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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세 번째 비석 (1) (8/25)

Chapter 5. 세 번째 비석 (1)

헥시온과 아델이 저택을 나선 것은 다음 날이었다. 떠나겠다는 헥시온과 마지못해 그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인 아델보다도 더 강력한 벽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집사, 올란도는 강했다.

오랫동안 헥시온을 돌봐 온 탓인지 그를 휘어잡는 법도 무척 능숙했고 아델은 그의 웃는 얼굴을 이길 재간이 없었다. 소리 없이 강하다는 게 저런 것이라는 걸 그녀는 어제 처음 깨달았다.

아델에게는 은근하게 밀어붙이던 헥시온도 올란도의 강경하고 부드러운 강함엔 이기지 못했다. 결국은 하루 정도 경과를 보고 다음 날 아침에 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 되었다.

“이런 활동하기 편한 옷은 어디서 났어?”

옷을 입는 걸 옆에서 도와주는 줄리에게 넌지시 묻자 줄리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대공 각하께서 레이스가 가장 적고 풍성하지 않은, 활동성을 중시한 드레스를 준비하라고 말씀을 해 두셔서 미리 몇 벌 준비해 두었습니다.”

‘확실히 파티용은 아니네.’

아델이 고개를 살짝 숙여 옷을 살폈다.

하얀색의 원단으로 만든 원피스 형식의 드레스는 레이스가 거의 없었다. 손목을 살짝 덮는 긴 옷 형식의 드레스였다. 화려한 장신구는 없지만, 눈에 띌 듯 말 듯한 자수가 아름답게 수놓여 있어서 적어도 싼값의 드레스만은 아니라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신경 써 주셨구나.”

“네. 오시기 전부터 저택도 많이 바꾸려고 애쓰셨고 방의 리모델링에도 신경을 많이 쓰셨어요.”

줄리가 묵묵히 대답했다. 솔직하고 직설적인 말에 도리어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니라고 숨기는 것보다야 대놓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거다.

‘나도 승마를 배워 볼까?’

오늘도 헥시온의 앞에 타야 할 텐데, 그러는 것보단 차라리 말을 배워서 조금 더 빨리 가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쓸데없는 치장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요구에 따라 액세서리나 목걸이 등의 장신구는 최소한으로 줄여졌다.

아델이 이곳에 와서 놀랐던 것은 그녀가 말한 요구가 거의 100퍼센트 반영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의견을 덧붙일 때 무척이나 조심스러웠고 혹여 좋은 의견이 있을 것 같을 땐 얘기는 하지만 강요는 하지 않았다.

아델에겐 그것이 무척이나 어색했다. 그것이 어색하고 고마워서 아델은 기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동시에 그들의 호의에 순수히 감사를 표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재 보려고 하는 스스로에게 약간의 회의감도 느꼈고.

‘당신이 원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당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 겁니다.’

어제 봤던 헥시온의 서늘하고도 굳은 의지가 엿보이던 시선이 떠올랐다.

아델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 뒤 식사가 나와서 분위기는 유야무야 흐트러졌다.

‘그건 결국, 어느 쪽의 대답이었을까?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결국, 끝까지 헥시온의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 그는 대답을 회피했고 내놓은 대답은 아델에겐 만족스럽지 않은 대답이었다.

헥시온의 얘기를 조금 더 들어 볼 걸 그랬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들었다간 헤어날 수 없는 늪에 같이 발을 들여 허우적거릴 것 같아서 아델은 먼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아. 그 결과구나.’

그 대답은, 어쩌면 자신이 단호하게 거부했기 때문에 생긴 대답일지도 모른다.

“준비 다 되었습니다. 노트와 펜은 이곳 가죽 파우치에 넣었습니다. 말 등짐에 매달아 두겠습니다.”

“그래.”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고 굽이 낮은 단화를 신었다. 멋스럽지는 않지만, 활동하기에는 확실히 제격이다.

그녀가 방을 나서려 문 앞에 섰다가 살짝 몸을 돌렸다. 뒤에는 줄리가 뒷정리를 하고 쫓아 나오려고 하느라 조급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줄리.”

“네, 아가씨.”

“옷 입는 거 도와줘서 고마워.”

아델이 결국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간신히 내뱉었다. 돌아오지 않는 화답에 지쳐, 어느 순간부터는 더는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조차 꺼리게 됐었다.

가끔 입에 버릇처럼 붙어 반사적으로 나오는 인사는 있었지만, 진심으로 대답을 기대했던 적은 없다. 기대는 하지 않기로 스스로 마음먹었기에 애써 돌아오지 않는 인사에 상처받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델이 건넨 인사에 줄리의 눈이 크게 떠졌다.

늘 무표정한 그녀의 입가가 둥근 호선을 그렸다. 딱딱한 강철 같은 분위기였던 줄리가 순간 봄 햇살처럼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천만에요.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저야말로 아가씨의 시중을 들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상냥한 목소리로 돌아온 인사에 아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다정한 사람이니 무언가 답이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했다. 다정하다고 생각한 후에야 인사를 건네는 것은 비겁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금 비겁해지더라도 그녀는 상처를 받는 걸 피하고 싶었으니까.

“응.”

아델이 열이 오르려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혹여나 볼이 발갛게 변하기라도 할까 봐 신경 쓰였으니까. 고개를 숙인 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해. 같이 내려가자.”

“대공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살짝 부드러워졌던 목소리가 이내 또 딱딱하게 바뀌었다. 조금 아쉬우면서도 저게 또 줄리가 일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늘 미리 준비하고 먼저 기다려 왔으니까 한 번쯤은 나도 조금 늦게 가 볼래.”

아델의 의미심장한 말에 줄리는 무언가를 캐묻거나 의아한 표정을 얼굴에 띄우는 대신 묵묵히 허리를 굽혔다.

“그럼 금방 치우겠습니다.”

“응.”

아델이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줄리가 아까보다 차분한 기색으로 어지러운 방을 간단히 치웠다.

‘아니, 헥시온은 저번에도 기다렸었지.’

추운 날씨에도 몇 시간이나 일찍 나와서 아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과 귓불이 벌겋게 변해 곧 시퍼레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청소를 하는 줄리의 뒤로 커튼이 젖힌 창밖이 훤히 보였다.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하늘은 새파랗게도 푸르고 짙은 흰색의 몽글몽글한 구름은 푸른 도화지에 가득했다. 흐리지도 않은 하늘은 무척 맑았다.

“다 했습니다. 아가씨.”

가만히 창문 밖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도중 줄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먼저 나섰다. 뒤따라 줄리가 곧장 나왔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네.’

준비하는데도 시간이 빠듯했지만, 잠깐 서 있는 5분도 그렇게 짧았던 것은 아니다.

중앙 계단을 내려가니 헥시온이 계단 밑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항상 묵묵히 자신을 기다려 준다. 그것이 아델은 미안하고 또 고마웠다.

“헥시온.”

“이런, 놀라게 해 주시진 않을까 해서 모른 척하고 있었는데 그럴 마음은 전혀 없었던 모양입니다.”

“……다음엔 참고할게요. 그런 걸 좋아하시는 줄은 몰라서.”

떨떠름한 아델의 반응에 헥시온이 퍽 뻔뻔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서도 눈을 맞춘 채 천천히 허리를 굽혀 손을 내밀었다.

“가시죠, 레이디.”

능글맞게 대답을 피하는 헥시온을 얄밉게 노려본 아델이 결국 별말 없이 순순히 그의 가죽 장갑 위로 손을 올렸다. 그가 싱긋 웃으며 아델의 손을 붙잡고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올란도.”

“네, 주인님.”

“말이 참 힘겨워 보이는군. 대체 무슨 짐을 이렇게 싼 건가?”

“아가씨가 혹시나 감기에 걸릴까 봐 담요와 간단히 드실 요깃거리와 과일, 그리고 차가 마시고 싶으실지도 모르니 차 세 종류와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여벌의 옷을 한 벌씩 더 넣었습니다. 혹시 모르니 로브는 꼭 입고 출발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모로 설명하는 것을 보며 말의 등짐을 쳐다보니 등짐의 키가 헥시온의 반쯤은 될 것 같았다.

경악하는 아델과 헥시온을 올란도는 무척 뿌듯하게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잠시 꼭 잡은 두 사람의 손으로 갔다가 황급히 위로 올라왔다. 혹여나 제 관심에 두 사람이 민망하다고 손을 놓을까 싶어서였다.

“너무 많아. 로브는 고맙게 입지, 요깃거리까진 괜찮아. 차는 한 종류면 되고 여벌의 옷도 치워. 그리고 누가 봐도 텐트용으로 보이는 저 두꺼운 천은 뭔가?”

“혹시 하룻밤 밖에서 잠을 주무시고 오실까…….”

“누구랑 누가 자?! 미쳤어? 너 쌰, 썅, 벌써 거기까지…….”

갑작스럽게 허공에서 들린 목소리에 아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가 헥시온과 붙잡은 손에 힘을 줬다. 아델의 긴장을 눈치챈 헥시온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오랜만의 즐거운 나들이를 감히 방해하려고 하는 것이, 그녀가 끔찍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이 한층 더 불쾌해졌다.

탁.

허공에서 내려온 타오르는 태양과도 같은 주황빛 머리카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콰른 비프타였다. 걷어 올린 팔뚝에 힘줄이 투둑 돋아난 것이 보였다. 아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어디 가?”

“……내가 너한테 말해야 할 필요가 있어?”

“아델과 나는 데이트하러 갑니다. 눈치가 있다면 자기가 불청객이라는 걸 좀 깨닫고 빠져 주시죠. 처남께선.”

헥시온이 아델과 잡았던 손을 풀고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끌어당기며 말했다. 빙긋이 웃는 헥시온의 입꼬리가 한쪽만 보기 좋게 뒤틀려 있었다.

“처…… 처남? 누가 처남이야! 썅!”

“나와 아델은 결혼할 사이고 이미 약혼도 정식으로 승인받았으니 아무리 개망나니 같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처남은 처남이 아니겠습니까.”

손톱을 세워 긁는 듯한 말투였다. 비웃음을 띤 미소의 헥시온의 짜증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다. 적어도 아델에겐 생생하게 느껴졌다. 웃는 얼굴 뒤로 넘실거리는 무형의 기운이 아델에게도 닿았으니까.

“누가 저딴 가짜 새끼 오빠야?!”

움찔.

아델의 몸이 굳었다. 그녀가 주먹을 꽉 쥐었다. 헥시온 역시 뻣뻣해진 그녀의 몸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인상을 쓴 채 고개를 들어 콰른 비프타를 노려봤다.

“그런 것치곤 참 제 약혼녀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처남께선.”

꼬박꼬박 처남 소리를 붙이는 이유가 콰른 비프타의 속을 긁기 위함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또 괜한 불이 붙으셨군.’

올란도가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퍽 곤란한 표정으로 답답하게 죄여 오는 나비넥타이를 살짝 잡아당겼다.

“관심은 무슨. 밖에 나가서 괜히 공작가의 명예나 더럽히지 않을까 걱정돼서 그러지.”

“이런, 처남.”

“처남, 처남 겁나 시끄럽네! 누가 네 처남이야?! 재수 없는 새끼.”

“처남 뒤에 뭐가 묻으셨습니다.”

“뭐?”

콰른 비프타의 눈이 확 일그러졌다. 그가 짜증스럽게 몸을 돌려 제 뒤를 살폈다. 뭐가 묻었는지 확인하고 싶어도 목이 180도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니 확인하는 것도 애매했다.

“뭐가?”

“아. 자기 뒤에 묻은 오물은 보이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남의 뒤에 묻은 오물은 있지도 않은 걸 찾을 만큼 시력이 좋으신 분이.”

빙긋 웃는 헥시온의 말 한마디에 콰른 비프타의 표정에 의아함이 서렸다. 그리고 그것이 분노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가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네놈……!”

“그렇게 멍청해서 어떻게 그녀의 오빠 노릇을 하겠습니까. 스스로 오빠가 되지 않겠다고 해 주시니 감사하군요. 그쪽이 처남이면 나는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는데.”

그가 말을 하면서도 아델을 벌써 말 위에 앉혔다. 제 할 일을 하면서도 콰른 비프타를 상대하는 헥시온의 행동과 말투에선 여유로움이 흘렀다.

“그러면, 처남도 아니면서 남의 저택에 멋대로 쳐들어왔다는 건데…….”

아델을 등에 진 헥시온의 표정에 더 이상 미소는 남아 있지 않았다. 싸늘하게 식은 시선으로 그가 콰른 비프타를 쳐다봤다.

“내가 그때랑 다르게 지금은 컨디션이 좋습니다.”

헥시온의 시선이 콰른 비프타에게 향했다.

“하!”

“그래서 적당히 봐주면서도 그쪽을 딱 걸레 조각이 될 때까지는 두드려 팰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게 진짜…….”

“헥시온, 늦겠어요. 상대해 봐야 시간 낭비예요.”

덤벼들려는 콰른 비프타와 헥시온을 보던 아델이 말했다. 그 한마디에 콰른 비프타와 헥시온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헥시온이 꽉 쥐었던 주먹을 폈다.

“알겠습니다.”

그가 순순히 몸을 돌렸다. 짧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헥시온은 아델이 탄 말에 순순히 올라탔다. 짐이 줄어 있는 것을 보아하니 올란도가 어느 정도 수용하고 짐을 내린 듯했다.

“겁먹고 튀냐?”

“저와 맞설 능력이나 되고 하는 말입니까?”

헥시온이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말이 출발했다. 저택의 정문이 활짝 열리고 헥시온이 말을 달렸다.

“망할!”

발을 거세게 구른 콰른 비프타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가 빠르게 헥시온의 뒤를 쫓아 몸을 날렸다.

“……거머리 같은 게 하나 따라붙었군요.”

“네?”

힐끗, 헥시온이 뒤를 바라보는 것을 느끼고 아델이 시선을 돌렸다. 뒤쪽 하늘에서 눈을 번뜩이며 쫓아오는 콰른 비프타가 보였다. 덕분에 주변 시선이 온통 이곳으로 몰렸다.

‘……헥시온이 로브를 씌워 줘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당장 내려서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을 거다. 아델이 손끝으로 로브의 후드를 한층 더 꾹 눌러 썼다.

“창피해, 진짜.”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디 가냐고!”

“왜 당신과의 데이트는 방해꾼이 이렇게 많을까요.”

허리를 굽힌 헥시온이 아델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바람 소리 때문에 묻힐 법한 작은 목소리였지만, 또렷하게 들렸다.

“야, 씨……! 니들 안 떨어져?!”

‘도대체 쟤는 왜 저래?’

가끔 저택에 돌아올 때도 이상한 선물을 던져대고 매일같이 찾아와서 자신을 들쑤시며 미치게 만들었지만, 설마 그것이 밖에 나와서도 적용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언제 봐도 사람을 미치게 하는 남자다.

아델이 손으로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눈을 질끈 감자 헥시온이 몸을 한층 더 굽혔는지 목덜미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두렵지 않은 이유는 목덜미에 닿는 숨결 때문일까.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삐를 붙잡은 손으로 틈틈이 제 몸을 단단히 받쳐 주는 팔 때문일까.

‘한 손밖에 쓰지 못하면서.’

한 손으로 많은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아델, 눈은 뜨셔도 됩니다.”

“……별로 보고 싶지 않아서요.”

“뒤는 내가 지킬 테니 당신은 앞만 보십시오. 내가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아델이 망설이다가 결국 눈을 떴다. 낮게 몸을 움츠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스스로가 있었다. 아델이 뒤늦게야 입을 다물었다.

“허리를 곧게 펴시고 앞을 보세요. 아델은 언제나 어깨가 움츠러져 있더군요.”

“그랬나요?”

“네. 조금 더 허리를 펴시고 앞을 보시면…….”

말하던 헥시온의 입이 멈췄다. 그의 표정이 한층 험악해졌다.

“쓸모없는 풍경이 보이는데요.”

“네, 그렇군요.”

눈앞에서 알짱거리며 아예 시야를 가리고 있는 콰른 비프타를 보며 아델이 싸늘한 평가를 했다. 덧붙이는 헥시온의 목소리가 곧장 그녀의 말에 반응했다.

“속도를 좀 올리겠습니다.”

헥시온이 말의 눈앞에서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콰른 비프타를 본체만체하며 그대로 고삐를 내리쳤다.

“윽……!”

말의 머리가 콰른 비프타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말의 머리가 그의 몸을 박기 전에 콰른 비프타가 살짝 방향을 뒤틀어 그것을 피했다.

두 사람이 탄 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도적의 무리를 쫓거나 맨몸으로 사냥하며 여행을 다녔던 콰른 비프타에게 말의 속도를 쫓아 날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콰른 비프타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 중에 가장 특화된 것은 마법 쪽이었고, 그는 바람에 관련된 힘은 상당히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방해꾼은 정말 싫습니다.”

“나도 싫어요.”

“생각보다 훨씬 당신에게 집착하는군요.”

“……옛날부터 절 무척 싫어했어요. 저택으로 돌아온 날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저를 찾아다니며 괴롭혔고요.”

지금 다시 생각해도 끔찍했다. 아델이 어두워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헥시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싫어한다기보단….’

싫어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집착하는 것과도 같아 보였다. 적어도 헥시온의 시선에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 사실을 입에 올려 아델에게 말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그 사실을 알았다고 달가워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헥시온 자신이 그걸 그녀에게 전하고 싶지 않았다.

“빨리 가죠.”

“네.”

헥시온이 속도를 높였다.

뒤로 따라붙은 기척이 사라질 기미는 없었지만, 저 정도 속도로 쫓아오는 것을 따돌린다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마법사란 정말 귀찮은 존재야.’

그들의 힘은 늘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적정선을 초월한다. 하늘을 난다는 것도 감히 자연의 일부인 바람을 조종한다는 것도.

헥시온과 아델이 상대를 해 주지 않으니 콰른 비프타도 굳이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다만, 찢어 죽일 것 같은 시선으로 헥시온의 뒤를 바짝 쫓기는 했지만.

점점 인적이 드물어지고 두 번째 비석이 있었던 숲까지는 금방이었다.

“뭐야, 풀헤임 숲은 왜 왔냐?”

“너 입 좀 다물어.”

아델이 콰른에게 날카롭게 말했다.

“흠. 많이 컸네, 정말. 예전에 잘 훈련된 개새끼처럼 웃던 것에 비하면 낫지만.”

헥시온이 말의 고삐를 잡아당겨 멈췄다.

이곳에서부턴 가 보지 않은 곳이니 걸어서 가자고 이야기를 해 둔 상태였다. 헥시온이 내려서 아델에게 두 팔을 뻗었다.

“꺄악!”

헥시온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델의 몸이 두둥실 떠오른 탓이다.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내질러졌다. 그녀가 퍽 당황한 듯 몸을 움츠리다가 이내 제 몸을 휘감은 주황색의 실을 발견하고 고개를 홱 들었다.

“왜? 내리려는 거 아니었어? 굳이 비굴하게 저 새끼한테 내려 달라 그럴 필요 있는 것도 아니고.”

어깨를 으쓱인 콰른 비프타가 허공을 휘젓던 손가락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내리긋자 아델의 발이 땅에 닿았다. 생각보다 순순히 내려놓은 콰른 비프타의 행태에 아델은 발이 땅에 닿고 실들이 멀어져가고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콰른 비프타에게 닿아 있는 아델의 눈을 보던 헥시온의 시선이 탁해졌다.

“아델.”

“네.”

그의 부름에 그녀가 곧장 반응했다. 헥시온이 그제야 옅은 미소를 띠며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이곳으로부터 열 시 방향이었죠?”

“네.”

“뭐 하러 가는데?”

허공에 떠 있던 콰른 비프타가 아델의 옆으로 내려오며 말했다. 건들건들한 걸음걸이에 깍지 낀 손을 뒤로 한 채 성큼성큼 따라오는 콰른 비프타의 행동에 아델이 미간을 좁혔다. 참다못한 아델의 걸음이 뚝 멈췄다.

“너 자꾸 왜 쫓아와?”

“산책인데.”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자꾸 애처럼 굴래? 네가 올 곳이 아니니까 당장 돌아가.”

“나 보내 놓고 둘이 무슨 짓거리를 할 줄 알고? 미쳤냐? 내가 망할, 너랑 저거랑 그 짓 하는 꼴을 볼 것 같아?!”

“못 배운 거 티 내지 마. 내가 이 사람이랑 뭘 하든 네가 신경 쓸 일은 더더욱 아니고.”

아델이 싸늘하게 말하자 콰른 비프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세워진 단단하고 커다란 벽에 기분이 한층 가라앉았다. 콰른 비프타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넌 왜 썅, 걱정해 줘도 지랄이야?”

“내가 언제 걱정해 달래? 세상 사람들한테 동정을 받아도 네놈 동정은 사절이야. 걱정도 하지 마.”

아델의 말에 콰른 비프타의 말문이 막혔다. 뒤에서 흉흉하게 지켜보고 있으니 무슨 짓을 할 수도 없고 이번에 여행에서 돌아온 뒤론 뭔 짓을 해도 겁에 질리지도 않는다.

‘게다가 이상하게 쟤한테 마법을 쓸 때마다 한 번씩 끊긴단 말이지.’

누군가 마력을 중간에 잘라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 그대로 뚝 끊긴다. 그 감각은 결코 달가운 기분은 아니었다.

“알았으면 당장 돌아가. 제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끔찍하니까.”

아델이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콰른 비프타가 몸을 돌려 다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의기양양하게 그녀를 토닥이듯 등을 쓰다듬으며 그녀를 에스코트하는 도둑놈도.

“갑자기 나타나서는…….”

콰른 비프타가 혀를 차곤 곧장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저놈이 원하는 대로 순순히 물러나 줄 생각은 아쉽게도 그에겐 조금도 없었다.

콰른 비프타가 쫓아오는 것을 느꼈는지 헥시온이 아델과 보폭을 맞추면서도 고개를 슬쩍 돌려 뒤를 살폈다.

‘끈질기군.’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여러모로 없어 보인다. 끈기라기보단 저건 오기다. 헥시온은 정말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땅에 처박고 싶은 생각을 간신히 억눌렀다.

“미안해요.”

아델이 그런 헥시온의 기색을 눈치챈 듯 말을 얹었다.

“누누이 말했지만, 아델이 내게 미안할 건 없습니다.”

“그래도요.”

“이곳을 좋아하는 건 당신이 아닙니까.”

그의 말에 아델이 고개를 들었다. 항상 듣고 싶은 말을 미리 생각해 두기라도 하는 것인지 그는 퍽 좋은 말만 해 주곤 했다.

“아주 둘이 쇼를 해라. 무슨 극단이냐? 신파극 찍어?”

산통을 깨는 소리에 헥시온과 아델의 얼굴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뒤를 따라오던 콰른 비프타가 헥시온과 아델 사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왔다.

“……뭐 합니까?”

“산책.”

“좀 떨어져서 하시죠.”

“내가 어디를 어떻게 걸어가든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도둑 새끼야.”

콰른 비프타의 말에 헥시온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툭 튀어나왔다.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는 느낌에 헥시온도 짜증이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이쪽……이 열 시 방향이죠? 헥시온.”

“……네.”

헥시온이 콰른 비프타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한 이십 분은 걸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 아무것도 나타나질 않네요.”

아델이 퍽 곤란한 눈으로 헥시온을 쳐다봤다.

헥시온이 그제야 콰른 비프타에게서 시선을 떼며 고개를 들었다. 그가 시선을 내리자 몇 번이나 지나갔던 것 같은 발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뭔가 표시를 해 두고 다시 걸어 보죠. 다리는 괜찮습니까?”

“나는 괜찮아요.”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헥시온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주먹만 한 돌을 집어 들었다.

“도대체 뭘 찾는데?”

“넌 좀 제발 돌아가!”

“네가 집으로 돌아온다고 하면 갈게.”

콰른 비프타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델이 주먹을 쥐고 그를 노려봤다. 분노로 얼룩진 아델의 눈을 보며 콰른 비프타가 몸을 타고 흐르는 전율에 속으로 신음했다.

“그 집으로 돌아가느니 스스로 절벽에서 몸을 던지겠어.”

“……뭐?”

“특히 네가 있는 집으로 돌아오라는 말이 내게 얼마나 끔찍한지 넌 모를 거야.”

생각 외로 날카롭고 무거운 언사에 콰른 비프타의 입이 다물렸다. 일전에 호수로 몸을 던졌을 때도 생각했지만, 솔직히 그 정도일 거라고까진 생각지도 못했다.

휘익, 콰득-!

무언가가 날아가 콰른 비프타의 볼 옆을 스치고 뒤에 있던 나무에 사정없이 박혔다. 콰른 비프타의 눈이 크게 떠졌다.

“너 지금 싸우자는 거냐?”

“이런. 나무에 표식을 해 두려다 그만…….”

헥시온이 손을 몇 번인가 쥐었다 펴며 고개를 들었다.

“손이 미끄러졌군요.”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미소를 띤 헥시온이 말했다. 콰른 비프타는 뒤에 있던 나무에 쑤셔박히듯 처박힌 돌멩이를 힐끗 쳐다보고는 헥시온을 흉흉하게 노려봤다.

“망할.”

그가 낮게 욕설을 내뱉었으나 헥시온에게 따로 덤벼들지는 않았다. 그 대신 다시 아델에게 고개를 돌려 억지로 틀어막힌 대화의 물꼬를 다시 텄다.

“야, 우리 집이 그렇게 싫냐?”

“내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매일 졸졸 쫓아다녔으니까!”

“아직도 너 무시하는 개 같은 새끼가 있어? 누군데?”

콰른 비프타가 으르렁거렸다.

“네 가족.”

“네가 가짜인 건 사실이잖아.”

표정을 구긴 콰른 비프타가 여상하게 말했다. 의아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섞이기도 해서 아델의 표정이 한층 딱딱해졌다.

“그래. 그러니까 놔 달라고 했는데 싫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나가기로 했어. 헥시온은 날 내가 바라는 대로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고.”

“나한테 말했으면 됐잖아?”

뻔뻔스럽게 말을 던지는 콰른 비프타에 아델은 제 골이 띵한 것을 느끼며 손으로 머리를 붙잡았다. 정말 벽보고 대화를 한다는 게 이런 감각인 건가?

“그만두자.”

아델이 고개를 저었다.

“넌 날 이해할 수 없어. 평생 이해하지 못할 거야. 난 그 집안의 누구보다도 네가 가장 끔찍했어.”

어쩔 수 없지 않으냐는 저 시선과 태도가 그토록 끔찍했다. 대놓고 무시하거나, 대놓고 싫어하거나. 저택에는 아델을 수많은 방법으로 대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럼에도 아델은 그중에서도 콰른 비프타가 가장 싫었다. 늘 곁에 있었으면서도 늘 어떤 것도 해 주지 않았던 또래의 남자아이. 반응해 주지 않으니 점점 더 끔찍한 것으로 제 심장을 바닥에 떨어뜨렸던 사람.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더는 콰른 비프타가 보이지 않기라도 하다는 듯이.

“아델.”

“네.”

“아무래도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요?”

아델의 물음에 헥시온의 입이 반사적으로 벌어졌다가 다시 꾹 닫혔다. 그가 퍽 당황한 듯 아델을 바라보다 표식을 한다고 꽂아두고 간 나무에 박힌 돌멩이를 바라봤다.

“돌멩이 박힌 나무가 이 숲에 두 개가 존재할 것 같진 않아서요……?”

“푸흡…….”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웃음을 터뜨렸다. 본인도 장담할 수 없다는 듯 뒷말이 의문형이 되어 버린 것을 아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그러네요. 이런 독특한 나무가 두 그루나 있을 리가 없죠.”

아델의 웃음소리에 헥시온이 결국 그녀를 마주 보며 웃었다. 살벌했던 분위기가 그나마 잠깐 풀어졌다.

뒤쪽에 있던 콰른 비프타가 웃음을 터뜨리는 아델을 쳐다봤다. 그가 퍽 고까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곤 비스듬하게 몸을 기울였다.

“왜 들어갈 수가 없을까요?”

“이 숲은 정말 이상한 곳이군요. 고대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탐사를 한 사람이 없는 것도 알 만합니다.”

아델의 의문에 헥시온이 탄식하듯 말했다. 숲의 비석을 한번 둘러보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두 사람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여기, 거기 아니냐? 이상한 소문 있던 데.”

비스듬하게 나무에 기대어 있던 콰른 비프타가 말을 던졌다. 아델은 그 말에 움찔 몸을 떨며 미간을 좁혔지만, 꼿꼿하게 콰른 비프타 쪽으론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오직 헥시온만이 그런 그녀를 달래듯 그녀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콰른 비프타에게 시선을 옮겼다.

“뭐 아는 거 있습니까?”

“아니, 예전에 도적놈들한테 들은 얘기 중에 하나 생각나는 게 있어서. 이 숲에 근거지 삼으려고 했던 놈들인데 결국 실패하고 돌아왔다더라고.”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말했다.

“이유는 우리가 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까?”

“흐음…….”

헥시온의 말에 콰른 비프타가 말을 아꼈다.

퍽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그가 아델을 쳐다봤다.

콰른 비프타가 아델을 보며 한 걸음을 내딛자 헥시온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네가 궁금하다고 내 눈 제대로 보고 말해 주면 알려 줄게. 어때?”

“…….”

아델이 헥시온의 등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궁금하지만, 그것보단 콰른 비프타가 끔찍한 감정이 훨씬 더 컸다.

아델이 헥시온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헥시온이 힐끗 아델을 보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하루 야영이나 하고 가겠습니까? 아델.”

“여기서요?”

“올란도가 싸 준 식사도 있고 아늑하고 조용하니 아델은 좋아할 것 같아서요.”

헥시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려던 아델이 어깨너머에 있는 콰른 비프타를 노려봤다. 저놈이 있으면 그곳이 천국이라도 아델에게는 지옥과도 같았다.

“상처받게 너무 대놓고 싫어하네. 오라버니한테 너무 냉정한 거 아니야?”

콰른 비프타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아델이 그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헥시온을 올려다봤다.

“그럼 천천히 식사하고 한 번 더 돌아보고 가요.”

“…….”

“네. 돌아가서 조금 더 수소문해 보겠습니다.”

헥시온이 아델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싱긋 웃는 헥시온의 표정을 보며 아델이 저도 모르게 마주 웃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콰른 비프타는 닭장에 버려진 오리 알처럼 덩그러니 서 있었다. 아예 모른 척하고 이어나가는 대화에 콰른 비프타가 땅을 차며 발을 굴렀다.

“야, 지금 나 무시하냐?”

“그럼 두 번째 비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겠…….”

“아! 가도 가도 똑같은 위치로 되돌아온대!”

콰른 비프타가 결국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델과 헥시온의 무시를 못 견딘 탓이다. 그는 타인에게 관심받는 걸 좋아했고, 어떤 무리에서든 중심에 서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내지른 말에 헥시온의 눈이 가늘어지고, 헥시온을 마주 보고 있던 아델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몰라. 도둑 새끼야.”

헥시온이 관심을 두자 콰른 비프타가 표정을 확 구긴 채 거친 언사를 내뱉었다.

무척이나 성의 없는 태도였다. 적어도 누군가 그의 혈통을 말해 주지 않는다면 그는 뒷골목 무뢰배나 도적질을 놈들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홱 돌린 콰른 비프타는 구겨진 표정을 했다.

그제야 아델이 고개를 돌려 콰른 비프타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른 곳을 보고 있었음에도 그녀의 시선을 느낀 듯, 콰른 비프타의 몸이 작게 움찔 떨렸다.

아델의 시선에 콰른 비프타가 제 뒷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비뚜름하게 나무에 기댄 그가 결국 못 이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웬 도적놈들한테 들은 얘기야.”

말을 던지듯 무성의한 말투로 입을 연 콰른 비프타가 그때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도적놈들을 일망타진하려고 거기에 잠입해 있을 때의 얘긴데, 이놈들이 뭐 근거지를 옮기려고 했던 모양이야.”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콰른 비프타가 고개를 돌려 아델을 쳐다봤다. 예전이라면 늘 시선을 피하거나 고개를 숙였을 아델이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마주하자, 도리어 시선을 피한 것은 콰른 비프타였다.

그가 퍽 멋쩍은 듯 손톱을 세워 볼을 긁적이고는 아델에게 두었던 시선을 그녀의 어깨너머로 옮겼다. 콰른 비프타가 마저 입술을 달싹였다.

“풀헤임 숲에 사람이 잘 오지 않는 걸 잘 알고 거길 근거지로 삼으려고 숲을 헤맸는데, 들어가도 들어가도 자꾸 같은 곳으로 되돌아오더래.”

여전히 태도는 불성실했지만, 목소리만큼은 아까보다 차분하게 들렸다.

“아무리 헤매고 헤매도 일정 이상은 들어갈 수가 없어서 때려치웠다고 하더라고.”

어깨를 으쓱인 콰른 비프타의 말에 헥시온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것참…… 하등 쓸모없는 정보로군요.”

“뭐? 아, 넌 왜 나한테 시비 못 걸어서 안달이 났냐? 나 말 안 끝났거든?”

정확히 말하자면 눈이 마주칠 때마다 온몸으로 시비를 걸고 있는 쪽은 콰른 비프타였다. 그러나 제 모습은 생각지도 않는 듯한 콰른 비프타의 모습에 헥시온과 아델이 동시에 말을 잃었다.

“그래서 어쨌다고.”

곧 다시 말싸움이라도 벌일 것 같은 흉흉한 기세에 아델이 미간을 좁히며 콰른 비프타를 채근했다. 콰른 비프타가 아델을 힐끗 보곤 잔뜩 날을 세웠던 몸을 다시 폈다.

“뭘, 어쩌긴 어째.”

콰른 비프타가 아델을 힐긋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연다.

“그놈들이 그래도 몇 명씩 팀으로 움직였는데, 그중 한 팀이 새벽녘쯤에 실종됐다가 그다음 날 새벽녘쯤에 발견됐어.”

“…….”

아델이 콰른 비프타의 말을 경청했다. 뭔가 쓸모 있는 정보처럼 들렸다. 이곳은 인간이 쉽게 범접할 수 있는 미지의 영역이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밝혀진 것조차 없는 미지의 영역.

“그놈들은 숲으로 들어가는 오솔길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는데, 그 말을 들은 다른 도적놈들이 밤까지 그 길을 찾기 위해 헤맸지만 못 찾았다던데.”

콰른 비프타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웃기지. 거짓말도 칠 걸 쳐야지.”

콰른 비프타가 키득거리며 몸을 들썩인다. 비웃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에도 헥시온과 아델의 표정은 퍽 진지했다.

“다른 얘긴 없었습니까? 안에 들어가서 뭘 봤다든가.”

“글쎄?”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콰른 비프타로서야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이것을 기억하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던 콰른 비프타가 작게 탄성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들어간 놈이 웬 비석 같은 걸 봤다고 했었지. 사람 키보다도 조금 더 큰 돌로 된 비석이었다나?”

“길이 있는 모양이긴 하군요.”

콰른 비프타에게 원하는 얘기를 다 들은 헥시온이 그를 등지고 서며 아델에게 말을 건넸다. 아델의 시야에서 콰른 비프타가 가려졌다. 그 대신 시야에 가득 찬 것은 헥시온의 너른 가슴이었다.

“제 생각엔 새벽에나 길이 보이는 또 독특한 종류의 공간이 아닐까 싶은데, 아델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도 그래요. 새벽녘에서 동틀 때 사이를 기다리면 될 것 같아요.”

“여기서 야영하는 건 필수적이군요. 올란도가 천막을 챙겨 줄 때 그냥 가져올 걸 그랬습니다.”

헥시온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완전히 짐이라고만 생각해서 가져오지 않았는데, 설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기서 야영을 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도 못했다.

“연륜 있는 사람의 말은 무시하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팔짱을 낀 헥시온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할 거 없으면 돌아가자. 가짜.”

“이 바위는 앉을 만할 것 같은데 여기 앉아서 기다려요.”

“심심하지 않겠습니까?”

완전히 무시당한 콰른 비프타가 성큼성큼 걸어와 아델의 앞에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아델이 몸을 굳히자 그가 씩 웃는다.

“왜 안 보이는 척해. 괴롭혀 주고 싶게.”

“그러게 왜 내가 안 보이는 척을 할까요. 처남께선. 죽여 버리고 싶게.”

눈앞에 불쑥 튀어나온 콰른 비프타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헥시온이 그의 목덜미를 그대로 낚아챘다.

“악! 야, 개새끼야! 이거 안 놔?!”

짧게 한숨을 내쉰 헥시온이 콰른 비프타를 내던졌다.

“언제까지 그렇게 애처럼 굴 건지.”

헥시온이 콰른 비프타를 흘겨보며 말했다.

관심을 받기 위해 상대방을 괴롭히는 행위는 어린아이들이 관심을 달라고 말하는 보편적인 행동이긴 했지만, 설마 다 큰 성인에게서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헥시온이 콰른 비프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던져져 나무에 부딪힌 콰른 비프타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털며 이를 악문 채 고개를 쳐들었다.

콰른 비프타의 벌어진 다리 사이로 발을 집어넣은 헥시온이 그대로 나무에 기대앉은 콰른 비프타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귓가에 입술을 바싹 가져다 댄 헥시온이 입을 열었다.

“그런 식이라면 평생 그렇게 곁에서 맴돌기만 할 텐데 깔끔하게 포기하는 게 어떱니까.”

“뭐?”

“제 감정을 아는 건지 모른 척하는 건지. 그러니 그녀가 당신을 제대로 봐주지 않는 겁니다.”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헥시온의 말에 콰른 비프타의 눈매가 한껏 치켜 올라가며 매서워졌다. 바위에 앉아 있는 아델로선 조금도 들리지 않아서 그녀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주제도 모르면서 넘볼 걸 넘보십시오. 한심하기는.”

“망할, 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주먹을 쥔 콰른 비프타가 그대로 그것을 헥시온의 얼굴을 향해 내질렀다. 헥시온이 느릿하게 시선을 굴려 날아오는 주먹을 보면서도 싱긋 웃으며 그것을 그대로 맞았다.

퍽-!

무섭게도 둔탁한 소리가 났다.

잠시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아델의 눈이 크게 떠졌다.

“헥시온!”

그녀가 급히 바위에서 내려와 헥시온에게 달려왔다.

헥시온이 눈꺼풀을 내리깐 퍽 처연한 표정으로 오른손으로 제 볼을 붙잡았다.

“괜찮아요?!”

아델이 헥시온의 앞에 서서 콰른 비프타를 등진 채 놀란 눈으로 그의 볼을 살폈다. 그녀의 손이 헥시온의 오른손을 붙잡아 그것을 아래로 내렸다. 벌써부터 벌겋게 물든 볼이 선명했다.

“……네, 괜찮습니다.”

“이 새끼가 어디서 개 같은 수작질이야? 가식 떨지 마, 썅.”

아델을 밀쳐내고 그 사이로 끼어들어 헥시온의 멱살을 잡는 콰른 비프타를 보며 아델이 이마를 짚었다. 끔찍하고 끔찍한 악몽이, 현실에서도 그녀를 지옥으로 밀쳐낸다.

“콰른 비프타.”

“너도 이 새끼 수작질에 속지 마. 앞뒤 다른 더러운 새끼라고.”

“야, 이 미친놈아.”

아델의 입에서 결국 참지 못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꾹꾹 죽여 놨던 슬럼가의 아델이 최근 불쑥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정말 오랜만에 쓰는 속된 단어는 입 안에서 어색하게 맴돌았다.

“내가 너한테 대체 뭘 했어? 네가 하란 대로 다 하고 살았잖아! 내가 뭘 더 해 줘야 해? 앞으로도 네 밑에서 개처럼 기어야 돼?”

콰른 비프타가 헥시온에게 향했던 몸을 아델 쪽으로 돌렸다. 그가 무표정한 눈으로 아델이 토해내는 말을 고스란히 들었다.

“그렇게…… 공작이 날 죽일 때까지?”

주먹을 쥔 아델의 말에 콰른 비프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야. 아무리 우리가 싫어도 넌 무슨 말을…….”

“난 싫어. 더는 그렇게 살기 싫어. 비참해지고 싶지도 않고 더 이용당하고 싶지도 않아.”

아델의 말에 콰른 비프타가 주먹을 쥐었다. 아델이 울컥해서 쏟아내는 말은 평소라면 기분이 좋았을 텐데도 전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도리어 속이 울렁거렸다.

“콰른.”

그녀가 콰른 비프타의 이름을 불렀다. 콰른 비프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쿵.

심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콰른 비프타가 황급히 손을 들어 제 가슴을 꾹 눌렀다. 떨어졌다고 생각했던 심장은 다행히 제자리에서 뛰고 있었다. 평소보다 조금은 빠르게. 그러나 확실하게.

“콰른 비프타.”

그녀가 다시 한번 콰른 비프타를 불렀다.

“……단 한 번이라도 나를 안쓰럽게 여긴 적이 있다면, 제발 날 그냥 둬.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아델이 가슴께의 옷자락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 잘 다림질되어 있던 천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헥시온이 그런 그녀의 뒤로 다가와 아델의 허리에 손을 감싸며 달래듯이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아델의 뒤에 선 헥시온이 옅은 미소를 띤 채 콰른 비프타를 내려다봤다.

“네겐 그곳이 돌아갈 집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겐 아니야. 내 집은 애초부터 없었고 지금도 없어.”

진은 그녀에게 언제든지 그곳으로 와도 좋다고 했지만, 아델도 잘 알고 있었다. 그곳에 가도 그녀는 겉돌 뿐이라는 걸. 이미 그녀가 있을 자리는 어디에도 없어졌다. 지붕 없는 집이어도 돌아갈 길거리라도 있었던 예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어디에도 편히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거긴 단 한 번도 내 집이었던 적이 없으니까.”

아델의 말에 콰른 비프타가 가만히 그녀를 쳐다봤다.

“저택이 싫은 거면 다른 집을 사 줘? 저 새끼는 안 돼.”

“적어도 너보단 나아.”

“허, 저 독사 품은 도둑놈의 개새끼보단 내가 더 낫다고 장담한다!”

으르렁거리는 콰른 비프타에 아델이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대화가 통할 것 같은 상대에게나 대화해야지, 그와는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저놈은 안 돼. 차라리 집을 사 줄게.”

“공작가와 연관된 건 더 이상 싫다고.”

“그럼 한 달만 기다리든가. 도적 소굴 몇 개 털어올 테니까.”

본인 자체가 공작가와 연관된 존재라는 사실은 머릿속에 없는 걸까? 아델은 속이 턱 막힌 것 같은 기분에 몇 번이고 심호흡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한테 왜 그래?”

“네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너 내 동생이거든?”

“난 카레나 비프타가 아니야.”

아델의 담담한 말에 콰른 비프타가 답답하다는 듯 짚었던 짝다리를 펴며 그녀를 제대로 마주 봤다.

“누가 너보고 카레나래? 걘 죽었어! 나도 안다고.”

콰른 비프타가 이를 드러내곤 성을 냈다. 퍽 억울하다는 목소리에 아델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아델도 알고는 있었다. 콰른 비프타는 자신을 가짜라거나 야라고 부르긴 했지만, 카레나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 아델은 굳이 그 사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콰른 비프타는 비프타 가문이다. 그녀가 어떻게든 쓰러뜨리고 넘어뜨려 복수하고 싶어 하는 가문의 사람.

“어쨌든 저 새끼랑 둘만 있는 꼴은 못 보니까 그렇게 알아.”

그렇게 말한 콰른 비프타가 헥시온을 한번 노려보더니 나무 기둥에 대충 주저앉아 기대며 팔짱을 끼곤 눈을 감아 버렸다.

더는 대화하기 싫다는 듯한 몸짓에 아델이 결국 제 뒷덜미를 붙잡았다.

‘위 아파.’

한층 더 속이 답답해진 듯했다.

아델이 결국 콰른 비프타를 쫓아내는 걸 포기하고 제가 앉아 있던 바위로 돌아가 앉았다. 헥시온이 눈을 감은 척하고 있는 콰른 비프타를 한번 흘겨보곤 아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헥시온, 괜찮아요?”

“사실 조금 아픕니다.”

헥시온이 약한 소리를 하자 콰른 비프타가 눈을 번쩍 떴다. 아델의 뒤로 사납게 노려보는 시선에도 헥시온은 퍽 처연한 눈으로 눈꺼풀을 내리깔고 있었다.

“……헥시온한텐 미안한 일밖에 없네요.”

“아델이 미안할 일은 아닙니다. 훈련도 안 된 개새…… 아니, 개를 풀어 둔 공작가가 문제지요.”

헥시온의 여상한 말에 콰른 비프타가 울컥한 듯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고 헥시온에게 덤벼들겠다고 욕설을 하며 일어나는 일도 없었다.

헥시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도 미안해요.”

아델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든 그녀가 조심스럽게 시퍼렇게 멍이 들기 시작한 헥시온의 볼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따끔거리는 볼에 닿아 오는 온기에 한층 더 통증이 강해졌지만 헥시온은 모른 척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헥시온이 한층 풀어진 표정으로 아델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지랄들을 한다. 지랄들을 해.”

눈꼴신 모습을 보다 못한 콰른 비프타가 결국 한마디를 토해냈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헥시온과 아델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무시했다.

“아델.”

“네.”

“손잡고 있어도 됩니까?”

“안 돼!”

콰른 비프타가 눈을 부릅뜨며 말을 끊었다. 헥시온의 웃는 얼굴 위로 힘줄이 돋아났다. 그가 퍽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야, 나 응급상처약 있어. 이거 처발라.”

콰른 비프타가 가슴 안쪽 주머니에서 나무로 만들어진 연고통을 꺼내더니 아델이 있는 쪽으로 힘껏 던졌다.

헥시온이 손을 뻗어 그것을 붙잡았다.

“아델이 맞을 뻔했잖습니까.”

“안 맞아! 내가 그 정도도 못하는 병신인 줄 아냐?”

“네.”

헥시온이 단호하게 대답하곤 퍽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연고통을 열었다. 맡아지는 약초 냄새는 헥시온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상당히 좋은 것이네요.”

“응급상처약이면 바르고 하루도 안 돼서 낫죠?”

“네. 비싼 값에 거래되는 거니 가지고 계시다가 혹시 다치시면 쓰십시오.”

헥시온이 아델의 손바닥에 연고통을 올려 주며 말했다.

‘나보다 다친 사람이 써야 할 것 같은데.’

그녀가 어색하게 웃다가 연고통의 뚜껑을 열어 손가락으로 연고를 덜었다. 그대로 헥시온의 볼에 그것을 발라 주곤 연고통의 뚜껑을 닫아 다시 헥시온에게 넘겼다.

“다치는 일은 저보단 헥시온이 더 많으니, 헥시온이 쓰세요. 웬만하면 다치지 말고요.”

“네, 알겠습니다.”

헥시온이 연고통을 아델에게서 받으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걱정해 주는 게 무척이나 그에겐 생소했다. 아픈 데 바르라고 연고를 챙겨 주는 것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이런 행동을 그에게 하는 사람은 적어도 없었으니까.

“썅, 그거 내 거거든?”

“쓰라고 준 거 아닙니까?”

“…….”

콰른 비프타가 차마 돌려받을 예정이었다곤 말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헥시온이 아델에게 받은 연고를 안쪽 주머니에 넣고는 고개를 젖혔다.

“시간이 아직 너무 많이 남았군요.”

“그러게요.”

퍽 조용한 시간이었다. 적어도 콰른 비프타가 입을 다물고 나니 숲에는 다시 적막과 고요만이 내려앉았다.

그가 없었다면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을지도 모르겠지만, 콰른 비프타가 있어서 헥시온은 말을 아끼는 듯했다. 물론, 아델 역시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낮에도 적막만이 감도는 기묘한 숲의 세 사람 사이로 조금은 눅눅한 바람이 불었다.

* * *

적막한 시간을 견디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피곤했던 것인지 불편한 자세로 무릎을 끌어안은 채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잠이 든 아델을 보던 헥시온이 그녀의 위로 담요를 덮어 줬다.

한 손으로 덮어 주느라 덮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그럼에도 꼼꼼히 여며 주기까지 하고 나니 퍽 만족스럽다.

‘도롱이 같군.’

담요로 둘둘 말린 모습이 퍽 그것과 닮았다. 헥시온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가 이내 다시 거둬들였다.

그가 옅게 미소 짓는다. 헥시온이 그녀의 옆자리에 앉자 아델의 머리가 툭, 쓰러져 그의 어깨에 닿았다. 예상치도 못한 사태에 헥시온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하필이면 또 움직일 수 있는 팔을 빼앗겨 버렸다.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상태에 헥시온은 숨을 쉬는 것조차 무척이나 조심해야 했다.

“아주 정성이다. 정성. 야, 남의 걸 훔쳐가니까 좋냐?”

콰른 비프타가 무척이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훔쳐간 적 없다만.”

“허, 반말하네?”

“먼저 찍찍 반말을 해댄 건 어디의 어느 새끼인지 모르겠군.”

“존나 가식적인 새끼.”

“그녀가 보기만 해도 몸서리치는 누구보단 낫지 않겠나.”

콰른 비프타가 나무에 기댄 채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그러면서도 목소리는 크게 내지 않는 것은 분명 아델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뻔했다.

“너 왼쪽 팔 한 번도 움직이질 않던데. 팔 병신이냐?”

“수준 낮아서 상대하기가 버겁군. 단어 선택하고는.”

혀를 찬 헥시온이 한심하다는 듯 그를 한번 흘겨보곤 고개를 돌렸다. 말을 하면서도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고 노력해서인지 헥시온의 말은 여느 때보다도 훨씬 뻣뻣하고 딱딱하게 들렸다.

“너 재수 없는 거 알지?”

“아까 말했을 텐데. 네 등 뒤에 있는 오물이나 닦고 다니라고.”

“……아오, 진짜.”

콰른 비프타가 화가 난 듯 발을 구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콰득, 콰드득.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에 헥시온과 콰른 비프타의 몸이 동시에 굳었다. 예민한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미친.”

“……정말 알면 알수록 놀랍군.”

비석에 칼럿병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기묘한 병에 관해서 적혀 있는 것이 신경 쓰이고, 아델의 생기가 감도는 시선도 보고 싶어서 온 것이지만 이곳에서 겪는 일들은 헥시온에게도 무척이나 놀라웠다.

“이게 뭐야? 야, 이 숲은 원래 이래?”

“무서우면 돌아가시죠.”

“미쳤냐? 네가 걔한테 뭔 짓을 할 줄 알고!”

“뭘 하든 당신이 상상하는 그 이상일 겁니다.”

헥시온의 말에 콰른 비프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 이, 이, 발정 난 망할 자식이! 너 미쳤어?!”

“생각하는 것도 저급하기는.”

헥시온이 말하며 다시 모습을 바꾸고 있는 숲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아무리 앞으로 나아가도 계속 제자리로 돌아왔던 곳의 나무들이 콰드득, 콰드득, 소리를 내며 옆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마치 길을 만들듯 수풀은 한껏 좌우로 몸을 눕히고 나무 사이로는 오솔길처럼 보이는 것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 기묘하고도 놀라운 광경을 보던 헥시온이 시선을 내려 아델을 내려다봤다.

“아델.”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아델의 이름을 불렀다. 콰른 비프타를 대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아델. 일어나십시오.”

“으음…….”

아델이 투정을 부리듯 헥시온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헥시온의 몸이 굳었다. 아델이 그제야 눈을 뜨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미쳤어…….’

그녀가 절망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층 붉어진 귓불의 헥시온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아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미안해요.”

아델이 붉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대체 어디에 머리를 부볐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야! 너 지금 누굴 유혹하는 거야?!”

휙, 시야가 바뀌었다. 갑작스럽게 끌려가는 몸에 아델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아델이 잡힌 제 손목을 내려다보다가 눈을 끔뻑였다. 버럭 내질러진 소리에 아델이 당황한 표정으로 변명하듯 입술을 달싹이며 고개를 들었다.

“유혹 안 했…….”

“너 같은 남자 새끼가 백날 유혹해 봤자 역겹거든!”

으르렁거리는 콰른 비프타의 목소리가 헥시온에게 향했다. 애먼 곳으로 향한 콰른 비프타의 언성에 아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얘 눈이 얼마나 높은지 아냐? 너 따위 건 마차 가득 실어 줘도 거절이라고.”

콰른 비프타의 의기양양한 말에 아델의 표정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언제부턴가 사교계 영애들을 제외하곤 상대하는 걸 꺼리게 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내가 누굴 데리고 와도…….’

공작이 수준에 맞지 않는다고 어울리지 말라고 하거나 아니면, 콰른 비프타가 계속 나타나서 짓궂게 괴롭히기에 그냥 포기하고 있었을 뿐이다.

뭣보다 누가 봐도 그런 남자들에 비해 헥시온의 외모는 뛰어났다. 솔직히 처음 봤을 땐 아델 역시 넋을 반쯤은 잃었었을 정도다. 공작가 사람들의 미모가 상당했음에도 넋을 잃을 정도였다는 건 그의 외모가 공작가의 사람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델, 시끄러운 개는 두고 길이 없어지기 전에 얼른 가시죠.”

헥시온이 손을 뻗었다.

콰른 비프타가 사정없이 잡은 손목이 슬슬 아파져 와서 손목을 비틀자 그가 퍽 기분 나쁜 얼굴을 하면서 한층 더 손에 힘을 줬다.

“읏…….”

아델이 작게 신음을 흘리며 표정을 구겼다.

동시에 헥시온이 콰른 비프타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안 놔?!”

“아델의 손을 먼저 놓으시죠. 아파하지 않습니까.”

콰른 비프타가 형형한 시선을 헥시온을 노려보다가 아델을 힐끗 쳐다보더니 손에서 힘을 풀었다. 꽉 잡혔던 아델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괜찮습니까?”

“네.”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 손목을 매만졌다. 벌겋게 달아오른 것으로 보아 곧 멍이 생기진 않을까 싶을 정도다. 헥시온이 퍽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손목을 엄지로 살짝 쓸었다.

“일단, 가시죠.”

그가 아델이 잡히지 않았던 왼손을 잡으며 그녀를 이끌었다.

아델이 그제야 시선을 들어 오솔길을 쳐다봤다.

“……와.”

그녀의 입에서 메마른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놀라긴 했지만, 제대로 감정조차 드러나지 않는 메마른 감탄이었으나 아델은 충분히 놀라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오솔길이 그녀의 눈에는 환하게 빛나며 반짝이고 있는 듯이 보였다. 종종 허공에 떠다니던 기묘한 것들이 모이고 모여 길을 만든 것처럼 느껴졌다.

촉촉하게 젖은 흙으로 만들어진 오솔길 위로 겹쳐 보이는 흐릿한 생명체들을 보며 아델이 조심스럽게 그곳에 발을 디뎠다. 헥시온이 그녀와 보폭을 맞췄다.

“야, 근데 대체 뭘 보러 가는 거냐?”

“…….”

콰른 비프타가 말을 던졌으나 아무도 그에 대답하지 않았다. 헥시온의 시선은 아델에게 고정된 채였고 아델의 시선은 정면에 고정된 채였다.

이제는 익숙해질 것 같은 무시에 콰른 비프타가 짜증스럽게 표정을 구기면서도 별말 없이 그들을 따라 오솔길 깊은 곳으로 발을 들였다.

“뭔가가 보입니까?”

“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아델에겐 보이나 해서요.”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입을 다물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묻는 것이, 얼마 전부터 보게 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을 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거 부럽군요.”

“네?”

이해할 수 없다는 아델의 반문에 헥시온이 슬며시 눈을 휘며 싱긋 웃었다.

“나도 당신과 같은 걸 볼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요.”

아쉽다는 듯 덧붙이는 목소리에 아델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듣기 좋고 달콤해서, 가끔은 목소리에 홀릴 것 같은 기묘한 기분도 들었다.

“끝이 보이는군요.”

“그러게요.”

빛나는 오솔길의 출구가 보였다.

콰른 비프타가 두 사람의 뒤에서 조금 멀찍이 떨어진 채 슬쩍 그들의 어깨너머를 쳐다봤다. 확실히 오솔길이 딱 끊기는 구역이 그의 눈에도 보였다.

“역시, 여기였던 모양입니다.”

헥시온이 먼저 오솔길을 빠져나가며 말했다.

정말 허허벌판에 가까울 정도로 잡초 외엔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떡하니 비석 한 개가 세워져 있었다. 아델의 머리통의 한 개만큼이나 더 큰 비석은 까치발을 떼야 간신히 맨 위의 글자가 보일 정도였다.

“아. 동이 트네요.”

콰득. 콰드득.

햇볕이 비추는 순간, 고개를 숙였던 수풀들이 순식간에 제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숙였던 몸을 일으키더니 이내 잠시 잠깐 길을 만들어 줬던 기묘하게 빛나는 생명체들이 하나둘 흩어지고 있었다.

“어……?”

멀찍이 뒤에서 쫓아오던 콰른 비프타가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이게 뭐야?!”

아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콰른 비프타가 오솔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는 순간 콰른 비프타와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야, 도둑 새끼야! 너 걔한테 허튼짓하면 가만 안 둔다!”

멀어져 없어지는 마지막 순간에 들려온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아델이 입을 떡하니 벌렸다. 도대체 쟤는 왜 저러는 걸까? 아델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가득 자리 잡았다.

‘언제부터 날 걱정했다고.’

아델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콰른 비프타가 있던 자리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해가 뜨자 오솔길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마치 애초에 길 따윈 없었다는 것처럼.

“없어졌네요.”

“드디어 조용해져서 나는 기쁜데, 아델은 아닙니까?”

“그냥 아무렇지도 않아요.”

속이 좀 시원해지긴 한 것도 같지만, 이게 기쁘다는 감정인지 자신이 지금 기뻐하고 있는 것인지조차도 불확실했다.

생각하던 아델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비석으로 향했다.

‘어디다 떨어뜨려도 살아남을 놈이니.’

걱정은 전혀 되지 않는다.

놀랍게도 아주 조금도.

그의 생명력이 바퀴벌레와도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정말 그렇게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랐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에 떨어뜨리든, 전쟁 한복판에 적장에 떨어뜨리든, 바다 위에 떨어뜨리든 콰른 비프타는 반드시 살아남아 저를 그렇게 만든 놈에게 오물을 쏟아부을 놈이었다.

비석에는 두 가지 글씨가 겹쳐 보였다.

하나는 밤에만 보일 것이 분명한 요정의 진액으로 적힌 글, 또 하나는 훅센라이트가 비석을 파서 적어 놓은 글.

“이곳에선 이상한 일은 없을 것 같군요.”

헥시온이 비석과 덩그러니 바위 하나만 놓여 있는 허허벌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이상한 길로 이곳까지 건너오긴 했지만요.”

“아, 갑자기 생갔났는데 돌아가면 헥시온에게 진을 소개해 줄게요. 일전에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여태 기회를 잡지 못해서 소개를 못 해 줬거든요.”

“알겠습니다.”

시선은 비석에 둔 채로 건네 오는 아델의 말을 헥시온이 수긍했다.

“아델.”

“네.”

“내가 말했던가요?”

“어, 뭘요?”

“최근 왼쪽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입니다. 그거 압니까?”

아델이 눈을 크게 뜬 채 비석으로 향해 있던 몸을 비스듬히 돌렸다. 몸을 돌리자 헥시온이 길게 늘어뜨려 놨던 왼팔을 들어 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힘겨운 듯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팔은 확실히 움직이고 있었다. 잔뜩 녹이 슬어 고장 난 기계를 억지로 움직이려는 듯이.

툭.

헥시온의 볼을 타고 내려온 식은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델이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헥시온, 무리하지 마요.”

미간을 찌푸린 아델이 그를 말렸다. 멀리서 보기에도 무척이나 힘겨워 보이는 일이라 얼마나 아플지 상상조차 되지도 않았다.

“이렇게 억지로라도 움직이면, 통증이 느껴집니다.”

“그러니까요. 아프잖아요.”

“내 왼팔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잖아요. 난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걸 느낍니다.”

헥시온이 고개를 든 채 아델을 마주 봤다. 고통에 흐려진 검은색 눈동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델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팔에서 힘을 빼는 듯 왼팔이 아래로 내려갔다.

“당신 덕입니다.”

헥시온이 말했다.

그가 성큼, 아델의 앞까지 걸어가 그녀의 앞에 섰다.

“아델. 난 이 감사를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손을 뻗은 헥시온이 아델의 오른쪽 손바닥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아까 콰른 비프타가 붙잡은 그녀의 손목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헥시온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가 조심스럽게 아델의 손목에 입을 맞췄다. 손을 뒤집어 손등에도 입을 맞춘 그가 옅게 웃었다.

“연고는 아델이 발라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 있다가 바를게요.”

“펜을 쓰는 데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네.”

아델이 냉큼 헥시온의 손에서 제 손을 빼냈다. 그녀가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매만졌다. 시큰거림 사이로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기분이 이상해.’

아델이 제 손목을 매만지다가 이내 비석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해독이나 할게요.”

“어차피 이곳엔 내일 새벽녘까지는 있어야 할 테니 천천히 하세요.”

아델이 본능적으로 품에 챙겼던 파우치를 열어 노트와 펜을 꺼냈다. 그녀가 조용히 비석을 보며 해독을 시작했다. 해독은 처음과 비교하면 확연히 빨라진 속도로 진행됐다.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헥시온은 그저 그녀와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는 나무에 기대선 채 그녀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욕심이라.’

무언가에 욕심을 내본 적이 대체 얼마 만이었던가. 이토록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한 것도 오로지 아델뿐이다. 그러나 아델은 손만 뻗으면 흩어질 것처럼 언제나 위태로웠다. 한참 동안 비석 해독에 빠져 있던 아델이 헥시온의 시선을 느낀 것은 그로부터 조금 뒤의 일이었다.

‘……집중 안 돼.’

집중이 안 돼도 이렇게 안 될 수가 있던가. 한번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니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얼굴에 구멍 뚫리겠어.’

절로 얼굴에 열이 오를 것 같아서 고개가 점점 숙어진다. 애써 머리를 흔들며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시선이 떨어질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이곳……은……인가?’

아델의 눈이 잘게 떨렸다. 그녀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노트에 글자를 끄적였다.

“그……, 헥시온.”

아델이 결국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며 그를 불렀다. 아델만을 흔들림 없이 바라보고 있던 헥시온이었기에 그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네.”

여상한 표정의 그를 바라보며 아델이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피곤하지 않아요? 뒤에 가서 잠시 눈 붙이고 있어도 돼요.”

“괜찮습니다.”

“……어, 그래도 계속 서 있으면 좀 힘들 것 같은데.”

“삼 일도 서 있으라고 하면 서 있을 수 있습니다.”

헥시온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해도 묵묵히 받아치는 헥시온에 그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고개를 끄덕인 아델이 다시 비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집중하자. 집중.’

그녀가 스스로 최면을 걸듯이 눈을 부릅뜬 채 글자를 노려봤다. 두세 시간쯤 지나서야 아델은 고개를 들며 짧은 한숨을 뱉을 수 있었다.

“다했어요.”

“평소보다 조금 오래 걸렸군요.”

“……네. 좀.”

누구누구가 자꾸 쳐다보고 있어서 그렇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한 아델이 떨떠름하게 수긍하는 것으로 대화를 끝냈다.

“오늘은 별거 없었어요.”

아델이 비석을 해독한 걸 눈으로 천천히 훑었다.

낮의 비석의 해독문이 유독 짧아서 밤의 비석을 해독하는 데 시간 대부분을 할애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세 번째 비석까지 온 자네들을 칭찬하네. 이곳은 숨겨진 공간이어서 찾기가 힘들었을 텐데. 나 역시 이곳은 아주 우연히 발견한 공간이었네. 동이 트기 전 새벽녘에만 아주 잠깐 드러나는 길은 요정의 세계의 요정이 되지 못한 작은 것들이 만드는 신비로운 길이지.”

헥시온이 나무에 기댄 채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눈을 감고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가끔은 정말 동화 속에 들어온 기분마저 들 때도 있었다.

헥시온에게도 아델에게도 비석의 이야기는 어릴 적에는 느껴 보지도 들어 보지도 못한 동화와 같은 신비로움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아름다운 건 길뿐이네. 이곳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거든. 그럼에도 내가 이곳을 선택한 건 함부로 들어오기 어렵기 때문이네. 이 정도도 하지 못하면 안으로 들어갈수록 위험해지는 비석엔 접근할 수도 없을 테니까.”

“……정말 걸어온 길이 전부였군요.”

“그러게요.”

아무것도 없는 휑한 공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 그럴 줄은 몰랐다.

너무 당당한 비석에 쓰인 말에 아델도 잠깐 말을 잃었다.

“계속 읽을게요.”

“네.”

“혹시나 함께 온 동료가 미처 길을 다 빠져나오지 못한 것을 걱정하고 있다면, 그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이곳에 도달하지 못하고 길의 중간에 멈춰선 자는 원래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게 될 테니까.”

아델이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딱히 주의점은 없다.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고 그저 휑한 들판 외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이니 편히 넘어가도 좋다. 그나저나 비석에 글을 써 넣는 것은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구나.”

그녀가 호흡을 고르듯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곤 입을 열었다.

“영웅으로 칭송받았던 내게 이런 적막함은 무척이나 달가운 것이지. 내가 이곳에서 전할 것은 없다. 네 번째 비석은 오솔길이 시작된 첫 시작점 열한 시 방향에 존재한다. 긴장하고 가는 것이 좋을 거다.”

아델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껏 장황했던 해독문에 비해서 무척이나 간결하군요.”

“덕분에 밤의 비석을 해독하는 데에 시간을 전부 쏟았어요.”

“사실 나도 궁금한 건 그쪽이긴 했습니다만.”

낮게 웃은 헥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밤의 비석에 적힌 것은 헥시온이 무척 신경 쓰던 것이었다. 그녀가 제가 해독한 것을 내려다보며 살짝 미간을 좁혔다.

“이곳까지 온 자네들에게 밝히자면, 세 번째 비석을 찾아오는 것이 다른 비석보다 찾기가 힘들었던 이유는 이 밤의 비석 때문이다.”

낮의 가벼운 말과는 퍽 다르게 시작된 밤의 비석의 해독문을 눈으로 읽으며 아델이 입술을 달싹였다.

“내 친우였던 알바 베스티아는 신께 선택받은 자라고 스스로를 칭하며, 기묘한 병에 걸린 사람들을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매도하고 있었다. 신께 모든 걸 맡기고 충성을 맹세하면 결코 그런 병에 걸릴 일이 없다고 말하는 알바 베스티아는 이미 내가 알던 친우와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델의 말에 헥시온이 진지한 눈을 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역시 제국의 건국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아델이 아주 천천히 입술을 달싹이며 호흡을 골랐다.

“그 기묘한 병은 온몸이 점점 돌처럼 굳어 가는 난생처음 보는 종류의 병이었으며 결국 그들은 오래지 않아 죽음을 맞이했다. 죽은 병자들의 시체는 온몸이 돌처럼 변했으며, 불에 탄 재와 같이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역시 칼럿병에 관한 이야기군요.”

“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적어도 훅센라이트가 남긴 비석에 칼럿병에 대한 무언가가 적혀 있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그들을 모아 두고 살리기 위해 애를 썼지만, 마땅히 좋은 방법을 찾을 순 없었다. 그러니 그때쯤 알바 베스티아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기로 한 기묘한 병에 걸린 병자를 고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마도 훅센라이트가 담담히 적어 내려갔을 글을 읽어 가는 아델을 헥시온이 묵묵히 바라봤다. 아델이 읽는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메말라 있어서 헥시온은 비석의 내용보다 그녀에게 시선이 더 갔다.

“알바 베스티아는 신에게 충성한 이들을 모았고 한 왕국의 신관의 자리까지 올랐다. 아무것도 없던 평민 모험가인 알바 베스티아가 왕국의 대신관이라니. 나는 무척 놀랐다. 그러나 그가 무언가 이 사태의 해결 방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신관……?”

헥시온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러면 초대 황제가 원래는 왕족이 아니라는 말인 겁니까?”

“평민 모험가라는 말도 있고 신관이었다는 말도 있으니 아마 그런 것 같아요.”

헥시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나라의 황제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혈통이다. 황가의 혈통이면서 가장 강한 자가 다음 대 황위를 이어받는 것이다. 게다가 현 황족은 자신들이 타고난 왕의 핏줄이라고 주장해 왔다.

역사서에는 작은 왕국의 왕자였던 알바 베스티아가 집권을 하면서 주변 나라를 쓸어내고 나라에 제국의 이름을 붙였다고 쓰여 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방해 없이 황태자가 되고 황제가 되어 왔다. 가장 중요한 혈통을 역사서가 인정해 주고 있었으니까.

“그게 사실이면 역사서가 조작되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겠군요.”

헥시온의 중얼거림에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마저 글을 읽어 내려갔다.

“알바 베스티아를 찾기 위해 나는 영웅의 길을 마다하고 들어와 터를 잡은 풀헤임 숲을 한동안 떠나기로 했다.”

“지금의 황제도 칼럿병을 저 좋을 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비석을 해독하다 보면 칼럿병의 그 근원에 대해서 알 수 있겠군요.”

헥시온의 말에 노트를 읽어 내려가던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이내 고개를 돌려 비석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손에는 꼭 쥔 노트가 들려져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요정의 진액으로 적힌 글씨는 선명했다. 천천히 붓으로 써 내려갔을 그 글씨는 어느 글자는 힘주어 쓴 듯 굵었고 또 어느 부분은 망설이며 써 내려간 듯 얇고 힘이 없었다.

“찾아간 그는 함께 했던 젊은 시절보다는 주름이 생기고 나이가 들어 있었지만,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오랜 친우는 10년 만에 재회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무척이나 반갑게 맞아 줬다. 우리는 회포를 풀었고 나는 그에게 풀헤임 숲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내가 자른 고목이나 그것에서 튀어나간 알 수 없는 것과 그 순간 겹쳐 퍼지기 시작한 기묘한 병을.”

점점 흥미로워지는 내용은 그 어떤 역사서에서도 감히 찾아볼 수 없었다. 아델은 흥분으로 뛰는 제 심장을 꾹 누르며 헥시온의 눈치를 살폈다.

‘……기뻐하고 있다고 하면 헥시온은 실망하려나?’

오래전 짓밟혀 다시는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꿈을 아델은 헥시온의 덕분에 조금씩 이뤄 가고 있었다. 그것도 누구에게도 해독된 적 없는 고대의 비석을 해독하는 것은 무척이나 가슴 뛰는 일이었다. 헥시온의 눈치를 살피며 아델이 애써 표정을 굳혔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모든 이야기를 들은 알바 베스티아는 웃었다. 그리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훅센라이트. 세상을 발밑에 둬 보지 않겠나? 나와 함께 신이 되자.’ 그는 내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알바 베스티아의 눈에는 예전과 같은 다정함과 처음 보는 광기가 뒤섞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이어갔다. 몇 줄 남지 않은 해독본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아델이 입술을 살짝 혀로 핥으며 마저 노트를 읽었다.

“그렇게 말한 알바 베스티아는 이미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기뻤던 회포가 순식간에 눈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의 권유를 거절했다. 그러자 알바 베스티아는 안타깝다는 시선으로 나를 보고는 돌아가길 권유했다.”

아델의 말에 헥시온의 표정이 무척이나 싸늘했다. 점점 윤곽이 잡히기 시작하는 이야기는 분명히 황가와 연관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나는 자네만큼은 날 이해해 줄 줄 알았네. 오늘만큼은 마지막 정으로 놓아주겠네. 만나서 반가웠네.’ 나는 그를 말리고자 했지만, 이미 수많은 신도와 왕가의 지지를 뒤에 업은 그는 내가 상대하기엔 무척 높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아델이 한숨과도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나는 쫓기듯 그곳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난 자네와 함께하고 싶다네. 마음이 바뀐다면 언제든 돌아오게.’ 그것이 그와 내 마지막 대화였다.”

비석에 적힌 내용은 그것이 전부였다.

마지막은 언제나와 같은 끝맺음의 말뿐이다.

“……네 번째는 이곳을 찾기 전 자네들의 발이 마지막 닿았던 곳에서 열한 시 방향이네.”

아마도 원래는 저 말이 끝맺음의 말이 아니었을까 하고 아델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노트에는 해독한 비석의 내용이 한 줄 더 남아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모든 비석의 말을 다 완성한 후 마지막에 망설이듯 적어 내려가지 않았을까, 아델은 그저 짐작했다. 왜냐하면, 마지막 한 줄만큼은 다른 글씨에 비해 무척이나 힘겹게 꾹꾹 눌러 적은 듯, 진한 글씨가 적혀져 있었다.

“장담하건대, 나는 이런 식의 재회와 헤어짐은 생각지도 못했네. 서로 등을 맡기던 전우의 변천이란, 지독히도 아프구나.”

몸을 숙여 해독했던 비석의 마지막 부분은 살짝 번져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물방울이라도 떨어져 덜 마른 요정의 진액을 퍼뜨려 놓은 듯이.

아델이 입을 다물곤 노트를 접었다. 그것을 다시 파우치에 넣고 앞이 조금 닳아 버린 연필을 집어넣은 후 헥시온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걸 다 해독해서 증거로 사용한다면, 황제를 압박하고 황가를 바닥에 끌어 내릴 좋은 증거가 될 겁니다.”

헥시온이 퍽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을 한 귀로 들으며 아델은 몸을 쪼그리고 앉아 비석의 가장 아랫부분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번진 진액은 그대로 굳어져 영원히 남게 되었다.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헥시온.”

“네.”

“목숨을 맡길 정도의 친구가 오랜만에 만났는데 내가 알던 모습과 무척 달라져 있다면, 그건 슬픈 일일까요?”

한껏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숙인 아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헥시온이 그녀의 옆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가 그녀의 옆에 똑같이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그런 친구가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저도 잘 몰라서 물어봤어요.”

지금껏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기에 과연 그런 일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훅센라이트는 분명히 슬펐던 거다.

“아델에겐 뭔가 보입니까?”

헥시온이 아무것도 조각되지 않은 비석의 아랫부분을 보며 물었다. 그제야 헥시온에겐 요정의 진액으로 적은 글씨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한낮인 지금에는.

그의 물음을 들은 아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뇨. 그냥 한번 여쭤봤어요.”

아델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저건, 분명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을 눈물일 테니까.

“그렇습니까.”

헥시온이 반문 없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델의 앞에 섰다. 아델이 비석을 등진 채 앞을 가린 헥시온을 올려다봤다. 헥시온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런데 왜 울고 계십니까?”

“네? 울다니, 누가…….”

의아한 듯 반문하는 아델의 볼을 타고 투명한 물이 도르륵 굴러 떨어졌다. 아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러자 눈 밑에 맺혀 있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아.”

아델이 소맷자락으로 볼을 서툴게 문질렀다. 그녀의 옷자락이 살며시 젖어 들었다.

“나, 왜 울지……?”

아델이 중얼거리듯 입술을 달싹였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델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슬프다는 감각은 없다. 속이 찌르르한 느낌도 목이 메는 것 같은 답답함도 없었다. 새파란 맑은 하늘에 비가 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델은 그저 멍하니 눈을 한 차례 깜빡였다.

“모르겠어요. 내가 왜 우는지…….”

슬픈 것도 아닌데, 마치 슬픈 느낌이 들었다. 닦아도 닦아도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보던 헥시온이 아주 천천히 허리를 굽혀 그녀의 눈물을 살짝 핥았다.

파드득-.

볼에 닿는 따뜻하고 말랑한 느낌에 그녀가 눈을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눈물을 멈추게 하는 방법을 딱 하나 알고 있습니다.”

헥시온의 목소리가 무척 낮았다. 평소보다도 한층 더 거친 목소리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종이 한 장을 두고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멈춰 있다. 말소리가 섞이고 숨결이 섞이고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한번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귓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에 아델이 숨을 삼켰다. 숨결이 섞이는 것뿐인데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아델의 살짝 벌어진 입술을 헥시온이 시선으로 집요하게 훑었다. 허리를 휘감아 끌어안은 덕에 서로의 몸이 바싹 붙었다. 헥시온의 심장 소리가 옷자락을 타고 느껴지는 듯했다. 사실 이것이 자신의 심장 소리인지 혹은 헥시온의 심장 소리인지 아델은 구별이 되질 않았다.

멍하니 헥시온의 새까만 눈동자를 올려다보던 아델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대체 뭘 하는 거지?’

헥시온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맞춰 왔다. 눈물도 이미 놀라서 멎은 듯했다. 그것을 맞은편에 있는 헥시온이 모를 리는 없었다.

아델은 입술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몸이 이렇게 뜨거웠던가?

숨결이 섞여 들고 입 안에서 혀가 얽혔다. 입술 사이로 파고든 혀가 습한 곳을 속속들이 파헤치듯 움직였다. 헥시온의 무릎이 아델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동공이 확장됐다.

아델의 등에 비석이 닿았다. 힘없이 늘어진 왼팔과는 다르게 헥시온의 오른팔은 아델의 허리를 힘껏 붙잡고 있었다.

무너져도 얼마든지 지탱해 주겠다는 듯이.

헥시온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두어 차례 살짝살짝 깨물었다. 입천장을 훑고 그녀의 혀를 잡아먹기라도 하겠다는 듯 덥석 물어 빨아들였다.

무척이나 자극적이었다. 아델의 얼굴에 열이 오르고 벌겋게 변했다. 호흡이 달리는 듯 들숨 날숨의 속도가 빨라졌다. 다리가 풀릴 것 같은 기분에 아델이 기겁하며 그의 가슴을 내리쳤다.

헥시온이 단단히 허리를 잡고 있었지만, 그것과 생리적인 두려움은 확실히 달랐다. 아델의 거부 의사에 헥시온이 아쉽다는 듯, 천천히 몸을 물리며 그녀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멎었군요.”

헥시온의 가죽 장갑이 끼워진 엄지손가락이 아델의 눈 밑을 가볍게 훑고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마주친 그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다정한 눈웃음에 아델은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도 등줄기를 타고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은 그녀의 몸을 떨리게 했다.

생경한 감각이었다. 아델이 흔들리는 시선으로 고개를 들어 헥시온을 쳐다봤다.

“내가 무례한 짓을 한 겁니까?”

헥시온의 물음에 아델이 입을 다물었다.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한들 정중하게 묻기는 물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델은 자신이 고개를 끄덕인 사실도 기억하고 있었다.

서늘한 숲의 그늘에도 불구하고 후끈 달아오른 몸이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아델이 손부채질로 얼굴을 식히며 고개를 돌렸다.

‘멀쩡해 보이네.’

숨을 몰아쉬며 벌게진 아델과는 다르게 헥시온은 멀쩡하게만 보였다. 그 사실에 자못 기분이 좋지 않다. 조금 짜증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왜 내가 기분이 나쁘지?’

생각하던 아델이 미간을 좁혔다. 물론, 어두침침한 숲속에 아델이 발견하지만 못했을 뿐 헥시온의 귓불도 상당히 붉어져 있었지만.

“문이 열리려면 시간이 좀 남았습니다. 혹여 피곤하시다면 주무십시오. 여긴 무척 조용한 공간이니까요.”

“……아무것도 없는데요?”

비석이 놓인 넓은 풀밭은 있지만, 짐을 매어 둔 말은 세 번째 비석으로 오는 입구에 두고 왔으니 마땅히 바닥에 깔 만한 천 보자기는 물론 식량조차도 전혀 없었다.

“아…….”

그제야 헥시온이 탄식을 흘렸다. 아델과 함께 이곳으로 들어오는 것과 콰른 비프타에게 신경이 전부 쏠려서 미처 말을 함께 들이는 걸 생각지도 못했다.

헥시온이 이마를 짚었다.

“미안합니다. 그놈한테 신경이 쏠려서는…….”

“괜찮아요. 콰른 비프타는 원래 그런 놈이라서.”

애초에 제대로 된 이성을 가지고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솔직히 그가 이 영역에 들어오지 못해서 아델로선 나름 잘됐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아델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비석 앞에 하나 있는 넓적한 바위에 조심스레 올라가 앉았다. 그러곤 무릎을 모아 팔로 끌어안고 조심스럽게 눈을 감는다. 헥시온은 그 바위 아래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왜 바닥에 앉아요?”

“당신이 거기서 자기를 바라서요.”

“난 괜찮으니 올라와요.”

헥시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으로 능숙하게 코트를 벗더니 이내 그녀의 어깨 위로 조심스럽게 덮어 줬다. 일련의 상황에 아델이 채 눈을 동그랗게 뜨기도 전에 헥시온은 다시 바위에 등을 기대며 주저앉았다.

아델은 결국 어정쩡하게 혼자 앉아 끌어안은 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등과 어깨가 따뜻하니 꾸벅꾸벅 잠이 몰려오는 것은 사실이었다.

시야가 암전된 건 순식간이었다.

헥시온이 검을 옆에 눕혀 둔 채 비석에 시선을 고정했다. 뒤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색색거리는 고른 숨소리에 그의 몸이 움찔 떨렸다. 헥시온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아델?”

“으응…….”

잠을 자지 않겠다고 한 건 언제고 고개를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불편하게 잠이 든 아델이 보였다. 헥시온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등허리를 붙잡아 조심스럽게 눕혔다. 한 손으로 눕히는 것은 무척 위태롭게 보였으나, 그런 것과는 다르게 헥시온은 상당히 안정적으로 그녀를 바위에 눕혔다.

떨어진 코트를 그녀의 위로 덮어 여며 주고 굽혔던 몸을 펴려던 헥시온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서 멎었다. 아까 깨문 탓인지 살짝 발갛게 달아올라 부푼 입술에 고정되어 있던 헥시온의 시선이 이윽고 그녀의 얼굴선을 타고 내려와 목덜미로 향했다.

곧게 뻗은 목덜미는 당장에라도 입을 맞추고 싶을 정도로 깨끗하고 하얬다. 물끄러미 그녀의 목덜미를 보던 헥시온이 이윽고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닿았던 입술이 다시 화끈거리는 것 같다. 답답함을 느낀 그가 입술로 오른손 장갑을 물어 손을 빼냈다. 귓불이 붉어진 헥시온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벅벅 문질렀지만, 열기는 한층 더 강해질 뿐 사그라질 마음은 없어 보인다.

“후…….”

머릿속에서 자꾸 질끈 눈을 감은 아델의 긴 속눈썹과 발갛게 달아올라 부푼 그녀의 입술이 재생됐다가 멈추길 반복했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될수록 붉게 달아오른 것이 귓불만이 아니라 점점 아래로도 내려와 물들기 시작했다. 활동하기 편한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툭 튀어나온 쇄골을 마지막으로 헥시온이 고개를 홱 돌렸다.

열이 확 오른 헥시온이 아델을 내려다보던 바위에서 벗어나 조용히 비석의 옆으로 향했다. 그가 단단한 비석에 머리를 쿵 박았다. 찌르르한 통증이 이마를 타고 몰려왔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뭇잎에 맺혀 있던 아침이슬이 도르륵 굴러떨어지듯 떨어져 내리는 그녀의 눈물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그것을 맛보고 싶어졌다.

닿으니 그 붉은 입술을 탐하고 싶어졌다.

저도 모르게 유혹하듯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허락하지 않으면, 그것을 물러날 자신은 있었다. 거의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깔끔하게 사과하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델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 순간 이성을 잃었다. 그녀가 숨을 쉴 틈을 만들어 주지도 않을 정도로.

비석이 녹색의 옅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어둑해졌나 싶더니 어느새 밤이 됐다. 헥시온이 고개를 들었다. 비석의 글씨가 빛나기 시작했다.

그가 아델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몸을 돌려 아까 그녀가 쪼그리고 앉았던 곳에 다시 몸을 굽혀 앉았다. 그녀가 가만히 쳐다봤던 비석의 아랫부분을 헥시온이 유심히 살폈다.

“번졌군.”

그가 손을 뻗어 유독 글자가 굵고 번진 문장 한 줄을 시선으로 읽었다.

“‘서로 등을 맡기던 전우의 변천이란, 지독히도 아프구나…….’였던가.”

헥시온이 아델이 읽어 줬던 마지막 문장을 떠올리며 낮게 읊조렸다. 사전 없이는 고대어 해독을 할 수 없는 그였지만, 그녀가 읊었던 해독문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했다.

‘목숨을 맡길 정도의 친구가 오랜만에 만났는데 내가 알던 모습과 무척 달라져 있다면, 그건 슬픈 일일까요?’

그녀가 마지막으로 던졌던 질문도.

헥시온은 그 말에 대답을 해 주지 못했다. 그건 그녀가 그런 질문을 던졌던 진의를 알게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말해 주는 편이 옳았을까?’

그것으로 그녀의 마음이 한층 편해질 수 있었다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헥시온은 그녀에게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뒤에서 잠을 자는 아델을 힐끗 보곤 왼쪽 장갑을 벗어 버릇처럼 코트 안쪽의 주머니에 넣으려다가 이내 비석 밑에 던지듯 내려놨다.

까득.

헥시온의 굳은 손가락이 주먹을 쥐듯 천천히 굽혀졌다. 헥시온이 이를 악물며 왼손에 힘을 줬다. 저번에는 주먹이 채 다 쥐어지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이 굽혀진다.

“큿…….”

그의 꽉 악문 잇새 사이로도 비명과도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벌게진 얼굴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금만 더…….”

부디 검을 쥘 수 있게 될 때까지만이라도. 헥시온이 제 회색빛을 띤 손을 오른팔로 끌어당겨 이마에 가져다 대며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밤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다음 권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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