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0. 여섯 번째 비석 (15/25)

Chapter 10. 여섯 번째 비석

“아델, 비석에 셰인나이트의 위치가 적혀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있어요.”

“야, 카레……. 아니, 아델.”

알리아 자작가에서 돌아오는 길, 갑자기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아델의 걸음이 멈췄다. 헥시온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은 느낌에 그녀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여긴 왜 왔어?”

“쌰…… 아니. 그, 몇 번인가 찾아갔는데, 네가 없잖아. 그래서 오늘은 기다렸어.”

버릇처럼 욕설을 내뱉으려던 콰른 비프타가 제 짜증을 억누르며 웃어 보였다. 내숭만 부리는 헥시온을 상대하기 위해 그가 간신히 짜낸 계책이었다. 헥시온에겐 그것이 잘만 보였다.

“좋은 소식이 있어서.”

“좋은 소식?”

“어머니가 임신하셨더라고. 동생이 생길 것 같아.”

씩 웃는 콰른 비프타를 보던 아델의 몸이 굳었다. 그러고 보니 완전히 잊고 있었다. 아예 공작가에서 떨어져 지내다 보니 그쪽을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복수심이 옅어지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늘 스트레스처럼 다가왔던 그들과의 거리가 한층 더 멀어진 듯한 느낌은 있었다.

“사실 안 지는 좀 됐는데, 씹, 아니. 매번 기회를 놓쳐서.”

콰른 비프타가 헥시온을 노려보며 말했다. 헥시온이 팔짱을 낀 채 코웃음을 쳤다.

“벌써 그렇게…….”

아델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다지 듣고 싶은 소식은 아니었고 이제 와선 더더욱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녀는 공작가에서 벗어났으니까.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해 줘?”

“뭐? 당연히 너도 우리 가족이니까…….”

“공작 부인이나 공작 각하가 전해 주라고 하진 않았을 거 아니야.”

“아니, 그걸 굳이 말로 해야 아냐?”

콰른 비프타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퉁명스러운 말투에 아델이 인상을 쓰자 콰른 비프타가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헥시온이 그를 비웃는 게 보였다. 콰른 비프타는 이를 악물었으나 굳이 그에게 덤벼드는 짓은 하지 않았다.

‘저 재수 없는 새끼.’

그가 아델의 앞에서 얼마나 내숭을 부리는지 그 속을 낱낱이 파헤쳐 전해 주고 싶었다. 콰른 비프타는 아델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 헥시온의 저 낯에 속았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해가 안 되는데. 난 그 집에서 나왔어. 네 동생이 태어나든지 말든지 더는 상관없어. 관여하고 싶지도 않아.”

“아오, 너 대체 저…….”

콰른 비프타가 짜증스럽게 제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힘을 준 덕에 두피가 날카로운 통증을 호소했지만 콰른 비프타에게 그것은 아픔도 아니었다.

“대공…… 각하가 뭐가 좋다고 그래?”

“넌 늘 내가 같은 말을 하게 만드는구나. 더 하고 싶은 말 없어. 전해 줄 말이 그것뿐이었다면, 돌아가.”

아델이 무표정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헥시온은 조금 놀랐다. 늘 부드러운 목소리를 구사하려고 노력하는 아델이 빙하보다 더 시린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에도, 그녀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귀찮음에 대해서도. 아델은 공작가를 상대할 땐 늘 어딘가 위축되어 있었고 날카롭고 예민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서 그러한 모습은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헥시온은 콰른 비프타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그녀가 마음에 들어 보이지 않게 미소 지었다.

“……어쨌든 한번 와 봐. 태어나면 분명 귀여울 거야.”

“너한테만 귀엽겠지.”

“그리고 어머니도 요즘 네가 나간 뒤로 영 기운이 없어서. 네가 좀 와 주면 좋겠기도 하고.”

콰른 비프타의 말에 아델이 미간을 좁혔다. 공작 부인과는 마지막 대화를 나눈 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공작 부인에게 동정하고 있다 말했고 평소라면 무슨 말이든 되받아쳤을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솔직히 아델은 진심으로 그녀가 가여웠다.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정략결혼 상대를 만나 자식을 낳았고, 아이를 잃었다. 그리고 그 잃은 아이의 대역을 할 사생아를 데리고 온 남편을 봐야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아델은 피해자였고, 공작 부인은 아델에게 있어 또 다른 가해자이기는 했지만. 가능하다면 그녀는 공작 부인만큼은 난리 통에서 빼내 주고 싶었다.

그녀가 한 일들을 용서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공작 부인이 가문의 멸망과 함께 죽어야 한다고 까진 생각하지 않았다.

“그 집으론 돌아가지 않아. 갈 생각도 없고.”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아무리 그래도 키워 준 정이라는 게 있는데.”

콰른 비프타의 말과 동시에 아델이 두 손으로 그의 목을 꽉 붙잡았다. 콰른 비프타를 위협할 정도의 악력은 아니었으나 그는 놀란 듯 몸을 굳힌 채 움직이지 못했다. 아델이 그대로 콰른 비프타를 벽에 밀쳤다. 그녀가 힘껏 콰른 비프타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는 약간 인상을 찌푸리긴 했으나 헥시온이 그의 목을 붙잡았을 때처럼 괴로운 표정을 짓거나 발버둥을 치진 않았다.

“콰른 비프타. 내가 저번에 말을 잘못한 것 같아. 우리 다시는 얼굴 보지 말자.”

“너…….”

“널 죽이고 싶어. 알아? 널 죽이고 싶다고!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네 가족들이 전부 죽었으면 좋겠어. 전부…… 전부! 전부…….”

“…….”

툭, 아델의 손이 콰른 비프타에게서 떨어졌다.

키워 준 정, 그 한마디에 간신히 붙잡고 있던 한 줄기 이성이 끊겼다. 줄곧 눌러 왔던 살의가 저도 모르게 뛰쳐나왔다.

“키워 준 정? 그런 게 어딨어. 난, 죽은 네 여동생을 대신하기 위한 꼭두각시였어. 너, 나 괴롭혔잖아. 진짜를 대신하기 위한 가짜라면서.”

아델이 콰른 비프타를 밀어냈다.

“다신, 오지 마. 다음에 오면…… 헥시온이 널 죽인다고 해도 말리지 않을 거야.”

“…….”

콰른 비프타는 여전히 충격받은 눈으로 아델을 멍청하게 바라봤다. 아델이 떨리는 손으로 헥시온의 손을 붙잡았다. 헥시온이 그녀의 손을 꽉 맞잡아 주었다.

“그렇다고 합니다.”

그는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맞추고는 콰른 비프타에게 다가갔다.

“한 번 더 그녀가 저런 표정을 하게 만들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죽여 주지.”

그가 콰른 비프타의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헥시온의 표정은 전에 보지 못할 정도로 험악하게 일그러진 채였다. 웃음기도 장난기도 엿보이지 않는 그의 시선에 콰른 비프타가 주먹을 쥐었다.

“공작 부인께는 시간이 된다면, 대공저로 한 번쯤 방문해 주시면 좋겠다고 전해 줘.”

그리고 그것이 아델이 비프타라는 성을 가진 공작가의 이들을 만나는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헥시온이 돌아와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 아델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야.”

“…….”

“그건 네가 나빴던 거야.”

콰른 비프타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돌아보는 아델을 보며 콰른 비프타가 이를 악물었다.

“억지로 미소 짓던 네 그 병신 같은 행동이 개 같았던 거라고!”

“…….”

“씨발, 억지로 끌려와서 병신같이 멍청하게 웃고. 욕먹어도 좋다고 웃고. 뭘 해도 좋다고 웃고! 짜증 나면 짜증 난다고 소리쳐! 화나면 화난다고 차라리 울고불고 난리를 치라고!”

콰른 비프타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분을 못 이긴 듯 세게 내리친 그의 손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아델로서는 처음 듣는 콰른 비프타의 진심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한층 딱딱하게 굳었다.

“혼자 이불에 처박혀서 울 거면 대놓고 울어! 안 괜찮다고 말하라고!”

콰른 비프타가 소리 질렀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언제나 괜찮다고 말하니까 어떤 것도 도와줄 수 없었다. 괜찮지 않다고 말하면 좋았잖아. 늘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에 그림 같은 미소를 띠었다. 그는 그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내가 뭘 해야 했는데? 남의 집에 억지로 끌려와서 이유 모를 일들을 당하면서, 도망갈 수도 없는데…… 괜찮다고 말하지 않으면? 뭐가 달라졌어?”

“내가 도와줄 수 있었어.”

“네가 내겐 제일 끔찍했어.”

“네가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거야! 처음 올 때부터 늘 괜찮다는 표정으로…… 썅.”

콰른 비프타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스스로의 분을 이기지 못한 듯 피 묻은 주먹으로 몇 차례나 벽을 내리쳤다.

“야. 그건 네 생각이야.”

“……뭐?”

“혹여라도 나 때문에 그랬다는 말은 하지도 마. 내겐 네가 가장 끔찍했다는 건 변함없으니까.”

아델이 차갑게 말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에 콰른 비프타가 크게 눈을 떴다.

“공작 부인이 날 왜 싫어하는지 알아?”

“……네가 죽은 카레나의 대역이라 그런 거잖아.”

“내가 공작의 사생아이기 때문이야.”

“……뭐?”

아델의 덤덤한 말에 콰른 비프타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콰른 비프타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개소리야?”

“개소리가 아니야. 진짜지.”

콰른 비프타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아버지가 밖에서 자식을 낳아 왔다는 거야? 거짓말!”

“네 눈앞에 증거가 있잖아.”

콰른 비프타의 기준은 늘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 정답이라고 밀고 나간다. 그리고 아델은 그것에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었다.

끔찍할 정도로-.

“네가 싫어, 콰른 비프타.”

저번에도 그 전에도, 계속해서 말했지만 그는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래서 아델은 이번에는 더 확실하게 말했다.

그가 싫다. 끔찍했다.

“이 몸에 있는 피의 반이 너와 같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속에 흐르는 걸 전부 뽑아내고 싶을 정도로 네가 싫어.”

“…….”

“아직도 네가 싫은 이유에 대해서 더 설명해 줘야 해?”

“씨발!”

콰른 비프타가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욕을 뱉었다. 어린애도 아닌데 제 감정을 억누를 줄도 모르고 오로지 표출할 줄만 안다. 아델은 그런 점도 싫었다. 늘 꾹꾹 눌러 참는 자신과 다르게 그는 약간의 불편한 심기마저 주변 사람들이 알아차릴 만큼 티를 내며 살았으니까.

“끔찍해. 난 너 때문에 몇 번이나 죽고 싶었어. 네가 주는 거지같은 선물에도 내가 멍청하게 좋다고 웃었다고?”

“…….”

그녀는 주먹을 꽉 쥔 콰른 비프타를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아니겠지!”

아델이 언성을 높였다.

“이번에는…… 분명 진짜 날 위해 가져온 선물이겠지. 알면서도 멍청하게 속은 나도 미련했지만! 네 그 경박하고 지독한 거짓말에 속을 만큼 멍청했지만!”

아델이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악을 쓰는 그녀의 몸이 분노에 벌벌 떨렸다. 콰른 비프타는 넋을 잃은 채 그녀가 속에서부터 내지르는 감정의 덩어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잔잔한 호수와 같았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약간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고요하디고요한 호수. 그래서 콰른 비프타는 항상 그녀를 재미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호수라고 생각했던 이는 거대한 바다였고, 지금은 쓰나미와 같이 커다란 파도와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었다.

“네가 쓰레기라는 걸 알면서도, 그딴 선물에라도 기뻐했을 정도로 난 힘들었어. 알면서도 기대감에 부풀어 열어 봤던 건……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고!”

“그건…….”

콰른 비프타가 항의라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가 이윽고 조용히 다시 다물었다. 알면서도 몇 번이고 기뻐하며 선물을 받아들였던 것은 멍청해서가 아니었다. 바보 같아서도 아니었다.

그저,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래도 날 잊지 않아 줬구나. 그래도 내 생각을 해서 선물을 사 왔겠구나. 그런, 거지같은 기대감 때문이었다.

“이제 필요 없어. 기대 안 해. 날 이렇게 만든 건 다름이 아니라 너였어. 너희 가족이었고 그 저택이었다고.”

아델의 목소리에 콰른 비프타는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노려보는 아델의 눈에 담긴 것은 그가 그토록 바랐던 감정의 잔해였다. 그러나 그 시선은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토사물이라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콰른 비프타는 그것을 깨닫는 순간 숨을 멈췄다.

“그러니까 네가 부린 패악을, 나 때문이라고 포장하지 마.”

“…….”

“대화나 관심이 아닌 폭력으로 해결하려고 한, 그 끔찍한 행동을 감히 나 때문이었다곤 하지도 마.”

“……내가 언제 너를 때렸다고 그래.”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콰른 비프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때리는 것만이 폭력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넌 글렀어.”

아델이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때리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상처받고 죽는 사람은 없겠지. 그것이 강자와 약자의 차이였다. 갑과 을의 다른 점이기도 했다.

“넌 가해자야. 그것도 아주 질이 나쁜 쪽이지.”

“…….”

“내가 왜 그렇게 너희를 싫어하냐고? 너와 내가 가족이라고? 그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부터 고쳤어야지. 날 동등한 존재로서 대했어야지.”

“……난 널 동등한 가족이라고 생각했어.”

변명처럼 내뱉어지는 콰른 비프타의 말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아델이 헛웃음을 삼켰다. 이윽고 그녀가 피식거리며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한없이 서늘했다.

“네가 저지른 게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시점부터 네가 나보다 한없이 우위에 서 있다는 걸 증명하는 거야.”

아델은 더는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난 네 가족이 될 생각도 없고 가족이 되고 싶지도 않아.”

“…….”

“뭣보다, 네가 공작 부인을 어머니라고 생각한다면 공작이 저지른 불륜의 증거물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면 안 되는 거 아니겠어?”

아델의 말에 그제야 콰른 비프타의 눈이 놀라움에 물들었다. 제 감정만 앞서서 또 이기적인 생각만을 한 것이 분명했다.

“……일생에 단 한 번의 부탁이야. 콰른 비프타.”

그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고개를 들었다. 아델과 콰른 비프타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다신 만나지 말자.”

그녀가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몸을 돌렸다. 대화를 나눈 것뿐인데도 이렇게 진이 빠진다. 아델은 진심으로 이것이 콰른 비프타와 나누는 마지막 대화이기를 바랐다.

“저자가 또 당신을 찾아오면, 이번엔 망설이지 않고 목뼈를 부…….”

말을 하던 헥시온이 멈칫했다. 뒤늦게 단어 선택이 머리를 거치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다. 그가 빙긋 웃고는 자연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제대로 겁을 줘서 쫓아내도록 하겠습니다.”

“네.”

아델이 지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운이 빠진 듯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헥시온이 냉큼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델.”

“…….”

“아델?”

“아…… 네. 왜요?”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친 듯한 얼굴을 보며 헥시온이 속으로 혀를 찼다. 콰른 비프타가 정말로 다시는 아델의 눈앞에 나타날 수 없게 발목을 부러뜨리든 목뼈를 부러뜨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아델에게 보여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휘하의 부하라도 몰래 풀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앞으로는 내가 당신께 진심을 담아 선물을 하겠습니다.”

“……네?”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들자 헥시온이 그녀를 휙 잡아당겨 골목길로 끌어당겼다. 그녀를 벽에 기대게 한 그가 후드 안쪽,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그러니 콰른 비프타 따위는 잊으십시오. 당신이 내 선물을 받고 기뻐해 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겁니다.”

“……헥시온은, 늘 내가 듣기 좋은 말만 해 주네요.”

“진심입니다.”

“정말요?”

“당연한 말씀은 하지도 마십시오. 서운합니다.”

헥시온이 처연하게 속눈썹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의 전매특허가 되어 버린 ‘서운합니다’에 아델이 결국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델 앞에서 고하건대, 맹세코 태어나 누군가에게 이렇게 매달려 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처음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마지막이 될 거고요.”

헥시온의 단호한 말에 아델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가 천천히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헥시온이 자유로운 오른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곧 깨어질 것 같은 유리병을 쓸어내리듯 조심스러운 손길에 아델이 떨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지 마요…….”

“…….”

“우리의 마음이 서로 얽히더라도, 나는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이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아델이 낮게 읊조렸다.

“난 당신 곁에 있을 명분이 없는걸요.”

공작가의 성도, 카레나 비프타의 대역이라는 명분도 사라진 채 남는 것은 초라한 몸뚱어리뿐일 것이다.

아델은 그것이 싫었다. 아무리 그가 다정해도, 아무리 서로가 사랑한다 하더라도, 자신이 평민인 이상 평생 그에게 의탁하면서 살 수밖에 없을 게 분명했다.

그건 비프타 공작가에 의지해 살아가던 지난날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었다. 지금은 고대어를 해독하는 능력이 그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지만, 황제가 된 그에게도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헥시온이 아델의 등을 쓰다듬던 손으로 그녀의 볼을 덮었다. 그 손길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게 된 아델이 헥시온을 바라봤다.

“명분이야 만들면 될 일입니다.”

“네?”

“있을 장소는 아델이 만드십시오. 당신의 고대어 능력은 대단합니다. 황성에도 고고학자와 역사학자가 있습니다.”

“…….”

헥시온이 조곤조곤 귓가에 속삭였다.

“제국은 오래전부터 고대에 남겨진 유적을 발굴하는 것에 대해 무척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고고학자도 역사학자도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죠. 숲의 고대 유적들이 방치된 이유도 그런 이유였을 것입니다.”

“아! 그렇네요. 확실히 고대 유적이나 역사에 대해 뭔가 발표된 적이 현저히 적은 것 같기도…….”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제국은 이상하리만큼 과거를 파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 때문인지 개중에는 고고학자라는 직업을 아예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가 가는 길에 본 시체들은 아마 비석을 해독하려고 했던 자들일 겁니다.”

헥시온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숨겨온 진실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그 바엘이라는 것의 잔재였다면…….”

“그래서 그동안 고고학자의 존재가 없었던 것이라는 말이군요.”

“네. 그러니 당신이 할 일은 무척 많을 겁니다. 만들 수 있는 명분은 수만 가지도 넘습니다.”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 간단하게 제시했지만, 내용은 무척이나 구체적이고 생각보다 자세했다. 아델이 생각하지 않은 부분까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해 왔던 것이 분명했다.

“앞으로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유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미지의 이야기를 좋아하고, 유적은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을 테니까요.”

“…….”

“그러니 그런 슬픈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

헥시온이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에 제 입술을 살짝 닿아왔다. 맞부딪힌 입술로 그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울어 버릴 것 같습니다.”

입술 위로 떨리듯 전해지는 목소리에 아델이 몸을 굳혔다. 그녀가 허락하듯 천천히 눈을 감자 헥시온이 입술을 살짝 깨물며 아델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입천장을 살살 긁으며 그는 아델의 여린 안쪽 살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혀를 붙잡고 빨아당기던 그는 그녀의 입안을 어루만지듯 천천히 탐했다.

“응…….”

그 집요한 움직임에 아델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입맞춤을 끝낸 헥시온은 아델의 입술에 다시 한번 쪽 입을 맞추더니 살짝 떨어졌다. 그래도 여전히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느껴져 아델은 꾹 감았던 눈을 아주 천천히 떴다.

“난 아델이 앞으로도, 줄곧 제 곁에 있어 주시길 바랍니다.”

“언제든 끝낼 수 있다고 한 건……, 응…….”

헥시온이었잖아요, 라는 뒷말은 나오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헥시온의 집요함에 묻혀 버렸다. 일부러 입을 막아 버린 것이 분명했다. 아델이 눈을 가늘게 뜨자 헥시온이 또다시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서운합니다.”

“아니, 이건 서운한 게 아니라…….”

헥시온이 허리를 굽혀 또다시 입을 맞췄다가 떨어졌다.

“물론 내가 그렇게 말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실 생각이었습니까?”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처연한 표정으로, 헥시온이 말했다.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표정인데, 그마저도 잘생겨 보였다. 그는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미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정말이십니까? 내가 싫어지셨습니까?”

“그게 아니라…….”

“물론, 이 관계는 여전히 당신이 우위에 있긴 합니다. 아델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나를 냉정하고 차갑게 내치실 수 있겠지요.”

“아무도 거기까진 말하지 않았어요.”

이제는 헥시온이 저런 표정을 하는 것이 반쯤 연기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알고는 있는데,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느끼는 것은 확연히 달랐다.

“내가 싫지 않습니까?”

“당연히……!”

울컥, 고개를 치켜든 아델이 목소리를 높이려다가 제 목소리에 도리어 놀라 주춤했다.

“당연히 싫지 않죠.”

“정말입니까?”

“네.”

“내가 좋습니까?”

“……싫으냐, 좋으냐로 따지면 당연히, 후자에 가깝죠.”

그는 은인이었고 아델은 헥시온이 싫지 않았다. 사실 조금 더 솔직해져 보자면, 그의 마음과 어느 정도 닮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럼…….”

“네.”

“그럼 말입니다, 아델.”

“네.”

“나와 진짜 연인이 될 마음은 없습니까?”

“네.”

반쯤 반사적으로 대답한 아델이 뒤늦게 질문을 곱씹었다. 그녀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아델이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다시 고개를 든다.

“……네?”

“내가 당신의 옆자리에 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헥시온이 아델과 손을 얽어 깍지를 꼈다. 뒤늦게 그의 말을 깨달은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계약이나, 약속 같은 관계가 아니라…… 진짜 연인이 되어 주십시오.”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것 같은데요…….”

“갑작스럽지 않으면,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귓가에 닿는 은근한 질문에 아델이 눈을 질끈 감았다. 달아오른 얼굴을 들키기 싫어 고개를 숙였지만, 헥시온이 한쪽 무릎을 굽혀가면서까지 눈을 마주쳤다.

“아델.”

“아, 제발……. 헥시온.”

아델이 벌겋게 물든 얼굴로 웅얼거렸다. 헥시온이 한쪽 무릎을 굽힌 채 천천히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강요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아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델, 나는 당신을 온전히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 있습니다.”

“…….”

“빨리 당신도 내게 그런 마음을 느끼면 좋겠네요.”

빙긋 웃은 헥시온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 당신을 좋아합니다. 다음에는 제대로 준비해서 다시 도전할 테니 그때까지 고민해 주십시오.”

헥시온의 손이 아델의 볼을 쓸었다.

“당신의 머릿속이 언제나 내 생각으로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

“그러면 더는 서운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웃음기 섞인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아델이 멍한 표정으로 헥시온을 바라봤다.

정말, 이길 수가 없다.

아델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였다.

“그럼 이만 돌아가지요. 오늘 일은 다 해결했으니 말입니다.”

“네…….”

아델이 푹 숙인 채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그녀의 후드를 다시 꼼꼼히 씌워 준 헥시온이 아델과 손을 맞잡고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 * *

쾅!

현관이 부서지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온 콰른 비프타를 보며 사용인들이 몸을 움츠리곤 황급히 허리를 굽혔다.

“아버지는?”

“공작님께서는 집무실에 계십니다.”

“주변에 있는 것들 다 꺼지라고 해.”

“예.”

시종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곤 콰른 비프타를 앞질러 빠르게 달려갔다. 그는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었지만, 오늘은 특히 성난 황소처럼 무서웠다. 겁에 질린 사용인들이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콰른 비프타의 주변으로 성난 마력이 흩어졌다. 덕분에 지나가는 길마다 장식물들이 흔들리다 떨어졌다. 콰른 비프타는 손도 대지 않고 집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쾅. 또다시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콰른,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집무실에 있는 것은 펠리스 비프타와 비프타 공작이었다. 두 사람은 집무실에서 같이 일을 처리할 때가 많았다. 아무래도 펠리스가 후계자이기에 그런 것이었지만, 지금 콰른 비프타에겐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번 건 네가 잘못했다. 콰른.”

서류를 정리하던 펠리스 비프타가 콰른 비프타를 타박했다. 그러나 콰른 비프타는 굳은 얼굴을 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

“그래.”

“……카레나, 아니. 아델이 아버지 딸이라는 게 진짜예요?”

콰른 비프타의 말에 비프타 공작의 얼굴이 굳었다. 펠리스 비프타는 대체 저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미간을 좁혔다.

“아델이 누군데?”

“카레나의 대역.”

콰른 비프타의 짧은 말에 펠리스 비프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질문이 이해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야, 어쨌든 그 애는 카레나 대신 살…….”

“아델이 아버지 사생아라는 게 진짜냐고!!”

펠리스 비프타의 말이 끊기기도 전에 콰른 비프타가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펠리스 비프타와 비프타 공작, 두 사람이 동시에 몸을 굳혔다.

비프타 공작이 입을 꾹 다문 채 콰른 비프타를 말없이 바라봤다. 펠리스 비프타가 두 사람의 사나운 기색을 살피더니 중재라도 하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콰른.”

펠리스 비프타의 말에 콰른 비프타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무슨 소리가 아니었다. 그가 직접 본인에게 듣고 온 이야기였다.

아직도 믿을 수 없는 것은 콰른 비프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델의 표정은 진지했다. 지금껏 콰른 비프타가 봐 왔던 표정 중에 가장 진지했다. 그렇기에 그는 아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왜 말을 안 해? 아버지.”

“그건 어디서 듣고 왔지?”

“……씨발, 지금 그게 중요해? 진짜인지 아닌지 묻잖아!”

“콰른 비프타! 너 미쳤어? 아버지께 지금 무슨 말버릇이야!”

펠리스 비프타가 콰른 비프타의 멱살을 붙잡고 벽에 밀쳤다. 콰른 비프타의 사나운 시선이 펠리스 비프타에게 향했다.

“……나 지금 기분 더러우니까 이거 놔, 형.”

“아무리 기분이 더러워도 어디서 이상한 말을 주워듣고 와서 아버지 앞에서 욕설이야? 네가 미치지 않았으면 이럴 리가 없지. 그 애가 나가고 나서 이상해지더니 진짜 미친 거냐?”

콰른 비프타가 마력을 모아 그대로 펠리스 비프타를 발로 밀쳐냈다. 펠리스 비프타가 뒤로 훅 밀려났다. 다행히 빠르게 손으로 막은 덕분에 급소에 직격하진 않았다.

“이게 거짓말인지 진짜인지는 아버지가 대답하면 끝날 일 아니야! 왜 말을 안 하냐고, 아버지!”

발악하는 콰른 비프타의 말에 펠리스 비프타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비프타 공작은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 콰른이 어디서 이상한 말을 듣고 온 모양입니다.”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느냐고 묻지 않느냐. 콰른 비프타.”

“……아버지?”

비프타 공작의 나직한 물음에 콰른 비프타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제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할 말이 없어졌다.

“하…….”

콰른 비프타가 고개를 푹 숙였다. 헛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잘못 알았겠지, 잘못 알았으면 다시 잘 설명이라도 해 주자고 생각했다.

“진짜였구나.”

콰른 비프타가 벽에 기댄 채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그는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피가 흘렀다가 굳은 손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그 애가 말했던 게 진짜였어…….”

“그 애가 알고 있었다고? 대체 어떻게?”

“아버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펠리스 비프타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듯 콰른 비프타에게서 몸을 돌려 비프타 공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건은 함구하도록 해라. 둘 다. 알겠나?”

“누구한테 함구해? 누구한테!”

“네 어머니가 들으면 놀랄 거다. 그러니…….”

비프타 공작의 염려스러운 목소리에 콰른 비프타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가 잔뜩 벌어진 눈으로 비프타 공작을 올려다봤다. 커다랗게 뜨인 눈으로 비틀비틀 일어난 콰른 비프타가 공작의 앞에 섰다.

“……아니지?”

“뭐가 말이냐.”

“어머니 몰래……, 어머니랑 상의도 없이…… 그 애, 그렇게 데리고 온 거 아니지? 아버지.”

콰른 비프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공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공작 부인이 날 왜 싫어하는지 알아?’

‘……네가 대역이라 그런 거잖아.’

‘내가 공작의 사생아이기 때문이야.’

비프타 공작은 자신이 말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아델은 공작 부인이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기했다.

“……제발 아니라고 해 봐! 아니라고 하라고! 말 좀 해!”

비프타 공작은 상당히 골치가 아픈 듯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은 채 혀를 찼다.

“……어떻게, 어떻게 아버지가…… 그럴 수 있어? 어떻게…….”

콰른 비프타가 피 묻은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채 말라붙지 않은 피가 콰른 비프타의 얼굴 이곳저곳에 상처처럼 새겨졌다.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알고 있다고 했다고…….”

“뭐?”

“……그 녀석이 어머니가 알고 있다고 말했어! 자기를 싫어했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대체, 씨발, 누구한테 함구하라는 거야!”

콰른 비프타의 목소리는 이제 반쯤 쉬어 있었다. 꽥꽥 내지르는 목소리를 듣던 펠리스 비프타가 짜증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한 번에 들어오는 정보를 이해할 수 없어서 머리에 과부하가 걸릴 것 같았다.

“……알고 있다고?”

계속해서 큰 변화를 보이지 않던 비프타 공작의 동공이 처음으로 눈에 띄게 흔들렸다. 콰른 비프타가 거칠게 발을 구르며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엉망이 된 머리카락으로 콰른 비프타는 악을 쓰며 집무실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세 사람이 있는 집무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해졌다.

* * *

“비석이 총 열두 개 있다고 처음에 쓰여 있었지요?”

“네에…….”

헥시온의 목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려왔다.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낮은 저음이어서 무척 듣기 좋았지만, 동시에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앞으로 일곱 개 남았군요. 조금 열심히 다녀야겠습니다.”

“……그렇긴 하죠.”

“그런고로 내일 함께 가는 건 어떻습니까?”

“내일이요?”

“네, 곧 황제가 날 부를 때가 다가오거든요.”

잠시 고민하던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숲에 다녀온 뒤로 일주일쯤 지나서 푹 쉬기도 했고 문제될 것은 없었다.

‘지금 가장 문제라면…….’

아델은 자신의 옆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누워 있는 헥시온을 흘겨봤다.

“왜 여기에 계세요?”

“……음, 팔이 아픕니다.”

“팔이 아프다고요?”

“네. 아무래도 칼럿 때문에 밤만 되면 심장에 통증이 찾아오다 보니…….”

헥시온이 어쩐지 인위적으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저걸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아델은 아주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우리는 더 이상 숨길 게 없는 사이 아닙니까.”

“…….”

헥시온의 말에 아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밤만 되면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하는 것인지, 능글맞음이 한층 더 심해졌다.

“저는 아델의 옆에 있는 게 좋습니다.”

“…….”

“안 됩니까?”

헥시온이 처연한 표정으로 아델을 올려다봤다. 고개를 저으면 곧바로 ‘서운합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이다.

“……아무 짓도 안 한다면요.”

“이런, 내가 한 이불을 덮고 자면서 여태 무슨 짓을 한 적이 있습니까?”

“…….”

한 이불을 덮을 때마다 거사가 이뤄지지 않았나 생각하던 아델이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그렇다고 무슨 짓을 했다고 하기엔 서로 합의 하에 이루어진 일이니, 애매했다.

“일주일 내내 집을 자주 비우셨던데요.”

“네, 개인적으로 처리할 것도 있고…… 그 진이라는 자도 만났어야 했고요.”

“아아.”

“내일이나 모레 중에 날이 좋을 때 떠나는 거로 하는 건 어떻습니까?”

“좋아요.”

아델이 작게 하품하며 대답했다. 이불이 평소보다 두 배로 따끈따끈해서 그런지 솔솔 잠이 몰려왔다. 헥시온이 오른손으로 아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좋은 밤 되십시오. 아델.”

“헥시온도요.”

“난 당신이 곁에 있으면 언제나 좋은 밤입니다.”

“아, 제발.”

아델이 잠이 확 깬 듯 눈을 치켜뜨며 타박했다. 헥시온이 아델을 달래듯 한층 더 힘주어 품에 끌어안았다. 잠시 후 피곤했던 아델은 고른 숨을 뱉으며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진심인데, 믿어 주시질 않는군.”

키득거리며 그녀의 머리에 이마를 살짝 비빈 헥시온의 입가에 퍽 만족스러운 웃음이 그려졌다.

* * *

“좋은 아침이다, 아델.”

“……어? 진?”

얼굴을 본 지 오래된 것 같지도 않은데 무척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헥시온을 슬쩍 쳐다보니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숲으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멈춘 아델이 옅게 웃는 진을 바라봤다. 진이 성큼성큼 다가와 아델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탁, 헥시온이 진의 손을 쳐냈다.

“정확한 상황을 확인하러 왔으면 그냥 일만 하는 게 어떱니까.”

“……쯧, 애처럼 구는 건 그만두는 게 어때? 한심해서 상대를 못 하겠군.”

“사랑하는 사람의 앞에선 얼마든지 유치해질 수 있습니다. 네놈이야 평생 여자 손도 못 잡아 봤을 게 뻔하지만 말입니다.”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엔 저번처럼 날이 선 듯한 느낌은 없었다. 몇 번 따로 만났다고 하더니 그사이 제법 친해진 건가? 물론 두 사람이 그녀의 생각을 들었다면 절대 아니라고 소리쳤을 게 분명했다.

“진은 여기 어쩐 일이야?”

“오랜만에 너도 볼 겸, 저자에게 네 얘기를 듣고 확인도 할 겸 왔다.”

“그렇구나. 좋네. 옛날에 탐험 같은 거 하던 기분도 들고.”

아델의 말에 진이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기어코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은 그는 숲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미처 막지 못한 헥시온이 뒤늦게 그녀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뭐 해요?”

“정화 의식입니다.”

“……네?”

“오늘은 여섯 번째로 기억합니다만, 맞습니까?”

황당함이 담긴 아델의 시선을 느낀 헥시온이 냉큼 고개와 함께 말도 돌려 버렸다. 아델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말에 긍정했다. 헥시온의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델은 그 모습을 보다 못해 고개를 돌렸다. 점점 붉게 물드는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자신이 다 민망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여섯 번째 비석은 네 번째 비석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쭉 들어가야 한다고 했어요.”

“네. ……알겠습니다.”

헥시온과 아델이 슬쩍 거리를 둔 채 숲 초입으로 들어갔다. 팔짱을 낀 진이 한심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보지 못한 사이 대체 무엇이 진행된 것인지 감도 잡히질 않는다.

‘……아델이, 저런 표정을 하는 건 처음 보는군.’

진이 묵묵히 그들의 뒤를 쫓으며 생각했다. 그녀는 늘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감정이라곤 하나도 없는 듯, 삶에 지독한 회의라도 느낀 듯, 죽은 눈을 한.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제법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델, 너무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네?”

“손을 뻗어도 닿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어 주십시오.”

하지만 늘 딱딱하고 오만불손한 표정으로 말만 경어를 쓰는 남자가 약한 척 투정을 부리는 모습이 솔직히, 보기 좋진 않았다.

진의 미간이 좁아졌다.

“네? 아델.”

“……너 약 먹었냐?”

진이 진지한 눈으로 물었다. 눈꺼풀을 살짝 내리깔고 슬며시 아델에게 옆으로 다가갔으면서, 뭘 또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어 달라는 것인가. 저기서 더 붙으면 누가 봐도 손이 아니라 몸이 붙을 게 분명한데.

“……당신, 꼭 따라와야겠습니까?”

“뭐?”

“아델과 둘이 있을 시간도 부족한데 솔직히 당신은 방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진이 헛웃음을 머금었다. 아델이 황급히 헥시온의 팔을 흔들며 무슨 짓이냐고 말했지만, 그의 퉁명스러운 시선은 여전히 진에게 향해 있었다. 예전처럼 적대감으로 가득한 눈은 아니었지만, 진에게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이긴 했다.

“최근 잠잠했다고 슬슬 내가 우스운가 보군.”

“당신이 우습지 않았던 적은 그다지 없습니다만.”

“그러면서 내 밑에 무릎을 꿇었나?”

“……누가 누구 밑에 무릎을 꿇었다는 겁니까?”

“네가 내게 도와 달라며 무릎을 꿇은 게 아니고 뭔가?”

코웃음을 치는 진의 목소리에 헥시온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가늘게 뜬 눈으로 진을 노려보던 헥시온이 이윽고 한숨을 짧게 내쉬며 아델의 손을 맞잡았다.

“아델, 저 속상합니다.”

처연하게 눈꺼풀을 내리깐 채 헥시온이 은근슬쩍 아델 쪽으로 몸을 붙였다. 아델이 조금 당황한 눈으로 헥시온과 진을 번갈아 봤다. 진이 곧 폭발할 기세였다.

“저자는 원래 저렇게 늘 까칠합니까? 속상합니다.”

“아……. 진은 다정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저자가 다정하다고요? 저보다 다정합니까? 아델은 잔인합니다…….”

“아니…….”

이쯤 되면 진은 억울했다. 먼저 제 손을 쳐내며 시비를 걸었던 건 누구였던가. 인사를 나누려던 멀쩡한 사람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누가 봐도 헥시온이었다.

“아델.”

“어…… 응?”

“진지하게 충고하건대, 병원이라도 데려가 봐라. 어디가 아픈 게 분명하군.”

진의 말에 아델이 어색하게 웃었다. 헥시온이 일부러 이러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헥시온을 밀치고 진의 편을 들기도 다 알면서 헥시온의 편을 들어 주기도 모호했다.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헥시온, 장난 그만 치고 얼른 가요.”

“……알겠습니다.”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헥시온이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티격태격 떠들다 보니 벌써 네 번째 비석 앞이었다. 헥시온이 아델을 뒤에 두곤 제가 앞장서서 걸어갔다. 아델의 뒤를 지키는 것은 진이었다.

여섯 번째 비석으로 가는 길은 무척 길었다. 이전처럼 길이 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수풀을 헤치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치워도 치워도 무성한 수풀은 자꾸만 길을 방해했다.

크아아악!

크르르르!

설상가상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수상한 울음소리에 헥시온과 진이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검집에서 뽑히는 검의 소리에 아델의 몸도 한껏 긴장됐다.

“이건 뭐지?”

“글쎄요. 이 숲에선 워낙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해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다만.”

“돌아가도 어차피 또 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숲에선 두려움을 참고 나아가지 않으면 또 다른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헥시온의 설명을 들은 진이 힐끔, 아델을 살폈다. 그녀도 그의 말에 동의하는 듯 묵묵히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사실 진은 그들이 이해가지 않았다. 누가 봐도 이 살기와 위협들은 예사 것이 아니었다.

“둘러싸였다.”

“어차피 다시 와도 둘러싸일 거야. 진.”

“……태평할 일이 아니야, 아델.”

진이 달래듯이 아델에게 말했다. 진은 오랜 시간 어둠의 세계에 몸을 담고 있던 덕에 누구보다 위험한 기운에 민감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살기다. 진의 동공이 확 축소되더니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정말 위험한 것 같은데.”

“하지만, 아직 공격하지 않잖아.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아델의 말에 진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렸다. 대체 언제부터 그녀는 스스로 의견을 말하고 스스로 위험한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된 거지?

진은 아델을 도왔다. 지금뿐만이 아니라, 뒷골목에 있을 때부터 계속 그녀를 도왔고 돌봐왔다. 그녀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녀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의아하기도 했다. 결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때로 굶는 그녀에게 밥을 챙겨 주면, 그녀는 거부하지 않고 받아먹었다. 동정받는 것을 싫어하는 듯 보였는데 실제론 주어지는 호의를 거부하지 않았다.

진은 건조한 목소리로 고맙다는 한마디를 건네는 그녀가 좋았다. 그래서 종종 그녀를 죽지 않을 범위에서 챙겨 주곤 했다. 제게 부탁한다면, 얼마든지 편의를 봐줄 수 있었다. 그는 시궁창이지만 그 시궁창 속의 주인이었고 제 품의 사람 정도는 얼마든지 돌봐 줄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애원하지도 부탁하지도 않았다. 그 작은 몸으로 음식을 구하려다 안 되면 어쩔 수 없다는 듯 구석진 곳에서 웅크리고 우물물로 배를 채우곤 했다. 힘이 없으니 경쟁에서 도태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매일 도전했다.

물론 대부분 패배했다. 살아는 있지만, 의욕은 없어 보였다.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죽음이 찾아온다면 분명히 담담히 눈을 감고 그것을 받아들였을 거다.

“아델, 동정받는 것이 싫나?”

“동정? 좋지는 않지. 하지만…… 누군가가 날 위해서 생각해줬다는 사실만큼은 기쁠 것 같네.”

싱긋 웃는 그녀를 보며 진이 헛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달라졌다. 보지 못한 새, 그가 찾지 못하고 시체 더미를 헤매던 사이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누군지도 모를 사람을 만나 달라졌다.

“이곳은 위험한데도 앞으로 나아가는 거야?”

“응.”

“어째서지?”

“글쎄, 드디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걸 찾았으니까?”

아델이 대답했다.

수풀을 헤치고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온몸에 붙여가며? 대체 무엇을 위해서? 진은 생각했다.

“무엇을 위해서……?”

“글쎄…….”

아델은 무척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소리 없이 몇 번인가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하더니 이윽고 그녀는 웃었다.

“내가 필요하다고 한 사람이 있었거든.”

“……네가 필요해?”

“응. 내 의지는 아무것도 없었던 삶에, 오로지 당신이 필요하다고 손을 뻗어 준 사람이 있었어. 그래서 도와주기로 했어.”

“…….”

“그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까, 나는 그 뒤를 따라가는 거야.”

아델의 말에 진이 숨을 멈췄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당한 마음과 기묘한 경이로움, 이를 모를 감정들이 뒤섞여 속에서부터 술렁였다. 그는 그녀가 혼자이기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발치에서 지켜봤다. 그러다가 놓쳤고 후회했다.

“……외로웠나?”

진의 물음에 아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쓰게 웃었다. 다시 헥시온의 등에 시선을 고정한 그녀는 한참 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녀가 짧게 대답했다.

“어릴 땐 말이야, 무리에 들어가는 것이 무서웠어. 다치는 것도 싫고,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도 싫어서 괜히 강한 척을 했어. ……그게 뭐라고. 죽고 나면 더 할 수 없는 건데.”

고해성사하듯 꺼내 놓은 이야기를 진은 묵묵히 들었다. 헥시온도 같이 듣고 있는 듯했지만, 이야기에 함부로 끼지는 않았다.

“하지만 역시 깨달았어. 혼자는 외롭더라. 아니라고 생각했고 아니었어야 했는데, 외로웠어.”

아델의 말에 진은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다. 아델은 혼자가 되는 것을 원했던 게 아니었다. 그저 기댈 사람을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아,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아델이 볼을 붉힌 채 얼굴을 문질렀다.

“멈춰라. 인간.”

그 순간 으르렁거림과 함께 들리는 쇠를 긁는 듯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의 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헥시온이 반사적으로 아델을 끌어당겨 뒤에 숨겼다.

“누구냐.”

“이곳은 인간은 출입할 수 없는 공간이다. 돌아나가라.”

“뭘 할 생각은 없습니다. 비석을 보러 가는 것뿐이지요.”

헥시온이 허공에 소리치자 상대가 잠시 조용해졌다. 여기저기서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는 여전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거기서 움직인다면 죽이겠다.”

헥시온이 한 걸음 움직이려는 순간, 목소리가 매섭게 지적했다. 그가 입을 다물고 발을 물렸다. 어느새 주변은 마치 밤처럼 사방이 어두워져 있다.

“다섯 번째 비석을 해독했나?”

“네.”

이번에 대답한 것은 아델이었다. 상대는 다시 조용해졌다. 아델과 헥시온, 진이 숨을 삼킨 채 다음 목소리를 기다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은 그들의 위치를 가늠하느라 바쁘긴 했지만.

“그렇군. 네놈들은 도전자군.”

“도전자?”

“비석의 끝을 보기 위해 가는 자를 나는 도전자라고 부른다.”

쿵-!

커다란 땅 울림과 함께 거대한 나무 위에서 누군가가 떨어졌다.

아델과 헥시온, 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것은 분명히 두 발로 서 있었으나 주둥이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양 볼에는 가느다란 수염이 길게 나 있었으며 샛노란 눈은 쭉 찢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회색의 털이 가득했다. 머리 위에는 귀가 쫑긋거리고 있는 것이 영락없이 직립보행을 하는 늑대였다.

킁, 콧김을 뿜은 늑대는 세 사람을 느릿하게 훑었다.

“참고로 지금까지 여기에 도착한 것은 네놈들이 스물일곱 번째다. 그리고 이곳을 통과해 여섯 번째 비석을 해독하고 일곱 번째 비석으로 나아간 이들은 총 일곱이다. 너희가 통과하면 여덟 번째가 되겠지.”

“늑대가 말을…….”

아델과 헥시온은 놀랐지만, 지금껏 겪은 놀라움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솔직히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은 달랐다. 그는 지금 눈앞에 있는 비현실적인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진은 눈치가 있었다. 그는 뭔가 말을 꺼내는 대신 침묵을 택했다.

“……스물일곱 명이나 왔었다는 건가요?”

“스물일곱 팀이지. 개중엔 혼자도 있었고 셋도 있었고 다섯도 있었다.”

늑대의 입이 움직이며 인간의 언어를 뱉었다. 경이롭고 기이한 광경이 아닐 수가 없었다. 늑대가 움직이며 말을 하다니.

“제법 많았군요…….”

“나의 친우가 이곳에 비석을 세우고서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인간의 세계에선 수백 년이 더 넘는 시간이 흘렀는데, 이곳을 알아낸 게 너희뿐만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한심하다는 듯 코웃음을 친 늑대의 비꼼에 아델이 입을 다물었다.

“이곳은 희생과 고통의 에리어다.”

“희생과 고통……?”

이름부터 섬뜩하기 그지없다. 아델이 손을 뻗어 이제는 자연스럽게 헥시온의 손을 맞잡았다. 진은 그것을 바라보며 입을 닫았다.

‘기댈 곳을 찾았군.’

힘들거나 무서울 때. 어찌할 수 없을 때 도와 달라며 손을 뻗을 곳을 그녀는 찾아낸 모양이다. 그래도 그녀는 두 번째라도 자신을 찾아 줬다. 도와 달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진은 그녀를 도와주기로 했다. 진이 씁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입을 닫았다.

“이곳에 오면서 느꼈겠지. 짐승의 울음소리를.”

“그래.”

“그것들은 인간의 살기와 원망 같은 감정으로 만들어진 이형의 존재들이다. 그것들을 죽이면 일곱 번째 비석으로 향하는 길이 생길 거다. 너희 중 한 명이 비석을 해독할 동안 쉬지 않고 그것들을 죽이면 된다.”

“……그것뿐인가?”

“그래, 그것뿐이지.”

늑대의 이가 재밌다는 듯 드러났다. 비웃음인지 웃음인지도 모를 것이 맺힌 늑대의 입을 보며 헥시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베면 바로 죽는 건가?”

질문은 진의 입에서 나왔다.

“아니. 그것들은 베면 증식할 거다. 또다시 베면 그것들은 모여 더욱 강한 개체가 될 거다. 두 시간이 지나면 나만큼 강한 것이, 세 시간이 지나면 내 친우만큼 강한 것이 네놈들을 공격하겠지.”

늑대가 말했다.

가면 갈수록 강해지다니, 마치 토너먼트 게임과도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그렇게 가벼운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것이 희생이다. 목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지.”

“그럼 고통은?”

진이 물었다.

“그것에게 베이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하고 가장 고통스러운 아픔을 재현한다.”

“…….”

진과 헥시온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아델 역시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품에 안고 있는 노트를 꽉 끌어안았다.

“이곳에 발을 들인 이상 도망갈 수는 없으나, 나는 관대하니 늘 기회를 한 번씩 줬지.”

“기회라뇨?”

아델이 묻자 늑대가 컹컹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네놈들이 비석에 대한 기억을 내놓고 물러난다면, 그것을 대가로 살려 주도록 하지. 이건 도전이 진행 중일 때도 유효하다.”

“웃기는 소리군요.”

“이형의 존재는 육체를 죽이진 않지만, 정신은 죽인다. 끔찍스러운 고통에 이성이 마비되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해. 그것들은 정신을 갉아 양분으로 삼을 테니까.”

늑대가 땅을 박차며 다시 나무 위로 도약했다. 그가 움직인 자리에 나뭇잎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자, 원혼을 베면 길이 생길 거다. 나아가는 도중에 홀리지 않기를 바라지.”

키득키득하는 소리와 함께 살기와 그 존재만이 느껴졌던 존재들이 세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늑대를 닮은 형체를 하고 붉은 눈을 한 채 몸은 온통 그림자처럼 새까맸다.

진과 헥시온이 달려든 열 마리를 단칼에 베었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쉬운 행위였다. 바닥으로 형체를 잃고 널브러진 것들이 이윽고 분열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은빛으로 빛나는 기묘한 길이 아까 늑대가 서 있던 자리부터 길게 생겨났다.

“아델. 다녀오십시오.”

“……네.”

눈치를 보던 아델은 망설이기보단 그 길로 몸을 던지는 것을 선택했다. 동시에 진과 헥시온이 두 번째 원혼을 벴다. 그것들은 또다시 분열을 시작했다. 새까만 늑대가 두 사람이 서 있는 장소를 꽉 채웠다. 샛노란 시선이 허공에서부터 그들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자.’

아델이 심호흡을 깊게 하곤 발을 내디뎠다. 비석으로 가는 길은 무척 이상했다. 일직선으로 나 있는 길의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주변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에 아델은 숨을 삼켰다. 그녀는 앞만 보고 빠르게 걸었다.

<아델, 아가…… 내 아가……. 이리오렴.>

<그래, 우리와 함께 있어야지. 이곳이 네 집이란다. 네 어미와 이제는 함께 살 수 있어.>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름다운 여인과 그 옆에 있는 비프타 공작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다정한 웃음을 띤 채 아델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마치 이곳으로 오라는 듯이.

‘원혼을 베면 길이 생길 거다. 나아가는 도중에 홀리지 않기를 바라지.’

아델이 이족 보행을 하던 늑대의 말을 떠올렸다. 홀리지 않기를 바란다는 게 이런 뜻인가? 그녀의 입가가 비틀려 올라갔다.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질 않는다. 분명 가장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상황인지라 그저 웃음만 새어 나왔다. 무엇보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비프타 공작은 절대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꿈이 너무 꿈같으면 믿기지도 않는다더니.”

아델은 그대로 고개를 돌린 채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그녀는 황량한 곳에 도착했다. 거대한 나무가 베어져 나간 듯한 흔적이 남은 자리 앞에 비석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주변에는 온통 죽은 나무들밖에 없었다. 마치 누군가 이 곳에 살충제라도 뿌리고 간 듯했다.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와 풀 한 포기도 존재하지 않는 모습에 아델은 잠시 넋을 잃었다. 이 숲은 울창하고 아름다웠다. 어디를 가든 그랬고, 지금껏 지나온 비석이 있던 곳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곳은 마치 죽음의 땅인 것처럼 축축하고 기분 나쁜 끈적임으로 가득했다.

“이 길을 이렇게 빨리 통과한 인간은 드문데.”

“보여 준 게 너무 황당해서요.”

“네가 바라던 것일 터다.”

“그러나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비석 위에 서 있는 것은 아까 봤던 이족 보행의 늑대의 발이었다. 늑대는 비석 밑으로 뛰어내렸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네.”

아델이 망설임 없이 대답하며 노트를 펼쳤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 그것은 꿈으로도 나올 수 없다. 그는 아델의 생각을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웨어울프, 폰은 기묘한 눈으로 해독을 시작한 아델을 바라봤다.

“이곳이 왜 이렇게 황량한지 알고 있나?”

“글쎄요.”

아델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무심하게 대답하며 빠르게 해독을 시작했다. 슥슥 글자를 써 내려가는 손에는 망설임이 없다. 폰은 제법 놀란 눈으로 아델을 바라봤다.

‘이렇게 빠른 건 두 번째군.’

솔직히 첫 번째 인간은 인간인지도 의심스러웠을 정도라 예외로 봐도 무방했지만.

“비석을 읽어 왔다면 알겠지만, 이곳이 바로 바엘의 봉인 장소였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 순간 노트에 빠르게 글을 써 내려가던 아델이 멈칫했다. 그녀는 허리를 펴고 제대로 폰을 바라봤다. 그제야 그녀의 시선에 황량한 주변이 다시금 눈에 담겼다.

확실히 이 부근은 마치 죽음이 좀먹기라도 한 듯이 보였다. 죽어서 말라비틀어진 앙상한 나뭇가지. 그 흔한 잡초도 없는 땅에서는 개미 한 마리도 기어 다니지 않고 있었다. 이곳이 생명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이 비석 뒤에 있는 밑동만 남은 나무는 내 친우가 베어 버린 나무지.”

“……그런가요.”

폰의 말을 들은 아델은 애써 다시 해독을 시작했다. 그건 그녀가 안다고 이제 와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호기심을 억누르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바꿀 수 없는 과거에 고개를 들이미는 것보단, 현재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 생산적인 일이었다. 진과 헥시온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을 거다. 그들은 검을 배웠고 싸움을 할 줄 알기 때문에 전방에 설 것을 선택했다. 그녀는 약했고, 검을 휘두를 힘조차 없었다. 하지만, 비석에 있는 글이라면 누구보다 빠르게 해독할 자신이 있었다.

“너는 궁금하지 않은가?”

“궁금증은 조금 미뤄 둬도 되잖아요.”

“그렇군. 현명한 인간이야. 그러나 아무리 현명한 인간도 종종 실수는 하는 법이지.”

폰은 비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말을 이어 갔다. 아델은 한 귀로 그 이야기를 흘리며 비석을 해독하기 위해 애를 썼다.

“내 친우도 그랬다. 인간치고는 강했고, 누구보다 아름다웠으며 올곧은 존재였으나 그도 호기심을 이기지는 못했지.”

“…….”

그러나 자꾸 말을 거는 웨어울프 때문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슥슥, 해석을 적어 내려가는 아델의 손길이 조금씩 버벅댔다. 그녀는 틀린 곳을 찾아 펜으로 선을 그어 지우기도 했다. 이게 방해의 일종이라면 그는 분명히 좋은 선택을 한 것이라고 아델은 생각했다.

“물론 내 탓도 있다.”

“…….”

아델은 이제 슬슬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저 늑대가 조금 조용히 해 줬으면 좋겠다. 가뜩이나 뒤쪽이 신경 쓰여서 미치겠는데, 옆에서 종알종알 떠드는 소리가 좋게 들리진 않았다. 이미 지나온 일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바엘은 풀려났고 그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은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어쩔 수 없다. 아무리 과거를 되돌아보고 자책해도 선택을 다시 할 기회는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원래 이 바엘의 나무를 지키던 파수꾼이었지.”

“……아, 좀!”

“……어?”

“제발 조용히 하시면 안 되나요?”

글을 적어 내려가던 그녀가 결국, 참다못해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예민해진 그녀의 시선이 폰의 눈에 닿았다. 주둥이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이빨이 무섭지도 않은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짜증스러움이 물씬 느껴졌다.

“……뭐?”

폰이 귀를 매만지더니 다시 되물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그러나 아델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조용히 좀 해 주세요.”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 이번에는 폰이 확연히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헤, 벌린 채 그녀를 쳐다봤다.

“만약 그 대화까지 방해 요소에 포함되는 거라면 어쩔 수 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끝나고 듣겠습니다.”

“…….”

“진이랑 헥시온이 밖에서 애쓰고 있어요. 당신이랑 잡담을 나누고 있을 순 없잖아요.”

그가 퍽 당황한 눈으로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폰이 비석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자, 그녀는 다시 해독을 시작했다.

‘근데 이곳엔 낮의 비석이 없네.’

더는 낮의 비석이 존재하지 않았다. 매끄러운 판 위에 적힌 것은 요정의 진액으로 된 글뿐이었다. 그녀가 비석을 중심으로 주변을 빙글 한 바퀴 돌았으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 했느냐?”

“아뇨.”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델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폰의 입이 다시 닫혔다. 이런 식으로 거절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몇몇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해독을 하기도 했고, 혼자서 이곳을 통과했던 녀석은 아예 자신과 잡담을 하면서 해독하기도 했었다.

‘아, 좀이라니…….’

그런 식의 짜증을 들은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폰은 그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그녀가 적어 내려가는 이야기를 바라봤다.

“특이한 인간이군.”

“걸어 다니는 늑대보단 덜 특이해요.”

“…….”

짜증이 담긴 목소리가 폰의 뼈를 때렸다. 화가 난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가 밖에 검을 든 녀석들보다 어째 더 무섭게 느껴졌다.

“…….”

사각사각 적혀 내려가는 글을 폰이 멍하니 바라봤다. 확실히, 제대로 해독을 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저것은 지금까지의 인간들 중에서도 무척 특출 난 실력이었다. 폰은 제법 진지한 눈으로 아델을 바라봤다.

몸을 굽혀 비석의 아래쪽까지 해독한 아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있던 탓에 옷에 흙이 잔뜩 묻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다 해독했나?”

“네. 이제 저걸 좀 어떻게 해 주세요.”

“그럴 순 없지.”

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긴 뭘 그럴 수 없어! 속이 새까맣게 타 들어간 아델이 발을 동동 굴렀다.

“약속했었잖아요.”

“여기서부터는 아무나 넘어갈 수 없다. 미안하지만, 제대로 해독한 게 아니라면 넘어갈 수 없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그의 표정을 보며 아델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그럼 읽으세요.”

그녀가 노트를 넘겼지만 폰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

“읊어라. 옳게 해독했다면 놓아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다시 해독해야 할 테니까.”

폰의 말에 아델이 당황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저 밖에는 사람의 형상을 한 무언가와 싸우고 있는 진과 헥시온이 있었다. 상대가 무척 강한지 두 사람이 동시에 덤비는데도 퍽 버거워 보였다.

“이쪽만 대단한 줄 알았는데, 저쪽도 대단하군.”

“아직 세 시간이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너무 세지 않아요?”

“평균치를 얘기한 것뿐이다. 저것은 베는 사람의 속도에 따라 강해지지.”

요는 그들이 너무 많이 빨리 베어 버렸기 때문에 예상 시간보다 한층 더 강해진 놈들이 나왔다는 얘기였다.

아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제 한 시간을 조금 넘겼을 뿐인데…….”

폰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진과 헥시온이 동시에 덤비고 있는데도 밀린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델이 다급하게 펼친 노트로 시선을 내렸다. 급히 쓰느라 평소보다 글씨가 한층 더 괴발개발이었다.

“그냥 읽으면 되는 건가요?”

“그래. 이 비석의 내용은 내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부 외우고 있다. 그대로 해독했다면 저것을 바로 없애 주지.”

폰의 말에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진과 헥시온이 있는 쪽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여섯 번째 시련을 치르고 있을 그대들에게 무운을 빈다.”

아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폰은 어느새 비석에 등을 기댄 채 입을 열고 있었다. 아델은 폰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음 줄을 읽어 내려갔다.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불안했다.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만약 틀리면 또 처음부터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렵기도 했다.

“이곳부터는 그대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친우에게 부탁해 여섯 번째 비석의 파수꾼을 부탁했다.”

“맞다. 그의 부탁으로 난 파수꾼 일을 하기로 했지.”

아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폰이 무척이나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아델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폰이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가로챘다.

“사실 친우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이곳에서 바엘의 봉인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지.”

“……네?”

“근데 훅센라이트와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아서, 결국은 그의 출입을 허락하고 말았다.”

그의 쓸데없는 말에 아델은 부글 끓는 속을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거 나중에 들으면 안 되는 거예요?”

“……지금 설명해야 딱 이해도 잘되고 좋다.”

“네, 근데 제 친구들이 다 죽어가는 것 같아서요.”

아델의 말에 폰이 미간을 좁힌 채 그녀의 뒤쪽을 바라봤다. 다 죽어가고 있다기보단 누구보다도 살기등등한 기세로 원혼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녀의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죽어간다고?”

폰은 결국 의문을 입 밖에 내고 말았다. 누가 봐도 저건 죽어가는 게 아니었다. 미쳐서 날뛰고 있는 것이면 모르겠지만.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것들이 온 거야?’

아무리 둘이 상대하고 있다고 해도 저것은 옛 훅센라이트의 분신이었다. 인간 둘이 백날 덤벼도 상대할 수 없는 것이 정상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열세인 듯 보여도 이미 오랜 시간 그를 상대하며 버티고 있었다. 게다가 그런 이들을 약하디약한 존재로 취급하는 눈앞의 인간 여자도 놀라웠다.

폰은 떨떠름한 기색을 내비치며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그렇다는데 무슨 말을 더하리.

“그래, 계속해라.”

폰이 손을 내저었다. 아델이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부터는 실력이 있는 자들 외에는 결코 들어올 수 없는 곳이기에, 나는 이 이상 낮의 비석의 말을 적는 것을 그만두었다.”

“맞아. 그런 얘기도 있었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하고 있다면서요?”

아델의 반문에 폰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지막 도전자가 왔던 것이 벌써 오십 년 전의 일이다. 그렇다고 잊어버린 건 아니야. 기억 속에 없는 말을 한다면 당연히 탈락이다.”

설렁설렁 손을 흔드는 폰의 오만한 모습에 아델이 미간을 좁혔다.

“이곳에 접근할 수 있는 자들은 모두 내 친우의 손길을 거쳐야만 가능한 일이니까.”

“흐흠~.”

그는 퍽 뿌듯하게 코웃음을 흘렸다.

“이유는, 이곳까지 왔을 그대들이 실력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지나쳤다가 개죽음을 당하는 것만은 막고 싶었기 때문이라네.”

아델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콧노래를 부르려는 폰을 무시하며 말을 이어 갔다.

“폰에게 설명을 들었겠지만, 이곳은 바엘이 봉인되어 있던 장소이다.”

저 웨어울프의 이름이 폰이구나.

그녀는 폰의 눈치를 살펴 가며 최대한 빨리 다음 줄로 시선을 내렸다. 그의 괜한 말이 또 말을 방해하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다.

“내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홀려서 결국은 베어낸 나무. 나의 과거. 나의 후회. 내 절망이 담긴 곳이지.”

“그는 많이 후회하고 괴로워했다. 수십 번은 더 찾아와서 이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 같군.”

폰의 설명을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충 받았다.

“이제 와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수십 번도 수백 번도 이곳에 와서 그때의 일을 자책했다. 바뀌지 않는 현실을 알면서도 그것이 바뀌길 기도했다.”

“…….”

아델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바싹 마른 아랫입술을 혀로 쓸며 한숨을 삼켰다. 그녀 또한 무언가를 간절히 바랐던 적이 있었다. 이뤄지지 않아 절망했던 적이 더 많았지만.

그도 같은 감정을 느꼈던 것일까.

“그러나 바뀌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었다.”

아델이 연이어 말했다.

“그를 찔렀던 날, 나는 그 눈에 가득 들어찬 배신감을 보았네. 절망을 보았고 원망을 보았지. 또한, 함께했던 찰나의 추억과 행복을 보았지.”

폰의 눈이 천천히 해독본을 읽는 아델을 향했다. 상당히 빠른 시간 내에 해독을 한 것 치고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이 글을 썼던 훅센라이트가 읽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받을 정도로.

“그가 했던 수많은 말은 커다란 창이 되어 내 심장을 후벼 팠으나……, 그날, 그 순간만큼은 그의 심장을 난도질해 갈기갈기 찢어 허공에 흩뿌린 것은 나였네.”

폰은 오래전 기억 속의 훅센라이트를 떠올렸다. 그는 강인했고, 아름다웠으며 늘 호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훅센라이트는 그의 친우가 황제가 된 이후부터 종종 혼자 이곳을 찾아와 멍하니 서 있다 가곤 했다.

그는 종종 숨어서 눈물을 흘렸다. 깊은 후회로 제 손을 바닥에 내리찍으며 스스로를 다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폰은 그런 훅센라이트를 모른척했다. 자신이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나는, 조금 더 그의 곁에 있으며 그를 회유해야 했을지도 몰랐네.”

그러나 지금 와서는 자신이 다른 태도를 취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술을 마시거나, 이야기를 들어 주었더라면. 만약 그랬더라면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저미는 기분은 받지 않아도 되는 걸까?

폰이 조용해지자 아델의 말은 조금 더 빨라졌다.

“그는 나를 죽이지 않았네. 그 대신 바엘의 힘을 빌려 성 밖으로 나를 추방했지. 그러나, 차라리 거짓을 속삭이며 그의 곁에 있어 줘야 했을지도.”

폰은 아주 천천히 털이 가득한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다른 인간들도 같은 내용을 해석해서 들려 주었는데, 대체 왜 아델이 해독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한층 더 속이 아파져 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후회해도 되돌릴 수 있는 건 없었네. ……간절히 바란다면, 이 끔찍한 결말은 조금 더 다르게 바뀔 수 있었던 것일까?”

아델은 잠시 숨을 돌렸다. 폰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펴질 기미가 없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아직도 헥시온과 진은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길거리를 헤매고 헤매다 한 여인을 만나게 됐지.”

폰은 더 이상 아델의 방해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아 아델을 올려다보며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아델은 몰랐겠지만, 단 한 번도 폰은 그런 적이 없었다.

“그녀는 먹지 못해 무척 메말라 있었고 두 눈은 퀭했으며 머리는 산발이었지만……, 그럼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은 억척스러운 사람이었네.”

아델은 이것이 몇 번이나 언급됐던 훅센라이트가 사랑했던 여인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그거 아는가? 바엘의 독은 사람에 따라 그 독이 퍼지는 차이가 있다네.”

읽어 내려가는 아델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아무래도 병이다 보니 사람마다 퍼지는 속도가 똑같지는 않을 테다. 하지만 굳이 그걸 적은 이유는 뭘까?

아델이 빠르게 다음 줄을 읽었다.

“대부분은 일주일에서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녀는 무려 일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바엘의 독과 싸우며 살아가고 있었네.”

아델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렇게 따지자면 헥시온은 지금까지 대체 몇 년의 세월을 싸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황제에게 어느 정도 해독제를 받은 것 같긴 했지만……

‘헥시온이 대단한 거였구나.’

보통은 일주일에서 한 달을 넘기지 못하다니. 옛날이 기준이라고 해도 바엘의 독에 관해서는 연구된 바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지쳤는지 그녀는 점점 죽어가고 있었지.”

아델이 탄식하듯 느릿하게 읽어 내려갔다.

“그녀는 누군지도 모를 이의 피를 뒤집어쓴 내게 잠자리를 내어 주고, 감자를 듬성듬성 썰어 넣은 멀건 죽을 대접했지.”

절망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던 목소리에서 한층 밝아진 목소리였다. 읽고 있는 아델은 모르겠지만 폰에게는 그것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감자를 삶은 물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음식이었으나 무척이나 맛있었다네.”

폰은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는 훅센라이트에게 과일 하나 제대로 가져다준 적도 없었다. 결국엔 견뎌내는 것. 그것을 기다려주는 것만이 그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녀에게는 어린 동생이 있었고 아이를 돌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지.”

그것은 절망 속에서 한 줄기 햇살이라도 발견한 듯한, 희망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나는 종종 그녀를 찾아갔네. 그녀는 힘겨운 삶 속에서도 상냥하고 다정하며 밝은 사람이었어.”

아델은 본인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확실히 아까보다 가벼워진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폰이 쓰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훅센라이트에게 과일 하나 제대로 가져다준 적 없었다. 평생 후회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을, 이렇게 뜬금없이 깨닫게 될 줄은 몰랐다.

“그 곁에 있으면 나 역시도 살아갈 기운이 생기는 것 같아 나는 그녀를 만나는 것을 기꺼워하게 됐네.”

아델이 천천히 노트를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그녀의 동생은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다네. 나도 어쩔 수 없는 병이었지.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여섯 번째로 방문하던 날, 그녀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네.”

그것은 희망이었으나 동시에 또 다른 슬픔이었다.

“그녀는 동생이 죽어 실의에 빠져 있었어. 일 년간 겨우 다리 한쪽밖에 진행되지 않았던 바엘의 독은 순식간에 그녀의 몸 반을 삼켜 버렸네.”

아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일 년간 다리 한쪽을 물든 독이 겨우 얼마 만에 몸의 반을 뒤덮었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잠시 고민하던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네.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 온몸을 잠식했지. 두려움에 심장이 쿵쿵 뛰었고 무서웠고 두려웠네. 그녀의 죽음을 상상하자 이윽고 숨도 쉴 수 없게 될 만큼.”

아델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것이 말하는 바는 명백했다. 훅센라이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살고자 하는 의지를 완전히 잃은 후였네. 그리고 그 마음을 집어삼키듯 바엘의 독은 시시각각 그녀의 몸으로 퍼져 그녀를 죽이고 있었지.”

또다시 훅센라이트의 절망이 느껴졌다. 그러나 조금 다른 느낌의 절망이었다. 무언가, 행복한 기운이 깔린 절망. 폰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지만, 굳이 입을 열어 그녀를 방해하진 않았다.

뒤쪽에선 여전히 싸움이 한창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두 사람이 훅센라이트의 분신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뭐 저런 미친놈들이…….’

폰이 헛웃음을 삼켰다. 인간은 진화하는 존재라더니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단 여섯 번뿐인 만남이었지만, 나는 이미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네. 그녀의 미소와 그녀의 웃음에 저도 모르게 감화되어 버렸다는 것을.”

아델이 읊조리는 목소리에 폰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그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 줄 사람을 찾았던 모양이다. 자신은 해 줄 수 없던 것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그가 찾아낸 것이다.

‘인간이란…….’

언제나 억척스럽고 혀가 내둘러질 정도로 놀라운 종족이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앞에서 눈물을 보였네.”

“……맨날 숨어서 울더니.”

흥, 코웃음을 친 폰은 고개를 홱 돌렸지만 그다지 기분이 나빠 보이는 기색은 아니었다.

“다시 생각해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야. 하지만……, 그녀는 나를 영웅이 아닌 그저 훅센라이트라는 한 명의 사람으로 대해 줬네. 그것이 내게 얼마나 커다란 위안이었는지, 그녀는 평생 모르겠지.”

영웅, 훅센라이트는 그 말을 무척이나 힘겨워했다.

“내가 울자 그녀도 같이 울음을 터뜨렸네. 그렇게 서로 부둥켜안고 울다가, 그날 밤…… 그녀와 몸……을 섞……었네.”

읊조리는 아델의 얼굴이 붉어지다가 이윽고 푹 숙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내용을 입으로 내뱉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다급히 노트를 움직여 부채질을 했다.

“어디 아픈가?”

“아뇨…….”

그녀가 폰의 눈치를 보다가 다급히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그 날 두 가지를 깨달았네.”

아델이 벌겋게 물든 얼굴로 애써 평정을 가장한 채 말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 피나 체액에는 바엘의 독을 정화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 그건 내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효능을 발휘한다는 것.”

훅센라이트의 피와 체액에 바엘의 독을 정화하는 능력이 있었다고? 그녀가 숨을 멈췄다.

“그리고 바엘의 독은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에게는 무척 느리게 작용한다는 것이었네.”

내용을 곱씹던 아델의 머릿속에 의문이 자리 잡았다.

‘……내게도 비슷한 게.’

다음 줄을 읽으려고 하던 아델이 멈칫했다. 그녀 역시 헥시온과 몸을 섞었다. 함께 밤을 지냈다. 그리고 마치 정화라도 한 듯이 헥시온의 몸을 잠식하고 있던 바엘의 독은 관계를 맺을 때마다 점점 줄어들었다.

‘……왜 내게?’

아델이 멍하니 글자를 몇 번이고 읽었다. 왜 자신에게 훅센라이트와 비슷한 능력이 있는 거지? 단순히 우연인가? 그저 우연으로 끝날 얘기라고 하기에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 필연적으로 느껴졌다.

헥시온과 얽힌 것부터 이 비석을 읽게 된 모든 것들이 그저, 필연처럼 느껴졌다. 원래는 없었어야 할 힘이다. 사실 회귀하기 이전에도 이런 능력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확신할 수 없었다. 회귀하기 전에 그녀는 바엘의 독을 품은 사람과 만난 적이 없었다. 이렇게 깊은 관계가 된 적도 없었고.

‘왜, 왜 나에게 이런 힘이 있지?’

하필 헥시온과 얽힌 자신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 능력이 있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한 번 생긴 의문은 점점 꼬리를 물고 물어서 커다랗게 부풀었다. 노트를 쥔 아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인간, 뭔가 문제가 있나?”

한참이나 말이 없는 아델을 보며 폰이 물었다. 아차, 싶어 고개를 들은 아델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 지금 급한 것은 이걸 해결하는 것이다.

“동시에 나는 이 비석 열두 개를 완성하는 것을 끝으로 영웅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기로 했네.”

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다. 훅센라이트는 더는 인간 세계의 일에 참견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눈앞에 있는 여인에게만 집중했고 숲에서 지내는 이들에게만 관심을 쏟았다. 종종 그의 여인이 장을 봐 오라는 부탁을 할 때만 제외하면, 그가 인간 세계로 발을 디디는 일은 없었다.

“내가 벌인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네.”

훅센라이트는 포기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예상했던 대로 황제는 바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고 이 비석은 그 해답을 줄 것이다.

“셰인나이트를 가져온 것만큼은 잘했다고 생각하네.”

아델이 눈을 빛냈다. 건국검이자, 헥시온의 계획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것의 위치는 열 번째 비석이 알려 줄 것이네. 만약 그대들이 나를 대신해 이야기를 끝내 준다면, 나는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겠지.”

마지막 내용은 처음과 같은 절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많은 것을 내려놓은 듯 편안하고 담담하게 느껴졌다.

폰은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봤다.

‘새파랗군.’

그날, 훅센라이트를 만났던 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리고 언제나와 크게 다름없는 날씨였다.

“앞으로 나아가게.”

아델의 말에 폰이 젖혔던 고개를 내렸다.

“그곳에는 절망도 희망도 있을 것이며, 어쩌면 그대들이 궁금해하는 진실이 있을지도 모르지.”

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가 끝이 나고 있다. 비석의 내용은 수십 번을 들어왔던 것이지만, 새로운 목소리로 듣는 것은 털이 쭈뼛 설만큼 전율이 일었다.

통과였다. 폰은 굳이 완벽한 성공을 깎아내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몇십 년, 몇백 년 후에 전해질지 모르는 마음이지만, 언젠가 반드시 전해졌으면 좋겠구나.”

그녀가 말했다.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비석은 폰이 열어 주는 원혼의 통로를 지나야 도달할 수 있다네.”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보통은 한 개의 비석만 일러 주지 않았던가? 의문을 담기도 전에 그녀는 마지막 줄을 읽으려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부디 마지막까지 갈 수 있기를.”

끝은,

“끝에서 기다리고 있겠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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