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 콰른 비프타 (6/25)

Chapter 3. 콰른 비프타

아델이 심호흡을 했다. 저택의 불은 밝다. 저녁 식사 시간보다는 늦었지만, 다행히 소동이 되진 않은 모양이다. 그 사실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서운하게 생각해야 할지. 차라리 식사 중에 온 편이 나은가? 다들 식사를 하고 있다면 망나니 놈을 보지 않고 방에 틀어박힐 수 있을 테니까.

‘설마 그 시체를 아직도 들고 있진 않을 테고.’

아, 몇 번을 생각해도 끔찍했다. 아델이 소름이 돋는 몸을 부르르 떨어 털어 냈다. 그녀가 과일이 가득 담긴 종이봉투를 끌어안은 채 저택에 발을 들였다.

“돌아오셨습니까?”

기사단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건넸다. 깍듯한 것을 보니 최근에 들어온 신입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 난 방에 들어갈 테니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해.”

“전달해 두겠습니다.”

아델이 기사를 한번 쳐다봤다. 군기가 바짝 들어가 있는 모습이 퍽 놀라웠다. 밖에 나와 있는 가족은 없었다. 이건 단언컨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거였다. 콰른 비프타는 상대하지 않는 편이 승리하는 것이라고 그녀는 단언할 수 있었다.

‘전부 식당에 모여 있는 모양이네.’

식당에서 드문드문 목소리가 들렸다. 시종과 시녀들도 전부 그쪽에 몰려 있는 모양이었다. 아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진짜 이게 무슨 꼴인지.’

전생에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런 놈과 잘못 엮인 것일까. 무슨 쥐새끼도 아니고 살금살금 방으로 올라가는 꼴이 우스웠다. 정말 이런 집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다른 것도 다 싫은데 콰른 비프타가 가장 싫었다.

달칵-.

아델이 뒤를 돌아볼 것도 없이 황급히 방에 들어와 문을 잠갔다.

그런데 그녀의 방 한가운데에 무언가 놓여 있었다. 천으로 된 커다란 짐 보따리 같기도 했다. 보통 과일을 수확하면 저런 천 보따리에 담아 두었다.

‘뭐지?’

방을 잘못 들어왔나 싶어서 슬쩍 문을 열고 다시 나갔다. 그리고 다시 들어와 안을 살폈다.

이건 자신의 방이 맞았다. 아무리 제 집이 아니고 3년 전으로 돌아왔어도 10년이나 지낸 방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보따리를 피해 의자에 로브를 벗어 걸쳐 두었다. 그 옆에 안고 있던 사과도 올려 뒀다. 그리고 아델은 다시 벽에 멀찍이 물러나 커다란 포대를 노려봤다.

“아, 제발.”

꺼림칙했다.

끔찍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가 뒷걸음질을 쳤다.

뭣보다 방 안에 가득한 이 비릿한 냄새. 이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과거의 한 장면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아델이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뭔지 알 것 같아서 더 끔찍했다. 방에서 쉬려고 했던 계획이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아델은 제 기분이 최악으로 치달아가는 것을 느꼈다.

“망할 망나니 새끼!”

그녀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사실 그뿐만이 아니라 알고 있는 온갖 욕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도 같았다. 적어도 그녀가 뒷골목에서 이곳으로 들어온 뒤론 웬만해선 입에 올리려고 하지 않았던 욕설들이 목까지 차올랐다.

천 보따리는 보란 듯이 제대로 묶어 놓지도 않아서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도 내용물이 훤히 보일 듯 위태로웠다. 주변에는 짐승의 털로 보이는 것들이 뭉텅이로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안에는…….

다행히 아델은 미래를 알고 있었고 보는 것보단 고개를 돌리는 쪽을 선택했다. 그놈은 이걸 보고 자신이 비명을 지르기라도 바라고 있겠지. 3년 전이였다면…….

‘아니.’

돌아오기 전이였다면 아델은 아무것도 모르고 내용물을 확인했다가 분명히 비명을 내질렀을 거다. 실제로 과거엔 그랬다. 그리고 비명을 들은 콰른 비프타는 히죽거리며 저를 구경하러 뛰어 올라왔었다.

그러나 아델은 더 이상 그런 놀음에 놀아날 마음이 없었다. 더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지도, 칭찬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참을 필요도 없었다. 아델은 지금껏 망나니의 장난을 참아만 왔지만,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정말 주먹으로 얼굴 몇 대는 때려 주고 싶어.’

그걸로 당한 게 다 풀리진 않겠지만, 분명 속은 한결 편해질 거다. 지금껏 제정신으로 버틴 스스로가 대견할 따름이었다.

아델이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돌렸다. 몸을 멀찍이 빼 둔 아델이 손만 쭉 뻗어 천의 입구를 두 손으로 꽉 붙잡았다.

“으으…….”

아델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양손에 느껴지는 이 묵직함이 그녀를 소름 돋게 했다. 지금의 아델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를 악물고 이 천 보따리를 질질 끌어내는 것 정도가 최대였다. 아델은 문을 활짝 연 채 자루를 끌어내기 위해 애썼다.

‘평소라면 그냥 벨라에게 치우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일분일초도 아깝다.

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단 하나.

문을 걸어 잠그고 앞으로 최소 보름간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 거다. 헥시온이 곧 연락을 주겠다고 했으니 그때 부탁을 해서 잠시 나갔다 오는 정도가 그녀의 계획이었다.

콰른 비프타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놈이었고 아델은 그를 제정신으로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어쨌든 버티기에 들어가야 했다.

‘기억에 따르면 보름 정도 뒤에 떠나니까.’

그 말은 즉, 보름을 틀어박히면 놈의 얼굴을 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델이 간신히 문밖으로 자루를 끌어냈다. 복도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가 곧장 문을 닫고 잠금쇠를 걸었다. 단단히 문을 잠근 그녀가 보따리가 놓인 곳을 피해 침대에 발을 올렸다.

‘창문도 잠그자.’

콰른 비프타는 마법을 쓸 줄 알았다.

소설이나 그림책에나 나오는 그런 거대하고 웅장한 마법은 아니었다. 그래도 물체를 띄우거나 공중에 몸을 띄우는 정도는 했다. 그러니 창문도 위험했다.

‘힘없는 게 죄지.’

기왕 축복을 줄 거라면 누군가를 치유하는 힘이나 무언가 보이지 않는 걸 보는 힘이 아니라, 콰른 비프타를 때려눕힐 힘을 주는 편이 더 좋았을 텐데.

“아, 살겠다.”

창문까지 닫고 커튼까지 치니 방 안이 어두컴컴해졌다. 촛불을 켜자 주위가 다시 밝아졌다. 아델이 촛불에 의지해 책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가죽으로 묶인 책을 꺼냈다. 노트와는 다르게 그것은 묵직하고 컸으며, 끈으로 꽉 묶여 있었다. 종이를 빼고 낄 수 있도록 매듭도 지어져 있었다.

‘정리나 하자.’

아델이 왼쪽엔 노트를 펼치고 오른쪽엔 가죽 표지로 된 책을 꺼냈다. 이건 아델이 비석을 해독한 것을 책으로 적기 위해서 서재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내용이 없는 빈 가죽 책이었다.

지면은 텅 비어 있었고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은 듯 퀴퀴한 먼지가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그것을 그녀가 털어서 가지고 온 것이었다.

평생 잊힐 거라면 그녀가 사용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표지로 쓴 가죽은 무두질을 잘한 듯 표면이 무척 부드러웠다. 어느 동물의 가죽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쇠를 달궈 제목을 써도 멋들어질 것 같았다. 갈색의 가죽에 금박으로 수를 놓은 책은 세련되어 보이기까지 했다.

아델이 잉크와 깃펜을 꺼냈다. 그녀가 깃펜에 잉크를 찍어 근처에 있던 빈 종이에 몇 번인가 글씨를 적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던 깃펜도 금세 익숙해졌다.

“꺄아아아악!”

펜을 들고 첫 글자를 적으려던 아델의 손이 삐끗했다. 아델이 깃펜을 잉크병에 꽂았다.

“꺄악! 이게 뭐, 시, 시종장님!”

밖에서 들려오는 쉼 없는 비명에 그녀가 미간을 좁혔다. 뭘 보고 누가 비명을 질렀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벨라가 발견했구나.’

기왕이면 이런 일에 어느 정도 면역이 있는 사람이 발견했으면 했는데.

타다다닷-.

멀어져 가는 발걸음 소리를 들은 아델이 턱을 괸 채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는 타인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인 것인 양 신경 쓰였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을 한 발자국 뒤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누군가는 그런 그녀를 매정하고 정 없다고 매도할지도 모르겠지만 살아온 어느 순간보다 아델은 마음이 편했다.

‘조용해졌네.’

그녀가 다시 깃펜을 잡았다.

아델이 노트의 맨 첫 장을 보며 그것을 텅 빈 가죽 책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깃펜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한 번도 끊지 않고 쭉 적어 나갔다. 글자가 옅어지기 시작하자 아델이 다시 잉크병에 깃펜을 넣었다가 뺐다.

흐릿해지던 글씨가 다시 한층 진해졌다. 뾰족한 펜촉에 힘을 줘 글을 쓸 때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좋았다. 마침내 한 페이지를 다 적은 아델이 조심스럽게 다음 장으로 넘겼다.

“썅!”

밖에서 비명과도 같은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날카로운 목소리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새로운 페이지 위로 펜을 움직이려던 아델의 움직임이 뻣뻣하게 굳으며 멈췄다.

펜 끝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델이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제 몸을 깨닫고 빠르게 깃펜을 내려놓은 후 잉크병을 닫았다. 제때 닫아 두지 않으면 잉크가 말라 버리니 이건 까먹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최대한 정상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델의 긴 속눈썹이 버릇처럼 천천히 아래를 향했다.

“그걸 왜 네가 봐? 미쳤냐!”

“…….”

저 성질머리는 여전했다.

“죄송합니다. 그저 저는 밖에 나와 있어서 짐이라면 치워 두려고 했…….”

“밖에 나와 있었다고?”

“네, 네.”

“거짓말 마! 난 안에다 넣어 뒀다고!”

제가 한 짓을 말하는 모양새가 퍽 당당했다. 보지 않아도 눈앞에 선연하게 펼쳐지는 놈의 모습에 아델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둘째 망나니는 귀족 집안의 자제답지 않게 퍽 저렴한 말투를 얼굴을 보지 않을 수 있는 게 이다지도 다행일 수가 있을까? 물론, 저놈이라면 이 두꺼운 문도 부수고 들어올 무력이 있겠지만.

‘그것만큼은 하지 않길 바라야지.’

그렇게까지 들어온다면 아델이 막을 힘은 없으니 말이다.

“야! 넌 오라버니가 왔는데도 얼굴을 안 비추냐!”

쾅!

문이 크게 흔들렸다. 겨우 문을 발로 찬 것뿐인데 방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힘이 장사였다. 얼굴을 마주 보지도 않았는데 심장은 터져 버릴 것처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아델은 초조하게 방을 서성이다가 자리에 선 채 귀를 틀어막았다.

“당장 나와!”

“…….”

나오라고 나갈 거였으면 미쳤다고 여기 틀어박히겠냐?

아델이 그렇게 생각하며, 쓰다 만 책을 덮어 서랍 안쪽에 밀어 넣었다. 책으로 옮겨 적고 있던 노트는 적당한 천에 돌돌 말아 감싼 후 품 안에 챙겼다.

이 상황에 오늘 해독한 비석을 정리해 책을 쓰는 건 무리였다. 그럼 잠을 자는 편이 낫겠지.

“야……. 너 진짜 안 나오면 이 문 부순다.”

문에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댔는지 으르렁대는 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생생했다. 을러대는 목소리가 협박조에 가까웠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저놈은 아주, 태어날 때부터 저랬으니까. 아니, 물론 그녀가 콰른 비프타의 탄생을 지켜본 건 아니었지만.

“꺅! 둘, 둘째 도련님! 부수는 건 안 됩니다!”

진짜 부수려는 모양이네. 아델이 헛웃음을 삼켰다. 저 돌머리부터 어떻게 부술 수 없을까? 마음대로 안 되면 때려 부수는 게 일이다. 아델이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정말 어쩔까?’

그냥 미친 것처럼 멱살 잡고 싸워 볼까? 물론, 그녀가 이길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도 괴롭히던 개가 이도 드러낼 줄 알고 물 줄도 안다는 걸 알게 되면 좀 덜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조금 비참해졌다.

“하나.”

정말 부술 모양이었다.

아델이 날아오는 파편을 적당히 피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눈을 굴렸다. 마음 같아선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둘.”

“아가씨! 제발 나와 주세요!”

벨라의 급박한 목소리에도 아델은 반응하지 않았다. 여기서 무너진다면, 앞으로도 계속 저놈에게 휘둘리게 될 것이다.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며 느릿하게 눈을 굴렸다. 펠리스랑 비프타 공작은 대체 뭘 하는 건지 모르겠네.

“미칠 거면 좀 곱게 미쳐 주면 좋겠는데.”

아델이 침대에 앉아 생각하다가 결국 이불을 덮었다.

“세…….”

“대체 이 밤에 무슨 소란이냐!”

아, 왔다.

비프타 공작인 모양이었다. 그가 왔으니 망나니 새끼라도 제 방으로 들어가라는 말 정도는 따를 수 있겠지.

“애가 안 나오잖아요!”

“너는 대체 나이가 몇인데 자중할 줄을 몰라!”

“아, 잔소리. 그냥 오빠가 여동생 좀 보겠다는데 뭐가 문제가 돼요?”

누가 오빠고 누가 여동생이야?

콰른 비프타는 그녀가 사생아라는 사실도 모른다. 저렇게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델로선 이해되지 않았다.

애초에 남매 같았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당연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해 준 거라곤 대역의 대가로 받은 물질적인 것뿐이고.

‘그럴 만한 감정의 교류가 있었냐고 하면…….’

전혀 없었다. 굳이 생각할 것도 없이 답은 나왔다.

“생각해 봐요, 아버지. 쟤가 얼굴만 보여 주면 그냥 끝날 일인데…….”

“하아.”

비프타 공작이 긴 한숨을 뱉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 비프타 공작은 자식 농사 망한 듯했다. 첫째를 제외하면 둘째가 망나니고 딸은 유전병이었으니까.

‘이번에 태어날 셀리나는…….’

글쎄. 어떤 존재였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아델은 한 번도 그 여동생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자라는 것도 당연하지만 못 봤다.

“카레나.”

밖에서 비프타 공작이 그녀를 불렀다. 아델이 눈을 감고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백날 천 날 거기서 부르든지 말든지 아델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자는 모양이다.”

“아니 그 예민한 애가 이 소리에 안 깰 리가 없…….”

“콰른 비프타!”

공작의 일갈에 콰른 비프타가 조용해졌다. 역시 저 망나니를 막을 수 있는 건 공작과 펠리스뿐이었다.

“내일 식사 시간에 보거라.”

“알겠어요.”

콰른 비프타가 포기했다.

“……라고 할 줄 알았죠?”

콰앙-!

폭발음과 함께 먼지와 나무 파편이 이불을 덮고 있던 아델의 위를 덮쳤다.

“아…….”

아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미친놈.”

졸지에 문의 파편과 먼지를 뒤집어쓴 아델이 이불 속에서 중얼거렸다. 미친놈은 회귀를 해서 돌아와도, 앞으로 3년이 지나도 미친놈이었다. 만고불변의 진리를 새삼 깨달은 기분에 아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채 가시지 않은 폭발의 여운 사이로 채도 낮은 주황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콰른 비프타!”

비프타 공작이 언성을 높였다. 당장이라도 망할 둘째 아들놈의 뒷덜미를 붙잡고 싶어 하는 것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지금만큼은 그의 심정에 조금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봐, 안 자잖아요. 넌 왜 자는 척을 해서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들어? 나 물 먹여?”

이죽거리며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오는 콰른 비프타의 모습에 아델이 숨을 삼켰다.

쭉 뻗은 눈매에 짙은 주황색 머리카락, 비프타 공작가의 상징적인 짙은 금안과 조금 가무잡잡한 피부. 모든 것들이 아델에겐 두려움이었다.

“……잘 준비 중이었는데.”

“허, 지금 반말했냐?”

“너는 나한테 존대하니?”

“핫, 그래. 그것도 그러네.”

콰른 비프타가 퍽 재미있다는 듯 키들거렸다.

“많이 컸네. 옛날 같으면 내가 준 선물 헤벌레한 얼굴로 열어 보고 꺅꺅 소리를 질렀을 텐데.”

콰른 비프타가 이를 드러낸 채 퍽 즐겁다는 듯 말했다. 이죽거리는 입가가 유쾌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가 유쾌한 만큼 아델의 기분은 점점 불쾌해졌지만.

“네 선물인데, 안은 열어 봤어?”

빙글거리는 웃음을 띤 채 콰른 비프타가 물었다.

“아니. 달갑지 않은 선물을 뭐 하러 굳이.”

아델이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굳은 표정으로 내뱉는 아델의 담담한 대답에 콰른 비프타의 눈썹이 크게 한 번 들썩였다. 콰른 비프타가 손을 뻗어 아델의 머리를 제멋대로 흩뜨렸다.

“잘 지냈냐?”

“더럽고 불쾌하니까 손 떼.”

“……뭐?”

콰른 비프타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아델이 옷자락을 꽉 부여잡으며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었다.

“불쾌하니 손 떼라고 했어. 저런 선물 같지도 않은 선물도 유쾌하지 않고.”

“……우와, 너 진짜 많이 컸다. 대공 작위를 가진 괴물 새끼가 청혼했다더니 눈에 뵈는 게 없는 것 같긴 하네.”

콰른 비프타가 웃음을 터뜨렸다. 입으로는 호탕하게 터뜨린 웃음이었지만, 눈은 메말라 웃고 있지 않았다. 지독한 가뭄에 갈라진 땅처럼 메마른 웃음엔 깊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이제 오라버니라고도 안 부르네?”

“역겹다고 부르지 말라고 한 게 누구였는데?”

아델이 슬며시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더는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과거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적어도 아델은 지금 그의 앞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피곤하니까 나가.”

“싫은데?”

“그럼 내가 나갈 테니 네가 여기서 자든가.”

어차피 콰른 비프타가 이 방에서 나가더라도 이 방에서 잠을 자는 건 무리일 듯했다. 엉망진창으로 바닥을 굴러다니는 문의 잔해를 치우고 새 문을 달기 위해서는 시간이 제법 필요할 테니까.

“벨라, 내가 임시로 지낼 방을 마련하도록 해.”

벨라가 눈치를 봤다.

“벨라, 마지막이야.”

“네, 알겠습니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벨라가 결국 냉큼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사실 콰른 비프타를 상대하고 싶지 않은 것은 이 저택 누구든 마찬가지일 거다.

콰른 비프타가 팔짱을 낀 채 아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너 진짜 돌았냐? 아니면 어디 머리라도 다쳤냐?”

“그러길 바랐다면 아쉽겠지만, 난 제정신이야.”

“아니면 미쳤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데.”

콰른 비프타의 주변에 있는 공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아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뒤쪽에 비프타 공작이 있지만, 어쩐지 말릴 기미는 없었다.

“하긴, 내가 요즘 집을 많이 비워서 조용하긴 했지.”

콰른 비프타가 손을 휘저었다.

쨍그랑-!

동시에 잠가 놨던 창문의 유리창이 깨지며 잠금쇠가 망가지고 쾅, 소리를 내며 거칠게 열렸다. 그 사이로 바람이 훅 불어닥쳤다.

아델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그녀가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홱 젖혀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눈에 무척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공포 따위는 한순간에 사라질 정도로 경이롭고 아름다운, 밤의 풍경이었다. 아델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타오르는 태양의 불길을 옮긴다면 저런 색을 가지고 있을까? 아델이 생각했다. 눈앞에서 콰른 비프타의 심장 끝에서부터 태양의 불길을 닮은 색의 실이 길게 뻗어 나와 그의 오른팔을 휘감고 있었다.

그것들이 모이고 모여, 그의 주변을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마치, 그의 격노한 감정에 반응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의 주변을 감싼 격렬한 소용돌이는 그의 손가락 끝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만 잘라 내면, 저 소용돌이는 자취를 감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걱정 마, 잘못했다고 빌면 용서해 줄게.”

잔인하게 웃은 콰른 비프타가 말했다.

“플라이.”

동시에 그의 주변을 둘러싼 붉은 주황빛의 실이 아델의 허리를 감쌌다.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아델이 아주 천천히 제 몸을 감싼 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를 수 있을까?’

아델이 생각하며 자신의 몸을 두른 주황빛의 실에 손을 댔다.

툭-.

허공에서 넘실거리던 실이 가위로 잘린 듯 끊어지더니 이내 힘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사르륵-.

바닥으로 떨어진 실이 가루가 되어 부서지더니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동시에 주변에 불어닥치던 바람도 자취를 감춘 후였다.

“뭐야……?”

멍하니 별 가루가 부서지듯 사라진 이름 모를 잔해를 바라보던 아델의 귀로 한껏 낮아진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녀가 조금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너 뭐 했어?”

서늘한 목소리에 아델이 아래를 내려다봤다가 다시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콰른 비프타를 쳐다봤다.

‘밤눈이 무척 밝아질 거야. 그리고 마법사를 상대할 수 있게 되겠지. 내가 네게 축복을 준 거야! 기쁘지 않아?’

아델의 머릿속에 문득 숲에서 만난 요정의 말이 떠올랐다.

‘마법사를 상대한다니…….’

그게 이런 것을 의미하는 거였나?

아델이 긴 숨을 뱉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왔다. 망나니 콰른 비프타의 얼굴이 정말 화가 난 듯했다.

“방금 마력이 끊겼어! 대체 무슨 짓을 했냐고 묻잖아!”

대답 없는 아델이 답답한 듯 콰른 비프타가 목소리를 높였다. 동시에 그의 가슴에서 또 다른 실이 뿜어져 나와 그의 몸 전체를 뒤덮었다.

거센 바람이 콰른 비프타의 주변에서 맴돌았다. 그녀가 입을 다문 채 주변을 살폈다. 문밖에 있는 비프타 공작이 얼굴을 찌푸린 채 아델을 쳐다보고 있었다.

‘들키면 안 돼.’

어쩐지 이것은 누군가에게 들켜선 안 될 것 같았다. 특히 처음부터 자신을 속이고 연기를 해 왔던 비프타 공작에게는 더욱더. 비프타 공작에게 들키면 앞으로도 계속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지금도 가진 것 없는 몸뚱이까지 이용해 정략결혼의 패로 쓰이고, 결국은 황제의 손이나 혹은 공작가에 꼬리가 잘리듯 잘릴 텐데. 여기서 더 무언가 이용 가치가 있다는 걸 알게 해선 안 됐다.

‘이용 가치가 없어야 해.’

생각한 아델이 숨을 멈췄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녀가 고개를 젓자 콰른 비프타가 험악하게 인상을 쓴 채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그의 손끝을 감싸고 있던 주황빛의 실들이 순식간에 아델을 휘감았다. 아델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

아델이 최대한 반응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반사적으로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진정하려 그녀가 주먹을 쥐었다.

‘야, 살려 달라고 해 봐!’

‘오라버니, 제발…… 살려 주세요……. 제가 잘못, 흑…… 잘못했…….’

시키는 대로 말하며 울먹이던 어린 자신의 목소리가 아델의 귓가에 맴돌았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그저 어린아이의 철없는 짓궂은 장난이었다고 치부하고 잊기엔 키득거리던 목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지금도 콰른 비프타만 보면 몸이 떨리고 호흡이 가빠지고 숨이 막히는데, 깔끔하게 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달라지려고 노력해도 뼛속 깊이 박힌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재능을 타고나서 마법적인 실력이 뛰어났던 콰른 비프타는 그 힘을 이용해 이런저런 장난을 치곤 했다.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엔 어렸던 아델에게 그것은 무척 잔인했다.

허공에 띄워 2층 창문 밖에 던져두곤 잘못했다고 빌거나 울 때까지 내려 주지 않았고 가끔은 마법을 이용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게 했던 적도 있었다. 특히, 어린 나이에 허공에 띄워서 창문 밖으로 내보낸 일은 몸이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

생각하는 사이 아델의 몸이 예전처럼 하늘에 떠올랐다. 콰른 비프타의 가슴에서 뻗어 나온 실이 아델의 온몸을 감싸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다. 예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무서웠는데, 지금은 이 실이 몸을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공포감이 짙지는 않았다.

“흠. 지금은 괜찮은 것 같은데. 착각인가?”

콰른 비프타가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역겹기 그지없는 행동거지에 아델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쭈, 이제 비명도 안 지르네?”

“…….”

아델은 눈앞에 보이는 실을 다시 한번 잘라 보고 싶었다. 저것이 흔히 말하는 마력의 흐름이라면, 그것이 보여서 잘라 낼 수 있는 거라면…….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수도 있어.’

마법사를 상대할 수 있다는 의미가 이런 것일 줄은 몰랐다. 인간의 세계가 아닌 요정의 세계가 보인다는 것이 마력의 근원이나 흐름이 보인다는 것일 줄은 몰랐다.

“당장 내려놔.”

“싫은데.”

콰른 비프타가 예전처럼 그녀를 창문 밖으로 확 밀어냈다. 또다시 몸이 허공에 매달렸다.

“잘못했지? 빌어 봐. 그럼 다시 원래대로 돌려줄 테니까.”

아델이 주먹을 꽉 쥐었다.

콰른 비프타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는 그가 가져다준 자루 속의 토막 난 시체를 보며 울먹이며 벌벌 떨었는데, 그걸 보고 콰른 비프타는 허리까지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었다.

‘다 죽은 고깃덩어리가 뭐가 무섭냐고 했었나?’

전장에서 언제나 시체를 보고 살아온 사람과 아델은 달랐다.

슬럼가에서 자란 그녀는 더럽거나, 비참하거나, 혹은 비열한 것에는 무던히도 익숙한 사람이었으나 타인을 처참하게 죽인 징그러운 시체를 보는 것엔 익숙하지 않았다.

위태롭게 이어진 실이 불안했다. 아델이 눈동자를 굴려 아래를 슬쩍 내려다봤다. 아래에 보이는 것은 정원과 그사이의 작은 연못이었다. 아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싫어, 차라리 죽고 말지.”

눈을 부릅뜬 아델이 제 몸을 띄우고 있는 실 하나에 손을 올렸다.

툭, 실이 끊겼다.

아델의 눈에 실이 별 가루처럼 부서져 허공에서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눈에 담은 아델이 한 차례 눈을 깜빡이는 순간, 그녀의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콰른 비프타가 눈을 크게 뜨며 황급히 창틀 가까이 다가갔다.

“야, 이 미친……!”

아델이 멀어져 가는 콰른 비프타를 보며 숨을 깊게 들이쉬곤 호흡을 참았다.

풍덩-!

물보라가 일며 허공에 물이 높이 솟아올랐다.

퉁-.

묵직하고 둔탁한 통증과 함께 아델은 제 몸이 연못 끝에 떨어져 연못 바닥에 닿은 것을 느꼈다. 둔탁한 통증에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아델은 호흡을 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며 사지를 버둥거렸다.

한참 만에 간신히 바닥을 짚은 손으로 아델이 몸을 일으키려고 애썼다. 간신히 발을 땅에 대고 일어나려는데 무언가 그녀의 뒷덜미를 잡아 물 밖으로 끌어 올렸다.

촤아악-!

그녀의 몸과 함께 끌어 올려진 물이 바닥으로 쏟아지는 것과 동시에 공기가 그녀의 폐로 훅 파고들었다.

“커흑, 콜록콜록-!”

아델이 거친 숨을 토하며 부족한 호흡을 채웠다. 거칠어진 호흡 사이로 그녀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너 미쳤냐!”

“저리 가.”

짝-!

아델이 뻗어 오는 콰른 비프타의 손을 거세게 내쳤다. 콰른 비프타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가 벌게진 눈으로 거친 호흡을 하면서도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델을 가만히 바라봤다.

‘대체 이건 누구야?’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린 콰른 비프타가 생소한 느낌의 여자를 쳐다봤다. 그가 아는 아델은 언제나 웃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을 당해도 결국은 언제나 같은 미소를 띠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짜 대역.

물론 콰른 비프타는 아델의 그 미소가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그림 같은 미소. 한 점 흐트러짐 없는 그 미소는 늘 콰른 비프타의 심사를 꼬이게 했다.

지금도 보라. 예전 같으면 주저앉은 채 울음을 터뜨리며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했을 한 살 어린 여동생의 대역은 꾸역꾸역 나무를 버팀목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세상에서 너 같은 게 제일 끔찍해.”

콰른 비프타가 분에 찬, 그러나 어딘지 억눌려 있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아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재수 없는 놈.”

아델이 시린 목소리로 말했다. 밤공기가 찬지 입술은 퍼렇게 물들고 살결엔 소름이 돋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콰른 비프타는 무심한 표정으로 아델의 몸을 훑었다. 처음 들어 보는 반말과 처음 들어 보는 진심. 콰른 비프타는 제 심장에 박혀 오는 날카로운 말을 무심한 표정으로 들었다.

그의 입술이 확 비틀렸다. 새삼 그 말에 상처를 받기엔 그는 그것보다 더한 이명을 등 뒤에 짊어지고 살아왔다.

“하하.”

콰른 비프타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유쾌했다. 무엇이 유쾌한지는 딱 잘라 말할 수 없었지만, 콰른 비프타는 제 감정이 유쾌함에서 비롯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저런 표정도 할 줄 알았네.’

콰른 비프타의 금안이 이채를 띠었다.

그것은 지금껏 콰른 비프타가 봐 온 아델의 모습 중에서 가장 정직하고 가장 솔직하며 또한 가장 적나라할 정도로 생생한 감정이었다.

“소름 끼치니까 날 그냥 내버려 둬.”

서늘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콰른 비프타는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알 수 없는 희열감에 웃었다.

“싫은데? 좀 더 울부짖어. 좀 더 살려 달라고 해야지.”

콰른 비프타가 아델의 앞에서 키들거리며 가볍게 웃었다. 살짝 기울인 고개에서부터 느껴지는 가벼운 행동거지에 아델이 입을 다물었다. 아연한 기분에 그녀가 고개를 툭 떨궜다. 누군가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 한 줄을 미련 없이 단검으로 잘라 내 버린 듯했다.

‘아. 정말, 싫다.’

아델이 헛웃음을 흘렸다. 최악의 인간이라고 생각했고 몇 번이나 각오도 했지만,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저런 놈이랑 대화하려던 내가 미친 거지.”

그녀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델의 중얼거림을 들은 듯 콰른 비프타의 눈썹이 쓰윽 위로 올라갔다. 멀리서 벨라가 커다란 담요를 품에 안은 채 달려왔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오지 마! 전부 소름 돋아서 끔찍하니까 나한테 다가오지 마.”

아델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그녀의 몸이 잘게 떨렸다. 이것이 콰른 비프타가 한 행동에 대한 분노 때문인지 혹은 콰른 비프타를 향한 두려움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피부로 스며드는 한기 때문인지 아델은 알 수 없었다.

“다친 곳은 없느냐?”

뒤늦게 천천히 내려온 공작이 물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가식적인 목소리.

“……하.”

아델이 입을 다문 채 입술 사이로 웃음을 흘렸다. 역겹기 그지없는 연극들이 겹치고 겹쳤다.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지?’

문득 의문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굳이 계속 이 연극을 할 필요가 있나? 아델은 헥시온과 약속을 나눴다. 그와 계약이든 가짜든 결혼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비프타 공작이 최종적으로 자신에게 원하는 것은 황실과 돈독한 관계로 보이기 위한 헥시온 대공과의 결혼이었다. 자신을 이용하려는 비프타 공작에게 이용당하는 척하면서 아델은 그의 뒤통수를 치려는 거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아델이 굳이 순종적일 필요는 전혀 없지 않은가?

비프타 공작의 시선이 아델의 위아래를 훑었다. 마치 가축의 등급을 매길 때와 같은 무기질적인 시선이었다. 한참 만에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다친 곳이 있으면 의원을 부르마.”

저 목소리에 담긴 것은 아델을 향한 걱정이 아니었다. 애초에 걱정이라는 감정이 담겼는지도 의문이었다. 만약 저 목소리에 감정이 담겼다면 그것은 이용 가치가 아직 남은 가짜 ‘카레나 비프타’를 향한 걱정이었다.

‘그만할까?’

단단했던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델이 고개를 들었다.

“저 헥시온 대공 각하와 결혼하려고 합니다.”

아델이 비프타 공작을 직시하며 말했다.

이건 아델이 스스로 하는 첫 번째 결정이었다. 이 저택으로 와서 무엇 하나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던 그녀가 스스로 발을 내디뎠다.

“뭐?”

비프타 공작이 예상치도 못한 말을 들은 듯 반문했다.

“그러니 더는 그런 같잖은 연극,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 메마른 목소리, 서늘한 시선까지. 무엇하나도 카레나 비프타와 닮은 구석이 없었다. 공작의 입꼬리가 슬며시 흔들렸다.

그래서였을까? 평소와 같으면 노성을 질렀을 것이 분명한 말투에도 비프타 공작은 아델의 날카로운 말도 못 들은 척 넘어갔다.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냐?”

“네.”

아델이 대답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대의를 위한 잠깐의 희생이다.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는 척하는 것뿐이었다.

‘내겐 당신이 필요합니다.’

헥시온의 말이 떠올랐다.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던, 간절함을 가지고 있던 남자.

‘당신을 죽이려고 한 황제도 당신을 그 좁은 새장에 가둬 둔 공작가도 제가 전부 베겠습니다.’

아델은 그와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헥시온과는 좋은 인연이 아니었으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악영향만 끼치는 좋지 못한 관계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얽혀서 생각지도 못하게 일이 꼬였다.

하지만 그 대가로 아델은 처음으로 그의 진심과 그의 고통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돌아오기 전의 아델은 결코 알 수 없었던, 헥시온의 진심이었다.

‘그저 내 곁에만 있어 주세요.’

절절하고 애절한 목소리.

태어나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그토록 애절하게 제게 매달린 적이 있었던가? 죽기 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그런 이는 없었다. 매달린 것은 언제나 아델이었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랐던 것도 아델이었다.

아델과 헥시온은 결정적인 부분에서 무언가 달랐다. 아델은 살고자 하는 헥시온이 무척 생소했다. 최악에 부딪혀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아델은 죽고자 했다. 그러나 헥시온은 끔찍한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살고자 한다. 그것이 그녀에겐 무척 신선했다.

‘도와줄 수 있다면…….’

도와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 증오스러운 가문을, 평생 그녀를 우리에 가둬 두고 죽이려고 한 비프타 공작이 귀족 계보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오늘 안에도 식사 예절을 제대로 익히지 못하면, 그 방으로 끌고 가.’

떠오른 목소리에 아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찌나 손을 세게 쥐었는지 새하얗게 질린 손끝은 차갑기만 했다.

그때, 싸늘하게 내려진 명령과 자비라곤 눈곱만큼도 없던 손속들. 장담하건대 아델이 3년 만에 귀족 예법을 모두 뗄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그녀의 자의적인 노력의 힘만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생각 속에 빠져 있던 그녀가 가슴 한구석에서 회오리치는 감정의 폭풍을 가라앉히듯 눈꺼풀을 한 번 깜빡였다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비프타 공작이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만족스러운 기색이었다. 헥시온 대공이 저주받은 것을 알면서도 그는 망설이는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실제로 그는 제 몸에 저주를 품고 있었다.

‘헥시온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어.’

그가 그런 절박한 얼굴로 거짓을 말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새삼 확인하게 되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뭐? 결혼이라니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아버지!”

“너도 이제 나이도 있으니 사고 좀 그만 치거라, 콰른.”

손을 뻗은 비프타 공작이 어쩔 수 없는 어린아이를 보듯 콰른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헝클였다.

“너도 이만 들어가도록 하거라. 결혼에 관해서는 일단 조율을 해 보고 말해 주도록 하마.”

비프타 공작이 던지듯 말했다. 모든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저 오만방자한 모습이 아델은 끔찍할 정도로 싫었다.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뭐라고 했느냐?”

“결혼 날짜도 시간도 전부 제가 정합니다. 각하께서 끼어 드실 일은 없어요.”

흐릿하게나마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띠고 있던 비프타 공작의 표정이 굳었다. 몸을 돌렸던 그가 다시 아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 더는 없을 거예요.”

그녀가 굳히듯 다시금 말을 덧붙였다.

“네가 요즘 오만방자한 짓거리를 눈감아 주니 기고만장해졌구나. 네가 뭐라도 된 줄 아느냐?”

“아뇨. 하지만, 제가 없으면 곤란해지는 건 각하시잖아요. 아니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절 내치지 않는 이유를 여기서 크게 읊어 볼까요?”

아델이 물러서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실에 묶여 있던 꼭두각시가 난생처음 스스로 고개를 들고 의지를 가진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델의 반항 어린 목소리에 비프타 공작의 미간이 크게 떨렸다. 움찔, 절로 높이 치솟으려는 손을 달래며 비프타 공작이 매섭게 눈을 뜬 채 주먹을 꽉 쥐었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반항을 배운 거지?’

얼마 전부터 ‘저것’은 이상한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척 작은 반항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에 굶주린 아이는 생각보다 다루기가 쉬웠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때때로 칭찬을 해 주고 그렇게 원하는 것을 부탁하듯 명령을 내리면 ‘저것’은 당연하다는 듯 그것을 해냈다. 길들지 않았던 때, 처음의 교육이 조금 귀찮았을 뿐, 저것은 금세 제 딸의 대역을 해냈다.

그런데 그것이 사냥 대회를 가기 일주일 전부터 기묘하게 바뀌었다. 분명한…… 변화였다.

“그렇지. 한동안 고분고분해서 주제 파악을 못 시켰지.”

비프타 공작이 중얼거렸다. 최근에 말을 꽤 순순히 들어서 교육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풀어 뒀더니 필시 저리 망나니처럼 구는 것일 것이다. 위치를 다시 각인하지 않으면, ‘저것’은 길러 준 주인에게 이를 드러낼 것이다.

‘잊었다면 다시 위치를 알려 주면 될 일이다.’

비프타 공작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비프타 공작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아델이 움찔, 몸을 크게 떨었다. 그녀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벨라.”

비프타 공작이 아델의 옆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벨라를 불렀다. 그의 부름에 그녀가 재빨리 손을 앞으로 모은 채 고개를 숙였다. 아델은 여전히 비프타 공작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저걸 방으로 데려가도록.”

움찔-.

아델의 몸이 크게 떨렸다. 그녀가 무척이나 떨리는 시선으로 비프타 공작을 쳐다봤다. 당장에라도 몸을 돌려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적어도 그런 감정이 목까지 차오른 것은 사실이었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싫습니다.”

아델이 떨리는 몸으로 목을 뻣뻣하게 치켜들었다.

비프타 공작의 눈썹이 다시금 크게 들썩였다. 그녀의 행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델은 이곳에서 물러날 수 없었다. 또 저 교육에 굴하면 모든 것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뿐이었다.

“아가씨. 제발요, 주인님께 대들지 마세요.”

벨라가 아델의 팔을 붙잡은 채 그녀를 잡아당겼다. 아델이 입을 다문 채 다리에 힘을 줬다.

비프타 공작이 버티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는 퍽 우스운 듯 코웃음을 치며 가슴팍에서 시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옆에 서 있던 집사가 허리를 굽히며 그의 시가에 성냥불을 붙였다.

“쟤한테 뭐 하려고, 아버지?”

“아직도 안 갔느냐? 너까지 말썽 피우지 말고 얼른 들어가거라. 나는 저것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후우. 짧게 내뱉은 한숨과 함께 새하얀 연기가 몽글몽글 피어나 하늘 높이 사라졌다.

“얼른.”

비프타 공작이 매섭게 말했다. 치켜뜬 눈을 가만히 보던 콰른 비프타가 결국 순순히 물러났다. 그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기세로 위협당한 콰른 비프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씨, 짜증 나.”

콰른 비프타가 제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너! 내일 봐.”

콰른 비프타가 머리가 엉망이 된 채 아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델은 멀어져 가는 콰른 비프타를 보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벨라와 세르반을 제외하곤 전부 물러나도록.”

콰른 비프타가 사라지자 비프타 공작이 명령했다. 그의 한마디에 작은 연못이 있는 정원에서 모두가 물러났다. 남은 것은 비프타 공작을 곁에서 보필하는 집사 세르반과 벨라, 그리고 아델뿐이었다.

가라앉은 적막과 동시에 비프타 공작이 반쯤 타 버린 시가를 입에서 빼 집사에게 건넸다. 집사, 세르반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비프타 공작이 성큼성큼 아델의 앞으로 걸어왔다.

“더러운 피가 섞여서 그런가 하는 짓도 멍청하군.”

비프타 공작의 얼굴에 있던 아버지의 얼굴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흐릿하게나마 하고 있던 연기를 그는 완전히 얼굴에서 지워 냈다. 그리고 남은 것은 퍽 잔인한 표정이었다.

‘콰른 비프타의 그 성격이 어디에서 왔나 했더니.’

아델이 두려움에 떨면서도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미미한 미소를 띤 얼굴 위로 사내는 옅게 웃고 있었다.

“카레나 비프타.”

“…….”

아델이 입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델이 퍽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자꾸 이러면 내가 널 예뻐해 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손을 뻗은 비프타 공작이 아델의 볼에 손을 얹은 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역겨운 시가 냄새가 났다. 그의 소름 끼치는 손길에도 아델은 뻣뻣하게 굳은 채 움직일 수 없었다.

“……나이가 드시더니 노망이 나기라도 하셨어요? 죽을 때가 된 게 아니라면 헛소리도 작작 하시죠.”

아델이 그의 위압감에 몸을 떨면서도 간신히 대답했다. 비프타 공작의 표정에서 금이 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를 비웃듯 이죽거린 아델의 고개가 순간 옆으로 거세게 돌아갔다.

짜악-!

아델이 뒤따라오는 소리를 들은 것은 자신의 고개가 돌아갔다는 것을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이런.”

비프타 공작이 조금 당황한 듯한 기색으로 아델의 턱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얼얼한 볼과 띵한 머릿속의 이유를 깨닫기도 전이었다. 억지로 들어 올려진 턱은 한껏 당겨 왔다.

“보이는 곳에 흠집이 나면 곤란하지.”

쯧, 낮게 혀를 찬 비프타 공작에 아델이 그제야 제 상태를 깨달았다. 그가 직접 아델에게 손을 댄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난 도대체 네가 날 자꾸 자극하는 이유를 모르겠구나.”

비프타 공작이 아델의 턱을 한껏 당긴 채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미친놈…….’

그녀가 몸을 비틀었지만, 평생 검을 수련해 온 남자의 악력에서 쉽게 벗어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처럼 순순하게 행동하렴. 그러면 아무런 불편함 없이, 시궁창으로 돌아가는 일 없이 살 수 있잖니.”

그 끝이 죽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델은 차오르려는 비웃음을 애써 억눌렀다.

“퍽이나.”

평소라면 밀려오는 통증과 눈앞에 선 상대에 대한 공포에 입을 열기도 어려웠겠지만, 아델은 오기로 굳은 입술을 움직였다.

기나긴 시간 동안 억압당해 온 사람이 그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상대와 접촉하지 않고도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아델은 그와 접촉하지 않는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종이에 물이 스며들 듯, 아델에게도 비프타 공작이라는 공포는 뿌리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

늘 그것에 휘말리며, 시달리며, 아델은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적어도 오늘만큼은 아델 역시 그 공포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상황은 어떤 것도 바뀌지 않을 테니까.

“떨고 있구나.”

떨림까지는 어떻게 할 순 없겠지만.

“그러게 말을 잘 들었으면 이런 일이 없잖니.”

“……난, 당신이 증오스러워.”

“결혼은 하겠다는 거로 알아들으마. 쓸모 있는 결정을 해 줘서 다행이구나.”

비프타 공작이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했다. 그러곤 아델을 칭찬하듯 그녀의 머리를 느릿하게 쓸었다. 마치 말 잘 들은 개를 칭찬할 때 같은 건조함이 느껴졌다.

“일정이나 자세한 게 정해질 때까지는 네 주제나 파악하고 있으렴.”

비프타 공작이 말했다.

‘주제 파악.’

아델은 비프타 공작이 하는 그 말에 대해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공작은 아델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성과를 내지 못하거나 혹은 그의 말대로 행동하지 않았을 때 취하는 행동이 있었다.

그녀를 방에 가두고 문을 걸어 잠근다. 창문은 나무판자로 막고 촛불마저 빼앗아 빛 한 점 없는 그저 어둠 속에서 아델은 한구석에 웅크린 채 공작의 화가 풀리길 기다려야 했다. 지독한 어둠 속에서 하루나 이틀에 한 번씩 주어지는 식사는 내용물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살기 위해 먹어야 했다.

아델은 어둠이 싫었다. 좁은 곳에 갇힌 어둠이 싫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또 다른 폭력이었다.

“데려가서 가두도록 해. 식사는 예전처럼 이틀에 한 번만 내주도록.”

“네. 주인님.”

벨라가 아델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이거 놔!”

아델이 눈을 부릅뜨며 벨라의 팔을 쳐 냈다. 난생처음 보는 거센 반항에 자리에 있던 벨라와 집사의 눈이 커졌다. 비프타 공작이 허공에 손을 올리고 검지를 까딱였다.

“예, 마스터.”

“저걸 데려가서 가둬.”

“알겠습니다.”

어디서 솟아났는지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움직이기 편한 가죽으로 된 갑옷을 입은 기사 둘이 아델을 양옆에서 제압했다. 아무리 몸을 흔들어도 그들에게선 벗어날 수 없었다.

“카레나, 넌 내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벌써 폐기 처분을 당하기엔 아깝지 않으냐?”

스쳐 지나가는 아델의 귓가에 비프타 공작이 낮게 속삭였다.

“데려가. 그리고 그 괴물…….”

비프타 공작이 뒤늦게 말실수를 깨달은 듯 제 입꼬리를 매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헥시온 밀라트리오 대공에게 결혼에 관한 자세한 일정을 조율하자는 편지를 보내도록.”

“네, 알겠습니다.”

저를 여전히 손바닥 위 꼭두각시처럼 두려는 비프타 공작의 행태에 그녀가 눈을 부릅뜨곤 고개를 돌려 멀어져 가는 공작을 노려봤다.

‘공작 각하의 전언이다. 지금껏 수고했다.’

‘아마도 황제는 당신을 죽일 예정이었을 겁니다. 언제인지는 몰라도 공작가에서 결혼을 시키기 싫어서 일부러 죽인 게 아니냐는 트집을 잡을 예정이었을지도 모르죠.’

죽기 전에 들었던 기사 같지도 않던 용병의 말과 헥시온이 해 준 말이 아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진짜 자신을 죽인 건 누구일까?

비프타 공작? 아니면 정말 헥시온의 말대로 황제가 벌인 일?

‘카레나 비프타 역시 제 자식이었으면서.’

지금 비프타 공작은 그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면서 그토록 싸늘한 눈을 했다. 아델이 그들에게 끌려가며 주먹을 쥐었다.

‘만약 일이 생긴다면 내게 도망쳐도 좋아요. 비프타 정도는 한 손으로도 때려눕힙니다.’

‘언제든지 제 집으로 도망쳐도 됩니다. 지켜 드리죠.’

그러고 보니 묻지 못했다. 만약 도망가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는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는 물음을.

밀어닥칠 공포에 빠르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하며 아델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승리를 위한 패배였다. 성공하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서는 것뿐이다.

아델은 헥시온의 손을 잡았다. 그와 자신이 정식으로 맺어질 때까지만 버티면 이 집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면 도와 달라고 말한 그의 소원을 이뤄 줄 수도 있겠지.

“이 방이에요. 그리고 제발 얌전히 계세요, 아가씨. 아가씨가 뉘우치시면 주인님께선 분명히 금방 용서해 주실 거예요.”

“……불쾌하니 얼굴 좀 치워 주겠니?”

“네?”

“네 얼굴 보는 것도 역겨우니까 꺼지라고 말했는데, 더 노골적인 단어로 말해 줘야 해?”

아델의 날카로운 말투에 벨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퍽 당황한 표정을 했으나 감히 흉흉한 기색을 내뿜는 아델에게 덤벼들거나 말대꾸를 하지는 못했다.

“……쉬세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벨라가 그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문을 닫았다. 아델은 벨라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단단하게 굳은 눈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에 순식간에 시야를 빼앗겼다. 그러나 아델에게 이 방의 구조는 익숙했다. 늘 그녀가 갇히던 공간이었으니까.

2층의 가장 끝 방.

밖에서도 안에서도 눈에 잘 띄지 않는 이 방은 그녀를 가둘 때가 아니면 절대 열리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니 청소하지 않은 방은 먼지로 가득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더듬더듬 벽을 따라 조금씩 발을 움직였다.

‘이 부근에 침대가…….’

턱-.

아델의 무릎에 침대가 걸렸다. 아델이 벽을 짚고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내려 침대를 찾아 손을 더듬더듬 움직였다. 아델의 손끝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눈을 뜨고 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포는 아델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아……?”

침대 끝에 걸터앉은 아델이 고개를 드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방 천장의 구석에 무언가 기묘한 것이 대롱처럼 매달려 있었다. 아델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저게 뭐지?”

잠긴 방 안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대롱은 옅은 초록빛을 내며 빛나고 있었다. 누에고치처럼도 생긴 그것은 새하얀 실로 이리저리 감겨 있어 무척 신기했다.

‘이 밤의 눈 때문인가……?’

아델이 제 손을 들어 눈두덩을 꾹 누르며 생각했다. 요정이 축복이라며 준, 요정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기묘한 눈.

‘그러고 보니 밤눈이 밝아진다고 했는데…….’

아델이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러자 주위의 사물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녀가 한 번 더 눈을 깜빡였다. 이번에는 한층 더 사물이 또렷해졌다. 의아한 기분에 눈을 한 번 더 깜빡인 그녀의 시야에 방 안 구조가 확실하게 보였다.

눈이 어둠에 적응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기에 그녀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어둠 속에서 사물이 보였던 적은 없었다. 이제는 방에 무엇이 있는지까지 확실히 보였다.

“이건 좋네…….”

아델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침대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무릎에 얼굴을 기댔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보인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그뿐이 아니라 방구석에는 무언가 초록빛을 내는 작은 빛도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눈치 못 챈 게 이상하네.’

물론, 차라리 못 본 게 나을 수도 있었다. 괜히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고 보고를 넣어도 문제가 될 테니까.

“다행이다.”

덕분에 무섭지는 않았다.

배고픔과 어둠의 공포랑 싸우는 것은 어린 아델에겐 무척 힘겨운 일이었다. 이대로 죽이는 줄 알고 살려 달라고 목이 쉬어라 외쳤던 적도 있었다. 익숙해지고 나선 그저 견디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됐다.

그녀는 이곳에 갇혀 있으면서 온갖 생각을 다 했다.

‘왜 나는 그걸 외우지 못했을까?’

‘왜 시키는 대로 하지 못했을까?’

‘어떻게 해야 용서를 해 주실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들은 전부 우스운 자기 위로였다.

‘왜 내가 이곳에 갇혀 있어야 하지?’

‘왜 난 저것들을 배워야 하지?’

지금 생각하면, 아델은 상황을 의심하는 법은 몰랐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것들은 그녀가 배운 적이 없으니 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아델은 그것을 하지 못해서 벌을 받았다. 그것은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일이었다.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그때와 그것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무력해서 빠져나갈 수 없는 지금. 무엇이 다를까?

아델이 아주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침대 구석에서 한껏 몸을 웅크린 채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렇게 불편한 잠을 청했다.

* * *

“오랜만에 뵙는군요, 공작.”

먼저 와서 응접실에 앉아 있던 헥시온이 다리를 꼬고 자리에 앉은 채로 말했다. 거만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으나 공작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반응을 하진 않았다.

‘꼭두각시 대공 주제에.’

그가 속으로 혀를 찼다. 주제도 모르고 오만방자하게 구는 것이 딱 최근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다만, 황제는 그런 헥시온을 보고도 눈을 감아 주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오늘로 일주일째군.’

비프타 공작이 생각하며 성큼성큼 헥시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렇군요. 덕분에 최근 안사람의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짓궂으신 건 좋지만, 너무 과한 것은 아니었는지요?”

“공작 부인께서 내 아내 될 사람에게 한 짓은 과하지 않은 짓이었는지?”

헥시온의 말투는 한없이 부드러웠으나 시선만큼은 무척 싸늘했다. 잘 발효된 빵처럼 부풀어 오른 볼을 보곤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생각하던 헥시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주 상습범이군.’

그가 팔짱을 낀 채 비프타 공작을 올려다봤다. 비프타 공작이 눈을 꾹 한 번 감았다가 뜨더니 이내 감정을 지우고 헥시온의 맞은편에 앉았다.

“결혼 의사는 딸아이에게서 전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대화가 빠르겠군요. 폐하껜 일정을 논의한 후 보고를 드릴 예정입니다. 운은 띄워 놨습니다.”

헥시온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비프타 공작이 무척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골칫거리가 생각보다 빨리 해결될 것 같았다. 덕분에 공작은 최근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당장 결혼을 진행하기보단 일단 약혼으로 진행한 후 차차 날을 잡아 결혼식을 올리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대공께선 어떻습니까?”

“난 영애께서 좋은 대로 하면 됩니다. 영애께선 어느 게 좋다고 합니까?”

“그럼 그 부분은 딸아이에게 물어보고 서면으로 말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비프타 공작이 노련하게 상황을 넘겼다. 지금 적당히 대화를 나누는 듯한 뉘앙스를 줘 놓으면 나중에 그의 뜻대로 할 수 있었다.

‘차라리 그편이 나을지도.’

어차피 그것은 자신의 말을 거절하지 못한다. 이번 일로 더 확실하게 깨닫게 됐겠지. 오늘이나 내일쯤 찾아가서 상황을 볼 예정이었다. 어느 정도 제 위치를 파악한 것 같으면 다시 사교계 활동도 시작해야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테니까.

‘비프타 가문은 앞으로 더 위상이 높아질 테지.’

무려 황족과 연을 맺게 되는 것이니까. 어디까지나 겉보기의 이야기지만, 비프타 가문과 황제에겐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단단한 결속이 그들의 방패이자 그들의 적에게 위협이 될 테니까.

“그럼 날짜는 언제쯤이 좋겠습니까?”

“그것도 그녀에게 묻고 싶군요. 그녀는 언제가 좋답니까?”

“자세한 걸 정해서 그럼 서면으로 보내는 것은 어떻습니까?”

비프타 공작의 말에 헥시온이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검은 눈동자가 둥글어졌지만, 비프타 공작은 제 등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저 웃음이 적어도 정말 즐겁거나 유쾌해서 짓는 웃음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뭔가 불만이라도?”

비프타 공작의 말에 헥시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참 알아줘서 고맙군요. 눈치가 너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면 말씀하시지요.”

‘재수 없는 놈.’

비프타 공작의 입과 속마음이 따로 놀았다.

헥시온이 가식적인 미소를 짓는다고 끌어올렸던 입꼬리를 다시 끌어 내렸다. 헥시온의 인상이 한층 싸늘해졌다.

“내가 왜 이런 의논을 공작과 나눠야 합니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영애와 결혼을 하려는 거지 공작과 하려는 게 아닌데……. 조율은 그녀와 직접 할 테니 불러 주시죠.”

헥시온의 직설적인 말에 비프타 공작의 입이 닫혔다.

그가 천천히 허리를 굽혀 찻잔을 들었다. 짙은 향의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비프타 공작이 고개를 들었다.

“딸아이가 몸이 좋지 않아서 지금은 얼굴을 비추기가 어려울 것 같군요.”

“이런. 문병이라도 가 봐야겠군요.”

“병에 아파하는 몰골을 보이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다음에 다시 방문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대공?”

헥시온의 눈이 비프타 공작을 천천히 훑었다. 자연스럽게 보이려는 듯하지만, 어쩔 수 없이 눈동자는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헥시온은 제 기색을 살피려 신경을 곤두세운 비프타 공작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린 헥시온을 본 비프타 공작이 의아한 기색으로 인상을 썼다. 즐겁거나 유쾌한 웃음이라기엔 메마른 목소리였다. 건조하고 짧게 웃음을 터뜨린 헥시온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가 경어를 써 주니 아무래도 꽤 호구같이 보이는 모양이야, 공작은.”

“……무슨 말씀이신진 모르겠지만, 무례하시군요.”

비프타 공작이 평정을 가장한 채 대답했다.

헥시온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곤 저를 따라 일어난 비프타 공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거짓말도 간파하지 못하는 머저리로 보이나?”

미간을 좁힌 헥시온이 물었다. 제법 온화한 분위기였던 장소가 순식간에 북부의 만년설이 휘날리는 살얼음판이 되었다.

“…….”

“날 속이려면 그 같잖게 곤두세운 기색이나 없애지 그러나? 전장의 경험이라면 내가 공작보다 더 많단 말일세.”

“무슨……?”

“사람 떠보려는 그 더러운 눈 치우라는 말인데 못 알아듣겠나?”

흥분하지 않은 것 같은 무척 잔잔한 목소리로 헥시온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의 말을 했다.

공작의 눈이 잘게 떨렸다.

“아무리 작위가 높다 한들 너무 무례하군요. 또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전 모르겠습니다. 딸아이가 아프다는 게 문제가 되는 줄은 몰랐는데요.”

“나는 내 아내 될 분을 뵈러 왔네. 공작, 그대를 보러 온 게 아니야. 그리고 내가 알기로 그녀는 책임감이 무척 강해서 아프다고 한들 내가 왔다고 하면 마중을 나올 사람이거든.”

그녀는 제 손을 잡았다. 스스로 발을 내딛기 위해 자신과 결혼을 해 준다고 했다. 괴로워하는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아델은 헥시온에게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그런 사람이 아프다고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는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비프타 공작에게서 느껴지는 느낌이 무척 더러웠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 분명한, 불쾌함의 근원지. 그것은 수많은 인간 군상을 만나 왔던 헥시온에게 무척 익숙한 것이었다.

“당장 그녀를 내 앞에 데려오게. 그러지 않으면, 내가 이 집을 뒤지도록 하지.”

헥시온이 살기등등한 기세로 말했다. 흉흉한 시선이 비프타 공작을 정확히 직시했다.

비프타 공작은 아주 잠시 난감한 표정을 얼굴 위로 드러냈지만, 노련하게 감정을 숨겼다. 짜증스러웠지만, 괜히 일을 그르칠 필요는 없었다. 이건 자신이 잠시 참아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데리고 올 테니 그럼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죠.”

“아프다고 하는데 내가 직접 찾아가겠네. 위치만 알려 주게.”

“아무리 혼인을 예정하고 있다지만, 딸아이는 한창때의 여인입니다. 타인이 들어오는 것을 내켜 하지 않을 겁니다.”

마치 정말 제 딸을 염려하듯 말하는 비프타 공작의 말에 헥시온이 입을 닫았다. 비프타 공작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조금 더 난동을 피웠다간 괜한 소문이 사교계에 흐를 거다. 헥시온이 한층 누그러진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경계심을 풀어 보이듯 양손을 옆으로 든 그가 다시 소파에 기댔다.

“공작의 말도 맞는군요. 내가 조금 흥분한 모양입니다. 사랑 앞에 장사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공작이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군요.”

“물론입니다.”

“네, 그럼 기다릴 테니 말을 잘 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한층 부드러워진 분위기가 됐다. 응접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 비프타 공작의 뒷모습을 보던 헥시온의 입술 끝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나저나.”

나가려는 비프타 공작의 뒷모습을 보며 헥시온이 운을 뗐다.

“영애께선 사랑받고 계시는 모양이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시녀에게 시키면 되는 일을 공작께서 직접 가시니 말입니다. 영애를 걱정하는 공작의 마음이 물씬 느껴집니다.”

비프타 공작의 눈썹이 잠시 일렁였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놓치지 않은 헥시온이 모른 척 빙긋 웃었다.

“힘겹게 얻은, 하나뿐인 막내딸이니 말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이 쓰이고 손이 가는군요.”

“보는 것만으로도 시선이 가는 분이 아닙니까, 영애께선.”

헥시온의 말에 비프타 공작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응접실을 나섰다.

“재수 없는 괴물 새끼.”

중얼거리듯 내뱉은 비프타 공작이 중앙 계단을 향해 발을 옮겼다. 계속 끈질기게 보여 줄 수 없다고 한다면, 정말 집 안을 뒤지기라도 할 기세였다.

‘제대로 반성을 했을지 모르겠군.’

비프타 공작은 당장 아델을 손에서 놓을 생각이 없었다. 도리어 그는 헥시온과 아델을 약혼으로 엮어 놓고 황제와 또 합의할 예정이었다.

아델은 좋은 패였다. 황제는 아델과 헥시온을 확실히 결혼을 시킨다는 공표를 하지 않는 한 비프타 공작가를 쓸모 있는 패로 생각할 것이다.

‘황제는 점점 욕심이 많아지고 있어.’

황제는 점점 그에게 어려운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카레나가 대공과 결혼을 한다면 분명히 공작가의 권한도 황제는 이리저리 휘두르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비프타 공작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벨라.”

“네, 주인님.”

“카레나는?”

“아직 그 방에 계십니다.”

비프타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앙 계단을 성큼성큼 밟아 올라갔다.

긴 복도의 가장 끝의 방은 원래 쓰지 않는 방이었다. 그리고 진짜 카레나 비프타의 태워 버리지 못한 유품을 보관한 곳이기도 했다.

“열도록.”

비프타 공작의 명령에 벨라가 자물쇠를 열고 문을 밀었다.

어두컴컴한 문이 열렸다.

아델은 갑작스럽게 새어 들어오는 빛줄기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에 스며든 빛은 일순 고통을 몰고 왔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일기장을 놓았다.

‘눈부셔.’

그녀가 눈을 벅벅 문지르다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지금 뭘 하고 있었지?”

방으로 들어온 비프타 공작은 아델이 침대에 떨어뜨린 것을 주워들었다. 작은 노트였다. 고급스러운 가죽 재질의 표지에 제목도 없었다. 그가 노트를 펼쳤다.

“이건……. 이걸 어디서 찾았지?”

“일주일이나 방에 가둬 두시는 데 이 좁은 방에서 찾지 못할 게 어딨겠습니까? 하도 할 일이 없어 이곳저곳을 뒤지다가 발견했습니다.”

“읽었나?”

비프타 공작의 날카로운 물음에 아델이 얼굴을 확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이 방에서요?”

“…….”

아델이 비꼬듯 말하자, 비프타 공작이 그제야 제가 한 질문이 우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 그가 노트를 다시 달려 있는 가죽 끈으로 묶어 책상 위에 올렸다.

“밀라트리오 대공이 찾아왔다.”

‘밀라트리오 대공이?’

아델의 머릿속에 헥시온이 떠올랐다.

‘그가 갑자기 찾아왔다고? 무슨 일이지?’

아델이 미간을 찡그렸다.

“네, 그래서요?”

그녀가 되물었다.

사실 아델은 비프타 공작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헥시온은 무척 머리가 좋은 남자였다. 그러니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을 보길 요구했다면 비프타 공작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들어줄 수밖에 없었을 거다.

“널 만나길 원하니 옷을 차려입고 응접실로 내려오거라.”

“싫습니다.”

아델이 여전히 침대에 앉은 채 비프타 공작을 올려다봤다. 비프타 공작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 일그러졌다.

“앞으로도 각하께서 시키는 건 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네가 저 대공과 만나더니 아주 오만방자해졌어! 저 꼭두각시 괴물이 네 뒷배가 되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게냐? 헛소리! 당장 눈앞의 권력에 미쳐서는!”

아델은 대답 없이 고개를 든 채 벌겋게 물든 얼굴로 소리치는 비프타 공작을 쳐다봤다.

‘이렇게 화도 낼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늘 거만한 눈빛과 차가운 명령만 받아 왔다. 아델은 단 한 번도 그의 말에 거역한 적이 없으니 그가 이토록 화를 내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편안히 살 수 있을 텐데 대체 뭐가 문제야!”

비프타 공작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냥 지금까지처럼 인형처럼 굴어라. 말 잘 듣는 인형. 그러면 이런 괴로운 일도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잖니.”

화를 내던 비프타 공작이 갑작스럽게 또 누그러진 목소리로 회유하듯 말했다. 그의 매서운 기세에도 아델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비프타 공작의 가면이 완전히 깨어졌다.

“전 앞으로 당신이 원하는 모든 일을 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의 말 잘 듣는 인형은 이미 없으니까.”

“은혜도 모르는 더러운 년!”

비프타 공작의 손이 하늘 높이 치켜 올라갔다. 분을 참지 못한 것이다. 아델이 눈을 부릅뜬 채 비프타 공작을 노려봤다. 움찔거리는 몸을 애써 참으며 그녀가 닥쳐올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공작 부인만 손버릇이 더러운 줄 알았는데, 공작, 그대도 마찬가지였을 줄 몰랐군.”

들려오는 서늘한 목소리에 눈에 힘을 주고 있던 아델의 표정에서 힘이 빠졌다. 그녀가 퍽 놀란 눈으로 허공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비프타 공작의 손을 바라봤다.

“공작, 지금 검을 쥐며 살아온 손으로 그녀를 때리려고 한 것 같습니다만…… 내가 본 게 맞습니까?”

“이건…….”

비프타 공작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로서도 마땅히 생각나는 변명거리가 없었다. 낭패감 짙은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비프타 공작이 입술을 다물었다.

“그대는 내가 우습나 보군.”

헥시온의 검은 눈이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흉흉하게 빛났다.

“단순한 교육입니다. 말을 듣지 않으니 아비로서 교육할 수도 있는 법이지요. 부모가 되면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부모로서의 교육?”

헥시온이 비꼬듯 그의 말꼬투리를 붙잡았다. 비프타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을 비틀자 헥시온이 순순히 붙잡고 있던 손목을 놓았다.

“부모라는 작자가 자식을 이런 골방에 가두고 검을 쥔 손으로 사정없이 때리려고 하는 건가?”

“이건 어디까지나 교육의 일환으로…….”

“공작은 검을 쥐었지. 오랜 시간 훈련한 기사가 아니던가? 도대체 기사도는 어디에 둔 거지? 이건 강자의 일방적인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헥시온이 비프타 공작의 손목을 다시 붙잡은 채 힘을 줬다. 강한 악력에 비프타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팔을 비틀었지만 헥시온의 힘은 괴물같이 강했다.

“큭…… 대공……!”

“아픈가?”

헥시온이 평이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토록 힘을 주고 있는데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무척 편안한 눈이었다. 비프타 공작이 이를 악물었다.

“아픈 이유가 뭔지 아나?”

꽈악-.

헥시온이 손목을 쥔 손에 한층 더 힘을 줬다. 비프타 공작은 그나마 체면 때문에 비명만 지르지 못할 뿐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이를 악물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위로 고통이 물씬 느껴졌다.

“큿…….”

“내가 강자고 공작이 약자이기 때문이야.”

헥시온의 말에 비프타 공작이 눈을 부릅떴다. 공작의 매서운 시선도 아무렇지 않게 마주하며 헥시온이 그의 어깨 너머로 아델을 쳐다봤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영애?”

“네. 여긴 어떻게……?”

“어쩐지 와야 할 것 같았습니다. 당신이 울 것 같았거든요.”

헥시온과 아델이 비프타 공작을 사이에 둔 채 대화를 나눴다. 헥시온이 비프타 공작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뭐가 이렇게 소란스러워?”

콰앙-!

거친 욕설과 함께 열려 있던 문을 힘껏 발로 차며 콰른 비프타가 방으로 들어왔다. 콰른 비프타가 퍽 껄렁한 표정으로 주머니에 손을 끼워 넣은 채 방을 천천히 훑었다.

“이 새끼 뭐야?”

“그럼 네놈 새끼는 뭡니까? 말 참 더럽게 하시는군요.”

“허, 네놈 새끼? 너 근데 우리 아버지한테 뭐 하냐?”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듯 콰른 비프타가 비프타 공작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헥시온의 팔을 붙잡았다. 그의 타오를 것 같은 주황빛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콰른 비프타가 있는 힘껏 헥시온의 팔을 붙잡은 채 힘을 줬지만, 헥시온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뭐야, 이건? 돌덩이라도 돼?’

콰른 비프타의 자존심에 커다란 생채기가 났다. 지금껏 힘겨루기로 그를 이긴 자가 몇이나 되던가? 몸집이 그보다 세 배는 더 큰 도적이나 산적도 한 손으로 제압했었다. 그의 형인 펠리스 역시 오로지 힘을 쓰는 검술에서는 콰른 비프타에게 한 수 접어 줄 정도였다.

“젠장!”

콰른 비프타가 한껏 힘을 주자 헥시온의 눈썹이 일렁였다.

“흐음.”

콰른 비프타를 한 번 본 헥시온이 붙잡고 있던 비프타 공작의 손목에서 손을 뗐다. 비프타 공작이 붙잡혔던 팔을 내려 반대쪽 손으로 제 손목을 붙잡았다.

‘읏…….’

욱신거리는 통증이 심각했다. 비프타 공작은 움직일 때마다 찌를 듯한 아픔이 느껴지는 손목에 얼굴을 구겼다.

‘괴물, 괴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괴물일 줄은…….’

비프타 공작이 일그러진 시선으로 헥시온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귀족답지 않은 말투나 행동, 멍청한 얼굴까지.”

헥시온이 책을 읽듯 무뚝뚝한 목소리로 콰른 비프타를 품평했다. 헥시온의 말이 한마디 한마디 이어질 때마다 콰른 비프타의 얼굴이 점점 종잇장 구겨지듯 일그러졌다. 아델을 대할 때의 다정한 말투와는 무척 다른 건조한 목소리였다.

“당신이 비프타 공작가의 둘째인 콰른 비프타군요.”

“그러는 너는 누구냐고 묻잖아. 이 새끼가!”

헥시온이 그에게 붙잡힌 손을 가볍게 비틀어 뺐다. 콰른이 없는 힘까지 끌어모아 붙잡고 있던 헥시온의 손목이 너무 쉽게 빠져나갔다.

헥시온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다시 눈을 뜨는 순간 콰른 비프타가 허공에 떠 있었다. 아델은 눈을 깜빡한 잠시 사이에 벌어진 일에 입을 떡하니 벌렸다.

“컥-!”

한 손으로 콰른 비프타의 목을 쥔 채 들어 올린 헥시온이 발버둥 치는 그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너보단 작위가 높습니다. 주제도 모르는 개새끼가 어디서 이렇게 왈왈 짖는지 모르겠군요. 공작, 교육하려면 이런 걸 교육하셔야지 않겠습니까?”

비프타 공작이 제 손목을 매만지며 얼굴을 찌푸렸다.

“콰른을 놓아주십시오.”

“그러죠.”

헥시온이 허공에서 손을 놓았다. 발버둥 치던 콰른 비프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뛰어난 반사 신경으로 바닥을 구르는 것만은 면한 콰른 비프타가 벽을 붙잡은 채 엉거주춤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괜히 말이 길어졌군요.”

헥시온이 고개를 돌렸다.

“제국에는 약혼자와 동거를 할 수 있는 법이 있죠. 그녀는 오늘부로 내 저택에서 지내게 될 겁니다.”

“이 개새끼가, 누구 맘대로!”

콰른 비프타가 흉흉한 눈으로 헥시온을 쏘아봤지만, 헥시온은 그쪽으론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비프타 공작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 영애께선 괜찮으십니까?”

헥시온이 한층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금까지 한 손으로 콰른 비프타를 막고 비프타 공작을 제압한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혹시 영애께서 어려우시다면, 다른 수단을 취해도 저는 괜찮습니다.”

“야, 이 개새끼가……!”

콰른 비프타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헥시온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주먹을 쥔 채 헥시온에게 그것을 내질렀다. 헥시온이 몸을 살짝 비트는 것으로 콰른 비프타의 주먹을 피하는 동시에 손바닥을 펼쳐 주먹을 막았다.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영애.”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비프타 공작의 매서운 시선에도 아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데려가 주세요.”

“영광입니다. 도리어 이쪽에서 부탁해야 할 정도입니다.”

헥시온이 붙잡고 있던 콰른 비프타의 주먹을 밀어냈다. 거센 힘에 콰른 비프타가 벽까지 밀려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헥시온은 묵묵히 비프타 공작의 뒤에 서 있는 아델에게 다가갔다.

“겨우 일주일 못 본 사이에 더 말랐군요.”

미간을 찌푸린 헥시온이 말했다.

“일단 내 저택으로 가시지요. 모시겠습니다.”

그가 손을 뻗었다.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비프타 공작의 눈이 아델에게 향했다.

“멈춰라, 카레나.”

“놓아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겠지만, 각하께서 그럴 리는 없겠죠.”

아델이 헥시온의 에스코트를 받아 걸어 나가며 말했다.

비프타 공작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욱신거리는 손목의 통증도,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계집도, 황제의 꼭두각시도 모두 비프타 공작에게는 거슬리는 것이었다.

“날 놓아주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 거예요.”

아델이 말했다.

“그리고 은혜를 모르는 더러운 게 누군데?”

아델이 주먹을 꽉 쥔 채 잇새 사이로 읊조렸다. 그녀의 서늘한 목소리에 비프타 공작이 눈을 크게 떴다.

“너 어디 가? 미쳤어? 저 새끼가 어떤 새낀 줄 알고 졸졸 쫓아가고 지랄이야 지랄은?”

벽을 붙잡은 채 소리를 지르는 콰른 비프타를 아델은 모른 척했다. 부러 그곳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말 한마디를 섞는 것도 원치 않았으니까.

“아델! 젠장. 내가 지금 멈추라고 하잖아!”

아델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잠시 멈칫한 틈을 놓치지 않고 콰른 비프타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휙 돌렸다. 콰른 비프타의 번쩍이는 금안이 아델을 향해 형형하게 빛났다.

“격 떨어질 정도로 예의라곤 정말 개미 눈곱만큼도 없군.”

헥시온이 콰른 비프타의 손을 비틀어 아델의 어깨에서 떼어 내며 말했다.

“너 진짜 가려고? 미쳤어?”

“이 역겨운 집안에 계속 있는 것보단 덜 미친 것 같은데. 꺼져.”

아델이 콰른 비프타를 한번 보고 몸을 돌렸다. 헥시온이 이번엔 그녀를 보호하듯 아예 그녀의 뒤를 쫓았다.

“결혼식이 정해지면 청첩장을 보내도록 하죠.”

헥시온이 말했다.

“물론, 그때 오실 수 있을지 의문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가 의미심장한 말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계단을 내려오던 아델이 계단 아래에 있는 인영을 보곤 걸음을 멈췄다.

“원하시는 대로 눈앞에서 사라져 드려요.”

아델이 말했다.

“당신을 동정해요, 부인.”

그녀의 말에 밑에 있던 공작 부인이 예상치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델은 헥시온과 함께 유유히 저택을 빠져나갔다.

저택 밖으로 나온 아델이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진이 다 빠지고 배도 무척 고팠다. 배고픔을 달래려 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노트를 읽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배고픔이 가시진 않았다.

“……몸은 괜찮습니까?”

“네.”

“그 방에 갇혀 있으셨던 겁니까? 아니면 그 방이 원래 당신의 방입니까?”

헥시온이 자연스럽게 아델을 한쪽 팔로 안아 요령 좋게 말 위에 앉히며 물었다. 그는 한쪽 팔로 능숙하게 말에 올라타 고삐를 잡았다. 마차를 타고 온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얼마 전에 반항을 했거든요. 그 벌이에요. 종종 있는 일이었어요.”

아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헥시온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런 창문도 막아 두고 불빛도 한 점 비추지 않는 퀴퀴한 먼지 냄새만 나던 방이었다. 결코, 귀족 영애가 있을 법한 방이 아니었고 보통의 부모는 그런 벌을 주지 않는다.

아델이 등을 기대며 말갈기를 잡는 것을 보며 헥시온이 오른손으로 고삐를 붙잡은 채 멀어진 공작저를 힐끗 쳐다봤다.

“덕분에 살았어요.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천만에요.”

“근데 왜 마차를 타고 오지 않았어요?”

“저주받은 대공의 마차를 운전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없거든요. 뭣보다 말을 타는 편이 조용한 샛길로 다닐 수 있어서 편해요.”

그렇게 말한 헥시온은 자연스럽게 인적이 드문 길로 고삐를 틀었다. 아델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설마 그놈이 아직도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그때, 딱 한 번 물어보기에 대답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어쩐지 ‘카레나 비프타’가 아니라 자신을 봐 주는 느낌에 퍽 기뻐서 얘기했지만, 단 한 번도 불러 주는 일은 없었다. 아델도 그래서 잊고 있었다. 설마 이 상황에서 듣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만.

“또 무슨 짓을 당했습니까?”

“네?”

“갇힌 것 말고 또 무슨 짓을 당했나요?”

“그냥 식사가 이틀에 한 번 주어진 것 외엔 없어요. 다행히 세간의 평판에 무척이나 신경을 쓰는 사람이라서 보이는 곳은 잘 때리려고 하지 않았거든요.”

“……그런 것 같지 않던데요.”

헥시온이 반사적으로 들어 올리던 비프타 공작의 손을 생각하며 말했다.

“가끔 제 분을 못 이길 때면 그렇게 손을 들긴 했죠.”

“참 익숙해 보입니다.”

“네?”

“그런 불합리한 일들에 참 익숙해 보여서 말입니다.”

무언가 맞받아치려던 아델이 입을 다물었다. 익숙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금 더 스스로 잘해야겠다는 생각은 여러 차례 했지만.

“불합리하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아서요.”

조금만 더 빨리 깨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죽기 전이라도, 그 마차에 오르기 전이라도 깨달았다면……. 분명히 조금은 다른 미래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네. 익숙해지지 마십시오.”

“그러려고 노력 중이에요.”

“영애는 내 저택에 가면 하루에 세 끼는 드시고, 중간중간 티타임도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눈을 끔뻑였다.

“저는 그렇게 많이 먹지 않아요.”

“한 번에 많이 먹으라는 얘기는 하지 않을 테니 조금씩이라도 자주 드십시오. 곧 바람이 불면 날아가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너무 과장된 말이었다. 아델이 당황한 눈으로 볼을 긁적였다.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안 먹진 않아요.”

“비유를 든 겁니다.”

헥시온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가져간 두 번째 밤의 비석은 해독하셨습니까?”

인적이 드문 곳으로 들어선 헥시온이 문득 물었다. 아델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 노트만큼은 그래도 품에서 떼지 않아서 가져올 수 있었지만, 그 외에 그녀의 물건은 전부 저택에 그대로 있었다.

“……아.”

아델이 침음성을 흘렸다.

“왜 그러십니까?”

“짐을 하나도 가져오지 않았네요.”

“사 드리겠습니다.”

“그게 돈이 얼만데 굳이 사요? 저택에 사람을 보내 주실 수 있으면 그걸로도 충분할 것 같아요.”

“그냥 사게 해 주십시오. 난 돈이 썩어 날 정도로 많으니 얼마든지 자유롭게 쓰십시오.”

헥시온이 앞에 앉은 아델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아 제게 기대게 하고는 그 손으로 다시 고삐를 붙잡았다. 졸지에 그의 가슴팍에 등을 기대게 된 아델이 눈을 크게 떴다.

“그깟 돈은 날 치료해 주지 못합니다. 고통을 없애 주지도, 내 아픔을 알아주지도 않아요. 그러니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원한다면 전부 가지십시오. 내겐 통증을 잠시라도 잊을 술을 살 수 있는 가치밖에 없는 것이니.”

“……아팠어요?”

“네……. 아팠습니다. 그래서 오래도록 연락이 없는 아델에게 안달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그런 꼴을 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가 뒤에서 아델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죽었다고 생각한 왼쪽 팔이 아주 잠시지만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난 당신만큼은 아프지 않았어요. 요정의 축복이라는 눈 때문에 어둠이 어둠 같지도 않았거든요.”

아델이 손을 뒤로 뻗어 어깨에 얼굴을 묻은 헥시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망설임 없이 곧바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온기에 헥시온이 움찔, 떨었다.

“뭐, 안에서 책도 읽었어요.”

“어둠에서 책을 읽으셨습니까?”

“네. 방구석 천장에 웬 누에고치처럼 생긴 것이 대롱처럼 매달려 있는데 그게 요정처럼 은은한 녹색으로 빛나더라고요.”

“설마……?”

“맞아요. 그래서 그걸 촛불 삼아 노트를 읽었어요.”

아델의 말에 헥시온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런가? 그의 떨림이 고스란히 아델에게 느껴졌다.

“저택에 가면 배부르게 식사를 하고 오늘은 푹 쉬십시오.”

“비석 내용이 궁금한 게 아니었어요?”

“궁금하지만, 내일로 미뤄도 됩니다. 내일도 옆에 있어 줄 거잖습니까?”

“그런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당당하시네요.”

“내 매력입니다.”

“그런 걸 뻔뻔하다고 하는 거죠.”

아델의 새침한 반박에 헥시온의 말문이 결국 막혔다. 마땅히 그 말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헥시온은 입을 다문 채 다시 고삐를 움직였다.

다그닥-.

말이 땅을 박차며 다시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콰른 비프타에게 진짜 이름을 알려 줬군요.”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미간을 좁혔다.

솔직히 그것에 한해선 아델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서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

“어릴 때 알려 준 적이 있어요. 설마 지금까지 기억할 줄은 저도 예상하지 못했고요.”

“나만 아는 줄 알았는데 조금은 아쉽네요.”

“이름이야 사람을 부르는 명칭의 하나일 뿐인데요.”

아델의 건조한 목소리에 헥시온이 입을 다물었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자포자기가 무척이나 쓰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 노트는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

아델이 잠시 침묵했다.

그것을 발견한 건 무척 우연이었다. 어둠 속에서 사물이 또렷하게 보인다는 건 무척 신기한 경험이었다.

어둠이 무섭지 않았던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사실 무섭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대롱처럼 매달려 있던 누에고치 덕이었다. 은은한 녹색 빛을 내는 그것을 책상 위 책꽂이에 걸어 두고 책을 보면 글씨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은은하게 밝았다.

“아델?”

헥시온이 대답 없는 아델을 불렀다.

“카레나 비프타가 쓴 일기였어요.”

“진짜 쪽을 말하는 거겠죠?”

“네. 죽기 전까지 썼던 일기장이었어요. 왜 나만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냐, 라든가 죽고 싶지 않다, 라든가 점점 감각이 없어진다는 것에 대한 절망감 같은 걸 적어 뒀더라고요.”

“동정했습니까?”

헥시온이 물었다.

“아뇨.”

그나저나 대공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구불구불하고 비탈진 수풀 길을 지나도 지나도 도착할 기색이 없었다. 사실 산길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런 샛길이 있다는 것도 아델은 전혀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래도 어릴 때는 수도의 이곳저곳을 맨발로 뛰어다녔는데, 그때도 이런 길이 있다는 건 몰랐다.

도대체 얼마나 수도의 구석으로 온 걸까?

“제 코가 석 자인데 동정할 여유가 어딨어요?”

“그런 것치곤 무척 찜찜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요.”

“그나저나 도착은 멀었어요?”

“아뇨. 곧 도착입니다.”

헥시온이 수풀을 빠져나오자 수도의 번화가에서 꽤 떨어진 곳에 커다란 저택이 있었다.

정확히는 조금 높은 지대에 위치한 저택이었다. 아래로 수도를 내려다보고 있지만, 사람의 접근이 쉽지는 않아 보였다. 광활한 땅에 펼쳐진 저택은 무척 화려하고 웅장하지만, 어쩐지 을씨년스럽게도 느껴졌다.

‘관리가 안 된 것 같지는 않은데.’

창문이나 건물 전반은 전체적으로 깨끗했다. 다만, 정원을 관리하는 사람이 마땅히 없는 것 같긴 했다. 늘어진 풀들이나 곳곳에 보이는 잡초, 가지치기를 하지 못한 나무들이 보였다.

‘깔끔하게 하려고 한 모양인데…….’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것 같진 않았다.

“엄청 크네요.”

“기분 나쁘지 않습니까? 보통 을씨년스러워서 기분이 나쁘다고들 하던데요.”

“저택이 크다 보니 정원 같은 곳이 관리가 덜 돼서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긴 하지만, 그뿐이에요. 집을 관리하시는 분은 무척 꼼꼼하신 분인 것 같네요.”

아델이 순수한 마음으로 칭찬했다. 담벼락은 부서진 곳 하나 없고 작은 틈도 꼼꼼하게 메운 흔적이 보였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며 아델이 주변을 훑었다.

말은 한껏 속도를 늦춘 채 천천히 움직였다. 경비가 지키고 있는 날카롭게 벼린 철로 된 울타리 문을 지나자 저택으로 향하는 길이 길게 뻗어 있었다. 넓은 들판처럼 잘 포장된 반들반들한 돌길과 옆으로는 전경이 탁 트인 정원이 있었다.

“올란도는 무척 좋은 집사입니다. 어릴 때부터 날 돌봐 줬죠. 뒤쪽에는 커다란 호수처럼 생긴 연못도 있으니 나중에 한번 가 보시겠습니까?”

“네.”

“테라스에서 바로 보이니 식사를 하면서 구경해도 분명 좋을 거라고 장담합니다.”

말은 이제 무척 느리게 걷고 있었다. 덕분에 아델은 저택의 전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오늘은 피곤할 테니 푹 쉬십시오. 나는 내일 아침 일찍 황제를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괜찮겠어요?”

헥시온의 말을 들으면 그도 결코 행복한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당신의 능력이라면, 난 황제가 주는 약을 먹기 위해 그의 밑에서 개처럼 기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내가 그를 베고 황제가 되겠습니다.’

헥시온의 증오는 아델이 보아 온 그 어떤 것보다 커다랬다. 자세하게 묻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신보다도 더한 상황에서 버티고 버티며 살아온 것이리라.

헥시온은 아델의 말에 기어코 대답하진 않았다. 그저 말없이 웃으며 말을 멈추고 그녀를 저택의 현관 앞에서 내려 줄 뿐이었다.

“이곳에선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당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아도 됩니다. 돈이야 창고에 많으니 얼마든지 가져다 쓰십시오. 내가 아직 쓸모가 있는 한, 황제는 날 버리지 못합니다.”

헥시온이 아델의 손을 가져와 그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아델이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곳이 어쩐지 뜨거웠다.

“……기분 나쁘십니까?”

“아뇨, 괜찮아요.”

아델이 고개를 저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올란도.”

“이런. 일정을 조율하러 가신다고 하셨으면서 아름다운 아가씨를 데리고 오셨군요.”

“사정이 있어서 오늘부터 여기서 지낼 예정이야. 이름은…….”

헥시온이 잠시 망설였다.

“카레나 비프타예요.”

아델이 헥시온의 망설임을 눈치채고 그의 말을 가로챘다.

“네, 카레나 아가씨.”

또 카레나 소리를 들어야겠구나 싶다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델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노련한 집사는 그것을 눈치 빠르게 알아챘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택을 관리하는 올란도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가씨.”

올란도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가 지긋한 노집사였다.

“그래요.”

“그나저나 이 늙은이가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해서 그러는데 혹시 별명이나 편하게 쓰시는 아명이 있으시면 넌지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명은 아델이에요. 하지만…….”

아델이 말끝을 흐렸다.

“물론 아명으로 부르는 건 부끄러우실 테니 저희끼리만 있을 때만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결국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아델이 잠시 생각했지만, 저 능청스러움은 분명히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그녀와 곧 약혼식을 치를 테니 불편함이 없도록 신경 써 줘.”

“알겠습니다.”

헥시온이 퍽 편한 얼굴로 올란도에게 명령했다.

올란도가 익숙한 듯 허리를 굽히고는 아델의 앞에 섰다.

“그럼 아델 아가씨, 지내실 곳으로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중앙에 길쭉하게 뻗은 계단을 올란도가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그 뒤를 따라 올라가며 아델이 힐끗 고개를 돌렸다. 계단 아래에서 헥시온이 올라가는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난 옷을 갈아입고 가겠습니다. 몸도 닦고 옷도 갈아입고 푹 쉬고 계십시오.”

‘……몸?’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아델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

반쯤 올라간 그녀가 난간에 기대어 양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제야 지금껏 잊고 있던 것이 한 가지 떠오른 탓이었다.

“아델 아가씨?”

올라가던 올란도가 기묘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곤 아델을 불렀다. 아델은 무척 오랜만에 듣는 제 이름에 감회를 느낄 새도 없이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일주일 동안 씻지도 못했어.’

그런 몸으로 아델은 계속 헥시온의 앞에 앉아 온 것이다. 아무리 땀을 흘리지 않고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 청결하다곤 볼 수 없었다.

“올란도…….”

“네, 아가씨.”

“죄송한데, 목욕 준비 좀 해 줄래요?”

“전담 시녀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저보단 조금 더 편하실 테니까요.”

아델이 비척비척 걸어가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우울함이 아델의 가슴을 쿡쿡 찔러 댔다. 어떻게 그걸 까먹고 졸졸졸 쫓아올 수가 있지?

‘아아…….’

아델이 벽에 머리를 박고 싶어지는 심정을 애써 억눌렀다.

“이곳이 아델 아가씨께서 쓰실 방입니다. 도련님께서 이것저것 신경을 써 둔 곳인데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신경을 써 뒀다고요? 제가 올 걸 알고 있었나요?”

“언젠가 지쳐서 도망 올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매일매일 관리를 해 두라고 명령을 들었었습니다.”

“……아.”

아델이 조금 놀란 눈으로 방 안에 발을 들였다.

바닥에 깔린 연보랏빛의 러그라든가 푹신푹신해 보이는 침대나 침구는 전부 새것처럼 보였다. 실크 커튼은 이중으로 되어 있어서 원한다면 햇빛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방 한쪽에 마련된 넓은 책상과 푹신푹신해 보이는 소파 같은 의자, 거기에 책을 꽂아 둘 수 있는 책꽂이도 큰 것이 하나 놓여 있었다.

“……꼼꼼하네요, 헥시온은.”

아델이 순순히 감탄사를 흘렸다. 아마도 책상은 책을 읽거나 해독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델을 위해 따로 신경을 쓴 것이 분명했다.

“헥시온의 팔은 언제부터 저렇게 된 거예요?”

“……역시, 도련님의 옷 안을 보신 게 아델 아가씨였군요.”

“역시라뇨?”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는 다르게 제법 정정해 보이는 올란도의 얼굴은 그럼에도 주름이 가득해서 세월을 숨기기엔 역부족으로 보였다.

아델의 물음에 올란도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도 억지로 들을 생각은 없었기에 올란도와 잠시 거리를 둔 채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말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더는 추궁할 마음은 없었다.

“일주일 전쯤에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을 들켰다고 무척 절망한 표정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일주일 전…….”

그와 두 번째 비석을 해독하러 갔다가 요정의 장난에 걸렸던 날이었다.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부터 도련님은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시는 듯 저택으로 오는 일직선의 길에서 온종일 시선을 떼지 못하신 적도 있습니다.”

“……분명히 괜찮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의 불신은 생각보다 더 깊게 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아델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안달하는 도련님을 본 게 몇 년 만인지 모릅니다. 솔직히, 이 늙은이의 심정을 말해 보자면 마음고생을 하시는 걸 알면서도 조금 기분이 좋았습니다.”

올란도가 퍽 부드럽고 인자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그 눈에 담긴 애정이 오로지 헥시온을 향한 것을 아델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곁에 좋은 사람이 있었네.’

그러니까 자신보다 더 끔찍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그가 무너지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문득 든 생각에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마치 부러워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제 생각이 조금 우스웠다.

“저 병이 걸린 것은 도련님이 아직 열 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올란도가 운을 뗐다.

“일곱 살 때쯤 황성으로 들어와 멸시 어린 시선을 받고 유폐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며 살던 도련님은 지금보다 훨씬 자유롭고 잘 웃으시던 분이었습니다.”

올란도는 무척 나지막한 목소리로 오래된 수첩 속의 기록을 열어 보듯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기억을 더듬더듬 되짚어 가는 올란도의 모습을 보며 아델은 그저 자리에 우뚝 선 채 그의 말을 경청했다.

“황제는 도련님을 마치 장난감처럼 취급했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불러서 고문에 가까운 폭력을 행사하거나 그분께 암살자들이나 받는 교육을 하곤 했죠.”

“…….”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도련님이 황성에서 도망을 쳤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허가해 주지 않을 게 뻔한 황제 폐하를 뒤로하고 어머니를 보러 갔다는 것이 더 옳겠지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속이 꽉 막혔다. 만약 아델의 성격이었다면, 전부 다 뒤엎는 한이 있더라도 저택에서 벗어났을 거다. 그나마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지속적인 폭력이나 학대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작 부인도 처음에는 다정했고.’

아델이 말없이 올란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황제 폐하가 노하셨습니다. 그분은 도련님께 기묘한 집착을 하시죠. 후계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폐하께선 유독 헥시온 도련님께 관심이 많습니다.”

“관심이 많다고요?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은데요.”

“글쎄요. 그것까진 잘 모르겠군요. 다만 그날, 폐하는 어머니의 시체를 찾아 헤매는 도련님을 그림자 기사단을 풀어 데리고 와 어딘가로 끌고 갔습니다.”

아델이 인상을 썼다.

어딘가?

무척 어중간한 단어 선정이었다. 올란도가 아델의 생각을 눈치라도 챈 듯 옅게 웃으며 금세 입을 열어 왔다.

“어디에 갔다 왔는지, 가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는 도련님께선 절대 말씀해 주시지 않습니다.”

“아…….”

본인이 말하지 않으면 모를 일인데, 그걸 말해 주지 않았다면 알 리가 없지. 아델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헥시온은 그 소매의 안을 들켰을 때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도련님의 팔엔 저런 끔찍한 흔적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황제 폐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어둠 속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셨습니다.”

“……황제가 그를 암살자로 사용했다는 말인가요?”

“이 늙은이는 그리 짐작하고 있습니다.”

올란도가 말했다.

“성년이 되었을 때, 황제 폐하께선 도련님께 대공이라는 작위를 주셨고 이번엔 전장에 내보내셨죠.”

“…….”

“황제가 주는 약이 없으면 도련님께선 저 같은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시니 도망을 가시는 건 꿈도 꾸실 수 없었을 겁니다.”

아델의 말문이 턱 막혔다. 무언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도와줘야겠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끔찍한 과거를 끌어안은 채 살았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가 그렇게 애절했던 이유를, 그토록 증오에 휩싸였던 이유를 아델은 이제야 아주 조금 이해할 것만 같았다.

아델이 퍽 심각한 얼굴로 말이 없자 올란도가 눈꺼풀을 내리깔며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도련님께서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을 들켰다고 말씀하셨을 때, 저는 그래서 그분께서 많이 싫어하셨냐고 여쭸습니다.”

“네?”

“상처가 되었다면 어떻게든 위로를 해 드리려고 제 딴에는 멋대로 생각한 것입니다만…… 하지만 도련님께선 고개를 저으셨지요.”

올란도가 퍽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상냥한 눈빛으로 말했다.

“괜찮다고 해서 더 무섭다면서 생전 읽지도 않던 인간의 심리에 관한 책을 정독하시기도 했습니다.”

“……아.”

아델이 퍽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다른 게 아니라 그저, 정말 어떤 표정으로 책을 읽었을지 기묘하게 상상이 갔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제가 믿음이 없나 보네요.”

“그런 게 아니라, 아마 두려우셔서 그럴 겁니다.”

“네?”

“누구도 도련님의 몸을 보고 정상적인 반응을 한 사람이 없거든요. 황제 폐하는 도련님의 상태를 세간에 발설하는 걸 원치 않았고…… 그것을 들키면 도련님은…….”

올란도가 말끝을 흐렸다.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황제가 원하지 않았는데, 그의 약을 받아먹고 살던 헥시온이 할 수 있는 선택지란 드물었을 거다.

‘……죽였구나.’

아델이 속으로 탄식했다. 3년 후의 미래에서 그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던 수많은 소문의 근원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자의 없이 누군가를 죽인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아델로서는 감히 다시 태어나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저는 아델 아가씨께서 지금 이곳에 와 계시다는 게 무척 기쁩니다.”

“……저도 제 이득을 위해 거래를 한 것뿐이에요.”

오로지 그를 도와줘야겠다는 그런 순수한 욕망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아델이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결국 순순히 본심을 털어놨다. 어쩐지 올란도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건 안 될 일일 것 같았다.

올란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도 이내 허허 웃어 보였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욕심이 있는 법이니까요. 그건 탓하는 게 아닙니다. 저만 해도 도련님과 아가씨가 좋은 사이로 발전하길 바라는 욕심이 있는걸요.”

“……네. 네?”

직설적인 올란도의 말에 아델이 당황해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이런,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올란도는 퍽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죄송해 보이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놀림당한 것이 분명한 것을 깨달은 아델이 짧은 한숨과 함께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욕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스스로가 욕심을 가지고 있다고 양심에 찔리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씀 깊게 새길게요.”

“한 귀로 듣고 흘리셔도 괜찮습니다. 늙은이의 괜한 말이니까요.”

괜찮다고 말하려던 아델이 괜히 말이 길어질까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제가 말이 너무 길었습니다. 곧 목욕 시중을 들 시녀를 올려 보내겠습니다.”

“부탁해요.”

“네, 생활하시다 불편한 일은 언제든지 저나 시녀에게 말씀을 해 주십시오.”

“네. 나도 잘 부탁해요, 올란도.”

“말씀은 부디 편하게 해 주십시오.”

빙긋 웃는 올란도의 말에 아델이 입을 다물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 올란도는 방문 끝에 선 채 아델을 가만히 쳐다봤다. 시선은 살짝 내리깔고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자세였다.

“익숙하지가 않아서…….”

아델이 말끝을 흐렸다.

“압니다. 그러니 천천히 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당신은 대공의 유일한 약혼녀이자 대공비가 되실 분이니까요.”

올란도가 말했다. 그건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델은 그가 말에 내포한 진심을 이해했다. 대공비가 될 자는 함부로 무시당해선 안 될 일이다. 그녀가 짧게 탄식했다.

“알겠습…… 아니, 알겠어. 노력할게.”

아델이 한참 만에 어렵사리 입을 뗐다.

애초부터 귀족으로 길러진 것은 아니라서 그런지 나이가 지긋한 노인에게까지 격 없이 대하라는 건 그녀에겐 영 불편한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올란도의 말도 이해는 갔다.

“감사합니다.”

올란도가 퍽 만족스러운 눈으로 허리를 굽혔다.

“그럼 시녀를 올려 보내겠습니다.”

“네…… 아니, 응.”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망함에 제 입술 끝을 매만지기도 했지만, 말버릇이란 쉽게 고쳐지는 게 아니었다. 특히나 아델의 경우 집 안에서는 거의 존댓말만 사용했으니까. 사용인과 말을 섞는 일은 드물었고 그나마 최근엔 벨라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올란도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그녀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피곤하네.”

일련의 상황에 휩쓸리듯 끌려왔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그 집을 나오게 될 줄은 몰랐다. 뒷일이 괜찮은가 싶지만 헥시온 본인이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조금 더 쏘아붙일걸.’

하고 싶은 말을 조금만 더 해 볼걸. 뒤늦게 머릿속에 했더라면 좋았을 말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그러면 뭐 하나? 이미 집은 나왔고 이것은 뒤늦은 후회일 뿐인 것을.

“그나마 이게 온전히 내 것이었지.”

그 와중에도 비석을 해독한 노트를 가지고 올 수 있었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어차피 그 집에 있는 건 모두 아델의 것이 아니었다.

아델은 천을 풀어 얇은 노트를 꺼냈다. 연못에 빠질 때 물에 젖긴 했지만 둘둘 감싸 두어 약간 잉크가 번진 것을 빼면 노트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우그러지긴 했지만, 글씨를 보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는 말이다.

‘책은 가져오질 못했네.’

책상 서랍에 넣어 둔 책은 크기도 컸지만, 챙겨올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니면 돈이라도 가져왔어야 됐는데.’

아델이 속으로 혀를 찼다. 개고생한 만큼 물질적으로라도 보상을 받아야 했는데 그걸 못 했다.

“은행의 금고에 넣어 둔 돈이 전부인가?”

그녀의 속에서부터 탄식이 흘러나왔다. 물론 헥시온이 돈이 많다고는 했지만, 그것과 공작저에서 가지고 나오는 돈은 별개였다.

“시녀들이 올라올 때까지만, 해독하고 있을까?”

그때 빨리 돌아가 봐야 하기도 하고 정신이 없기도 해서 고대어를 해독하다가 급히 적어 온 또 다른 고대어인 터라 노트가 엉망이었다.

고민하던 아델이 빠르게 책상 앞에 앉았다. 나무 냄새가 나는 책상은 무척 새것처럼 보였다. 마감도 잘 되어서 뾰족뾰족하거나 날카로운 부분도 없었다.

아델이 노트를 올리고 노트에 꽂아 둔 만년필을 꺼냈다. 그녀가 아주 천천히 고대어를 해독하며 얼룩지고 우그러진 노트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똑똑.

한 다섯 줄 정도를 해독했을 때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델이 펜을 멈추고 만년필의 뚜껑을 닫았다.

“들어와요.”

무심코 내뱉은 말에 아델이 속으로 혀를 찼다. 말을 편하게 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그녀가 입꼬리를 다시 매만졌다. 그녀가 탄식하는 사이 문이 열렸다. 시녀로 보이는 이 두 명이 들어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카레나 아가씨. 오늘부터 아가씨의 시중을 들게 된 줄리라고 합니다.”

“같이 시중을 들게 된 프레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줄리라고 소개한 차분한 목소리의 여자는 짙은 보라색의 긴 생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있었다. 그리고 옆의 여자는 단발머리를 한 다갈색 머리카락의 시녀가 프레이였다.

“카레나 비프타라고 해.”

아델이 최대한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대공비가 될 사람이라고 하지만, 아직 대공비가 된 것도 아니라서 사실 조금 민망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일이 다 해결되면 각자 제자리로 돌아갈 테고.’

아델은 아델대로 어딘가 고대어를 해독하는 고고학자가 되어 있을 수도 있었다. 헥시온은 그가 원하는 대로 된다면 정말 황제가 되어 제국을 지배하고 있을 수도 있다.

지금으로서는 꿈만 같은 아득히도 먼 이야기이긴 하지만.

“몸을 씻고 싶은데 준비를 도와주겠니?”

“네,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프레이가 해맑게 웃으며 먼저 대답했다. 그러곤 종종걸음으로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으시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프레이가 들어가자 이번엔 줄리가 다가왔다. 한껏 자신을 낮춘 프레이와 줄리의 행동은 벨라를 상대하던 아델에겐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씻는 건 스스로 할 수 있으니까 욕실에서까지 시중을 들지는 않아도 돼.”

아델이 벨라에게 하는 것처럼 말했다가 너무 싸늘하지는 않았나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줄리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게 편하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응.”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가 아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드레스의 끈을 풀어냈다.

* * *

욕조에 몸을 담그고 오랜만에 편안하게 목욕을 한 덕인지 눈꺼풀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배도 고프고 눈꺼풀은 무겁고 해독하던 것은 또 마저 해독하고 싶다. 상반되는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부딪쳐서 머리도 아플 정도다.

프레이와 줄리는 아델의 기색을 살피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불러 달라고 하며 침구를 정리해 주곤 유유히 떠나갔다.

‘졸려…….’

아델이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그러나 배가 고파서 눕는다고 해도 쉽게 잠이 들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꼬르륵거리는 뱃고동 소리에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똑똑.

졸음과 배고픔과 해독에 대한 욕망과 싸우며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아델이 예고 없는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네.”

목소리가 조금 삐끗했다.

그녀가 황급히 제 목을 더듬었다. 헛기침을 두어 차례 하는 찰나 대답을 들은 상대방이 문을 열었다. 줄리나 프레이인가 했는데, 들어온 것은 의외로 헥시온이었다.

“불편한 곳은 없습니까?”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아델이 원래대로 돌아온 목소리로 조용히 대답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은 여전히 꿈인지 생시인지 잘 구별이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헥시온의 호의는 감사했다.

“배가 많이 고플 텐데 식사 준비를 해 놨으니 내려가시죠. 그 뒤엔 잠을 푹 주무시는 걸 추천합니다.”

“……피곤해 보이나요?”

아델이 침대에서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는 퍽 곤란한 표정으로 웃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헥시온에게 다가갔다.

“근데 그 말 전하러 오신 건가요?”

“네.”

아델의 말에 헥시온은 별 고민 없이 대답을 내놨다.

아델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굳이 헥시온이 직접 올 필요가 있을까? 이 저택엔 그래도 그의 손과 발이 되어 주는 수족도 많이 있을 텐데.

“제가 당신 곁에 있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렇게만 있어도 살 것 같아서요.”

“……정말 독심술 하는 거 아니죠?”

“아델은 무방비할 땐 표정에 생각이 다 드러납니다. 압니까?”

헥시온이 낮게 웃으며 되물었다. 새삼 생각지도 못한 말이라서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아델로선 헥시온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곁에 있으면 아픈 게 없어진다니.

“……제가 정말 헥시온을 낫게 해 드릴 수 있을까요?”

“글쎄요. 하지만…….”

헥시온이 말끝을 늘였다.

“아주 잠시 잠깐의 꿈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충분합니다.”

만약 그녀가 자신을 낫게 해 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헥시온은 괜찮았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약에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그에게 무척 특별한 일이었으니까.

아델의 말문이 막혔다.

“근데…… 그 장갑은 집 안에서도 끼고 있는 거예요?”

계단을 내려가며 적막에 몸을 비틀던 아델이 그에게 물었다. 헥시온이 잠시 아델을 쳐다봤다.

“네, 이상합니까?”

“불편하지 않으세요?”

“내 손을 보는 다른 이들의 불편만 할까요.”

헥시온은 담담히 이야기했지만, 표정이 그렇게 밝지는 않았다. 아델이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서는 벗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다들 당신을 이해하고 이곳에 있는 거잖아요.”

“그들이 이곳에서 일하는 이유는 내가 다른 곳보다 월급을 높게 쳐 주기 때문입니다.”

헥시온이 말했다.

‘……그런 것 같진 않던데.’

올란도는 물론이고 줄리나 프레이도 저택을 불쾌해하거나 저택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을 꺼리는 느낌은 없었다. 그와 접촉했을 것이 분명한 아델에게 손을 대는 것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 생각하면서도 확신은 없는 아델로선 무언가 말을 덧붙여 주지는 못했다.

“저도 식사만 하고 잠을 자야겠습니다.”

“헥시온의 방은 어디인가요?”

“제 방은 1층에 있습니다.”

헥시온의 말에 아델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보통 주인의 방은 2층이 아니던가? 그중에서도 제일 좋은 방이 보통은 저택의 주인들이 쓰는 방이었다.

“왜 1층이에요?”

“시끄러울 테니까요.”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 그녀의 고개가 한 번 더 옆으로 기울어졌다. 밤에 무슨 일을 하기에 시끄러운 걸까? 잠시 고민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헥시온.”

“뭐가 말입니까?”

“덕분에 그 집에서 빠져나왔으니까요. 내가 했다면 분명, 1년은 더 넘게 기다려야 했을 거예요.”

그동안 자신이 버틸 수 있었을지, 아델은 장담할 수 없었다. 사지가 멀쩡할지도 말이다. 그러니까 아델은 헥시온이 자신을 그 집에서 꺼내 준 것만큼은 이유 막론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아델에게 받은 것보단 덜합니다.”

헥시온이 식당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 과장된 말에 아델이 퍽 민망한 표정으로 귓불을 매만졌다. 이런 식의 말을 들어 본 적이 드물어서 들을 때마다 속이 간질거렸다.

“아까 보니까 노트를 펴 놓고 있던데 비석을 해독하던 중이었습니까?”

“시녀들이 오는 걸 기다리면서 다섯 줄 정도요.”

“밤에만 보이는 비석 쪽이죠?”

“네. 언뜻 보니 나무를 베어 버렸다는 것 같던데요.”

아델이 아까 해독해서 노트에 적어 둔 다섯 줄을 생각하며 말했다. 그녀가 헥시온이 빼 주는 의자에 앉았다. 그가 맞은편에 앉으며 기묘한 표정을 했다. 식탁에는 무척 다양한 음식이 한 상 가득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나무요?”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오래된 고목을 베었다는 것 같았어요. 거기까지만 해독을 해서 잘 모르겠네요.”

아델이 볼을 긁적였다.

기억나는 대로 읊어 보자면 내용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말이 많았던 것이 분명한 비석 제작자의 특성상 초입 부분은 쓸데없는 설명이었다.

“그 비석, 훅센라이트가 썼다는 거 알고 있어요?”

“……고대의 영웅, 훅센라이트 말입니까?”

헥시온이 예상치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놀란 눈을 한 헥시온을 보며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요정에게 들어서 알게 된 이야기이긴 했지만.

“요정의 말로는 그러더라고요.”

“요정……. 그런 게 정말 실존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믿어 주시는 건가요?”

아델이 기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원래 이런 말을 들으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게 정상 아니던가?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아무리 자신이 보인다고 연설을 해도 말이다. 그러니까 아델은 단 한 번도 정말이냐고 묻거나 의심하는 눈길조차 보내지 않는 헥시온이 신기했다. 그는 아델이 처음 요정을 봤다고 했을 때부터 어떤 의심을 내비치는 말이나 행동도 하지 않았다.

“아델이 그렇다고 말하는데 내가 믿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헥시온이 도리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델의 입술이 조가비처럼 다물렸다.

“내가 말하긴 뭣하지만 허무맹랑한 이야기잖아요.”

“난 믿기지 않는 일들을 눈앞에서 많이 겪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와서 사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요정이 존재했다고 해도 그리 놀랍지 않습니다.”

포크를 들던 헥시온이 아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아델이 헥시온과 허공에서 시선을 마주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한 번에 믿어 줄 줄은 몰랐다. 눈앞에서 본 아델조차 단번에 믿기는 어려웠으니까.

[두 번째 비석까지 온 자네가 부디 선한 인간이길 바라네.

이 숲에 들어온 나는 풀헤임 숲의 조용함이 무척 마음에 들었네.

이곳은 태곳적부터 존재했던 숲으로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미지의 세계였네. 그리고 숲에는 무척이나 오래된 고목이 있었네.

나는 그것을, 결코 손대어서는 안 되었는데…….]

아델이 말끝을 흐리듯 끝이 난 비석을 해독한 내용을 떠올렸다.

역시 훅센라이트의 글이 그렇듯 그의 내용은 초반만 읽어선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비석의 글은 꼭 도입부가 있었다. 그것은 훅센라이트의 개인적인 사견이기도 했으며, 그의 일기처럼 보이기도 했고 마치 참회의 기록처럼 보이기도 했다.

얼핏 봤던 고대어 안에는 ‘베었다’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그러니 아마도 위에 해석한 고목을 베어 낸 것이 아닐까 아델은 추측하고 있었다. 아델이 별생각 없이 버릇처럼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고기는 싫어합니까?”

샐러드나 채소 위주로 식사를 하는 아델을 본 헥시온이 물었다. 아델이 그제야 포크를 움직이던 손을 멈칫했다. 그녀가 멍한 눈으로 입을 벌렸다.

“아. 그러게요.”

자리가 불편한 것도 아니고 싫은 사람이 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버릇처럼 샐러드만 먹는 자신이 조금 우스웠다. 아델이 멍한 눈으로 눈에 띄게 줄어든 샐러드 그릇을 쳐다봤다.

“좋아해요, 고기.”

“많이 드십시오.”

“네.”

아델이 부러 고기 위주로 손을 댔다.

천천히 시작한 식사는 한 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헥시온은 그녀의 식사 속도에 맞춰 제 페이스를 늦췄다.

“영웅 훅센라이트에겐 재미있는 소문도 많이 있는 거 아십니까?”

“마왕을 쓰러뜨렸다던가요?”

“그런 것도 있지만, 그와 초대 황제가 동료였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저도 들어 본 적이 있어요.”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자 헥시온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네.”

그도 우연히 황성의 거대한 도서관에서 우연히 구석에서 발견한 낡고 오래된 책에서 읽은 내용이었다.

“물론 제가 발견한 책의 경우엔 부덕한 내용이라서 누군가 발견하면 분명 불태워 버리겠지만요.”

헥시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건국검 셰인나이트에 대해서 들어 본 적 있습니까?”

“제국의 진정한 주인만이 가질 수 있다는 검이요? 분명히 도둑맞아서 몇백 년도 넘게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소문을 듣긴 했어요.”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소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황제가 되기 위한 조건에는 두 가지가 존재했다. 하나는 태양의 피를 이은 자 중에 승리의 여신이 깃든 자가 황위를 이어받는 것이고, 또 하나는 건국검 셰인나이트에게 인정받아 그 주인이 되어 건국검을 신전 중앙에 꽂는 것이었다.

그러나 건국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셰인나이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으니 당연하게도 지금껏 황위는 첫 번째 방법으로 이어 오곤 했다.

첫 번째 방법은 간단했다. 황위 계승권을 가진 황족끼리 신의 앞에서 검을 겨루어 가장 강한 자가 황위를 이어받는 것이다.

“그게 사실 그 영웅의 검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셰인나이트가 훅센라이트의 것이라는 얘기인가요?”

“건국 초기, 나라를 함께 세우려던 이는 두 명이라는 가설이 있었죠. 하나는 초대 황제고 하나는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춘 훅센라이트라는 설이 있었습니다.”

헥시온이 후식을 내오는 올란도와 시녀들을 힐끗 보며 말을 이었다. 아델이 퍽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호기심이 눈에서 물씬 느껴졌다. 헥시온이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정말요? 그런 가설은 처음 들어요.”

“황성에 관리되지 않은 구석에 박혀 있었던 책에서 읽었지요. 저자도 밝히지 않은 무척 낡은 책에 적혀 있던 내용이니 신빙성은 그리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헥시온이 아델의 눈을 보며 대답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생전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던 영웅이 남기고 간 비석이라니 혹시 숨은 진실을 알 수 있을까 봐 조금 기대됩니다.”

“그러게요.”

아델이 헥시온의 말에 수긍했다. 역사적 사실이든 과거에 있었던 또 하나의 가설이든 아델로선 전혀 몰랐던 이야기가 무척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푸딩이 맛있네요.”

후식으로 나온 커스터드푸딩을 한 입 떠먹으며 아델이 말했다. 디저트라는 걸 제대로 챙겨 먹어 본 적은 없는데, 생각보다 무척 맛있었다. 약간 쌉싸름한 맛이 나는 캐러멜 시럽도 그렇고 샛노란 푸딩도 그렇고 무척 조화로운 맛이었다.

“내 저택에 근무하는 자들은 모두 일류입니다. 부족하지 않을 돈을 주고 있으니 그 정도는 해야지요.”

헥시온의 뻔뻔한 말에 아델이 웃음을 터뜨렸다. 헥시온이 그녀의 웃음에 마주 미소 지었다. 그녀가 문득 몸을 살짝 숙여 팔꿈치를 식탁에 올렸다.

“이렇게 대화를 하면서 식사를 한 건 처음이에요. 속이 더부룩하지 않네요.”

“그러니 많이 드십시오.”

“오늘은 헥시온의 말대로 푹 자야겠지만요.”

아델이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헥시온은 이미 식사를 다 끝낸 후였다. 디저트도 큼직큼직하게 퍼먹어서 그런지 식기가 벌써 텅 비어 있었다.

“식사는 다 하셨습니까?”

“네. 맛있었어요.”

그녀가 대답하곤 뒤따라 일어나는 헥시온을 바라봤다.

“방까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 불편하지 않다면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헥시온이 옅은 미소를 띤 채 냉큼 아델의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올라가시죠.”

그가 식당의 문을 열며 말했다. 아델이 그 뒤를 쫓았다.

선뜻 데려다주겠다고 한 것치고 그는 아델을 바래다주는 내내 별말이 없었다. 흐르는 적막이 그렇다고 또 불편한 것도 아니라서 아델도 이번에는 굳이 억지로 말을 붙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편히 쉬시길.”

“헥시온도요.”

헥시온이 흐린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니다.”

헥시온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방으로 들어가는 아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문이 닫히고 문 너머로 작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가 손을 뻗어 아델의 방문에 손을 얹었다.

‘드디어…….’

머릿속에 든 생각에 헥시온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려고 했던가? 잠시 고민하던 그가 미간을 좁혔다.

“큿…….”

헥시온이 통증을 호소하며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그가 다른 손으로 제 입을 막고 황급히 아델의 문 앞에서 몸을 돌려 중앙 계단으로 향했다.

‘약도 이게 마지막이군.’

그가 마지막 남은 약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아델이 곁에 있을 때뿐이라는 듯, 통증은 그녀가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헥시온을 괴롭혔다. 특히 최근엔 약을 먹어야 하는 주기가 짧아지는 것 같아서 주기를 조절하느라 어느 정도의 통증은 정신력으로 버텨 내고 있었다.

헥시온이 난간을 붙잡으며 힘겹게 계단을 내려왔다. 눈앞이 흐릿하고 몸이 휘청거렸다.

“도련님!”

집 안을 한번 둘러보고 복도에서 나오던 올란도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황급히 헥시온에게 다가왔다. 코앞까지 다가온 올란도를 향해 헥시온이 손을 뻗었다.

“……괜찮, 흣……. 괜찮아. 가서 볼일 봐.”

잔뜩 벌겋게 변한 얼굴로 손을 내저은 헥시온이 올란도를 지나쳤다.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헥시온의 뒤를 쫓아가던 올란도가 발을 동동 굴렀다.

“약은 어디에……?”

“……저리 가, 올란도.”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린 헥시온이 비척거리며 제 방을 향해 꾸역꾸역 발을 내디뎠다.

‘그 약은 좋지 않아.’

헥시온이 생각했다. 먹으면 먹을수록 순간의 고통은 사라지지만, 가면 갈수록 주기가 짧아지고 통증이 더 심해지는 느낌이었다. 숨을 쉬면 폐에 통증이 일고 이미 죽어 버렸다고 생각한 왼쪽 팔은 고통스럽게 울부짖는다. 헥시온은 주변에 제 몸을 부둥켜안고 바닥을 구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 냈다.

“아델…….”

“네?”

제 방문 앞에 선 헥시온이 문손잡이를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아델이 불편하지 않은지, 살펴만 주게.”

“알겠습니다. 하지만 도련님, 일단 도련님께서 먼저…….”

탁-!

올란도의 걱정을 뒤로한 헥시온이 대답 없이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지금 그에겐 올란도의 걱정에 괜찮다고 대답을 해 줄 기력이 없었다.

“크윽…….”

헥시온이 침대 앞에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시트를 꽉 쥐었다. 이불 위에 얼굴을 묻었지만, 신음은 그럼에도 새어 나갔다.

‘위스키…….’

그가 오른손을 더듬거리며 침대 옆에 있는 장식장을 열어 눈에 띄는 술과 고급스러운 세공이 들어간 유리잔을 대충 집어 들었다. 옅은 황금빛을 띠는 술을 유리잔에 콸콸 따른 헥시온이 그것을 입에 털어 넣었다.

얼마나 독한지 뚜껑을 따자마자 술 냄새가 방을 가득 채웠다. 식도를 태우며 넘어가는 액체에 헥시온이 유리잔에 술을 한가득 다시 따랐다. 그것을 또다시 꿀꺽꿀꺽 마셨다. 그렇게 세 번을 반복하고 나서야 그가 벌게진 얼굴로 스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은 채 침대 옆에 기댔다.

침대 옆에 세워 둔 검 끝에 달린, 아델이 선물해 준 술을 꽉 쥐었다. 효능이 다했는지, 이제는 술을 붙잡아도 통증이 옅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헥시온은 고통에 신음할 때마다 그것을 붙잡곤 했다.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허윽…….”

호흡하는 것조차 괴로웠다. 헥시온이 침대 옆 협탁에 술과 유리잔을 거칠게 올리고 침대의 시트를 붙잡으며 침대 위에 올라가 엎드렸다.

“아델…….”

당장에라도 그녀에게 뛰어가고 싶은 충동이 헥시온을 휩쌌다.

그러나 그래선 안 된다. 이제야 그 집에서 벗어난 그녀에게 무거운 책임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착하니까 분명 죄책감 따위를 느낄 거다. 헥시온은 제 욕심과 욕망을 짓밟았다.

지금까지 잘 참아 왔다. 이건 달콤한 사탕의 맛을 알아 버린 어린아이의 마음과 닮아 있었다. 평범하게 숨 쉬고 평범하게 웃을 수 있는 달콤함을 맛본 탓에 드는 욕심이었다.

‘아파…….’

헥시온이 시트를 붙잡은 채 몸을 웅크렸다. 신음이 새어 나가면 혹시나 제 한심한 꼴을 들킬까 봐 일부러 1층으로 방을 옮겼다. 고통이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헥시온이 손을 더듬거렸다. 협탁에 있는 술병을 붙잡은 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유리잔에 술병을 기울였다. 콸콸 쏟아진 액체가 옆으로 조금 흘러넘쳤다. 가득 담긴 술잔을 잡은 헥시온이 몸을 일으켜 그것을 쉼 없이 목으로 넘겼다. 그의 목울대가 몇 차례 일렁였다.

“젠장…….”

헥시온이 눈을 감았다.

통증을 이겨 내는 방법은, 빠르게 잠이 드는 것뿐이다. 그 방법 외에는 정상적인 머리로 이 통증을 버텨 낼 수가 없었다.

‘알약이 한 개밖에 남지 않았기도 하고.’

통증은 심해지는데 점점 황제가 주는 약은 개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내일은 황성으로 들어가야 했다. 아델과의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서도, 제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약을 받아 내기 위해서도.

독한 술기운에 머리가 멍했다. 헥시온이 그대로 무너져 내려 눈을 감았다. 밤만 되면 특히 심해지는 통증이 끔찍했다.

‘또, 그 꿈을 꾸겠군.’

사냥 대회가 열리기 일주일 전부터 꾸기 시작했던 이상한 꿈. 칼럿에 걸린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듯한 기묘한 모습. 몸의 반 이상에 전이되어 더는 사는 것조차 힘겨워 약물과 술에 중독된 처참한 모습.

헥시온의 눈꺼풀이 둔해지는 통증과 함께 점점 내려앉았다. 통증에 신음하던 사내가 곧 몸을 웅크리며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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