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즉위식 한 달 전에야 다시 올 수 있었다니, 서글프네요.”
“그런 것치곤 무척 기뻐 보이는데요.”
아델과 헥시온이 아리아 린델과 훅센라이트의 무덤 앞에 앉은 채 가만히 대화를 나눴다. 헥시온은 이래저래 꺼림칙하게 여겨지는 면이 있었지만, 그래도 제국민들 사이에서는 제법 평판이 높았다.
무엇보다 나라를 구한 영웅이 아니던가? 같은 의미로 아델의 이야기도 사람의 입과 입을 통해 전해져 갔다.
셰인나이트는 신전의 중앙에 꽂혔으며, 다시 스스로를 봉인했다. 몇몇 이들이 셰인나이트를 뽑으려고 했으나 격한 통증만을 느낀 채 손을 놨다고 한다. 검을 뽑을 수 있는 이는 오로지 아델과 헥시온뿐이었다.
“오랜만에 당신과 둘이 있는 시간이 아닙니까.”
“하긴, 말이 많죠?”
“아델보단 덜합니다. 당신에게 쏟아지는 소문들을 듣다 보면…… 정말 전부 죽이고 싶어집니다.”
아델이 쓰게 웃었다. 고아에 대역에 거기에 더해 갑작스러운 예비 황후라니. 그녀가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당황했을 법한 일이었다.
헥시온이 살의에 들끓자 그의 검은색 눈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헥시온.”
탁.
검지로 그의 이마를 툭 친 아델에 그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의 검붉은 기운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헥시온이 풀어진 웃음을 흘리며 미소 지었다.
“네, 아델.”
“그런 표정 하지 마세요. 눈이 붉어진다니까.”
“가끔…… 아델이 연관되면 너무 화가 나서 그렇습니다.”
“난 괜찮아요. 내가 헥시온 옆에 있겠다고 마음먹었는걸요. 그러니 최선을 다해 버틸 거예요.”
최선을 다해 있을 자리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니 헥시온이 걱정할 일은 없었다.
“그래도…….”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 달라고 할게요.”
“…….”
“그 전까진 혼자서 있을 장소를 만들 거예요. 누가 만들어 준 곳보단…….”
아델이 옅게 웃었다.
“이젠 내가 직접 만드는 곳이 좋아요.”
헥시온이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이윽고 부드럽게 입가를 허물며 둥근 호선을 그렸다.
“품에 안고 있던 새가 날아가려고 하네요. 놓아줘야 한다는 건 아는데…….”
훨훨 날아가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는 건 아는데, 그러기 위해 얻은 자리이기도 한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날갯짓을 하려는 모습을 보니, 서운하네요.”
헥시온이 옆에 앉은 아델을 품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제가 무슨 새예요?”
“네, 귀여운 새지요.”
아델은 황궁 예법을 배우고 황후가 할 일을 배우고 미뤄 둔 인수인계를 받고 책을 집필하느라 정신없었다.
헥시온은 헥시온대로 전 황제가 미뤄 둔 일을 처리하고 신전 일을 정리하고 숙청하고 엉망이 된 관리 체계를 원래 자리로 돌리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둘이 같이 있을 시간도 없이 바빴는데, 오랜만에 낸 시간이었다. 당연하게도 오랜만에 맞이한 평화로움은 두 사람 모두에게 기꺼웠다.
“그러고 보니 복수를 끝낸 날 있잖습니까?”
“네.”
“아주 기묘하고 이상한 꿈을 꿨습니다.”
“꿈이요?”
아델이 헥시온의 품에 안긴 채 되물었다. 헥시온이 고개를 끄덕인다.
“꿈속의 나는, 몸의 반 이상을 바엘에게 잡아먹힌 상태였거든요.”
“……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는 듯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헥시온이 입을 열었다.
“그곳에서도 아델과 나는 결혼을 할 예정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내가 당신과 무척 결혼하고 싶긴 한가 봅니다.”
“……그래서요?”
아델이 조금 나직해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는 곧 죽기 직전이라서요. 당신에게 내 모든 걸 주려고 준비 중이었어요.”
차분하게 설명하는 헥시온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그가 천천히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꿈속의 자신과 아델의 위치는 영 좋지 않았는지, 상황은 나빴다.
“……내게 전부요?”
“네.”
“날 어떻게 알고요?”
“……글쎄요? 하지만 꿈속의 나는 당신을 무척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생각보다 나이가 좀 있어 보였거든요. 덧붙이며 헥시온이 부끄러운 듯 웃어 보였다.
“근데…… 꿈이 참 스펙터클하더군요. 당신이 또 누구한테 습격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마차에서……?”
“네, 당신은 마차를 타고 내게 오는 중이었고…… 난 당신을 살리기 위해…….”
헥시온이 눈을 끔뻑였다. 조금 느려진 목소리에서 기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달리고 있었어요.”
필사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로 말을 타고 움직이지 않는 팔로 검을 뽑았다. 아델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뜬 눈으로 헥시온을 바라봤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숨을 멈춘 아델이 그저 헥시온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렇게 달리고 달렸는데, 결국 아델의 이름만 부르고 끝났습니다.”
헥시온이 쓰게 웃었다.
“……그래요?”
“네.”
“그 뒤는 없어요?”
“네, 거기서 잠에 깨 버렸거든요.”
헥시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델이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
모든 일의 시작점, 죽기 바로 직전 들렸던……. 제 이름을 부른 찢어지는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 그 주인이 누구일까 늘 궁금했는데, 만약 그 꿈이 사실을 밝혀 주는 거라면, 자신을 구하러 달려온 이도 처음부터 헥시온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랬군요.”
“네.”
헥시온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사실은 그 뒤에, 한쪽 팔로 그녀를 죽인 도적들을 도륙하고 간신히 품에 끌어안은 그녀의 온기가 식어 가는 것을 느끼며 비명처럼 오열했다.
지켜 주지 못한 괴로움에 울부짖었다. 그것은 꿈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실제로 겪기라도 한 것처럼 아파서, 다시 생각해도 괴로울 정도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품에 있으니까.’
아델은 곁에 있다. 죽지도 않고 산 채로 멀쩡히 숨을 쉬면서. 꿈속의 자신이 아델을 지키지 못한 건 결국 꿈속의 일일 뿐이다.
그는 아델을 지켜 냈다. 설령 바엘의 잔해 같은 것을 제 몸에 품고 있을지언정, 앞으로 그것이 아델을 위협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델.”
“네?”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입니까?”
“그냥, 기뻐서요.”
아델이 헥시온을 끌어안은 채 중얼거렸다. 제 마지막 궁금증이 이렇게 풀리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알게 되어 행복했다. 그때도 지금도, 그와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좋았다.
“꿈속에서도 날 구해 주려고 필사적으로 뛰었다는 거잖아요.”
“……내가 너무 결혼하고 싶어서 그런 꿈을 꾼 모양입니다.”
“겨우 여기까지 왔어요.”
아델이 헥시온의 손을 꽉 붙잡았다. 각자의 힘겨웠던 시간을 떨쳐 내고 드디어 이곳까지 걸어왔다.
“황제가 되면 원하는 건 뭐든 손에 쥐여 드리겠습니다.”
“……아뇨.”
아델이 냉큼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기회를 잡으려 여우처럼 구는 거라는 얘기가 돌고 있는데 굳이 거기에 말을 더 끼얹고 싶진 않았다.
“이런.”
“헥시온만 곁에 있으면 돼요. 필요한 게 있으면 내가 해 보고 안 되면 말할게요.”
“……그래도 가끔 의지해 주지 않으면, 저는 시무룩해져서 쪼그라들고 말겁니다.”
“멋대로 내 숲에 들어와서 대체 여기서 뭘 하느냐?”
“판!”
“흥, 친근하게 부르지 말거라. 뭐…… 바엘을 없애 준 건 고맙지만.”
판이 짓궂게 웃다가 이윽고 느릿하게 다가왔다. 직접 만들기라도 한 듯 무색투명한 얼음 꽃을 손에 쥔 판이 세워진 비석 두 개 앞에 각각 하나씩 내려놓았다.
“너희 인간들은, 죽은 자를 방문할 때 꽃을 가져다 둔다지.”
두 개의 비석 사이에 털썩 주저앉았다. 봉긋하게 솟은 무덤 두 개가 외롭게 보였다.
“……멍청한 녀석.”
판이 낮게 중얼거렸다.
“결국, 여기에 함께 잠들 것을.”
무엇을 위해 그토록 방황했고 고민했고 후회했는지. 판이 작게 중얼거렸다.
“멍청한 인간이니까, 그냥 부딪쳐 보는 편이 좋았을 거다.”
생각하고 후회하는 것보단 그것이 더 나았겠지. 판이 무덤을 한 번씩 쓰다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냉큼 뒤를 돌았다.
“너희도 자주 오지 마.”
“아델이 여길 좋아해서 불가능한 부탁이군요.”
판의 말에 헥시온이 여유롭게 맞받아쳤다. 판이 눈을 가늘게 뜨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종종 이곳저곳 다 방문해 주든가.”
“네, 그럴게요.”
아델이 냉큼 대답했다. 기다리는 많은 이들에게, 이곳에 훅센라이트의 무덤이 있다고 알려 주고 싶었다. 혹여 찾아올 수 있는 이들은 찾아올 수 있도록.
“좋은 곳이에요.”
“당신과 있는데 어디든 좋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