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1권) (1/20)

남주의 복지를 책임지겠습니다 1권

(1)

* * *

“멍청아! 뭐 하냐?”

조찬 시간이 다 되어 스스로 채비를 하고 1층의 식당으로 내려가던 찰나였다.

이놈의 콩가루 집안은 콩가루 주제에 온 가족이 모여 함께하는 조찬과 석찬만은 중요시해서 단 하루도 빼먹는 날이 없었다.

심하게 아프거나 부재중인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참석하는 것이 이 집안의 규칙이었다.

이젠 슬슬 익숙해질락 말락 하는 카랑카랑한 변성기 소년의 목소리. 나는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쉬었다.

“멍청이가 아니라 누나겠지, 아돌프.”

그러나 내 말에 아돌프는 조금도 수긍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더더욱 의기양양하게 히죽 웃으며 코웃음을 치는 것이었다.

“헹! 누나 좋아하시네.”

그렇게 말하며 아돌프는 내게 태클을 걸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에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호잇!”

나는 속으로 숫자를 삼까지 센 뒤 보기 좋게 그의 태클을 뛰어넘었다.

“우아악!”

그 통에, 아돌프는 균형을 잃고 보기 좋게 얼굴부터 고꾸라졌다. 곱게 차려입은 그의 셔츠와 앙증맞은 크라바트가 엉망으로 구겨졌다.

아돌프의 태클을 받아 낸 지 어언 일주일 째. 그동안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아돌프의 태클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어느 날은 왼쪽으로 걸어왔다면 그다음 날은 오른쪽으로 걸고 또 그다음 날은 왼쪽으로 거는 식이었다.

심지어 타이밍도 언제나 똑같았다. 이 규칙엔 결코 예외가 없었다.

‘차기 검술 기대주가 이렇게 단순해서야.’

저렇게 단순무식하긴 하지만 아돌프는 놀랍게도 온갖 대회에서 상을 휩쓸 정도로 검술에 재능이 있다고 한다. 아마 이제껏 만난 대회 상대들은 아직 이 규칙성을 파훼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굳이 불필요한 분쟁을 더 발생시킬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런 생각은 속으로만 삼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당을 향해 걸었다.

“야, 거기 서!”

하지만 단순무식의 화신은 나를 금방 쫓아왔다. 그의 한쪽 코에서 코피가 줄줄 흐르는 것이 보였다.

“라리아 주제에…… 라리아 주제에, 어떻게 피한 거야?”

“누나를 이름으로 부르면 못 써, 아돌프.”

“시끄러워!”

내가 시큰둥하게 내뱉자 아돌프가 소리 질렀다.

어휴, 귀 따가워.

“말해! 어떻게 피했냐고?”

“……너 가위바위보 할 때 맨 처음에 내는 게 맨날 똑같은 타입이지?”

“뭐? 뭔 소릴 하는 거야!”

자꾸 어떻게 피했냐고 묻길래 힌트를 줬는데도 난리다.

일일이 상대하는 것도 귀찮아져서, 나는 그를 무시하고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 했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하자, 홀처럼 거대한 식당과 아주 긴 식탁이 보였다.

셔우드 백작,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 자리인 가장 상석은 비어 있었고, 그 바로 아래에 30대 중반 정도의 여성과 20대 중반 정도의 남성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나의 계모와 오빠 노먼이었다.

노먼과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것 같던 계모는 나를 보더니 매서운 얼굴을 했다.

처음 봤을 땐 대체 사람 표정이 어떻게 저렇게 급격하게 바뀌나 싶어서 좀 무서웠지만, 그것도 일주일을 봤더니 이젠 익숙해졌다.

“난 또 너무 늦길래 안 오는 줄로만 알았구나. 발이 엉덩이에 달리기라도 한 거니?”

계모가 연지 바른 붉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정말이지, 저렇게 게으르고 쓸모없는 것을 어느 집안에서 데려가려고 할까.”

어이가 없네.

나는 분명 정시 5분 전에 도착했다. 아돌프가 그리도 귀찮게 방해를 했음에도 그랬다.

그녀의 말에 ‘진짜 라리아’라면 분명 상처받았을 것이다. 말문이 막혀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속상한 얼굴로 계모에게 사과하곤 의자에 앉았겠지.

하지만 난 별로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난 진짜 라리아도 아니고 말이다.

“넵넵. 저는 게으르고 쓸모가 없어서 시집보내서 치워 버리기도 글러 먹었죠. 그리고 그건 다 제가 저의 천한 모친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이고요. 계모님 말씀이 다~ 옳으십니다.”

나는 지난 일주일 동안 70번 정도 들은 것 같은 그녀의 레퍼토리를 미리 쫙 읊어 주었다.

71번째 말하기도 귀찮고 입 아플 텐데, 그럴 고생을 덜어 주었으니 이만한 효녀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나의 효심 어린 행동으로 인해 식당 안의 분위기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천한 피라고요? 라리아에게 저희의 모친에 대해 천한 피라고 비난하신 겁니까?”

나의 오빠 노먼이 잔뜩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평소 그는 결코 내 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계모나 아돌프가 날 귀찮게 하든 말든 방관하는 주의였으나, 일단 나와 어머니가 같았다.

즉 계모가 나한테 친모를 들먹이며 하는 패드립은 그에게도 패드립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계모는 나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노먼은 무서워한다. 계모의 얼굴은 종이보다 더 창백해졌다.

“아, 아니, 노먼! 내 말은…… 아니, 그게 아니라.”

“말해 봐라, 라리아. 평소 계모님께서 우리의 친모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느냐?”

노먼은 계모를 등지고 나에게 물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그가 나에게 이렇게까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처음 보았다.

나는 어쩌고 있나 궁금해서 계모 쪽을 흘끗 보았다.

그녀는 노먼의 등 뒤에서 잔뜩 창백한 얼굴로 마구 손사래를 치다가, 자신의 목을 손으로 긋는 시늉을 했다.

‘저거 협박인가?’

저게 ‘솔직하게 말하면 넌 나에게 죽는다’라는 뜻인지, 아니면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노먼에게 죽는다’라는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전자였으면 괘씸죄를 얹어서 노먼에게 여태까지 내가 들은 패드립들을 죄다 고자질을 해 버리고 싶었지만, 지금 그러기는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늘은 지난 일주일간의 계획이 결실을 맺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공연히 사건을 키워서 계획을 어그러뜨리고 싶지 않았다.

“으음…….”

고자질할까? 아니면 관둘까. 내가 고민하던 그 순간이었다.

쾅! 식당의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 뒤에서 나타난 사람은 아돌프였다.

아마 터진 코피를 뒷수습하느라 늦은 모양이었다.

그 등장이 계모에게는 천사의 나팔 소리처럼 들린 모양이었다.

“세상에, 아돌프! 늦지 않게 왔구나!”

계모는 굉장히 호들갑스러운 반응으로 아돌프를 환영했다.

“뭐야, 왜 이렇게 야단이야? 창피하게. 저리 가.”

사춘기인 아돌프는 제 엄마의 오버스러운 행동이 민망했는지 그녀를 밀쳐 냈다.

노먼은 미심쩍은 눈으로 계모를 흘끗 보았지만 일단 이 화제는 나중으로 미루기로 한 눈치였다.

아돌프는 계모의 옆에 앉고, 나는 노먼의 옆에 앉았다. 셔우드 백작은 출장으로 부재중이었기에, 우리 네 사람은 조찬을 시작했다.

어색한 공기 속에서 아침 식사를 한 뒤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카펫을 들춰 바닥을 덮고 있는 대리석타일 중 한 장을 떼어 냈다.

그러자 그 아래에 내가 숨겨 놓은 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놈의 콩가루 집안에서 탈출해야 해.’

나는 가방을 들쳐멘 뒤 외출용 코트를 입었다.

‘백작이 없는 지금이 기회야.’

바닥을 원래대로 해 놓은 뒤, 가방을 코트 밑에 숨긴 채 몰래 저택에서 빠져나왔다.

물론 셔우드 백작저에는 전용 마차가 있었지만 그것은 탈 수 없었다. 흔적이 남기 때문이다.

나는 걸어서 시내까지 나온 뒤 삯마차를 탔다.

“블랙웰 대공가로 가 주세요.”

일반적인 귀족가의 자제는 따로 용돈을 받지 않는다. 살 것이 있으면 자신의 집안에 비용을 청구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셔우드 백작가에 마차 삯을 청구할 수 없었다.

대신, 나는 손가락에 끼우고 있던 반지 중 하나를 빼서 마부에게 주었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어요.”

마차가 블랙웰 대공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불편한 삯마차에 몸을 싣고, 엉덩이가 아파 오는 것을 참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넓은 광장과 상점가, 노점, 농산물을 직접 팔러 나온 농부들과 장을 보러 나온 아낙네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들…….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가 없는 풍경들.

창밖으로 보이는 시내의 풍경은 영락없이 17~18세기 유럽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그래.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물론 내가 이 세계에 원래부터 소속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 사람이 된 지는 고작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은 라리아 셔우드라고 불리는 나의 원래 이름은 남주현. 대한민국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특이사항이 있다면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 정도일까.

평소처럼 눈을 떴을 때, 셔우드 백작가의 천덕꾸러기 여식 라리아 셔우드가 된 기분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빙의’라는 말로만 듣던, 말도 안 되게 비과학적이고 비현실적인 상황을 실제로 겪게 되었다는 것도 있지만…….

‘하필 2년 안에 끔살당할 악녀일 건 뭔데?!’

그렇다.

‘기왕 빙의를 할 거면 여주인공에 하면 좋잖아!’

내게는 2년짜리 시한부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라리아 셔우드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순간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를 깨달았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라리아 셔우드는 내가 직접 지은 이름이었으니까. 작명 사전까지 뒤져 가면서!

로맨스 판타지 소설만 8년을 읽은 나는, 이제 슬슬 내 작품이라는 걸 가지고 싶은 유혹에 빠졌다.

그래서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썼다. 내 취향을 듬뿍 담은 피폐물이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연재사이트에서 인기도 나름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몇 편이나 썼을까, 원래 소설 같은 걸 써 본 경험이 없어서 그랬는지 열정은 금방 동이 났다.

나는 내 재능이 쓰는 것보다는 읽는 쪽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쓰던 소설을 대충 던져 두고 반년 정도 방치했다. 마지막으로 연재사이트에 접속했을 때 나를 찾는 독자들의 아우성이 댓글란에 가득했던 것 같지만…….

뭐…… 뒷내용이 통 떠오르지 않는데 어쩌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내가 쓰던 소설에 빙의하고 만 것이다. 그것도 조연 악역으로!

‘이건 쓰던 소설을 연중한 죄 많은 작가에게 내려진 천벌인가?’

나는 그런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독자들의 원성이 저주가 되어 내게 부메랑처럼 돌아온 걸까?’

연중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난 그 사실을 몰랐다.

그리도 수많은 사람들을 애태우고 고통받게 만든 죗값을 이렇게 돌려받게 된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2년 뒤 예정된 죽음 외에도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라리아 셔우드는 집안의 천덕꾸러기였다. 아버지도, 계모도, 오빠도, 동생도, 모두 라리아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그런 집안에서는 하루도 더 있고 싶지가 않았다.

‘좋아, 이놈의 콩가루 집안에서 탈출하고 2년 뒤의 죽음도 피하자!’

내게 이런 목적이 생긴 것은 당연지사였다.

다행인 것은, 이 소설의 원작자가 나라는 것이었다. ‘이 세계’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당연히 나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활용해 지난 일주일간 계획을 세웠다.

셔우드 백작가에서 성공적으로 탈주하고 나의 목숨도 구할 계획을.

그리고 그 계획의 끝은 바로 그곳에 있었다.

블랙웰 대공가.

“녹턴 블랙웰 대공.”

나는 조용히 그의 이름을 뇌까렸다. 지난 일주일간 나의 이름이 되어 주었던 라리아 셔우드보다도 익숙한 울림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는 내 소설의 남주였으니까.

마차가 블랙웰 대공가의 정문 앞에서 멈추었다.

“신분패를 보여 주십시오. 대공 전하와의 만남은 미리 약조하셨습니까?”

문지기의 말에 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신분패와 대공의 편지를 보여 주었다.

“오늘 10시에 약속되어 있는 셔우드 백작 영애셨군요. 들어오십시오.”

문지기가 대문을 활짝 열었다. 마차는 아무런 걸림 없이 미끄러지듯 대공가의 안으로 들어갔다.

‘집 진짜 크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셔우드 백작가도 재력이라면 수도에서 한 가닥 하는 편이었으나, 블랙웰 대공가의 저택은 그런 셔우드 백작가의 저택이 8개쯤은 있어야 살 수 있을 것처럼 거대하고 화려했다.

화려한 정원에 난 길을 마차로 한참을 간 뒤에야 저택의 현관이 보였다.

마부의 도움을 받아 현관에 내리고 나니, 현관문은 목을 아플 정도로 한껏 젖혀도 맨 윗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기둥과 문틀, 천장에 문손잡이까지 섬세한 부조를 새기고 벽화를 그려 놓았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저택이 자리 잡은 곳도 수도에서 제일 목 좋은 곳이고. 서울로 치면 강남 노른자 땅 한복판에 수천 평의 건물을 지어 놓은 격이잖아?’

블랙웰 대공가의 재력이란 정말이지 보기만 해도 질릴 정도였다.

물론 내가 그렇게 설정하긴 했지만…… 어쨌든 내 상상력을 훨씬 상회하는 것 같았다.

대공가의 집사로 보이는 노인이 현관에서 나를 맞이했다.

“블랙웰 대공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셔우드 양. 대공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드르륵—.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현관문이 열리고, 집사가 나를 이끌었다.

“대공 전하께서는 이곳에 계십니다.”

응접실 문 앞에서 집사가 말했다.

“고마워요.”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집사가 응접실의 문을 열어 주었고, 나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계획은 철저하게 짜 두었다지만, 그래도 떨리는 것은 역시 어쩔 수가 없었다.

방 안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셔우드 영애.”

그를 직접 본 나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는 굉장한 미남자였다.

그 누구보다 짙은 검은 머리와 오묘하고 매혹적인 빛의 보라색 눈. 날카로운 콧날과 완벽한 턱선. 예복에도 가려지지 않는 넓은 어깨와 탄탄한 몸.

여담으로 내가 빙의한 원작은 비참 잔혹 피폐물이다.

내가 연재한 데까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내용은 이렇다.

「여주인공과 녹턴은 제국에서 제일 큰 축제인 레온하르트 기념제에서 최초로 만난다. 두 사람은 첫눈에 사랑에 빠지지만 신분과 블랙웰의 악명, 둘의 사이를 시기하는 사람들로 인해 갈등을 겪는다.

갈등이 심화되면서 여주인공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하게 된 녹턴은, 결국 이성을 잃고 자신들의 사이를 훼방 놓는 모든 인물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여주인공을 납치한다.」

알겠는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놈은 훗날 여주에게 그런 어마어마한 짓을 저지르는 무서운 놈이란 말이다.

하지만 그를 마주하는 순간, 나는 이 소설의 원작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런 잔인한 살인범에 납치범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 눈빛에서 느껴지는 퇴폐적인 매력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짐작하게 했다.

그야말로 완벽한, 흠잡을 곳이라곤 한 군데도 없는 미의 이데아 그 자체.

심지어 그는 정말이지 내 취향이기까지 했다.

‘당연하지! 내 취향으로 설정했으니까!’

새삼 여주가 부러워져 눈물이 날 정도였으나, 중반부 이후에 이놈이 여주에게 한 짓들을 떠올리니 놀랍게도 심장이 멀쩡해졌다.

덕분에 이성을 되찾은 내가 침착하게 미소 지었다.

“블랙웰 대공 전하.”

나는 치맛단을 잡아 올리며 귀족의 예법대로 인사했다. 나보다 작위가 훨씬 높은 그는 그저 여유롭게 앉은 채 고갯짓할 뿐이었다.

미소를 가득 띤 내 얼굴과 대조적으로 그의 얼굴은 지극히 건조하고 무감각했다.

그야말로 해야 하는 일을 하는 듯한 사무적인 얼굴.

“앉으시죠.”

그가 웃음기라곤 일절 없는 얼굴로 자리를 권했다.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생각했다.

‘그래, 넌 그런 놈이었지. 가뜩이나 요즘은 고생하고 있는 데다가 여주도 없으니 오죽하겠어? 나 같아도 그런 상황에선 웃음이 안 나올 거야.’

그런 생각을 하니 그의 건방진 태도에 딱히 화가 나거나 미워 보이지 않았다.

곧 하녀들이 간단한 차와 다과를 내왔다. 나는 홍차를 조금 마시면서 블랙웰 대공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생각할 때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이들의 시녀로 지원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 내가 이 계획을 떠올린 것은 블랙웰 대공가에서 내건 신문 광고를 보고 나서였다.

블랙웰 대공에게는 자식이 있었다. 그것도 두 명. 이란성 쌍둥이.

암만 피폐물이라지만 엄연히 로맨스 판타지 소설의 남주인공인데 사생아 자식이라니?

놀랄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 아이들은 그의 친자식이 아니다. 양자다, 이 말이다.

젊고, 애인 한 번 없었다던 대공에게 양자가 그것도 둘씩이나 생긴 데에는 그 나름의 사정이 있다.

뭐, 그런 시시콜콜한 사정은 좀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고, 어쨌든 올해로 5살이 되는 그 아이들의 유모가 갑자기 은퇴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을 찾는다는 내용의 광고였다.

나는 그 광고를 보고 시녀로 지원했다.

시녀, 즉 왕족과 고위 귀족의 곁에 붙어서 시중을 들어 주는 하위 귀족을 뜻하는 말이다.

“네, 그렇습니다.”

내 대답에 그는 다리를 꼬고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가 말을 이었다.

“이렇게 지원해 주신 상황에서 유감이지만, 지원자는 많습니다. 신분과 학력,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말이지요.”

그럴 만도 했다. 오히려 그러지 않았으면 더 놀랐을 거다.

‘그’ 블랙웰 대공가였고, ‘그’ 녹턴 블랙웰이었다.

그의 자식들이 사생아라서 대공가의 승계 권한이 없다고 해도, 어쨌든 자식들과 얽히면 당연히 그하고도 얽힐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어떻게든 대공가와의 연줄이 될 것이다.

심지어 젊은 여성이라면 어떻게든 그의 눈에 들어 대공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내리깔고 있던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굴러 나를 향했다. 그가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영애를 꼭 뽑아야만 하는, 다른 지원자들과는 다른 차별점이 있습니까?”

충분히 예상했던 질문이다. 나는 상대에게 들리지 않을 크기로 숨을 들이마시곤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그 정도도 없었다면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내가 말했지만 재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자신감!

순간 대공의 미간이 미미하게나마 좁혀지는 것이 보였다. 하긴, 그의 앞에서 이만한 자신감을 대놓고 드러낸 지원자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녹턴 블랙웰 대공이다.

냉혹한 폭군, 철혈의 칼날, 미친 악마 따위의 별명이 있는 그였다.

오글거린다고? 좀 참아라. 새벽 감성에 정신 놓고 쓴 지름작이라 그런 거니까!

하여튼 무정하고 비정한 자비 없는 폭군, 피를 갈구한다는 괴물의 앞에서 자신감을 오롯이 드러낼 수 있는 간담 부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한 사실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이렇게 뻗댈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는 나는 원작자고 쟤는 내 창조물이라 그렇게까지 무섭게 느껴지진 않았다는 것이다.

본디 두려움이란 무지에서 생겨나는 것.

그에게 어떤 과거가 있고, 피를 갈구한다는 광증이란 건 무엇인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나로선 그가 무섭기보단 딱할 뿐이었다.

그리고 둘째로는…….

“흥미롭군요. 어디 한번 보여 주시죠, 영애.”

블랙웰 대공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싸늘하다 못해 팔에 닭살이 돋을 정도로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좋아, 인생은 한 방이다!’

나에겐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대공 전하의 아드님이신 미하일 블랙웰 공자…… 말이지요.”

나는 떨림을 감추기 위해 애쓰며, 입을 열었다.

“혹시, 밤마다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울지 않으신가요? 가까스로 잠에 들어도 악몽을 꾸고.”

나는 숨을 조금 들이켰다.

“……어머님을 찾고.”

긴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목소리는 잘 벼려진 날붙이처럼 또렷했다.

“그러면서도 대공 전하께서 달래 주기 위해 다가오면 더 자지러지게 울고.”

그렇게 길지 않은 말이었으나, 이 말이 불러온 변화는 명백했다.

내가 응접실에 들어온 뒤 거의 표정 변화가 없었던 블랙웰 대공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보라색 눈이 커지고 잘생긴 입가가 딱딱하게 경직한 상태였다.

그야말로 정곡을 찔린 사람, 그 자체였다.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셔우드 백작가에서 대공가를 염탐하는 것은 불가능할 터인데……. 아니, 하녀를 매수했나?”

그의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에는 경계심마저 가득 서려 있었다.

나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띄웠다. 친근해 보이지만 지나치게 밝지 않도록. 그의 사정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듯이.

“염탐이라니요, 그럴 리가요. 실례지만, 들어오는 길에 미하일 공자와 자네트 공녀가 그려 놓은 그림을 보았답니다. 홀의 왼쪽 구석 액자에 넣어져 걸려 있는 두 장의 그림이 공자와 공녀의 그림 맞지요?”

“……그렇소만.”

“그중 말 탄 기사를 그려 놓은 것이 미하일 공자의 것일 테고요.”

들어오는 길에 본 홀의 왼쪽 구석에는 딱 봐도 어린애가 그린 두 장의 그림이 액자에 넣어져 걸려 있었다.

그야말로 5세 어린이의 실력이라 무엇을 그렸는지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자세히 보니 한 장은 말을 탄 기사의 그림, 또 한 장은 드레스를 입은 공주님의 그림이었다.

편견적이긴 하지만 일단은 가능성이 큰 가정을 찍어 본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내 예측은 맞은 모양이었다. 블랙웰 대공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금 더 따뜻하게 웃어 보였다.

“역시 맞군요. 저는 유아교육학을 독학하였습니다, 전하.”

“유아교육학? 그런 학문도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 유아의 심리를 이해하고 가르치는 방법을 연구한 학문이랍니다.”

이 시대에 유아교육학은 상당히 낯선 학문이었다.

아직 유아나 어린이의 심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어린이는 작은 어른’이라고 여기는 시대였으니까.

아이를 가르칠 때도 아이의 지적 수준이나 심리에 대한 이해 없이 그저 어른을 가르치는 방법 그대로 시간만 줄이는 식으로 가르치곤 했다.

독학이라는 건 거짓말이다. 사실 빙의 전 내 직업은 병설 유치원 교사였다.

유아교육을 전공하여 임용고시를 통과해 유치원 교사가 된 지도 어언 4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내 머리와 몸속엔 임용을 통과하기 위해 피땀 흘리며 갈고닦고, 실전으로 배우고 익힌 유아교육학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다만 이곳에서는 대학이나 어떤 교육기관에서 배웠다고 할 수가 없었다.

블랙웰의 정보력이라면 라리아가 대학 수학 경험이 없다는 사실 정도는 쉽게 꼬리가 밟힐 테니까.

그래서 이곳에서는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했다고 주장할 생각이었다.

“계속하십시오.”

“네. 저는 미하일 공자의 그림을 주의 깊게 살펴보다가 그 속에서 공자의 심리적 불안과 두려움을 발견하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의 그림은 마음의 창과 같습니다. 유아들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자신의 창작물에서 표현하고는 한답니다.”

당연하지만 이건 약 팔이다.

내가 미하일의 심리적 문제를 알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내가 원작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림을 통해 유아의 심리를 진단하다니, 그런 걸 할 수 있다면 내 직업이 유치원 선생님이 아니라 유아 심리학자나 소아정신과 의사였을 거다.

내가 미하일의 그림으로 핑계를 댈 생각을 한 건 레퍼런스가 있는데, 빙의 전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 기X충에서…….

아니, 이건 뭐 됐고.

“…….”

어쨌든 유아교육학이란 걸 처음 들어 본 사람한테 그럴싸하게 들리기만 하면 된 거다.

“유아의 그림으로 아이가 밤에 경기를 일으키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인데…… 뭐, 일단 그건 그런 걸로 합시다.”

대공은 내게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긴 했지만 다행히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었다.

휴! 남주현의 말발, 아직 죽지 않았구나!

“영애의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미하일은 밤마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악몽에 울고, 심지어 제가 달래 주려 해도 더 두려워하기만 합니다.”

거의 변화가 없던 대공의 눈에 언뜻 걱정스런 빛이 비쳤다. 나는 조금 마음이 아파졌다.

그 잔혹하고 무정한 괴물 블랙웰 대공도 5살짜리 자식에게는 약해질 수밖에 없나 보다. 물론 친자식은 아니지만.

“그래서 영애에게는 해결 방법이 있다는 겁니까?”

대공의 형형한 보라색 눈이 나를 향했다.

왔다! 여기서 이 떡밥을 물지 않으면 내가 아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저는 원작자인걸요!

* * *

이후의 진행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셔우드 영애께서는 이 방을 쓰시면 됩니다.”

블랙웰 대공가의 집사, 시몬이 내가 이곳에 있는 동안 묵을 방을 보여 주었다.

나는 그저 이 집안의 사용인일 뿐인데도 어마어마하게 크고 멋진 방을 받았다.

내가 셔우드 백작가에서 쓴 방보다 3배는 큰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쪽은 셔우드 영애를 모실 하녀, 메리입니다. 영애의 생활 전반의 일들을 담당할 것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메리에게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더군다나 전속 하녀까지. 사용인에게는 무척 호화로운 대접이 아닐 수 없었다.

‘역시 남주는 다르구나!’

나는 새삼 감격했다. 하긴, 내 남주가 쪼잔한 것은 싫었으니까 배포가 있고 타인에게 씀씀이가 크다고 설정한 기억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대접을 직접 받을 때의 기분이란 건 다른 법이니까.

‘과거의 나, 잘했다!’

나는 속으로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지르면서 푹신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 침대만 해도 더블사이즈를 한참 넘을 것 같았으며 폭신한 거위 털로 가득한 질 좋은 이불과 베개가 놓여 있었다.

시몬은 내게 방을 안내한 뒤 돌아갔고, 메리만이 혼자 남아 나의 주접을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우물쭈물하던 메리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저, 아가씨.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응?”

내가 몸을 일으켜 그녀를 보았다. 메리는 주저하다가 내게 물었다.

“어째서 대공저에서 상주하시기로 한 건가요? 출퇴근을 하시는 쪽이 더 편하지 않으신가요? 대공님께서는 충분히 이해하셨을 텐데…….”

나는 그녀가 무엇이 궁금한 것인지 이해했다.

이 세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평민 사용인은 직장에 상주하고 귀족 사용인은 출퇴근을 하는 편이다.

그리고 퇴근도 없이 하루 24시간 직장에 상주하는 것보다는 당연히 집으로 퇴근해 자신의 시간을 확보하는 편이 삶의 질에 도움이 된다.

원래 살던 곳에서도 숙직실 시설이 잘 되어 있는 회사는 취준할 때 피해야 할 곳 일 순위로 꼽히지 않았던가.

물론 직장과 거주지가 멀다면 귀족일지라도 상주를 선택하곤 하지만 대공저와 셔우드 백작저는 둘 다 수도에 있으므로 마차를 타면 그렇게 멀지 않다.

그러니 귀족의 몸으로 굳이 상주를 선택한 내가 놀라워 보일 만도 했다.

어쩌면 이미 다른 사용인들 사이에서 나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을지도 모르고.

“흐음, 그건…….”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오늘 처음 만난 하녀에게 ‘같이 살던 가족들이 너무 개 같아서 탈출했다’라고 말하는 건 좀 그럴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진심을 숨기고 메리에게 따스하게 웃어 보였다.

“그야, 아이들이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고를 치는 존재잖니.”

“네? 그, 그야 그렇죠.”

“하루 24시간 중에 공자님과 공녀님이 날 필요로 하는 순간이 어느 때인지 미리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겠니? 나는 그 어느 때라도 공자님과 공녀님의 곁에서 그분들을 도와드리고 싶거든. 설령 그게 밤이 되었건 새벽이 되었건 말이야.”

“아가씨…….”

사실 아예 거짓말은 아니었다.

내가 이곳에서 상주하는 걸 선택한 첫 번째 이유는 셔우드 백작가를 탈출하기 위함이지만, 두 번째 이유는 대공가에 찰싹 붙어 있어야만 미하일과 자네트, 그리고 대공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들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특히 대공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려면…… 밤이 제일 좋을 때이니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스스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이 말에 메리는 큰 충격과 감동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 영롱한 빛이 돌더니, 뺨이 확 붉어졌다.

메리는 치맛단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진심으로 공자님과 공녀님을 생각하시는 아가씨 같은 분을 모시게 되어 기쁩니다. 저 역시 아가씨께서 절 필요로 하시는 순간이라면 어느 때고 아가씨를 돕겠습니다.”

진심이 어린 듯한 그 반응에 나는 매우 머쓱해졌다.

딱히 그녀가 생각하는 이타적인 이유만으로 이곳에 온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곳에 온 가장 큰 이유는 내 한목숨 살아남기 위한 거니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메리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아, 이곳에서 여자들은 악수를 잘 하지 않나?

하지만 뭐 어떻겠는가. 이 정도는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난 손을 내민 채로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너무 날 위해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어쨌든 잘 부탁해, 메리.”

“전혀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저야말로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조금 주저하던 메리는 결국 내 손을 맞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꽤 기분이 좋았다. 한결 친해진 것 같달까?

시작이 좋았다. 그리고 시작이 좋다는 건 이미 반은 됐다는 것이다. 나는 메리에게 말했다.

“좋아, 그럼 이제 공자님과 공녀님이 계신 곳으로 날 데려다줄래? 나도 내 일을 시작해야 할 것 같으니 말이야.”

* * *

자네트와 미하일은 정말 귀여운 아이였다.

하긴 그 굉장한 미남인 대공과 피가 어느 정도 이어져 있으니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자네트와 미하일은 사랑스러움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두 사람은 쌍둥이인데, 서로 별로 닮지 않았다.

미하일은 대공을 닮은 검고 곧은 머리를 가졌지만 초록색 눈이었고 5살배기다운 터질 듯 빵빵한 볼은 마구 주물러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반면 자네트는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은발과 보라색 눈을 가지고 있어, 작은 요정이나 천사처럼 보였다.

내 직업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아이를 진짜 진짜 좋아한다. 하물며 이렇게까지 예쁘고 귀여운 아이들이라니, 말 다 했다.

‘이렇게 예쁜 아이들을 돌보게 되다니! 혹시 이곳이 천국 아닐까? 아, 빙의하길 잘했어!’

내가 속으로 소리 없는 주접을 부리는 동안 자네트는 곧게 서서 멀뚱멀뚱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미하일은 하녀의 다리 뒤에 숨어 낯을 가리는 중이었다.

나는 허리를 굽혀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최대한 친근하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공녀님, 공자님? 저는 라리아라고 해요. 앞으로 공녀님과 공자님을 모시게 되었어요.”

그때까지 말없이 멀뚱거리고 있던 자네트가 말했다.

“니가 우리 히녀야?”

“네?”

“니가 우리…… 히녀냐구?”

나는 그 말에 웃을 뻔했지만, 직업의식을 발휘해 참아 냈다.

‘혀가 짧아서 시옷 발음을 잘 못 하는구나.’

너무 귀여워 견디기 어려울 정도지만……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이 자신들을 얕보거나, 미숙하게 보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챈다.

그리고 그런 어른에게는 쉽게 마음을 닫는다.

그래서 나는 자네트의 발음에 웃는 대신 평이한 어조를 유지하며 말했다.

“네, 제가 이번에 새로 들어온 공녀님과 공자님의 시녀예요.”

그러나 자네트의 눈에는 여전히 미심쩍은 눈초리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자네트가 자신의 등 뒤에 서 있던 하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몰리는 어디써?”

“몰리는 다쳐서 고향으로 돌아갔잖아요, 아가씨.”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아마 몰리가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미하일과 자네트의 유모인가 보다.

내가 원작자라곤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남주 자식들의 작중 시작 시점 1년 전 은퇴한 유모에 대한 설정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모르는 사실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활짝 열고 정보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하녀는 계속해서 자네트에게 설명했다.

“이제부터 라리아 아가씨께서 몰리처럼 다정하게 아가씨와 도련님을 돌봐 드릴 거예요.”

하나 자네트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것 같았다. 자네트의 입은 불퉁하게 튀어나온 채였다.

나를 빤히 올려다보던 자네트는,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나, 이거 시러!”

하녀는 엄청나게 당황했다.

“어머, 고, 공녀님께서 왜 이러실까. 공녀님, 아가씨를 보세요. 정말 다정하고 친절하시다고요. 꼭 몰리처럼요.”

“시러! 저리 가! 시러어!”

“아이참, 공녀님. 정말 오늘따라 왜 이러세요. 죄송해요, 아가씨. 공녀님이 원래 이런 분이 아니신데…….”

하녀는 자네트를 달래려고 야단이었다.

장난감도 가져다주고, 자네트가 좋아한다는 사탕도 가져다주며 달래려 애썼지만, 자네트는 요지부동이었다.

“몰리 데려와아! 몰리!”

심지어 대리석 바닥 위에 발라당 드러누워 생떼까지 부리는 것이 아닌가?

하녀는 자네트에게 쩔쩔매면서도 내 눈치를 보는 게, 아무래도 내가 자네트를 달래지 못한다고 화를 낼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애꿎은 하녀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괜찮아. 아직 아이들이 나를 낯설어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나는 하녀에게 웃어 보였다.

“이제 넌 가서 쉬어. 이제부터 공자님과 공녀님은 내가 모실 테니.”

“네에? 저, 정말인가요, 아가씨?”

“그럼. 나 혼자서도 친해질 수 있어.”

하녀는 기겁했지만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그야 나는 유치원 교사고, 아이들을 돌보는 데에는 이골이 났으니까.

‘우리 반 인원이 총 열여덟 명인데, 두 명 정도야 껌이지.’

나는 하녀의 등을 떠밀다시피 해 내보냈다.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는 메리를 제외하면 방에는 자네트와 미하일, 그리고 나만이 남았다.

자네트는 여전히 대리석 위에 드러누워 떼를 쓰고 있었고, 미하일은 멀찍이 물러나서 겁먹은 얼굴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하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맘때의 애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겐 낯을 가린다. 게다가 무엇보다…….

‘이전 양육자와 친했다면, 새로운 양육자에게는 더 적대적이기 마련이지.’

마치 새엄마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는 아이처럼 말이다.

자네트가 했던 말들을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자네트와 미하일은 유모였던 몰리와 몹시 친했던 모양이다.

아이들은 갑자기 자신들을 떠난 몰리가 그리운 것이고, 그래서 나를 더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것임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나는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귀족 아가씨’답지는 않은 행동이었지만 내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앉아서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다정하게 웃었다.

“공녀님, 공자님. 몰리가 많이 보고 싶은가 봐요.”

“……씨익, 씨익!”

자네트가 성질을 부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하일은 엄지손가락을 빨면서 고개를 떨궜다.

“몰리는 정말 많이 좋은 사람이었나 봐요. 공녀님과 공자님이 이렇게 보고 싶어 하는 걸 보면요.”

“몰리 나빠!”

갑자기 자네트가 벌떡 일어났다.

“몰리가, 나랑 미하일 버려써! 집에 가 버려써!!”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나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몰리는 많이 다쳐서 공녀님과 공자님을 돌볼 수 없을 뿐이에요. 몰리도 사실 공녀님과 공자님이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내 말에, 여전히 심통이 가득한 얼굴이긴 했지만 자네트가 조용해졌다. 나는 빙긋 웃으며 그녀와 미하일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저는 공녀님과 공자님을 만나게 되어 기뻐요. 우리는 분명 아주 아주 잘 지낼 수 있을 거예요. 게다가, 나중에 몰리와 편지를 주고받거나 직접 만나러 갈 수도 있겠죠.”

“…….”

“자, 공녀님. 공자님.”

나는 아이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우리 앞으로 잘 지내 봐요. 저랑 친구 해 줄래요?”

“칭구…….”

미하일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멀찍이서 나를 멍하니 보고 있던 미하일이 슬금슬금 몇 걸음 다가왔다.

‘됐다!’

하지만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건 미하일뿐이었던 것 같다. 자네트는 심통 난 얼굴로 고개를 확확 젓고는 등을 홱 돌려 버렸다.

게다가 자네트가 그렇게 하자, 미하일은 자네트의 눈치를 보다가 결국 내게 더 다가오는 것을 포기하고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아무래도 자네트의 경계심이 심한걸. 이유를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생각했다.

비록 아이들과 바로 친해질 수는 없었지만, 사실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다.

어찌 첫술에 배부르겠는가. 오히려 미하일이 금방 경계를 누그러뜨리고 다가온 것만 해도 엄청난 수확이었다.

그리고 아이들과 나눈 대화로 깨달은 것이 있었다.

‘아이들과 친해지려면, 몰리에 대해 더 알아 둘 필요가 있겠어.’

그렇게 생각한 나는 메리와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저택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냥 집 안을 구경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다른 사용인들에게 몰리에 대해 수소문하기 위해서였다.

“몰리 말입니까? 공자님과 공녀님의 내니(nanny. 유모) 말씀이시죠? 푸근하고 좋은 사람이었지요. 걷는 걸 싫어하는 공자님을 늘 업어 주고는 했답니다.”

“정말 좋은 사람이었죠! 꼭 제 친할머니 같았다니까요.”

“몰리는 피곤할 텐데도 밤마다 공자님과 공녀님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고 자는 모습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퇴근하곤 했어요.”

“참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정원사의 사다리에 다리가 깔려서…… 나이도 많은데 참 안타깝게 됐다니까요. 물론 대공 전하께서 충분한 치료비와 평생 먹고살 수 있을 만큼의 퇴직금을 내렸답니다. 지금은 고향 집에서 자식들과 함께 산다고 들었습니다.”

두루두루 평가가 좋은 걸 보니 아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용인들과도 원만하게 잘 지낸 사람이었던 것 같았다.

어쨌든 저택 내의 수백은 될 듯한 사용인들에게 다 물어보고 다녔더니 목적은 거의 달성할 수 있었다.

힘들긴 했지만 아주 유용한 정보를 많이 얻었다.

“히잉, 메리, 나 안아죠…….”

미하일이 투정 부리며 두 팔을 뻗었다. 메리가 미하일을 가볍게 안아 들며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가씨?”

“정보는 다 얻었으니, 이제 써먹어야지. 아이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데 몰리의 육아법을 이용할 생각이야.”

“몰리의 육아법을…… 이용한다고요?”

메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지켜봐.”

내 생각은 단순했다.

모든 가수마다 각자의 창법이 있고, 모든 화가마다 각자의 그림체가 있듯이, 모든 양육자에겐 자신만의 육아법이 있다.

몰리에게도 그녀만의 육아법이 있을 것이었다. 나는 당분간 그것을 따라 하기로 했다.

전 양육자를 그리워하는 아이들에게 익숙한 편안함을 주고, 그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자, 공자님, 공녀님. 목욕할 시간이에요.”

현재 시각은 오후 7시, 아이들이 씻을 시간이다.

“우리 재미있는 거품 목욕해요. 오리 장난감이랑 돛단배 장난감도 드릴 테니까요.”

나는 활짝 웃으며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미하일과 자네트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시러…….”

미하일은 풀죽은 얼굴로 도리질을 쳤고, 자네트는 아예 멀찍이서 못 들은 척하며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뭐, 그럴 만도 했다. 원래 어린애들 중 목욕 좋아하는 아이는 별로 없다.

하지만 내겐 회심의 무기가 있었다.

“공자님, 공녀님. 바닐라 쿠키 드릴까요?”

“꾸끼?”

단번에 두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 미하일과 자네트는 과자를 매우 좋아한다.

하지만 몰리는 이가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 아이들에게 과자는 매우 한정적으로 주곤 했다.

이를테면 목욕하기 직전 같은.

나는 까치발을 들어 옷장 위에 올려져 있는 쿠키단지를 꺼냈다. 내가 쿠키단지의 뚜껑을 열며 물었다.

“바닐라 쿠키 먹을 사람~?”

“나!”

“나, 나도…….”

자네트가 제일 먼저 인형도 내던지고 달려왔고, 미하일도 우물쭈물하더니 자네트를 뒤쫓아왔다.

나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바닐라 쿠키를 꺼내 들었다. 미하일과 자네트가 최고로 좋아하는 과자였다.

아니나 다를까, 내 손에 들린 쿠키를 본 아이들의 눈이 몽롱해지고 식탐과 탐욕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정신은 이미 쿠키에 완전히 팔려 있었다.

내가 말했다.

“쿠키 드릴 테니까 이 쿠키 드시고 목욕하시는 거예요~?”

“응!”

옳지, 우리 공녀님 공자님은 말도 잘 듣네.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두 사람에게 쿠키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쿠키를 맛있게 먹은 뒤에 두 사람을 욕실로 데려가 때 빼고 광내고 이가 반짝반짝해질 때까지 치카치카도 해 준 것은 물론이다.

목욕을 한 뒤에는, 착한 어린이들은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그런지 큰 방을 함께 썼다.

내 침대도 굉장히 크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대공가 아이들의 침대는 그 스케일이 달랐다.

두 사람이 함께 쓰는 더블베드는 그 위에서 공놀이를 해도 될 것 같은 크기였다.

“나 자기 시러.”

자네트가 토라진 얼굴로 툴툴거렸다. 미하일도 말은 안 해도 같은 마음인 것 같았다.

그렇다. 원래 어린애들은 일찍 자기 싫어하는 법이다.

어른들은 일찍 자고 싶어 죽을 지경인데……. 흑흑.

나는 미하일의 베개 모양을 고쳐 주고 자네트의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겨 덮어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잘 마음이라곤 조금도 들지 않는 듯, 볼따구가 사탕이라도 문 것처럼 부푼 아이들의 모습은 너무 귀여워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엄마 미소를 가득 지은 채, 그들의 옆에 모로 누워 말했다.

“그래요? 우리 공녀님이 자고 싶어지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 참, 그렇지……. 공녀님, 공자님. 혹시 옛날이야기 좋아하세요?”

“옛날얘기?”

아이들의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이 동그래졌다.

몰리는 자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매일마다 옛날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했다. 나도 한번 그렇게 해 볼 생각이었다.

“재밌는…… 고야?”

미하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재미없을 것 가태.”

자네트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웃어 보였다.

“흐응, 글쎄요. 어떨까요? 어디 한 번 듣고 판단해 보셔요. 어디 보자…….”

아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물론 나는 이 세계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래동화나 민담 같은 것은 잘 모른다.

하지만, 이래 봬도 로맨스 판타지 하드독자에 직접 써 보기까지 한 사람이다.

아이들을 즐겁게 해 줄 간단한 이야기 정도야 얼마든지 만들어 낼 자신이 있었다.

“아, 그래. 용의 기사의 모험 이야기는 어떠세요? 용 아빠와 인간 엄마를 둔 기사, 드래고니아가 마왕도 무찌르고 공주님과 연애도 하는 내용이에요.”

“재밌겠다.”

미하일이 눈을 빛냈다. 자네트도 말은 하지 않지만 내심 관심이 동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토닥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옛적에, 아주 먼 옛날에, 용기사 드래고니아가 살고 있었어요. 그는 용의 발톱으로 만든 전설의 검과 용의 비늘로 만든 전설의 방패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쩌면 내게는 독자보다 작가의 재능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내 이야기를 꽤 좋아했다.

어느 날은 내 취향을 지나치게 담아서 옛날이야기가 피폐물이 되어 버려 미하일을 울린 적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꽤 선방했다고 생각한다. 며칠 뒤부터는 내가 말 안 해도, 아이들이 먼저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으니까. 물론 한참 훗날의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아이들을 성공적으로 재운 첫날 밤.

블랙웰 대공가에 와서 취직한 첫날이자, 처음으로 나의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날이었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흐뭇한 기분으로 잠든 아이들의 모습을 잠깐 내려다보았다.

‘둘 다 정말 천사 같다니까.’

가느다랗게 빛나는 머리카락과 솜사탕처럼 말랑해 보이는 볼은 정말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뿌듯하게 아이들의 자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곧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와, 살금살금 아이들의 방에서 빠져나왔다.

아이들도 잠에 들었으니 이제 나도 퇴근할 시간이었다.

이미 저택 내의 사용인들도 대부분 퇴근한 듯 저택은 온통 고요했고, 창밖에서는 부엉이와 나이팅게일의 울음소리만이 드문드문 들려왔다.

방문 앞에 선 나는 아이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언제나 경첩을 잘 손질해 두는 듯, 방문은 소리 없이 매끄럽게 열렸다.

그런데 열린 문 너머,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헉!’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가까스로 입을 막았다.

공포에 질려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나는 곧 형형하게 빛나는 보라색 안광을 발견했다.

‘아, 녹턴이구나.’

그제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내가 애들을 잘 돌보았는지 확인하러 온 모양이었다.

나는 문을 닫고 치맛자락을 들어 보이며 인사했다.

“대공 전하, 좋은 밤입니다.”

그가 몇 걸음 더 다가왔다. 그제야 창밖에서 비치는 달빛 아래에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의 표정은 오늘 오전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냉랭한 얼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눈빛.

“…….”

그는 말없이 내게 다가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어, 뭐야?’

나는 좀 당황했다. 덩치도 크고 눈빛도 형형한 그가 오밤중에 다가오는 건 약간 무서웠다.

그는 내게서 한 걸음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까지 다가왔다.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나도 모르게 내 목은 자라처럼 쪼그라들었다.

“……!”

그의 손길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나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줄로만 알았다.

영문을 몰라 눈을 몇 번 끔뻑이니, 어느샌가 그의 손에는 거위 깃털 하나가 들려 있었다.

“영애의 머리에 붙어 있었다.”

대공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나를 고용한 이후부터는 하대하는 어투를 썼다. 그가 고용주고 내가 사용인이기 때문에 그런 모양이었다.

나는 떨리는 동공으로 그의 손에 들린 거위 깃털을 보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아, 저걸 떼어 주려고 다가왔던 거구나. 괜히 놀랐네. 그건 그렇고, 저건 대체 언제부터 붙어 있었던 거야?’

내 방에서 침대에 누웠을 때부터? 아니면 지금 애들을 재워 주면서?

후자라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전자라면 큰일이었다. 거의 하루 종일 머리에 깃털을 붙이고 다녔다는 뜻이니까.

생각만 해도 부끄러워서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나는 괜히 얼굴이 뜨거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인 채로 발끝만 보고 있자, 그가 다시 말했다.

“얼굴이 붉군.”

이런, 이 어둠 속에서도 그걸 보다니. 밤눈이 아주 밝은 사람인가 보다. 나는 더 창피해졌다.

나름대로 배려라는 걸 하는 것인지 대공이 화제를 돌렸다.

“아이들은?”

“지금 막 잠들었어요.”

내가 조심스럽게 그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아이들이 궁금해서 왔을 테니, 나는 대공이 아이들의 안부만 들으면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공이 다음으로 꺼낸 말은 내 예상을 완전히 깨뜨리는 것이었다.

“영애의 방에 데려다주도록 하지.”

“어, 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게 데려다주고 어쩌고 할 것도 없이 내 방과 아이들의 방은 아주 가까웠다.

같은 층이었고, 다른 방 두 개만 지나면 바로 내 방이었다.

게다가 여기가 뭐 위험한 골목길도 아니고 블랙웰 대공저인데, 가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 리가 있겠는가?

그 사실을 이 집의 주인인 블랙웰 대공이 모를 리도 없을 텐데, 그는 굳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나를 방까지 에스코트해 주겠다고.

나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본래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 아니다.

타인에게는 무관심하며, 그가 애정이나 관심을 보이는 대상이라곤 오로지 아이들과 여주뿐이었다.

그의 창조자인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내 취향을 듬뿍 부어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아이들을 보살펴 주는 사람이라 그런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구 두근거리던 가슴도 어느샌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더군다나 근무 첫날이고.’

그를 만들긴 했지만, 그에 대해 아주 세밀한 것까지 다 알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대공이 아이들을 보살피는 유모를 어떻게 대하는지 따위는 깊게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원작에 등장하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나는 모른다.

아마 그가 지금 나를 대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아이들을 돌보는 시녀가 되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나는 괜히 두근거렸다는 사실이 창피할 지경이었다.

‘절대 이 사람한테 들켜선 안 되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그가 내미는 팔을 잡았다. 처음 받아 보는 에스코트였다.

복도는 싸늘했다. 창밖에서 달빛이 아스라이 쏟아지고 밤새들의 울음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그의 팔은 두말할 것 없이 든든했지만 좀 민망하기도 해서, 나는 어색하게 대공의 옆얼굴을 힐끗거렸다.

그의 뒤로 넘긴 검은 머리칼 위로 쏟아지는 달빛이 하얗게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

뒤로 넘겼으나 밤늦은 시각이기에 조금 흐트러진 앞머리와 하얀 이마, 자색의 눈동자가 담긴 눈매는 냉정해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자네트의 눈매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나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서, 나는 그의 얼굴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어차피 남의 떡이기에 욕심을 내는 건 아니지만,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다. 정말이지 눈 호강이 아닐 수 없었다.

아이들의 방과 내 방은 아주 가깝기 때문에 에스코트는 매우 짧았다. 내 방문 앞에 도착한 나는 그의 팔에서 손을 떼었다.

“에스코트 정말 감사드려요, 대공 전하. 좋은 밤 되시길 바랄게요.”

하지만 내 인사에도 그는 바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으로 나를 빤히 내려다보던 그는, 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나를 향해 팔이 다가온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다.

그의 손의 종착지는 내가 아니라 내 등 뒤의 문손잡이였다.

끼이익—. 복도의 고요를 깨는 문 열리는 소리.

“어서 자는 게 좋을 거다.”

그리고 그의 낮은 목소리.

“내일은 내일의 업무가 있지 않나.”

그의 무뚝뚝하고 단조로운 말에 나는 그만 웃음마저 나올 것 같았다.

‘내일의 업무를 위해 일찍 자라’라는 그 딱딱한 말 뒤에 숨어 있는 배려가 보이는 것만 같아서.

게다가 직접 문을 열어 주다니 다정하기도 하지. 대공이란 집무실 문도 자기 손으로 열지 않을 것 같은 위치가 아닌가.

나는 빙긋 웃으며 문틀을 넘었다.

“네, 감사합니다.”

대공은 할 말이 있는 듯이 조금 머뭇거렸다. 떠나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을 잘 부탁하지, 영애.”

고압적이고 딱딱한 말투를 쓰는 그가 입에 담으리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만큼 아이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나는 그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두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면서, 달빛 아래에서 활짝 웃었다.

“물론이죠. 맡겨만 주세요!”

그는 그제야 등을 돌리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결코 웃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그가, 등을 돌린 채 미소 지었다는 것을.

* * *

“시러! 시러어어어억!”

“공녀님!”

“자네트 공녀님!”

아이들과 친해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름대로 정성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자네트는 여전히 내게 대놓고 적대적이었고 미하일은 자네트보다는 낫지만 나를 무서워했다.

하지만 뭐, 괜찮았다. 어떻게 첫술에 배부르겠는가.

이제 고작 일주일이 지났고 그렇게 짧은 시간 만에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자네트와 미하일은 5살이지만, 귀족이라서 그런지 벌써부터 일주일에 한 번 예법 수업을 들었다.

바로 오늘이 예법 가정교사가 오는 날인데, 문제가 있었다.

바로 가정교사가 오기 한 시간 전, 아이들이 정원에서 놀고 싶어 해 잠깐 놀게 해 주었건만…….

그 짧은 사이에 자네트가 흙투성이 땅강아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메리와 다른 하녀들은 쩔쩔매며 자네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공녀님, 목욕하셔야 해요. 목욕을 하시고, 옷을 갈아입으셔야 수업을 듣죠.”

“맞아요. 이런 모습으로 예법 선생님을 만나실 순 없잖아요.”

“시러어어어!”

하지만 자네트는 그런 어른들의 사정 따위에는 자비가 없었다.

자네트는 목욕하고 옷 갈아입는 게 얼마나 싫었는지 바닥을 떼굴떼굴 굴러다니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어쩌죠? 아가씨. 벌써 선생님이 오시기 10분 전이에요.”

메리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나는 공자님을 담당할 테니, 메리는 공녀님을 최대한 빨리 씻기고 환복해서 모셔와 줘.”

“알겠습니다.”

메리와 하녀들은 바닥에서 몸부림치던 자네트를 옆구리에 끼고 사라졌다.

나는 미하일을 내려다보았다. 미하일은 자네트를 따라 조금 뛰어다니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태가 꽤 괜찮은 편이었다.

나는 옷매무새를 고쳐 준 뒤 미하일의 손을 잡았다.

“그럼 갈까요, 공자님?”

미하일은 엄지손가락을 빨다가 우리 앞에 놓인 끝도 없이 올라가는 계단을 보았다.

미하일은 갑자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어, 왜 이러세요? 가셔야죠, 공자님.”

“나 힘드러…….”

미하일이 칭얼댔다.

“업어죠.”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아까 뛰어놀 때는 전혀 안 그러더니!’

하지만 이런 어린애한테 논리적으로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까 뛰어놀 때는 아무리 열심히 놀았다고 해도 지금 힘들어서 계단을 못 올라가겠다면 그런 것이다.

다만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지금 우리들이 있는 곳은 1층 홀이었고, 아이들이 수업을 듣는 방은 4층이라는 점이다!

이놈의 망할 저택은 크기도 어마어마하게 커서 무려 6층의 대건물이었다.

엘리베이터는 화물용 수동 엘리베이터뿐이기에 사람은 탈 수가 없었다. 위험하기도 했고.

만 5살짜리 어린아이 정도야 업어 줄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5살짜리를 업고 4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은 좀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수업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좋아요, 공자님. 업히셔요.”

내가 비장하게 말했다.

그리고 5초 뒤.

“으그그그극!”

나는 미하일을 업고 가까스로 일어났다.

짜식, 누가 블랙웰 아니랄까 봐…… 꽤 덩치가 좋구나. 이건 내가 맨날 업는 5살 아이들의 무게가 아닌데?

“헉, 허억…… 고, 공자님. 편안하신가요?”

“으응.”

내 등 뒤에서 미하일이 엄지손가락을 빠는 소리가 들려왔다. 적어도 불편하진 않은가보다.

“좋아요, 그럼……. 갑니다!”

나는 미하일을 업은 채 계단을 하나씩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끝도 없는 것만 같았던 계단들이 하나씩 줄어들었다.

놀랍게도 나는 미하일을 업고 계단을 오를 수 있었다!

이마와 몸뚱이에서 땀이 비 오듯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너무 힘들어서 무아지경이 됐기에 더 쉽게 오를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2층, 3층…….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계단에도 끝이 보이고, 나는 마침내 4층에 도달하는 데에 성공했다!

“허억!”

나는 4층의 복도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20kg는 족히 될 무게를 짊어지고 4층까지 계단을 오르다니…….

이렇게 과격한 운동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헉, 헉, 헉, 헉…….”

샤워라도 한 듯 땀을 흘리며 주저앉아 있는 나와 대조적으로 미하일은 아주 멀쩡했다. 그는 내 팔에서 사뿐히 내려섰다.

“자, 허억, 헉. 공자님, 가세요. 수업에…… 늦으면, 안 되니까요.”

나는 다 죽어 가는 소리를 내며 미하일의 등을 떠밀었다.

“응!”

미하일은 도도도 소리라도 날 것 같은 발걸음으로 달려갔다.

교실은 계단 바로 앞의 문이었고, 그는 내가 보는 눈앞에서 정각 1분 전에 교실에 골인했다.

짜식, 괜찮냐는 질문이라도 한 번 해 줬으면 이 누나가 엄청 감동했을 텐데…….

하지만 원래 5살은 그렇게 시야가 넓은 나이가 아니다.

나는 5분 뒤에 자네트를 데리고 도착한 메리와 함께 교실 앞에서 대기했다.

1시간 뒤, 수업을 마친 미하일과 자네트가 나왔다.

낡고 허름한 내 모습과 대조적으로 두 사람 모두 아주 하얗고 뽀송한 모습이었다.

“라리아!”

“메리!”

그래도 귀여운 두 아이가 달려 나오는 모습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상이 되는 기분이었다.

자네트는 메리에게, 미하일은 내게 달려왔다.

첫날에만 해도 나를 향해 달려오긴커녕 겁먹은 얼굴로 나를 경계하던 아이들이었으니 놀라운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수업은 잘 들으셨나요, 공자님, 공녀님?”

“응!”

나는 함박웃음을 머금고 미하일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다른 손은 자연스럽게 자네트에게 뻗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를 경계하는 자네트는 내 손을 피해 메리의 치마폭으로 들어갔다.

“…….”

메리가 당황스러운 듯 나를 보았지만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웃어 보였다.

“그럼 갈까요?”

나는 미하일의 손만을 잡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작은 발걸음에 맞추어 걸음을 늦춰 준 것은 물론이다.

한데 자네트의 태도가 약간 이상했다. 그녀는 메리의 옆에 딱 붙어 있으면서도 미하일을 계속 쏘아보았다.

‘왜 저러는 거지? 미하일이 비교적 날 잘 따르기 때문에, 배신감을 느끼는 걸까?’

나는 좀 걱정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미하일이 날 따라 주는 것은 고맙고 기쁘지만, 그것으로 두 아이의 관계가 나빠지길 바라지는 않았으니까.

하나 내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바로 그날 저녁에 밝혀졌다.

석찬 뒤, 두 아이가 방에서 놀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나는 인형과 블록, 나무를 깎아 만든 병사와 마차 따위로 아이들과 놀아 주고 있었다.

기분 탓인가, 웬일로 자네트는 놀이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네트가 쌍둥이 동생 미하일과 놀면서도 자꾸만 이쪽을 흘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뭐, 뭐지? 내 얼굴에 뭐 묻었나?’

내가 내 얼굴을 더듬던 그때였다.

작은 손이 내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할 말이 이써.”

자네트였다. 자네트는 평소처럼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방문을 가리켰다.

생크림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볼과 꾹 다물린 입술은 사랑스러웠지만, 나를 담은 채 올려다보는 보라색의 눈동자는 채 만 5살의 어린애답지 않게 진지했다.

“공녀님, 무슨 일 있으세요?”

나는 미하일을 메리에게 맡기고 자네트와 함께 놀이방에서 나왔다. 때마침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네트는 함께 나온 뒤에도 오리처럼 입술을 내민 채 한참을 주저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툭 내뱉었다.

“난…… 미하일의 누나야.”

“……?”

자네트는 뒤뚱뒤뚱 돌아섰다. 아이의 작은 등이 보였다.

“미하일은, 내가 지킬꼬야.”

허리는 꼿꼿이 곧추세우고, 그 작은 어깨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아이의 작은 등은 놀라울 만큼 의지로 가득해 보였다.

“아빠랑 약속해써.”

5살짜리 아이의 진지한 모습은 솔직히 매우 웃기고 귀여웠지만, 그 이상으로 대견하고 가슴이 짠해져 와서 난 웃을 수 없었다.

나는 자네트의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자네트가 이제껏 내게 유난히 적대적으로 굴었던 것은, 미하일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미하일을 지키고 싶은 자네트로서는 낯설고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자네트는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너 나뿐 사람 아니지?”

여전히 진지한 눈을 한 채 아이가 물었다.

“‘우리 편’이지? 몰리처럼.”

이것은 자네트가 나를 ‘우리 편’에 들여놓아 주겠다는 선언과 다름없었다.

비록 힘들었고, 고생도 했지만 그래도 해낸 것이다.

아이의 마음속 벽을 조금이나마 허문 것이다.

비록 이것이 자네트와 미하일의 친한 사람이 되는 과정 중 첫 번째 단계일지라도 진심으로 기뻤다.

그리고 꼭 그 소중한 마음에, 신뢰에 응해 주고 싶었다.

나는 복도에 쪼그려 앉아 자네트와 눈을 맞추었다.

“물론이죠, 공녀님.”

나는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 자네트의 손을 잡았다.

“저는 언제라도 공녀님과 공자님의 편이에요. 언제까지나.”

자네트는 말없이 나를 보았다. 자네트가 내 손을 피하거나 뿌리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나 기쁘고 고마웠다.

우리는 한참이나 눈을 맞추었다. 먼저 고개를 돌린 사람은 자네트였다.

“……나 들어갈래.”

그 말에 나는 치마를 털고 일어났다.

자네트에게 놀이방 문을 열어 주면서도, 놀이방에 돌아올 때까지도 내 얼굴의 싱글벙글한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뭔가 좋은 일 있으셨습니까? 계속 웃고 계시네요.”

오죽하면 메리가 이렇게 물어볼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아까 나눈 대화를 자네트와 나만의 비밀로 하기로 했다.

메리를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자네트가 나를 믿어 주었으니 나는 그 신뢰에 응해 주어야 했다.

설령 상대가 5살짜리 꼬맹이라도 말이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고, 메리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자네트의 말에서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미하일을 지키기로 약속했다는 ‘아빠’가 녹턴 블랙웰 대공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자네트와 미하일의 친아버지를 말하는 걸까.’

내가 원작자지만 아무리 고민을 해 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원작에서 미하일과 자네트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다.

자네트가 옛날에 한 작은 약속 같은 건 작중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나는 잠시 블랙웰 대공과 아이들, 그리고 아이들의 친부에 대해서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야!”

“히히힝~! 히히힝!”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알아챘는지, 미하일이 장난감 마차를 내 머리에 두드리며 말 소리를 냈다.

자네트도 양손 가득 장난감 배와 장난감 병정을 든 채 외쳤다.

“머야! 딴생각하지 마!”

“미안해요, 공자님, 공녀님.”

나는 씩 웃고는 다시 집중해서 아이들과 놀아 주기 시작했다.

* * *

그로부터 몇 주 뒤의 일이었다.

“공녀님, 공자님! 좋은 소식이에요.”

하녀가 손에 편지봉투 하나를 들고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몰리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우와아!”

아이들은 하녀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머야? 머래?”

“읽어죠!”

하녀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며 보채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기쁘고 반가운 기색이 가득했다.

복숭앗빛으로 상기된 볼과 반짝이는 눈동자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네,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읽어 드릴게요…….”

하녀는 봉투를 찢어 안에 있는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한데 반쯤 읽었을까.

“공녀님, 공자님!”

이건 나다. 나는 잠시 볼일이 있어서 아이들을 메리에게 맡기고 외출했던 참이었다.

“라리아!”

아이들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아이들은 편지를 읽는 하녀를 그대로 둔 채 나를 향해 우르르 달려왔다.

“어디 가따 와써?”

“기다렸자나! 왜 이렇게 느저써?”

“헤헤,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어요?”

메리와 하녀가 아이들과 나를 돌아보았다. 아이들은 내 치맛자락을 붙잡고 재잘재잘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 모습은 꼭 엄마 새를 둘러싼 아기 새들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메리와 하녀의 눈은 따뜻했다.

참으로 고맙고, 행복한 오후였다.

* * *

다행스럽게도 미하일이 밤에 악몽을 꾸는 증상은 훨씬 나아졌다.

“정말 다행이에요, 미하일 공자님!”

메리가 자고 일어난 미하일의 옷을 갈아입혀 주며 말했다.

“거의 매일마다 깨서 울곤 하셨는데 요즘은 그러지 않으시네요!”

미하일은 잠이 덜 깬 눈을 손등으로 마구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미하일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곤 말했다.

“나 졸려, 라리아.”

미하일이 옷을 입다 말고 내 치마폭에 폭 하고 얼굴을 묻었다.

나는 그런 그가 귀여워서 검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마구 흩트려 버렸다.

“그러니 일찍 주무시라고 했잖아요. 밤늦게까지 노시더니, 이럴 줄 알았어요.”

어젯밤 자네트와 미하일은 유난히 자려고 하지 않았다.

취침 시간까지 계속 놀고 싶어 하다가, 내 옛날이야기를 3개나 듣고서야 잠에 들었다.

덕분에 나도 늦게까지 자지 못해 좀 피곤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이 정돈 괜찮아. 난 어른이니까!’

메리는 미하일의 옷을 다 입혀 주고 그의 머리를 빗겨 주며 내게 말했다.

“공자님께서 잘 주무시게 된 것도 분명 아가씨 덕분이겠죠. 아가씨가 오시고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공자님이 악몽을 꾸지 않으셨으니까요.”

나는 자네트의 머리를 묶어 주다가 멋쩍어져서 뒤통수를 긁었다.

“흐음, 그런가? 뭐, 난 별거 안 했는걸.”

메리는 내 능청에 가볍게 웃고는 물었다.

“혹시 어떻게 공자님을 치료하신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음, 그건…….”

사실 별거 아니었다. 나는 원작자이기 때문에, 미하일이 악몽을 꾸는 증상이 어째서 일어나는 일인지 알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것은 아이들의 애정 결핍 때문이다.

모든 아이들에게는 진심 어린 사랑이 필요하다. 하나 이 아이들에겐 아낌없는 사랑을 줄 보호자가 부족했다.

친모도, 친부도 없지, 양아버지란 사람은 저렇게 무뚝뚝하지. 녹턴 블랙웰은 내 취향의 남주인공이지만 그렇게 좋은 아버지는 아니니까.

이런 사정이 마음 여리고 겁 많은 미하일의 악몽에 반영되었던 것이다.

그나마 얼마 전까지는 아이들을 따뜻하게 보살펴 준 유모 몰리가 있어서 괜찮았지만, 몰리가 일을 그만둔 뒤부터는 미하일의 증상이 심해졌던 거고.

‘그러니까, 미하일이 악몽을 더 이상 꾸지 않게 된 건…….’

좀 민망하지만, 나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이들을 아끼고, 아이들도 내게 의지하니까. 미하일의 애정 결핍도 어느 정도 충족이 된 거겠지.

원작에서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여주가 아이들과 친해지면서 미하일의 악몽 증상이 나아지고, 이것이 녹턴 블랙웰이 여주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다.

즉 원작의 흐름, 여주와 남주가 가까워지는 것을 위해서라면 미하일의 증상을 방치하는 것이 정답이었겠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미하일은 잠꾸러기래요! 바보!”

“공녀님! 동생을 놀리면 못써요!”

자네트가 미하일에게 혀를 쏙 빼 물고 약을 올리기 시작하자 메리가 깜짝 놀라 자네트를 말렸다.

하지만 정작 놀림당한 미하일은 별로 화도 나지 않는지 헤헤 웃을 뿐이었다.

“자네트, 나랑 기차놀이 하자.”

“미하일은 잠꾸러기래요…… 머, 머라구?”

“기차 갖고 놀자. 나랑, 메리랑, 라리아랑.”

미하일이 메리와 나를 가리키며 사랑스럽게 웃었다.

“오늘도 나랑 놀아 줄 거지? 자네트.”

한없이 순하고 사랑스러운 남동생의 말에 심술궂은 말을 내뱉던 자네트도 말문이 막힌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자네트는 부끄러운 듯 보라색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잠깐만이야.”

“응! 잠깐이라도, 좋아.”

나는 그 모습을 얼굴 가득 엄마 미소를 지은 채 지켜보았다.

이렇게나 착한 아이가 울고,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지켜볼 수만 있겠는가.

‘그래, 여주인공은 엄청 다정하고, 착하고, 예쁘니까 분명 다른 방법으로 대공과 가까워질 수 있을 거야. 아니면…….’

나는 결심을 굳혔다.

‘내가 그렇게 되도록 도와줘도 되고.’

나도 콩가루 집안에서 탈출했고, 좋은 직장을 구했고, 미하일도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고, 모든 것이 잘 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긴 했다.

그건 바로…….

‘애들이랑 아빠랑 안 친해도 너무 안 친하단 말이야.’

나는 생각했다.

‘미하일은 여전히 대공을 볼 때마다 벌벌 떨고 말이야. 이 가족이 행복해지려면 꼭 서로 친해져야 할 텐데…….’

나는 다짐했다. 아무래도 대공과 아이들도 사이좋게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한데 바로 그날 아침, 예상치도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아이들을 조찬에 보낸 뒤 사용인 식당에서 메리와 함께 아침을 먹고 있던 때였다.

나는 이 세계에 온 뒤 아침 식사를 할 때마다 신문을 읽는 습관이 생겼다.

이 세계의 문화에 좀 더 빠르게 적응하고,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도 입에는 마멀레이드와 버터를 바른 토스트를 문 채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는데…….

“헉!”

내가 숨을 삼키자 맞은편에서 식사를 하던 메리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나는 도저히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 눈동자가 신문 위의 어느 지점에 박혀 사정없이 흔들렸다.

메리가 다시 나를 불렀다. 나는 신문을 잘 접어 치우며 얼버무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좀 특이한 기사가 나서. 하하하…….”

메리는 걱정스런 기색이었지만,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 굳이 더 캐내려고 하진 않았다.

나는 남은 토스트를 서둘러 배 속에 쑤셔 넣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 문을 잠근 뒤 품에 숨기고 있던 신문을 꺼내 펼쳤다.

신문의 1면 하단에는 내 시선을 잡아끄는 광고가 실려 있었다.

「사람을 찾습니다 : 라리아 셔우드. 19세.

2주 전 셔우드 백작저에서 조찬에 참석한 뒤 사라짐. 사용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짐을 싸서 스스로 외출했다고 함. 가출로 추정.

그녀의 행방에 대해 단서를 가진 분이나 그녀를 보호하고 계신 분은 클레이튼 셔우드 백작에게 연락 바람. 크게 사례하겠음.

C. S. 그리고 H. S.」

몇 번을 읽어도 글자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 셔우드 백작이 나를 찾고 있었다!

나는 기가 막혀서 입을 떡 벌렸다.

“이게 뭐야! 백작이 왜 나를 찾아?”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사라지든 말든 셔우드 집안 사람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이나 셔우드 백작가 사람들은 라리아를 싫어했고, 그녀를 냉대했으니까.

나는 변기에 앉아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긴, 생각해보니 아무리 관심 없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장녀는 살림 밑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라리아를 어디 팔아먹을 집안 자산으로 생각했다면, 사라졌을 때 찾으려고 할 만해.’

그래, 그들이 나를 찾는 것은 틀림없이 이런 이유일 것이다.

라리아는 그럭저럭 예쁘장하게 생겼으니 팔아먹듯 시집보내면 셔우드 백작가에 보탬이 될 테니까!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을까?

난 변기 위에 쪼그려 앉아 이마를 팍팍 쳤다.

‘하지만 알았다고 했어도 달리 방법은 없었을 거야. 내가 아무리 원작자라고 해도 지금 셔우드 백작의 가치관을 수정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래, 셔우드 백작이 이렇게 나올 줄 진작 알았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때에도 나는 분명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차분해졌다. 변기 위에서 고민하던 나는, 결국 이렇게 결정했다.

‘당분간 외출을 자제하고 대공저에서 조용히 지내야겠어. 백작에게 잡혀가는 일이 없도록.’

하지만 그 신문을 보는 사람이 대공가에 나뿐일 리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후가 되자 퇴근한 대공이 나를 자신의 집무실로 호출했다.

나는 그야말로 도살 날짜가 정해진 소가 된 기분이 되었다.

“그러니까…… 영애가 셔우드 백작가를 나와 이곳에 시녀로 취직한 것은.”

녹턴 블랙웰 대공이 잘생긴 이맛살을 찌푸린 채 말했다.

그의 책상에는 오늘 자 신문이 펼쳐져 있었으며, 그의 검지손가락이 짚고 있는 곳엔 나를 찾는 광고가 실려 있음은 물론이다.

“집안과는 합의되지 않은 일…… 즉 가출이었다, 이 말이군.”

나는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블랙웰의 정보력을 생각하면 언젠가는 들킬 거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빨리 들킬 줄이야!

원래는 들키기 전에 아이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까지 친해지고, 나의 능력을 충분히 보여 주어서 사실을 들켜도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빌어 볼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아직은 이곳에 취직한 지 채 두 주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아이들과 어느 정도 친해진 건 사실이지만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빌어 봤자 얼마나 먹힐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제길, 왜 하필 지금이야.’

나는 시선을 떨군 채 입안 살을 깨물었다.

난 정말이지 그가 날 쫓아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이 세계는 현대 대한민국과 꽤 달랐다.

이 세계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귀속된다.

혼인 전엔 가장인 아버지에게, 혼인 후에는 남편에게. 즉 나의 처우를 선택할 수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셔우드 백작이었다.

블랙웰 대공 역시 결국 이 세계의 일부.

그가 나를 셔우드 백작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건 합리적인 판단인 것이다.

‘돌려보내기만 하면 차라리 다행이지. 함부로 가출한 죄로 신고해 버릴지도 몰라.’

클 만큼 컸는데도 가출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간다니!

믿을 수 없지만 그런 세상인 것이다, 이 세계는.

‘젠장, 난 대체 왜 이런 세계관으로 소설을 쓴 거야?’

그러나 대공은 내가 함부로 가장의 손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로 힐난하거나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귀족 영애로서 정숙하지 않다고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러는 대신, 그가 입에 담은 말은…….

“왜 그랬지?”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눈에는 그저 무게감만이 담겨 있을 뿐, 일말의 부정적인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혼자만의 생활이 쉽지는 않을 텐데도, 집을 스스로 떠난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 아닌가.”

그는 그저 가출의 이유가 궁금할 뿐, 눈앞의 가출 소녀에게 그 어떠한 편견도, 선입견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 사실에 나는 오히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차라리 내 예상대로 반응해 주었으면 이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휴, 진정하자. 진정.’

나는 숨을 작게 들이켜곤 대답했다.

“……집이…… 너무 불편해서요.”

역시 내가 만든 남자주인공. 그는 내가 설정하지 않은 부분에서조차 가끔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내 취향으로 행동하곤 한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아마 내 대답이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은 모양이다.

“집이 불편하다고?”

나는 잠시 그에게 어디까지 사정을 설명해야 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방금 보여 준 그의 인품을 생각하니 말해 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적어도 녹턴은 내가 말한 가정 사정을 함부로 떠들고 다닐 만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특히나 셔우드 백작에게는.

“말씀드리기 송구합니다만, 대공 전하. 사실은…….”

나는 그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라리아가 어릴 적부터 집안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다는 것.

가족들 중 단 한 사람도 그녀의 편을 들어 주지 않았다는 것.

생활에 있어 최소한의 의식주 외에는 거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 기타 등등.

처음에는 담담하게 시작된 이야기였지만 내 목소리도 점차 열기를 띠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비록 내가 그 가정을 직접 겪은 것은 고작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라리아에게는 평생이었을 테니까.

나는 라리아가 가엾고, 안타까우며, 미안했다.

그녀의 무책임한 가족들에 대한 분노와 그녀의 가정환경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죄책감으로 뒤덮여, 이야기가 마무리될 때 즈음엔 목소리가 떨리기까지 했다.

다행히도 나의 이야기가 대공의 마음을 건드린 것 같았다.

언제나 냉철하던 그의 얼굴은 내 설명이 진행되면서 점차 굳어 갔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렇게 감정이 크게 드러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가 확실히 동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내 이야기가 다 끝나자 그가 제일 먼저 내뱉은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진심 어린 충격이 묻어나는 그 짧은 말.

그 말은 마치 내 심장을, 아니 라리아의 심장을 감싸는 것만 같았다.

“어째서.”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들이 왜 라리아를 이렇게까지 미워하고 있는 걸까요?

사실 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냥…… 내가 그렇게 설정했기 때문이다.

스토리 전개상 악녀가 필요했고, 라리아의 성격이 비틀리게 만들기 위해서 제일 편한 배경설정이 엉망인 가정환경이었으니까.

하지만 차마 그에게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저 씁쓸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

그는 강렬한 보랏빛 눈빛으로 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 조금 민망해질 정도였다.

사실 그가 이렇게까지 크게 반응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기본적으로 여주 외의 사람에게는 무관심한 것이 바로 녹턴 블랙웰이니까.

‘어쨌든 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으니 다행이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계속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저…… 대공 전하, 저는 그 집안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평생 함께 지내온 가족이지만 저는 그들보다 공녀님과 공자님이 훨씬 소중해요. 제가 계속 이곳에 있으면 안 될까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그 말에 대공은 또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분명히 충격받은 기색이었다.

“대체 왜…… 내가 영애를 돌려보낼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네? 그야…… 국법상 미혼 여성은 가장의 소유고, 또…….”

“우습군. 내가 법 따위를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하나?”

지금 좀 위험한 대사가 나온 것 같은데…….

그는 진심으로 자존심이 상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찌푸린 이마 위로 앞머리를 헝클어뜨리곤 그가 선언했다.

“나는 영애를 고용할 때 6개월 치 선금을 지불했다. 계약대로 일을 끝마치기 전에 영애는 그 어디에도 가지 못한다.”

“……푸훗!”

그 말에 나는 그만 웃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선금은 무슨 선금.

6개월 치 월급을 미리 받은 게 맞긴 한데, 그동안 밖에 나갈 일이 없었으니 난 그 돈을 단 한 푼도 쓰지 못했다.

그러니 까짓 돈은 돌려달라고 하면 그만 아닌가.

‘그냥 나를 그 콩가루 집안에 돌려보내는 게 싫은 거면서.’

이유가 이렇게나 명백한데, 나를 돌려보내지 않을 핑계를 굳이 선금 따위에서 찾는 것이 좀 귀엽게 느껴졌다.

“왜 웃는 거지?”

그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나는 그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봐 얼른 고개를 저었다.

“우, 웃은 거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딸꾹질이…….”

녹턴은 조금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흘끗 봤다가, 책상 위에 펼쳐두었던 신문을 대충 접어 던져 버렸다.

신문은 2m쯤 떨어져 있는 쓰레기통에 쏙 날아들어 갔다.

“사정은 잘 알았다, 셔우드 영애. 영애가 다시 붙들려 가는 일이 없도록 그대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함구하도록 하지. 나는 물론 대공가의 사용인들까지 전부 입단속 시키도록 하겠다.”

정말이지 친절하기도 하지!

역시 내 남주라니까!

나는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얼굴 가득 환하게 웃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요!”

“크흠, 흠. 은혜는 무슨.”

그가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렸다.

“그럼 이제 돌아가도 좋아, 영애. 차후 다시 부르도록 하지.”

녹턴은 벽을 본 자세 그대로 축객령을 내렸다. 아마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네! 다시 한번 정말 감사합니다, 전하!”

나는 다시 인사하고는 그의 집무실을 나섰다.

그때 나는 쫓겨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에 들떠 있었던지라 그를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의 귀가 조금 붉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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