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 *
약혼 사건으로 며칠 동안 떠들썩했던 대공저도 어느샌가 잠잠해졌다.
모두가 나와 녹턴의 약혼을 ‘사건’이 아니라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될 즈음, 거대한 대공저는 평소의 잠잠하고 정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정말 크다고 생각했지.’
나는 거대한 저택 내부를 돌아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그 규모에 맞지 않게 조용하다고도.’
이렇게 거대한 건축물이라면 그에 걸맞게 많은 수의 사람이 있을 테고, 그렇다면 어느 정도 활기가 돌고 시끌벅적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블랙웰 대공저는 놀랍게도 굉장히 조용하고 정적인 장소였다. 셔우드 백작저보다도 훨씬 더.
‘아마 수녀원도 이보다 조용하진 않을 거야.’
그나마 부엌처럼 늘 바쁜 장소라든가, 자네트와 미하일의 주변은 비교적 활기가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대공저 전체를 따지고 보면 사람 사는 곳이라고 보기엔 턱없이 부족할 정도였다.
“라리아! 라리아—!”
작은 고무공을 가지고 놀던 자네트와 미하일이 작은 발로 오도도도 달려왔다.
나를 향해 반짝이는 눈 하며, 꼭 쥔 앙증맞은 주먹들까지.
정말이지 심장을 부여잡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네에, 공녀님, 공자님?”
나는 사랑스러움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로 활짝 웃었다.
자네트가 나를 향해 소매를 불쑥 내밀었다.
“이거 봐!”
나는 자네트의 소매를 살펴보았다.
자네트가 입고 있는 옷은 그녀의 보라색 눈과 잘 어울리는 보랏빛 공단으로 만들어진 너무나 귀여운 아동용 드레스였다.
소매와 치맛단에 달려 있는 검은색 프릴이 포인트였다.
“아, 프릴이 떨어졌네요.”
그런데 자네트의 왼쪽 소매에 달려 있던 프릴이 반쯤 떨어져서 헐렁이고 있었다.
얼마나 열심히 놀았으면, 싶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도 어릴 적에 놀다가 옷을 여기저기 찢어 먹거나 단추가 떨어지곤 했는데, 그때 기억도 났다.
“아, 공녀님. 그건 제가…….”
내 옆에 있던 메리가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긴 귀족 아가씨들은 시녀라고 해도 이런 삯바느질 같은 잡다한 일은 보통 하지 않는다.
귀족 아가씨들이 하는 바느질은 일반적으로 자수뿐이었다.
그래서 메리는 내가 프릴을 꿰맬 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귀족인 데다 대공의 약혼자이기까지 한 내가 이런 잡다한 일을 받았다고 화를 내거나.
하지만 내가 그럴 리가 없었다.
“괜찮아, 메리.”
나는 씩 웃으면서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반짇고리였다.
“내가 할게.”
유치원에서는 이런 반짇고리 정도는 기본이다. 아이들은 험하게 놀다가 툭하면 옷을 찢어 먹거나 하니까.
그러니 당연히 바느질 정도는 숙달하게 되는 것이다.
단추나 프릴을 붙이는 것은 물론, 찢어진 옷을 티 나지 않게 꿰매거나 심지어 간단하게 이름을 수놓는 일도 할 수 있었다.
나는 손재주가 좋은 편인지라, 우리 유치원 원아들의 물건에 이름은 물론 작은 꽃이나 꿀벌, 병아리 같은 것을 수놓아 주고는 했다.
나는 아이들과 메리가 보는 앞에서 자네트의 소매를 꿰맸다.
프릴과 같은 색깔인 검은색 실을 사용해 눈에 띄지 않게 하고, 이렇게 저렇게 꿰매면…… 짠!
“우와!”
미하일이 탄성을 질렀다. 자네트의 소매에서 너덜거리던 프릴은 어느샌가 감쪽같이 수선되어 있었다.
자네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의 소매를 요리조리 살펴보는 걸 보니 썩 마음에 든 것만 같았다.
메리 역시 깜짝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굉장히 숙련된 바느질인걸요. 아가씨, 이런 걸 대체 어떻게……?”
내가 암만 바느질을 잘해도 평생 바느질을 해온 하녀만 할까?
그런데도 하녀인 메리가 감탄하는 것이 멋쩍어서 나는 쑥스럽게 웃었다.
“그냥, 원래 이런 거에 관심이 많았어.”
그렇게 말했는데도 완벽히 해명이 된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자네트를 보면서 애써 화제를 돌렸다.
“완벽히 수선된 건 아니고 응급처치일 뿐이니까 나중에 좀 더 제대로 된 수선을 받도록 해요, 공녀님.”
“웅.”
자네트는 조금 우물쭈물하는 것 같다가, 툭 내뱉었다.
“……고마워.”
자네트는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툭 내뱉고는, 바로 몸을 돌려 공을 주우러 가 버렸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그 말을 들었다.
그 귀여움에 나와 메리는 순식간에 엄마 미소를 지을 수밖에는 없었다.
“정말, 공녀님도…… 부끄럼을 타신다니까요.”
“공녀님이 솔직하지 못해서 그렇지 사실 마음은 착하셔.”
그때였다. 우리가 놀고 있던 홀에 시종이 나타났다.
“여기 계셨군요. 주인님께서 공녀님과 공자님을 부르십니다.”
“주인님이라면…… 대공 전하께서?”
내가 되물었다.
별거 아닌 되물음이었는데도, 내 말에 삽시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내 곁에 있던 미하일도, 저쪽에 떨어져서 공을 가지고 놀던 자네트도 놀란 토끼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미하일이 한층 시무룩해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안 갈래.”
자네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반응은 조금씩 달랐지만, 두 사람 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마 겁을 먹은 것이리라.
아, 알 것 같다. 이 분위기…… 이건 마치…… ‘치과 가자’라는 말을 들은 어린이 같다.
‘아빠의 부름을 받은 애들이 반가워하긴커녕 이렇게나 싫어하고 무서워하다니!’
나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곤, 시종에게 물었다.
“알려 줘서 고마워. 그런데 전하께서 공녀님과 공자님만 오라고 하셨어?”
“라리아 셔우드 영애께서도 시간만 되신다면 동행하셔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자네트와 미하일에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저도 같이 갈게요. 어때요? 이제 하나도 안 무섭죠?”
“난 원래 안 무서워써!”
자네트는 투덜거리면서도 내 말에 조금 안심하는 눈치였다.
미하일은 내 치맛자락에 매달리면서 말했다.
“라리아가 나랑 자네트 지켜 줄꼬지……?”
이건 대체…… 너네 아빠가 잡아먹기라도 한다니?
하지만 미하일의 울망이는 눈망울 앞에서 차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미하일의 등을 토닥이며 그를 안심시켰다.
“당연하죠!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공녀님과 공자님을 지켜 드릴 테니까요. 맡겨만 주세요.”
“……그럼 조아.”
그제야 미하일이 발그레한 뺨으로 해사하게 웃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네트 역시 내가 동행한다는 말에 다소 안심한 듯한 눈치였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이곳에서 계속 지내다 보니 나는 왜 대공저가 이렇게 침체되고 조용한 분위기인지 대충 감이 잡혔다.
그건 다 이 집의 집주인, 녹턴이 문제였다.
나와 아이들은 함께 녹턴의 집무실로 향했다.
“대공 전하, 부르신 라리아 셔우드와 공녀, 공자입니다.”
내가 집무실 문을 두드리자, 문 너머에서 낮고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내 손과 치맛자락을 붙든 아이들이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아이들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곤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녹턴의 집무실은 업무를 보기 위해서 켜 둔 몇 개의 등유 램프에도 불구하고 다소 어두침침했다.
기분 탓인지 어쩐지 복도보다 훨씬 싸늘한 느낌마저 들었다.
녹턴의 모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선 그의 키와 넓은 어깨가 유난히 두드러지게 보였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집무실 안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
“자네트, 미하일.”
냉정하고 엄격해 보이는 그의 얼굴과 말투는 도무지 다섯 살배기 자녀들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만일 저게 자기 자식들을 대하는 태도라면, 누구라도 심각하게 혼내기 직전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영애에게 폐가 될 짓은 하지 않았나?”
나는 머리가 다 아파 올 지경이었다.
‘자식들 앞에서 시녀 걱정을 왜 한담! 애들한테 잘 지냈냐고 안부를 묻진 못할망정!’
아니나 다를까 자네트와 미하일의 얼굴은 큰 벌이라도 앞두고 있는 듯이 창백했다.
심지어 서로를 부둥켜안고 오들오들 떨기까지 하고 있었다.
누나인 자네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안 해써요. 그치? 라리아.”
아이들은 나를 올려다보았다. 구원을 바라는 듯한 간절한 눈빛이었다.
나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웃어 보였다.
“물론이죠. 공녀님과 공자님께서 얼마나 잘해 주시는지 저는 늘 감읍할 따름이랍니다.”
“…….”
자네트를 응시하던 특유의 강렬한 보라색 눈빛이, 이번에는 미하일을 향했다.
“오늘 있었던 예절 수업에선 어땠지? 말해 봐라, 미하일.”
이 사람, 지금 자기 애들을 취조하는 건가?
그렇다. 이놈의 집구석이 이렇게 조용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블랙웰 대공가.
그렇게 길지 않은 역사에도 어마어마한 속도로 부흥하여, 종국에는 황실조차도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정도로 부강해진 가문.
대를 거듭할수록 훌륭한 대공을 배출해 낸 가문이지만, 그런 블랙웰의 최고의 대공은 단연 녹턴일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입을 모았다.
역사학자들의 판단에는 이견이 없었다.
늘 발전해 왔던 블랙웰이지만 그런 대공가가 최고로 강대하며 부유한 전성기는 바로 지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녹턴이 위대한 대공이자 정치가인 것과는 별개로, 좋은 아빠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의 의도를 대충 알 것 같았다.
‘나름대로 자기 자식들을 챙기려고 하는 것 같긴 한데, 방법이 완전히 잘못됐잖아!’
표현엔 서툴러도 마음속으로는 아이들을 걱정하고 아끼는 녹턴은, 아이들과 나름의 대화의 시간을 갖고 싶었던 것 같다.
문제는 그 대화 방법이 아이들을 대하기에는 영 부적절하다는 데에 있다.
‘이게 어딜 봐서 대화야? 심문이지!’
아니나 다를까, 마음이 무르고 심약한 미하일은 너무 겁을 먹어서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 저어…… 그. 그게, 그게에…….”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어른이고, 원작자니까 녹턴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는 거지, 아이들의 눈에는 영락없이 아버지가 자신을 혼낸다고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나 녹턴의 눈매는 더더욱 엄격해지기만 했다.
“왜 말을 하지 않지? 대답을 하라고 했지 않았느냐, 미하일.”
“어, 으으, 그…… 저기…….”
미하일의 사랑스러운 녹색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기 시작했다.
미하일에게 지켜 주겠다는 약속을 하기까지 했는데,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이쯤에서 끼어들었다.
“공자님, 무서워하지 마세요. 대공 전하께서는 공자님을 혼내시려는 게 아니라, 공자님이 오늘 수업에서 뭘 했는지를 듣고 싶으신 거예요.”
“우우, 진짜……?”
“그럼요. 어머, 저도 궁금한데요. 오늘 공자님과 공녀님은 뭘 배우셨죠? 말씀해 주실 수 있어요?”
나는 다정하게 웃어 보이며 손바닥으로 미하일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미하일은 같은 말이지만 녹턴에게 하려고 할 때보다 나에게 하려고 할 때 훨씬 편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미하일은 초록색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어, 그게에……. 티타임 예절을 배워써. 선생님이 차 만들어 주시구 자네트랑 나랑 마셨는데. 손가락을 이러케 해서…… 이러케…….”
미하일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찻잔을 들고 마시는 모양새를 흉내 내어 보였다.
그 모습은 너무나 귀여워서 입에 주먹을 넣고 울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에 나와 미하일만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진정했다.
나는 흠뻑 웃으며 미하일에게 물었다.
“그랬어요? 정말 즐거웠겠어요.”
“응! 마시써써. 정말……. 차랑, 꾸끼랑…….”
미하일은 언제 울었냐는 듯, 나를 따라 기쁜 듯이 웃었다.
그의 생크림 같은 하얀 볼살이 양옆으로 올라가고 귀여운 애교살이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자네트랑 같이 놀아서 조아써!”
으윽! 견딜 수가 없다! 난 아무래도 오늘 죽을 운명인가보다. 사인은 씹덕사, 범인은 미하일……!
흘끗 보니 자네트의 얼굴은 분홍색이 되어 있었다.
그 얼굴은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고, 감동한 것 같기도 했다.
“그냥 수업인데 모가 재미써? 미하일 바보.”
“헤헤.”
아까만 해도 냉동고처럼싸늘하던 분위기가 어느샌가 화창한 봄날처럼 따뜻해졌다.
나는 뿌듯함을 느끼며 녹턴을 돌아보았다. 녹턴은 다소 감정을 읽기 어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법이군, 영애.”
그가 팔짱을 낀 채 나를 향해 툭 내뱉었다. 내 미간이 보일 듯 말듯 꿈틀거렸다.
‘으이구, 성깔 더러운 자식. 속으로는 감명받고 있는 주제에!’
하지만 나는 솔직하지 못한 캐릭터가 좋으니까, 괜찮다.
좋으니까 내 작품의 남주인공으로 썼지!
나는 아이들이 놀도록 잠시 둔 채 그에게 다가갔다.
“공녀, 공자님이 오늘 뭐 하고 지냈는지 듣고 싶으셨던 거죠? 전하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런 식으로 물어보시면 안 돼요.”
안 그래도 그에게 아이들 대하는 법을 가르쳐서 아이들과의 관계를 개선시킬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마침 좋은 기회였다.
녹턴은 미심쩍은 얼굴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럼 어떻게 물어봐야 하지?”
이건 완전히…… 평생 물어보는 방법이란 게 아까의 그것밖에는 없었던 사람의 반응이다.
나는 한숨이라도 쉬고 싶었으나 참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녹턴 블랙웰이지 않은가.
나는 그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그의 가족들도.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도.
그런 그라면, 타인에게 물어보는 방법을 정말 그것만 알고 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그에게 티 낼 수는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했다.
“말투도 명령조보다는 좀 더 부탁하는 어조로 하시는 게 좋을 것 같고요, 어투도 좀 더 부드럽고 다정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두 검지로 내 입꼬리를 밀어 올리는 시늉을 했다.
“웃으시는 게 좋겠어요, 전하. 적어도 공자님과 공녀님을 대하실 때만이라도요.”
“……웃어?”
녹턴의 얼굴이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나는 그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첫 만남인데도 불구하고 예의상의 웃음기도 보여 주지 않았던 그의 모습.
결코 웃지 않는 그를 많은 사람들은 냉혈한, 감정 없는 괴물로 평했다.
하지만 나만은 알고 있었다. 그가 도무지 웃을 줄 모르는 이유를 말이다.
‘그도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었던 건 아니야. 그도 어릴 적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어.’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그를 이렇게 만든 사람은 바로 나라는 죄책감이 가슴을 조였다.
‘그가 16살일 때 일어났던 그 사건 이후부터는—.’
“영애?”
나는 멈추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가슴 속을 가득 채우던 죄의식이 숨결에 섞여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눈앞에 보이는 희고 반듯한 얼굴, 의문을 품고 있는 보라색 눈동자.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다시 한번 죄책감이 고개를 쳐들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갑자기 왜 그러지?”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전하도 웃으실 수 있어요. 그저 지금은 익숙하지 않으신 것뿐이에요. 전하의 웃는 얼굴은 그 누구보다도 멋지실걸요?”
“…….”
“자, 저랑 한번 연습해 보실래요?”
나는 입꼬리를 양옆으로 당겨 활짝 미소 지었다.
“입꼬리를 이렇게 올리시는 거예요. 눈꼬리는 아래로 접으시고요.”
“내가 이런 걸 왜…….”
“아이참, 그러지 마시고 한번 해 봐요! 이게 다 공녀님과 공자님을 위해서라니까요?”
내가 재촉했다. 녹턴은 영 하고 싶지 않은 듯했지만, 내가 아이들을 들먹이자 주저하다가 결국 입꼬리는 끌어 올리고 눈매는 휜 채로 그 모습을 내게 보였다.
“어떻지?”
“…….”
“…….”
“…….”
오…… 내 눈. 마이 아이즈.
방금 그 모습 안 본 눈 삽니다!
나라고 그의 웃는 모습이 처음부터 멋지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가 웃는 것은 거의 6년 만이니 꽤 어색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그냥 ‘어색하다’라고 표현하기에는 심히 무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안 그래도 냉혹하고 다소 무서운 인상이었던 그가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이게 웃기까지 하니 그 모습이…… 상상이 되는가?
내 취향을 집약해 놓은 이상적인 미남의 처참하게 일그러진 모습은 정말이지 보기 쉽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런 내 감정이 내 얼굴에도 나타난 모양이었다.
녹턴은 내 충격받은 얼굴에 더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그도 설마 내가 이렇게까지 정색할 줄은 생각도 못 했으리라.
“내가 안 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가 황급히 얼굴을 돌렸다. 슬쩍 보이는 그의 귀는 분홍색이었다.
이런 일에 부끄러워할 줄도 알았구나. 오만한 사람이니까 별로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그가 귀엽게 느껴졌다.
가슴 속 간질간질함이 가벼운 웃음으로 터져 나왔다.
“전하,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그렇게…… 그렇게까지는, 음, 나쁘진 않았어요.”
“부끄러워한 적 없다!”
“한 번만 더 해 봐요, 우리. 네? 분명 더 나아질 거예요.”
내 말이 놀리는 걸로 들렸는지 녹턴은 등을 돌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귀는 분홍색이었다.
나는 그의 소매를 살짝 잡아 쥐었다. 그가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안 하실 거예요? 저 전하의 웃는 얼굴, 한 번 더 보고 싶은데요.”
“…….”
“자네트와 미하일도 분명 그럴 거예요. 전하, 어서요.”
그제야 녹턴이 이쪽을 흘끗 돌아보았다. 그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제길……. 어지간히도 귀찮게 하는군. 그럼 딱 한 번만이다.”
“네! 딱 한 번만!”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시키는 대로 하는 점이 귀엽다니까!
한 번만 더 해 보겠다던 녹턴은 나와 마주 본 채 웃는 얼굴을 몇 번이나 연습했다.
그 모습은 처음에는 정말 끔찍했지만, 계속하다 보니 처음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만 같았다.
‘아직은 갈 길이 멀긴 하지만……. 이렇게 계속 연습하다 보면 정말 멋지게 웃을 수도 있겠는데.’
그렇게 생각한 나는 녹턴에게 숙제를 내주었다.
“잘하셨어요! 처음보다 훨씬 나아졌는걸요. 앞으로 매일 자기 전에 거울을 보고 웃는 얼굴을 다섯 번씩 연습하세요. 아셨죠?”
“뭐? 내가 왜 그런 짓을…….”
“이게 다 공녀님과 공자님을 위해서라니까요, 전하! 생각해 보세요, 공녀님과 공자님이 저한테 그러듯 전하의 바지에 매달리며 재롱을 피우는 모습이요. 진짜 귀여울 것 같지 않나요?”
내 말에 녹턴이 다시 한번 멈칫했다. 분명 귀여운 자네트와 미하일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번거롭지만 않다면 가끔은 해 보도록 하지.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됐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설령 그가 아주 가끔만 연습한다 해도, 그걸로 어디란 말인가?
미친 괴물, 철혈의 검이 웃는 얼굴을 연습하게 만든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녹턴과 조금 더 대화를 나누다가, 아이들을 데리고 집무실을 떠났다.
* * *
혜성처럼 나타나 야만족의, 반대 세력의, 배신자의 피를 먹고 성장한 블랙웰은 많은 이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검은 바탕에 은색으로 가문의 문양을 수놓은 블랙웰의 깃발은 그를 적대하는 자들에게는 사형선고와 같았다.
고작 삼백여 년의 역사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이 신흥 가문은 많은 정통파 귀족들의 시기와 경계를 샀다.
하지만 함부로 적대하기에 이 검은 맹수는 짧은 시간에 지나치게 몸집을 불렸다.
출신지도, 배경도 알 수 없이, 그야말로 인세에 갑작스레 출몰한 괴물 그 자체.
많은 수의 귀족들은 이 괴물과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빈대처럼 들러붙어 그 피를 빨며 견제하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 * *
월드만 자작성의 중앙홀.
틀림없이 자작성의 주인이 앉을 만한, 성의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화려한 보위에 앉아 있는 자는 월드만 자작이 아니었다.
녹턴 블랙웰이었다.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턱을 괸 채 앉은 그에게서는 지극한 오만함과 권태가 느껴졌다.
손에 든 보석을 살펴보던 그의 나른한 자색 눈동자는 보위 아래 무릎 꿇려진 자들에게로 향했다.
“훌륭한 수집품이로군. 공국의 왕의 것이라고 해도 손색없겠어. 이것은 작은 성의 값과 맞먹는다는 동방의 보옥이던가? 한낱 자작 주제에 이런 것들을 창고가 가득 차도록 수집하느라 수고가 많았겠군그래.”
달싹이는 입술 사이에서 듣는 이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 정도로 섬뜩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면…… 지속적으로 대공가의 군수물자를 빼돌려 적국에 팔아치우느라 수고가 많았다고 해야 하나?”
포승줄에 묶여 보위 앞에 무릎 꿇린 월드만 자작은 눈앞이 노래지는 것만 같았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 증거라곤 하나도 남기지 않았을 터인데…….’
증거는 털어서 먼지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악착같이 지웠다. 증인이 될 만한 녀석들은 전부 사고를 가장하거나 누명을 씌워 죽였다.
무수한 수의 얼간이들이 대공가를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다 처리당했지만 자기만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대체 어떻게……!’
자신이 저지른 짓은 큰 죄라고 할 것까지도 없었다.
블랙웰 대공가 정도로 거대한 세력에는 언제나 많은 수의 하이에나와 구더기가 꼬인다.
제국의 황실에는 부패한 자가 하나도 없을까?
자신만큼, 혹은 자신보다도 훨씬 더 해 먹은 그들이 지금까지도 떵떵거리며 살아 있는 까닭은 그것이 암묵적으로 용인되기 때문이었다!
그들보다 훨씬 높은 자들도 똑같으니까. 썩은 부분을 전부 도려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니까.
그러니까 자신이 저지른 일은 잘못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은 그저 운이 나빴던 것뿐이다.
지난밤까지만 해도 자신의 미래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자작이, 자신의 불운을 처음으로 직감했던 것은 바로 오늘 아침이었다.
수백 개의 검은 깃대가 지평선을 장식하던 그 모습.
검은 개미 떼 같은 블랙웰의 기사들이 순식간에 성을 포위하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평생 잊을 수 없을 악몽.
“아버지! 아버지!”
자작은 열 살짜리 아들이 울면서 자신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자신의 아이의 손목이 포승줄에 묶여 붉게 부어오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자작은 그저 아들의 울음소리가 대공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걱정이었다.
딸과 아내, 장인과 장모도 전부 똑같은 꼴로 흐느끼고 있었다.
포승줄에 꽁꽁 묶여 대공의 발밑에 널브러져 우는 가족들을 보면서도 자작은 그 모든 일이 자신의 죄라는 자각을 갖지 못했다.
‘어떻게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물증은 없을 것이 분명하다. 저쪽에서 먼저 증거를 들이대기 전에는 최대한 발뺌해 보자.’
그렇게 판단한 자작은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이마를 조아리며 말했다.
“대공 전하! 송구하오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저는 평생을 대공가의 영광을 위해 충성을 바쳐 투신했습니다. 부디,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대공은 그의 말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발밑의 이들을 슥 훑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가족들에게는 죄가 없군.”
당연히 가족들을 공범으로 끌어들이지는 않았다. 이 일 전부가 그 홀로 저지른 짓이다.
증인이 될 만한 자는 전부 처리해야만 했고, 그의 가족들은 그런 식으로 처리해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패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작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목숨이었으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대체 어떻게,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는 거지?’
……대공이 깊게,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을수록 위험했다. 자작은 숨통이 바짝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자작을 제외한 가족들을 풀어 주고 응접실에 가두어라.”
대공이 명령하자 기사들의 손에 의해 가족들이 끌려갔다.
가족들을 풀어 준다는 것은 그들의 목숨만은 살려 준다는 것을 의미하리라.
하지만 자작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나는, 풀어 주지 않는 거지?
어째서, 내가,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지?
기사들 중 제일 높은 지위인 듯한 자가 대공에게 물었다.
“자작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자작에게는 억겁의 시간으로 느껴지는 대공의 입술이 떨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
그 끝에서, 대공이 말했다.
“군법대로 처리하라.”
군법대로 처리하라.
군법에 따르면, 군수물자를 유출한 자는 즉결 처형이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자신을 향해 검을 뽑으며 다가오는 기사를 보며, 자작은 깨달았다.
자신은 그저 운이 나빴던 것뿐이 아니었다.
어리석었던 것이다.
친아버지를 살해할 정도의 괴물이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는 예상부터가, 다른 인간들과 같은 자비를 보일 것이라는 생각부터가 잘못되어 있었다!
“대공 전하! 전하!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전하! 전……! 컥!”
자작의 목숨 구걸은 무거운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쿵 소리와 함께 끊겼다.
자작성의 화려한 홀에 짙은 피 냄새와 죽음의 냄새가 진동했다.
* * *
“역시 오늘도 자비라곤 없으셨군.”
녹턴의 보좌관이자 블랙웰 기사단의 부단장, 페르닐 테이스벡이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 엄격하신 분입니다. 그나마 가족들은 살려 주신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뭐, 죄도 없는 10살짜리 꼬맹이를 연좌제로 보내 버릴 수는 없잖아.”
“그건 물론 그렇습니다만…… 아무래도 주군의 이미지가 있잖습니까.”
기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거 왜, 6년 전 그 사건……. 그런 일을 하신 분한테 어울리는 처사는 아니죠. 그 정도로 냉혹하신 분이라면 저는 가족들도 싹 쓸어 버리실 줄 알았는데요.”
감히 주군의 과오를 입에 담은 기사를 심하게 꾸중할 만도 했건만 페르닐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네가 지난 분기에 들어온 신입이었던가? 신입이라 그런지, 주군에 대해 뭘 모르는구나.”
“예?”
“주군께선 죄가 있는 자, 없는 자를 칼같이 구분하신다고. 심지어는 증거가 없는 사건에서도 죄인을 정확히 골라내시고, 꿍꿍이가 있는 자는 바로 알아보시고 결코 곁을 주지 않으시지.”
“예? 그게 정말입니까? 명탐정이 따로 없으시군요!”
“인마, 명탐정이 뭐냐? 이런 건 통찰력이라고 하는 거야.”
신입 기사는 감명을 받은 듯 눈을 빛냈다.
“주군께선 정말 훌륭한 분이시군요. 그러고 보니 주군께선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녹턴의 오랜 보좌관인 페르닐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야 업무를 보고 계시거나 검술 수련을 하고 계시겠지.”
그러나 그의 추측은 전부 틀렸다.
점령당한 월드만 자작성,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전 성주의 방에서 녹턴은 홀로 앉아 있었다.
그것도 몹시 심각한 얼굴로.
그럴 만도 했다. 이번 사건을 정리하고 자작성과 자작령의 후처리를 하는 것은 몹시 번거로운 일이었다.
아마 며칠 정도는 수도로 돌아가지 못하리라.
“…….”
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감안하고서라도 녹턴의 굳어진 얼굴에는, 부릅뜬 눈에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근심이 가득 차 있었다.
자작을 처형하는 결정도 눈 깜짝하지 않고 해치운 그는, 지금은 마치 사약이라도 앞에 둔 듯한 얼굴이었다.
하나 그의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사약이 아니었다. 그저 거울 하나가 덩그러니 걸려 있을 뿐이었다.
녹턴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이루 말할 수 없이 심각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극도로 완벽에 가까운 미모를 가진 그였으니 그 모습조차 아름다웠으나, 그 모습은 한 떨기 꽃보다는 한밤중에 마주쳐 흰 송곳니를 드러내고 안광을 빛내는 맹수에 가까웠다.
심약한 자들이라면 그의 미모에 감탄하기보다는 두려움에 떨며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할 것이었다.
오랜 시간 거울 속 자신을 노려보고 있던 녹턴은, 어느 순간 굳게 마음을 먹은 듯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가 웃었다.
거울을 보고.
그의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비틀려 올라갔다. 눈꼬리가 휘어지며 그 안의 형형한 보라색 안광이 번득였다.
정말 스스로도 봐 주기 어려운 꼴이었다.
이런 일을 한 번도 아니고, 하루에 다섯 번씩이나 해야 한다니.
그녀가 이 일을 시킨 뒤로 이미 사흘이나 했지만 나아지고 있는지도 스스로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젠장할…….”
그가 거울 속의 자신을 노려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당장이라도 이런 멍청한 짓은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잘하셨어요! 처음보다 훨씬 나아졌는걸요.”
“이게 다 공녀님과 공자님을 위해서예요.”
“출장 다녀오시는 동안에도 꼭꼭 하루 다섯 번씩 연습하시는 거, 잊지 마세요!”
이런 쓸데없고, 아무런 생산성도 없는 일은 당장이라도 그만두려고 하다가도, 그 의욕 넘치는 목소리를 떠올리면,
……여전히 자신을 두려워하고, 괴물 보듯이 하는 아이들을 떠올리면…….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딱 한 번만 더 할까.
녹턴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이런 얼간이 같은 짓은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다, 영애.”
그는 깊은 숨을 한 번 쉬고는 다시 거울을 보고 미소 지었다.
여전히 끔찍하게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사내가 거울 속에 있었다.
녹턴은 입꼬리를 조금이라도 더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손가락으로 입술을 잡고 끌어당겼다.
아까보다는 그나마 나은 것 같지만, 손가락을 떼면 입술은 다시 원래의 그 상태로 돌아갔다.
얼굴 근육 전체가 널빤지처럼 뻣뻣하기 그지없었다.
녹턴은 손가락을 떼곤 거울 속의 자신을 노려보며 끄응, 소리를 냈다.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자작성에 있는 며칠 동안, 녹턴은 이런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이런 멍청한 짓은 한 번만 더 하고 때려치워야지.
이런 쓸데없는 짓은 한 번만 더 하고 당장 그만둘 테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은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결국 밤마다 거울을 보고 라리아가 시킨 대로 하고 마는 것이었다.
그렇게 엿새가 지났다.
* * *
녹턴이 출장을 간 동안 나는 언제나와 같은 생활을 계속했다.
“자, 공녀님, 공자님. 이건 착한 어린이 표예요.”
나는 아이들에게 30칸짜리 모눈이 그려져 있는 종이를 나눠 주었다.
모눈도, 종이의 테두리에 가득 그려져 있는 꿀벌과 꽃 그림도 모두 내가 직접 그린 것이었다.
기왕 애들에게 주는 거, 예쁜 게 좋을 테니까.
진짜 화가만큼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나름의 정성이 들어간 내 역작이었다.
“우와!”
별것도 아닌 것에 초록색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관심을 보이는 미하일은 무척 사랑스러웠다.
이런 종이 따위보다 훨씬 값지고 화려한 장난감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하일은 내게 선물 받은 것이 진심으로 기쁜 것 같았다.
미하일은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으며 종이를 요리조리 들여다보았다.
“너무 예뻐!”
“고마워요, 공자님.”
나는 미하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결 좋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손바닥 아래에서 쓸려 내려가는 기분이 좋았다.
“이게 모가 이뻐?”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예상대로, 자네트였다.
자네트는 입을 비죽 내밀고 손에 든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잘 그리지도 못하는데 머.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우리 집 화가는 이거보다 훨씬 더 잘 그려.”
“고, 공녀님……. 그런 말씀을 하시면…….”
메리가 안절부절못하며 내 눈치를 보았다. 메리는 내가 지난밤 얼마나 열심히 그림을 그렸는지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상처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내가 애들을 보살핀 경력은 일이 년이 아니다. 자네트보다 훨씬 짓궂은 아이들도 몇 번이나 만나 보았다.
나는 자네트의 본심을 알았기에 그녀의 말에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다.
“공녀님도 참. 사실 기쁘셔서 그러시는 거죠? 저는 다 알아요.”
“머? 아, 아니거든! 안 기뻐!”
내가 웃으며 말하자 자네트가 퍼뜩 놀라 부인했다.
하지만 오랜 유치원 선생님 경력으로 다져진 나의 관찰력은 놓치지 않았다.
자네트가 퉁명스러운 말을 하면서도 몇 번이나 종이 위의 그림을 힐끔거렸다는 것을 말이다.
‘역시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양아버지지만 녹턴의 성격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속으로만 생각하며 자네트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공녀님도 쓰다듬 받고 싶어요? 이리 오세요.”
“피료 업써!”
“아유, 공녀님도 참, 튕기는 모습이 귀여우시다니까.”
“으아앙!”
나는 자네트를 붙잡고 마구 쓰담쓰담쓰담을 해서 결 좋은 은발을 잔뜩 헝클어뜨린 다음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자, 이건 착한 어린이 도장이에요.”
나는 아이들에게 작은 도장을 보여 주었다.
“앞으로 공녀님과 공자님이 착한 일을 하시거나, 떼를 쓰지 않고 제 말을 잘 들어 주시면 도장을 하나씩 찍어드릴 거예요.”
“그거 모으면…… 모가 좋은데?”
씨근거리던 자네트가 물었다.
“도장을 여기 끝까지 모으시면, 소원을 하나 들어드릴 거예요.”
“소원?”
단번에 아이들의 집중이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들의 초록색, 보라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라리아가 소원 들어주는 고야? 모든지?”
“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요.”
예를 들어서 세계 정복 같은 소원은 내가 들어주기 어려울 테니까. 설마 아이들이 그런 소원을 빌진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미하일이 아니라 자네트라면야…….
아이들의 반응은 내 생각보다 컸다.
“진짜? 너무 조아! 라리아, 고마어!”
미하일은 벌써 내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기라도 한 양, 뛸 듯이 기뻐하며 내 다리를 꽉 끌어안았고,
“치, 귀찮은데……. ……그래도 미하일만 하는 건 시러.”
자네트는 투덜거리면서도 내심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어쩌면 쌍둥이 남동생에게 질 수 없다는 경쟁심리가 자극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날부터, 아이들의 도장 모으기 경쟁이 시작되었다.
‘착한 어린이 도장’ 육아법은 유치원에서 한두 번 써본 방법이 아니었으니 그 효과는 이미 입증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유치원이 아닌 제국의 대공저에서도 확실히 발휘되었다.
아이들이 얌전해지는 데에는 단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다.
“공녀님, 공자님! 목욕하실 시간이에요!”
“으으, 시러! 어제도 했자나?”
자네트가 카펫 위에 엎어진 채로 투덜거렸다.
참고로 미하일과 자네트는 오후 내내 나와 함께 물감 놀이를 한 탓에 손은 물론 얼굴, 다리에 머리카락까지 온통 물감으로 엉망이었다.
그런 자네트가 카펫 위를 뒹굴고 있으니 방 안의 꼴 역시…… 짐작이 가는가?
방 청소하는 하녀들에게 새삼 미안해졌지만, 그래도 물감 놀이는 아이들의 정서 안정과 창의력 발달에 좋으니까…….
나중에 하녀들에게 과자라도 가져다줘야겠다.
어쨌든 아이들이 이런 꼴이니 목욕을 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에 이미 과자를 먹였으니 또 바닐라 쿠키를 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걱정 없지.’
나는 속으로 씩 웃으며, 회심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목욕 잘하시면 도장 찍어 드릴게요.”
“도장?”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엎어져 있던 자네트도, 카펫 위에 쪼그리고 앉아 블록을 가지고 놀고 있던(블록에 물감을 묻히고 있던) 미하일도 한순간에 발딱 일어났다.
나는 활짝 웃으며, 품에서 도장을 꺼내 들었다.
“……도장 필요한 사람?”
“나!”
“나, 나도!”
“내가 먼저야!”
아이들이 앞다투어 욕실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며 메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착한 어린이 도장이라니…… 정말 신기한걸요. 과자 없이 공녀님, 공자님을 이렇게 쉽게 목욕시킬 수 있다니…….”
“헤헤, 별거 아냐.”
아이들의 특정 행동을 이끌어 내는 데 필요한 것은 당연히 보상이다. 관심과 의욕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 말이다.
보상은 외적 보상, 내적 보상으로 나뉘는데, 외적 보상은 과자나 용돈 같은 것이고, 내적 보상은 아이가 내적으로 느끼는 성취감, 만족감 등을 말한다.
착한 어린이 도장을 모두 모으면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조건을 걸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이 방법은 외적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착한 일을 하면 바로 주어지는 과자와 다르게 도장을 30개 모아야 하는 방법은 외적 보상을 유예시키고…….
아이들은 도장을 모으는 행위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미하일은 벌써 도장을 6개나 모았다고 자랑했다.
즉, 내가 들어줄 소원이 아닌 도장을 모으는 만족감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내적 보상이 된다.
외적 보상, 내적 보상이라는 개념은 현대 유아교육학에서는 아주 고전적인 것이지만 이곳 제국에서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유아교육학이라는 학문도 없는 곳이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제국에서는 아이가 말을 듣게 하기 위해서 과자 같은 즉각적인 외적 보상을 주거나, 혹은 매를 드는 방법을 쓰고 있지만…….
두 가지 방법 모두 좋은 방법이 아니다.
체벌은 특히 그렇고, 외적 보상은 단기적으로는 최고의 효과를 가진 방법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발전하는 기쁨을 배울 수 없게 되니까.
“착한 일을 하면 도장을 찍어 주다니, 전 이런 방법은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이런 방법을 대체 어떻게 생각해 내신 건가요?”
메리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나는 멋쩍게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냥…… 내가 원래 육아법에 관심이 많아서. 늘 공녀님과 공자님을 어떻게 보살피면 좋을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거든.”
지금의 내게는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차마 ‘전생의 세계에서는 흔한 방법이다’라고는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메리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감격한 것 같았다.
“아마 제국에서 아가씨보다 훌륭한 양육자는 없을 겁니다. 몰리도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아가씨만큼 독창적이진 않았으니까요.”
으윽! 나는 부끄러워져서 땅 밑으로 꺼져 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면 하늘로 솟아오르거나.
그러나…… 그때만 해도, 나도 메리도 예상치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이들의 경쟁심이 내 생각보다 지나치다는 것이었다.
“아니, 공자님! 이 꽃에 물을 주셨어요?”
메리가 깜짝 놀라서 말하자, 미하일은 뺨을 분홍색으로 물들이곤 배시시 웃었다.
“으응.”
그러니까 상황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우리, 그러니까 아이들과 나, 메리 이렇게 네 명은 따뜻한 오전 햇살을 맞으며 정원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하일이 화단에서 멀리 벗어난 곳에 피어 있는 들꽃 한 송이를 발견했다.
정원사의 손에 잘 관리되고 있는 화단의 꽃에 비해 그 들꽃의 모습은 참으로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미하일은 초라하고 비실비실한 들꽃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더니, 시원한 물을 한 잔 떠 달라고 했다.
나와 메리는 미하일이 산책을 하다 목이 마른 줄로만 알았다. 메리가 얼른 달려가 물을 한 잔 구해 왔고…….
미하일은 우리들의 예상을 벗어나, 들꽃에 물을 준 것이 아닌가!
“얘만 계속 혼자 여기 있으니까, 목이 마를 것 가타서…….”
“공자님……!”
솜사탕 같은 볼살에 보조개가 함빡 패도록 배시시 웃는 미하일의 모습에…… 나와 메리는 가슴이 녹아드는 것만 같았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을 수 있을까?
정말이지 녹턴의 아들이라곤(물론 양아들이지만)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착한 아이였다.
나는 당장이라도 미하일을 꽉 끌어안고 볼살을 빨아먹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욕망을 꾹꾹 참아냈다.
미하일의 볼을 빨아먹는 대신,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공자님은 어쩜 이렇게 다정하실까요? 작은 꽃에도 이렇게 마음을 쓰시다니……. 공자님은 분명 어른이 되면 아주 훌륭하신 분이 될 거예요.”
“헤헤…….”
“아가씨, 도장이요. 공자님께 ‘착한 어린이 도장’ 드려야죠.”
메리가 ‘그것’을 입에 담자, 나는 두 어린이들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느꼈다.
“도…… 도장? 나 도장 주꺼야?”
미하일의 눈이 커졌다. 정말 열심히 도장을 모으고 있는 미하일은 진심으로 기쁜 것 같았다.
“도장? 미, 미하일만?!”
자네트는 입을 떡 벌렸다. 미하일만큼 많이 모으지는 못했지만 자네트 역시 도장에 꽤 열정을 불태우고 있던 차였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미하일의 선의는 정말 착한 어린이의 행동이라고 할 만하지만…… 이런 일로 도장을 줘도 괜찮은 걸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나는 내 말을 잘 듣거나 ‘착한 일을 하면’ 도장을 준다고 해 버렸다.
양육자에게 제일 중요한 건 아이들을 대하는 언행에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주겠다고 한 보상을 주지 않거나, 일관적이지 않은 이유로 훈육을 하는 등의 행동은 아이들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었다.
“좋아요, 공자님. 도장 하나 드릴게요. 정말로 잘하셨어요.”
“와아!”
“왜, 왜 미하일만! 나도, 나도 줘!”
“공녀님은 다음에 제 말을 잘 들으시면 드릴게요.”
나는 자신도 도장을 달라고 떼를 쓰는 자네트를 달래고, 방에 돌아와 미하일의 도장 표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런데……. 우리의 자네트는 그 일이 계속 마음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자, 나도 물 줘써! 도장 조!”
다음 날. 자네트는 화단의 꽃은 물론 공작저의 모든 식물들에게 물을 부어 주었다.
관목, 크고 작은 조형 식물, 온실의 채소와 허브들, 심지어 물을 자주 줄 필요가 없는 선인장까지…….
그걸 다 혼자 했냐고? 그럴 리가 있나. 당연히 일꾼들을 썼지.
물동이를 들고 나르는 수십 명의 일꾼들 사이에서 위풍당당하게 서서 도장을 요구하는 다섯 살배기 꼬마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공녀님…….”
나와 메리는 황망하게 서서 위풍당당한 자네트를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역시 블랙웰 대공가의 장녀라고 해야 하나. 선행의 스케일이 범상치 않은걸…….’
뭐, 그래도 정원사의 일을 덜어 준 건 사실이니까 선행은 선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자네트에게 도장을 찍어 주었다.
“야호! 나도 도장 바다써! 아하하하! 신난다!”
자네트는 뛸 듯이 기뻐했고, 나는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그다음 날. 우리는 공원으로 소풍을 나왔다.
소풍이라고 해봤자 별건 아니고, 그냥 돗자리를 깔고 샌드위치와 간식을 나누어 먹었을 뿐이다.
우리는 돗자리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비프 샌드위치를 먹고, 하녀들이 준비해 준 뜨거운 물로 차까지 우려 마셨다.
“오늘은 소풍날이니까, 특별히 머핀을 드릴게요.”
“우와아!”
나는 몰리의 양육법을 이어 아이들의 치아 건강을 위해 단 것은 하루 한 번으로 제한했고, 아이들은 여전히 단 것에 사족을 못 썼다.
하지만, 오늘만은 특별히 맛있는 머핀을 주기로 했다.
소풍에 군것질이 빠지면 섭하니까!
“짜잔!”
나는 주방 하녀들이 새벽부터 준비해 준 회심의 간식, 마카다미아와 화이트 초콜릿을 듬뿍 넣은 머핀을 꺼냈다.
머핀을 보자마자 아이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와! 마시께따!”
미하일은 정말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머핀을 받아 들었다. 자네트는 자기 얼굴만 한 머핀을 받아 들자마자, 누구한테 뺏길세라 그것을 황급히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하일이 시선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
미하일이 어딘가를 빤히 바라보길래, 나 역시 그의 시선을 좇았다.
알고 보니, 미하일의 시선 끝에는 어린 마부의 아들이 있었다. 만 다섯 살 정도, 미하일과 자네트의 또래로 보였다.
더벅더벅한 갈색 머리에 콧등에는 주근깨가 빼곡히 박혀 있는 그 아이는 침까지 흘리면서 미하일을…… 아니, 미하일의 손에 들린 머핀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대 한국에는 유치원도 있고 맞벌이 부부를 위한 국가지원 아이 돌봄 서비스 같은 것도 있지만 제국에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제국에서는 일터까지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니, 이 녀석이!”
그렇다곤 해도 아이가 고용인의 자제를 뚫어져라 보는 것은 당연히 무례한 일이었다.
뒤늦게서야 미하일과 자기 아들 사이의 아이컨택(?)을 눈치챈 마부는 화들짝 놀랐다.
“이, 이놈 자식아! 어, 어느 안전이라고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냐, 응? 저분은 네 친구가 아니라 대공 전하의 아드님이시란 말이다!”
“우으, 아빠, 나도 저거…….”
“이 녀석이 그래도! 어, 어서 도련님께 사죄드리지 못하겠느냐, 응?”
아들이 미하일(의 손에 든 머핀)에 대고 삿대질까지 하자 마부는 기함했다.
귀족 나리께 손가락질을 하다니!
보통의 귀족 집안이라면 일자리도 잃고, 매질까지 당할 수 있는 큰 잘못이었다.
마부는 창백해진 얼굴로 자기 아들을 안고 달려와 연신 허리를 굽혔다.
“정말 죄송합니다, 도련님, 아가씨. 제 아들이 아직 제대로 배워 먹지를 못해서…….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제가 정말 확실히 가르쳐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미하일과 자네트는 너무 어리고, 이 둘을 제외하면 이 자리에서 제일 높은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러니 내가 상황을 수습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으음…….”
내가 이를 어쩔까, 잠깐 고민하던 찰나였다.
“이놈아, 도련님께 진심으로 사과드려라. 어서!”
마부가 아들을 내려놓고 등을 꾹 눌러 허리를 숙이게 만들었다.
“재송함니다…….”
마부의 아들이 웅얼거리듯 말했다.
미하일은 머핀을 든 채 그런 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네트와 미하일은 만 다섯 살이었지만, 블랙웰 대공가의 피를 이었기 때문일까, 발육이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만 여섯 살, 심지어 만 일곱 살이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로 키가 컸다.
그래서 미하일은 상대를 내려다볼 수밖에는 없었다.
아이를 빤히 보던 미하일이, 머핀을 든 손을 쑥 내밀었다.
“이거 머꾸시퍼?”
뜻밖의 질문에 마부도 나도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마부의 아들은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미하일이 방긋 웃었다. 눈 밑의 애교살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그럼 너 이거 머거.”
나도, 메리도, 마음 졸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 마부와 다른 사용인들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귀를 의심한 건 당연지사였다.
특히 제일 당황한 건 마부 같았다.
“예? 아, 아니…… 도련님, 정말 죄송하지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마부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럴 만도 했다. 자기 아들이 귀하신 소공자님께 삿대질을 해서 매를 맞고 쫓겨날 줄 알았는데, 혼쭐이 나긴커녕 머핀을 주다니!
이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은 사람은 오직 한 명, 마부의 아들뿐인 것 같았다.
“와아!”
아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냉큼 미하일의 손에서 머핀을 받아 들었다. 당연히 마부는 기겁했다.
“아, 아니, 이 녀석이! 그, 그거 당장 도련님께 돌려드리지 못하겠느냐! 도련님, 정말 죄송…….”
하지만 미하일은 조금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아니야. 그건 이제 그 애 꼬야.”
마부의 아들에게 하루에 한 번밖에 먹을 수 없는 머핀을 양보한 미하일은 진심으로 아무렇지도 않고, 오히려 후련하고 기쁜 듯한 얼굴로 웃었다.
“나는 갠차나.”
“도련님……!”
마부도, 주변의 사용인들도 모두 감격에 빠질 수밖에는 없었다.
“세상에, 어쩜 저렇게 천사 같은 분이 다 계실까…….”
“공자님은 정말 다정하셔.”
“저렇게 마음 넓고 양보를 잘하는 다섯 살은 난생처음 보는걸.”
사용인들이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껏 죽인 말소리였으나, 그들 모두가 감동으로 들떠 있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감동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도련님. 이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도련님께서 어엿한 성인이 되실 때까지 저는 도련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아들의 결례로 벌을 받고 실직하기는커녕, 자비를 베푼 소공자에게 마부는 몇 번이고 허리를 숙였다.
“이놈, 너도 도련님께 감사하다고 해야지. 어서!”
“감쟈함니다. 감쟈함니다. 감쟈함니다.”
머핀을 우물거리던 마부의 아들이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와 메리는 물론 이 모습을 엄마 미소를 지으면서 지켜보았다.
소풍을 마치고 마차에 타고 돌아가던 길.
“우리 공자님은 정말 마음이 깊으시기도 하지.”
마차 안에서도 미하일의 선행이 화제에 올랐다.
아이들, 나와 메리와 함께 마차에 탄 하녀 두 명은 그때의 일을 입에 담으며 계속해서 꺄악꺄악 떠들어 댔다.
“너무 사랑스러우셨어요. 저는 그때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니까요.”
“정말 놀랐어요. 이렇게 어린 공자님께서 어떻게 거기서 머핀을 줄 생각을 하셨을까요?”
칭찬을 듣는 건 미하일인데 왜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건지.
엣헴, 내 공자님이 이렇게 착하고 다정하고 어른스러운, 자라나는 벤츠의 새싹이다 이거야!
어른들의 대화라고 아이가 못 알아듣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자신의 칭찬이 들려오자 미하일은 귀를 발갛게 붉히고 내 팔을 붙들고 옆에 착 붙어 있었다.
“이짜나, 라리아.”
“네에, 공자님?”
“나 잘해찌?”
미하일이 이런 걸 다 물어볼 줄이야. 아이구, 귀여워.
어린아이에게 칭찬은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 내 신조였기 때문에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물론이죠. 우리 공자님 아주 잘하셨어요.”
“그럼, 도장 주꺼야?”
“네에?”
뭐라고? 이건 또 예상 밖의 말이어서 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미하일은…… 도장을 받기 위해 일부러 착한 일을 한 건가?’
의외이긴 했지만 미하일을 탓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한없이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아이들 역시 사람인데, 어떻게 천사처럼 한없이 순진하기만 하겠는가.
아이들도 알 건 다 알고, 계산도 할 줄 아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어쨌든 도장을 받기 위해 그랬든 받지 않기 위해 그랬든 선행은 선행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물론이죠, 공자님. 돌아가면 바로 도장을 찍어 드릴게요.”
“야호!”
미하일이 숨김없이 기뻐했다.
“머어? 왜 미하일만! 나도 죠!”
내 무릎에 앉아 있던 자네트가 불만을 토했다. 나는 자네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공녀님도 착한 일을 하시면 도장을 드릴게요.”
“우씨이…….”
이때만 해도 나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이 말이 씨가 될 줄은…….
약속대로 미하일에게 도장을 찍어 주고, 언제나와 같은 하루를 보낸 뒤의 다음 날이었다.
“야! 나와!”
이 패기 넘치는 외침의 주인은…… 바로 자네트 공녀님 되시겠다.
이른 오전부터 자네트는 마구간으로 향했다.
“아니,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대공가에서 대공 전하 다음으로 귀하신 몸인 소공녀께서 호령하니 어제의 그 마부가 뛰쳐나왔다. 옆에는 아들을 달랑달랑 단 채였다.
“혹시 무언가 문제라도…….”
그렇게 중얼거리는 마부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역시 어제 아들이 소공자에게 삿대질을 한 것이 문제가 된 걸까? 그래서 뒤늦게라도 벌을 내리시려는 게 아닐까?
마부가 그렇게 불안해할 정도로 자네트는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작은 입술을 꼭 다문 채로 조용히 마부와 그의 아들을 노려보던 자네트는…….
“이거 바다.”
“예?”
마부가 되묻기가 무섭게, 자네트를 따라온 일꾼들이 그의 앞에 무언가를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그것은 각종 과자와 빵이었다.
자두 푸딩, 생크림 케이크, 에클레어, 마들렌, 사브레, 브리오슈, 파운드케이크, 머랭 쿠키, 피낭시에는 물론이고…….
보기만 해도 달콤한 마멀레이드 잼과 라즈베리 퓨레, 카시스와 미라벨 잼, 벌꿀은 물론…….
심지어는 황금빛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버터와 감초사탕까지 있었다!
“우와, 와아아!”
눈앞에 쌓이는 별천지 같은 과자들에 마부 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네트는 그 앞에 척척 나서더니,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다 니꺼야! 다 머거!”
그렇게 말한 자네트가 이번에는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곤 말했다.
“라리아! 나 잘해찌?!”
그리고 이 상황을 열 걸음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는…….
“……아. 네.”
다소 허름해진 상태로 대답했다.
뼛속까지 서민인 나로서는 정말이지 저 공녀님의 선행 스케일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어쨌든, 당황스럽긴 해도, 칭찬은 해야 한다. 양육자의 언행은 일관적이어야 하고, 두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 차별이 있으면 안 되니까.
“우, 우리 공녀님…… 마부의 아들까지 이렇게 잘 챙겨 주시고, 정말 훌륭하세요! 정말 마음이 깊으시고 배포도 크시네요.”
“마, 맞습니다! 과연 자네트 공녀님, 정말 다정하고 마음 넓으신 분이시군요.”
“헤헤헤.”
나와 메리가 한껏 칭찬해 주자, 자네트는 만족스런 얼굴로 웃었다. 그 모습은 정말로 뿌듯해 보였다.
‘저 얼굴을 보면 평범한 어린애긴 한데…….’
……스케일이 나랑 좀 달라서 그렇지.
나는 자네트에게도 도장을 찍어 주기로 약속했다.
우리가 그러는 동안, 마부의 아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가득 쌓인 과자들을 향해 달려갔다.
“우와! 아부지, 아부지! 이거 좀 보세요!”
아들은 과자 더미를 가운데에 두고 강강술래 하듯 빠르게 돌았다.
그는 정말로 행복해 보여서, 생일 선물과 크리스마스 선물 10년 치를 미리 받은 것 같은 반응이었다.
“세, 세인트 아그네스 님께서 오신 것 가타요!”
그 모습을 얼떨떨하게 지켜보고 있던 마부 역시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말 그렇구나.”
세인트 아그네스는 여신의 계시를 받고 크리스마스에 가난한 집의 아이들에게 빵과 과자를 나눠 주었다는 성인이다.
지금이 크리스마스는 아니지만, 상황과 아주 잘 어울리는 비유가 아닐 수 없었다.
“아가씨께서는 정말로 세인트 아그네스 님이실지도…….”
그렇게 중얼거리는 마부의 붉어진 눈에는 어느덧 감동의 눈물까지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마부는 자네트와 미하일에게 땅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허리를 깊게 숙였다.
“저와 아들을 이토록 보살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가씨. 그리고 도련님! 이 보잘것없는 몸이 늙어 스러지더라도 평생을 아가씨와 도련님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엣헴.”
“헤헤헤.”
자네트가 어깨를 으쓱하고 미하일이 수줍게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부에게 차마 자네트와 미하일이 착한 어린이 도장 때문에 이런다는 말을 할 용기는 나에게 없었다…….
‘뭐, 그래도 다들 행복해 보이니 괜찮지 않을까.’
나는 적당히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마부는 자기 아들이 한 달 내내 먹어도 다 못 먹을 양의 과자를 어린 자식이 있는 사용인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사용인들 사이에서 자네트와 미하일의 평판이 더욱 좋아졌다는 뒷이야기.
* * *
“사용인 일동, 대공 전하께, 경례!”
녹턴이 대공저로 돌아온 것은 우리가 한바탕 도장 소동을 겪은 뒤의 일이었다.
저택의 모든 사용인은 물론, 그의 자식들인 자네트와 미하일까지 저택 홀에 도열하여 대공을 맞이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다녀오셔쩌요, 아버지.”
녹턴을 무서워하는 자네트와 미하일이 겁을 먹고 울거나 투정을 부리면 어쩔까 했는데.
어려도 귀족이라는 건지, 이제 조금은 그에게 익숙해진 건지, 아니면 내가 곁에 있어서 그러는 건지, 아이들은 제법 의연하게 양아버지를 맞이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이 장하고 또 장해서 몰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사용인들에겐 반응조차 하지 않고 지나쳤던 녹턴은 나와 아이들의 앞에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나와 아이들을 천천히 훑는 것이 느껴졌다.
“별일은 없었나?”
녹턴이 내게 묻자, 나는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네. 공녀님, 공자님은 잘 지내셨습니다.”
“영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질문에, 나는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되물었다.
“네?”
“영애에겐 별일이 없었냐고 물었다.”
정말이지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출장을 나갔다가 6일 만에 돌아온 대공이, 자기 자식들의 안부와 함께 한낱 사용인의 안부를 묻다니.
‘표면적으로는 약혼 관계이니까, 다른 사람들의 눈을 신경 써서 물어본 거구나.’
그렇게 생각한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저 역시 잘 지냈습니다. ……덕분에.”
기분 탓이었을까? 내 대답을 들은 녹턴의 입가가 아주 미미하게 꿈틀거린 것 같기도 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나를 보는 그의 눈길이 어쩐지 평소보다 부드러운 것 같다고 느낀 그 순간이었다.
“그렇군.”
녹턴은 고작 그 말 한마디만 남기고 바로 몸을 돌려 저벅저벅 홀을 가로질렀다.
그의 발걸음이 향한 방향을 보니, 아마 집무실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6일 만에 돌아와서 일부터 하려고? 지독한 일 중독 인간 같으니.’
나는 속으로 혀를 찼으나, 그나마 아이들과 약혼녀인 내 인사 정돈 받아 주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게 녹턴은 그를 오랜 기간 모셔 온 집사 시몬은 물론 다른 사용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예상 밖의 일은 그날 오후에 일어났다.
바로, 일 중독 인간에게서 호출이 온 것이었다.
그것도 아이들은 빼고 나 혼자만 집무실로 오라는 호출이었다.
“들어오게.”
집무실 문을 노크하자 너머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부르셨나요? 대공 전하.”
문 너머에는 녹턴 블랙웰, 그의 모습이 있었다.
두꺼운 외출용 코트를 벗어 던지고 언제나와 같은 가벼운 실내용 재킷과 베스트를 두른 채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래.”
그는 정나미 없을 정도로 짧게 대답하곤 맞은편의 좌석을 권했다.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가 나를 왜 부른 걸까?’
사실 잘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이들과 함께 오게 했다면 출장 직후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그랬던 걸로 이해하면 될 텐데, 아이들은 부르지 않은 걸 보니 그건 아닌 것 같고.
‘어쩌면 그동안 아이들에게 있었던 일을 물으려 하는 걸지도 모르지.’
그 정도로 결론을 내린 나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그의 기색이 뭔가 이상했다.
“…….”
녹턴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원래 늘 웃지 않고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다니는 그였지만 그가 그 정도로 안면을 굳히고 있는 모습은 또 처음 보았다.
대리석처럼 굳은 얼굴의 녹턴은 입은 고집스레 다물고, 눈썹은 빳빳하게 경직된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의아해져서 그를 불렀다.
“전하?”
그제야 녹턴은 얼음에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뜨더니, 뭔가 결심을 한 듯한 결연한 얼굴을 하곤 내게 말했다.
“그걸 말해 두고 싶군, 영애. 내가…….”
그의 입술이 긴장한 기색을 띠고 달싹였다.
“영애의 부탁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야.”
그의 말에 나는 다시 멍해졌다.
“부탁? 무슨 부탁이요?”
녹턴이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설마 잊어버린 건가? 내게 웃는 연습을 해 달라고, 영애가 부탁하지 않았나?”
뭐라고? 그의 말에 나는 기가 차서 그만 풋 웃고 말았다.
사실 잊고 있었던 건 맞았다.
‘착한 아이 도장’ 소동의 임팩트가 너무 강해서 그에게 웃는 얼굴 연습을 하라고 했던 걸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부탁’이라니! 말만 들으면 꼭 내가 그에게 ‘제발 웃는 연습을 해 주세요’라고 간청이라도 한 것 같다.
‘그야말로 평생을 권력자로 살아온 사람의 사고방식이네.’
물론 그렇다고 화가 나거나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성장 환경이 어땠는지 정도는 창조자인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왔다면 그의 건방진 성격도 이해가 된다고나 할까.
더군다나 꼭 창조자가 아니더라도, 그가 원래 겸손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 정돈 오 분만 대화를 해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고.
내가 웃자 녹턴의 한쪽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왜 웃는 거지?”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맞아요, 제가 그런 부탁을 드렸었죠.”
나는 서둘러 수습했다.
“전하께서 제 부탁을 잊어버리지 않으셨다니 기쁘네요. 그럼 연습은 많이 하셨나요?”
녹턴은 생각 외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직접 보는 것이 이해가 빠를 거다, 영애.”
오오, 세게 나오는데?
그래서 그의 말은, 지금 직접 그동안 연습의 결실을 보여 주시겠다? 나는 팝콘이라도 튀겨서 가져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취향을 빼다 박은 미남이 16살 이후로 최초로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다니!
‘물론 연습의 성과가 별로 없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가 내가 시킨 대로 연습을 했고, 출장이 끝나자마자 그 결과를 보여 주려고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쁘고 즐거운 심정이었다.
“와, 정말요? 그럼 보여 주세요!”
나는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아마 내 눈은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을 것이었다.
녹턴은 시간을 끌지 않았다. 그는 그저 짧은 한숨 소리 비슷한 걸 내더니,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곤…….
살짝 미소 지었다.
“……!”
나는 순간 말문을 잃었다.
나는 아직도 그가 처음으로 웃었던 때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로부터 고작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거보다 조금 나아져 있는 정도를 예상했는데…….
내 예상은 완전히 틀렸다. 그는 이제 제법 그럴싸하게 웃었다.
어색한 기미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그의 번듯한 미모에 가려져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살짝 흔들리는 검은색 앞머리 아래에서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 가늘어지는 눈매와 곱게 휘어지는 입술.
늘 한없이 냉정해 보이기만 하던 그가 지은 부드러운 미소는 몰라볼 정도였고,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나아진 그의 웃는 얼굴을 보면, 대체 얼마나 연습을 열심히 한 건지 대충 짐작이 갔다.
‘게다가,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내 취향을 집약해 놓은 미남의 미소는,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강력했다.
그가 손을 뻗어 심장을 꽉 쥐고 흔드는 것만 같았다. 배 속이 울렁이고 얼굴이 절로 홧홧해졌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웃어 준 것이 아니다.
그냥 내가 시켰던 연습의 성과를 보여 주려고 했던 것뿐이 아닌가. 그런데 고작 이 작은 미소에 내 마음이 이렇게까지 흔들릴 줄이야.
‘얼굴이 문제야, 얼굴이.’
새삼 후회가 들었다.
아, 남주인공을 이렇게까지 내 취향으로 설정할 필요는 없었는데…….
조금 정돈 내 취향에서 어긋나게 써도 괜찮았지 않았을까?
나는 불에 댄 듯 놀라 그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영애?”
한껏 돌린 옆얼굴에서 그의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상황을 수습하려고 필사적으로 아무 말이나 막 던졌다.
“……아, 아! 저, 정말 많이 느셨네요. 우와~ 대, 대단해요~!”
내가 생각해도 영혼이 없는 칭찬이다. 자네트나 미하일에게 하는 말과는 아주 천지 차이였다.
상대가 화를 내도 할 말이 없었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연습을 해 왔는데 제대로 보지는 않고 영혼 없는 칭찬이나 하고 있으면 누구라도 기분이 나쁘지 않겠는가.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그때였다.
“영애.”
무언가가, 내 턱에 닿아 왔다.
그것이 보드라운 가죽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작은 힘이 내 턱을 잡고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그것은 너무나 예상 밖의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저항할 새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그 힘에 끌려가 그를 돌아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제대로 보라고 말했을 텐데.”
그의 낮고 그윽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가 장갑을 낀 손으로 내 턱을 끌어당겨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는 것을.
그의 코와 나의 코는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시야 안 한가득히 그의 완벽한 얼굴이 들어왔다.
“영애가 부탁해서 한 일이니, 영애가 제대로 봐 줘야지.”
녹턴은 믿을 수 없게도 능숙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속삭였다.
“안 그래?”
미치겠다. 죽을 것 같다.
나는 당장이라도 심장이 입 밖으로 뛰쳐나올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 인간은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내가 뭐,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가족의 원수라도 되어서 그 복수로 내 심장을 파열시켜 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내게 이래서는 안 되었다.
저렇게 섹시하게 웃는 저 인간을, 대체 어느 누가 여자와 단 한 번도 교제해 본 적 없는 남자로 보겠는가?
미친 듯이 박동하는 맥박과 달달 끓어오르는 혈류를 이기지 못하고, 나는 결국…….
“놔, 놔주세요…….”
눈을 질끈 감고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그는 내 턱을 놓아주었다.
가까스로 그의 손에서 벗어난 나는 여전히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숨을 골랐다.
대체 얼마나 심호흡을 했을까, 겨우겨우 눈을 뜨자 그가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웃고 있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나?”
그가 언제나와 같은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감상을 말해 줘야 할 게 아닌가.”
그래, 맞아. 감상! 내가 시킨 일이니 뭐라고 대답은 해야 했다.
다행히도 한참 시간을 들여 진정했더니, 이제는 좀 영혼이 있는 칭찬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와, 정말 놀랐어요! 몰라볼 정도로 엄청나게 자연스러워지셨는걸요. 정말 멋져요. 이제 조금만 더 연습하시면 ‘제국 최고의 웃는 얼굴의 소유자’ 1위는 단연 대공 전하이실 거예요.”
녹턴은…… 어이없게도, 내 주접이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눈을 내리깔고 내 말을 듣는 그의 얼굴은 웃음기 한 점 없었지만 묘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게, 어쩐지 계속해 보라는 무언의 표시 같기도 하고.
‘이 인간 의외로 칭찬 좋아하는구나.’
좋아한다면 계속해야지 뭐.
“대공 전하의 미소를 비유하자면 마치 높은 산맥의 만년설 같달까요. 그 아무도 본 적 없는 아름다움이 있으니까요.”
“…….”
“역시 대공 전하는 별로…… 제 마음의 별로……!”
그런데 기분 탓일까.
왜 이렇게 애 다루는 느낌이 들지……?
그의 무언의 압박대로 한참을 주접을 피우던 내가 말했다.
“참, 그런데 이렇게나 웃는 얼굴이 자연스러워지신 걸 보면, 연습을 정말 열심히 하셨나 봐요!”
내 말에 아주 잠깐이지만 녹턴이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나를 마주 보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 전혀. 연습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그가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었을 리가 없는 건 사실이다.
나는 녹턴의 창조자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 잘 알았다.
그는 상당히 고집불통인 데다가 자존심이 세서, 나는 그가 내 말에 따라 연습을 성실하게 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긴 하지만.
‘연습을 안 했는데 이렇게 자연스러워질 수가 있나?’
뭔가 미심쩍었다. 뭐라 말로 표현할 근거는 없지만, 아무튼 직감적으로 그랬다.
나는 눈앞의 상대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까만 해도 그렇게 당당하게 나를 직시하고, 환상적인 미소로 내 정신을 빼놓던 그는…… 어느샌가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저기, 전하.”
“…….”
“왜 눈을 안 마주치세요?”
“…….”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데 굳이 캐낼 필요도 없었다.
나는 어느샌가 그를 꽤 격의 없이 대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가 나의 고용주라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무례하게 굴어도 될 정도로 그와 친한지도 확신이 들지 않았고.
비록 내가 그의 약혼녀라고 해도 말이다.
나는 그의 연습 여부에 대해서는 그만 궁금해하기로 하고,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손뼉을 짝 쳤다.
“어쨌든, 그만하면 충분해요. 이제 실전에 들어갈 차례네요.”
“실전이라고?”
“네. 그 멋진 웃는 얼굴을 저한테만 보여 주실 생각은 아니시죠?”
내가 씩 웃으며 말하자 녹턴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애초에 그가 웃는 얼굴을 연습한 건 다 그와 아이들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이번에는 아이들에게 써먹어 볼 차례인 것이다. 그 멋진 미소를 말이다.
똑똑한 녹턴은 그러한 내 말뜻을 말 안 해도 깨달았을 것이다.
우리는 작은 계획을 짰다.
이 계획은 녹턴에게는 작은 한 걸음일 뿐이지만, 녹턴과 아이들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거대한 도약이 될 것이었다.
* * *
다음 날이었다.
어린이들의 일은 노는 것이기 때문에 자네트와 미하일은 이날 오전도 열심히 놀았다.
함께 실컷 놀고, 점심을 먹은 뒤, 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대공 전하를 뵈러 갈 거예요. 어제 출장에서 돌아오셔서, 공녀님과 공자님이 많이 보고 싶으시다네요.”
당연히 아이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치과 가자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잔뜩 주눅이 들었다.
“안 가면 안 대……?”
“난 시러. 안 갈꼬야.”
당연한 일이었다. 두 아이 모두 여전히 녹턴을 무서워하고 있었으니까.
녹턴에게는 유감인 일이지만 그가 출장을 간 지난 6일 동안 아이들은 그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아했다. 그때만은 대공저가 온통 이 아이들 세상 같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나는 최대한 따뜻하게 웃어 보이며 두 아이를 꼭 안아 주곤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는 공녀님, 공자님을 혼내시려는 게 아니고 그저 보고 싶으실 뿐이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 이번에도 제가 같이 갈 테니까요.”
“정말로……?”
“네! 게다가 대공 전하께서 공녀님, 공자님을 위해 맛있는 과자까지 준비해 놓으신다고 하셨어요.”
내가 열심히 설득하자, 그 겁 많은 미하일은 결국 큰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아. 난 라리아를 미드니까.”
미하일이 용기를 냈는데 경쟁심 많은 자네트가 대놓고 겁을 낼 수는 없었다.
“나, 나도! 난 하나도 안 무서워!”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한꺼번에 꼭 안아 준 나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녹턴의 집무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자, 문 너머에서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도 좋아.”
아이들이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아이들의 손을 다시 한번 꼬옥 잡아 쥐곤, 문을 열었다.
문 너머의 풍경은…….
아이들이 두려워하던 그 어둡고 삭막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등유 등 몇 개만을 밝혀 두던 방 안은 훨씬 환한 마나 등과 활짝 열린 창문 덕에 대낮처럼 밝았다.
종이 냄새와 쨍한 잉크 냄새만이 풍기던 방 안을 채우는 것은 달콤한 바닐라, 헤이즐넛의 냄새였다.
집무실 한가운데의 테이블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쿠키와 초콜릿, 그리고 김이 폴폴 올라오는 따끈한 우유가 놓여 있었다.
녹턴은 그 테이블 옆의 소파에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군.”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쿠키와 우유를 차려 두고 기다리는 녹턴이라니!
정장을 입고 짚신을 신은 모습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것을 본인도 알고 있었는지, 그는 조금 어색한 듯 평소보다 경직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일단 앉도록.”
아이들도 갑자기 변한 방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흠칫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곧 그 달콤한 냄새에 홀린 듯 다가가 녹턴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 역시 아이들의 옆에 앉았다.
녹턴은 어색한 건지 긴장한 건지, 어울리지 않게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잘 지냈느냐?”
늘 얼굴만 보면 대화가 아닌 심문을 하기 바빴던 그의 입에서 나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비록 말투는 여전히 딱딱하긴 했지만.
당연히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아이들이 깜짝 놀라 대답하지 않자 녹턴은 조금 당황한 듯 나를 보았다. 나는 그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무언의 응원을 했다.
녹턴이 다시 물었다.
“내가 출장 다녀오는 동안…… 잘 지냈느냐고 물었다. 너희 둘 다.”
물론 이건 모두 그와 나의 계획의 일부였다.
방의 분위기가 변한 것도, 과자와 우유도, 심문이 아닌 인사와 안부의 말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도. 전부!
“이해할 수가 없군. 등유 등을 마나 등으로 바꾼다고 무엇이 달라지지? 이 방에 들어온 그 누구도 그런 걸로 지적을 한 적은 없었다.”
“나 참, 그건 대공 전하께서 대공 전하이시기 때문이구요! 속는 셈 치고 한번 해 보시라니까요. 참, 다과를 준비해 놓으시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메뉴는, 음…… 아이들이 좋아하는 쿠키와 몸에 좋은 우유가 좋겠네요.”
“그건 대체……. 대화를 할 땐 대화에 집중하는 것이 좋은 게 당연하지 않나?”
“인간이란 원래 먹을 것을 나눠 먹을 때 제일 친근감을 느끼게 되어 있다고요. 참, 대화를 하실 땐 아이들이 겁먹지 않도록 최대한 부드럽게 말해 주세요. 예를 들면…….”
그렇게 그와 옥신각신했던 기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인간 심리에 심각하게 무지한 그는 내 의견에 동의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내 의견을 따랐다.
내 전문성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 같아서 꽤 마음에 들었다.
양부의 돌변에 자네트와 미하일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 그…….”
놀란 미하일이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자네트가 먼저 말했다.
“네. 잘 지내써요.”
장하다, 자네트!
역시 쌍둥이이긴 하지만 누나 노릇을 톡톡히 하는구나. 나는 남몰래 자네트의 등을 토닥였다.
“그렇군.”
녹턴은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눈짓으로 테이블 위의 과자를 가리켰다. 그제야 녹턴이 다시 말했다.
“이건…… 마음대로 먹어도 좋다.”
좋은 타이밍이었다. 마침 아이들의 시선이 녹턴에서 과자로 자꾸만 옮겨가고 있었으니까.
과자에 사족을 못 쓰는 아이들이고, 하루에 단 한 번밖에 먹지 못하는 귀한 것이니 그런 반응도 당연했다.
녹턴의 말에 아이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마 그가 어떤 말을 해서 아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인 건, 이번이 최초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내 가슴 속이 간질간질해졌다.
“공녀님, 공자님.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하셔야 하죠?”
“감…… 감사합니다.”
아이들은 녹턴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과자를 하나씩 집어 입에 넣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녹턴의 눈치를 보느라 조심스러웠지만, 달콤한 과자가 입안에서 녹아내리자 두려움도 함께 녹아내린 모양이었다.
녹턴에 대한 학습된 두려움보다는 달콤한 것에 대한 본능이 강해졌는지, 아이들은 어느샌가 과자를 먹는 데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긴장도 한결 풀린 것 같았다.
볼살이 빵빵해져서는 과자를 냠냠 먹는 아이들의 모습은 정말이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귀여웠다.
같은 생각을 한 건지 녹턴의 눈매도 한결 부드러워진 것이 보였다.
아이들이 과자를 실컷 먹고 나자 녹턴이 입을 열었다.
“내가 출장을 간 동안에는, 뭘 했지?”
그 역시 아까보다는 한결 자연스러워진 것 같았다. 내가 부연설명을 했다.
“대공 전하께서 우리가 뭐 하고 놀았는지 궁금하신 것 같아요.”
아이들은 이번에는 골똘히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으우, 움…….”
“소풍 가써요. 그림도 그려꾸…… 식물에 물도 주고…… 도장도 받구…….”
“도장?”
녹턴이 되물어서, 내가 대신 대답했다.
“공녀님과 공자님이 착한 일을 하시면 제가 도장을 찍어 드리고, 도장을 서른 개 모으면 제가 소원을 들어드리기로 했어요. 제 교육법의 일환이죠.”
“그렇군.”
잠시 고민하던 녹턴이 아이들에게 말했다.
“행여 영애에게 폐가 될 만한 소원은 말하지 마라.”
어휴, 저 잔소리꾼!
아니나 다를까 흠칫 놀라는 아이들의 등을 토닥여 주곤 내가 대신 대답했다.
“우리 공녀님, 공자님은 착하셔서 안 그래요. 그렇죠?”
“으, 으응…….”
“그, 그러엄…….”
기분 탓일까, 아이들의 말투에 자신감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가 출장 나갔던 동안의 일에 대해 조금 더 대화를 나눈 뒤, 녹턴과 나 사이에 뭔가 의미심장한 눈빛이 오갔다.
그렇다. 이번 만남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그것을 위해 녹턴이 그렇게 열심히…… 아니, 열심히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연습을 한 것이 아니겠는가!
짧은 자리 뒤, 아이들이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자, 공녀님, 공자님. 이제 대공 전하께 인사드릴까요?”
“안넝히 계헤요.”
“안녕히 게헤요.”
배꼽 위에 손을 올려놓고 인사하는 아이들의 뒤에서, 내가 녹턴에게 눈짓했다.
시간이 되었다는 신호였다.
아이들이 고개를 들고, 녹턴이 인사를 할 차례가 되었을 때…….
그가 눈꼬리를 접고, 입꼬리를 가볍게 끌어올렸다.
‘왔다.’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홀리지 않도록 눈을 감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자네트, 미하일.”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웃음기 어린 그의 목소리에는 그만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내 시야에 그의 모습이 들어왔다.
애와 어른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두려움의 대상인 괴물 대공은 그 자리에 없었다.
냉엄했던 보라색 눈동자도 지금은 그저 온화한 색깔로 빛날 뿐이었다.
“조만간 다시 부르도록 하지.”
어린 자식들을 대하는 인사라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담백한 말이었지만, 누구보다 그에 대해서 잘 아는 나는 그것이 그의 최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말의 내용이 그렇게 중요한 상황도 아닌 것 같았다.
그의 미소에 혹한 것이 나 하나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 어어…….”
자네트와 미하일의 눈은 왕방울처럼 커져 있었다.
녹턴이 웃음을 잃은 것이 그가 16살 때, 6년 전의 일이었으니, 그들로서는 난생처음 보는 양아버지의 웃는 얼굴이리라.
아이들은 당황한 듯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데리고 그의 집무실을 떠나려 했다.
문지방을 넘기 전, 언제나 녹턴의 곁에서 도망치고만 싶어 하던 자네트가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또, 또 봐요.”
그렇게 말하곤, 자네트는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감이 나쁘지 않았다. 녹턴은 내 지시에 꽤 충실히 따라 주었으며, 전체적인 분위기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아이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것이 좋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놀이방에 돌아왔을 때 자네트와 미하일에게 물었다.
“대공 전하, 오늘따라 별로 안 무섭지 않았어요?”
미하일은 자기 손가락을 맞잡고 손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자네트는 구불구불한 은발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우음…….”
“그, 그런 거…… 같기도 하구.”
다행이었다. 아이들의 반응도 그리 나쁘지 않다!
녹턴과 옥신각신하며, 아이들의 두려움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온갖 고민을 했던 나는 너무 기뻐서 주접이라도 떨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내가 너무 ‘대공 전하도 사실 무서운 분이 아니다’라는 둥, 과도하게 그의 편을 드는 의견을 강요하면 아이들에게 반발심리가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사실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만일 앞으로 대공 전하가 또 부르시면 어떨 것 같아요?”
“……계에속, 계속 오늘 같으면…….”
카펫 위에 주저앉아 나무 블록을 쌓으며, 자네트가 작게 말했다.
“싫지는 않아.”
누나가 먼저 그렇게 말하자, 미하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희망이 있어!’
사실은 나도 걱정이란 것을 했다.
아이들이 녹턴에게 마음을 완전히 닫았을 수도 있었다.
만일 그랬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 관계를 개선시키는 데 정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생각보다 녹턴을…… 진심으로 싫어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니면, 어쩌면…….’
나는 어느샌가 블록을 갖고 놀기 시작한 아이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아이들 역시 기다리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하나뿐인 아버지가 자신들을 다정하게 대해 주기를 말야.’
그렇다. 비록 친부는 아니지만, 아이들은 그를 무척 두려워하고 있지만, 얼굴을 마주 보는 일조차 많지 않지만…….
그들은 가족이 아닌가.
어떤 아이에게나 가족이 필요하다.
반드시 피가 이어져 있을 필요는 없더라도, 진심 어린 애정을 주고받고, 체온을 나눌 그런 가족이.
갑자기 가슴 한구석 어딘가가 저릿해졌다.
“넌 고아라며? 엄마가 널 버렸다며? 에에에, 남주현은 엄마도 아빠도 없대요!”
“역시 부모 없는 애는 부모 없는 티가 난다니까.”
“걔가 고아원 출신이라고? 허어…… 하도 씩씩하고 밝아서 그렇게 안 봤는데. 알고 보니 불쌍한 애였네.”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나는 얼른 고개를 털어버렸다.
‘다 지나간 일이야. 나는 이미 익숙해졌는걸.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그리고…….’
나 자신을 설득하는 것처럼 몇 번이고 되뇌며, 생각했다.
‘……나 말고 다른 아이들은 행복하게 해 주기로 결심했잖아. 그걸 위해 난 이 일을 하기로 한 거니까.’
그 어떤 아이도 나처럼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아이가 어른의 따스한 보살핌과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내가 유치원 선생님이라는 일을 선택한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