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de Story
헥시온이 에테르노 제국의 정식 황제가 된 후, 8년이 흘렀다. 그 말은 즉, 아델이 황후가 된 지도 8년의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그사이 해결할 일이 산더미였기에 즉위 후 3년간은 거의 잠도 자지 않고 일했다.
헥시온이 황제가 된 후 제국은 천천히 안정되어 갔다. 태평성대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헥시온의 통치를 칭찬했다.
썩어 있던 것들을 전부 도려내고 그곳을 보수해 깨끗한 것을 들이붓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헥시온에겐 아델이 있었고 어쨌든 두 사람에겐 진도 있었다.
그렇게 8년, 세상은 평화로운 듯 또 새로운 사태에 직면하고 있었다. 아델이 유일무이한 황후가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고고학자로서의 활동이었다. 덕분에 황제와 황후는 붙어 있는 시간보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더 많게 됐다.
그 탓인지 종종 황제와 황후가 이혼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우스갯소리로 자주 들려오곤 했다. 최전선에서 활약한 덕분에 지금껏 잠들어 있던 각종 고대의 기록들이 하나둘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국민도 처음에는 유물 탐사를 그저 흥미롭게만 생각했으나 황후인 아델이 우연히 유적에서 거대한 황금의 산을 발견하면서 너도나도 유물 탐사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황금기의 시작이었다.
어떤 먼 나라에는 해적들이 날뛰며 해적왕이 보물을 찾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나라엔 지하 세계가 존재하고 지하 세계의 왕이 있었던 암흑기가 있었던 것처럼, 고대의 기록을 따라 탐험하는 탐험가들과 함께 황금기가 시작된 것이다.
바엘로 인해 숨겨졌던 고대 유물 중엔 황금과 보물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오는 특수한 유물의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그 와중에 속속들이 고고학자들의 해독에 의해 ‘고대의 유적’이라는 곳이 발굴되기 시작했다. 그 안을 탐사하면서 얻는 보물들은 그 값어치를 따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고고학자와 탐험가를 비롯한 모험가가 생겨났다.
파티를 짜고 유적 탐사에 나서는 이들이 생기는가 하면, 그런 것들로 사람을 현혹해서 각종 범죄가 판을 치기 시작했다. 때문에 그에 관한 법률도 늘어서 한동안 헥시온과 진이 골머리를 썩어야 했다.
“안 됩니다.”
“이렇게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할 건 또 뭐예요, 헥시온?”
“이제 겨우 저번 탐사에서 돌아오셔서 딱 반년 같이 있었는데 또 어딜 가시겠다는 겁니까? 이러다 정말 외로움에 지쳐 죽겠습니다.”
헥시온이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약한 소리를 뱉었다. 긴 머리카락이 아델의 옆으로 사르르 쏟아져 내렸다. 나이가 들면서 늙어 간다는 느낌이 거의 없는 헥시온은 아델의 잦은 행방불명에 이제는 반백 년 묵은 능구렁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반년이나 같이 있었던 거죠. 저번 탐사에서도 겨우 3개월 만에 돌아왔잖아요. 솔직히 엄격히 따지면 9개월째예요.”
“자꾸 이러시면 제가 서럽습니다, 아델.”
곧이라도 울 것 같은 촉촉이 젖은 시선으로 제 다리 위에 올라탄 사내를 보며 아델이 입을 꾹 다물었다. 몇 번이나 당해도 자꾸만 당한다. 매번 새로워지기 때문인 건지. 쿡쿡 죄책감을 찔러 대는 애처로운 눈빛에 아델이 입만 뻐끔거렸다.
헥시온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움직일 수 있을 때 많은 것을 해 두고 싶었다. 이제 슬슬 여기저기서 후계자에 대한 압박이 들어오고 있다.
주변의 걱정이 많아지고 헥시온을 위해서라도 아이가 있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한동안 이곳에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나이가 들고 힘이 빠져 버리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날도 시간도 줄어들 테고.
‘……외롭게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헥시온을 사랑하는 만큼 지금껏 하지 못한 수많은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크다. 반대로 헥시온은 위치가 위치이니 움직일 수 없는 처지였다. 한 번 움직이는 데 수많은 사람이 쫓아오니 그로서도 내키지 않으리라.
그러다 보니 헥시온은 자꾸만 떠나는 아델 덕분에 그녀를 자극하는 수많은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헥시온이 아델의 품에 무너져 내리며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1년에 한 달도 얼굴을 보기 힘들 테니까. 그렇다고 그녀가 책무를 다하진 않는 건 아니었다. 밖에 나가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은 전부 해내곤 한다.
“유적 규모로 봐서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아요. 2주 정도면 될 텐데, 금방 돌아올게요.”
“저번에도 그렇게 말씀하시곤 넉 달이 넘게 걸렸습니다.”
헥시온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한 달이 걸린다고 한 유적 탐사를 무려 5개월을 조금 못 채우고야 돌아왔다. 유적 탐사를 시작하면 기본적으로 탐사대와 유적지에서 지내거나 유적 안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곤 한다.
사고가 나는 일도 적은 것은 아니라서 그렇게 연락이 끊길 때면 헥시온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런 것을 아델에게 굳이 알리진 않고 있지만…….
‘그만두라고 해도 그만두진 않겠지.’
위험한 일을 그만두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걸 볼 때마다 그녀를 힘주어 붙잡고 싶은 손이 풀리기도 한다.
“고고학자와 탐험가가 근래 들어 최고의 직업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그렇죠.”
“덕분에 관련 산업도 발전하고 있죠. 이미 수많은 모험가가 길거리에 널렸는데 왜 굳이 아델이 그런 위험한 유적에 가겠다는 건지요?”
“기분이 좋아요. 아무도 가 본 적 없는 곳에 제가 첫발을 디딘다는 게요. 그러니까 부탁할게요.”
아델이 두 손을 모았다. 헥시온의 얼굴에 순식간에 불만스러움이 드리웠다. 결혼을 했지만, 침대의 옆자리는 차 있을 때보다 비어 있을 때가 더 많다.
“오늘 하룻밤, 제게 괴롭힘을 당하겠다고 약속하시면요.”
“……네?”
“피곤한 아델을 배려해서 한동안 하지 않았는데…….”
헥시온이 느리게 제 옷의 단추를 풀고 상의를 벗었다. 순식간에 드러난 흉터가 짙은 몸을 보며 아델이 놀란 듯 파드득 어깨를 떨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떠나겠다고 하시는 걸 보니 내가 잘못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헥……시온……?”
“앞으로 최소 2주간 독수공방하게 될 저와 아델의 몸을 위해서 쌓인 욕정은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헥시온이 가벼운 손놀림으로 아델의 원피스를 풀어내며 말했다. 헥시온의 손에 붙잡힌 아델은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괜찮긴요. 벌써부터 기대감에 젖어 계시는 것을요.”
헥시온의 손가락이 그녀의 허벅지를 손톱을 세워 살짝 긁어내렸다. 그의 손길에 아델이 숨을 들이켰다. 번뜩이는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읏…….”
아델이 숨을 훅 들이켰다.
순간, 눈앞이 휘청거렸다. 오랜만에 자극에 몸이 절로 떨린다. 쾌락에 조금씩 흐려지는 아델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헥시온이 허리를 숙여 입을 맞췄다.
‘마음 같아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해 버리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순간, 자신은 그녀를 억압했던 공작과 다를 것이 없어진다. 그녀의 끔찍한 삶을 또 되새기게 할 수 없었다.
이제야 살고 싶다고, 사람답게 살고 있는 사람이다. 이토록 밝게 웃고 빛나는 그녀를 본 적이 없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헥시온은 제 욕망을 짓밟았다. 썩어 문드러지는 제 외로움을 불태웠다. 그럼에도 종종 싸늘하게 식어 그녀를 붙잡아 가둬 두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치밀곤 했다.
“아델,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헥시온이 그녀의 혀를 빼물며 이를 세워 강하게 씹었다. 미간을 찌푸릴 정도로 아릿한 통증에 아델의 입술에서도 통증 섞인 신음이 흘러나갔다.
“아마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안다면, 분명 기겁하고 도망을 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이 시커먼 속내를 전부 드러내면 도망을 칠지도 몰랐다.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으니 필사적으로 참고 있을 뿐이다.
“서운합니다, 아델.”
헥시온이 아델의 입 안을 제 혀로 헤집었다. 느리게 입술을 가르고 밀고 들어오는 단단한 혀가 순식간에 축축한 입 안에서 얽혀 들었다. 아델이 입을 벌린 채 헥시온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녀의 손이 헥시온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해도 됩니까?”
헥시온이 그녀의 드러난 어깨 위에 입을 맞췄다.
“가둬 둘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욕심이 생기는 게 인간인가 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품에 안고 있으면, 그따위 외로움 또 뭘 어떤가 싶어지기도 한다. 그녀가 좋다고 하는데 자신이 참지 못할 이유가 대체 뭐가 있을지?
헥시온이 아델의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내가 욕심나요?”
아델이 헥시온의 얼굴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잡았다. 서로가 연결된 채 열기를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충만함이 차올랐다. 헥시온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금색 눈동자를 마주 봤다.
“……너무 당연한 걸 물으셔서 서운합니다.”
“정말, 그 서운하단 말 언제쯤 안 쓰게 될 거예요?”
짧게 숨을 뱉은 아델이 헥시온을 품에 끌어안았다. 헥시온이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푹 묻으며 눈을 깜빡였다. 그가 풀어진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몸에 얼굴을 기댔다.
“많이 참고 기다리고 있다는 건 알아요. 그래도 지금뿐이라 더 필사적인 거예요.”
“왜 지금뿐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는 황후고 헥시온은 황제잖아요. 후계자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가 따가워요.”
아델의 말에 헥시온이 입을 다물었다. 많은 것들이 해결되었으니 후계자가 두 사람의 마지막 걸림돌일지도 몰랐다.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나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긴 했다.
‘……늘 애처럼 구는 건 나인 것 같군.’
그녀는 늘 어른스럽다. 자신은 생각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곤 한다.
“……할 수 없네요.”
“저도 가는 수밖에.”
분위기에 맞지 않는 뜬금없는 결론이었다. 헥시온이 그렇게 읊조리곤 그대로 그녀와 몸을 힘껏 맞물렸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눈앞이 새하얘졌다. 질끈 눈을 감은 그녀와 함께, 헥시온도 몸을 무너뜨렸다.
* * *
“그래서, 일이 왜 이렇게 되는 건가요, 헥시온?”
아델의 차가운 목소리와 대조적으로 헥시온이 화사하게 웃었다. 헥시온이 눈앞에 있는 유적의 입구를 보며 느리게 주변을 훑었다. 탐사대원이라고 해 봐야 대부분 남자뿐이었다.
‘……이런 데서 굴렀단 말이지.’
솔직히 말해서 웬만한 것들은 다 보고받고 있었지만, 이런 작업 환경까지는 몰랐다. 남자들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지낼 것이라고는 더욱이 생각지도 못했고.
“유적 탐사라는 게 여길 들어가는 겁니까?”
“네.”
“이 사람들이랑 같이요?”
“……네.”
헥시온의 표정이 화사해졌다. 만면에 미소를 띤 그 얼굴을 바라보던 아델이 느리게 시선을 피했다. 헥시온이 슬쩍 아델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장치라면?”
“고대의 장치들이에요. 보통은 뭘 밟으면 화살이 날아온다거나 하는 식인데…….”
헥시온의 웃음이 또다시 짙어졌다. 헥시온은 웃는 낯을 하고 있었지만, 그 뒤에서 풍기는 오라가 시커멓기 그지없다. 당장이라도 제 멱살을 붙잡는 건 아닌지 조금 무서워질 지경이다.
“……네, 근데 뭐 미리 예측해서 다 피해 가니까 위험한 일은 없어요.”
“아델은 늘 그러더군요. 위험한 일이 없다고. 유적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제게 들려 주는 이야기는 별로 없어요.”
헥시온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의 머리카락이 사르르 흩어졌다. 아델이 입을 꾹 다물자 헥시온이 또다시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런다고 호위 기사로 변장해서 올 건 뭐야?’
아델을 혼자 다니게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에 그녀가 참가하는 유적 발굴단에는 항상 호위가 끼어 있었다. 최소 일당백은 하는 호위들의 실력은 늘 뛰어났다.
“만약에요, 아델.”
헥시온이 입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당장 몬스터의 소굴로 간다고 해요. 어떤 몬스터가 올지 나는 다 알아서 위험한 일은 없을 거예요.”
“……아니, 몬스터의 종류를 안다고 해서 위험하지 않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어요?”
“네, 나는 다녀와서 당신께 무사하다고만 할 거예요. 어떤 일이 있었든, 어떤 위험한 상황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든 말입니다.”
헥시온이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아델의 표정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헥시온이 슬쩍 미소 지으며 그녀의 손을 힘주어 붙잡았다. 헥시온과 아델을 선두로 유적 발굴단이 유적으로 들어갔다.
“그냥 그런 의미입니다. 당신의 안전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냥 걱정돼서 죽을 것 같아서요.”
헥시온이 고개를 젖혀 어둑어둑한 동굴을 한차례 훑었다.
“그래서 한 번쯤 보고 싶었습니다. 8년이 지난 지금, 아델이 어떤 표정으로, 어떤 모습으로 일을 하고 있을지.”
그 힘든 상황에서도 아델은 해독을 하는 것만큼은 즐겼던 즐겼다. 모든 걱정이 사라진 지금은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모든 것을 이끌어 나가고 있을지 그것이 너무도 궁금했다.
“그러니 너무 고깝게 여기지 마세요.”
“……고깝게 여긴 건 아니에요. 그냥, 부끄럽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그랬어요. 일도 많잖아요.”
“8년간 열심히 일했으니 휴가를 받은 셈치면 됩니다.”
그 말은 진이 결코 인정하지 않을 거다. 8년간 정말 쉬지 않고 일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은 진이었으니까. 헥시온은 한 번씩 아델을 보겠다고 황성을 뛰쳐나오곤 했으니 늘 뒤처리는 그의 몫이었다.
“이런 흙으로 빚은 곳을 들어가는 게 무섭진 않나요?”
“음, 무슨 일이 있든지 살아만 있으면 헥시온이 찾으러 와 줄 테니……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어요.”
담담한 아델의 말에 헥시온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난생처음 알게 됐으니까. 헥시온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랬습니까?”
“네, 헥시온이 뒤에 있으니까 무섭진 않아요. 누군가 있다는 사실이 든든하다는 걸 이제 알았거든요.”
헥시온이 있어서, 아델은 힘을 냈다. 어떤 어두운 곳도 들어가는 게 두렵진 않았다. 어쨌든 숨만 붙어 있으면 시체라도 필사적으로 찾을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근데 어쩐지 점점 어두워지는 것 같군요. 원래 이렇습니까?”
“아뇨, 그리고 어쩐지 주변이 조용한 것…… 아.”
주변을 둘러본 아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어둠에 반쯤 파묻힌 시야에 손을 맞잡은 헥시온의 윤곽이 간신히 보였다. 두 사람 이외에는 사람이 없었다.
“헥시온, 아무래도 우리가 장난질에 걸린 것 같아요.”
“장난질이라니, 무슨 장난질입니까?”
“고대 유적이다 보니 종종 요정이나 생물들의 장난이 걸린 곳도 있거든요. 아마 여기도 그런 종류인 것 같아요.”
아델이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보이는 건 없지만, 앞으로 계속 걸어가면 점점 더 어두워지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녀가 낮게 혀를 찼다.
“이것도 그 숲처럼 벗어나야 하는 겁니까?”
“네, 보통은…… 그 안에서 뭔가를 충족하면 해결해 주긴 하더라고요. 여긴 어떤 구조일지.”
“돌아 나가는 건요?”
“이런 구조는 돌아가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거예요. 막혔을걸요. 앞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요. 뭘 원하는지는 끝에 도달하면 알게 되겠죠.”
팔짱을 낀 헥시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같이 옛날 느낌을 즐기며 둘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한 것뿐인데 설마 이렇게 운이 없을 줄이야. 헥시온이 낮게 혀를 찼다.
“하는 수 없지 않습니까. 풀헤임 숲에서도 무사히 살아 나왔으니, 이번에도 무사하겠죠.”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허리를 굽혀 입을 맞췄다.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 * *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앞은 보이지 않게 됐고 걸음은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헥시온과 아델은 맞잡은 손을 꽉 붙잡은 채 천천히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보이지 않는 공포라는 것은 언제나 사람을 잠식했는데, 이상하게도 오늘만큼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단단하게 맞잡은 손 때문인지, 그저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오늘은 절대 문제가 생길 것 같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거다. 이 정도로 두려움이 들지 않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예전이랑은 확실히 다르네.’
풀헤임 숲에서는 한 걸음 내딛는 것만으로도 잘못된 길로 빠질까 봐 매번 매 순간을 긴장했다. 독안개 숲을 빠져나올 때도 그랬고. 아델이 헥시온과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까르르, 이게 누구야?>
<우리들의 집을 누군가가 침입했다곤 생각했지만……>
<앗, 너 훅센라이트니?>
그 순간, 어둠 속 어딘가에서 발랄하기 짝이 없는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한 명의 것이 아니었다. 겹치는 것을 보아하니 여러 사람의 것인 듯했다.
“……진짜 오랜만에 듣는다, 그 이름. 난 아델이야, 훅센라이트가 아니라.”
<뭐야, 실망이야.>
<맞아, 실망이네.>
<훅센라이트인 줄 알았는데……>
<근데 왜 그놈이랑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거야?>
세 명인가? 혹은 네 명?
목소리가 겹치고 겹치고 겹치길 반복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좁은 공간에 울려 퍼지며 메아리까지 울려 대니 더욱 몇 사람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그 사람의 먼 후손이야.”
사실 정말로 먼 후손인지는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말이다.
새까만 어둠 속에 무언가가 뿅뿅뿅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빛무리가 퐁퐁 터지더니 어린아이의 외향을 한 남자아이 셋이 모습을 나타냈다.
어둠 속에서도 은빛으로 반짝이는 것이 마치 밤하늘에 새겨진 별처럼 보였다. 아이의 등에서 쫙 펴진 잠자리 같은 얇은 날개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요정의 날개처럼 보이기도 하고 손으로 찢으면 찢어질 것처럼 연약하게 보이기도 했다.
아델이 짧은 한숨을 뱉었다.
하늘에서 포르르 은색 반짝이를 흘리며 날갯짓을 하던 소년들이 냉큼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헥시온이 느리게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몸을 긴장했다.
<그러게? 너는 계집이네.>
<뭐야, 사내놈이 아니었잖아?>
<그러게. 다리 사이가 텅 비었네.>
후욱!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세 명의 소년이 폴짝 뒤로 물러났다. 소년들의 움직임에 따라 바닥으로 우수수 쏟아지는 은색 가루가 별 가루처럼 신비로웠다.
<어이쿠.>
<위험하잖아.>
<인간 주제에.>
헥시온의 안광이 매섭게 빛났다. 소년들이 뿜어내는 은빛에 비친 것뿐인데 순간 눈동자에서 타오르는 불을 본 기분이었다. 아델의 몸을 요리조리 살피는 세 아이의 눈길을 헥시온이 참아 내지 못한 탓이었다.
“어린것들이 해도 되는 것과 해선 안 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군.”
<뭐래, 이 인간은?>
<기분 나쁜 인간.>
<왜 둘이 붙어 있는 거지? 얘, 훅센라이트는 거절해 버렸는데 넌 어때? 우리랑 같이 살지 않을래?>
정신이 없다. 아델이 이마를 짚자 헥시온이 짧게 한숨을 뱉으며 허리를 휘감아 끌어당겼다. 다정하게 달래듯 등을 쓰다듬는 손길에 긴장이 절로 풀어졌다. 아델이 세 소년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 그럴 순 없어. 난 돌아가야 해. 이 집을 탐험하러 온 것뿐이야.”
<그냥 심심해서 놀러 온 거라는 거야?>
<그런 거야?>
“맞아.”
아델의 대답에 세 명의 소년이 동시에 팔짱을 끼고 똑같은 타이밍에 똑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흠.>
<끄응.>
세 소년이 똑같은 표정으로 각기 다른 신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실망한 듯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좋아, 그러고 싶지 않지만 기회를 줄게.>
<사실 원래라면 장난감으로 만들 거였어.>
<하지만 넌 나쁜 녀석이 아닌 것 같으니까.>
세 소년이 서로의 말을 받아 가며 대답했다.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자 세 소년의 얼굴이 순식간에 짓궂게 변해 버렸다. 장난기 짙은 악동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던 아델이 슬쩍 헥시온을 바라봤다.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잘 안 보이네.’
주변이 너무 어두워서 얼굴에 음영이 짙게 질 뿐이다. 손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가 너무도 따뜻하다.
<좋아, 우리 소개부터 할게.>
세 소년이 팔을 쫙 폈다가 둥근 포물선을 그리며 허리를 숙였다. 신사가 할 법한 무척 정중한 인사법이었다. 세 소년이 허공에서 하고 있는 것이 조금 신기하게 보였다.
<우린 밤의 관조자.>
<하나이자 셋이고>
<셋이자 하나야.>
또다시 시작된 어려운 말에 아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의 것들은 언제나 하나같이 말을 어렵게 하는 걸 좋아한다. 수많은 비석과 고대어를 해독할 때도 그랬지만 말이다.
<훅센라이트는 우리의 놀이를 너무 빠르게 깼어.>
<진지하게 상대해 주지도 않았지.>
<별다른 겁이 없는 녀석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툴툴거리는 세 소년의 얼굴이 불만스럽게 보였다. 호쾌한 성격의 훅센라이트라면 아마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은 확실히 있었다.
<우리는 밤을 관장하고>
<어둠에 스며들고>
<또 인간에게 시련을 내려.>
세 소년의 말소리가 울리며 종국엔 겹쳤다. 메아리치는 목소리가 생각보다 듣기 좋았다. 세 소년의 몸에서 나던 빛이 순식간에 사라지기 시작했다. 물이 빠지듯 순식간에 은빛이 모습을 감춘다.
<너희들의 슬픔과 고통이 맛있는 간식이야.>
<통과한 자에겐 막대한 보물을.>
<실패한 자에겐 끔찍한 악몽을.>
<자, 우리의 게임에 참여하겠어? 한번 들어오면 빠져나갈 순 없어.>
<우리의 공간에서 놀고 싶다면 우리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와.>
은빛 날개가 천천히 어둠 속에 스며든다. 반쯤 사라지자 윤곽만이 모습을 보였다. 이제 어둠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신형이 흐릿해진 세 소년을 보며 아델이 입을 열었다.
“참여할게.”
<바라는 건?>
“이곳에 들어온 이들의 무사 귀환과 이 유적의 탐사.”
<소원은 오로지 한 개만 빌 수 있어.>
불만스러운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퉁명스러운 것이 두 번째 아이와 말투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세 소년의 목소리는 확실히 흡사하지만, 아주 미묘하게 다르게 느껴지는 점이 있었다.
“생각해 봐, 우리의 목숨은 두 개잖아. 헥시온 것과 내 것. 그러니까 소원을 두 개 빌 수 있는 거야.”
생명을 두 개 거니까 두 개분의 소원을 들어줘야 하잖아. 덧붙이는 아델의 말에 세 소년이 어둠 속에서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긴 시간 침묵하며 고민하는 듯하던 세 소년이 이윽고 답을 내놨다.
<좋아, 너희가 지면 둘 다 우리의 장난감이 되는 거야.>
<우리 집에서 계속 쭉 함께 놀자.>
<게임은 간단해. 낙원을 찾아. 이곳에서 유일하게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니 어디인지는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그 가운데에 있는 나무에서 황금 사과를 따면 인정해 줄게.>
<우리 시험은 그거야.>
<못하겠으면 우리를 불러. 그럼 언제든 이 끔찍한 어둠 속에서 구해 줄 테니까.>
세 소년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또다시 적막이 가득한 어둠 속이었다.
헥시온이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그녀를 덥석 품에 끌어안았다.
“뭐 하는 거예요!”
“혹시나 잃어버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끌어안고 있습니다.”
“무슨……, 누가 잃어버려요? 안 잃어버려요.”
아델이 웅얼거렸다.
헥시온이 제 어깨에 얼굴을 푹 파묻는 그녀의 등을 느리게 쓰다듬으며 웃었다. 기척은 전혀 없지만, 의외로 클리어 조건은 간단했다.
“별거 없이 이곳만 통과하면 된다니, 금방 도착하겠군요.”
“……이런 경우엔 도리어 조금 더 귀찮던데요.”
“귀찮다니요?”
화악!
눈앞이 밝아지더니 어둠 속에 덩그러니 문 두 개가 생성됐다. 시뻘건 문과 샛노란 문이었다. 무늬도 장식도 아무것도 없는 문을 물끄러미 보던 아델이 한숨을 내쉬며 끙끙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이럴 줄 알았어요. 이런 무난한 난관은 보통 정신을 건드리는 종류예요.”
“정신?”
“네, 뭐…… 상대가 가장 끔찍해하는 기억을 보여 준다거나 그런 거 있잖아요.”
아델이 머릿속을 비워야 한다며 두 손으로 양 관자놀이를 붙잡은 채 웅얼거리는 모습을 보던 헥시온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헥시온으로서는 그녀만 있으면 충분했으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문제 될 것이 없기도 했다.
‘언제쯤 날 제대로 의지해 주려는 건지.’
빨리 자신을 제대로 봐 주면 좋을 텐데 말이다. 늘 혼자서 살아온 사람이라 익숙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역시 아쉽고 서운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느 쪽 문으로 가고 싶습니까, 아델?”
“저 이런 거 약해요. 맨날 뭘 뽑아도 꼴찌가 된단 말이에요.”
“저도 악운이 강한 편이라서.”
나쁜 걸 뽑아도 살아남을 수 있는 운이 강할 뿐, 나쁜 것을 뽑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일단, 입을 맞춰 주시면 제가 골라 보겠습니다.”
“……아니, 이런 걸로 무슨?”
“아니면 아델이 고르십시오.”
아델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그녀가 냉큼 헥시온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댔다. 두 사람이 비스듬히 입술을 맞댔다. 자연스럽게 맞물린 입술로 타액을 나누고 나니 두근거리는 심장이 조금 진정했다.
“그럼 전 붉은색으로 가 보겠습니다. 노란색보다는 끌립니다.”
“혹여나 안 좋은 선택지가 나오더라도 원망을 하진 마십시오. 반드시 지켜 드릴 테니까.”
그렇게 헥시온은 붉은색 문을 열어젖혔다.
* * *
화르륵!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발밑에 불이 붙었다. 헥시온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어느새 문이 사라진 후였다. 매캐한 냄새와 시체 썩는 냄새, 피비린내가 코끝을 자극했다.
“전부 죽여라! 전부 죽여서 사지를 잘라!”
“……갑자기 무슨 전쟁일…… 헥시온?”
아델이 자연스럽게 헥시온을 향해 시선을 돌리다가 그대로 굳었다. 헥시온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델도 헥시온을 따라 다시 시선을 옮겼다.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었다. 이기고 있는 것은…….
‘……적군이야?’
지고 있는 게 제국이다. 에테르노 제국.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제국이니만큼 의아한 면이 있었다.
“헥시온, 전쟁이 무서워서 그래요? 근데 제가 생각하기에 이건 가짜 같아요. 공식적으로 이렇게 대패한 전쟁은 없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이 정도로 급박하고 고통스러웠던 전투가 있었습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헥시온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귓가를 두드리는 목소리에 아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지 그가 떨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아, 있었던 일이에요? 열세에 몰렸어요?”
“전투가 치열하기도 치열했지만, 제국에서 제대로 물자가 지원되지 않아서 더 끔찍했습니다. 산짐승을 붙잡아 먹고 인간의 시체라도 먹어야 한다는 얘기가 오고 갔죠.”
헥시온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등을 두드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그는 곧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아델은 오랜만에 보는 그의 모습에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듯 싸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적이 있었어요?”
염려가 담긴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헥시온이 옅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있어요. 결과적으로 뒤늦게 조금이나마 물자가 도착하기도 했고 큰 장맛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그 점을 이용해 승리를 거두긴 했습니다.”
“다행이에요.”
“그때까진 버리는 패라고 할 수 없었던 모양이지요.”
아주 먼 기억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떠올리니 순식간에 사람을 바닥으로 밀어 버린다. 기억이라는 것이 그렇다. 더 이상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이라도 사람을 한심하게 만들고 만다.
“그 시기에 매일같이 꾸던 꿈이 있습니다. 중요한 순간에 제 병이 도져서 움직이지 않는 겁니다.”
“……헥시온.”
“지금은 없을 일이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우리가 대패해서, 동료들의 사지가 잘리고 제 목이 날아가는 꿈을 매일같이 꿨습니다.”
끔찍한 꿈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아델과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면서 완전히 잊게 된 꿈이었는데, 설마 이렇게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꿈이라는 사실 정도는.
“아무래도 그 소년들이 말했던 것 중에 ‘악몽’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는 것 같네요.”
“앞으로 우리가 꾸었던 꿈이 나올 거라는 얘긴가요?”
“……그런 게 되겠네요.”
쓴웃음을 짓는 헥시온의 기분은 아주 조금이지만, 저조해 보였다.
헥시온의 꿈은 넓은 듯했지만, 끝이 존재했다. 앞으로 쭉 걸어 나가니 존재하는 것은 길이 뚝 끊긴 것만 같은 어둠이었다. 발을 한 발이라도 잘못 내디디면 바닥으로 굴러떨어질 것이 분명한 공간. 그렇게 헥시온의 꿈을 구석구석 살핀 결과 두 개의 통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녹색 문과 노란색 문이었다.
“……어디로 가는 게 좋겠습니까?”
“이번엔 녹색 문으로 가 봐요. 그리고 이만 내려 주고요. 손잡고 걸어가면 되잖아요.”
헥시온이 웃는 얼굴로 순순히 그녀를 내려놨다. 여전히 그의 기분은 저조하게만 보였다.
녹색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눈앞이 확 밝아졌다.
그녀가 있는 곳은 연회장 한가운데였다. 사방에 귀족들이 널려 있고 귀족들이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평민 따위가 황후가 되어서 그래.”
“더러운 사생아 핏줄.”
“게다가 아이까지 뱄다고 하지 않나.”
아델은 선명하게 들리는 수많은 목소리에 멍청하게 눈만 끔뻑였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직면한 터라 말문이 턱 막혔다. 그리고 동시에 놀랐다.
“……아델, 이건 당신의 꿈입니까?”
헥시온이 자신의 꿈이 아님을 확신한 듯 말했다. 턱 막힌 말문은 열릴 생각이 없었다. 치부를 들킨 것만 같은 기분 나쁜 느낌에 절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그냥 초반에 이런 걱정이 좀 있었어요. 설마 이런 걸 보여 줄 줄은 몰랐는데…….”
헥시온이 설명을 요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우뚝 선 것이, 움직일 생각이라곤 전혀 없어 보였다. 아델은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처음 황후가 됐을 때…… 그냥, 이런 꿈을 좀 꿨어요. 혹시나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었고…….”
조금 무서웠던 것뿐이다.
자신이 그의 치부가 될까 봐. 혹시나 황후라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 그에게 부끄러운 존재가 되어 버릴까 봐.
“끙, 지금은 절대 그런 생각 안 해요.”
“……왜 제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말씀해 주셨으면 그들의 목을 비틀어서라도 헛된 말이라는 것을 알려 드렸을 텐데요.”
아델이 어색하게 웃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번의 공간은 오로지 연회장이었으니 다음 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악몽이긴 하지만, 그리 두려운 악몽은 아니었다.
‘아니 예전이라면 두려워했을지도 모르겠네.’
아니면 이 자리에 혼자 있었다면 괜한 생각을 곱씹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헥시온이 곁에서 절대 아니라고 해 주니 다행이었지만.
“이번에는 노란색 문과 물방울무늬 문이네요.”
“이제 어느 쪽도 싫어지는군요.”
팔짱을 낀 헥시온이 한숨처럼 말했다.
“이번엔 제 차례군요.”
그가 무척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곤 푹 한숨을 내쉬고 노란색 문을 벌컥 열었다.
“우리 이혼해요.”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델의 몸이 뚝 굳었다. 그 한마디에 이게 누구의, 어떤 종류의 꿈인지 알게 된 그녀가 낮게 탄식했다.
“……아.”
“젠장.”
헥시온이 이를 악물었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수치심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헥시온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아델의 손목을 붙잡았다.
“얼른 찾아서 나가죠, 아델.”
그는 다급하게 말했다. 아델이 그를 슬쩍 보곤 대놓고 팔짱을 낀 채 자리에 떡하니 섰다.
“아델, 제발.”
“헥시온, 당신과는 더 못 살겠어요.”
헥시온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그가 두 팔을 내저으며 입술만 뻐끔거렸다.
“이혼해요. 당신이 날 위해 했다는 모든 일들이 끔찍해요. 그런 끔찍한 짓을 한 얼굴로 잘도 날 사랑한다고 말씀하셨군요.”
얼굴을 붉히고 있던 헥시온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가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가장 두려워했을 말을 저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내가 떠날 것 같아요?”
“……예전에는 그랬습니다.”
“지금은 안 그런 거예요?”
“…….”
헥시온의 입술이 딱 달라붙었다. 그는 아주 느리게 눈꺼풀을 깜빡이더니 대답 대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주 가끔, 정말 드물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가끔 걱정되긴 하지만, 솔직히 저렇게까진 아닙니다.”
“나한테 못 할 짓 한 적 있어요?”
“그건 아니지만,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할까 생각한 적은 있습니다.”
가둬서 제 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거나 날개를 부러뜨린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이었고 이 꿈은 혹여나 그녀가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을 두려워했을 때 꾼 것이었다.
“없습니다. 이런 생각도 이젠 거의 하지 않습니다. 이제 다음 걸 찾으러 가죠.”
“이혼하자니까 어딜 가요!”
“아델, 내가 당신과 순순히 이혼을 하느니, 당신 발목을 부러뜨리는 게 더 낫습니다.”
들려오는 서늘한 음성에 아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앞에 있던 헥시온이 고개를 저었다. 환상 속 아델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환상 속 헥시온이 서늘한 눈으로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제 눈엔 저거 같은데, 저거 아닐까요?”
당황한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그를 물끄러미 보던 아델이 헛숨을 삼켰다.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군요.”
그녀가 눈앞에 있는 갈색 문을 열고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 버렸다. 헥시온이 낭패감에 젖은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갈색 문 너머에 있는 것은 작은 아이였다. 헥시온은 뚝 걸음을 멈춘 그녀를 따라가 황급히 그 곁에 섰다.
“아델?”
“엄마…… 제가 더 잘할게요. 버리지, 버리지 마세요.”
새하얗게 질린 아델이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작은 아이를 바라보며 어깨를 떨고 있었다. 녹색 눈동자와 새까만 머리카락. 생김새는 헥시온을 꼭 닮은 소년이었다.
“……우리가 아이를 낳으면 이렇게 생겼을 것 같았는데.”
그러나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곳이 악몽을 보여 주는 공간인 만큼, 그녀가 좋은 꿈으로 이 아이를 만났을 리는 없을 거다. 헥시온이 팔을 뻗어 아델을 품에 끌어안았다.
“이런 꿈을 꾸셨습니까? 그래서 필사적으로 지금 돌아다니시는 건가요, 아델?”
“……꿨어요.”
아델이 숨을 토해 내며 말했다. 헥시온의 어깨를 힘껏 붙잡은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공작과 똑같이 행동할 게 무서웠어요. 자식은 부모를 닮고 배운 것을 그대로 답습한다고 하잖아요.”
본 것이 그것밖에 없다. 사랑받아 본 기억이 없어서 사랑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이에게 상처를 줄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곁에 있어 주려고 했다.
“아델, 지금 당신이 수많은 사람을 대하는 것에는 한 치의 틀림도 없습니다. 상대가 아이가 된다고 해서 달라지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헥시온이 아델을 조심스럽게 달랬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부드럽고 다정하다.
“조금 틀리더라도 아이와 함께 부모가 되는 법이니, 성장 과정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습니다.”
“잘 모르겠어요.”
“물론, 전 싫지만 아이가 생겨도 얼마든지 지금처럼 탐사를 다니셔도 괜찮습니다. 황성엔 널린 것이 육아를 도울 이들이고 원한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으니까요.”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입을 다물었다. 다정한 목소리는 언제나 그녀를 달래 주곤 한다. 아델이 낮게 숨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헥시온의 품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이렇게 보고 있으니 확실히 우리 둘의 아이가 욕심이 나긴 하는 것 같습니다.”
“돌아가서 생각해 봐요, 그건.”
아델이 붉어진 얼굴로 휙 몸을 돌렸다. 작은 정원 이곳저곳을 뒤지다 보니 발견한 것은 나무 뒤에 뜬금없이 숨어 있는 문 두 개였다.
이번엔 헥시온의 차례였다.
헥시온이 가시덩굴로 둘러싸인 문과 나무뿌리로 둘러싸인 문 두 개 사이에서 고민했다.
“이쪽으로 가 보죠.”
헥시온이 가시덩굴의 문을 열어젖혔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헥시온은 눈앞의 풍경에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어졌다. 그것은 그가 생각하고 꿈꿨던 것 중에 가장 불안하고 끔찍하게 여겼던 꿈이었다.
“폐하! 황후마마께서 탐사 가셨던 유적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급박한 목소리와 경악에 찬 보고는 귓가를 아프게 찔러 댔다. 꿈이라는 것을 알지만, 헥시온은 그조차 생각하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악몽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헥시온?”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헥시온은 그 자리에 굳은 것처럼 미동도 없이 우뚝 서 있었다. 그것은 그가 생각한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가장 끔찍한 지옥도였다.
“헥시온, 괜찮아요?”
“아…… 네. 네…….”
그렇게 말하는 헥시온은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아델이 황급히 손을 뻗어 그의 볼을 꾹 눌렀다. 그녀의 온기를 느끼는 것과 동시에 헥시온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아델.”
“네, 저 여기에 있어요. 죽지도 않고 멀쩡히 살아서요. 그러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마세요.”
아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느리게 시선을 내린 헥시온이 그녀의 손을 힘주어 붙잡았다. 차게 식은 손끝이 그의 긴장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아뇨, 죄송할 건 없어요.”
아델이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악몽 속 가짜 헥시온을 바라봤다. 가짜라곤 하지만, 실제로 헥시온이 꾸었던 꿈이 분명했다. 상황이 바뀌고 관 앞에 선 헥시온이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꿈을.’
설마 그가 이런 꿈을 꾸고 있을 줄은 몰랐다. 늘 다녀오라고 웃으며 말해 주었기 때문에 그가 이런 걱정을 안고 있을 줄은 예상도 하지 못했다.
“마지막 악몽이 묵직하네요, 아델.”
헥시온이 애써 웃는 낯으로 말했다. 말이 웃는 낯이지 사실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표정이었다. 악몽 속의 헥시온과 눈앞의 헥시온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얼른 문을 찾아야 한다는 걸 아는데…… 움직일 수가 없네요.”
못 박힌 듯 굳어진 헥시온의 목소리가 살포시 떨리기 시작했다. 대화를 나누고는 있는데 고개는 바뀐 풍경 속에 비친 관에 꽂힌 채였다.
‘제대로 내 이야기를 듣고는 있는 거지?’
시선이 닿질 않으니 계속 신경이 쓰였다. 아델의 표정을 본 헥시온이 표정을 풀었다가도 다시 굳히고 만다. 얼굴 근육이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헥시온, 이런 걸 걱정했어요?”
“……이런 게 아닙니다. 제겐 당신이 세계입니다. 세계가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습니까?”
아델의 말에 헥시온이 단박에 반박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다만, 이건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돌아오지 못할 게 두려워요?”
“……네, 아주 두렵습니다.”
“왜 말하지 않았어요?”
“그 두려움을 억누를 만큼, 당신의 행복을 바라니까요. 웃는 아델이 좋습니다. 유적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당신이 어떤 표정을 하는지 모르시겠지만요.”
즐겁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즐거움이다. 헥시온과 유적 두 가지를 저울에 올린다면 천칭이 기우는 곳은 당연히 헥시온이었다. 헥시온이 더 무거웠다. 그가 자신에겐 더 중요했다.
“난 혼자가 싫다고 했잖아요. 곁에 있어 달라고요. 외로워지고 싶지 않다고도.”
“……네, 맞습니다.”
“내가 당신을 두고 가는 일은 없어요. 사지가 절단되어서라도 살아남아 보일게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델의 말에 헥시온이 여전히 그다지 시원하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헥시온의 손을 잡고 움직이려고 했다. 그러나 헥시온은 끌려오지 않았다.
“정신적인 공격에 이렇게 취약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저는 제법 이런 일에 취약했던 모양입니다.”
서툴게 웃으면서도 걸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세히 보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극한의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그는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당신이 떠나고 연락이 되지 않는 날이 길어지면 늘 생각합니다. 악몽이 사라지지 않아요. 끔찍한 그림자가 제 사지를 휘감습니다.”
헥시온의 목소리에 아델이 입술을 깨물었다. 몇 번인가, 약속한 일정을 지키지 못한 일이 있었다. 깊은 유적에 있어서 되돌아 나올 수도 없고 이런 정신계 공격의 장난질에 걸린 적도 있었던 거다.
“무력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미안해요. 그런 생각까지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아델이 헥시온을 힘껏 끌어안았다.
“일단 여기서 나가요. 문만 찾으면 되잖아요. 나머지는 나가서 말해요.”
아델이 달래는 목소리에 헥시온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낮게 숨을 뱉으며 혀를 찼다. 아델의 손길에 의해 걸음을 옮기면서도 그의 신경은 온통 날이 서 있었다. 아델이 느낄 정도로.
“내가 아무 데도 가지 않으면 안심할 수 있겠어요?”
“……다른 의미로 안심하지 못할 겁니다.”
그녀가 온실에 갇혀 죽어 가는 꽃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결국 자신이 이겨 낼 수밖에 없다.
“문은 이 두 개인 것 같습니다.”
“둘 다 새빨간 색이네요. 이쪽이 조금 더 짙은 것 같네요.”
아델이 고민 끝에 짙은 붉은색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헥시온이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아델의 눈이 커졌다.
* * *
<이게 뭐야, 재미없어!>
<분명히 업그레이드를 했는데 어떻게 알았어!>
<내 장난감이었는데!>
<맞아, 장난감이었는데!>
세 정령이 울적한 표정으로 발을 굴렀다. 아델이 빙그레 웃으며 팔짱을 꼈다.
“약속은 약속이잖아. 길을 열어 줘.”
아델이 말하며 긴박했던 상황을 곱씹었다. 문을 열려는 순간, 헥시온이 손목을 잡아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진 악몽 속의 가장 낡은 성 외곽을 가리켰다.
‘저건 제 꿈에 없었습니다, 아델.’
낡은 성은 헥시온의 꿈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헥시온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라 그 이질적인 장소에 간 순간, 풍경이 뒤바뀌며 아름다운 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 열매가 열린 나무였다.
<너무해…….>
<다 왔었는데!>
<더 어렵게 낼 걸 그랬어!>
세 정령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기묘한 공간의 출구를 열었다.
“가요, 헥시온.”
“네.”
시커먼 출구를 향해 발을 디딘 순간, 눈앞엔 거대한 지하 유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거리에는 황금이 널려 있었고 보석이 굴러다녔다. 오래전 파묻혀 드래곤의 둥지로 사용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나라가 돈 때문에 망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헥시온 덕분이에요. 그러니까 전부 헥시온에게 줄게요.”
질린 듯 말을 하는 헥시온을 보며 아델이 말했다. 눈앞에 굴러다니는 수많은 재보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긴다는 그녀의 말에 헥시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괜찮습니다. 정말 잠시 악몽에서나 나오던 장면이 현실에 나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던 것뿐이에요.”
“이걸 다 줘도 아깝지 않을 만큼 당신을 사랑해요. 위험한 걸 걱정하고 있다는 건 알아요. 최대한 조심하고 있고요.”
아델이 헥시온의 손을 꽉 붙잡으며 느리게 주변을 훑었다. 굴러다니는 재보, 수많은 고대어로 된 유물, 그리고 연구하면 분명히 즐거울 고대의 흔적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헥시온보다 소중할 수는 없었다. 그와 함께하기로 정한 것은 아델이었다. 그러니…… 그녀 역시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었다.
“한동안은 당신이 조금 더 골머리를 썩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앞으로 조금만 더 돌아다닐게요.”
“……당신이 원하시는 만큼 하셔도 됩니다.”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원한다면 아델은 얼마든지 쥔 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그다음엔 아이를 만들어요. 제대로 사랑받지 못했지만, 최선을 다해 부모가 되어 봐요.”
“……예?”
“그렇게 우리 자식이 크면 황위를 물려주고 함께 여행을 떠나지 않을래요?”
아델의 말에 헥시온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그가 당황한 듯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흔들렸다. 꾹 입다문 그의 입매를 손가락으로 살살 풀어 주며 아델이 웃었다.
“예전처럼요. 당신과 제가 훅센라이트의 흔적을 쫓아 비석을 해독하러 다녔던 때처럼 둘이서 여행을 가요. 그때를 위해서 저도 잠시 즐거움을 내려 둘게요.”
그때가 되면 분명 젊음이 남아 있지는 않겠지만, 오랜 추억을 되새기며 함께할 순 있을 것이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와 함께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어쨌든 황후라는 직위를 받은 이상 언제까지고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건 그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정한 것이었다.
“오늘 즐거웠거든요. 헥시온, 나는 수많은 유물 탐사를 다녔지만…… 당신과 했던 그때만큼 즐거웠던 적은 없어요.”
벌어진 헥시온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서렸다. 그가 당황한 듯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러니까 헥시온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만둘 수 있어요. 나와 언젠가 같이 떠나 주겠다고 약속하면요. 언제나 당신은, 내가 어디에 있든 유일무이한 사람이에요.”
구원이자 유일한 숨구멍이었던 그는 여전히 힘들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며 어떤 이야기도 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믿음직한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걱정 하지 마세요.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반드시 마지막엔 당신에게 돌아올 테니까.”
“……그 말씀 후회하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시체조차 곁에 두려고 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럴 일 없도록 노력할게요.”
“……아이도 여행도 저는 다 좋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뭐든지요.”
헥시온이 긴 숨을 뱉으며 아델을 힘껏 끌어안았다. 충만한 애정이 흘러넘쳐서 더 숨길 수도 없는 꼴이 되었다. 아델이 헥시온의 등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미래의 자금도 벌어 뒀겠다, 어떻게 되든 걱정은 없네요.”
괜히 민망해진 아델이 눈앞의 보물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랑합니다, 아델.”
그것이 무색하게도 귀에 내리꽂히는 애정 어린 목소리에 아델의 얼굴이 절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저도요.”
웅얼거리듯 작게 대답한 아델이 순순히 입을 벌렸다.
악몽 속에 있었지만, 그렇게 두렵지 않았다. 마지막에 본 그 악몽만 아니었다면.
‘그래도 아마 나는 계속 걱정하고 악몽을 꾸게 되겠지.’
그녀가 온전히 제 곁에 있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헥시온은 거기까지 말하진 않았다. 이것만으로 충분했으니까. 그녀가 죽을 때까지 곁에 있겠다고 약속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여전히 당신의 유일한 기사입니다.”
속삭이는 목소리에 아델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델이 황후가 된 지 10년째 되던 해, 제국에 경사가 생겼다.
아델이 첫 아이로 아들을 낳았다. 그 이듬해 쌍둥이 딸을 또 낳으니, 모두가 총명하고 우애가 깊어 작은 다툼조차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황후는 아이들에게 언제나 다정했으나 때때론 엄했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황태자가 성년식을 치르는 것과 동시에 황제는 황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다.
세 아이가 떠나지 말라며 사흘 밤낮을 경비를 강화하고 두 사람의 처소를 지켰으나, 결국 어느 날 선황과 선황후가 탈출에 성공했다.
선황과 선황후는 미발굴 지역의 유적들을 탐사하며 1년에 한 번씩 황실로 돌아오는데, 그 미모가 쉬이 불을 끄지 않았다고 한다. 금실이 좋았던 선황과 선황후가 생전 탐사를 마친 유적은 총 127개로, 그들이 쓴 유적 탐사 일기가 아주 긴 시간 동안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황태자가 물려받은 제국은 더할 나위 없이 태평성대였으며, 자식들은 모두 부모에게 효를 다하며 애정을 쏟았다고 한다.
긴 태평성대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