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 *
셔우드 백작가에 들키지 않기 위해 일단 당분간은 외출을 자제하기로 했고, 그다음은 어쩌면 좋을까.
나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편지라도 한 통 쓸까? 나를 찾지 말라고?’
아니, 과연 그들이 편지 한 통 보고 집안 자산을 포기할 정도로 라리아의 의견을 존중하는 가족이었던가?
고작 일주일이었지만 그동안 겪은 집안 분위기를 보면 그건 아닐 것 같았다.
‘오히려 편지를 보낸 사람을 실마리 삼아 내가 대공가에 있다는 사실을 들킬 수도 있어. 아무래도 편지는 보내지 않는 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분수 쇼 보구 시퍼! 분수 쇼오!”
자네트의 목소리였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네트가 또 특기인 바닥에 벌러덩 드러눕기를 하고 생떼를 부리고 있었다.
“분수 쇼~!”
“갑자기 무슨 분수 쇼 말이에요, 공녀님?”
내 물음에 메리가 대신 대답했다.
“오늘 저녁 6시에 세인트 아그네스 광장에서 한다는 분수 쇼요. 그걸 대체 어디서 들으신 건지…….”
“분수 쇼 볼래애애애!”
그러는 동안에도 자네트는 익룡 소리를 내며 빽빽 울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네트의 고집은 어마어마해서, 메리와 내가 열심히 달래 봐도 듣는 척조차 하지 않을 게 뻔했다.
나는 골치가 아팠다. 물론 오늘은 자네트도, 미하일도 일정이 없는 날이라 마을 광장에 가는 것은 일도 아니긴 했다.
‘하지만 문제는 나지.’
문제는 내가 밖에 나가기 좀 곤란한 입장이란 거다. 나를 찾는 광고가 바로 며칠 전 신문에 실리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애들과 메리만 보낼 수는 없고.’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아이들의 시녀고 아이들을 밀착 감시…… 아니 돌보아야만 하니까.
‘……하지만 내가 못 나간다고 애들까지 집에 가둬 놓는 것은, 좀 그렇긴 하지.’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옷도 평소 입던 것과 전혀 다른 스타일로 입고, 머리 모양도 바꾸고.
모자도 깊이 눌러써서 얼굴을 꼭꼭 숨기고 가서, 광장에서 분수만 보고 얼른 돌아오기로.
일단은 신문에 광고가 실린 지 6일이나 지났다.
그런 광고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고, 이 수도에서 날 알아볼 사람은 또 얼마나 있겠는가.
“그럼 광장에서 분수 쇼만 보고 돌아오는 거예요, 공녀님.”
“와아! 솜사탕도 머글래!”
“카라멜 애플도!”
“……제 말 듣고 있는 거 맞죠? 공녀님, 공자님?”
그렇게 우리는 대공저를 벗어나 마차를 타고 광장으로 갔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에게 카라멜 애플을 하나씩 쥐여 주고 분수 쇼를 다 볼 때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라리아는 원래 유명하거나 존재감 있는 타입이 아니었고, 나는 꼼꼼히 변장을 했으므로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평소와는 다른 내 모습을 조금 무서워했지만 금방 익숙해진 것 같았다.
분수 쇼가 끝나고 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자, 분수 쇼 재밌었죠? 그럼 이제 약속대로 저택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응!”
다행히 이번에는 말을 잘 듣는다. 더 놀고 싶다고 조르면 어쩔까 했는데.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마차가 들어올 수 있는 광장 가장자리를 향해 걷던 그때였다.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이미 너무 멀리 가 버린 거면 어떡하죠?”
“……라리아의 얼굴을 그린 광고지라도 뿌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 이름, 그 목소리에 나는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야 당연했다. 내가 일주일이나 들었던, 그리고 그렇게나 피하고 싶었던 목소리였으니까!
이 목소리와 말투는 셔우드 백작, 계모, 그리고 라리아의 오빠인 노먼 셔우드 자작인 게 분명했다.
‘큰일 났다. 어서 자리를 뜨는 것이 좋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발에 속도를 붙이던 그 순간이었다.
“저기요!”
어느샌가 등 뒤까지 다가온 목소리에 나는 등골이 쭈뼛 섰다.
이 목소리는 분명…… 라리아를 쥐잡듯이 괴롭히던 계모의 목소리가 아닌가?
여차하면 도망칠 생각으로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계모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깨와 엉덩이에 뽕을 가득 넣어 체형도 다르게 보이게 하고, 평소엔 전혀 쓰지 않을 모자를 눌러쓰는 등 정성을 한껏 다한 변장 덕분이리라.
간만에 본 그녀의 얼굴은 어쩐지 조금 수척해 보였다. 마음고생, 아니면 몸 고생이라도 한 듯한 모양새였다.
“저, 혹시 라리아라는 아이를 못 보셨나요? 머리카락은 밀짚을 닮은 베이지색이고, 눈은 청록색인 여자아이예요. 키는 이 정도까지 오고요…….”
뭐, 라리아가 사라졌다고 마음고생을 할 사람은 아니니 몸 고생 쪽이 아닐까?
집안 자산을 잃어버린 죄로 셔우드 백작이 벌이라도 준 걸지도.
그렇게 생각하며 계모의 어깨너머로 백작과 노먼의 모습도 흘끗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 역시 조금 수척하긴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라리아를 찾는 데 열심이었나 본데.’
이 집안의 살림 밑천에 대한 집착이 그렇게까지 심할 줄이야!
나는 팔다리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어차피 천덕꾸러기였던 딸이 자기 맘대로 살게 놔두는 게 그렇게나 어렵단 말인가?
아마 그들이 오늘 이 광장에 온 것도 분수 쇼를 보러 온 것이 아닌 라리아를 찾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분수 쇼를 보러 나온 사람들이 많으니 하나하나 물어보고 다녔으리라.
행여 목소리를 내면 들킬까 봐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저었다. 하지만 계모는 끈질겼다.
“한 번이라도 다시 생각해 주세요. 정말 이런 아이를 못 보셨나요?”
‘거 참 귀찮게 구네!’
나는 조금 생각하는 척만 하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계모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나로선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녀의 정중한 모습이었다.
계모가 백작과 노먼에게 가는 것을 본 나는 땅이 꺼져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십 년, 아니 백 년 감수했다.
그렇게 나는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을 마차를 향해 몸을 돌렸는데…….
“저, 다시 실례합니다만.”
나는 완전히 간이라도 떨어지는 줄 알았다!
내가 입을 떡 벌리고 돌아보니 계모가 다시 돌아와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간신히 보냈는데 왜 또?!
“혹시 카라멜 애플을 파는 매대가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라리아가 그걸 좋아해서, 혹시나 해서 상인한테 물어볼까 하고…….”
아니, 미치겠네! 물론 알긴 하지만, 그걸 왜 하필 나한테 물어본담!
하지만 나는 최대한 당황한 티를 숨겼다. 목소리를 낼 수 없으니 손짓으로 카라멜 애플 매대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려던 그때…….
“라리아! 여기서 모해!”
귀에 익은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누구의 것인지는 바로 알 수 있다. 그것은 자네트의 목소리였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을 가르고 계모의 얼굴이 멍해지는 그 순간, 내가 한 생각은 딱 하나였다.
아, 망했다.
“라…… 라리아? 네가 라리아라고?”
계모의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라리아, 정말 네가 맞니? 나는 네가 정말로…….”
게다가 그녀의 등 뒤에서 내 이름을 듣고 노먼과 백작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럴 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딱 하나였다. 바로 도망치는 것.
나는 그녀의 말을 더 듣지 않고 몸을 돌려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아니, 라리아!”
“라리아! 어딜 가느냐!”
마차까지만 도착하면 된다!
그곳까지만 가면, 호위기사들과 하녀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일방적으로 끌려갈 일은 없을 것이다.
라리아의 몸은 작고 날렵했기에, 게다가 눈치 빠르게 재빨리 도망치기 시작했기에 마차까지라면 충분히 잡히지 않고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라면 아이들을 챙겨야 한다는 거지만.
어느샌가 지척까지 따라온 자네트가 부루퉁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얼른 아이의 손을 잡았다.
“도망쳐요, 공녀님!”
“왜?”
“그, 그건…… 이따 설명해 드릴게요!”
그때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자네트가 여기 있다면, 미하일은 어디 갔지?
“악!”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발이 꼬이는 것을 느꼈다.
이유 없이 스탭이 꼬인 것은 아니다. 바로 무언가에 발이 걸렸기 때문이다.
우당탕탕! 나는 그만 그 자리에 넘어져 버렸다. 미하일과 함께 말이다.
나는 치마폭까지 바짝 붙은 미하일을 보지 못하고 그의 몸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우이, 아퍼어…….”
“고, 공자님, 괜찮아요?”
나는 제일 먼저 미하일의 상태부터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내 치마에 감싸여 넘어진 덕인지 별달리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라리아!”
“라리아! 이, 이 애비를 두고 어딜 가는 게냐!”
바로 계모를 비롯한 셔우드가의 사람들에게 따라잡혔다는 것이다.
“여신님 맙소사, 정말 라리아였잖아!”
심지어 넘어지는 통에 모자까지 날아가 버렸다. 도저히 그런 사람 모른다고 발뺌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젠장, 어쩔 수 없지.’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는 불편한 어깨 뽕을 빼 버렸다.
계모, 노먼, 백작 세 사람은 단숨에 나와 아이들을 둘러싸고 제각기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라리아!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냐? 이, 이 아이들은 대체 누구고?”
“라리아, 아버지, 어머니께서 많이 걱정하셨다.”
“여신님, 감사합니다! 라리아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얼마나 널 찾아다녔는지 너는 상상도 못 할 게다!”
게다가 세 명의 어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흥분에서 떠들어 대자 아이들은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라, 라리아. 저 하람들 누구야?”
“무써워…….”
미하일은 내 치마폭 깊숙이 파고들었고, 자네트는 매서운 눈으로 어른들을 노려보았지만 아이인 만큼 주눅이 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런 미하일과 자네트의 어깨를 손으로 감쌌다.
그들에게서 아이들을 보호하는 일이 최우선이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미리 말씀드리건대, 이 아이들은 블랙웰 대공의 아이들이에요. 아이들에게 해를 입히시면 대공가의 화를 입게 될 거예요.”
그들이 라리아를 직접적으로 때린 적은 없었지만, 그리고 설마 이런 조그마한 아이에게 위해를 가할 만큼 쓰레기에 머저리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 아닌가.
내가 끌려가지 않으려고 하면 분명 물리적인 방법이 동원될 텐데, 그때 아이들이 휩쓸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내 말에 셔우드가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라리아?”
“우리가 왜 애들에게 해를 끼치겠니?”
“블랙웰…… 대공? 블랙웰 대공의 자식들이 어째서 여기에?”
애들한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어 보이니 다행인 걸까. 어쨌든 나는 아이들을 치마폭으로 감싼 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백작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하여튼, 이렇게라도 널 찾아서 정말 다행이구나. 정말이지 신께 감사드릴 일이다.”
“…….”
“지난 삼 주 동안 얼마나 널 걱정했는지 아느냐? 이제 됐다. 왜 집을 나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돌아가자, 라리아.”
하지만 나는 돌아갈 생각이라곤 추호도 없었다. 그놈의 콩가루 집안에는 더 이상 한 발짝이라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아버지. 전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뭐, 뭐?”
“유감이지만 그동안 대공가에 적을 둔 데다가, 6개월 치 봉급을 선불로 받아 버린 몸이라서요. 열심히 일해서 그걸 전부 몸으로 갚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네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피식 웃었다.
“게다가 왜들 그렇게 열심히 저를 데려가고 싶어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어차피 저를 미워하고 계셨잖아요?”
“뭐라고? 아니, 라리아!”
“아버지도, 어머니도, 오라버니도…… 모두 절 미워하고 계시지 않으셨나요?”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그들을 한 사람씩 바라보았다. 모두가 찔끔 주눅이 든 얼굴이었다.
적어도 자신들이 잘못을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하나뿐인 고명딸을 19년이나 무관심 속에 방치할 정도로요.”
내 말에 이번에는 노먼이 나섰다.
“라리아, 네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안다. 하지만……!”
“오해? 오해라고요?”
변명을 더 이상 들어 주기도 귀찮았던 나는 그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라리아가, 아니 제가 그동안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감정을 느끼며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아세요? 아니, 알 리가 없겠죠. 안다면 당신들이 라리아를 그렇게 대했을 리가 없겠지.”
이곳에서 라리아의 결말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가족들의 멸시와 방치 끝에 애정 결핍에 시달리던 라리아는 녹턴 블랙웰에게 목을 맨다.
그에게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갈구하던 라리아는 결국 여주인공을 살해하려 하고, 분노한 남주인공의 손에 죽는다.
이 얼마나 비참한 결말이란 말인가.
만일 이 콩가루 집안이 라리아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면, 그저 최소한의 사랑만이라도 주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자꾸만 옛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주현아, 엄마 말 잘 들었지? 이제부터는 주현이에게 엄마는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거야.”
“잠바 주머니에 돈이랑, 빵이랑, 편지 넣어 놨으니까, 원장님께 편지 꼭 보여 드리고.”
“알았지, 주현아? 혼자서도, 씩씩하게 있을 수 있지?”
마주하기 두려운 기억. 그래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머릿속 깊이 묻어 놓고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았던 기억…….
그 기억이 자꾸만 라리아의 인생에 겹쳐 보이는 것만 같았다.
“당신들이 라리아가 얼마나 외로워했는지 안다면, 그래서 그녀가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지 안다면! 결코 그딴 소리는 하지 못했을 거예요!”
시야에 물기가 어렸다. 안개처럼 뿌연 시야 안에서도, 그들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느끼는 것은 어떤 감정일까? 어떤 감정이 그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있는 걸까? 미안함? 죄책감? 아니면…….
그때 백작이 대리석처럼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우리는 네게 있어 죄인이지. 하지만, 네가 어떻게 생각한다고 해도, 돌아가기 싫다고 해도, 넌 내 딸이다. 넌 내 허락 없이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라리아.”
“아, 아버지!”
“여보!”
백작의 냉정한 말에 노먼과 계모가 기겁했다. 하지만 백작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마음 깊이 후회하고 있단다. 그동안 네게 행했던 모든 것을 말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널 위험 속에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이 험한 세상에 홀몸의 계집애 하나 덩그러니 나와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어린 너는 아직 모를 거다.”
역시 이렇게 되는 걸까.
하지만, 예상한 바였다.
고작 내 말 몇 마디에 라리아를 존중하기 시작할 사람들이었으면, 처음부터 그렇게 대하지 않았겠지.
후회는 하지 않았다. 백작가를 나온 것도, 대공가에 들어온 것도, 아이들과 분수 쇼를 보러 온 것도.
전부 내 선택이었고, 그 상황에서의 최선이었다.
다만, 그저…… 걸리는 것이 있다면…….
“돌아가자, 라리아. 언제나 널 감시하는 호위기사와 하녀들을 붙여 두겠다. 외출은 무기한 금지인 줄 알아라.”
백작이 냉정한 눈으로 내 팔을 부여잡았다.
그 손엔 생각보다 힘이 들어가 있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윽, 하고 신음을 흘렸다.
그 통에 치마폭을 붙잡고 있던 내 손에 힘이 풀렸다. 그리고…….
“라, 라리아!”
“라리아, 우리 라리아 델꾸 가지 마!”
그 속에서 자네트와 미하엘이 튀어나왔다.
자네트는 있는 힘껏 백작의 몸을 밀친 뒤 양팔을 벌려 내 앞을 가로막았다.
미하엘은 내 다리를 있는 힘껏 끌어안은 채 필사적으로 도리질 쳤다.
고작 5살짜리 꼬마애가 밀쳐 내는 힘은 미미했고, 백작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 뭐야?”
하지만 그를 당황시킬 수는 있었다. 백작의 손에서 순간적으로 힘이 풀렸고, 나는 그 틈을 타 그의 손에서 손을 빼냈다.
“고, 공녀님! 공자님!”
아이들의 용감한 행동에 나는 어마어마하게 감격했다.
감동의 도가니탕 속에서 배영 접영 평영 자유형을 풀코스로 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저 감동에만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나는 아이들을 들쳐 업고 재빨리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니, 라리아!”
“저, 저 녀석이!”
등 뒤에서 셔우드가의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스럽게도 그리 멀리 도망치지 않아도 되었다.
왜냐하면, 돌아오지 않는 나와 아이들을 따라온 기사들과 하녀 무리가 드디어 도착했으니까!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아무리 내 체력이 좋다 한들 만 5살짜리 아이 둘을 안고 전속력으로 뛰는 건 꽤 힘든 일이었으니까.
메리가 뛰어나와 날 걱정해 주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저 사람들은 대체…….”
“날 찾으러 온 셔우드가 사람들이야.”
나는 메리에게 대충 사정 설명을 했다. 그러는 동안 기사들이 셔우드가의 사람들을 가로막았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뭐라고? 저 애는 내 딸이야! 너희가 무슨 권리로 내 딸을 데려가는 거야?”
“저희는 블랙웰 대공 전하의 명을 받아 라리아 셔우드 영애의 신변을 지키고 있습니다.”
“설령 대공이라고 해도 내 딸을 마음대로 데려갈 권리는 없어! 저 아이에 대한 권한은 부친인 내게 있단 말이다!”
셔우드가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블랙웰 대공의 이름과 기사들의 흉흉한 분위기에 찔끔했지만, 곧 법적인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사실 대공의 지위가 백작보다 높다고는 해도, 나는 여전히 셔우드가의 소속이었으니 백작의 말에는 정당성이 있었다.
게다가 노먼이 백작가 쪽의 기사들까지 불러오는 통에 상황은 더 난전이 되었다.
“어찌 됐든 안 됩니다. 블랙웰 대공 전하의 명입니다.”
대공가의 기사들도, 백작가도 전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 대치를 지켜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거 참 이상하네. 라리아한테 관심 없는 사람들이라면 이쯤 되면 물러설 만도 할 텐데.’
셔우드가의 사람들에게는 ‘라리아를 집안 자산이라고 생각하고 돌려받고 싶어 한다’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는 어떠한 처절함이 있었다.
‘하긴, 아랫사람들 시키지 않고 라리아를 자기들 손으로 직접 찾아다녔던 것도 이상하고. 대체 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인 거지?’
셔우드 백작가, 블랙웰 대공가.
물론 대공가 쪽이 압도적이긴 하지만 백작가도 결코 뒤떨어지는 이름값은 아니다.
그런 두 가문의 기사들이 광장 한복판에서 대치하고 있는 상황은 어마어마한 이목을 끌었다.
가뜩이나 분수 쇼가 끝난 직후라서 사람도 많은 상황. 몇 명의 기사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둘러싼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대체 무슨 소란이지.”
낯익은, 하지만 이곳에서 들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왠지 모를 카리스마가 깃든 그 낮은 목소리는 모두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나 역시 설마 하는 마음에 그를 돌아보았다.
수백의 바늘 같은 시선 끝에서 우뚝 서 있는 그 남자는…….
“주, 주군!”
“대공 전하!”
블랙웰의 기사들과 하녀들이 먼저 그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뭐라고, 설마 블랙웰 대공?”
“저 사람이 녹턴 블랙웰?”
삽시간에 그 많던 인파 사이에 길이 열렸다.
그 사이로, 큰 키에 잘 어울리는 검은 롱코트를 휘날리며 그가 다가왔다.
성큼, 성큼, 눈 깜짝할 사이 가까워지는 그의 모습은, 그 보라색 눈동자는 왠지 모를 위압감이 있었다.
기사들 앞에서도 물러나지 않던 셔우드 백작조차 굳은 얼굴로 뒷걸음질을 칠 만큼.
“당신은……?”
백작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정말 궁금해서 한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만큼 대공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설마 나를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셔우드 백작.”
오만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것도 제국 수도의 재계를 장악하고 있다는 셔우드 백작을 상대로!
예의도, 최소한의 존중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어투에 백작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가정사는 콩가루라곤 해도 괜히 셔우드 가문을 거부(巨富)의 자리에 올려놓았다고 평가받는 것은 아닌지, 그는 금방 안색을 정돈하고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대공 전하. 좋은 저녁입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어째서 내 아이들의 시녀를 데려가려 하는 거지?”
대공은 백작이 꺼낸 인사를 시원하게 씹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백작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백작은 침착함을 유지하려 한껏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공 전하의 자녀분들의 시녀가 바로 제 하나뿐인 고명딸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셔우드 영애에게 6개월 치 봉급을 미리 지불했다. 영애는 내게 채무자나 다름없어. 채무를 노동으로 갚기 전에는 그녀의 퇴직을 허락하지 않겠다.”
“그 채무는 제가 대신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제 딸을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여기까지는 내가 예상한 흐름이었다.
내가 미리 받았던 반년 치 봉급은, 내게는 큰돈이지만 수도의 큰손 셔우드 백작에게는 껌값일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되면, 제국법에 따르면 나를 데려갈 권리는 당연히 백작에게 있었다.
누가 봐도 백작 쪽이 유리한 상황이었다.
이대로라면, 나는 셔우드가로 속절없이 끌려갈 판이었다.
‘그렇다고 날 포기할 생각은 아니겠죠? 대공 전하.’
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대공의 옆얼굴을 보았다.
‘제발 어떻게 좀 해 봐요.’
그때, 이쪽을 흘끗 돌아본 그의 시선과 내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내 마음을 읽은 것일까?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미미한 움직임으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셔우드 백작과 대공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백작의 청록색 눈동자와 대공의 보라색 눈동자에서 스파크라도 튀길 것처럼 그 긴장감이 팽팽했다.
“나와 내 아이들에겐 셔우드 영애가 필요하다.”
대공은 백작을 내려다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백작이 그녀를 마음대로 하게 놔둘 수는 없어.”
백작은 공포와 긴장을 느끼는 듯 안색이 창백했으나, 제법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자신보다 반 뼘 정도 큰 대공을 올려다보면서 그가 말했다.
“싫으시다고 해도 라리아는 제 딸입니다, 대공 전하. 법에 따르면, 숙녀에 대한 권한은 그 친부에게 있다는 사실을 잘 아실 텐데요.”
그때였다. 대공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대단히 번듯하고 잘생긴 얼굴이었으나 그의 입술 아래에서 드러난 송곳니는 생각보다 날카로워서 나까지 움찔 놀랄 정도였다.
“아니, 숙녀에 대한 권한이 있는 것은 부친뿐만이 아니지.”
“네?”
“잊고 있는 것 같군, 백작. 숙녀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남자 형제, 친자, 친부.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우선하는 것은…….”
그의 뒤편에서 가슴 졸이며 상황을 관전하고 있던 내 몸을 무언가가 끌어당겼다.
“배우자.”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길고 단단한 팔뚝이 내 어깨를 두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주변이 온통 싸해졌다.
이 모든 것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는 데에는 삼 초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까, 지금 대공의 말은…….’
나는 침착하게 생각했다.
‘내가 지 배우자라서, 지가 날 데려갈 자격이 있다…… 이거지?!’
나는 야구 배트로 뒤통수를 얻어맞기라도 한 듯 골이 띵한 기분이 되었다.
‘아니, 누구 맘대로 배우자야?! 대체 언제부터!’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녹턴을 쳐다보았다. 그는 시선을 느낀 듯 내 쪽을 흘긋 보았다.
“…….”
하지만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는 듯, 끼어들지 말라는 의미의 눈짓만을 남몰래 보낼 뿐이었다.
충격을 받은 것은 나뿐이 아닌 것 같았다.
셔우드 백작은 입을 떡 벌리고 대공과 나를 번갈아 가며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거의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콩가루에 막장 가장이긴 해도 꽤 멋지게 나이가 들어서 중후한 분위기가 느껴졌던 미중년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그, 그렇, 그렇다는 것은…….”
백작이 한껏 더듬으며 말했다.
“제, 제, 제 여식이, 라리아가, 대공 전하와 혼약을 올렸다는 것입니까?!”
온 광장이 술렁였다. 당연한 일이다.
‘그’ 녹턴 블랙웰 대공이 아닌가.
제국 최고의 부와 권력, 심지어 능력과 검술과 미모까지 지닌 남자.
그럼에도 모두가 두려워하고 피하는 남자. 통제할 수 없이 미쳐 버렸다는 괴물 대공이…….
누구도 모르게 배우자가 생겼다니! 어마어마한 가십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아직 정식 혼약을 올린 것은 아니다.”
내 어깨를 두른 녹턴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영애와 나는 약혼 관계다. 하지만 알고 있겠지, 백작. 약혼 관계의 남녀는 같은 자택에 거주하는 순간 사실혼 관계로 취급되어 약혼녀에 대한 권리는 약혼남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내겐 오히려 그 손길이 든든하고 따뜻하게까지 느껴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아마 긴장감과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미치겠네. 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인지.’
골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당황스럽긴 하지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그러는 것이 날 백작가로부터 보호하려고 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사실, 생각해 보니…… 백작가에 끌려가지 않을 방법이 정말 이것밖에 없기도 하고.’
다만 놀라울 뿐이었다. 그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 주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연한 거지만, 약혼 선언은 결코 별것 아닌 것이 아니다.
특히나 대공 같은 위치의 사람에겐 더더욱 그렇다. 우선 혼삿길이 막혀 버리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그런 그가, 앞으로 일어날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일들을 전부 감수하고 라리아 셔우드 같은 별 볼 일 없는 여자와 약혼 관계라고 거짓 증언을 해 주었다.
오로지 내가 백작가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백작은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보라색이 되고 있었다.
그는 숨이 턱턱 막히는 듯 컥컥 소리를 내다가, 이번엔 날 돌아보았다.
“아니…… 라리아! 네가 말 좀 해 보거라. 정말 네가, 대공 전하와…… 약혼을 했단 말이냐?”
그가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내 어깨를 둘러 안고 있는 녹턴을 돌아보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난 그가 시작한 연극에 어울려 줄 생각이었다.
백작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녹턴의 혼삿길을 막는 것은 미안하지만…… 잠깐만이니까.’
그렇지만 녹턴은 내가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가 갑작스레 내 손을 잡아챘다.
그의 손이 얼마나 큰지, 그래서 내 손은 그의 손안에서 얼마나 폭 감싸이는지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영애.”
그는 내 손을 끌어당겨, 손등에 자신의 입술을 대고 눌렀다.
손등에 입 맞추는 도중에도, 그의 보라색 눈빛은 올곧게도 내 얼굴을 향했다.
그 눈빛은 생각 외로…… 뜨겁게 느껴져서, 이게 연기라는 걸 몰랐다면 진짜로 그가 날 마음에 두고 있다고 착각이라도 했을 뻔했다.
나는 남몰래 침을 삼켰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나는 셔우드 백작을 돌아보았다. 그는 어느샌가 20살쯤 늙은 것처럼 보였다.
“네, 아버지. 저는 대공가에서 시녀로 일하면서 대공 전하와 서로 영혼의 끌림을 느꼈답니다. 결국, 이분과 미래를 약속하게 되었지요.”
나는 셔우드 가문의 사람들에게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광장에 모인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께 말도 없이 약혼해서 죄송하다고 하진 않을게요. 솔직히 우리가 그렇게 가까운 부녀 사이는 아니었잖아요?”
“말도 안 돼, 그 괴물 대공이 약혼을…….”
“여자가 겁이 없기도 하지. 어떻게 저런 사람과 백년가약을 맺을 수 있는 거지?”
“쉿! 대공 전하께서 들으시겠어!”
광장 안이 수런거림으로 가득 찼다.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 본 것은 처음이라 꽤 민망했지만, 되도록 의연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와중에 제일 의연하지 못한 건 당연히 백작이었다.
“이런, 말도, 말도 안 돼. 인정할 수 없습니다! 대공 전하, 어찌 이런 일을…… 라리아의 아버지인 저와는 한 치의 상의도 없이……!”
“내가 어째서 백작과 상의를 해야만 하지? 법에 따르면, 약혼에 필요한 것은 당사자들의 의사뿐인데.”
대공이 노골적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비웃었다.
이 인간, 이렇게 보니 꽤 성격 나빠 보인다. 그런 사람인 줄 알고 있긴 했지만.
“그럼, 용건은 여기까지다. 가자, 영애.”
대공이 나와 아이들을 이끌고 등을 돌렸다. 그의 검은 롱코트가 휘날리는 것이 보였다.
자리를 뜨기 전,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겉껍데기만 그럴싸한 가족을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버지라는 권위에 기대어 일말의 애정도 없던 자식에게 권력을 행사하려는 꼴이 추하기 그지없군.”
“…….”
백작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적어도 자신의 죄는, 위치는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라리아! 어딜 가는 거니!”
“안 돼, 라리아! 돌아오거라!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애타게 기다리신다!”
등 뒤에서 셔우드 가문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렸지만 대공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나도 묵묵히 아이들을 챙기며, 그의 팔 안에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마차에 도달할 때까지 녹턴은 내 어깨에 두른 팔을 풀지 않았다. 아마 주변인들의 시선 때문이리라.
그는 나와 아이들을 마차에 먼저 태운 뒤 따라 올라탔다. 곧 마차가 출발했고, 창밖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계속 나와 대공의 눈치만 보던 아이들은 그제야 말문이 트였다.
“라리아.”
먼저 입을 연 것은 미하일이었다.
“네, 공자님?”
미하일의 수줍지만 똘망똘망한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내가 미소 지으며 대답하자, 그가 물었다.
“라리아 우리 엄마야?”
그래, 이렇게 물어볼 줄 알았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자신들의 말을 못 알아듣는 줄 알고 아이들 앞에서 할 말 못 할 말 다 하곤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아이들도 알아들을 것은 다 알아듣는다.
그 난리가 났는데 이 아이들이 못 알아들었을 거라고 여기는 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이었다.
나는 한숨을 삼켰다.
궁금한 건 자네트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자네트는 마차 시트 위에 기어 올라와 내 치마폭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라리아 우리 엄마 될꼬야?”
이럴 때는 어떻게 대답을 하면 좋은 걸까.
기대감으로 가득 차 반짝거리는 아이들의 눈앞에서는 도저히 ‘백작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거짓 약혼 선언을 했다’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으음……. 그, 그건…….”
그래서 나는 나답지 않게 다소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곤란한 얼굴로 웃고 있으니 맞은편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셔우드 영애를 귀찮게 하지 마라.”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시선을 옮겼더니, 녹턴이 아이들을 짐짓 엄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른들이 보아도 등골이 시려 오는 그의 자색 눈동자가 어린 애들에게는 오죽하겠는가.
내 무르팍에 매달려 눈을 빛내던 아이들은 그의 말에 화들짝 놀라더니 창백해졌다.
“우으…….”
“재송해요…….”
아이들은 잔뜩 풀이 죽어 얌전히 좌석에 앉았다.
대체 그를 얼마나 무서워하는 건지, 미하일은 내 코트 자락 뒤에 매달려 얼굴을 묻었다.
양부라곤 해도 아버지라는 사람이 애들을 이렇게 무섭게 하면 쓰나!
나는 그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전하, 공자님과 공녀님을 겁주지 마세요.”
“하지만, 영애…….”
녹턴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사실 나도 그의 마음이 이해되긴 했다.
그는 아마 거짓 약혼 선언이 내 장래에 방해가 될까 봐 걱정되는 것이리라.
냉혈하고 성격 더러워 보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가슴 따뜻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내가 진짜로 걱정되는 것은 그와 아이들의 관계였다.
녹턴과 아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해도 좋지 않았다.
녹턴은 아이들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대하곤 했고, 아이들은 안 그래도 무서운 양아버지가 엄하게 굴기까지 하니 더욱 무서워했다.
아이들이 아버지인 녹턴보다 몇 주밖에 안 된 시녀인 나를 더 의지하고 따르는 것만 봐도 오죽하겠는가?
그가 그러는 이유도 알고 있었다.
그가 자라온 가정환경은 올바른 부모 자식 관계를 배울 만한 곳이 아니었다.
좋은 아버지의 롤모델이 없었던 그는 그저 자신이 겪은 것을 그대로 아이들에게 행하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래서 더 안타까운 것이다.
‘사실 누구보다 아이들을 걱정하고 있으면서!’
아이들의 시녀 면접을 집사나 하녀장에게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보통 이런 잡다한 일을 그 집안의 가장이 직접 하는 경우는 드무니까.
나는 그에게 빚이 있었다. 백작가로부터 날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손해까지 감수하게 만든 빚이.
그리고 물론 애착도, 책임감도 있었다.
그는 나의 창조물이 아닌가.
사실 생각해 보면, 그에게 그토록 불행한 과거를 준 것도,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게 만든 것도 전부…….
‘내가 내 손으로 한 일이니까.’
나는 남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그를 불행하게 만든 사람으로서, 내겐 책임이 있어. 그를……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만들어 주어야 할 책임이.’
아무래도 그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그와 아이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일은 필수적일 것 같다.
나는 장차 그에게 아이를 대하는 법, 좋은 아빠가 되는 법을 가르쳐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차가 대공저에 도착했다.
“오늘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전하.”
마차에서 내린 뒤 나는 녹턴에게 정식으로 인사했다.
“감사 인사는 필요 없다.”
그는 담담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 쑥스러워하는 티가 났다.
표정은 냉정했으나 그의 귀가 분홍색이라는 점이 이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타인에게서 감사 인사를 받는 게 익숙지 않은가 보네.’
그 모습이 좀 귀엽게 느껴졌지만 나는 애써 웃음을 삼켰다.
그때, 그의 말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영애. 안 그래도, 오늘 일어난 일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데.”
사실 예상하긴 했다. 생각보다 일이 커졌으니 그에 대해 상의를 하긴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메리에게 아이들을 부탁하고 그의 집무실로 따라갔다.
집무실 문을 닫자마자 들려온 말은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미안하다.”
성격 나쁜 데다가 오늘 나를 크게 도와준 그에게서 들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저, 전하께서 제게 왜 사과를…….”
녹턴은 내게 자리를 권하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그가 책임감을 느끼는 듯한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영애를 너무 큰일에 휘말리게 만들었어. 의사도 묻지 않고 약혼 선언이라니……. 정말 미안하게 되었다.”
아랫사람의 의사까지 신경 쓰는 사람이었구나. 나는 반쯤은 얼떨떨하고 반쯤은 감동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제가 백작가에 끌려가지 않게 하기 위해 그러신 거잖아요? 또 그건 제가 부탁드린 거고요. 저는 백작가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전하.”
나는 진심을 담아 활짝 웃었다. 녹턴은 그런 나의 얼굴을 흘끔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약혼 선언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장차 영애가 혼인하려 할 때도 문제가 될 수 있어.”
“그건 걱정 마세요.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뭐?”
녹턴이 놀란 듯이 되물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내가 살던 현대 한국에서는 비혼, 1인 가구 등이 늘고 있었지만 제국에서는 혼기가 차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제일 바라는 것은, 일단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만약에, 만약에 이곳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면 그냥 애들을 잘 보살피고 녹턴과 애들이 사이좋아지게 만든 뒤 여주인공에게 그를 넘기고 고액의 퇴직금을 받아 살아갈 생각이었다.
퇴직금을 받으면 그것으로 제국 최초의 유치원을 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뭐, 어쨌든 간에 그때가 되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는가.
내 독신주의자 선언에 녹턴은 한 대 맞기라도 한 듯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이어서 말했다.
“저는 그냥 결혼하지 않은 채 일을 계속하면서 살고 싶어요. 오히려 저는 전하께서 이후 결혼하실 때 흠이 될까 봐 걱정인데요.”
뭐, 여주인공은 편견도 없고 그와 트루럽이기 때문에 이 정도 과거사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약간 멍해 보이던 녹턴이 입을 열었다.
“나…… 나도, 혼인에는 관심이 없다. 평생 독신으로 살 생각이다.”
나는 속으로만 피식 웃었다.
어련하시겠어요.
하긴, 애인 한 번 사귀어 본 적 없을 정도로 워낙 여자한테 관심이 없는 그가 아닌가.
하지만 여주인공을 만난 뒤에는 어떨까?
그런 생각은 숨긴 채 나는 빙긋 웃었다.
“와, 전하께서도요? 그거 반갑네요. 그럼 같은 독신주의자들끼리 함께 화이팅해요.”
“화이팅?”
“아, 외국어인데 힘내자는 뜻이에요.”
나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우리는 앞으로의 행동방침을 좀 더 자세하게 정한 뒤 헤어졌다.
대화를 마치고 아이들의 방에 돌아와 보니, 아이들은 피곤했는지 벌써 단잠에 빠져 있었다.
* * *
변화는 당장 다음 날부터 시작되었다.
나와 녹턴이 예상한 대로 신문에는 블랙웰 대공과 셔우드 백작 영애의 약혼 소식이 대서특필되었다.
[괴물 대공 녹턴 블랙웰, 약혼? 그 상대 라리아 셔우드는 누구?]
[미친 악마 녹턴 블랙웰 드디어 약혼. 동화 ‘푸른수염’ 현실이 되나?]
[과연 대공가의 새신부는 그의 광증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뭐 이런 유의 가십성 기사들이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악명 높지만 어마어마한 부와 권력을 가진 녹턴이 사교계에서 별다른 존재감이 없었던 셔우드 영애와 약혼한 이유에 대해 소설을 쓰고 있었다.
각 신문들이 예측한 약혼 사유는 제각각이었다.
내가 녹턴에게 약점을 잡혔다는 얘기라든가, 반대로 내가 피에 미친 남편을 감수하고서라도 부와 권력을 손에 쥐고 싶어 하는 어마어마한 야심가라는 얘기라든가.
심지어 무시무시한 괴물 대공과 용감한 영애 사이의 미녀와 야수를 방불케 하는 드라마틱한 로맨스 스토리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사실에 가깝지는 않네.’
나는 아침 식사를 하며 신문을 뒤적거렸다.
‘하긴,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이 놀라운 약혼 소식이…… 그냥 가출하기 위한 거짓 발표였다는 것을 말이야.’
다 읽은 신문들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던 그때였다.
“아가씨,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함께 식사를 하던 메리가 주저하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주인님과 약혼하게 되신 계기를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하긴, 메리는 더더욱 놀랄 만도 했다.
그녀는 나와 녹턴이 만난 지 이제 고작 3주밖에 안 됐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 약혼 발표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녹턴과 나, 두 사람뿐이었다.
일단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녹턴이 그렇게 하자고 제안했다.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입단속 하기 어려워진다. 당분간 진실을 아는 사람은 최소한으로 하도록 하자.’
그의 말엔 일리가 있었고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선뜻 그러자고 했었다.
하지만 역시 메리를 눈앞에 두고 거짓말을 하는 건 조금 죄의식이 드는 일이었다.
그녀는 내가 이곳에 온 이후로 나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 준 사람이고, 나 역시 그녀를 단순한 하녀가 아닌 의지할 만한 친구로 여기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녹턴과 약속한 일이니, 메리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 미안, 메리.’
그렇게 생각한 나는 녹턴과 미리 준비해 놓은 대답을 말했다.
“사실은, 대공 전하와 면접을 하던 그날 우리는 서로 첫눈에 반해 버렸어. 대공 전하와 교제를 한 지는 삼 주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시간은 ‘이 사람 아니면 안 되겠다. 이 사람과 평생 동안 지독하게 얽히고 싶다’라고 느끼게 하는 데에는 충분했지.”
내 말에, 메리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았다.
“아, 아니, 대체……. 전 생각도 못 했습니다. 아니, 그 전에, 추, 축하드립니다, 아가씨. 하지만…….”
메리는 내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주저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인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나는 그녀를 독촉하지 않고, 말을 꺼낼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한참 후에야 주저하던 메리가 입을 열었다.
“……저, 사실은 아가씨가 몹시 걱정이 됩니다. 왜냐하면 주인님께서는…….”
“안 좋은 소문이 많으시지. 광증도 있으시고. 나도 알아.”
숨길 것도 없었다. 녹턴의 악명은 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의 광증은 블랙웰 대공가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유전병이었다.
대대로 블랙웰 대공가의 사람들은 냉혈하고 유능한, 지극히 이성적인 정치가였으나 그와 동시에 그 성정과 어울리지 않는 광증을 지녔다.
그 광증을 가진 사람은 한 번 이성을 잃어버리면 피를 보아야만 하는 괴물이 된다.
블랙웰 대공가의 사람들은 그 특유의 유능함과 냉혹함 그리고 광증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의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그는 전대 대공의 적자인 녹턴 역시 다르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만인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녹턴.
하지만 그가 정말로 그 악명을 온 천하에 떨친 것은…….
……자신의 아버지를 찢어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을 때부터였다.
전대 블랙웰 대공은 그 아들의 손에 죽었다.
그것도 처참하게. 역사에 남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사건이었으며 온 제국을 뒤흔드는 이슈였다.
하나 아버지를 살해한 녹턴은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직접 대공위에 올랐다.
패륜아, 흉악 친족 살인범이라고는 하나 블랙웰 대공에게 직접 반기를 들 용기가 있는 자는 없었다.
나는 새마저 떨어뜨릴 정도의 권력을 가졌다는 황실마저 눈치를 보는 것이 바로 블랙웰 대공가가 아닌가.
하나 녹턴에게 씌워진 공포스러운 이미지, 광인, 폭군이라는 이명은 벗겨지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아가씨도…… 저, 주인님께서 6년 전에 저지른 그 일은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메리의 안색은 창백했다.
하녀로서 주인의 오점을 입에 담는 것은 큰 불경이었다. 그것도 주인의 약혼녀 앞에서.
“전 정말 걱정이 됩니다. 주인님은, 당신의 친아버지마저…… 그렇게 하신 분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도, 내가 자신을 크게 경을 칠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메리는 내게 간언을 하고 있었다.
오로지 내 안전을 걱정해서.
그 사실이 나는 무척 기쁘고, 고마웠다.
‘메리가 나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걱정하고 있구나.’
메리의 손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손을 뻗어 그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아가씨?”
메리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그 손을 피하거나 잡아빼지는 않았다.
나는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꼭 감싸 쥐곤 말했다.
“고마워, 메리. 날 걱정해 줘서.”
“아가씨…….”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너를 믿는 만큼 그분을 믿으니까. 그분은 절대 날 위험하게 만드시지 않을 거야. 너만큼이나 내 안전을 걱정해 주시는 분인걸.”
나는 진심을 담아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를 걱정해 주는 그녀의 마음은 너무나 고마웠지만, 더 이상 그녀가 나 때문에 고민하지 말았으면 했다.
하지만 메리는 고민이 풀린 듯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녀는 걱정을 꾹꾹 눌러 참는 듯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아가씨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런 거겠지요. 그래요…….”
그러더니 메리는 갑자기 허리를 숙였다.
“불손함에 사죄드립니다. 감히 대공가의 약혼녀께 대공 전하의 과오를 입에 담았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날 걱정해 주느라 그런 거잖아.”
당연히 나는 그런 걸로 메리를 혼낼 생각이 없었다.
비록 이곳에서는 귀족의 몸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를 체득하며 살아온 내가 아닌가.
갑자기 하녀에게 매질을 할 만큼 귀족적인 사람이 될 자신은 없었다.
더군다나 내가 진짜 녹턴의 애인인 것도 아니고.
오히려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걱정해준 메리에게 무척 고마울 뿐이었다.
‘앞으로 메리한테 정말 잘해줘야지.’
하지만 나는 메리와 다르게 그 사건으로 인해 녹턴이 무섭거나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 사건’의 진상을.
당연한 일이다. 녹턴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것도, ‘그 사건’을 만들어낸 것도, 전부 내가 아닌가.
“아가씨…….”
자신의 극도로 불손한 행동에도 매질은커녕 꾸중조차 하지 않는 내게 메리는 큰 감명을 받은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이 영룽하게 빛났다. 좀 부담스러울 정도로.
“제가 아가씨를 모시게 된 것은 제 인생에서 큰 행운이에요.”
갑자기 분위기 왜 이래? 민망해 죽겠네.
나는 난감해서 뺨을 긁적였지만, 그녀의 말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내게도 메리를 만나게 된 건 큰 행운이야.”
갑자기 메리는 결연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더 이상 떨리지 않는 두 손을 꽉 쥐어 보이며 말했다.
“비록 모자란 몸이긴 하지만 절대 위험한 일이 없도록, 앞으로도 아가씨를 성심성의껏 보필하겠습니다.”
몹시 민망했지만 그 이상으로 고맙고 기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활짝 웃었다.
“그래, 잘 부탁해.”
메리뿐만이 아니었다. 대공가의 다른 사용인들의 대우도 달라졌다.
원래 나는 귀족이고 시녀이니만큼 다른 하녀들과는 다른 대우를 받았다.
사용인 숙소가 아닌 본채의 방을 썼고 메리의 보필을 받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사용인은 사용인. 당연히 다른 하녀, 하인들에게는 주인인 녹턴보다야 편한 상대였다.
그런데…….
“저분이…… 정말로?”
“글쎄, 그렇다니까. 톰이 어제 광장에서 직접 들었대…….”
또 시작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눈앞의 점심 식사에 집중했다.
사용인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자니 내 이야기가 거의 5분에 한 번씩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귀마개를 진작 구해 올 걸 그랬어. 밥 먹다 체하겠네.’
“세상에, 저분이 대공비가 되신다니…… 엄청난 신분 상승이네.”
“굉장히 친절하고 유능하신 분이셔. 공자, 공녀님들도 굉장히 따르시더라고.”
그래도 평소 사용인들과 관계를 잘 다져 놓아서 그런 건지 나쁜 얘기는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대공가에서 오래 지내려면 인간관계는 당연히 중요했다.
내가 귀족치고는 계급을 그리 따지지 않으니 더더욱 사용인들에게 호응이 좋았다.
게다가 유치원 교사였던 내게 적당한 친분 유지 활동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치원 교사라고 하면 사람들은 아이들을 대하는 일만 생각하지만, 사실 어른을 대할 일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바로 학부모들 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연락이 오는 학부모들에게 그때그때 적절한 대처를 해 주고 평판을 관리하는 일 또한 바로 유치원 교사의 업무 중 하나였다.
한데 그런 와중에 눈치 없는 놈이 있었다.
“솔직히 대공비를 하기엔, 그렇게까지 미인은 아닌 것 같은데…….”
주방 일꾼 중 하나가 이런 말을 했다.
“저, 저놈이 감히……!”
나보다 훨씬 화가 난 메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째려보았다.
그녀의 매서운 눈빛과 마주치자, 일꾼은 흠칫 놀라면서 고개를 숙였다.
주먹을 꽉 쥐는 메리의 폼을 보아하니, 놔뒀다간 턱이라도 한 대 갈길 기세였기에 내가 그녀를 말렸다.
“메리, 진정해. 난 괜찮아.”
“하지만 아가씨……! 저 불손한 녀석을……!”
“글쎄, 괜찮다니까. 네가 진심을 다해 때리면 내가 송장 치워야 한다구.”
내 말에 메리는 결국 자리에 앉았다.
헛소리를 한 녀석은 메리를 비롯해 많은 하녀들의 눈총을 받고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야만 했다.
그 녀석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용인들은 나를 비교적 편하게 대하던 이전과 달리 훨씬 깍듯하게 대했다.
아무래도 내가 예비 대공비쯤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예전처럼 편하게 대하는 게 훨씬 좋은데 말이지. 어차피 녹턴이랑 진짜 결혼할 것도 아니고…….’
21세기 한국의 흙수저로 20년 넘게 살아서 그런가, 귀한 대접받는 게 익숙지 않은 나로선 좀 곤란한 일이었다.
또, 집사 시몬은 내가 방을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비 대공비께서 쓰실 방으로는 너무 작습니다. 그보다 훨씬 큰 안방으로 옮겨 드리고, 또 전용 시녀를 2명, 하녀를 7명 더 구해 드리겠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시녀에게 시녀를 붙이다니, 이게 무슨 말이람?’
녹턴의 약혼녀 대접을 해 주겠다는 건 알겠는데 너무 과했다.
나는 지금으로선 그의 약혼녀 이전에, 자네트와 미하일의 시녀였으니까 말이다.
아니, 만약 내가 그의 ‘진짜’ 약혼녀라면, 약혼녀 대접도 그러려니 하며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거짓 약혼 발표였고 진짜로 결혼할 것도 아닌데 너무 좋은 대접을 받아 버리면 꼭 사기 치는 것 같단 말이야!’
이런 걸 아마 혼인빙자 사기라고 하던가?
어쨌든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나는 시몬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고맙지만 전 지금으로도 충분해요. 저는 제가 봉급을 받고 있는 이상 대공 전하의 약혼녀 이전에 사용인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백작가에서 겪었던 대접에 비하면 대공가에서 지금 받고 있는 대접만 해도 엄청나게 후했다.
백작가에서는 지금 쓰는 방보다 훨씬 작은 방을 썼고, 전용 하녀도 없었으니까.
“제 머릿속엔 그런 것들보다 공녀님과 공자님을 잘 모실 생각뿐이에요. 지나치게 많은 하녀들은 제 일에 도움이 되긴커녕 방해만 된답니다.”
나는 그저 사기꾼이 되기 싫었을 뿐이지만, 아무래도 시몬은 큰 오해를 해 버린 것 같았다.
그의 주름진 눈이 커지더니 묘한 빛으로 일렁였다.
“아니, 셔우드 영애…….”
그의 일렁이는 눈빛과 젖은 목소리는 그가 심히 감동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의 심상찮은 반응을 보며 나는 눈치껏 깨달았다.
‘내가 프로의식이 투철하고 검소해서 제안을 거절한 줄 아는 것이로구나!’
이거 참! 어쩜 오해를 해도 이렇게 할 수가.
말도 안 되는 오해였다. 난 곧 원작에서 사라져야 할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혼인빙자 사기를 쳐서 후한 대접을 받다가 도망가 버리면 남겨진 사람들은 얼마나 큰 배신감을 느끼겠는가?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나는 그저 과분한 기대를 받는 것이 싫을 뿐이다.
답답해진 나는 최선을 다해 해명하려고 노력했다.
“시몬, 설마 오해하는 것은 아니죠? 저는 검소해서 당신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그게 제게 합당한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라고요.”
그러나 시몬의 주름 가득한 얼굴에서 훈훈한 미소는 사라질 줄을 몰랐다.
그는 내 해명을 듣고 오히려 더더욱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허허, 알겠습니다. 제가 영애께 오해라니요, 당치도 않지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검소한데 겸손하기까지 하다니, 참으로 훌륭한 대공비감이야!’라고 쓰여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몇 번이나 더 해명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시몬의 ‘검소하고 겸손한 대공비감’이라는 오해는 더더욱 커지기만 했다.
이건 뭔, 기대를 받기 싫었는데 괜히 기대를 늘리기만 한 것 같았다.
결국, 나는 그에게 해명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는 없었다.
내가 입을 다물자 시몬이 단호한 눈으로 말했다.
“하지만 영애, 아무리 영애께서 검소하시다고 하셔도, 혼인 뒤 정식으로 대공비가 되시면 그때는 저도 양보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반드시 최소한 시녀 5명, 하녀 20명만이라도 늘 동행하도록 하십시오. 블랙웰 가문과 대공 전하의 위상을 위해서라도요.”
“……아, 네. 물론이죠.”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건 결코 거짓말이 아니다. 어차피 내가 녹턴과 결혼해 정식으로 대공비가 될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테니까!
나는 시몬과 헤어지며 그가 떠나는 모습을 슬쩍 돌아보았다.
검은 정장으로 감싸인 어깨가 씰룩씰룩하는 것이, 그의 떠나는 뒷모습은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그가 대공저 내에서 나에 대한 괜한 칭찬이나 퍼뜨리지 말기를 빌고 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