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요정의 영역 (2)
<뭐야, 벌써 가는 거야?>
헥시온과 아델의 대화를 들은 세이렌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불만스러워 보이는 표정을 보아하니 이 상황이 상당히 내키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아델은 정말로 피곤했고 당장이라도 누워서 쉬고 싶었다.
<좀 더 있다 가, 인간.>
나뭇잎처럼 생긴 요정이 포르르 날아와 아델의 어깨에 앉으며 말했다. 상냥한 목소리에 아델이 어색하게 웃었다.
<맞아, 맞아! 여기엔 달콤하고 과즙이 꽉 찬 과일도 많아.>
<피곤하다면 꽃으로 된 침대 위에서 자는 게 좋을 거야.>
<우리가 너를 위해 노래를 불러 줄게.>
요정들이 하나같이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다리 밑에 모여든 요정들이 옷자락을 붙잡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난 가야 해.”
아델이 고개를 저었다.
요정의 세계는 분명 아름답고 신비롭다. 눈을 감는다면 푹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 같지만 마음까지 편할지는 의문이었다.
<그럼 다음에도 올 거야?>
<훅센라이트처럼 종종 놀러 와도 좋아.>
<우리들의 시간은 기니까!>
<기다릴 수 있어!>
요정들의 말에 아델이 입을 닫았다. 눈앞의 작은 것들이 망울망울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외로워서 그렇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약속은 못 하지만, 노력은 해 볼게.”
그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약속을 할 뿐이다. 이곳에 다시 오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으니까.
“아델.”
“네?”
“그럴 땐 올 생각 없으니 못 온다고 확실히 말해 주면 좋습니다.”
헥시온의 단호한 말에 그녀가 놀란 듯 입을 벌렸다. 늘 생각하지만, 그는 직설적이다. 정말 주변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그러니 기다리지 마시지요. 들러붙지도 말고 말입니다.”
헥시온이 아델의 온몸에 들러붙은 요정을 하나하나 손수 떼어 던져 버렸다. 요정들은 시무룩한 눈으로 아델을 올려다봤다.
<안 올 거야?>
“아마도 안 올 겁니다.”
대답은 아델이 아니라 헥시온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아델의 손을 붙잡고 그녀를 살짝 끌어당겼다. 헥시온은 그대로 몸을 돌려 성큼성큼 요정의 영역을 벗어났다. 올망졸망한 눈으로 졸졸졸 쫓아오던 녀석들도 일정 영역부터는 걸음을 멈췄다. 그곳이 그들이 나오지 못하는 마지막 선인 듯했다.
세이렌은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 세게 말한 거 아니에요?”
“확실하게 말하지 않아서 괜한 기대감을 심어 주는 것보단 낫습니다.”
“……그래도.”
아델이 웅얼거렸다.
‘정말 혹시나 다음에 올지도 모르니, 그렇다고 말을 해 줘도 좋았을 것 같은데.’
아델이 그렇게 생각하며 헥시온을 힐끔거리자 그가 결국 그녀의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내가 너무 냉정한 것 같습니까?”
“……조금은요.”
머뭇거리던 아델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헥시온은 고민하듯 잠시 말이 없었다.
“괜한 기대는 상대를 실망하게 할 뿐입니다. 확실히 말해 주는 편이 냉정해 보일지라도 나은 선택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그런가요?”
“네. 예를 들어서 만약 당신이 어딘가에 갇혀서 나갈 수 없는 내게 언젠가는 올 거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곳이 철창 속이든 어두운 숲속이든 한없이 당신을 기다리겠죠.”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조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느릿하게 걸음을 걷는 와중에도 헥시온은 아델을 살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나는 실망할 겁니다. 그리고 슬프고…… 동시에 원망스럽겠지요.”
그의 말에 그제야 머릿속이 탁 트였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녀는 잡히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한 차례 쓸어내리다 고개를 들었다.
“……헥시온만의 배려군요.”
“기다리다 기다리다 오지 않으면 나는 분명 울 겁니다.”
“헥시온이 울어요? 음. 화나서 나무를 다 베어 버리면 모를까.”
아델의 말에 헥시온이 웃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은 것인지 조금 궁금해졌다.
“……정말요?”
“네.”
헥시온이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 웃어 주며 수풀을 빠져나가자 어느새 네 번째 비석이 있는 곳이었다.
<야, 암컷 수컷.>
뒤에서 들리는 원색적인 부름에 헥시온과 아델이 동시에 굳었다. 너무 원색적이라 들어도 들어도 얼굴이 붉어지기밖에 하지 않는다.
“뭡니까?”
헥시온의 목소리가 조금 삐딱해졌다.
<거짓말을 하지 않아서 고맙다고.>
두 사람의 표정이 의아함에 젖었다.
네 번째 비석에 비스듬하게 기댄 세이렌은 여전히 알몸이었고 여전히 오만하게 보였으나 기묘하게도 동시에 슬프게 느껴졌다.
“당신을 위한 게 아니었으니 걱정 마시죠. 괜히 아델에게 저주라도 걸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허, 우리가 무슨 주술사라도 되는 줄 알아? 그런 능력까진 없다고.>
세이렌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바엘의 독을 몰아내고 싶으면, 둘이 열심히 몸 섞어.>
“네에?”
아델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세이렌이 뭘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훅센라이트의 힘…….>
세이렌이 아델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그러니까, 비석의 가호는 바엘과 상극이야. 훅센라이트는 영웅이었고 그의 힘은 악을 몰아내지. 그러니 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저 남자는 나을 거야.>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확신에 찬 세이렌의 목소리에 아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세이렌이 비석에 기댄 채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훅센라이트의 암컷도 바엘의 독에 죽어가고 있었거든. 그 암컷은 너보다 정도가 심했어. 그러나 결국엔 완치됐지.>
아델과 헥시온의 눈이 크게 뜨였다. 놀란 듯 벌어진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세이렌이 어깨를 으쓱였다.
“완치되었다고요?”
<그래. 나았어. 훅센라이트와 꾸준히 몸을 섞었거든.>
밝은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아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낫는다는 것에 정신이 팔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듯했다.
<교미지.>
“으아…….”
세이렌의 말에 아델이 작게 신음을 흘리며 마주 잡고 있던 손을 풀고 제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귓불은 물론 목까지 새빨개진 아델을 내려다보고 있던 헥시온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귓불도 붉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주 쇼를 해라, 쇼를 해.>
세이렌이 헛웃음을 삼킨 채 중얼거렸다.
“이야기 끝났으면 가겠습니다.”
헥시온이 오른팔로 아델의 허리를 감싸며 말했다. 세이렌이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훅센라이트는, 우리에겐 잊을 수 없는 인간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잔인한 인간이었지. 그는 우리에게 해서는 안 될 약속을 했어.>
아델과 헥시온이 고개를 돌려 세이렌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거짓말을 해 주지 않은 건 고마워. 훅센, 그 망할 새끼보단 너희가 좀 더 낫다는 얘기야.>
“그것참 영광입니다.”
무감정하게 책을 읽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한 헥시온은 그대로 아델의 허리를 감싼 채 네 번째 비석이 있는 숲을 빠져나갔다. 물론 그 전에 그들은 헥시온이 구해 온 붉은 열매를 씹어먹기도 했다.
독 안개 숲을 빠져나가서 조금 더 걸어나가니 묶어 뒀던 말이 보였다. 헥시온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한쪽 팔로 들어 말 위에 올려 줬다. 그는 오랜 시간 한쪽 팔로만 생활을 해서 그런지, 오른팔의 근력이 상당했다. 한쪽 팔로 갑옷을 입은 성인 남자도 가볍게 들어 올리는 것을 보면 아델은 그의 한계가 궁금해질 정도였다.
“드디어 빠져나가는군요.”
헥시온이 조금 질렸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델은 이제는 조금 편해진 그의 가슴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합니까?”
“조금요.”
“저택으로 돌아가서 식사도 하고 하룻밤 푹 자고 피곤이 좀 가시면, 함께 어떻습니까?”
헥시온이 허리를 굽혀 그녀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아델이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돌려 뻐근하게 그를 올려다봤다.
“어떻다뇨?”
“요정이 말해 본 걸 해 볼 생각은 없습니까?”
“요정이 말해…… 윽.”
아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가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본 헥시온이 낮게 웃었다.
“……요.”
“네?”
“그런 건 미리 말하지 말고 그냥 그때 분위기를 봐서 하세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아델의 말에 헥시온이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꼬물거리는 품 안의 온기가 무척 귀여웠다.
“네, 내가 눈치가 없었습니다. 그럼 오늘 밤이라도 분위기를 봐서 하겠습니다.”
“…….”
뒷덜미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아델을 보며 헥시온이 말의 배를 한 번 더 찼다. 그의 조급함을 대변하듯, 말의 속도가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