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 진실
헥시온과 아델이 숲에서 나온 지 채 사흘도 지나지 않아, 수도에는 기묘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저잣거리에 붙은 대자보에는 황실의 만행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황실의 핏줄을 죽이고 황좌를 차지한 초대 황제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 기괴했다. 황제는 황좌에 앉아 있었지만, 그가 쓴 황제의 관 위에는 새까만 안개처럼 생긴 끔찍한 생물이 앉아 있었다. 흡사 악마처럼 생긴 그 생물체의 눈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하였다.
대자보에는 황제가 사실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칼럿병은 황제가 악마를 이용해서 만들어 내는 병이라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사람들은 대자보를 기묘하게 생각하면서도 코웃음을 치며 지나쳤다. 이윽고 소식을 들은 황실에서 기사를 파견해 대자보를 전부 뗐지만, 그 이후 며칠 동안이나 대자보는 수도 곳곳은 물론 제국 내의 여러 마을로 퍼져 나갔다.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살얼음이 언 호수 위처럼 위태로운 일상은 이윽고 완전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얘기 알고 있나?”
“아, 대자보? 알고 있지. 그렇지 않아도 요즘 기사들이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녀서 미치겠네!”
“아니! 그거 말고.”
술잔을 기울이던 선이 굵은 사내가 툭 튀어나온 광대뼈가 닿을 정도로 반대편에 앉은 남자에게 몸을 바싹 붙였다.
“그 대자보에 나온 대로 정말 당한 사람이 있는 모양이야. 왜, 쿠알 장군님을 기억하나?”
“……?”
“악마와 계약을 한 금기를 범해 칼럿병에 걸려서 작위를 박탈당하고 폐하의 마지막 자비로 수도에서 쫓겨나신 분!”
“아……. 그분이라면, 기억하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어. 하지만 실제로 팔 한쪽이 끔찍하지 않았나?”
사내가 답답한 듯 술을 홀짝거리며 대답했다. 고개를 좌우로 젓는 것에서 안타까움이 물씬 느껴졌다.
“그분은…… 악마와 내통한 게 분명해. 황실에서도 악마와 거래를 해서 그 능력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하지 않았던가? 결과적으론 좋은 일이었지만, 기사로선 해선 안 되는 일이었지.”
“그거 말일세! 그분이 사실은 황제가 그렇게 만들어 쫓아냈다는 얘기가 있어.”
“예끼! 그런 말 함부로 말게!”
“거참, 그래서 작게 말하지 않나. 왜 그분의 명성이 무척이나 뛰어나지 않았나? 황제가 그것을 질투했다는 소문이 있어.”
한껏 줄어든 작은 목소리에 상대를 나무라던 남자가 입을 꾹 닫았다. 흔들리는 시선에서 고민이 느껴졌다.
“……정말인가?”
“아, 그렇다니까! 그분이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가고 계신 모양인데 시골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하곤 했다는 걸세.”
“그래?”
나무라던 남자가 제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결국 의문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자 열심히 입을 놀리던 사내가 씩 웃더니 이윽고 빈 술병을 흔들었다.
“이런, 병이 비었군.”
“이 치사한 친구. 여기 술 한 병 더 주게!”
“네!”
그제야 남자가 다시 몸을 앞으로 굽히며 입을 열었다. 풀풀 풍기는 술 냄새 사이로 들리는 사내의 이야기는 무척 좋은 안줏거리였다.
“그래서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근데 그때는 솔직히 그분의 상태가 영 좋진 않았지 않나? 그래서 미친 사람 취급을 했다지.”
“그랬지.”
술이 나오자 남자가 병을 따 사내의 빈 잔을 채웠다. 퍽 흡족한 듯 사내는 무척이나 들뜬 얼굴로 재빠르게 또 말을 이어 갔다.
“근데 이번에 대자보가 그 마을에까지 붙었는데, 그분이 불같이 화를 내더라는 거지!”
“오오, 그래서?”
“역시 제 예상이 맞았다면서. 누명을 밝혀야겠다고 술에 취해 구구절절 그때 일을 늘어놨다더구먼.”
“허어. 그게 정말인가? 그분이 정말 미친……, 아니 문제가 생긴 걸 수도 있잖나?”
남자의 물음에 사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닌 것 같단 말이지. 여기저기가 어수선해, 정말.”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 사내가 잔에 가득 담긴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다음에 또 보세. 난 가 봐야겠어.”
“아, 그래. 알겠네.”
손을 흔든 사내는 술집을 떠났다. 왁자지껄한 술집 밖으로 나오니 이윽고 적막이 찾아왔다. 사내의 눈이 한껏 가라앉았다.
“헥시온, 바빠요?”
“아뇨, 안 바쁩니다.”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에 상반신이 반쯤 가려진 헥시온이 대답했다. 어찌나 평온한 얼굴인지, 주변에 있는 서류 더미가 아니었으면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주위의 배경은 다른 말을 하고 있는데요.”
“……그냥, 쌓인 것뿐입니다. 보고 처리만 하면 돼요.”
그게 바로 바쁘다는 것 아니던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델은 애써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달아서 들썩이다가 결국 제 코앞까지 다가와 자신을 끌어안는 헥시온에게 아델은 손을 들어 등을 토닥여 주었다.
“밖이 시끄러운 것 같더라고요.”
“아, 사람이 제법 많이 늘긴 했지요. 다들 보이지 않게 들어와 있는 거긴 한데, 신경 쓰이면 눈에 띄지 않도록 명령하겠습니다.”
“그건 아니에요. 수도도 어수선하다고 하던데요.”
“아…….”
헥시온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이윽고 입가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평소와 같은 다정한 미소가 아니라 어딘가 살짝 비틀린 미소였다.
“황실에 불만을 품은 이들을 좀 찔러 봤습니다. 꽤 오래전부터 협력을 얻으려고 한 거라서, 아마 곧 들고일어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들고일어나다니, 누가요?”
“칼럿병의 피해자들입니다.”
“……칼럿병의, 피해자요?”
아델의 물음에 헥시온이 그녀를 덥석 안아 올려 소파에 앉혔다. 자연스럽게 그 옆자리에 앉은 헥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럿병으로 인해 쫓겨난 사람이나 칼럿병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사람. 황실에서 일하다가 어느 날 사라진 사람들 위주로 찾아보니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많아요?”
“네, 다들 팔다리를 잃거나 병을 앓으며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지요.”
아델을 만나기 전에도 헥시온은 자신과 같은 이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제 사람들을 파견해서 수소문하며 그들의 발자취를 좇았다. 그것도 황실에 지독한 원한이 있거나 황실을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주로. 돈이나 눈앞의 명예보다도 목숨을 끌어안고 황제에게 달려들어 자폭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은 결코 배신을 하지 않는다. 그리 많지는 않지만, 황제의 성까지 쳐들어가 목을 벨 때까지의 시간을 벌어 줄 정도는 충분했다.
“귀족이었으나 몰락한 자도 있고 제법 명망 있던 장군도 있었습니다. 물론 황제의 더러운 일을 처리해 주던 그림자도 있었죠.”
“……설마 황제는 그 사람들을 전부 버린 거예요?”
“네, 그는 그런 사람입니다.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것 같으면 싹부터 잘라 내죠.”
헥시온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얼마 전, 셰인나이트를 얻어 돌아온 후에는 대자보를 써서 수도를 비롯한 각 마을에 부착했다. 균열은 무척 작지만, 거기에 바람을 불어넣으면 얼마든지 커질 수 있다. 미리 얘기해 둔 칼럿병의 피해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곧 폭동이 될 거다. 이미 많은 이들이 조용히 수도로 들어오고 있었다.
“오늘 고고학자 협회에 가려고 하는데요. 위험할까요?”
“얼마 전에도 열한 번째 비석 해독 때문에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네. 근데 곧 해독문을 발표할 거라면서요? 그래서 한 번 더 확인해 보려고요.”
아델의 설명에 헥시온이 미간을 좁혔다. 마음에 차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또 가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고심이 자신에게까지 느껴져서 아델은 웃으며 헥시온의 손을 맞잡았다.
움찔, 한차례 어깨를 떤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슬쩍 그녀를 흘겨보곤 웃었다.
“알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사람 붙일 거죠?”
“……보이지 않게 호위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신경 쓰시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드리겠습니다.”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호위를 붙인다는 것 자체도 뭐라고 할 마음은 없었는데. 아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헥시온이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인사는 해 주지 않으십니까?”
“네? 아……. 다녀오겠습니다.”
아델의 대답에 헥시온이 살짝 미간을 좁히더니 이내 허리를 굽혀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잠시 눈을 끔뻑이던 아델이 이윽고 벌겋게 물든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헤, 헥시…….”
“연인끼리의 인사는 이런 거 아니었습니까?”
뻐끔거리는 아델의 입술을 사랑스럽다는 듯 내려다보던 그가 그녀의 벌어진 아랫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느릿하게 쓸며 대답했다. 아랫배를 뭉근하게 적셔 오는 가라앉은 목소리에 아델이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다, 다녀오겠습니다.”
“네, 다녀오십시오.”
헥시온의 집무실 문을 부술 듯 힘껏 열어젖힌 그녀가 뻣뻣한 걸음으로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별것 아닌 가벼운 입맞춤인데도 예상하지 못해서 그런지 한층 더 얼굴이 홧홧했다. 아델이 맨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로브를 뒤집어썼다.
그녀가 조용히 저택을 빠져나가고 그 뒤를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둘 뒤따랐다. 집무실 창문을 열고 기대어 있던 헥시온이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 * *
“꺄아아악!”
“악마의 병이야!”
“다가가지 마! 다들 문 닫고 들어가라고!”
저택을 빠져나와 고고학자 협회로 향하는 도중 들린 목소리에 아델이 뚝, 걸음을 멈췄다.
악마의 병?
악마의 병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 나라에 딱 하나밖에 없었다.
‘칼럿병?’
아델이 비명이 들렸던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길거리 한가운데 내쫓긴 듯 바닥에 나뒹군 아이가 바들바들 떨며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나 마음대로 일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당장 치우지 않고 뭐 해! 경비대에 신고는 했어?”
“같이 있다간 우리까지 문제 생길지도 몰라! 어떡해!”
시끄러운 주변에 얼굴을 구긴 아델이 로브를 푹 눌러쓴 채 벌벌 떨며 바닥에 망연히 주저앉아 있는 인영을 향해 걸어갔다. 앳된 얼굴의 아이였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어찌할 줄도 모르고 주저앉은 아이의 한쪽 다리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서서히 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다.
“이봐! 미쳤어? 당장 떨어져! 악마의 병이 옮는다고!”
누군가가 아델의 어깨를 붙잡으며 소년에게서 떨쳐 내려 했다. 아델이 미간을 좁힌 채 커다란 손을 쳐 내곤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았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입술을 뻐끔거릴 뿐이다.
“흐윽…… 흑…….”
간헐적으로 떠는 아이를 위해 달려오는 사람은 없다. 비쩍 마른 몸이나 허름한 옷가지를 보아하니 아마도 아이는 그녀가 어릴 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아이가 분명했다.
“안녕?”
“네, 네에……?”
“이름이 뭐니?”
“피아, 피아예요…….”
입술을 달싹인 소년이 간신히 혀를 움직여 대답한다. 웅성거림이 가득한 주변에선 모두가 문을 걸어 잠그기 바쁘다. 칼럿병을 가진 아이를 품에 안고 있다고 병균이 된 듯한 느낌이다. 제 주변으로 둥근 원이 만들어지고 걸어가는 길마다 바다가 갈라지듯 길이 생겨난다.
아델이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동시에 속이 쓰렸다. 이 꼴을, 평생에 걸쳐 헥시온이 당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애절하게 저에게 매달렸던 헥시온이 온기를 원하고 제가 유일한 세계라고 말한 그 이유를 아주 조금이지만 이해했다.
“네? 네……. 근데, 병이, 흑, 병이 옮으실…….”
아이가 벌벌 떨면서도 입술을 달싹였다. 새파랗게 질려 핏기조차 없는 얼굴에 공포가 가득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리가 아까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음, 이건 병이 아니야.”
“네……?”
“네 몸에 지금 벌레가 들어간 거야. 네가 겁에 질려 있으면 이 벌레가 네 몸을 더 빨리 집어삼킬 거야.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 고칠 수 있는 병이니까 그렇게 겁에 질려 있으면 안 돼.”
누군가를 달래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 아델은 최대한 사실을 얘기하려고 노력했다. 헥시온도 늘 멋대로 다가와서 끌어안고 혼자서 스스로를 달래곤 했으니까. 그보다 더 어린애를 상대하는 방법을, 아델은 알지 못했다.
“살고 싶다고 하면, 살 수 있어요……?”
“응.”
“……고…….”
아이가 긴장을 꿀꺽 삼켰다. 떨리는 눈동자가 로브 속 아델의 시선과 마주쳤다. 중심에서 멀어지니 웅성거리는 시끄러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됐다.
‘아이는 무겁네.’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렇다고 다리가 아픈 아이를 두고 갈 수도 없으니. 아델이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걷는 속도를 높였다.
“뭐라고 했니?”
“만약, 죽고 싶다고 하면 죽을 수도 있어요?”
“……맞아, 순식간에 벌레가 네 몸을 전부 갉아먹을 테니까.”
잠시 망설였던 아델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이는 고개를 툭 떨구곤 아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닿아 오는 온기에 몸을 살짝 떤 아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죽고 싶니?”
“아뇨, 살고 싶어요.”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 죽고 싶을 만큼 다리가 아팠던 것 같은데, 누나 옆에 있으니까 아프지 않아요.”
“다행이네.”
아델이 곧장 고고학자 협회로 향했다. 호위가 있다고 했으니 혹시나 뒤따르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이 알아서 처리해 주리라. 주변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은 편했다.
“왜 이렇게 된 거야?”
“……모르겠어요. 누가 새까만 보석 같은 걸 줬는데, 아주 귀한 거라고 했어요.”
“그걸 받았구나.”
“네, 그걸로 밥을 먹고 싶어서 식당에 갔는데…… 갑자기 다리가 아파져 오기 시작하더니 돌처럼 변했어요.”
다시 그 일을 떠올린 듯 아이의 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전…… 악마를 부른 적이 없는데…….”
“악마를 불러낸다고 걸리는 병이 아니니까.”
아델이 아이의 등을 쓰다듬어 주다가 이윽고 허름한 건물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문 안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뚝 멎더니 이윽고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아! 아델이었구나. 미리 기척 좀 주지 그랬어요?”
“미안해요.”
아델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생각보다 팔다리가 꽤 아팠다. 아이를 안고 있는 건 힘겨운 일이었다.
“그 애는 누구예요? 설마 애를…….”
“아뇨, 갑자기 칼럿병에 걸린 아이를 오다가 발견해서요. 집에 들여도 괜찮을까요?”
아델의 말에 눈동자를 도르륵 굴린 리차스가 뒤를 바라봤다. 아델이 피아를 품에 안은 채 정확히 문밖에 서서 대답을 기다렸다.
‘안 된다고 하면 일단 저택에 먼저 보내야 하나?’
헥시온의 허락을 받지 않아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라고 칼럿병에 걸린 아이를 무시하진 않을 거다. 애초에 모든 사실을 알더라도 지금껏 꺼림칙했던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 건 아니다.
‘갑자기 칼럿병 걸린 아이가 나타난 것도 이상해.’
보석을 줬다는 것이 바엘의 잔해나 파편이라면 표면에 드러난다는 것을 감수하고 벌인 일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왜 그런 일을 벌인 거지?
일단 거기에 뒀다가 좋은 일을 겪진 않을 테니 미련 없이 데리고 오긴 했는데, 뒤가 찜찜했다. 칼럿병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보이게 할 필요가 뭐가 있지?
“어렵다면, 말씀해 주세요. 아이는 먼저 저택에…….”
“들어오셔도 됩니다. 뭘 그렇게 망설이십니까?”
정중한 프레우의 말에 아델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차스는 냉큼 앞을 비켜섰다. 안은 크게 다를 바 없는 듯했지만, 조금 변화가 있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벽난로 옆에는 장작이 가득했고 낡고 찢어졌던 소파는 새것과 다름없었으며, 세월의 흔적으로 가득했던 식탁은 잘 다듬어진 식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좀, 바뀌었네요.”
아델이 아이를 식탁 의자에 앉히며 말했다. 긴장한 듯 잔뜩 목을 움츠린 아이는 여전히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네, 그분 덕분입니다.”
“침대도 싹 바뀌었다고, 아가씨!”
케인타르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얼굴이 그다지 우중충하지 않다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다행이네요. 따뜻하고 좋아요.”
프레우의 눈동자가 도르륵 돌아가 아이에게 향했다. 헬라가 눈치 빠르게 주방으로 가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 아이의 앞에 잔을 내밀었다. 아델이 슬쩍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시장을 지나오는데, 소란스러워서 다가갔더니 악마의 병이니 뭐니 하고 있길래요. 칼럿병인 것 같아서 데리고 왔어요.”
잔뜩 긴장한 아이는 잔을 손에 쥐지도 못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아델이 한쪽 무릎을 꿇고 의자에 앉은 아이의 눈을 마주 봤다. 진갈색의 깨끗한 눈동자에 가득 자리 잡은 공포에 아델이 한숨을 삼켰다.
“누나……, 저 죽어요?”
“아니,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 안 죽어.”
“하지만…….”
“누나의 친…….”
“아니, 내 애인도 이 벌레한테 몸을 먹혔어. 너만 할 때 먹혔는데도, 지금까지 살아 있어. 거의 낫기도 했어.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 죽지 않을 거야. 이 벌레는 사람의 안 좋은 감정을 먹거든.”
아델의 설명에 피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손을 뻗어 피아에게 따뜻한 우유가 담긴 컵을 쥐여 줬다. 한층 진정했는지 아이는 아까보다 조금 떨림이 멎은 손으로 컵을 쥐었다.
“일단, 치료법은 내 집으로 가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은데 괜찮니?”
“……네.”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아이의 다리를 한 번 더 살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자신이 곁에 있는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마음을 바로잡은 것인지 아까보다 더 심해지진 않았다.
“칼럿병을 보는 건 처음인데…….”
리차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아델이 그를 힐끗 보곤 프레우를 바라봤다.
“비석 해독문을 축약해서 발표할 거죠?”
“네, 적당히 선동할 수 있는 걸 위주로 뽑아 놨습니다. 이 해독문의 증인은 저희 고고학자 협회와 어떤 귀족 가문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아.”
알리아 자작가의 얘기가 분명했다. 고고학자 협회는 분명히 명실상부 존재하는 기관이었지만, 모르는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고고학’ 자체를 모르는 자들이 많으니 전문성은 그들에게 찾되 그보다 더 영향력 있는 알리아 자작가의 이름을 파는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진이라는 분이 찾아와서 호위를 몇 붙일 거라고 통보를 했습니다만…… 혹시 아는 분입니까?”
“네, 도와주기로 한…… 친구예요.”
진이 전혀 얼굴을 비춰 주지 않으니 보지 못한 지 제법 시간이 지났다. 아델이 느리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헥시온에게 듣기론 용병을 지원해 주기로 약속했다고 들었다. 뒤에서 헥시온 대신 연락망이 되어 주고 있는 것도 아마 진인 듯했다.
“일단 이 정도인데 확인하시고 그분께도 보여 드리십시오.”
“알겠어요. 그리고 이건 저번에 드린다는 걸 깜빡했는데…….”
아델이 노트 하나를 내밀었다. 프레우가 퍽 의아한 눈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가 받은 노트를 펼쳐 안을 살피다 말고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들었다.
“이건……?”
“제가 해독한 내용이 적히지 않은, 비석의 원본이에요. 그대로 베껴 온 거니까 직접 해독해 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애초에 고대어라는 것은 완전히 답이 있는 게 아니다. 의미는 있지만, 해독에 따라서 또 다르게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델의 해독은 어디까지나 정석적인 해독법이었다.
“연습용으로 써도 좋을 것 같아서요.”
“……감사합니다.”
프레우가 옅은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아델이 그에게서 받은 해독문을 펼쳤다. 아델과 고고학자 협회원이 머리를 맞댔다.
* * *
“또야, 또…….”
“아아! 대체 이게 몇 번째야? 미쳐 버릴 것 같아. 하루하루가 불안하다고!”
수도가 뒤숭숭해졌다. 술집은 온통 머리를 싸매고 불안에 떠는 이들로 가득했고 사람들 사이에는 기묘한 소문과 황실의 이야기가 뒤섞여 불협화음을 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은 황제의 더러운 공작을 밝히겠다며 시위에 나섰다. 개중에는 눈에 익은 귀족이나 장군도 있어서 백성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들은 칼럿병에 걸린 제 몸을 보여 주며 이 긴 시간 동안 살아남았다고, 악마의 병 따위가 아니라며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그러다 경비대가 파견되면 흩어졌다가 또다시 모이기 일쑤였다.
그리고 며칠 뒤, 황성과 신전에서 각각 성명문을 발표했다. 황실을 모략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경비대에 신고하라는 이야기였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은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관련 이야기를 하면 엄벌에 처하겠다는 성명문에는 황제의 직인이 찍혀 걸렸다.
신전에서는 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고귀한 핏줄에게 검을 들이대는 불온 세력 때문에 신께서 무척 노하셨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신전의 성명문 발표 이후 도심 곳곳에서 칼럿병이 만연했다. 사람들은 픽픽 쓰러졌고 수많은 사람 앞에서 재가 되어 사라졌다. 순식간에 공포가 잠식해 신전으로 찾아가는 사람의 수가 늘어났다.
황제는 두문불출했고 두어 번 더 헥시온에게 입궁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헥시온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게 다 신의 핏줄인 황제 폐하께 대척하는 불온 세력 때문에 신께서 분노하신 게 아니겠나!”
술을 마시던 사람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분노했다. 빈 병을 쿵쿵 나무 탁자에 찧으며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왁왁 소리를 지르는 남자의 말에 몇몇이 동조했다.
“맞아! 감히 고귀한 신의 핏줄인 황제 폐하께 대적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야!”
“다 싸잡아 죽여야 하오!”
“물론, 그것도 맞지만…… 다들 보지 않았소! 최근에 고대 비석인지 뭔지를 해독한 해독문 말이야! 거기에 적힌 이야기를 생각하면…….”
구석에 있던 남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장 먼저 소리를 치던 남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쿵쿵거리며 반론을 제기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지금 황제 폐하를 모욕하는 거요?”
“내가 언제 모욕을 했소! 단지, 알리아 자작 각하께서 우리 같은 것들을 얼마나 굽어살피셨는지 생각해 보게!”
“……크흠.”
알리아 자작의 이야기가 나오자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수도에 사는 사람이나 그의 영지민 중에 자작의 도움을 받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던가? 가뭄에 그 저택에 찾아가면 밀 한 바가지라도 내주려고 노력하는 무척 선량한 귀족이었다.
“그 해독문 밑에 그분의 이름과 사인이 적혀 있었소! 직인까지! 그분께서 보증하는 것이 아닌가!”
“황제 폐하는 물론 대단한 분이시겠지만, 나는 내 아이가 아파 죽어 갈 때 의원을 내주었던 자작 각하가 거짓말을 하신다는 게 더 믿기지 않는군!”
“아, 거! 말이 그렇지, 실제로 지금 노한 신께서 악마의 병을 이곳저곳에 뿌리고 있지 않아!”
“그거 말인데 좀 이상하지 않나? 신께서 어떻게 악마의 병을 뿌린단 말이야?”
어딘가에서 나온 의문에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것도 그렇다. 신께서 노여워하시는데 왜 악마의 병이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거지? 언성을 높이며 싸우던 주점 사람들이 순간 모두 숙연해졌다.
“원래 만연한 병인데, 신께서 우리를 더는 보호해 주지 않으시는 건 아닐까? 그건…….”
“그럼 지금 쓰러진 자들이 전부 악마와 내통을 했단 말이오?”
“아, 뭐 그런 건…….”
“얼마 전에 쓰러진 내 애는 겨우 세 살인데! 세 살짜리 내 애가 악마랑 내통했다는 거야 뭐야!”
단숨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오. 그냥 그럴 수도 있다 이거지.”
벌겋게 취해 말을 했던 남자가 입을 다물고 슬슬 뒤로 물러났다.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던 술집은 이윽고 조용해졌다.
* * *
황좌에 앉아 있던 황제가 돌연 고개를 치켜들었다. 힘을 준 듯 뻣뻣한 목을 앞뒤로 흔든 황제가 이윽고 눈을 도르륵 굴렸다. 얼굴 근육이 망가진 듯 기이한 표정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셰인나이트의 봉인이 풀렸다.>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그 녀석이 죽어서 드디어 안심했는데……!>
혼잣말을 하다가도 마치 또 다른 사람처럼 걸걸한 목소리를 내다가 또 앳된 아이의 목소리가 황제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붉게 물든 황제의 눈은 자아를 잃은 듯 삐걱삐걱 눈동자가 돌아갔다. 흰자위에 핏줄이 드러날 정도로 눈동자를 까뒤집은 그가 꺽꺽거리며 고개를 미친 듯이 저어 댔다.
<누가 셰인나이트의 봉인을 풀었지?>
왼쪽으로 고개를 휙 돌린 황제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 숲에 있는 것은 손댈 수 없어!>
이번엔 오른쪽으로 고개를 휙 돌린 황제가 눈을 까뒤집으며 말했다.
<다음 숙주를 찾아야 하는 이 시점에…….>
고개를 아래로 숙인 황제가 비통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
<적합자는 어딨지? 강인한 육체는……?>
<그 검은 것이 조금만 자아가 약했어도 좋은 숙주가 되었을 텐데.>
이윽고 황제는 고개를 위로 벌떡 젖혔다. 목이 빠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강한 반동이었다. 황제가 온몸을 부르르 떨며 분노한 듯 소리쳤다.
<이번에야말로 셰인나이트를 없앤다!>
<이번에야말로 우리가 이 세계를 지배한다!>
<방해꾼은 사라져야지. 우리는 자유다.>
황제가 말했다. 아무도 없는, 밤만이 내려앉은 어둑한 알현실에서 붉은 안광을 빛내면서 그는 허공을 향해 쉼 없이 목소리를 냈다. 그의 뒤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 * *
“아델, 바쁘십니까?”
그녀의 방으로 올라와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들이민 헥시온은 책을 집필하느라 바쁜 아델을 불렀다. 여러 차례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어 결국 멋대로 문고리를 돌린 참이었다.
헥시온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그녀가 눈을 한차례 깜빡였다. 한 템포 쉰 뒤에야 목소리의 주인을 눈치챈 듯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헥시온, 갑자기 어쩐 일이에요?”
“요즘 하도 두문불출하시기에,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밤에는 보잖아요?”
혼자 자기 무섭다는 헥시온이 밤마다 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서 매일 밤 동침 아닌 동침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사실 ‘두문불출’이라는 단어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사실은 서글픈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헥시온이 냉큼 제 말을 뒤집었다. 아델이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들자 그가 무척 억울한 눈으로 양손을 쭉 내밀었다. 장갑을 끼고 있지 않은 그의 굳은살 박인 새하얀 손이 보였다.
“손이 왜……?”
아델의 경악이 담긴 시선이 헥시온을 향했다. 그녀는 헥시온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손을 뻗어 그의 왼손을 직접 더듬기까지 했다.
“……멀쩡, 해졌네요?”
“네. 셰인나이트에 대해서 정보를 얻기 위해 이것저것 해 보다가 칼럿병으로 인해 굳은 왼손을 살짝 찔러 봤는데, 순식간에 정화되어 사라졌습니다.”
헥시온이 손을 털어 내며 말했다. 축 처진 눈꼬리에 힘이 없는 것이 무언가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근데 무슨 부작용이 있나요? 왜 서글픈 일이에요?”
“저는 아델이 고쳐 주길 바랐단 말입니다.”
“……네?”
“아델한테 치료받고 싶었어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며 헥시온이 아델의 어깨에 이마를 문질렀다. 잔뜩 기운 빠진 목소리가 된 이유를 들은 아델 역시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무슨 이런, 웃기지도 않은 이유가 다 있는지.
“……농담이죠?”
“하늘에 맹세코 진심입니다.”
헥시온이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어찌나 진지한지, 아델은 진심으로 그에게 정신 차리라고 뺨을 한 대 때려 주고 싶을 정도였다. 아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굳이 치료 명목으로…….”
“그럼 치료 명목이 아니어도 됩니까?”
헥시온이 반색하며 말했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인 그녀는 부끄러움에 뒷목을 매만졌다. 보이지 않게 살짝 끄덕인 고개에 헥시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재미있는 일을 하나 생각해 봤습니다.”
“재미있는 일이요?”
짓궂음이 물씬 느껴지는 목소리에 아델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반문했다. 헥시온이 느릿하게 눈동자를 굴리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의 눈동자가 휘어졌다.
“내가 신의 대리인이 되어 볼까 합니다. 아니면 영웅의 후예라도.”
비뚜름한 미소를 지은 헥시온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셰인나이트로 칼럿병에 걸린 이들을 치료해 볼 생각입니다. 아델이 데려왔던 피아라는 아이처럼 수도 곳곳에서 칼럿병이 만연하고 있어요.”
“네. 세 번째 비석에 나왔던 기묘한 병에 걸린 병자들의 이야기 같습니다. 엉망진창이에요.”
하지만 엉망진창이라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는 거다. 속속들이 나오는 증거에 사람들은 흔들리고 있었다. 줄곧 신앙처럼 믿어 왔던 황실과의 괴리감에 이도 저도 못하는 중이 분명했다.
사람들이 흔들리고 황실을 의심한다는 것은 헥시온과 아델에게는 호조였다. 특히 최근 발표한 알리아 자작가의 직인이 찍힌 비석의 해독문이 큰 역할을 했다. 고고학자 협회는 전문성을, 알리아 자작가는 신뢰도를 높여 줬다.
악마의 병이라면서 아직 자아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아이들까지 병에 걸리게 한 것은 분명 바엘의 실책이었다. 셰인나이트는 칼럿병을 치료할 수 있다. 그것은 여러모로 이용할 가치가 있었다. 오래전, 바엘이 했던 그대로 헥시온 그가 직접 행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 비석에 나왔던 초대 황제처럼, 신의 대리인이 되어 볼까 합니다.”
“셰인나이트로 칼럿병을 치료하려고요?”
“네, 그쪽에선 똑같은 방법을 쓰려고 할 테니 그 방법을 내가 가로채 볼까 합니다.”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 상황을 보면 바엘이 그때와 같은 방법을 쓰려고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같은 일을 반복하기 전에 먼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사라졌던 건국검이라고 불리는 신검인 셰인나이트와 그걸로 악마의 병이고 불리는 병을 치료하는 안 좋은 소문으로 가득했던 황자라니. 제법 그림이 괜찮을 것 같지 않습니까?”
“헥시온, 악당 같아요.”
“사람의 목숨으로 장난치는 악마보단, 악당 쪽이 더 귀엽고 좋지 않습니까?”
헥시온이 아델의 침대에 걸터앉으며 그녀를 무릎에 앉혔다. 물론 헥시온의 말도 분명히 맞았다. 아델이 한차례 눈을 끔뻑이곤 짧게 숨을 뱉었다.
“그러네요. 그것도 좋은 것 같아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악마를 없애는 게 꼭 영웅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덧붙인 그녀의 목소리에 헥시온이 웃었다.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가볍게 깨물자 아델이 살짝 몸을 떨며 헥시온의 어깨를 밀었다. 헥시온이 순순히 그녀의 목덜미에서 입술을 뗐다.
“때론 악당이 거슬리는 악마를 없앨 수도 있으니까요?”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기꺼이 거슬리는 악마를 없애는 악당이 되어야겠군요.”
“그러게요.”
웃음을 터뜨린 아델의 대답에 헥시온이 미소 지었다. 제 품에 그녀가 있다는 것도, 손이 멀쩡해졌다는 것도, 복수가 코앞에 다가왔다는 것도, 모든 것이 그저 꿈처럼 느껴졌다.
“곧 황제 측에서 무슨 말이 있을 겁니다. 내가 지금부터 셰인나이트로 칼럿병을 치료하고 다니면 더 그럴 거고요.”
“네.”
“시위는 계속되고 황실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늘어났습니다. 아델이 없었다면, 비석을 해독하지 못했다면, 이런 종류의 복수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겁니다.”
그저 황실로 숨어들어 가거나 모아 놓은 정예와 함께 황실을 습격해 황제의 목을 베는 정도였을 거다. 그렇게 되었다면 반란이라는 명목으로 황제의 좌에 앉을 순 있었겠지만, 민심은 싸늘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델 덕분에 그 모든 것에 명분이 생겼다. 민심을 얻을 방법도 생겼다. 손에 쥔 셰인나이트는 바엘이라는 악마의 유일무이한 대적자였다.
“전부 아델 덕분입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한 일이었죠. 지금은…… 그냥 헥시온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아델이 곁에 있으면 난 언제까지나 행복할 겁니다.”
헥시온이 그녀의 등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이윽고 그가 한숨처럼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비비며 느리게 웃었다. 끝이 보이고 있다. 그 사실이 헥시온의 가슴을 쿵쿵 뛰게 만들었다.
“셰인나이트를 그런 용도로 써도 되는지 아델에게 허락받고 싶었습니다.”
“그건 헥시온의 것이잖아요.”
“하지만 뽑은 건 아델입니다. 나는 셰인나이트를 억지로 굴복시켰지만, 셰인나이트가 인정한 건 아델이었잖습니까?”
그의 말에 아델이 입가를 풀어 훌쩍 웃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헥시온의 목을 끌어안았다.
“써도 돼요. 헥시온이 쓰겠다고 한다면, 나는 말리지 않아요. 좋지 않은 일이라도 눈을 감을 거예요.”
“…….”
“헥시온은 내가 당신의 세계라고 했죠?”
“네.”
망설임 없는 대답이 아델의 입가를 절로 부드럽게 만들었다. 호선을 그린 입술 끝에 웃음이 맺혔다가 떨어졌다.
“내게 헥시온은 새로운 삶이에요. 우물 속에 있던 개구리를 헥시온이 꺼내 줬어요.”
“……내가 할 말을 아델이 하네요.”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볼에 입을 맞추고 헥시온의 입술이 이윽고 아델의 입술 위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마침내 눈두덩이 위에 내려앉은 보드라운 입술에 아델이 조심스럽게 얼굴을 비볐다.
“좋아해요, 헥시온.”
아델이 그의 목덜미를 힘껏 끌어안으며 말했다. 언젠가부터 익숙해져 버린 온기가, 이제는 곁에 없으면 눈을 감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온기가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다. 언제나 혼자였던 제 삶은 이제 그런 삶이 되었다.
“절대 어디 혼자 나가지 마십시오. 늘 호위가 따라다니곤 있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나가지 않는 편을 추천합니다.”
“아…… 그럴게요.”
아델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이 이윽고 고개를 살짝 모로 기울이며 입술을 맞부딪혔다. 이후로는 둘만의 시간이었다.
* * *
“도대체 왜 이쪽에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와그작 구기며 진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는 술집이나 여기저기에 섞여 들어 여론을 만들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인력을 전부 돌리는 등 수도 전역을 감시하고 있었다.
몇 차례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지만, 도리어 이쪽이 당해서 칼럿병에 걸린 자도 생겼다. 미리 고칠 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능력에 관해서도 알려 줘서 그런지 큰 동요는 없었지만 일반 시민들은 조금 달랐다. 두려움이 극도에 달한 자는 그 자리에서 재가 되어 사라지기도 했다.
대자보를 붙인 것도 각 마을에 소식을 전하는 것도 전부 정보 길드가 도맡았다. 어마어마한 거래 금액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 정도로 구르니 솔직히 무척 피곤했다.
‘심지어 아델의 얼굴은 보지도 못했고.’
한번 보려고 생각할 때마다 일 더미가 끊임없이 굴러들어 와 잠을 잘 틈도 없었다. 수도에는 거미줄처럼 수많은 헥시온과 진의 소식통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때때로 둘의 귀가 되었고 팔다리가 되어 주기도 했다.
수도는 지금껏 없을 정도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피해자들은 반은 신전에 매달렸다. 나머지 반은 어딜 믿어야 할지 몰라 불신에 시달리거나 혹은 알리아 자작가를 찾아가 도움을 요구했다. 알리아 자작가는 칼럿병에 걸린 이들을 위해 기꺼이 문을 열고 그들에게 음식과 의원을 제공했다.
[물밑 작업.]
방금 본 쪽지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성의도 안부 인사도 없는 짧디짧은 한 문장이다. 정말 거리낌 없이 부려 먹히고 있다는 걸 알기에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물밑 작업이라는 건 칼럿병의 치료법을 찾았다는 이야기였다. 이런저런 암호를 정할 때 미리 얘기를 해 주었다. 그때, 사전에 본보기로 치료를 받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지. 미리 치료받을 사람을 구해 놓으라는 이야기지만, 이쪽에서도 피해자가 나왔으니 사실 굳이 준비해 놓을 필요도 없다.
‘말만 전해 두면 되겠군.’
이쪽은 손이 부족한 실정이라 최대한 빨리 치료가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방법인지 한마디도 언급이 없다니. 쪽지에 그렇게 다양한 말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 쪽에 독에 당한 이가 몇 명이나 있지?”
“세 명입니다.”
“셋한테 전해. 내일 광장에서 피해자로서 숨어 있으라고. 파트너가 나와서 운을 띄우면 가장 먼저 뛰쳐나가서 연기하라고 해.”
“네.”
“몸이 나으면 다시 하던 일로 복귀하라고 하고.”
“알겠습니다.”
인적 드문 골목에서 두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말을 하는 건 일방적으로 진 쪽이었지만, 어쨌든 상대는 그 이야기를 경청하고 허리를 굽힌 후 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진은 그대로 건물 벽에 기댄 채 팔짱을 꼈다. 늘 도와줘야만 했던 소녀는 스스로 역할을 찾았다. 혼자서 서 있을 수 있게 됐고 돌아갈 곳이 생겼다.
“아무것도 못 해 준 사이에 혼자 날 수 있게 되어 버렸군.”
죽었다고 생각한 사이에 상처 입었고 성장했고 어느새 다른 보금자리를 찾아갔다. 그녀를 위한 자리는 언제고 마련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뭐가 달랐던 거지?’
그 희멀건 샌님처럼 생긴 남자와 자신은.
몇 번이고 오기를 권했다. 그녀가 제 영역으로 들어오면 얼마든지 지켜 줄 수 있었다. 그러고 싶었고 그러길 바랐다. 그러나 어릴 때도 고집이 세서는 꾸역꾸역 권할 때마다 고개를 젓고 만다. 며칠을 꼬박 굶어도 챙겨 주지 않으면 한 번을 도와 달라고 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러다 죽어 버릴 것 같아서 불안했던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뭐든지 혼자서 해낸다고 생각했더니.”
그런 얼굴로 웃고 그런 얼굴로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팔짱을 낀 진이 느리게 벽에서 몸을 뗐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을 거다. 뒤를 돌아본다고 해도 그놈은 예상한 듯 그녀가 돌아볼 그 자리에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서 있을 테고.
“생각하니 열 받는군.”
일이 끝나면, 진심으로 그 얼굴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 눈을 가늘게 뜬 그가 이윽고 골목길을 떠났다.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이 쓸쓸하게 보였다.
* * *
“뭔 일 있어?”
“뭐가 이리 시끄럽나?”
품에 물건을 가득 안고 있던 사람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퍽 버거운 모양새였지만, 광장 가득 바글바글 모인 인파에 흥미가 당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 그 칼럿병 말이야! 그 악마의 병! 그걸 고칠 수 있다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말 아니야!”
“뭐?”
“자네 부인도 그 병에 걸렸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랬지. 근데 누가?”
멍한 얼굴로 남자가 되묻자 대답을 해 준 사내가 도르륵 눈동자를 굴리더니 눈치를 살폈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허리를 굽혀 남자의 귓가에 소곤소곤 속삭였다.
“그, 왜 저주받았다고 유명한 황자님 계시잖나?”
“근데, 지금 저기 계신 분이 그분이라고 하더구먼. 심지어 무려 전설 속에만 있는 줄 알았던 그 건국검을 가지고 나타나셨어.”
남자가 한 박자 쉬곤 눈을 도르륵 굴렸다.
“듣자 하니 저분도 그 칼럿병에 걸렸다가 완치했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
이야기를 들은 남자는 물건을 한쪽 구석에 던지듯 내려 두곤 인파를 뚫고 중심부를 향해 힘겹게 나아갔다. 중앙에는 다리를 절뚝이거나 상반신이 돌처럼 굳은 사람들이 어두운 낯으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가운데 새까만 옷을 입은, 수려한 미남자가 새하얀 검을 손에 쥔 채 예리해 보이는 칼끝을 칼럿병에 걸린 부위에 가져다 대며 살짝 찔렀다.
콰득!
어디선가 균열이 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파열음과 함께 돌처럼 굳었던 팔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변해 갔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던 남자는 눈을 크게 뜬 채 자리에서 방방 뛰며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세상에.”
긴가민가한 마음으로 모였던 이들이 눈을 큼직하게 떴다. 모두가 눈을 비비고 믿기지 않는 광경을 바라봤다. 돌처럼 굳은 부위를 찌르는 순간 새하얀 검이 무언가 빨아들이더니 순식간에 팔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병이 완치된 것이다.
헥시온은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보여 주듯 준비된 진의 부하 두 명을 더 같은 방법으로 치료했다. 사기 치지 말라며 코웃음을 치려고 왔던 사람들이 경악하며 앞다퉈 칼럿병에 걸린 제 가족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황자 전하! 황자 전하!”
아이를 품에 안은 남자가 다급하게 달려와 헥시온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남자가 뚫은 인파 뒤로 경악한 여인도 함께였다.
“우리……, 우리 애도 치료해 주세요! 제발요!”
“물론입니다.”
헥시온이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살갑게 휘어진 눈매가 무척 다정했다.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입꼬리로 그가 거리낌 없이 병에 걸린 아이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장갑을 끼지 않은 굳은살 박인 손이 아이에게 닿았다. 아이의 왼쪽 팔다리가 칼럿병으로 인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헥시온이 셰인나이트를 힘주어 쥐자 셰인나이트가 단검처럼 작게 줄어들었다.
“세상에, 진짜 건국검 아니야?”
“새하얀 검은 지금까지 본 적도 없어!”
“검이 줄어든다는 얘기는 듣도 보도 못했고.”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헥시온이 느릿하게 눈을 굴렸다. 주변에 보이는 호위 기사 외에도 정보 길드와 그 수하들이 광장 전역에 쫙 깔려 있다. 인파 사이에도 섞어 둬서 선동하라고 해 뒀고 효과는 제법이었다.
헥시온이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작아진 셰인나이트로 아이의 칼럿병 부위를 느릿하게 찔렀다. 아이의 부모가 잔뜩 긴장한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아이는 칼에 찔렸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러운 표정 한 번 짓지 않았다. 눈을 멀뚱히 뜨고 있던 아이의 몸에서 순식간에 회색빛이 사라져 갔다.
“움직여 보렴.”
헥시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가 눈을 질끈 감고 제 팔다리를 움직이더니 이윽고 홉뜬 눈으로 고개를 젖혀 헥시온의 눈을 바라봤다.
“해 보렴, 제시.”
부모의 말에 그제야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프지 않아요.”
“다행이군. 아이는 괜찮아졌으니 이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헥시온이 다시 검을 위에서 아래로 휘두르듯 내리긋자 검이 길어지더니 이윽고 다시 장검으로 바뀌었다. 헥시온이 검을 제 허리춤에 끼워 넣었다.
쿵!
아이를 품에 안고 있던 남자와 그 뒤에 서 있던 여자가 돌연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거세게 박았다.
“세상에…… 제시, 세상에, 아아.”
고개를 바닥에 박은 남자가 울먹이며 말했다.
“신이시여……. 아아, 황자 전하,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함께 주저앉은 여인이 그 곁에서 아이를 끌어안은 채 연신 고개를 숙여 댔다. 순식간에 광장은 난장판이 되었다. 헥시온은 그 사이에서 느리게 미소 지었다.
* * *
“이봐, 자네. 어제 연설 들었어?”
“들었지. 세상에…… 황제 폐하께서 그런 끔찍한 짓을 하셨을 줄이야.”
속닥거리는 작은 목소리에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내가 맥주잔을 거칠게 내려놨다.
커다란 소리와 함께 얼굴이 벌게진 사내가 고개를 휙 젖혔다.
“황제 폐하는 무슨! 어제 황자 전하 말씀이 사실이면, 그들이 황제인가! 사기꾼이지!”
“이 사람아! 당장 목소리 안 낮추는가! 황실 기사단이 매일매일 순찰을 돌면서 잡아가고 있는 거 모르지 않잖나!”
“알 게 뭔가!”
“이봐, 자네가 참아. 어제 저치 아들 하나가 황실 기사단에 끌려갔네.”
그 말에 사내를 말렸던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술집은 여느 때와 다르게 숨죽인 듯 조용했다. 모두가 속닥거리며 떠드는 말소리에선 두려움이 진하게 느껴졌다.
“바로 어제만 해도 술에 취해서 황제를 욕했던 사람이 처형당했지.”
“저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니 정말 황자 전하께서 하신 말씀들이 사실일지도 모르겠어. 아니, 사실일 거야. 아니면 저렇게 마구잡이로 잡아서 처형을 할 리가 있나!”
“그것도 그렇지.”
지난 일주일간 쉬지 않고 광장을 비롯한 수도 전역에 나타나 칼럿병을 치료한 헥시온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황제는 헥시온을 잡아들이기 위해 몇 차례 병사를 파견했으나 그는 만만치 않았다. 저택까지 쳐들어온 황실 기사단을 피해 알리아 자작가에 몸을 위탁한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소문의 중심에서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헥시온의 목에는 현상금까지 걸렸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게다가 황실 기사단 열이 덤벼도 그를 이기기엔 무리였다. 알리아 자작가도 그를 비호하고 나서니 민심의 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는 자명했다.
알리아 자작은 저택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헥시온의 기사단과 진의 길드원들, 그리고 알리아 자작가의 기사들이 각자 돌아가며 저택의 경비를 한껏 강화했다.
그리고 헥시온은 적당히 각색한 이야기를 연설하는 것으로 대중의 민심을 샀다. 어릴 적부터 황제의 이상한 지하실에 갇혀 칼럿병에 걸린 뒤론 살기 위해 그의 명령에 따랐다는 것부터, 따르지 않으면 끔찍한 고통에 시달렸다는 것까지.
셰인나이트를 구하기 위한 과정과 함께 고대어를 해독했던 아델이 영웅 훅센라이트의 후손이라는 것까지 밝히자 반응은 뜨거웠다.
눈앞에서 악마의 병이라고 불린 병을 치료한 그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황제를 의심했기 때문에 신이 진노하여, 악마의 병을 흩뿌린다는 아귀가 맞지 않는 내용보다는 증거도 증인도 있는 헥시온의 이야기가 훨씬 더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칼럿병이 번지는 속도는 연일 빨라지고 있었다. 황성은 제국민을 억압하고 신전은 침묵했다. 사람들은 신전에 발길을 두는 것보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헥시온을 찾아 수도 전역을 누비고 다니는 쪽을 선택했다.
신도를 비롯한 제국민의 발길이 뚝 끊긴 신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했다. 어디까지나 황제의 명령으로만 움직인 꼭두각시들은 지금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혼자서 움직이는 것도 할 수 없게 됐다.
“차라리 정말 황자 전하께서 이 나라의 왕이 되어 주신다면…….”
“알리아 자작님께서도 인정하시는 분이 아닌가.”
“정말 사실이라면…….”
작은 목소리들이 조금씩 조금씩 목소리를 키웠다. 서로 눈치를 보기 바쁜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차라리 우리 모두가 함께 시위를 가는 건 어떤가?”
“시위?”
“그래!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 번에 몰려가면 제아무리 폐하라고 할지라도 무슨 일을 저지르시겠나? 여기 있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좀 더 많은 사람을 모아서 말이네!”
한 사람이 목소리를 키우자 여기저기서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눈치만 보는 사람이 많았다. 말없이 술만 들이켜고 있던 황제를 사기꾼이라고 지칭했던 남자가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찬성이야!”
일어난 남자가 고개를 푹 숙였다.
“내 아들…… 내 아들이 어찌 될지도 모르는 마당에…….”
한평생 거친 일을 해 투박하고 두툼해진 손으로 사내는 제 얼굴을 가렸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그 모습에 술집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먼 이웃나라의 왕은 무척 폭군이었는데, 우리 같은 국민이 시위를 해서 왕을 끌어내리고 새 왕을 추대했다고 하더군!”
“그런가?”
한 사람이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자 남자가 곧장 그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적막한 술집이 한층 더 고요해졌다. 이윽고 모두가 입을 다물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시위를 제의한 사내뿐이었다.
* * *
“이게 옳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알리아 자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황제가 하는 일이 옳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론을 형성하고 제국민을 이용하는 것이 잘하는 일이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그렇다고 자신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옳은 일로 만들면 되는 일이죠. 자작도 어차피 여기까지 발을 들였으니 빼긴 늦었습니다. 포기하시죠.”
“발을 빼는 건 이미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국민이 피해를 입는 것 또한 반대입니다.”
“……자작은 지금 자기가 이상적인 말을 하고 있는 걸 알고 있습니까?”
“…….”
어둑한 밤, 술잔을 기울이며 헥시온이 싸늘하게 말했다. 이상적인 이야기만 할 수 있었다면 애초부터 시작하지 않았을 일이다. 그리 칭송받았던 영웅도 큰일을 이뤄 낸 위대한 학자도 모두 실패와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뤄 낸 것이다.
“희생이 없는 대의라……. 듣기엔 좋네요.”
헥시온이 사람 좋게 빙그레 웃었다.
“저도 그런 방법이 있다면 기꺼이 그 방법을 따르고 싶군요. 좋은 의견이 있으면 부디 자작께서 말해 보십시오.”
부드럽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일순 싸늘해지더니 곧 비웃음을 띤다. 알리아 자작이 애꿎은 잔을 꽉 쥐곤 짙은 주황빛의 액체를 벌컥 마셨다. 뜨거운 것이 목을 태울 듯 긁으며 목구멍을 넘어 위로 내려갔다.
“성공 확률이 지금처럼 높다면 저 역시 기꺼이 지금까지 벌인 판을 뒤엎겠습니다.”
헥시온의 말에 알리아 자작이 입을 다문 채 숨을 삼켰다. 그는 더 말을 덧붙이지 못했다. 싸늘한 헥시온의 시선 속에 엿보이는 책망이 매서웠다. 그는 올곧음을 몸에 담고 절약을 생활화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귀족으로 태어났으니 그에 따른 책임이 따른다고 굳게 믿었다. 실제로 그와 같은 귀족이 있으니 이만한 제국이라도 큰 불만 없이 굴러온 것이다. 헥시온은 그런 그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당신의 신념을 깔아뭉개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난 알리아 자작께서 앞으로도 그 자리에 있길 바랍니다.”
“…….”
알리아 자작이 기묘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헥시온을 바라봤다. 일이 급해 그를 협박하듯 이번 일에 참여하게 했지만, 헥시온은 그와 적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도리어 개인적으로는 그에게 호의적이기까지 했다.
“자작께선 그 자리에서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국민의 기둥이 되어 주시면 됩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정리해서 내게 알려 주시면 됩니다. 나는 그럼 그것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헥시온의 말에 알리아 자작의 눈이 커졌다. 잘게 떨리는 동공 속에 짙은 동요가 자리 잡았다. 동요가 불신이 되고 불신 속에 약간의 기대감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알리아 자작이 오랜 시간 국민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그것을 안건으로 올렸던 사실을 헥시온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 황제는 그것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권력은 너무 강했고, 귀족들은 그런 그에게 반항할 생각보다는 입 안의 혀처럼 굴고 그 앞에서 꼬리를 흔드는 것을 택했다.
당연히 알리아 자작의 의견은 받아들여진 적보다 대놓고 비웃음당하는 용도가 된 적이 훨씬 많았다. 그런 그에게, 헥시온의 말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간언하십시오. 그게 어떤 말이라도 자작에 한해서는 귀 기울여 듣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달콤한 미끼가 눈앞에서 흔들렸다.
“……어째서, 그런 말로 저를 홀리려 하십니까?”
“홀리다니……, 난 일편단심 아델뿐입니다만.”
웃음기를 머금은 헥시온의 말에 알리아 자작이 벌겋게 물든 얼굴로 여러 차례 헛기침을 뱉었다.
“농담입니다.”
건조한 헥시온의 말에 알리아 자작이 무척이나 떨떠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이라고 하기엔 얼굴이 무표정했다. 헥시온이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자작이, 얼마나 이 제국을 소중히 여기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입니다. 본인 배를 불리려고 했다면…… 당신은 이미 지금보다 더 높은 지위나, 부를 얻었겠지요.”
믿음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바라는 것 없이, 이 제국을 지켜 온 자작을 믿습니다.”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헥시온의 무심한 말에 알리아 자작이 시선을 떨구며 주먹을 쥐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 바라 왔던 말인가? 얼마나 오랜 시간 듣고 싶었던 말이었던가?
그가 바란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힘들어 하는 백성에게, 제 말에 귀를 기울여 줄 사람이 필요했다. 제가 올린 안건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비웃으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아니라.
헥시온이 격의 없이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장갑도 끼지 않은 새하얀 손은 굳은살과 상처로 가득했다. 알리아 자작이 물끄러미 그 손과 헥시온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번에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까?”
“……아뇨.”
아래로 떨궜던 손을 든 알리아 자작이 헥시온의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헥시온이 옅은 미소를 띤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동안 시끄럽고 귀찮긴 하겠지만, 내 부하도 진의 녀석들도 실력은 출중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자작가의 기사들도 뛰어납니다.”
알리아 자작의 말에 헥시온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곤 웃었다. 발판은 거의 다 깔렸다. 남은 문제는 황성에 어떤 식으로 들어가야 여러모로 좋을까 하는 것 정도다.
‘……황제가 잠잠한 게 제일 신경 쓰인단 말이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영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네, 들어가십시오. 저도 한 잔만 더 하고 들어가겠습니다.”
헥시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그의 집무실에서 빠져나왔다.
* * *
“아델?”
“……헥시온?”
“늦은 시간에 어딜 다녀오십니까?”
“이 뒤에 정원이 있다기에 잠이 안 와서 바람 쐬러 다녀왔어요.”
아델의 말에 헥시온이 쓰게 웃었다. 아델은 요즘 거의 밖에 나가지 못했다. 한껏 날이 선 수도 분위기를 알게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황제의 마수가 어디서 어떻게 뻗쳐 올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안합니다. 많이 답답하죠?”
“괜찮아요. 괜히 돌아다니다가 헥시온이 간신히 펼쳐 놓은 판을 뒤집고 싶지 않거든요.”
아델이 어깨를 으쓱였다. 무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녀가 괜히 호기롭게 뛰어들어 봐야 참전할 수 있는 판이 아니었다. 그녀의 역할은 비석을 해독하고 셰인나이트를 뽑는, 딱 거기까지였다.
“일이 전부 끝나면, 마지막 비석을 해독하러 가도 될까요?”
“물론이죠.”
헥시온이 조심스럽게 물어 오는 아델의 입술 끝에 살포시 입술을 맞추며 대답했다. 언제나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하던 아델이, 지금은 그에게 묻고 그의 의견을 구하게 됐다. 끌어안으면 자연스럽게 몸을 기대어 오는 별것 아닌 움직임 하나가 그의 심장을 얼마나 떨리게 하는지, 그녀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한 방이 필요합니다. 황제가, 걸어 잠그고 있는 문을 풀고 모습을 드러낼 한 방이.”
확실히 그가 ‘악’이라는 것을 증명할 것이 필요했다. 지금껏 황제는 칼럿병으로 사람의 선악을 판단했다. 그가 저지른 일이지만 조금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일 수 있는 증거가 필요했다.
“황제의 목은 내가 벨 겁니다. 그 후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나와 당신의 삶을 체스 판에 올린 이들을 처벌할 거고요.”
아델의 귓가에 헥시온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알아서, 그녀가 말없이 웃었다. 지독한 악몽이 긴 시간을 넘어 드디어 끝이 난다는 얘기였다.
“기분이 좋아야하는데, 이상해요.”
“그들이 무릎 꿇고 바닥을 구르며 당신을 올려다보는 상상만 하십시오. 아델은 힘들었던 만큼 행복해질 테니까요.”
헥시온이 아델의 귓가에 달래듯 속삭였다. 그녀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헥시온은 어때요? 괜찮아요?”
“네, 전에 없을 정도로 기분도 컨디션도 최고입니다.”
헥시온의 이가 드러났다. 사납게 보이는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녀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마음에 든다고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델.”
“네?”
“이 일을 전부 마무리하더라도 정말 제 곁에 있어 주실 겁니까?”
“……?”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나운 기세가 넘실거리더니 어느새 또 어린아이 같은 분위기로 바뀌었다.
“……아니, 곁에 있어 주십시오. 아니……. 그, ㄱ…….”
입술을 뻐끔거리던 헥시온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얼굴을 벅벅 문지른 그가 고개를 돌렸다.
“아닙니다. 일이 다 끝나고, 정리되면 그때 말하겠습니다.”
“알겠어요.”
“곧 시위가 일어날 겁니다. 황성은 시끄러워질 테지만, 귀족들은 입을 벙긋도 못 하겠죠. 그에게 밉보이면 안 되니까요.”
헥시온이 느리게 웃었다. 느른하게 풀린 입술 끝이 올라가는 장면은 몇 번을 봐도 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가 아델의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윽고 짓궂게 웃었다.
“키스를 하고 싶으면 그렇게 집요하게 보지 않아도 해 드릴 수 있습니다.”
허리를 굽힌 헥시온이 어느새 입술을 아델의 코앞에 가져다 댄 채 말했다. 숨결이 느껴지는 가까운 거리에도 아델은 당황하지 않았다. 헥시온의 시선을 한 번 마주하곤 곧 방긋 웃었다.
“좋아요.”
아델이 냉큼 헥시온의 목을 끌어안은 채 그의 입술 위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깃털이 내려앉았다가 후다닥 떨어진 정도였지만, 그녀가 먼저 다가와 입을 맞춘 것은 처음이었다.
“……깃털도 아니고 너무 가볍습니다.”
헥시온의 입술 사이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델이 낮게 웃음을 터뜨리곤 한 걸음 물러났다.
“나머지는, 일 다 끝내고 해요.”
“……그땐 키스만으론 끝나지 않을 겁니다.”
헥시온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으르릉거리는 낮은 울림에도 아델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좋아요.”
헥시온이 졌다는 듯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짚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약속했습니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확답을 요구했다. 아델이 가볍게 고개를 주억이며 수긍했다.
“황제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래요?”
“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일단 베고 보았습니다. 귀족들이 설설 기는 데엔 분명 그런 이유도 있겠죠.”
“……그렇다고 귀족을 전부 잘라 내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그냥 두진 못하겠지만, 살릴 사람들은 살릴 겁니다. 벌써 황제를 뒤로하고 제게 접선해 온 이들이 제법 있습니다.”
아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얘기는 듣질 않아서 전혀 몰랐다. 헥시온이 그녀의 손을 붙잡고 천천히 방을 향해 걸어가며 입술을 달싹였다.
“최근 좀 정신이 없어서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습니다. 원래부터 황제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나 적어도 눈치는 있는 쪽이죠.”
“나머지는요?”
“혼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꼭두각시를 굳이 세워 둬야 할 필요성은 못 느끼겠습니다.”
슬쩍 고개를 기울인 채 여상하게 내뱉는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쓰게 웃었다. 그는 잔인하다. 허용치를 넘어선 것에 대한 자비는 없다. 그러나 그 모습까지 인정하기로 했다. 그 모습마저 시선을 뗄 수가 없어서 그녀는 말을 아꼈다.
“황제는 제 것이라고 마음먹은 것들이 빠져나가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귀족들이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간 걸 알았다면, 아마 곧 움직이겠지요.”
“……집착이 심하다고 했죠?”
“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제 소유가 아닌 것들을 싫어합니다. 평생 그를 지켰던 기사단장도 팔을 잃어야 했고 나 역시도 그에게 생명을 담보로 잡혔으니까요.”
어느새 방에 도착했다. 헥시온이 그녀의 방 앞에 선 채 문을 열었다. 아델이 안으로 들어선 후 인사를 건네려고 하자 그는 자연스럽게 그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뭐예요? 헥시온 방은 옆이잖아요.”
“네, 근데 너무 피곤해서 옆방까지 갈 기력이 없습니다.”
아델의 손을 잡은 헥시온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녀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눈을 끔뻑거리는 사이 재빠르게 재킷을 벗어 던지고 그녀의 어깨에서 숄을 빼내 의자에 올려 둔다. 그러고는 아델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대로 이불 속에 몸을 푹 파묻었다.
“아, 피곤합니다.”
“제가 저 방으로…….”
“안녕히 주무십시오.”
아델을 팔다리로 꼭 껴안은 헥시온이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눈꺼풀이 미동도 하지 않는’ 그의 품속에서 이리저리 바르작거리던 아델이 결국 포기하고 몸의 힘을 풀었다.
헥시온이 귓가에 대고 낮게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한숨을 내쉰 아델이 불편한 듯 몇 차례 몸을 비틀다가 이윽고 헥시온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그가 그녀의 숨이 고르게 퍼질 때까치 한쪽 팔을 벤 채 아델의 등을 쓸어내렸다.
* * *
“그것이 배신했어.”
“그것이 배신했다!”
까득, 까드득, 목이 기묘한 방향으로 꺾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징그러울 정도로 이리저리 돌아가는 황제의 목은 꺼림칙하기 그지없었다.
“진즉 양분으로 삼아 먹었어야 했다.”
“인간이 배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황제가 양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 사방팔방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가 머리를 깨질 듯 아프게 했다.
“셰인나이트가 돌아왔어.”
“영웅이 돌아왔어. 그것의 핏줄이 살아 있었어!”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내 것과 만나게 해서는 안 됐어!”
굵은 목소리가 나왔다가도 또 얇은 여자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하고 또 젊은 청년이었다가 늙은 노인이 되기도 했다. 텅 빈 대전 안에서 황제는 눈동자를 까뒤집은 채 한참이나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목을 돌리기 바빴다.
“시끄러운 것들을 먼저 처리하자.”
“본때를 보여 줘야 해.”
“나는…….”
“신이다.”
삐걱거리며 이리저리 움직이던 목이 정면을 향해 뚝 멈췄다. 고장 난 듯 눈조차 깜빡이지 않는 황제가 붉은 눈동자를 형형하게 빛내며 입을 쭉 찢어 웃었다.
“내가 신이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주변으로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며 주변을 집어삼켰다.
“폐하, 지금 바깥…….”
황급히 들어오던 대신 하나가 허리를 굽히기도 전에 제 발밑을 꾸물거리며 맴도는 새까만 것을 바라보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무감정한 붉은 눈동자가 생긋 웃으며 남자를 바라봤다.
“폐……하……? 이건 무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새까만 안개가 순식간에 대신의 다리를 감싸더니 돌처럼 딱딱하게 굳히기 시작했다. 대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으아아악!”
“시끄럽구나.”
“폐하, 폐하! 살려, 살려 주십시오! 폐하!”
남자가 필사적으로 손을 허공에 휘저었지만, 황제의 얼굴은 무감각하기 그지없었다. 차가운 눈동자가 무심하게 필사적인 대신을 훑고 관심 없다는 듯 비껴갔다.
“……시끄러운 게 너무 많아.”
“응, 청소를 해야지.”
황제의 목소리였다가, 순식간에 앳된 아이의 목소리가 되었다. 그사이 완전히 돌덩이가 된 대신은 이윽고 재가 되어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사라졌다. 황제가 느린 걸음으로 대전을 빠져나갔다. 붉게 물든 카펫 위로 잿더미가 쌓여 있었다.
* * *
“아침부터 뭡니까? 노크도 없이.”
아델을 품에 안은 채 잠을 자고 있던 헥시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뒤척이는 아델의 목 아래까지 이불을 푹 덮어 준 그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창문 근처에 기대선 검붉은 머리카락의 사내가 보였다.
“태평하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굴려 놓고선.”
진이었다. 진은 퉁명스럽게 말을 꺼냈다.
“받은 만큼은 일을 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쯧.”
팔짱을 낀 진의 시선이 곤히 잠을 자는 아델에게 잠시 닿았다. 그의 눈동자가 굴러가는 방향을 본 헥시온이 반사적으로 아델의 머리까지 이불을 덮어씌웠다.
“뭘 봅니까?”
“내 친구도 못 보나?”
“제대로 눈 떴을 때 보십시오. 훔쳐보지 말고.”
“그럴 만한 시간도 주지 않으면서, 어디서 개소리를 지껄여?”
진이 눈을 매섭게 뜬 채 으르렁거렸다. 잠깐 틈이라도 내려고 하면, 그사이에 냉큼 일을 들이미는 게 어느 쪽이었던가? 헥시온이 무심한 눈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뭡니까?”
“이번 주가 지나면 시위가 시작될 거다. 판을 깔긴 했는데, 몸을 사리는 이들이 많아서 설득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려.”
“하긴. 그럴 만도 합니다. 황제는 공포를 이용하는 법을 잘 알고 있거든요. 대놓고 처형까지 감행했을 정도니까요.”
헥시온이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들은 들고일어날 거다. 당장 눈앞의 죽음보다 황제의 억압이 더 두려울 테니까. 평생을 저당 잡히는 것보단 눈앞에 있는 희망의 끈을 붙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황성 내의 분위기가 엉망이라더군. 그림자 하나가 전해 왔어.”
“엉망이라니요?”
“조금이라도 심기를 어지럽히거나 의사에 반하는 이들은 그대로 죽인다고 하더군. 보고서에 따르면 그 모습이 칼럿병의 마지막과 같았다고.”
“……돌이 됐다는 겁니까?”
“그대로 재까지.”
진의 말에 헥시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궁지에 몰린 것은 분명했다. 황제가 저 정도로 제 패를 드러낼 줄이야. 제 삶을 평생 짓누른 자가 사실은 별것 아니었음을 발견할 때마다 스스로의 삶이 불쌍했다.
“아무래도 그 상대를 가리지 않는 것 같아서, 그림자에겐 적당히 상황을 봐서 빠져나오라고 명령했다.”
“그렇습니까?”
“사실 그것도 요원할 것 같더군. 황제가 황성에 들어온 이들을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는 모양이야.”
진의 말에 헥시온의 미간이 좁아졌다. 황성에 들어온 이들을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니.
“살얼음판이라고 해. 황제의 말에 감히 말을 얹는 사람은 없고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귀족도 시종 시녀도 필사적이라더군.”
“그 남자는 원래 그럽니다. 자신에게 복종하고 굴종하는 이들을 발밑에 두며 꿈틀거리는 걸 즐기지요.”
배신이라는 단어에 얼마나 치를 떠는지 모른다. 황제 본인이 싫어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안에 있는 바엘이 싫어하는 것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어차피 지금까지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놈들은 살릴 생각 없었습니다. 제 손 더럽히지 않고 알아서 처리되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죠.”
헥시온이 무심하게 말했다. 황제가 움직였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헥시온이 가볍게 목을 움직여 스트레칭을 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까지 나와 저 애를 엮이게 해 놓고 실패하면 넌 나한테 죽을 거다.”
“당신 실력으론 무리입니다.”
헥시온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진이 그를 한차례 흘기곤 다시 창문을 밟고 섰다.
“시위가 일어날 때 주변 경호나 잘 부탁드립니다. 황제가 강경 수단으로 나올 것이 거의 분명하다고 보면 됩니다.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
헥시온의 설명에도 진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가볍게 날아오른 몸은 생각보다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창문 아래를 한 번 내려다본 헥시온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헥시온이 여전히 잠을 자는 아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조용히 일렁거렸다.
* * *
정확히 사흘 뒤, 진이 예견했던 시위가 일어났다. 단순히 시위라고만 하기보다는 폭동에 가까웠다. 수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반이 넘게 참가했을 정도로 규모가 무척 컸다.
그들은 황성 앞에서 사흘 밤낮을 시위를 벌였다. 나머지 반은 침묵을 유지하는 신전에 쳐들어가 그 안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시위를 준비하는 사흘 동안, 수도에는 칼럿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것이 더 힘들어졌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을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고 밤을 새워 가며 치료를 해 준 헥시온에게 시민은 감화했다. 시민은 여전히 침묵하는 신전과 황성에게 단단히 화가 났다. 그 심리를 헥시온의 측근들은 여지없이 이용했다.
알리아 자작가는 헥시온의 일러두었던 대로 식량이나 물자를 지원했다. 그의 진두지휘 아래 헥시온의 밑으로 들어온 다른 귀족들 역시 창고를 열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시민이 아무런 걱정 없이 시위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귀족들의 지원을 받자 시위는 더 빠르고 거세게 진행되었다. 수도는 전역이 거의 시위의 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시민은 경비를 도는 황실 기사단에게 오물을 던졌다. 병사들은 봉변을 당하지 않기 위해 슬금슬금 황실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황성 앞에는 매일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목이 터져라 황제의 해명과 양위를 요구했다. 침묵하는 황성에는 당연히 비프타 공작가도 끼어 있었다. 물론, 그들은 황제를 옹호한다기보다는 이혼 서류를 두고 집을 나간 공작 부인을 포함해 다른 상황에 바빠 정신이 없었다는 것이 더 옳았다.
그리고 마침내, 일주일의 시위 끝에 황제가 황금으로 된 황좌에서 일어났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짜증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폐하?”
황제가 굳게 닫혀 있던 황성의 문을 열었다.
* * *
갑작스럽게 황궁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문틈으로 황금관을 쓴 사내가 나왔다. 그는 두툼한 붉은 망토를 두른 채 나른하게 걸었다.
황제였다.
설마 황제 본인이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좌중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저게 황제 폐하?”
“기분 나빠…….”
황제의 뒤로 시커먼 그림자가 길게 빠져 넘실거렸다. 그의 주변에는 새까만 안개가 흩날렸다. 온몸에 시커먼 기운을 두른 채 그는 천천히 시위자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쿵.
그가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주변에 있는 식물들이 돌이 되었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바스러져 사라졌다.
처음에는 작은 들꽃이.
두 번째엔 무성하게 자라 있는 잡초가.
이윽고 황성에 심은 나무마저 집어삼키며 잿더미로 만들었다.
“주제도 모르고 신에게 대드는 족속 따윈…….”
황제가 기이하게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바들바들 떨며 한 걸음 물러났다. 황제는 그걸 보면서 빙긋 웃었다.
“청소하고 다시 키워야지.”
말 잘 듣는 것들로 말이야. 달콤하게 덧붙이는 목소리는 앳되면서도 무척 서늘했다. 황제가 시위대가 모인 자리로 조금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검은 안개가 주변의 사람들을 감쌌다.
“이게 뭐…….”
검은 안개에 둘러싸인 사람이 순식간에 돌덩이가 되었다. 황제가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돌덩이를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방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이었던 돌이 순식간에 재가 되어 바람에 흩어졌다. 누군가 얼음물을 끼얹은 듯 주변이 조용해졌다.
황제가 웃었다.
“꺄아아아악!”
“사, 살려……!”
“도망 가아아!”
사람들이 혼비백산해서 이리저리 흩어지기 시작했다. 황제가 쥐 새끼처럼 도망가는 사람들을 보며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공포가 느껴진다. 배가 부를 정도로 짙은 공포심에 황제의 눈동자가 한층 더 벌겋게 물들었다.
“주제를 몰라, 주제를.”
“인간은 바퀴벌레만큼이나 끈질겨.”
“신을 거스르는 자는 죽는 게 당연하지.”
황제가 제자리에 우뚝 선 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작은 목소리에다 잔뜩 뭉개진 발음이라 근처에 있지 않으면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한차례 중얼거림이 끝나고 고개를 번쩍 든 황제의 주변에서 새까만 안개가 사방팔방으로 뛰쳐나가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붙잡았다. 붙잡힌 사람들은 돌이 되고 곧이어 재가 되었다.
바엘이 황제의 몸에서 폭주했다. 한동안 폭주한 정신이 몸을 막 다룬 탓인지, 황제의 몸은 안쪽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어차피 오래 쓸 수 없다면, 청소 도구로라도 사용하면 그만이었다.
“황자 저하!”
시위에 나온 이들을 학살하며, 황제는 웃었다. 살겠다고 몸부림치며 공포에 질린 이들이 비명을 내지를 때마다 제 힘이 강해지는 걸 느꼈다.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충족감에 황제는, 바엘은 미소 지었다.
“헥시온, 그 겁쟁이는 오지 않을 거야.”
바엘은 상대를 절망보다도 더한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잔인하게 속삭였다.
“네놈들은 이용당한 거지. 그걸 아직도 모르다니, 이래서 아둔한 너희들은 내 밑에서 가축처럼 살 수밖에 없는 거다.”
바엘이 이를 드러내며 그들을 비웃었다. 작은 희망에 잠겼던 눈동자가 공포에 질리고 피부가 새하얗게 질리는 것을 여유롭게 관찰했다.
“신을 의심한 대가로, 네놈들은 오늘 죽을 거다. 처절하고, 비참하게.”
“흐아아악!”
바엘은 비명을 지르는 이의 팔을 꺾었다. 그대로 돌이 되어 버린 남자가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숨이 꺽꺽 넘어가려는 것을 바라보며 바엘이 황홀하게 미소 지었다.
“드디어 둥지에서 나왔군, 황제.”
콰앙-!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검이 바엘의 옆을 비껴 가며 바닥을 내리쳤다. 움푹 파인 바닥을 눈동자만 굴려 바라본 바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청량한 기운의 사내.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개가 어우러진 존재는, 바엘에게도 황제에게도 무척이나 익숙한 사람이었다.
“……헥시온 밀라트리오. 내 장난감이 못 본 새 기세등등해졌구나.”
“황, 황자 저하…….”
“뒤쪽으로 물러나도록 하죠. 방해됩니다.”
헥시온의 싸늘한 목소리에 팔이 꺾인 사내가 여러 차례 고개를 숙이며 기듯이 그 자리를 힘겹게 벗어났다. 근처에 있던 아델이 남자를 부축해 헥시온과 멀리 떨어진 나무 밑 그늘로 향했다. 그가 아델의 뒷모습을 한차례 바라보곤 다시 황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반쯤 뒤집혀 흰자위가 반 이상 차지하고 있는 황제는 이미 제대로 된 이지조차 없어 보였다. 눈앞에 있는 것이 황제인지, 바엘인지, 지금까지 상대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저게…… 그 녀석의 핏줄인가?”
“훅센라이트의 자식.”
“죽였어야 했던 원수지.”
하나의 목에서 나는 목소리가 이리저리 일그러졌다. 긁어내리는 듯한 목소리가 어린아이가 되고 또다시 황제의 목소리가 되었다가 이번엔 쉰 소리가 되었다. 한마디 한마디마다 뒤바뀌는 목소리에 헥시온의 표정이 구겨졌다.
“완전히 망가지기라도 했나 봅니다.”
헥시온이 아델 쪽으로 향해 있는 바엘의 시야를 몸으로 가리며 말했다. 헥시온의 손에서 새하얀 검신이 옅은 냉기를 뿜으며 서늘하게 빛났다.
“죽어서도 거머리 같은 원수!”
“이번에야말로 죽여서, 다시는…….”
“사지를 갈라 짐승에게 주고”
“몸뚱어리를 다져 우적우적 씹어 먹겠다!”
“머리를 첨탑에 걸어 새들의 먹이로 삼지!”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리는 바엘이 이리저리 팔과 목을 꺾어 댔다.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기라도 하는 것인지 눈동자는 뒤집어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목은 기묘하게도 180도 가까이 돌아갔다가 다시 정면을 향했다. 혀를 쭉 빼고 문 채 키득거리는 모습은 이미 황제라기보단 괴물에 가까웠다.
“그 입 닥치지 그래.”
헥시온의 짤막한 말에 360도 뱅글뱅글 돌던 눈동자가 돌연 헥시온의 앞에 뚝 멈췄다.
“뭐?”
“그 전에 네놈은 죽을 거다. 내가 이 자리에서 널 살려 보낼 생각이 없으니까.”
“키워 준 은혜도 모르는 개새끼가!”
“개새끼가 무럭무럭 자라서 네놈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 있다는 걸 간과하지 말았어야지.”
다리에 힘을 준 헥시온이 빠르게 도약해 바엘을 향해 검을 횡으로 그었다.
채앵-!
바엘이 손을 뻗자 검은 안개가 모여 새까만 검신을 만들어 냈다. 흑과 백의 검이 부딪혀 묵직한 소리를 냈다. 까득까득, 새하얀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바엘의 검을 야금야금 삼켰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고귀한 왕관을 머리에 쓴 채 새까만 검을 들고 황제를 상징하는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남자는 더 이상 황제로 보이지 않았다.
황제의 소문에 대해 긴가민가했던 이들은 그저 그 광경에 모든 것을 납득했다. 그들의 눈에는 새하얀 검을 휘두르는 굳은 표정의 황자가 훨씬 더 사람 같았다.
콰앙-!
검이 부딪힐 때마다 커다란 굉음을 냈다. 땅에 발자국이 움푹 파이고 먼지가 휘날렸다.
“크으……!”
검이 부딪힐 때마다 바엘은 자신이 밀리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비슷하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오랜 시간 평화에 찌든 바엘은 긴 시간 단련해 온 헥시온을 이겨 내지 못했다. 대적자가 없는 삶을 살아온 바엘을 헥시온이 몰아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동안 왜 한 번도 대적하지 않았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그사이 바엘의 움직임을 외운 헥시온은 쉼 없이 빈틈을 파고들었다.
그의 검은 바엘의, 황제의 몸을 찌르고 베었다. 베일 때마다 바엘은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시린 냉기가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몸이 망가지고 있었다.
‘이대론 안 돼.’
몸이 죽기 전에, 새로운 숙주를 찾아야 했다. 또 그 숲에 봉인되어 긴 세월 누군가 풀어 주기만을 기다릴 순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바엘의 눈이 번뜩였다.
비명처럼 소리를 내지르며 바엘이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갑작스럽게 뒤바뀐 기세에 헥시온이 검을 막으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내가 이날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헥시온이 일그러진 얼굴로 사납게 중얼거렸다.
“네놈이 알 리가 없지.”
헥시온의 검이 바엘의 심장을 향해 정확히 내달렸다. 바엘이 반사적으로 몸을 물리며 검으로 앞을 막았다.
까득-!
바엘이 쥔 검의 중심이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건방진, 장난감 따위가……!”
“오늘 넌 그 장난감으로 인해 바닥을 구를 거다.”
헥시온의 검이 위협적으로 움직였다. 검과 검이 부딪히며 끊임없이 마찰음을 냈다. 막는 것에 급급한 바엘이 결국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배신한 것들은…….”
“주제도 모르는 것들은…….”
“전부 죽여 버리겠다!”
바엘의 목소리에도 비웃음을 흘린 헥시온이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바엘이 쥐고 있던 검을 어딘가로 던졌다. 동시에 헥시온의 검이 바엘의 심장을 찔렀다.
“커흑…….”
황제의 입에서 핏덩이가 떨어졌다. 심장 부근에서 시커먼 것이 꾸물꾸물 흘러나왔다.
“방금 뭘 한…….”
“꺄아아아악!”
비명 소리에 고개를 돌린 헥시온이 눈을 크게 떴다. 배에 새까만 검이 박힌 아델이 그대로 나무에 꽂힌 채 입에서 후두둑 피를 쏟고 있었다.
“헥…….”
“아…….”
헥시온의 몸이 벌벌 떨렸다.
“아아…….”
그가 셰인나이트를 떨어뜨린 채 그녀를 향해 떨리는 걸음을 옮겼다. 커다랗게 뜬 눈동자가 풍랑을 만난 배처럼 속절없이 흔들렸다.
“아델!”
헥시온이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그사이, 황제의 몸에서 빠져나간 바엘이 만들어 놨던 숙주를 찾아 몸을 날렸다.
* * *
“뒤쪽으로 물러나도록 하죠. 방해됩니다.”
헥시온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래도 살았다며 고개를 숙이고 기어서라도 자리를 피하려고 애쓰는 남자를 아델이 부축했다.
“도와드릴게요, 이쪽으로.”
“고마, 고맙습니다.”
그녀는 나무 근처에 남자를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아델은 기묘하게 꺾여 굳어 버린 남자의 팔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예전에 헥시온의 팔이 낫길 바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조금이지만 효과가 있었었다. 어쩌면 이번에도 되지 않을까? 아델은 남자의 손을 붙잡은 채 눈을 감았다.
그의 팔이 낫길 바란다.
그러자 몸에서 무언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델이 흠칫 놀라며 눈을 뜨자 그녀의 손끝에서 초록색의 빛무리가 빠져나가 남자의 돌처럼 굳은 팔에 스며들었다. 굳은 부분이 옅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서서히 돌처럼 굳었던 부분이 쩌적쩌적 갈라지며 바스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세, 세상에…….”
남자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근처에서 그 모습을 본 사람들도 하나같이 경악했다. 팔이 꺾인 남자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신녀님, 신녀님이신가요……? 아아…….”
“저분 그분 아니야? 그, 영웅의 후손이시라는…….”
“나도 본 적 있어. 황자 전하께서 연설하실 때!”
순식간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델은 어안이 벙벙해서 고개를 돌렸다.
“신녀님! 제발, 우리 애도…… 우리 애도 고쳐 주실 수 있나요?”
품에 아이를 안고 있던 여자가 황급히 아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아델이 곤란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방금, 저 악독한 악마에게 당해서…….”
“……해 볼게요.”
아델이 조심스럽게 갓난아기의 다리에 손을 얹은 채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끝에서 또다시 녹색 빛이 빠져나가 아이에게 스며들었다.
“다 됐어요.”
고개를 들자 어느새 줄처럼 늘어진 칼럿병 환자들이 보였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고 치료를 서둘렀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도중, 어디선가 들린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푸욱.
연이어 들린 섬뜩한 소리와 함께 비명을 지를 수도 없을 정도로 끔찍한 통증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사람이 너무 아프면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고 했던가. 현실과는 무척 동떨어진 듯한, 감각이었다.
“꺄아아아악!”
누군가 지른 비명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자신이 지금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델은 고개를 들어 헥시온을 찾았다. 그는 경악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헥…….”
그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울컥, 입에서 흘러나간 무언가에 말이 흩어졌다. 눈앞이 흐릿하고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상황을 파악하기라도 하려는 듯 밭은 숨을 뱉길 반복했다.
“아델!”
비명처럼 소리를 지른 헥시온이 자신을 향해 달려왔다. 그가 다급하게 아델을 끌어안았다. 그제야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작은 통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순식간에 온몸을 잠식했다.
“……헥……시온…….”
“아델……, 아델…….”
헥시온이 정신을 놓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끌어안은 채 중얼거렸다. 바엘이 만든 새까만 검이 아델의 몸을 반 이상 검게 물들였다.
헥시온의 주변으로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차마 검을 뽑지도 못했다. 심지어 그녀에게 손을 대는 것도 두려워 몸을 떨 뿐이었다.
아델은 한마디 말도 내뱉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리다가 이윽고 조용히 눈이 감겼다.
“아델……?”
간신히 이어져 가는 옅은 숨소리가 끊길 듯 불안정했다. 공포에 휩싸인 헥시온의 흰자위가 시커멓게 물들었다가 이윽고 눈동자가 붉게 뒤바뀌었다. 헥시온은 점점 검게 물들어가는 아델의 배를 보다가 죽은 듯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는 그녀의 팔을 몇 번 쓰다듬었다.
이윽고 그는 멀찍이 떨어뜨려 둔 셰인나이트를 가지고 왔다. 핏기 없이 새하얗게 질린 아델은 숨소리조차 옅어서 마치 죽은 것처럼 보였다.
확신하건대, 그녀는 죽을 것이다. 헥시온은 지금껏 수많은 죽음을 봐 왔다. 그녀에게 다가온 사신의 숨결 역시 그에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셰인나이트는 신검이며, 선한 자에게 꽂으면 때때로 생명력을 주기도 한다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도 있지.’
아델이 읊어 줬던 비석의 내용이 헥시온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인간을 지키는 수호자였으나, 그들을 결코 신뢰하지 않았던 비운의 영웅.
‘그리고…… 오로지 선한 사람이 세상에 있으리라 믿지도 않네.’
‘그래서 나는 그 힘을 그녀에게도 사용할 수 없었어. 혹여 그녀가 선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대로 죽을까 봐 무서웠어.’
오랜 시간 인간에게 신물이 나서, 사랑하는 이조차 믿을 수 없었던 훅센라이트는 결국 그녀를 살리기 위해 어떠한 모험도 하지 않았다. 그 뒤에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난, 당신과 달라.”
헥시온이 검게 물든 흰자위와 시뻘겋게 물든 눈동자로 셰인나이트를 쥐었다. 한쪽 팔이 검게 물든 헥시온의 손에서 파지직, 파지직 불꽃이 일었다.
셰인나이트가 헥시온을 거부하고 있다. 그 의미는 명백했다. 자신이 물들기 시작한 것이겠지. 셰인나이트는 바엘을 거부 하니까.
헥시온의 눈이 한층 더 탁해졌다. 그가 셰인나이트를 쥐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아델의 몸을 꿰뚫은 새까만 검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뽑아내며 셰인나이트를 그 자리에 느릿하게 꽂아 넣기 시작했다.
그가 차게 식은 아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외롭게 하진 않겠습니다.”
속삭이듯 귓가에 한마디를 덧붙인 헥시온은 아델을 푹신한 풀밭 위에 눕힌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셰인나이트가 새하얀 빛을 뿜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라보며 헥시온은 새까만 검신을 손에 쥐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말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그는 새까만 검을 휘두르며 땅을 박차고 바엘의 뒤를 쫓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바엘의 흔적을 쫓았다.
“……어디지?”
한쪽 팔을 시커멓게 물들인 채, 검을 쥐고 방황하는 헥시온은 황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붉은 눈동자는 광기로 번들거렸다. 속에서부터 치솟는 살육의 충동에 헥시온은 몇 번이고 살아 있는 것들을 베어 내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칼라드.”
헥시온의 입술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황제의 궁으로 향하던 헥시온이 걸음을 뚝 멈췄다.
바엘은 황제의 몸을 버렸다. 황제는 죽었고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판단했을 확률이 높다.
‘바엘은 그 자체로는 큰 힘이 없으니…….’
헥시온의 몸이 자연스럽게 황태자가 기거하는 성을 향해 움직였다. 바엘이 다음 숙주를 찾으러 갔다면, 남은 것은 칼라드 황태자밖에 없었다.
“이곳은 허락 없이 출입하실 ㅅ……!”
헥시온이 가볍게 검을 움직였다. 앞을 가로막았던 병사의 눈이 크게 뜨였다가 이윽고 그 목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사납게 이를 드러내는 헥시온의 얼굴에 살의가 흘러넘쳤다.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헥시온은 인간이라고 보기엔 그 모습이 상당히 기이했다.
황태자의 성에 들어가자 기분 나쁜 느낌이 온몸을 잠식했다. 끈적끈적하고 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피부를 찔러댔다.
헥시온은 2층으로 올라가 가장 화려한 방의 문을 검으로 베었다. 동시에 눈앞으로 날아오는 무언가에 그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날아오는 것을 쳐냈다.
“네놈…….”
황태자가 붉게 물든 눈을 한 채 일그러진 얼굴로 몸을 떨었다. 헥시온과는 다르게 눈동자만 붉어진, 인간과 크게 다름없는 모습이었으나 그의 온몸을 새까만 안개가 넘실거리며 감싸고 있었다.
“그 모습…….”
“네놈은 건드려서 안 될 걸 건드렸어.”
헥시온의 검이 황태자를 향했다. 헥시온이 그대로 바닥을 박차며 검을 횡으로 그었다. 순식간에 헥시온이 쥔 검과 같은 것을 만들어낸 바엘이 그것을 막아냈다.
“제길! 저것만큼 완벽한 몸뚱어리도 없었는데!”
바엘이 분노한 듯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챙, 채앵- 챙!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부딪히는 검과 검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그때, 헥시온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며 빠져나와 팔을 휘감았다.
바엘이 눈을 빛내며 희열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발아?”
“네놈은 태어날 때부터 특이했지.”
까득, 검과 검이 맞물리며 쇠를 긁는 듯한 소리를 낸다.
“내 흔적을 가장 많이 타고났어. 보통 숙주가 된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면 조종하기 편한 몸이 되는데…….”
황태자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 길게 늘어졌다. 쭉 찢어져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징그러웠다.
“네놈은 달랐다. 내 독을 자력으로 버텨낼 만큼 내성이 있었고 한심한 황태자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웠지.”
“닥치지 그래.”
헥시온이 홱 몸을 돌리며 그대로 황태자의 팔을 베어 냈다. 바엘이 막을 새도 없이 빠르게 내리쳐진 검에 황태자의 팔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러나 황태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 씨가 발아했다는 게 무슨 뜻인 줄 아느냐?! 네가 인간이 아니게 됐다는 소리다! 크하하하! 나와 다름없는 존재가 됐다는 소리지!”
“아델을 위해서라면, 악마든 저 밑바닥의 찌끄러기든 뭐든지 될 마음이 있었으니 상관없어.”
그의 검이 황태자의 한쪽 다리를 베었다. 바엘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무엇이 즐거운지 한참이나 웃으며 헥시온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헥시온은 느릿하게 걸음을 내디디며 황태자의 심장을 향해 검을 뻗었다.
푹-.
섬뜩한 소리와 함께 둔탁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헥시온은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숙여 제 배에 꽂힌 검을 한 번 보았다. 그러나 그는 곧 마주 웃으며 그대로 황태자의 심장으로 천천히 제 검을 밀어 넣었다.
“커흑…… 왜…….”
“셰인나이트만 효과가 있는 줄 알았는데, 같은 종류의 검에도 상처를 입는 모양이야.”
헥시온이 낮게 읊조렸다.
“왜, 옮겨지지 않는 거지? 내 씨에서 발아했다면 넌 내 것이다! 주인인 나를 거부할 순 없는 노릇이라고!”
황태자의 몸 안에서 바엘이 발악했다. 검을 찔러 넣어 헥시온의 심장을 통해 옮겨간다. 그것이 그가 바라던 것이었다. 그러나 넘어 가지지 않았다.
“넌 원래부터 내 거였다!!”
“이 세계에 네 것은 아무것도 없어. 바엘.”
헥시온은 심장에 박아 넣은 검을 느릿하게 비틀어 돌렸다. 황태자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도망쳐야 하는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그에게 억눌리기라도 한 듯. 황태자의 몸에 들어간 바엘이 몸을 떨었다.
“이 다음에는 어디로 도망갈 거지?”
헥시온이 황태자의 어깨를 붙잡은 채 물었다. 새까맣게 물든 흰자위에 붉은 눈동자에 광기와 살의가 넘실거렸다.
“도망가 봐. 어느 쪽이지?”
이를 드러낸 그 모습에 바엘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 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새끼가…….”
헥시온이 이윽고 검을 박아 넣은 채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황태자는 몸이 반으로 나뉘더니 숨을 거뒀다. 곧 검은 연기처럼 모습을 드러낸 바엘을 향해 헥시온이 검을 내질렀다.
끼에에에엑-!
괴물의 멱을 따는 듯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인간의 음성과는 현저히 다른 목소리였다.
바엘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껍질을 뒤집어쓰지 않은 것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헥시온은 희열에 가득 차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미친 것처럼 몸을 떨며 꽂아둔 검을 그대로 둔 채 허공에 다른 검을 만들어 냈다. 헥시온은 만들어 낸 검으로 다른 검을 느릿하게 꽂아 넣었다.
끼에엑-!
끼에에엑-!
푹, 푹, 푹. 십 수개의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꽂아 넣는 헥시온의 손길엔 자비가 없었다.
“망할!”
점점 흐려지는 바엘의 형체에도 불구하고 헥시온의 손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별것도 아닌 것에 도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을 빼앗겼는지.”
까득. 이를 악문 헥시온이 바엘의 중심에 검을 계속해서 꽂아 넣었다.
“겨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짙은 원망이 느껴졌다.
“이런……!”
푹-!
꽂히는 섬뜩한 느낌이 서늘했다.
“너 같은 게……!”
바엘은 비명조차 지를 기운이 없는 듯 흐릿해진 기색으로 간헐적으로 몸을 떨어댈 뿐이었다.
“네놈……!”
꺼질 듯한 목소리와 함께 검은 안개가 뭉친 듯한 형체를 하고 있던 것이 이윽고 서서히 안개처럼 흩어져갔다.
“네가 내 인생을 망쳤지.”
“키킼, 살겠다고 멍청하게 바닥을 뒹구는 꼬라지가 웃겼지.”
푹-.
또 하나의 검이 박혔다. 굳은 표정의 헥시온이 눈매를 굳혔다. 바엘이 또다시 기묘한 울음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흐릿한 형체가 다시 안개처럼 모였다.
“……살려 주세요! 하면서 머리 조아리던 꼬…… 끼에에에엑-!”
헥시온의 검이 다시 바엘에게 박혔다. 바엘의 형체가 흐릿해졌다가 다시 또렷해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고장 난 것을 보는 듯했다.
이를 드러낸 헥시온이 다시 느리게 검을 꽂아 넣었다.
“아델을 상처 입히고…….”
시커먼 안개로 온몸을 감싼 채 붉은 눈을 빛내는 헥시온은 이제 바엘과 큰 차이가 없이 보이기까지 했다.
“내 인생을 망가뜨렸지.”
손을 뻗은 헥시온이 바엘의 흐릿한 형체를 붙잡았다. 인간과 닮지 않은, 안개와 같은 형상임에도 불구하고 손에 잡혔다. 헥시온이 양손으로 쥔 채 안개를 찢듯이 힘껏 잡아당겼다.
끄에에에엑-!
헥시온의 손끝에서 검은 기운이 뭉치더니 이윽고 살의가 넘실거리는 검붉은 색의 검이 생성됐다. 다른 새까만 검과는 확연히 차이를 보이는 검이었다.
“네놈이 영원히 고통스러워했으면 좋겠지만…….”
헥시온이 천천히 검은 안개 사이로 보이는 붉은 핵 같은 곳을 향해 천천히 검을 밀어 넣었다.
“안, 안 돼! 하지 마! 꺼흐윽……!”
콰득-!
무언가 단단한 것에 박힌 검이 부드럽게 들어가기를 멈췄다.
“하지, 하지 마……!”
헥시온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헥시온의 손에 붙잡혀 도망가지도 못하는 바엘의 모습은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사, 살려…… 살려 줘……! 난, 나는……! 이제 와서어!!”
헥시온이 검을 쥔 손에서 살짝 힘을 풀었다.
“봐, 너도 살려 달라고 하잖아. 꼬라지가 참 우스워.”
바엘의 말을 고스란히 따라 빙긋 웃으며 헥시온이 덧붙였다.
콰드득-!
검을 밀어 넣는 헥시온의 붉은 눈동자가 잔혹하게 빛났다.
“시, 싫어어어!!”
바엘이 비명을 지르며 흐릿하게 흩어졌다. 사라지는 바엘의 눈이 있을 법한 곳을 보며 헥시온이 웃었다. 이윽고 완전히 바엘이 형체를 잃자, 헥시온의 눈동자에서 서서히 감정의 물이 빠져나갔다. 동시에 그의 힘으로 뭉쳤던 검들도 검붉은 색의 검을 제외하곤 전부 사라졌다.
바엘이 죽었다.
더는 그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헥시온이 멍하니 제 손을 내려다봤다. 제 모습은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며, 바엘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핫…….”
우스운 꼴이다. 바엘을 죽이기 위해 결국 바엘과 같은 꼴이 됐다. 온몸을 뒤덮은 바엘과 다름없는 광기가 살육을 충동질했다.
‘……허무해.’
그가 느리게 고개를 젖혔다.
허무했다. 그토록 평생을 압박했던 족쇄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모든 것을 끝내고 보니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말 죽은 건가.”
헥시온이 쥐고 있는 검으로 반으로 갈라진 황태자의 몸을 푹 찔렀다.
푹,
푸욱,
푹-.
죽어 버린 시체를 몇 차례나 더 찔러 보고 나서야 헥시온이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한참이나 허리를 꺾은 채 미친 것처럼 웃음을 터뜨린 헥시온이 고개를 툭 떨궜다.
“아…….”
그는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낮은 탄성을 흘렸다.
“아델…… 아델…….”
헥시온이 동아줄을 찾기라도 하려는 듯 아델의 이름을 몇 차례나 중얼거리며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델을 찾으러…….”
그가 터덜터덜 힘없는 발걸음으로 몸을 돌렸다. 셰인나이트는 어느새 아델에게서 빠져나온 채 그녀의 품에 조심스럽게 안겨 있었다.
아델을 곁에서 지키고 있는 것은 진이었다. 진은 아델의 곁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머리카락을 느리게 쓸어 넘기고 있었다.
“……너.”
다가오는 헥시온을 발견한 진이 그를 불렀다. 헥시온은 도무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눈은 살짝 풀려 있었고 주변이 눈에 들어오는 것 같지 않았다. 붉은 눈동자와 몸 주변에 넘실거리는 검은 안개까지. 그는 황제와 비슷하게 보였다.
진이 헥시온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너, 괜찮은 거 맞나?”
“비켜…….”
헥시온은 진을 밀어냈다. 진을 밀치고 아델의 곁으로 다가온 헥시온은 깔끔하게 아문 그녀의 배 위를 눈으로 훑더니 그 곁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단단한 바닥에 부딪힌 무릎이 아프지도 않은지 헥시온이 숨을 삼키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델, 아델…….”
그는 유일한 온기를 찾아 매달리는 것처럼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델…….”
헥시온이 길게 숨을 내뱉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차게 식었던 몸에, 온기가 닿자 그제야 차츰차츰 살아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코끝을 자극하는 피비린내가 그제야 사라지는 듯했다.
“헥……시온……?”
헥시온의 찬 기운에 눈을 몇 차례 끔뻑이던 아델이 그의 이름을 반사적으로 불렀다. 나직한 목소리에 헥시온이 움찔 몸을 떨었다.
“일은…… 끝냈어요?”
아델의 물음에 헥시온이 울컥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목덜미에 묻은 얼굴을 떼지 않았다.
“당신이 죽었다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헥시온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것을 죽이고 나도 죽으려고 했습니다. 당신을 외롭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런다고 내가 좋아할 것 같진 않은데요.”
“당신을 외롭게 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아델을 혼자 두고 싶지도 않았고…….”
헥시온이 잔뜩 억눌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솜이 물을 먹은 것처럼 무거운 팔을 힘겹게 들어 아델이 헥시온의 얼굴을 더듬거렸다. 눈이 부셔서 쉽게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지 않았다.
“나 역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델은 헥시온의 등을 쓸어내리며 힘겹게 눈을 떠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마치 울상이 된 어린아이의 얼굴처럼 보였다. 붉은 눈동자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마치 피눈물처럼 보여서, 아델은 잠시 숨을 멈춘 채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더는 혼자이고 싶지 않아요.”
심장이 떨어지고, 숨이 멎고, 온몸의 피를 누군가 전부 빼내어 가는 듯 이상한 기분이었다.
“살아서…… 다행입니다.”
헥시온이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델은 헥시온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깃털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듯, 그 짧은 그의 눈동자에서 서서히 붉은 기운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헥시온이 느리게 한차례 눈을 깜빡이자 검게 뒤덮여 있던 흰자위가 서서히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새빨간 눈동자가 다시 검게 물들고 팔을 물들였던 새까만 안개가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다시 만나서 다행이에요. 수고했어요, 헥시온.”
아델이 작게 속삭였다.
* * *
“……훅센라이트?”
호수 앞에 멀뚱하게 서 있던 새하얀 머리카락의 아이가 고개를 젖혔다.
“바엘이 죽었구나.”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작은 그리움이 느껴졌다.
긴 시간, 그를 숲의 관리자로 만들었던 바엘이 죽었다. 세상 어디에 있어도 느껴지던 바엘의 흔적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제 몸을 묶고 있던 족쇄가 풀어진 것이다.
“……훅센라이트, 네가 남긴 의지가 결국 결말을 만들었어.”
쏴아아아.
훅 불어온 바람이 작은 몸을 스치고 호수를 훑으며 멀어져 갔다. 바람을 따라 몸을 돌린 판이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린 그가 고개를 젖혔다.
낮게 중얼거린 판이 흩어지는 바람을 느끼며 옅게 웃었다.
* * *
제국은 순식간에 들썩였다.
황제가 스스로 드러낸 바엘의 허물을 모든 이가 지켜보았다. 사람들은 신전과 황성을 욕했다. 황성의 유일무이한 후계자가 된 헥시온은 황태자와 황제의 목을 광장에 효수했다. 당연하게도 신전은 전체적으로 물갈이가 되었고 최고 책임자들은 그대로 끌어 내려졌다.
헥시온은 황제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아델 역시, 카레나 비프타로서 살았던 모든 삶을 내려 두었다.
정식 대관식 전에, 헥시온은 끝까지 황제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들을 전부 잘라냈다. 반란 아닌 반란이 일어난 후로 한 달. 제국은 천천히 안정을 되찾아갔다. 헥시온을 비롯해 진과 알리아 자작가가 필사적으로 발로 뛴 덕분이었다.
고대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늘어났고 그에 따라 고고학자 협회에도 이따금 발걸음을 하는 이들이 잦아졌다. 그리고 헥시온은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비프타 공작가의 비리에 손을 댔다.
최근 아델은 함께 지내자는 헥시온을 황성으로 밀어 넣고 적당한 집을 구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시장에 가고 스스로 요리를 시작했다. 진과 가끔 만나서 차를 마시고, 바쁜데도 거의 매일같이 찾아오는 헥시온과 짧은 대화와 입맞춤을 나누었다. 밤을 보내고 새벽녘이 될 즈음에는 헥시온을 쫓아낸다. 그러면 또 헥시온은 헤어지기 아쉬운 한창때의 연인들처럼 깊게 입맞춤을 하다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 떠나간다.
그저 그것뿐인 날들이, 아델에겐 무척이나 즐거웠다.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온전한 자유였다. 더는 누구도 아델을 위협하거나 감시를 하지 않았다. 주변을 살피지 않아도 되고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행동거지에 주의할 필요도 없었다.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대화를 나누더라도 보고할 사람도 없었다. 대신, 최근 아델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헥시온에 대한 소문을 엿듣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시장을 보기 위해 나가려던 참이었다. 누군가가 나가려는 제 앞을 가로막지 않았더라면. 아델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내 말이 우습지?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네가 비프타 가문이 저지른 비리의 증거를 가져오면 와도 된다고 했잖아.”
한층 수척해진 모습의 콰른 비프타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콰른 비프타가 누런 봉투에 든 두툼한 무언가를 아델의 품에 안기듯 넘겨줬다. 그가 주먹을 쥔 채 고개를 숙였다.
“네가 원하던 거.”
얼굴을 찌푸린 아델이 그를 바라봤다. 콰른 비프타는 맘고생이 심했던 듯 무척 어두운 표정이었다. 풀이 확 죽은 듯한 그 모습에 아델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흩뜨렸다.
“그래서, 내가 원하던 걸 가져와서 뭘 어쩌라고?”
“아버지……, 우리 가족들 좀 살려 줘.”
주먹을 쥔 콰른 비프타가 구겨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델은 최근 비프타 가문이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다만, 헥시온에게 들은 것을 조합해 보면, 공작 부부의 이혼 소송을 진행 중이라고 들었다. 비프타 공작은 자신의 딸 대역을 세웠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으로 크게 지탄을 받고 있다고 들었다.
“지금까지 한 짓을 생각해. 애초에 그런 황제와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부터 공작가는 당연히…….”
“아니야. 아냐, 아델.”
“내 이름 부르지 마.”
아델이 몸을 떨며 말했다. 친근하게 그의 입술에서 튀어나오는 목소리가 이토록 끔찍할 수 없었다.
“공작가를 살려달라는 게 아니야. 이대로라면, 아버지는 목숨을 잃으실 거야. 헥시온, 그놈이…… 그렇게 만들겠지.”
주먹을 쥔 그가 말했다.
“어머니는, 한참 전에 집을 나가셨어. 찾아가 봤는데 끝이 보이는 사람과 더 함께할 순 없다고……. 우린…….”
콰른 비프타가 무릎을 꿇었다. 돌아갈 집을 지키는 것은 포기했다. 헥시온 밀라트리오는 철저하게 그들을 조여 오고 있었다. 비리를 숨기는 것에 급급할 때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떠난 뒤 모든 것을 놓은 듯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펠리스 비프타는, 그런 그들을 보다 못해 결국 스스로 기사 작위를 내려놓고 공작가에 몰려드는 일을 꾸역꾸역 대리로 처리하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했어.”
이를 악문 콰른 비프타가 바닥에 이마를 댔다.
아델이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이토록 모든 걸 내려놓고 필사적으로 구는 모습을, 아델은 본 적이 없었다.
“……네가, 옳아. 난 이기적이었고 내 세계를 지키는 데 급급했어. 갑자기 떨어진 네가 방해꾼이라고 느낀 게 맞아.”
“…….”
“가족이, 죽는 걸 볼 자신이 없어. 죽고 싶지도 않아. 뻔뻔한 건 알지만…… 도와줄 사람이 너밖에 떠오르질 않아.”
아델이 말없이 바닥에 이마를 박은 콰른 비프타를 주먹을 쥔 채 내려다봤다. 듣지 못했던 줄곧 듣고 싶었던, 어쩌면 가장 바라왔을 말이었다.
“미안해, 제발……. 도와줘.”
어떤 사람이든 벼랑 끝에 몰리면 자존심도 자부심도, 신념조차도 던져 놓는다고 한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죽음 앞에서조차 의연할 것 같았던 콰른 비프타의 모습에 아델은 그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건, 헥시온한테 전해 줄게. 헥시온이 알아서 생각하겠지.”
“…….”
“한마디, 전해 주긴 하겠지만 기대하지 마. 그리고 그 대가는 영원히 네가 내게 얼굴을 보이지 않는 거야.”
“……약속할게.”
단 한 번도 그 말에 대답한 적 없던 콰른 비프타가 결국 그 말에 답을 내놨다. 아델이 쓰게 웃었다.
“널 진짜 오빠처럼 생각했던 때도 있었어. 언젠가 돌아봐 주길, 바랐던 적도 있었어. 그건 내 멋대로 바란 거니까…… 네 탓을 하진 않아.”
“…….”
“멋대로 데려와서 모든 것을 앗아 놓고 인형 취급을 했던 것도. 그 안에서 혼자 기대하고 실망한 것도. 모두 내 탓일지도 모르지.”
아델이 조용히 읊조렸다.
“나는 필사적으로 노력한 끝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됐는데…… 이젠 네가 내게 바라는구나.”
낮은 목소리에 콰른 비프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델이 몸을 돌렸다. 손에 든 서류가 무척 무겁게 느껴졌다. 기묘한 기분이다.
“정말, 다시는 보지 말자. 콰른 비프타.”
“……미안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콰른 비프타가 굳은 얼굴로 깊게 허리를 숙였다.
“미안하다고 하지 마. 너 좋자고 사과하지 마. 분명히 말했잖아!”
아델이 이를 악물었다.
“난 평생 널 용서하지 않을 거고 앞으로도 평생 네 가족들이 불행하길 바라!”
주먹을 쥔 채 소리를 내지르는 아델의 모습에도 콰른 비프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리라. 아델의 심기를 거슬러서, 그에게 좋을 것은 어떤 것도 없으니까. 그것을 알기에 아델은 분했다. 조금 더 제 힘으로 이룩한 것이 있었다면 이것보다는 덜 분했을까.
“네놈이 사는 집 따위에 가서, 너 같은 놈을 만나서, 최악의 인생이었어! 끔찍했어!”
아델이 일그러진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울고 싶지 않아서, 꾹꾹 눌러 참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내지르는 감정과 함께 터져 나왔다.
“……미안.”
“다른 걸 바라지 않았어. 돈도, 명예도, 뭘 바랐던 게 아냐…….”
비참함에 고개를 숙였다.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가지고 태어난 걸, 나만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의 비참함이 너무도 컸다.
“……제발, 우리, 보지 말자……. 평생, 불행했으면 좋겠어. 네가…… 나만큼 아파했으면 좋겠어.”
“응…….”
“그러다, 지금처럼 어쩔 수 없이 하는 사과가 아니라…….”
이를 악문 채 아델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날이 오면…… 좋겠어…….”
“……그래.”
아델이 더는 말문을 열지 않자, 그는 이내 왔던 길을 돌아가듯 로브에 깊게 얼굴을 묻으며 골목길로 사라졌다.
사라진 콰른 비프타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아델이 몸을 돌려 천천히 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책상 위에 널브러진 책과 수많은 고서들, 그리고 또 다른 참고자료들로 집은 거의 서점이나 다름없었다.
‘……끝.’
끝이겠지.
지독히도 길었던 악몽이었다. 카레나 비프타의 대역이었던 아델은 비프타 공작가를 좋아했다. 비프타 공작가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줄곧 그래 왔다. 사랑받고 싶었고 칭찬을 받고 싶었다. 그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가고 싶어서. 그러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그녀는 그 근처에조차 가지 못했다. 콰른 비프타는 그것을 알려 줬다.
사랑받기를 포기하고 바라는 것을 포기했을 때야 비로소 아델은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혼자서 외로워하고 혼자서 울지 않아도, 손을 뻗으면 입을 맞추며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봐 줄 사람이 있었다.
혼자가 된 것은 이제, 그토록 돌아갈 곳을 원했던 콰른 비프타였다. 그는 더는 돌아갈 곳 없는 기나긴 세월 동안 방랑자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돌아갈 곳 없는 집을 한탄하며, 자신과 크게 다름없는 삶을 살겠지.
아델이 이를 악문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이상 울지 않을 거다. 그녀가 벅벅 눈매를 닦아냈다. 아마도 이것은 긴 악몽의 종착점이었다.
“아델.”
“헥시온, 또 이렇게 몰래 오시고. 올란도가 뒷목을 잡을 거예요.”
“아닙니다. 다른 자들에게 들키지 않게 돌아오기만 하라고 흔쾌히 허락해 줬습니다.”
헥시온은 올란도가 그 과정에서 골치 아픈 표정으로 뒷목을 잡았다는 내용은 쏙 뺀 채 대답했다. 평소라면 정말이냐며 한 번 정도는 말꼬리를 붙잡을 만도 한데 아델은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헥시온이 아델의 침대에 앉아 그녀를 무릎에 앉혔다.
“그나저나 아델은 혼자 사는 것이 퍽 마음에 드는 모양입니다.”
“네? 아, 여러모로 못 해 본 것들을 해 볼 수 있어서 좋아요.”
“……그건 정말로 서운합니다.”
아델이 헥시온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이 말은 종종 듣지 않으면 심심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됐다. 아델을 무릎에 앉힌 헥시온이 어리광을 부리듯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나는 매일매일 몸이 달아서 하루가 멀다 하고 어둠이 내려앉기만을 기다리는데, 아델은 혼자서도 무척 즐겁군요.”
툴툴거리는 목소리에 불만이 그득하다. 하지만 그것이 투정이라는 것을 알기에 아델은 그의 목덜미를 살살 쓸어내렸다.
“물론, 헥시온이랑 함께하면 더 즐거울 것 같긴 해요.”
제가 원하는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귓가에 속삭여 주는 사랑스러운 연인에 헥시온이 그녀의 귓불을 깨물었다. 그녀의 목덜미와 입술에 몇 차례 입을 맞춘 헥시온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왜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는지 말해 줄 마음은 없습니까?”
“……별로 우울하진 않아요.”
“이런, 그럼 왜 나를 만났는데도 심란해 보입니까?”
짐짓 서운한 듯 덧붙이는 목소리에 아델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말을 꺼내기엔 복잡하고 그렇다고 하지 않기엔 그를 속이는 것 같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진 않은데.’
그렇다고 아는 이가 목이 잘려 광장에 효수되는 꼴을 볼 정도로 비위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화낼 거예요?”
“흐음…….”
헥시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 찾아온, 콰른 비프타에 관한 얘기라면 먼저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면 속상한 척을 할 예정이긴 했다. 그러나 신경 쓰인다는 듯 눈치를 보는 아델을 보니 그러고자 하는 마음도 쏙 사라졌다.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얘기면 화내지 않곤 못 배깁니다.”
“그건 아니고요.”
머뭇거리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헥시온이 싫어할 남자를 만나긴 했어요.”
“누굴요?”
헥시온이 아델을 품에 안은 채 되물었다. 전혀 모른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능청스러운 모습이었으나, 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에 정신이 팔린 아델은 눈치채지 못했다.
“콰른 비프타요.”
“그놈이 또 찾아왔나요?”
“네, 근데 정말 마지막이었어요.”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곤 냉큼 덧붙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사나운 기운이 넘실거렸기 때문이다. 그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음……. 비프타 공작가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거 맞죠?”
“그렇습니다. 황제와 가장 많이 연관되어 있던 것이 비프타 공작가였으니,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니냐는 비난이 세서 다른 건 제대로 터뜨리지도 못했습니다.”
헥시온이 무척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물론 그 뒤로도 그는 충분히 그들을 잘근잘근 밟아서 상황을 재미있게 만들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콰른 비프타가 선수를 쳤다. 이미 그녀에게 붙여 놓은 사람에게 보고를 들은 헥시온은 그가 중간에서 바꾸어 둔 기류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거요.”
아델이 한쪽에 밀어 두었던 서류 뭉치를 꺼내 헥시온에게 내밀었다. 헥시온이 그것을 받아 들며 고개를 기울였다.
“뭡니까?”
“콰른 비프타가, 공작가의 비리를 전부 가져왔어요.”
“……다른 건 바라지 않으니, 가족들의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하더라고요.”
헥시온이 서류를 대충 열어 보곤 침대에 던지듯 올려 뒀다. 그에게 그다지 관심 있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부탁을 듣고 자신에게 서류를 전해 줬다는 것은 아델 역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싶진 않다는 것이겠지.
“그들이 살길 바랍니까?”
“……평생 내 눈앞에 없었으면 좋겠지만, 그저 악연이라고도 생각해요.”
따지고 보면, 진짜 카레나 비프타가 죽었던 것은 황제의 계략이었고 그것이 아니었다면 비프타 공작과 아델이 만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사실 그들이 무조건적으로 죽어 마땅하다고 보진 않는다.
자신이 죽었을 때는 그저 눈앞이 새하얗게 변해서 분노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차분히 생각해 본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힘을 빌려서까지 죽일 정도의 죄는 아닐 것이다.
“뭣보다 헥시온의 손으로 처리하게 하고 싶지도 않고요.”
“……생각해 보겠습니다. 난 그들이 괘씸하거든요. 무슨 이유에서든.”
아델이 한숨을 내뱉으며 마주 본 헥시온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어요.”
“……아델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주고 싶지만, 오늘은 콰른 비프타만으로도 용량 초과입니다.”
덧붙인 헥시온의 말이 퉁명스러웠다. 아델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가 머뭇머뭇 헥시온의 입술 끝에 입을 맞췄다.
“…….”
헥시온이 그래도 반응이 없자 그녀가 반대쪽 입술 끝에 입을 맞추고 이마에 맞췄다가 볼에 맞추곤 살살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귀엽게 입을 맞춰 주셔도…….”
그녀가 헥시온의 말을 막기라도 하려는 듯 마지막으로 눈을 질끈 감곤 입술 위에 입을 맞췄다. 움직이던 헥시온의 입술이 떡하니 멈췄다. 그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질끈 감았다가 뜨곤 가느다란 눈으로 아델을 바라봤다.
“이건…….”
헥시온의 귓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비겁합니다.”
그가 아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열이 오른 듯 새빨개진 얼굴에 그녀가 웃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별건 아니에요. 마지막 비석, 해독하러 가고 싶어요. 열두 번째 비석…… 있다고 들었잖아요.”
“……아, 그거.”
헥시온이 아델의 어깨에 턱을 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일을 마무리하면 마지막 비석을 해독하러 가기로 약속을 했으니까.
“네, 그건 일이 좀 더 바빠지기 전에 가는 걸로 하죠.”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가는 걸로 하겠습니까?”
“그렇게 빨리 괜찮아요?”
“네, 그리고…… 이젠 제 용건입니다만, 들어주시겠습니까?”
헥시온이 아델을 옆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아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헥시온이 그녀 앞에 섰다. 침대에 앉아 그녀가 고개를 젖혔다. 헥시온이 한쪽 무릎을 꿇고 그 앞에 앉았다.
“아델.”
“네?”
“난 곧 황제가 될 겁니다.”
“네. 축하해요. 헥시온은 분명 바엘에게 조종당했던 그 어떤 황제보다 훨씬 더 좋은 황제가 될 거예요.”
아델이 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가 좋은 왕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델의 한마디에 헥시온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제 곁에, 아델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생,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아델이 제 곁에 있어 주세요. 그거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헥시온이 품에서 작은 보석함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큼직한 녹색 보석이 박힌 은색의 링이 두 개 자리 잡고 있었다.
“나와 결혼해 주세요. 황후가 되어 주십시오, 아델.”
“……헥시온.”
아델이 입을 떡 벌린 채 놀란 눈으로 반지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투명한 녹색 보석은 무척 순도가 높아 보였다. 잘 가공해 빛을 뿜고 있는 것은, 제 손가락에 끼기엔 무척 귀하게만 보였다.
“아델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나와,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헥시온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아델이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다가 쓰게 웃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없는 평민. 과연 그런 자신이 나라의 지존이 될 사람의 곁에 앉을 자격이 있을 것인가?
“……열두 번째, 비석을 본 뒤에…… 대답해도 될까요?”
아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헥시온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민 반지함의 반지 두 개 중 하나를 꺼낸 헥시온이 그녀의 손에 링을 하나 올렸다.
“네, 그러십시오. 언제든 기다리겠습니다.”
헥시온이 아델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두 사람은 더듬더듬 목을 타고 올라가 키스를 했다. 얽히는 혀가 무척이나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