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주의 복지를 책임지겠습니다 2권
(7)
* * *
그리고 지금.
“……셔우드 백작 부인과 영식이 셔우드 영애를 만나러 왔습니다.”
하늘이 머리 위로 추락하는 것만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그녀가 셔우드로 돌아가 버리면 어떻게 하지.’
그녀가 나타난 뒤로 채도가 생겨나고 색채가 드러났던 세계가, 도로 무채색의 무저갱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셔우드 가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고작 몇 번의 회유 정도로 그들에게 돌아가지는 않으리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족이었다.
가족의, 혈연의 끈은 강하다.
적어도 만난 지 세 달여밖에 되지 않은, 사용인과 고용주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자신과의 관계에 비하면 그럴 것이다.
‘만일 그녀가 셔우드의 설득에 넘어가서, 나와 아이들을 버리고 돌아가 버린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그녀의 찬란한 색채가 없는 블랙웰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녀가 돌보고 있는 아이들은 물론, 자신마저도.
그녀가 떠나면 잃을 것은 너무나 많았고, 그녀 없이도 괜찮아질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녀가 사라지면, 그는 간신히 되찾은 세계의 색깔을 도로 영영 잃어버리고 말 것 같았다.
그녀가 사라진 블랙웰에서. 그 무채색의 감옥에서.
‘안일했다.’
녹턴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지난번 광장에서의 일 이후로 셔우드가의 인간들이 그녀를 단념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한심할 정도로 천진한 생각이었다. 그가 그녀를 포기할 수 없는 만큼, 그들이 그녀를 포기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인데.
그에게 가치 있는 만큼, 그녀가 누구에게나 가치 있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인데.
‘그녀를 셔우드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녹턴은 이를 악물며 생각했다.
‘이제껏 그래 왔듯이……!’
늘 그랬듯 순수한 호의로. 그녀를 위한 선의로.
아니,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런 것은 전부 핑계였다. 이건 ‘그녀를 위한’ 게 아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욕망일 뿐이다.
그녀를 계속해서 곁에 두고 싶은 마음. 그녀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 무슨 짓을 해서라도 붙잡아 두고, 놓아주지 않고 싶은…….
‘한심하기 그지없군, 녹턴 블랙웰.’
녹턴은 희게 질린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그녀가 가족들과 화해해서 셔우드에 돌아간다면 진심으로 축하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도, 그녀가 돌아가는 것을 결코 기쁘게 생각할 수 없는 자신이 있었다.
사실은 그녀가 셔우드와 화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계속해서 셔우드를 미워하기를 바랐다. 그녀와 같은 피를 나눈 가족인데도 불구하고.
“하.”
헛웃음을 쳤다. 이리도 한심한 자신에게, 지독한 실망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괴물이었고 패륜아였다.
모두의 두려움과 멸시를 받는 자신이 지금보다 더 추악해져 봤자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이렇게 해서라도 그녀를 붙잡아 둘 수 있다면, 그녀를 자신과 아이들의 곁에 있게 만들 수만 있다면.
녹턴은 라리아를 붙잡아둘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거짓 약혼이라는 허술한 족쇄를 채워 놓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약혼은 당사자들의 의사에 따르는 것이니, 그녀가 가족들과 화해하고 셔우드로 돌아가고 싶어 하게 된다면 이 족쇄는 얼마든지 끊어질 수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녹턴은 그녀를 자신의 집무실로 호출했다.
“부르셨나요, 전하?”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내자 녹턴은 평온하던 심장이 가볍게 뛰는 것을 느꼈다.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일에는 익숙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냉정한 얼굴로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외근은 잘 다녀오셨어요?”
“언제나와 같지. 그건 그렇고, 영애.”
서론은 건너뛰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녹턴의 대화 방식에 라리아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와 3개월의 시간을 함께했을뿐더러, 그녀는 그의 창조주이니까.
“내가 왜 불렀는지 궁금하겠지.”
녹턴에 말에 라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음, 아이 대하는 법을 배우려고 부르신 거 아니었어요?”
그녀의 말에 녹턴은 가슴 속 어딘가가 잔잔하게 들끓는 것만 같았다.
우리가 그렇게나…… 공적인 일에 한정되어 있는 관계인 건가. 단순히 고용주와 사용인, 그뿐인 건가.
그런 감정은 드러내지 않은 채, 녹턴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준비해 둔 서류철 하나를 꺼내 한 손으로 내밀었다.
“기존 계약 기간이 반 이상 지났으니, 계약을 갱신하도록 하지.”
라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서류를 집어 빠르게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녹턴이 설명했다.
“6개월 계약에 3년을 추가하도록 하지. 봉급은…… 기존의 5배로 올려 주겠다.”
“네, 5배요?!”
라리아는 하도 놀라서 계약서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도 그럴 게, 그녀의 기존 봉급도 그녀 또래의 평범한 귀족 영애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손에 넣기 힘들 정도의 액수로, 아주 후한 편이었다.
그런데 그런 봉급을 5배나 올려주겠다니?
황실에서 일하는 상급 공무원들 중에도 이만한 봉급을 받는 자는 드물 것이다.
하지만 녹턴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3년 동안의 봉급 역시 전부 선지불하도록 하지. 어떤가?”
“그, 그건…….”
라리아의 눈이 팽팽 돌아갔다. 5배의 봉급을 3년 치나 선지불하겠다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수도의 대저택을 하나 구입해, 하녀들을 부리면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갈 만한 액수였다.
“하, 하지만…… 어째서 제게 그렇게까지 큰 제안을 하시는 건가요?”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한 질문이었다. 녹턴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영애의 양육법이 마음에 드니까. 또, 양육자가 자주 바뀌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오래 맡는 것이 안정적이겠지.”
고작 그런 이유로 봉급을 5배나 올려 주겠다고?
하지만, 좀 더 곰곰이 생각해 보니 타당한 이유인 것 같기도 했다.
전 양육자였던 몰리가 은퇴한 일로 많이 상심했던 아이들이 아닌가.
라리아 정도로 능숙한 양육자가 아니었다면 몰리를 잃어버려 상심한 아이들의 마음을 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유도 타당하고, 내게는 과분할 정도로 좋은 제안인 것 같은데…….’
하지만 라리아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니야. 9개월 후면 여주인공이 나타날 거야. 그때까지 내가 여기 있을 수는 없어. 아이들은 새엄마한테 익숙해져야 하니까.’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해피엔딩을 맞으면, 이물질은 빠져 주는 것이 예의였다.
더군다나 원래 목표가 대저택에서 사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냥 유치원만 차릴 수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결국 라리아는 계약서를 내려놓았다.
“죄송하지만, 이 연장은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뭐?”
표정을 잘 숨겨 오던 녹턴의 얼굴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설마 이 정도로 좋은 제안을 5분도 고민하지 않고 거절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한 번에 3년을 연장하는 건 너무 긴 것 같아요. 6개월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네요. 아, 물론 봉급은 올려 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녀의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라는 말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가족들과 화해하여 셔우드로 돌아갈 가능성을 상정하고 한 말인가?’
설마설마했지만, 그녀의 입으로 그녀가 셔우드로 돌아갈 가능성을 확인받은 기분은 비참했다. 속이 불쾌한 감각으로 뒤틀렸다.
녹턴은 가까스로 표정을 숨기곤, 기존의 계약서를 다시 서류철에 꽂아 넣었다.
“그렇다면 6개월만 연장하는 걸로 하지. 연장 계약 기간 동안의 봉급은 3배로 올려 줄 테니, 이후의 계약에 대해서도 잘 생각해 보도록.”
“정말요? 네, 감사합니다!”
라리아는 기쁜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의 밝은 얼굴을 마주한 채, 녹턴은 고심했다.
‘이걸로 9개월의 시간은 벌었군.’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최악의 경우, 그 9개월이 끝나자마자 라리아가 셔우드로 돌아가 버릴 수도 있었다.
‘내게 주어진 9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그것만은 막아야만 해.’
만일 계약으로 붙잡아 둘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써서라도.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녀가 블랙웰에 남아 있고 싶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다음 날, 아이 다루는 법을 가르치기 위하여 두 사람이 집무실에서 만났을 때 녹턴은 라리아에게 말했다.
“얼마 전에 셔우드가에서 무단으로 방문을 하려고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애를 만나기 위해서였다지.”
라리아는 조금 놀랐지만, 그 일을 그가 알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그가 없을 때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그가 이 집의 주인이니 집안사람 중 누군가는 그에게 보고를 했을 게 분명하니까.
이미 그가 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라리아는 순순히 대답했다.
“네. 셔우드 백작 부인…… 새어머니와 이복동생이 절 찾아왔었어요.”
녹턴은 그녀가 아직까지는 셔우드가의 설득에 완전히 넘어간 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셔우드가에 단호했던 그녀를 완전히 설득했을 만큼 셔우드에 기회가 많지 않았을뿐더러, 만일 그랬다면, 어제 그녀가 계약 연장에 동의하지 않았을 테니까.
녹턴은 혀를 찼다.
“영애도 곤란했겠군.”
라리아는 설마 그가 자신을 탓하려고 하는 건가 걱정했으나, 다행히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안도했다.
하나 그녀를 놀라게 만든 것은 그다음 말이었다.
“우리의 약혼 관계를 더 널리 알리는 게 좋을 것 같군. 셔우드가 영애를 완전히 단념하게끔 말이야.”
“네?”
그의 말은 타당했다. 그들의 약혼 관계가 더 널리, 강하게 인식될수록 라리아가 다른 가문의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어려워진다.
자연히 집안 자산으로서 그녀의 가치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나야 독신주의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상관없지만, 녹턴이 문제였다.
이 약혼 관계가 널리 퍼질수록 그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 어려워지는 만큼, 그 역시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 어려워지는 것이 당연했다.
라리아의 입장에서야 물론 고마운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도 점점 셔우드의 집착적인 접촉 시도가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셔우드에서 그녀에게 완전히 관심을 끊어 준다면 그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배려로 녹턴이 곤란해지는 것은 사양이었다.
“하지만……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라리아가 걱정스런 얼굴로 묻자, 녹턴이 픽 웃었다.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나. 나 역시 영애와 같은 독신주의니까.”
‘으음……. 그 독신주의, 나중에 여주인공을 만나면 깨지게 될 텐데…….’
라리아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그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 대신, 라리아는 이렇게 물었다.
“그럼, 약혼 관계를 더 널리 알리는 것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녹턴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함께 황실 무도회에 참석하도록 하지. 파트너로서 말이야.”
“네? 황실 무도회요?”
깜짝 놀란 라리아에게 녹턴이 말했다.
“그래. 7월 1일에 예정된 황실 무도회에 파트너의 자격으로 참석하도록 하지. 반년 만에 황실에서 주최하는 무도회이니 수도의 모든 귀족들이 참석할 거다. 우리의 약혼 사실을 모두의 머릿속에 각인시키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겠지.”
끽해야 신문을 통한 공식 발표 정도를 염두에 두고 있던 라리아의 생각보다 굉장히 본격적인 방법이었다.
‘함께 무도회에 참석하면,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 다정한 연인을 연기해야 하는 거 아냐?’
자신이야 정말로…… 상관없지만, 아니 오히려 이렇게까지 발 벗고 나서 주는 녹턴에게 고마울 따름이지만…….
그의 장래 연애사업이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나중에는 분명 후회하게 될 텐데.’
그가 자신과 보낸 시간을 후회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결국 라리아가 거절의 뜻을 밝히려는 그 순간…….
“참고로, 거절은 거절하지.”
녹턴이 아직 꺼내지도 못한 라리아의 말을 잘랐다.
“이건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다, 영애. 내가 영애의 고용인이라는 사실을 잊지는 않았겠지?”
“네? 세상에 이런 게 어딨어요!”
라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뜻이 이렇게까지 강경한 이상, 그녀가 어찌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사실, 그에게는 빚이 많으니만큼 그의 말을 거절하기가 뭐하기도 하고.
‘이런 오지랖 넓은 배려쟁이 같으니. 나중에 가서 후회하지나 말라구.’
라리아는 녹턴이 나중에 여주인공을 만나서 자신의 오지랖 넓었던 과거를 후회하면 그땐 실컷 놀려 주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녀의 책임도 없지 않으니, 둘 사이의 큐피트도 해 주고.
물론, 라리아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녹턴의 제안이 순수하게 그녀를 돕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그녀가 나의 약혼자라는 사실을 수도 모든 자들의 머릿속에 똑똑히 새겨 주도록 해야겠군.’
녹턴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 뒤에 그런 흑심을 숨기며 생각했다.
수도 내의 모두에게 그녀가 자신의 것, 블랙웰의 예속이라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다니.
죄책감과 묘한 고양감이 동시에 가슴을 두드렸다.
‘이것으로 그 누구도 감히 그녀를 탐낼 생각도 하지 못하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뱃속이 기묘한 감각으로 뒤틀렸다.
그것은 죄책감이었다. 녹턴은 자신의 이기심으로 인해 그녀의 미래를 망치는 것만 같은 죄악감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추악한 버러지가 되더라도, 훗날 그녀에게 원망을 듣게 되더라도…….
‘그녀를 반드시 손에 넣고 말 것이다.’
녹턴은 그렇게 마음을 굳히곤, 형형한 자색 눈동자 위로 눈꺼풀을 내려 앉혔다.
* * *
녹턴과 나는 함께 황실 무도회에 참석하기로 했지만,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무도회라면 춤을 춰야 할 텐데…… 내가 왈츠, 미뉴에트 같은 것을 어떻게 알겠어!’
아기 상어 율동이라면 자신 있지만, 진짜 귀족 영애도 아닌 내가 무도회에 어울리는 사교댄스를 출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사실을 늦지 않게 녹턴에게 고백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혹시 무도회에 참석해도 춤을 추지 않을 수 있을까요?”
내 말을 들은 녹턴은 조금 놀란 것 같았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이곳 제국에서 귀족 영애에게 사교댄스는 구구단과 같은 기본 중의 기본 소양이니까.
녹턴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영애는 무도회도 한 번 참석해 본 적 없나?”
“아…… 하하.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19살의 라리아가 무도회 한 번 안 나가 봤다는 것 역시 좀 심각한 문제였다. 민망하긴 했지만, 나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거짓말을 해 봤자 뭐가 나아지겠는가?
내 대답의 녹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입술이 옆으로 길게 찢어지며 악문 송곳니가 드러났다. 그의 자색 눈동자가 분노한 듯 허공을 향해 희번덕하게 빛났다.
“그 한심한 인간들…… 어떻게 제 자식을 이 지경까지……!”
그가 중얼거렸다.
그의 반응과 말로 미루어 보아, 셔우드가에서 나를 방치하다 못해 춤도 가르치지 않고 무도회도 한 번 안 보내고 집에서만 감금해 키운 줄 아는 모양이었다.
“아하하…….”
나는 몹시 어색해졌다. 그가 나를 위해 화내 주는 것은 기뻤지만…… 결국 이건 거짓말이었으니까.
그때였다. 그의 말이 고개 숙인 내 머리 위로 툭 떨어졌다.
“그런 집안에서 자라났으면서 아동 교육학 같은 학문은 용케 익혔군.”
나는 멋쩍게 대답했다.
“네, 뭐……. 저는 별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남는 시간 동안 서재의 책을 거의 다 읽었어요.”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특히 어린아이에 대한 건 읽고 또 읽었죠. 아이가 너무 좋았거든요.”
갑작스레 어린 시절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지냈던 그 날들. 외롭고, 따분한 고아원에서의 생활.
할 게 없어서, 이미 낱장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책들을 읽고 또 읽던 시절.
어릴 때 제일 좋아했던 것은 소공녀나 키다리 아저씨 같은, 외로웠던 어린아이가 결국 사랑을 받고 행복해지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머리가 굵어졌을 때는 내가 그 어린아이가 되겠다는 희망은 버렸다.
대신, 내가 어린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근처 공립 도서관에서 아동 교육학에 대한 책이란 책은 죄다 읽었다.
유치원 선생님이 되려면 공부를 잘해야 했기에,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고아원의 아이에게 사교육 따윈 사치였다. 꿈을 이루기 위해, 나는 모든 것을 오로지 내 힘으로 해내야만 했다.
녹턴은 내 말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긴 침묵 끝에, 그가 말했다.
“……그런 환경에서, 잘…… 자라 주었군.”
솔직하지 못한 그의, 담백한 칭찬.
“수고가 많았다. 정말…….”
그는 천성적으로 유들유들하다거나 넉살스럽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만 해도, 어찌할 줄 모르며 애써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르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라서,
“고생이 많았겠어.”
더욱 그의 말이 내 마음속에 깊이 와닿을 수 있었으리라.
수고가 많았다. 고생했겠다. 이런 별것도 아닌, 흔하고 흔한 말이 어째서 이렇게 가슴 속에서 따뜻한 온기가 되어 퍼지는 걸까.
그의 담백하기 짝이 없는 말에 나는 순간 목이 메는 것만 같았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나의 삶, 꿈을 위해, 아이들을 위해, 그저 앞만 보고 달려온 삶에 ‘수고가 많았다.’라고 말해 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나 참, 그런 끔찍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면서, 지금 누굴 위로하는 거람?’
나는 그가 자라온 환경, 그의 가족과 유년의 일을 알고 있다. 나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비참했던 그의 과거.
그런 그에게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만 같아 몹시 민망했지만, 그래도 기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는 진심을 담아 활짝 웃었다.
“정말 감사해요.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해 주신 분은 전하께서 처음이세요.”
녹턴은 내 대답에 희미하게 웃고는, 화제를 돌렸다.
“유감이지만 황실 무도회에 참석한 모든 인원은 최소한 한 번은 춤을 추어야 한다. 영애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지.”
“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역시 대한민국의 유아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아기 상어 율동으로 무도회장을 평정하는 수밖에 없나?
하나 안타깝게도 내가 유통령 최신 트렌드 아기 상어를 무도회장에서 선보일 기회는 없었다.
녹턴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출 줄 모른다면, 배우면 된다. 무도회 이전에 함께 댄스 강습을 듣도록 하지.”
“네? 댄스 강습이요?”
그렇게 우리는 함께 댄스 강습을 듣게 되었다.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그의 행동력은 굉장했다.
그는 당장 그날 춤을 가르칠 선생을 섭외해서, 우리는 내가 춤을 못 춘다고 말했던 그다음 날부터 사교댄스 특별 강습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내 본분은 자네트와 미하일의 시녀였다.
이미 녹턴에게 애 다루는 법을 가르치는 시간에도 메리와 하녀들에게 아이들을 부탁하고 있었는데, 그런 시간을 더 이상 늘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와 녹턴의 댄스 강습에는 자네트와 미하일, 메리도 참가했다.
“그럼, 가장 기초적인 스텝부터 시작해 볼까요.”
버넷 자작 부인이 가볍게 손뼉을 치곤 말했다.
“박스 스텝과 턴을 도는 법부터 알려 드리겠습니다. 먼저 박스 스텝은 내추럴 박스와, 리버스 박스로 나뉩니다. 스텝에 제일 적절한 홀드 자세는…….”
녹턴이 섭외한 우리의 댄스 강습 교사 버넷 자작 부인은 어린 귀족 영애들에게 예절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라고 한다.
대체 그런 유명한 사람을 어떻게 단 이틀 만에 섭외했는지…… 나는 녹턴의 행동력과 부와 권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엔 없었다.
수업을 듣는 도중에도, 나는 등 뒤가 자꾸 신경이 쓰여서 뒤를 흘끗거리며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메리와 자네트, 미하일이 있었다.
“라리아, 힘내!”
“라리아, 잘해!”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아이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며 응원했다.
으윽, 너무 귀여워! 그 귀여운 모습에 나는 가슴이 살살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그 응원을 들으니, 어쩐지 어떤 춤동작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좋아, 내가 이래 봬도 아기 상어 노래와 율동을 처음 접한 지 단 30분 만에 익히고 3살, 4살, 5살 반 아이들의 스타가 된 사람이란 말이지. 그러니까 분명히…….
‘이번에도 할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한 나는 버넷 부인의 지시대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 배우는 왈츠는 대단히 어려웠다. 당연한 말이지만 동요의 율동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영애, 조금 더 빠르게! 하나, 둘, 셋, 넷.”
라리아의 몸은 귀족 영애치곤 체력도 나쁘지 않았고, 운동 신경도 원래의 내 몸과 비슷한 정도로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땀은 비 오듯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연속 동작을 쉼 없이 반복하자 금세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헉헉거렸다.
“으앗!”
오랜 연습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졌기 때문일까, 어느 순간 발을 헛디딘 나는 뒤로 자빠질 뻔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엉덩방아를 찧을 거라고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은 나는, 둔탁한 고통 대신 느껴지는 따뜻하고 단단한 온기에 흠칫 놀랐다.
눈을 뜨자, 시야 한가득 검은 와이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허리에 감겨 있는 단단한 팔뚝도. 코를 타고 비강을 채우는 남자의 체향도…….
‘이거 미치겠네.’
나는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한 채로 웅얼거렸다.
“놔, 놔주세요, 전하.”
그제야 녹턴은 나를 풀어 주었다. 나는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서둘러 몸을 돌렸다.
숨이 막힐 정도로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나는 버넷 부인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고 말했다.
“버넷 부인, 잠깐만 쉴 수 있을까요?”
몸도 힘들었지만 심장이 더 힘들었다. 저 인간은 자신이 내 심장에 얼마나 해를 끼치는지 꿈에도 모를 것이다.
버넷 부인은 내 말에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보고는 말했다.
“음, 확실히 오래 수업하긴 했지요. 좋아요, 그럼 10분만 쉴…….”
한데 그때였다.
“하, 고작 그 정도로 지친 건가?”
녹턴이 버넷 부인의 말허리를 잘랐다. 물론 버넷 부인은 그에게 고용된 사람일 뿐이었으니, 그의 무례에도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 정도라뇨! 벌써 한 시간 반 넘게 춤만 췄는걸요.”
옆눈으로 본 그는 놀라울 정도로 멀쩡해 보였다. 평지를 걸은 것처럼 조금도 숨이 차지 않고, 땀도 거의 흘리지 않은 것 같았다.
사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굳이 나와 함께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춤꾼이었으니까.
사교 활동을 좋아하지 않는 그는 무도회에도 거의 나가지 않는데, 춤은 언제 배운 건지 미스터리였다.
‘나는 그래서 더 힘들기는 하지만…….’
이인삼각 경주를 하는데 한쪽만 달리기 속도가 빠르면 다른 한쪽은 편할까?
아니다. 오히려 훨씬 힘들어진다. 헉헉거리며 따라가기에도 바쁠 것이다.
차라리 못할 거면 둘 다 못하는 편이 나은데, 수준 차이가 심하게 나니까 그것도 문제였다.
“고작 그 정도의 체력이라니 심각하군. 이래서야 무도회에 갈 수는 있을지 모르겠어.”
등 뒤에서 그가 비꼬는 소리가 들렸다.
웬만한 놀림이라면 허허 웃어넘길 수 있는 나였지만, 지나치게 뛰어난 실력으로 나를 고생시킨(?) 그가 그러니까 더더욱 얄밉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무도회는 자기가 제안한 거면서!’
하지만 녹턴의 얄미운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빈약한 체력의 소유자인 영애를 위해서, 역시 업무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겠군. 과로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그게 무슨 말이에요?”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품에 안겨 두근거렸던 감각 같은 것은 어느샌가 씻은 듯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은 그저 그의 높은 콧대를 찍소리 못하게 눌러 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저 그렇게 체력 나쁘지 않거든요! 아니, 솔직히 이 정도면 좋은 편이라고요!”
차마 ‘당신이 지나치게 괴물인 거지’라는 본심은 입에 담을 수 없었다.
내 말에 녹턴은 비웃듯 한쪽 입꼬리만 올렸다.
“그래? 그건 또 처음 듣는 소식인걸.”
“정말이라구요! 제가 공자님을 얼마나 여러 번 업어 드렸는데…….”
한껏 항변하던 나는 그의 다음 말에 멈칫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체력이 좋다면 더 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
놀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의 팔이 왈츠의 준비 자세처럼 내 허리를 감아 왔다.
대체 언제 이렇게 바짝 다가온 걸까. 내 머릿속의 본능이 위험 경보를 마구 울려 대고 있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있지. 이제 와서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 당연하죠.”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내뱉었다. 눈앞에서, 그가 픽 웃는 것이 보였다.
녹턴은 내 허리를 감지 않은 다른 팔로 내 손을 맞잡았다.
“그럼 계속하지.”
“……아, 네!”
버넷 부인이 황급히 대답하고, 악단이 다시 춤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버넷 부인이 보내는 신호에 맞춰 우리는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아까보다 훨씬 합이 맞았다.
‘이 잠깐 사이에 내 실력이 월등히 좋아진 것은 아닐 테고…….’
이건 분명, 그의 쪽에서 신경을 써 주고 있는 것일 테다.
이것은 말하자면, 나보다 훨씬 빠른 걸음으로 걷는 그를 다급한 종종걸음으로 따라 걷다가, 그가 내 보속에 맞추어 발을 늦춰 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경쾌하고 달콤한 음악과 딱딱 맞아들어가는 스텝. 맞잡은 그의 큰 손. 단단하고 든든한 팔. 마주한 시선…….
합이 딱 맞는 퍼즐처럼 맞아들어가자 나는 짧은 시간 안에 춤을 배워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즐거워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렇다, 그와 추는 왈츠는 즐거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대로 계속 춤을 추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고 숨이 찼지만, 그래도 웃음이 나왔다.
오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가 아래에서 나는 웃으며 그와 춤을 추었다.
“…….”
그 역시 웃는 나를 보고 희미하게 마주 웃었다.
“와! 라리아, 머시써!”
우리가 춤을 추는 모습을 지켜보던 미하일이 말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모두의 시선이 느껴졌다. 자네트도, 메리도, 버넷 부인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두 할래!”
“나두!”
메리의 옆에 앉아 있던 자네트와 미하일이 벌떡 일어나서 쪼르르 달려왔다.
아이들은 이내, 우리의 옆에서 함께 연주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직 왈츠를 배우지 않은 5살배기들이었지만, 쏟아지는 햇살 때문일까, 워낙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기 때문일까.
그 모습은 상당히 그럴싸해 보였다.
즐거워 보이는 아이들, 녹턴과 춤을 추면서 나는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이 블랙웰 대공가에 오게 되어 정말로 다행이라고.
* * *
오후에는 함께 춤을 배우고, 저녁에는 아이를 대하는 법을 가르치고, 밤에는 불면증이 있는 그를 재우고.
하루 24시간 중에서 라리아와 녹턴이 공유하는 시간은 나날이 길어져만 갔다.
그 누구도 이들이 그저 단순한 고용주와 사용인의 관계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정도였다.
녹턴은 그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라리아가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이 모두의 뇌리에 깊이 박히면 박힐수록 좋았다.
그럴수록 더더욱 그녀가 블랙웰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기 어려워질 테니까.
‘그리고 그녀 역시 이런 생활이 싫지는 않은 거겠지.’
만일 싫다면, 그를 재우거나 함께 춤을 배우는 일 같은 건 진작 그만두었을 테니까.
그녀가 블랙웰에서의 생활을,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나 자신에게 노래를 불러 주는 일이나 함께 춤을 추는 일을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심장이 기분 좋게 맥동했다.
맥동하는 심장에서 피어오르는 온기는 움트는 봄처럼 그의 몸과 마음을 따스하게 덥혀 주곤 했다.
녹턴은 이 감정이 ‘희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지 모든 것이 잘될 것 같았다.
그녀도 블랙웰에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셔우드에 돌아가지 않고, 계속 그의 곁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자신의 곁에 있을 거라고.
녹턴 블랙웰이 모든 게 잘될 것 같은 ‘희망’을 느껴 본 일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 사건’ 이후로는 처음이었고.
블랙웰 저택만큼이나 무채색이었던 삶이 알록달록한 색상으로 칠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와 같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아름다운 색채로.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실례합니다.”
언제나와 같이 라리아가 침실로 찾아왔다.
가벼운 목소리와 종종거리는 발걸음.
그녀를 기다리며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녹턴은, 그 소리를 듣자 심장이 조금 빨라진 것을 느꼈다.
“왔군.”
녹턴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제일 먼저 그녀 특유의 선명하고 묘한 빛깔의 색채가 보였다.
그 빛에 눈이 익숙해지고 나자, 간편한 실내 드레스를 입고 있는 라리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라리아는 헤헤 웃었다.
그 모습에 얼굴이 괜히 풀어질 것만 같아서 녹턴은 신경 써서 입가를 굳혀야만 했다.
“네. 준비는 다 되셨나요?”
“그래.”
그의 짧고 무뚝뚝한 대답에, 라리아는 손뼉을 가볍게 쳤다.
“좋아요, 그럼 오늘도 꿈나라로 가 볼까요? 일단 바르게 누워 주세요.”
하루 종일 아이를 대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그녀는 조금 유치한 어휘와 말투를 쓰는 경향이 있었다.
녹턴은 자신의 취향을 알고 있었다. 만일 다른 사람이라면 질색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쩐지…… 싫지 않다니까.’
그녀의 말투는 왠지 싫지 않았다. 오히려 병아리처럼 귀엽고, 듣고 있자면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
자신이 어떤 광증을 가지고 있어도, 모두가 구설수에 올리는 끔찍한 패륜을 저지른 괴물이어도, 그냥 다 괜찮다고 해 줄 것만 같은…….
녹턴은 자세를 고쳐 바르게 눕고 잘 준비를 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8년 동안이나 자신을 괴롭혔던 끔찍한 불면증과 악몽이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렇게나 끔찍하게 싫어하는 노래였는데 말이지.’
녹턴은 노곤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좋지 않은 기억을 불러오니까…….’
끔찍한 기억 위로 그녀의 솜털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가 덮인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녹턴은 두려움을 잊고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 가녀리고 바람에도 부러질 것 같은 작은 여자의 노랫소리 하나만으로도 녹턴은 용기가 났다.
눈을 감은 채 노래를 불러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무도회가 2주밖에 안 남았네요.”
7월 1일에 시작하는 무도회까지 2주가 남았다. 그것은 그녀를 처음 만난 지 세 달 하고도 반이 되었다는 뜻이다.
녹턴은 새삼스런 기분을 느꼈다. 100일을 좀 넘는 이 짧은 시간 만에 그녀에게서 이런 감정을, 이런 편안함을…… 느끼게 될 줄은.
세 달 전의 자신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녹턴은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그렇군. 그동안 영애의 춤도 제법 봐 줄 만하게 되었지. 다행스럽게도.”
눈을 감아도 라리아가 입을 비죽대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녹턴은 쿡쿡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눌렀다.
하지만 의외로 라리아는 화를 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대공 전하. 저는 전하께 정말 감사드리고 있어요.”
뭐? 이건 또 의외의 반응이다. 민망하기도 하고.
녹턴이 당황한 사이, 라리아가 말을 이었다.
다음 말을 들은 녹턴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무 사이도 아닌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노력해 주셔서요.”
아무 사이도 아니다. 고작 세 단어의 이 말이 가슴 속에 차갑게 박혀 들었다.
그녀의 다정한 말이 박혀 든 부위부터 얼어붙을 듯 싸늘한 냉기가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 입을 막아 버리고 싶었지만, 채 그러기도 전에, 그녀의 말이 계속되는 것이 먼저였다.
“약혼 관계라곤 하지만 그건 가짜 발표일 뿐이고, 사실 그냥 고용주와 사용인일 뿐이잖아요. 시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분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정말 감사해요. 전하는 저의 은인이세요.”
고용주. 사용인.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 말들이 이렇게 잔인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그녀에게 우리 둘 사이의 접점이라곤 서류상의 계약밖에는 없었던 건가.’
턱 하고 목 끝에서 숨이 막혔다.
‘희망이 있다고 느꼈던 것은…… 전부 나의 착각이었던 건가?’
그제야 녹턴은 깨달았다.
자신이 희망이 있다고 느꼈던 것은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가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으리라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댄스 수업? 잠을 재우는 일? 그런 거야 당연히, 자신이 그녀의 고용주이기 때문이 아닌가.
계약과 돈. 그녀에게는 그 외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아무것도.
‘믿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6년 전 그날, 누구도 믿지 않기로 다짐했는데.’
모든 것은 그녀가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기에. 그로서는 한 포기의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었기에.
‘또다시, 멋대로 믿어 버리고 말았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크다. 카드가 뒤집히듯 희망이 뒤집힌다. 희망의 뒷면은, 절망이다.
한심스런 자신을 비웃어 주고 싶었다. 욕이라도 하고 싶었다.
누군가를 믿은 죄로 그런 고통을 겪었던 자신이, 다시 한번 타인을 믿어 버리다니. 이토록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만 믿어! 다른 생각은 하지 마. 그저, 이 일을 해냈을 때 우리가 얼마나 행복해질지만 생각해.’
또 시작이다.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우습지도 않은 말.
‘알고 있지? 녹턴. 난 널 누구보다 믿는다. 넌 그럴 가치가 있는 인간이야.’
……그 개같이 다정한 목소리.
한때 그 말에, 그 웃음에 진심을 걸었다.
그의 등에 인생을, 목숨을 걸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와 함께라면 무엇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던 때가 있었다.
‘이 저주받은 블랙웰에서 함께 나가는 거야!’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 나올 정도로 헛된 망상이었다.
그녀의 노랫소리 덕에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목소리를, 지금은 그녀로 인해 떠올리고 말았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정말이지 최악의 감사 인사였다.
“……이런 거지 같은…….”
녹턴은 벌떡 일어나 앉더니, 발작적으로 앞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 모습을 본 라리아는 화들짝 놀랐다.
“전하? 가, 갑자기 왜 그러세요?”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그에게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녹턴은 헐떡이며 침대 헤드에 상체를 기댔다. 가운의 틈으로 그의 반질반질한 근육이 끊임없이 수축했다가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저, 전하! 괜찮으세요? 정신 차리세요!”
“크윽, 으, 흐으으……! 빌어, 먹을……!”
발작하던 녹턴의 손가락 사이로 번득이는 보라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잔뜩 충혈된 흰자와 형형한 안광이 빛나는 자색 눈동자.
그를 만든 원작자인 라리아는 깨달았다.
‘광증 발작을 일으키고 있어!’
손발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가 원작에서 광증에 빠져 저질렀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와 제일 가까이 있는 그녀는, 당연히 처참한 꼴로 죽을 것이다. 지금 당장 도망친다 해도 과연 그에게 붙잡히지 않을지 확신이 없었다.
모든 걸 버리고 전력으로 도망쳐야 그나마 가능성이 있을 테지만…….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위험해져!’
그녀가 도망치면 목표물을 잃은 녹턴은 그 잔혹한 폭력의 대상을 이 저택 안의 다른 사람들로 옮길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자네트와 미하일도 있었다.
어른들과는 달리 제 발로 도망도 칠 수 없는 작은 아이들. 이 저택에 있는 사람들 중 제일 위험한 사람은 그 두 아이가 될 것이다.
자네트와 미하일이 녹턴의 손에 찢겨 죽을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절대 안 돼.’
라리아는 입술을 깨물고는, 떨리는 손으로 천장에 달린 검은색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이 검은색 설렁줄은 블랙웰 저택에만 있는 것으로, 녹턴이 미쳐 날뛸 때를 대비한 것이다.
이것을 당기면 블랙웰 기사단이 출동해 그를 제압하게 되어 있다.
비상 방책이기는 하지만 사실 큰 의미는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블랙웰 기사단은 황실 기사단과 맞먹을 정도로 뛰어나지만, 녹턴은 광기가 극한으로 치달았을 때는 단신으로 그런 기사단을 쓸어 버릴 수 있을 정도의 괴물이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이 설정들은 전부 그녀의 손으로 한 것이니까.
‘하지만…….’
그동안 자신이 잘 관리해 준 덕에 녹턴의 이번 발작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만 죽이면 이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나만을 희생양으로 해서 정신을 차려 준다면……!’
자신을 죽이고 나면, 그는 기사단에 제압될 정도로는 진정할 것이다.
라리아에게 그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침실을 채운 어둠 속에서 짐승처럼 흉흉한 안광이 떠올랐다.
그 보라색의 안광 두 개가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 라리아는 그가 완전히 이성을 잃었음을 깨달았다.
그 눈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맹수, 혹은 괴물과 마주친 듯한 감각.
그저 그의 두 눈에 응시당하는 것만으로도 천근 같은 압박감이 온몸을 죄어 왔다.
자신은 그의 손에 죽을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 외에 다른 미래는 없었다.
숨 막히는 두려움 속에서 그와 눈빛을 주고받던 그때.
“꺄악!”
녹턴의 거친 손아귀가 그녀를 덮쳤다. 그것은 오늘 오후에 함께 춤을 출 때의 손길과는 전혀 달랐다.
그에게 끌어당겨지자 라리아는 온 세상이 뒤집히는 것처럼 보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의 몸은 침대에 눕혀진 채였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애써 시선을 끌어 올리자, 그녀의 위에는…….
녹턴이 자신을 두 팔 사이에 가둔 채 올라타 있었다.
“크윽, 크으르르르……!”
그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닌, 산산조각 난 언어의 파편들을 입술 사이로 흘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는 짐승처럼 거친 손길로 그녀의 가는 손목을 침대에 대고 눌렀다.
그리 힘을 들이지 않은 것 같은데도, 마치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이렇게 죽는구나.’
가빠지는 숨을 삼키며 라리아는 눈을 감았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신이시여, 저는 달리 바라는 게 없어요. 다만, 자네트와 미하일이 너무 충격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애들은 아직 어리고 마음이 여려요. 그리고…….’
라리아는 난생처음으로,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를 했다.
‘……그가, 지나치게 죄책감 갖지 않았으면…….’
녹턴의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라리아는 모든 것이 최대한 빨리 끝났으면 했다.
“아, 흑……!”
날카로운 통증이 목덜미를 후볐다. 그가 라리아의 목을 깨문 것이다.
“아, 흐으, 아, 아파……!”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찌나 아픈지 눈물이 찔끔 났다. 비릿한 피의 냄새가 코를 스쳤다.
“크으으, 흐으으으…….”
녹턴이 자신의 목덜미에 얼굴을 처박은 채 신음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가쁜 숨결이 목을 간지럽혔다.
그녀를 전부 들이마시려는 것처럼, 허파에 바늘 꽂을 틈 하나 남겨 두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는 라리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박은 채 숨을 들이켰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쯤이면 그가 그녀를 죽이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그녀는 그가 한 손으로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작고 약하니까.
게다가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탄 거대하고 단단한 몸. 손목을 결박한 채로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그.
그에게 붙잡힌 두 손목이, 그의 얼굴이 닿은 목덜미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간지럽고 뜨거웠다.
“……라리아…….”
그가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가 인간의 말을 뱉자, 라리아는 흥분해 외쳤다.
“저…… 전하! 정신, 정신이 드세요?”
“크윽…….”
녹턴은 몇 번이나 더 라리아의 목덜미에 대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들이마시고, 문지르고. 심지어는 깨문 자리를 핥고 빨기까지 해서, 라리아는 행여 이상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이를 꽉꽉 악물어야만 했다.
그러기를 한참, 마침내 녹턴의 두 눈동자에 이성의 빛이 돌아왔다.
“제기랄…….”
녹턴은 욕설을 내뱉으며 라리아의 목덜미에서 얼굴을 떼었다.
아직 멍한 그의 눈이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주변을 훑었다.
그의 시선이 엉망이 된 침대와, 거의 다 흘러내려 허리춤에서 달랑거리는 가운과, 자신의 몸 아래에 깔린 라리아를 훑었다.
몽롱하던 그의 얼굴이 곧 경악으로 물드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이게 다 무슨……! 이런 망할, 빌어 처먹을……!”
“저, 전하. 진정하세요. 전 괜찮으니까요. 그리고 이건 놓으시고…….”
라리아는 그를 안심시키려 노력하며, 눈짓으로 결박된 손목을 가리켰다.
녹턴은 그제야 불에 덴 듯 펄쩍 뛰며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는 그녀의 몸 위에서 내려온 뒤 용광로처럼 붉어진 얼굴에 대고 마른세수를 했다.
“이, 이런 정신 나간 놈……! 어떻게 이런 짓을. 이런 망할 자식!”
라리아는 부스스한 몰골로 일어나 앉아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몇 번이나 자신을 향해 욕을 하던 녹턴이 다급히 그녀를 붙들었다.
“여, 영애. 다, 다친 덴 없나? 저, 정말. 정말 미안하다. 내가 어떻게 이런 짓을…….”
늘 냉랭하고 까칠하던 그가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횡설수설하는 그에게 라리아는 솔직하게 말했다.
“목이 좀 다친 것 같고, 손목에도 멍이 생긴 것 같긴 한데요.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아요.”
“괜찮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영애. 나, 나는…….”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전하. 전하께서 원해서 하신 일도 아니잖아요.”
이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의 광증은 그녀가 원해서, 자신의 손으로 만든 설정이다.
그런 그를 그녀가 어떻게 탓할 수 있겠는가.
라리아는 한숨을 삼켰다.
그가 이렇게 반응하리라고는 예상했다. 그는 자신의 광증을 혐오하니까. 성격 나쁜 듯하지만 사실은 다정한 사람이니까.
냉혹한 듯 보여도 실은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가 제일 잘 알았다.
그야, 그녀는 그의 창조주가 아닌가.
라리아는 손을 뻗어 정신없어 보이는 녹턴의 양 뺨을 부여잡았다.
“어쩔 수 없으셨던 거예요.”
그녀가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전하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전 괜찮아요.”
“…….”
녹턴은 얼굴을 부여잡힌 채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영애…….”
그가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주군!”
침실 문이 벌컥 열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검은 갑옷과 은색 검으로 중무장을 한 장정들. 바로 블랙웰의 기사들이었다. 좀 전에 라리아가 설렁줄로 호출을 했기에 나타난 모양이었다.
극도로 강한 녹턴을 경계한 건지, 기사들은 모두 중무장을 하고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미쳐 날뛰는 주군을 제압할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있던 그들의 얼굴엔 곧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그야,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녹턴은 누가 봐도 제정신으로 보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성을 잃은 녹턴이 살해했을 거라고 여겨졌던 셔우드 영애 역시 살아 있었다.
기사들을 본 녹턴은 라리아의 손을 떼어 내고 가운을 제대로 입었다.
“늦었군.”
그렇게 내뱉는 녹턴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냉정했다. 방금 라리아를 대하던 태도와는 놀라울 정도로 차이가 있었다.
“셔우드 영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랬나?”
“…….”
기사들의 침묵 속에서, 기사단의 부단장이자 녹턴의 부관인 페르닐은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군. 주군께서 평소와 다르게 반응하시잖아.’
녹턴이 이성을 잃었을 때를 대비해 블랙웰 기사단에게 맡겨진 역할은 그의 제압과 주변 피해의 최소화였다.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녹턴의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구조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기사단이 아무리 빨리 출동하더라도 무장을 하고 이동하는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그 사실을 모르는 녹턴이 아닐 텐데도 그는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페르닐이 생각하기에, 녹턴은 엄격하고 까다로운 상사였지만 쓸데없는 것으로 트집을 잡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시비비를 칼로 자르듯 날카롭게 가리는 사람이기에 부하들에게 공연히 화풀이를 하는 그의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는 건 분명…….’
페르닐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녹턴의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을 흘끗 보았다.
셔우드 영애. 녹턴의 약혼녀이자 소공자, 소공녀의 시녀인 그녀가 어색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목덜미에는 물린 듯한 상처가 있어 옅은 피 냄새가 여기까지 났다.
페르닐은 생각하는 걸 그만두고 고개를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주군.”
녹턴의 늘 얼음처럼 차갑던 자색 눈동자가 이글이글 들끓었다. 그는 도열한 기사단을 슥 훑어보더니 말했다.
“이번 일은 부단장을 대표로 처벌하고, 훈련을 강화하겠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겼는데도 늦장을 부린다면 그때는 너희 모두 목이 달아날 줄 알아라.”
“존명!”
녹턴은 마른세수를 하고 말을 이었다.
“……셔우드 영애를 프레드릭에게 데려가라.”
프레드릭은 블랙웰의 상주 의사였다.
녹턴의 명령에 몇 명의 기사가 라리아를 부축해 주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라리아는 부축받지 않아도 걸을 수 있다며 모든 제의를 거절했다.
라리아는 기사들의 안내에 따라 상주 의사의 방으로 향했다.
잠을 자던 의사는 기사들의 거친 손길에도 짜증 한 번 없이 일어나 라리아의 상처를 살폈다.
치료를 마친 뒤 의사가 말했다.
“당장 할 수 있는 처치는 다 했습니다. 환부가 감염될 수 있으니 매일마다 저에게 찾아오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많이 놀라셨을 텐데, 오늘 밤은 푹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안정에 좋은 차를 끓여 드릴 테니 드시고 가시지요.”
라리아는 의사가 대접해 준 차까지 마신 뒤에야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침대에 쓰러지듯 드러누운 라리아는 목덜미의 붕대를 만지작거리며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했다.
갑작스레 변했던 녹턴의 눈빛. 마치 맹수의 앞에 아무런 방어구도 무기도 없이 내쳐진 것만 같은 감각.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탔던 그 단단한 몸. 물릴 때의 날카로운 통증.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서늘했다.
의연하게 반응하긴 했지만, 그녀라고 두렵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왜 두렵지 않겠는가.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블랙웰까지 찾아온 그녀다.
코앞까지 닥쳐왔던 죽음 앞에서 그녀는 너무나 무서웠다.
이제껏 꾸려왔던 삶이 이런 최악의 형태로 끝난다는 것이 울고 싶을 만큼 두렵고 또 억울했다.
다만 녹턴이 아이들을 해치는 것이 훨씬 더 두려웠을 뿐이다.
‘하지만, 그가 왜 갑자기 이성을 되찾았던 걸까?’
정말 십 년 감수하긴 했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라리아가 알기로 녹턴은 한 번 광기에 빠지면 타인을 살해하기 전에는 이성을 되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침대에 누워 한참을 고민하던 라리아는, 결국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내렸다.
‘내가 그동안 불면증을 치료해 준 것의 효과인가?’
불면증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그의 광증을 심화시키는 요인일 테니, 그 스트레스를 덜어 주면 광증이 약화될 만도 하다.
그렇게 광증이 약화된 결과 그가 이성을 금방 찾을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래, 이거 말곤 설명할 방법이 없어.’
라리아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너무 피곤해.’
많이 긴장했기 때문일까, 모든 것이 해결되고 나니 육체보다는 정신적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썰물처럼 몰려오는 수마에, 라리아는 옷을 갈아입지도 못한 채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녹턴이 이성을 잃은 사건 직후의 다음 날.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났다. 정리해 둘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책상에 앉아 종이와 깃펜을 꺼냈다.
‘내가 이곳, 블랙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이곳에 온 첫 번째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라리아는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악역이었다.
여주인공을 해하려다가 남주인공인 녹턴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는 라리아의 정해진 운명을 피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만을 위해서라면 그저 녹턴과 여주인공을 만나지 않게 멀리 도망치기만 하면 됐겠지만…….
내게는 블랙웰에 와야만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녹턴을 행복해지도록 만들어야 해.’
그것이 나의 두 번째 목적이었다.
‘내가 그의 인생을 망쳤으니, 당연히 내가 책임져야만 해.’
그리고 녹턴을 행복해지게 만들기 위해 나는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제일 먼저, 그의 아이들을 돌보는 것.
밤마다 경기를 일으키는 미하일을 치료하고, 녹턴에게 아이 다루는 법을 가르치고, 아이들과 녹턴의 관계를 개선시키는 것.
이것은 현재 진행 중에 있으며, 경과도 좋다. 이제 아이들은 더 이상 녹턴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내 생각에, 녹턴을 행복해지게 하려면 두 가지가 더 필요하다.
바로 ‘녹턴과 여주인공의 사이를 이어 주는 것’ 그리고 ‘녹턴의 광증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것’.
하지만 전자는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다.
여주인공의 등장, 즉 본편의 시작은 8개월 뒤의 일이다.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후자는?
우선, 녹턴이 광증을 앓고 있는 이상 그는 완전히 행복해지기가 어렵다.
그는 자신의 광증을 혐오하며, 그가 이성을 잃을 때마다 그의 주변인이 위험해질 테니까.
불면증을 낫게 해 주기는 했지만 이것은 그저 미봉책에 불과하다. 광증 발현을 조금 미루었을 뿐 완전히 없앤 것이 아니다.
‘그럼, 내 목표는 정해진 거네.’
나는 고민하다가 종이에 그의 광증에 대해 아는 것을 전부 쓰기 시작했다.
「1. 블랙웰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병이다.
2. 모든 블랙웰이 광증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블랙웰의 인간이 강한 정신적 충격이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적은 확률로 발현된다. 일반적으로 2~3대에 1명 정도가 광증을 가지고 있다.
3. 녹턴은 18살에 겪은 ‘그 사건’을 계기로 광증에 걸렸다.
4. 광증이 발현되면 특수한 능력을 겸비하게 된다.」
그 특수한 능력이 뭐냐고? 그건 나도 모른다. 아직 원작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했지만 내가 쓴 원작은 지름작이었고, 심지어 연중했다. 나는 이 설정을 나중에 정하기로 결심하고 끝끝내 정하지 못했다.
‘대충 뭐, 엄청 좋은 머리나 전투력이나 그런 거 아니겠어?’
그의 질릴 정도로 강력한 힘을 생각하면, 그게 광증에 따라오는 특수한 능력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니까.
‘그 능력이 뭔지는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으니, 내가 녹턴에게 물어봐도 알려 주지 않겠지.’
블랙웰은 신비주의 가문이기도 하고, 원작의 중반까지 그 능력이 드러나지 않은 것을 보면 결국 녹턴 본인 외에는 아무도 그 능력을 모를 가능성이 클 것 같았다.
‘그래도 이 상황에 도움이 되는 능력일지도 모르니, 다음에 한번 잘 떠봐야겠어.’
거기까지 쓴 나는 종이를 노려보았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그의 광증에 대해 아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원작에서 녹턴의 광증은 갈등의 소재일 뿐 결말까지 치료되지 않는 걸로 결정되어 있었으니까.
치료하는 방법까지는 설정해 두지 않았다.
‘피폐물을 쓰지 말 걸 그랬어. 광증을 치료하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해피엔딩 소설을 썼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었다.
‘유전병을 대체 어떻게 치료한담. 내가 의사도 아닌데.’
현대 한국에서도 치료하지 못하는 불치병이 많은데, 과연 내가 그의 광증을 치료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초조해졌다.
내가 불행하게 만든 그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게 될까 봐.
내가 그에게 저지른 과오를 영영 되돌리지 못할까 봐.
하지만…….
‘방법이 보이지 않더라도, 뭐라도 해 봐야지.’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 * *
그날 오후, 나는 반차를 내고 오랜만에 혼자만의 외출을 했다.
시녀가 된 뒤로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아이들의 곁에서 거의 한시도 떨어지지 않다시피 했으니. 혼자만의 시간은 정말로 오래간만이었다.
‘지금도 아이들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꼭 필요한 일이니까.’
아이들은 메리와 다른 하녀들에게 맡긴 채 나는 시장으로 향했다.
“쌉니다, 싸요! 신선한 무가 지금이라면 반 테트!”
“오늘 잡은 돼지고기 있어요!”
“거기 아가씨, 이 바구니 좀 보세요. 강가에서 꺾은 갈대로 저희 집에서 직접 짠 거랍니다.”
늘 고요한 블랙웰 저택과 다르게 시장은 시끌벅적한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거의 몇 달 만의 혼자만의 시간이기에, 여유롭게 시장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내게는 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다.
내가 시장에 온 것은 그저 장을 보러 온 것이 아니었다.
녹턴의 광증을 치료할 생각인 나는, 그와 블랙웰의 광증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신흥 가문 블랙웰의 가장 비밀스러운 유전병에 대한 정보가 도서관이나 신문에 있을까?
아니, 그럴 리가.
‘이런 비밀스러운 정보를 얻기 제일 좋은 곳은 바로 거기지.’
나는 시장을 가로질러 걸으며 생각했다.
‘정보 길드.’
그렇다. 나는 블랙웰의 광증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정보 길드로 향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길드의 위치, 의뢰 방법 같은 기본적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야, 나는 이 작품의 원작자이니까.
원작에서 여주인공이 녹턴과 블랙웰 가문에 대해 뒷조사를 하기 위해 정보 길드에 의뢰하는 장면이 나왔던 것이다.
소란스러운 시장 안으로 한참을 걸어가 내가 발을 멈춘 곳은, 무시무시하게 생긴 용병들이 드나드는 비밀스러운 분위기의 술집도, 그렇다고 영화에 나올 것처럼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첩보기지도 아니었다.
내 앞에 있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야채 가게였다.
지나가던 손님이 당근을 고르는 것이 보였다.
다양한 채소들이 가판대에 줄지어 놓여 있고, 천장에는 옥수수와 몇 가지 약초가 묶여 매달려 있었으며, 심지어 바닥에는 닭 두 마리가 떨어진 콩 쪼가리 같은 것을 쪼아먹고 있었다.
허름해서 글자 몇 개가 떨어지려고 하는 간판에는 ‘페트로스 브라트카르토’라고 적혀 있었다.
제국의 방언으로 ‘페트로의 감자튀김’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봐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 중앙시장에도 수십 개는 있을 법한 그런 가게였다.
나는 가판대 앞에 서 있는 아주머니를 불렀다.
“저기요.”
장부를 보고 있던 아주머니는 곱지 않은 눈초리로 나를 살펴봤다.
물건을 사러 온 사람이라기보다는, 시장을 구경하러 온 철없는 귀족 영애쯤으로 보인 모양이다.
“뭐 필요한 것 있소?”
아주머니의 말에, 나는 빙긋 웃으며 들고 있던 바구니를 덮은 천을 걷었다. 바구니 안에는 하얀 달걀들이 수북이 들어 있었다.
“여기서 산 달걀이 상한 것 같은데요. 환불해 주시겠어요?”
내 말에 일순간 아주머니의 눈빛이 바뀌었다. 아주 한순간이었지만.
“귀찮게 하기는.”
아주머니는 여상한 태도로 내가 들고 있던 바구니를 받아 들곤, 가게 뒤로 들어갔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곳의 의뢰 방법은 바로 달걀 껍데기 안에 의뢰 내용을 쓴 종이를 넣고 봉해서 달걀을 환불해 달라고 하는 것.
달걀 껍데기를 깨뜨리지 않으면서 구멍을 내고 내용물을 빼내고 편지를 넣고 다시 밀랍으로 봉하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한 5분이나 기다렸을까?
곧 아주머니가 다시 나와서 불친절한 어조로 말했다.
“따라오슈.”
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가게 뒤에 있던 창고 문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를 따라 창고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넓어 보이는 창고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콩과 각종 향신료, 메이플 시럽, 등유와 아마(亞麻)기름, 닭 사료, 게다가 반쯤은 겨와 모래가 섞인 저급 밀가루부터 귀족들이나 먹을 법한 고급 밀가루까지.
얼마나 걸었을까? 말없이 걷기만 하던 아주머니가 어느 순간 멈추어 섰다.
그녀는 놋쇠 프라이팬과 다 죽은 화분이 얹어져 있는 선반을 두들기더니 말했다.
“열어. 의뢰야!”
그녀가 말하자…… 놀랍게도 선반이 드르르륵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려나더니, 벽이 마치 미닫이문처럼 옆으로 열렸다.
비밀 문이었던 것이다.
아주머니가 안내하는 대로 나는 비밀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가게 밖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고급스러운 사무실이 있었다.
검은 소가죽을 씌운 소파와 흑단목 재질의 양각이 섬세한 테이블.
과시적인 의도가 다분한 값비싸 보이는 조각상과 명화까지.
벽 쪽에는 비밀 문을 열어 준 사람으로 보이는, 손목부터 목까지 흉악한 문신으로 가득한 어마어마한 떡대의 남자가 서 있었는데 방 안의 풍경과 정말이지 언밸런스했다.
‘허름하고 평범한 야채 가게 안에, 이런 으리으리한 사무실이라니…….’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무실을 구경하던 내게 아주머니가 자리를 권했다.
“브라트카르토의 행동대장 마사요.”
아주머니가 내 맞은편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반가워요, 마사. 앨리스라고 해요.”
이런 곳에서는 가명을 쓰는 것이 기본이다. 마사라는 이름도 당연히 가명일 것이다.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 나니 떡대 문신 남자가 약초를 우린 듯한 차를 내왔는데, 굉장히 쓰고 끔찍한 냄새가 나서 마시는 시늉만 했다.
마사는 팔짱을 끼곤 말했다.
“특이한 의뢰를 하셨던데. ‘블랙웰의 광증에 대해 조사해 달라’는 게 영애의 의뢰가 맞소?”
“네, 맞아요.”
“귀찮은 의뢰야. 아주 까다롭다고. 그 정도는 댁도 알고 있겠지?”
마사의 말뜻은 그거다. 뒷조사해야 할 대상이 너무나 거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거물일수록 조사하기가 아주 까다롭고, 위험할 수밖에 없다.
만일 조사하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최악의 경우 블랙웰과 길드 사이의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고 있어요.”
마사는 손으로 코를 팽, 하고 풀었다. 그걸 대충 앞치마에 닦으며 그녀가 말했다.
“이렇게나 거물을 상대하는 의뢰 자체가 워낙 드물어서 말이야. 하긴 댁 같은 젊은 아가씨가 우리 길드에 의뢰를 해 오는 일부터가 드문 일이긴 하지. 그래서 말인데…….”
마사는 검지와 엄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이건 충분히 가져왔겠지?”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던 전개였다. 다른 곳도 아닌 블랙웰을 조사하라니, 어지간한 비용으론 의뢰를 받아 주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 정도면 될까요?”
마사는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내가 셔우드에서 가출할 때 가져온 보석들,
그리고 블랙웰에서 선지불 받은 12개월치 봉급이 들어 있었다.
그동안 돈을 쓸 일이 거의 없었다 보니 봉급은 처음 받았을 때의 액수에서 거의 달라지지 않은 거액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충분히 거액이지만…… 제국 최고의 정보 길드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금 장난해?”
마사가 주머니를 테이블 위로 던졌다.
“고작 이 정도로 블랙웰의 최고 기밀을 털어 오라고? 철없는 아가씨, 왜 이런 데 관심을 갖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이 정도로 블랙웰과 척을 지고 싶어 하는 길드는 아무 데도 없어. 그러니 괜히 위험한 짓 하지 말고 집에서 얌전히 있어.”
주머니 안에 든 것은 나의 전 재산이었다. 어디서 사채라도 끌어오지 않는 이상 내가 그보다 더 많은 돈을 가져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물러날 내가 아니었다.
나는 마사가 던진 주머니엔 손도 대지 않은 채 다리를 꼬았다.
턱을 치켜든 채 나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면, 다른 것을 더 얹어드린다면 어떨까요?”
“뭐, 뭐라고?”
이 정도 으름장을 놓으면 울면서 도망갈 줄 알았던 모양이다. 마사는 갑자기 변한 내 태도에 얼빠진 얼굴을 했다.
하지만 정보 길드에서 이 정도 블러핑을 하는 사람은 널리고 깔렸을 터. 마사는 곧 코웃음을 치곤 말했다.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댁 같은 평범한 귀족 영애가, 뭘 가지고 있겠…….”
“뭐겠어요? 여기는 정보 길드잖아요. 정보를 재물처럼 사고파는 곳.”
나는 검지를 들어 올려 내 머리를 가리켰다.
“정보를 드릴 테니까, 블랙웰의 정보를 가져다주세요. 어때요?”
“정보라고?”
마사는 잠시 얼빠진 얼굴로 나를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내 앞에서 장난질하는 거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아가씨. 네가 알아 봤자 뭘 알겠어? 설마 너희 집안 정보라도 팔려는 건 아니겠지? 철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나는 코웃음을 쳤다.
이 모든 세계관을 만든 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섭하지!
“설마 그럴 리가요. 황실이나 성국의 뒷사정에 대해 뭐 알고 싶은 거 있어요? 뭐든 물어봐요.”
그저 철없는 영애의 장난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 마사는 설마 하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황실의 숨겨져 있는 황자로 불리우는 제4 황자에 대해 알고 있나?”
그는 원작의 서브남주 중 한 명이었다. 당연히 어느 정도는 그에 대한 설정을 알고 있을 수밖에.
“그 정돈 기본이죠. 제4 황자의 이름은…….”
나는 제4 황자에 대해 줄줄이 쏟아 냈다.
그의 이름부터 외모, 왜 황실에서 숨겨져 있는지, 어떤 정치적 가치관과 배후를 가지고 있는지, 그의 앞으로의 동향은 어떨지, 기타 등등.
철없는 영애가 되는대로 거짓말을 한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조리 있는 설명이었다.
더군다나 제국 최고의 정보 길드이니만큼 브라트카르토도 제4 황자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있을 텐데, 그들의 정보와 완벽히 일치했는지 마사의 입은 경악으로 점점 벌어졌다.
“마, 말도 안 돼! 그렇다면, 작년에 성국에서 비밀리에 임명되었다는 성녀는?”
“그것도 쉽죠.”
나는 성녀에 대해 아는 대로 다 털어놓았다. 내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마사의 얼굴은 충격과 경악으로 일그러져 갔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마사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말도 안 돼. 우리 길드의 길드장보다도 더한 정보력이잖아.”
그녀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 정체는…… 대체 뭐지?”
지나가던 평범한 원작자입니다만.
“이쯤 했으면, 테스트는 통과인가요?”
나는 생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제 정말로 궁금한 걸 물어보시죠. 거래는 마저 성사시켜야 하지 않겠어요?”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던 마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드장과 이야기 좀 하고 오지. 잠깐이면 된다.”
아마 길드 역사에 없을 정도로 예외적인 상황이니 상사의 의견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녀가 거래를 체결하기 위한 계약서를 가지고 오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거래는 성사되었다.”
세계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뒤 길드의 인장이 찍힌 계약서에 지장을 찍자 마사가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계약의 내용에 대해 확인을 받았다.
“잊지 마세요. 절반의 정보는 오늘 드렸고, 나머지 절반의 정보는 계약이 완료된 다음 제공하는 거예요. 정해진 시일까지 블랙웰의 조사를 제대로 하셔야만 나머지 비용을 드릴 거예요.”
“여부가 있겠나? 우리 고객님이신데.”
그렇게 불친절하게 굴었던 때는 언제고, 지금 그녀의 표정은 싱글벙글했다.
내가 제공한 정보가 아주 유용하고 값진 것인가보다.
혹시나 해서 확인을 받긴 했지만 사실 별로 걱정하지는 않았다. 브라트카르토는 제국 최고, 아니 대륙 최고의 정보 길드였다.
꽤 위험한 의뢰이긴 하지만, 이번 의뢰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낼 거라고 나는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만일 길드의 역량으로 불가능한 의뢰였으면 애초부터 계약을 거절했겠지. 길드장에게 그 정도 판단력은 있을 테니까.’
브라트카르토의 현 길드장 페트로는 여우처럼 교활하고 드래곤처럼 영리한 자였다.
브라트카르토를 제국 최고의 정보 길드라는 위치에 올려놓은 그는 결코 길드에 손해가 되는 선택은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마사는 히죽히죽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돈! 고객님을 밖까지 모셔다드려라.”
“옙.”
떡대 문신남이 대답하고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사무실을 나서기 전에 마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사 중간과정도 보고하는 것 잊지 마세요. 적어도 두 주에 한 번은 진척상황을 알려 주셨으면 좋겠네요.”
“걱정 말라고, 고객님!”
마사의 흔쾌한 대답을 들은 뒤에야 나는 사무실에서 빠져나왔다.
떡대 문신남에게 뒷문을 안내받은 나는 그곳을 통해 시장 골목으로 나왔다.
썩어 가는 생선 내장, 선지, 동물의 잔뼈, 음식물 쓰레기 따위로 더럽고 질척질척한 골목길을 걸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뭔가 찝찝하단 말이야.’
대체 왤까? 거래는 이렇게 성공적으로 성사되었는데.
브라트카르토의 정보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진척 상황 보고까지 꼬박꼬박 받기로 했으며, 이 과정에서 내가 더 이상 신경 써야 할 것은 없을 터인데.
그런데도 왠지 무언가가 찝찝했다.
‘특히, 마사의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흔쾌한 태도 같은 것이…….’
지나친 의심일까? 하지만, 여태까지 나의 원작자로서의 직감은 틀린 적이 없었기에 더 신경 쓰였다.
고민하던 나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이, 신경이 쓰여 봤자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는걸. 일단 대공저로 돌아가서 생각하자.’
그렇게 나는 골목을 빠져나와 시장을 가로질러 대공저로 향했다.
한데 대공가로 가던 길, 주택가 골목에 접어들었을 즈음이었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콱, 하고 뒷덜미가 잡아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채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입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단단한 밧줄 같은 감각이었다.
몇 개의 단단한 손들이 내 몸을 단단히 붙든 것이 느껴졌다.
“쉿, 조용히 있어!”
“죽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있어!”
적대감이 가득 담겨 있는 거친 목소리.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고, 머리에 봉투 같은 것을 씌운 듯 시각과 청각이 차단되었다.
나는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에 의해 들쳐 메져 어디론가 실려 갔다.
세상에, 늘 아이들에게 유괴를 조심하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설마 내가 유괴를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얼마나 오래 이동했을까, 나를 들쳐 메고 있던 자가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배려 없는 손속에 어깨가 바닥과 강하게 부딪혀 나는 재갈을 깨물었다. 분명 멍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봉투가 벗겨지고 재갈이 입에서 빠져나갔다. 나는 콜록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마 가건물이나 폐건물 같은 곳으로 보였다. 다른 가구는 없었지만 이상한 위치에 있는 기둥 몇 개가 시야를 차단했다.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은 예닐곱 정도로, 전부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어딜 한가하게 구경하고 자빠졌어?”
한 남자가 내가 주변을 살피도록 순순히 놔두지 않고 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두피가 당겨지는 고통에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네가 왜 여기 왔는지 알긴 아는 거냐? 어?”
남자는 겁을 주려는 듯 내 머리채를 붙잡고 으름장을 놓았다.
“……웃, 그야 브라트카르토 때문이잖아요.”
내 대답에 당황한 듯 복면 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 외에는 달리 제게 이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이 없는걸요. 추측해 보건대…… 제가 준 정보의 진위를 의심해서, 혹은 정보의 출처를 알아 내려고겠죠. 아니면, 제가 위험인물로 여겨져서 제거하기 위해서거나.”
내 말에 삽시간에 공기가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내 대답이 그들이 기대하는 반응은 아니었으리라.
당연한 일이다. 보통의 10대 귀족 영애 중 유괴를 당하면 울거나 살려 달라고 빌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물론, 나도 무서웠다. 나도 비교적 평화로운 삶을 영위해 왔던 평범한 유치원 선생님에 불과했으며, 괴한들에게 납치를 당하는 일 같은 건 난생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쩐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극한 상황에서 오히려 냉정해진다는 것이 이런 걸까?
턱이 떨려 이가 딱딱 부딪치는 와중에도 주변의 풍경은 똑똑히 눈과 귀에 들어왔다.
두근거리는 심장과 대조적으로 뇌는 냉철하게 굴러갔다.
그렇다. 지금 나를 납치한 상대라면 브라트카르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10대 귀족 영애 주제에 성국과 제국의 기밀에 대해 줄줄 꿰고 있다니, 역시 지나치게 수상하게 보이긴 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고객에게 최상의 대접을 한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브라트카르토에서 고객을 납치하기까지 할 줄이야…… 내 예상 밖이었어.’
나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남자들이 당황한 기색으로 나를 흘끗거리고 있던 그때였다.
“비키세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남자들의 험악하고 거친 목소리와 달리, 맑게 허공을 울리는 청명하고 부드러운 음색.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나는 목소리 주인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설마…….’
남자들이 서둘러서 양옆으로 비켜섰다. 그 사이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반곱슬의 붉은 머리칼에 얼굴 한가득히 박힌 주근깨. 처진 눈매와 순한 눈망울. 그는 잘 봐 줘야 20대 초중반 정도의 젊은이였다.
게다가 품에는 끊임없이 꼬꼬꼬 소리를 내는 토실토실한 닭을 두 마리 안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누가 봐도 순박한 농사꾼 총각으로 보였다.
그는 미소 띤 얼굴로 다가와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이미 저희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대화가 빠르겠네요. 브라트카르토의 길드장, 페트로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순간 그의 입술이 비틀려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
“……라리아 셔우드 영애.”
가명을 썼지만 역시 들켰나 보다. 사실 브라트카르토의 정보력을 생각하면 예상 못 할 전개는 아니었다.
그는 손을 뻗어 내 뺨을 감싸 쥐었다. 나는 이마를 찌푸리며 불쾌감을 표시했지만, 그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흥미로운 추리였어요. 게다가 거의 정확했죠. 놀라운 정보력에 더불어 빛나는 지성까지, 인정해 드릴게요.”
“제게 원하는 게 뭐죠?”
내가 그의 말을 잘랐다. 그는 그런 사소한 일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대답했다.
“영애의 추리 중 두 번째와 세 번째…… 라고 하면 될까요? 제4 황자나 비밀리에 임명된 성녀까지 알고 있는 마당에 당신이 준 정보의 진위를 의심해서 뭐 하겠어요?”
나의 추리 중 두 번째와 세 번째.
‘정보의 출처를 알아내려고. 혹은…… 내가 위험인물로 여겨져서 제거하기 위해.’
페트로가 소탈하게 웃었다.
“아하하,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세요. 그냥, 궁금하잖아요? 평범한 19살짜리 백작 영애가 어떻게 황실과 성국의 특급 비밀을 알고 있느냐, 저는 그것이 알고 싶었던 거예요. 제국 수도의 재계를 장악하고 있다는 셔우드 백작조차 그 정도의 정보력은 가지고 있지 않을 텐데 말이죠.”
“……그래서 정보의 출처를 알려 드리면 저를 제거하시려고요?”
“으음, 어쩔까요. 영애가 정직하게 알려 주시기만 한다면 꼭 제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 이 세상은 소설이고 제가 그 소설을 썼어요. 그래서 알고 있는 것뿐이에요.”
“하하, 농담도 잘하시네요.”
이것이 진실인데 믿지 않는다니, 아무래도 글렀다.
내가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페트로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뭐, 순순히 말해 주지 않으리란 것 정돈 예상하고 있었어요. 영애도 말했지만, 지금 영애는 저희 브라트카르토의 너무나 큰 위험 요소이자 경쟁자예요. 생각해 보세요. 어마어마한 정보력을 가졌지만 그 출처는 알 수 없는 귀족 영애라니. 저희가 땀 흘려 일구어 온 정보 생태계를 망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 이유로 고객에게 최고의 대우를 한다는 브라트카르토의 명성도 포기하기로 한 건가요?”
“아니, 그럴 리가요.”
페트로가 픽 웃었다.
“어떻게 쌓아 올린 건데요. 하나 가르쳐 드릴게요, 영애. 명성이란 사실을 기반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에요. ‘정보’를 기반으로 생겨나죠.”
“…….”
“결국 아무도 모른다면, 상관없다는 거예요. 브라트카르토가 고객을 제거했다는 사실 말이죠. 알고 있는 사람은 오늘 여기서 죽을 테니까요.”
페트로가 좌우로 도열해 있던 사내들을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사내들이 감춰 뒀던 흉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목숨을 끊기보다는 오랜 시간 고통을 주는 데에 최적화된 물건들이었다.
“걱정은 마세요. 지금 당장 죽일 생각은 아니니까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그냥 죽여 버릴 수는 없죠. 깨 기름 짜듯이 짜낼 수 있는 데까지는 최대한 쥐어짜 봐야겠죠. 그래도 조금이라도 오래 살 수 있어서 좋죠?”
정말 이렇게 끝인가?
이렇게 죽는 건가? 어떻게 여기까지 살아남았는데…….
남자들의 그림자가 내 머리 위에 드리워지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문짝이 날아가 반대편 벽에 부딪혀 나동그라졌다.
당연히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기겁을 했다.
특히 페트로는 ‘엄마야!’라고 소리치며 닭 두 마리를 끌어안고 앞으로 엎어졌을 정도였다.
주인의 몸에 짓눌린 닭들이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자욱한 먼지 사이로,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가 고요를 찢었다.
“야, 이 자식들아!”
허공을 가르는 변성기 소년의 목소리.
‘설마?’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이곳에서 들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목소리였다.
나는 눈을 뜨고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아돌프였다!
아돌프는 엉망이 된 내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눈을 부릅떴다.
“이, 이 자식들이. 우, 우리, 우리 누님한테…… 감히 이런 짓을 해!”
아돌프는 그렇게 소리치면서 검을 빼 들었다. 고작 14살밖에 되지 않은 그였으나, 그 기세는 상당히 흉흉했다.
“아니, 설마!”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페트로가 소리쳤다.
“아돌프 셔우드? 14살에, 누나인 라리아 셔우드와는 사이가 아주 안 좋다는. ……게다가…….”
모든 일이 이루어진 것은, 페트로가 다음 말을 채 마치기도 전이었다.
“……제국 최연소 검술 마스터라는.”
그렇다. 아돌프는 마치 전광석화와 같은 몸놀림으로 내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곧 7명의 남자들이 나무토막처럼 차례차례 쓰러져 나가기 시작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고작 14살밖에 되지 않은 아돌프가 검으로 제국 최고 정보 길드의 길드원들을 하나하나 때려눕히고 있었던 것이다.
“뭐, 뭐야! 이 꼬맹이가!”
“으아악!”
남자들은 아돌프에게 덤벼들든, 도망치려 하든 상관없이 그의 검격에 무참히 쓰러져 나갔다.
“이 망할 자식들이! 감히 우리 누님을 건드려! 이 개자식들!”
역날검인지 피는 튀지 않았지만, 아돌프는 대단히 흉흉한 기세로 남자들을 두들겨 패고 있었다.
딱 봐도, 이 상황에 굉장히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어느샌가 모든 적들을 쓰러뜨린 뒤에야 아돌프는 멈춰 섰다.
“누님!”
그가 다급한 얼굴로 내게 달려왔다.
“누님, 다친 덴 없어? 혹시 저 새끼들이 무슨 짓 했어? 나, 너무 늦지 않은 거지?”
걱정하면서 나를 살피는 그 모습은, 솔직히 말해서 주인이 다쳤을까 봐 걱정하는 강아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흉흉한 얼굴로 남자들을 두들겨 패던 아까의 모습과는 놀라울 정도로 딴판이었다.
위기에서 살아난 것은 기쁘지만, 혼란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돌프가 대체 왜 이런 곳에? 게다가 왜 날 구해 준 거지? 아니, 싫어해도 가족이니까 구해 줄 수는 있다 쳐도…… 왜 저렇게까지 진지하게 날 걱정하는 거야?’
나는 어리둥절해하다가 옆에 있던 페트로를 보았다.
그는 넋이 나간 얼굴로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길드원들이…… 브라트카르토 최고의 전투 요원들이!”
자신의 자객들이 순식간에 쓰러진 것을 믿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구구국.”
페트로의 품에 안겨 있는 닭 두 마리는 주인의 마음은 추호도 모르는 듯한 멍청한 표정으로 끊임없이 그의 옷 카라를 쪼고 있었다. 덕분에 그에게서 느껴지는 황망함이 배가 되는 것만 같았다.
“아.”
넋을 놓고 있던 페트로는 어느 순간 나와 아돌프의 시선을 눈치챈 것 같았다.
“아…… 하하. 저, 정말 대단하시네요. 아, 아까 그건 그냥 이벤트였답니다. 아시죠? 고객님을 즐겁게 하기 위한 유흥이라고나 할까…….”
“…….”
“아무렴, 고객분들께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는 브라트카르토에서 고객님을 정말 진심으로 공격하겠어요? 그럴 리가요! 하, 하하. 그럼 전 이만. 즐거운 시간 되세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던 페트로는 잽싸게 도망치려 했…… 지만 아돌프에게 뒷덜미를 붙잡히고 말았다.
“히이이익!”
“가긴 어딜 가, 이 홍당무 새끼야. 감히 우리 누님을 위험에 빠뜨려놓고 내빼려고 해?”
페트로보다 키가 작은데도 아돌프에게서 느껴지는 압박감은 굉장했다. 나는 아돌프가 저렇게까지 무서운 얼굴을 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아돌프는 페트로의 덜미를 잡고 그를 그대로 벽에 패대기쳤다.
“크흑!”
“꼬꼬댁!”
금속성의 섬광이 번득이더니, 아돌프는 페트로의 바로 머리카락 옆 벽에 검을 찍어 버렸다.
움츠러드는 페트로를 조금도 봐주지 않고 아돌프는 그의 머리채를 잡아채며말했다.
“히이익!”
“죽여 버릴 거야. 감히 우리 누님한테 그런 짓을 해? 아주 작살을 내서 장례를 치를 시신도 못 찾도록 만들어 주마.”
‘새삼스럽지만 아돌프의 검술 실력도 그렇고, 저 성깔머리도 그렇고…….’
나는 생각했다.
‘나에겐 굉장히 많이 봐주고 있었던 거구나.’
셔우드가에서 지낸 일주일 동안 그가 나한테 끊임없이 걸어왔던 장난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발을 건다든가, 호박이니 뭐니 하면서 놀린다든가, 과자를 훔쳐먹는다든가, 유리창을 깨고 내가 깼다고 거짓말을 한다든가 했던 그 많은 일들…….
그리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 사방에 늘어져 있는 남자들. 죽은 것 같진 않지만 그들 모두가 팔다리가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거나, 얼굴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두들겨 맞은 상태였다.
‘나한테 했던 그것들은 정말 그냥 장난이었던 거구나.’
어처구니없지만 나는 그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제국 최고 정보 길드의 길드장으로선 의외지만, 페트로는 본인의 전투 능력은 전무한 것 같았다.
그는 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그, 그게요…… 사실은, 댁의 누님이…….”
나는 이쯤에서 슬슬 끼어들기로 했다.
딱히 페트로를 변호해 주고 싶었던 건 아니고, 그가 ‘당신 누나가 정보 길드보다도 엄청난 정보력을 가지고 있다’라고 불어 버리면 내가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아돌프, 그만하면 됐어.”
내 말에 아돌프의 눈썹 양 끝이 팔자 모양으로 떨어졌다. 그가 억울한 듯이 말했다.
“누님! 하, 하지만…… 이 개자식이 누님을……!”
“나도 알고 있어. 저 인간이 날 죽이려고 한 거.”
나는 페트로를 향해 삿대질했다.
“벌을 주지 말자는 게 아니고, 죽이는 것보다 더 나은 벌이 있지 않나 싶어서 하는 말이야. 저런 인간한테 죽음은 너무 편안한 결말이야.”
“저기, 댁이 더 무서운데요…….”
페트로의 말을 무시한 채 아돌프는 내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 그의 머리채를 놓았다.
“누님이 그렇다면.”
아돌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았다.
내가 셔우드가를 떠난 뒤의 그의 반응은, 단순히 집안 자산을 잃어버려 아까워하는 모습과는 달랐다.
셔우드가에 있던 일주일 동안, 내게 수도 없이 발을 걸며 낄낄거리던 철없는 천둥벌거숭이 같던 그가 어째서 이렇게 달라졌는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그 모든 생각들과는 달랐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내 말에 아돌프가 티 날 정도로 움찔 놀랐다. 그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거…… 검술 수업 끝나고 시장에 다녀왔을 뿐이야. 절대 시장에서 누님을 보고 따라간 게 아니라고.”
“……날 미행했어?”
“미행이라니! 난 그냥…… 누님이랑 한마디라도 하고 싶어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아는 아돌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인가 했는데, 저 단순무식함을 보아하니 그 아돌프가 맞긴 맞나 보다.
“다른 사람을 미행하는 건 나쁜 짓이야, 아돌프.”
“으으…… 미, 미안…….”
아돌프가 시무룩한 강아지 같은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내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
결국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토닥이며 말했다.
“어쨌든 고마워. 덕분에 내가 목숨을 구했어. 네가 날 따라오지 않았으면, 난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거야.”
아돌프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감동의 빛이 아롱거리는 것이 보였다.
고작 그 정도의 말에 얼굴을 복숭앗빛으로 상기시킨 채 그가 손으로 코를 쓱 문질렀다.
“헤헤, 이 정도쯤이야 뭘!”
그때였다.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는 모양인지 눈을 떼굴떼굴 굴리고 있던 페트로가 말했다.
“다, 당신들. 브라트카르토는 당신들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브라트카르토의 길드원들과 길드장인 저를 이런 꼴로 만들어 놓다니!”
“뭐?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매가 부족했냐?”
아돌프의 으름장에도 굴하지 않고 페트로가 촉새 입을 달싹였다.
“이건 폭행이고 영업 방해에 신체의 자유 훼손, 저희 길드에 대한 모욕이라고요. 길드 변호사를 통해 고소할 테니 그렇게 아세요.”
정말, 아까부터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자기들이 먼저 나를 유괴해 놓고 뭐, 폭행?
아마 이쪽이 14살에 19살이니까 법을 들먹이면 적당히 겁을 줄 수 있겠거니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나는 진짜 19살짜리 세상 물정 모르는 귀족 영애가 아니라 사회 경험이 많은 2N살이기에 그게 헛소리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지만…….
“뭐? 그건 안 돼! 제길, 아버지가 한 번만 더 사고 치면 집에서 쫓아내겠다고 했는데…….”
14살인 데다 단순무식의 화신인 아돌프에게는 그 수작이 먹혀든 모양이었다.
아돌프가 초조해하자 페트로는 의기양양해졌다. 화색이 도는 얼굴로 그가 말했다.
“자, 고소당하기 싫으시면 어서 저를 보내 주시죠!”
“으…… 으윽, 그건 안 돼……!”
이 한심한 상황에 나라도 어떻게든 대응해 보려던 찰나였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가 들리는군요.”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아돌프가 나타났던 문이었다.
“뭐? 말 같지도 않다니, 그게 무슨…….”
발끈하며 그쪽을 돌아본 페트로의 얼굴이 대리석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나는 그를 따라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보았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바로…….
시리도록 파란 눈동자 위에 외알 안경을 낀 백금발의 미남자.
움직임과 걸음 하나하나까지 우아하기 그지없는, 그야말로 귀족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그 남자는…….
바로 노먼이었다.
“민중을 보호해야 할 법으로 민중을 되레 억압하려 하는 말이 제대로 된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를 알아봤는지, 페트로가 입을 떡 벌렸다. 그가 당혹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노먼 셔우드 자작, 27세. 최연소 수석 법관이자 최고로 유력한 차기 최연소 법무부 장관!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오늘도 설명 감사합니다, 페트로왜건 씨.
노먼은 이쪽으로 걸어오더니 아돌프에게 말했다.
“한참 찾았다, 아돌프. 장을 보다가 멋대로 사라지다니.”
“아 참, 깜빡했네. 어쩐지 뭐가 빠진 것 같더라.”
아니, 지갑도, 모자도 아니고. 형을 막 빠뜨리고 다녀도 되는 거야?
노먼은 얼어붙도록 차가운 눈으로 페트로를 훑었다. 그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책을 뒤적이며 말했다.
“방금 폭행, 영업 방해, 신체의 자유 훼손, 길드에 대한 모욕이라고 하셨습니까? 우선 제국법 제24조 17항에 따르면,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방금 제 여동생을 암살하려 하였고 그 증인과 증거물이 충분하니, 아돌프의 폭력 행위는 누이를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로 판단됩니다.”
“…….”
“또한 제국법 제45조 68항에 따르면, 모욕죄의 대상은 개인 및 정당한 절차를 거쳐 황실에 승인받은 법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브라트카르토는 사업자등록을 거치지 않은 불법 영업 업소인 것으로 판단, 모욕죄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영업 방해와 신체의 자유 훼손의 경우…….”
현직 법관인 노먼은 법 조항을 대면서 페트로의 궤변을 하나하나 논파해 나갔다.
“……오히려, 이쪽에서 페트로 씨에게 적용할 죄목이 있습니다.”
“뭐, 뭐라고요?”
몸과 정신 모두 너덜너덜해진 페트로를 앞에 두고 노먼은 최후의 선고를 내렸다.
“불법 영업, 범죄 길드 운영, 탈세, 정보 절도, 납치, 고문 미수, 살인 교사 미수, 협박, 귀족 능멸 죄! 어디, 아직도 할 변론이 있습니까?”
털썩.
결국 내가 개입하기도 전에, 페트로는 이 먼치킨 형제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는 없었다.
“신뢰가 최대의 자산인 정보 길드에서 고객을 공격하다니,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브라트카르토의 다른 고객들이 이 일을 알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지 무척 궁금합니다.”
노먼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살벌하게 비꼬았다.
“정보 길드, 그거 별거 아니구만? 최고의 전투 요원이라는 놈들이 내 손에 묵사발 나고. 불만 있냐, 엉? 아주 먼지 한 톨 안 남기고 탈탈 털어 주랴?”
아돌프가 칼집을 바닥에 쿵 소리 나게 내리찍으며 윽박질렀다.
페트로는 그런 그들 앞에 무릎 꿇고 납작 엎드려 있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무엇이든 할 테니, 이 일은 부디 비밀로 해 주시면…….”
“꼬꼬댁, 꼬꼬꼬꼬.”
무엇이든 한다고? 이 모습을 관망하고 있던 내 머릿속에 번득이는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면서 말했다.
“잠깐, 오라버니. 그리고 아돌프. 잠깐 내가 이야기 좀 할게. 내가 최대의 피해자니까 괜찮지?”
“어? 그, 그렇긴 하다만은…….”
노먼과 아돌프는 그리 탐탁지는 않은 얼굴이지만 결국 내 말에 살짝 옆으로 비켜 주었다.
“야! 누님한테 허튼수작 부리면, 뼛조각 하나 안 남길 줄 알아!”
으름장 놓는 아돌프를 뒤로하고, 나는 페트로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든 하신다고 했나요? 정말 저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나요?”
“그, 그러믄요. 이번 일을 비밀에 부쳐 주시기만 한다면 저 페트로, 영애를 위해 뭐든지 하겠습니다.”
페트로는 군기가 빡 들어간 모양새로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흐음.”
그가 나를 죽이려고 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제국 최고 정보 길드의 길드장이다. 굉장히 이용 가치가 많다는 뜻이다.
특히나, 녹턴의 광증을 치료할 방법을 찾고 있는 나에게는 말이다.
“좋아요. 당신에게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묻지는 않을게요.”
“저, 정말이요?”
“아니, 라리아!”
“누님!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손을 들어 올려 노먼과 아돌프를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는, 싸늘한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대신, 죽는 게 더 나았겠다 싶을 정도로 부려먹을 테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예요.”
페트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도 이번 일이 공론화되어 그동안 쌓아 뒀던 브라트카르토의 모든 명성이 날아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리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불법 길드에 시킬 일이라면 나라도 도와줄 수 있다.”
노먼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노먼 셔우드 자작의 영향력도 물론 꽤 크지만, 아무리 그래도 브라트카르토만큼은 아니었다.
게다가 합법적인 행동의 한계는 꽤 명확한 법이다.
아무리 노먼이라고 해도 자칫하면 블랙웰 대공가와 척을 질 수 있을 법한 일은 할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그것을 원치 않기도 했고.
“계약은 성립되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품에서 수정구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혹시 몰라서 가져온 영상석이었다.
셔우드가에서 가져온 패물 중 가장 비싼 것들을 팔아 구한 것이다. 나는 지금껏 일어난 모든 일들을 이 영상석으로 몰래 녹화하고 있었다.
정말로 ‘혹시 몰라’ 대비책으로 구해 온 것인데,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이야.
노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페트로에게 경고했다.
“이번 계약을 어기고 내 누이에게 적대적으로 나온다면 그때는 정말로 제국법의 철퇴를 맞을 것이니 그리 아시오. 누이의 뒤에 누가 있는지 결코 잊지 마시오.”
“내 칼도 같이 맞을 테니까 잊지 말라고.”
노먼과 아돌프의 경고에, 페트로는 자신 있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트카르토의 모든 신용을 걸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그는 부리나케 도망가 사라져 버렸다.
꽁무니 빠지게 도망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모든 일이 정리되자, 노먼이 그동안 미뤄 왔던 질문을 했다.
“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이냐, 라리아? 브라트카르토와 네가 계약을 했다니?”
“그러니까! 누님, 저런 야비한 범죄자들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들에게 정말 큰 도움을 받은 건 맞지만 차마 그에 대해선 말할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그에 대해 설명하는 건 곤란해요. 제 사생활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노먼은 이마를 감싸 쥐었다. 콩가루 집안이긴 하지만 의외로 신사다운 일면이 있었는지, 사생활이라고 하니 더 캐묻지는 않았다.
아니면 그동안 라리아를 냉대했던 일에 죄책감이라도 가지고 있었든가.
결과적으로는 괜찮은 노예…… 아니 인력을 얻었고, 죽을 뻔한 목숨도 살아났지만.
나를 구해 준 사람이 하필 이 두 사람이라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큰일 났네. 셔우드 가문에 빚을 지고 말았어.’
하필 다른 누구도 아닌 셔우드 가문이었다. 나를 끌고 가고 싶어 하는 그 셔우드.
‘그래도, 죽는 것보다야 낫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곤 입을 열었다.
“절 도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혹시, 제게 원하는 거라도 있으세요?”
나는 당연히 그들이 나를 데려가겠다고 할 줄 알았다. ‘자신들이 구해 준 목숨이니 자신들에게 권리가 있다’거나, 그런 말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들이 말한 것은…… 정말 의외의 것이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 라리아. 지난번 아버님께서 너를 강압적으로 끌고 가려고 했던 일을 아직 염두에 두고 있겠지.”
나는 깜짝 놀라 노먼을 보았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 드러나 있는 감정은…… 놀랍게도, 비통함과 죄책감이었다.
“나는 네 의사에 반해 너를 강제로 데려갈 생각이 없다.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 라리아. 하지만…… 적어도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이라도, 우리 가족과 대화를 나눌 순 없겠니?”
“대화…… 라고요?”
“그래. 네가 셔우드를 떠난 이후로 우린 너무나 감정적이었기에 깊은 대화를 한 번도 나누어 보지 못했지. 그러니 지금이라도, 딱 한 번만 기회를 주렴.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다.”
너무나 의외의 제안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말도 안 돼. 내 의사를 존중하려고 하고 있잖아?’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것이 나를 끌고 가려는 수작질인지, 진심인지에 대해서.
하지만 그들의 표정에 거짓은 없었다. 더군다나, 나를 끌고 가려 한다면 진작 끌고 갔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만한 힘과 권력이 있으니까.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곧 편지를 보낼 테니, 그때 약조를 잡죠.”
“누님……!”
“라리아…….”
순간 아돌프와 노먼의 얼굴이 얼마나 밝아졌는지.
특히, 늘 냉정하게 굴던 노먼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기쁜 얼굴을 하곤 다가와 내 손을 꽉 쥐었다.
“정말, 정말 고맙다, 라리아. 네게 죄를 지은 우리에게 이런 기회를 주어서.”
“뭐, 뭘요. 오라버니와 아돌프가 절 구해 주신 건 사실이니까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그들은 나를 블랙웰 대공저까지 데려다주었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이후, 나와 셔우드가 사이에 몇 번의 편지가 오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