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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네 번째 비석 (11/25)

Chapter 7. 네 번째 비석

“야, 여기.”

또 대공저까지 찾아온 반갑지 않은 인간의 얼굴을 본 아델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아침에 당황하고 놀랐던 기분을 따뜻한 물에 목욕하며 달랬다. 아래쪽은 아직도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크게 신경 쓰일 정도가 아니게 되었다. 애써 다시 안정을 찾은 마음으로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오던 차였는데.

‘……하필이면 저놈이야.’

생각하던 아델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대놓고 그렇게 싫다는 얼굴을 해야겠냐?”

“전적으로 전부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

“오라버니한테 말하는 거 봐라.”

“싫으면 내 눈앞에 나타나질 말든가.”

팔짱을 끼며 퉁명스럽게 말하는 콰른 비프타의 말을 아델이 차갑게 대꾸하며 곧장 식사하러 걸음을 옮겼다. 헥시온은 이럴 때 안 나타나고 어디에 있는 건지.

‘그래도 예전처럼 심장이 빨리 뛰진 않네.’

두려움과 공포에 질린 과거가 아예 생각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점점 잊히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아델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의 저택 자꾸 불쑥불쑥 찾아오지 마.”

“남? 너랑 내가 남이냐?”

“당연히 남이지. 그리고 이 저택은 헥시온의 거니까 당연히 네가 찾아오면 안 되는 곳이고.”

아델의 말에 콰른 비프타의 얼굴이 확 일그러지며 험악해졌다. 콰른 비프타가 퍽 불만인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짧게 한숨을 삼켰다.

“언제부터 헥시온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됐냐?”

“언제부터든.”

“까칠하게 좀 굴지 마라. 쯧. 오늘은 너 때문에 온 거라고.”

콰른 비프타가 퍽 짜증스럽게 말했다. 웬일로 짜증을 안 내나 싶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최근 그가 화를 냈던 건 아델 쪽이 아니라 헥시온의 쪽이긴 했다.

‘헥시온이 없어서 그런가.’

어느 쪽이든 콰른 비프타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나 때문이라니?”

“네 책이랑 편지 쌓인 거 가지고 왔어. 네 성격엔 죽어도 저택으로 안 오려고 할 것 같고.”

“가려고 했어.”

“그러면 네 곁을 지키는 멍청한 검은 개새끼한테 막혔나 보지.”

콰른 비프타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말투는 전혀 곱지 않지만, 맥락만큼은 확실히 짚어 냈다. 아델은 짐짓 놀랐지만 애써 티 내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옛날부터 통찰력 하나는 뛰어났으니까.’

말투는 전혀 곱지 않지만.

“네가 뭐 하러? 어련히 가지러 갈 텐데.”

아델의 물음에 무슨 말이든 쏘아붙일 줄 알았던 콰른 비프타가 팔짱을 낀 채 말없이 그녀를 쳐다봤다. 아델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던 그가 무심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네 면상 보려고.”

콰른 비프타의 말에 아델이 대놓고 짜증스러운 표정을 했다.

‘단어 선택하고는.’

그녀가 속으로 생각하며 짧은 한숨을 삼켰다. 어쨌든 짜증스러운 일이긴 하다. 아델이 고개를 돌렸다. 물건을 가져다줬다면 두 번 일하지 않게 됐으니 고마운 일이긴 하다. 그 고마운 일을 해 준 것이 콰른 비프타만 아니었다면, 아델은 최선을 다해 감사를 전했을 거다.

“어딨는데?”

“마차에.”

“아, 그래.”

고맙다는 한마디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 어깨를 으쓱였다. 콰른 비프타에게 감사는 사치지. 아델이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볼 일 다 봤으면 돌아가.”

백날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해도 들어먹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아델은 콰른 비프타에 관한 모든 것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차라리 없는 취급이라도 하면 마음이 훨씬 편해지리라.

“아, 배고프다.”

“…….”

아델의 눈이 일그러졌다. 어쩐지 불안한 느낌이 등줄기를 스쳤다.

“배고프면 네 집으로 돌아가서 먹…….”

달칵. 멀리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콰른 비프타의 귀가 먼저 쫑긋거리고 말을 멈춘 아델이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돌렸다.

“아델, 거기서 뭘…….”

다가오던 헥시온이 콰른 비프타를 발견한 듯 험악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아델의 앞에 섰다. 헥시온과 콰른 비프타가 말없이 서로를 노려봤다.

“경비병들이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헥시온의 물음에 콰른 비프타의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숨겨진 꿍꿍이라도 있는 듯한 표정에 헥시온이 미간을 좁혔다.

“주인과 비교하면 경비병들 실력이 형편없던데.”

이죽거리는 콰른 비프타의 말에 헥시온의 미간이 크게 요동쳤다. 그가 오른손에 끼워진 장갑을 자연스럽게 입술로 물어 빼냈다.

콰른 비프타가 퍽 호기에 찬 눈으로 헥시온을 올려다봤다. 금세 스스로를 진정시킨 헥시온이 그 시선을 무심하게 마주했다. 그가 이내 몸을 돌려 아델과 시선을 마주했다.

“아델.”

“네?”

헥시온이 다정하게 허리를 굽혀 그녀의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아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몸도 좋지 않으실 테니 식당에 먼저 가 계십시오. 그와는 대화를 좀 나눠야 해서 늦을 것 같습니다.”

콰른 비프타와 헥시온의 분위기가 무척 살벌했다. 눈치 빠른 아델이 그걸 모르진 않았다. 그리고 헥시온 역시 저 살기등등한 콰른 비프타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도 없다. 그럼에도 헥시온의 표정은 조금 밝았다.

‘그 이유를 모를 것 같지 않은 게 문제지.’

천천히 등을 쓸어내리는 손바닥이라든가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이 평소보다 한층 더 다정한 목소리나 눈빛이라든가.

“얼른요.”

헥시온이 재촉하듯 다시금 말했다. 그의 권유에 아델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콰른 비프타를 한 번 쳐다봤다.

콰른 비프타가 성의 없이 턱을 까딱였다. 허락을 받을 생각이라곤 조금도 없었는데 마치 허락해 줄 테니 저리 가라는 제스처다.

“알겠어요.”

“식사는 먼저 하고 계셔도 됩니다.”

“그럴게요.”

“네.”

헥시온이 입술을 빙긋 말아 올리며 다정하게 그녀를 배웅했다. 그녀의 손등에 입맞춤까지 한다. 콰른 비프타가 그런 헥시온을 못마땅하게 노려보았다.

아델이 그런 콰른 비프타와 헥시온을 번갈아 한 번 쳐다보더니 이내 머뭇머뭇 몸을 돌렸다. 콰른 비프타와 더 얽히는 것보단 헥시온의 말을 따르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 탓이다.

조금 머뭇거리던 그녀가 이내 발걸음을 곧게 하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아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조차 다정했던 헥시온이 그제야 부드럽게 휘어지느라 가늘어졌던 눈을 떴다. 아델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헥시온이 불쾌한 것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봄에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 같던 미소가 서서히 자취를 감추더니, 콰른 비프타에게 시선이 닿자 완전히 서릿발이 휘날리는 듯한 냉랭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뭐가 그렇게 불만입니까?”

“네놈 새끼 자체가 불만인데.”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녀가 저 정도로 치를 떤다는 건 콰른 비프타. 당신이 괴롭혔다는 증거 아닙니까?”

헥시온이 정말 의아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기울어진 고개에서 느껴지는 의문에 콰른 비프타가 짝다리를 짚고 팔짱을 끼고 불량한 태도로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도대체 남의 저택까지 쫓아와서 이러는 이유를 아무리 고민해도 모르겠군요.”

“고민할 필요 없어. 네놈 새끼가 더럽게 마음에 안 들 뿐이니까.”

“그리고 매번 바닥을 구를 것이 분명한 격차에도 덤비는 이유를 모르겠고.”

헥시온이 깔보는 시선으로 눈을 내리깔자 콰른 비프타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호승심으로 가득한 콰른 비프타를 내려다보며 헥시온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서는 참 골치가 아픈 상대였다. 어쨌든 공작의 핏줄이니 죽일 수도 없고 너무 대놓고 찾아와서 또 죽일 수도 없었다. 차라리 몰래 찾아오기라도 했다면 죽여 놓고 어디 인적 드문 숲에 짐승의 먹이로라도 던져 줄 것을.

헥시온이 무심한 눈으로 살벌한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살짝 몸을 비트는 것으로 콰른 비프타의 검을 피했다.

“젠장!”

욕설과 함께 콰른 비프타의 검이 살기로 점철되어 내리쳐졌다.

헥시온에게는 무척이나 지루한 동작이었다. 흥분한 탓인지 그도 아니면 정말로 죽일 기세가 없는 탓인지, 호흡이 흐트러진 콰른 비프타는 헥시온에게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대체 왜 집착합니까?”

“누가 집착을 해!”

“네가 그녀에게 하는 꼴이 그렇지 않습니까.”

“애초에 저건 내 거였어! 내가 먼저 발견해 놓은 걸 네놈이 중간에서 훔쳐간 거라고. 이 망할 도둑 새끼가!”

콰른 비프타가 매섭게 눈을 뜬 채 소리쳤다. 소리를 낮출 생각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였다. 시끄러운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헥시온에게 그것은 소음이었다.

큭.

헥시온의 입술 사이로 억누른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가 퍽 웃긴 소리를 들었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콰른 비프타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백 보 양보해서 그렇다고 치지.”

헥시온은 웃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무척 사나웠다. 호기롭던 콰른 비프타가 목소리만으로 잠시 몸을 굳혔을 정도다. 내리깔고 있던 긴 속눈썹이 올라가고 새까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럼 소중하게 제대로 품에 안고 있어야지.”

“뭐?”

“아니면, 족쇄를 달아서라도 도망갈 수 없게 묶어 두든가.”

“미친…… 이 개 같은 또라이 새끼가……!”

“귀한 새를 붙잡아 새장에 가뒀으면, 그걸 새장인 줄 모르게 했어야지. 눈치를 챘으니, 도망을 가지 않습니까.”

헥시온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콰른 비프타의 눈에 불이 붙었다. 분노가 뚝뚝 떨어지는 그의 금안을 무심하게 마주 보며 헥시온이 낮게 웃었다.

“내가 썅, 너 미친 새끼인 줄 진즉 알아봤는데……!”

콰른 비프타가 검을 위험하게 휘둘렀다. 헥시온이 아주 최소한의 동작만으로 콰른 비프타의 검을 피했다.

“미친놈이 미친놈을 알아보는 논리라면 납득이 가긴 하는군요.”

“내가 뒤진다고 해도 네 새끼 죽이고 간다.”

콰른 비프타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헥시온은 여전히 가소롭지도 않다는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몸을 피했다.

“그럴 수 없을 겁니다. 내 머리카락도 베지 못할 실력으로는.”

“너 같은 새끼한테 미쳤다고 저걸 넘기냐?!”

“아. 그 점에 관해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나는 그녀가 죽으라고 한다면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기꺼이 죽어 줄 테니까요.”

헥시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델이 기다릴 걸 생각하면 이걸 떨쳐내고 가야 하는데, 제대로 붙었다간 난투가 될 거다. 콰른 비프타가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건 헥시온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이점인 마법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건 어느 정도 제 위치를 자각하고는 있다는 거겠지.

‘마법까지 썼으면 상대하기 골치아팠겠지만.’

단순히 검술만을 놓고 본다면 아쉽게도 콰른 비프타는 헥시온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순순히 기절해 주진 않을 것 같고.’

생각하는 헥시온의 눈이 귀찮음에 물들었다.

콰른 비프타의 검이 아래에서부터 대각선으로 공기를 가르며 올라왔다.

달칵.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검을 피하기 위해 몸을 비틀었던 헥시온이 눈을 크게 떴다.

콰른 비프타와 헥시온의 시선이 찰나의 시간 동안 마주쳤다. 헥시온이 비틀었던 몸을 반만큼만 원래대로 돌렸다. 콰른 비프타의 검의 사정거리에 드나 가벼운 검상으로 끝날 정도의 거리였다. 아델이 식당의 열린 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헥시온, 그만 상대하…….”

콰른 비프타가 뒤늦게 검을 멈추려고 했지만, 검 끝이 헥시온에게 닿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콰른 비프타의 검 끝이 헥시온의 볼을 스치고 귀 끝을 베고 높이 치솟았다.

“콰른 비프타!”

뒤늦게 콰른 비프타가 몸을 물렸지만, 스친 헥시온의 볼에 붉은 실선이 생기더니 이내 피가 흘러내렸다. 헥시온이 콰른 비프타를 보며 옅게 웃더니 이내 표정을 굳히며 제 볼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저 새끼, 피할 수 있었으면서……!’

피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피했었다. 그걸 다시 검 끝이 닿는 아슬아슬한 범위에 몸을 들이민 것이었다. 콰른 비프타의 속에 천불이 일었다.

‘저 멍청한 건 속도 모르고, 썅!’

지금 화를 내 봐야 역효과라는 걸 콰른 비프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놀란 듯한, 두 눈에 쌍심지를 켠 모습만 봐도 그랬다. 콰른 비프타가 검을 내렸다.

뚝뚝뚝.

바닥으로 떨어지는 피를 헥시온은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델이 곁에 올 때까지 그는 그저 놀란 듯한 가식적인 눈으로 콰른 비프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헥시온.”

“……네. 좀 놀랐을 뿐입니다.”

헥시온이 멍하니 시선을 돌려 아델을 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갑작스러운 공격에 피해를 입은 피해자의 모습이었다.

콰른 비프타가 손을 뻗어 헥시온의 곁에 있는 아델의 손목을 잡아채 끌어당겼다.

“야. 너 내가 집 사 줄 테니까 당장 나와. 저 새낀 위험하다고! 나만큼 미친 새끼야.”

“……남의 저택 와서 칼부림하는 미친놈의 칼을 맞고도 화를 안 내는 것만으로도 너보단 낫다고 생각하는데.”

“야! 저게 아까 무슨 말을 한 줄 알아?! 아오! 썅, 거미줄에 걸린 것도 모르고 병신같이 구네. 지랄 말고 당장 나와. 끌고 가기 전에.”

아델의 눈이 탁해지더니 이내 무겁게 가라앉았다. 떨어질 정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저놈을 향한 감정은 이제 땅속으로 파고든다.

“너 속고 있다고!”

“야. 콰른 비프타.”

“아, 왜!”

아델이 고개를 돌려 콰른 비프타와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널 봐 주길 바라?”

“뭐?”

“내가 널 무시하지 않고 제대로 봐 주길 바라냐고. 생각해 보면 네가 날 괴롭히기 시작한 건 내가 네 괴롭힘에 반응하지 않으려고 웃거나 보고도 못 본 척했을 때지.”

아델의 묵묵한 말에 콰른 비프타가 눈을 홉떴다. 짜증과 흥분으로 점철되어 있던 콰른 비프타의 눈이 아델을 향했다. 색소가 짙은 콰른 비프타의 금안과 그보다 색소 옅은 아델의 금안이 허공에서 얽혔다.

“내가 널 제대로 보길 바라면 네가 제대로 행동해. 어린 애같이 굴지 마. 잘못을 했으면 변명이 아니라 사과를 해. 날 설득시키려면 제대로 이해되게 말을 해.”

아델이 손수건을 꺼내 헥시온의 피가 흘러내리는 볼을 꾹 눌러 주며 말했다. 콰른 비프타와 대화하는 아델을 내려다본 헥시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델이 피를 멎게 하려고 한 차례 더 힘을 주는 데 헥시온의 눈이 확 찡그려졌다.

“아픕니다…….”

그가 목소리를 확 내리깔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 죄송해요.”

아델이 손에 들어간 힘을 조금 풀었다.

아델의 어깨 너머로 헥시온이 콰른 비프타와 눈을 마주쳤다. 콰른 비프타가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헥시온을 올려다봤다.

“그러기 전까지 난 앞으로도 계속 널 공기보다도 더 투명하게 인식할 테니까.”

아델의 말에 콰른 비프타가 눈을 가늘게 떴다. 헥시온을 살피는 눈길이 어딘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 보였다. 적어도 헥시온의 눈에는.

그가 이내 이를 드러내며 씩 웃더니 웃음기를 지우곤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마치 아까 헥시온이 했던 것처럼.

“……내가 그렇게만 하면 제대로 봐 줄 거야?”

꽥꽥 소리나 지를 줄 알았던 콰른 비프타가 의외로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놨다. 그 차분한 대답에 놀란 아델이 눈을 크게 뜨며 헥시온에게서 손을 떼고 몸을 돌렸다.

떨어진 온기에 헥시온이 보이지 않게 아랫입술을 한 차례 핥곤 잘근 깨물었다. 목까지 차오른 갈증과 눈앞의 방해꾼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뭣보다 그로 인해 제게서 관심이 멀어진 아델이 싫었다.

“……네가 한 짓이 있어서 좋아한다고는 말 못 해. 싫어하지 않고 반응해 준다고도 약속 못 하고.”

뭣보다 아델은 비프타 가문을 망하게 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콰른 비프타는 저렇게 망나니처럼 굴어도 제 가문을 소중히 여긴다. 물론, 비프타 가문이 망해도 가장 질기게 살아남을 사람 역시 콰른 비프타라고 아델은 생각하지만.

아델의 딱딱한 말에 콰른 비프타가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가증스러울 정도의 행동에 헥시온의 얼굴이 대놓고 구겨졌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무시하진 않는다고 약속할 테니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것도 헥시온한테 시비 걸어서 다치게 하는 것도 그만해.”

아델이 단호하게 말했다. 자기 원할 때 언제나 멋대로 찾아오는 콰른 비프타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게다가 만나면 헥시온과는 으르렁거리지,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또 그를 다치게 했다.

아델의 말에 콰른 비프타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한동안 말이 없기에 아델이 다시 몸을 돌려 헥시온의 귓불에 난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얼른 의원이라도 불러요.”

“이 정도는 괜…….”

“방문할 때 하루 전이라도 너한테 연락하면 돼? 그러면 만나줄 거야? 너는 맨날 해 봐야 거절할 것 같았으니까.”

콰른 비프타가 팔짱을 낀 채 당당하게 말했다. 마치 연락하지 않은 것이 제 탓이라는 듯한 말투가 신경 쓰였지만, 콰른 비프타의 일이다. 뭐 하루 이틀 저런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이해할 범위였다.

“정식으로 절차를 걸치고 내가 시간이 된다면.”

아델이 말했다. 콰른 비프타의 주황빛의 속눈썹이 느릿하게 내리깔렸다. 타오르는 불꽃같은 그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좋아. 그럴게.”

콰른 비프타가 의외로 순순하게 물러났다.

“오늘은 돌아가. 그리고 헥시온에게 사과해.”

“……사과?!”

콰른 비프타가 눈을 확 치켜떴다가 아델의 시선을 마주하더니 이내 이를 으득, 갈며 눈에 힘을 풀었다.

‘저 새끼가 가증스럽게 나온다 이거지.’

그렇다면 자신 역시 가증스럽게 대하면 될 일이다.

저것도 인내심이 대단치는 않을 거다. 콰른 비프타는 힘으로 그를 상대하는 것보단 아델에게 저 새끼의 진면모를 보게 하는 쪽으로 전술을 바꿨다.

다행히 콰른 비프타는 집요했고 한번 제게 오물을 뿌린 상대는 오물통에 빠뜨려야 화가 풀리는 성격이었다.

“싫으면 돌아가고 다신 오지 마.”

“……아냐. 내가 잘못…….”

까득, 악문 잇새 사이로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했지. 네 말이 맞아.”

콰른 비프타가 빙긋 웃으며 검을 허리춤에 집어넣고 헥시온의 앞으로 다가갔다.

헥시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콰른 비프타의 행동이 손바닥 뒤집듯 바뀐 이유를 어렵지 않게 눈치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온다는 거군.’

가늘게 눈을 뜬 헥시온이 저보다 작은 콰른 비프타를 내려다 봤다. 시선은 흉흉하지만, 입꼬리만큼은 억지로 끌어올린 모양새가 무척 우스웠다.

“미안, 합니다. 대공.”

“대공 전하.”

아델이 옆에서 정정했다.

“대공…… 전하.”

콰른 비프타가 억지로 억지로 입술을 달싹였다.

헥시온이 여전히 아델의 손수건으로 제 볼을 누르며 그를 내려다 봤다.

용서라니. 이렇게 가증스러울 데가. 마음 같아선 그의 성질을 박박 긁어 다시 검을 뽑게 하고 싶지만, 아델이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괜히 들켜서 좋은 것은 없을 거다.

‘사람 하나 때문에 이런 짓을 할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대공인 헥시온 밀라트리오와 암살자인 헥시온 밀라트리오는 성격부터가 달랐다. 대공으로서의 삶은 최대한 평범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확실하게 그어 뒀던 경계가 이런 식으로 풀릴 줄은 예상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했다.

헥시온이 속으로 혀를 찼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실례되는 일이라는 걸 알았으면 앞으로 평생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주의하지……요.”

이를 악문 콰른 비프타가 대답했다.

아델이 그래도 원만하게 끝나는 사태에 대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헥시온도 종종 욱하는 성격이 있는 건 알았지만…….’

콰른 비프타의 성질을 긁는 것도 문제는 있다. 물론, 그의 적개심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그렇게 공격당했고 만날 때마다 콰른 비프타가 적개심을 숨기지 않으며 시비를 걸고 덤벼들었으니.

“그럼 우린 식사하러 가요.”

“그러죠.”

헥시온이 별로 간지럽지도 않은 볼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쓸며 콰른 비프타를 흘겨봤다. 흉흉한 시선이었지만, 마찬가지로 헥시온에겐 간지럽지도 않았다. 그가 자연스럽게 아델의 허리를 팔로 감으며 그녀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섰다.

“젠장!”

콰른 비프타가 뒤늦게 발을 구르며 욕설을 뱉었다. 그가 손으로 거칠게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몸을 돌렸다. 소란스러웠던 저택엔 적막만이 흘렀다.

* * *

“현관이 소란스러운데도 아무도 나오질 않네요.”

“저택을 관리하는 인원이 최소 인원보다도 훨씬 더 적어서 이 시간엔 모두 저택 밖이나 다른 곳에 있습니다. 경비병이 유일한 현관 지킴이죠.”

헥시온이 안으로 들어갔다. 식사는 차려져 있었다.

헥시온이 근처에 누군가 있는 걸 싫어한 탓인지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식사 시중을 들 사람도 없는 건가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뭣보다 인원수도 부족한데 굳이 여기에 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요. 혹 필요하시다면 바로 구해 보겠습니다.”

헥시온이 한 손으로 의자를 빼 주며 말했다. 아델이 그가 빼 준 의자에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도 도움 없이 혼자 먹는 게 더 편해요.”

줄곧 그렇게 먹어 오기도 했다. 이제 와서 바꿔 봐야 불편하기밖에 하지 않을 거다. 아델의 말에 헥시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까는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지금은…….”

아델이 뒷말을 삼켰다. 지금 그의 심기는 조금 불편해 보였다. 아까 막 나왔을 때는 퍽 기분이 좋아 보였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는 간단하겠지.

“콰른 비프타 때문이죠? 죄송해요.”

아델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정말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아델은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낯이 뜨거워졌다. 오늘은 무슨 바람인지 순순히 물러났지만, 콰른 비프타의 변덕은 여름날 섬 날씨보다도 더 심하다는 걸 아델은 알고 있었다.

‘어차피 오늘 하루의 말이겠지.’

내일이 되면 또 어떻게 달라질지 몰랐다. 그렇게 되면 대체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아델로선 속이 턱 막힌 듯 막막했다.

“아델.”

“네.”

“나는 아델이 콰른 비프타, 아니. 비프타 가문에 대한 것으로 책임감을 느끼고 사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헥시온이 짐짓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매번 제 잘못도 아닌 것에 사과하는 아델을 보는 것이 헥시온으로선 무척이나 내키지 않았다. 저번에도 말을 했지만, 쉽게 고쳐지질 않았다.

“날 걱정해 줘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건 아델이 잘못한 게 아닙니다. 아델은 콰른 비프타의 여동생입니까?”

“……아뇨.”

콰른 비프타의 동생이었던 적은 없다. 그의 괴롭힘 상대였거나 놀이 상대였거나 아니면 그에 준하는 무언가였던 적은 수없이 많았어도.

“네. 콰른 비프타의 여동생은 카레나 비프타입니다. 나는 아델에 대해 전부 알고 있으니 대신 미안해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헥시온의 단단했던 입매가 슬쩍 풀어졌다.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는 헥시온을 보며 아델이 입을 다물었다.

“콰른 비프타가 저러는 이유가 저 때문이잖아요.”

“아델은 암살자가 당신을 노리는 걸 내가 막다가 다쳤어도 암살자 대신 내게 사과할 건가요?”

헥시온의 물음에 아델이 고개를 저었다. 암살자 대신 사과는 하지 않겠지만…….

“나 때문에 다쳤으니 미안하다고 할 거예요.”

“이런 건 스친 상처도 아닙니다.”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아프긴 하지만요.”

덧붙이는 말 사이로 사심이 엿보였다. 아델이 눈을 가늘게 뜨자 헥시온이 헛기침을 하며 슬쩍 고개를 돌린다. 어젯밤을 생각하면 사실 오늘 아침 무슨 일이 있었어도 그는 기분이 좋을 수 있었다.

“혹시 아픈 곳은 없습니까?”

헥시온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 시선이 의미하는 것을 아델은 어렵지 않게 알았다. 그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없어요.”

아델이 강경하게 고개를 저었다.

있어도 절대 말해 주지 않겠다는 행동이었으나 헥시온은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당신에게 알려 주고 싶은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헥시온이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서 헥시온을 바라봤다. 궁금함이 담긴 시선에 헥시온이 천천히 제 왼팔을 들어 올렸다. 늘 아래로 늘어져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도 않던 팔이 위로 올라갔다.

호기심이 담겨 있던 아델의 눈에 경악이 담겼다. 팔꿈치로 팔을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깨는 돌아가고 있었다.

“팔이…… 움직이네요?”

아델이 놀람을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헥시온이 퍽 벅찬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은 어깨까지 굳어 있던 헥시온의 팔을 기억했다.

‘어제도 한 손으로 다했지…….’

한 손으로도 몸을 잘 지탱했고 한 손으로도 제 옷을 잘 벗겨 줬다. 정말, 어젯밤에 한해서 헥시온은 몸을 섞는 것에 대해 문제라곤 조금도 없었다.

아델이 도와준 것이라곤 그의 옷을 벗겨 주는 정도였다. 퍽 다급하게 단추를 풀어 내리느라 계속 손이 헛나가는 것이 조금 웃겼기 때문이었지만.

생각하던 아델의 볼이 살짝 열기를 머금었다. 그의 애절함과 분위기에 휩쓸려 손을 뻗고 말았다. 조금 후회는 했지만, 원망스러울 정도는 당연히 아니다.

“네. 당신 덕분인 것 같습니다.”

“제 덕분이라뇨?”

아델이 퍽 묘한 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의아한 표정을 하던 아델의 얼굴이 조금씩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설마.”

“네. 당신이 만든 물건을 지니면 통증이 완화됐고, 손을 잡고 있으면 아픈 게 없어졌고 곁에 있어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델이 양손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헥시온이 뒷말을 따로 내뱉진 않았지만, 충분히 이해하고도 넘쳤다. 아델이 한숨을 삼키며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무언가 달라졌다면, 그 달라진 계기가 되는 걸 찾아야 했다. 그러려면 평소와 달랐던 것을 찾아야 하는데, 어젯밤 두 사람이 평소와 달랐던 것이라고 한다면 딱 하나뿐이다.

‘……관계.’

관계를 맺은 게 아무래도 그를 효과적으로 치료한 게 아닐까 싶다.

아델이 아주 짧게 한숨을 삼켰다. 나았다니 다행이지만, 그게 어젯밤의 관계로 인해서라니.

“칼럿병이 사라졌나요?”

“어깨 부위가 원래대로 돌아왔습니다.”

“……도대체 나는 무슨 이상한 힘을 가진 걸까요?”

아델이 양손으로 얼굴을 두어 번 쓸어내리며 물었다. 손을 모은 그녀가 짧은 한숨을 뱉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기묘한 일들은 죽기 전 겪었던 미래에는 분명히 없던 것이었다.

지금은 알고 있던 미래가 많이 뒤틀렸다. 요정을 만난 일도, 마법사의 마력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그것을 잘라 낼 수 있는 능력도, 도대체 언제부터 생겼는지 알 수 없는 치유 능력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꺼림칙합니까?”

“저 스스로가 전혀 모르는 능력을 가지게 됐으니까요. 이건 원래 없었어야 했던 힘이었어요.”

“내가 만약 이 상황이 기쁘다고 하면 경멸할 겁니까?”

헥시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델의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조심스럽게 깍지를 껴 오는 헥시온의 손에선 예전과 다르게 온기가 느껴졌다.

“아뇨.”

아델이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아델로선 싫어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다만, 그 힘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알 수가 없어서 꺼림칙할 뿐이지.

“내가 입을 맞추는 건 싫습니까?”

헥시온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아델의 코앞까지 다가와 묻는다. 조심스러운 물음이지만, 눈에는 이름 모를 욕망이 번들거렸다.

아델이 다가오는 입술을 보며 느릿하게 입을 벌렸다.

“말했잖아요. 우리의 계약이 끝나는 날까진, 어떤 욕심이든 받아 주겠다고.”

입술을 달싹이며 아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헥시온의 입가에 쓴 웃음이 맺혔지만, 그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걸 거부하지 않았다.

조금은 섧고 조금은 애달픈, 끝이 정해진 짧은 입맞춤이었다. 눈을 감은 아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입맞춤은 길지 않았다. 무척 짧았으나 무척 애절했다.

“……만약, 우리가 조금 다르게 만났다면 뭔가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헥시온이 입술을 떼며 아델의 코앞에서 물었다. 섞이는 숨결이 뜨겁고 애처롭다.

‘만약…….’

아델은 그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만약’이라는 것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일어날 리도 없는 일이다. 시간이 되돌아가지 않는 한 없을 일이었다. 아무리 만약을 빌어도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아델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만약을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아델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이라는 건 없어요. 헥시온.”

결코, 없을 일이다.

고개를 들자 헥시온은 조금 실망한 얼굴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마 누구도 느끼지 못할 옅은 실망감이 아델에게는 느껴졌다.

“그렇군요.”

허리를 굽혀 바싹 얼굴을 가져다 댔던 헥시온이 천천히 멀어졌다. 아델이 그런 헥시온을 올려다보다가 꾹 닫아 놨던 입술을 작게 벌렸다.

“하지만, 만약이 있다면…….”

아델의 말에 자리로 돌아가려 몸을 돌렸던 헥시온이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그가 다시 몸을 원래대로 돌려 아델을 내려다봤다.

“우리는 만나지도 못했을 거예요.”

아델이 손을 뻗어 그의 왼팔을 붙잡았다. 헥시온이 움찔 몸을 떨었다.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지만, 그녀의 손에서부터 온기가 전해지는 것도 같았다.

“당연히 헥시온의 아픔도 몰랐을 테죠. 혹은 당신이 아프지 않았을 ‘만약’도 있어요. 우리가 지금 이곳에 있는 건 언젠가의 수많은 만약 중의 하나일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일 뿐이다.

그러니까 아델은 ‘만약’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싫었다.

아델은 헥시온과 마주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죽지 않았다면 미래의 제 남편이 되었을, 이름도 몰랐던 사내의 진심과 그의 면모를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위로를 받았다. 그의 상처를 보았다. 그의 아픔을 알았다. 새로운 것을 보았고 새로운 미래를 붙잡을 기회를 받았다. 그가, 자신을 간절히 원했다. 누구도 원하지 않던 ‘아델’이라는 이름의 자신을 제대로 봐주고 원한다며 애달프게 무릎을 꿇었다.

그러니까 아델은 수많은 이 미래가 최악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헥시온을 마주 본 채 아델이 입을 열었다.

“수많은 만약 중에는 분명히 내가 헥시온을 만날 수 없었을 만약이라는 것도 있을 거예요. 난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아델이 고개를 들었다.

“헥시온은 아닌가요?”

“……나 역시 당신을 만나서 구원받았습니다.”

헥시온이 한 걸음 만에 다가와 아델의 손을 깍지 껴 붙잡았다. 그러나 끝이 보인다는 것이 싫을 뿐이다. 헥시온은 차마 목까지 차오른 그 말을 내뱉지 못하고 아델을 보며 옅게 웃어 보였다.

“식사가 다 식겠습니다.”

“이미 반쯤 다 식긴 했어요.”

“……당장 다시 데워 오라고 하겠습니다.”

헥시온이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뭇 진지하기까지 한 그 말투에 아델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뜨거운 걸 잘 못 먹으니까 내겐 이 정도가 딱 좋아요.”

미지근하긴 하지만, 아델에겐 적당했다. 헥시온이 고개를 끄덕이곤 제자리로 돌아갔다. 제자리라고 해 봐야 물론 맞은편 테이블에 앉은 것뿐이지만.

“뭔가 바쁜 일이 없다면, 이번엔 제대로 둘이서 숲에 가지 않겠습니까?”

“콰른 비프타가 밀린 편지와 가지고 오려던 책을 가져온 모양이라서…… 그거 한번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요.”

필요한 것에는 답장을 해 줘야 하기도 하겠고.

“그렇군요.”

“그리고 알리아 영애도 한번 불러야 할 것 같고요.”

아델의 입에서 나온 뜬금없는 말에 헥시온이 미간을 좁혔다.

알리아 가문이라면 제국에서 무척 보기 드문 청렴결백한 귀족 중 한 명이었다. 황제가 하는 일에 종종 반기를 들기도 했다. 덕분에 귀족계에서 입지는 그리 넓지 않지만, 헥시온은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마약에 손을 댄 것 같더라고요. 질 나쁜 업자한테 걸린 모양이에요. 이번에 연회에서 만났는데 도와 달라고 하더라고요.”

“마약이라니. 귀족 영애가 손을 대기 쉽지도 않았을 텐데 신기하군요.”

핵심을 짚는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생각해도 그건 여전히 의아한 일이었다.

죽기 전의 아델은 알리아 영애와 제법 친하게 지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알리아 영애의 뒤를 아델이 잘 쫓아다니곤 했다. 늘 사람들의 중심에 서는 알리아 영애를 동경했던 적도 있었다.

‘예전 일이긴 하지만.’

그 일이 터지고 환상이 깨져서 그런지 이제는 한심하게만 보였지만.

아델이 알고 있는 알리아 영애의 성격을 생각해 봐도 타인의 뒤에 숨어서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몰아가는 것은 잘했어도 그런 위험한 일에까지 손을 댈 정도로 겁이 없지는 않았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애초에 마약 업자들은 뒤에서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뒤탈이 없을 법한 이들을 보통은 타깃으로 삼는다. 그래야 노예로 팔든 사지에 밀어 넣든 창관에 팔든 뒤를 밟히지 않고 끝나니까.

그러나 알리아 영애는 전혀 다른 부류다. 꾸미는 걸 좋아하니 그녀가 귀족이나 돈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몰랐을 리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층 더 알 수가 없다. 한낱 마약 업자 따위가 손을 댈 수 있을 법한 위치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들은 ‘손님’을 정하는데 무척 신중한 편이거든요.”

아델이 말을 하고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심지어 지금의 아델로선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계속 뒷골목에서 자랐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들?”

“그런 위험한 약을 다루는 이들을 말하는 거예요.”

마약 업자들이 원하는 것은 대개 돈이다. 원하는 만큼의 돈을 한 번에 내어 주고 원만하게 연을 끊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 뒤를 캐서 상대가 꼼짝할 수 없는 뭔가를 내밀어 포기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알리아 자작은 무척 청렴결백한 이입니다. 황제조차도 털어 낼 것이 없어 쉬이 손대지 못하는 그 명성을 자식이 다 망치는군요.”

“알리아 자작이 청렴결백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예요?”

“네. 그는 곧게 뻗은 소나무 같은 인물입니다. 늘 올곧은 말은 하고 불의를 못 본 척하지 않고 진심 어린 동정을 할 수 있는 자입니다.”

헥시온의 후한 평가에 아델이 조금 놀란 눈을 했다. 그런 사람 밑에서 어떻게 그런 성격의 알리아 영애가 태어났는지 의문이 생겼다.

아델이 턱을 매만졌다.

“대개 하는 말은 귀족들의 눈 밖에 날 말이긴 하지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청렴하고 결백하지요.”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비프타 공작이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걸 몇 번 들어 본 것 같기도 해요.”

“네. 그의 영지는 아주 평판이 좋고 이주 희망자들이 늘 줄을 설 정도입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들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죠.”

“……황제가 알리아 자작을 아니꼽게 보더라도 손을 댈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거군요.”

아델이 헥시온의 말에서 금세 중심 내용을 끄집어냈다. 천천히 식사하던 헥시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알리아 영애의 일이 수면에 드러날 정도가 된다면 그건 황제가 자작에게 손을 댈 수 있을 꼬투리가 될 겁니다.”

헥시온이 자신의 생각을 말해 주며 퍽 고민된다는 듯 눈꺼풀을 내리깔며 움직이던 식기를 멈췄다.

“그 시기가 언제쯤이냐가 문제겠군요.”

“……3년, 아니 2년쯤 뒤요.”

아델의 확신에 찬 말에 헥시온이 기묘한 표정으로 그녀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재정이 처음 기울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들려왔던 것이 그때쯤이었다. 서서히 무너져가던 알리아 자작은 3년 뒤쯤 빚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영지조차 지탱하지 못할 정도가 됐다.

아는 건 그 정도지만, 그 뒤가 어떻게 됐을지는 짐작이 갔다.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닌 귀족은 대개 파산을 하고 작위와 영지를 빼앗긴다.

“어떻게 압니까?”

“네?”

“방금 2년쯤 뒤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그런 계산이 나왔는지 궁금해서 여쭸습니다.”

헥시온의 궁금증 가득한 시선에 아델이 어색하게 웃었다. 낭패감에 그녀가 애꿎은 웃음만 흘렸다. 잠시 생각하다가 너무 자연스럽게 대답하고 말았다.

“그냥…….”

아델이 머리를 굴렸다. 미래에서 보고 왔다는 얘기는 차마 할 수가 없다. 아니, 애초에 믿어 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냥?”

헥시온이 재촉하듯 짓궂게 말을 덧붙였다.

“……마약 중독자들이 대개 그쯤 망하더라고요. 그때까진 어떻게든 돈을 빌리든 뭘 하든 채워 넣다가요.”

“그렇군요. 쉽게 알기 어려운 얘기를 많이 아는군요. 아델은.”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답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과거의 자신에 대해선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아델이라고 불러 주고 있지만, 지금 이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카레나 비프타의 껍데기 때문이니까.

“……영 질 나쁜 쪽에 걸린 것 같아서, 괘씸하다고 모른 척하기엔 이미 알리아 영애에게 상황을 들어 버렸어요.”

이대로 문제가 생기면 분명 뒤끝이 찝찝할 거다. 듣지 못했다면,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들어 버렸으니 모른 척하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

‘쓸데없는 오지랖인데.’

별로 키우고 싶지 않은 종류의 오지랖이기도 했다.

“원한다면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헥시온이 스테이크를 한 조각 입에 썰어 넣으며 물었다. 마치 식사를 했냐고 묻는 듯한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였다.

‘잘못 들었나?’

아델이 고개를 털며 귀를 꾹꾹 눌렀다. 처리해 준다는 게 옆으로 밀어 치워 준다는 의미는 아닐 텐데.

“네?”

고민하던 아델이 결국 반문했다.

“아. 알리아 영애 쪽이 아니라 그 마약 업자를 말하는 겁니다.”

그가 설명이 부족했다는 듯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놀란 건 그쪽이 아니었지만, 헥시온은 아델의 반문을 그렇게 해석한 듯했다. 아델이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몇 차례 뻐끔거리다가 조금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이긴 하겠지만, 만약…….”

“황제가 손을 쓰고 있는 거라면…… 이라는 가정을 하고 계시는군요. 내 약혼녀께서는.”

헥시온이 퍽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흐뭇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에 아델이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그녀가 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술, 은 아닌데.’

팔이 움직여져서 그런 건가? 유독 오늘따라 헥시온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물론 싫다는 건 아니지만, 저런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목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으니 조금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다.

“……맞아요.”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투가 어쨌든 아델이 생각한 건 그게 맞았다. 황제가 손을 쓰고 있는 경우 그 연이 닿아 있는 자가 갑작스럽게 죽으면 의심을 할 거다.

그 작은 틈새가 일을 그르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모른 척하고 알리아 영애에게서 시선을 돌릴 생각이었다.

“알리아 자작은 그냥 버리기엔 아깝습니다.”

헥시온이 조금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고민에 빠진 듯했다. 목소리가 건조하다고 해서 다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그가 알리아 자작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는 영지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나중에 소문의 근원지가 되어 주더라도 나쁘지 않고 사병도 꽤 있으니 쓸모가 있을 것 같군요.”

헥시온은 잠시 고민했다. 아델이 괜찮다고 하면 알리아 영애 따위에게서 손을 떼라고 할 생각이었으나, 그 여식은 그렇다 쳐도 알리아 자작은 그냥 잘라 내기엔 아까운 인물이었다. 높은 관직을 쥐여 줘도 결코 자신의 신의나 충정을 저버리지 않을 상대였다.

대대로 알리아 가문이 그랬다. 그들은 청렴결백하고 자기 주도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수완도 제법 좋고 쌓아 놓은 재물도 꽤 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자작에 남아 있는 것은 알리아 가문의 성격이 무척 올곧았기 때문이다.

‘그사이에 어쩌다 그런 여식이 태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리아 영애 자체의 인성이 문제가 된 것보다는 아마도 반발심 때문일 것이다. 헥시온은 그렇게 추측했다.

타인에게도 매서운 잣대를 들이대는 알리아 가문이다. 제 가문의 핏줄에게라고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창때의 영애라면 혹하지 않을 리가 없다.

“흠, 근시일 내에 알리아 자작을 한번 봐야겠습니다. 일단, 알리아 영애를 도와주고 빚을 지워 두는 게 낫겠지요.”

“벌써 거기까지 생각한 거예요?”

“네. 그는 드물게도 괜찮은 자입니다. 그 영애도 태생부터 나쁘다기보단 예의범절에 매서운 가문에 반발심이 든 것이겠지요.”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놀란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아델도 그럴 것이라고 예상하던 차였다. 그것을 타인의 입으로 듣는다는 것은 조금 놀라운 일이었다.

“그보단, 난 아델과 데이트가 먼저 하고 싶습니다.”

“……데이트요?”

“우리만의 나들이가 있지 않습니까.”

풀어헤쳐진 입가에 띤 상냥한 미소에 아델이 낮게 탄성을 흘렸다. 비석 해독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숲으로 가는 것을 헥시온도 제법 즐기는 모양이다.

“네 번째 비석이죠?”

“네. 이번엔 부디 방해꾼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건 제가 편지를 먼저…….”

“나보다 편지란 말입니까? ……서운합니다.”

헥시온이 퍽 처연하게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아델이 헛웃음을 삼켰다. 늘 서운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는 것은 알았지만, 오늘따라 한층 더 처연하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헥시온보다 편지라는 얘기는 절대 아니에요. 다만…….”

헥시온이 슬쩍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아델의 눈치를 살폈다. 정확히는 살피는 척을 한 모양이었지만.

“다만?”

“다만…….”

그럼 무슨 얘기일까? 아델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실 미뤄 놓을 만큼 미뤄 놓은 편지의 확인이 하루 더 늦어진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다. 물론 노트에 적어 놨던 것을 다시 책에 옮겨 적는 것도 하루 늦어진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건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또 마땅히 변명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니 한층 그러지 않아도 될 만한 이유만 떠올랐다.

헥시온의 입가에 띤 미소가 짙어졌다.

“……언제 갈까요?”

아델이 결국 고개를 떨궜다.

“내일이요.”

헥시온이 웃었다. 그녀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의 허락을 들은 헥시온의 눈이 반달로 접혔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점 능글맞아지는 것 같아.’

원래 능글맞기는 했지만…….

가끔은 무척 진지하다가도 가끔은 애절하고 또 가끔은 이렇게 짓궂기도 하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잘 모르겠을 정도로.

‘싫지 않은 게 문제지.’

아무리 그가 짓궂게 굴어도 몸을 붙여 와도 싫지 않다는 게 문제다. 이러다 어느 순간 마음마저 빼앗길까 봐 두려웠다. 반드시 끝이 나야 정리가 되는 관계에 생기는 마음은 독이었다.

“그럼 오늘은 알리아 영애를 만나 보러 가는 건 어떻습니까?”

“……오늘이요? 오늘은 편지를 보낼 생각이었는데요.”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헥시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기왕 마음을 정했으면 단칼에 검을 뽑을 모양이다.

“알리아 자작은 수도에도 저택을 한 채 가지고 있고 요즘은 수도에 있을 겁니다.”

헥시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헥시온이 아델에게 손을 뻗었다.

“저택에서까지 굳이 에스코트하지 않아도 되는데요.”

“그냥 좋아서 그럽니다.”

헥시온이 아델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속삭이는 말이 다정하다. 달콤해서 그 안에 풍덩 빠지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아델이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당신의 온기가 좋아서요.”

헥시온이 변명하듯 뒷말을 덧붙였다.

“저도 좋아해요.”

아델이 말했다. 헥시온의 눈이 크게 떠졌다.

“헥시온의 온기요.”

아델이 정면을 향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헥시온이 빠르게 실망감 짙은 시선을 지워 냈다. 다행히 그녀가 시선을 다른 곳에 둔 덕에 그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그거 알아요?”

“아뇨. 모릅니다.”

“누군가와 손을 잡아 보고 누군가에게 머리가 쓰다듬어지며 칭찬받고 누군가가 날 필요로 해 주는 게 소원이었는데, 헥시온이 전부 이뤄 줬어요.”

아델이 말했다.

헥시온이 입을 다물었다. 그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자신이 제 욕망을 채우기 급급할 때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훨씬 소박하고 훨씬 상냥한 것들이다. 그럴 때마다 제 저열한 욕망과 비교되는 것 같아서 그는 속이 쓰렸다.

동시에 다정한 그녀가 사랑스러우면서도 자신과 같은 욕망에 빠뜨려 울먹이는 얼굴을 보고 싶기도 했다. 저급하고 저열한, 바닥에서 굴러온 그의 못된 마음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헥시온은 제 마음을 꾹꾹 눌러 밟았다.

“헥시온에게는 저도 감사하게 생각해요.”

“……천만에요. 내 고마움에 비할 바는 못 될 겁니다.”

헥시온이 다정한 미소를 얼굴에 두른 채 여상하게 대답했다. 어디까지나 그녀에겐 들키고 싶지 않은 저열한 욕망이다. 아마도 그녀가 원하지 않는 한, 평생 충족될 리 없는 그런 욕망.

“잘됐으면 좋겠어요.”

“뭐가요?”

“헥시온의 일이요. 그래야, 자유로워지죠.”

아델의 말에 헥시온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가 풀어졌다. 그가 능숙하게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내려오면 될까요?”

“네. 준비해 놓고 기다리겠습니다.”

헥시온이 다정함과 상냥함으로 저를 포장하며 무해하게 웃어 보였다. 아까 그냥 보낸 콰른 비프타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제대로 때려서 보내도 좋았을 것을.’

콰른 비프타는 머리를 쓰며 아델에게 여우처럼 살살 웃어 보이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그것이 짐승이 사냥하기 위해 일보 물러나는 것이라는 걸 헥시온은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설마 그 콰른 비프타가 그럴 줄은 예상하지도 못했지만.

“네, 다시 올게요.”

“알겠습니다.”

헥시온이 계단을 오르는 아델을 배웅하며 웃었다. 그림처럼 반듯하게 그려진 미소를 띤 채 그가 아델이 사라질 때까지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죽겠군.’

눈을 내리깐 그가 제 방으로 발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납으로 된 추라도 단 듯 무거웠다.

* * *

“……와 줘서 고마워요. 비프타 영애.”

급작스러운 방문에 알리아 영애가 눈치를 살피며 아델의 뒤를 따라온 사내를 힐끗 쳐다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대공 각하께서도…….”

알리아 영애가 더듬더듬 헥시온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굳은 표정에서 꺼림칙함이 엿보였다. 헥시온이 그런 알리아 영애를 곁눈질로 힐끗 보고는 아델의 뒤를 따랐다.

“갑작스럽게 방문해서 미안해요.”

아델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하지만, 전혀 미안할 것이 없었다. 그녀로선 오지 않아도 그만일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것은 약간의 양심의 가책과 헥시온의 흥미 때문이었다.

‘깊게 발을 들일 생각은 없었는데.’

한번 이야기를 들어 보고 그녀의 상황에서 가장 행동하기 쉬운 적절한 방법을 알려 주는 것. 아델이 생각했던 도움은 딱 거기까지였다. 사실 그 이상을 해 줄 이유도 그럴 만한 명분도 없다.

“아뇨, 정말 고마워요. 언제쯤 연락이 오나……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알리아 영애가 목을 거북이처럼 움츠리며 웅얼거렸다. 작은 목소리와 불안한 시선 처리를 보아하니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게 전부 지키려고 하니 하나를 잃는 것도 두렵지.’

어차피 이번 일을 조용하게 끝낼 방법은 없다. 상대를 죽여 달라고 그녀 스스로가 청부를 하던가, 그것도 아니면 솔직하게 말하고 깊게 빠지지 않은 선에서 정리하는 수밖에.

“난 시간 낭비가 세상에서 제일 싫습니다.”

헥시온이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보며 말했다. 마치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인 양 내뱉는 목소리에 아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델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렇게 바빴던가?’

아델이 눈을 끔뻑였다. 오늘도 할 일이 딱히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곧장 나온 것일 테고. 심지어 내일은 숲에 가자고 했었다.

응접실 소파에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고 앉은 헥시온은 무척 여유롭게만 보였다. 그의 맞은편에 앉는 알리아 영애는 다리를 떨며 손톱을 물어뜯는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네…….”

청문회라도 온 것처럼 추궁당하는 알리아 영애가 고개를 푹 숙였다. 울먹이는 눈동자에서 곧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언제부터입니까?”

헥시온의 한마디에 알리아 영애가 고개를 들며 입을 꾹 다물었다. 바로 들려오지 않는 대답에 헥시온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델이 헥시온의 옆에 앉아 눈만 굴렸다.

“반년쯤 됐어요…….”

“도대체 어디서 접한 거예요?”

“……부티크 거리에 갔을 때였어요. 웬 보따리 상인이 바다 건너 가져온 무척 귀한 향신료라며 꽤 비싼 값을 불렀죠.”

아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눈에 훤히 보일 것 같은 기분에 골이 띵했다.

‘그냥 발 뺄까?’

아델이 멍하니 생각했다. 길가다가 누가 주는 건 입에 대지도 말라는 건 뒷골목에서도 배운 상식이었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지만, 조금만 신중했다면 피할 수 있었던 일을 듣는 것은 조금 괴로웠다.

“……그, 그래서, 살짝 찍어 먹어보니 정말 지금껏 먹어 본 적 없을 정도로 달콤했고 몇 번 더 권하기에 그 자리에서 몇 입 더 먹었어요.”

아델의 표정이 한심함으로 물드는 동안 헥시온의 표정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퍽 심드렁한 듯 보였다. 아델이 그를 한번 힐끗 보고 알리아 영애에게 다시 시선을 옮겼다.

“먹는 동안 어느 순간 구름에 붕 뜬 것 같은 느낌도 들고 기분이 좋아져서, 흑, 정신을 차려 보니 그 향신료를 사 버렸…… 흑, 더라고요…….”

점점 줄어드는 목소리에 흐느낌이 섞여들었다. 아델이 조금 아연한 기분에 고개를 젖혀 천장을 올려다봤다. 애초에 부티크 거리에 있는 보따리 상인이라니. 어떻게 거기에 속을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아니, 부티크 거리에 보따리 상인이면 의심을 좀 해야 했을 것 같은데요.”

“전…… 그냥, 살 생각은 없고 맛만 볼 생각이었는데…….”

알리아 영애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웅얼거렸다. 제 잘못을 아니 고개를 드는 것도 수치스러울 거다. 아델이 한숨을 삼켰다.

대개의 뒷골목 업자들이 취급하는 마약은 질이 나쁘다. 중독성이 높고 의존성도 강하다.

‘그나마 알리아 영애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 마약의 의존성을 밀어내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여태 그 마약에 중독되지 않고 정상적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반년이었으면 이미 사실 의존해서 점점 망가지고 있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여기서 의욕이 꺾이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구렁텅이까지 빠져서 약을 입에 대게 되면 그때야말로 더 돌이킬 길이 없다. 한번 중독되면 중독에서 벗어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까.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식으로 접선하고 있는지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는…….”

알리아 영애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늘,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나와서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남자인 듯하고 몸이 그렇게 크진 않아요. 그리고 목소리는 가느다란 편이고요.”

알리아 영애가 머릿속을 뒤적거리며 기억나는 정보를 읊었다. 상대는 언제나 로브를 쓰거나 얼굴을 가리고 나타나서 그녀가 아는 정보는 무척 적었다.

“하지만, 늘 향수 냄새가 났어요.”

“향수?”

“네. 여성이 뿌리는 향수 냄새가 났어요. 늘 다른 향수 냄새여서 사창가나 그런 쪽을 자주 다니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도 좀 했고요.”

마약으로 돈을 벌어서 창관에 가져다 바치고 있다니. 없을 법한 일도 아니다.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누군가가 마약에 미쳤다면 성관계에 미친 사람도 없을 리가 없지 않은가.

“또, 그리고…… 생각보다 그렇게 키가 큰 것 같지도 않았어요.”

알리아 영애가 말한 정보를 아델이 차근차근 머리에 집어넣었다. 사실, 마약이 얽혀 있다면 이런 정보는 진에게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면 될 일이다. 만약 진과 일로 엮였다면 한층 더 꼬리를 잡기 쉬울 거고.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구매한 마약은요?”

“그건 제가 구매한 게 아니에요! 그쪽에서 억지로……!”

아델의 물음에 알리아 영애가 기겁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곤 제가 낸 목소리에 놀란 듯 황급히 몸을 움츠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이유에서든 돈을 주고 물건을 받았으면 그걸 구매했다고 하는 거예요.”

“……하지만!”

“적어도 이게 수면 위로 드러나면 세상은 그렇게 보겠죠.”

아델이 딱 잘라 말했다. 그제야 알리아 영애의 입이 풀로 붙인 것처럼 꽉 다물어졌다.

본인이 원해서 구매를 했든 구매를 하지 않았든 사실 세간에서 그런 것이 궁금할 리는 전혀 없다. 그들이 궁금한 일이란 대개 진실보다는 수면 위로 드러난 자극적인 소재뿐이다.

“하지만, 영애도 알다시피 정말 제가 원해서 구매한 게 아니에요. 저도 억지로…… 정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영애께선 늪을 향해 스스로 발을 디디신 거죠.”

아델이 말했다. 예전에는 자신을 선두에서 괴롭히며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던 상대의 작아진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무척 기묘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게 스트레스 풀이였을 수도 있으려나.’

어느 정도 수면 위로 올라올 때까지 알리아 영애에 대한 소문은 깨끗했다. 그러니 그녀는 다른 쪽으로 스트레스를 풀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보다 약자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그게 나였다는 것에 자존심을 상해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렇게 보란 듯이 복수할 기회가 생겼으니 즐거워하라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차라리 처음 알았을 때 자작께 말씀드리고 사실대로 고했다면 약간의 해프닝으로 끝났을 수도 있을 일이잖아요.”

아델의 말에 알리아 영애가 노란색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약간의 주름도 펴기 위해 노력하는 하녀들이 본다면 경악할 일이다. 한 번 한 거짓말이 눈덩이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랬다면 알리아 영애는 더 이상 그 상대와 접촉하지 않을 수 있었겠죠. 이렇게 상황이 악화되는 일도 없었을 거예요. 적어도 작은 해프닝 정도로 끝났겠죠.”

아델의 담담한 말에 알리아 영애의 눈에 물이 가득 차올랐다. 아슬아슬한 곳까지 올라와 찰랑거리는 눈물을 아델이 무심하게 바라봤다. 물론 이보다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것보단, 지금이라도 용기를 내서 누군가에게 도와 달라고라도 말한 것을 기특하게 여겨야 하는지 의아하긴 하지만.

“난…… 나는…….”

핏기가 사라진 알리아 영애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눈에 힘을 준 알리아 영애가 소리 없이 뻐끔거리는 입술에서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냥……, 그냥…… 무서웠어요. 사교계에서 매장될 거라는 사실이 두려웠다고요. 당신도, 비프타 영애도 알잖아요! 같은 귀족 영애니까! 그게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일인지…….”

‘같지 않은데.’

알리아 영애의 약간의 억울함이 담긴 항의에 아델이 무심하게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그날 죽지 않고, 이렇게 과거로 돌아오지도 않았더라면 아델 역시 알리아 영애와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두려워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네요.”

아델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자신은 사교계의 매장을 두려워하진 않았을 거다. 아델은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다만, 무언가가 두려웠다면…… 아마도 그렇게 됐을 경우 자신에게 쏟아질 비프타 공작과, 공작 부인의 매서운 시선과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봤을 펠리스 비프타의 시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까지 일을 꼬이게 했을 것 같진 않네요.”

아델이 담담하게 말했다. 물론 그런 멍청한 수법에 걸려들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었던 그때였더라도.

그러나 동시에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런 수법을 멍청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걸리지 않았을 거라고 장담하는 것도, 모두 그녀 자신이 그런 수법을 눈앞에서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이런 쪽에 면역이 없는 사람은 어쩌면 걸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 기회에 확실히 지적해서 겁에 질리게 해 두지 않으면, 언젠가 또 해이해지는 일이 있을 테니까.

“제가 그렇게 되면…….”

알리아 영애의 손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버지가 힘겹게 쌓아 오신 명예를 무너뜨릴 게 무서웠어요! 그냥 무서웠다고요! 당신도 그렇잖아요! 그랬을 거잖아요…….”

고개를 내젓는 알리아 영애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델이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아주 오래전, 철이 들기도 전에 우는 것을 포기했다. 울어서 해결되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보다는 조금 더 강해 보이기 위해 스스로의 감정을 꾹꾹 눌러 담는 법을 배웠다. 아픔에 이를 악물고 상대방을 물어뜯을 틈을 노리는 것을 배웠다.

아델은 울 수 없었다. 뒷골목에서 떨어진 생선이나 과일 하나를 훔쳐 필사적으로 달아날 때도 그러다 붙잡혀서 얻어맞을 때도 울 수 없었다. 카레나 비프타의 거죽을 뒤집어쓴 뒤에도 그녀에게 눈물은 사치였다. 우는 것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아델은 그것을 질리도록 잘 알고 있었다.

“알리아 영애.”

“흑, 네…….”

“그렇게 울면 무언가가 해결되나요?”

고개를 기울인 아델이 정말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건조한 목소리와 찌푸려진 눈살에서 이해할 수 없음이 엿보였다.

헥시온이 힐끗 시선을 움직여 퍽 건조하고 냉랭한 표정의 아델을 살폈다. 아델의 말에 알리아 영애가 눈을 크게 뜨더니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스스로를 변명하면서 우는 것보다는 내가 영애에게 물어본 질문에 대답을 해 주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내가 도움을 주길 바란다면요.

아델이 말을 덧붙였다.

그제야 알리아 영애가 소맷자락으로 눈을 꾹꾹 눌러 닦더니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그건, 더 먹기가 무서워서 숨겨 놨어요. 제 방 침대 밑에 모아서 붙여 놨죠.”

알리아 영애의 입술은 어느새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올바른 환경에서 자란 만큼 잘못된 것에 대한 인식도 빨랐을 거다. 그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일탈을 꿈꾼 게 실수였던 모양이지만.

“네. 좋지 않은 거예요. 마약이나 그런 뒷골목에서 만든 약이란 대개 출처도 명확하지 않은 저급 약물을 사용하니까요.”

“……몸에 좋지 않은 건가요?”

“사람 기분을 억지로 좋게 하는 게 몸에 좋을 리가요. 심지어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건 정신에 직접 작용하는 거예요.”

아델도 뒷골목에서 종종 본 적이 있었다. 마약에 중독돼서 매일매일 돈을 가져다 바치며 몸이 망가져 가던 사람들을. 그렇게 죽은 자들이 꽤 됐다.

“남은 거 전부 주세요. 뭔지는 몰라도 환각제 성분이 섞인 것 같으니까. 절대 먹을 생각은 하지 말고요.”

아델의 말에 알리아 영애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녀나 집사를 시킬 수 없는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만한 일이었다.

“잠시 실례할게요.”

“네.”

알리아 영애가 응접실을 나섰다.

순식간에 공간에 적막이 흘렀다. 헥시온이 아델을 살짝 보며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무 날을 세우고 있군요. 아델.”

“내가요?”

“네. 뭔가가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습니까?”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가 그녀를 달래듯 아델의 손을 붙잡은 채 그녀의 손등을 엄지로 천천히 쓸었다.

“누가 우는 게 싫어요.”

“우는 게요?”

“운다고 해결되지 않을 일인데, 울어서 해결하려고 하는 게 싫어요. 내가 꼬인 걸 거예요. 난 마음껏 울어 본 기억이 없거든요.”

그때 비석의 앞에 섰을 때 제 의지도 아닌 눈물을 흘렸던 기억을 제외하면 그녀는 운 기억이 없었다. 그나마도 그건 정말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은 상태에서 눈물을 뚝뚝 흘린 것이었다. 감정의 요동이라곤 하나도 없는 눈물이었다. 흘러내리는 이유도 왜 그런지도 알 수 없었던 눈물.

“아쉽군요.”

“뭐가요?”

“전 아델이 우는 얼굴도 보고 싶었는데요.”

헥시온이 고개를 숙여 아델의 코앞에서 작게 속삭였다. 아델이 샐쭉하니 눈을 뜨곤 이내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렸다. 하여튼, 짓궂다.

반쯤 열린 테라스에서 살랑살랑 들어오는 바람이 퍽 기껍다. 한낮이라 그런지 온몸이 나른하기도 하다. 두 사람은 대화도 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달칵.

그 순간 문이 열렸다. 아델은 편하게 숙였던 몸을 폈다. 걸음걸이 하나는 완벽한 알리아 영애가 잰걸음을 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이거예요.”

고급스러운 비단에 둘둘 싸인 것을 알리아 영애가 탁자 위에 올려놨다. 아델이 손을 뻗어 그것을 열어 내용물을 살폈다. 새하얀 색의 가루였다. 얼핏 보면 설탕과 크게 구별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아델이 그것을 손가락으로 찍어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혀에 가져다 대려고 새끼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영애.”

손을 뻗은 헥시온이 그것을 제지했다. 탓하는 듯한 시선이 잠시 아델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러곤 빙긋 웃더니 이내 허리를 굽혀 그녀의 새끼손가락에 묻은 가루를 살짝 핥는다. 푹 찍어 바른 꿀이라도 핥는 것처럼 길게 뻗은 손가락을 두어 번 핥더니 이내 슬쩍 몸을 떨어뜨렸다.

아델이 파드득 몸을 떨며 황급히 들었던 손을 내렸다. 앞에 앉아 있던 알리아 영애의 눈은 화등잔만 하게 커져 있었다. 늘 목석같이 표정의 변화도 없던 사내가 앞에 있는 사람이 소중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상냥하게 미소 짓고 있다. 사람이 접근하는 것을 그토록 꺼리던 사내가 말이다.

아랫입술을 핥은 헥시온이 입 안에 맴도는 달큼하면서도 자극적인 향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마약 중에서도 환각제 종류인 듯합니다. 당신의 추측이 맞았습니다. 현명하시긴.”

헥시온이 퍽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위험한 일은 제게 맡기십시오. 굳이 이런 걸 당신이 맛볼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곁에 있으니까요.”

‘그럼 헥시온에겐 위험하지 않나요?’

목까지 차오른 의문을 아델이 꾹 눌렀다. 그는 자신을 마치 깨어질 듯한 유리 공예 작품처럼 대하면서 정작 자신은 강철보다 더 단단하다는 미스릴이라도 되는 양 굴었다. 그녀가 불만을 참아 내며 시선을 알리아 영애에게로 돌렸다.

“그래서 그 업자와의 다음 접선은 언제에요?”

“……다음 주 부티크에 가는 날이에요. 수요일이요.”

“정확히 어디서 접선하나요?”

“늘 가는 부티크 근처에 약속한 날에 가면 언제나 보따리 장사를 하고 있어요.”

알리아 영애의 말에 아델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그렇게 당당히 장사하는 데 그것도 벗어나지 못했단 말인가? 신병을 확보하면 한층 빨라지는 일이 아니던가.

‘……아.’

생각하던 아델이 속으로 탄성을 흘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병사를 움직일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알리아 자작의 권한이었고, 작은 병사라도 움직였다간 자작의 귀에 들어가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개인 사병이나 정보 길드 같은 곳에 의뢰하기에 알리아 영애는 담이 작았다. 지킬 것도 많았고 내보이고 싶은 것은 없으니 행동반경도 좁아진 거다.

“늘 그곳에 있나요?”

“……잘 모르겠어요. 요즘은 잘 가지 않아서. 하지만, 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보따리 장사는 뭘 파는데요?”

“잡화용품이나…… 조악한 돌멩이로 만든 장신구를 팔아요.”

파는 척을 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정말 팔고 있는 것인가. 아델이 의문을 가졌지만,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 수요일……. 일단 알겠어요.”

아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어 준 차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지만,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 자체가 아델에겐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라도 솔직하게 말하고 자작에게 해결해 달라고 말하려 했는데.’

헥시온의 눈을 보니 이 기회를 그냥 넘기진 않을 모양이었다. 그에겐 지금 전적으로 제 편이 필요할 테고 자작이라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절대 제가 말했다고 하면 안 돼요! 비프타 영애, 제발 부탁드려요. 만약 그러다 놓치기라도 하면…… 전 끝이에요…….”

아델의 옷자락을 붙잡은 알리아 영애가 무척 간절하게 말했다.

아델이 슬쩍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 헥시온을 바라봤다. 헥시온은 팔을 뻗어 아델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알리아 영애의 손을 떼어 냈다.

“알리아 영애.”

“네……. 대공 각하.”

헥시온은 무척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마치 전기가 흐르는 듯한 찌르르한 통증에 그녀가 눈을 끔뻑였다.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는 없습니다. 당신은 대가를 치러야 할 테죠.”

“……돈이라면 얼마든지 낼게요.”

알리아 영애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하지만 헥시온의 서늘한 눈을 보는 순간 그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뒤에 선 아델에게 본능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헥시온은 무척 두려운 사내였다. 시선만으로도 잡아먹힐 것 같다, 고 알리아 영애는 생각했다. 헥시온은 아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고 그가 으스러질 듯이 쥔 손목은 꽤나 아팠다.

“그 대가는 당신의 아버지가 치르게 될 테고 말입니다.”

헥시온이 알리아 영애의 말이 우습다는 듯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말했다.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하지만, 아버지께는……!”

“내가 영애를 도와주는 이유가 그렇습니다.”

헥시온의 말에 알리아 영애가 새파랗게 질렸다.

“뭣보다 상의를 하자는 게 아니라 통보를 하는 거지요.”

벌써 아버지에게 어떤 말을 듣게 될지 두려웠다. 아버지, 알리아 자작은 예의범절에 엄하고 격식에 어긋나거나 사치를 좋아하지 않았다.

언제나 귀족으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요하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온 사람. 왜소하나 올곧은 그 등에는 신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일리아는 그런 집안이 싫었다. 끔찍했다.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일탈을 한 결과가 결국 이것이었다.

알리아 영애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리고…….”

헥시온의 목소리가 무척 낮아졌다.

그가 알리아 영애의 귓가에 입술을 바싹 가져다 댔다. 아델에게는 들리지도 않을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가 입을 열었다.

“곤란해하시니 들러붙지 마십시오.”

한마디를 속삭인 헥시온이 깔끔하게 굽혔던 허리를 폈다. 서늘했던 눈이 어느새 반달로 곱게 접혀 있었다. 다정한 시선이 잠시 아델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 모습에 알리아 영애가 잠시 넋을 잃었다. 가까이서 보니 헥시온 대공이 아름답고 신비롭다고 종종 말하던 다른 영애들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꺼림칙한 소문만 들어와서, 가까이 가는 것조차 꺼려하던 헥시온은 무언가 시선을 끌어당기는 기묘한 매력이 있었다.

“아시겠습니까?”

알리아 영애에게 다시 향한 헥시온의 눈은 아델의 앞에서 보이던 다정함이 사라진 상태였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겨울에 내리는 눈밭에 손발을 묻은 것보다도 더 시리게만 느껴졌다. 알리아 영애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지 않으면, 눈빛에 잡아먹힐 것 같았다.

“그럼 이만 돌아가지요. 아…… 영애.”

아델이라고 부르려고 했던 헥시온이 아차 한 표정으로 황급히 말을 돌렸다.

아델이 놀라 알리아 영애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어디에 넋이 빼앗겼는지 멍한 표정으로 헥시온을 쳐다보고 있었다.

“배웅은 괜찮습니다. 쉬십시오. 알리아 영애.”

헥시온이 부드럽게 말하며 아델의 허리를 팔로 지탱했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접촉에 아델은 딱히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짧은 인사와 함께 자작가의 응접실을 뒤로했다.

“왜 그렇게 짓궂게 굴어요?”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저택을 나온 아델은 마차에 오르며 헥시온에게 말했다. 마차에 자리를 잡고 앉은 헥시온이 살짝 커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내가 말입니까?”

“그런 것 같았는데, 아닌가요?”

“솔직히 말입니까?”

“네.”

아델의 말에 헥시온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사실은 그랬습니다. 당신이, 알리아 영애에게 괜한 관심을 가지는 게 싫습니다.”

“관심 없는데요.”

너무 단호해서 순간 말을 잃은 것은 헥시온 쪽이었다. 단칼에 잘라내는 아델의 목소리에 헥시온은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이번 일 어떻게 하려고요?”

“뒤를 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거길 휘저어야 하는데 나로선 내키지 않습니다.”

“진에게 맡기면 간단할 것 같긴 한데…….”

아델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쪽 세계를 꽉 잡고 있는 진이라면 활동하기도 편할 거고, 굳이 다음 주 수요일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될 수도 있다.

“아델은 그자를 꽤 믿는 모양입니다.”

헥시온의 말에 아델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그야 아무래도 오래된 사이고, 한배를 타게 됐고, 어쨌든 자신과 헥시온보다는 자유로운 사람이니까.

“서운하군요.”

헥시온이 퍽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장난기가 물씬 느껴져서 아델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알리아 자작은 아까운 자입니다. 언제나 중립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의 여식이 그를 드디어 선택에 기로에 올려놓는군요.”

“헥시온은 자작을 무척 높게 평가하나 보네요.”

“한 번 신의를 정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저버리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현 황제를 내켜 하지 않는 자이기도 합니다.”

헥시온이 후한 평가를 했다. 아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스듬히 호선을 그리고 있는 그는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이제 그는 선택해야 할 겁니다. 내겐 잘된 일이지만, 그에겐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래서 저택으로 가지 않는 이 마차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 있던 아델이 물었다.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헥시온이 짓궂은 미소를 띤 채 눈꺼풀을 살짝 내리깔았다.

“재료를 사러 갑니다.”

“재료요?”

“네. 팔찌를 만들어 준다고 하셨는데 까먹으신 것 같아 제 것은 제가 직접 챙기러 갑니다.”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약간의 투정이 서려 있는 것을 아델은 재게 눈치챘다. 그녀가 입술을 벌린 채 멍한 눈을 했다.

“그거…… 겨우 어젯밤의 일 아니었나요.”

아델의 말에 헥시온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싱긋 웃었다.

“그것도 그렇군요. 그럼 어젯밤의 약속을 지키러 가는 거군요.”

헥시온의 말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아델이 두어 번 눈을 깜빡이곤 이내 졌다는 듯 낮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웃음을 머금은 아델이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 두 개를 만들어서 하나는 제가 차고 하나는 헥시온이 차다가 효력이 떨어지면 바꿔서 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커플 팔찌입니까?”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색감으로 사고 비슷한 디자인으로 만들 테니 세트인 팔찌라고 생각해도 문제는 없을 거다.

“둘 다 헥시온의 것이지만요?”

“……그럼 도대체 어디가 커플입니까?”

“약혼한 사이인데 굳이 커플이라는 수식어가 필요한가요?”

아델의 말에 헥시온이 퍽 진지한 눈을 했다. 그러고 보니 말이 약혼녀이지 그럴 만한 것을 증명할 장신구는 아무것도 없었다.

‘반지도 아직이었군.’

헥시온이 속으로 탄식했다. 그 황성 연회가 열리기 전에 미리 준비했어야 했던 일인데……. 황제에게 휩쓸려 지내느라 어영부영 넘길 뻔했다.

마차에 몸을 기댄 헥시온이 창밖을 보는 아델을 가만히 쳐다봤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까워서 닳을 것 같은 기분에 숨이 막혔다. 닿고 싶고, 품에 안고 싶다. 모든 것을 제게 의지하게 하고 싶었다. 저열한 욕망과 그저 조금씩 날아오르려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바람이 속에서 공존했다.

“알리아 영애가 그냥 우연히 마약에 손을 대게 됐다고 생각해요?”

“아뇨. 그쪽에서 접근한 게 분명하겠지요.”

아델의 말에 헥시온이 지체할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아델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그곳에 있었다는 것은 영애 중 하나를 노렸다는 것이다.

‘그게 황제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저 일반 마약 업자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헥시온이 생각하며 아델을 쳐다봤다. 그녀도 퍽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빨리 해결하든가 해야겠군.’

그렇지 않으면 그녀의 시간을 전부 쓸데없는 마약 업자와 자작 영애 따위에게 빼앗길 것이 분명했다.

“아델, 여기서부턴 걸어가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요.”

아델의 대답에 헥시온이 마부 쪽의 마차 벽을 두어 번 두드렸다.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늦추더니 이내 멈춰 섰다. 헥시온은 기다렸다는 듯 먼저 마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가 아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에스코트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거 너무 과해요.”

“보통입니다.”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입을 닫았다. 보통의 영애들이 이런 에스코트를 받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녀로서는 전혀 익숙하지 않았지만.

“자, 얼른.”

헥시온이 작은 목소리로 재촉했다.

아델이 결국 못 이기겠다는 듯 낮게 웃으며 그가 내민 손에 제 손을 올렸다. 장갑 위로 닿는 손은 서늘했지만, 기묘하게도 안심이 됐다. 손을 잡은 두 사람이 시장의 인파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 *

“……서운합니다.”

움찔,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가던 아델이 난처한 표정을 했다. 뒤따라오는 헥시온은 척 보기에도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의 머리에 귀가 달려 있었다면 어찌나 축 늘어져 있을지 보지 않아도 상상이 갔다.

그렇다. 서운한 일이 생긴 지 어언 이틀째. 헥시온은 아주 입에 저 단어를 달고 살고 있었다. 요는 즉, 난생처음 만들어 본 팔찌 만들기에 장렬히 실패하고 차마 그것을 줄 수 없어서 깊은 호수에 던져 버린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도대체 누가 팔찌 만들기가 쉽다고 했던가. 원석을 사서 실에 꿰기만 하면 되지, 하고 간단하게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의 뺨을 아델은 사정없이 내려치고 싶어졌다.

“연습해서 다시 만들어 드릴게요.”

“나는 아델과 함께 손을 잡고 고른 원석으로 만든 팔찌가 좋았습니다.”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듯한 말투였다. 심지어 저 이야기도 벌써 여러 차례다. 손가락으로 세어 보면 열 번은 훌쩍 넘을 것 같았다. 이틀간 헥시온은 정말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주기에는…….’

웬만했으면 아델도 헥시온에게 선물이라고 줬을 거다. 그러나 난생처음 만들어 보는 팔찌는 두 개 모두 실패였다. 그뿐이랴. 괜히 낭비하고 싶지 않아 재료도 딱 맞춰 샀더니, 남는 것도 없었다.

조악하다 못해 조잡하고 너덜너덜한 팔찌를 줄 수는 없었기에 결국은 다음에 다시 만들어 주겠다고 권유했다. 그러나 헥시온은 그것도 괜찮다며 조잡한 팔찌를 요구했고, 실랑이를 벌이던 아델은 대공저에서 십 분쯤 걸으면 나오는 호수에 팔찌를 던져 버렸다.

그때 헥시온의 표정이란, 정말 다시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이었다. 언제나 여유로움과 능글맞음과 무표정한 얼굴이 대부분인 그에게서 경악이 느껴질 정도였다.

입을 떡 벌린 채, 눈은 던져진 팔찌에 파문을 일으키는 호수의 수면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떨리는 동공이 작은 원망을 담고 아델에게 닿고 나서야, 그녀는 살짝 후회했다.

‘그냥 주고 새로 만들어 줄 것을.’

결국, 백기를 든 것은 아델이었다. 그녀는 헥시온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같이 비석을 해독하러 가자고 권유했다. 고민하던 헥시온은 내키지 않는 표정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너무 조악했어.’

끈은 너덜너덜하지, 원석은 얼기설기 매여져 있지, 예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함께 재료를 고르던 헥시온의 표정이 상당히 즐거워 보였던 것을 떠올리면 제 행동이 너무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도 됐다.

“돌아가면 다시 시장에서 원석을 사 와서 만들어 줄게요.”

“그리고 이번엔 또 어디에 버리실 겁니까?”

“안 버려요! 이번엔 꼭 줄게요.”

“……정말이십니까?”

눈꺼풀을 천천히 내리깐 헥시온이 나직하게 물어왔다. 이쯤 되면 그가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말을 하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네. 약속할게요.”

축 늘어져 있던 헥시온의 입꼬리가 둥글게 말려 올라갔다. 처연하고 애처로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헥시온이 언제나와 같은 미소를 입가에 띤 채 아델을 내려봤다.

‘장난이었네.’

하여튼 감정을 숨기는 것에는 무척 능숙한 사람이다.

“약속하셨습니다.”

“네.”

팔찌를 한 백 개는 만들 수 있을 만큼 재료를 산다면 그중 하나는 성공하지 않겠는가. 실력이 안 되면 물량으로 승부하면 될 일이다. 아델이 생각하며 수풀을 걸었다. 조금 더 걷고 나니 세 번째 비석으로 향하는 ‘새벽의 오솔길.’의 시작점이 보였다.

“저번에 왔던 곳이 이곳이니까, 네 번째 비석은 여기에서 11시 방향에 있을 거예요.”

아델이 가져온 노트를 펼쳐 내용을 확인하며 말했다. 지금껏 해독한 세 개의 비석에 대한 해석이 적혀 있었다. 그리 자세하지 않은 약도도 첨부되어 있었다.

“지도를 직접 그리신 겁니까?”

“아……!”

아델이 얼굴을 확 붉히며 노트를 닫았다. 갑작스럽게 닫힌 노트를 본 헥시온의 눈이 살짝 커졌다.

“미안합니다. 멋대로 엿봐서 불쾌하셨습니까?”

“아뇨! 그건 아니고……, 부끄러워서요. 보시다시피 그림에는 전혀 소질이 없어요.”

아델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을 죽죽 그어 놓아 저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대충 표시해 놓은 지도였다. 책에는 그나마 몇 차례 덧대어 그려서 볼 만했지만, 노트에 그려 둔 것은 정말 낙서 수준이었다.

“저는 특징만 표시해 두신 게 알아보기 쉽고 좋았습니다. 조금만 더 다듬으면 훌륭한 지도가 될 거예요.”

“비석만 쓰인 지도를 누가 필요로 여길까 싶긴 하지만요.”

아델이 어깨를 으쓱였다. 고대어를 해독해서 적는다고 해도 정식적인 출판을 거치는 것도 아니라 평생 한 권의 책으로만 남게 될 확률이 높았다. 그게 누군가에게 전해져 언제 어느 사람이 읽게 될지도 알 수 없겠고.

“제게 선물해 주시면 소중히 간직할 자신 있습니다. 대대로 가보 삼지요.”

헥시온이 아델에게 낮게 속삭였다.

“……그건 부담돼서 생각해 봐야겠네요.”

“이런.”

헥시온이 낮게 혀를 차며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델은 애써 모른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11시 방향으로 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헥시온은 아델의 곁에 바싹 붙은 채 걸음을 옮겼다.

“너무 붙은 거 아니에요?”

“이 정체 모를 숲에서는 아델이 제가 손을 뻗으면 붙잡을 수 있는 범위에 있으셨으면 합니다.”

헥시온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 순간 떠오르는 두 번째 비석의 사태에 아델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요정과 인간의 경계 사이로 나뉘었을 때, 그녀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리고 그 역시도 상실감에 떨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헥시온이 날 버리고 이 숲을 떠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돌아올 방법을 찾아볼게요.”

“제가 당신을 버릴 일은 결코 없습니다. 하지만, 눈앞에서 사라지지 말아 주십시오.”

헥시온이 조심스럽게 팔을 뻗더니 망설이듯 그녀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아델이 앞을 향했던 시선을 옮겨 헥시온을 올려다보자 그가 퍽 붉어진 귓불로 조심스럽게 손을 붙잡아 왔다. 혹시 거부할까 봐 살짝 닿기만 했던 헥시온의 손은 아델이 거부하지 않자 슬금슬금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저랑 둘이 있을 때는 장갑을 빼시지 않을래요?”

“원하신다면 그러겠습니다.”

헥시온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숲의 중심부로 갈수록 나무가 더욱 울창해지고 빽빽해졌다. 적막은 그 영역을 넓혀서 갔고 스산함은 한층 더 짙어졌다. 어디서 울리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 이름 모를 새의 울음소리는 커져만 갔다.

“……길을 잘못 든 건 아니겠죠?”

아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보통은 삼사십 분 정도 걸으면 나왔던 비석이 이번에는 한 시간은 족히 걸은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높이 솟은 비석 비슷한 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헥시온이 걸음을 멈추곤 회중시계를 반대로 뒤집었다. 그가 반대쪽 회중시계 뚜껑을 열자 한쪽을 똑바로 가리키고 있는 나침반이 나왔다.

“방향은 아까와 같습니다. 제대로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딸깍.

헥시온이 다시 나침반을 닫았다. 그렇다고 같은 곳을 헤매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밝은 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둑어둑한 느낌이 강했다.

“……여기가 맞겠죠?”

아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산한 느낌이 등줄기를 뱀처럼 슥슥 스치고 지나갔다.

크르릉-.

어디선가 짐승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아델이 몸을 움찔 떨었다. 첫 번째 비석을 해독하려다 길을 헤맸던 날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도 헥시온이 구해 줬었지.

‘……정말, 엄청 무서웠었는데.’

두려움이 목까지 차고 올라서 소리조차 내지를 수 없을 정도로 무서웠다.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은 예정 없이 죽는 것보다도 훨씬 더 사람을 공포와 두려움에 질리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길을 헤매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헥시온이 말했다.

실제로 풀헤임 숲의 평면을 지도로 봤을 때 풀헤임 숲의 크기는 무척 광활했다.

제국의 가진 영토의 반만 한 크기인 것이 풀헤임 숲이었다.

“어쩌면 여기서부터가 본격적, 이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본격적이요?”

“애초에 이 숲은 비석이 다닥다닥 붙어 있을 법한 숲이 아닙니다. 하지만 세 번째 비석까지는 이 숲의 크기에 비하면 무척 가까이에 붙어 있었던 편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헥시온이 의문을 제기했다. 아델의 고개가 옆으로 슬쩍 기울어졌다가 이내 납득한 듯 목을 위아래로 주억이며 그의 말에 수긍했다.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사실 이런 식이라면 비석은 숲의 한 곳에만 모여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여태 다른 사람들이 찾지 못했을 리도 없고.

‘세 번째까지 비석만 해도 사람이 우연히 접할 수 있었지.’

실제로 그런 사례도 있었다. 아델이 하나둘 들어맞는 상황을 떠올리며 숨을 삼켰다. 그녀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크르르르…….

그때 또다시 들리는 짐승의 울음소리에 아델이 움칫 걸음을 멈췄다. 아까보다 울음소리가 가까워져 있었다. 아델은 헥시온과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짐승의 울음소리가 어디에선가 간헐적으로 들릴 때마다 아델의 몸이 잘게 떨렸다.

‘정말 싫다.’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냈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공포가 스멀스멀 몸을 타고 기어올랐다. 한 번 공포로 각인된 것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새삼스럽게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손을 잡고 있으니 아델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헥시온에게 전해졌다. 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기대시겠습니까?”

고개를 살짝 기울인 헥시온이 아델에게 권유했다.

“네? 아뇨.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혹 무서우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기꺼이 안고 가 드릴 테니.”

헥시온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굳어 있던 아델이 헛웃음과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실없는 소리에 기운이 쫙 빠졌다. 그래도 덕분에 긴장도 같이 풀린 것 같다.

“진심입니다.”

“……네?”

“물론 짐승 따위가 당신을 해하지는 못할 테지만요.”

헥시온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얼마나 강한지 아델도 잘 알고 있었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콰른 비프타를 한 손에 제압하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한참을 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기묘하게도 점점 숲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새가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되었다.

‘보통은…… 더 많아지지 않던가.’

인적이 드물수록 새나 작은 생명체의 모습은 자주 보이기 마련이다. 걸음을 내디디면 내디딜수록 내려앉는 적막에 불안감만이 샘솟았다.

불안함이 그녀의 머릿속에 경종을 울려댄다. 그리고 명백히도 살아 있는 식물의 수는 현저히 적어졌다. 울창하고 빽빽한 나무들은 여전히 가득했지만, 자잘한 꽃이나 잡초 등은 잘 눈에 띄지 않게 됐다.

‘게다가 공기도 탁해…….’

숨을 쉬는 것도 묘하게 힘겨웠다.

갑자기 눈앞이 한 번씩 두 개로 갈라졌다. 아델이 황급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제야 두 개로 나뉘었던 시야가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하아, 하아…….”

아델의 호흡이 거칠어지자 헥시온이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얼굴색이 나쁘군.’

그가 아델의 손을 꽉 잡은 채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왜 이러지?’

아델이 인상을 찡그렸다.

벌써 체력이 떨어졌나?

문득 드는 의문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아델이 가빠지는 호흡을 애써 다독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그다지 빠르지 않은 속도로 평지를 걸은 것뿐이다. 숲에는 딱히 언덕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아델, 괜찮습니까?”

“……네. 조금 숨쉬기가 힘들어서…….”

아델의 호흡이 조금 더 가빠졌다. 산소가 부족한 것인지 계속해서 눈앞이 흐릿해졌다가 두 개로 나뉘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나무가…….’

두 개인가?

수백 개인가?

나무들이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확실한 것은 탁한 공기와 숨을 쉬기 어려워진 현실뿐이다. 점점 사고가 느려졌다. 걸음도 같이 느려지는 듯했다. 걷는 것조차 호흡이 가빠져서 아델의 걸음이 자연스럽게 멈췄다. 아델이 천천히 무거워지는 고개를 숙였다.

턱-.

굳은살이 박인 큼직한 손이 아델의 코와 입을 덮었다. 아델이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든다.

“헥시온……?”

코와 입이 부드럽게 막힌 아델이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헥시온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아무래도 이 주변에 호흡기로 들어오는 독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허리를 굽혀 아델의 코앞에서 낮게 속삭였다. 아델이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이며 헥시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아델.”

평소라면 또렷하게 들릴 헥시온의 목소리가 윙윙거리는 잡음과 함께 들렸다. 제대로 들릴 것 같으면 뭉개져서 들리고 눈꺼풀은 계속해서 무거웠다.

“네…….”

아델이 한참 만에 대답했다.

‘졸려…….’

눈을 감고 싶은데, 감아선 안 될 것 같아서 억지로 눈에 힘을 줬다. 헥시온이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러곤 그대로 아델의 손을 들어 그녀의 입에 가져다 댔다.

“입을 잘 막고 계실 수 있습니까? 최대한 마시지 마십시오.”

“……졸려.”

“안 됩니다.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하는데 길을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저를 도와줘야 해요.”

헥시온이 아델을 달래듯 조곤조곤 설명했다.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번째 비석을 찾아야 합니다. 줄곧 그랬듯 그곳에는 뭔가 해답이 있겠지요.”

아델이 양손으로 입을 꾹 막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헥시온이 아델의 허벅지 밑에 오른팔을 넣어 그녀를 안아 올렸다. 아델이 무거운 목을 그의 어깨에 툭 기대었다.

“헥시온은 괜찮아요?”

입을 막은 덕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아델이 물었다.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그녀가 필사적으로 버티며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무거운 눈꺼풀을 결국 감아 버릴 것만 같았다.

“난 웬만한 독에는 다 내성이 있습니다. 아직은 생명을 위협하는 종류의 독은 아닌 듯합니다.”

“……‘아직은’이라뇨?”

“별것 아닌 독이라도 여러 개의 독이 섞이면 보통 치명적인 독이 되곤 합니다.”

아델이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이 독은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시시각각 변하는 것 같군요.”

헥시온이 아델과 대화를 나누며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적어지는 식물과 이제는 들리지도 않는 짐승과 새의 울음소리까지.

‘이보다 안쪽은 좀 위험하겠는데.’

아델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이성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는 것도 기특한 일이었다.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발을 들이려던 헥시온이 걸음을 멈췄다.

“아델.”

헥시온이 아델을 불렀다. 어떻게든 버티려고 노력하느라 흐트러져 있던 숨소리가 점점 고르게 퍼져 가고 있었다.

“아델.”

그가 다시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직은 색색거리는 숨소리인 것을 보아 잠만 자는 모양이지만, 이게 언제 위험하게 바뀔지도 몰랐다. 그걸 바로 확인하려면 아델이 깨어 있어서 스스로의 이상함을 직접 말해 주는 것이 빨랐다.

‘해독제를 챙기지 않은 것이 불찰이군.’

아무리 자신에게는 대부분의 독이 무효하다고 해도 아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네 번째 비석으로 가는 길이 독기로 가득 차 있을 줄이야.”

나무에서 뿜어내는 독기가 분명했다. 오는 내내 유일하게 건재하고 무사했던 것은 잡초나 꽃이나 독버섯 따위가 아니라 나무였다. 이런 독기 속에서도 파릇파릇한 잎사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무에겐 독이 전혀 듣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헥시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안쪽은 생명이 위험할 것 같군.’

일정 선을 경계로 황무지가 보였다. 꺼림칙한 보랏빛 안개가 눈에 보일 정도로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아델.”

그가 아델을 안은 채 어깨를 한 번 흔들었다. 으음, 작게 반응한 아델은 아직은 괴로워 보이거나 문제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제 어깨에 기댄 채 색색거리는 아델은 퍽 편안해 보였다.

‘훅센라이트도 분명 인간일 테고, 그는 이곳을 통과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

그렇다는 건 저 독기로 가득한 보랏빛 안개를 통과할 방법이 있다는 거다. 헥시온은 조심스럽게 아델을 보랏빛 안개가 넘실거리는 경계선과 멀리 떨어진 곳에 눕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헥시온이 허락을 구하듯 아델에게 속삭였다. 다행히 주변에 인기척이나 생물의 기척은 없다. 헥시온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제 허리춤에 찬 검을 한 번 매만지곤 그대로 보랏빛 안개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몸이 넘실거리는 보랏빛 안개에 순식간에 집어 삼켜졌다.

* * *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음에 헥시온이 호흡을 멈췄다. 사방에 위험한 독기를 품은 것이 분명한 안개가 넘실거렸다. 독에 내성이 있는 그로서도 호흡 한 번 한 번이 버거울 정도였다. 그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입을 막았다. 헥시온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너무 안일했나.’

하지만, 비석이 있는 위치를 대략이나마 가늠이라도 해야 했다. 아델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도 없었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향할 위험 요소는 최대한 배제하고 싶었다.

“역시 해독제를 가져왔으면 좋았을 것을.”

‘독 안개라니…….’

사실 웃음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헥시온은 지금껏 위험한 곳은 어디든 다녀와 봤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 안개로 둘러싸인 숲을 걸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델을 데리고 들어왔으면 큰일 날 뻔했군.”

헥시온이 손으로 가린 입술 사이로 중얼거렸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들어서고 중독이 되는 순간 십 분도 되지 않아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 뻔했다.

‘……시체도 있고.’

언제의 시체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닥에 굴러다니는 해골이 보였다. 헥시온이 퍽 심드렁한 눈으로 해골을 눈으로 훑고는 조금 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스락.

그 순간 독 안개 한가운데에서 들린 소리에 헥시온이 몸을 홱 돌렸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바람 소리라고 치부하기에는 이 안은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분명 뭔가 움직였다.’

앞으로 걸어가던 헥시온이 걸음을 멈춘 채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바스락.

헥시온이 가만히 서 있자 이번에는 그의 뒤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기다리던 헥시온이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휙, 검은 무언가가 헥시온을 피해 뜀박질을 했다.

끼이이잉-!

헥시온이 손으로 잡아챈 것을 내려다봤다. 겁에 질려 끽끽 소리를 내며 힘없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토끼?”

뒷발에 힘을 준 채 헥시온의 팔을 퍽퍽 내리치는 것은 토끼였다. 가소롭지도 않은 뒷발질에 그가 헛웃음을 머금었다. 새하얗고 동글동글한 꼬리가 잔뜩 성이 난 모양새다.

‘왜, 토끼지?’

눈을 두어 번 깜빡인 헥시온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너무 뜬금없는 것을 만나서 황당할 정도다. 왜 갑자기 이 독 안개 속에서 토끼가 튀어나오는가. 독에 익숙해진 짐승 같은 것을 생각했던 헥시온으로선 맥이 탁 풀렸다.

“……왜 멀쩡하지?”

이 독 안개는 강한 독이 호흡기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나마 독에 익숙한 헥시온이니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것이지 그도 몸이 무겁고 눈앞이 흐릿해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토끼라니. 그것도 무척이나 순진무구한 눈의 토끼였다. 위험 요소라고는 조금도 없는 새하얀 털에, 새빨간 눈을 한 쫑긋거리는 귀를 가진 토끼.

‘뭔가 있긴 한가 보군.’

이곳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게 해 주는 무언가가.

헥시온이 한 손으로 잡아낸 토끼를 든 채 이리저리 살폈다. 특별히 뭔가 문양이 있거나 마법 따위로 보호를 받는 건 아닌 듯했다. 방금까지 풀숲에서 뛰놀기라도 했는지 발의 새하얀 털이 녹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열매를 먹었는지 붉은 과즙이 입가에 조금 묻어 있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평범한 토끼인 것 같은데…….’

눈을 가늘게 뜬 헥시온이 토끼를 뒤집어 보기도 하고 그대로 다시 원래대로 돌리기도 했다. 토끼는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이미 눈치챈 듯 몸에서 힘을 뺀 채 눈치만 살살 보고 있다.

‘이 숲에 있는 것들은 다 기묘하군.’

영악하게도 정말 눈치라도 보는 듯 구는 토끼가 신기했다.

“뭐가 다른 걸까.”

날카로운 시선이 토끼를 훑었지만, 별달리 특별한 건 없다. 고민하던 헥시온이 토끼를 바닥에 살짝 던지듯 내려놨다. 특유의 반사 신경으로 바닥에 착지한 토끼가 두 발로 선 채 헥시온을 빤히 올려다본다. 그러곤 이내 몸을 돌려 힘껏 내달리기 시작했다. 헥시온이 곧장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지끈-!

뛰어가는 토끼를 따라 한참을 안으로 들어가던 도중, 심장에 통증이 일었다. 헥시온이 숨을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필 이럴 때…….’

아델과 떨어진 지 너무 오래된 것이 분명했다.

‘약을 잊어버리고 왔어.’

늘 약을 챙기는 편이었는데, 그녀가 곁에 있고 난 뒤부터는 약이 필요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완전히 잊고 있었다.

“멀쩡해진 것도 아닌데…….”

헥시온이 악문 잇새로 중얼거리며 자신을 탓했다. 안일했다. 식은땀이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다. 무거워진 몸과 흐릿해진 시야에 이은 칼럿의 후유증까지.

‘……뭐지?’

그 순간 보랏빛 안개로 가득하던 숲의 답답함이 조금 가셨다. 고개를 들자 저 멀리 빛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꽃밭?”

새빨갛고 붉은 열매가 가득 보이는 기묘한 꽃밭이었다.

헥시온은 심장을 부여잡은 채 힘겹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와서 돌아가기엔 여기까지 온 시간이 아까웠다.

“물러설 곳 없다, 이건가.”

그는 나무를 짚으며 앞으로 걸었다.

일단, 저 꽃밭이 토끼를 독에서도 움직이게 해 준 해독제이길 바라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평소라면 오 분이면 걸었을 거리를 헥시온이 꾸역꾸역 숨을 삼켜가며 걸어 들어갔다. 휘청거리는 걸음이 무척이나 위태로웠다. 흐릿해지는 시야를 헥시온이 고개를 털어가며 애써 걸음을 옮겼다.

“……하.”

독 안개 숲을 빠져나온 헥시온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는 서 있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주저앉은 헥시온의 허벅지 위로 꽃잎 몇 장이 내려앉았다.

짹, 짹짹.

헥시온이 고개를 들었다. 붉은 열매가 열린 꽃과 열매로 가득한 꽃밭 한가운데, 커다란 비석이 웅장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옆으론 햇살이 쏟아져 내렸고 시원한 바람이 훅 불어 닥치기도 했다.

‘토끼뿐만이 아니었군…….’

마치 온갖 생명의 휴식처라도 되는 양, 주변은 숲속에서 사는 짐승이나 동물일 것이 분명한 녀석들로 가득했다.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짐승부터 작은 초식 동물까지.

마치……

“마치 낙원 같군.”

이상적인 낙원을 보는 느낌이었다.

육식 동물과 초식 동물이 어울리고, 먹이사슬 또한 이곳에서는 무용지물인 듯했다. 마치 동물들의 휴식처처럼 느껴졌다. 침입자인 게 분명한 인간인 헥시온을 보면서도 동물들은 흘긋 시선을 한 번 줄 뿐, 덤벼들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이 열매인가?”

꽃 사이사이로 붉은 열매가 달린 꽃이 있었다. 먼저 익어 꽃이 지고 과실이 열린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곳에 있는 녀석들은 이걸 먹은 것이 분명했다.

‘인간에게도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헥시온이 열매를 뜯어 입에 넣고 씹어 삼켰다. 새콤달콤한 것이 확실히 입맛을 돋우는 데에는 탁월한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나른하고 무거웠던 몸이 열매를 씹으면 씹을수록 원래대로 돌아가는 듯했다. 헥시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럿의 후유증이야 늘 익숙한 통증이니 아직 참을 만했다.

‘독의 해독제는 이거였군.’

헥시온이 그것을 두 뿌리 정도 꺾어 주머니에 넣었다. 필요한 것을 찾았다면, 아델의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가 할 다음 일이었다. 열매를 챙긴 헥시온이 곧장 몸을 돌렸다. 여유로워 보이는 동물들의 한쪽에는 작은 샘물도 있었다. 초식 동물과 육식 동물, 그 모든 것을 한입에 집어삼키는 포식자까지 어우러져 물을 마시고 있다.

헥시온이 그것을 한 번 힐끗 보고는 이내 완전히 몸을 돌렸다. 그는 독 안개 안으로 다시 스스로 발을 들이밀었다. 숨을 참고 독 안개에 스스로 집어 삼켜진 헥시온은 그 한가운데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폐부까지 들이닥치는 독 안개에도 머리가 어지럽거나 호흡이 가빠지는 건 전혀 없다.

‘처음 보는 꽃이었는데.’

적어도 해독제로는 처음 보는 녀석이다. 그는 다양한 해독제에 박식했으나 붉은 열매 종류의 해독제는 처음 들어 봤다. 애초에 단일 열매만으로 이토록 효과가 좋은 해독제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비석은 찾아서 다행이군.”

숲을 더 헤매지 않아도 되는 건 불행 중 다행인 일이었다. 이 숲은 정말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애초에 해독제를 구하기 위해서 독 안개를 넘어야 한다는 것부터 이해가 되질 않았다.

‘다른 길이 있었던 건가?’

미간을 좁힌 헥시온의 걸음이 이번에는 빠르게 독 안개를 넘어섰다. 비석으로 향하던 때와는 다르게 돌아가는 길은 속도가 붙었다. 그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더니 종국에는 결국 뛰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게 됐다.

“아델.”

그는 아델을 부르며 독 안개를 빠져나갔다. 답답했던 시야가 확 밝아졌다. 헥시온이 그제야 폐부를 채우는 맑은 공기에 긴 숨을 뱉었다. 그는 쉴 틈도 없이 곧장 누워 있는 아델에게 달려갔다.

색색거리며 숨을 내쉬는 아델은 아직도 잠에서 깨지 못한 듯했다. 이 공기를 계속 마시고 있으면 잠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같은 독이지만, 즉사냐 아니냐의 차이군.’

어느 쪽도 숲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살 가망이 없었다. 네 번째 비석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위험하다면 비석에 귀띔이라도 해 놨으면 좋았을 것을. 본 적도 없는 영웅에 대한 원망이 조금 치솟았다.

“아델.”

헥시온이 그녀를 흔들었다. 그러나 곤히 잠에 빠진 아델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몇 차례 그녀를 불러 봐도 반응이 전혀 없었다. 헥시온은 곤란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열매가 아니었으면 수월했을 텐데.’

그가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망설였다. 딱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는 사람을 상대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깔때기라도…….’

생각하던 헥시온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깔때기도 없거니와 있어도 그건 아니다. 그는 뿌리째 뽑아온 열매를 내려다보다가 곧 널찍한 돌에 몇 차례 으깼다.

즙이 새어 나오자 으깨진 열매를 모은 헥시온은 이내 그것을 아델의 입속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그리고 헥시온은 그대로 몸을 굽혀 아델의 몸을 반쯤 일으키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으으…….”

아델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파고든 혀가 모아 둔 열매를 찾아 그녀의 목 안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아델의 목이 반사적으로 몇 차례 움직였다. 입 안에서 사라진 열매를 확인한 헥시온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한 번 훑곤 느릿하게 떨어졌다.

“아델.”

헥시온이 아델을 작게 불렀다. 그녀의 입술에 붉은 열매의 즙이 묻어 있었다. 헥시온이 황급히 손을 뻗어 엄지로 입술을 훑으며 즙을 닦아냈다.

“아델?”

그가 다시금 부르자 아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아델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렸다. 아델은 막이라도 씌워진 것처럼 흐릿한 시야에 몇 차례 눈을 깜빡였다.

코끝에 풀 냄새와 꽃향기가 섞인 익숙한 체향이 스쳤다. 아델이 한 번 더 눈을 깜빡이자 막이 걷힌 듯 시야가 또렷해졌다.

“헥시온?”

“네. 어디 아픈 곳은 없습니까?”

“……몸이 좀, 나른하고 무거워요.”

“수면 효과가 있는 독이 퍼져서 그럴 겁니다. 정신을 차리셨으니 내가 당신을 안고 비석이 있는 곳까지 갈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어쩐지 조금 조급해 보인다.

피부로 느껴지는 조급함에 아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제 몸이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을 받았다. 바로 세워진 몸과는 다르게 고개는 무겁게 헥시온의 어깨에 그대로 내려앉았다. 아델이 뜨거운 숨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헥시온의 몸이 어쩐지 뻣뻣했다.

‘가까워…….’

목덜미에 바로 닿는 숨결에 헥시온이 몸을 긴장시켰다. 그는 다시 보랏빛의 독 안개를 바라봤다. 그가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아델, 몸이 이상하거나 호흡이 힘들거나 그러면 반드시 말씀하셔야 합니다.”

“……네.”

“꼭입니다. 반드시 참지 말고 내게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헥시온의 신신당부를 들으며 아델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밖에 없다. 입 안을 맴도는 새콤달콤한 향을 보아 헥시온이 무언가 먹인 것은 분명했다.

아델이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어떻게?’

점점 돌아가기 시작하는 사고 사이로 의문이 파고들었다. 헥시온은 어쩐지 다급한 걸음으로 걷고 있다. 눈앞에는 보라색의 난생 처음 보는 이상한 안개가…….

‘안개?’

아델이 눈을 크게 뜨며 무거운 목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었다. 사방팔방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로 가득하다. 그것도 일반적인 안개는 아니었다. 그냥 보기에도 꺼림칙한 짙은 보랏빛의 안개다. 헥시온의 표정은 굳은 채로 쉼 없이 자신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 안개…… 독이에요?”

헥시온이 힐끗 안고 있는 아델을 바라봤다. 목덜미에 닿지 않은 숨결이 아쉬우면서도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괜찮은 것 같군.’

아까 먹인 열매가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효과를 발휘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빠르게 움직인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넉넉하게 가져왔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도 들었다.

“세상에, 잠…… 잠깐. 전 멀쩡한데요?”

“해독제를 찾았습니다.”

헥시온이 묵묵히 대답했다. 아델이 아직 멀쩡한 것을 보니 해독제가 확실히 제 효능을 발휘한 것은 분명했다. 그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해독제라뇨……?”

“독 안개를 통과하는데 웬 토끼 한 마리가 멀쩡히 이 안개를 뛰어가기에, 그것을 쫓았습니다.”

“아…….”

아델이 짧게 탄성을 흘렸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랬구나, 하며 수긍하려던 그녀의 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델이 입을 가린 채 천천히 호흡하며 흔들리는 시선으로 앞을 보고 있는 헥시온을 쳐다봤다.

“헥시온. 독 안개를 통과했다고요?”

“……네.”

헥시온이 두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아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방금까지만 해도 느린 달팽이처럼 굴러가던 머릿속이 제 궤도를 찾아갔다.

“어떻게요?”

“전 독에 내성이 있습니다.”

“그게 뭔지도 모를 독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는 이유가 되진 않아요.”

“웬만한 독에는 전부 내성이 있으니 무사할 거라는 확신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헥시온이 안심하라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반달로 곱게 휘어진 눈꼬리와 자연스럽게 올라간 입꼬리. 탓할 곳 없는 완벽한 미소였다. 그러나 아델은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저 웃음이 그저 그려내고 만들어 낸 웃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저것은 상대를 안심시키려는 노력 끝에 터득하게 된 미소다. 아델 역시 그런 적이 있으니, 헥시온의 진실을 눈치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조금 더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겨 주세요. 절 자유롭게 해 준다고 했잖아요. 그러려면 당신이 다치지 않아야 해요.”

“네. 저는 죽지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만약, 제가 죽더라도 제 재산과 권력, 그리고…….”

헥시온이 말끝을 흐렸다가 이내 결심한 듯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죽더라도 최소한 당신이 그들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조치해 두었습니다.”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게 아니야.’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런 말이 아니었다. 그런 사후의 일 따위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무엇보다…….”

흐릿한 미소를 띤 헥시온이 말끝을 늘렸다.

“난 당신이 무사하단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차고 넘치는 대가를 받았습니다.”

“왜…….”

아델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느릿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자 자연스럽게 헥시온의 어깨에 이마가 닿았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은데, 어떤 말도 쉽게 나오질 않았다.

“왜 저한테 그렇게 잘해 줘요? 제가 헥시온의 목숨까지 걸만한 가치가 있는 건가요?”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 고통이 싫어서 곁에 두려고 하는 거라면, 아델은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아픈 것을 싫어하니까.

심지어 칼럿은 불치병이다. 어떤 경로로 어떻게 걸리게 됐든 간에 개개인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는 없는 병이었다. 그것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죽으면 무용지물이 된다. 죽으면 복수도 지금껏 쌓아 왔던 어떤 것도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런데 왜…….

“죽었으면 어떡하려고요.”

“내가 죽으면 당신을 데리고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겠죠.”

“…….”

“살아 돌아온 지금은 아델을 살릴 방도를 찾아온 스스로가 무척 대견하군요.”

헥시온이 자신이 남겨 둔 흔적을 쫓아 천천히 독 안개 숲의 깊은 쪽으로 계속해서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델의 안색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먼저 먹은 내가 아직 괜찮으니 아델 쪽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왜…….”

“나갈 방도도 없는 새까만 어둠만이 가득한 장소에서 갇혀 지내다가 빛을 찾고 온기를 찾았습니다.”

헥시온이 나직하게 말했다.

“평생 닿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에 닿았는데, 그것에 목숨을 걸지 않을 이유가 있을 리가요.”

어깨에 묻은 이마가 그의 걸음걸음마다 들썩이며 흔들렸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자 숨결이 닿은 곳이 퍽 뜨거워졌다.

아델이 눈을 질끈 감았다.

“헥시온이 나으면 전 떠나도 되는 거죠?”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그렇다, 고 말하지는 않는다. 헥시온은 언제나 확답을 주진 않았다. 그저 당신이 원한다면, 아델이 원한다면, 언제나 그런 식으로 빠져나갔다. 그는 언제나 아델에게 상기시킨다. 칼자루는 아직도 그녀가 쥐고 있다는 사실을.

“비석은 어디에 있었어요……?”

“해독제인 열매가 있는 곳에 있었습니다.”

아델이 화제를 돌렸다. 헥시온은 모른 척 그저 그녀의 질문에 묵묵히 대답했다. 이제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됐는데, 헥시온은 그녀를 내려놓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독 안개 속 비석이라니…… 정말 무섭네요.”

“나도 깜짝 놀랐습니다.”

“귀띔이라도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비석에는 독 안개에 대한 이야기는 눈곱만큼도 적혀 있지 않았다. 독을 조심하라고 한마디만 적어 뒀어도 뭔가 대비책을 마련했을 텐데 그조차도 없었다.

“나중에는 짐승이 파수꾼으로 등장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델이 키득거리며 낮게 웃었다. 그러다가도 금세 웃음기가 가셨다. 썰물처럼 서서히 빠져나가는 웃음 끝에 그녀의 표정에 남은 것은 불안함이었다.

“……설마 그러진 않겠죠?”

아델이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 아델의 기색을 눈치챈 듯 헥시온이 일부러 지친 표정을 만들어내며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전 이제 이 숲에서 어떤 상식도 기대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네 번째 비석의 놀랄 점은 가는 길에 독 안개가 뿌려져 있다는 것뿐인가요?”

장난기 짙은 헥시온의 표정에 아델이 포기하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물음에 헥시온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광경을 봤다. 독 안개로 둘러싸인 숲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낙원이 있었습니다.”

“낙원이라뇨?”

“보면 알 겁니다.”

헥시온이 말을 아꼈다. 굳이 말을 할 필요도 없이 독 안개의 끝이 보였다.

“공기가 조금 바뀌었네요?”

“거의 다 왔습니다.”

“그래서 언제쯤 내려 주실 거예요?”

아델이 꾹꾹 눌러 담았던 물음을 그제야 던졌다. 언제 내려 주나 계속 기다렸지만, 그는 절대 아델을 내려 줄 기미가 없었다. 그제야 헥시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낙원에 도착하면요.”

거의 동시에 헥시온이 독 안개 바깥으로 발을 내밀었다. 탁하고 답답했던 공기가 순식간에 맑아졌다.

아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둑하고 한 치 앞도 보기 힘들었던 독 안개를 빠져나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햇살과 꽃향기와 새콤달콤한 향기가 폐부를 찔렀다.

“이곳입니다.”

“……허어, 이게 무슨…….”

아델이 입을 떡 벌린 채 눈을 깜빡였다. 체통이고 예의고 지킬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한데 어우러진 수많은 식물과 짐승과 새들이 시선을 빼앗았다. 새하얀 꽃과 사이사이 보이는 붉은 과실이 달린 식물이 눈에 띄었다. 아델이 고개를 기울였다. 향을 보아하니 헥시온이 먹인 것이 이 열매인 모양인 듯했다.

“헥시온, 이게 그 해독제예요?”

“네. 맞습니다. 구하느라 애를 좀 먹었지요.”

헥시온이 독 안개를 헤매던 것을 생각하며 대답했다. 아델이 입을 꾹 다문 채 말없이 그와 열매를 번갈아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도통 이유를 알 수 없는 시선에 참다못한 헥시온이 결국 아델에게 물었다. 아델이 아주 천천히 한 번 더 열매와 헥시온을 번갈아 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이거 여기로 오는 길에 꽤 있지 않았어요?”

“아뇨.”

헥시온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너무 단호해서 아델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아닌데, 분명히 있었는데…….’

너무 단칼에 잘려서 정말 없었나 생각하던 아델이 고개를 내저었다. 분명히 있었다. 열매가 빨간 색이었어서 조금 더 선명하게 기억했다.

“있었어요. 나무 밑동이나 눈에 띄지 않는 곳 사이사이에…….”

“없었습니다.”

“아니 있었…….”

“아닙니다.”

유독 단호한 헥시온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헥시온이 부릅뜬 눈으로 아델을 보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인정하기 싫어하는 표정이다.

그제야 그가 원하는 답을 찾아냈다. 아델이 볼 안쪽을 깨물며 눈에 힘을 줬다. 웃음을 참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 결과였다. 세상에, 저 사람이 저렇게 어린애처럼 굴 줄이야. 예상도 못 했다.

“……제가 잘못 봤나 보네요.”

고개를 돌린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헥시온이 퍽 지친 표정으로 근처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포르르-.

날아온 알록달록한 새 세 마리가 헥시온의 머리와 오른팔에 내려앉았다. 그 어울리지 않는 불균형적인 모습에 아델이 웃음을 터뜨렸다.

따스한 햇살이 포근하게 낙원에 내려앉았다. 정말 낙원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아델이 헥시온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지쳤어요?”

“네. 지쳤습니다. 그러니 안아 봐도 됩니까?”

헥시온이 은근슬쩍 옆으로 붙으며 나직하게 물었다. 떨어졌던 온기가 다시 붙어오자 아델의 표정이 살짝 붉어졌다.

“안 된다고 하면 안 할 건가요?”

“…….”

아델의 질문이 정곡을 찌르기라도 한 듯 헥시온은 대답이 없었다. 도리어 대답 대신 오른쪽 팔을 슬금슬금 뻗더니 아델의 허리를 슬쩍 감쌌다.

“안 됩니까……?”

속눈썹을 내리깐 헥시온이 퍽 처연한 얼굴로 물었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여전히 없다. 아델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키들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들썩이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헥시온이 가만히 내려다봤다.

“구해 줘서 고마워요.”

아델이 말했다. 눈동자를 도르륵 도르륵, 두어 번 굴린 그녀는 잠시 망설인 끝에 헥시온의 팔에서 벗어나 그를 바라보는 자세로 몸을 돌렸다. 그러곤 그대로 두 팔을 양옆으로 벌렸다.

“뭡니까? 이 꿈같은 건.”

눈을 크게 뜬 헥시온이 벅찬 표정으로 물었다. 아델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감사 인사요. 싫으면 말…….”

덥썩-!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헥시온의 몸이 벌어진 팔 사이로 쑥 들어오더니 한쪽 팔로 덥석 아델을 끌어안았다. 그 행동이 어찌나 빠른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싫다고 한 적 없습니다.”

“망설이시길래요.”

아델의 말에 헥시온의 귓불이 살짝 붉어졌다. 그가 쥐구멍에 숨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냥…… 꿈을 꾸고 있나 했을 뿐이지요.”

그가 웅얼거리며 자신을 변호했다.

아델은 대답 대신 손을 움직여 헥시온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망설이듯 움찔거리던 손바닥이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이내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헥시온은 조심스레 아델을 안은 팔에 힘을 줬다. 욕심이 나는 것이다. 이렇게 아델을 품에 안고 있다 보면 제 것이 된 것만 같은 충만함이 들었다. 이 왼쪽 팔의 저주가 그녀를 붙들어 주는 유일한 이유라면…… 헥시온은 그 사실마저도 다행이라고 기쁘게 여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께 얼마큼 잘해 주어야 당신이 나를 떠나지 않을까?’

헥시온의 입술이 아델의 목덜미에 닿았다. 아델은 움칫거리며 몸을 떨었지만 그렇다고 헥시온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이것이 아델이 말하는 ‘욕심을 받아 준다.’라는 것이겠지만 그 때문에 그는 다른 욕심이 생겼다.

주변에는 쏟아지는 햇살을 즐기는 동식물로 가득했고 지저귀는 새소리가 평화로웠다. 헥시온은 느릿하게 이를 드러내 그녀의 목덜미를 베어 물었다.

“읏……!”

한껏 베어 문 살결을 빨아당기자 아델의 입에서 조금 놀란 듯한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녀가 다급히 헥시온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뭐, 뭐…… 뭐 하는 거예요?!”

“이미 서로 모르는 게 없는 사이에 뭘 그렇게 부끄러워합니까.”

헥시온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띤 채 말했다. 어깨를 으쓱이는 그의 뻔뻔한 표정을 보며 아델이 목덜미를 손으로 꾹 누른 채 입술을 뻐끔거렸다.

아델이 황당함에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말도 없자 헥시온의 뻔뻔한 표정이 조금 무너져 내렸다. 이윽고 눈동자를 굴리던 헥시온이 굳게 닫아 둔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합니다. 맛있어 보였습니다.”

나온 대답이 더 가관이다. 아델의 입이 다시 떡하니 벌어졌다. 같은 사람의 피부가 뭐가 맛있어 보인단 말인가.

“……혹시 식성 중에 인육을 먹는 것도 있어요? 독에 당했다거나?”

“……진심입니까?”

헥시온의 시선이 아델에게 닿았다. 그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사실 조금 우스운 얘기였다. 아델은 결국 말없이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근데요, 헥시온.”

“네.”

“비석을 찾은 것도 좋고 눈앞에 비석이 있는 것도 좋은데…… 그 근처에 있는 짐승이 좀 무섭지 않아요?”

“저 정도는 제가 처리할 수 있습니다.”

힐끗 비석 근처를 지키듯 엎드려 눈을 감고 있는 포식자들을 훑어 본 헥시온이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렇기야 하겠지만…….”

사람과 검을 맞대며 살아온 헥시온이다. 겨우 금수 따위가 상대가 될까. 아델도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래선 안 될 것 같다는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것이지만.

“여긴 너무 평화로워요. 괜히 피를 보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부스럭.

뒤쪽에서 들린 소리에 아델이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털로 뒤덮인 토끼가 귀를 쫑긋이며 붉은 눈으로 아델을 빤히 올려다봤다.

“토끼?”

“이 토끼입니다. 독 안개 속을 뛰어다니고 있던 게.”

“아하. 이 애가 절 살려 줬군요.”

아델이 손을 뻗자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던 토끼가 도도도 아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아델과 헥시온을 한 번 번갈아 보더니 다시 도도도 아델의 손에 조금 더 다가왔다. 그러더니 제 앞발을 턱, 아델의 손에 올리는 게 아닌가. 그러곤 그 상태로 또 뒷발로 선 채 아델을 살피듯 빤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것과 잠시 놀고 계십시오. 혹시 모르니 비석까지 갔다 와 보겠습니다.”

“아니, 같이 가요.”

아델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헥시온이 고개를 저었다.

“비석을 해독해셔야 하니 체력을 비축해 두십시오.”

“아니, 비석 해독하는데 무슨 체력이…….”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헥시온은 이미 저만치 멀리 가 버렸다. 아델은 불만스럽게 얼굴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괜한 변명이라는 것이 빤히 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그것이 그녀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속이 쓰렸다. 그 빤히 보이지만, 거짓으로 덮고 있는 감정의 이름을 알 것만 같아서.

“마음이란 건 참 어려운거네.”

그녀가 기묘할 정도로 얌전한 토끼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며 하소연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알고 있어도 대답해 줄 수 없고 모르면 알아내기조차 힘든 것이다. 아델은 끝을 보고 있었고 대답을 해 주는 것은 그에 대한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크르르르-!

크르릉--.

갑작스럽게 들린 소리에 아델의 몸이 움찔 떨렸다. 제일 먼저 도망갈 줄 알았던 토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델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리어 화들짝 놀란 아델은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헥시온!”

눈앞에 펼쳐진 경악스러운 상황에 아델이 다급하게 헥시온을 불렀다. 헥시온 역시 낭패감이 어린 표정이다. 아델이 경악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평화롭게 쉬고만 있던 짐승들은 어느샌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한껏 날을 세운 채 헥시온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 눈빛이 무척이나 흉흉했다.

“아델, 거기서 절대 움직이지 마십시오.”

헥시온은 그 와중에도 아델을 먼저 신경 쓰며 말했다. 아델은 숨을 삼킨 채 굳어 있었다. 흉흉한 짐승들 때문에 저도 모르게 아래에 있는 토끼를 안아 들었다.

‘어쩌지?’

숨을 삼킨 아델이 눈동자를 굴렸다.

“헥시온……!”

발만 동동 구르고 있으려니 헥시온이 슬쩍 아델을 향해 미소 짓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주 느리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한껏 송곳니를 드러냈던 짐승의 으르렁 소리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들은 내가 비석에 가까이 가는 걸 내켜 하지 않는 것 같군요.”

헥시온이 두어 걸음 더 비석에서 멀어지자 확실히 으르렁거림이 잦아든다.

아델이 그 모습을 보며 몸을 굳혔다. 짐승들은 당장에라도 헥시온에게 달려들어 그를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위협은 점점 줄어들었지만, 짐승들의 흉흉한 시선은 여전했다.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다. 그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러나는 헥시온이 대단해 보였다.

깡충.

그 때 토끼가 아델의 품에서 뛰어내렸다. 귀를 쫑긋 움직이는 녀석은 깡충깡충 비석으로 뛰어갔다.

“잠……!”

아까와는 다르게 흥분한 저 짐승들에게 당장에라도 잡아먹히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헥시온이 꽃밭을 벗어나는 것과 동시에 꽃밭으로 뛰어든 토끼가 폴짝폴짝 뛰어 비석 앞에 뒷다리로 버티고 섰다. 그러곤 눈을 댕그랗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본다. 짐승들은 그런 토끼를 힐끗 쳐다보곤 다시 아까와 마찬가지로 엎드리곤 눈을 감았다.

‘같은 동물들에겐 손대지 않는 건가?’

비석에 다가간 것이 인간이라서 짐승들이 예민하게 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아예 이곳에 발을 디뎠을 때 이를 드러냈어야 옳지 않던가.

‘굳이 비석에만 날카롭게 구는 이유는 뭐지?’

아델이 미간을 좁힌 채 저 멀리 서 있는 토끼를 마주 봤다. 새까만 동공이 그녀를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다.

쫑긋!

길쭉한 토끼의 귀가 움직였다. 쫑긋쫑긋 두어 번 움직이며 비석과 아델을 번갈아 가리킨다. 적어도 아델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아델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오라고?”

아델이 작은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이자 토끼가 고개를 이리저리 기울였다. 아델의 목소리에 꽃밭에서 빠져나온 헥시온이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델이 토끼와 시선을 마주친 채 앞으로 한 걸음 옮겼다.

헥시온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델. 어디 갑니까?”

헥시온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미간을 좁힌 그녀가 아주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토끼를 가리켰다.

“토끼가, 저쪽으로 오라고 하는 것 같아서요.”

“……네?”

헥시온이 황급히 꽃밭으로 들어가려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델은 걸음을 멈추곤 고개를 돌렸다. 토끼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아델의 눈이 어딘가 살짝 풀어진 기분이 들었다.

“안 됩니다. 아델.”

“하지만…….”

아델이 묘한 눈으로 헥시온을 한번 돌아보고 다시 토끼를 쳐다봤다. 토끼가 귀를 쫑긋거린다. 그것이 마치 가까이 다가오라고 말하는 듯했다.

아델의 시선은 토끼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마치 어딘가에 홀린 사람처럼 보여서 헥시온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단단하게 고정했다.

‘한쪽 팔이 더 움직였다면…….’

헥시온은 어깨를 제외하면 자유롭게 움직여 주지 않는 왼팔을 생각하며 짧은 한숨을 삼켰다.

<쳇, 눈치 빠른 건 이래서 싫다니까.>

흠칫.

헥시온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들려온 목소리에 아델의 눈은 크게 뜨였다. 초점을 잃었던 아델의 눈동자에 초점이 흐릿하게 돌아왔다. 흐리멍텅한 시선에 아델이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유혹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인간은 오랜만인데.>

두 발로 서 있던 토끼가 마치 고양이처럼 혀를 내밀어 털을 핥더니 이내 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고양잇과 동물이 그루밍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다.

“토……끼가 말을 해?”

“……이게 토끼의 목소리입니까?”

아델의 중얼거림에 헥시온이 말을 얹었다. 아델이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돌렸다. 헥시온에게 저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이 신기했다.

“……저 목소리가 들려요?”

“네. 들립니다.”

헥시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델이 놀란 눈을 했다. 기묘하게 머릿속에 울리는 듯한 목소리는 요정과 대화를 했던 때와 느낌이 비슷해서, 당연히 그런 줄만 알았다.

<멍청한 거 아냐? 말을 했는데 당연히 들리지. 게다가 이곳은 휴식처. 어떤 존재라도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공간이지. 경계가 흐트러진 공간이니까.>

토끼가 좌우로 고개를 저으며 한심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작은 생물에게 비웃음을 당하니 영 기분이 묘하다. 아델이 조금 멍하니 토끼를 쳐다봤다.

<근데 넌 뭔데 쉽게 유혹당하지 않았지? 보통은 바로 당하는데.>

토끼가 성큼성큼 뒷다리로 꽃밭을 걸어왔다. 토실토실한 엉덩이가 쉼 없이 꽃밭에 스쳤다. 잔뜩 살이 오른 토끼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토끼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한쪽 팔이 새하얗고 긴 사람의 팔로 변했다. 한쪽이 다 변하면 또 반대쪽이, 그러곤 양다리가 길어졌다.

얼굴과 몸통만 토끼인 기묘한 그것은 이윽고 아델과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정확히는 그녀보다 조금 키가 커졌다. 한 걸음 더 내딛자 웨이브 진 붉은 머리카락이 풍성하게 내려앉았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긴 속눈썹을 가진 붉은 눈의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여자가 한 걸음 더 내디디며 꽃밭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토끼였던 그것은 어느새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와 풍만한 가슴을 가진, 매혹적인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옷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의 여인이.

아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에 비해 헥시온의 표정은 관심도 없다는 듯 무척 무심했다.

“자, 잠시만요……!”

눈앞에 바싹 붙은 붉은 눈의 여자가 아델의 시야에 꽉 들어찼다. 뒤에서는 헥시온이 허리를 감싸고 있으니 도망갈 곳도 없고 그렇다고 눈을 돌릴만한 곳도 없었다.

<흐음, 성적으로 영 무지한 것 같지도 않은데.>

여인이 허리를 굽혀 얼굴을 쑥 아델의 앞까지 들이밀며 말했다. 그녀가 아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코를 움직여 냄새를 맡았다.

“꺼지시죠.”

<……뭐라?>

“내 사람 유혹하지 말고 꺼지라고 말했습니다.”

헥시온이 그녀를 뒤로 끌어당기며 붉은 눈의 여인에게 일갈했다. 눈을 가늘게 뜬 여자가 퍽 재밌다는 듯 낮게 웃었다. 그러곤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냄새가 나는구나. 인간 여자야. 아주 불쾌하고…… 아주 짜증스러운 인간의 냄새가 섞여 있어.>

가는 눈으로 여자가 아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름다운 여인은 옷자락을 하나도 걸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척 조금의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여기까지 오며 붉은 눈을 조심하라는 주의를 보지 못했느냐?>

아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눈동자가 붉게 빛나는 존재를 만난다면 눈을 감아라. 한번 홀리면 정신력으로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다는 걸 명심하도록. 그들은 인간에게도 원한다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분명 지금껏 해석한 비석 중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비석이 있던 환각 에리어에 한정된 줄 알았다.

“당신도 요정……인가요?”

<그렇지. 그래서 넌 누구냐? 왜 훅센라이트, 그 망할 것의 냄새가 나는 거지? 그것을 만났나?>

붉은 눈의 요정이 물었다. 아델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죽은 사람을 만났을 리가 있나. 내 말에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쳇, 어디서 뭘 하고 지내는 건지. 재수 없는 녀석.>

“훅센라이트는, 죽었어요.”

아델의 말에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한껏 벌어진 눈동자가 잘게 떨리기까지 한다. 팔짱을 끼고 있던 그녀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한껏 벌어졌던 요정의 눈이 아주 천천히 원래 크기로 돌아왔다.

<……그런가.>

요정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가셨다. 조금 낮아진 진중한 목소리로 그녀가 작게 읊조렸다.

<인간의 일생이 짧다는 걸 잊고 있었군.>

탄식하듯 내뱉어진 한마디에 아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알몸의 그녀가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봤다. 햇살이 내리쬐는 하늘은 무척이나 푸르렀다.

<비석은 왜 노리는 거지?>

“……비석을 해독하고 싶어서요. 그 안에 적힌 내용이 알고 싶어요.”

<알아서 뭘 하려고?>

요정이 가늘게 뜬 눈으로 물었다. 직설적인 물음에 아델의 입이 다물어졌다.

‘뭘 하려고 하냐고?’

크게 바라는 건 없다. 그저 자신의 인생을 찾고 싶었다. 어떻게든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황제와 공작이라는 거대한 손바닥은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감히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왔다. 그리고 도망갈 기회가 생겼다.

“제 손으로 자유를 얻으려고요.”

<자유?>

요정이 기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저 비석은 훅센라이트가 우리에게 맡긴 것이다. 여기가 이런 낙원이 된 것도 이곳이 그 녀석의 의지가 남아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지.>

“안 되나요?”

말이 길었다.

아델이 묻자 요정은 팔짱을 끼곤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정이 퍽 장난스럽게 웃더니 양팔을 벌렸다.

<이리 와 봐.>

“네?”

“안 됩니다. 아델.”

헥시온이 그녀를 말렸다. 요정이 짓궂게 웃었다.

<오면 가게 해 줄게. 비석에.>

보상을 제시하는 듯한 요정의 말에 아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가 말없이 요정의 눈을 마주했다. 악의가 느껴지진 않았다. 아델은 헥시온의 손을 붙잡고 그를 달래듯 느릿하게 손등을 쓸었다.

“괜찮을 것 같아요.”

아델이 한 걸음 내딛자 요정이 냉큼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곤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곤 훌쩍 떨어졌다.

아델과 헥시온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음, 합격.>

요정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헥시온이 황급히 팔을 뻗어 아델을 낚아채곤 그대로 그녀를 뒤로 물렸다. 그러곤 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입술을 문질렀다.

“저거 죽여도 됩니까?”

그가 부드러운 손길로 입술을 닦아내며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델에게 물었다. 아델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당장에라도 검을 뽑지 않을까 걱정마저 들었다.

“…….”

아델의 거부에 헥시온이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꾹꾹 밟아냈다. 그녀가 싫다는데 감히 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 헥시온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거참 소유욕 짙은 수컷이네.>

노골적인 단어에 아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요정들은 생물을 단지 성별로만 구분하는 걸까? 이전에 만났던 요정도 그렇고 눈앞에 있는 요정도 그렇고 아델에겐 여간 익숙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악의가 있나 없나 확인한 것뿐이란다.>

요정이 거리낄 것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아델로선 갈 곳 없는 시선을 어디에 정착시키지도 못하다가 결국 눈을 내리깔 수밖에 없었지만.

<물론, 난 수컷보단 암컷 쪽이 더 취향이긴 하지만.>

요정의 붉은 눈이 야살스럽게 휘어졌다. 얄미운 웃음을 보는 헥시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차마 아델이 손을 대지 말라고 한 것에 손을 댈 수가 없어 애꿎은 주먹만 쥐었다 폈다.

“그럼 가도 되나요?”

<물론. 약속은 지킨단다.>

요정이 어깨를 으쓱이곤 몸을 반쯤 비켜섰다. 알몸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아델이 꽃밭으로 걸음을 옮기자 헥시온이 그 뒤를 쫓았다. 그러나 그는 아델의 뒤를 따라 걸을 수가 없었다. 아델이 꽃밭에 들어가자마자 요정이 그 앞을 가로막았으니까. 부드럽게 휘어져 있던 요정의 눈이 가느다랗게 뜨였다.

“비키시지요.”

<넌 안 돼.>

들려오는 말에 아델이 걸음을 멈췄다. 비석에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불구하고 짐승들은 아델에게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수컷아. 저들이 네가 내 허락을 받지 않아서 거절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손을 뻗은 요정이 헥시온의 볼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그의 눈썹이 크게 들썩였다. 아델이 걸음을 멈추고 요정과 헥시온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처럼 들립니다만.”

헥시온이 요정의 어깨너머로 아델을 바라보다 이내 느릿하게 시선을 내려 눈앞의 요정을 봤다.

그가 짧은 숨을 뱉었다. 눈앞에 있는 매혹적인 여인의 모습을 한 요정은 그다지 헥시온의 눈에 차지 않았다.

<네 이 왼팔. 바엘의 독을 품고 있지?>

요정이 무척 관능적인 손길로 헥시온의 왼팔을 아주 천천히 쓸어내렸다. 헥시온이 무심한 눈길로 제 팔을 훑었다.

“바엘의 독이 뭡니까?”

무심히 대답하면서도 헥시온이 어깨너머로 아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달래는 듯한 그의 시선에 그녀가 볼을 긁적인다. 아델이 몸을 돌려 천천히 비석에 가까이 다가갔다.

<궁금한가? 수컷.>

“궁금하니 묻지 않았겠습니까.”

<……흐음. 고얀지고.>

요정이 헥시온의 몸에 제 몸을 바싹 가져다 대며 귓가에 속삭였다.

<하지만 싫지 않다. 내게 정기를 준다면 하나하나 세세하게 알려 주지. 뭣하면 몸으로 알려 줘도 좋고.>

요정의 손이 헥시온의 허벅지를 타고 다리 사이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헥시온은 그에 답하듯 느릿하게 그녀의 팔을 쓸며 손을 움직였다. 요정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띄워졌다. 요정의 팔을 타고 올라간 헥시온의 손은 이윽고 그녀의 목덜미를 쓸더니 그대로 목을 틀어쥐었다. 그 손놀림이 마치 유혹이라도 하는 듯 자연스러워서 그녀도 미처 반응하지 못한 듯했다.

“시답잖은 짓거리 그만하시지요. 흥이 돋지도 않습니다.”

<……뭐라?>

“이런 일을 당하고 싶은 상대는 따로 있습니다. 그녀에게라면 이보다 더한 짓을 당해도 기꺼이 온몸을 내어드리겠습니다만…….”

헥시온이 요정의 목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요정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그녀가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헥시온의 오른손을 붙잡고 떼어 내기 위해 바르작거렸다. 아무리 요정이라도 숨구멍이 막히면 버틸 수가 없는 듯 요정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인간을 잡아먹어 썩은 내를 풀풀 풍기는 하찮은 것에 내어드리기엔 아깝습니다.”

겨우 한 손으로 요정을 제압한 헥시온이 그녀의 어깨 너머로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였다. 걱정스레 이쪽을 바라보는 아델이 시야에 담겼기 때문이다. 헥시온의 미소를 발견한 듯 아델이 한층 안도한 표정으로 노트와 펜을 꺼내 해독을 시작했다. 헥시온이 비석에 집중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요정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이래 봬도 그녀를 위해서 나름 정갈하게 관리하는 몸이라서.”

순식간에 미소가 없어진 헥시온이 건조하게 말했다. 요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관능적인 미소를 띠고 있던 입가는 허물어진 지 오래였다.

“그래서, 바엘의 독이 뭡니까? 아는 게 있으면 말하십시오. 여기서 목뼈가 부러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크윽…… 하……! 뱀의 거죽을 뒤집어쓴 인간이라니. 저 암컷은 네 본질을 알고 있느냐?>

“그녀는 몰라도 됩니다. 평생 보여 드릴 일도 없을 테니.”

헥시온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목을 쥔 손에 힘을 한껏 줬다. 인간이라면 이미 죽었을 정도의 악력임에도 불구하고 요정은 얼굴만 벌겋게 물들였지, 아직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대답.”

<바엘의 독은 말 그대로 바엘의 독이다. 훅센라이트가 이 숲에 봉인되어 있던 것을 풀어낸 바엘이 내뿜는 독이지.>

“그것이 이렇게 신체를 돌처럼 변하게 합니까?”

<그러다 잿가루가 되어 죽는다.>

번뜩이는 요정의 붉은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헥시온이 아주 천천히 요정의 쥐었던 목을 놓았다. 그가 손을 놓자 요정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시퍼렇게 멍이 든 목에는 손자국이 짙게 나 있다.

“그 바엘이라는 건 어떻게 생겼습니까?”

<모른다. 훅센라이트도 몰랐다. 바엘은 형체가 없으니 어떤 것도 될 수 있고 어떤 것에도 깃들 수 있지. 그 물건이 부서지기 전까지는.>

헥시온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비석 해독에 한창인 아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정말, 뒤를 한 번 돌아봐 주지 않는군.’

그것이 그녀의 장점이라는 것을 알지만, 종종 아쉽고 속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델은 언제나 앞을 보고 앞을 향해 걸어 나간다. 늘 뒤를 돌아보던 자신과는 전혀 다르게.

<사랑을 하고 있군.>

“…….”

헥시온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요정을 바라봤다. 마치 예상하지도 못했던 답을 들었다는 듯,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됐다는 듯 흔들리는 시선이었다.

“……아닙니다.”

헥시온이 뒤늦게 대답했다.

“그녀는 그저, 나와 거래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입술 사이로 새어 나가는 말에 심장에 거친 통증이 일었다. 알고 싶지 않은 단어를 귓가로 듣는 것은 생각보다 충격적인 일이었다.

<훅센라이트도 사랑을 했지. 애절하고 달콤하고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나무 밑동에 기대앉은 알몸의 요정이 말했다. 요정에게 인간의 의복이란 가치가 없는 것임을 알고 있지만, 헥시온에게도 그녀의 거리낌 없음은 조금 놀랄만한 것이었다.

<바엘의 독을 풀고 싶나?>

“방법이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

요정이 퍽 멍청한 소리를 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살짝 흘겨보는 시선에는 한심함이 담겨 있었다.

<한 가지는 바엘이 깃든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비석이다.>

“비석?”

헥시온이 미간을 좁혔다.

<정확히는 나도 몰라. 비석을 해독하며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 끝에 해답을 찾을 수도 있겠지.>

요정이 제 목을 매만지며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시퍼런 멍은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 헥시온의 눈에 놀라움이 번졌다.

<훅센라이트가 비석에 무언가를 숨겼다고 들었다. 그것이 무언가 답이 되겠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없다 이겁니까?”

요정이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쫙 켜더니 아! 하곤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나도 소문으로 듣기만 한 거지만, 이 숲 어딘가에 현자가 있다고 하던데. 세계와 동화되어 모르는 것이 없다고 하는 그를 찾아가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요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저 암컷은 정말 뭐야? 왜 훅센라이트의 냄새가 나는 거지?>

“신경 끄십시오.”

헥시온이 요정의 앞을 몸으로 가로막으며 말했다. 아델은 비석 앞에 웅크려 앉은 채, 비석 가장 아랫줄을 해독하고 있는 듯했다.

<이 숲은 바엘을 싫어하지. 넌 이곳에서 끊임없이 이물질 취급을 받게 될 거야.>

요정이 키득거리며 헥시온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는 요정의 목소리를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아델이 웅크렸던 몸을 일으켰다.

“벌써 다 하셨습니까?”

<와- 저건 진짜네. 여기까지 온 인간도 몇 없었지만…… 저걸 저렇게 빨리 해독한 인간도 처음인데.>

“여기까지 온 사람이 있었습니까?”

요정의 말에 헥시온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요정이 무슨 멍청한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 이 숲이 생겨나고 긴 세월 동안 이곳을 찾아온 게 너희뿐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요정의 말에 헥시온은 입을 다물었다. 풀헤임 숲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어서 솔직히 그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곳까지 들어오지 못했거나 혹은 비석을 해독하지 못했거나.

<뭐, 엄청 드물긴 하지만 없던 것도 아니야. 대부분 이 독 안개 영역을 넘지 못하고 죽었지만.>

헥시온이 바닥을 굴러다니던 백골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백골이 있기에 짐승의 먹이였었나 싶었더니 설마 이곳을 넘으려고 했던 이들일 줄은 몰랐다.

<개중에는 정말 운 좋게 넘어온 녀석도 있었고.>

요정이 그렇게 말하며 헥시온을 의미심장하게 훑었다.

“나는 운이 아니라 실력으로 온 거지요.”

요정의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헥시온이 입술을 비틀어 올린 채 덧붙였다. 요정이 퍽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그들은 다 어떻게 됐습니까?”

<글쎄……. 적어도 내 기억엔 이 영역을 넘어간 놈들은 없네.>

붉은 루즈를 바른 듯 매혹적이던 요정의 입술이 이윽고 쭉 찢어졌다. 입꼬리가 광대뼈에 닿을 정도로 뻗어 나간 요정의 모습에 헥시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먹었군.”

<그거야 누구 하나 비석을 시간 안에 제대로 해독하지 못했는걸.>

“시간?”

<난 그들에게 24시간을 줬고 놈들은 그 안에 비석 전부를 해독하지 못했지. 다섯 번째 비석으로 가는 길은 나만 알고 있으니까.>

요정의 입꼬리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새침한 표정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리던 그녀가 이내 꽃밭에서 벗어난 아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벌써 해독한 거야? 아니면…… 포기?>

“해독했어요.”

아델이 묵묵히 대답했다.

<전부?>

“바라는 게 요정의 진액으로 적힌 것이라면, 대답은 ‘네’예요.”

아델의 흔들림 없는 당당한 말에 요정의 눈동자가 크기를 키웠다. 그녀의 시선이 이내 약간의 의구심을 머금은 채 가늘게 뜨였다. 요정이 빙긋 웃었다.

<해독을 읽어 보렴. 네 말이 사실이라면 다섯 번째 비석으로 가는 길로 내가 인도해 주마.>

알몸의 요정이 양팔을 좌우로 쫙 펼치며 말했다. 당당하던 아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순간, 커다란 손이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순식간에 컴컴해진 시야에 아델이 눈을 끔뻑였다.

“헥시온?”

“보지 마십시오. 눈 썩습니다.”

“……네?”

잘못 들었나? 아델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뒤돌아서 나보고 읽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투정 같은 목소리에 아델이 그의 손안에서 눈만 깜빡였다. 그러던 아델의 몸이 어느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입을 손으로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인 아델의 어깨가 들썩였다.

<세상에.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 이봐? 여기 요정 하나 있는데 안 보이니?>

요정이 퍽 짓궂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헥시온은 아델에게 보이지 않게 요정을 한 번 흘겨보더니 이내 천천히 아델의 눈에서 손을 떼어 냈다.

벌어지는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느낀 아델은 냉큼 몸을 돌려 헥시온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바로 눈에 들어온 것이 그의 가슴이어서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나긴 했지만. 아델은 목을 두어 번 가다듬더니 이내 노트를 들어 헥시온의 가슴을 가렸다. 그녀가 약간 붉어진 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번째 비석까지 오다니.”

아델이 노트를 읽으며 힐끗, 요정을 바라봤다. 그녀는 퍽 진지한 눈으로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알몸이었지만.

“이곳까지 왔다는 건 이곳의 터줏대감인 세이렌를 만났다는 거겠군.”

세이렌?

아델이 슬쩍 시선을 돌려 요정을 쳐다봤다. 요정은 아까와 다름없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델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은 ‘경계가 흐트러진 곳.’ 나는 ‘낙원’이라고 부르는 곳이네. 말 그대로 이곳에선 요정을 볼 수 없던 자도 요정을 볼 수 있고 그들의 언어를 듣지 못하던 자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네.”

요정의 눈썹이 살짝 들썩였다. 그녀는 퍽 못마땅한 눈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더 읽어 보라는 것이 분명했다.

“독 안개로 가득한 숲을 벗어났다는 건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것이겠지.”

“죽을 뻔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헥시온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우연히 해독할 수 있는 열매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아델이 어떻게 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핏기가 싹 빠져나가는 듯했다.

“사실 오다 보면 보이는 붉은 색의 열매를 먹으면 해결되는 일이긴 하네.”

무척이나 가벼운 말투였다. 아델이 슬쩍 헥시온의 눈치를 살폈다.

“그것은 이 숲의 극히 일부에서만 자라는 해독제이며, 웬만한 독은 다 해독할 수 있네. 그러나 이 숲 밖으로 나가면 시들어 죽고 말더군.”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던 곳에서 자란 식물이 인간 세상의 더러운 공기에 적응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요정이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아델이 읽고 있는 노트에 고정되어 있었다. 헥시온이 요정에게로 돌아가려는 아델의 시선을 손을 뻗어 멈췄다. 볼에 닿아온 온기에 아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뭐, 이제 와서 알려 줘 봐야 뭐하겠느냐마는……. 여기까지 왔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게 아니겠나! 하……하하…….”

아델이 눈치를 보며 한층 작은 목소리로 말을 끝마쳤다. 해독할 때도 고개가 기울어질 정도로 의아했던 부분이지만, 읽고 나니 어떤 의도로 훅센라이트가 적었는지 명확했다.

“……만난다면 한 대 때리고 싶군요.”

<아, 그건 나도 공감.>

헥시온이 죽여 버리고 싶다는 말을 애써 돌려 말했다. 요정이 손을 들어 그의 말에 힘을 보탰다. 아델이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이곳은 세이렌의 영역. 오랜 세월을 산 요정의 호의를 얻는다면 다음 비석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내 소중한 친우이니 혹여 시간이 된다면 말동무라도 해 주면 고맙겠네.”

<……쓸데없기는.>

“다섯 번째 비석의 위치는 그녀에게 물어보시게.”

아델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곳은 낙원. 경계가 흐트러진 곳이기에 다양한 존재들을 만날 수 있지. 이곳에서는 포식자도 피식자도 한데 어우러지는 곳.”

헥시온이 그녀의 등을 느릿하게 쓸었다. 아델이 긴장된 몸을 한층 풀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미리 말하지만, 주인인 세이렌 이외에는 어떠한 살생도 허용되지 않는 곳이라네.”

아델의 말을 들으며 헥시온이 느릿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이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거라곤 눈앞에 있는 요정의 이름이 ‘세이렌’이라는 사실과 그녀가 이 영역을 지배하는 주인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곳에서 검을 빼 들어 피를 보았다면 자네들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마주하게 될 걸세.”

아델이 힐끔 헥시온을 살폈다. 아까 검을 뽑으려는 걸 막기를 잘한 듯했다.

“이곳은 그대의 마음에 찼는가?”

갑작스러운 물음에 아델과 헥시온이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깊은 숲속까지 들어왔다는 것은 자네도 분명 이곳까지 도피하고 싶을 정도로 싫은 무언가가 세상에 있었다는 거겠지. 마지막까지 부디 함께해 주게.”

아델이 마저 입술을 달싹였다.

“추신. 세이렌의 원한은 만년설의 얼음보다도 더욱 매섭다네. 절대 화나게 하지 말게나.”

요정이 팔짱을 낀 채 키득거렸다. 헥시온과 아델이 돌아보자 요정이 퍽 즐겁다는 듯 눈을 한껏 반달로 휘어 접은 채 입을 열었다.

<여기에 온 놈들의 일부는 짐승을 베겠다며 검을 빼 들었다가 그 검을 든 손으로 스스로의 사지를 직접 베어야 했지.>

“환각입니까?”

<비슷해. 넌 걸리지 않아서 아쉽지만.>

요정이 말했다. 요사스러운 시선으로 헥시온을 흘겨본 요정은 이내 빙그레 웃으며 아델을 내려다봤다.

<그래서, 다음은?>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퍽 위험하게 빛났다.

<내가 궁금해한 게 그게 아니라는 건 아가도 알잖니?>

요정의 날카로운 손톱이 느릿하게 아델의 볼에 닿았다.

짜악-!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팔을 내리친 헥시온만 아니었다면 닿을 뻔했다.

<이게 무슨…….>

“이런. 아델. 괜찮습니까? 엄청 커다란 파리가 순간 보인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헥시온의 손이 느릿하게 요정의 손톱이 닿을 뻔했던 아델의 볼을 쓸어냈다. 요정의 여유롭던 얼굴 위에 핏줄이 돋아나며 짜증이 덧씌워졌다. 아예 옷자락으로 벅벅 닦아내는 모습이 그녀의 신경을 한층 더 건드렸다. 아델이 세이렌의 눈치를 살피곤 시선을 내려 노트를 읽곤 황급히 입을 열었다.

“독 안개의 숲을 빠져나온 그대들이라면 이 숲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 정도는 깨달았겠지. 그 독은 이 주변 녀석들이 ‘바엘’이라고 부르는 악마의 것이네.”

헥시온의 눈이 크게 뜨였다. 요정 역시 제법 놀란 눈으로 아델을 쳐다봤다. 설마 정말로 그 짧은 시간에 다른 글씨와 겹쳐져 흐릿한 밤의 비석까지 해독했을 줄은 몰랐다.

‘……드디어, 이 한없이 긴 시간 끝에 네 유지를 이어받을 자가 나타난 건가. 훅센.’

팔짱을 낀 요정이 말없이 나무에 기대어 아델을 바라봤다.

‘네가 그리 바라마지않던 대로.’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아주 천천히 눈꺼풀 아래로 자취를 감췄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 시간 연구하고 이곳저곳 알아본 결과, 이 숲은 ‘바엘’이라는 그 악마를 봉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됐네.”

아델이 숨을 삼켰다.

“……그리고 내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현혹되어 풀어 준 것이, 그 바엘이라는 사실도.”

헥시온이 주먹을 꽉 쥐었다. 요정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그다지 미동이 없는 표정으로 아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묵묵히 듣고 있는 요정을 보며 아델은 다시 시선을 해석을 적은 종이로 내렸다.

“원래 바엘은 한 그루의 나무에 봉인되어 있었으나, 수 세기가 지나며 그 근처에 풀헤임 숲이 형성된 것으로 보이네.”

아델의 말이 끝나자 헥시온이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짧은 한숨을 삼켰다.

“이 팔이 이렇게 된 게 바엘의 독이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얘기군요.”

<아까 말했잖아. 바엘의 독이라니까? 설마 내가 한 말을 안 믿은 거야?>

“아무래도 신뢰도가 없지 않습니까.”

요정의 입이 떡하니 벌어지더니 이내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헥시온은 모른 척 아델을 돌아봤다.

“나는 아마도 알바 베스티아가 바엘이 깃든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네. 신전은 이윽고 왕가조차 뛰어넘을 지지도를 갖게 됐지. 공포란 사람을 결속하고 무능을 비난할 여지를 주게 되니까.”

아델이 노트를 천천히 읽어 내렸다.

생각보다 요정은 조용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를 방해하지도 않았고 중간에 뭔가 말을 덧붙이지도 않았다. 그저 다음을 기다리는 듯 조용히 아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는 어쩐지 가라앉아 있는 듯 힘이 없어 보였다.

“비난에 시달리던 왕가가 무너져 내린 것은 하룻밤 새였네. 왕가 모두가 기묘한 병에 걸려 재가 되어 사라졌지. 그리고 마치 예견된 일인 양, 국민의 지지를 얻고 있던 알바 베스티아가 왕좌에 앉았네.”

예상하고 있던 이야기였다.

아델은 헥시온을 잠시 힐끗 바라보았으나 다행히 그에게서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그는 그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왕좌에 앉자 떠돌던 기묘한 병은 서서히 자취를 감췄네. 더는 걸리는 사람도 죽는 사람도 없었지. 사람들은 신의 사도께서 자신들을 구원해 줬다고 믿었다.”

아델이 잠시 숨을 삼켰다. 초대 황제가 어떤 방법으로 왕좌를 차지했는지 드디어 머릿속에 완벽히 그려졌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믿지 않았어. 머리가 좋은 치였으니, 어쩌면 그가 꾸민 일이겠지. 그러나 아직도 의아하게 생각하는 게 있네.”

글자 속 훅센라이트가 의문을 제기했다. 아델이 고개를 들자 헥시온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가 눈이 마주친 것에 조금 놀라 잠시 굳어 있자 헥시온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알바 베스티아. 그는 분명 욕심이 있는 친구였으나 한 나라의 왕좌를 노릴 만큼 담이 크지는 않은 사내였네. 다시 그를 만나 보았을 때,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구는 것이 마음에 걸렸네.”

갑자기 요정이 얼굴을 찌푸렸다. 글을 읽느라 아델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계속해서 요정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헥시온은 변화를 알아챘다.

“나는 그가 왕관을 쓰고 신검, 셰인나이트를 신전에 꽂는 것을 먼발치에서 지켜봤네. 그것은 내가 헤어지기 전, 그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네.”

신검? 아델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헥시온이 말하길 그건 건국검이라고 했다. 제국을 건국하는 데 큰 공헌을 했으니까. 훅센라이트는 그것을 신검이라고 부른 것인가? 그녀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곤 다시 글을 읽어 내려갔다.

“셰인나이트는 어떤 악도 처단할 수 있는 검이네.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 악마를 벨 수 있는 유일한 검이지. 그 녀석이 벨 수 없는 것은 없지. 그가 무사하길 바라 준 선물이었는데…….”

말은 끊겨 있었다. 그러나 뒷말이 어떤 것인지 어렵지 않게 유추가 됐다. 꾹꾹 눌러썼던 훅센라이트의 기분이 어땠을지 감히 짐작도 되지 않는다.

“곁을 함께 하던 친우가, 더는 가까이할 수 없는 존재가 되다니. 지금 생각해도 속이 쓰리군.”

아델이 조금 메인 목으로 느릿하게 말했다.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비석을 해독하다 보면 심장이 조이듯 아파질 때가 있었다.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알바 베스티아는 왕좌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엘을 사용하는 걸 멈추지 않았네. 제 의견에 반하는 귀족이나 기묘한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에게 그것을 사용했지.”

내려갈수록 글은 비통함에 젖어 있었다.

아델이 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에 얼굴을 찌푸렸다. 도대체 뭐가 이렇게 지끈거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을 악마와 내통한 증거로서 그들을 처단했네.”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델의 이상을 가장 먼저 눈치챈 헥시온이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가 허리를 굽혀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댔다.

“쉬이, 괜찮습니다.”

그 온기와 나직한 목소리에 아델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가 이윽고 잘게 떨리며 제자리를 찾았다.

“곁에 있겠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등에 닿는 온기에 속에 가득 찼던 공포인지, 혹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을 밀어냈다.

아델이 짧게 숨을 뱉었다. 노트는 이제 몇 줄 남지 않았다.

“바엘을 유일하게 처단할 수 있는 물건인 셰인나이트가 알바 베스티아의 삼엄한 감시 속에 있었네. 나는 그것을 되찾아야 했네. 언제가 될지 모르는 미래를 위해서.”

아델이 말하는 내내 헥시온이 아델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은 채 그녀를 달래듯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요정의 일그러지는 표정이 퍽 볼 만했다. 물론, 헥시온의 입장에서. 처음 그녀를 유혹하려고 했던 게 얼마나 괘씸했는지 모른다. 다시 생각해도 짜증스러워 헥시온의 미간이 좁아졌다.

“다섯 번째 비석은 세이렌에게 묻게. 이것을 전부 해독했다면 그녀는 분명 자네들을 마음에 들어 하겠지. 그리고 요정의 길로 안내할 걸세. 다섯 번째 비석은 그곳에 있네.”

<죽어서도 마음에 안 드는 놈이야. 훅센라이트.>

요정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렇다고 정말 살기가 느껴진 것은 아니었지만.

“기묘하게도 바엘의 독은 내게 통하지 않았네. 그것이 숙주인 알바 베스티아가 내게 갖고 있던 호의 때문인지, 셰인나이트를 오래 가지고 있던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노트의 메모에 끝이 보였다. 아델이 심호흡을 하며 마지막 줄을 눈으로 읽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게 된 여인도 그 병에 괴로워하고 있었다네.”

비석의 메모는 그것이 끝이었다. 아델이 아주 천천히 노트를 접었다.

심장이 아팠다. 통증이 일었다. 마치 훅센라이트가 이 글을 쓰면서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는 듯이.

“고생하셨습니다. 아델.”

헥시온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어넘겼다.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몸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순간, 비석에서 초록색의 무언가가 빠져나와 아델의 몸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이게 뭡니까?”

헥시온의 물음에 요정이 그를 한 번 쳐다보고 아델을 한 번 쳐다보더니 이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그녀의 입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헥시온? 뭔가 있어요?”

“초록색 빛 같은 게 당신 몸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아, 비석을 해독하면…… 가끔 그러더라고요.”

아델이 지친 듯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헥시온이 입을 꾹 다물었다.

“몸에 이상은 없습니까?”

“치유 능력이 매번 강해졌던 것을 생각하면…….”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끝을 흐렸다.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는 의견이었다. 헥시온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

요정이 아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목소리가 나오진 않았다. 그녀는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멀리 갈 것도 없네. 아까 했던 말 다 취소.>

요정, 세이렌이 두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런다고 아까 했던 말이 정말 날아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수컷아, 둘이 연인이라면 바엘이 깃든 물건을 찾을 필요도 없이 그냥 이 녀석이랑 몸을 섞으면 해결되겠네.>

“네?”

아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헥시온이 요정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요정은 더는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비석의 힘은 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말입니까?”

<훅센라이트가 죽었으니까.>

요정의 말에 두 사람이 퍽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요정이 홱 몸을 돌렸다. 그녀가 아델과 헥시온에게 따라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따라와, 다섯 번째 비석으로 안내하지.>

“지금 가야 합니까?”

<네 번째 비석의 가호가 있을 때 넘어가야 갈 수 있어. 이곳에서 오래 있는 만큼 네놈들의 몸도 경계가 흐트러지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네놈들이 지금 인간인지 요정인지 짐승인지 모를 어중간한 상태라는 거지.>

요정이 성의 없이 설명해 주곤 입을 꾹 다문다. 더는 대화할 의지가 없어 보였다.

<경고하지. 요정의 길에선 결코 뒤를 돌아봐서도, 다른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가서도 안 돼. 현혹하려는 것들투성이니까. 앞만 보고 날 따라와.>

그렇게 말하던 요정은 수풀 위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손으로 붙잡더니 커튼을 젖히듯 확 잡아당겼다. 그 순간 밝은 낮임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밤이 아로새겨졌다.

“와아…….”

아델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밤하늘이었다. 새까만 공간에 별처럼 반짝이는 것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시선을 사로잡을 정도로 아름다운 공간이다.

“밤하늘에 올라온 것 같군요.”

“……그러게요.”

헥시온이 은근슬쩍 팔을 뻗어 아델의 손을 붙잡았다. 아델이 흠칫 놀라며 쳐다봤지만 그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길을 잃으시진 않을까 해서…….”

빤히 바라보는 아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헥시온이 변명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아델은 그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에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노닥거리지 말고 빨리 따라와. 주변에 뭐가 보여도 결코 따라가선 안 돼. 그들은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어 유혹하니까.>

세이렌이 고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딱 달라붙어 있는 헥시온과 아델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헥시온은 그럴수록 아델의 옆에 더 바싹 붙었지만.

“네.”

아델이 순순히 대답하자 그녀가 몸을 홱 돌렸다. 세이렌의 알몸도 이쯤 되면 슬슬 익숙해질 정도다. 그녀의 등을 쫓아 아델과 헥시온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새까만 공간에 발을 들이자 입구가 사라졌다. 주변은 온통 어둠투성이였다. 별처럼 촘촘하게 박힌 은빛의 빛무리가 아니었다면 분명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발이 굳었을 거다.

“아델, 이쪽입니다.”

“아. 네.”

그나마 헥시온이 단단하게 손을 붙잡고 있어서 무섭진 않았다.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갈수록 처음의 빛무리의 실체가 아델의 눈에는 보였다.

“……요정?”

<어머, 뭐야? 보이는 거야? 흐음…….>

아델의 중얼거림을 들은 듯 세이렌이 몸을 빙글 돌리더니 이내 놀랍다는 듯 말했다. 아델이 넋을 잃고 어둠 속을 가만히 쳐다봤다. 아까는 뭐가 있는지 몰랐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보였다. 이파리 없는 가지가 가득한 앙상한 나무와 그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수많은 요정들이 보였다. 은빛의 빛무리는 그 요정들의 날개에서 나는 빛이었다.

<얘는 보면 볼수록 특이하네. 요정의 축복이 없으면 볼 수 없을 텐데…….>

허리를 굽혀 아델에게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댄 세이렌이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검지를 쫙 펴 헥시온을 가리켰다.

<넌 이 주변이 뭘로 보여?>

헥시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검은 배경에 은빛 물감을 떨어뜨려 놓은 것 같습니다.”

<근데 너는 요정이 보인단 말이지?>

검지가 아델을 향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날카로운 손톱에 아델이 몸을 굳히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흡.”

말을 끝맺기도 전에 세이렌의 얼굴이 아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무척이나 가까운 거리에서 요정의 붉은 눈이 이채를 띄며 반짝였다. 그녀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숨결은 인간의 것과 다르게 무척이나 차가웠다.

<너, 요정의 축복을 받았구나?>

아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환각의 숲에서…….”

아델의 대답에 세이렌이 어깨를 으쓱이며 멀어졌다. 그녀가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델이 제 코앞까지 왔던 차가운 숨결을 떠올리며 발을 뗐다.

“괜찮습니까?”

“네? 뭐가요?”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으셔서.”

그의 말에 아델이 낮게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잠시, 숨결이 차가워서 좀 놀란 것뿐이에요.”

“추우면 안아 드려도 됩니다만.”

“무거워서 안 돼요.”

헥시온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아델이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진심이었는데.’

아델에게는 장난처럼 들린 모양이다. 조금 더 진지하게 말해 볼 것을 그랬나 싶다가도 한층 가벼워진 아델의 분위기를 괜히 망치고 싶진 않았다.

“근데, 엄청 신비로운 광경이네요.”

아델이 옆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빠져들 것처럼 아름다운 밤하늘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순간, 그녀의 눈에서 초점이 흐려졌다.

뚝, 걸음이 멈추려는 순간, 눈앞이 컴컴해졌다.

“아델.”

“……헥시온?”

“안 됩니다. 현실을 보셔야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려고 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한 헥시온이 아델의 눈을 가렸던 팔을 내리고 그대로 한 팔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순식간에 발에 닿은 땅이 사라지고 시야가 쑥 올라갔다. 잠시 흐려졌던 아델의 초점이 순식간에 또렷해졌다.

“헥시온!”

“자꾸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보시니 어쩔 수 없습니다. 저만 봐 주십시오.”

헥시온이 고개를 들어 안고 있는 아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헥시온의 숨결에 아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만 보셔야 합니다.”

헥시온이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달아올랐던 아델의 얼굴에 한층 더 열이 올랐다. 그녀가 결국 고개를 푹 숙여 헥시온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선 내가 안 보일 것 같습니다만.”

“……차라리 아무것도 안 볼게요.”

아델이 웅얼거리며 말했다. 헥시온이 낮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귓불까지 벌겋게 물들었을 게 뻔한데, 주변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조금 안타까웠다. 그가 입맛을 다시며 모른 척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니들 한 번만 더 늦게 오면 두고 간다.>

세이렌이 짜증스럽다는 듯 얼굴을 확 일그러뜨린 채 소리쳤다. 세이렌이 짜증을 내든지 말든지 태평스러운 표정의 헥시온은 느긋한 걸음으로 품에 폭 안긴 아델을 즐기며 느긋하게 걸었다.

‘요정도 도움이 될 때가 있군.’

유혹을 한다고 하기에 어떤 유혹인가 싶었는데, 유혹보다는 현혹에 가까운 모양이다. 헥시온에겐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어깨에 얼굴을 묻은 아델이 움찔거렸다. 그녀의 머릿속에 방금까지 봤던 아름다운 광경이 잊히질 않았다.

“아델.”

그가 아델을 불렀다.

“네……?”

“뭘 그렇게 보십니까.”

“아무것도 안 보…….”

아무것도 안 봤다고, 항의하려던 아델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어느샌가 그녀는 어깨에 묻었던 고개를 들고 또다시 지나온 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델이 헥시온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러고 있는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안 됩니다.”

헥시온이 단호하게 말했다.

“묻힐 거면 내 품에 묻히십시오. 주머니에라도 넣고 다닐 테니.”

“……제가 들어갈 주머니가 어디에 있어요.”

“만들면 됩니다.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어딨습니까.”

퍽 진지한 눈을 보며 아델이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장난으로라도 그러라고 했다간 정말 주머니 같은 걸 만들어서 등에 메고 다닐 것만 같았다.

“자꾸 저쪽으로 시선이 가면 그러지 않게 해 드릴까요?”

헥시온이 옆을 힐끗 바라보곤 말했다.

“어떻게요?”

“이렇게 말입니다.”

헥시온은 아델을 조금 낮게 고쳐 안고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러곤 그대로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제 혀를 밀어 넣으려는데……

<도착!>

어두웠던 눈앞이 확 밝아졌다. 장막이 걷히며 아름다운 초록빛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입술을 맞춘 채 굳어 있던 헥시온이 짜증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도착했으니 떨어지거라.>

세이렌의 말에 헥시온이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핥곤 떨어졌다. 살벌한 시선이 세이렌을 향했지만, 요정은 그 눈빛이 가소로운지 키득거리며 웃을 뿐이다.

<어째 아쉬운 표정이구나. 수컷아.>

장난스러운 목소리의 세이렌이 헥시온을 느릿하게 시선으로 훑었다. 헥시온이 얼굴을 확 굳힌 채 안고 있던 아델을 천천히 바닥에 내려 주었다.

“아델, 괜찮습니까?”

“……네.”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곤 이내 숙였다.

찬물을 맞은 듯 훅 가라앉아 버린 분위기 때문인지 아델은 이유 모를 짧은 한숨을 뱉었다.

<남의 길에서 애정 행각을 벌이니까 그렇지.>

세이렌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표정이 무척 개운해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 헥시온의 일그러진 표정을 구경하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다.

아델과 헥시온이 그제야 제대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온통 녹음으로 가득 둘러싸인 공간은 어두침침한 숲과는 확연히 그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요정의 세계에 어서 오거라.>

어느새 등 뒤에 잠자리처럼 얇고 투명한 날개가 돋아난 세이렌이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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