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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잊혀질 것들에 대하여 (25/25)

외전. 잊혀질 것들에 대하여

“잠, 잠깐만 얘들아!”

아델이 정원을 뱅글뱅글 뛰노는 아이들의 뒤를 따라 걷다가 거친 숨을 내쉬며 아이들을 불렀다.

“어머니! 이렇게 약하면 아니 됩니다!”

“오라버니 마리…… 마씀미다!”

“마씁미다!”

아무리 그래도 이 나이에 아이들을 따라잡으려 뛰는 건 아델에게 힘겨운 일이었다. 그녀가 제법 긴 시간 동안 유적을 탐사하려고 다녔다고 해도 그게 달리기를 잘하거나 지구력이 좋아졌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으니까.

“어머니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에덴이 검은색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힘껏 외쳤다.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소년의 눈이 퍽 단단하게 보였다.

올해 네 살이 된 첫째 아들은 고지식한 편인데다가 어쩐 일인지 아델을 꼭 이렇게 운동을 시키려고 들었다. 1년 전에 유적 탐사를 마치고 돌아온 아델이 한 차례 크게 유행병에 걸려 앓았던 적이 있는 탓인 듯했다.

헥시온의 분위기가 보통이 아니었다곤 전해 들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니 아이들은 그녀가 조금만 기력이 없어 보여도 불안해하곤 했다. 그런고로 아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한 게 바로 이 술래잡기 같은 놀이인 모양이다.

문제는 술래잡기라곤 하지만 약간 놀림 받는 느낌도 있다는 거지만. 아델이 아이들의 뒤를 따라 조금 뛰다가 멈춰서 숨을 몰아쉬었다.

작은 아이들은 탁자 밑으로 쏙 들어갔다가 나무 뒤로 숨고 아델이 가까이 오면 그 옆을 쏙 스쳐 지나며 자유분방하게 이리저리 뛰느라 바빴다.

아델이 걸음을 멈추고 더는 움직이지 못하자 이번엔 두 쌍둥이 딸이 가만히 있지 못했다. 헥시온과 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태어난 두 쌍둥이 딸의 두 눈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를 보며 아델은 어색하게 웃었다.

“어마니! 이리로 오세여!”

“오세여!”

“시린, 마린……. 엄마 힘들…….”

세 살짜리 두 딸이 아델의 원피스자락을 붙잡아 꾹꾹 잡아당겼다.

“아니댑니다! 어마니는 웅동을 해야해여!”

“해야 해여!”

두 딸의 성화에 아델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허리를 폈다가 다시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인 그녀는 더 말을 하지 못하고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가볍게 닦아냈다.

‘……나이, 들었나?’

이젠 조금만 뛰어도 솔직히 벅찼다.

“아, 엄마 힘들다.”

아델이 터덜터덜 나무그늘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체력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최근에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약간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벌써, 14년이 흘렀다.

황후가 되고 그들과 헤어지고 아주 긴 시간이 흘렀다. 솔직히 말해서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종종 그들이 생각이 날 때가 있었다.

정확히는, 작년에 제국 밖에서 새로 발굴된 유적에 헥시온의 허락을 얻어 한 달 간의 짧은 여정을 다녀올 때 펠리스 비프타를 만난 이후로 떠오르게 된 생각이지만.

‘뜬금없었지.’

그녀가 느리게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 * *

“……아델?”

“오라버……, 아니. 펠리스……?”

언제나 함께하던 용병단이 급한 일이 생겨 유적팀이 용병단을 하나 고용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음, 짐작하건대 아마 헥시온은 몰랐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에게 언제나 기사를 붙여 주려고 늘 애를 쓰지만 내켜하지 않으니 유적 탐사에 관해서는 아델에게 대부분의 권한을 넘겨주곤 했다.

 시간 쌓은 신뢰의 증거이기도 했다. 물론 종종 버티지 못하고 찾아올 때도 있었다. 위험한 곳에 간다고 하면 당연하게도 그는 황실 기사단을 파견하기도 했고.

어쨌든, 오랜만의 재회는 아주 갑작스러웠고 당혹스러웠으며 생각보다도 더 아무렇지 않게 이루어졌다. 십 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그는 상당히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냉철하고 차가운 분위기는 여전했지만, 예전과 같은 오만한 느낌은 거의 없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는 그녀를 본 펠리스 비프타는, 아니……. 펠리스는 별말 없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첫인사를 마쳤다.

“잘 지낸 것 같아 보이는군.”

“……아, 네.”

어색한 인사였다. 그는 예전처럼 고급스러운 원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지도 않았고 화려한 검을 차고 있지도 않았다. 머리는 관리받지 못한 듯 제법 흐트러져 있었고 튜닉을 걸친 몸은 예전보다 조금 말라 보이기까지 했다.

“야! 일 안하고 뭐하냐? 펠리스.”

뒤에서 달려온 누군가가 그의 뒤통수를 거칠게 내리쳤다. 아델의 눈이 잔뜩 벌어지고 펠리스의 미간도 설핏 찡그려졌다.

“윽…….”

그가 낮은 신음을 흘리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표정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자존심이 상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갑자기 또 무슨 짓입니까, 단장님.”

“웬 여자한테 넋을 잃은 것 같아서 그렇지.”

“고용주분입니다. 단지…….”

그가 아델을 힐긋 바라보았다.

“단지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를 드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대장님께선 이런 일은 영 하지 않으시니 말이죠.”

“아아, 이쪽이.”

붉은 머리카락의 호탕하게 생긴 여인은 볼에 제법 큰 상처가 있었다. 그녀가 호쾌하게 씩 웃으며 손을 쭉 내밀었다. 방금까지 뭘하다 왔는지 흙투성이의 손이었다.

“흑묵 용병단의 키슈라고 합니다. 일단 단장을 맡고 있죠. 떠돌이 용병단이다 보니 사실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싶겠지만. 짧은 여정이지만 잘 부탁합니다.”

“아, 아델이라고 해요.”

“네, 들었어요. 엄청난 황후 마마시라고.”

아델이 마주 손을 내밀어 잡으려는데 펠리스가 아델의 손을 가볍게 가로막곤 키슈의 손을 가져갔다. 손수건으로 흙투성이의 손을 털어 준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더러운 손으로 악수 청하는 거 아니라고 했습니다.”

“진짜 귀찮다, 너도. 말 안 들으면 확 청소랑 빨래 네 담당으로 해 버린다.”

“제 당번은 저번 주였습니다.”

“…….”

아델에겐 그것이 아주 신선한 충격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었고 믿기지도 않았다. 그 장면이 제법 뇌리에 박혀서 그녀는 헤어짐을 경험하고도 긴 시간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은연중에 어디 다른 마을에라도 정착해서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뭘 해도 대단한 사람들이었으니 잘 살고 있을 거라고. 게다가 시간이 십 년이 훌쩍 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적어도 펠리스의 경우에는 그간 정착하지 않고 떠돌이 생활을 한 것은 분명했다. 다른 이들의 소식은 더 들려오지도 않았지만.

“그리고 저와 흑묵 용병단의 계약 기간은 앞으로 반년 남았습니다.”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키슈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지금까지와의 분위기가 거짓말이었다는 듯 살기등등한 사나운 표정이 펠리스에게 향했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너…….”

“고용주 앞입니다, 단장님.”

“……X발, 너 이번 주 청소랑 빨래 네 담당이야. 한 번만 그런 잡소리 꺼내면 가만히 안 둔다.”

키슈가 씩씩거리며 몸을 홱 돌렸다. 펠리스가 무심한 눈으로 멀어지는 키슈의 등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델은 그의 오만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눈을 마주하며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염치없겠지만, 네게 사과하지 못한 것이 신경 쓰였다.”

“…….”

“미안했어. 이제는 왜 그랬는지 이유조차 선명하지 않은데, 네게 큰 상처를 준 것만큼은 알겠더군.”

그가 자조하듯 낮게 읊조렸다.

“아니지.”

그가 중얼거리더니 이내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쁜 버릇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며 읊조리던 펠리스는 이윽고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몇 번 매만지더니 곧이어 허리를 천천히 90도로 굽혔다.

“긴 시간 미안했습니다. 아델.”

깊게 숙여지는 허리를 눈앞에서 보는 것에 아델은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무려, 펠리스 비프타가 제게 허리를 굽혔다. 고고하고 오만하던 그가 말이다.

아델은 애꿎은 입술만 뻐끔거리느라 바빴다. 그의 허름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거칠게 쏘아붙일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원망하고 증오하고 고통스러웠던 시절도 분명히 있었지만, 십 년이 넘는 세월에 그런 어두운 감정은 거의 희석되어 남아 있지 않았다.

“용서를 바라고자 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긴 시간 전하지 못한 말이 때때로 가슴에 남아서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가 천천히 굽혔던 허리를 폈다.

“나는 연고를 두지 않고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고 이대로 떠돌며 용병으로 살 겁니다. 이게 당신의 위안이 될진 모르겠지만요.”

그의 말에 아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 자리에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답을 바란 것도 용서를 구하는 것도 아니라는 듯 펠리스는 말없는 아델을 한 번 보더니 묵례를 하곤 몸을 돌렸다.

그는 그 뒤로 정말 모르는 사람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다가오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호위를 할 때는 경어를 쓰고 적당한 거리에서 할 일만 했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떠나갈 때조차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녀가 찾아가서 펠리스에게 말을 걸었을 정도였다.

“다른 가족들에 대한 소식, 들은 거 있어요?”

“없습니다. 부러 알아보지 않았고 듣고자 하지도 않았고요. 당신께서 바라던 것이었으니 나는 그 속죄를 충분히 할 생각입니다.”

“나는…….”

“몰랐던 것은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걸, 그저 끌려온 네게 죄가 없었다는 걸…….”

펠리스가 묵묵히 말했다. 무심하게 이어지는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는 그때 몰랐습니다. 내 삶이 소중하다면 네 삶도 소중하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어렸던 펠리스 비프타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눈앞의 것이 소중하고 가족을 깨부수는 아이가 싫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실 별거 아닌 일이었다. 그저 명을 다한 동생이 죽었고 새로운 가족이 들어왔던 것뿐이었다. 그것을 조금 일찍 깨달아서 인정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 펠리스 비프타는 다시 한번 눈앞의 소녀였던, 여인을 보았다. 어느새 어른이 되어 성숙미가 물씬 풍기는 이가 된 아이는 손에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있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앞으로도 당신의 앞길에 행운이 가득하길.”

펠리스 비프타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용병단과 또 정처 없는 길을 떠나갔다.

* * *

그 이후로 다른 이들의 소식을 수소문해 봤지만, 마땅한 정보를 얻은 건 없었다. 펠리스를 보니 이번엔 또 때때로 콰른 비프타에 대한 생각이 났다. 그가 마지막에 건넸던 사과 같지 않던 사과가 종종 머릿속을 맴돌았다.

가족들이 전부 뿔뿔이 흩어지고 모든 걸 다 잃었으니 그들은 결국 떠돌이 신세가 되었을 거다. 듣자하니 친가로 돌아간 공작 부인도 썩 좋은 취급을 받진 못하고 두문불출한다고 들었다.

이제 15년 가까이 시간이 지났다.

‘난 그 사람들이 평생 괴롭길 바랐었나?’

유년 시절이 행복하진 않았지만, 굶주리거나 괴롭지도 않았다. 길바닥에서 살았으면 더 비참했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길거리에서 주워 온 아이를 썩 다정하게 품어 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도리어 밖에서 주워온 아이면서 관심을 요구하는 제가 더 이상했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하다 보면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그들에게 평생의 속죄를 바랐던가? 품에 아이들을 안고 있으면 종종 죄책감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아냐, 쓸데없는 생각.’

아델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곤 나무 밑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녀들이 기겁하며 그녀에게 달려들었지만 아델이 손을 내젓는 것으로 냉큼 그들을 물려 버렸다. 그러자 쪼르르 아이들이 몰려와 그녀의 옆에 옹기종기 모였다.

“어머니는 너무 약해요.”

“아냐, 어머니는 생각보다 강해…….”

“에덴이 강해질게요! 어머니를 지켜드립니다!”

“시린도!”

“아, 아…… 마, 마린도!”

무릎과 양옆에 자리잡은 아이들을 보며 아델이 웃음을 터뜨렸다. 별거 아닌 이런 일상이 행복으로 자리잡은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힘주어 아이들을 품에 끌어안았다. 팔에 차고 넘칠 정도로 안기는 아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말간 얼굴로 웃었다.

“어머니는 어리강쟁이에여.”

“어리깡?”

“으응?”

“어머니께선 아버지한테만 어리광을 부리는데 이상하군요.”

뒤에서 팔이 뻗어와 그녀를 덥석 품에 안아들었다. 아델이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그렇습니까, 아델?”

아이들이 무슨 부스러기 떨어지듯 후두두 바닥에 떨어졌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아이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울상이 되었다.

“아버지!”

“왜 그러나요? 에덴.”

“어, 어머니랑은 저히가 먼저 놀고 이써써요!”

“그럼 이번에는 아버지의 차례입니다.”

헥시온이 웃는 낯으로 가볍게 아이에게 말했다. 에덴이 주먹을 꼭 쥐고 억울하다는 듯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어, 어머니는…… 에덴이랑 놀고 이써요!”

“저런, 이번엔 아버지랑 노셔야 합니다.”

울먹한 얼굴이 아델에게 향했다. 에덴의 표정을 보던 아델이 어색하게 웃으며 헥시온의 이마를 살짝 눌렀다.

“애들 괴롭히지 마세요, 헥시온.”

“아델이 온종일 아이들에게만 관심을 주니 아버지는 마음이 썩 좋지 않았습니다.”

“서운했어요?”

“네, 서운합니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헥시온이 말했다. 아델이 어깨를 한 차례 으쓱이곤 허리를 굽혀 에덴의 이마에 입술을 가볍게 맞췄다.

“아버지가 어머니랑 할 말이 있나 보네. 오늘은 여기까지만 놀까? 에덴. 우리 시린이랑 마린도.”

“하지마안……, 어머니이!”

에덴이 어리광을 피우며 아델에게 달려들었다. 엉겨 붙어 웅얼거리는 아이의 표정을 보며 아델이 웃었다.

“대신 내일은 피크닉이라도 갈까?”

“피크……닉이요?”

울먹이던 에덴이 단숨에 울음을 그치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약간 헥시온을 닮은 면이 있단 말이지…….’

단숨에 얼굴색을 싹 바꾸는 이런 모습 말이다. 아이가 조금 영악한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하며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피크닉.”

“아버지 빼고요?”

“어?”

“아버지 말고 어머니랑 돈생이랑 갈래여!”

에덴의 말에 헥시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흘긋 올려다보며 노려보는 아이의 눈길이 퍽 사나웠다. 헥시온이 웃음을 삼키며 아델의 볼에 입을 맞췄다.

“내일은 저랑 데이트를 해 주시는 줄 알았는데요, 아델.”

“헥시온.”

“……정말, 너무하십니다.”

헥시온이 툴툴거리며 물러났다. 서른이 넘어서도 아직 아이 같은 면모가 남아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좋아, 멀지 않은 곳이니까 우리끼리 가 볼까?”

“네!”

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언제 울먹였냐는 듯 밝아진 얼굴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대신 해지기 전에는 돌아오셔야 합니다. 아델.”

“약속할게요.”

“밤에는 저랑 있어 주셔야 하고요.”

“……대부분 그러지 않나요?”

헥시온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그가 가볍게 허리를 펴곤 고개를 끄덕였다. 에덴과 두 딸이 헥시온에게 달려와 그의 다리를 포옥 끌어안았다.

“아버지 감사함미다!”

에덴의 말에 그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으로 웃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때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누구보다 행복에 충만했다.

“사랑합니다, 아델.”

“……뭐예요, 갑자기.”

“그냥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아델이 아이들을 방으로 데려다주고 그와 함께 부부 방으로 향했다.

들어가자마자 그가 입을 맞췄다. 단숨에 입술을 물더니 깊게 빨아들인 헥시온이 빙긋 웃으며 아랫입술을 핥았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은 헥시온이 그녀의 혀를 낚아 채 단숨에 제 쪽으로 힘껏 당겼다. 혀뿌리가 아려올 정도로 얼얼해지는 기분에 아델이 눈을 찡그렸다.

조금은 거친 입맞춤이었다. 타액이 섞이고 뜨거운 숨결이 맞닿아 정신을 아득하게 했다. 입천장을 훑고 치열을 가볍게 두드리며 지나가는 입술에 그녀가 정신을 반쯤 놓을 듯해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그녀를 침대 위로 살짝 밀었다. 밀쳐진 그녀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무너진 몸을 버티고자 그의 왼쪽 무릎에 손을 대는 순간 헥시온의 웃음이 짙어졌다. 어쩐지 계속 손을 대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오싹한 감각에 그녀가 슬쩍 손을 떼자 그가 빙긋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델.”

“네?”

“이제부터 뭘 할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짐짓 서운하다는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짙게 섞여 있었다. 약간 당황한 터라 곧장 대답하지 못한 아델은 입만 뻐끔거리다가 눈을 끔뻑거렸다.

“어서요, 아델.”

그가 재촉했다.

몇 번을 보고 몇 번을 경험해도 썩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다. 아델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단추를 풀었다. 마치 그것이 허락이 되었다는 듯, 그가 고삐 풀린 짐승처럼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 * *

지독한 정사의 감각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허리가 제법 아팠다. 아이들이 태어나고선 사실 거의 관계를 맺지 않았다. 아델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달려든 것도 오랜만이지.’

사실 갑자기 헥시온이 이렇게 일을 한 것도 신기하긴 했다. 보통은 의사를 묻곤 했으니까. 헥시온이 자신을 품에 끌어안은 채 귓가에 와닿는 느낌이 적나라했다. 멍하니 그의 상체를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헥시온.”

“네.”

“혹시 비프타 공작가 사람들, 뭐 하고 지내는지 알아요?”

아델의 물음에 헥시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그녀의 등허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한참이나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건 왜 묻나요? 아델.”

그가 나직하게 되물었다. 헥시온의 목소리의 온도가 조금 낮아진 듯도 했다.

“이제, 잊을 때도 된 것 같아서요.”

“지금껏 잘 잊고 계셨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 과거를, 그 기억을, 사과를 강하게 내치던 순간을, 문득문득 아이들을 품에 안을 때마다 떠오르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죽일 것을요.”

“그러지 마요.”

헥시온은 기분이 퍽 나빠진 듯 한참이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을 유지하는 그를 아델은 더 닦달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가 대답하지 못한다고 말해 주지 않는 이상, 언제나 답을 준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헥시온은 긴 침묵 끝에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을 이기는 건 언제나 어렵네요.”

품 안에 아델을 끌어안은 헥시온이 썩 내키지 않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대충 이야기는 알고 있습니다. 다들 그저 여기저기 떠도는 모양이지만요.”

“……그래요?”

“흠. 최근 공작 부인이 뭔가 준비하는 것 같긴 하더군요.”

헥시온이 아델의 목덜미를 가볍게 깨물며 말했다.

‘공작 부인이?’

살포시 닿았다가 떨어진 입술이 마치 깃털 같아서 조금 간지러웠다. 아델이 웃음을 터뜨렸다가 잠시 몸을 움츠렸다. 눈웃음을 치는 헥시온의 시선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공작 부인이 뭘 준비하는데요?”

“생각보다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수완이요……?”

“상황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이혼이라곤 하지만, 귀족가에서 이혼한 여인이 어떤 존재인진 아델도 잘 아시겠지요.”

헥시온의 말에 아델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15년이 지난 지금은 많이 괜찮아진 수준이었다. 그러나 15년 전만 해도 거의 죄인과 다를 바 없는 취급이긴 했다.

“친가가 거의 지원을 안 해 주었던 건 아시지요?”

“네.”

“제국을 떠나 해외를 몇 번 다녀오더니 무언가를 수입해 들여와선 그걸 제국에 유통하고 있습니다.”

“……유통이요?”

전혀 듣지 못했던 이야기다. 굳이 알아보지도 않았기도 했고 거의 10년 동안은 거의 유적을 찾아 밖을 떠돌아다니기도 했고 말이다.

“네, 사업 쪽으로 제법 수완이 있었는지 유통업을 하더니 이제는 작은 상단을 준비하는 듯하더군요.”

“상단이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아델의 눈이 커졌다. 어느새 등을 돌린 그녀의 날개뼈 위에 입을 맞춘 헥시온이 느리게 숨을 뱉었다.

“네, 콰른 비프타는 글쎄요.”

아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 이름은 여전히 그녀의 좋지 못한 곳을 찔러댔다. 공포나 두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긴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니 겁에 질려 사과를 해 왔던 콰른 비프타의 어린 낯이 떠오를 뿐이다.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것이 가족이었으니 그것을 뿔뿔이 흩어지게 해 빼앗은 것으로 만족했었다. 그러나 십 년이 훌쩍 넘은 시간이 지나 가족을 가지게 되니 조금씩 생각이 났다.

‘과했다곤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평생 고통스럽길 바랐던 것도, 아마 아닐 것이다. 그저 처음에는 고통스럽게 방황하겠지만 언젠가는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그들 나름대로 그들의 삶을 살기를 바랐다.

“마지막으로 소식을 들은 것은 몬스터 토벌팀에 들어갔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몬스터, 토벌이요?”

“네, 현상금 사냥꾼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답다면 참 그다운 직업이었다. 등을 돌리고 누운 그녀의 몸을 빙글 돌린 헥시온이 눈매를 둥글게 휘었다.

“공작은…….”

“아델, 기억이 잘 안 납니다.”

“네?”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줄줄 읊조렸으면서 이게 무슨 소리야? 아델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자 헥시온이 전매특허라도 낸 듯한 축 처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민간요법에 머리를 때리면 기억이 난다고 하던데요.”

“……서운합니다.”

“네, 서운하셔도 어쩔 수 없어요.”

“과격하시고.”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니까요?”

아델의 말에 헥시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툭 튀어나온 입술을 보고 있으려니 토라진 제 아들, 에덴이 생각났다.

‘에덴은 정말 헥시온 판박이인 것 같은데.’

약간 여우같이 요망한 것도 그렇고 표정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것도 말이다.

“뭘 원하는데요.”

아델이 한숨을 푹 내쉬며 졌다는 듯 반문했다. 헥시온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확 밝아졌다.

“아델의 적극적인 키스면 될 것 같습니다.”

“……네?”

“아니면 아델이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제게 멋진 고백을 해 줬으면 좋겠어요.”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약간, 어리광이 생긴 것 같은데.

아이들 생기고 난 뒤로 사랑한단 말을 해 달라고 조를 때도 많아졌다.

사실 해 주지 못할 만한 건 아니었지만, 조금 민망했다. 헥시온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미 인정했지만 그래도…….

‘매번 부끄럽단 말이지.’

이런 부끄러운 말을 헥시온은 어떻게 매일매일 하는지 모르겠다.

아델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등으로 두어 번 꾹꾹 눌렀다. 기대감에 찬 헥시온의 얼굴을 보면 아무래도 이길 재간이 없다.

“……조만간, 해 줄게요.”

아델이 나직하게 말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헥시온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에 대해서는 저도 소식을 들은 게 거의 없습니다. 몇 년 전에 들은 얘기로는 그야말로 정처 없이 떠돌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정처 없이요?”

“네, 듣자 하니 빈민가를 둘러보고 있다고.”

아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속죄라도 할 셈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라도 있는지 미묘한 불쾌감이 치고 올랐다.

“속죄라도 하고 있대요?”

“그건 잘 모릅니다. 저도 굳이 그들에 대해서 알아보려 하지 않아서.”

“……그래요.”

“타국에 있는 이들이라 알아보려고 한다면 품이 많이 들어서요.”

그가 느리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굳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뭔가요, 아델. 그들에게 다시 작위라도 주길 바라나요?”

목소리가 다정하지만 미묘하게 서늘했다. 아델이 설핏 미간을 찌푸리곤 고개를 저었다. 단언컨대 그것은 아니다. 다만, 딱 한 가지만 걸렸을 뿐이다.

“추방형을 거뒀으면 좋겠다는 것뿐이에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어요. 이제, 그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미약한 죄책감을 가지고 살고 싶지도 않아요.”

그들이 그렇게 떠돌며 지낸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언제나 아델의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을 잊지 못하고 종종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제 그것조차 질릴 때가 되었다.

아델은 잊고 싶었다. 완전히 지우고 더는 죄책감이나 미련조차 가지고 싶지 않았다.

“해 줄 수 있어요?”

“아델이 바란다면 못할 건 없습니다. 평생 작위를 가질 수 없는 평민이겠지만요.”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았으면 했다. 헥시온이 가느다랗게 뜬 눈을 이내 미소로 감춰 보였다.

“아델.”

“네?”

“사랑합니다.”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저녁 시간도 훌쩍 지난 밤이었다.

똑똑.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델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헥시온이 비스듬히 몸을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뭐지?”

“아, 아버지! 어머니…….”

두 사람이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치 자고 시푼데, 드러가도 대여?”

“시린도요!”

“마린도…….”

아주 다 같이 몰려온 모양이다. 바닥에 대충 던져져 흐트러진 옷을 주워 빠르게 입으며 아델이 입을 열었다.

“자, 잠깐만 기다리렴!”

창문을 활짝 열어 혹시 모를 정사의 냄새를 날려 보낸 그녀가 거울을 훑곤 문을 열었다.

“아델, 불편하실 텐데 일단 욕실에 잠시 다녀오세요.”

헥시온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문이 활짝 열리자 세 명의 아이가 쪼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 아버지. 같이…… 자도 댈까요?”

“시린 무선 꿈 껐서여.”

“마링두여!”

아무리 침대가 넓디넓다곤 해도 다섯 명이 넉넉하게 잘 수 있는 사이즈는 아니었다. 헥시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는 수 없지, 같이 자자.”

아델이 두 팔을 벌려 다리에 엉겨 붙는 아이들을 침대로 이끌었다. 헥시온이 가볍게 아이들을 침대 위로 올려 주는 사이 아델이 잠시 욕실을 들렀다 나왔다. 욕실을 나오니 헥시온이 언제 가져왔는지 동화책을 꺼내 아이들 사이에서 서툴게 이야기를 읽어 주고 있었다.

“어머니가 오셨으니 얼른 잠을 자야겠습니다.”

“하지만, 다음에 이야기가 궁금함미다!”

에덴이 불만을 토했다. 두 팔을 위아래로 흔들며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에 아델이 웃음을 삼켰다. 에덴이 그러자 시린과 마린도 마찬가지로 똑같이 제 오빠를 따라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아델이 헥시온의 손에서 가볍게 책을 빼앗아 접으며 빙긋 웃었다.

“내일 또 자기 전에 읽어 줄게. 오늘은 코오 해야지.”

“우우…….”

세 아이가 입술을 댓발 내밀었다. 그 귀여운 모습에 아델이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들을 사이에 두고 침대에 누웠다. 넓은 침대에 아이 셋이 쪼르르 누워 버리니 아델과 헥시온은 침대의 양 끝에 간당간당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괜찮아요. 잘 자렴, 에덴, 시린, 마린.”

한 명씩 이마에 입을 맞춰 주자 아이들이 배시시 웃으며 하나둘 눈을 감기 시작했다.

이윽고 방에는 색색거리는 숨소리 세 개가 들려왔다. 머지않아 또 하나의 숨소리가 들려오고 마지막으로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마지막으로 방엔 늦은 밤이 내려앉았다.

* * *

“아저씨, 머리 색 되게 예쁘네요.”

빈민가에 발을 들이자 어디선가 입에 발린 칭찬과 함께 빈민가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밀런은 무심한 눈으로 아이들을 훑다가 가져온 음식이 담긴 자루를 내려두었다.

“와아! 빵이다!”

“아저씨는 돈이 많아요?”

“글쎄, 어때 보이지?”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음, 몰라요. 하지만 이 근처 빈민가 돌면서 맨날 음식 나눠 주죠? 그러면 돈이 많은 건가?”

5년 정도는 아무런 생각 없이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았고 5년은 웬 도박 중독 노인에게 강제로 끌려다니며 빈민가를 떠돌았다. 근 5년은 쓸데없이 남겨 준 노인의 푼돈으로 저렴한 음식을 사서 빈민가에 한 번씩 뿌리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면 그런 거겠지.”

“근데 왜 나눠 줘요?”

“글쎄, 빈민가에서 먹는 빵은 어떤 맛인지 궁금했거든.”

그가 자루에서 빵을 하나 꺼내 손으로 뜯어 입에 넣었다. 밀가루 냄새가 나는 빵은 썩 맛있지 않았다. 딱딱하고 냄새가 났다.

빈민가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씻지도 못한 이들에게선 냄새가 났고 불쾌감에 속이 울렁거렸던 적도 있었다. 지금에서야 아무렇지도 않게 빵을 뜯어 먹을 정도가 되었지만.

“……와, 그게 뭐예요.”

“글쎄, 뭘 것 같으냐.”

“아저씨 거지면서 뭔가 귀족 아저씨 말투 같다.”

키득거리는 아이들의 말에는 가감이 없었다. 그가 키웠던 아이들과는 제법 달랐다. 따지고 보면 자유분방했던 것은 콰른 비프타, 그 아이뿐이었다. 그나마도 집을 벗어나서나 자유로웠지.

“아저씨는 결혼 안 했어요?”

“했었지.”

“정말요? 거지인데 결혼을 해요? 아, 근데 잘생겼으니까 괜찮을지도 모르겠어요!”

밀런이 미간을 좁혔다. 더는 비프타 공작이 아니게 된 그가 이런 길거리 생활을 한 지 제법 시간이 흘렀다. 처음에는 밖에서 자는 것이 썩 익숙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디에서든 눈을 감는 건 어렵지 않았다. 추방된 후 종종 암살자들이 오는 것만 제외한다면, 썩 나쁜 삶이라곤 할 수 없었다.

“자식도 있어요?”

옹기종기 모인 꾀죄죄한 아이들에게서 질문이 우수수 쏟아졌다. 밀런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4명, 있었지.”

“다 어디 갔어요?”

“한 명은 죽었고 두 명은 떠났고, 또 한 명에겐…….”

그가 느리게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죽은 카레나와 펠리스와 콰른을 비롯해서 긴 시간 망막에 박힌 것처럼 떠오르는 아이가 있었다. 사실 자식이라고 칭한다고 해도 그쪽이 지독하게도 싫어할 것 같지만 말이다.

“버림받았다. 잘못을 많이 했거든.”

“사과는 했어요?”

“아니, 앞으로도 할 생각은 없다.”

사과란 다른 말로는 가해자의 면죄부와 마찬가지였다. 밀런은 다시 한번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자신이 똑같은 길을 선택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아이를 이용할 것이고 제가 끌어안은 가족을 지키려고 할 것이다.

그때는 형태가 조금 달라져 조금 더 소중하게 여겨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으니 용서를 구하는 것조차 제겐 사치였다.

‘아니, 이런 짓을 하는 게 속죄라도 되는 건가?’

스스로의 죄책감을 덜고 싶다는 것에서 나오는 이상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쓸데없는 기부 행위는.

“나도 매일매일 이런 빵 먹고 싶다아…….”

행복하다는 듯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긴 빵을 하나씩 들고 우걱우걱 먹는 아이들을 보다가 밀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뻑뻑한 빵을 자리에 앉아 다 해치운 그가 입을 열었다.

“다시 돈을 벌러 가야 하니, 나중에 또 가져오도록 하지.”

“정말요?”

“그래.”

“근데 돈은 어떻게 벌어요? 나도 돈 많이 벌고 싶다. 아저씨처럼 맨날맨날 이런 빵을 먹을 수 있겠죠?”

“맞아! 돈 버는 방법이 따로 있어요?”

밀런은 비어 버린 자루를 작게 접어 허리춤에 밀어 넣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허리춤에 매인 녹슨 검이 덜렁거렸다.

“도박을 했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몸을 돌린 밀런은 벙찐 아이들을 두고 순식간에 빈민가 소굴을 빠져나갔다.

그가 안주머니에 넣어 둔 지갑을 꺼냈다. 낡은 가죽 주머니엔 금화가 제법 묵직하게 들어 있었다.

‘슬슬 도시로 갈 때가 됐군.’

이 정도 남았을 때 도박장에서 다시 한번 돈을 불려야 한동안 여행을 다시 할 수 있었다. 그가 생각을 정리하며 다음 도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지배인니이이임!! 그 사람이 왔다고 합니다.”

“뭐?! 설마…… 사신?”

혼비백산해서 달려온 이의 모습에 지배인이 후다닥 뛰어나갔다. 화려한 카지노 앞에서 다른 종업원들의 안내를 받고 있는 상대적으로 허름한 차림새의 사내를 보며 지배인이 혀를 내둘렀다.

“사신이 누군데요?”

“1년에 한 번 불쑥 나타나서 며칠 동안 몇만 금화를 쓸어간다는 그…….”

밀런이 가볍게 안으로 들어와 눈에 익은 게임에 참여했다. 앉아서 겨우 몇 번의 게임 만에 순식간에 금화를 모은 밀런의 모습에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또각또각.

다음 게임을 위해 코인을 던져 넣던 밀런이 뚝 움직임을 멈췄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옮기더니 이윽고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이번 판은 죽은 걸로 하지.”

지금껏 모은 금화의 반 이상을 털어 넣었으면서 그는 깔끔하게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작은 구두굽 소리를 내며 유령처럼 다가왔던 귀부인과 함께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사신의 모습에 모두가 웅성거렸다.

밖으로 나온 밀런이 적당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땅히 갈 곳이 없다는 걸 깨달은 뒤엔 길거리에 잠시 멈춰야 했지만. 그는 집도 없었고 현재 머무는 여관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찻집에 가자니 제 차림새가 그런 곳에 들어갈 정도로 썩 멋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난감한 상황에 밀런은 미간을 좁혔다.

“계속 세워 둘 건가요?”

소프라노 톤의, 조금은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민 끝에 그가 근처 찻집에 발을 들였다. 고급스럽지 못한 찻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별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이네요.”

“……그렇군.”

마지막으로 헤어질 땐 여러 차례의 사과와 함께 조용히 제국을 떠난 것이 전부였다.

거의 15년만의 재회였다.

“잘, 지냈나?”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하죠. 우린 지금 아무 관계도 아니잖아요.”

처음 만났을 때라고 해도 벌써 30년이 훌쩍 넘은 과거의 이야기였다. 민망한 느낌에 밀런이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흩뜨렸다.

“잘 지내셨습니까, 영애.”

“글쎄요, 썩 좋진 않았는데요.”

“…….”

“당신이 도박장에서 나오는 모습도 보고 빈민가를 떠도는 모습도 보다니 놀랍군요.”

무표정한 얼굴로 말한 그녀가 찻잔을 기울였다. 밀런이 입을 다물곤 물끄러미 제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연이 닿은 노인에게 쓸데없는 걸 배워서 말입니다.”

간단한 의술이나 도박 기술 같은 걸 배웠다고 덧붙인 밀런은 또다시 내려앉은 침묵에 입을 다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난 우리 애들 이렇게 평생 떠돌게 하고 싶지 않아요.”

“…….”

“당신이 한 짓을 생각하면 꼴도 보기 싫었지만, 콰른과 펠리스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잠이 벌떡 깨요.”

“이해합니다.”

밀런의 말에 그녀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미지근한 찻물을 그에게 뿌렸다.

“그런 사람이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애들을 그렇게 상처 줘서 떠나보내고 즐거웠냐고요!”

“……세실리아.”

“십 년이 넘도록 어떻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을 수가 있어!”

헉헉 숨을 몰아쉬며 소리를 내지른 그녀의 볼을 타고 눈물이 뚝 떨어졌다. 헤어지고 떠나는 날조차 표독스럽게 굴던 그녀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밀런은 적잖이 당황해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소식은 종종 듣고 있었소. 잘 지내는 것 같아서 굳이…….”

“평생 죗값을 치르겠다고 떠도는 애들이? 애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데! 잘못은 당신이 했잖아! 당신이……, 당신이 지은 죄면서…….”

밀런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었다. 그의 죄를 알기에 차마 가족 누구에게도 찾아갈 염치가 없었으니까. 연락을 해 보고자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떠나 놓고, 어떻게…… 편지 한 통을 안 보낼 수가 있어요.”

“당신이 날 보면, 싫어할 것 같아서…….”

종종 편지를 기다렸지만, 십 년이 넘도록 편지 한 통이 오지 않았다.

“내가 미쳤지, 이런 답답한 인간을 찾아와서 뭘 하겠다고. 당신은 평생 이렇게 길거리나 헤매며 살아요.”

“……미안합니다, 세실리아.”

분에 못 이겨 벌떡 일어난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킨 밀런이 그녀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당신, 우리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런 거 알아요?”

“……기억합니다. 내가 거만하고 오만하다고 결혼하지 않겠다고 싫어하셨었죠.”

“그리고 똑같이 떠나려는 날 붙잡고 사과했죠.”

밀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양산을 들고 성큼성큼 찻집을 나섰다. 밀런이 멍하니 있다가 값을 지불하고 그 뒤를 쫓았다.

“난 상단을 만들 거예요.”

“상단……?”

“준비는 다 했어요. 콰른이랑 펠리스만 찾으면 돼요.”

“……그렇군요.”

밀런이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좋다고 해야 할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이유를 대야하는 걸까.

“그리고 황제에게서 얼마 전에 전보가 왔더군요.”

그녀가 전하는 말에 그의 눈동자가 설핏 찡그려졌다.

“전보?”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1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자리에서 떠나 있었으면서도 그 특유의 분위기는 많이 사라지지 않은 듯 보였다.

“이제 와서 보복이라도 하겠다고 합니까?”

“추방령을 거둬들일 테니 다시는 그 아이 눈에 띄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녀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시간이 흐른 만큼 그녀의 얼굴에도 숨길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있었다.

“……추방령을 거두겠다니 갑자기 이유가 뭐라고 하던가요.”

“완전히 잊고 싶어 한다더군요.”

“아…….”

그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솔직히 말해서 밀런은 한 번도 자신이 했던 일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아이를 입양하고 대역을 세우고 가족을 지키려고 했다. 가문을 보호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과는 다르게 그는 지난 15년간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후회했다. 제 자식들처럼, 아이를 대해 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

긴 시간 빈민가를 떠돈 이유는 어렸던 그 아이의 치열한 삶을 느껴 보고 싶어서였다. 빈민가의 아이들은 더러웠지만, 생각보다 밝았고 생각보다 조금 더 호전적이며 생각보다 더 속물적이었다.

걸어 온 싸움은 피하는 법이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삶이었다. 한 번 걸어 오는 싸움에서 밀리면 영역 다툼에서도 밀린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아델은 무척 얌전하고 조용한 아이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처음 데리고 왔을 때는 어찌나 사나웠는지 몰랐다. 그런 본능과도 같은 성격을 다 죽여 가며 그 아이는 곁에 남아 있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자존심이 상했다. 제가 뿌린 씨에, 제가 저지른 실수임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화가 났다. 뒤늦게 깨달아 봐야 당연하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차라리 솔직히 세실리아에게 말했으면, 제 사생아에게 조금 더 다정하게 굴었으면, 카레나를 조금만 더 빨리 잊을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그 역시 사람인지라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이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에 밖에 있던 자식을 데리고 와야 할 정도로 급했다. 그 모든 것들이 너무 한순간에 벌어져서, 감정이 뒤섞이고 뒤섞여 결국 이런 사태를 만들어냈다.

“난 당신 용서하지 못했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한테 평생 미안해하면서 살아요.”

“…….”

“내 아이들을 찾아야겠어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딱한 표정에 차가운 눈빛이었지만, 그녀가 원하는 말을 밀런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러겠습니다. 세실리아.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세요.”

그가 그녀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몸을 일으켰다.

* * *

문득 바람이 불었다. 꽃향기가 물씬 풍겨 오고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눅눅하면서도 미묘하게 버석한 공기가 뺨을 스쳤다.

오랜만에 혼자서 하는 외출이었다. 아델은 골목길 한편에 마련된 꽃집에 시선을 두었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아주 어릴 때 이 앞을 뛰어나갔던 적이 있었다. 그때도 향긋한 꽃향기에 시선을 빼앗겼었다. 간헐적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모자를 가볍게 꾹 누르고 꽃집에 다가가자 화사한 낯의 여자가 활짝 웃었다.

“어서 오세요, 어떤 꽃을 찾으시나요? 어떤 분께 어떤 마음을 전하고 싶은지 말씀해 주시면 추천해 드릴게요.”

“음, 줄 사람은 남편이에요. 그리고, 날이 좋아서 고백을 하려고요.”

아델의 말에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한층 말간 낯으로 손뼉을 짝 쳤다. 그러더니 이내 그녀에게 환히 웃어 보였다.

“그런 꽃이라면 제가 예쁘게 꾸며드릴 수 있어요. 멋지시네요.”

꽃집 주인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그녀에게 풍성한 꽃다발을 하나 만들어 내밀었다. 색지로 감싼 꽃다발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연이어 보석가게에 들르고 옷가게에 들렀다가 이번에는 향수 가게에 발을 디뎠다. 아이들의 옷이 생각나서 하나 구매하고 헥시온의 옷을 사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제 옷도 하나 샀다.

아이들이 없는 조용한 하루는 기분이 이상했다. 늘 아이들과 헥시온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니까.

‘익숙하지 않네.’

생각하던 아델이 걸음을 뚝 멈췄다. 이런 조용한 시간이 익숙하지 않다니 뭔가 이상했다. 아델은 빈민가를 떠나온 그때부터 아마도 15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적막 속에서 살았다. 살얼음판 위를 걸었고 언제 그 살얼음판이 깨질지 몰라 항상 두려움에 떨며 살았다.

그러나 불행했던 것보다도 더 많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을 때도 되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웃을 일밖에 없고 행복한 일밖에 없고 즐거울 일밖에 없었다.

-잊을 때가 됐잖아.

누군가 그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그녀는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수를 했다. 헥시온의 힘을 빌어 그들을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고 노예로 만들어 평생 불행하게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비참하게 만들자면 수십 가지의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답답하고 멍청한 이라고 할지라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누군가를 지옥에 몰아넣고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은 뒤에 웃으며 멀쩡히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끔찍한 불행과 지옥으로 몰아넣은 뒤에 스스로는 청렴하고 결백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델은 아이들의 앞에서 조금이라도 더 당당해지고 싶은 사람이었다. 주먹질을 해서 체통 없다 여겨지더라도 스스로에게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원하고 지키려 했던 것을 빼앗았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없애고 뿔뿔이 흩어 보냈다. 그러나 그 모습이 그녀를 아주 조금 청렴하지 못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짐처럼 무겁게 남았다. 사람의 고통에 어떻게 무게를 다룰 수 있겠냐마는,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잃고 그녀가 불행했던 세월만큼이나 괴로워했다.

아델은, 이제 놓기로 했다. 작은 미련도 약간의 가책도 물이 담긴 커다란 쟁반에 떨어진 잉크 한 방울까지.

이제는 잊어도 되는 것이다.

카레나로 살아온 시간보다 아델로 살아온 시간이 훨씬 더 많아졌다.

지금이 가장 적기였다.

오늘 하루 그녀는 참으로 서툰 준비를 했다. 직접 나와 선물을 고르고 선물을 사고 아이들의 옷을 직접 샀다. 그리고 난생처음 꽃다발을 사 보았다. 이걸 지금 가장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아델은 마차 가득 선물과 꽃다발을 챙겼다. 아이들에게도 줄 꽃 한 송이도 예쁘게 포장했다.

소중했다. 지금 가진 것들이 너무 소중해서 과거의 상처가 이제 아주 옅은 흉으로만 남았다.

이 흉터가, 사라지는 일은 아마 평생 없겠지만…….

종종 떠오를 것이고 종종 자신을 아프게 할 것이고 문득 지나가는 행복한 가족을 보면 스스로의 어린 시절이 떠오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에겐 우울해할 때 달래 줄 사람이 있었다. 걱정하고 울먹여줄 아이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과거를 떠올리지 않아도 될 소중한 가족이 생겼다.

유적을 떠돌고 밤의 세계에, 풀헤임 숲에 발을 디뎠던 것은 아직도 꿈만 같았다. 그것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잔상이 되어 괴로운 과거보단 조금 더 즐거운 과거를 떠올릴 수 있게 된 만큼, 언젠가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과거가 떠오르지 않을 날도 올지 몰랐다.

평생 용서하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는 큰 짐이 될 것이다. 하나의 거스러미가 될 것이고 종종 그들이 선택을 망설이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공작가에 대한 것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녀는 행복해졌고 그들은 다시 원래의 삶을 되찾으면서도 불편할 것이다. 그녀는 그들의 마음속 한곳에 남을 평생의 거스러미로 충분했다.

마차가 멈췄다. 본성 바로 앞에 멈춘 마차에서 내리자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왔다.

“어머니이이!!”

“어마니!”

“……아마니!”

마린은 시린과 수 분 차이로 태어났는데 이상하게도 막내의 면모가 강했다. 시린의 말투를 따라하는 아이를 보다가 달려온 세 아이를 품에 끌어안았다.

“왜 여기에 나와 있어?”

“아버지가 어머니 데리고 멀리 간대여……. 아니지여?”

에덴의 말에 아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흐어어엉, 어마니 시러여…….”

“시러어…….”

아이들이 그녀의 드레스 자락에 하나둘 몰려들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했다. 울먹울먹한 에덴의 얼굴에도 눈물이 가득했다. 그녀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뒤따라 나온 헥시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중의 이야기를 한 것뿐입니다, 아델. 앞으로 10년 뒤의 이야기예요.”

“아…….”

“에덴은…… 아니, 저는…… 50년 뒤에도 어머니랑 살 검미다……!”

“시린도 오라버니랑 가씀다!”

“마린도 가씀다!”

아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그녀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헥시온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어지럽고 정신도 없는 상황인데, 이상하게 지금이 딱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델은 조금 허둥지둥 마차에서 꽃다발을 꺼냈다. 그녀가 헥시온의 코앞에 꽃다발을 내밀었다. 훅 스며든 꽃향기와 시야를 가린 화사한 꽃에 헥시온의 눈이 크게 뜨였다.

“……좋아해요, 헥시온. 헥시온이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아주……, 많이요.”

십 년이 넘게 살고 아이까지 낳았는데도 왜 이렇게 볼이 붉어지는지 모를 일이다. 그녀는 서툴게 입을 열었다. 상대의 표정은 보이지도 않았다.

“나랑……, 앞으로도 계속 살아 줄 거죠?”

“아델…….”

그의 목소리가 잔뜩 낮아졌다.

“당연한 소리는 마십시오.”

그가 눈 깜빡할 사이에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이들이 아래에서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버둥거렸다.

“어머니 잡아먹찌 마여!!”

“어마니, 안 대!”

“앙 대!”

셋이 힘을 모아 드레스 자락을 붙잡아 당기며 그녀를 끌어내려는 모습을 본 헥시온이 살짝 굳어 멈췄다.

헥시온이 물러나자 이번에는 왜 우리 꽃은 없냐며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아델이 안에서 꽃 한 송이를 꺼내 아이들에게 하나씩 쥐여 주었다.

“……십 년 안에 반드시 나갈 겁니다.”

웅얼거리듯 불만을 토하는 헥시온의 등을 토닥이며 아델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헥시온의 눈이 크게 뜨였다.

“봐주세요.”

“…….”

헥시온의 팔에 힘줄이 돋았다. 그가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사랑합니다, 아델.”

속삭이는 목소리는 15년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설핏 웃었다.

행복했다. 그저, 이 순간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이 잊을 때였다. 그들의 값어치가 0이 되는 순간이었다. 부채감도 미약한 죄책감도 전부 없앤 채로. 아델은 웃으며 아이들을 품에 안았다.

그녀는 행복했다. 무슨 짓을 해도 버리지 않을 사람을 찾아 둥지를 틀었다. 이곳에서만큼은 그녀가 주인공이 아니어도 불안하지 않았다. 아델은 제 품에 안긴 아이들을 한껏 끌어안았다. 앞으로 나아갈 미래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이 행복을 위해 그 길을 걸어온 것이라면 어쩌면 다시 그 길을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이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따스한 노을이 내려앉는 오후였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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