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20)

(5)

* * *

아이들이 예법 수업을 듣는 동안, 나와 메리는 잠시 휴식을 취하러 가고 있던 차였다.

복도의 꺾어진 코너 앞에서 하녀들이 쑥덕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어젯밤도 그랬다니까. 벌써 2주째야.”

“어머, 어머. 정말 뜨거운 사이이신가 봐!”

“2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대낮부터 대체 무슨 대화를 하고들 있는 걸까?

아주 사적인 대화를 나누고들 있는 것 같아서, 방해가 되지 않도록 다른 길로 돌아갈까 생각이 든 찰나.

내 귀에 아주 익숙한 말이 박혀 들었다.

“그렇다니까, 주인님과 그 약혼녀 말이야!”

발걸음이 저절로 우뚝 멈춰 섰다.

그러니까, 저들이 나누고 있는 대화의 주어가 나와 녹턴이란 말인가?

그런데 나와 녹턴은 그렇게 뜨…… 거운 사이도 아닐뿐더러, 그런 행각을 보인 적도 없는데?

내가 그들이 왜 그런 오해를 한 건지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매일마다 주인님의 침실에서 만나시다니…… 정말 뜨거운 사랑을 하시는 게 틀림없어!”

“두 분이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는 소문이 진짜였던 거야!”

“어쩜, 너무 로맨틱하다!”

아, 미치겠네. 그제야 그들이 오해를 한 이유를 깨달았다.

내가 매일 밤마다 녹턴의 방을 들락인 것이, 뜨거운 밀회의 시간(?)을 가진다고 왜곡되어 소문이 퍼진 것이다!

왜 진작 예상하지 못했을까?

이제 생각해 보니 약혼 관계의 남녀가 매일 밤마다 방에서 만난다니, 그런 소문이 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소문을 알고 있는 걸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사용인들 사이에서의 소문은 매우 빠르게 퍼진다.

매일 반복되는 노동만 하는 그들이 즐길 만한 것은 남의 가십 정도밖에 없으니까.

보통 저택 전체에 소문이 퍼지는 데에는 3~4일이면 충분했다.

그러니까,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해도…….

‘2주나 지났으니, 대부분의 사용인들이 이 소문을 알고 있겠네!’

얼굴이 확확 달아올라 불타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면 뻥 하고 터져 버리거나.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째서 하녀들이 유난히 나를 안주인 대접했는지, 집사 시몬은 왜 내게 집안 대소사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고 내 방을 옮기는 데 집착했는지.

그야, 약혼 관계인데 같은 집에서 살고 있을뿐더러 매일 밤 동침까지 한다면, 이미 사실혼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다들 이미 내가 정식 대공비나 다를 바가 없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내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로 멍하니 서 있자, 메리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팔을 걷어붙였다.

“저, 저 녀석들을 그냥……!”

암만 봐도 하녀들과 담판을 지으려고 하는 것으로 보여서 나는 황급히 메리를 말렸다.

“아니야, 메리. 이런 일로 네가 싸울 필요는 없어.”

“하지만, 아가씨……!”

나는 진심이었다. 사실 나는 사용인들이 내 얘기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 가지고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었다.

반복되는 노동으로 언제나 바쁘고, 놀 거리가 부족한 그들의 작은 즐거움을 굳이 뺏고 싶지는 않았다.

나에 대해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사실 아까의 대화 내용도 오해가 심각해서 그렇지 나에 대해 악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진 않았으니까.

“주인님은 무서운 분이신 줄만 알았는데 그런 로맨틱한 구석도 있으셨다니 미처 몰랐다니까.”

“나도 그런 운명적이고 뜨거운 사랑을 하고 싶어!”

“앗, 이러다 늦겠다. 혼나기 전에 어서 가자, 애들아.”

나와 메리가 가만히 있는 동안, 하녀들은 나와 녹턴 간의 있을 수 없는 러브스토리에 대해 떠들어 대며 자리를 떠났다.

그들의 명랑한 웃음소리와 발걸음 소리는 점차 멀어지더니 어느샌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나는 침실로 돌아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걸 대체 어쩐다.’

이미 저택 내에 나와 녹턴이 매일 밤마다 동침한다는 소문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오해는 풀어 주고 싶었다. 내가 부끄럽기도 할뿐더러, 녹턴의 혼삿길이 막히는 것도 걱정이 되었다.

‘녹턴이 문란하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그건 생각만 해도 억울했다.

‘녹턴은 문란한 남자가 아니야! 걔는 평생 여자 손 한 번 안 잡아봤단 말이야!’

하지만 별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다.

내가 일일이 사용인들을 붙잡고 해명하고 다닌다고 해도, 모양새도 웃길뿐더러 믿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나 같아도 안 믿을 것 같았다.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해 보았으나 좋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고, 그러는 동안 아이들을 데리러 갈 시간이 되었다.

예법 수업이 끝난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뒤, 나는 이 고민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육아란 다른 생각을 하면서 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일이 아니니까.

바쁘고 즐거운 하루가 지나고, 그날 밤.

“나 자기 시러.”

내가 지은 옛날이야기를 한 개 들려주었는데도 아이들은 오늘따라 잠투정이 심했다.

투정을 부리는 모습조차 귀여워, 나는 빙그레 웃으며 아이들의 뺨을 쓸었다.

“공녀님이 오늘따라 왜 꿈나라로 가기 싫으실까? 이야기 하나 더 들려드릴까요?”

하지만 자네트가 원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런 게 아닌 것 같았다.

손등으로 졸린 눈을 부비던 미하일이 끼어들었다.

“나는 라리아랑 가치 자구 시퍼.”

자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이 애들은 잠을 자기 싫은 것이 아니라 둘이서만 자기가 싫은 모양이었다.

귀여워라.

괜히 웃음이 나왔다. 떼를 쓰는 것이 어린애답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아닌 하필 나를 콕 짚어 같이 자고 싶다고 하는 것도 무척 기뻤다.

그만큼이나 이 아이들이 나를 엄마처럼 의지하는 것 같아서.

이 귀여운 아이들을 끌어안고 같이 잠에 드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그러마 할 수도 없었다.

많은 수의 어린이들이 엄마 아빠와 함께 잠에 드는 한국과 달리 서구에서는 갓난아기일 때부터 부모와 다른 방을 쓰지 않던가?

이곳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에서는 어린아이가 어른과 잠을 자는 일에 익숙해지면 독립심이 떨어진다고 여겼다.

한낱 사용인인 내가 고용인의 교육방침을 함부로 건드리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웃으며 아이들을 달랬다.

“우리 공녀님, 공자님이 저랑 같이 주무시고 싶으시군요? 그래도 그건 안 돼요. 우리 푹 자고, 내일 아침 볼까요?”

“이잉, 시러!”

“가지 마, 라리아! 가치 이써!”

한데 아이들의 투정은 오늘따라 거셌다. 아무리 달래도 말을 듣지 않았다. 심지어 간식이나 도장으로 유혹해도 마찬가지였다.

‘얼른 달래서 재우고, 녹턴의 방에도 가야 하는데…….’

벌써 평소 녹턴을 찾아가는 시간보다 한참을 늦어 버렸다. 조바심이 든 나는 어떻게든 아이들을 달래 보려 했다.

“나중에 훌륭한 어른이 되려면 혼자 자는 법도 알아야 해요. 오늘은 푹 자고, 우리 내일…….”

그때였다. 씨익씨익 거리던 자네트가, 내 말을 끊고 이렇게 소리쳤다.

“치사해, 라리아! 아버지랑은 맨날 가치 자면서!”

“마자!”

미하일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리고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이 애들, 대체 그 소문을 어떻게 안 거야?’

자네트와 미하일은 고작 5살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같이 잔다.’라는 말의 뜻을 문자 그대로 같은 침대에서 잠만 잔다는 걸로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그 소문을 들었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다.

애들에게서 그런 말을 들어 버린 나는 도저히 표정을 관리할 수가 없었다.

또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시한폭탄처럼 새빨개졌다.

“아, 아니. 오, 오해예요! 저랑 전하는 같이 안 자요. 매일 전하를 재우기만 하고 나오는걸요?”

“거짓말!”

“정말이에요! 전하께는 노래만 불러 드릴 뿐이라고요.”

하지만 아이들은 조금도 귀담아듣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해명하면 해명할수록, 아이들의 떼는 더 심해질 뿐이었다.

“라리아 미어! 아버지랑은 가치 자면서 우리랑은 안 자구!”

심지어 미하일은 커다란 눈에 눈물을 잔뜩 매달고 울먹이기까지 했다.

“라리아는, 훌쩍…… 우리 시러?”

“아니요, 공자님. 그럴 리가요!”

“훌쩍…… 근데 왜…… 우리랑 자기 시러……?”

같이 자기 싫은 게 아니라, 어른들의 사정이 있는 것뿐이라고요!

하지만 아이들이 어른들의 사정 따위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나두 라리아랑 아버지랑 가치 자꺼야!”

“나두!”

이 난장판을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나름대로 아이 돌보기에는 잔뼈가 굵은 나였지만 살다 살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서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나와, 셔우드 영애와 한 침대에서 자고 싶다고?”

낮은 목소리가 소란을 갈랐다. 나와 아이들은 동시에 문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하……!”

내가 중얼거렸다.

우리의 시선 끝에는, 가운 차림의 녹턴이 문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특유의 강렬한 눈빛으로 아이들을 쏘아보았다.

“한 번이면 충분한가?”

“…….”

“자네트, 미하일. 대답해라. 한 번이면 충분하냐고 물었다.”

갑자기 이곳에 녹턴이 나타날지는 상상도 못 했는지, 아이들은 완전히 넋이 빠졌다. 미하일은 어찌나 놀랐는지 딸꾹질까지 하고 있었다.

“……네.”

그래도 누나라고, 자네트가 용기를 내어 대답했다.

딸의 대답에 녹턴은 제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대답했다.

“한 번 정도는 어려울 것도 없지.”

지독히도 오만한 말투로 그가 말했다.

“그럼 내일 밤으로 하지. 자네트, 미하일, 셔우드 영애, 그리고 내가 모두 한 침대에서 자는 거다.”

5살배기 딸에게 하는 말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권위적인 말투였지만, 내가 더욱 믿을 수 없었던 건 그 말의 내용이었다.

뭐라고? 애들과 나, 게다가 녹턴까지 네 사람이…….

전부 한 침대에서 잔다고?!

그런 내 마음은 꿈에도 모르는 것 같은 고고하고 오만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며, 녹턴이 말했다.

“이걸로 되었나?”

“…….”

“…….”

그 자신감 넘치는 태도 때문일까, 아이들이 그를 무서워하기 때문일까.

자네트와 미하일은 그의 말에 얼빠진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전만 해도 그렇게 생떼를 부리던 아이들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순한 태도였다.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본 녹턴은 내게 손짓했다. 따라오라는 표시였다.

나는 아이들의 눈치를 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녹턴에게 다가갔다.

그가 내 팔을 가볍게 쥐었다. 내 팔을 감싼 단단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럼 오늘은 그만 자도록.”

녹턴은 그렇게 말하고 방문을 닫았다. 닫히는 문 너머로 아이들이 얌전히 이불을 덮고 눕는 것이 보였다.

함께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우리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 걸까. 정말 이래도 되나?

내가 아이들을 달래지 못해서 그가 그런 약속을 한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어쩌면 그는 별로 원하지 않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혼자서도 잘 잠에 들지 못하는 사람인데 세 명이나 옆에 누운 상태로 그가 어떻게 푹 잘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았기에 도와준 것일 터다. 그는 성격 나쁜 듯하면서 내심 배려심 있는 사람이니까.

‘더군다나 나와 녹턴이 한 침대에서 자다니…….’

생각만 해도 민망해서 얼굴이 홧홧 달아올랐다.

나는…… 뭐, 싫지 않지만. 문제는 녹턴이다. 나야 평생 독신으로 살 거라지만 그의 혼삿길을 막아 버릴지도 모르지 않는가.

‘안 그래도 매일 동침하는 사이라고 소문이 쫙 났는데, 이렇게 되면 완전히 기정사실화하는 거잖아.’

내 행동이 원작을 크게 비틀어 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 행동 때문에 만약 녹턴의 광증이 치료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다 왔다.”

내 머리 위로 그의 낮은 목소리가 툭 굴러떨어졌다.

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녹턴의 침실 문이 눈앞에 있었다.

녹턴은 문을 열고 나를 먼저 들여보냈다.

그가 내 팔에서 손을 뗄 때에야, 나는 그가 여전히 내 팔을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쩐지 팔 위로 그의 따뜻한 체온이 남은 것 같아, 괜히 그 부분을 문질렀다.

등 뒤에서 문이 덜컥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그의 침실에 들어온 게 한두 번도 아니면서. 대체 왜 새삼…….

‘왜 이렇게…… 긴장이 되지?’

이렇게, 처음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나는 걸까?

“화가 났나?”

그때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녹턴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미간이 조금 좁아져 있는 것이, 조금 짜증이 난 것 같기도 했고, 부끄러운 것 같기도 했다.

“네? 그게 무슨…….”

정말이지 생각도 못 한 말과 반응이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할 수밖엔 없었다.

한데 녹턴은 되레 기가 막혀 하는 것 같았다. 그는 혀를 쯧 차더니, 제 앞머리를 헝클어뜨리곤 이렇게 말했다.

“아무 말도…… 없었지 않나. 오는 내내.”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는 데에는 몇 초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몇 초가 지나서야, 나는 가까스로 깨달았다.

‘복도에서 내가 말이 없었던 게 화가 나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하는 거구나!’

깜짝 놀랐다. 나는 그가 원하지 않는 일을 약속하게 되어 기분이 상했을까 봐 걱정했는데, 그는 그 나름대로 내가 화가 났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건방지고 오만한 사람이며, 대륙의 황제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권력의 소유자인 그가 나 같은 한낱 시녀가 기분 상해할까 봐 걱정했다니.

그것은 어쩐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왜일까? 괜히 웃음이 나고, 가슴 속이 간질간질했다.

나는 얼른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니에요, 전하! 그럴 리가요. 전하의 뜻은 알고 있어요. 절 도와주시려고 그러신 거잖아요.”

“…….”

그제야 딱딱하게 굳어 있던 녹턴의 얼굴이 말랑말랑해졌다. 그가 훨씬 풀어진 눈매를 하곤 물었다.

“……화 안 났나?”

“그럼요! 제가 복도에서 말이 없었던 건 그냥…… 전하께서 귀찮으실까 봐 걱정하느라 그랬던 것뿐이에요.”

“귀찮다니…… 날 뭘로 보는 거지? 난 내가 하기 싫은 일은 약조하지 않는다.”

아, 네. 어련하시겠어요…….

어쨌든 다행이었다. 오해는 금방 풀렸고, 아무도 화가 나거나 기분이 상하지 않았으니까.

다만 아직 문제가 하나 있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이건 진짜 약혼 관계도 아니고……. 전하께서 나중에 새로운 신붓감을 찾으시면.”

나는 계속 신경 쓰이던 것을 물었다. 하나 녹턴은 코웃음 치며 일축했다.

“까짓 잡스러운 소문에 신경 쓸 내가 아니다.”

정말이지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다.

하긴, 블랙웰 정도의 권력이라면 원치 않는 소문은 퍼지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언제나와 같이 그를 재우기 위해, 녹턴은 침대에 눕고 나는 그의 옆에 앉았다.

노래를 부르기 위해 목을 고르는데, 녹턴이 물었다.

“정말 괜찮겠나?”

“네? 뭐가요?”

“같이 밤을 보내는 것 말이다.”

그도 아이들을 달래 주려고 충동적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신경이 쓰이긴 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보통의 귀족 영애라면 아이들이 중간에 끼어 있다고 해도 외간 남자와 같은 침대를 쓰는 일이 쉽지 않을 테니까.

그것도 그 상대가 표면적 약혼남인 녹턴이라니. 나라고 떨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왠지 괜찮을 것 같았다. 부담스럽거나 싫지 않았다.

나는 빙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당연히 괜찮죠. 단둘도 아니고, 공자님이랑 공녀님도 있는걸요.”

녹턴은 천장을 응시하던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런가.”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결 온화해진 얼굴, 나직한 목소리. 녹턴이 안심하는 것 같기에, 나는 그에 쐐기를 박 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게다가 절 도와주시려는 것 외에 다른 마음은 하나도 없으시다는 거 당연히 아는데요.”

“큽.”

천천히 눈을 감으려던 그가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보았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기분 탓일까? 그가 내 시선을 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내 시선을 분명 느꼈을 텐데도, 그날 밤, 그는 끝끝내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렇게 밤이 깊어 가고, 마침내 날이 찾아왔다.

바로 나와 녹턴, 그리고 아이들, 이렇게 네 명이 한 침대에서 자는 날이.

‘나름대로 공식적인 첫 합방의 날이긴 하지.’

내가 오늘 밤은 녹턴과 아이들과 함께 잔다고 말했을 때, 메리도 다른 하녀들도 모두 경악했다.

그리고…….

‘그렇다곤 해도 엄연히 아이들도 있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아가씨의 기념할 만한 첫 합방이니까, 최고로 아름답게 만들어 드릴게요!”

“손톱의 큐티클까지, 머리카락 끝까지 완벽하게 손질해 드릴게요!”

“아가씨, 목욕물에는 장미수를 넣어 드릴까요? 아니면 백합? 프리지아?”

하녀들은 어마어마하게 각오가 들어간 태도로 나를 씻기고 마사지하고 찜질하고 바르고 입혔다.

그야말로 손톱 아래의 큐티클 하나, 상한 머리칼 한 가닥 내버려 두지 않을 것처럼, 팔꿈치 주름까지 깨끗하고 매끈하게 만들어 버렸다.

물론 나는 절대 그럴 필요 없다고, 아이들과 같이 한 침대에서 잠만 잘 뿐이라고 항변했으나…….

그녀들은 결코 듣지 않았다.

마침내 모든 과정이 끝난 뒤,

“어쩜, 정말 아름다우세요!”

“주인님께서도 깜짝 놀라실 거예요!”

하녀들이 내 모습을 보고 꺄악꺄악 환성을 질렀다.

마침내 거울 앞에 섰을 때, 나는 그들의 반응을 조금쯤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밀빛을 띄는 베이지색의 머리카락은 샴푸 CF처럼 한 올도 상한 구석 없이 윤기가 흘렀다.

잡티 하나 없는 흰 피부 위로 발그레한 뺨이 사랑스러웠다. 옅은 화장을 한 입술은 촉촉하고 자연스러운 붉은 기가 돌았다.

피부가 좋아져서 그런지 둥글고 순한 눈매와 선명한 청록색의 눈동자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새하얀 순백의 원피스 잠옷을 입고 있는 라리아는 내가 봐도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정말 굉장한 솜씨라고밖엔 할 수 없었다.

라리아는 원래도 꽤 예쁘장하게 생겼지만 오늘만큼은 날개 없는 천사에 비견해도 좋을 것 같았다.

‘게다가 좋은 향기도 나. 이게 무슨 향수일까?’

킁킁거리고 있는데, 하녀들이 내 등을 떠밀었다.

“시간이 되었어요, 아가씨. 늦기 전에 어서 가셔요!”

“그래요. 주인님의 마음을 사로잡을 시간이에요!”

뭔가 미친 소리가 들린 것 같지만 나는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도와줘서 고마워. 다녀올게.”

“네! 아가씨, 힘내세요!”

“아가씨, 응원할게요!”

이제 보니 그네들은 녹턴과 나 사이 로맨스 스토리의 열렬한 추종자인 것 같았다.

나와 녹턴의 관계를 응원하느라 이렇게까지 온 정성을 다한 것이리라.

‘미안하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일은 절대 없을 텐데…….’

녹턴의 침실로 가기 전에 나는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 내가 준비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메리가 챙기고 있기로 했었다.

나는 아이들의 침실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공녀님, 공자님. 저 왔어요.”

우당탕탕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문이 벌컥 열렸다.

“라리아!”

귀여운 잠옷을 입은 아이들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뛰쳐나왔다.

상기된 뺨과 밝은 얼굴을 보니, 근 몇 주 만에 제일 들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은 문을 열고 뛰쳐나오더니 내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게 달려와 안길 줄 알았는데, 그러기는커녕 우뚝 멈춰서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고, 공자님, 공녀님!”

아이들을 보고 있던 메리가 뒤늦게 방 안에서 달려 나오다가, 또 나를 보고 놀란 얼굴로 멈칫했다.

‘하긴, 내 이런 모습이 낯설기는 하겠지.’

되도록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괜히 민망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마, 많이 이상해요?”

“……예쁘다.”

넋을 놓은 듯한 목소리. 그것은 자네트의 목소리였다.

깜짝 놀란 내가 내려다보자, 자네트가 헙 하면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아마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인 모양이었다.

“나, 난 아무 말두 안 해써!”

자네트의 귀여운 발뺌에 나는 그만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자네트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메리의 치마폭에 숨어서 날 쏘아보았다.

“라리아, 너무 귀여워!”

미하일은 초록색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내 다리를 끌어안았다. 나는 그런 미하일을 꽉 안고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이럴 땐 ‘예쁘다’라고 하는 거예요, 공자님. 그래도 고마워요.”

“헤헤, 라리아, 너~ 무 예뻐!”

이런 걸로 일희일비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순수한 칭찬이 기쁘지 않을 순 없었다.

나는 자네트와 미하일의 손을 잡고 메리를 돌아보았다. 메리는 날 향해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좋은 밤 되세요, 아가씨. 그리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응, 메리도.”

아이들과 함께 메리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 우리는 진짜 목적지로 향했다.

바로 녹턴이 기다리고 있는 그의 침실 말이다.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자꾸만 바짝바짝 목이 탔다. 아이들과 잡고 있는 손바닥에 자꾸만 땀이 차서 신경이 쓰였다.

심지어 벽에 걸린 거울이 보이자, 그걸 보고 잠시 옷매무새를 정돈하기까지 했다.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나니 머리가 헝클어진 것 같고, 머리도 정돈하고 나니 이번엔 화장이 번진 것 같고…….

‘이게 대체 뭐 별거라고. 그의 침실에 처음 가보는 것도 아니고…….’

내가 대체 뭣 때문에 이렇게까지 긴장하고 있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냥, 한 침대에서 같이 자는 것뿐인데…….’

그런데 그때였다. 계단 앞에 서자, 미하일은 계단을 쭉 올려다보더니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 안아 줘, 라리아.”

왜 그 말을 안 하나 했다.

미하일은 유난히 걷는 걸 싫어하는데 특히 계단을 제일 싫어한다.

제 발로 걸은 걸음이 열 걸음이 넘을라치면 꼭 안아달라거나 업어달라는 말을 하곤 했다.

“머어? 미하일, 엄살쟁이! 이게 머가 힘들다구.”

옆에서 자네트가 핀잔을 주었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 평소라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안아 주었을 텐데…… 오늘은 예쁘게 단장을 하고 옷매무새까지 고쳐서 그런지 미하일을 안아 주는 것이 조금 주저됐다.

미하일을 안아서 계단을 오르고 나면 옷매무새도 엉망이 되고 머리카락도 헝클어질 것이 뻔하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곧 깨달았다.

‘이런 걸로 고민하다니, 나답지 않았어.’

아무래도 주변에서 하도 띄워 줘서 나까지 헛바람이 조금 든 것이 분명했다.

“그래요, 공자님. 안아 드릴게요. 자…….”

내가 미하일을 안아 올리기 위해 팔을 벌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

내 손이 미하일에게 닿기도 전에, 그의 몸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깜짝 놀란 내가 시선을 옮겼다. 미하일을 나 대신 들어 올린 사람은 바로…….

“대공 전하?”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중얼거렸다.

내 시선 끝에는 녹턴이 있었다. 그는 미하일을 들어 올린 채, 엄한 얼굴로 이렇게 꾸중했다.

“셔우드 영애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재송해요.”

그의 두 손에 어깨를 끼워 들려 올려진 미하일이 시무룩한 강아지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미하일이 겁먹을까 봐 걱정했지만, 그동안 몇 번이나 함께 다과를 먹으며 친해지기 위해 노력한 덕일까?

미하일은 풀 죽긴 했지만 예전만큼 겁에 질리진 않은 것 같았다.

녹턴은 미하일을 제법 능숙하게 안아 들었다. 내가 가르쳐 주었던 ‘아이를 편안하게 드는 자세’ 그대로였다.

“이만 가지.”

그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곤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의 품에 안긴 미하일의 얼굴은 꽤나 편안해 보였다.

우리는 녹턴의 침실에 들어섰다.

“와아!”

아이들은 양부의 침실에 처음 들어와 봤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곤 여기저기 탐험하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공자님,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공녀님, 여기 있는 물건 부수시면 안 돼요. 아셨죠?”

덕분에 애들을 돌볼 의무가 있는 내가 바빠졌다.

잠시 아이들이 사고 치지 않도록 보고 있던 나는, 녹턴의 낌새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그가 유난히 내게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시험 삼아 그에게 다가가 보았는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랑 눈이 마주치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전하, 왜 그러세요?”

그런 그가 의아해서 나는 그에게 좀 더 바짝 다가갔다.

그러자 턱 하고 내 어깨에 무언가가 걸렸다. 그의 손이었다.

“잠깐.”

녹턴이 내 어깨를 붙들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느라고 목 근육이 더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내게 다가오지 마.”

“네? 대체 왜 그러시는데요. 어디 편찮으세요?”

저렇고 고개를 이상하게 돌리고 있다니, 목에 담이라도 왔나?

하나 내 걱정스런 질문이 무색하게도, 그의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녹턴이 내 어깨를 잡지 않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영애에게서…….”

“저요?”

“그래, 영애에게서…….”

그다음으로 들린 말은 아주 작아서 꼭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좋은 향기가 나서.”

그의 들어 올린 손 뒤로 언뜻 보인 목과 귀는, 선명한 분홍색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칠렐레팔렐레 돌아다니던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

‘오늘 같이 자는 걸 엄청 의식한 것처럼 보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손발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에게서 괜한 오해라도 사면 어떻게 하지?’

왜 이걸 생각 못 했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하녀들에게 좀 미안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전부 거절하고 평상시 같은 모습으로 올 걸 그랬다.

나는 그에게서 조금도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내가 그를 유혹해서 분수에도 맞지 않는 대공비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거나 하는 오해라면 최악이었다.

가뜩이나 자신을 유혹하는 여자들에게 신물이 나 있을 그가 아닌가?

“아, 그게 말이죠. 이건 다 하녀들이…….”

한데 사정 설명을 하려고 해도 뭔가 모양새가 이상했다. 이건 꼭 하녀들 탓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가?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하녀들이 알아서 대공을 꼬시라고 예쁘게 단장시켜 보냈다니! 누가 봐도 변명으로밖에 안 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게…….”

내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그때였다.

머리카락 끝에 닿아 오는 손길을 느끼고 나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놀랍게도, 시선 끝에는 그가 있었다.

숨결마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녹턴은 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는 나의 머리카락을 손끝에 감아 자신을 향해 끌어당겼다. 머리카락의 향을 들이마시곤, 그가 속삭였다.

“……누구에게 보이려고 이렇게 하고 온 거지?”

기분 탓일까?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맞다면, 정말 믿을 수 없게도…….

그의 눈빛은 어떠한 열망을 담고 있는 것만 같아서, 무언가에 대한 소유욕이 그 안에서 일렁이는 것만 같아서…….

나는 작게 숨을 삼켰다. 심장이 자꾸만 뛰어서, 이번에는 내가 그에게 눈을 마주칠 수 없게 되었다.

“대답을 해야지, 영애.”

그의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때였다.

쨍그랑!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에 나는 불에 덴 듯 놀랐다.

“공녀님!”

나는 녹턴을 거의 밀어내다시피 하고 아이들에게로 달려갔다.

자네트와 미하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테이블에서 떨어진 손바닥만 한 청동 화병이 보였다. 아무래도 놀다가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어휴, 참. 정말이지 한시도 눈을 못 떼겠다니까!”

나는 아이들이 더 이상 사고를 치지 못하게 손을 잡고 침대로 연행해 왔다.

그런데 기분 탓일까? 언뜻 보인 녹턴의 얼굴이 어쩐지 황망해 보인 것은…….

나는 가까스로 아이들을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나도 눕기 위해 자리를 돌아보았다.

매일마다 본 침대이긴 하지만, 이곳에 내가 눕는 것은 처음이었다.

평소에는 녹턴 혼자서 쓰던 침대였지만, 정말 커서 자네트와 미하일은 15명도 족히 누울 수 있을 것 같은 넓이이기에 우리 네 명이 나란히 누워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누우려고 하니, 또 문제가 생겼다.

“내가 라리아 옆에 자꺼야!”

“시러! 내가 옆에 자꺼야!”

원래 내가 누우려고 했던 자리는 맨 오른쪽 끝에 있는 녹턴에게서 제일 멀리 떨어진 왼쪽이었다.

어른 두 명이 침대 양옆에 눕고 아이들이 그 사이에 눕는 그런 형태.

하나…… 자네트와 미하일이 싸우기 시작했다. 바로 내 옆자리를 두고.

“이익! 너 진짜! 이 바보야, 내가 라리아랑 자꺼란 말야!”

“아야! 꼬집지 마아!”

둘이 무언가를 두고 싸우면 보통 미하일이 양보를 하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미하일도 양보하지 않았다.

눈물까지 그렁그렁 달고서는 누나한테 마구 대들었다.

“자네트는 바보 멍청이야! 나두, 나두 라리아랑 자고 싶은데……!”

“자, 공녀님, 공자님? 싸우지 마세요.”

내가 얼른 끼어들었다. 나는 두 아이의 등을 도닥이며 말했다.

“제가 공녀님과 공자님의 가운데에서 잘게요. 그럼 되는 거죠?”

그러자 아이들의 얼굴이 동시에 밝아졌다.

“조아!”

미하일이 소리쳤다. 여전히 눈에는 아까 흘리던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있는 채였다.

그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아 주며 내가 말했다.

“이제 안 싸울 거죠?”

“응!”

자네트도 말은 안 하지만, 히죽히죽 웃음을 참는 얼굴을 보아하니 만족스러운 것 같아 보였다.

나는 두 아이를 쓰다듬으며 멋쩍게 녹턴의 눈치를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저쪽이 아빠고 난 그냥 시녀인데,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나만 좋아해도 되나?’

그동안 녹턴과 아이들이 친해지도록 무진 노력했기에 확실히 아이들은 지금은 그를 이전보다는 덜 무서워하게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같이 보내는 시간의 차이가 커서 그런지, 여전히 그보다는 내가 더 좋은 듯했다.

“…….”

녹턴은 턱을 괸 채 이쪽을 빤히 보고 있긴 했지만, 그런 걸로 불만스러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운 묘한 얼굴.

왠지 그의 눈이 나의 깊은 곳까지 읽어 내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자는 순서는 이렇게 결정되었다. 미하엘, 나, 자네트, 녹턴.

“안녕히 주무세요.”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갑자기 바뀐 환경 때문일까?

양옆에서 쉴 새 없이 꼬물거리는 따뜻한 체온 때문일까?

아니면…….

몇 분인가 잠에 들려고 노력하던 나는 결국 눈을 떴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보랏빛 안광이 나를 반겼다.

“전하.”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옆으로 돌아누운 채 나를 보고 있던 녹턴은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제 입술 위에 대었다.

우리 둘 사이에 있는 것은 자네트뿐이었다. 우리 둘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팔을 뻗으면 곧장 그에게 닿을 것이다.

그 사실을 의식하자 괜히 또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심지어 우리는 지금 한 침대에 누워 같은 이불을 덮고 있었다.

‘마치…… 진짜 가족처럼.’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쳤다.

안 돼, 라리아. 그런 것을 생각하거나 기대해선 안 돼.

넌 이 가족 사이에 낄 수 없어.

넌 그냥 시녀일 뿐이잖아.

‘……기분이 이상하네.’

그 당연한 생각이, 단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는 이 명제에…….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프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이 사람들에게, 이 가족에게 너무 익숙해져 버린 걸지도 모른다.

고작 세 달밖에 되지 않는 이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하게 된 만큼 나도 그들을 필요로 하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괜찮다. 난 견뎌 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가족이 없는 데에 익숙하니까.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던 것 같다.

의식하지 못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가슴 속의 훨씬 큰 통증 때문인 건지, 아프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내 입술 위로 작은 온기가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깜짝 놀란 나는 시선을 들었다. 녹턴의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내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마치 깨물지 말라는 듯이.

그의 손끝이 닿은 입술이 뜨거워졌다. 입술을 깨문 것을 들킨 것은 부끄러웠지만, 그의 온기는 싫지 않았다.

나와 그의 시선이 허공에서 뒤섞였다. 정말 한순간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이 공간 안에 나와 그, 둘밖에 없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으으응…… 라리아아…….”

미하일이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리아, 팔베개해 줘…….”

나는 마치 나쁜 일이라도 하다 걸린 것처럼 깜짝 놀라 녹턴의 손을 밀어냈다. 나는 미하일을 향해 몸을 돌렸다.

“공자님, 팔베개해 드릴까요?”

“응…….”

미하일은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반가운 듯 활짝 웃었다.

“왜 미하일만 팔베개 해 줘? 나두 해 줘!”

이번에는 자네트가 쨍알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나는 양팔을 전부 아이들에게 하나씩 빌려주어야만 했다.

그러고 있는 동안에도 옆얼굴에서 녹턴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런데…… 어쩐지,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자꾸만 입술 위에 닿았던 그의 손길이 떠올랐다.

그 손길이 떠오를 때마다, 그의 시선이 닿는 옆얼굴이 홧홧 뜨거워지는 것 같았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내일 그의 얼굴을 어떻게 본담.’

그런 걱정을 하면서, 나는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주변이 온통 부산스러웠다. 눈을 뜨니, 하녀들이 침실을 드나들며 아침상을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내가 시켰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옆에서 녹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스스해진 내 모습과는 딴판으로, 그는 자고 일어난 사람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멀끔해 보였다.

그는 잠든 자네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식당까지 가기에는 피곤해서 말이지.”

자네트는 옆으로 누워 자고 있었는데, 덕분에 오동통한 볼살이 베개에 눌려 짜부라져 있었다.

그 모습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볼을 마구 주물러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별로 피곤해 보이지는 않는데.’

자네트의 자는 모습을 구경하던 나는 녹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마…… 나랑 애들이 피곤할까 봐 그런 거겠지.’

이제 슬슬 그의 솔직하지 못한 화법에 익숙해져 가는 것도 같았다. 괜히 웃음이 흘러나왔다.

“공녀님, 공자님. 일어나세요. 아침 드실 시간이에요.”

내가 깨우자, 아이들 역시 잠에서 깨어났다. 누가 더라고 할 것 없이 온통 부스스한 모양새였다.

우리 네 명은 상체를 일으킨 거 외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도,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에 아침상이 차려졌다.

베드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따끈따끈한 크로와상과 버터, 사과잼, 훈제 햄, 메이플 베이컨, 스크램블 에그, 베이크드빈, 샐러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양파스프, 홍차 등등을 보면서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다니, 좋은걸.’

시녀인 지금은 물론이고, 백작가의 장녀였던 시절에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물론 이건 셔우드 백작의 조찬에 대한 집착 때문이긴 하지만…….

아침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하녀들은 지극정성으로 우리의 시중을 들었다.

“베이컨을 좀 더 가져다드릴까요?”

“수프의 온도는 만족스러우십니까?”

“홍차 대신 로즈마리 티를 가져올까요?”

그들의 시중을 받고 있자니, 정말이지 대공비가 된 듯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녀들은 내가 정말 대공비라도 된 것처럼 날 대했다.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냅킨 하나 건넬 때조차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네’라고 소리치며 달려와 필요한 것을 물었다.

고맙다기보다는 황송하다에 더 가깝달까, 아니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체할 것 같아.’

이런 와중에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하녀들을 턱짓과 눈짓으로 부리는 녹턴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옆에서 식사를 하는 녹턴과 아이들. 부담스러울 정도로 공손한 하녀들과 시종들. 믿을 수 없도록 크고 넓은 침대…….

‘대체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걸까?’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이 모든 오해를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어 버린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남몰래 한숨을 쉬곤, 남은 아침 식사를 해치워나가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뒤, 마침내 즐거웠던 가족 놀이를 끝낼 시간이 되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나와 아이들이 녹턴에게 인사했다.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던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실례는 무슨.”

성격은 나쁘지만, 빈말은 거의 하지 않는 그다. 그 말을 들으니 그도 이 시간이 싫지 않았던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아이들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는 메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즐거운 시간 보내셨습니까?”

그 말을 들으니 새삼 실감이 났다.

그래, 나는 그 시간이 정말 즐거웠다.

곤한 잠에 든 아이들에게 팔을 내어줄 수 있어서.

아침에 깨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본 사람이 녹턴과 아이들이라서.

아이들의 잠의 든 얼굴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어서.

네 명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할 수 있어서.

잠시나마 이 가족의 일원이 된 것만 같아서.

나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어떠셨어요? 공녀님과 공자님은 즐거우셨어요?”

미하일은 여전히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밝게 웃었다.

“응! 라리아랑, 자네트랑…… 아버지랑. 가치 자서, 정말 조아써!”

나는 자네트를 돌아보았다. 자네트는 대답하기가 쑥스러운지 괜히 딴청을 부렸다.

그때, 미하일이 내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근데에, 라리아.”

“네?”

별생각 없이 미하일을 돌아본 나는, 다음 질문에는 그만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라리아랑 아버지, 언제 겨론해?”

딴청을 피우던 자네트도 거들었다.

“라리아, 언제 진짜 우리 엄마 돼?”

그 말을 하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순진한 기대감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아이들의 동그란 눈이 별이라도 쏟아질 듯 반짝반짝 빛났다.

“…….”

그런 아이들에게 나는 차마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기대하는 아이들을 앞에 두고, ‘이 약혼은 위장 약혼일 뿐이고, 결혼할 일은 영원히 없다.’라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아이들이 내가 엄마가 되길 바라 주어서, 그만큼이나 나를 좋아하고 마음을 열어 주어서, 고마웠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곧 이 아이들은 여주인공을 엄마라고 부르게 되겠지.’

나는 생각했다.

‘내가 아니라.’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주인공이 나타나면 나는 떠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여주인공에게 익숙해질 테고, 나를 잊어버리겠지.

아이들이 떠난 사람을 쉽게 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발달적 특성이다.

그 사실을 모를 내가 아니었다. 유아교육과 시절 시험 기간에 그 부분을 달달 외우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그런데도, 어째서…….’

그 사실을 생각하면, 이렇게 가슴이 찌르듯이 아픈 걸까.

“아하하, 글쎄요? 과연 언제일까요? 저도 궁금하네요.”

나는 괴로움을 숨기려고 애써 웃으며 얼버무렸다. 내 엉터리 같은 대답에 아이들이 입을 비죽 내밀었다.

“에이, 머야아~.”

“라리아가 왜 멀라?”

“하하, 미안해요. 나중에, 알려 줄게요. 나중에.”

싫더라도 결국 사실을 알려주어야 할 때는 올 테니까. 하지만 그것이 꼭 지금이 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우리가 하룻밤 가족놀이를 했다고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이구, 공자님. 머리 뻗치신 거 봐요. 제가 빗어 드릴게요, 자…….”

“우웅, 라리아…… 나, 5분마안…….”

“안 돼요, 공녀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착한 어린이죠.”

언제나와 같은 하루하루가 지났다. 나는 아이들을 정성껏 보살폈고, 아이들은 늘 그렇듯 사랑스러웠다.

다만, 평소와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는 것을 언제나 나와 붙어 다니는 메리만은 발견한 것 같았다.

“아가씨,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주제 넘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주저하던 메리가 내게 말했다.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일에만 매달리고 있지 않으십니까. 주인님께서 출근 시간을 미뤄 주셨는데도…….”

언제나처럼 나를 걱정해 주는 그녀의 말에 나는 속으로 뜨끔함을 느꼈다. 나는 어떻게든 웃어서 넘겨 버리려 했다.

“아하하, 괜찮아, 괜찮아. 나 원래 체력이 좋거든. 이 정도론 힘들지 않아.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야.”

하지만 메리가 누군가? 자신에게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언제나 나를 위해 간언을 해 주는, 훌륭한 하녀이자 친구였다.

“아가씨께서 공자님, 공녀님을 진심으로 아끼시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대로라면 건강에 무리가 올 겁니다. 이제부터는 저와 하녀들이 맡을 테니 잠깐만이라도 쉬세요.”

“아이참, 괜찮은데…….”

메리는 이번에도 내 얼버무림에 그냥 넘어가 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잠깐 자리에서 물러나 메리가 아이들을 돌보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기로 했다.

내가 요 며칠간 유난히 일에 열중한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난 그저 아이들이 나를 잊을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에 괴롭힘당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자리에 앉아 턱을 괸 채 아이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게 뭐 별거라고. 늘 겪어 왔던 일이잖아?’

나는 유치원 교사다. 몇 년 동안 일해 오면서 이미 많은 아이들을 만났고, 많은 아이들을 떠나보냈다.

엄마 닭을 따라다니는 병아리들처럼, 나를 그렇게나 잘 따르던 아이들이 졸업한 뒤에는 나를 새까맣게 잊어버리는 일을 이미 질리도록 겪어 왔다.

처음에는 슬펐지만, 그래도 곧 그런 일에 익숙해졌다.

그런 걸 감당하는 것 역시 유치원 선생님의 일이었기도 했고, 나 역시 새로 담당하게 된 아이들을 맞이하는 데 바빠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라리아! 모해?”

“라리아, 놀자!”

이 아이들, 자네트와 미하일이 나를 잊어버린다고 생각하면 이렇게나 마음이 아파 오는 건지.

‘……그냥 단순히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 아니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이들은 내 발치까지 와 있었다. 활짝 웃는 얼굴로, 함께 놀자고 말하며 내 치마폭에 매달려 왔다.

“고, 공녀님, 공자님! 제, 제가 놀아 드리겠습니다.”

“시러, 라리아랑 놀꺼야!”

“라리아, 이거 좀 바!”

당황한 메리가 쫓아왔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메리에게 괜찮다는 의미를 담아 웃어 보인 뒤, 미하일이 내미는 것을 들여다보았다.

미하일이 내민 것은 바로 ‘착한 어린이 도장표’였다.

“나, 서른 개 다 모아써!”

미하일은 벌써 도장을 다 모았던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반가워하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와, 그랬죠, 참! 공자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에헤헤.”

“씨이, 그게 모가 대단해! 나도, 나도 곧 다 모을 건데……!”

옆에서 자네트가 투덜거렸지만, 미하일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헤헤 웃었다.

나는 미하일을 안아 들고 내 무릎 위에 앉혔다.

“그럼, 도장을 서른 개 다 모으셨으니 약속대로 제가 소원을 들어드려야겠죠? 공자님, 어떤 걸 원하세요?”

사실 보상을 ‘소원 들어주기’로 걸긴 했지만 이 아이들이 어떤 소원을 빌지는 나도 예상이 되지 않았다.

‘녹턴이 물질적으론 결코 모자람 없게 해 주니까 선물을 받고 싶다고 할 것 같진 않고……. 과연 뭘 원할까?’

소풍 나가기, 아니면 하루에 하나밖에 먹지 못하는 과자를 실컷 먹고 싶다는 소원을 빌지도 모른다.

혹은 그보다도 훨씬 어려운 걸 수도 있고.

‘뭐가 됐든 최대한 이뤄 주고, 정 나 혼자만의 힘으로 어려운 거면 녹턴의 도움을 받으면 되지 뭐.’

내가 미소를 머금고 묻자, 미하일은 갑자기 얼굴을 붉히고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인 얼굴로 시선을 피하며 웃던 미하일이 마침내 꺼낸 말은…….

“……뽀뽀해죠.”

“네?”

정말이지 예상 밖의 소원에,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미하일은 다시 한번 말했다.

“뽀뽀해죠. 내 여기에.”

그러면서,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기 뺨을 꾹 누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가슴이 벅차 왔다.

도장을 서른 개나 모은 대가로 내가 해 줬으면 하는 것이, 고작 뽀뽀라니…….

세상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또 있을까?

나는 감격해서 미하일을 보다가, 그의 뺨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에 미하일의 보들보들한 생크림 같은 볼살이 부드럽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어때요? 이걸로 됐어요?”

내가 미하일의 뺨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고작 뽀뽀 한 번을 해 주었을 뿐인데, 미하일은 너무너무 행복해 보였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까르르 웃다가, 손가락 사이로 눈을 뜨고 날 올려다보았다.

“웅! ……근데…….”

또 원하는 것이 있는 걸까? 나는 그의 이어지는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조금 주저하던 미하일은, 내 귓가에 대고 소곤소곤 속삭였다.

“……더 많이 해주면, 더 조을 것 가태.”

아유, 정말! 이젠 못 참겠다!

그 한마디에 나는 그때까지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만 가슴속에 넘쳐흐르는 사랑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미하일을 꽈악 안아 버렸다.

“으아! 답답해!”

“공자님도 참! 어쩜 이렇게 귀여우세요!”

나는 미하일을 꽉 안았다가, 그의 양 뺨에 번갈아 가며 뽀뽀를 했다.

쪽 쪽 쪽 쪽 쪽, 작고 가벼운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행복감이 내 가슴을 가득 채웠다.

한편 우리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자네트는…… 꽉 쥔 앙증맞은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더니, 이렇게 소리쳤다!

“왜 미하일만 뽀뽀해죠! 나한테도 해!”

미치겠네, 한 놈만 귀여워도 미치겠는데 이렇게 두 놈 다 귀여워서 난 어떡하면 좋지?

“우리 귀여운 공녀님, 뽀뽀 안 해 드려서 속상하셨구나! 이리 와요, 제가 마구 뽀뽀해 버릴 테니까!”

한순간에 뽀뽀귀신이 되어 버린 나는 이번에는 자네트를 안아 들고 마구 뽀뽀를 날려 대기 시작했다.

자네트의 능금빛 두 뺨, 이마, 코, 입술, 할 것 없이 마구마구.

“으그그그그…….”

토마토처럼 새빨개진 자네트의 입꼬리가 마구 부들부들 떨렸다. 어딜 봐도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라리아, 나두 뽀뽀 더 해죠!”

“나두, 나두!”

내 무릎 위에 기어오른 두 아이에게 나는 한참이나 정신없이 뽀뽀를 해야만 했다. 입술이 얼얼해져 올 정도로.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나의 행복은 이 아이들이구나.’

그래, 그것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변치 않을 진실이었다.

설령 이 아이들이 다른 사람을 엄마로 여기고 사랑하게 되더라도.

이 아이들이 날 잊게 되더라도.

‘너희는 날 잊어도, 난 너희를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나는 두 아이를 꽉 끌어안고 생각했다.

‘그러니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너희에게 마음껏 내 사랑을 줄게. 나중에 가서 후회하지 않도록.’

이 아이들과 함께 있을 수 있을 때까지는 최대한의 사랑을 줄 것. 뒤늦게 후회하거나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마음껏 아끼고 사랑할 것.

그것이 바로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 * *

세인트 아그네스 광장에서 가족들을 만난 뒤로, 내가 블랙웰 대공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이 가만히 있었느냐면 그건 아니다.

그 약혼 소동 이후 이 주쯤 지났을 때부터 가족들은 내게 돌아가면서 편지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일주일에 한 통 정도였지만, 그 빈도는 갈수록 잦아져서 나중엔 하루에 한두 통씩은 꼬박꼬박 오곤 했다.

“주인님께 그렇게 호된 말을 들었는데도 포기하지 않는다니. 정말이지, 셔우드 가문은 수치심도 모르나 봅니다.”

화가 난 메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오늘은 내 손에 무려 세 통이나 되는 편지가 와 있었다. 각각 계모, 오빠 노먼, 남동생 아돌프가 보낸 것이었다.

화가 나서 셔우드 가문에 대한 험담을 하던 메리는 곧 그들이 일단은 내 가족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새빨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화가 나고 속상해서 그만…….”

“아니야. 나도 네 말에 동의하는걸.”

나는 픽 웃고는, 내 방 구석에 있던 바구니에 편지 세 통을 던져 넣었다. 바구니 안에는 어느덧 꽤 많은 양의 편지들이 쌓여 있었다.

벌써 셔우드로부터 수십 통의 편지를 받았으나 나는 단 한 통도 뜯어 보지 않았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어차피 나를 정치적 도구로 쓰기 위한 설득의 말이 적혀 있겠지.’

그런 편지를 굳이 볼 필요는 없었다. 나는 순순히 그들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당해 줄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나는 바구니 안에 담긴 편지봉투들을 보다가 메리에게 말했다.

“나 좀 도와줄래? 오늘 밤은 이걸 벽난로의 땔감으로 쓰면 좋을 것 같아.”

“물론입니다, 아가씨!”

나와 메리는 함께 편지들을 벽난로에 넣었다. 잘 정제된 고급 종이라 그런지, 편지는 매연도 많이 일으키지 않고 무척 잘 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제 슬슬 여름이 오고 있었다. 그러니 아이들의 옷과 장난감을 여름에 걸맞은 것으로 꺼내야만 했는데, 그 양이 워낙 많다 보니 나 혼자만의 힘으론 역부족이어서 메리와 하녀들의 힘을 빌렸다.

“메리, 고마워. 수고가 많았어.”

일을 끝마친 뒤 내가 고마움을 표했다. 메리에게 인사한 뒤, 나는 메리가 데려온 다른 하녀에게도 말을 걸었다.

“너도 정말 고마워. 그건 그렇고 이름을 아직도 못 물어봤네. 넌 이름이 어떻게 되니?”

그녀는 얼굴은 몇 번 봤지만 이름은 모르는 아이였다. 메리가 내게 그녀를 소개했다.

“이 아이는 제 룸메이트인 사라라고 하는데, 그림에 뛰어난 재주가 있습니다.”

룸메이트라고? 그러고 보니 지난번, 시몬이 내 방을 옮기려고 해서 내가 메리의 방으로 갔을 때 언뜻 그녀를 본 것 같기도 했다. 어쩐지 눈에 익더라니.

그때 그녀의 침대 옆에 무척 근사한 목탄화들이 여러 장 붙어 있는 것을 봤었다. 하나같이 굉장히 잘 그린 그림들이었다.

나는 반가움을 느끼며 사라에게 악수를 청했다.

“아! 우리 지난번에 봤었지? 반가워! 네 침대 옆에 붙어 있는 그림들을 봤는데, 정말 잘 그리더라.”

“가, 감사합니다…….”

사라는 깜짝 놀란 듯하다가 쑥스러운 듯 조심스레 내 손을 맞잡았다.

“하지만, 자주 그리지는 못하는걸요.”

사라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때,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자주 그리지 못한다는 것이 단순히 시간이 없어서라든가 그런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저런, 왜? 시간이 없어서?”

내가 떠보자, 그녀는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음…… 종이가 너무 비싸서요. 목탄과 검은 빵은 어찌어찌 구할 수 있지만, 그림을 그릴 좋은 종이는 비싸서 제 주급으로 구하기는 역시 어렵네요.”

저런. 나는 그녀가 무슨 문제를 겪고 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이 시대에서 예술은 사치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예술 도구들은 값이 비싼데, 종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대 사회에서야 너무나 싼 물건이라 상상이 잘 안 될 수도 있겠지만, 이 세계는 아직 공장 산업이 발달되지 않은 세계니까.

직접 나무를 정제해서 만드는 고급지는 그 자체로도 가격이 꽤 나갔다.

‘내가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 내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나는 어디론가 달려갔다가 곧 돌아왔다. 손에는 바구니를 하나 든 채였다.

“아니, 아가씨! 그런 잡일은 제게 시키시지 않고…….”

내 모습을 본 메리가 내 손에 들린 바구니를 빼앗아 갔다. 그러던 중, 바구니 안에 담긴 것을 본 메리의 눈이 커졌다.

“아가씨, 이건……!”

나는 메리를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응.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아.”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사라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바구니 안에 가득 담긴 물건들을 꺼내 보여 주었다.

그것은 편지였다. 셔우드 가문에서 온 것들을 나중에 땔감으로 쓰려고 차곡차곡 모아 뒀던 것들이었다.

“우리 집에서 온 편지인데, 이면지로 써.”

“아니, 아가씨……! 어떻게 그 편지들을……!”

메리가 불안해 보이는 얼굴로 안달복달을 했다.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이 편지들에는 셔우드 가문과 나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잔뜩 쓰여 있을 테니까.

하지만 뭐, 나는 상관없었다. 이미 셔우드 가문과 나의 관계에 대해서는 저번 약혼 소동 이후로 온 대공저에 소문이 날 대로 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라에게 편지를 준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나는 사라를 보았다. 그녀는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정도로 커져서는 내 손에 들린 편지와 내 얼굴을 번갈아 가며 보고 있었다.

“아, 아가씨! 이건…… 이건, 정말 굉장한 고급지잖아요?”

역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 알아보는 것 같았다. 사라는 편지봉투의 보드라운 표면을 손가락으로 쓸어보곤 몸을 떨었다.

“음, 그런 것 같더라고. 난 종이는 잘 모르지만.”

“이, 이렇게 귀한 걸…… 제가 정말 받아도 될까요?”

“물론이지. 내겐 전혀 필요 없는 물건이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좋은 종이인데, 필요도 없는 내 손에 있다가 아깝게 땔감으로 쓰이기보단 귀하게 써 줄 사람의 손에 들어가는 편이 낫겠지.

“접혀 있는 데다가 편지지와 그림용 종이는 좀 다르겠지만…… 그것만 괜찮다면 얼마든지 써도 좋아. 마음껏 써도 돼. 하루에도 이런 걸 한두 통씩 받고 있는데, 받는 대로 다 네게 줄 테니까.”

내 말에 사라는 거의 울 것만 같은 얼굴이 되었다. 사라는 내가 내민 편지 바구니를 받아 든 채, 감격에 빠진 얼굴로 말했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제가 어떻게 갚아야 할지…….”

“뭘, 원래 사람은 서로 돕고 사는 거지. 그건 그렇고 이거 한번 뜯어 봐도 될까? 상태를 확인해 봐야지.”

행여 편지지가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상태면 곤란하니까.

내 말에 사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편지봉투 하나를 집어 조심스럽게 뜯기 시작했다. 그러자…….

편지지에 향수를 뿌린 듯 좋은 향기가 훅, 하고 퍼지더니 봉투 안에서 곱게 접힌 편지지가 여러 장 쏟아져 나왔다.

편지지는 어림잡아도 일고여덟 장은 될 것 같았다.

편지지는 편지봉투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고급지였다.

도톰한 두께감과 보드라운 표면의 미색 종이의 한쪽 면에는 새파란 사파이어 빛 잉크로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다행히 다른 한쪽 면은 깨끗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사라에게 편지지를 보여 주며 물었다.

“어때? 여기에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아?”

“네! 무, 물론이죠. 정말 굉장히 좋은 종이인걸요. 감사합니다……!”

정말 다행이었다. 혹시나 해서 몇 개의 봉투를 더 뜯어봤지만, 전부 사라가 그림을 그리는 데 쓰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한데 편지를 뜯어 보다 보니 나는 뭔가 기시감을 느꼈다.

‘생각보다 하나같이 편지의 분량이 굉장히 긴걸.’

한 통당 최소 일고여덟 장, 심지어 열 장이 넘어가는 편지들도 있었다.

그런 편지지마다 깨알 같은 글씨가 한가득 적혀 있었다.

이런 편지를 하루에도 한두 통은 보내다니, 편지를 쓰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중노동일 것 같았다.

‘게다가 대충 쓴 것도 아니고, 정말 정성스럽게 썼어. 잉크와 향수, 편지지의 장식 그림 컨셉까지 맞춰 가면서.’

내용을 제대로 읽지는 않고 그저 봉투를 뜯으면서 언뜻 보았을 뿐이지만, 모든 편지가 좋은 향수를 뿌리고 고급 잉크로 정성스럽게 써 내려갔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이건 대체…… 라리아가 그렇게까지 정치적 도구로 가치가 높았던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라리아는 셔우드 백작가라는 좋은 집안의 고명딸이고, 예쁘장하게 생겼으므로 괜찮은 값에 팔려 나갈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콧대 높은 셔우드 백작가에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뭔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세인트 아그네스 광장에서 그들을 보았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의 그들 역시, 단순히 정치적 도구를 돌려받기 위해서 그랬다고 하는 걸로는 설명되지 않는…….

‘……묘한 처절함이 있었지.’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편지 한 통을 받아와서 방에서 꼼꼼히 읽어 보았다. 그것은 라리아의 아버지, 클레이튼 셔우드 백작이 보낸 것이었다.

그저 진심 없는 설득의 말이나 적혀 있을 거라는 내 예상과 다르게, 편지에는 구구절절한 후회와 사죄의 말이 가득했다.

내가 널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됐다는 둥, 정말 미안하다는 둥…… 어쩌구저쩌구…….

‘백작가에서는 그렇게나 라리아를 정치적 도구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편지를 다 읽어본 나는 그것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생각했다.

‘……내가 모르는 다른 사정이 있는 걸까.’

하지만 편지 몇 장보다 훨씬 더 놀라운 일은, 바로 그로부터 며칠 뒤에 일어났다.

* * *

녹턴이 외근을 나간 어느 날이었다.

“공녀님, 공자님. 시장 구경은 즐거우셨어요?”

“웅!”

나와 메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거리 구경을 하고 돌아가던 차였다. 아이들의 손에는 캐러멜 애플과 솜사탕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나는 밝게 웃으며 대답하는 미하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공자님의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다음에 또 놀러 가요.”

“쪼아!”

귀여워라. 나와 메리가 함께 엄마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보는데, 목전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백작 부인!”

“제발요, 그 애를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세요!”

뒤얽힌 다급한 목소리에 내 발이 우뚝 멈췄다.

이 소리가 들리는 곳은…… 대공저의 대문 앞이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것 같아서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곳을 보았다.

이 익숙한 목소리…… 바로 나의, 아니 라리아의 계모와 남동생인 아돌프가 그곳에 있었다.

두 사람은 문지기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씨이, 내가 내 누이 좀 만나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오랜만에 보는 얼굴인 아돌프가 씩씩거리며 문지기를 밀치는 모습이 보였다.

중갑옷을 입고 있는 문지기는 그 손길에 균형을 잃고 거의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문지기들 중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말했다.

“셔우드 영애를 최우선으로 보호하라는 대공 전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백작 부인, 그리고 백작 영식. 더 이상 이런 무례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요, 용납하지 않는다면…… 뭐죠?”

“아무리 백작 부인과 영식이라고 하더라도 치안 관리대에 넘길 수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뭐라고? 야! 너 말, 말 다 했어!”

“아돌프!”

아이고, 골치 아프게 됐네. 오랜만에 만났다곤 해도 별로 반갑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저 난장판에 끼어들고 싶은 마음도 추호도 없었고.

‘하지만 저 둘이 대문을 꽉 막고 있으니 눈에 띄지 않고 들어갈 방법이 없어…….’

나는 생각했다.

‘조금 걷는 한이 있더라도 빙 돌아서 뒷문으로 들어갈까?’

하나 굳이 할 필요도 없는 고민이었다. 왜냐하면, 채 행동방침을 정하기도 전에 그들의 눈에 띄어버렸으니까.

“어? 라, 라리아!”

계모의 목소리였다. 우리를 발견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나는 쯧 하고 혀를 찬 다음, 우리들을 수행하고 있던 호위 기사에게 말했다.

“저희는 저택에 들어갈 테니, 저 사람들을 잘 쫓아내 주세요.”

“예, 영애.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호위 기사들은 내 부탁대로 계모와 아돌프를 쫓아내기 위해 다가갔다.

호위 기사들이 그들의 앞을 막아서는 동안, 우리는 문지기들의 도움을 받아 대공저의 대문으로 들어서려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라리아!”

변성기 소년의 째지는 목소리가 귀청을 흔들었다.

대문으로 들어서려던 우리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랄 수밖에는 없었다.

아돌프는 우리의 눈앞에서 놀라울 정도의 날렵함으로 기사들과 문지기들을 요리조리 피해 달려왔다.

아직 14살밖에 되지 않아 체구가 작은 그는 문지기들의 손에 옷깃조차 스치지 않았다.

눈 깜짝할 새에 아돌프는 내게 바짝 다가왔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헉, 헉. 라리아…… 아니, 누님!”

오랜만에 보는 동생의 얼굴은 울듯이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눈물을 참는 것처럼 새빨개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아돌프는 이를 악물었다.

그런 그를 나는 차마 매정하게 무시하고 갈 수가 없었다.

알겠지만, 나는 노인뿐만 아니라 어린애들한테도 약하다.

그리고 아돌프는, 5살짜리 애들에 비하면 크긴 하지만, 그래 봤자 14살이다. 아직 어린애란 말이다.

“아니, 저런……!”

“아돌프!”

“셔우드 영애께 어딜!”

문지기들과 기사들이 아돌프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그를 간신히 붙잡았을 뿐, 거칠게 대하지는 못하는 것이 뻔히 보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건장한 기사들에게 14살은 젖내나기 짝이 없는 애송이일 뿐이니까.

기사들과 문지기들의 억센 손아귀 안에서 간신히 숨을 고르던 아돌프가 입을 열었다.

“누님, 말해 봐…….”

“…….”

“이제 정말 안 돌아올 거야?”

아돌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말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돌프가, 내게 돌아오길 바라는 것 같은 말을 입에 담다니.

나를 무시하고 냉대했던 어른들에 비해, 아돌프는 제일 순수하게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던 녀석이었다.

어린아이의 순수함은 때론 굉장히 잔혹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아돌프의 경우가 딱 그랬다. 라리아를 괴롭히는 것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던 그의 모습이 여전히 내 기억 속에서 생생했다.

그런데 그 기억은 전부 착각이었다는 양, 지금 아돌프의 얼굴은 너무나 절박해 보였다.

“내가, 내가 그렇게 싫어?”

글썽거리는 눈물이 한가득 매달린 갈색 속눈썹. 슬픔에 아롱거리는 파란 눈동자는 연기라곤 볼 수 없었다.

“영원히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대체 왜 아돌프가…… 나, 아니 라리아가 돌아왔으면 하는 것처럼 말하는 거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린 아돌프가 라리아의 정치적 도구로서의 가치를 잘 알고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어리기도 하고, 두뇌파라기보단 육체파, 단순무식한 그의 성격을 감안하면 그가 그런 속내를 감추고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동안 온 편지 중에 아돌프의 것도 있긴 했어도, 그건 뭐 어른들이 라리아를 되찾기 위해 아돌프마저 동원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이 언행까지 전부 어른들이 시킨 것일까? 그런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

너무 혼란스러운 나머지 나는 말문마저 막혔다.

얘가 대체 왜 이러는 것인지, 조금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바보 아냐?!”

허공을 찢는 카랑카랑한 목소리. 그 목소리는 내 발치에서 들려왔다.

그것은 자네트의 목소리였다.

5살밖에 되지 않은 자네트는 나와 아돌프의 사이에 당당히 서서 그를 향해 삿대질하고 있었다.

자색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며, 자네트가 외쳤다.

“니네들이 라리아한테 못되게 굴었자나, 멍청아!”

5살이라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혜안이었다. 과연 블랙웰이라고나 할까.

하긴 그래, 세인트 아그네스 광장에서의 일도 있었으니 자네트와 미하일도 어렴풋하게나마 나와 셔우드가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을 것이다.

자네트의 팩트 폭력에 아돌프는 뼈가 부러지…… 진 않았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의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시, 시끄러워! 너, 너 같은…… 너 같은 꼬맹이들이 뭘 알고 그런 말을 해!”

14살이 5살더러 꼬맹이라고 하는 이 불합리한 상황. 아돌프는 감정이 북받친 듯 말을 더듬었다.

“나는…… 나는, 난……!”

마침내 그의 눈가에서, 꾹 참고 있던 눈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누님, 돌아와! 내가, 내가 잘못했어!”

닭똥 같은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그때 발 건 것도, 누님 방에 지네 풀어 둔 것도, 과자 훔쳐 먹은 것도, 꽃병 깨고 누님 짓이라고 거짓말한 것도, 못난이라고 부른 것도 전부! 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돌아와!”

아돌프야…… 네가 저지른 죄가 많긴 하구나. 순간 나는 그를 안쓰러워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어서 돌아가십시오, 영식!”

“지금 당장 돌아가지 않으면, 치안 관리대를 부르겠습니다!”

“엉엉, 누님! 내가 잘못했어! 돌아와!”

참다못한 기사들과 문지기들이 아돌프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이번에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저 대성통곡하면서 그들의 손에 끌려나갈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착잡해졌다.

“아가씨, 이제 들어가시지요.”

메리의 손에 이끌려 아이들을 데리고 대공저 내부로 들어가면서도, 내 머릿속엔 이런저런 생각이 끊이지가 않았다.

‘만일 저게 전부 연기라면, 아돌프는 연기 천재였겠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저 가족, 라리아를 싫어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대체 왜 저러는 걸까?’

내가 알던 것들과 지금 그들이 보이는 행보는 도무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그들 사이에서 살았던 일주일간의 경험과 그들의 지금 행동은 서로 명백한 모순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원작자니까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는 대공저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내가 아는 것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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