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세 번째 비석 (2)
똑똑.
밤이 내려앉은 어두침침한 방에 들린 노크 소리에 노트에 비석을 해독한 내용을 적어 내려가던 아델이 고개를 들었다.
“누구세요?”
“납니다.”
아델이 펜을 내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세히 보니 책상이 엉망이다.
그녀가 눈을 도르륵 굴리곤 황급히 널브러져 있는 노트와 종이를 대충 정리했다.
“아델?”
“아, 드, 들어오세요.”
달칵,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가 책상 위 책꽂이 사이에 황급히 대충 정리한 종이를 끼워 넣었다. 방으로 들어온 헥시온이 방 안 가득 퍼진 종이와 잉크 냄새에 자연스럽게 책상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요.”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녘에 돌아와서 곧장 눈을 감고 잠자리에 들었다.
매번 고통스러워하는 헥시온이니 그가 먼저 자는 걸 보겠다고 우겼지만, 그가 약을 먹고 잘 테니 편히 들어가라는 말로 그녀를 먼저 방으로 밀어 넣었다.
“난 피곤한데, 뭔가 개운해 보이네요. 헥시온.”
“그래 보입니까?”
“네.”
“그럼 난 개운한 모양입니다.”
헥시온이 나긋하게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헥시온이 가져온 와인 병을 창가에 내려 뒀다. 그가 이렇게 기분이 좋은 이유를 그녀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렇게 기분이 좋았나.’
콰른 비프타를 한 대 때린 게.
새벽녘이 되어 열린 오솔길을 걸어 밖으로 나오니 꽥꽥거리는 콰른 비프타가 살벌한 눈으로 헥시온을 노려봤다. 물론, 헥시온이야 익숙하게 그를 무시했다. 그러자 놈의 타깃이 아델로 바뀌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꼬치꼬치 캐묻는 것에 저도 모르게 떠오르는 기억에 그녀가 몸을 굳힌 것이 화근이었다. 눈치 빠른 콰른 비프타가 아델의 망설임을 읽어내고 먹잇감을 문 개처럼 물고 늘어졌다.
누구도 제대로 대답을 해 주지 않자 종잇장보다도 더 얇은 인내심을 가지고 있던 콰른 비프타가 그대로 헥시온에게 덤벼들었다. 그리고 헥시온이 한 손으로 휘두른 검에 맞고 기절하고 말았다.
두 사람은 기절한 콰른 비프타를 풀헤임 숲에 버려두고 돌아왔다.
‘그 질긴 놈이 거기서 죽을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아예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를 혐오하고 싫어하는 것과는 다르게 제가 매개체가 되어 그가 죽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콰른 비프타를 걱정하고 계시는군요.”
“아뇨.”
아델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헥시온이 가만히 아델을 쳐다보다가 이내 입가를 풀어 부드럽게 웃었다.
“난 아델이 그 자를 걱정하지 않길 원합니다.”
“……걱정하지 않았어요.”
“네. 그럼 한잔하겠습니까?”
헥시온이 와인 병을 살짝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델이 창가 옆 탁자에 앉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헥시온이 잔을 꺼내 왔다.
“미안하지만, 병을 따 주실 수 있겠습니까?”
헥시온이 퍽 곤란한 얼굴로 물었다. 아델이 곧장 손을 뻗어 서툴게 와인 병의 코르크를 열어 주자 헥시온이 그걸 받아서 들어 잔에 조심스럽게 와인을 따랐다.
“내일 부티크에 갈 건가요?”
“네, 그럴 생각입니다.”
“그러면 일전에 말씀드렸던 조력자를 만나 보러 가지 않겠어요?”
아델의 말에 헥시온이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밑으로 정보를 얻어 오고 사병을 모아 줄 사람이 필요했다. 반역이라는 건 그런 것이었다.
“부디 그래 주십시오.”
“곧 황성 연회네요.”
“떨리십니까?”
헥시온이 물으며 오른손으로 잔을 들었다. 앞으로 내미는 그를 보며 아델이 마주 잔을 내밀었다. 잔과 잔이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적어도 헥시온 덕에 콰른 비프타가 끔찍하고 손댈 수 없는 인간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헥시온의 한쪽 눈썹이 쓱 들렸다.
그가 그녀를 쳐다봤다. 헥시온의 시선을 느낀 아델이 타는 목을 축이듯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곤 입을 열었다.
“덕분에, 조금 용기가 생겼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늘 보기만 해도 몸이 굳었던, 아델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던 콰른 비프타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그가 무섭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가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그래요.”
혀끝까지 오른 궁금증을 애써 삼키며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분위기에 휩쓸리듯 그렇게 되어 버렸지만, 다시 생각해도 왜 거기에 고개를 끄덕였는지 모를 일이다. 아델이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언제든지 끝을 낼 수 있는 관계라고 했죠?”
멈칫.
잔을 기울여 와인을 마시려던 헥시온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가 애써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평이한 표정으로 마저 잔을 기울여 와인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아델이 원한다면요.”
헥시온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동요를 잘 드러내지 않는 남자의 동요가 겉으로 드러났다. 아델은 그것을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나를 좋아해요? 헥시온.”
저번에는 두루뭉술하게 돌려서 대화를 나눴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나직하고 꾸밈없는 직선적인 물음에 헥시온이 아주 천천히 잔을 내려놨다. 그는 목이 탔지만, 와인을 먹으면 한층 더 타들어 갈 것 같았다.
아델은 이미 조금 전에 잔을 내려놓은 후였다.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망설이듯 뻐끔거리던 입술 사이로 간신히 한마디가 뱉어졌다. 떨리는 목소리 끝을 애써 숨기려고 노력하는 것이 기특할 지경이다.
아델은 이때만큼은 상대의 감정에 예민한 자신의 감각이 없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동시에 불가능하다는 것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숲에서의…….”
아델이 입술을 달싹였다.
목에 턱 막힌 듯 쉽게 나오지 않는 말에 그녀가 잔을 쥐고 남아 있던 와인을 꼴깍꼴깍 목 뒤로 넘겼다. 목 안이 화끈해지며 잠시 눈앞이 핑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입맞춤이요.”
“그건, 아델에게 허락을 받고 정정당당히……!”
아델은 새어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삼켰다. 결투하는 것도 아니고 ‘정정당당’은 또 뭔가. 어울리지 않는 단어 선택이었다. 헥시온도 뒤늦게 그것을 깨달았는지 말을 하다가 만다.
“저한테 마음이 있는 거죠?”
“……그러는 아델은 어떻습니까? 내게 마음이 있습니까?”
“제가 먼저 여쭸어요.”
아델의 지적에 헥시온이 제 앞에 있는 와인을 그녀와 똑같이 단숨에 들이켰다.
그녀가 먼저 물어본 게 맞기는 하다.
“내 대답 여하에 따라서 우리의 관계가 달라집니까?”
“네.”
헥시온이 눈꺼풀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언제나 무거운 팔이, 오늘따라 유독 더 무겁게 느껴졌다. 헥시온이 와인 병을 들어 와인을 콸콸 따랐다. 그 와중에 그녀의 잔에 채워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가 꽉 채운 와인 잔을 또다시 콸콸 입에 털어 넣었다. 와인을 음미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지만, 단숨에 술기운을 끌어올리기엔 충분했다.
‘아직은…….’
아직은 이름을 주지 않았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니, 이것은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헥시온은 자신을 설득시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자꾸만 보고 싶고 닿고 싶고 생각나는 이 감정이 그는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해야 했다.
입을 맞추고 싶은 에메랄드빛 머리카락도 이를 박고 싶은 새하얀 목덜미도 빨아들이고 싶은 연분홍색의 입술도, 모두 헥시온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또다시 싹을 틔워 자리 잡은 텃밭을 발로 짓밟았다. 어떤 감정의 싹이 자라고 있든지간에 그것이 꽃피우기 전에 헥시온은 몇 번이고 밟아 죽일 자신이 있었다.
“없습니다.”
한참만에야 헥시온이 입을 열었다.
대답은 느렸지만, 확실했다. 약간의 떨림이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델이 고개를 들어 헥시온을 살폈다.
‘…….’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헥시온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무채색의 감정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새까만 눈동자는 장난기와 웃음기와 열망을 품고 있던 방금까지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그래요?”
“네.”
그것 참 다행이네요.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결국, 뱉어지지 못한 한마디에 아델이 미간을 좁혔다.
“오늘은 늦었군요. 낮에 충분히 주무셨겠지만, 밤에도 꼭 주무십시오. 이불도 푹 덮으시고요.”
“가시려고요?”
“네. 잠자리를 방해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 잠자리를 방해하러 조금 전에 와인 병을 들고 찾아온 게 대체 누구인지. 아델은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억눌렀다. 그가 왜 떠나려고 하는지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내가 잔인한 말을 하게 해서 그렇겠지.’
하지만, 황제가 된 헥시온이든 아니면 대공인 헥시온이든 어느 쪽으로라도 그와 엮이려면 그녀에겐 카레나 비프타라는 껍데기가 있어야 했다. 그래야만 아델은 헥시온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아델이 가장 바라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헥시온이 가볍게 손을 내젓고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가 정중히 인사하고는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 줘야 하는데.”
아델이 이마를 짚었다.
보지 않았으면 모를까 매일 밤 그렇게 고통에 신음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을 무시할 만큼 그녀는 철면피가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그녀의 은인이기도 했다.
‘……조금 있다가 잠깐 들러 보자.’
헥시온은 얼른 자라며 자리를 떴지만, 아델은 해 놨던 비석 해독문의 정리를 마저 할 예정이었다. 그 후에야 잠자리에 들 생각이니 자기 전에 헥시온의 방을 들어가 보면 될 거다.
“……얼른 나으면 좋을 텐데.”
정말 부부였다면 옆에서 같이 잠이라도 자 줄 수 있었을 거다.
‘오늘도 비석을 해독했으니까…….’
치유의 힘이 조금 더 강해졌을지도 모른다.
아델이 느릿하게 미간을 좁히곤 이내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다. 책꽂이에 대충 쑤셔 놨던 종이를 다시 끄집어냈다. 책을 펼치고 지렁이 기어가듯 적어 놨던 해독문을 천천히 다시 깨끗한 노트에 천천히 적어 내려갔다.
이르게 술이 끊긴 밤은 무척 길었다. 펜이 노트에 쓰이는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들리는 적막이 내려앉았을 때쯤, 아델이 고개를 들었다.
‘슬슬…….’
시간도 꽤 지난 것 같으니 하지 못한 일 한 가지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자. 아델이 그렇게 생각하며 정리하던 것을 접었다.
어설프게나마 그리고 있던 비석의 그림이 두꺼운 가죽 표지에 덮여 모습을 감췄다. 종이를 책 사이사이에 끼워 두고 책꽂이에 책을 꽂는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펜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을 열어 둬서 그런지 어깨가 퍽 싸늘했다. 아델이 양팔을 교차시켜 제 팔을 슥슥 문질렀다. 그러곤 이내 이제는 조금 익숙하게 방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온 아델이 곧장 헥시온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가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끙끙거리는 소리가 닫힌 방문의 사이로 아주 작게 새어 나왔다.
근처까지 가지 않는다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무척 작은 신음이었다. 그녀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곤 옷자락을 붙잡고 있던 손으로 문을 열었다. 기름칠이 잘된 방문이 삐걱거리는 소리 한번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윽.”
들어가자마자 방 안 가득 풍기는 알코올 냄새에 아델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창문도 꽉 닫은 덕분에 방은 온통 술 냄새로 가득했다. 통증을 없애고 수면을 취하기 위해 먹은 술이겠지만, 오늘따라 냄새가 유독 심하다. 침대 옆에 있는 협탁을 살펴보니 바닥을 구르고 있는 술병이 무려 두 병이다.
아델이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떡 벌렸다.
헥시온은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어렵사리 잠을 자고 있었다. 흘러내린 식은땀으로 침대는 흠뻑 젖었고 그의 오른손은 힘줄이 튀어나오는 것으로 모자라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시트를 붙잡고 있다.
“대체…….”
통증이 심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잠이 잘 오지 않아서 마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엉망이 된 침대와 시트로 인해 헥시온은 이불도 제대로 덮고 자고 있지 않았다.
아델이 이제는 조금 익숙하게 탁자에서 의자를 빼냈다. 혹여나 소리가 날까 그것을 들고 헥시온이 누워 자는 침대 옆에 놓은 후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새하얗게 질려 핏줄이 도드라진 오른손등 위로 아델이 손을 올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땀을 뚝뚝 흘리던 헥시온의 숨이 천천히 고르게 바뀌었다.
‘내가 준 술이 효과가 있다고 했나?’
술을 쥐면 아프지 않다고 했으니, 자신이 직접 만든 물건이 효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뭔가 만들어 주는 편이 좋으려나?’
기왕이면 직접 시간을 들여 만들 수 있고 언제든지 몸에 착용할 수 있는 것으로. 술은 검 손잡이나 허리띠에 달고 다니는 물건이라서 계속해서 손에 쥐고 있기는 번거로울 테고.
‘팔찌…….’
만들 수 있는 걸 생각해 보면 팔찌가 그나마 간단했다.
원석을 사서 실에 꿰거나 금으로 된 줄을 사서 원석이나 가공된 보석을 사이사이에 끼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아델이 헥시온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녀가 언제나처럼 눈을 감았다.
“당신이 얼른 낫기를 바라요.”
눈을 감은 아델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것만큼은 진심이었다. 이 고통을 얼마나 더 견뎌야 할지 그녀로선 도저히 짐작이 가질 않았으니까.
웬만한 일에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는 헥시온이다. 그런 헥시온이 이토록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눈 뜨고 보기가 힘들었다.
아델의 몸에서 녹색의 빛무리가 빠져나가 헥시온의 가슴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아델은 급격히 제 시야가 핑, 도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여기서 잠이 들 수 없다.
몇 차례 비슷한 일을 반복한 결과, 헥시온을 치유하기 위해 소원을 빌 거나 간절히 바라면 몸에 급격히 피로감이 쌓이며 잠이 몰려왔다. 이전에도, 그 전에도 그 때문에 헥시온의 침대에 얼굴을 박고 불편한 자세로 잠을 잔 것이다.
아델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핑글 도는 시야를 애써 붙잡았다. 헥시온은 아마도 괜찮을 거다. 뭣보다 저렇게 또 자고 있다가 아침에 서로 눈이 마주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아델?”
문을 열고 나가려는 아델의 귓가로 헥시온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얼마나 끙끙 울부짖었는지 조금은 쉰 목소리였다. 문고리를 잡은 채 아델이 걸음을 멈췄다.
반사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쓰러져서 괜히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몰려오는 피로를 아델은 애써 밀어내며 눈에 힘을 줬다.
“상…….”
아델이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상태가, 괜찮은가 보러 왔어요. 괜찮아 보이네요. 이만 가 볼게요.”
몸을 일으킨 헥시온이 통증이 가신 제 심장을 손으로 더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괜찮은 게 아니라, 아델이 괜찮게 만들어 준 거겠지요.”
“……어느 쪽이든 괜찮으면 된 일이잖아요.”
“아델.”
“네.”
헥시온의 낮은 목소리에 뒤돌아선 아델의 눈이 커졌다. 아델이 무겁게 내려오는 눈꺼풀을 애써 다그치듯 들어 올렸다.
“갑자기 무슨…….”
“…….”
“하루만 편히 자고 싶은데 안 되겠습니까?”
괜한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다. 방금 아델은 헥시온을 치유하고자 그의 손을 잡고 그가 낫기를 바랐다.
그는 괜찮아졌을 거다. 적어도 오늘 밤만큼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그를 내치고 곧장 방으로 돌아가면 바로 쓰러져 잠을 잘 수 있을 거다. 아마도 아까와 같이 그는 순순히 물러나겠지.
“……내가 필요해요?”
“네.”
망설임 없는 대답에 문고리를 잡은 아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수십 번, 수백 번, 지난 십 년간 줄곧 듣고 싶었던 말을 도대체 여기에 와서만 몇 번을 듣는 것인지. 십 년간 바라던 말을 최근에는 질리도록 듣고 있었다.
그것도 정말 간절한 목소리로.
등을 돌린 아델의 뒤로 헥시온이 바싹 붙었다. 그의 오른팔이 아델의 허리를 휘감았다. 헥시온이 고개를 숙여 아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한 달 뒤에도 일 년 뒤에도 당신이 필요합니다.”
“……병은 금방 나을 거예요. 내가 노력할게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아델이 모른 척 헥시온의 말을 맞받아쳤다.
헥시온의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서부터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숨결 사이로 느껴지는 독한 술 냄새는 그가 아직 술에 취한 상태일지도 모르겠다는 의아함을 그녀에게 남겼다.
“내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나요? 아델.”
“…….”
아델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녀 역시 마땅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조금 더 옳지만.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
아델이 입을 다문 채 숨을 삼켰다. 어리광을 부리듯 어깨에 이마를 한번 문지른 헥시온이 입술을 달싹였다.
“자고 가 주세요. 아델.”
그의 손이 아델의 손목을 느릿하게 엄지로 쓸어내렸다. 천천히 문지르는 그 감각에 아랫배가 찌르르 울렸다. 아델이 당황하면서도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렸다.
‘피곤해…….’
그런데 이상하게도 방금처럼 잠이 몰려오진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눈이 동그래졌다.
덥지도 않은데 어쩐지 방이 후끈했다.
아델이 기묘한 감각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놨다.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감사합니다.”
기묘하게도 모든 상황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마치 자연스럽게 위에서 아래로 물이 흐르듯 헥시온은 아델의 허리를 손등으로 쓸어내리며 그녀를 한쪽 팔로 덥석 안아 들었다.
흠칫.
놀란 아델이 반사적으로 헥시온의 목을 한쪽 팔로 감싸 안았다. 순간적으로 들어 올려져 중심이 흔들렸기에 무너지는 중심을 되찾기 위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다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민망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곤 해도. 그녀가 황급히 손을 떼곤 고개를 숙였다.
붉어진 얼굴이 화끈하다. 헥시온의 입술이 닿았던 목덜미도 그의 손이 닿았던 손목과 허리도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아델이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처음 검은 갑옷을 입은 그가 구해 줬을 때도 몸이 단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얇은 가운 위로 살결로 느껴지는 근육 역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다.
아델을 안은 헥시온이 그녀를 아주 천천히 침대 위에 눕혔다.
아델이 퍽 당황한 눈으로 멀뚱히 있지 헥시온이 허리를 굽히곤 아델을 향해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반달로 접힌 눈꼬리가 무척이나 예뻤다.
남자에게 그런 말이 어울릴 거라곤 생각해 본 적 없는 아델이었으나, 헥시온에 한해서는 확실히 달랐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고 소문난 비프타 공작가의 사람도 헥시온보다는 확실히 부족했다. 드넓고 깨끗한 저 북부 어딘가에 있다는 아름다운 겨울 호수처럼 헥시온의 눈동자도 무척이나 깨끗한 검은색이었다.
아델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헥시온의 뒷머리를 훑어내렸다. 조금 땀에 젖은 머릿결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갔다.
“아델.”
“네.”
“이런 밤에는 사내의 방에 함부로 발을 들이는 거 아닌 거 압니까?”
헥시온이 귓가에 속삭였다.
상대를 유혹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한껏 달큼한 목소리에 아델이 숨을 삼켰다.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풀린 눈동자는 그가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꿈속의 경계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인지 모호했다.
“난 당신이 갖고 싶어.”
“…….”
“이곳에 내 흔적을 남기고…….”
헥시온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의 손이 허리를 훑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그 입술을 탐하고 싶어.”
허리를 따라 흘러내리는 기묘한 감각에 아델이 아주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날 좋아해요? 헥시온.”
그녀가 조금 전에는 들었던 질문을 다시금 입 밖으로 꺼냈다. 헥시온의 눈꼬리가 움찔, 작게 떨렸다. 아델이 가만히 헥시온의 시선을 마주 봤다.
“……아뇨.”
헥시온의 마지막 이성이 간신히 정답을 내뱉었다. 이번에는 아델이 놀란 얼굴을 했다. 대답과는 다르게 헥시온의 입술이 아델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아델은 그의 입맞춤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가 느릿하게 눈을 감자 헥시온의 혀가 그녀의 마른 입술 사이를 가르며 파고들었다.
헥시온의 아델의 아랫입술을 빨며 입천장을 느릿하게 훑었다. 짧은 입맞춤에서 그가 마신 독한 술기운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단지 냄새만으로도 취할 것 같았다. 도대체 얼마나 독한 술을 마셔댄 것인지.
그만큼 통증을 견디기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내 감정엔 이름이 없어.”
“……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그런 이름의 감정을 모르니까.”
경어를 쓰다가도 또 말이 짧아지기도 하고 또다시 경어를 쓰기를 반복한다.
그는 지금 술기운에 취해 있는 게 분명했다. 아델은 확신했다.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데 헥시온이 먼저 아델을 침대에 눕혔다. 그가 그대로 그녀의 위에 올라타 아델의 목 뒤를 엄지손가락으로 느릿하게 문질렀다.
그가 입술이 닿을 코앞까지 다가와 아델을 불렀다.
뜨거운 숨결이 공기 중에서 뒤섞였다. 그의 손이 어깨를 타고 올라와 팔을 타고 내려가더니 이내 아델의 손을 깍지 꼈다. 그러곤 이내 그대로 아델의 위로 무너져 내렸다.
“……?”
툭 내려앉은 헥시온의 몸이 아델의 위에서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다시 잠에 빠진 듯한 그의 모습에 아델이 황당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헥시온? 지금 장난……쳐요?”
아델이 멍한 표정으로 불렀다.
헥시온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후끈했던 열기 위에 순식간에 얼음물이 끼얹어졌다. 아델은 손만 붙잡힌 채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제 몸을 내려다봤다.
아델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망할.”
그녀의 입에서 분노 섞인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도망가지도, 그렇다고 오른 열기를 달래느라 쉽게 잠이 들 것 같지도 않던 아델이 험악한 얼굴로 결국 눈을 감았다.
깍지 낀 손만이 유독 도드라지게 보이는 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