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 * *
녹턴의 광기 발작 사건 이후로, 녹턴과 라리아는 단둘이서 만나는 것을 자제하고 있었다.
아이 돌보기 수업도, 녹턴을 재우는 일도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행여 자신이 다시 라리아를 위험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녹턴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녹턴은 자신의 집무실에 라리아가 찾아왔을 때 깜짝 놀랐다.
“영애.”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모습이 그녀라는 사실에 녹턴은 제법 당황했으면서도, 꽤 태연하게 그녀를 집무실로 맞아들였다.
집무실에 자리를 잡고 앉은 뒤, 몇 마디의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나서 라리아가 말했다.
“제게 하루만 휴가를 주세요. 6월 25일이면 좋을 것 같아요.”
“휴가라고?”
녹턴이 되물었다.
뭔가 이상했다. 그녀는 블랙웰에 고용된 지난 4달 동안 단 하루도 휴가를 쓰지 않았다. 단, 며칠 전에 쓴 반차를 제외하고서 말이다.
거의 일을 쉬지 않았던 그녀가 짧은 기간 안에 두 번이나 쉬다니.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휴가는 물론 줄 수 있지만, 무슨 일이지?”
그는 최대한 초조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그녀를 살짝 떠보았다.
그의 마음은 꿈에도 모르는 라리아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저희 가족들을 만나 보려고요.”
녹턴은…… 두려움이 현실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동안 가족들과 가까워진 건가?’
숨이 막혔다. 발밑이 새까맣게 꺼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셔우드로 돌아갈 마음이 들었나?’
만일 그녀가 셔우드로 돌아갈 생각이 들었다면, 그것은 분명 그의 탓일 것이다.
그가 이성을 잃고 그녀를 위협했기 때문에. 그녀를 위험에 빠뜨릴 뻔했기 때문에 그녀의 마음이 바뀐 것이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숨 막히는 두려움 속에서, 녹턴은 생각했다.
‘누구라도 그런 위험한 일을 겪고 나면 단 한 순간도 내 곁에 있기 싫어지겠지.’
바닥이 타르처럼 찐득찐득한 진창으로 변해 간다. 그녀의 색채로 물들어 있던 세상에서, 물이 빠지듯 색채가 사라져 간다.
빛도, 색채도 사라진 세상에는 결국 잿빛 같은 무채색만이 남는다. 희망도, 행복도 없는 팔레트 속, 오로지 절망이라는 이름의 색상만이.
타르처럼 거무죽죽해져 가는 마음을 애써 숨긴 채 녹턴이 말했다.
“셔우드의 인간들이 또 영애에게 수작을 부리려는 것이면 어떻게 할 셈이지?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내가 동행해도 괜찮다.”
라리아는 고민했다. 굉장히 고마운 제안이었다. 이미 그에게는 너무나 많은 빚을 지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이번에는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스스로 해결하고 싶었다.
라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상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인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사적인 대화를 많이 할 것 같아서요. 제안 감사해요.”
결국 동행마저 거절당했다.
붙잡고 싶다. 그들과 만나지 말라고 하고 싶다.
제발 자신과 아이들을 두고 떠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자신은 그녀에게 너무나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고용주일 뿐이 아닌가. 6개월의 계약으로 묶여 있는.
더군다나 그녀를 위험에 빠뜨릴 뻔한…… 그녀를 살해할 뻔한 자신이었기에, 더더욱 그럴 수 없었다.
저주스러웠다. 이 손으로 그녀를 해치게 만들 뻔한 광증이.
어떤 방법으로든 그녀를 꼬드긴 셔우드가. 그녀를 붙잡을 수 없는…… 이리도 무력한 자기 자신이.
녹턴의 복잡한 심경을 담은 자색 눈동자 위로 눈꺼풀이 덮였다가, 걷혔다.
“알겠다. 그날은 아이들에게 다른 하녀를 붙이도록 해야겠군. 행운을 빈다.”
“감사해요, 전하!”
라리아는 잔인할 정도로 밝게 웃었다.
그날 밤 침소에 든 녹턴은 생각했다.
‘만일 그녀가 셔우드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으면, 계약 따윈 얼마든지 없었던 것이 될 수 있다.’
그녀를 묶어 두었던 것은 몇 푼 안 되는 선금과 표면적 약혼 관계라는 허울뿐이었으니까.
약혼은 그녀의 의사로 깨면 그만이고, 선금 정도야 셔우드가라면 몇 배를 지불하라고 해도 가능할 것이다.
‘그녀가 당장 다음 달에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막을 방법이 없다.’
책임감이 강한 그녀니까 설마 그렇게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하진 않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만으로도 불안감이 밀려왔다.
밤중에 어둠을 노려보며 홀로 고민하고 있자니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악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냥 가둬 버릴까. 어디에도 갈 수 없게 손발에 사슬을 채운 채. 블랙웰을 떠나서는 어디에도 갈 수 없도록.’
제국과 성국의 비난을 받든, 셔우드와 전쟁을 하든 그녀를 떠나보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런 대가를 감수하는 편이 그녀에게 버림받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녹턴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지었다.
‘6년 동안 괴물 소리를 듣더니 정말로 괴물이 되어 버린 건가, 나는.’
하지만 다음 날, 그녀를 마주하는 순간 녹턴은 자신이 결코 그럴 수 없음을 깨달았다.
“다음은 내츄럴 턴입니다. 하나, 둘, 셋, 넷.”
악단의 연주와 버넷 자작 부인의 목소리. 따스하게 내리쬐며 부서지는 오후의 햇살과 그 속에서 춤추는 라리아의 모습.
날이 갈수록 능숙해지는 그녀의 스텝을 지켜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팔을 허공 위로 높이 든 채, 우아하게 빙그르르 회전하는 그녀의 몸. 꽃처럼 둥글게 퍼지더니 곧 내려앉는 치맛자락.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아주 잘했어요!”
이마와 관자놀이에서 반짝이며 떨어지는 땀방울. 힘이 들 텐데도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와 함께 춤을 추는 것이 행복하다는 듯이 너무나 밝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 지금 꽤 잘하지 않았어요?”
라리아는 내츄럴 턴을 다시 한번 선보였다. 백조의 날갯짓처럼 우아한 모양새였다.
“실력이 점점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스스로도 뿌듯한지 그녀는 두 주먹을 꽉 쥐고 기쁨을 표현하다가 달려와서 그의 손바닥에 손바닥을 부딪쳤다.
몹시 즐거울 때 그녀의 습관인데, 외국의 관습 같은 것이라고 했다.
녹턴은 그녀의 솔직한 반응에 그만 픽 웃고 말았다.
“……나쁘진 않군.”
“나쁘진 않아요? 에이, 거짓말하지 마세요. 저 정말 잘했는걸요. 그쵸, 공녀님, 공자님?”
“머쪄, 라리아!”
묶여 있지 않은 그녀는 생기와 열정으로 넘쳤다. 그것은 너무나 아름답고 강렬했다.
그녀가 가진 색채 따위보다도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이었다.
녹턴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욕심대로 그녀를 묶어 가둔다면, 그녀는 색깔은 잃어버리지 않을지 몰라도 이 아름다운 생기와 열정은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다시는 그에게 사랑스럽게 웃어 주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그의 손바닥에 손바닥을 부딪치지도, ‘같은 독신주의자끼리 화이팅’하자고 해 주지도 않으리라.
녹턴은 깨달아 버렸다. 자신이 좋아하고,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 것은 그녀의 특이한 색채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모든 것이 좋았다.
저 웃음도, 생기와 열정도, 책임감도, 아이들에게 보이는 애정도, 봄날에 찾아온 종달새와 같은 걸음걸이도. 유치한 말투도.
그것만이 자신의 행복이고 희망이었다. 그 행복을 잃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그녀의 곁에 있고 싶었다. 닿고 싶었다.
어느 초여름날, 오후의 내리쬐는 햇살과 악단이 연주하는 달콤한 춤곡 속에서 녹턴은 사랑을 깨달았다.
삶의 이유도, 어떠한 온기도 없이 모래처럼 건조하기만 하던 그의 삶에 기적처럼 피어난 첫사랑이었다.
* * *
6월 25일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이날을 손꼽아 기다려야 하는지, 아니면 오지 않기를 빌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운 하루하루였다.
셔우드 가문. 그들에게는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드디어 이 혼란도 끝이구나.’
메리에게는 일찌감치 아이들에게 가라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혼자서 외출 준비를 했다.
준비를 금방 끝낸 나는 시간에 맞춰 마차를 타고 약속 장소로 출발했다.
덜컹이는 마차 안에서 나는 상념에 빠졌다. 셔우드 가족들과 지낸 일주일간의 시간, 그리고 라리아에 대한 상념이었다.
“도착했습니다.”
“고마워요.”
나는 마부에게 팁을 주고 마차에서 내렸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작지만 아늑해 보이는 카페였다.
다소 일찍 왔기에 카페에 셔우드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용한 자리를 잡아 그들을 기다렸다.
잠시 후, 그들이 나타났다.
“라리아!”
“정말 오랜만이구나.”
셔우드 백작, 계모, 노먼, 그리고 아돌프까지, 셔우드의 전원이 마차를 타고 나타났다.
나는 그동안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금 고민했다.
솔직히 친한 사이도 아닌데 친한 척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난번처럼 매정하게 구는 것도 좀 그랬다.
하지만 고민 결과, 나는 그냥 느낌대로 그들을 대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버지, 어머니.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셔우드 백작과 계모는 그동안 고생을 했는지 얼굴이 꽤 핼쑥해져 있었다. 계모가 먼저 말했다.
“우리야 뭐, 평소처럼 잘 지내지. 너야말로…… 블랙웰에서는 잘 대해 주니?”
‘셔우드보다는 훨씬 잘해 주긴 하지만…… 그렇게 솔직히 말하면 좀 그렇겠지.’
초장부터 분위기를 깨지 않기로 결심한 나는 적당히 말했다.
“네, 그럼요.”
다음은 백작의 차례였다. 내 시선이 그에게 닿자, 백작이 어색하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으음…… 잘 지냈느냐, 라리아.”
셔우드 백작은 지난번 광장에서의 만남 때 일이 신경 쓰이는지 굉장히 어색하게 굴었다.
‘신경이 쓰일 만도 하지. 솔직히 셔우드 백작이 지난번에 너무 막 나가긴 했잖아. 사람을 막 끌고 가려고 하질 않나.’
그 정도로 생각한 내가 적당히 넘어가려고 하던 그때였다.
“보고 싶었다.”
이것은 놀랍게도 백작의 말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백작은 내 시선을 느끼곤 주저하다가 다시 말했다.
“저번엔 정말 미안했다, 라리아.”
괜찮다고 말하기는 좀 그래서,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자, 그럼…… 다 모였으니, 한번 대화를 해 볼까요.”
내가 말했다.
“궁금한 게 정말 많아요. 아시다시피 전 겨우 19살이에요. 하지만 당신들은 10대인 제게 꽤 모질게 굴었죠. 그래서 전 당신들이 저를 싫어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셔우드를 떠나자 갑자기 제가 돌아오길 바라는 것처럼 행동하시더라고요.”
셔우드의 네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체 왜 그런 거예요? 왜 저를 미워했고, 왜 제가 돌아가기를 바라는 거죠? 당신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내가 그들과 부대끼며 산 것은 고작 일주일이었지만, 나는 그들에 대해 그 일주일 동안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빙의 전에는 알지 못했던 사실이지만, 라리아는 일기를 썼다.
매일 매일. 9살부터 시작해서 19살인 지금까지, 10년 동안이나. 그 많은 일기들은 전부 그녀의 드레스룸에 보관되어 있었다.
내가 쓴 소설 속의 세계에 떨어지고, 라리아가 된 이후 나는 그 일기를 전부 읽었다.
일기에는 라리아에 대해 많은 것들이 쓰여 있었다. 그녀가 어떤 가정에서 자랐으며, 이 콩가루 집안에서 얼마나 불합리한 일들을 당했는지.
기댈 곳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녀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외로운 장소였는지.
나에게는 행운인 일이었다.
그 일기 덕분에 이 가정에 좀 더 빠르게 적응했고, 라리아인 척을 더 잘 해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라리아가 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일개 조연이 아닌 내가 되고, 그녀의 삶이 나의 삶이 되자 나는 나의 유년기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주현아, 엄마 말 잘 들었지? 이제부터는 주현이에게 엄마는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거야.’
우리 엄마는 내가 8살 때 나를 버렸다.
사실 이해는 한다. 우리 집이 얼마나 가난했는지, 엄마 혼자 일을 하며 나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나는 기억하고 있다.
별로 엄마를 원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한 번 받은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외로웠던 고아원에서의 생활, 하루하루 엄마가 돌아오길 기다리기만 했던 날들…….
……결국 엄마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아이들이라도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결심했던 어린 시절이 라리아의 외로움과 겹쳐 보였다.
이제 라리아는 없다.
어디로 가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족의 사랑이라는 것을 느껴 보지도 못한 채 그녀는 사라졌다.
그녀가 진심으로 안쓰럽고 공감이 갔다. 그녀가 안타까워서라도, 나는 셔우드의 사람들을 함부로 용서해 줄 수 없었다.
내 질문에 네 사람 모두 우물쭈물하는 것이 보였다. 우물쭈물하던 그들 중, 셔우드 백작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라리아, 사실은 말이다…….”
* * *
셔우드 백작은 전형적인 귀족의 삶을 살았다. 그야말로 귀족의 교과서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일찍이 모두가 인정하고 숭상할 만한 학식을 갖추었으며 뛰어난 능력으로 빠른 출세를 하여 수도의 재계를 거머쥐었으며 물려받은 영지를 성공적으로 다스렸다.
다만 ‘훌륭한 귀족의 삶’의 구성 요소는 학식과 출세뿐만이 아니다. 결혼을 해서 가문을 잇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셔우드 백작은 완벽한 귀족답게 집안에서 골라 준 상대와 정략결혼을 했으며, 아이를 둘 낳았다.
그들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노먼과 라리아였다.
하지만 ‘훌륭한 귀족의 삶’에 배우자를 사랑하는 일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셔우드 백작은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라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나, 정략혼의 상대인 배우자에게는 어떠한 관심도 없었다.
예산이 필요하다고 하면 부르는 대로 주었고, 원하는 것은 드레스든, 금은보화든 안겨 주었으며 집안 안팎에서 백작 부인으로서의 대우는 결코 모자람 없이 해 주었다.
다만 어떠한 사랑도, 인간적인 관심도 주지 않았을 뿐이다.
“각하, 어찌하여 제게 이리도 무심하십니까? 어찌하여 아이에게는 진심 어린 웃음을 보여 주시면서 제게는 한 번도 웃어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어느 날, 백작 부인이 눈물 흘리며 사랑을 애원했으나 백작은 그러한 것이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어차피 정략결혼이지 않은가. 집안과 집안의 이익을 위한, 이해타산을 위한 결합일 뿐 그녀를 진심으로 아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세월은 흘렀고, 갓난아기였던 라리아는 6살의 꼬마 숙녀가 되었다.
아이가 자라면 자랄수록 돈은 많이 드는 법이다.
게다가 백작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여운 딸을 어떠한 모자람도 없이 키우고 싶었다.
라리아를 훌륭한 숙녀로 키우기 위해 백작은 더욱더 일에 매진했다.
집에도 돌아오지 않는 날이 많아졌고, 휴식은 사치가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딸아이를 생각하면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백작 부인이 죽었다.
사인은 병사였다. 타고난 체질이 허약했던 백작 부인은 슬픔과 외로움에 병까지 앓으면서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백작에게 폐를 끼칠까 봐 그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고 했다.
자신의 무관심으로 인해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도 충격이었지만, 더욱 큰 충격은 따로 있었다.
백작 부인이 남편으로부터 어떤 냉대를 받았는지, 그녀가 얼마나 외로워하고 괴로워했는지, 사무치는 고독 속에서 병을 앓아 얼마나 아파했으며, 어떻게 죽었는지 엄마를 걱정하며 곁을 지킨 라리아는 전부 알고 있었다.
“난 당신을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6살이었던 라리아의 눈엔 결코 6살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와 증오가 담겨 있었다.
“우리 어머니를 죽인 당신을 나는 영원히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을 저주해요. 영원히!”
아무리 힘들게 일을 해도 결코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였던 딸이, 삶의 유일한 이유였던 딸이 자신을 원수를 보는 듯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6살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깊은 증오의 업화를 태우며 자신을 저주하고 있었다.
‘이런 걸 바랐던 게 아니었다.’
그제야 백작은 자신의 죄를 깨달았다.
‘사랑하는 딸아이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너무나 큰 죄를 지어 버렸다. 일평생 무슨 짓을 해도 갚을 수 없을 죄를.’
죄책감에 사로잡힌 백작은 다시는 딸아이를 마주 보지 못했다.
자신의 죄를 잊기 위해, 그저 미친 듯이 일만 했다.
일에 파묻혀 있으면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악감을 잠깐이나마 떨쳐 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13년이 흘렀다.
* * *
셔우드 백작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나는 한숨을 쉬었다.
“멍청한 사람.”
나는 지끈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정말이지 이렇게 한심스러울 수가 없었다. 부인을 방치해서 죽여 놓고,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다시 딸을 방치하다니!
아무리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지만, 어쩜 해도 그렇게 최악의 선택만을 골라서 할까?
내 말에 셔우드 백작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그가 내게 말했다.
“네 말이 맞다, 라리아. 내가 어리석었지.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어리석은 짓을 해 버렸어. 널 낳아 준 어미를 방치한 것이 첫 번째, 바꿀 수 없는 과거의 행실을 탓하며 너마저 방치한 것이 두 번째, 너의 정당한 분노를 억압하고 널 강제로 끌고 가려고 했던 일이 세 번째 어리석음이었다.”
셔우드 백작 역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말이다, 라리아. 너를 사랑했기에 작은 새장에 가둬 두고 싶었단다. 그저 가둬 놓고, 너를 위한 모든 것을 가져다주기만 하면 네가 행복할 줄 알았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돈 따위가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네게도 진심 어린 깊은 대화와 자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단다.”
“…….”
“너는 새장에 가둬 놓고 때때로 구경하기만 하면 되는 새 따위가 아니야. 새장을 벗어나 훨훨 날며 자신만의 꿈을, 자신만의 인생을 꾸려 나가야 하는…… 한 명의 ‘사람’이었는데. 과거의 나는 그것을 미처 몰랐던 게다.”
셔우드 백작은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미안하구나. 내 남은 인생 동안 평생 네게 사죄를 해도 다 갚지 못할 잘못이지만, 그래도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단다.”
나는 차를 홀짝이며 묵묵히 그의 사과를 듣다가 말했다.
“얘기 끝났나요?”
“그래.”
“그럼…….”
나는 고개를 돌렸다. 바로, 셔우드 백작의 옆에 앉아 있는 계모와 아돌프를 향해서였다.
계모와 아돌프는 내 시선이 닿자 눈에 띄게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댁들은 뭐가 문제였나요?”
“그, 그게…….”
계모가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 * *
라리아가 8살이 되던 해, 집안의 압박으로 인해 백작가의 안주인 자리를 오래 비워 둘 수 없었던 셔우드 백작은 라리아의 계모, 즉 힐러리 셔우드와 재혼했다.
그때 당시 힐러리는 3살짜리 아들 아돌프를 데리고 있던 채였다.
떨림과 불안 속에 백작 부인이 된 힐러리는 백작성에 온 뒤 처음으로 의붓자녀인 노먼과 라리아를 만났다. 하지만…….
“아, 안녕? 나는 너희의 새엄마란다. 하지만 나를 친엄마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대하렴. 이쪽은 내 아들 아돌프, 이 아이 역시 앞으로는 너희의 동생이란다.”
“알겠습니다, 어머니.”
16살인 노먼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너무 어렸던 라리아의 마음속엔 여전히 아버지의 잘못으로 친엄마를 잃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싫어요!”
“아니, 라리아!”
“당신이 왜 우리 엄마죠? 제게 엄마는 딱 한 사람뿐이에요.”
라리아는 울먹이며 자신과 친어머니를 배신한 오빠 노먼을 쏘아보곤, 힐러리에게 소리쳤다.
“제 앞에서 함부로 엄마 소리 하지 마세요. 가증스러우니까!”
그러고는 큰 소리로 발을 구르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니, 라리아! 라리아!”
힐러리는 차마 라리아를 붙잡지 못했다.
“으애앵!”
어린 아돌프는 큰소리에 놀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날의 일은, 두려움과 떨림 속에 아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찾으러 온 힐러리의 마음속에 큰 상처로 남았다.
더군다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서 오세요, 여보.”
“음, 당신이구려. 오늘은 무슨 일 없었소?”
“네, 없었어요.”
셔우드 백작은, 자신의 냉대 속에 죽었던 전 아내로 인해 교훈을 얻긴 했는지 힐러리에게 어느 정도의 관심을 보였다.
“그거 다행이로군.”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관심엔 진심 어린 애착과 정성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동정심과 의무감만이 느껴지는 그의 관심 표현은 오히려 힐러리의 가슴을 후벼팔 뿐이었다.
그의 진심 어린 애정이 향하는 방향은 오로지 한 곳뿐이었다.
바로 라리아였다.
힐러리 자신에게도, 아돌프에게도 주지 않는 그의 진심 어린 애정은 오직 라리아만의 것이었다.
자신을 진짜 어머니로 인정해 주지 않는 바로 그 라리아.
“엄마, 왜 아버지는 내게는 진심으로 웃어 주지 않는 거야? 내가 검술 대회에서 준우승밖에 하지 못해서 그런 걸까? 우승을 하면, 아버지는 그때는 내게 진심으로 웃어 주실까?”
“아돌프…….”
“대회에 나간다고 했는데도 아버지는 조심하라는 말 한마디 해 주지 않으셨어. 아버지가 걱정하는 사람은…… 늘 라리아뿐이잖아.”
아들의 말 역시 마음을 후벼팠다.
아돌프를 친아들처럼 아껴 줄,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줄 남자가 필요해서 재혼을 했던 것인데.
셔우드 백작은 이 모자에게 결코 훌륭한 남편도, 훌륭한 아버지도 되어 주지 못했다.
분명, 재혼하면 의붓아이들에게 친엄마처럼 잘해 주기로 결심했는데.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는데.
방치와 원망과 절망과 시기의 끝에 곪고 썩어 든 가슴 속에서 결국 악심은 자라났다.
결국 저 애만 없으면, 라리아만 없으면 모든 게 괜찮았을지도 모르는데.
라리아가 독점한 백작의 사랑을 자신과 아들이 나누어 받고, 그토록 바라던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뚤어진 감정은 결국 만만한 상대를 향했다.
그 순간부터, 라리아는 가족 따위가 아니었다. 적이었고, 사랑을 빼앗아가는 경쟁자였으며,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 못하게 만드는 원흉이었다.
“게을러터지고 쓸모라곤 아무짝에도 없는 년!”
“너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어야 했던 건데. 네가 이 집안을 망쳤어!”
“다 너 때문이야. 내가 이 꼴로 사는 것도, 내 아들이 사랑받지 못하는 것도, 다 너 때문이라고!”
괴롭힘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자신이 라리아를 그렇게 대하니 어린 아들에게 영향이 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야, 이 멍청아! 이거나 먹어라!”
“꺄악!”
하지만 그것이 만족스러웠다. 라리아는, 자신과 아돌프의 적이었고 경쟁자였으니까.
가엾은 아들의 받아 마땅한 사랑을 빼앗아 간 도둑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라리아가 사라졌다.
꼴도 보기 싫은 애물단지가 집을 나가 버린 것이다. 남편과 의붓아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았다.
처음에는 앓던 이가 빠진 듯 속이 시원했다.
아니, 시원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힐러리는 뭔가의 위화감을 느꼈다.
‘집이…… 너무 조용해.’
꼭 있어야 할, 너무나 중요한 것이 사라진 기분.
“넵넵. 저는 게으르고 쓸모가 없어서 시집 보내서 치워버리기도 글러 먹었죠. 그리고 그건 다 제가 저의 천한 모친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이고요. 계모님 말씀이 다~ 옳으십니다.”
건방지고 마음에 안 들었던 그 애의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드레스를 팔랑거리며 돌아다니던 그 사뿐사뿐한 발걸음도, 오고 가던 언쟁도, 보기만 해도 약이 오르던 무심한 눈빛도.
전부가 다, 꼭 이 집안에 있어야 할 것만 같은데……. 지금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바라던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그제야 힐러리는 깨달았다.
언제부턴가, 너무나 큰 착각을 하고 살았다.
행복한 가정, 서로를 아껴 주고 진심으로 위하는 가정이 인생의 목표였던 그녀였다.
언제부턴가, 라리아만 없어지면 그 목표가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라리아가 없는 행복한 가정을 바란다고,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라리아가 없어져도 집안 분위기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어수선하고, 싸늘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게다가, 설령 라리아가 없는 채로 분위기가 좋아진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불완전했다.
힐러리가 바라던 서로를 아끼고 진심으로 위하는 가정에는, 라리아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5명의 가족들 중,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 힐러리는 사실, 라리아와 친해지고 싶었다. 그녀와 가까워지고, 그녀의 진짜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런 감정을,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원망을, 최악의 형태로 표현하고 말았지만.
하지만 이제 와선 너무 늦었다. 힐러리는 그 사실을 한심할 정도로 뒤늦게 깨달았다.
* * *
계모의 말 역시 한숨이 나오기는 마찬가지였다.
‘백작이 쓰레기네.’
나는 셔우드 백작을 째려보았다. 그가 움찔 놀라며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질투를 다스리지 못하고 친해지고 싶은 마음을 최악의 방식으로 표현한 계모와 아돌프도 문제고 말이야.’
내가 계모와 아돌프를 째려보자, 두 사람 역시 화들짝 놀라며 어찌할 줄 모르고 얼굴을 붉혔다.
‘정말이지 콩가루 집안이잖아, 이거.’
나는 깨달았다. 언제나 큰 사건은 별거 아닌 계기를 통해 일어나듯이, 이 가정을 엉망으로 만든 것도 그저 오해와 미숙함일 뿐이었다.
‘누구 하나라도 정신을 차리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더라면, 마음을 열고 진심을 다해 다가갔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결국 나는 깊은 한숨을 푹 쉬고 말았다.
이 집안을 엉망으로 만든 것은 작은 오해와 미숙함일 뿐이라지만, 그 오해와 미숙함으로 인해 인생에 있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라리아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걸까.
가정에서 받은 외로움과 상처로 인해 결국 녹턴에게 집착하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해 그에게 죽음을 맞는 라리아의 삶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하지만 잘못한 것은 이들만이 아니지.’
나는 생각했다.
‘제일 큰 잘못을 한 사람은…… 바로 나야.’
그렇다.
결국 이 가정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근본적인 원인은, 일회성 악역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라리아와 그녀의 외로운 삶을 만들어 낸 나에게 있었다.
‘이런 내가 그들에게 화를 내도 되는 걸까. 모든 것이 그들의 잘못이라고, 책임을 돌려도 되는 걸까.’
입맛이 썼다. 나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들의 이야기는 잘 알았어요. 덕분에 왜들 그랬던 건지 의문이 풀렸네요.”
“라리아,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정말 면목이 없다는 걸 알지만……. 우리들은 네게 진심으로 미안하고,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단다. 이 죄를 회피하지 않고, 평생 동안 네게 최선을 다할 테니, 부디 우리에게 돌아와 줄 수는 없겠니? 어머니 아버지께서 네 걱정으로 매일마다 밤잠을 못 이루고 계시다.”
노먼은 확증을 받으려는 듯 다른 가족들을 돌아보았다. 백작과 계모, 아돌프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야, 누님. 앞으로는 절대 누님한테 대들지 않고 이름으로 부르지도 않을게. 뭐든지 양보하고, 착한 동생이 될게. 그러니까 돌아와, 응?”
“라리아, 네게 한 잘못이 너무 많아 면목이 없지만 부디 돌아오렴. 여자 혼자 밖에서 지내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데. 게다가 네 약혼자의 악명은 너도 알고 있지 않니? 네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되어서 도저히 잠을 잘 수 없구나.”
“힐러리와 아돌프의 말이 맞다. 무엇이든 할 테니 돌아오기만 하거라, 라리아. 이제껏 네게 해 주지 못한 애비 노릇을 할 기회를 다오.”
그들이 내게 돌아오라는 말을 할 것은 예상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저는 돌아갈 생각이 없어요.”
내 말에 네 사람의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뚜렷하게 어렸다.
하나같이 어깨와 눈썹이 축 처지고, 한숨을 푹푹 내쉬는 것이 시무룩한 강아지 가족처럼 보였다.
내가 그들의 모습을 흘기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지금은요.”
그렇다. 나는 그들에게로 돌아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지금은’ 말이다.
지금 내겐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그들이 라리아에게 지은 잘못이 있듯 나는 녹턴에게 지은 과오가 있었고, 그를 마저 행복하게 해 주어야만 했다.
‘앞으로 8개월 뒤, 그가 완전히 행복해진 뒤에야…… 나는 그에게서 떠날 수 있어.’
내가 덧붙인 말에 희망을 느꼈는지 네 사람의 표정이 변했다. 꼭 스위치라도 켠 듯 얼굴이 밝아진 것이다.
“라리아! 그 말은…… 나중에라도 돌아올 생각이 있다는 뜻이냐?”
노먼이 희망을 품은 채 물었지만, 나는 그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여러분이 잘하면요.”
“자, 잘하면…….”
그렇다. 비록 그들의 사정도 알았고, 그들이 뉘우치고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알았지만…….
나는 라리아를 생각해서라도 그들을 쉽게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기도 좀 그렇지.’
그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들을 이렇게 만든 데에는 내 책임도 분명히 있어.’
그렇게 생각한 나는, 그들을 보며 단호하게 선언했다.
“여러분에게 8개월의 시간을 드리겠어요. 그 시간 동안, 여러분이 잠깐이 아니라 진심으로 뉘우쳤다는 사실을 증명하세요. 만일 여러분이 진심이라는 확신이 생기면, 8개월 후 셔우드 백작저로 돌아가겠어요.”
그렇다. 비록 라리아의 인생에 너무나 많은 잘못을 저지른 그들이었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기회를 주는 것이 마땅할 것 같았다.
라리아의 일기장에서 읽은 구절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째서 우리 가족들은 나를 이렇게 미워하는 걸까?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지른 걸까? 괴롭고 쓸쓸해서 매일 밤마다 울면서 잠에 든다.」
「하지만, 매일 밤마다 꿈을 꾼다. 모두와 화해하는 꿈을. 아버지, 새어머니, 오라버니, 그리고 아돌프……. 네 사람과 함께 행복하게 웃으며, 진정한 가족이 되는 꿈을.」
「그들이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에게서 사랑받고 싶다. 서로를 진심으로 위하는 가족이 되는 것만이 나의 꿈이고 희망이다.」
19살의 2월 15일, 그러니까 내가 빙의되기 고작 일주일 전에 쓴 일기였다.
‘바보 같은 라리아. 그렇게 오래 냉대당했으면서, 어떻게 가족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거니? 대체 어떻게?’
그 일기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되는 것도 같았다.
그래도 가족이니까.
미워하고, 싸우고, 욕을 하고, 못살게 군다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니까. 세상에 둘도 없는 그런 존재이니까.
고작 이런 이유로, 나 역시 나를 8살 때 버린 엄마를 여전히 미워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어린 시절의 나도 꿈을 꾸었다. 너무나 많이 꾸어서 이제는 눈을 감기만 해도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꿈이다.
엄마가 나를 찾으러 오는 꿈.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이젠 다시 같이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며 내 손을 잡고, 꽉 안아 주는 꿈.
나를 버린 엄마를 수도 없이 원망했지만, 엄마가 언젠가 나를 찾으러 오면 결국 용서할 생각이었다.
다시는 날 떠나지 말라며, 나를 안아 주는 엄마를 꽉 마주 안아 줄 생각이었다.
‘라리아 역시 그랬던 거겠지.’
나의 꿈은 결국 영영 실현되지 못했지만, 라리아의 꿈이라도 이루어 준다면 그것으로 좋은 게 아닐까.
그것으로 라리아도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오래 묵은 한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고 라리아의 한을 풀어 주겠다는 이유로 나의 꿈인 제국 최초의 유치원 건립을 그만둘 생각은 아니다.
‘셔우드 백작저에서 살면서도 유치원 선생님은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뭐. 녹턴에게서 퇴직금을 충분히 받으면 꼭 유치원을 차려야지.’
내 말에 감격한 듯한 백작이 내 손을 잡았다.
“라리아, 정말 고맙다. 죄 많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다니,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그의 주름 진 눈가에는 눈물마저 맺혀 있어서, 나는 조금 민망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정말 제대로 증명하셔야 돼요. 절대로 적당히 넘어가 드리지는 않을 거니까 말이에요.”
“그래, 물론이지, 라리아. 난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고맙구나.”
“라리아,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겠니? 어떻게 해야 우리가 정말 뉘우쳤다는 것을 네가 알 수 있겠니?”
계모의 질문에 나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답을 했다.
“여러분은 저를 위해 뭐든지 하겠다고 하셨으니 제가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해 주세요. 제 부탁을 잘 들어주시면, 그걸로 여러분의 진심이 증명된 걸로 할게요.”
“그, 그래 알겠다. 그래서 네 부탁이란 게 무엇이냐?”
나는 내 남매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먼저 아돌프, 그리고 오라버니.”
“으, 응?”
“오라버니와 아돌프는 재능이 많으니, 그 재능을 착한 일에 써 주세요. 하루에 한 번씩, 작은 거라도 좋으니,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 사회에 환원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 ‘재능 기부’죠.”
“재…… 재능 기부……?”
너무 현대적인 개념이었나? 하지만,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겠지.
나는 이번엔 새어머니를 보았다.
“새어머니.”
“어, 으, 응!”
“새어머니는 백작가의 안살림을 이끌어 나가는 능력이 탁월하시니, 매달 수도의 고아원에 5천만 테트씩 기부하시고 매주 봉사활동을 나가시도록 하세요. 고아원은 늘 자원과 인력이 부족하니 새어머니의 도움의 손길을 두 팔 벌려 환영할 거예요.”
5천만 테트는 수도의 작은 집을 한 채 살 수 있을 정도의 거액이었다.
매달 5천만 테트를 기부하고 매주 봉사활동을 나가는 일은 백작 부인인 그녀에게도 큰 부담이 되리라.
하지만, 그녀는 결심한 듯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애야.”
나는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
“그래, 라리아.”
그야말로 이 조건의 하이라이트였다. 그야, 이 집안이 엉망이 된 건 셔우드 중에서는 그의 책임이 가장 크지 않은가?
“아버지는 매주 새어머니와 봉사활동을 함께 나가세요. 그리고, 이틀마다 가족들에게 진심을 담은 편지를 한 통씩 쓰고, 매일마다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
“새어머니와 아돌프에게 시간을 많이 쓰세요. 새어머니와 데이트도 하고, 아돌프와 승마도 하고……. 적어도 일주일에 이틀은 새어머니와 아돌프를 위해 따로 시간을 내세요. 온 가족이 소풍을 나가거나 연극을 보러 가기도 하고요. 그동안 바쁘게 일만 하셨으니 이 정도로 시간을 내는 건 어렵지 않으시겠죠?”
내 말에 그는 복잡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떨궜다.
“알았다, 라리아. 그리고…….”
그가 말꼬리를 흐리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그가 말했다.
“……정말 고맙구나.”
“…….”
나 참, 왜들 이러실까, 민망하게시리.
멋쩍어진 나는 뺨을 긁적이곤 말했다.
“바로 오늘부터 시작이에요. 제 약속, 절대 잊거나 어기지 마세요.”
“알았다, 라리아.”
“여신께 맹세코 네가 말한 것을 꼭 지키겠다.”
대화가 얼추 마무리되었다고 느끼자, 나는 창밖을 보았다.
벌써 해가 졌는지 온 사방이 어둑했다. 게다가 장대비가 시원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아무리 휴가를 냈다고 해도, 이제 슬슬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았다. 아이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럼 오늘은 이걸로 마무리해요. 8개월 뒤에 뵈어요. 가끔씩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편지를 보낼게요.”
“라리아, 비도 오는데 대공저까지 데려다줄까?”
“괜찮아요. 저도 마차를 탈 거니까요.”
나는 가족들과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저로 돌아가기 위해 카페를 나서려던, 그 순간이었다.
“어?”
문을 열자, 저 멀리 쏟아지는 빗속에서 어슴푸레한 뭔가가 보였다.
아마 사람 같았다. 검고, 커다랗고, 빗물에 푹 젖어 있는…….
그는 그곳에 서서 누군가를 오랜 시간 기다린 것처럼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곳을 보던 내가 중얼거렸다.
“저 사람, 설마…….”
* * *
라리아의 휴가 날, 녹턴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녀의 노래를 꾸준히 듣고 불면 증상이 한결 나아졌었지만, 그 효과마저 오늘은 통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가득 찬 고민이 심장을 떨리게 하고 불안감을 재촉했다. 결국 녹턴은 하룻밤을 뜬눈으로 새우고야 말았다.
집사로부터 라리아가 대공저를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뒤에도 계속 그녀의 생각만이 났다.
‘그녀가 셔우드의 인간들과 무슨 대화를 하고 있을까.’
야비한 셔우드 놈들이 그녀를 달콤한 말로 꼬여 내는 것을 생각하면,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역시 억지를 부려서라도 그녀와 동행했어야 했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셔우드 놈들의 꼬임에 넘어간 라리아가 오늘 당장 일을 그만두고 셔우드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그려졌다.
‘제발, 그것만은 안 돼.’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것만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막을 것이었다.
그녀에 대한 마음을 자각한 지금, 더 이상 거리낄 것은 없었다.
자신은 대공이고 그녀는 그저 백작 영애라는 사실 따위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만일 그녀가 자신과 아이들을 버리고 당장 셔우드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설령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를 붙잡으리라.
한없이 구차하고 비굴해진다고 해도, 그녀가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주어서라도 붙잡으리라.
그러던 중, 하늘이 어두워지고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군요.”
주인의 마음은 꿈에도 모르는 집사 시몬이 여상하게 말했다.
“외출 나가신 셔우드 영애가 비를 맞지 말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 말을 듣자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녀를 찾아갈 아주 좋은 핑곗거리가 생긴 것이다.
“잠시 나갔다 오겠다.”
녹턴은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외투만을 입은 뒤, 그녀가 말해 줬던 약속장소로 향했다.
그렇게, 다시 현재.
라리아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녹턴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장대비를 그대로 맞아 가면서 말이다.
“전하!”
라리아가 허둥지둥 카페에서 뛰쳐나갔다. 달려오는 그녀를 본 녹턴은 쓰지 않은 채 들고만 있던 우산을 그녀에게 씌워 주었다.
“……영애.”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없는 동안, 너무 많은 생각을 했다. 묻고 싶은 말도 많았다.
내가 싫어졌나?
지난번 그 일로 인해, 내가 두려워졌나?
셔우드로 돌아가고 싶어졌나?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빗물에도 녹지 않았던 그 많은 질문들이…….
“전하, 이게 무슨 일이에요! 비를 왜 맞으셨어요? 우산을 갖고 계시면 우산을 쓰셨어야죠!”
그녀의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얼굴에, 잔소리하는 그 말들에…….
“감기 걸리시면 어떻게 하려고요! 아이참, 내가 못 살아!”
녹아서 쓸려 내려가 버리는 것만 같았다.
라리아가 까치발을 든 채 손을 뻗어 녹턴의 이마를 짚었다. 아마 열이 있나 확인해 보는 것 같았다.
열이 있긴커녕 비에 식은 그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손은 그 무엇보다 따뜻했고.
녹턴은 입꼬리를 당겼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걸까. 이 여자는.
그녀는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를 죽일 뻔한, 위험에 빠뜨릴 뻔한 자신을. 평생을 미워해도 괜찮을 자신을.
자신을 미워하거나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평소에 보이던 여상한 태도는 그저 괜찮은 척이 아니었을까, 하던 두려움과 고민들이 빗물에 씻겨 사라져 갔다.
“영애.”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토끼 같은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물었다.
“돌아갈 건가? 셔우드로.”
라리아는 잠시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곧, 그녀가 눈꼬리를 접으며 미소 지었다.
“아니요, 제가 공녀님과 공자님을 두고…… 전하를 두고 어디를 가겠어요.”
그녀가 푸스스 웃으며 말했다.
“제가 없으면 우산도 못 쓰시는 전하를 어떻게 혼자 두겠어요?”
빗물에 젖은 세상이 온통 빛나기 시작한다.
물 빠진 색감을 가지고 있던 세상에 물감이 번지듯, 그녀의 아름다운 색채가 번져 나간다.
세상에 색깔이 돌아온다.
녹턴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의 거대한 몸이 무너지며…….
라리아의 가녀린 몸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포옹에 화들짝 놀란 라리아가 말했다.
“저, 전하!”
“잠시만.”
녹턴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잠시만 이렇게 있도록 하지.”
그제야 라리아는 잠잠해졌다. 그녀의 가는 팔이 애써 등을 마주 안아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벌컥! 하는 소리와 함께 녹턴의 옆에 있던 검은 마차의 문이 열리며 조그마한 무언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라리아!”
바로, 자네트와 미하일이었다.
알록달록한 우비를 입은 자네트와 미하일은 마차에서 뛰어내리더니 라리아에게 달려가 그녀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라리아, 가지 마!”
“가지 마! 우리랑 살아!”
라리아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녹턴과 아이들을 한꺼번에 안아 주었다. 아주 오래오래.
* * *
가족들과 담판도 지었겠다, 녹턴의 광증에 대한 조사는 페트로에게 맡겨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다. 이제 내가 제일 신경 써야 하는 일은 딱 하나뿐이었다.
바로 황실 무도회였다.
‘으음, 그러고 보니 무도회에서 입을 옷이 없네.’
나는 드레스룸을 뒤적이며 생각했다. 셔우드가에서 가져온 옷들은 대부분 수수한 실내복 위주였기에 무도회에서 입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나는 이 사실을 녹턴에게 말하며 어떻게 해야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안 그래도 영애의 무도회 드레스를 만들어 줄 디자이너를 부른 참이다. 내일 오후 4시에 시간을 내도록.”
뭐라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하지만 그의 말에 나는 내심 안도했다. 역시 꼼꼼하고 유능한 남자였다. 잊지 않고 파트너의 옷까지 챙겨 줄 줄이야.
‘나는 어떤 드레스를 입게 될까.’
패션에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처럼 새 옷이 생긴다는 것은 조금 기뻤다.
하지만 미리 예상을 했어야만 했다. 그가 준비한 것은 단순히 ‘새 옷’ 정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처음 뵙겠습니다. 로잘린 부인이라고 편히 불러 주세요. 셔우드 백작 영애께 최상의 아름다움을 선사해드리겠습니다.”
머리를 멋지게 부풀려 틀어 올리고 입가에 미용 점을 찍은 디자이너가 나와 녹턴에게 인사했다.
내 옆에는 자네트와 미하일이 찰싹 달라붙어서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반가워요, 로잘린 부인.”
‘로잘린 부인?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이름인데…….’
그때만 해도 기억해 내지 못했지만, 나는 그녀의 이름을 신문에서 몇 번 보았다.
그녀는 황족의 의상까지 담당하는 수도의 일류 디자이너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그런 대단한 디자이너를 앞에 둔 채, 녹턴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우선 샘플부터 보지.”
녹턴이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 로잘린 부인은 그의 말에 가볍게 손뼉을 쳐 신호를 보냈다.
그녀의 신호에 응접실 문이 열렸다. 나는 샘플이라기에 카탈로그 북 같은 것을 보게 될 줄 알았는데, 웬걸…….
응접실 문으로 들어온 것은 카탈로그 북을 든 사람이 아니라, 샘플 드레스를 입고 있는 사람이었다.
화려한 무도회용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이 모델처럼 멋지게 워킹해 응접실로 들어왔다.
“우와아!”
아이들에게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럴 만도 했다. 나도 이런 광경은 난생처음 보았으니까.
공작새처럼 화려하게 꾸민 모델들은 방에 들어오더니 우리의 눈앞에서 360도 회전을 하거나 다양한 포즈를 취하는 등, 옷의 디테일과 핏을 보여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여기 이 드레스는 동방 산동의 비단을 르잔 왕국의 최상급 보라색 염료로 물들인 천으로 만든 것이랍니다. 치맛단에 오버된 퍼프로 우아함과 고상함을, 칼라의 주름 장식으로 장래의 대공비에 걸맞은 위엄과 품격을 표현했지요. 그리고 또 이 장식품의 디테일을 보시면…….”
로잘린 부인은 옆에서 드레스들을 차례차례 설명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건…… 패션쇼잖아?’
응접실에 앉아서 무도회용 드레스 패션쇼를 감상할 수 있다니! 이것이 블랙웰의 재력인 걸까?
놀란 나는 옆에 앉아 있는 녹턴을 흘끗 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감흥도 없는 것 같았다.
그저 특유의 무심한 눈으로 드레스를 하나하나 훑어볼 뿐이었다.
수십 명의 무도회 복장을 한 모델들이 한자리에 모이니, 그야말로 응접실이 화려한 무도회장 같았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모델만 총 마흔 명이 넘는 듯했다.
응접실이 굉장히 넓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더 좁았으면 콩나물시루가 됐을 거다.
“마음에 드는 의상이 있으신가요?”
로잘린 부인이 나를 향해 미소 지으며 물어 왔다.
“어…….”
나는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원래 패션에는 특별히 조예가 없을뿐더러, 선택의 가짓수가 마흔 가지가 넘었으니까.
여기저기에서 온갖 드레스를 입은 온갖 모델들이 자신의 옷을 자랑하니, 눈이 빙글빙글 돌아갈 것 같았다.
대체 어느 옷부터 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주저하고 있자니, 녹턴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 너, 너, 너, 너.”
그는 턱을 괸 채 눈짓으로 모델 몇 명을 가리켰다.
“영애의 체형에 어울리지 않아. 나가.”
그의 말에 선택된 다섯 명이 우르르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너무 권위적인 어투여서 걱정했지만, 로잘린 부인도, 모델들도,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모델들을 계속해서 추려냈다.
“거기, 너, 너, 너도 나가. 영애의 머리 색과 그런 색은 안 어울려.”
“너와 너, 너, 너. 그래, 너도.”
“그래, 거기 너. 그쪽도.”
그렇게 한참을 골라내고 나니 마흔 명이 넘었던 모델들은 어느덧 다섯 명밖에 남지 않았다.
선택지가 마흔 가지에서 다섯 가지로 줄어들자 훨씬 고르기가 쉬워졌다.
게다가 그는 패션에도 안목이 있는지 남은 다섯 가지 드레스는 마흔 가지 중 최고로 아름답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역시, 대공 전하께서는 안목이 있으시군요!”
로잘린 부인이 아부했으나, 녹턴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설명해 봐.”
그가 짧게 명령했다.
물론 로잘린 부인은 아까 모든 드레스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했지만, 마흔 가지 드레스에 대한 설명을 한꺼번에 들었으니 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참이었다.
“오, 물론이지요. 우선 여기 이 드레스는 샤흐탕 지방의 공단을 재료로 하여…….”
로잘린 부인은 긴 설명을 다시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힘들거나 짜증 나는 기색 하나 보이지 않고 활짝 웃었다.
과연, 프로 중의 프로라고 할 만했다.
그녀의 설명에서 정확한 지명이나 장인의 이름 같은 것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하나하나 내 연봉 정도는 우습게 느껴질 최고급의 옷들이라는 것 정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중 최고는 바로 마지막 드레스였다.
짙은 쪽빛을 띤 그 드레스는 그저 조명을 받는 것만으로도 오색으로 화려하게 빛이 났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했더니, 답은 바로 로잘린 부인의 설명에 있었다.
“이 드레스는 마이바흐의 밤하늘을 컨셉으로, 별이 가득한 찬란하게 빛나는 밤하늘을 형상화하였답니다. 1,690개의 다이아몬드와 70개의 진주로 장식하여 샹들리에 아래에서 화려하게 빛난답니다. 셔우드 영애를 무도회장에서 제일 빛나는 사람으로 만들어 드릴 거예요.”
차를 마시며 설명을 듣던 나는 차를 반쯤 뿜어 버릴 뻔했다.
뭐, 다이아몬드가 어쩌고 진주가 어쨌다고? 전생에 천연 다이아몬드라곤 단 한 개도 착용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다이아몬드가 한 개도, 두 개도 아니고 1,690개라니!
‘미친 거 아니야! 저거 입고 다니다가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난 나를 용서하지 못할 거야.’
생각만 해도 등골이 시려서 찻잔을 든 손이 다 떨릴 정도였다.
‘저 드레스는 절대 안 돼. 아무래도 다른 걸 골라야겠어!’
그런데 그런 설명을 듣고도 녹턴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 같았다.
1,690개의 다이아몬드가 두렵지 않은 건지, 두렵지 않은 척하는 건지, 무심한 얼굴로 그가 나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한번 입어 보지?”
“네?”
나는 입을 딱 벌렸다.
“무, 무, 무엇을…… 서, 설마 저 마이바흐 드레스를요?”
녹턴은 벌벌 떨고 있는 나를 왜 그러냐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무 비쌀 것 같아서 부담스럽다고 하면 블랙웰의 명성에 먹칠하는 일이겠지? 적당히 둘러대서 거절하자.’
그렇게 생각한 내가 얼버무리려던 찰나였다.
“진짜 이뿌겠다!”
미하일이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손뼉을 짝 쳤다.
“라리아, 얼른 입어 바!”
“얼른! 빨리!”
두 아이가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니, 나는 도저히 그 앞에서 거절의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입안이 바싹바싹 타올랐다. 눈앞이 하얘지는 것 같았지만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요.”
녹턴이 로잘린 부인을 보며 물었다.
“샘플이 한 벌 더 있겠지?”
“네, 물론이죠! 자, 셔우드 영애. 이쪽으로 오세요.”
결국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기분으로 옆 방으로 가서, 로잘린 부인과 하녀들의 손에 드레스로 갈아입혀졌다.
드레스를 입는 동안에도 나는 다이아몬드가 한 알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떨어져서 마루 틈으로 굴러가 버려 사라지지 않을까 극히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옷을 다 입은 뒤 나는 다시 응접실로 돌아갔다.
“어, 어때요?”
보이진 않아도, 얼굴이 꽤 화끈화끈한 걸 보니 내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녹턴도 아이들도 잠시 놀란 얼굴로 말이 없었다.
몇 초가 지나서야 아이들이 환성을 질렀다.
“우와아!”
“라, 라리아……!”
눈이 등잔처럼 커다래진 자네트와 미하일이 이쪽을 향해 몸을 기울이는 것이 보였다. 미하일이 즐거운 듯 손뼉을 쳤다.
“너무, 너무 예뻐!”
“딴사람 가타.”
자네트가 상기된 얼굴을 쿠션으로 가렸다.
서민의 간을 콩알만 하게 만드는 위험한 옷인 것은 확실했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반응이 좋은 걸 보자 기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괜히 온몸이 비비 꼬이는 것만 같았다.
“저, 전하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가 녹턴을 돌아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귀와 목이 분홍색이 된 것이 손 아래로 뻔히 보였다.
“이걸로 하지.”
“네에?”
“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완성품은 다음 주 화요일에 저택으로 배달해 드릴 거고요, 이건 영수증…….”
“아, 아니, 아니, 잠깐만요!”
신이 나서 상황을 진행시키는 로잘린 부인을 내가 가까스로 저지했다.
“다, 다른 옷들도 입어 보면 안 될까요? 어, 어쩌면 더 잘 어울리는 게 있을 수도 있잖아요!”
로잘린 부인이 잊고 있었던 것을 깨달은 듯 말했다.
“어머! 확실히 그렇네요. 그럼 그렇게 하시겠어요?”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녹턴을 보았다.
그는 그사이에 안색을 정돈했는지, 얼굴이 다소 연핑크색이긴 했지만 평소와 같은 무심한 얼굴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영애의 말도 일리가 있군.”
나는 그의 생각이 변하기 전에 하녀들과 함께 서둘러 옆 방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나는 다섯 벌의 드레스를 전부 입었다.
아까의 그 마이바흐가 어쩌구 하는 다이아몬드 드레스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하나하나가 정말 값진 고급품이었다.
“어, 어때요? 아까 그 드레스도 괜찮긴 하지만, 이 드레스가 더 잘 어울리지 않나요?”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내가 필사적으로 주장했다.
“이것두 이쁘다.”
미하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까 그게 더 조은데.”
자네트가 꿍얼거렸다.
녹턴은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그런 내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관찰하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확실히, 이것도 나쁘지 않군.”
“그, 그렇죠? 그럼 역시, 주문은 이쪽으로 하시는 걸로?”
내가 희망을 품고 물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나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은 것이었다.
“다섯 벌 전부 주문하지.”
“아하! 그러면 되는구나!”
“네에에? 잠깐, 잠깐만요!”
아이들의 즐거워하는 목소리를 내가 다급하게 잘랐다.
아니, 댁이 손이 큰 건 알지만, 그 설정을 내가 넣기는 했지만! 굳이 무도회용 드레스를 다섯 벌이나 살 필요는 없잖아!
내가 당신과 무도회에 다섯 번이나 갈 것도 아닌데!
나의 서민적인 간덩이는 그의 말도 안 되는 재력과 담력을 도저히 견뎌 낼 수가 없었다.
나는 타임을 선언하고, 그를 옆 방으로 불러냈다.
“대체 뭐가 불만이지?”
내 소극적인 태도를 느끼고 있었는지, 그가 미간을 좁혔다.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 아니 그게…… 저, 저 드레스는 제 분수에 맞지 않아요. 저는 좀 더…… 평범한 걸 생각했다고요.”
“뭐, 분수?”
“네! 드레스가 이렇게까지 비쌀 필요는 없어요. 저는 그저, 구색만 맞추는 정도면 충분했단 말이에요.”
순간 녹턴의 눈썹이 꿈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는 화가 난 듯 내 얼굴 옆으로 팔을 뻗어 벽을 짚었다. 녹턴은 내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분수에 맞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헛소리지? 블랙웰 대공의 여자 이상으로 이 드레스들이 격에 맞는 인간은 없다.”
그가 입에 담은 단어 하나가 철렁, 하고 내 가슴속에 내려앉았다.
블랙웰 대공의 여자. 그렇다.
나는 지금 그저 라리아 셔우드가 아니었다.
표면적이지만 블랙웰 대공의 약혼녀로서, 그의 가문에 반쯤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즉 내가 입고 걸치는 것은 블랙웰의 명성과 품격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게다가 무도회 내내 나를 데리고 다녀야 할 그의 심정은 어떻고?
황제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권력자이자 대공국의 주인인 그이니, 아주 잠깐 데리고 다닐 표면적 약혼자라고 해도 대충 입은 사람을 데리고 다니기는 싫을 것이다.
그제야 나는 그의 심정을 깨달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대답했다.
“알았어요.”
“…….”
녹턴은 그런 내 얼굴을 유심히 내려다보다가, 등을 돌려 응접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가 열어 주는 문을 통해 응접실로 돌아간 나는, 녹턴이 다섯 벌의 드레스 값을 치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마이바흐 드레스의 샘플을 바라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1,690개의 다이아몬드 중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수밖에.’
그런데 드레스로 끝이 아니었다. 드레스는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드레스에 어울리는 구두, 장갑, 머리 장식, 액세서리…… 구매해야 할 것들은 끝도 없었다.
그중 60개의 작은 다이아몬드로 만든 체인을 1개의 커다란 다이아몬드에 엮은 목걸이는 걸었더니 목이 다 아플 정도였다.
블랙웰의 이름에 먹칠을 할 순 없으니, 나는 녹턴이 그 모든 물건들을 주문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만 봐야 했다.
이번 무도회를 위해 구입한 의상과 액세서리들의 전체 가격은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들으면 내 간이 떨어질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한편 이 모든 쇼핑 과정을 구경한 자네트와 미하일은 몹시 들떠 보였다.
“라리아, 라리아. 우리 옷은 언제 사?”
미하일이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
“나는 무도회에서, 아~ 주 높은 모자를 쓸 거야! 천장에 닿을 만큼!”
자네트가 신이 나서 천장을 가리켰다.
그제야 나는 이 아이들이 한 착각을 깨달았다.
이 아이들은 자신들도 무도회에 가는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어쩔까. 아이들을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설명을 해 주어야만 했다.
“나 무도회에서 라리아랑 춤출래!”
“나두!”
아이들은 사교댄스를 흉내 내는 건지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나는 춤을 추는 두 아이를 붙잡고 눈높이를 맞추곤 이렇게 말했다.
“공녀님, 공자님. 두 분은 저와 함께 무도회에 못 가요.”
“뭐어? 왜애?!”
“무도회는 16살에 데뷔를 치른 사람만이 갈 수 있거든요. 공녀님, 공자님은 이제 5살이잖아요?”
아니나 다를까, 내 말에 아이들은 큰 충격을 받은 것만 같았다. 무도회에 갈 꿈에 부풀어 있던 아이들의 얼굴엔 실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치마안…… 나두 가구 싶은데…….”
“시러! 나두, 나두 무도회! 무도회 갈 거야아아아악!”
미하일은 시무룩한 얼굴로 울먹거렸고, 자네트는 바닥에 드러누워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나는 실망한 두 아이를 달래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공녀님, 공자님도 11년 후에는 무도회 가실 수 있겠네요.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그치만, 지금 가구 싶은데…….”
“치사해! 왜 라리아만! 불공평해! 나두 드레스! 목걸이! 모자아아아아!”
하지만 아무리 달래도 두 아이 모두 진정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거 아무래도 말로는 안 되겠는걸.’
잠시 고민하던 나는 두 아이가 떼 부리는 말을 유심히 듣기 시작했다.
“나두, 아버지처럼 입구 춤추고 시픈데에…….”
“모자! 모자 쓸 거야아아아악!”
아이들이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듣던 나는 깨달았다. 두 아이가 제일 관심이 있는 부분은 아무래도 ‘옷’인 모양이었다.
아마 이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무도회란 ‘어른들이 근사한 옷을 입고 춤을 추는’ 곳이리라.
내 머릿속에 번득이는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옷을 입는 것을 좋아하지.’
아이들이 어른들의 옷, 장신구 등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는다.
이것은 어른의 생활양식을 학습하는 아이들의 발달과정 중 하나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든 제국이든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떼쓰는 아이들을 쩔쩔매며 달래던 하녀들을 붙잡고 부탁했다.
“나와 전하의 드레스룸에서 옷과 모자, 신발을 가져다줄래? 낡았거나 거의 입지 않는, 비싸지 않은 옷으로 부탁해.”
“네, 네!”
하녀들은 부리나케 달려 나가더니 상자에 온갖 옷, 장신구를 한가득히 담아 왔다.
나는 아이들의 눈앞에서 그것들을 꺼내 보였다.
“공녀님, 여길 보세요! 갈색 모자네요. 깃털도 달려 있어요. 정말 예쁘네요, 그쵸?”
“무도회! 모자아아……! 응?”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던 자네트가 관심을 보이며 몸을 일으켰다. 자네트의 보라색 시선은 드레스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모, 모자…….”
“그래요, 모자예요. 어디, 한번 써 보실래요? 많이 크긴 할 테지만, 제가 잡아 드릴게요.”
얼굴이 씰룩이더니, 자네트가 활짝 웃었다.
“조아!”
하녀들은 센스 좋게 아이들이 들여다보기에 딱 좋은 크기의 거울도 가지고 왔다.
자네트는 모자를 쓰곤 거울에 모자를 쓴 자신의 모습을 요리조리 비춰보았다.
“나 어때?”
신이 난 자네트의 입꼬리는 거의 귀에 걸릴 것 같았다.
‘어때라고 물어 봤자…….’
내가 뒤에서 잡아 주고 있는데도 모자는 너무 커서 자네트의 코까지 내려왔다.
코까지 내려오는 큰 모자를 뒤집어쓴 채 신이 난 모습이라니!
너무 귀엽고 우스워서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나는 간신히 눌러 참았다.
나는 웃는 대신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어머, 공녀님. 모자가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히히.”
자네트는 히죽거리더니 또 다른 모자를 찾기 시작했다.
“라리아, 나두! 나, 아버지 옷 입고 시퍼.”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하일이 내 팔에 매달렸다. 나는 상자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좋아요. 공자님은 어떤 옷을 드릴까요? 연미복? 가운? 아니면…….”
미하일이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승마복!”
나는 상자에서 승마용 검은색 재킷과 하얀색 바지를 찾아냈다.
녹턴의 체격이 워낙 큰지라, 그의 바지는 밑단을 아무리 접어도 미하일이 입기에는 정말 너무 컸다.
미하일이 그걸 입은 모습은 바지를 입었다기보다는 포대 자루를 입은 것 같아 보였다.
“와! 이랴, 이랴! 히히히힝!”
하지만 맞지 않는 옷이라도 미하일은 무척 기뻐 보였다.
저렇게 큰 옷을 입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지 궁금할 정도로 말 타는 시늉을 하며 폴짝폴짝 온 방 안을 뛰어다녔다.
“공자님, 발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여러 명의 하녀가 지켜보고 있는 데다가 아이들 방은 아주 두꺼운 카펫을 깔아 둬서 넘어져도 다칠 염려는 없지만.
그래도 조심은 아무리 해도 과하지 않으니까.
나는 상자를 거꾸로 들어 올려 탈탈 털었다.
그 안에서 온갖 장신구들이 쏟아져 나왔다.
시계, 구두, 넥타이, 팔찌, 지갑, 미하일 정도는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여행용 서류 가방까지…….
“공녀님, 공자님. 구두도 한번 신어 보실래요?”
“조아!”
나는 아이들을 위해 구두를 한 켤레씩 바닥에 늘어놓았다. 원하는 것을 직접 신어 보고 고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도 넘어질 수 있으니 굽이 낮은 것만 골라 주어야겠는걸.’
나는 발뒤꿈치가 잘 까지기 때문에 높은 구두를 좋아하지 않아서 대부분이 굽이 낮은 게 다행이었다.
자네트와 미하일은 신이 나서 구두를 한 켤레씩 발에 꿰었다.
“라리아, 이거 봐, 이거!”
미하일이 다급하게 부르는 말에 내가 고개를 돌렸다.
미하일은 녹턴의 검은색 옥스퍼드화를 신고 뒤뚱뒤뚱 걷고 있었다.
“어때? 나, 머쪄? 아버지 가태?”
포대 자루 같은 승마바지를 입고 항공모함 같은 구두를 신은 채 걷는 꼬맹이의 모습이라니!
솔직히 멋있다고 하면…… 선의의 거짓말일 것이고, 너무 귀여워서 끌어안고 마구 깨물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귀여운 아이를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게 뭐가 어려운 일이겠는가?
“어쩜, 공자님, 너무 멋있으세요! 위엄이 넘치시는데요.”
“헤헤헤.”
미하일은 뺨을 능금빛으로 물들이고 수줍게 웃었다.
“라리아, 나, 나중에 크면 아버지처럼 되고 시퍼.”
“와, 정말요? 대공 전하께서 아시면 정말 좋아하시겠는걸요.”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미하일이 녹턴을 무서워할 때는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이것도 다 아이들이 녹턴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고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됐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나는 새삼 보람을 느꼈다.
내가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자 미하일은 기쁜 듯 헤헤 웃었다.
“공자님, 대공 전하가 좋으세요?”
“웅! 아버지는 정말 머쪄.”
그가 멋있는 건 사실이긴 하지만, 너무 까칠하단 말이지.
미하일만의 순수함과 다정함은 잃지 않았으면 좋겠는 건 나의 과도한 욕심일까?
그렇게 말한 미하일은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내게 눈높이를 맞춰 달라는 뜻의 손짓을 했다.
내가 허리를 숙이자, 미하일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건…… 비밀인데. 그래두 난 라리아가 더 조아.”
윽, 이젠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아유! 예뻐라. 공자님, 어쩜 이렇게 귀여운 말만 골라 하실까?”
“으아! 간지러어!”
나는 미하일을 덥석 끌어안고 그의 생크림 같은 볼따구에 마구 뽀뽀를 날리기 시작했다.
미하일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내게 안겼다. 따뜻하고 보들보들한 느낌과 함께, 달콤한 우유 향 같은 아기 냄새가 났다.
그때였다.
“모두! 이거 바!”
자네트의 목소리였다. 나와 미하일은 함께 자네트를 돌아보았다.
그랬더니…….
자네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옷으로 치장한 채 우쭐한 얼굴로 서 있었다.
두 손을 허리에 올려놓은 위풍당당한 모습이, 자신의 패션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거기까진 좋았다. 한데 문제는…… 자네트의 패션이었다.
자네트는 연두색 보닛을 두른 채 그 위에 갈색 깃털 모자를 쓰고, 그 위에는 커다란 분홍색 머리핀을 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몸에는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채 파란색 스카프를 두르고, 양쪽 발엔 검은색 구두와 흰색 구두를 짝짝이로 신고 있었다.
정말이지 아방가르드하고 미래지향적인 패션 감각이 아닐 수 없었다. 과연, 블랙웰의 장녀!
“어때?!”
자네트가 뿌듯하게 말했다.
“아흑…… 크크크큭…….”
“어흐흑…….”
“푸훗, 으흑, 으흐흑…….”
시선을 조금 옮기자 하녀들은 이미 초토화 상태였다.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것이 보였지만 그 노력은 별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블랙웰에서 두 번째로 높으신 분인 소공녀님을 상대로 맘껏 웃을 수도 없고…… 하녀들은 웃지 못해 거의 흐느끼는 중이었다.
물론 나도 비슷한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그나마 웃음을 참는 일에 능했다.
“……와…… 공녀님, 정~ 말 패션 감각이 독창적이시네요! 시대를 한 20년은 앞서간 것 같은걸요! 나중에 어른이 되시면 사교계의 패션을 선도하시겠어요! 제국의 패션리더! 최고!”
“히히힛.”
내 칭찬에 자네트는 뿌듯한 얼굴로 한껏 턱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난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공녀님도 언젠가는 알게 되시겠지. 예쁜 색깔을 모두 모아 놓는다고 최고로 예뻐지지는 않는다는 걸 말이야…….’
자네트가 예쁜 색깔을 모두 모아 놓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때가 오면, 나는 흐뭇할까? 아니면 아쉬울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그 모습을 볼 수는 없겠지만. 새삼 씁쓸해졌다.
나는 자네트의 오늘의 귀여운 모습을 실컷 봐 두고, 평생 잊지 않기로 결심했다.
자네트에게도 뽀뽀 귀신이 되어 어마어마한 양의 뽀뽀를 해 준 건 물론이고 말이다.
“무도회니까 춤춰야지, 춤!”
내 뽀뽀를 받고 기분이 좋아진 자네트가 씩씩하게 말했다.
“조아!”
누나의 말이라면 뭐든 따르는 미하일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두 아이는 손을 맞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도저히 혼자만 볼 수가 없어서, 나는 하녀 한 명을 붙잡고 부탁했다.
“대공 전하를 좀 모셔와 줄래? 이 모습을 보시면 분명 좋아하실 거야.”
“그럴 필요는 없다.”
이크, 이 사람도 참, 양반은 못 된다니까!
나와 하녀들은 깜짝 놀라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알고 나타난 건지, 간편한 베스트 차림으로 소매를 접어 올린 녹턴이 문가에 기대 서 있었다.
“전하!”
나는 반갑게, 하녀들은 깜짝 놀라서 그를 불렀다.
하녀들은 여전히 그가 무서운 모양인지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진 채로 후다닥 벽 쪽으로 붙어섰다.
녹턴은 그런 하녀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내게 눈인사를 하곤 춤추는 아이들을 흘끗 보았다.
“……다들 꼴이 왜 저렇지?”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픽 웃으며 그의 팔뚝을 건드렸다.
“귀엽잖아요?”
녹턴은 아이들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혼잣말했다.
“이 모습을 보면 블랙웰의 시조들이 무덤에서 뛰쳐나오겠군.”
하긴, 그럴지도 모르겠다. 블랙웰은 그 괴물적인 능력과 광증으로 시초부터 경외받았고, 모두가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과 위엄은 블랙웰이 통치하는 방법이었고, 또 하나의 힘이었다.
어린 시절에조차 이런 여유나 놀이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던 녹턴의 가정환경을 생각하면,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렇지만…….
“……블랙웰이지만 아이들인걸요.”
나는 아이들을 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믿고 있다. 모든 아이들은 즐겁고, 행복해야만 한다고.
나도, 녹턴도, 그 행복이 허락되지 않은 채 자란 사람들이지만. 우리 외의 다른 아이들은 다르기를 바란다.
그 마음이 전해진 걸까? 녹턴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옆얼굴에 와 닿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언제나처럼 강렬했지만, 그 눈빛은 적대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의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런가.”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계속 춤추는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 * *
아이들의 무도회가 마무리되고, 이젠 어른들의 무도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나는 댄스 수업과 사교 예절 수업을 마무리 지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대공 전하. 그리고 셔우드 백작 영애.”
수업의 마지막 날, 춤 선생님인 버넷 자작 부인이 나와 녹턴에게 인사했다.
“자작 부인도 수고했습니다.”
“뭘요, 백작 영애께서 실력이 일취월장하셔서 가르치는 입장에서 즐거웠답니다.”
두 사람이 비교적 온화한 분위기로 대화하는 것이 낯설어 보였다.
‘녹턴도 선생님한테는 존댓말을 쓰는구나…….’
하지만 감명받을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곧 자작 부인은 대공저를 떠나는 마차에 올랐다.
“버넷 자작 부인.”
내가 그녀를 불렀다. 다시 불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자작 부인이 놀란 눈으로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제가 뭔가 빼먹은 거라도 있나요?”
“아하하, 그런 게 아니라요. 잠시만요.”
나는 하녀들에게 미리 준비했던 것을 가져오게 했다. 하녀들은 곱게 포장된 서류 가방만 한 상자를 가져와 버넷 부인에게 건넸다.
“이건 동방에서 들여온 인삼이라는 약초예요. 냉한 몸에 열이 돌게 하고, 건강을 보양하는 데 아주 좋대요. 그동안 잘 가르쳐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어머나, 어찌 이리 귀한 걸…….”
버넷 부인은 깜짝 놀라 안경을 고쳐 쓰곤 상자를 열어 보았다. 안에는 내 손가락 두 개만 한 인삼이 세 뿌리 들어 있었다.
그간 버넷 부인에게 춤을 배우면서 느낀 건데, 그녀는 손이 매우 찼다. 여성들 중 혈액순환이 안 되어 수족냉증이 있는 사람은 아주 흔했다.
특히 버넷 부인과 같은 갱년기의 여성 중엔 더더욱.
‘갱년기 여성에게 인삼이 좋다고 들은 적이 있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
물론 이걸 사느라 선지불 받은 내 연봉의 사분지 일이 날아가긴 했지만…… 원래라면 정보 길드에 써야 했을 돈도 돌려받았으니 이제 돈 쓸 데도 없고. 좋은 사람에겐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 원래 내 신조였다.
버넷 부인은 상자를 닫았다.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그녀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이런, 백작 영애. 전 정말로……. 백작 영애처럼 귀하신 분께 이런 대접을 받을 줄은 생각도…….”
그녀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기 시작했다.
버넷 부인에게는 내가 아주 높은 사람으로 느껴졌나 보다. 하긴, 나는 녹턴의 약혼녀라 장래의 대공비로 알려져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무리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진짜 약혼도 아닐뿐더러, 나는 진짜 귀족조차 아니니까.
현대 한국에서 살아온 세월이 이곳 제국에서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긴 나에겐 모두가 동등한 사람인 게 당연한 일이었다.
버넷 부인은 훌쩍이다가 손수건에 팽, 하고 코를 풀었다.
“백작 영애 같은 분을 가르치게 된 건 제 20년 선생 인생에서 제일 영광이었어요.”
아니, 이건 또 무슨 말이람.
‘저번에 듣기로는 버넷 부인은 이웃 나라의 왕족들까지 가르쳤던 걸로 대단히 유명한 사람이던데…….’
다소 민망해진 내가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이, 부끄럽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야말로 버넷 부인께 춤을 배워 기뻤던걸요.”
“어쩜, 이렇게 겸손하고 다정하시기까지.”
내 말이 단순한 겸손인 줄 알았던 건지 버넷 부인은 오히려 더더욱 강하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백작 영애께서는 정말 훌륭한 대공비가 되실 거예요. 머지않아, 영애께서는 모든 제국 여성들의 귀감이 되실 거라고요. 장담할 수 있어요.”
유감이지만 내가 정말로 대공비가 될 일은 영영 없을 텐데 말이다.
녹턴과 파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버넷 부인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니 괜한 죄책감에 가슴 한구석이 쿡쿡 쑤셨다.
‘기분 탓일까? 왠지 버넷 부인에게서…… 시몬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은데.’
버넷 부인이 시몬처럼 나에 대한 이야기를 소문내고 다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나마 시몬이 내 칭찬을 하고 다니는 것은 대공저 안에서 그쳤지만, 버넷 부인이 사교계 전체에 내 얘기를 퍼뜨리고 다닌다면…….
으윽! 생각만 해도 창피했다.
그렇게 선생님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무도회 전날.
무도회 전날이지만 언제나처럼 녹턴에게 아이 대하는 법을 가르치러 갔는데, 집무실에서 만난 그는 전혀 예상 밖의 제안을 했다.
“오늘은 무도회의 예행 연습을 하지.”
녹턴이 책상 위의 영상구를 툭툭 쳤다. 그러자 영상구에서 녹화된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악단이 춤곡을 연주하는 영상이었다. 영상구에서 꼭 악단이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은 생생한 연주가 흘러나왔다.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엔 없었다.
‘언제 이런 것까지 다 준비했담?’
하여간에 은근히 꼼꼼한 남자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물었다.
“공녀님, 공자님을 모셔올까요?”
춤 수업 때는 늘 아이들이 참석해서 평가(?)해 주었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그러나 녹턴의 반응은 생각 외로 칼 같았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조금 다급하다 싶을 정도로 서둘러서 그가 말했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하고는, 그가 부연설명을 했다.
“……우리끼리만 해서, 집중해서 서둘러 끝내도록 하지.”
하긴, 집중해서 빨리 끝내기엔 사람이 적은 게 좋으니까. 나는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번 기본 동작부터 혼자 해 보도록.”
“네.”
나는 순순히 대답하곤 기본 스텝부터 선보이기 시작했다. 녹턴은 책상에 기대선 채 내가 춤을 추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앞에서 선보인 춤은, 내가 생각해도 꽤 괜찮았던 것 같다.
나는 운동 신경이 원래 좋은 데다가, 그동안 정말 열심히 연습했으니까.
빙글빙글 돌 때마다 그의 보라색 눈과 마주쳤지만 싫지 않았다. 땀이 흐르는데도 괜히 웃음이 나왔다.
‘처음에는 저 시선이 너무 차갑고 따가워서,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이 느껴졌는데.’
그때 느꼈던 느낌이 이상할 정도로, 지금 느끼는 그의 시선은 간지럽지만 따뜻했다.
그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무뚝뚝한 얼굴도 지금은 꽤나 친근해졌다.
음악은 점점 고조되고, 내 기분도 들뜨고 있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지켜보기만 하실 건가요? 예행연습이니까 같이 춰야죠!”
그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픽 웃곤 결국 내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우리는 음악에 맞추어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두 사람만의 왈츠. 서로의 눈동자 속에는 서로뿐이고, 이 순간을 공유하는 건 우리 둘뿐인…….
그런데 음악이 최고로 고조된 그 순간이었다.
남자가 여자를 강하게 당기고, 여자가 빙글빙글 돌아 그의 품에 안기는 동작이었다.
내가 그의 품에 안길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그가 그대로 우뚝 멈추어 버렸다. 어떤 이유도 전조도 없이.
음악은 계속해서 흘러갔고, 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로 멀뚱거렸다.
“전하……?”
얇은 여름용 와이셔츠와 베스트만을 입고 있는 그의 품은 뜨거웠고, 빠른 고동이 느껴졌다.
격렬한 운동으로 인해 빨라졌던 나의 심맥은 더더욱 미친 듯 박동하기 시작했다.
나보다 한참 위에 있던 그의 얼굴이 천천히 내려왔다. 머리카락 위로 그의 숨결이 서서히 내려앉더니…….
그가 내 머리 위에 입술을 포갰다.
낮은 숨소리. 단단하고 뜨거운 팔뚝.
예상치 못하게 내려앉은 입술의 감촉. 머리카락 위로도 그의 입술이 생각보다 부드럽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일분일초의 시간이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의 숨소리도, 심장의 고동도 너무나 많은 의미를 가지고 내게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그는 잠시 뒤에야 입술을 떼고,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나는 여전히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손으로 꾹 누르면서 그를 보았다.
나는, 당연히 그가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다.
실수였다고. 나를 끌어안은 채로 멈춰 선 것도, 내 머리 위에 입 맞춘 것도…… 뭔가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거라고.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
그의 가슴이 천천히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의 아름답고 강렬한 보라색의 눈은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응시했다.
그 눈에는 불탈 듯이 뜨거운 욕망과 어떠한 충동이 가득했다.
가슴이 너무 떨려서 견딜 수 없었다.
“아, 저. 죄, 죄송해요. 그, 급한 일이 있는 걸 깜빡했어요!”
나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당한 변명을 주워섬기며 집무실을 나와 달려갔다.
나는 복도를 달리고 또 달렸다. 숨이 차올랐지만 그래도 계속 달렸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지 않으면, 그의 눈빛이 떠올라서. 그의 부드러웠던 입술의 감촉이 자꾸만 떠올라서…….
……내가 뭔가 심각한 착각이라도 해 버릴 것만 같아서…….
한참을 달리고서야 나는 어딘지도 모르는 복도에서 멈추어 섰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나는 벽에 기대어 헐떡였다.
심장이 난폭하게 뛰어 댔다. 온몸의 피가 용광로처럼 들끓는 것 같았다.
‘착각하면 안 돼, 라리아.’
나는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그가 나한테 잘해 주는 건, 그냥 내가 아주 쓸 만한 인재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가 다정한 사람이기 때문이야. 그러니 이런 일에 두근거려서는 안 돼. 왜냐하면…… 왜냐하면…….’
나는 불타오르는 것만 같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벽에 기댄 채로 천천히 주저앉았다.
‘그에게는 여주인공이 있는걸.’
8개월 뒤면, 그에게 약조된 운명의 사랑이 찾아올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나에게 다정한 것도 이제 8개월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나는 착각하지 말아야 했다. 이 정도 일에는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강해져야만 했다.
더욱 큰 상처를 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내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는 데에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몸의 피로보다 마음의 피로가 훨씬 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