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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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날, 황실 무도회 당일.
황실 무도회는 7월부터 2월까지 이어지는 사교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수도에서 제일 큰 사교 행사였다.
당연히 이 행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대단했다. 황실 무도회에 누가 참석하고 어떤 옷을 입고 오는지 같은 것은 무도회의 몇 달 전부터 초유의 관심사가 되곤 했다.
그리고 이번 황실 무도회의 참석자 중 가장 많은 주목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은 바로 녹턴 블랙웰 대공이었다.
황실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정도의 명가, 블랙웰의 주인.
절세의 미남자이자 단신으로 황실 기사단을 상대할 수 있다는 제국 최고의 검술 마스터.
모두가 우러르는 명성과 친부를 제 손으로 살해하고 대공위에 올랐다는 악명을 동시에 지닌, ‘그’ 괴물 대공.
모두의 선망과 두려움을 한 몸에 받는 그는 성년이 된 이후 거의 어떠한 사교 행사에도 참석한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6년의 공백을 깨고 최초로 황실 무도회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약혼녀를 데리고 말이다.
이성 교제 한 번 없었던 그의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약혼 발표는 올해 봄 이후 사교계 최고의 이슈였다.
더군다나, 그의 약혼 상대는 그와 어울릴 법한 절세의 미녀도, 사교계의 꽃도, 하다못해 그의 악명에 어울릴 만한 야심 가득한 악녀조차 아니었다.
사교계에서 거의 아무런 존재감도 없었던 백작 영애, 라리아 셔우드였다.
올봄부터 호사가들은 이 약혼에 대하여 수도 없이 많은 입방아를 찧어 대곤 했다.
그러니 이번 황실 무도회에서 최고로 주목을 받는 사람이 괴물 대공과 약혼녀인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그 둘이 약혼을 한 이유가 대체 뭘까?”
“그 두 사람이 세기의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이 사실일까?”
황실 무도회에 참석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는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그 의문을 풀고 싶어 했다.
무도회가 시작되기 직전, 무도회장에 모인 이들의 가장 큰 화제 역시 그 두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곧 있으면 대공 전하와 그 약혼녀가 도착하겠네요. 정말 기대되는걸요.”
“약혼녀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 궁금해요.”
“맞아요. 그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도요.”
그때였다. 블랙웰의 마차가 무도회장의 앞에 도착한 것은.
무도회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바늘 같은 시선이 입구에 빽빽이 꽂혔다.
모두가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날카로운 눈빛에는 약혼녀를 자로 재듯 평가하고자 하는 의도가 가득했다.
‘그 존재감 없고 말수 적었던 셔우드 영애가 무슨 수로 블랙웰 대공을 손에 넣었을까?’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 봤자 셔우드 영애지. 얼음처럼 냉정한 블랙웰 대공이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할 리가 없어.’
그 올가미 같은 시선에 헐뜯을 거리가 하나라도 걸린다면, 그들의 악의적인 호기심 앞에서 라리아는 맛 좋은 먹잇감이 되고 말리라.
마차의 문이 열리고, 길고 검은 옷을 입은 거구의 남자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녹턴 블랙웰 대공이었다. 사교 행사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적어 많은 것이 무성한 소문에 싸인 그 남자.
하지만 그는 소문보다도 훨씬 더 미남이었으며, 무척이나 대하기 어려워 보이는 눈빛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어머, 수도에 저런 남자분이 다 있었다니……!”
“저도 대공 전하를 직접 뵌 건 처음이에요!”
그를 처음 본 어린 영애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친부를 살해했다는 악명, 한 번 광기에 빠지면 피를 보아야만 한다는 악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놀라울 정도로 매력적인 남자였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그런 악명 때문에 더 위험한 매력이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마차에서 먼저 내린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안에 있던 사람이 내리는 것을 도왔다.
바로 그의 약혼녀, 라리아 셔우드였다.
“……!”
내심 그녀를 우습게 여기던 사람들은 놀라움에 숨을 삼켜야만 했다.
그동안 각종 사교 행사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으며, 사교계에서 거의 존재감이 없었던 그녀였다.
숫기가 없고 늘 혼자 다니기 일쑤였으며, 얼굴은 예쁘장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수도에 그녀보다 대단한 미인은 차고도 넘쳐 이목을 끌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모습은…….
라리아는 대공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눈부시게 빛나는 푸른 드레스를 입은 그녀에게서 과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결 좋은 베이지색 머리카락과 청록색 눈동자가 사랑스럽게 빛났다.
그녀의 드레스도, 커다란 다이아몬드 목걸이도 샹들리에의 빛에 비쳐 오색으로 빛났지만, 그녀에게는 드레스나 목걸이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반짝거림이 있었다.
그토록 화려하게 꾸몄음에도 그녀 자신의 매력은 조금도 가려지지 않고 오히려 더 환하게 빛나는 듯했다.
그녀는 물론 미인이었지만, 단순한 외모의 아름다움이 그녀의 매력의 전부가 아니었다.
그녀에게서는 생기가 넘쳐흘렀으며, 발랄한 에너지로 가득했다. 이런 그녀에게서 사랑스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라리아는 모두가 경외하는 녹턴 블랙웰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녹턴에게 무어라 속닥이더니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괴물 대공의 에스코트를 받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퍽 편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놀라운 것은 라리아 셔우드뿐만이 아니었다.
그 어떤 여성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고, 누구에게나 무정했던 그 냉혈한 녹턴 블랙웰의 시선은 라리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단단히 두른 채 그녀의 말과 몸짓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굴었다.
한편으론 무례한 인간이 그녀에게 접근할까 봐 미리 차단하는 것 같기도 했다.
비록 그의 얼굴은 언제나와 같이 무뚝뚝했지만 그가 그녀에게 얼마나 신경을 쓰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는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녹턴이 여자에게 이렇게나 신경을 쓰다니.
이 자리에 있는 그 어느 누구도 본 적이 없었던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들이 무도회장으로 걸어 들어왔다. 순간 조용해졌던 사람들은 다시 쑥덕여 대기 시작했다.
그들의 화제는 여전히 녹턴과 라리아였다. 비록 그 논조는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대공 전하께서 근사하신 건 알고 있었지만, 셔우드 영애가 원래 저렇게 매력적이었던가요?”
“저렇게 매력 있는 영애가 어떻게 여태까지 무도회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거지?”
“이상하네요, 제가 알던 셔우드 영애는 원래 저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들의 대화가 라리아에게 호의적으로 변했다. 그녀에게서는 도저히 흠잡을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녹턴과 라리아가 함께 무도회장을 거니는 동안에도 많은 이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이 놀라운 커플에게 말을 걸어 보고 싶은 사람은 많았으나, 녹턴이 두려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안 그래도 다가가기 쉬운 분위기가 아닌 그였는데, 오늘따라 더더욱 주변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섣불리 말이라도 걸어서 두 사람을 방해했다가는 그가 가만두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을 느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용감한 사람들은 있었다.
“대공 전하, 그리고 셔우드 영애. 처음 인사 올립니다.”
한 쌍의 부부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낮은 사람으로서의 예절에 따라 자신들을 소개했다.
“저는 마리나 호프, 그리고 이쪽은 제 남편 호프 백작이랍니다.”
“안녕하십니까? 대공 전하와 그 약혼녀분을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던 호프 백작이 흠칫 놀랐다. 녹턴이 방해받은 듯 적대적인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빛은 산전수전 다 겪은 기사도 오금이 저리게 만들었기에, 호프 백작은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녹턴이 적개심을 드러낸 것은 잠깐이었다.
그는 곧 표정을 정돈하곤 호프 백작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녹턴 블랙웰. 그리고 이쪽은 내 약혼녀요.”
“라리아 셔우드예요. 잘 부탁드려요.”
“만나서 반가워요, 셔우드 영애! 정말 만나 뵙고 싶었어요. 와, 그건 그렇고 무척 아름다운 드레스네요. 로잘린 부인의 디자인인가요?”
능숙하게 스몰토크를 걸었던 호프 백작 부인은 라리아의 가슴 위에 얹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이, 이거 설마…… 대, 대양의 눈물인가요?!”
“네? 대양의 눈물이요?”
그녀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 라리아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호프 백작 부인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라리아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가리켰다.
“이 목걸이 말이에요! 아난소 지역에서 난 다이아몬드 중 최대의 크기이자 현재 제국에 있는 보석 중 제일 고가일 거라고 하는…… 세상에나, 설마 대양의 눈물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다이아몬드가 참 크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러니 당연히 값비쌀 거라고도 예상했지만…… 설마 이름까지 있을 정도로 유명한 보석일 줄 라리아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제국에서 제일 비싼 보석이라고? 드레스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웠는데, 이 목걸이의 값어치는 대체 얼마란 말인가?
호프 백작 부인은 거의 황홀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라리아의 목걸이를 들여다보았다.
“어쩜, 이렇게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이렇게 투명할 수 있다니. 단 일 분만이라도 이 목걸이를 소유할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는걸요. 정말 부럽네요, 셔우드 영애! 대공 전하께서 영애를 많이 신경 쓰시나 봐요.”
“아하하…….”
라리아는 멋쩍은 얼굴로 웃으며 녹턴을 흘겨보았다.
아무리 블랙웰 대공의 약혼녀로서 품위를 갖추어야 한다지만,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그가 그럴수록 나중에 블랙웰 대공가를 떠나야 하는 라리아로서는 부담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녹턴은 그녀의 힐난하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눈치채지 못했는지, 눈이 마주치자 별거 아니라는 듯 픽 웃었다.
“블랙웰의 안주인의 목 외에 이 녀석이 어울릴 만한 자리는 없지.”
“어머나…… 대공 전하께서 이렇게 로맨티스트이실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의 말에 호프 백작 부인이 감탄했다.
한편 이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 역시 모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양의 눈물이라고요? 55캐럿이나 되고, 그것 하나만으로도 왕국 몇 개를 살 수 있다는…….”
“언제부턴가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들었는데, 블랙웰 대공께서 입수하신 거로군요!”
이쯤 되면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라리아 셔우드 영애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블랙웰 대공이 라리아 셔우드에게 완전히 빠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왕국 몇 개 정도의 값어치를 가진 보석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물로 줄 정도로.
어떤 일이나 처음이 제일 힘든 법이다. 호프 백작 부부가 제일 먼저 용기를 내자, 다른 사람들 역시 하나둘 녹턴과 라리아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실례합니다. 혹시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두 분과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만…….”
“무도회장에서 뵙는 것은 처음이군요, 대공 전하. 혹시 저를 기억하십니까?”
“대공 전하, 그리고 셔우드 영애.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그것도 사교계에서 영향력이 있고 발이 넓기로 유명한 호프 백작 부인에 준하거나 그보다 더 유력한 사람들만이 그들의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라리아는 눈앞이 핑핑 돌았다. 그들 중 대부분이 라리아의 일기장에서 보았거나 예절교육 때 배웠던 유명인들이었다.
‘블랙웰 대공과 그의 약혼녀라서 그런 거겠지. 무도회에 한 번 나온 것만으로도 이 정도로 주목을 받다니, 블랙웰은 정말 대단하구나.’
지난 몇 달간 사교계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화제가 됐는지 알지 못했던 그녀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추리였다.
‘블랙웰의 이름에 누가 되면 안 되겠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사람들에게 응대를 하려 애썼다.
그나마 유치원 교사를 하던 때에 하루에도 몇 번씩 학부모들을 응대했던 경험이 있어 사람을 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
그러는 와중에도 녹턴의 시선은 라리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블랙웰의 이름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라리아의 마음과 반대로, 녹턴은 불만스러웠다.
‘뭘 쓸데없는 놈들까지 하나하나 상대해 주고 있는 거지?’
녹턴의 눈에는 보였다. 늘 힘든 기색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라리아였지만 그녀 역시 지쳐 가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환경 속에 낯선 옷을 입고 낯선 사람들을 수십 명씩 상대해야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녀가 블랙웰에 온 이후로, 그녀가 우선시한 사람은 언제나 아이들 아니면 자신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자신의 옆에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보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 말하고 웃고 있지 않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광경이었다. 녹턴은 왠지 모를 불쾌함을 느꼈지만, 난생처음 느껴 본 그 감정의 이름이 질투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녹턴은 라리아의 말을 끊고 그녀를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그가 어리둥절해하는 라리아를 데려간 곳은 무도회장 옆에 마련된 휴게실이었다.
휴게실에 도착하고 나서야, 라리아는 그가 지친 자신을 배려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녹턴은 라리아를 휴게실 소파에 앉힌 뒤 구두를 벗고 쉬게 했다.
“쉴 새 없이 떠들어 댔으니 목이 마르겠군.”
그는 지나가던 시종을 불러 음료수를 가져오게 했다. 그가 음료수 잔을 건네자 라리아는 민망해졌다.
‘이거 원, 내가 시녀고 녹턴이 대공인데, 이래서야 누가 윗사람인지 모르겠는걸.’
“감사해요. 하지만 직접 해 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그녀의 말에 녹턴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가 라리아의 옆자리에 앉으면서 물었다.
“불편한가?”
“아뇨. 그건 아니지만……. 저를 이렇게 살펴 주시기에 전하는 너무 귀하신 분이잖아요? 아시다시피, 저는 그냥 시녀일 뿐인걸요.”
녹턴은 그런 라리아를 빤히 보았다.
“영애는 시녀이기 이전에 내 약혼녀다.”
그의 말에 라리아는 마시려던 음료를 뿜을 뻔했다.
“블랙웰의 여자가 최고의 대우를 받지 않으면 누가 이런 대접을 받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 약혼이 거짓된 것이며, 언젠가는 끝날 소꿉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그가 제일 잘 알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심장이 자꾸만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음료수 잔 안에서 터지는 기포를 보는 척하며 고개를 숙여도 그의 시선은 자꾸만 따라왔다.
그의 시선이 의식돼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의 말에 의미부여 하면 안 돼, 라리아. 그는 그냥 내가 받는 대접이 곧 블랙웰이 받는 대접이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뿐이야.’
라리아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잠재우기 위해 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약혼녀를 내팽개쳐 두기엔 그가 너무 다정한 사람이라 그런 것뿐이야. 오해하지 말자. 섣불리 오해하는 것만큼이나 꼴불견은 없으니까…….’
자꾸만 의식되는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음료수를 홀짝이던 그 순간이었다.
똑똑.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녹턴이 인상을 팍 썼다.
‘대체 어떤 놈이 방해를…….’
그는 라리아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뜻의 손짓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 너머에 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라리아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공과 약혼녀의 휴식시간을 방해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제국에 몇 없을 텐데…….’
보통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면 무도회에서 휴게실에 있는 사람을 방해하는 것은 꽤나 큰 결례로 여겨졌다.
특히나 남녀가 함께 들어간 방이라면 더더욱. 두 사람이 휴게실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상대를 확인한 녹턴의 말은 그런 그녀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황제와 황후로군.”
“네, 뭐라고요?!”
라리아는 입을 떡 벌렸다.
그녀는 허둥지둥 음료수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런 그녀와 대조적으로 녹턴은 한없이 여유로운 태도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편히 쉬고 싶다면, 쫓아 보낼까?”
이건 또 무슨 소리! 아무리 블랙웰이 황실조차 쉽게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가문이라고 하지만, 황제 부부가 제 발로 행차했는데 만남을 거절하는 일이 결례가 아닐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런 주저 없이 그 결례를 범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오로지 라리아가 마음 놓고 쉴 시간을 주기 위해서.
라리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폐하께서 오시다니, 당연히 모셔야죠.”
너무 당황한 라리아는 녹턴의 얼굴에 순간 스친 아쉬운 빛을 눈치채지 못했다.
라리아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녹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알겠다.”
그리고 문을 열어 불청객을 맞이했다.
라리아는 예절 수업 때 배운 대로 깊이 고개를 숙이고 치맛단을 들어 올려 황제와 황후 부부에게 예를 갖추었다.
“셔우드 가문의 장녀 라리아가 지고하신 태양과 달을 뵙습니다.”
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황제와 황후는 기껏해야 20대 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젊은 부부였다.
황제는 정중히 예를 갖추는 라리아를 향해 퍽 소탈한 얼굴로 웃었다.
“안녕하시오, 셔우드 영애. 말로만 들었던 영애를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어 반갑기 그지없소. 그리고 녹턴! 오랜만이군. 왜 요즘은 황궁에 잘 들르지 않나?”
살갑게 말하던 황제는, 녹턴의 미간에 순간적으로 금이 가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아시다시피 제가 요즘 일이 많습니다.”
“안 그래도 월드만 자작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었네. 아, 아니면 성국 문제인가? 요즘 성국에서 자꾸 호출한다면서?”
“예, 뭐. 이것저것. 그건 그렇고, 이렇게 들르신 이유가 뭡니까?”
녹턴이 다소 무례할 정도로 직접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내 살아생전 자네를 무도회에서 볼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자네가 참석했다기에 무슨 바람이 불었나 싶어 찾아왔지.”
황제는 여태까지 자리를 권하지 않는 녹턴에게 소파를 향해 눈짓했다.
녹턴은 라리아를 보았다. 라리아는 잔뜩 다급한 얼굴로 필사적인 신호를 보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녹턴이 말했다.
“편히 쉬다 가십시오. 부디.”
“그래, 그래야지! 고맙네.”
그제야 황제와 황후, 그리고 그들의 맞은편에 녹턴과 라리아가 자리에 앉았다. 라리아가 인사했다.
“이렇게 두 분을 알현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 영광은 무슨. 편히 대해요.”
황제가 녹턴과 황후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 친우 녹턴의 아내가 될 사람이니 영애 역시 내 친우 아니겠소? 하하하!”
“그럼요.”
“…….”
황후가 동조하고, 녹턴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라리아는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 모든 세계를 만든 원작자이니까 말이다.
‘그는 악역 중 한 명이었지.’
황제의 이름은 귄터 프란츠 크리스토프 뮌스 브레히트. 녹턴을 질투해 그와 여주인공의 관계를 훼방 놓고, 각종 악행을 벌이는 악역이었다.
참고로, 황실의 숨겨져 있는 황자로 불린다는 제4 황자는 그의 동생이었다.
‘내가 원작자가 아니었으면 저 친근한 언행에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어.’
라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의 아내인 황후는 평범하게 착한 사람이었지만, 황제는 그다지 가까이할 만한 인물이 못 되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악역이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가 악행을 벌이기 시작하는 건 여주인공이 나타난 이후라는 점이야.’
즉 지금은 그렇게까지 위험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게는 예의를 차리고 밉보이지 않는 한에서, 적당히 경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라리아는 황제 대신 황후에게 말을 걸었다.
“황자 전하의 모습을 신문에서 뵈었어요. 아직 8세밖에 되지 않으셨는데 벌써 글자를 줄줄 읽으신다면서요?”
계급의 고저와 상관없이 자기 아이 이야기를 하는 데 관심 없는 부모는 없었다.
더군다나, 아이 자랑을 할 만한 판을 상대가 먼저 깔아주었으니. 황후는 반가움을 숨기지 못하며 눈을 반짝였다.
“어머, 맞아요! 자랑은 아니지만, 우리 세드릭…… 아니, 황자가 얼마나 총명한지 몰라요. 제 아들이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니까요? 글쎄, 얼마 전에는 30페이지나 되는 책을 앉은 자리에서 줄줄 읽어서 깜짝 놀랐답니다.”
“30페이지나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황자 전하께선 총명하신 게 맞는 것 같아요.”
학부모들을 대하는 데 잔뼈가 굵은 라리아에게 아이 가진 부모를 상대하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나 다름없었다.
황후의 아들 자랑에 한참이나 맞장구를 쳐 주자 기분이 좋아진 황후가 말했다.
“혹시 영애를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을까요?”
“영광입니다, 폐하!”
“좋아요, 라리아. 라리아도 저를 레베카라고 불러 주세요.”
황실의 사람이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할 때 덥석 그에 응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났다.
그럴 때는 자신을 낮추며 좋게 거절하는 것이 제국 사교계의 암묵적 규칙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그것이 황족에게 큰 친밀감의 표시인 것은 맞았다. 라리아는 기쁘게 생각하며 말했다.
“아니, 어떻게 제가 감히 황후 폐하의 존함을 입에 담을 수 있겠어요? 그 말씀은 부디 거두어 주세요.”
“정말 괜찮은데……. 정 불편하다면 억지로 이름으로 부르진 않아도 좋아요.”
거절을 했는데도 황후는 무척 흡족해 보였다.
“블랙웰에도 황자 또래의 아이가 둘 있지요?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라고 하던데요.”
“맞아요. 황자 전하만 하겠느냐만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랍니다.”
“좋아요, 라리아. 아시다시피 황실에 어린아이라곤 황자 한 명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황자가 많이 외로움을 타는 것 같던데, 혹시 그쪽의 아이들은 안 그런가요?”
그 말에 라리아는 깨달았다.
그것은 황후가 황자와 블랙웰의 아이들을 친구로 만들어 주고 싶다는 의사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자네트와 미하일의 주변에는 어른들밖에 없었지.’
라리아는 생각했다.
‘모든 아이들에게는 또래의 친구가 필요한 게 사실이야. 또래의 친구는 사회성과 정서 발달에도 큰 도움이 되지.’
그러고 보면, 얼마 전에 아이들이 무도회에 참석하고 싶어 했던 것도 떠올랐다.
‘아이들을 위한 간단한 사교 행사를 열어 주면 어떨까? 또래의 아이들을 불러서 파티를 열어 준다면…….’
자신이 생각해도 좋은 생각 같았다. 라리아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폐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저희 아이들을 위해 주최할 파티에 황자 전하를 초대하고 싶어요. 혹시 괜찮으실까요?”
“파티라니, 좋은 생각이네요! 블랙웰 대공가에서 열릴 파티라니 기대가 되는데요. 블랙웰이라면 믿고 황자를 맡길 수 있지요.”
황후의 흔쾌한 허락에 라리아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이들을 위한 파티라니, 멋진 생각이야. 자네트와 미하일에게 또래 친구를 만들어 줄 수 있다니!’
황후와 라리아가 이런 대화를 하는 동안 황제와 녹턴 역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주로 정무나 외교에 대한 이야기였다.
“확실히 성국의 간섭이 점점 심해지고 있단 말이야. 레마르크 2세, 그 작자가 대신관이 된 이후로는 더더욱.”
성국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던 황제는 어느 순간 여자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피식 웃으며 녹턴에게 말했다.
“하여간에 여자들이란, 만나기만 하면 옷 아니면 애들 이야기란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녹턴?”
꼭 여자들은 하찮은 것에만 신경 쓴다는 어투였다.
그리고 그의 말은 여자들의 귀에도 들려왔다.
“음, 아하하…….”
남편의 무례한 발언에 황후가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웃음으로 얼버무리려 애썼다.
라리아 역시, 이런 자리에서 빈정거리는 말을 들으니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애당초 황제가 그리 인격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한 기대는 진작 바닥을 찍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라리아가 황제의 말을 무시하고 파티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려던 찰나였다.
“글쎄요, 만나기만 하면 자식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아니면…….”
냉랭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어색한 침묵을 깨뜨렸다. 녹턴이었다.
그는 무정한 자색 눈동자로 황제를 똑바로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부모가 되어서는, 제 자식 일에 관심 한 점 없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그의 말려 올라간 입꼬리에는 비웃음마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라리아는 오늘 아침 식사로 먹은 게 체하는 느낌이 들었다.
‘미, 미친 거 아냐?!’
에둘러 말했지만, 누가 봐도 녹턴은 황제를 비난하고 있었다.
아무리 블랙웰이 황실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권력을 가졌다든가, 제국의 실세라든가 하지만…….
그렇다 해도 법적으로나, 공식적으로나 블랙웰은 황실의 권속이다.
그런데 녹턴이, 감히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제국의 황제를 이렇게 망신 주다니!
라리아도, 황후도, 심지어 저 말을 들은 황제 본인도 큰 충격에 넋이 나가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라리아는 황제가 불같이 화를 낼까 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아…… 하하하하하! 이런! 내가 한 방 먹었군.”
황제는 붉어진 제 이마를 내리치며 홍소를 터뜨렸다.
“그래, 한 방 먹었어. 녹턴, 역시 자네는 재치가 있다니까. 패기도 있고……. 권력자에게 알랑방귀나 뀌며 단물이나 빨아먹으려 드는 누구들이랑은 전혀 다르지.”
황제는 웃으며 녹턴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리고 녹턴은 픽 웃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칭찬 감사합니다.”
한편 이 모습을 지켜보던 라리아의 동공은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뭐야, 화 안 내는 거야? 정말로 괜찮아?’
쿨한 건지, 쿨한 척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황제가 화를 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호호호, 저, 정말 재미있는 농담이었어요.”
황후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지 함께 분위기를 수습하려 애쓰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보며 라리아는 무심코 생각했다.
‘블랙웰이 정말 대단한 집안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황제에게 물을 먹여도 괜찮을 줄이야…….’
정말이지 원작자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수준의 권력이었다.
* * *
한편, 녹턴은 황제를 처음부터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품성이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진실을 보는 눈’이 있었으니까.
‘진실을 보는 눈’으로 본 황제는, 능력은 나쁘지 않지만 인격은 그에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소인배였다.
황제의 본질은 질척질척한 열등감과 악의로 뒤덮여 있었다.
또한, 녹턴은 그가 자신을 볼 때마다 그 열등감이 경련하듯 부풀어 오르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열등감. 녹턴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미지의 감정이었다.
‘한심한 인간.’
타고난 능력조차 가려 버릴 정도의 부정적인 감정이라니.
녹턴은 제국을 손에 넣고도 자신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황제를 볼 때마다 내심 그를 우습게 여겼지만, 달리 그 외에 조치를 취하진 않았다.
그만큼이나 황제가 자신의 털끝도 건드리지 못하게 할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녹턴에게 황제는 경쟁자조차 되지 못할, 그저 그런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데 오늘.
“하여간에 여자들이란, 만나기만 하면 옷 아니면 애들 이야기란 말이야.”
이제껏 귀찮음이나 우스움 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던 상대였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녹턴?”
녹턴은 그의 말에 처음으로 심기가 거슬리는 것을 느꼈다.
여태까지는, 열등감과 시기심으로 똘똘 뭉친 저 작자가 뭐라고 하건, 친근한 척하면서 은근히 속을 긁는 말을 해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봤자 버러지가 꿈틀대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가 아무리 발악해 봤자 녹턴의 능력과 명성에는 발끝도 따라올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가 입에 담은 것은 녹턴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녀에 대한 것이었으니까.
라리아는 자신이 사랑하는, 자신이 선택한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하는 말을 제가 감히, 하찮은 것처럼 취급하다니.
불쾌해진 녹턴은 이제껏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을 했다.
그의 말에 반박한 것이다.
“글쎄요, 만나기만 하면 자식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아니면, 부모가 되어서는 제 자식 일에 관심 한 점 없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녹턴은 자신의 말에 황제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황제는 이제껏 자신이 귀찮게 굴 때마다 녹턴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은 것이 자신이 황제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은 황제이고, 녹턴 블랙웰 대공은 제국의 권속이므로. 화는 나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 실은 그게 아니었다.
녹턴은 자신이 제국의 권속임을 추호도 신경 쓰지 않았으며, 그가 황제의 도발에 반응하지 않았던 이유는 한 가지였다.
조금도 화가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만큼이나 녹턴에게 상대는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 존재였으니까.
황제는 그 사실을 그제야 깨달아 버렸다.
또한, 그가 녹턴을 화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라리아라는 것 역시도.
라리아는 어느샌가 녹턴의 역린이 되어 있었다. 저런 지질한 작자가 그녀를 깔보는 모습을 그냥 보고 넘기기에, 그녀는 자신의 안에서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 순간 녹턴 역시도 깨달았다.
‘……약점이 생겨 버렸군.’
6년 전 그 사건 이후,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고 거리낄 것이 없었던 그였는데…….
권력도, 부도, 명성도, 하다못해 자신의 삶조차도 미련이 없었던 그였는데.
어느샌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명징한 약점이 생겨 버린 것이었다.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그녀의 청록색 눈이 보였다. 조금 벌어진 입술과 긴장한 듯 꼭 쥐고 있는 작은 주먹도.
누구보다도 강하고 누구에게도 해를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자신에게, 저런 작고 가녀린 것들이 역린이 되고야 말았다.
라리아, 그녀를 향한 것이라면 고작 저 한심한 작자의 말조차 그냥 넘기지 못하는데.
만일 그녀에게 직접적인 위해가 닥쳐 오기라도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식고, 세상이 검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감히 누가 블랙웰 대공의 여자를 함부로 건드리려 들까. 그녀는 내가 지킬 것이다.’
그렇게 되뇌며 잡생각을 떨쳐 버렸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느라 녹턴은 놓쳐 버리고야 말았다.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황제의 분노와 앙심이 담긴 시선을.
* * *
“그럼 우리도 이제 슬슬 가 보지. 편히들 쉬게.”
황제 부부는 한참을 노닥거린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를 갖추어 배웅을 하면서도 라리아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윗사람을 대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었으니까.
다시 둘만 남자 녹턴이 말했다.
“좀 더 쉬겠나?”
라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만하면 휴게실에서는 충분히 있었던 것 같았다.
“우리도 같이 나가 봐요.”
녹턴은 그녀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함께 무도회장으로 돌아갔다.
타이밍 좋게, 궁정악단이 합주를 시작했다. 무도회의 메인 이벤트가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귄터 프란츠 크리스토프 뮌스 브레히트 황제 폐하와 레베카 에리히 오브라이언 뮌스 브레히트 황후 폐하 납십니다!”
호명관이 무도회의 참석자들을 가장 높은 사람부터 차례대로 부르기 시작했다.
모든 참가자들은 자신의 차례에 모두의 앞에서 최소 한 번은 춤을 추어야만 했다.
황제 부부가 무도회장의 한가운데에 나와 첫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라리아는 깨달았다.
황실에서 온 참석자는 황제 부부 단 두 사람뿐이므로, 그다음은 바로 블랙웰 대공과 그의 약혼녀의 차례라는 사실을 말이다.
라리아는 떨리는 기분으로 차례를 기다렸다. 황제 부부의 춤이 끝나면, 호명관이 자신들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어린애들의 앞에 나서는 거라면 자신 있지만, 이렇게 많은 어른들 앞에 나서는 건 처음인걸…….’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괜히 긴장이 되었다.
정말 열심히 배우긴 했지만, 춤을 배운 기간이 고작 한 달 남짓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 불안하기도 했다.
녹턴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손바닥에 자꾸만 땀이 배어 나왔다. 녹턴이 찝찝해할까 봐 라리아는 슬그머니 그의 손에서 손을 뺐다.
“……?”
꼭 붙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가자 녹턴이 언짢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라리아는 멋쩍게 웃었다.
“손에 땀이 차서요.”
그렇게 말하며, 라리아는 얼른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녹턴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녹턴은 말도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채더니 손가락 깍지를 끼웠다. 또 멋대로 손을 빼지 말라는 양.
놀란 라리아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녹턴은 그녀를 보고 웃고 있었다. 입꼬리를 올린 채 그녀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걱정되나?”
그가 낮게 속삭였다.
라리아는 심장이 가볍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곤,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걱정하지 마라.”
그가 말했다.
정말이지 멋이라곤 하나도 없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많고 많은 위로와 안심의 말들을 두고 기껏 하는 말이 ‘걱정하지 마라.’ 라니!
정말이지, 달콤한 말이라든가 능청과는 어울리지 않는 녹턴다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라리아는 그만 풉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웃자 녹턴의 미간에 가는 주름이 생겼다. 그가 그녀의 손을 꼭 쥔 채 물었다.
“왜 웃지?”
“전하다워서요.”
“그래서 별로였나?”
라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기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곤, 대답했다.
“그래서 좋았어요.”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의 담백하다 못해 투박한 위로의 말 속에 얼마만큼의 진심이 들어 있는지 그녀는 알고 있으니까.
그 짧고 건조한 말 한마디를 내뱉기 위해, 그녀를 향해 웃어 주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 알고 있으니까.
게다가 새삼 곁에 그가 있다는 게 실감 나서 더 안심이 되기도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에게 있어 녹턴은 대단히 신뢰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의 고용주인 동시에 좋은 친구였고, 지난 한 달 동안 열심히 합을 맞춘 최고의 댄스 파트너이기도 했다.
라리아는 불안감이 사라진 얼굴로 그를 향해 빙긋 웃었다.
“감사해요. 덕분에 긴장이 싹 풀렸네요.”
녹턴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반응을 완전히 납득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미소만큼은 마음에 쏙 들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보잘것없는 말이었지만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때였다.
“녹턴 블랙웰 대공 전하와, 라리아 셔우드 백작 영애 납십니다!”
호명관이 드디어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가지.”
녹턴의 말에 라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무도회장의 중심에 섰다. 수백의 시선이 그들을 둘러쌌다.
첼로의 둔중한 선율과 함께 연주가 시작되었다.
연주에 맞추어 춤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라리아는 꼭 춤 속에 빨려들어 가는 것만 같은 감각을 느꼈다.
한 번 몰입하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녹턴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보라색 눈동자 속에 비치는 사람도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뿐이었다.
어느샌가 둘만의 공간이 된 무도회장에서 라리아는 즐겁게 추었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도 않고, 자신이 블랙웰의 이름에 누가 될까 봐 걱정하지도 않고, 그저 순수하게 즐기는 마음으로.
‘나 꽤 잘하고 있는 것 같아.’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꽤 그럴싸하게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아 뿌듯했다.
한편,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은 그냥 그럴싸하게 춤을 추는 정도가 아니었다.
‘두 사람 다 무도회는 처음일 텐데, 어쩜 저렇게 잘 출 수가?’
사람들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숨을 죽였다.
어느 무도회에서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다던 녹턴은 정말 완벽한 춤꾼이었다.
하지만 제국 최고의 소드마스터라고도 불리는 그이니 몸을 잘 쓰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되는 일이었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약혼녀 쪽이었다. 그녀가 돌 때마다 별이 쏟아질 것만 같은 푸른 치맛자락이 둥글게 펴졌다.
녹턴에 비해 그녀의 춤은 기술적으로 완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코 결점으로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기에 그녀는 녹턴에 비해 자유로웠고 발랄한 생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춤은 그저 의무감에 추는 춤이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가 이 순간을 즐기고 있음이 느껴졌다.
모두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굉장히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마침내 연주가 끝나고, 춤도 끝났다. 라리아는 숨이 찼지만, 그래도 맘껏 땀을 흘린 뒤의 상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
두 사람은 기분 좋게 미소 지으며 시선을 교환했다.
하지만 그런 여유를 부릴 시간은 길지 않았다. 곧 열화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던 것이다.
라리아는 깜짝 놀라 동그랗게 뜬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들을 에워싼 사람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왜들 그러지? 무도회에서는 원래 이렇게 반응이 좋은가?’
라리아는 황제 부부의 춤이 끝난 직후의 반응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때의 반응도 썩 좋았던 것 같긴 하지만, 사실 녹턴과 대화하는 데 정신이 팔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라리아는 ‘원래 다 그런가 보다’ 정도로 결론 내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녹턴과 함께 자리에서 물러났다.
함께 걸어가며 라리아가 말했다.
“정말 즐거웠어요. 저 꽤 잘했죠? 사실 걱정했는데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 다행이에요.”
녹턴은 종달새처럼 재잘대는 그녀를 귀엽다는 듯 내려다보다가, 문득 말했다.
“설마 눈치 못 챈 건가?”
“네? 뭐를요?”
“춤이 끝난 뒤 말이다. 반응이…….”
그러나 그의 말을 채 끝을 맺지 못했다. 누군가가 감히 그의 말을 끊은 것이다.
“라리아!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반갑구나!”
녹턴의 미간에 선명한 주름이 졌다. 그녀와 단둘이 되려고 할 때 방해하는 눈치 없는 작자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녹턴과 라리아가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바로 셔우드 백작과 백작 부인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라리아가 반갑게 말했다.
라리아의 계모인 셔우드 백작 부인은 상기된 얼굴로 치맛자락을 붙잡고 달려왔다.
그녀가 라리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전하와 네 춤은 잘 봤단다. 정말 아름다운 춤을 추더구나!”
“아이참, 보통이죠.”
라리아가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셔우드 백작 역시 어색하고 멋쩍은 얼굴로 다가왔다.
“만나서 반갑구나, 라리아. 네가 이번 무도회에 참석할 줄은 몰랐다.”
그는 젊었을 때의 미모를 그대로 간직한 채 나이 든 얼굴에 반가움이 깃든 미소를 띄웠다.
그는 잠시 라리아를 보다가, 곧 녹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공 전하.”
“……그래, 격조했군.”
두 남자의 분위기는 도저히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어색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라리아는 그들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가 세인트 아그네스 광장에서의 일이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때 두 남자가 얼마나 심한 언쟁을 벌였고 결국 녹턴이 백작에게 어떻게 한 방을 먹였는지도.
백작 부부는 자신들보다 20년은 젊은 듯한 대공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녹턴은 여전히 그들이 그리 곱게 보이지 않았다.
라리아와 원만한 화해를 했다는 소식은 그녀를 통해 들었지만, 그녀가 그들을 용서했다고 해도 그는 아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들은 너무 오랜 시간 라리아를 박대했고, 그녀의 유년시절을 외롭고 쓸쓸하게 만든 주범이었다.
그리고 또…….
‘그녀가 당장 셔우드가로 갈 일은 없다고 하긴 했지만.’
녹턴은 그들을 쏘아보며 생각했다.
‘8개월 뒤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라리아가 당장 셔우드로 돌아가지는 않겠다고 했고, 그는 라리아의 책임감과 진실성을 믿었다.
그녀는 자신의 말을 지킬 것이고, 8개월 동안은 그와 아이들의 곁에서 충실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계약 기간까지의 이야기다.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계약 기간이 끝나면 돌아가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그때까지 그녀의 마음을 붙들어 놓기로 결심했지만, 그래도 그들이 자신에게서 라리아를 빼앗아 가려고 하는 경쟁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오래 그녀를 박대한 주제에 왜 이제 와서 살가운 척인지 모르겠군.’
라리아는 가족들과 화해했다고는 말했지만 가족들의 심정 변화의 이유까지는 그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그건 너무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들의 사연을 모르니 녹턴은 더더욱 짜증이 났다.
그의 ‘진실을 보는 눈’에 비친 그들에게 악의는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그도 사람인지라 한 번 눈 밖에 난 자들은 무슨 짓을 해도 아니꼬워 보이는 게 당연했다.
지금 녹턴의 눈에는 그들이 아양을 떨어 라리아를 빼앗아 가려고 하는 위선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편, 녹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라리아와 셔우드 백작, 백작 부인은 지난 일에 대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라리아, 요즘 몸은 건강하니? 전하께서는 잘해 주시고?”
“물론이죠. 얼마나 잘해 주시는데요. 참, 두 분이 매주 봉사활동을 나가신다는 소식은 신문에서 봤어요. 힘들진 않으신가요?”
“호호, 힘들기는! 이제껏 네게 못 해 준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일도 아니란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고아원에 갔을 때 말인데…….”
백작 부인이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길고 긴 수다를 늘어놓으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그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백작 부인의 얼굴은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나가 꼭 유령처럼 보였다.
“어, 어머니? 무슨 일 있으세요?”
“여보, 갑자기 왜 그러는 거요?”
하지만 백작 부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동공은 라리아의 등 뒤에서 멈춰 있었다.
바로 녹턴이었다.
녹턴은 대단한 미남자였지만 결코 대하기 편한 타입의 미남은 아니었다.
오히려 검은 맹수를 닮은 그를, 그의 형형한 보라색 눈동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가 노려보면 기사들조차 오금이 저릴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그런 그가 적개심을 담아 귀부인을 노려보고 있으니 상대가 느끼는 공포감은 오죽하겠는가.
“어…… 어머!”
남편과 의붓딸이 걱정하는데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던 셔우드 백작 부인은 어느 순간 현기증을 느낀 듯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셔우드 백작이 깜짝 놀라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괜찮소, 여보? 무슨 일이오?”
“제가 의사를 모셔올게요!”
라리아가 눈치 빠르게 나섰다. 그녀는 무도회에 늘 상주하는 궁의를 부르기 위해 달려갔다.
라리아가 데려온 궁의는 셔우드 백작 부인을 정성스레 진료했지만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
‘알코올을 지나치게 섭취한 것도 아닌 것 같고, 코르셋으로 인한 호흡곤란도 아니고, 지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궁의가 자신을 진찰해도, 남편과 의붓딸이 걱정해도 셔우드 백작 부인은 차마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지고하신 대공 전하께서 자신을 보는 눈빛이 무서워서 그랬다고 차마 어떻게 말하겠는가?
자신의 체면도 그렇고, 사실을 말하기엔 여전히 그가 무서웠다.
녹턴이 여전히 뒤에서 언짢은 얼굴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백작 부인은 그냥 입을 다물 수밖엔 없었다.
그녀를 아무리 살펴도 마뜩한 결과를 찾지 못한 궁의가 말했다.
“아마 오랜만의 무도회로 인해 피로가 쌓이셨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여보, 피로하다면 내게 말을 하지 그랬소. 어쩐지 오늘따라 무리를 하더라니…….”
백작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동안 부부간의 사이도 부쩍 좋아진 모양인지, 그의 목소리와 표정에는 흉내 내는 것이 아닌 진심 어린 걱정이 비쳐 보였다.
“아, 아무래도 그래야겠네요. 오늘은 좀 일찍 자리를 뜨는 것이 좋겠어요.”
백작 부인이 녹턴을 외면하며 더듬더듬 말하자, 백작이 작별을 고했다.
“그럼 아쉽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라리아. 오늘 만나서 즐거웠단다. 대공 전하께서도 강녕하십시오.”
“저도 반가웠어요. 두 분, 살펴 가세요!”
녹턴과 라리아와 헤어진 백작 부부는 무도회장을 나섰다.
그러면서도 백작 부인은 방금 보았던 대공의 맹수와도 같은 무시무시한 눈빛이 잊히지가 않아 부르르 하고 몸을 떨었다.
‘저렇게 무서운 남자랑 살게 되다니, 라리아는 정말 괜찮은 걸까?’
백작 부인은 어깨너머로 고개를 돌려 그녀의 의붓딸과 약혼남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았다.
거리가 멀긴 했지만, 라리아는 그 무서운 맹수 같은 남자에게 조금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두 사람의 관계는 놀라울 정도로 살가워 보였다.
‘저 아이도 참, 예전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갑자기 담력이 좋아졌다니까. 대체 어떻게 된 걸까?’
혼자서 궁금해 해봤자 알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셔우드 백작 부인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의붓딸이 무시무시한 예비 사위에게서 안전하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 * *
셔우드 백작 부부와 헤어진 후에도 녹턴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녀와 무도회를 즐기며 잠시 잊고 있었던 불안감이 다시 깨어났기 때문이었다.
8개월 뒤 그녀가 자신을 떠나는 것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여태껏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않던 그가 이제 와서 이런 사소한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기 전, 최대한 빨리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군.’
지금도 노력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녹턴은 라리아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멈추어 섰다. 그에게 붙잡힌 라리아가 따라서 멈추어 서며 무구한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그는 허리에 두른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 올렸다.
“한 번 더 춤을 추도록 하지.”
그가 턱짓으로 가리킨 무도회장에서는 차례차례 나와 춤을 추는 순서는 이미 끝났는지 모두가 함께 춤을 즐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라리아는 생각했다.
‘녹턴이 춤추는 것을 그렇게 좋아했던가? 의외네.’
명확히 그가 춤을 추는 것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여부는 작중에서 등장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원작자로서 추측하기에,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별다른 취미가 없었을뿐더러 사교 활동을 즐기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춤을 좋아하는 모습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뭐, 그래도 엄청 잘 추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그의 일면이 있을 수도 있는 거겠지.’
그가 춤을 추는 것을 즐긴다고 생각하니 괜히 귀엽게 느껴졌다. 창조주로서 대견(?)하기도 하고.
‘아니면…….’
라리아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나와 춤을 추는 것이, 그도 꽤 즐거웠던 걸지도.’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아까 그와 춤을 출 때 그녀는 정말 즐거웠으니까.
그만큼이나…… 아니, 그것의 반 만큼이라도 그가 즐거웠다면 그녀는 무척 기쁠 것 같았다.
자신이 느꼈던 즐거움을 그 역시 느꼈다고 생각하니 괜히 가슴이 기분 좋게 맥동했다.
라리아가 엷게 상기된 얼굴로, 그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려던 그 순간이었다.
“……라리아 셔우드 영애?”
갑자기 불리는 자신의 이름에 라리아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자신을 부른 사람은 궁정의 시종이었다.
그는 대공과 그의 약혼녀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하곤, 공손한 자세로 라리아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그것은 작은 편지봉투였다.
“라리아 셔우드 영애께 보내는 서신입니다.”
녹턴의 눈초리를 받은 시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라리아는 편지봉투를 살펴보았다. 급하게 보낸 것인지 밀랍으로 봉해져 있지는 않았다. 심지어 겉봉에 이름조차 쓰여 있지 않았다.
“고마워요. 그런데 제게 누가……?”
그녀의 말에 시종이 대답했다.
“미하일 블랙웰 영식과 자네트 블랙웰 영애입니다.”
“네에? 공녀님과 공자님이?”
그제야 라리아는 다급하게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편지지가 두 장 들어 있었으며, 파스텔로 그린 듯한 삐뚤빼뚤한 글자와 그림이 가득했다.
행복하게 웃고 있는 베이지색 머리의 여자와 검은 머리의 남자, 은발의 소녀와 흑발의 소년 그림과 꽃이나 나무, 기사, 저택, 마차.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자와 드래곤 그림까지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들의 한가운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라리아 빨리와」
「라리아 보고싷어」
「언재와?」
「아버지랑 라리아. 일직 오새요.」
「느즈면 않대」
아이들의 편지를 받아 본 라리아는……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무도회 준비까지 하느라 아이들을 너무 오래 혼자 둔 것 같았다.
물론 메리와 믿을 만한 하녀들에게 맡겨 두긴 했지만, 이제껏 아이들과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역시 아이들에겐 자신이 필요했다. 물론 자신에게도 아이들이 필요했다.
그 사실을 자각하니, 갑자기 맹렬하게 아이들이 보고 싶어졌다.
“전하, 공녀님과 공자님이 전하와 저를 찾고 있어요.”
라리아가 녹턴에게 편지를 보여 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시간도 너무 늦었는데, 이제 슬슬 돌아가면 안 될까요? 네?”
그렇게 말하는 라리아의 얼굴에는 의지가 가득했고, 그녀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딱 봐도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죽을 지경인 것처럼 보였다.
녹턴은 기가 찼다.
‘내가 춤을 제안했을 때보다 훨씬 흥분했군…….’
그라고 아이들이 안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며칠을 못 본 것도 아니고, 이제 고작 한나절 정도가 지났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맡겨 두었으니 걱정이 될 만한 것도 없었다.
그에 반해, 그녀와의 무도회는 처음이었다. 아니, 그녀와 단둘이 외출한 것이 처음이었다.
솔직히 그는 그녀와 좀 더 있고 싶었다. 아직 그녀와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단둘의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하지만…….
그는 라리아를 빤히 보았다.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그녀의 청록빛 눈. 눈이 시릴 정도로 아롱대는 그녀 특유의 색채…….
녹턴은 자신에 대해 잘 알았다. 그는 권위적이고 고집이 강했다. 한 번 마음을 먹으면 의견을 꺾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도…….
녹턴은 한숨을 뱉으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어찌하여 이 작은 여인 앞에서는 ‘안 된다’라는 말 한마디 하기가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그에게는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사랑스럽게 빛나는 청록색 눈동자에 실망의 그늘이 내리는 것을 지켜볼 자신이.
그녀의 들뜬 듯이 아롱거리던 색채가 풀이 죽어 잦아드는 것을 볼 자신이.
결국 녹턴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럼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오늘은 일찍 쉬도록.”
“와! 전하! 정말 최고예요!”
어처구니없게도 라리아는 오늘 무도회장에 온 뒤로 제일 기뻐했다.
그녀에게 춤을 제안했을 때보다, 그녀에게 준 보석이 얼마나 값어치 있는 것인지 알려 줬을 때보다도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무도회장을 떠나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휘감으며, 녹턴은 생각했다.
‘조만간 단둘이 외출할 기회를 다시 만들어야지, 안 되겠군.’
* * *
무도회의 다음 날 아침. 언제나처럼 아침 식사를 하며 신문을 꺼내 든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으음, 약간은 예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신문의 헤드라인에는 온통 어제의 무도회에 대한 이야기로 뒤덮여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녹턴과 나에 대한 이야기로!
「사교 활동을 싫어한다던 블랙웰 대공이 황실 무도회에 모습을 드러낸 까닭은?」
「라리아 셔우드, 괴물의 신데렐라가 되다」
「행방이 묘연했던 ‘대양의 눈물’, 괴물 대공의 약혼녀의 손안에?」
「대공의 약혼녀의 드레스에 쓰인 다이아몬드, 무려 1,690개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져!」
신문의 1면 헤드라인마다 온통 그와 나의 이름이 가득했다. 그 주제도 다양했다.
우리의 관계에 대한 추측성 기사, 내 드레스와 보석에 집중한 기사, 우리에 대한 다른 무도회 참가자들의 익명 인터뷰 등등…….
‘오죽하겠어. 녹턴 같은 유명세도, 악명도 높은 사람이 처음으로 무도회에 참가했으니까. 게다가 지난번의 약혼 발표도 엄청난 화제가 되었으니…….’
심지어는 무도회에서의 우리의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한 삽화까지 있었다.
녹턴과 나의 복장을 상세하게 분석한 그림, 우리가 춤을 추는 모습, 사이 좋게 거니는 모습 등등…….
‘대체 이런 건 언제 그린 거야?!’
이번 무도회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얼마나 엄청났던지, 신문은 1면은 물론이고 몇 페이지씩이나 무도회에 대한 특집 기사에 할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다른 참석자에 대한 기사, 특히 황제 부부에 대한 기사는 확연히 양이 적어 몹시 민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황제 부부라면 이렇게 관심을 빼앗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황후 레베카 쪽은 그렇다 쳐도, 황제 귄터는 녹턴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인물이니 더더욱 신경이 쓰였다.
‘황제가 분노해서 이상한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앞으로는 최대한 눈에 띄지 말아야겠어.’
나는 그렇게 마음을 먹었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게다가 이번의 언론의 열렬한 관심이, 다름 아닌 녹턴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이었다는 사실을!
그렇다. 지난번 약혼 발표 때에 언론의 관심이 빠르게 잦아든 것 역시 그가 개입한 결과였지만, 이번 무도회에서의 일이 언론에 유난히 주목받은 것 역시 그의 의도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난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난 완전히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고 만 것이다!
하여간에, 신문을 뒤적거리며 읽던 나는 그만 풉 웃고 말았다.
‘신문의 기사만 보면, 정말 나와 녹턴이 뜨거운 사랑을 하는 연인 같잖아.’
왜 아니겠는가? 그 냉혹한 괴물 녹턴 블랙웰 대공이 약혼녀의 곁에 찰싹 붙어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며 그녀를 꿀이 떨어지는 시선으로 지켜보고 신경을 썼다는데.
더군다나 그가 약혼녀에게 어마어마하게 값진 드레스는 물론 대양의 눈물까지 선물했다는데!
만일 내가 뒷사정을 몰랐더라면, 그리고 이 기사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었더라면, 나 역시 이 신문을 읽고 나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여간에 신문의 허풍이란. 과장이 너무 심하다니까.’
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신문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오늘의 일과를 시작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신문의 기사는 내 생활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이변은 당장 그날 점심부터 시작됐다.
“셔우드 영애,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편지를 받아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게 편지를 보낼 사람이라곤 셔우드가의 사람들 정도뿐이었으니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해리스 후작 영애?”
곰곰이 기억을 되새겨 보았으나 모르는 이름이었다. 원작에 등장하는 인물도 아닌 것 같았다.
어째서 모르는 사람이 편지를 보낸 건지 궁금해하던 나는 페이퍼 나이프로 봉투를 뜯었다. 안에서 나온 편지의 내용은 귀족다운 장문의 안부 인사와 미사여구로 가득했으나 요점만 간추리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신문에서 나에 대한 내용을 읽고 내게 관심이 생겼으니, 티파티에 초청한다는 내용이네.’
이 세계에 온 뒤로 처음 받아 본 초대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귀족들은 초대장을 서로 안부 인사처럼 주고받는다더니.
그제야 내가 귀족의 세계에 떨어진 것이 조금 실감이 났다.
초대장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나는 픽 웃었다.
‘관심은 고맙지만 거절해야겠어.’
티파티까지 참석하기에 나는 너무 바빴다. 이 티파티에 가려면 또 휴가를 내야 할 테고, 그럼 그 날은 아이들을 보지 못할 테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아이들의 시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귀족 놀이를 하느라고 본분을 소홀히 할 순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첫 초대장에 대해 정중하게 거절하는 답장을 써서 보냈다.
한데,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 식사 시간에는 편지가 두 통 왔다. 역시 티파티나 가든파티 등의 초대장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편지가 네 통 왔다. 이 중에는 파티에서 만났던 호프 백작 부인의 초대장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날 점심에도, 저녁에도…… 그다음 날에도……. 어마어마한 양의 초대장들이 쏟아졌다.
이 모든 것이 황실 무도회와 신문 기사의 영향이었다.
무도회에서도 주목을 받았을뿐더러 신문 기사가 그것을 엄청나게 띄워 주기까지 했으니, 사교계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게 된 것이다.
지난 19년 동안 사교계에서 거의 존재감이 없었던 라리아에게는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초대장이 수십 장씩 쏟아지니 거절 답장을 쓰는 것도 일이었다.
심지어 개중에는 나의 환심과 허락을 구하기 위해 선물을 동봉한 것도 있어서, 그런 것은 거절 답장을 보내면서 선물까지 일일이 되돌려 보내야만 했다.
“어휴! 계속 글을 썼더니 팔이 다 아프네.”
나는 깃펜을 내려놓고 오른팔을 주물렀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메리가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글을 알았더라면 도와드렸을 텐데…….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해서.”
“아니야, 메리가 미안할 게 어디 있어. 메리는 늘 내게 큰 도움이 되어주고 있잖아.”
내가 진심을 담아 웃어 보였다. 하지만 메리는 내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여전히 아쉬운 듯했다.
어느덧 초대장의 답장을 거의 다 쓴 나는 계속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황자가 많이 외로움을 타는 것 같던데, 혹시 그쪽의 아이들은 안 그런가요?’
‘저희 아이들을 위해 주최할 파티에 황자 전하를 초대하고 싶어요.’
‘모든 아이들에게는 또래의 친구가 필요해.’
나를 위한 파티에는 관심 없었지만, 아이들을 위한 파티의 필요성은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어른들처럼 아이들에게도 사회 활동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마침 자네트와 미하일이 무도회에도 엄청 가고 싶어 했으니…… 무도회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것을 열어 주면 좋아하려나?’
나는 혹시나 해서 아이들의 의사를 물어보았다.
“공녀님, 공자님. 무도회에 가고 싶어 하셨죠? 제가 그런 비슷한 파티를 열어 드리면 어떨 것 같으세요?”
내 질문에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놀랍게도, 목욕 전에 쿠키를 줄 때랑 비슷한 것 같았다.
“구럼……! 이쁜 옷 입구, 라리아랑 춤출 수 이써?”
미하일이 앙증맞은 두 손을 꼬옥 쥐고 물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저랑도 좋지만, 다른 또래 친구분들이랑도 춤추셔야죠.”
“칭…… 구?”
“네, 친구.”
나는 바닥에 앉아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곤 설명했다.
“파티를 하면, 공녀님과 공자님께도 비슷한 또래의 친구가 생기는 거예요. 친구, 좋지 않으세요?”
내 말에 미하일이 큰 눈을 더더욱 동그랗게 떴다. 자네트도 마찬가지였다.
녹턴은 아이들을 아끼는 아버지이긴 해도 세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아이들이 또래 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듣기로는 여태까지 아이들의 생일파티도 또래 친구 없이 대공가 사람들하고만 했다니 말 다 했다.
‘뭐, 녹턴 자신도 어릴 적에 또래 친구를 가져 보지 못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못 미쳤던 것도 당연하지.’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더니 다시 날 보았다. 아무래도 여태까지 친구를 가져 본 적이 없었던 나머지, 상상이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칭구가 이쓰면…… 가치 멀 해?”
고민하던 자네트가 물었다. 나는 그런 자네트의 뺨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대답했다.
“음, 같이 맛있는 것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고, 춤도 추고, 장난감도 가지고 놀지요!”
아이들은 다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마 또래 친구와 함께 맛있는 걸 먹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 어떨지 상상하는 것이리라.
먼저 대답한 쪽은 의외로 미하일이었다.
“나느은…… 라리아랑 장난감 가꾸 놀고, 춤추는 게 더 조치만…… 칭구도 조아.”
자네트는 동그란 이마를 찌푸리며 손으로 머리카락을 꼬았다.
“칭구는 기찬을 것 가튼데……. 그래두 파티는 조아.”
내 얼굴에 반가운 빛이 어렸다. 나는 두 아이를 모두 끌어안아 주곤 이렇게 말했다.
“우리 공녀님, 공자님. 제가 또래 친구가 얼마나 재밌는 건지 보여드릴게요!”
나의 ‘아이들 친구 만들어 주기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 *
일반적으로 집안의 행사를 주최하는 사람은 집안의 안주인이지만, 안주인이 없을 경우 집사가 담당하는 것이 보통이다.
블랙웰의 경우 안주인이 아직 없기에 이 모든 일을 집사 시몬이 해 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파티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니 시몬에게 부탁할 수는 없겠지.’
나는 생각했다.
‘안 그래도 워낙 바쁜 사람이니까 말이야. 이런 걸로 방해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
그렇게 결정 내린 나는, 시몬에게 업무를 더 얹어주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혼자서 일을 해 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내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파티의 기획서를 준비했다.
생각 외로 어렵지는 않았다. 아직까지 대부분의 유치원에서 교사들이 행정 업무까지 담당하고 있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치원의 수많은 행사와 일정을 기획해 본 경험이 이번에도 도움이 되었다.
더군다나 나는 미래의 대공비로 대우받고 있는 덕에 과거에 블랙웰에서 진행했던 행사의 기획서나 장부, 서재의 관련된 책들도 마음껏 열람해 볼 수 있었기에 좋은 참고가 됐다.
나는 최대한 정성 들여 쓴 기획서를 집사 시몬에게 가져갔다.
“시몬, 다름이 아니라, 제가 공녀님과 공자님을 위한 작은 파티를 기획해 보았는데요. 혹시 바쁘지 않으시다면 기획서를 한번 봐 주시겠어요?”
내가 미래의 대공비로 대접받고 있다지만 진짜 대공비인 것도 아니고, 아직까지 집안의 안살림은 전부 시몬이 담당하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그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몬은 내 말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예? 파티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런 건 제게 부탁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에이, 안 그래도 바쁘신데 어떻게 이런 일까지 부탁드리겠어요. 이건 제 개인적인 욕심인걸요.”
순간 시몬의 눈에 감동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왠지 익숙한 광경이었다.
“이거 참, 한낱 집사까지 배려해 주시는 대공비라니…… 허허. 어쨌든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그 기획서는 어디 있습니까?”
“여기요.”
내가 기획서를 내밀자 시몬의 눈이 다시 휘둥그레졌다.
“아니, 이게 다 뭡니까? 이게…… 설마 다 기획서란 말입니까?”
시몬이 기획서를 팔락팔락 넘겼다. 끝도 없이 나오는 서류들.
테이블 위에 올려놓거나 천장에 매달 인테리어 소품까지 세세하게 써 놓은 계획서와 예상 장부…….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시몬의 눈은 점점 커져 종국에는 왕사탕만 해졌다.
‘분량이 좀 많았나?’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블랙웰에서 치러진 지난 몇 년간의 행사 기획서들을 살펴보고 동일한 양식으로 쓴 건데요. 혹시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요! 문제라니요, 아닙니다! 전 그냥, 워낙 잘 쓰셨기에 놀라서 그만…….”
시몬의 반응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블랙웰에서 지난 몇 년 동안 치렀던 행사들은 누군가의 생일축하연이나 즉위식 같은 굉장히 큰 행사뿐이었다.
사교 활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녹턴의 취향이 반영되어 가든파티나 티파티 같은 사소한 행사는 거의 치르지 않았던 것이다.
생일축하연이나 즉위식 수준의 큰 행사일수록 기획서가 자세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작은 파티일수록 덜 신경 쓰기 마련이고.
그런데 나는 참고할 만한 자료가 큰 행사밖에 없었기에 그 정도 수준에 맞추어서 쓴 것이다.
시몬은 입을 반쯤 벌리고 계속해서 기획서를 넘겨 보면서 물었다.
“아니, 대체 어떻게 하면 미혼의, 행사 준비 경력도 없는 영애가 이 정도 수준의 기획서를 쓸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아이를 돌보는 일까지 하면서! 영애, 실례지만 혹시 이 기획서를 쓰시면서 도움을 주신 분이 계십니까? 가족분들이라거나, 셔우드에 계실 적에 회계를 배웠던 선생님이라거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 기획서는 저 혼자서 쓴 거예요.”
“영애 혼자서요! 허허허. 이거 참.”
시몬은 반쯤은 기가 막힌 듯, 반쯤은 기쁜 듯이 웃었다.
“장래의 대공비께서 인품도 훌륭하실뿐더러, 이리도 업무수행능력도 탁월하시니 저는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인님께서 과연 혼인은 할 수 있으실지, 배필을 구해 오시기는 할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이리도 완벽한 분을 구해 오시다니. 저는 이제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습니다!”
“시몬,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정말입니다, 영애. 저는 이제야 블랙웰의 선대님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인님이 아장아장 걸어 다니실 때부터 그분을 모셨는데…… 그분이 이리도 어엿한 혼처를 찾으시다니.”
민망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난 행사 준비가 처음도 아니었고, 심지어 녹턴의 진짜 배필조차 아니었으니까!
‘나중에 시몬이 실망하는 모습을 어떻게 본담?’
녹턴과 파혼을 하면 제일 크게 실망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시몬일 것 같아서 나는 가슴속에 돌덩이가 하나 얹어지는 기분이었다.
유교 국가에서 살아온 기간이 너무 길었던 내게 노인 공경의 마음은 피할 수 없는 굴레와 같은 것이었다.
“아하하…… 조, 좋게 봐 주어서 고마워요. 아무튼, 이대로 진행해도 괜찮을까요?”
어색해진 내가 화제를 돌렸다. 감동의 바다에 빠져 있던 시몬이 정신이 든 듯 퍼뜩 고개를 끄덕였다.
“암요, 물론입니다. 장래의 대공비께서 하시겠다는데 제가 어찌 토를 달겠습니까? 아, 그런데 주인님께서는 허락하셨습니까?”
“물론이죠.”
녹턴에게는 진작 말했고 허락도 받았다.
그는 파티의 필요성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기본적으로 육아 방식에 대해서는 내 전문성을 존중해 주고 있는지라 내 제안에 반대하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야 아무런 문제가 없지요. 참, 그럼 이번 파티 준비와 관련된 권한은 전적으로 영애께 위임해 드리겠습니다. 원하시는 것은 뭐든지 하십시오. 아랫것들에게도 잘 말해 두겠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이렇게나 후할 줄이야! 나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었다.
몇 시간 뒤 시몬은 내게 예산 장부를 보내 주었는데, 예산 역시 굉장히 후하게 책정해 주었다는 사실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예상 장부에서 제안했던 예산의 거의 3배잖아?”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어마어마한 거액이었다.
하긴, 내가 계획했던 것은 좀 빠듯한 예산으로 잡아 두었던 것인지라 예산이 넉넉하면 좋았다.
더군다나 블랙웰 대공가이니만큼 어린이 파티라도 좀 호화롭게 해 주어야 블랙웰의 면이 살 것이고.
“아낄 수 있는 부분에서는 아끼면서, 블랙웰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멋진 파티를 열어야겠어.”
그렇게 결심한 나는 본격적으로 파티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장식품의 경우, 일반적으로 귀족의 파티에서 쓰이는 것은 생화나 조각상과 예술품 등, 값비싼 물건들이었다.
‘생화도 물론 호화롭고 멋지겠지만, 이번에는 예산도 아낄 겸 색다르게 해 봐야겠어.’
나는 벨벳 천과 각종 헝겊, 크고 작은 구슬, 방울, 색종이, 색실, 찰흙 등을 잔뜩 구해 왔다.
나는 직접 만든 수공예품으로 파티장을 꾸며 볼 생각이었다. 나는 유치원 선생님이었고, 어린이를 위한 간단한 공예에는 잔뼈가 굵었다.
“라리아, 모해?”
내가 바닥에 재료를 깔아 놓고 이것저것 만들고 있자 아이들이 관심을 가졌다.
미하일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내가 만들고 있는 것을 들여다보았고, 자네트는 털실과 방울 등을 집어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나는 빙긋 웃으면서 미하일에게 만들고 있던 것을 보여 주었다.
“장식품을 만드는 거예요.”
“잔시푸?”
“네. 자, 공자님, 잘 보세요.”
나는 미하일의 눈앞에서 벨벳 리본을 이리저리 접었다. 약간의 바느질로 주름을 넣고 돌돌 말아 주니, 짠! 어느샌가 붉은 벨벳 리본은 싱그러운 장미꽃이 되어 있었다.
미하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너무 이뻐!”
“고마워요.”
나는 뿌듯하게 웃으며 장미 몇 송이를 더 만들었다. 이 모습을 관심 있게 지켜보던 자네트가 외쳤다.
“나두 해 볼래!”
“어머, 공녀님도요?”
아무리 블랙웰이라지만, 5살짜리가 리본 장미를 만들기는 좀 어려울 텐데. 바느질도 해야 하고.
고민하던 난 아이들에게 미술수업에서 흔히 만들던 장난감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기로 했다.
“자, 공녀님, 공자님. 보세요. 이 찰흙과 색종이로 뭐든지 만들 수 있어요. 종이를 이렇게 접으면, 짜잔! 강아지도 되고요. 이렇게 접으면, 짜잔! 마차도 되지요.”
“우와아!”
“게다가 이렇게 털실을 붙이거나 구슬이나 방울을 달아서 꾸며 볼 수도 있지요.”
내가 시범 삼아 몇 가지를 만들어 보이자 아이들의 눈은 별이라도 쏟아질 듯 빛나기 시작했다.
자네트는 입까지 크게 벌리고 내가 접은 종이 강아지를 이리저리 만지작댔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향해 빙긋 웃었다.
“어때요? 같이 하시겠어요?”
“할래!”
“나두, 나두 할래!”
아이들은 신이 나서 덤벼들었다.
일단 내가 몇 가지 기초적인 종이접기를 가르쳐 주자, 그것만으로도 상상력이 자극된 것인지 아이들은 내가 가르쳐 주지 않은 것들도 척척 만들어 냈다.
“이거 봐! 별이야!”
삐뚤빼뚤 오린 종이에 구슬을 잔뜩 붙여 반짝거리는 별을 만든 자네트가 외쳤다.
“이거 봐! 고양이!”
종이와 찰흙으로 고양이를 만들고, 털실로 다리를 달아 준 뒤 목에는 방울까지 달아 준 미하일이 말했다.
처음으로 해 본 만들기가 즐거웠던 것인지, 아이들은 몇 시간이나 계속해서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만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수공예는 소근육과 창의력, 감성 발달에 도움이 되지.’
자네트와 미하일은 만들기에 어찌나 푹 빠졌는지 내가 가져오지 않은 재료까지 가져오고, 파스텔과 물감을 이용해 직접 만든 장난감에 색칠까지 했다.
우리 셋이 그렇게 한참이나 만들기에 열중하고 나니, 어느샌가 바닥 한가득 깔릴 정도의 수공예품들이 모였다.
나는 그중 자네트가 만든 드래곤을 집어 들었다. 찰흙과 상자로 몸통을 만들고 색종이로 비늘과 날개를 표현한 자네트의 역작이었다.
나는 자네트의 드래곤을 창문에 건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창문에서 바람이 솔솔 불어 들어올 때마다 드래곤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일 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입가에 웃음이 그려졌다.
‘아이들이 만든 장난감을 가구에 올려놓거나, 작은 거 여러 개를 엮어서 모빌을 만들어 천장에 달면 예쁘겠는걸.’
나는 나와 아이들이 만든 수공예품으로 파티장을 꾸밀 생각이었다. 아이들이 만든 작품들은 내가 만든 것에 비해 삐뚤빼뚤하고 엉성했지만 정성이 들어가 있고 사랑스러웠다.
‘파티의 참가자들 역시 어린아이니까, 친근감을 느껴서 오히려 좋아할 거야.’
파티 준비를 위해 필요한 장식 중 대부분은 직접 만들었으니, 장식에는 큰돈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파티의 모든 부분에서 돈을 아낄 생각은 아니었다.
블랙웰의 위신이라는 것이 있으니 말이다.
장식 대신, 내가 돈을 아끼지 않은 곳은…….
“아가씨, 지시하신 머드케이크를 완성했습니다.”
블랙웰의 주인은 미식에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에 부엌도 그 규모에 비해 한산한 것이 보통이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무려 다섯 명의 셰프와 마흔 명의 부엌 하녀들, 서른 명의 하인들이 부엌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셰프 중 한 사람이 내게 쟁반을 내밀었다.
파티 요리 목록을 보면서 정신없이 체크하고 있던 나는 케이크를 보고 탄성을 질렀다.
정말 달콤해 보이는 머드케이크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초콜릿의 풍미가 느껴지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짙은 갈색의 표면.
그 위에는 버터크림으로 곰돌이 얼굴 모양이 장식되어 있었다.
“와, 정말 귀엽네요!”
내가 말했다. 셰프의 얼굴에 뿌듯함이 떠올랐다.
“이것도 시식해 보시겠습니까?”
“물론이죠.”
나는 포크로 케이크를 조금 떠서 입에 넣었다.
꾸덕한 케이크가 잇새에서 잘게 부서져 내리는 느낌이 좋았다. 게다가, 입에 넣자마자 퍼져 나가는 초콜릿과 버터의 풍미.
비강을 가득 채우는 향긋한 바닐라의 향!
잘라낸 케이크의 단면에서는 찐득한 가나슈가 줄줄 흘러내렸다. 미각도, 시각도 녹여 버릴 정도의 달콤함이었다.
“너무 맛있어요.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겠는데요!”
그렇다. 나는 그 나이대 아이들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안다. 바로 맛있는 간식이었다.
초콜릿 머드케이크, 산딸기 밀푀유, 에클레어, 버터스카치 파이, 밤 몽블랑, 말린 과일이 듬뿍 들어간 파운드 케이크, 절인 무화과, 각종 쿠키와 감초 사탕!
이 달콤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아이가 과연 있을까?
게다가 이 간식들은 그저 맛있게만 만든 것이 아니었다. 특별히 신경 써서 설탕은 최대한 줄이고, 과일로 건강한 단맛을 내게끔 만든 과자들이었다.
장식에서 돈을 아낀 만큼, 나는 아이들이 먹을 것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아이들이 최대한 맛있고 건강한 요리를 먹을 수 있도록!
‘그리고, 아이들이 즐길 만한 것들도 중요하지.’
이곳 제국에서, 어른들을 위한 파티에는 즐길 거리가 매우 많았다. 연주회나 연극, 전시 등을 감상하는 파티는 아주 흔했다.
사냥이나 뱃놀이, 폴로가 메인인 파티도 있었고, 꼭 그런 활동이 주가 아니더라도 어떤 파티나 초청 연주가, 가수, 코미디언, 성대모사 기술자, 피에로, 곡예사, 점술사, 심지어 마임 연기자까지 불러 즐기곤 했다.
하지만 그에 반해 아이들만을 위한 즐길 거리는 매우 적었다.
기껏해야 어른들을 위한 연극 중 그나마 덜 폭력적인 것을 상영하는 정도가 선택지의 전부였던 것이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의 마음에 쏙 들 만한, 그런 즐길 거리를 제공하고 싶었다. 파티에 참가한 모든 아이들이 신나게 웃다가 돌아갔으면 했다.
자네트와 미하일을 돌보면서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파티 준비를 하는 것은 물론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 파티에서 즐거워할 아이들을 생각하면 힘이 나고 피로가 풀렸다.
‘이 파티에 온 아이들이 모두 최고의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어.’
파티의 초대장마다 귀여운 리본을 그려 넣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 * *
한편, 라리아가 이렇게 열심히 파티를 준비하는 동안. 블랙웰에서는 그녀가 모르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바로 블랙웰의 사용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변화였다.
원래도 라리아의 이미지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라리아는 성격이 활기차고 살가웠으며, 언제나 자신의 업무를 열심히 했으니까.
그녀가 소공녀, 소공자를 지극정성으로 돌본다는 것은 이미 온 저택에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비록 그녀가 미래의 대공비로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공녀와 소공자의 시녀인 그녀와 블랙웰 구석구석의 사용인들의 접점은 거의 없다시피 해서, 그들에게 라리아는 먼 세상 존재에 불과했다.
집안일을 총괄하는 시몬보다도 거리감이 있는 존재였다.
즉, 그때까지 블랙웰의 사용인들에게 라리아는 언젠가는 우리의 윗사람이 되시겠지만 지금은 아닌, 들리는 소문 좋은 귀족 아가씨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라리아가 처음으로 집안일, 즉 집안 행사 주최의 업무를 맡으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파티를 준비하면서 라리아는 그동안은 거의 접점이 없었던 사용인들과 교류하고 그들에게 직접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시장에서 이 목록에 있는 것들을 직접 사다 줄래? 판매하는 가게도 정리해 뒀으니 어렵지 않을 거야.”
“이 그림대로 가구를 옮기고, 이 장식을 천장에 달아 줬으면 해.”
“이 연락처로 연락 부탁해. 아, 그리고 이 편지도 부쳐 주고.”
그녀의 지시는 언제나 정확하고 막힘이 없었다.
그녀는 늘 원하는 것이 명확했으며, 지시를 이해하지 못하면 더 자세히 설명해 주고, 지시대로 잘 이행할 경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녀들도, 하인들도, 외부 일꾼들도, 그녀를 대하고 그녀의 밑에서 일하고 나면 오래지 않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라리아 아가씨는 정말 일을 잘하시는 것 같아. 그 나이대의 어린 귀족 영애답지 않게 말이야.”
누군가가 말했다.
“꼭, 오래 집안일을 한 귀부인 같으시다니까.”
“게다가 늘 솔선수범하고 부지런하시지.”
“사실 우리들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시잖아? 그러니 도저히 게으름을 못 피우겠어.”
그것은 정말로 사실이었다. 라리아는 언제나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빠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바쁜데도 불구하고, 신경질적이기는커녕 그녀는 늘 활기차고 아랫사람에게 다정했다.
그것이 블랙웰의 사용인들에게는 굉장히 인상이 깊게 남았다.
이제껏 그들이 겪어 본 윗사람들이라곤 엄격한 녹턴, 시몬, 혹은 평민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타 가문의 귀족들뿐이었으니까.
“아가씨는 우리 같은 아랫것들에게도 다정하셔.”
“절대 화풀이를 하거나 괴롭히지 않으셔.”
“곧 대공비가 되실 분인데도, 전혀 자만하지 않고 우리를 인간적으로 대우하셔.”
일을 잘하고 부지런하면서도 아랫사람을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라리아 덕에 사용인들 역시 의욕 넘치게 일을 했다.
이내, 블랙웰 저택 전체에 그녀를 닮은 활기가 차올랐다.
수도에 블랙웰 대공저가 세워진 이래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사용인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을 제일 처음 알아차린 사람은 바로 집사 시몬이었다.
모든 사용인들을 총괄하는 그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 짧은 시간 안에 아랫것들에게 이리도 좋은 영향을 끼치시다니! 예상하긴 했지만, 내 예상보다도 더하군. 역시 훌륭한 대공비감이야. 암!’
시몬은 자신의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그 자부심을 사용인들에게 드러내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내 일찍이 그분께서 행사 준비를 하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처음으로 하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탁월하시더군.”
“그때부터 이미 알아챘지. 품위와 겸손함뿐만 아니라 재주까지 뛰어난 분이 집안의 안주인으로 오셨구나, 하고 말이다.”
“흠흠, 어쨌든, 장차 대공비가 되시면 우리 블랙웰을 더더욱 융성하게 하실 분이니 정성을 다해 그분을 모시도록!”
사실 시몬은 그렇게 주책바가지 같은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칭찬에 인색하고 아랫사람에게 엄격한 편이라, 아직 라리아를 만나 보지 못한 사용인들조차 그의 반응을 보고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대체 예비 대공비님께서 어떤 분이시길래 집사님이 저렇게까지 극찬을 하시는 걸까?’
동네방네 칭찬을 늘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시몬은 결혼 당사자에게도 말을 꺼냈다. 바로 녹턴 말이다.
“셔우드 영애께서 맡은 업무를 대단히 탁월하게 수행하고 계신 걸로 사료됩니다. 개인적으로, 이번에 준비하고 계신 파티가 어떻게 될지 무척 기대가 됩니다.”
라리아가 처음으로 집안일을 맡았다는 사실에 걱정한 녹턴은 시몬에게 그녀의 동향에 대해 조사해 오라고 지시했다.
그녀가 뛰어난 양육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양육과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일은 전혀 다른 성질의 일이었으니까.
라리아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아무런 경력도 없는 19살 소녀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몬의 보고에 그는 걱정이 조금 덜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군.”
안도감과 기쁨을 숨기며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시몬은 그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마음에 드신 건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건지…….’
시몬은 녹턴이 아장거리던 시절부터 그를 윗사람으로 모셨지만, 여전히 그의 내밀한 감정을 읽는 것은 어려워했다.
특히나 6년 전 그 사건 후부터는 더욱 그랬다. 6년 전의 녹턴과 후의 녹턴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까.
시몬은 조바심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괜한 말을 입에 담았다.
“주인님, 그러고 보니, 정식 혼인식은 언제쯤 거행하실 예정이십니까? 혼약을 이루시는 날짜가 언제일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올해 안이었으면 더할 나위가 없겠습니다만…….”
그렇게 경솔한 말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약혼을 할 때에는 동시에 결혼 날짜를 잡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녹턴과 라리아는 거의 3달째 결혼 날짜는 잡지 않고 약혼 관계만 유지해오고 있었다.
그렇기에 블랙웰 안팎으로 그들의 결혼이 대체 언제가 될 것인지, 결혼 날짜를 잡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지에 대한 추측이 많았다.
시몬은 그것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귀족이라면 분명 보좌로서 할 수 있을 법한 타당한 질문이었을 것이나…….
문제는 그가 ‘다른 귀족’이 아닌 ‘녹턴 블랙웰’이라는 데에 있었다. 극도로 권위주의적이고 극도로 외곬이며 다른 의견을 허락하지 않는 남자.
“내가…….”
서류에 시선을 박고 있던 녹턴은 두 눈동자를 끌어 올렸다. 그의 미간에는 불쾌감을 나타내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한 번이라도, 네게 간섭을 허락한 적이 있던가?”
맹수를 닮은 보랏빛의 눈빛. 마치 허공에 두 개의 광휘만이 떠 있는 것만 같은 그 위압감.
그의 눈은 녹턴이 어릴 때부터 거의 업어 키우다시피 했던 시몬조차 적응이 되지 않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 눈을 보는 순간 시몬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다급하게 허리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주인님. 제가 경솔한 발언을 했습니다.”
녹턴은 그런 시몬의 정수리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시몬의 셔츠 안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몇 초 후에야 녹턴은 서류로 눈을 돌렸다.
“나가 봐라.”
“예.”
그의 시선이 거둬지자, 숨 막히는 위압감도 사라졌다.
시몬은 뒷걸음질로 녹턴의 집무실에서 나간 뒤, 문을 닫고 나서야 막히던 숨을 몰아쉬었다.
집무실에 혼자 남은 녹턴은 다소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팔락였다.
‘결혼이라.’
그것을…… 왜 그라고 바라지 않겠는가.
평생 생각지도 않았던 자신의 곁, 대공비의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라리아 셔우드밖에 없을 거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혼인 따윈 생각도 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지금은 너무나 명백하게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혼인은커녕 약혼조차 허울뿐인 상황에서 혼인은 무슨.’
그는 냉소적으로 코웃음 쳤다.
그렇다. 계약서와 돈 몇 푼으로 이루어진 이 관계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이 거짓 약혼에, 허울뿐인 관계에 매달리고 애태우고 조바심내는 사람은 그뿐이었으니까.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뿐이었으니까.
물론 그라면 충분히 그녀를 강제로 곁에 붙잡아놓을 힘이 있었다.
셔우드 백작가에 압력을 넣어 그녀를 팔아넘기듯 자신에게 넘기게 하여, 결국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녀를 대공비의 자리에 앉혀 둘 힘이.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해서, 그녀의 몸만을 자신의 곁에 붙잡아 둔다면 그것으로 충분할까?
도저히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몸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원했다. 그녀의 영혼도. 마음도.
이 모든 것이, 그녀가 진심으로 그를 바라게 만들지 않으면, 진심으로 자신과 결혼할 마음이 들게 하지 않으면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이 망할 놈의 광증.’
녹턴은 이를 악물었다.
아직도, 그녀를 위험에 빠뜨릴 뻔했던 그날 밤의 일이 눈앞에 생생했다.
그 가녀린 팔다리를 침대에 널브러뜨리고,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도.
악몽 같은 기억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죽일 뻔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눈앞이 아득해졌다.
만일 그때 자신이 정말로 그녀의 목숨을 해쳤다면…… 그는 결코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하리라.
이 광증은 그가 영원히 가져가야 할 굴레였다. 이 가문의 핏속에 깊게 박혀 있는 저주.
그리고 그가 그것을 갖고 있는 이상 필연적으로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위험해졌다.
그가 소중히 여겨서 가까이 두고 싶어 할수록 더더욱 그럴 것이다.
가슴이 답답했다.
녹턴은 신경질적으로 타이를 풀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을 열어젖혔다. 여름의 상쾌한 바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가씨, 같이 가요……!”
잠시 바람을 쐬고 있는데, 블랙웰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녹턴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얼른 와, 메리!”
파티 준비를 위해 장을 보고 온 것일까?
라리아와 몇 명의 하녀들이 식재료를 가득 들고 정원을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하녀들과 떠들며 행복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은 꼭 작은 종달새 같았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속이 간질간질했다. 녹턴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녀를 곁에 두면 안 될 이유는 이렇게나 많은데.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한 점의 이익도 되지 않는데.
이것은 너무나 위험하고 비이성적인 감정일진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사랑한다’라는, 오로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녹턴은 창틀에 팔을 걸친 채 말없이 창밖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아주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 * *
일전에 카페에서 모든 오해를 해소한 뒤에도 셔우드 가의 사람들은 내게 편지를 자주 보냈다.
하루하루가 바빴지만, 그래도 나는 그들의 편지에 최대한 답장을 썼다. 이제는 그들이 좋은 의도로 편지를 보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정성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편지로 보고해 주는, 섬처럼 따로따로 외떨어져 있었던 셔우드가 사람들의 관계가 좋아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꽤 재미있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
편지를 자주 보낸 사람 중에는 아돌프 역시 있었다.
언제 한 번은 아돌프에게 보내는 답장에 내가 준비하고 있는 어린이 파티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그런데 아돌프에게서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자신 역시 파티에 참석하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답장을 보냈다.
「내가 주최하는 파티에 네가 참석하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아니 네가 자리를 빛내 준다면 오히려 반갑겠지만,
어린이 파티에 참석하기에 너는 나이가 너무 많지 않니? 아돌프.」
그러자 아돌프는 편지로 이렇게 말했다.
「뭐 어때. 그런 게 그렇게 중요해? 나는 누님의 귀여운 어린 동생이잖아?」
세상에, ‘못난이’라든가 ‘호박’ 같은 말만 할 줄 아는 줄 알았던 아돌프가 서면이라지만 이런 말을 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어지는 말들은 더 가관이었다.
「얌전히 구경만 하다가 갈게. 꼬맹이들이랑 싸우지도 않을게.
저번 무도회에 나도 가고 싶었는데 나는 성인이 아니라서 누님을 신문으로밖에 못 봤단 말이야.
엄마랑 아버지가 누님 춤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야기하는데 얼마나 약 올랐는지 알아?」
‘아돌프가 이렇게 귀여운 말도 할 줄 아는 애였구나.’
나는 그의 편지를 읽으며 킥킥 웃었다.
‘그렇지만, 14살이나 되는 아돌프가 어린이를 위한 파티에 참석하는 건 정말 상상도 되지 않는걸.’
사실 아돌프가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농담인지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보통 만 14살은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나이지 유치원생과 어울리고 싶은 나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아돌프가 대체 무슨 재미로 어린이 파티에 참석하고 싶어 하겠는가?
‘뭐, 역시 농담이겠지? 사춘기인 아돌프가 어린이 파티에 정말로 올 리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답장에 이렇게 써서 보냈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렴, 아돌프. 외출할 때 아버지, 어머니께 허락받는 것도 잊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