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9. 알리아 자작가 (14/25)

Chapter 9. 알리아 자작가

“주인님! 아가씨! 대체 연락도 없이 어디를 다녀오신 겁니까.”

말을 타고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올란도가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언제나 깔끔한 복장을 선호하는 올란도의 차림새가 흐트러져 있었다. 걱정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숲에 다녀온다고 하지 않았나.”

헥시온이 기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올란도가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잠시’라고 표현하기에 그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은 시간은 무척 길었다.

“오늘로 5일째였습니다.”

“……뭐?”

아델을 한쪽 팔로 안아 들어 내려 주던 헥시온이 반문했다. 놀란 기색은 아델도 역력했다. 5일이라니. 아무리 따져도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낸 것 같진 않다. 기껏해야 밤, 그것도 아니면 다음 날 아침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게 정말인가?”

“예, 연락이 없어 몰래 사람을 풀어야 하나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장난에 걸려든 것 같군.”

헥시온이 느릿하게 눈을 내리깐 채 생각했다. 요정의 영역이라고 했으니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가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피곤하실 테니 일단 올라가서 씻으십시오.”

“네.”

아델은 헥시온의 배려를 내치지 않았다. 도리어 기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피곤하기도 했고 5일이라는 정신적 충격도 있었으며, 그렇게 듣고 나니 몸이 한결 더 찝찝해진 기분이라 영 느낌이 이상했다.

“올란도, 나는 괜찮으니 일단 아델을 먼저 올려 보내 주고 오도록 해.”

“네, 시녀가 이미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녀들을 붙이겠습니다.”

“아아.”

헥시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가 허리를 굽혀 아델의 목덜미에 입을 한 번 맞췄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아델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떤다.

“헤, 헥시온……?”

“이제부터 못 본다고 생각하니 서운해서요. 이별의 인사입니다.”

“……네?”

끽해야 겨우 서로 목욕하는 한 시간 정도가 아닌가. 그걸 ‘이별’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쓰는 것에 아델은 경악했다. 못 본다고 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다. 서운하다는 말은 왜 이렇게 매일 나오는 것인지!

“이별……이라고 할 만큼 이게 거창한 헤어짐이던가요.”

“제겐 그렇습니다.”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헥시온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보며 아델은 입을 다물었다. 그 뒤에 숨겨진 것이 장난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럴 때면 아델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씻을게요.”

“나도 목욕하고 올라가겠습니다.”

“……네.”

헥시온은 붉어진 목덜미를 손으로 쓱쓱 쓰다듬으며 계단으로 향하는 아델을 보며 소리죽여 웃었다. 솔직하고 사랑스럽다. 누군가에게 이러한 감정을 느껴 본 적은 없지만, 지금이라면 그는 거창한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즐거워 보이십니다.”

“음……. 조금은.”

올란도의 말에 대답하며 헥시온은 제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따로 일은 없었나?”

“네. 큰일은 없었습니다. 몇 차례 비프타 공작가의 둘째 공자께서 찾아오신 것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그림자는 불러 모으고 있나?”

“예. 전국으로 흩어져 지내고 있던 이들이 하나둘 수도에 터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올란도가 눈을 굴렸다.

그는 방문을 닫은 것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헥시온을 봤다.

“정말 진행하실 겁니까?”

“그녀가 있는 지금이 가장 적기다. 황실이 그토록 자랑하는 적통이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악마의 병, 칼럿을 이용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어. 증거와 그것을 증명하고 지지해 줄 가문만 있으면 돼.”

헥시온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올란도에게 건넸다. 노집사는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도 걱정스러운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일이 잘못되면 단순히 죽는 것으론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 끝이 어디더라도 그간 겪었던 지옥보다는 덜하겠지. 집사는 내가 죽을 것 같나?”

“……사람의 일이란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니 그저 걱정될 뿐입니다.”

올란도의 대답에 헥시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이 가장 적기라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부족한 것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칼럿에 대한 비밀을 밝히려면 은밀하게, 입이 무거우면서도 신뢰가 있는 고고학자가 필요했다.

‘해독은 아델이 해 주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 개인의 것이었다. 아델은 정식으로 고고학에 관련된 학위나 자격을 딴 것이 아니었다. 고고학자가 모인 협회에 가입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실력은 출중하지만, 바깥에서 봤을 때 그녀가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전문가의 신뢰도 낮은 일이었다. 그것을 증거로 내놓을 순 없었다. 그렇기에 공증이 필요했다.

“아직 조금 남은 일이다. 찾을 것도 남았고 지지해 줄 이도 이것을 증명해 줄 자도 부족해. 그림자를 눈에 띄지 않게 계속 불러들여. 지원은 눈에 띄지 않도록 아끼지 말고.”

헥시온의 명령에 올란도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저 그 말을 따르겠다는 단순한 행동이었으나 헥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곁에서 고생이 많아.”

“당연한 일인 것을요. 이 늙은이, 그저 도련님께서 행복하셨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올란도가 목욕 준비를 하러 들어간 사이 헥시온은 굳은살 박인 제 손으로 얼굴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거울 앞에 서자 벗은 몸에서 딱딱하게 굳은 왼팔이 보였다. 늘 그곳에는 손을 대고 싶지 않아 않았다. 어릴 때부터, 심지어 지금까지도 말이다. 헥시온은 손을 뻗어 제 왼쪽 팔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팔을 도려내, 누군가 거친 바위로 만든 조각을 박아 넣은 것처럼 이질적이고 꺼림칙하다.

자주 찾아오는 고통은 언제나 그가 혼자서 감내할 것이었다. 누구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올란도조차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면서도 자신이 혼자 있기를 종용하면 뒤돌아서 문을 닫는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줘요. 내가 곁에 있는 것으로 아프지 않다면 얼마든지 도와줄게요. 그러니 밤에 혼자 끙끙 앓지 마세요.’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아델만큼은 제 상처에 손을 대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제 숨겨 둔 마음에 침범하는 것도 거리끼지 않았다. 끔찍한 저주를 받았다고 유명한 남자를 곁에 두고도 진심으로 낫기를 바랐다.

감히 마음에 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리낌 없는 그 말을 들으면서 부푼 마음을 숨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꽃피우면 안 된다, 그토록 밟아 죽였던 마음이건만…….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온 신경과 시선은 온통 그녀를 향해 있었다. 더 이상 숨기는 것도 불가능할 정도로.

정신을 차려 보니 그녀의 자유를 빼앗고 싶어 하는 한심한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몸이 완전히 낫지 않더라도 그 대가로 그녀가 곁에 있어 준다면 그편이 도리어 더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목욕물 준비가 다 됐습니다.”

“그래.”

그가 굳은 듯 서 있던 몸을 움직였다. 제 의사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이 팔은 그녀가 있으면 분명히 낫는다. 그 기대감에 찬 희열과 동시에 그 후에 제게 이별을 고할 현실은 언제나 머릿속에서 빙빙 맴돌았다. 욕실로 들어가는 헥시온의 눈동자가 탁하게 가라앉았다.

* * *

“카레나 아가씨, 목욕물 준비를 하겠습니다.”

“아, 응. 부탁해.”

벌겋게 물든 얼굴을 숨기려 손바닥으로 얼굴을 꾹꾹 누르면서도 아델은 충실히 대답했다. 줄리가 욕실 안으로 들어가고 프레이가 남아 그녀가 옷을 벗는 걸 도왔다.

“아가씨, 혹시 어디 아프세요?”

“응? 아니. 왜?”

아델이 고개를 젓자 프레이는 퍽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델을 요모조모 살폈다. 실례하겠다고 말하고 손바닥을 뻗어 이마 온도까지 재 본다.

“얼굴이 새빨개서요. 목덜미도 붉고……. 혹시 감기의 증상일 수도 있으니 의원을 부를까요?”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아.”

아델이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벌게진 아델의 얼굴을 프레이가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하지만 5일이나 밖에서 생활하셨다면…….”

“아니. 정말 아니야.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괜찮으니까.”

차마 입구에서 당한 일 때문이라곤 말할 수 없었던 아델은 손부채 질로 얼굴을 다급하게 식혔다. 어떻게든 식혀야 해결이 될 것 같다. 적어도 감기가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거긴 따뜻하기도 했고…….’

아델이 포근했던 요정의 공간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런가요?”

“응. 그래.”

아델이 단호하게 말하자 프레이는 의뭉스러운 표정을 하면서도 더 말을 붙이거나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몸이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 같으면 꼭 말씀해 주셔야 해요.”

“알겠어.”

“약속이에요?”

“으응.”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욕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아, 얼른 가요. 아가씨.”

욕실에서 나온 줄리의 말에 프레이는 아델을 수증기 가득한 욕실로 밀어 넣었다. 아델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 열기에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델은 목욕을 끝내고 이제는 너덜너덜해져서 전우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노트를 정리하려고 책상에 앉았다.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콰른 비프타가 가져다준 책도 펼쳤다. 빈 백지를 찾아 책장을 넘기고 깃펜을 손에 쥔 채 천천히 엉망진창인 노트의 해독을 옮겨 적었다.

똑똑.

한창 글을 옮겨 적는데 들려온 노크 소리에 아델이 고개를 들었다. 코앞에 있던 책에 집중하고 있던 터라 초점이 조금 맞지 않았다.

“네.”

그녀가 초점을 맞추기 위해 두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아델. 들어가도 됩니까?”

“아…… 헥시온.”

아델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장이 풀리니 어쩐지 졸음이 몰려왔지만, 어쨌든 찾아온 사람이 있으니 맞이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가 문을 열어 주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헥시온이 들어왔다.

“조금 출출하실 것 같아 먹을 것을 가지고 왔는데 어떻습니까?”

헥시온이 올란도가 가져온 쟁반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팔이 하나 밖에 없더라도 그 팔을 대신할 사람이 많았다. 늘 생각하지만, 그건 그녀가 부러워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식사 대용이라기보단 안주용으로 보이는데, 제 착각일까요?”

아델이 웃으며 되물었다. 반짝이는 은쟁반 위에는 치즈와 카나페, 절인 올리브와 과일 같은 것들이 올려져 있었다. 간단히 먹기 좋은 음식이라면 그렇게 여길 수 있겠지만, 함께 가져온 와인을 보면 술안주가 분명했다.

“너무 노골적입니까?”

“……방금 그 말이 제일 노골적이었어요.”

아델이 담담하게 쏘아붙이자 헥시온이 모른 척 어깨를 으쓱였다. 올란도는 제법 달콤한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눈치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고생했으니 회포를 풀자는 의미입니다.”

와인을 따 놓고 간 올란도의 배려에 헥시온은 움직일 수 있는 한 손으로 병을 붙잡고 소믈리에만큼이나 능숙하게 와인을 따랐다.

아델이 그 모습을 보며 그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그녀가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산미와 함께 느껴지는 제법 달콤한 와인에 아델이 입가에 미소를 띤다.

“맛은 어떻습니까?”

“맛있어요.”

“아, 그거 다행이네요.”

헥시온이 안도했다는 듯 그제야 제 와인 잔을 들었다. 두 사람이 와인을 홀짝였다. 내려앉은 이유 모를 적막은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아, 맞다.”

“뭐가 말입니까?”

“시간이 5일이나 지났다면, 내일모레겠네요.”

아델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헥시온이 이내 탄성과 함께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카나페를 집어 입에 넣으며 질책하듯 아델을 바라봤다.

“오늘 밤은 일 얘기 금지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계획도 세워야 하고.”

“내일 세워도 됩니다.”

“그…….”

“저는 강하니까 괜찮습니다. 웬만한 상황에도 전부 대응할 수 있고요. 당신이 원한다면 그게 무엇이든 손에 쥐여 드리겠습니다.”

헥시온이 강경했다. 아델이 어떤 말을 하든 간에 다 받아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결연한 표정이기까지 했다. 아델은 결국 그를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네, 서운할 뻔했습니다.”

“……그 서운함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느껴지는 거예요?”

와인 잔을 입술에 대며 아델이 묻자 헥시온이 곰곰이 생각하는 듯 손가락 끝으로 와인 잔을 매만졌다. 그러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아델을 본다.

“아델이 나를 보지 않을 때요.”

“……네?”

“당신이 말없이 슬픈 눈을 할 때요.”

“아…….”

“아무것도 얘기해 주지 않고 혼자서 견디려고 할 때도 서운합니다.”

“…….”

아델의 입이 꽉 다물렸다. 헥시온은 아델을 살피곤 와인 잔의 다리를 손가락으로 두어 번 쓸어내렸다.

“아델.”

“네.”

“일전에 내게 물었었지요. 아델을 좋아하냐고요.”

헥시온이 옅게 웃으며 물었다. 그녀가 조금 망설이면서도 확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던 적이 있다. 그를 밀어낼 구실을 얻고 싶어서…… 확실히 도장을 찍어 두고자 했던 적이 있었다.

“그거 다시 한 번만 물어봐 주시면 안 됩니까?”

헥시온이 몸을 낮춰 탁자에 엎드리며 아델을 슬며시 올려다봤다. 졸지에 언제나처럼 고개를 숙일 수도 없게 된 아델은 시선을 내린 채 입을 다물었다.

“물어봐 주세요. 아델.”

세상 다정한 목소리로 그가 유혹하듯 아델에게 말했다. 반달로 접힌 눈은 살살 눈웃음을 치는 것처럼 보였다. 아델이 뻣뻣하게 굳었다. 불안함이 그녀를 뒤에서 집어삼킬 듯 위협했다.

헥시온이 재촉하듯 그녀를 바라봤다. 실제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재촉하는 듯 들렸다. 그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 메마른 아랫입술을 혀로 핥으며 아델은 입을 열었다.

“……절 좋아해요? 헥시온.”

아델의 질문에 헥시온의 입꼬리가 깊게 파이며 말려 올라갔다. 그가 탁자에 엎드렸던 몸을 일으키며 팔을 뻗어 아델의 손을 잡았다.

“네, 좋아합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치료하는 것이 평생의 염원이었던 내 팔이 이대로 남아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델이 숨을 깊게 삼켰다. 저런 말을 하는 것부터 예사롭지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렇게 돌직구로 말할 줄은 몰랐다.

“아델, 내가 싫나요?”

비록 한 손밖에 맞잡지 못했지만, 아델의 손을 꼭 잡은 헥시온이 물었다. 처연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그녀가 잡히지 않은 손으로 제 눈을 가렸다.

“……그런 말은 비겁한 거 알죠?”

“네.”

헥시온은 수긍했지만, 질문을 바꾸진 않았다.

“대답해 주세요. 아델은 내가 싫어요?”

“……싫지 않아요.”

싫지 않다.

호감도 있다.

곁에 있는 것도 즐겁다.

그러나 그녀는 카레나 비프타 영애가 아니고, 발에 챌 정도로 널린 평민 중의 평민이었다. 그것도 최하급 평민. 왕이 될, 아니. 왕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귀족인 그와는 위치가 달랐다. 어울릴 수 없었다.

그의 앞길을 막고 싶지 않았다. 도움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오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수군거림에 오르내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세요?”

“그냥 하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용기가 생길 때 하지 않으면, 또 언제 세상 밖으로 나올지 모르니까요.”

헥시온이 말했다. 그가 남은 와인을 재빠르게 들이키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됐을까요?”

“……뻔뻔한 거 알죠?”

“조금 서운하지만, 아는 걸로 하겠습니다.”

헥시온이 아델에게 입을 맞췄다. 그는 한쪽 팔로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아델을 푹신푹신한 침대에 앉히고는 정작 자신은 바닥에 꿇어앉았다.

헥시온은 아델에게 바짝 몸을 붙이며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점점 질척해지는 입맞춤에 결국 아델은 가늘게 뜨고 있던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저번보다 더 짙은 입맞춤이었다. 말캉한 것이 입 안을 헤집고 탐했다. 이곳저곳 움직이며 콕콕 찔러 대는 통에 아델의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헥시온은 혀 안쪽이 아릴 정도로 깊게 빨고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서 멀어져 갔다. 아델의 숨이 조금씩 가빠지기 시작하자 그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탔다. 헥시온이 흐릿하게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잊지 마십시오.”

헥시온이 그녀의 옷 위를 매만졌다. 그녀가 의아한 눈으로 헥시온을 마주 봤다.

“여전히 이 관계의 우위는 당신에게 있습니다.”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그것을 내려 아델과 깍지를 낀 헥시온이 속삭였다. 여전히 당신의 손에 검이 쥐여져 있다며, 속삭이는 헥시온의 목소리에 아델이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아프게 감았다.

헥시온이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사랑스럽다는 듯 아델에게 연신 입술을 맞추며, 헥시온은 내려앉은 고요한 적막을 기꺼이 반겼다.

기다리던 밤이었다.

* * *

‘따뜻해…….’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에 아델은 온기를 찾아 꼬물꼬물 파고들었다. 그런 아델의 허리를 무언가가 단단하게 붙잡고 끌어당겼다. 그러곤 등을 토닥이기까지 한다. 여기까지 진행되자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헤매고 있던 아델도 이상함을 눈치챘다.

“일어나셨습니까?”

“……네? 네.”

몽롱한 정신으로 대답하고 나서야 그녀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델은 눈을 번쩍 뜨곤 고개를 젖혔다. 눈앞에는 어딘가 개운해 보이는 표정의 남자가 있었다. 동시에 어젯밤 일이 아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그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좋은 아침입니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아델이 웅얼거리며 베개에 얼굴을 다시 파묻었다.

밤을 즐기는 건 좋지만, 늘 이렇게 다음 날이 고생이다. 욱신거리는 허리와 뻐근한 다리 사이, 그리고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부끄러움까지.

‘……절 좋아해요? 헥시온.’

‘네, 좋아합니다.’

아델이 얼굴을 베개에 푹 소리가 날 정도로 다시 박았다.

대체 왜 그랬을까? 대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냥 해 달라고 해도 하지 말걸! 굳이 왜 했을까?! ……부터 시작해서 온갖 후회가 속에서 들끓었다. 다음 날,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의 모든 부끄러움은 제 몫인데 말이다.

쪽, 쪽. 엎드린 아델의 뒤통수에 헥시온이 입을 맞췄다. 그대로 굳은 아델의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델.”

“……네.”

그녀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끙끙거리며 대답했다. 몸보단 정신적으로 죽을 것 같았다. 아침만 되면 그 전날 했던 부끄러운 일들이 전부 떠올라서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 팔을 만져 보시겠습니까?”

“……네?”

헥시온이 침대에 앉더니 제 왼팔을 내밀었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칼럿병의 잔해.

아델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곧이어 그녀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그런 아델을 보며 헥시온이 부드럽게 웃었다. 의욕이 없어 보이던 아델은 이불을 돌돌 감싼 채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양손으로 헥시온의 팔을 꾹꾹 만졌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만지시면 곤란합니다.”

“네?”

“아침부터 당신을 괴롭힐 것 같아서요.”

헥시온이 짓궂게 웃으며 아델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조금 올라와서 입술에 한 번, 볼에 한 번, 눈꺼풀 위에 한 번, 이마에까지 입을 맞추고 나서야 몸을 뗐다. 아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게 뭐 하는…….”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싫으십니까?”

“…….”

남사스러운 발언에 아델은 이불을 감싼 채로 다시 엎드렸다. 베개에 다시 얼굴을 파묻자 헥시온이 그녀의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녀는 베개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돌렸다.

“관절, 움직여요?”

“아직, 굳은 곳이 조금 남아 있어서 조금 아프고 뻑뻑하긴 하지만, 거의 팔꿈치까지는 없어졌습니다. 저번보다 훨씬 많이 없어졌어요.”

“……어제 헥시온이 그만하라고 하는데도 몇 번이나 더 해서 그렇겠죠.”

아델의 지적에 헥시온이 움찔 떨었다. 죄책감 서린 눈동자가 슬쩍 아델을 살짝 봤다. 그는 이윽고 볼을 긁적였다.

“그래도 축하해요. 곧 다 낫겠네요.”

“모두 아델 덕분입니다.”

헥시온이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며 속삭였다.

‘온기에 익숙해져서 버릇 나빠지겠어.’

이러다가 더 이상 혼자 잘 수 없게 되어 버릴 것 같았다. 오늘만 해도 온기를 찾아 무의식적으로 헥시온의 품으로 파고들었으니까.

“오늘은 푹 쉬고 내일은 일찍 부티크가 있는 쪽으로 나가 봐야겠군요.”

“네…….”

아델이 다시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움직일 의욕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헥시온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피곤합니까?”

“지치긴 하네요.”

“하긴, 설마 5일이나 지났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고 말이죠.”

“그거 충격이었죠.”

아델이 눈을 두어 번 끔뻑이며 대답했다.

“식사는 방으로 가져오라고 할까요?”

헥시온이 아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네, 오늘은 방…… 아니, 이불 속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고 싶지 않네요.”

온기로 데워진 이불 속은 무척 따끈따끈하고 맨살에 닿는 이불은 보들보들하며 포근했다. 요즘 늘 바쁘게 지냈던지라 이런 나른한 휴식이 마음에 들었다.

“그럼 다녀올 테니 푹 쉬고 계십시오. 씻을 거라면 시녀들을 부르겠습니다.”

“으음…….”

아델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민했다. 확실히 씻기는 씻어야겠는데. 귀찮음과 찝찝함 사이에서 고민하던 아델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불러 주세요.”

“네. 저도 씻고 다시 오겠습니다.”

“네? 왜요?”

아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헥시온의 속눈썹이 기다렸다는 듯 밑으로 축 처졌다. 아니, 왜 저렇게 애처로운지. 아델의 양심이 콕콕 찔렸다.

“오면 안 됩니까?”

“아니, 그냥 이유가 궁금해서…….”

더듬더듬 변명처럼 대답하자 헥시온이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운합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오는 그의 단골 멘트에 아델의 입이 꽉 다물어졌다. 머릿속에 졌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델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와도 되죠. 식사, 같이하려고요?”

“그것도 있고 저도 아델과 함께 뒹굴거리고 싶습니다.”

왜 굳이 자신의 방에서……? 의문이 떠올랐으나 한마디 더 하면 또 튀어나올 것 같은 ‘서운합니다.’를 생각하며 아델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처연한 표정을 보면 심장이 아프단 말이지.’

누가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바늘로 심장을 콕콕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찌르르한 느낌은 심장에 좋지 않았다.

“일단, 다녀오세요.”

“네. 다녀오겠습니다.”

헥시온이 산뜻하게 대답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뒤돌아 침대에서 발을 내렸다. 아직 옷은커녕 속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않은 아델과는 다르게 멀끔한 차림이었다.

‘몇 시에 일어난 거야?’

물론 지금이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긴 하지만 말이다.

헥시온이 문을 나서자 아델은 넓어진 침대 위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설마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지.’

비프타 공작가에서 그런 식으로 나오게 될 줄 몰랐고, 누군가와 남녀 간의 관계를 맺게 될 줄도 몰랐고, 이렇게 한가롭고 편안한 삶을 살게 될 줄도 몰랐다. 모든 것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라서 당황스럽고 또 기묘했다.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침대에서 누군가와 함께 눈을 뜨고, 일어나기 싫다며 뒹굴거리게 될 줄이야. 분명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여 줄 사람이다.

“아가씨, 들어가도 될까요?”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온 목소리에 아델이 응, 낮게 대답했다. 그리 큰 목소리가 아니었는데도 바로 반응하듯 문이 열렸다.

“목욕물 준비해 줄 수 있어?”

“네, 물론이죠.”

“몸은 괜찮으십니까?”

줄리의 말에 아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줄리가 다행이라며 말을 덧붙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면서 표정 변화가 없는 것이 대단하게만 보인다.

“이쪽으로 오세요, 아가씨.”

“응.”

돌돌 말린 이불을 조심스럽게 풀며 줄리가 말했다. 힐끗, 자신을 바라보는 줄리의 귓불이 빨개졌다. 왜 그런가 싶어 시선을 내리자 온몸이 울긋불긋한 자국으로 가득했다.

“…….”

아델은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애써 침착한 얼굴로 욕실에 들어갔지만, 프레이의 놀란 표정도 보고 말았다. 목덜미부터 점점 열이 오르는 게 그녀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가씨께서 오신 뒤로 저택 분위기가 많이 밝아진 것 같아 기뻐요.”

프레이가 그녀를 욕조에 앉히고 머리를 감겨 주며 말했다.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고 있던 아델은 멋쩍은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주인님께서도 웃는 일이 많아지셨고요.”

“……그래?”

“네. 좋은 분이시지만, 다정했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많이 유해지셔서 기뻐요.”

눈을 감은 사이로 들리는 조잘거리는 프레이의 목소리에 아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누군가의 구원이나 희망이 될 거라곤 생각한 적도 없었다. 시간이 되돌아오고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모든 것이 흘러가고 있다.

“그러고 보니 그 공작가의 둘째 공자님이요. 사흘 전부터 매일 찾아오시는 거 알아요?”

“……콰른 비프타가?”

“네. 아가씨가 어디에 계시냐고 물어서 외출하셨다고 말씀은 드렸거든요.”

“또 문제를 일으켰니?”

아델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레이가 냉큼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었어요. 그러냐며 돌아가셨다가 또 찾아오셨어요. 어제로 세 번째였거든요.”

“……그래?”

무슨 바람이 분 거지? 또 얼마나 난리를 치고 갔을지 걱정했는데, 그는 정작 말만 묻고는 곧장 돌아갔다고 했다. 의외였다. 물론, 저번에도 제법 수그러든 모습을 보이긴 했다. 하루 전에 통보하는 것은 까먹은 모양이지만. 그래도 난장판을 치지 않고 간 게 어딘가 싶다.

“아 그리고 어제는 갑자기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분이 오셔서 주인님을 찾았어요.”

“……혹시 붉은 눈에 덩치가 곰처럼 크고?”

“네! 엄청 사나운 짐승 같았어요.”

진이 왔다 간 듯했다. 겨우 5일 정도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들려오는 이야기가 무척 새로웠다. 아델은 욕조에 몸을 더 깊이 담갔다.

“응…… 그렇구나.”

오늘은 어쨌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하루였다.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다.

아델이 물속에 늘어트린 채 눈을 감았다.

* * *

“저 남자인 것 같은데, 아델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뭐, 아마 확실하겠죠.”

보따리장수라곤 이곳에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아델과 헥시온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골목에 숨어 보따리장수를 훔쳐봤다.

좁은 골목에 둘이 숨어 있으려니 자연스럽게 몸이 밀착되어서 다른 곳에 신경을 돌리느라 애를 써야 했다. 귀족이 이용하는 부티크에서 보따리 장사라니, 놀랍기도 하다.

그는 세밀하게 조각한 조각품과 보석을 가공한 물건을 팔고 있었는데, 아델이 보기에도 단순한 보따리 장사라고 하기에는 상등품으로 보였다.

“알리아 영애는 오늘 오지 않습니까?”

“아, 접선은 평소처럼 그대로 하라고 일러두긴 했어요.”

“우리는 그걸 숨어서 지켜보는 거고요?”

“……네? 네. 괜히 들키면 소란만 생기잖아요.”

아델의 말에 헥시온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전혀 동의를 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사실 그로선 소란은커녕 단숨에 뒷덜미를 낚아채 뒷골목에 던져 놓을 수도 있었다. 헥시온은 아델과 보따리장수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금 더 아델의 몸과 밀착했다.

‘천천히 해도 되겠지.’

지금은 제 몸에 기대어 숨죽인 채 보따리장수의 동향을 살피는 아델에게 온통 시선이 쏠렸다.

저렇게 작은 체격이라면 힘보다는 속도일 거다. 도망치는 속도가 얼마나 빠를진 모르겠지만 딱히 그를 놓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굳이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아델을 구경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어, 알리아 영애가 왔어요.”

“그렇군요.”

헥시온이 대답하며 아델의 허리에 은근슬쩍 손을 올렸다. 아델은 저쪽에 온통 신경이 쏠려 그런 헥시온의 움직임 따윈 전혀 신경도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알리아 영애가 다가오자 보따리장수가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안한 기색의 알리아 영애가 고개를 돌려가며 주변을 살폈다. 헥시온이 아델의 허리를 감싼 채 조금 더 골목 안으로 몸을 숨겼다.

“아주 누가 있어서 불안하다고 소문을 내는군요.”

“네? 누가요?”

“알리아 영애 말입니다.”

헥시온의 표정이 구겨졌다. 저렇게 티를 내서야, 잡을 수 있는 것도 놓칠 것 같았다. 다행히 상대는 멍청한 듯하다. 그녀의 이상한 행동을 의심하지는 않는 듯했다.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이윽고 헥시온과 아델이 있는 골목길의 정반대 방향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멀어지자 헥시온은 아델의 손을 붙잡고 적당한 거리에서 둘을 미행했다.

그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섰다. 헥시온이 팔짱을 꼈다. 아델의 표정도 기묘해졌다.

“좀…… 초보자 같네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너무 허술해요. 주변에 사람도 없고 나라면 불안해서 누군가를 데리고 다닐 거예요. 물론, 엄청 강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델이 말끝을 흐렸다. 그다지 엄청 강해 보이지 않은 탓이었다. 헥시온이 아델의 로브를 조금 더 깊게 눌러 주며 그녀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네, 일단 잡고 생각해 보죠.”

헥시온은 던지듯 말을 내뱉고는 성큼성큼 걸어 알리아 영애와 수상한 보따리장수가 있는 곳을 향해 직진했다.

그가 제법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보따리장수는 눈치를 채지 못한 듯 보였다. 당연하지만, 거리를 좁힌 헥시온이 보따리장수를 붙잡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눈치를 채고 도망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헥시온의 발이 로브를 뒤집어쓴 그의 옆구리를 찼으니까.

“아악!”

보따리장수가 비명을 질렀다. 고통에 신음하며 바닥을 구르는 목소리는 무척 앳되어서 발을 날린 장본인인 헥시온은 물론 멀찍이 떨어져 있던 아델까지도 굳었다.

헥시온은 손을 내려 로브 속에서 꿈틀거리는 보따리장수를 집어 들었다. 성의 없이 한 손으로 덜렁덜렁 들어 올린 것뿐이었지만.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헥시온이 보따리장수를 한 손으로 붙잡은 채 알리아 영애에게 말했다. 서늘한 시선이 잠시 그녀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알리아 영애는 잘게 몸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알리아 자작에겐 곧 찾아가겠다고 전해 주시면 좋겠군요.”

“…….”

알리아 영애는 입을 다물었다.

대답이 없는 알리아 영애를 향해 짧은 한숨을 내쉰 헥시온이 몸을 돌려 그녀를 내려다봤다.

“난 두 번 말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면, 이대로 놓아주면 됩니까?”

“……아뇨! 아, 알겠습니다.”

알리아 영애가 기겁하며 빠르게 대답했다. 헥시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알리아 영애는 빠르게 아델을 스쳐 지났다.

“씨발, 이거 놔!”

“놓을 거였으면 붙잡지도 않았습니다.”

헥시온이 그렇게 말하곤 멀찍이 떨어져 있는 아델을 흘긋 쳐다봤다. 멀뚱히 서 있는 것을 보아하니 이쪽으로 올 마음이 없어 보였다. 거기까지 확인한 헥시온은 허리를 굽혀 보따리장수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난 인내심이 많지 않아. 한 번 더 움직이면…… 그대로 다리 하나, 팔 한쪽을 자르고 대화를 나누도록 하지. 뭣하면 칼로 네 몸을 벽에 고정해 놓고 대화해도 돼.”

헥시온의 서늘한 목소리에 보따리장수의 몸이 굳었다. 아직도 보따리장수는 로브에 얼굴이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겁에 질린 보따리장수가 반항을 멈추자 헥시온이 굽혔던 허리를 폈다.

“아델,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시죠.”

“……그렇게 들고요?”

“곤란합니까?”

“눈에 띌 것 같긴 해요. 그리고…… 들켜도 좋을 건 없잖아요.”

아델의 지적에 헥시온이 그제야 낮게 탄성을 흘렸다. 잡았다는 것에 신경이 쏠려 황제의 눈을 신경 쓰지 못했다. 저택까지 들고 가는 건 무리가 있었다.

“저택은 무리겠군요. 내가 적당히 대화를 나눌 만한 장소를 압니다. 다만, 당신을 데리고 가는 것은 내키지 않네요.”

“괜찮아요.”

“……아마 냄새도 나고 더럽습니다.”

헥시온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델은 괜찮다며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헥시온은 퍽 내키지 않는 듯 보따리장수를 한번 흘겨보곤 골목 더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근데 생각보다 반항을 안 하네요.”

“초식 동물은 위험에 예민하다고 하잖습니까. 비슷한 거겠지요.”

“아. 하긴, 헥…… 아니, 당신은 강하니까요.”

이름을 부르려다 보따리장수의 눈치를 보며 아델이 냉큼 말을 바꿨다. 헥시온이 부드럽게 웃었다. 보따리장수가 제 쪽을 힐끔거리며 살피는 게 느껴졌지만, 그는 모른 척했다.

“이쪽입니다.”

헥시온이 하수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상치도 못했던 길에 아델이 눈을 끔뻑였다. 헥시온이 조금 민망한 듯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러게, 더럽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길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나도 뒷골목을 누빈 적이 있긴 합니다.”

헥시온이 대답하며 몸을 굽혀, 능숙하게 하수구의 문을 열었다. 아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오른팔은 보따리장수를 붙잡고 있었고 하수구를 연 것은 왼팔이었다. 하수구 뚜껑을 붙잡고 연 것이 아니라 틈 사이에 딱딱하게 굳은 손을 끼워 넣고 억지로 들어 올린 것이었지만. 조금 무식한 방법이긴 했지만, 그가 왼팔을 움직였다는 것이 아델에겐 감회가 새로웠다.

“사다리가 있습니다. 천천히 조심해서 내려가십시오.”

“네.”

아델이 긴장한 채 하수구 밑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렸다. 아델이 내려가자 헥시온이 보따리장수를 들어 올렸다.

“내려가. 도망가면,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게 해 주지.”

시커먼 동공에 잔혹함이 스쳐 지났다. 보따리장수가 몸을 벌벌 떨며 고개를 빠르게 주억였다. 잔뜩 겁에 질린 그를 내려다보며 헥시온이 손을 놓았다. 보따리장수가 벌벌 떨며 하수구 밑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헥시온은 사다리에 다리를 올리고 한 손으로 하수구 뚜껑을 닫더니 그대로 뛰어내렸다. 제법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헥시온은 멀쩡했다. 그가 보따리장수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가죠.”

“네.”

헥시온이 어두컴컴한 하수구를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아델이 그 뒤를 천천히 쫓았다.

“이 정도의 인간에게 농락당한 알리아 영애도 우습군요.”

“사람이 패닉 상태에 빠지면 정상적인 사고가 안 되니까요.”

“도대체 넌 무슨 생각으로 귀족 영애를 협박할 생각을 했지?”

“…….”

보따리장수가 입술을 꼭 깨물곤 입을 다물었다.

묵비권이라도 행사하겠다는 모습에 헥시온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순간 사나워졌다. 물론, 아델이 옆으로 다가오자 순식간에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말이다.

“이쪽입니다. 아델.”

헥시온이 막다른 곳에 도착해서 턱짓으로 위를 가리켰다.

* * *

“여긴…… 어디예요?”

“옛날에 어머니께서 살던 집입니다.”

“아.”

아델이 놀란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낡고 허름해서 곧 무너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오래되어 보이는 집이었다. 아직 건물이 무너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낡아 보였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헥시온이 들고 있던 보따리장수를 대충 바닥에 던졌다. 보따리장수는 데굴데굴 한 바퀴 구르더니 끙끙거리며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으아아악!”

그러더니 이윽고 품에서 뭔가를 꺼내 헥시온에게 달려들었다. 낡고 오래됐는지, 날이 잘 갈아지지도 않은 단도였다. 헥시온이 퍽 심드렁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간단히 보따리장수의 손을 붙잡아 꺾었다.

“아악!”

“이거 좀 어린 거 같지 않습니까?”

헥시온이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멀리 차내며 말했다. 정말 상대조차 되지 않는 일련의 상황에 아델이 어색하게 웃었다. 저런 검으론 제대로 찔리지도 않을 것 같았다.

헥시온이 보따리장수가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를 벗겼다. 드러난 것은 무척 왜소한 몸에 작은 키를 가진 어린아이였다.

그것도 이제 겨우 열네 살이나 되었을 법한 어린 아이.

“젠장! 젠장!”

아이가 발버둥을 치며 욕설을 뱉었다. 팔짱을 낀 헥시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말 귀찮다는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는 발버둥 치는 아이의 발을 짓밟으려다가 문득 뒤에 있는 아델을 떠올리고는 움직이려던 다리에 힘을 줬다.

“난 두 번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거래에 나왔던 건 늘 너였나?”

“…….”

소년은 입을 다문 채 눈을 부릅뜨고 헥시온을 노려봤다. 헥시온의 눈이 한층 서늘해졌다. 소년이 그 위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아델.”

“네?”

“조금 대화가 필요할 것 같은데, 아델에게 보이기엔 좀 부끄러워서요.”

헥시온이 아주 천천히 눈꺼풀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러곤 왼손으로 제 장갑 낀 오른손을 매만진다. 그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에 아델이 눈을 크게 뜨곤 낮게 탄성을 흘렸다.

‘칼럿병으로 협박이라도 할 생각인가?’

하긴, 저 병은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번 걸리면 고칠 수도 없고 시체조차 남지 않고 재가 되어 사라졌으니까. 제국에서 자라는 아이들이라면 옛 설화로 들은 적도 많이 있을 거다.

헥시온은 늘 제 치부를 아델에게 보이는 것을 꺼렸고, 아델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웬만해선 그의 의사를 존중해 주고 싶었다. 자리를 잠시 피해 달라는 뉘앙스가 분명했기에 아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다시 부르겠습니다.”

“알겠어요.”

고개를 끄덕인 아델은 로브를 조금 더 꾹 눌러쓰며 낡은 오두막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과 동시에 헥시온이 짧게 한숨을 뱉었다.

“가끔 상대의 역량도 파악 못 하고 까부는 놈들이 있긴 하지.”

아델이 나가는 것과 동시에 헥시온의 분위기가 뒤바뀌었다. 넘실거리는 살기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소년의 몸이 벌벌 떨렸다. 공포에 질린 소년의 목을 한 손으로 잡은 헥시온은 그대로 아이를 들어 올렸다.

“난 도덕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서…….”

“커흑-.”

목이 잡혀 공중에 뜬 아이가 고통스러움에 발버둥을 쳤다.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가 소년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있는 헥시온의 눈은 무척 건조했다.

“네가 갓난아기든 아니면 이제 자라나는 새파랗게 어린 새싹이든, 죽이는데 망설임은 없어.”

“컥-.”

소년이 점점 지쳐 가는지 바르작거림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뭣보다 소년은 두려웠다. 정말로 상대의 눈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떨림도 없었다.

‘날 죽일 거야…….’

소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도축되기 직전의 돼지가 된 기분이었다. 소년은 발버둥을 쳤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냥 대답했으면 좋았잖아.”

헥시온이 붙잡고 있던 손을 허공에서 그대로 놓았다. 죽일 마음이었다면 단숨에 목뼈를 부러뜨렸을 거다. 손속에 제법 사정을 둔 것이었다.

“흐윽…… 콜록! 허억, 헉…… 콜록…….”

소년이 황급히 숨을 들이마시며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소맷자락으로 벅벅 문질렀다. 헥시온이 느릿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래에 나왔던 건 계속 너였나?”

“마, 맞…… 맞아. 나였…….”

헥시온의 눈이 서늘했다.

“저, 저였어요…….”

소년이 황급히 눈을 내리깔며 말을 바꿨다. 사정없이 잡혔던 목이 아직도 아팠다. 그보단 공포가 더 짙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벌벌 떨고 있는 소년은 몸집이 왜소하고 허름한 옷을 입고 있어서 안쓰럽게 여길 만했지만, 헥시온에겐 신경 쓸 것이 전혀 아니었다.

“한 번만 더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다음엔 그 손목을 반대로 꺾어 영원히 쓸 수 없게 만들어 주지.”

“……네네! 네!”

헥시온의 시선이 소년의 목에 난 손자국에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좋아. 로브 다시 뒤집어쓰도록 해.”

소년이 아직도 벌벌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로브를 뒤집어썼다. 그제야 헥시온이 부드럽게 웃으며 몸을 돌려 오두막 밖으로 향했다. 아델은 문 앞에 기대어 서 있었다.

“아델, 제대로 얘기를 해 줄 모양입니다.”

“아. 그래요?”

“예. 들어오십시오.”

헥시온이 아델의 손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다시 오두막으로 끌어당겼다. 아델이 순순히 안으로 들어왔다. 어느새 로브를 뒤집어쓴 보따리장수가 벌벌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서 있었다.

“무슨 얘기를 했어요?”

“현명하신 당신께서 예상하시는 것을 했을 뿐입니다. 무서운지 로브까지 뒤집어쓰겠다고 하더군요.”

“아아…….”

확실히 무서울 만하다. 닿기 싫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아델은 그럼에도 기분 나쁜 기색을 내지 않는 헥시온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로선 네 녀석이 그 거래를 텄다는 건 믿기지 않습니다.”

“그…… 귀족 여자는 상대하기가 쉬워서……. 무슨 말을 해도 바로 믿고 게다가…… 여러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 주셔서…….”

변성기가 채 오지 않은 소년이 벌벌 떨며 더듬더듬 말했다.

“그건 참 제대로 파악하셨군요.”

헥시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리아 영애의 멍청함에 공감했다. 헥시온의 대답이 들려올 때마다 소년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건 어디까지나 공포로 인한 것이었으나 아델은 그가 칼럿병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긴, 초식 동물도 제 먹잇감 앞에선 어깨 펴고 한없이 잔인해진다고 듣기는 했습니다.”

헥시온이 퍽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년의 목이 한껏 움츠러들었다. 그가 짧은 한숨을 삼켰다.

“누가 알려 줬습니까?”

“몰, 모르는…….”

헥시온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저, 정말 몰라요! 정말! 매번 로브를 쓴 사람이랑 만나는데…… 그 사람이, 알려 줬어요. 큰돈을 벌 수 있다고.”

“그 사람은 언제 만납니까?”

“화요일에…….”

아이가 잔뜩 움츠린 채 대답했다. 아델과 헥시온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꼬리 하나를 잡은 줄 알았더니, 이건 꼬리의 꼬리였던 모양이다. 헥시온이 엄지로 제 이마를 문질렀다.

“뒷배는 따로 있고 그냥 이용만 당했다?”

소년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헥시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겨우 돈을 벌 수 있다고 귀족을 협박하는 일을 했다? 이런 제대로 얻어먹고 산 것 같지도 않은, 아무런 힘도 없는 꼬마가? 잠시 고민하던 헥시온이 이를 드러냈다.

“감히 귀족을 협박해 놓고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곤란하지요. 네놈은 이곳에서 즉결 처분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하, 하지만……!”

아델도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으나, 헥시온을 막지는 않았다. 그를 보니 진심인 것 같지는 않다.

‘……진심인 것 같지 않다니.’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보이지도 않는 그의 마음을 판단하는지. 아델이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니면 평생 지하 감옥에서 썩는 것도 추천하도록 하겠습니다.”

“안 돼요!”

소년이 황급히 소리쳤다. 쿵 소리가 날 정도로 무릎을 꿇은 소년이 바들바들 몸을 떨며 고개를 젓는다.

“안 돼요, 나리. 안 돼요…….”

“죄를 저지르고 그냥 빠져나갈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게다가 정보 제공도 할 수 없는, 쓸모라곤 없어 보이는 말단 중의 말단을.”

바들바들 떨던 소년이 이마를 바닥에 붙인 채 고개를 저었다.

“여동생이…….”

“여동생?”

“여동생이, 병에 걸렸어요. 그걸 낫게 하려면…… 그 사람이 주는 약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전 그 귀족 여자에게 받은 돈으로…….”

소년이 울먹이며 더듬더듬 말을 읊조렸다. 그는 엎드려서 두 손으로 싹싹 비비기까지 했다. 비굴할 정도로 아이는 몸을 움츠린 채 자존심도 없이 자신을 낮췄다.

“여동생을 혼자 둘 수가 없어요. 제발, 제발 시키는 건 뭐든 할 테니까 살려만 주세요…….”

소년이 이마를 바닥에 박으며 헥시온의 바짓단을 붙잡은 채 애원했다. 헥시온의 표정이 순간 짜증으로 물들었다가 이내, 아델의 시선을 신경 쓴 듯 입매를 굳혔다. 그저 범인을 잡아 뒤를 캐서 알리아 자작에게 빚을 지게 하려던 것뿐인데 일이 점점 복잡해지고 있었다.

“여동생이 무슨 병에 걸렸는데?”

“그게…….”

소년의 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아델의 평이한 물음에도 뭐 때문인지 대답은 없고 눈치만 보기에 바빴다. 가만히 아이를 내려다보던 헥시온이 아이의 코앞에 발을 쿵, 내려놨다.

“몸이…… 돌처럼 변해 가는 병인데…….”

벌벌 떠는 아이의 목소리는 겁에 질려 있었다. 바닥에 이마를 박은 채로 떨리는 몸이며 목소리가 마치 한겨울에 밖에 쫓겨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게…… 죄송합니다.”

“마약은 누가 제공했지?”

“……제가, 만든 거예요.”

소년이 더듬더듬 말했다. 다른 출처를 생각했던 헥시온의 표정이 굳었다. 마약을 만들었다는 말인가? 이렇게 어린 애가? 아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네가 만들었다는 거야?”

“네……. 원래는, 어떤 조직에 돈을 주고 팔던 거예요. 나쁜…… 나쁜 일이라는 건 알지만, 도저히 먹고살 길이 없어서…… 저 같은 어린애는 써 주지도 않고 동생은 일하기엔 몸이 약해요.”

헥시온은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이가 짜증이 난다기보단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그걸 그 귀족에게 팔게 됐니?”

아델이 몸을 쪼그리고 앉으며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힐끔거리며 헥시온의 눈치를 살피더니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사람이 말을 걸어왔어요. 그 조직에서 돈을 받는 날이라서 그 날은 동생을 데리고 함께 나왔었거든요. 몸이 약한 아이라 평소엔 나가질 못해서…….”

소년은 무언가 분한 듯 이를 악문 채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망토 사이로 빠져나온 주먹은 얼마나 꽉 쥐었는지 새하얗게 질려서 안쓰러워 보일 정도다.

잘게 떨리는 손끝을 보며 아델이 한숨을 삼켰다. 가끔 뒷골목엔 ‘쓸데없는 재능’을 타고나는 이들이 있었다. 그녀가 쓸데없다고 표현하는 것은 바닥을 기는 뒷골목의 아이들에게 주어진 재능이란 그야말로 이상한 곳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원받을 수 없는 환경에서 재능을 타고난 아이들은 그것으로 뒷 세계에서 돈을 벌려고 하다 보니 이상한 쪽으로 재능을 사용하게 되곤 했다. 눈앞의 아이도, 그런 재능을 타고난 이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뒷 세계에서는 대게 힘으로 강자와 약자를 나눈다. 그러니 차라리 그 능력이 남들보다 조금 더 뛰어난 근력 정도라면 상관없었을지도 모른다. 상대를 제압하거나 할 때라도 사용할 수 있었을 테니까. 저 나이에 마약을 혼자서 만들어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때 알리아 영애에게 회수했던 마약은 제법 질이 좋았다.

‘차라리 약사가 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면, 분명 아이의 재능은 조금 더 좋은 쪽으로 꽃을 피웠을 거다.

“그런데 그 자식이…….”

아이의 입술 사이로 이를 악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깐 눈을 뗀 사이에 동생에게 무슨 짓을 한 것 같아요. 갑자기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쓰러지더니…… 다음 날에는 다리 한쪽이 돌처럼 변해 있어서…….”

소년의 몸이 이제는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얘기를 하다가도 분을 참지 못하겠는지 소년이 몇 번이고 주먹을 맨바닥에 내리쳤다.

“젠장!”

아이가 욕설을 뱉었다. 퍽퍽 맨땅을 내리치는 소년의 손이 벌겋게 물들어갔다.

“그때, 그 애를 잠시라도 혼자 두는 게 아니었는데…….”

“그래서, 그 사람이 가져다준 약을 먹으니까 괜찮았어?”

“네. 동생은 매번 아파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는데, 그 약을 먹으니 효과가 있었어요. 그 대신…… 저는 그 사람이 시키는 걸 해야 했어요.”

그건 칼럿병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확신했다. 칼럿병이 사용된 것이라면, 그건 말 그대로 황제의 부정을 알리는 거다. 황제가 칼럿병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기만 한다면.

“마약을, 그 여자한테 팔고…… 그 돈으로 자기에게서 약을 사라고 했어요. 귀족 여자가 주는 돈을 전부 가져다줘야 살 수 있을 만큼 비쌌고요.”

얼굴을 바닥에 묻은 채 말하는 소년에 아델이 쪼그렸던 몸을 일으켰다. 이걸 벌써 잘라낸다면, 황제의 귀에 이야기가 들어갈 거다. 그러면 괜히 뒤를 잡힐 수 있다.

“일단…… 이대로 두는 게 낫겠죠?”

“당신의 생각도 그럽니까?”

“네.”

괜히 들쑤시거나 괜한 정의감으로 아이를 구해내는 것보단 일단 이 상태를 유지하면서, 이쪽에서 움직여서 정보를 캐내는 것이 나았다.

헥시온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나.”

“네?”

“얼른.”

“네네.”

헥시온의 명령에 소년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박고 있던 이마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아이는 헥시온의 눈치를 살폈다. 헥시온이 낮게 혀를 차곤 장갑을 벗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소년의 눈이 크게 커졌다. 손끝에서부터 팔꿈치까지 뒤덮고 있는 몸이 돌처럼 굳는 현상. 그것은 소년에게도 익숙했다. 제 동생의 다리가 그렇게 굳었고 그 때문에 그녀는 걸어 다니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됐으니까.

“원래는 여기까지 있었다.”

헥시온이 어깨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파악한 소년이 입을 벌렸다.

“나을, 나을 방법을 아는 건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나요? 뭐가 필요해요? 뭐든 다 할게요. 제발…… 동생을, 치료해 주세요.”

헥시온이 팔짱을 꼈다. 칼럿병이 가져다주는 고통의 크기는 누구보다 헥시온이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괴로운지도. 매일 밤, 잠을 이루는 것도 괴롭다는 사실도.

“앞으로 넌 매주 그 귀족을 만나서 지금처럼 똑같이 하도록 해. 물론 그 남자와도 접선을 계속하는 거다.”

“네……?”

“다만, 주기적으로 사람을 보낼 테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하게 보고해. 가능하다면 정보가 있으면 좋지. 생김새든 특징이든 목소리든 뭐든 좋아. 내 수하에게 보고해라.”

“……네.”

원하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년이 실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 대신, 네 동생의 병을 조금이라도 완화해 줄 수 있는 다른 대안을 함께 보내겠다.”

“……네!”

“결코, 의심을 사선 안 돼.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해라. 비굴하게 굴었다면 계속 비굴하게 굴고, 동생을 살리고자 안절부절못했다면 계속 그렇게 굴어. 너와 접선하는 귀족에게도 그렇게 전해 둘 테니.”

“그러면…… 동생은 살 수 있나요?”

“적어도 그 남자에게 맡기고 있는 것보단 생존율이 높아지겠지.”

헥시온의 말에도 소년은 확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다며, 감사하다고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는 소년을 헥시온이 인상을 찌푸린 채 내려다봤다.

“오늘 있었던 일은 불문에 부치도록 해.”

“네. 감사합니다, 나리.”

소년이 한층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헥시온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이제는 알리아 자작을 만날 차례였다.

* * *

“으음, 큰 수확은 없었네요.”

“어차피 이번 건은 알리아 자작을 천칭에 올릴 판이었습니다. 꼬리를 잡을 수 있는 작은 근거라도 얻었으니 충분합니다.”

“그런 것치고는 무척 피곤한 표정인데요?”

아델의 물음에 헥시온이 조금 놀란 눈을 했다.

그는 그녀를 힐끔 바라보더니 낮게 웃었다.

“아델에겐 뭔가를 숨길 수가 없겠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는데요?”

“화가 나서 그럽니다.”

“어째서요?”

“모든 상황이 화가 납니다. 황제를 당장에라도 끌어내리고 싶습니다.”

헥시온이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아델이 그를 슬쩍 쳐다보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도 잡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잡을 수 있는 곳까지 서서히 내려오고 있잖아요.”

아델이 헥시온의 오른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갑작스럽게 먼저 닿아 온 그녀의 손길에 헥시온의 귓불이 살짝 붉어졌다.

“……아델 앞에선 화도 못 내겠습니다.”

“네?”

헥시온은 아델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언제나 내 화를 금세 풀어 버리니까요.”

“…….”

“당신 손길 하나에 화를 푸는 내가 나는 참 신기합니다.”

그가 허리를 굽혀 아델의 귓가에 속삭였다. 예민한 귀에 닿는 숨결에 그녀가 뻣뻣하게 굳었다.

* * *

헥시온과 아델은 로브를 뒤집어쓴 채 곧장 알리아 자작저로 향했다. 말을 타고 나온 것이 아니라서 시장을 거쳐 귀족 거리까지 걸어가야 했으나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라 힘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 부끄럽네.’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를 걷다 보니 얼굴이 자연스레 붉어졌다. 사람들이 둘을 힐끗거린 탓도 있지만, 헥시온과 맞잡은 손이 어쩐지 후끈거려서 아델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어릴 땐 세상이 그저 어둡게만 보였습니다. 재미없고, 따분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요.”

사람이 많지 않은 귀족 거리로 들어서며 헥시온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푹 뒤집어쓴 로브 때문에 헥시온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재밌는 건, 당신과 함께 있으면 그 기분이 싹 사라집니다.”

“……그래요?”

“네. 내가 당신을 만난 건 말 그대로 구원이었습니다. 잊고 살았던 평범한 삶을,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아델이 내게 다시 쥐여 줬습니다.”

헥시온의 말에 아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붉어진 얼굴을 들킬까 괜히 두려워졌다. 얽혀 있는 손가락과 손바닥 사이로 제 심장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질 것만 같았다. 로브를 쓰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헥시온이 먼저 구해 주셨잖아요.”

“네. 그날 당신을 구한 게 나라서 천만다행입니다.”

헥시온이 말했다.

처음에는 그저 별생각이 없었다. 카레나 비프타는 어차피 언젠가 마주할 사람이었고, 그런 거라면 적당히 점수를 따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이 이런 종류의 인연이 될 줄은, 그가 누군가에게 맹목적으로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저야말로 고맙죠.”

“내가 더 감사합니다.”

“저도 헥시온을 만나서 그 집을 나왔잖아요.”

아델이 말했다. 실제로 그랬다. 그녀에게 헥시온은 구원자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죽었거나 적어도 온전하게 살아 있지는 못했을 터다.

“그런데 이렇게 가도 될까요? 미리 얘기도 하지 않고…….”

“우리에겐 알리아 영애가 있으니까요. 살짝 언질만 주면 그녀는 우리에게 문을 열어줄 겁니다.”

“그거야…….”

그렇긴 하겠지. 알리아 영애는 지금 겁에 질린 상태고 헥시온의 말이라면 뭐든 들을 기세긴 했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의외로 헥시온을 꽤 두려워하는 듯했다.

‘칼럿이란 게 그렇게 무서운 건가?’

헥시온을 볼 때마다 너무 겁에 질려 있으니 조금 안쓰럽기도 하다. 그건 겁이라는 수준을 넘어 공포에 가까웠다.

이윽고 그들은 알리아 자작저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알리아 자작저에 다가가자 경비병들이 창을 세우며 앞을 막아섰다.

“용건을 말해라.”

헥시온은 로브를 조금 더 깊게 눌러쓰며 말했다.

“알리아 영애께서 시키신 심부름을 마치고 왔습니다.”

“들은 얘기가 없다. 돌아가라.”

“이런, 많이 피곤해 보이시더니 잊어버리신 모양이군요. 알리아 영애께 맡기신 일은 처리했다고 말씀드리면 분명히 열어 주실 겁니다.”

헥시온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조금 비굴한 듯 들리기도 했다. 그는 천의 목소리라도 가졌는지 때때로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굴 때가 있었다.

‘무서울 때도 있고…….’

사실 옛날부터 위험한 전장을 많이 돌아다녔으니, 산전수전을 다 겪은 만큼 분명 다양한 모습이 있을 거다.

“바쁘신 와중에 힘이 드실 테지만, 말을 전해 주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헥시온이 번쩍번쩍한 은화를 두 개 내밀자 경비병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험악해진 인상의 경비병을 보며 헥시온은 속으로 혀를 찼다.

‘역시 알리아 자작이라고 해야 할지.’

신임이 높은 만큼, 밑에 있는 경비병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별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사람이 움직이는 데엔 그만한 대가가 필요한 것이니까요. 이건 경비병분들께서 개인적인 부탁으로 움직여 주시는 데에 대한 대가입니다.”

헥시온이 뒤늦게 조곤조곤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뇌물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음에도 경비병들은 그걸 순순히 받아들이는 기색이 아니었다. 경비병 하나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니 돈은 필요 없다. 말은 전해 드리고 오지. 허튼짓하지 말고 기다리도록.”

“네, 알겠습니다.”

헥시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법 세차게 거절당했는데도, 그는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했다. 두 경비병이 서로 시선을 한 번씩 마주하고는 이내 한 사람만 남겨 둔 채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헥시온과 아델은 적당히 멀찍한 곳에서 경비병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저런 경비병이 드문데 알리아 자작께선 사람을 잘 뽑으시나 보네요.”

“알리아 자작은 신임이 무척 높습니다. 자작가 자체에서 선행을 많이 베풀기도 하고 신전에 기부도 많이 합니다.”

“그래요?”

“네. 신전이 아무리 부패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지금껏 쌓아 온 영지민들과 백성들과의 유대는 무척 끈끈합니다.”

헥시온이 작은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알리아 자작가에 대해서는 알리아 자작 영애만 알고 있던 아델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알리아 자작도 사교계나 귀족들 사이에서는 잘 회자되지 않는 사람이었지.’

아무래도 그는 사교계의 연회에 자주 참석하는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겐 더더욱 알리아 자작이 필요합니다. 그가 악마를 신봉하고 있었다? 자작가를 아는 백성이라면 누구도 믿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요?”

“나라에 큰 기근이 닥치거나, 영지 운영이 힘들어지면 그 스스로 굶어서라도 영지민들과 찾아오는 백성들에게 모든 걸 나눠 주곤 했던 사람이니까요.”

아델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젖히자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헥시온과 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그들의 그런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역사는 깊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알리아 자작가에게만큼은 칼럿을 이용할 수 없는 겁니다. 뒤를 털어도 나올 게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렇군요.”

“네, 그래서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돈보다는 알리아 자작을 존경하거나 그에게 도움을 받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큼 충성심도 강하지요.”

“아…… 그런 거였군요.”

이제야 경비병들의 혐오스러운 시선이 이해됐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알리아 영애가 그런 곳에 배경을 두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헥시온이 손을 뻗어 아델의 로브를 더 꾹 눌렀다.

“그런데 거기에 균열이 생긴 겁니다. 알리아 영애가 그것이죠.”

“……참, 불행한 일이네요.”

“나와 당신에겐 행운인 일이고요.”

빙긋 웃은 헥시온은 경비병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때마침 이야기를 전하러 갔던 경비병이 성큼성큼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걸 눈치챈 거야?’

가끔 헥시온의 동물적인 감각은 조금 무섭게 느껴진다.

“알리아 영애께서 허락해 주셨습니까?”

“네, 손님이니 들여보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신분을 파악하지 못해 무례하게 굴었던 점 사죄드립니다.”

헥시온이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사과를 건네는 병사를 보며 손을 내저었다. 그는 솔직히 제법 이 경비병들이 마음에 들었다. 돈에 혹하지 않는 이들은 무척 드문 일이었으니까.

“괜찮습니다. 제대로 밝히지 못해 미안한 건 이쪽이지요.”

헥시온이 흔쾌히 사과를 받아넘겼다. 상대에게 날카로운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에겐 무척 드문 행보이기도 했다.

“안내하겠습니다.”

“네. 가죠.”

헥시온이 아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델은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별다른 말없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또다시 심장이 빠르게 뛰고 맞닿은 손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경비병의 안내에 따라 저택으로 들어가자, 저택 입구에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 알리아 영애가 보였다. 옷도 갈아입지 못한 듯 아까와 같은 복장이었다. 그녀는 아델을 보더니 황급히 다가왔다.

“비ㅍ…….”

아델이 제 이름을 크게 부르려는 알리아 영애의 입술에 손가락을 올렸다.

“쉿, 제 이름 부르지 마세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알리아 영애가 고개를 끄덕인다.

“와 주셔서 감사해요. 일단 제 방으로…….”

“아뇨, 괜찮을 것 같군요. 기다리던 분이 얼굴을 내미신 것 같으니.”

헥시온의 낮은 목소리에 알리아 영애가 눈을 크게 떴다.

“누구십니까.”

뒤에서 들리는 중년 남자의 목소리에 헥시온이 몸을 돌렸다. 그의 로브 자락이 움직임에 따라 펄럭거렸다.

알리아 자작은 이제 막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듯했다. 그는 코트를 벗어 집사에게 건네고 날카롭게 뜬 눈으로 로브를 쓴 두 사람과 그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제 하나뿐인 여식을 바라봤다.

알리아 자작은 제 여식을 제법 엄하게 키우며 많은 것을 자제하게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하나뿐인 혈육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잔뜩 움츠러든 제 여식을 보는 것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는 이야기다.

“아, 아버지…… 이분들은…….”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제 딸을 보는 알리아 자작의 눈이 곱지는 않았다. 비록 엄하게 키우기는 했지만, 그것이 어디 나가서 남들에게 비굴하게 지내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제 여식이 그럴 성정이 아니라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제대로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알리아 자작.”

“……당신은.”

알리아 자작의 눈에 놀라움이 번졌다. 로브를 살짝 들어 올린 헥시온이 알리아 자작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표정이 이윽고 딱딱하게 굳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연륜만큼이나 표정을 숨기는 것에 능한 알리아 자작이 금세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들에게 들어오는 것을 허가했다. 헥시온이 알리아 자작의 뒤를 따라가고 아델은 헥시온의 옆에서 걸음을 걸었다.

“옆에 계신 분은?”

“제 약혼녀입니다.”

“아. 비프타 영애도 함께셨군요.”

알리아 자작이 집사에게 간단히 다과를 내오라는 명령을 내리며 곧장 응접실로 향했다.

아델은 천천히 저택을 둘러봤다. 저택은 무척 오래된 느낌이었지만, 관리가 안 됐냐고 묻는다면 아니었다. 저택 내 고풍스러운 장식품들은 모두 세심하게 관리가 되어 있었다. 오래된 듯 보이지만, 내부는 관리를 잘한 듯 깔끔했고 장식품에는 먼지 한 톨 없었다.

“저택의 분위기가 무척 좋습니다.”

헥시온이 드물게도 칭찬의 말을 건넸다. 알리아 자작이 허허 웃었다.

“몇 안 되는 취미 생활입니다. 대대로 알리아 자작가는 이런 골동품을 수집하는 게 취미였지요. 밖에서 보기엔 무척 재미없겠지만요.”

“저건 글레어 로버트의 그림인가요?”

문득 걸어가던 아델이 벽 한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바라보며 물었다. 알리아 자작이 놀람을 숨기지 않았다. 그가 조금은 달아오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알아보시겠습니까?”

“네, 한번 본 적이 있거든요. 그때 봤던 화풍이랑은 느낌이 다르네요.”

“얼마 전에 시장에서 좌판을 깔고 헐값에 팔고 있는 것을 구매했지요. 아직 무명의 작가인데 용케 알고 계십니다.”

글레어 로버트는 2년 뒤 무척 대성할 인물이었다. 그가 그린 그림을 한 귀족이 지원해서 전시회를 열어 줬는데, 그곳에서 가치를 인정받아 그림 한 장당 가격이 높게 뛰었고 한동안 사교계가 떠들썩했었다.

“조금 더 모아서 전시회를 열어 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게 알리아 자작가였어?’

그녀가 조금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알리아 자작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져 있다. 헥시온은 아델을 힐끗 보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재능 있는 젊은 예술가들을 후원한다고 소문을 들었는데 진짜였군요.”

“그저 모으고 싶어서 모으고 있는 것뿐입니다. 가치 있는 것에는 그만한 값을 지불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헥시온이 입맛을 다셨다. 그에겐 저런 신실한 마음이나 뭔가를 이득 없이 지원해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그에게 알리아 자작은 필요한 존재였다. 그의 부족한 면을 알리아 자작이 뒷받침해 줄 테니까.

“영애께서도 보는 눈이 무척 높으시군요.”

“칭찬 감사합니다.”

“이곳이 응접실입니다.”

알리아 자작이 응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풍스러운 나무로 된 긴 탁자가 방 중앙에 놓여 있었다. 책장도 찻잔도 모두 나무로 된 것들이었는데 유일하게 소파만이 가죽으로 된 것이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이지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곳까지 찾아오셨는지 연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소파에 앉은 알리아 자작은 집사가 차를 내려놓자마자 그를 곧장 내보내곤 직설적으로 물었다. 헥시온은 빙긋 웃으며 로브를 벗었다. 알리아 자작은 말없이 헥시온의 시선을 마주했다.

“알리아 영애가 위험한 일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는 건 알고 계셨습니까?”

“……위험한 일?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듣지 못했겠지요. 영애께서 자작에게 말하지 않았을 테니까.”

헥시온의 여상한 목소리에 알리아 자작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는 굳은 눈으로 헥시온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헥시온은 그가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곧장 입을 열었다.

“마약에 손을 대고 있었습니다.”

“……농이 지나치십니다.”

알리아 자작의 목이 꼿꼿해졌다. 인자하게 휘어졌던 눈꼬리는 매섭게 치켜 올라갔고 목에는 핏대가 솟아서 그의 분노를 짐작하게 했다.

“그건 본인에게 물어보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헥시온이 어깨를 으쓱이자 알리아 자작은 성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응접실 문을 열었다. 응접실 밖에는 알리아 자작저의 집사가 서 있었다.

“당장 밀레이아를 불러 내려오라고 하게! 당장!”

“네, 알겠습니다.”

알리아 자작이 소리쳤다. 집사가 황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알리아 자작은 성큼성큼 돌아와 다시 소파에 앉았다.

“밀레이아는 그런 일을 할 만큼 대범한 아이가 아닙니다.”

알리아 자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오랜 시간 제 딸을 봐 온 만큼 그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확신했다.

“대범하지 않은 이라도 한 번 안 좋은 일에 발을 내디디면, 두 번은 쉬운 법이지요.”

헥시온의 말에 알리아 자작이 표정을 굳혔다.

“일단 여식이 내려오고 대화를 이어 하지요.”

알리아 자작은 그렇게 말했으나 불편한 기색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는 헥시온 밀라트리오 대공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공식 석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유 없이 움직이는 남자가 아니었다.

‘제발, 밀레이아.’

알리아 자작이 속으로 기도했다. 말괄량이 딸이 부디 그런 범법까지는 저지르지 않았길 바랐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밀레이아 알리아 자작 영애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이미 한껏 몸을 움츠린 채 겁에 질려 있었다. 알리아 자작은 더 물어볼 것도 없이 모든 사태를 파악했다.

그녀가 잔뜩 움츠러들어 있던 이유도. 지금 저렇게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이유도. 눈앞의 대공이 가져온 이야기가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리아 자작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다 못해 그걸 정통으로 맞은 기분이었다.

“……밀레이아.”

“네…….”

“내가 지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얘기가 정말이냐? 말해 보아라.”

알리아 자작의 무거운 목소리에 알리아 영애의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쥔 손을 가만히 보며 알리아 자작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 죄송해요…… 아버지……. 흐윽…….”

“하아…….”

알리아 자작의 입에서 결국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불안함은 확신이 되었고 거기에 더해 확인 사살까지 받았다. 그는 마른세수를 몇 차례 하며 손을 내저었다.

“제 자식의 죄는 제가 자수해서 달게 갚도록 하겠습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넌 나중에 얘기하자꾸나. 올라가라. 그리고 한동안 외출 금지다.”

알리아 자작이 냉정하게 말했다. 알리아 영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주먹을 꽉 쥐곤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런 집안에서 태어나는 게 아니었어.”

“뭐?!”

“아버지가 늘 그러니까…….”

억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알리아 영애가 이윽고 울음을 터뜨리며 터덜터덜 다시 응접실을 나섰다. 아델은 조금 놀랐다. 적어도 그녀가 뺨 한두 대 정도는 맞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사실 그 정도로 해결될 일이 아니긴 하지만.

응접실 문이 다시 닫혔다.

“……감옥에 가게 한다고요?”

“예. 죄를 지었으니 당연한 일이죠.”

아델의 물음에 알리아 자작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마약은 제국이 엄하게 금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껏 청렴결백하게 살아온 자였고, 그것은 제 딸이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좀 심한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귀족이 아닌가. 손을 쓴다고 한다면 얼마든지 입을 막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애초에 그가 저렇게 나온다면 헥시온은 제안을 해 보지도 못하고 마음을 접어야 했다. 아델이 애써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윽고 닫혔던 헥시온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헥시온이 말했다.

“그녀는 십중팔구 죽겠군요.”

팔짱을 낀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덤덤하게 말했다. 알리아 자작의 얼굴이 매섭게 굳었다. 부드럽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했다. 아무렇지 않게 마주하는 헥시온이 놀라울 정도였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대공께선. 전할 말이 그것뿐이셨다면 이만 돌아가십시오.”

“왜 내가 이렇게 말했는지 이유는 묻지 않으십니까?”

“알리아 자작가는 언제나 중심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니 허튼 수작 부리지 말라는 소리였다. 짧은 대화만으로 헥시온이 원하는 것을 눈치챈 알리안 자작을 보며 아델은 속으로 사뭇 놀랐다. 그러나 헥시온은 무심한 눈으로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황제가 알리아 자작가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던 알리아 자작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눈을 부릅뜬 알리아 자작이 헥시온을 노려봤다. 그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위험한 얘기를 하려고 온 것이라면 더더욱 돌아가십시오.”

“알리아 자작께서도 현 황제가 내키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황제는 당신을 생각 이상으로 거슬려 하고 있습니다.”

“밀라트리오 대공 각하.”

알리아 자작이 짐짓 엄하게 말했다. 헥시온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부터 쉬울 거라고 생각하고 온 것은 아니지만, 철벽이 대단했다.

“갑자기 알리아 영애가 왜 마약에 빠졌을까요? 귀족을 협박할 수 있는 위치의 마약범과 귀족의 만남이 우연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현 폐하께서 어떤 분이든 알리아 자작가는 황제 폐하를 모셔 왔습니다.”

“황제 폐하께선 황실의 적통 핏줄이고 신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알리아 자작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결코 누군가를 배신할 마음은 없었다. 더욱이 황제에게는 충성을 맹세했었다.

헥시온은 느릿하게 주변을 훑었다. 느껴지는 기척은 따로 없었다. 그는 허리를 굽혀 몸을 숙였다.

“그게 전부 거짓이라면 어떻습니까?”

“……뭐라고요?”

“황제는 사실 적통의 핏줄도 아니고, 신의 축복도 전부 꾸며진 것이라면 어떻겠냐는 말입니까. 거기에 알리아 자작의 여식을 이용해 알리아 자작가를 몰락시키려고 했다는 것이 포함되면…….”

헥시온이 말끝을 흐렸다.

알리아 자작이 눈을 크게 뜬 채 입술을 꽉 다물었다. 여태 큰 반응이 없던 알리아 자작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내 이야기를 좀 들어 줄 마음이 생깁니까?”

“지금 본인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알고 계십니까? 젊은 치기는 치기만으로 두십시오.”

“압니다. 아니까 말하는 겁니다.”

헥시온이 다시 허리를 펴며 말했다. 누구보다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만약, 헥시온이 알리아 영애를 구해 주지 않았다면…… 알리아 영애는 마약에 중독되고, 자작가의 재산을 빼돌리다가 결국 자작께서도 도와주실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헥시온의 옆에 가만히 앉아 있던 아델이 말했다. 그녀는 다가올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작가의 몰락을 코앞에서 보고 왔고, 알리아 자작도 이를 막지 못했을 것이다. 눈치챘을 땐 이미 너무 늦었을 테니까.

‘그리고 아마, 그 아이도…….’

여동생을 살리고자 했던 아이도 버려졌을 거다. 그리고 아델은 죽었다. 그 모든 것을 보고 왔기에 그녀는 확신하고 말할 수 있었다.

“알리아 영애는 마약으로 인해 피폐해졌을 거고, 결국엔 누구도 그녀를 돌아봐 줄 수 없었을 거예요. 사채는 거대하게 불어나 자각가를 덮쳤을 겁니다.”

“…….”

나직하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처연했고 동시에 담담했다. 마치 절절한 장면을 직접 보고 와서 덤덤하게 읊어 주는 것처럼.

헥시온과 알리아 자작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 싸해진 분위기를 눈치챈 듯 아델이 조금 멋쩍게 뒷덜미를 매만지며 말을 멈췄다.

“그, 괜한 참견이었나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가 곧바로 대답했다. 아델이 어색하게 웃으며 로브 아래로 볼을 긁적였다.

“나는 황제를 끌어내리려 하고 있습니다. 뒷받침할 증거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알리아 자각가의 명성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백성들에게 진실을 알려 주십시오.”

“무슨 진실을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황제가 적통이 아니라는 증거. 그리고 그가 결코 신에게 축복이나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닌 악마 같은 자라는 증거가 있습니다.”

알리아 자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헥시온이 말하는 것은 누가 봐도 반역이었다. 반역은 중죄였다. 잘못되면 단순히 개인만의 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직계 혈통은 물론이고 방계까지 전부 멸문당할 수 있었다.

“내 한쪽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소문은 알리아 자작께서도 충분히 들어 보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

알리아 자작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표정에서 충분히 그가 소문을 들어 봤음을 읽을 수 있었다. 헥시온은 짧게 한숨을 내쉬곤 장갑을 벗었다. 그러곤 그것을 앞으로 내밀었다.

“뭔지 압니까?”

“……칼럿이군요.”

“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깨까지 번져 있습니다. 누가 이 꼴로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굳은 표정의 알리아 자작이 헥시온을 올려다봤다.

“누가…… 만들었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그건 그저 병이 아닙니까.”

“그게 사실은 인위적인 것이었다고 한다면요?”

헥시온의 물음에 알리아 자작의 표정이 한층 더 딱딱해졌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의 진의를 파악한 탓이다. 알리아 자작은 한참을 헥시온의 팔에 시선을 고정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칼럿은 악마의 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엔 대공 각하께서 죄를 저지른 증거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만.”

“황제가 칼럿을 조종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알리아 자작은 아무 말 없이 헥시온을 바라보다 곧 양손으로 제 얼굴을 거칠게 문지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얘기가 오가고 있다.

“……그 증거가 대체 뭡니까?”

“보여드릴 수는 있지만, 확실히 의사를 밝혀 주셔야지요.”

헥시온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붉은 입꼬리가 그리는 호선에 알리아 자작이 숨을 멈췄다. 도대체 누가, 이 사내를 황제의 개라고 칭한 것일까. 시키는 것만 할 줄 아는 개가 대체 누구였단 말인가.

눈앞에 있는 것은 말 그대로 거대하고 사나운 짐승이었다. 조용히 똬리를 틀고 있다가 틈이 보이면 높이 도약해 그대로 먹잇감을 짓누를 짐승.

“난 위험한 일엔 끼고 싶지 않습니다.”

“끼지 않는다면 죽을 테지요. 황제는 더욱 활개를 칠 테고 저 악마 같은 이의 핏줄이 앞으로도 영원히 제국을 장악할 겁니다.”

“…….”

알리아 자작은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다. 헥시온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가 황제에 대한 불만이 상당히 쌓여 있다는 사실도.

“황제를 끌어내린다고 치면, 누가 황제가 됩니까? 대공께서라도 황위에 오르실 예정입니까?”

알리아 자작의 물음에 헥시온이 말없이 웃었다.

“……맙소사, 정말입니까? 이건, 진짜 반역입니다.”

한껏 목소리를 낮춘 알리아 자작이 확인 사살까지 받은 후에야 고개를 저었다. 고대부터 시작된 황제를 향한 민심은 커다랬다. 황제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비를 예측하기도 했고, 신전은 항상 황제에게 우호적인 신탁을 발표했다. 그는 고통에 몸서리치며 죽어가는 일을 살려낸 적도 있었다.

물론 그 이후, 그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는 하나 쌓아 온 아성을 무너뜨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대 영웅인 훅센라이트가 남긴 고대 유물을 발견했는데, 그곳에 수많은 증거들이 새겨져 있더군요. 역사에서 지워진 공백기에 대해서도.”

헥시온의 말에 알리아 자작이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그것을 지지해 줄 명망 높은 고고학자와 가문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지만.”

“알리아 자작. 당신은 오랜 시간 수많은 곳에서 쌓아 온 신뢰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황제는 단순히 칼럿으로 당신을 없애버리지 못한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저로는 부족할 겁니다.”

헥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다.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건국 검이라고 일컬어지는 셰인나이트의 행방을 알아내고, 칼럿병에 걸린 피해자들을 찾아내고, 어딘가에 잠들어 있는 바엘을 끄집어낼 수 있다면.

승산은 있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주십시오.”

“오래 드리진 못합니다. 그리고 알리아 영애에게도 앞으로 계속 의심받지 않도록 마약을 판매하던 자와 평소처럼 접촉을 하라고 전하십시오.”

“그건 어째서입니까?”

“자작이 내 손을 잡아 준다면 상세히 말해 드리겠습니다.”

헥시온이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일은 비밀에 부쳐 주십시오.”

헥시온의 말에 알리아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정한 듯했지만, 어딘가 무서웠다. 새까만 눈동자에 있는 어둠이 집어삼킬 것 같았다. 알리아 자작은 순간 겁을 집어먹은 스스로를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채찍도 중요하지만 적절한 당근과 칭찬을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과한 억압은 때론 소심하고 겁 많은 쥐조차 고양이를 물게 하니까요.”

헥시온이 덧붙인 말에 알리아 자작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

그의 배웅을 받으며 헥시온과 아델이 자작저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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