼어들었다.
“방망이를 든 애한테 까불면 안 되지.”
‘어? 저 아이는…….’
나는 그 아이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하지만, 자네트에게 한 방 먹은 남자아이는 그러지 못한 모양이었나.
“씨이, 넌 또 뭐야! 왜 끼어들어서 잘난 척이야?”
남자아이는 마침 화풀이할 곳이 필요했던 모양인지, 자네트의 편을 들어 준 아이를 퍽 밀쳤다.
아이는 비틀거리다가 나가떨어졌고,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끼어들었다.
“황자님! 괜찮으세요?”
“뭐! 황자?”
나는 세드릭을 살폈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바닥재를 푹신한 것으로 깔아 두기 잘했다 싶었다.
세드릭을 밀친 아이는 다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상대가 황자씩이나 되는 줄은 저도 몰랐을 것이다.
“이 녀석, 황자 전하께 무슨 짓이냐?”
“감히 옥체에 손을 대다니! 어리다고 봐주지 않을 줄 알아라.”
심지어 잠깐 한눈을 팔고 있던 세드릭의 호위 기사들까지 끼어들어 소년을 윽박질렀다.
“으…… 윽……! 잘, 잘못했어요!”
소년은 9살 정도로 보였고, 이 파티장에서는 제일 나이가 많은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젠 슬슬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호위 기사들과 소년의 가운데에 끼어들어 말했다.
“잠깐만요, 아이를 그렇게 강압적으로 대하지 말아주세요.”
“하지만 영애, 이 녀석이 황자 전하께 어떤 무례를 저질렀는지 영애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봤지만, 그래도 애들인걸요. 그런 식으로 대하시는 것은 옳지 않아요. 보세요, 거의 울려고 하고 있잖아요?”
내가 가리키는 곳에서는 소년이 울먹거리고 있었다.
“나 집에 갈래…… 엄마…….”
“이 애의 부모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알려서 훈육하게 할 테니, 더 큰 벌을 주지는 말아 주세요.”
“하지만, 황자 전하의 옥체에 손을 대는 것은 중죄입니다.”
“맞습니다. 이 녀석에게 죄에 상응하는 벌을 주어야 합니다.”
정말이지 말이 안 통한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곤 말했다.
“그렇게 치면 황자 전하를 제대로 호위해야 할 여러분들이 한눈을 팔았던 것도 사실이잖아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로 처벌받고 싶으신가요?”
“그, 그건…….”
당황하던 기사들의 옷자락을 누군가가 당겼다. 황자 세드릭이었다.
“난 괜찮다. 저 녀석에게 너무 뭐라고 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황자 전하.”
그제야 기사들은 입을 다물고 한발 물러났다. 나는 이런 일에 익숙해 보이는 세드릭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래선 애들이랑 놀기만 해도 기사들이 말리려고 하겠구나. 황자로 지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겠는걸.’
아니나 다를까 기사들까지 끼어든 이 소동을 보고 수군거리는 아이들이 보였다.
“…….”
그런 아이들을 뒤로하고 뒤돌아서는 세드릭의 등이 이상하게 외로워 보였다면 지나친 생각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바로 그때였다.
“너!”
나는 깜짝 놀랐다. 세드릭이 황자임을 알고도 스스럼없이 삿대질을 하며 너라고 부르는 아이가 있으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심지어…… 내 공녀님이라면?
“공녀님!”
내가 작은 소리로 불렀지만 자네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기사들과 함께 자리를 뜨려던 세드릭은 깜짝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자네트는 크리켓 배트를 든 채 말했다.
“크리켓 할 줄 알아?”
“크…… 크리켓?”
세드릭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트는 이리로 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그럼 가치 해.”
“하, 하지만…….”
세드릭은 기사들을 흘끗 보았다. 세드릭이 공에 맞거나 하면 기사들이 또 뭐라고 할까 봐, 그것을 걱정하는 것이리라.
“일부러 나랑 놀아 주려 하지 않아도 돼.”
세드릭이 얼굴을 붉힌 채 말했다. 하지만 자네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먼 소리야? 크리켓 하려면 수가 마자야 댄단 말야. 한사람 부족하니까 가치 해.”
“…….”
“하꺼야? 말꺼야?”
자네트가 독촉하듯 물었다. 세드릭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
세드릭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싫은 건 아닌 듯이 입꼬리가 살풋 올라와 있었다.
자네트가 함께 놀던 애들 무리에게로 세드릭을 데리고 가며 물었다.
“이름이 머라구?”
“……세드릭.”
“난 자네트야.”
자기소개를 하던 자네트는 갑자기 등 뒤의 어느 곳으로 손을 쭉 뻗었다.
“그리구 저기 쟤는 미하일. 내 동생.”
그곳에서는 미하일이 다른 애들 몇 명과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다들 즐거워 보였다.
“그렇구나. 자네트…… 미하일…….”
세드릭이 상기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네트와 세드릭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더니 이내 크리켓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나는 어마어마하게 감동을 받았다.
‘우리 공녀님, 공자님이 또래 친구들과 이렇게 잘 어울리다니! 게다가 다른 친구를 배려해 주기까지 하다니!’
어쩜 이렇게 잘 자랐을 수가! 둘 다 착한 아이라서 그런 걸까? 친자는 아니라고 해도 녹턴의 아이라서, 그의 다정한 마음을 닮았나?
하지만 감동만 받을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세드릭의 호위 기사들이 또 아이들이 노는 것을 훼방 놓을까 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네들은 다른 아이들이 세드릭에게 실수라도 할까 봐 따가운 눈초리를 부라리고 있었다.
‘황제 부부에게 명령을 받은 건지, 아니면 본인들의 충심이 과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호위들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그렇게 보시다가 아이들 얼굴이 뚫리겠어요. 호위도 좋지만 좀 쉬엄쉬엄하시지요.”
“영애, 저희에겐 황자 전하를 빈틈없이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어른의 보호도 필요하지만, 어느 정도의 자율성도 필요하다고요. 진정 황자 전하를 위하신다면 지금은 황자 전하께서 마음껏 노시도록 내버려 두세요.”
기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머뭇거렸다. 나는 그들을 위해 의자를 꺼내 주고 강제로 앉혔다.
“정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으시면 여기 앉아서 보세요. 그리고, 애들이 설령 싸우더라도 절대 윽박지르거나 하지 마시고요.”
기사들은 다소 떨떠름해 보였으나 그래도 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
사교 행사장에서 주최자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건 큰 결례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한 하녀가 내게 달려와 말했다.
“아가씨! 큰일이 났어요.”
“큰일이라니?”
하녀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글쎄…… 파티장에 억지로 들어오려는 분이 있어요!”
“뭐?”
어린이 파티에 억지로 들어오려고 하다니, 이게 대체 어떤 무뢰배인가 했다.
내가 현관에서 그 무뢰배의 얼굴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니, 아돌프!”
“누님!”
문지기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사람이 아돌프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기겁을 했다.
문지기에게 화를 내던 아돌프는 나를 보자마자 눈꼬리 끝을 떨어뜨리고 억울한 얼굴을 했다.
“누님! 글쎄, 이 자식들이 나더러 초대자 목록에 없어서 들어갈 수가 없대! 뭐 이런 얼간이들이 다 있어?”
나는 그제야 새까맣게 잊고 있던 아돌프의 편지를 떠올렸다.
아돌프가 진짜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입장 가능자 목록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는데, 설마 이렇게 직접 와줄 줄이야!
“미안해, 아돌프. 내가 너무 바쁜 나머지 깜빡 잊어버렸네.”
“뭐어? 누님!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아돌프는 억울해하며 내 안내에 따라 홀로 들어왔다. 들어오는 길에 문지기를 한 번 쏘아봐 주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돌프는 나름대로 파티에 온답시고 신경 쓴 건지 옷도 평소보다 잘 차려입고, 손에는 꽃다발까지 들고 있었다.
내 시선이 꽃다발에 닿자, 아돌프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자. 이거 가져.”
갓 다듬은 듯 싱싱한 프리지아가 한가득한 꽃다발이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곤 활짝 웃으며 프리지아 향을 맡았다.
“꽃이라니! 네가 이렇게 섬세한 줄은 몰랐는걸, 아돌프.”
“날 뭘로 보는 거야? ……사실은, 엄마 아이디어긴 해. 그래도 꽃은 내가 땄어. 우리 집 온실에서…….”
“정말 고마워. 화병에 꽂아서 내 방에 놓아둘게.”
나는 아돌프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는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지만 입꼬리가 꿈틀거리는 것만은 숨기지 못했다.
나는 꽃다발을 하녀에게 건넸고, 하녀는 어울리는 화병을 찾으러 갔다. 파티장으로 가면서 아돌프가 물었다.
“누님,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은 어떻게 됐어?”
“그 녀석이라니 누구 말야?”
“그…… 누님을 납치했던 그 자식 말이야. 거 무슨 정보 길드인가 뭔가 하는…….”
아돌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내가 조사하라고 한 정보에 대해 조사하고 있어. 연락은 늘 잘 되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 그렇다면 다행인데…… 그래도 난 그 새끼 못 믿겠어. 혹시 그 자식이 또 맘에 안 들게 굴면 나한테 꼭 말해, 누님. 내가 아주 죽여 버릴 테니까.”
순간 아돌프의 목소리가 얼마나 낮아졌는지 나는 깜짝 놀랐다. 흘끗 돌아본 그의 얼굴에 농담을 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아돌프는 완전히 진심이었던 것이다. 고작 14살인데도 불구하고.
‘정말이지 아돌프에게 이런 면모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어.’
셔우드 백작가에서의 일주일 동안 아돌프에게 괴롭힘을 당한 나는 그가 나를 정말 싫어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 그건 전부 장난질에 불과했다.
아돌프가 정말로 싫어하는 상대에게는 어떻게 대하는지 나는 최근에서야 알았다.
어찌 됐건 그만큼 나를 생각해 준다는 거니 고맙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아돌프의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대어 쓰다듬었다.
“이그, 그런 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럼 걱정할 짓을 하지 말든가.”
뚱한 소리를 하면서도 아돌프는 내 손을 쳐내거나 피하지 않았다.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을 텐데도 말이다.
그는 오히려 내 손길을 만끽하는 것처럼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파티가 이루어지고 있는 홀에 도착하자 나는 아돌프에게 잔소리를 했다.
“간식은 마음껏 먹어도 되고, 장난감도 가지고 놀아도 되지만, 애들이랑 싸우면 안 돼. 알았지?”
“나도 알아!”
아돌프를 홀에 데려다 놓은 뒤, 나는 파티에 참가한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두 잘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아이들도 모두 삼삼오오 잘 놀고 있고 어른들 역시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이제야 좀 한숨을 돌릴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오후 3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왜 초청한 공연단이 오지 않는 거지? 왔어도 한참 전에 왔었어야 할 시간인데…….’
‘론도의 기사’ 인형극을 공연할 극단이 올 시간이 지나도 이미 한참 지나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극단에 연락을 해 보려던 찰나였다.
시종 한 명이 허겁지겁 달려와 내게 편지봉투를 건넸다.
“아가씨! ‘울새와 파랑새’ 극단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나는 불길함을 느끼며 편지봉투를 뜯었다.
‘울새와 파랑새’ 극단의 인장이 찍혀 있는 편지지에는, 오는 길에 마차 사고가 심하게 나서 공연을 하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계약을 이행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계약금은 전액 환불하겠다는 사과와 함께 말이다.
내가 편지의 내용을 말하자, 함께 파티를 준비했던 하녀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다들 내가 이번 인형극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더군다나, 이미 ‘론도의 기사’ 인형극에 대해 아이들에게 말을 해 버렸으니, 어떻게든 아이들을 실망시키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아가씨, 이를 어떻게 하지요? 지금이라도 부를 수 있는 다른 극단이나 연기자를 구해 볼까요?”
메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극단이라고 해도 갑자기 ‘론도의 기사’ 공연을 준비할 수는 없겠지. 그리고 아무리 어린아이라고 해도 그렇게 허술한 공연은 모두 눈치챌 거야.”
나는 편지를 든 채 잠시 고민했다. 메리는 그런 내 옆에서 내가 낙심하거나 실의에 빠진 줄 알고 안절부절못했다.
고민하던 내가 마침내 말했다.
“내 생각엔 아무래도…… 내가 직접 나서는 게 좋을 것 같아.”
“네, 아가씨께서요?!”
놀란 하녀들이 입을 떡 벌리고 날 보았다. 나는 그네들이 어떤 오해를 했는지 깨닫고 손을 내저었다.
“인형극을 하겠다는 건 아니고, 책을 읽어 주면 어떨까 싶어.”
“책을…… 읽어 주신다고요?”
메리가 되물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지켜봐.”
나는 약간의 준비를 한 뒤 홀로 돌아갔다. 시간은 내가 예고한 3시 30분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아이들의 기대감 역시 높아지고 있었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는 아이들의 앞에 나서서 말했다.
“여러분, 안타까운 소식이 하나 있어요. ‘론도의 기사’ 인형극을 준비했지만, 극단의 마차가 오는 길에 사고가 나서 인형극을 보여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뭐어!”
“그런 게 어딨어!”
“이럴 수가!”
기대감으로 뜨거워지던 홀에 찬물을 끼얹은 것만 같았다.
아이들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잔뜩 시무룩해져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아이,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쑥덕거리는 아이, 화난 얼굴로 불만을 터뜨리는 아이, 심지어는 울먹이기까지 하는 아이도 있었다.
나는 얼른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대신에! 제가 ‘론도의 기사’를 재미있게 읽어 드리려고 해요. 와, 정말 재미있겠죠?”
“책 읽어 주는 게 뭐가 재미있어?”
“맞아. 그런 건 우리 부모님도 해 주셔!”
몇 아이들이 투덜거리고, 다른 아이들이 ‘맞아, 맞아’ 하면서 동조를 했다.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더 뻔뻔하고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글쎄요, 과연 어떨까요? 여러분 부모님이 읽어 주시는 거나, 혼자 읽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재미있을 거예요.”
내가 누구인가? 바로 이 당당함 하나로 의심 많은 녹턴을 설득하고 블랙웰 아이들의 시녀 자리를 손에 넣은 사람이 아닌가?
당당하다 못해 뻔뻔해 보이는, 왠지 모르게 설득력까지 느껴지는 이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투덜거리던 아이들조차 곧 조용해졌다.
나는 집중하라는 의미를 담아 헛기침을 했다.
“그럼, 시작할게요. 모두 잘 들어 주세요.”
투덜거릴 때는 언제고, 아이들은 어느샌가 옹기종기 내 앞에 모여앉아 있었다.
“이제부터 집중 안 하고 시끄럽게 구는 놈들은 나한테 한 대씩 맞는다!”
어떤 놈이 이런 무시무시한 말을 하는가 봤더니 아돌프였다.
아돌프는 맨 뒷줄에 앉아서 주먹을 들어 보이며 아이들에게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나는 아돌프에게 그러지 말라는 뜻으로 눈을 흘기곤, ‘론도의 기사’ 1권을 펼쳤다.
‘동화 구연은 꽤 오랜만인걸.’
그렇게 생각하며 작은 숨을 들이마신 뒤, 나는 ‘론도의 기사’ 첫 줄을 읽기 시작했다.
“……기사 웰링턴에게는 작은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드래곤을 물리치고 보물을 손에 넣기에는, 악당의 음모에서 자신의 고향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우기에는, 위험에 빠진 공주님을 구하고 그녀의 마음을 얻기에는…… 그의 키가 너무나 작다는 것이었다.”
동화구연은 단순히 책을 읽어 주는 행위와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대화를 나눌 때 서로에게 전달되는 정보라면 말의 내용을 뜻하는 ‘언어적 표현’만을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말의 내용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다.
바로 ‘반언어적 표현’, ‘비언어적 표현’을 통해서다.
목소리의 톤, 속도, 억양 등을 말하는 ‘반언어적 표현’, 제스처와 표정 등을 뜻하는 ‘비언어적 표현’을 통해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주고받는다.
동화구연은 이 ‘반언어적 표현’, ‘비언어적 표현’을 충분히 활용하여 동화의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책의 내용을 아이들의 눈앞에 펼쳐 놓듯이, 촬영, 연기, 연출, 제작 등 모든 것을 나 혼자서 이루어내는 무대를 만들어 나가듯이…….
“기사 웰링턴! 나, 크리스 벨로프 백작이 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격의 차이라는 걸 똑똑히 보여 주지.”
“케헤헤, 귀하신 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쇤네에게 분부만 내려 주십쇼.”
“기사님께서는 뭘 모르시는군요. 여자의 마음은 강함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책의 한 장 한 장을 넘기는 짧은 순간 동안 나는 수도 없이 많은 얼굴로 변신했다.
어느 때는 오만하고 권위적인 귀족으로, 어느 때는 비굴하고 촐싹 맞은 졸개로, 어느 때는 우아하고 고상한 공주님으로, 그리고 용맹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기사로…….
하지만 부끄러운 마음 같은 건 들지 않았다.
이런 일은 수도 없이 해 보아서 익숙했을뿐더러, 무엇보다도, 내가 온몸으로 표현하는 이야기에 푹 빠져든 아이들의 모습이 내게 힘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불평할 때는 언제고, 아이들이 나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데에는 고작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모든 아이들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이들이 내게, ‘기사 웰링턴’의 모험에 시선과 귀를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의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와하하하하!”
“웰링턴, 힘내!”
“으으으으으!”
“으웃…… 훌쩍, 훌쩍…….”
심지어 아이들은 내 이야기에 푹 빠져들어, ‘기사 웰링턴’을 따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그가 악당의 함정에 걸려들까 함께 조마조마 가슴을 졸였으며, 악당과의 치열한 전투 중엔 응원했으며, 그의 성취에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곤 했다.
나는 그것이 기뻤다.
아이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 손끝, 발끝부터 살아 있다는 감각이 생생히 맥동했다.
아주 옛날부터 그랬다. 나로 인해 아이들이 기뻐하면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곤 했다.
몸은 다소 피곤하더라도 마음만은 씻은 듯이 피로감이 사라지곤 했다.
그것이 내가 이 일을, 아이들을 사랑하는 이유일 것이다.
“으으으……. 벨로프 백작, 이 나쁜 자식! 죽여 버리겠어. 감히 웰링턴을 함정에 빠뜨리다니……. 훌쩍, 훌쩍…….”
14살인 아돌프조차 이 이야기에 같이 울고 웃었다는 건 좀 의외였지만 말이다. 뭐, 그만큼 원작이 재밌고 내가 구연을 잘했다는 거겠지?
* * *
라리아가 최선을 다해 동화구연을 하는 모습을 보고, 옆 방으로 가지 않고 홀에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어른들은 깜짝 놀랐다.
“아니, 어쩜 저런 경박한 행동을…… 그것도 명망 있는 셔우드 백작가의 영애가!”
“젊은 귀족 영애가 품위 없게 무대 위의 극인(劇人) 같은 행동을 하다니요?”
“곧 대공비가 되실 분께서 부끄럽지도 않으신 걸까요?”
잠자리에서 책을 읽어 주는 일 정도는 그들도 흔히 하고는 했지만, 라리아가 아이들의 앞에서 행하는 것은 단순히 책을 읽어 주는 것과는 달랐다.
그보다는 연기를 하는 어릿광대짓에 좀 더 가까울 것이다.
극장에서 예인(藝人)의 공연을 보고 즐기는 것은 귀족들 사이에서 흔한 취미였지만, 재주를 팔아 모두의 구경거리가 되어서 돈을 버는 예인이라는 직업은 천대받는 시기였다.
사랑방에 얌전히 앉아서 집안 어른들의 말에 따르는 음전하고 순종적인 숙녀가 모든 여성들의 모범이 되는 제국에서, 라리아의 행동은 모두의 놀라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을 보는 아이들의 반응이었다.
“와하하하하!”
“웰링턴, 힘내!”
“으으으으으!”
“으웃…… 훌쩍, 훌쩍…….”
라리아의 행동을 보고 수군거리던 어른들은 한마음이 된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그들 모두가 부모로서 아이를 수년간 보아 왔지만, 자신의 자식이 이토록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모습은 거의 처음이다시피 했다.
그것도, 저 천박하고 유치한 행동에 아이들이 이렇게 반응하다니!
‘하긴, 그러고 보면…… 이곳에 왔을 때부터 그랬지…….’
처음에는 다소 유치하고, 세련되지 않게 보였던 이 방의 풍경에 아이들이 얼마나 기뻐했던지.
부모조차 몰랐던 생기발랄한 에너지를 뿜어내며 서로서로 어울려 놀던 아이들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라리아의 경박한 행위에 거부감을 느꼈던 그들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들 역시 부모였다.
자녀들을 사랑하기에, 자녀들이 진심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에는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셔우드 영애가 어떤 마법을 부렸기에 아이들이 이렇게 즐거워하는 걸까?’
방에 남아 있는 어른들은 라리아의 모습을 보며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는 없었다.
게다가, 원래 그 행동을 하는 본인이 부끄러워하면 더 민망해 보이고, 본인이 당당하면 왠지 그럴싸해 보이는 법이다.
수십 명의 아이들과 몇 명의 어른들 앞에서 어릿광대짓을 하면서도 라리아는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인 양 열정과 자신감이 넘쳤다.
아이들만큼이나 그녀 역시 행복해 보였으며, 그녀의 얼굴과 몸짓에선 찬연한 생기가 넘쳐흘렀다.
‘셔우드 영애도 평범하게 자라난 귀족 영애일 텐데…… 대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거지?’
라리아의 모습을 보며 어른들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녀의 행동을 귀족답지 않다며 비판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그 모습이 그렇게 나쁘게 보이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침내 ‘론도의 기사’ 1권의 동화구연도 결말에 다다랐다.
기사 웰링턴은 악당의 손에서 고향을 지켰으며, 부와 명예를 얻었고, 공주님과의 오해도 해결되고 서로에게 품은 정열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기사 웰링턴과 공주 크리스티나는 이 모험으로 자신들이 얻은 것 중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것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마을을 구한 영웅이라는 명성도, 사람들이 씌워 주는 화관과 귀향하는 발치에 뿌려 주는 꽃잎도 아니었다. 바로 서로를 향한 영원하고 변치 않을 뜨거운 사랑이었다.”
동화책을 덮으며 나는 아이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은 아직도 환상적인 모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듯한 얼굴이었다.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보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흥분감에 달뜬 얼굴을 한 아이도 있었다.
해피엔딩의 감동에 뜨거워진 눈을 비비는 아이도 있었다.
‘모험은 끝났어.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올 시간이야.’
아이들을 향해 마음속으로 그런 말을 건네며, 나는 웃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소리 내어 물었다.
“어때요? 제가 읽어 드린 이야기는 즐거우셨나요?”
“네!”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물이 쌓인 둑이 터져 나가듯 고요했던 홀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우와, 진짜 최고야!”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
“다음 권도 읽어 주세요!”
“빨리요!”
아이들이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며 재촉했다. 어떤 아이들은 손으로 바닥을 두드리거나 발을 구르기도 했다.
나는 시계를 보고 말했다.
“하지만, 벌써 7시가 거의 다 되어 가는걸요. 아쉽지만, 이제 슬슬 파티를 마무리할 시간이네요.”
“뭐어어?”
“집에 가야 해?”
“싫어! 난 안 갈 거야!”
아이들이 한껏 실망한 티를 냈다. 몇 명의 어른들이 가기 싫다며 고집을 부리는 아이들을 달래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만큼 이 파티와 내 동화구연이 즐거웠던 거겠지 싶어 나는 한껏 보람을 느꼈다.
“배고프지 않나요? 모두들, 돌아가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코 자야겠지요? 다음에도 또 여러분을 초대할게요.”
“정말이죠?”
“약속이에요!”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어 댔다. 벌써부터 다음 파티가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물론이죠! 자, 그럼!”
나는 손뼉을 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헤어지는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해 준비한 마지막 순서가 있었다.
내가 보낸 신호에 하인들이 무언가를 가져왔다. 그것을 본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게 뭐야?”
“우와…….”
그것은 작은 기둥에 커다란 박 같은 것이 달려 있는 물건이었다.
내 전생에 운동회 같은 데서 보았던 박 터뜨리기랑도 비슷했지만 그것보단 훨씬 작았으며 박이 알록달록 눈을 즐겁게 하는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이것은 피냐타(Piñata)라는 것인데, 남미에서 유래되어 서구권 어린이들의 파티에 흔히 쓰이는 물건이다.
아이가 곤봉이나 방망이로 박을 때려 터뜨리면 그 안에서 선물과 간식 같은 것이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다.
피냐타는 두 개 준비되어 있었다. 각각 자네트와 미하일을 위한 것이었다.
하인들이 자네트와 미하일에게 나무막대기를 하나씩 주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속삭였다.
“자, 공녀님, 공자님. 제가 예전에 말씀드린 대로만 하시면 돼요. 박을 맘껏 때려서 터뜨리시는 거예요. 아셨죠?”
자네트와 미하일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이들의 모습을 잘 보기 위해 한발 물러났다.
“자, 그럼…… 시작!”
“이이이익! 얍!”
아까 크리켓 실력을 여지없이 보여 줬던 자네트는, 내가 신호를 주자마자 신이 나서 달려들더니 단 두 방 만에 박을 터뜨렸다.
퍽! 퍽! 콰자작!
부서지는 박과 튀어나오는 예쁘게 포장된 작은 선물들. 그 모습을 감명 깊게 지켜보며 나는 생각했다.
‘공녀님에겐 검술의 재능이 있는 걸지도 몰라.’
한편, 자네트가 그러는 동안 미하일은…….
미하일은 막대기를 든 채 멀뚱멀뚱 박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성질이 급한 아돌프는 그 모습이 답답한지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꼬맹이! 얼른 때려! 이렇게! 이렇게!”
어찌나 답답했는지, 아돌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을 때리는 시늉을 해 보이기까지 했다.
제국 최연소 검술 마스터의 검술 시연을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 하지만 미하일은 이게 얼마나 귀한 경험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 어, 어, 으우우…….”
아돌프가 독촉하자 미하일은 오히려 눈썹 끝을 떨어뜨리며 울상을 지었다.
울먹이는가 싶더니, 미하일은 막대기를 던져 버리곤 달려들어 박을 끌어안았다.
“때리기 시러! 얘가 아푸자나!”
아악! 심장이…… 내 심장이!
공기 중 귀여움과 사랑스러움 농도가 과다해지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어른들은 호흡곤란과 흉부 통증 증세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때리기 시러어어어!”
그 말과 함께 미하일은 그 작달막한 팔로 박을 쓰다듬고 뺨을 비볐고, 그의 말랑말랑 쫀득쫀득 슬라임 같은 볼따구가 마구 뭉개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심장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크윽…… 미하일…… 박이 아픈 건 걱정해 주어도, 내 가슴이 아픈 건 걱정해 주지 않는구나…….’
주변을 둘러보자, 다른 어른들도 다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미하일 도련님은 천사셔…….”
“어쩜 저렇게 사랑스럽고 착하실 수가…….”
“세상에 저렇게 배려심 깊고 다정한 아이가 있을 수 있다니!”
계급과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모든 어른들이 미하일의 천사 같음에 감동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피냐타를 때리기 싫다는 미하일의 호소에, 결국 해당 피냐타는 때려서 부수지 않고 그냥 칼로 가르게 되었다.
피냐타 속에 들어 있는 선물들을 모든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서야 파티는 끝이 났다.
“정말 즐거웠어요.”
“최고의 파티였어요!”
“또 파티를 여시면, 저희 딸을 꼭 다시 불러 주세요.”
떠나는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하나하나 작별인사를 하고, 그들을 마차에 태워 보냈다.
그중에는 아돌프 역시 있었다.
“누님, 언제 연기를 그렇게 잘하게 된 거야? 진짜 엄청나더라. 당장 무대에 서도 되겠던데?”
아돌프의 과찬에 나는 엄청나게 민망해져 버렸다.
당연한 일이지만 동화구연과 연기는 굉장히 다른 일이다.
나는 동화구연이라면 자신 있지만 무대 위에서 하는 연기를 진짜 프로 연기자들만큼 해낼 자신은 없었다.
“얘도 참 별소릴 다 해. 아 참, 우리 공녀님이랑 공자님 너무 귀엽지?”
갑작스럽게 시작된 나의 주접에 아돌프는 뭐 씹은 얼굴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못 들은 척하지 않고 대답은 충실히 해 주는 모습을 보니 과연 착한 동생이라고 할 만했다.
“아, 뭐……. 못생기진 않았지, 뭐. 아, 근데 사내애 쪽 말이야. 이름이 미하일이던가?”
“응, 미하일 공자님.”
“걔, 완전 여우가 따로 없던데? 어른들한테 귀엽게 보이는 데 도가 튼 녀석이야. 겉과 속이 다른 놈이라고! 누님, 그 녀석은 좀 조심할 필요가 있겠어.”
이건 또 뭔 소리? 나는 아돌프의 말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는 없었다.
어른들의 생각과 달리, 아이들은 언제나 순진무구하지만은 않다.
아이도 사람이기에 당연히 계산적인 판단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미하일이 계산적으로 착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그렇다 해도 미하일이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귀엽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미하일은 사랑스러운 내 공자님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아하하, 그래, 그래. 우리 공자님 너무 귀엽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 말 하나도 안 들었지, 누님?!”
아돌프는 골치가 아픈 듯이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는 대공저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하여간에 누님은 너무 순진해 빠져서 탈이라니까. 이러니까 내가 누님을 내버려 둘 수가 없는 거 아냐?”
아돌프까지 마차를 태워 보낸 뒤 나는 혼자서 픽 웃었다.
‘내가 순진하다니…….’
내가 몇 살이고, 사회생활을 한 게 몇 년인데. 14살 꼬맹이한테 그런 말을 다 듣다니.
‘아돌프가 나에 대해 오해를 좀 해 버린 것 같지만, 뭐, 상관없겠지?’
그렇게 생각한 내가 파티의 뒷정리를 시작하기 위해 몸을 돌리던 찰나였다. 눈에 아주 친숙한 인영이 들어왔다.
홀의 가장 뒤쪽에 그가 있었다.
소리도 소문도 없이 파티장에 스며든 그는 벽에 기대선 채 팔짱을 끼곤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에, 특유의 꿰뚫어 보는 듯한 자색 눈빛으로.
깜짝 놀란 나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전하!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내가 다가오는 것을 무뚝뚝한 얼굴로 지켜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동화책을 읽어 주던 중간부터.”
내 기억이 맞다면 오늘 그는 외근이 있었다.
즉 밖에서 바삐 일을 하다가 퇴근하자마자 내게 찾아온 것이다. 내가 오늘 파티를 주최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침이 꿀꺽 넘어갔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 반가운 마음이 좀 더 컸다. 왜 반가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일부러 내가 주최한 파티를 구경하러 올만큼 내게 신경을 써 줬다는 것 때문일까?
‘에이, 나한테 신경을 쓰긴 무슨. 그냥, 블랙웰의 이름을 건 첫 파티니까 궁금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부끄러워졌다. 괜한 설레발을 친 것 같아서. 나는 뺨을 긁적이며 웃었다.
“오셨으면 티를 내시지 그러셨어요. 애들 파티 구경하는 거 지루하셨겠어요.”
내 말에 녹턴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눈이 되었다. 아마 아까 본 것들을 떠올리는 것이리라.
“아니, 볼만하더군. 그 간신배 흉내를 내던 것이 특히. 의외의 모습이던데.”
……이 인간이?
* * *
라리아가 자네트와 미하일을 위한 어린이 파티를 열겠다고 했을 때 녹턴은 말은 안 해도 내심 꽤 놀랐다.
그녀는 이미 아이들의 보육자로서 업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있었다.
거기서 굳이 일을 더 늘리지 않는다고 해도 녹턴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런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일을 더 하겠다고 하다니?
행사를 준비하는 일이 얼마나 복잡하고 번거로운 일인지 정도는 녹턴도 익히 이해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19살의 소녀였다.
행사 개최 같은 복잡한 일은 집안 관리에 숙련된 귀부인이 된 뒤에 한다 해도 아무도 그녀를 흠잡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오로지 아이들을 위해서 자청해 그런 어려운 일을 해내겠다고 하는 것이다.
‘공녀님과 공자님께는 또래 친구가 필요해요, 전하. 또래 친구는 아동의 정서, 사회성 발달에 큰 도움이 된답니다.’
‘친구와의 사회생활은 아동의 성장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예요.’
사실 녹턴은 라리아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론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한두 번도 아니고, 그는 그녀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있었기에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일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무리가 될까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의욕과 열정이 넘치는지 알고 있었기에 녹턴은 그녀가 자신을 혹사시킬까 봐, 그리고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그녀가 실망할까 봐 걱정되었다.
사교 행사를 좋아하지 않아 거의 참가한 적이 없는 그였으나, 원숙한 귀부인들조차 흔히 따분한 파티를 열곤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럴 때마다 사교계의 호사가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된다는 것 정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라리아의 파티가 따분하고 지루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조간신문의 1면에 실리는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녹턴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런 일이 생기면 신문사 놈들을 가만둘 수 없겠지.’
자신에게 신문사에 압력을 넣을 권력이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하지만 언론의 보도는 어떻게든 무마한다고 해도, 사교계의 소문까지 자신이 어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녹턴은 그러한 것에 라리아가 상처를 받을까 신경이 쓰였다.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그녀를 소문에서 지켜 주고 위로해 주리라.
라리아의 제안을 녹턴이 허락한 이유에는 사실 이런 결심이 숨어 있었다.
파티가 준비되는 도중, 시몬으로부터 준비가 상당히 잘되고 있으며 사용인들로부터의 평판도 좋다는 보고를 들었다.
한시름 덜기는 했지만 그래도 녹턴은 여전히 걱정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
과정이 좋다고 결과도 늘 좋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파티 당일.
아침부터 녹턴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에게 말은 안 했지만 내심 걱정하고, 기다려 오던 라리아의 첫 행사 날에 외근이 잡힐 줄이야.
사실 그도 알고 있었다. 설령 외근이 없다고 해도 그가 달리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아이들은 녹턴을 굉장히 무서워했다. 기사의 아이들조차 그와 눈을 마주치면 경기를 일으키거나 오줌을 싸는 일이 다반사였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어른들조차 두려워하는 그의 존재감을 아동들이 견뎌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녹턴이 ‘어린이 파티’에 대놓고 참석하는 것은 라리아에게 방해가 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대단히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감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녹턴은 라리아가 첫 파티를 여는 날에 외근을 나간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되도록이면 그녀의 곁에 있어 주고 싶었다. 그녀의 어깨에 어느 정도의 무게감이 실려 있는지 아느니만큼.
비록 자신이 다정한 말 같은 것에 재주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녀의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녹턴은 최대한 빨리 업무를 끝내고 돌아왔다.
조금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급하게 끝내고 돌아왔는데도 시간은 다섯 시. 어느덧 저녁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파티가 끝날 때까지 한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은 때였다.
파티 중이라기에는 꽤 조용했다. 입구에서는 라리아의 목소리만이 도란도란 흘러나왔다.
홀의 입구에서 녹턴은 멈칫했다. 아이들이 자신을 보고 겁에 질릴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몰래 들어가서 멀리서만 보고 나오면 상관없겠지. 아주 잠깐만 볼 테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결국 라리아가 처음으로 연 파티를 보고 싶다는 욕망을 이기지 못한 녹턴은 되도록 기척을 죽인 채 홀의 입구로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자신이 들어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녹턴은 자신이 기척을 잘 숨겨서 그런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아이들이 한곳에 모여앉아 있을뿐더러, 모두가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무엇에 그렇게 집중하고 있는지 그 시선을 따라가던 녹턴은 심장이 기분 좋게 뛰기 시작했다.
모든 아이들의 한가운데에 바로 그녀가 있었다. 라리아 셔우드.
“하지만 바로 그때! 눈이 째지고 비굴한 얼굴로 손을 싹싹 비비는 남자가 나타났다. 기사 웰링턴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런 착각이 들 만큼이나 그녀에게는 사랑스러움이 넘쳐흘렀다.
라리아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었는데, 그녀가 하는 행동은 단순히 동화책을 읽어 주는 것과는 달랐다.
아마 그냥 읽어 주는 정도였다면 아이들이 이렇게 집중하고 있지도 못했었을 것이다.
“기사님, 쇤네에게 분부만 내려 주십쇼. 쇤네는 기사님을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그대를 믿다가 내 충실한 친우 윈저가 쇠똥밭에 처박혔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내가 그대를 믿어도 되겠는가?”
“와하하하!”
그녀는 책을 읽고 그 내용을 표현하고 있었다.
목소리뿐만이 아닌 온몸으로. 그 모습은 단순히 책을 읽어 준다기보단 연극을 공연하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그가 보는 눈앞에서 라리아는 몇 번이나 변했다.
정의롭고 용맹한 기사로, 비굴한 간신배로, 천박하고 유쾌한 생선 장수로.
그저 발랄하고, 조금 유치한 말투를 쓰는 라리아의 모습만 보아 왔던 녹턴은 그녀의 새로운 얼굴이 꽤 흥미롭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녀의 또박또박한 발음과 선명한 발성은 이렇게 멀리 있는 그의 귀에도 꽂힐 정도로 완벽했다.
그 덕분인지 수십 명의 아이들은 단 한 명도 주의력을 허투루 쓰고 있지 않았다.
모두가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따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본 녹턴은 직감했다.
이제껏 그가 했던 걱정들은 모두 헛된 기우에 불과했다. 이 파티는 분명 아이들에게 있어 최고의 파티였을 것이었다.
억지로 연습한 대로 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지난날 동안 바삐 일을 했을 텐데도, 눈에서 총기가 넘치는군.’
그녀가 얼마나 성실한지는 그가 제일 잘 알았다.
그녀가 파티 준비를 하면서 원래 업무인 자네트와 미하일을 돌보는 일도 놓치지 않으려 얼마나 애써 왔는지 그는 전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나 바쁘고 정신없이 지내 왔던 그녀는 지금 피로해 보이기는커녕 그 누구보다도 밝고, 건강하고, 행복해 보였다.
아이들을 대하는 일이 그렇게나 기쁜 것일까. 사실 녹턴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자신의 아이들을 보는 것은 좋았으나 그것은 제 자식이니 당연한 일이다.
남의 아이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그로선,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생기가 넘치는 그녀의 마음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런 그녀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니까.
사실,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행복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질투가 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웃는 것만은, 사랑스런 생기로 넘치는 것만은 보기 좋았다. 그녀에게는 그런 얼굴이 어울리니까.
행복해하는 그녀의 미소를 보는 것. 그리고 그런 그녀를 자신이 지켜보는 것.
녹턴은 이 순간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저 흘러가는 것만으로도 아깝게 느껴지는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는 처음 깨달았다.
이제껏 그의 인생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던, 그런 경험이었다.
아주 잠깐만 보고 나오겠다고 생각했던 그는 결국 파티가 끝날 때까지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셨으면 티를 내시지 그러셨어요. 애들 파티 구경하는 거 지루하셨겠어요.”
그를 보자마자 쪼르르 달려온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귀여운 청록빛 눈동자가 자신을 보며 가늘어지는 것이 보기 좋다고 생각하며, 녹턴은 대답했다.
“아니, 볼만하더군. 그 간신배 흉내를 내던 것이 특히. 의외의 모습이던데.”
좀 더 살갑게 말할 걸 그랬나.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해 봤자 이미 말은 입술을 통해 나간 뒤였고,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 말을 들은 라리아의 입이 비죽 튀어나오는 것이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우니 아무래도 괜찮다고 할까.
“정말……. 감동받을라 치면 꼭 그러신다니까요!”
라리아에게는 유감스러운 소식이지만, 그녀를 놀려 주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중독될 정도로.
스스로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들떠 오르는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녹턴은 말했다.
“생각 외로…… 흥미로운 파티를 연 것 같던데. 제법이던걸, 영애. 칭찬할 만해.”
오만한 말에 라리아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녹턴의 창조주였다.
그의 말이 사실은 극도의 칭찬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칭찬에 인색한 그에게 기대 이상의 찬사를 듣자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뭐, 이 정돈 보통이죠. 참, 공녀님과 공자님도 생각보다 즐거워해 주셔서 무척 기뻤어요. 공녀님과 공자님께서 오늘 친구를 많이 사귀신 것 같아요. 글쎄,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
라리아는 오늘 파티에서 자네트와 미하일이 했던 일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았다. 자네트의 활약상 역시 빼먹지 않았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자부심마저 느껴졌다.
자기 자식도 아닌 아이 자랑을 이렇게 진심으로 할 수 있다니, 녹턴은 그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내심 기뻤다.
‘혹시…… 그녀도 아이들이 자신의 자식인 것처럼 느끼고 있는 건가?’
생각만 해도 뱃속이 간질간질했다. 그녀가 제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대체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자네트와 미하일, 그리고 아이들의 어머니인 라리아와 아버지인 자신. 더할 나위 없는 관계도였다.
이 네 사람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가족초상화가 되리라.
녹턴은 자신의 이런 변화가 굉장히 기묘하게 느껴졌다.
가정을 꾸리는 데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그였는데.
오히려 지난날의 경험으로 인해, ‘가족’이라는 말에 거부감마저 느끼던 그였는데.
사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자신이 훌륭한 남편이자 아버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족쇄를 이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그녀가 아이들에게 정이 들어서라도 계속 블랙웰에 남아 주었으면, 자신의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하는 계산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녹턴은 이런 자신이 간사하게 느껴졌다.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이렇게 해서라도 그녀를 붙잡아 두고 싶은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들뜨게 되는 자신이 있다.
“……참, 제 동생 아돌프도 파티에 왔었어요.”
그녀의 말에 녹턴은 귀가 번쩍 뜨이는 것만 같았다. 아돌프? 그 아돌프 셔우드?
그녀가 가족들과 화해한 덕에 그녀의 아름다운 색채에 걸려 있던 안개 중 하나가 사라졌다.
그것은 대단히 잘된 일이었다. 축하해 주어야 마땅할 만한 그런 일.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녹턴은 도저히 그 사실을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셔우드가의 인간들과 편지를 주고받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녀의 파티에 올 정도로 사이가 가까워졌을 줄이야.’
불안감에 가슴이 죄였다. 그녀가 셔우드의 인간들과 가까워진다는 것은 곧 계약이 끝나자마자 그녀가 셔우드로 돌아가 버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그녀에게 밝히겠는가.
그녀는 자신이 그녀가 가족들과 사이가 좋아지는 걸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런 이기적이고 검은 마음을 그녀가 알게 할 순 없었다.
그는 타들어 가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그렇군. 그런데 어린이 파티에 오기에는 나이가 많지 않나?”
“맞아요, 아돌프는 14살이니까요. 하지만 꼭 오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자기는 저번 무도회 때 참석을 못 해서 아쉬웠다나요.”
눈치가 좋은 녹턴은 그 정도의 말만으로도 라리아의 동생이 얼마나 그녀를 좋아하는지 눈치챘다.
그 역시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니만큼 더 쉽게 알았는지도 모른다.
‘망할 셔우드 놈들. 그녀를 오랜 시간 박대할 때는 언제고, 왜 이제 와서 아양을 떨어 대는 거지?’
비이성적인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그녀의 가족이라는 것 정돈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턴에겐 그들이 경쟁자처럼 느껴졌다.
라리아의 애정과 관심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탐해 서로를 짓밟고 위로 올라가려 하는 경쟁자.
녹턴은 순간적으로 눈엣가시 같은 셔우드 놈들에게 살심마저 느꼈다.
하지만 정말로 그녀의 가족들을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짓을 저질렀다간 그녀에게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테니까.
셔우드가의 앞길에 지옥을 펼쳐 줄 계획이 몇 개나 떠올랐지만 녹턴은 최대한의 자제심을 발휘했다.
‘안 돼, 차라리 셔우드 놈들보다 빠르게 그녀의 마음을 손에 넣을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 시커먼 속내를 숨긴 채 녹턴이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뒷정리는 시몬에게 맡기고 이제 그만 쉬도록. 그러다가 쓰러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그럴 순 없어요! 시몬도 많이 바쁘잖아요. 뒷정리를 마치고 오늘 업무 다 끝낸 뒤 쉴게요.”
하여간에 이 여자는. 그녀가 하고 싶은 일 다 하도록 내버려 뒀다가는 분명 몇 달 못 가 쓰러지고 말 것이다.
자신의 미간을 꾹 누르며 녹턴이 말했다.
“대공의 명령이다. 불복할 셈인가?”
“네?”
“뒷일은 잊고 당장 방으로 돌아가 쉬도록.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신 뒤 최소 10시간은 숙면해라. 명령이다.”
그의 말에 라리아는 입을 딱 벌렸다. 이 인간은 대체 대공으로서의 권위를 왜 이런 데에 쓴단 말인가?
게다가 그 말투는 얼마나 고압적인지, 어조만 들으면 꼭 굉장히 위험하고 잔인한 명령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한 말이 이제 그만 쉬라는 뜻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나라서 다행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분명 그의 의도를 오해했을 거야.’
그나마 자신이 그의 창조주라서, 그의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게 다행이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사실 내가 피로할까 봐 걱정해 주고 있는 거잖아?’
그의 성격을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그의 솔직하지 못한 걱정이 꽤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는, 시몬에게는 미안하지만 그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알았어요. 메리에게 공녀님과 공자님을 부탁한 뒤 바로 방으로 갈게요. 좋은 저녁 되세요, 전하.”
라리아는 치마폭을 들어 올리며 곱게 인사한 뒤 홀을 떠났다.
녹턴이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녀를 지켜보았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한 채.
* * *
「괴물 대공의 저택에서 열린 어린이 파티, “아이들의 천국”」
「아이 보기의 귀재, 라리아 셔우드 - 파티 참가자 3인 인터뷰」
「괴물 대공의 사생아, 반바지 입다! 최신 유행 예감? 디자인 심층 분석」
다음 날 아침부터 쏟아지는 기사들과 함께, 라리아의 파티에 대한 사교계의 관심은 하늘을 찔렀다.
“대공 전하의 약혼녀가 그렇게 근사한 파티를 열었다면서요?”
“제 조카가 그러는데, 6년 인생에서 제일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하더군요!”
“저희 딸도 똑같은 파티를 열어 달라고 졸라서 골치가 아파 죽겠어요!”
파티에 다녀온 아이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열광적이었다. 너무나 재미있었다며, 똑같은 파티를 열자고 졸라 부모들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라리아의 파티가 어른들의 시각에서는 완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음에도, 어쨌든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즐거워하는 것만으로도 꽤 만족을 느꼈다.
아이들은 파티를 즐기게 하고 부모들은 옆 방에서 육아의 스트레스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도 가점의 요인이었다.
“나이도 어린 셔우드 영애가 그렇게 멋진 파티를 열다니.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심지어 본인은 파티에 참석한 적도 별로 없잖아요? 대단한 재능이에요.”
물론 그녀의 파티에 호평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도자기와 생화 대신 아이들이 만든 잡동사니로 파티장을 꾸몄다면서요? 어머나, 유치해라.”
“그 경박한 책 낭독은 어떻고요. 장래 대공비의 언행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였어요.”
“그런 유치한 솜씨로 열 수 있는 것은 어린이들을 위한 파티뿐이겠던걸요. 어른들을 위한 행사를 열면 바로 본 실력이 들통나고 말 거예요.”
하지만 혹평의 대부분은 사교계의 투명인간이었던 라리아의 갑작스런 약진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들의 시기심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적어도 아이들은 그녀의 파티를 진심으로 즐겼다’라는 것이었다.
라리아 셔우드가 블랙웰의 소공녀, 소공자를 돌보는 시녀라는 사실은 알려져 있어도 그녀의 업무 실력까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번의 파티는 그녀의 전문성을 사교계에 알리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또한, 그녀에 대한 인식이 변화한 것은 사교계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일로 인하여 블랙웰 대공저 내에도 그녀의 뛰어난 업무 실력이 알려졌다.
친절하면서도 정확하고 정밀한 그녀의 지시는 블랙웰 사용인들의 입장에서도 굉장히 편안한 업무 환경이었다.
이제껏 그들의 상사가 녹턴과 시몬 같은 깐깐한 사람들밖에 없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더욱.
“블랙웰에서 20년을 몸담아 왔지만 이번만큼 일하기 편했던 적이 없었어요.”
“아가씨께서는 당신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아주 정확히 아시는 것 같았어. 파티장의 단면도가 머릿속에 통째로 들어 있으신 것 같은 느낌이야.”
“관대하시지,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지, 유능하시지……. 정말 더할 나위 없는 안주인 감이라니까.”
“빨리 아가씨께서 블랙웰의 안주인이 되어 주셨으면!”
한편 블랙웰의 사용인들 사이에서 라리아의 입지가 올라가면서 예상치 못한 피해자가 생겼다.
“아가씨께서 그리 미인은 아니라고 한 놈이 네놈이냐?”
“우리의 안주인님께 감히 뭐가 어쩌고 어째?”
“감히 훌륭하신 아가씨께 그런 망발을! 본때를 보여 주마!”
“자, 잘못했어! 그땐 내가 잠시 미쳐서 헛소리를, 안 돼, 내가 잘못했다니까! 살려 줘어어어!”
바로 녹턴과 라리아의 약혼 발표 직후 그녀가 그리 미인은 아니라고 했던 주방 보조였다.
어린이 파티 이후 오래 지나지 않아 그가 흠씬 두들겨 맞고 떡이 된 채 밀가루 창고에서 발견되었으나 블랙웰의 그 누구도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한편, 이번 파티의 주인공이었던 자네트와 미하일의 반응은?
“이얍! 이얍!”
자네트는 피냐타를 부술 때 사용했던 나무 막대기를 자꾸 들고 다녔다.
“이 나뿐넘! 정의의 칼을 받아랏! 얍! 얍!”
라리아가 읽어 주었던 로망스 소설 ‘론도의 기사’의 주인공 대사를 흉내 내며 막대기를 검처럼 휘두르고 다니는 것이 요즘 자네트의 취미였다.
‘정말로 공녀님에게 검술의 재능이 있나?’
그런 모습도 귀엽긴 했지만 막대기를 아무 데나 휘두르고 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라리아는 자네트가 그럴 때마다 쫓아다니면서 주의를 주곤 했다.
“공녀님, ‘검술 연습’을 하시는 건 좋지만 꼭 사람이 없는 곳에서만 하셔야 해요. 아셨죠? ‘검’을 휘두를 때마다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것 잊지 마세요.”
“응!”
자네트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로망스 소설에 푹 빠진 자네트는 자신의 막대기를 ‘검’, 막대기를 휘두르는 놀이를 ‘검술 연습’이라고 불러 주면 좋아하곤 했다.
자네트에게 주의를 주던 라리아는 자신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오는 고사리 같은 손길을 느꼈다.
시선을 내리니, 미하일이 그녀의 치마를 잡아 쥐며 초록색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라리아, 라리아. 언제 또 해?”
“네? 뭐를요, 공자님?”
“파티 말야. 언제 또 해?”
미하일이 애교스럽게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정말이지 어른의 가슴을 살살 녹여 버리는 미소가 아닐 수 없었다.
라리아는 그런 미하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대답했다.
“공자님이 이렇게 좋아하시니, 조만간 또 해요.”
“와아! 라리아, 채고!”
미하일이 방방 뛰며 기뻐했다. 자네트도 그녀의 말을 듣고 신이 난 듯 발을 굴렀다.
또래 친구와의 놀이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았던 아이들은 웬걸, 막상 하고 나니 파티가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걸핏하면 파티를 또 열어 달라고 조르곤 했다.
아이들의 그런 반응에 라리아는 가슴 가득 차오르는 보람을 느꼈다.
‘이렇게나 좋아할 줄이야. 파티를 열길 정말 잘했어.’
외부에서도 파티의 반응이 썩 좋았다는 것은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신문도 구독하고 있고, 그날 이후로 자녀가 있는 귀부인들로부터 다음 파티는 언제 여냐는 편지가 쇄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네트와 미하일을 위해 연 파티였던 만큼, 다른 사람의 칭찬 10번보다 아이들의 칭찬 1번이 훨씬 더 기뻤다.
‘준비하느라 좀 힘들긴 했지만, 애들이 이렇게나 좋아해 준다면 10번이라도 열 수 있을 것 같아.’
라리아는 블랙웰을 떠나기 전에 꼭 어린이 파티를 또 열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이번 일로 라리아가 느낀 것은 또 있었다. 바로 행정 업무가 굉장히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유치원에서도 늘 행정 업무를 보고 있었으니 그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작은 유치원 하나를 돌보는 일과 대공저를 건사하는 일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런 유의 일은 잘한다고 눈에 띄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잘해도 본전, 못하면 바로 눈에 띄는 일인지라 못하면 욕을 먹지만 잘한다고 감사 인사를 듣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라리아는 그동안 대공저의 모든 행정 업무를 담당했던 집사 시몬을 찾아갔다.
“시몬,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니, 영애.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라리아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시몬은 그녀가 찾아오자 바쁜 와중에도 발 벗고 뛰쳐나왔다.
라리아는 그런 시몬에게 자신이 품고 있던 생각을 말했다.
“이번에 파티를 열어 보고 집안일이 얼마나 힘든지 새삼 깨달았어요. 그나마 저는 일회성으로 한 거지만 시몬은 몇 년간 대공저 전체를 돌보셨잖아요?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어요?”
라리아는 충격받은 시몬의 주름진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그래서 제가 대신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었어요. 정말 감사해요, 시몬.”
뜻밖의 말에 시몬은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라리아의 생각은 옳았다.
집안일은 잘한다고 눈에 띄지 않아서, 이제껏 일반적인 집사의 업무는 물론 안주인의 업무까지 떠맡았으면서도 시몬은 감사 인사나 칭찬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블랙웰의 주인이 칭찬에 인색하고 무뚝뚝한 성정이라 더했다.
워낙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니 자연히 아랫사람에게 엄하고 신경질적이 될 수밖에는 없었는데, 그래서 그는 아랫사람들에게 유능하긴 해도 까다로운 상사로 통해 인망이 좋지 않았다.
‘이렇게 따뜻한 말을 들어 본 게 대체 얼마 만이었던가?’
그는 생각했다.
‘내가 일생을 다 바쳐 헌신한 일에 대해 마지막으로 인정받은 게…… 대체 언제였단 말인가?’
그동안 바라기는커녕 생각도 하지 못했던 온기. 인간적인 다정함.
블랙웰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기에 충성을 바쳐 헌신해 왔고 그런 자신의 인생에 후회는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이 인간적인 온기에 대단히 굶주려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블랙웰의 피를 이은 자들은 그런 것이 필요 없는 초인간적인 존재일지라도, 그들을 모시는 그는 한 명의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이기에.
그리고 놀랍게도, 자신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준 사람은 제 인생의 고작 삼분지 일 정도밖에 살지 않은 어린 영애였다.
숨이 턱 막히고 목이 멨다. 눈가에 다리미를 대고 누르는 듯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블랙웰의 충성스러운 집사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진 그는 대놓고 엉엉 울지는 않았다.
대신 고개를 치켜들고 눈물을 참아 보려고 하다가 마음대로 되지 않자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꾹꾹 찍었다.
“부끄러운 모습 보여 죄송합니다. 원, 늙은이가 나이 들어서 주책을…… 영애의 친절한 말씀에 너무나 감명받은 나머지 그만…….”
시몬이 손수건에 코를 팽 푸는 모습을 보고 라리아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말에 이 나이 든 집사가 눈물을 흘리기까지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블랙웰에서의 일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으면…….’
하지만 이해는 갔다.
원래 귀족가의 집사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야 이력서라도 내밀어 볼 수 있을 정도로 힘들고 어려운 일인데, 그것도 대륙에서도 손에 꼽히는 규모를 가진 대공가가 아닌가.
심지어 그는 원래는 안주인과 나눠서 해야 할 일까지 전부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시몬이 감명받은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고, 윗사람이 인간적인 친절과 감사의 인사를 베푸는 것을 겪어 본 게 거의 처음이기 때문이었지만.
라리아는 녹턴의 다정한 면모를 하도 자주 겪은 탓에 그 사실까지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라리아는 시몬의 주름진 손을 더 단단히 쥐곤 진심을 담아 위로했다.
“아니에요. 시몬을 이해해요.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어요?”
시몬은 몇 번 더 코를 풀고 눈가를 찍어 내다가 굳게 결심한 듯 말했다.
“저 시몬, 영애와 같은 귀하신 분께서 블랙웰의 안주인이 되신다는 것을 평생의 기쁨이자 영광으로 삼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평생 영애를 위해 분골쇄신하여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만일 영애께서 별을 따오라고 하시면 따 오는 시늉이라도 하겠습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라리아는 그의 말에 하도 충격을 받아 입을 떡 벌렸다.
‘곧 블랙웰을 떠날 저 같은 사람한테 충성을 맹세하시면 어떻게 해요?’
그러나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고. 라리아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두 손을 내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뿐이었다.
“아니, 아니요! 괜찮아요. 전 그저 사람으로서 해야 할 말을 한 것뿐인걸요. 그만큼 시몬이 블랙웰을 위해 오랜 시간 수고를 해 주신 것뿐이니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러나 그 말이 시몬의 귀에는 영락없는 겸양의 말로밖엔 들리지 않았다.
그는 내심 미래의 안주인께서 겸손하시기까지 하다고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제 예순 평생 영애와 같은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는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습니다. 영애와 같은 분께서 제가 모시는 블랙웰의 안주인이 되어 주신다고 하니 이 이상 감사할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제가 블랙웰의 안주인이 될 일은 영영 없다니까요!’
물론 시몬의 열정적인 눈을 앞에 둔 채 차마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이거 참, 그렇다고 나중에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시몬을 박대할 수도 없고…… 이를 어떻게 하면 좋담?’
자네트와 미하일에게 진심을 다해 돌봐주듯 늘 고생을 하는 시몬에게도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하고 싶은 것이 라리아의 심정이었다.
그 결과가 늘 원치 않는 방향으로 돌아와서 문제지만.
한편, 이때의 일로 라리아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아무래도 시몬의 일을 약간은 분담해 드려야겠어.’
노인 공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라리아는 그가 자신 같은 젊은이 앞에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바쁘게 일하고 있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그의 주름진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가슴이 짠해지곤 했다.
그러한 탓에 라리아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업무를 하면서 틈틈이 시몬의 일도 도와주게 되었다.
만일 라리아가 평범한 귀족 영애였다면 시몬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업무 경험이 없는 어린 귀족 영애는 숙련된 집사의 일에 도움이 되긴커녕 방해가 될 가능성이 더 컸으니 말이다.
보통 귀족 여성이 본격적으로 집안일을 시작하는 것은 혼인을 한 뒤 집사와 시녀장의 도움을 받아 수습 과정을 거친 이후였다.
하지만 시몬은 라리아가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것을 계기로 블랙웰의 업무를 좀 더 일찍 가르쳐 드릴 수도 있고 말이다.
“제가 시몬의 일을 돕는 것은 누구에게도 비밀이에요. 아셨죠? 약속이에요!”
“물론입니다! 이 시몬, 영애의 말씀이라면 목숨이라도 걸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쇼!”
시몬의 태도가 한층 부담스러워진 것을 느꼈지만 라리아는 모른 척하기로 했다.
라리아가 자신이 시몬의 일을 돕게 된 걸 비밀로 하려고 한 것은 그저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예를 들어 녹턴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그녀더러 쉬라고 들들 볶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다는 말이 있다.
시몬이 목숨마저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라리아가 시몬의 일을 돕기로 했다는 말은 결국 돌고 돌아 녹턴의 귀에 들어갔다.
라리아가 시몬의 일을 도와주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녹턴이 그에 대한 말을 꺼냈을 때 라리아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그걸 대체 어떻게 안 거야? 하여간에 녹턴의 정보력은 무섭다니까…….’
라리아는 혼이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녹턴은 그녀가 과로하는 것을 싫어하는 데다가, 사실 그녀의 오지랖이 지나쳤던 것도 사실이니까.
하지만 녹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그렇게 행정 일을 하고 싶다면야 영애의 근무지를 바꾸지. 오늘부터 영애는 시녀장 사무실에서 근무하도록.”
시녀장. 혹은 퍼스트 메이드 레이디. 집사와 함께 여성 사용인들을 총괄하고 지휘하는 직급이다.
간단히 말해 하녀, 시녀들의 총지휘자이며, 집사와 동등한 지위라고 할 수 있었다.
녹턴의 말에 라리아의 눈이 커졌다. 그의 말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그녀가 되물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녀의 어리숙한 질문에도 녹턴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가 단조롭지만 귀에 똑똑히 박히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승진 축하한다는 뜻이다, 영애.”
그의 말 한마디에 라리아는 단순한 아이들의 시녀에서 최고 관리자인 시녀장으로 고속 승진을 해 버린 것이다!
시녀장이라니, 분명 굉장히 좋은 일이었다.
그와의 계약은 아직 7개월 정도 남아 있었고, 그 시간 동안 훨씬 편한 일을 하고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단순 시녀와 시녀장의 봉급은 천지 차이였다.
퇴직하고 나면 수도에 유치원을 몇 개나 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시녀장으로 일을 하면 시몬의 일을 충분히 도우면서 아이들도 계속 지켜볼 수 있겠지.’
직접 아이들을 돌보는 힘든 일 대신, 자신이 원하는 신뢰할 수 있을 만한 하녀들을 직접 아이들의 곁에 붙여 놓을 수 있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데 왜일까? 라리아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라리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뭔지, 승진을 했는데도 어째서 기쁘지가 않은 건지 깨달았다.
“전하, 시녀장이라는 과분한 자리를 주실 정도로 제 능력을 신뢰해 주셔서 무척이나 감복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부디 결정을 물러 주세요.”
“뭐라고? 왜지?”
“제가 원하는 일은 공녀님과 공자님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고 그분들을 지켜보는 일입니다. 한갓 시녀에 불과하지만 저는 이 일이 좋습니다. 저는 제 몸과 마음을 다해 제 손으로 그분들을 모시고 싶어요. 계속 시녀로 있는 것을 허락해 주세요.”
녹턴은 라리아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녀가 당연히 이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만큼이나 그의 제안은 매력적이었다.
그녀가 자네트와 미하일을 진심으로 아낀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시녀장이 된다고 그들을 못 만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원하는 하녀들을 골라 아이들의 곁에 놓고 원하는 양육법을 행사할 수 있다.
게다가 업무 중 남는 시간에는 얼마든지 아이들을 보러 올 수 있다.
아이들을 아끼는 입장에선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일 것이었다.
아이를 돌본다는 측면에서 시녀장과 시녀의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시녀는 육아 중 필연적으로 생기는 잡다하고 번거로운 일들을 직접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녹턴이 라리아에게 시녀장의 일을 제안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녀가 아이들을 정성껏 돌보는 것은 기뻤지만, 그녀가 그로 인해 수고로운 일을 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사무실에 앉아 잡일 같은 건 하녀들에게 시키며 편안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일을 했으면 했다.
아이들을 졸졸 쫓아다니며 체력을 쓰고 땀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아이가 좋다지만, 잡일 따위는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고 자신은 귀여워하기만 하는 편이 편한 게 당연하지 않은가? 대체 어째서…….’
바로 그때 녹턴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지난 파티의 일. 수십 명의 어린이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 생선 장수와 기사를 흉내 내던 라리아의 모습.
목이 아프도록 책의 내용을 읽으면서도 라리아는 조금도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일이 너무나 행복한 듯이 생기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대할 때, 자신의 손으로 직접 돌볼 때 살아 있음을 느끼는 사람 같았다.
녹턴은 ‘하’ 하고 한숨처럼 웃었다. 그가 말했다.
“하여간에 영애도 참 별종이군. 안 그런가?”
라리아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기껏 생각해서 제안했을 승진을 거절했으니 그가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가볍게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 그녀를 보고 웃고 있었다.
“아…… 하하. 뭐,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라리아는 뺨을 긁적이며 웃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녹턴은 가슴이 기분 좋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별종을 좋아하는 나도 별종이지.’
그런 생각은 무뚝뚝한 얼굴 뒤에 숨기며, 녹턴은 말했다.
“그럼 오늘 한 이야기는 잊도록. 앞으로도 평소와 같이 근무해라. 단, 결코 무리하지 말 것. 무리하는 것이 보이면 영애에게 휴가를 주는 수밖에 없다. 알겠나?”
라리아는 그의 말에 그만 풉 웃어 버리고 말았다.
‘휴가를 주는 수밖에 없다’니, 이게 무슨 집 요정 취급이란 말인가? 아무리 사람이 일 좀 열심히 했다고 그렇지!
그녀가 여태까지 하루도 안 쉰 것도 아닌데 말이다.
녹턴의 미간에 주름이 생기는 것을 보고 기침 소리인 척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라리아는 말했다.
“전하의 자비에 감사드려요! 진심으로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보조개가 팰 정도로 방긋 웃었다.
자신의 웃는 얼굴이 상대에게 있어 얼마나 큰 파괴력을 가지는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 * *
무도회 때처럼, 어린이 파티 이후에도 내게 여러 곳에서 초대장이 왔다.
티파티, 가든파티, 무도회 등, 이런저런 사교 행사의 초대장이었다.
이번에도 모든 초대장에 거절의 답장을 쓰긴 했지만, 단 하나, 내가 도저히 거절을 할 수 없었던 곳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황후 레베카에게서 온 초대장이었다.
그녀는 세드릭이 어린이 파티를 너무 좋아했다면서, 좋은 자리에 자신의 아들을 초청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차를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세드릭이 공녀의 이야기 역시 많이 하였으니, 아이들 역시 동반하여 방문해 주면 세드릭이 정말 기뻐할 것 같다는 내용의 초대장이었다.
다른 초대는 다 거절하더라도 황후가 직접 쓴 초대장을 거절하다니!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세드릭의 이야기가 나오자 더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다.
다른 또래와 어울리지 못했던 세드릭의 외로워 보였던 뒷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나와 녹턴은 하루 시간을 내어 황궁에 방문하게 되었다. 물론 자네트와 미하일도 함께.
우리는 초대장에 적혀 있던 장소인 장미 정원으로 향했다. 과연, 정원은 만개한 여름 장미로 가득해서 그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신선하고 달콤한 장미 향이 가득한 화원 한복판에 햇빛을 가리는 화려한 차양이 설치되어 있고, 찻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찻자리는 어른들을 위한 테이블과 아이들을 위한 테이블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황후의 섬세함이 돋보였다.
그리고 세 명의 황족들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황족을 대하는 예를 갖추자, 황제 귄터가 특유의 소탈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 우리 사이에 이런 딱딱한 예법이 다 뭔가. 블랙웰과 황실은 예로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닌가?”
“어서 와요, 블랙웰 대공. 그리고 라리아. 이렇게 시간을 내어 자리를 빛내 주어 고마워요. 부디 자택처럼 편히 있다 가시길 바라요.”
황후의 옆에는 꼬마 황자 세드릭이 있었다.
세드릭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의젓한 척 서 있었지만, 그 표정에는 잔뜩 들뜬 기색이 다 드러났다.
세드릭은 우리의 모습을 보자 푸른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그의 눈은 자네트가 있는 방향에서 멎었고, 젖살이 포동포동한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이 피어났다.
인사를 나눈 우리는 자리에 앉아서 다과와 담화를 즐겼다.
레베카를 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황제를 대하는 것은 조금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그가 악역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는 속내를 읽기 어려운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처럼 친근한 태도에 소탈한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 찻자리가 원작에는 없었던 장면이라 더 불안했다. 그가 이 변화에 어떤 식으로 나올지 예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추면서, 계속 경계하는 수밖에…….’
그렇게 생각하며 황제 부부와 녹턴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였다. 갑자기 아이들의 대화가 귀에 박히듯이 들어왔다.
아이들은 셋이서 꽤 죽이 잘 맞는 것으로 보였다. 셋 다 착한 아이이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세드릭의 말소리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신경이 쓰여 옆눈으로 흘긋 보니 세드릭이 나이프로 과일을 자르는 데에 열중하고 있는 걸로 보였다.
정성스러운 손길이었지만 아직 소근육 발달이 덜 된 8살의 손안에서 과일은 예쁘게 잘리기보다는 거의 곤죽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한참이나 과일을 자르던 세드릭은 수줍은 얼굴로 자네트의 어깨를 톡톡 쳤다.
자네트가 고개를 돌리자, 세드릭은 접시를 내밀었다.
“자네트, 이거 먹어.”
이제 보니 그가 자른 것은 아마 자두인 것 같았다.
자두의 껍질과 씨앗을 벗기고 먹기 좋게 잘라 주려 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의 의도대로 먹기 좋은 모양이 되기보다는 보라색 곤죽이 되어 버린 자두를 본 자네트는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웩! 안 머글래. 나 자두 시러.”
그 모습을 본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아이고, 저런. 세드릭이 상처받겠는걸.’
아니나 다를까 세드릭은 굉장히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자네트를 위해서 열심히 과일을 다듬었는데 거절당하다니.
게다가 면전에서 웩 소리마저 듣다니!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되지 않을 리가.
“그, 그래…….”
세드릭은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태도로 접시를 도로 끌어당겼다.
유감이지만 자네트는 그런 세드릭의 태도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섬세한 미하일만이 자네트와 세드릭의 눈치를 번갈아 보며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세드릭이 걱정된 나는 그를 계속 지켜보았다.
자네트와 미하일이 노는 동안, 세드릭은 혼자서 붉어진 눈가로 훌쩍이기 시작했다.
마음이 아파서 나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의 테이블로 향했다. 훌쩍거리던 세드릭은 내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세드릭을 향해 씩 웃어 주며 이렇게 말했다.
“황자 전하, 뭔가 괴로운 일이 있으셨나 보군요. 하지만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자 전하의 고민은 저 기사 웰링턴이 해결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목소리는 한껏 깔고 두 손은 허리에 척 얹어 놓은 채였다.
세드릭은 내가 무엇을 흉내 내는 건지 알아보았다. 바다처럼 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가 말했다.
“웰링턴!”
웰링턴은 ‘론도의 기사’의 주인공 이름이다.
그렇다. 나는 얼마 전 파티에서 읽어 주었던 소설 ‘론도의 기사’의 주인공 흉내를 내고 있었다.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동화 구연을 할 때 모든 어린이들이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지만, 그중 세드릭은 어느 누구보다도 눈을 빛내고 있었다는 것을.
이 작은 꼬마 황자가 ‘론도의 기사’의 열성 팬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았다.
나는 세드릭의 자리에 앉은 뒤 그를 내 무릎 위에 앉혔다. 세드릭의 눈을 마주 보면서 내가 말했다.
“우리 황자 전하께서 무슨 일로 빨간 토끼 눈이 되셨을까요? 용맹한 기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을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웃! 으으으…….”
용맹한 기사가 되고 싶었던 세드릭은 황급히 소매로 눈을 문질렀다.
세드릭은 붉어진 얼굴을 한 채 8살치곤 무척 또박또박한 말투로 말했다.
“영애, 일부러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영애? 영애가 누굽니까? 전 기사 웰링턴입니다. 황자 전하, 제가 한 가지 비밀을 알려 드리지요.”
나는 세드릭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본디 여자의 마음을 얻는 것은 드래곤의 심장을 손에 넣는 것보다 어려운 것. 하지만 한 번 그것을 결심하셨다면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내가 원하는 것보다 여자가 원하는 것을 주어라.’”
“……?”
역시 8살짜리한테는 너무 고차원의 연애 조언이었던 걸까?
세드릭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알쏭달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위치 때문에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지만 8살은 8살이구나.’
아마 세드릭이 내 말을 완전히 이해할 때쯤에는 지금은 포동포동한 젖살도 쪽 빠져 있겠지.
나는 세드릭을 안아 든 채 등을 토닥이면서, 기사 웰링턴의 명대사를 흉내 냈다.
“음, 너무 어려웠나. 아까 그건 잊어버리세요. 어쨌든 용맹한 기사는 결코 눈물을 내보여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때라도 용기와 희망을 갖고 나아갈 것! 그 끝에 드래곤의 벌어진 아가리가 있을지라도!’”
언뜻 내려다본 세드릭의 귀는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입꼬리 역시 올라가 있는 것을 보니, 이런 ‘어린애 대접’이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고마워요.”
그가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며, 금빛 속눈썹을 내려 앉혔다.
‘좀 더 어리광 피워도 괜찮을 텐데. 황자 전하는 어린이 대접을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어요.’
마음속으로만 그런 말을 전하고는, 나는 그가 이만 놓아 달라고 할 때까지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세드릭을 달래 주고 어른들의 테이블로 돌아왔더니, 세 명의 어른들 전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라리아! 저는 세드릭이 운 줄도 몰랐는데요. 참, 애 엄마가 되어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네요.”
레베카가 말했다.
“하하, 이거 참. 소문대로로군! 셔우드 영애가 아이 다루기의 귀재라는 소문 말이오. 내 눈에는 영애가 신묘한 묘기라도 부리신 것 같소.”
황제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만 명의 군대는 내 수족처럼 부릴 수 있어도 한 명의 우는 아이는 도저히 못 다루겠다니까. 그렇지 않은가, 녹턴? 이런 신붓감을 얻게 되다니 자네 정말 운이 좋군. 절대로 놓치지 말고 꽉 잡게.”
이쪽을 보던 녹턴은 황제에게 웃음기 없는 얼굴을 돌렸다.
“예, 물론입니다. 결코 놓치지 않을 예정입니다.”
그가 왠지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한데 기분 탓일까? 그의 말이 어쩐지 서늘하게 들리는데……? 왠지 등골이 으슬으슬한데……?
황제 부부나 블랙웰 대공이나 모두 바쁜 사람들이었기에 찻자리는 그리 길지 않았다.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올라탔을 때, 나는 자네트의 기색이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공녀님? 무슨 일 있으세요?”
나는 자네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자네트는 마지 못해 불만 가득한 보라색 눈을 이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한 것 같았다.
그녀의 볼따구는 마치 복어처럼 빵빵하고, 입은 오리처럼 튀어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라리아…… 세드릭이 조아, 내가 조아?”
“네?”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내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옛날에도 자네트에게 이것과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은 느낌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공녀님? 저는 당연히 공녀님이 세상에서 제일 좋죠!”
내가 황급하게 말했다. 하지만 자네트의 기분은 아직 풀리려면 먼 것 같았다. 내 말에 자네트는 더더욱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근데 왜, 세드릭만 안아 주고! 토닥토닥해 주고! 이쁘다 귀엽다 해!”
안아 주고 토닥토닥은 했지만 이쁘다 귀엽다고는 안 했는데요, 공녀님!
내가 기가 막혀 잠시 멍하니 있는 동안 자네트는 스스로 내 무릎 위로 기어올라 왔다.
자네트는 얼마나 분한지 씨익씨익 소리까지 내며 내 손을 들어 자기 머리 위에 얹었다.
“나한테두 해! 안아죠! 토닥토닥 해! 이쁘다 귀엽다 해~!”
이런 대환장쇼 속에서, 미하일은 나와 자네트의 눈치를 번갈아 가며 보더니 고사리 같은 손을 들어 제 누이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토닥토닥. 우리 자네트, 이쁘다, 귀엽다…….”
“씨익, 씨익!”
자네트는 내가 쓰다듬어 주지 않자 아예 내 손에 자기 머리를 마구 문질러 대고 있었다.
황궁에 오느라 내가 직접 예쁘게 빗어 주고 핀까지 꽂아 준 자네트의 머리가 엉망이 되어 가고 있다.
“우, 우리 공녀님, 제가 황자 전하만 안아 드리고 달래 드려서 속상하셨구나~! 아이참. 그래도 전 우리 공녀님과 공자님뿐인걸요. 다른 누구한테 비교를 하겠어요?”
나는 필사적으로 자네트를 달래며 꼬옥 안아 주었다. 미하일이 도와줬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래도 정신없이 안아 주고, 토닥토닥해 주고, 뽀뽀해 주었더니 자네트의 씨익거리는 숨소리도 점점 가라앉아 갔다.
그런 와중에 황제와 정무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돌아온 녹턴이 마차에 올라탔다.
“출발하지. 음? 자네트, 영애……. 다들 꼴이 그게 뭔가?”
아무것도 모른 채로 마차에 탄 녹턴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 녹초가 된 나와 사자 머리가 된 자네트를 보고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설명을 해 주고 싶었으나, 이것도 자네트의 프라이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엔 없었다.
“음, 뭐…… 그런 게 있어요.”
천천히 출발하는 마차 안에서, 세드릭을 질투하다가 어느샌가 내 머리카락을 붙잡고 새근새근 잠든 자네트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세드릭…… 아무래도 갈 길이 먼 것 같네.’
* * *
그리고 한편. 블랙웰이 떠난 뒤, 한결 적막해진 장미 정원에서는.
“이 망할 놈의 블랙웰!”
쨍그랑! 와장창창창! 내팽개쳐진 접시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소박하고 우아했던 찻자리는 어느샌가 난장판으로 변모해 있었다. 박살 난 유리 화병과 흩어진 장미꽃잎, 부서진 식기 따위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그 옆에서 어린 세드릭은 울음을 참는 얼굴로 입을 다문 채 서 있었다.
“블랙웰, 이 재수 없는 자식……!”
그리고 이 수라장의 한복판에 있는 자는 바로 귄터 브레히트 황제.
그는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을 뒤엎다가, 어린 아들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이 자식아! 네가 애비 얼굴에 똥칠을 하려고 작정했느냐? 사내새끼가 고작 계집애 하나 때문에 질질 짜! 이게, 아주 부모 망신을 주려고 작정했구나!”
황제는 고작 8살밖에 되지 않는 어린 아들의 어깨를 거칠게 쥐었다. 고통에 세드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아픕니다. 아픕니다. 아바마마!”
“이 망할 놈의 자식이!”
8살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에 비하면 솥뚜껑이나 다름없는 손을 들어 올리던 찰나였다. 황후 레베카가 그의 팔에 매달렸다.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황자는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제발, 고정하시옵소서!”
“이익, 이게!”
황제는 레베카를 팔꿈치로 밀쳐 쓰러뜨렸다. 그 모습을 본 세드릭은, 결국 ‘용맹한 기사’ 이야기 때문에 억지로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렸다.
“어마마마!”
이곳에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원 한쪽에서는 하녀와 시종들이 창백한 얼굴로 벌벌 떨고 있었다.
바로 지금 같은 때, 주인이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그에게 잘못 보이면 그들과 같은 천것들은,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목이 달아날 수 있었다.
한참이나 행패를 부리던 황제는 테이블에 손을 짚어 몸을 기댔다.
“헉, 허억, 허억……. 빌어먹을…….”
그의 입술이 양옆으로 비틀리듯 벌어졌다. 잇새에서 씹어뱉는 듯한 말이 새어 나왔다.
“블랙웰, 이 재수 없는 자식.”
그의 재수 없게 잘생긴 얼굴이 떠오르자 황제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 망할 자식이 황후와 제 약혼녀의 앞에서 망신을 줬던 일도.
‘글쎄요, 만나기만 하면 자식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아니면, 부모가 되어서는 제 자식 일에 관심 한 점 없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때의 그 모멸감. 그 수치심!
‘내 앞에서 건방 떨고 앉아 있어. 개자식. 이 나라의 황제는 나란 말이다. 내가 바로 전 대륙을 호령하는 귄터 브레히트 1세란 말이다!’
그와의 만남은 끔찍한 악연이었다.
만일 하늘이 녹턴 블랙웰이나 귄터 브레히트, 둘 중 한 사람만을 내렸다면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하늘 아래에 태어났다는 데에 있다.
하필이면 같은 해에 태어난 탓에, 귄터는 갓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부터 선황제에게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비교를 당해야만 했다.
‘녹턴 블랙웰은 벌써 책을 줄줄 읽는다는데, 너는 어째서 아직까지 글자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하느냐? 이래서야 네가 자랑스러운 황실의 일원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 아둔한 것! 녹턴 블랙웰은 말을 수족처럼 부린다던데, 너는 어찌하여 안장에 올라탈 줄도 모른단 말이냐!’
‘녹턴 블랙웰이 기사와 대련을 하는 모습을 보았느냐? 그 녀석은 성인 기사를 상대로 대련에서 승리한다는데, 네 검술은 어찌하여 성장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너같이 멍청한 것이 아니라, 녹턴 같은 녀석이 황자로 태어났었어야 했는데!’
‘이 어리석은 것. 이 아둔한 것!’
‘아니야! 난 아둔하지 않아. 나는…… 나는!’
순간 하늘이 노래지고 시야가 좁아졌다. 귄터는 헉헉거리며 테이블 위에 매달려 가까스로 쓰러지지 않았다.
‘녹턴 블랙웰, 어째서 그 자식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거지? 대체 왜!’
탁월한 재능. 지능. 권력. 부. 미모.
녹턴은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그랬다.
그에게 비교당하고 싶지 않아서 죽을 정도로 노력했지만, 자신이 죽을 각오로 따라잡을 때마다 그 녀석은 비웃듯이 멀리 가 버리고는 했다. 그것도 아주 쉽게.
비참한 인생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그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결국 자신은 황제가 되고, 그는 자신의 수하가 된 지금까지도.
귄터는 알고 있었다. 국민들이 그가 없는 곳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제국의 실세는 사실상 블랙웰 대공이다. 황제는 허수아비일 뿐이다. 대체 누가 녹턴 블랙웰을 두고 브레히트 1세를 추종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그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딱 하나 있었다. 바로 사교계 활동과 결혼.
녹턴은 사교계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광증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기보다는 두려워했다.
단 한 번이라도 그를 이기고 싶었던 귄터는, 그에게 없는 것을 추구했다.
정치적 이익보다는 사교계 최고의 꽃을 골라 황후로 삼았다. 이곳 제국은 혼인을 하지 않으면 완전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곳이다.
그런 이곳에서 최고의 꽃을 아내로 맞은 자신이야말로 최고의 남자인 것이 당연했다.
녹턴 블랙웰, 그가 아무리 잘났어도 혼인 하나 하지 못하는 한 자신의 아래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라도 안심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가. 녹턴 블랙웰은 결국, 대체 어디서 구해 왔는지는 몰라도 저렇게나 완벽한 여자를 구해 오지 않았나.
지금 사교계는 블랙웰의 약혼녀 이야기로 온통 야단이었다.
사교계의 떠오르는 샛별인 그녀의 앞에서, 과거의 꽃인 자신의 아내는 너무나 한심하고 비루하게만 보였다.
더 이상 혼인으로도, 여자 경험이 없는 것으로도 그를 비웃을 수 없었다.
이제 자신은 그 어느 것으로도 그를 이길 수 없었다. 그 사실이 귄터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제기랄!”
귄터는 테이블 위에 있는 것들을 한 팔로 쓸어 던져 버렸다.
와장창, 쨍그랑!
높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식기들이 부서지고 유리 파편이 흩어졌다.
으아아앙, 아이 울음소리만이 수라장이 된 장미 정원에서 울려 퍼졌다.
<2권 끝.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