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밖으로 나온 아델은 곧장 우물가로 향했다. 다행히 밖은 소란이 한층 진정된 후였다.
‘벨라는 그걸 고새 일러바쳤네.’
기대도 안 했지만, 안 했던 기대마저 바닥으로 처박혔다.
아델이 아주 천천히 바깥쪽에선 잘 보이지 않는 우물가 옆에 기댔다. 그녀는 메모해 왔던 노트를 꺼내 펜을 들었다. 그러고는 달빛에 의지해 고대어를 적어 온 노트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언젠가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길 바란다. 이것은 내가 숲을 탐사하면서 남긴 이야기다. 이 석판은 소위 ‘안전지대’라고 불리는 시작점을 처음으로 숲 전체에 총 12개가 존재한다.]
이게 전부……?
너무 도입 부분에서 끝난 거 아니야?
아델이 여러 차례 고대어를 다시 읽었지만, 그녀가 적어 온 부분은 저게 전부였다.
“궁금하네…….”
그녀가 바람에 흩어질 것 같은 작은 목소리를 뱉었다.
‘또 주제 파악을 할 시간이 필요한 거라면 계속 그렇게 해 보거라.’
그럼에도 머릿속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져 나가질 않았다. 애써 다른 쪽으로 생각을 돌리려던 아델은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괜찮아.”
노트를 손으로 꽉 쥔 그녀가 그것으로 얼굴을 가렸다.
“괜찮아, 아델.”
아무도 불러 주는 일 없더라도, 그녀는 아델이었다. 주먹을 휘두르고 어른의 살을 이로 물어뜯는 것도 서슴지 않던 슬럼가의 아델. 설령 지금은, 카레나 비프타라는 이름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달빛이 얼굴을 가린 아델의 위로 내려앉았다.
* * *
‘질려.’
야영도 하루 이틀이지 닷새째가 되어 가니 질렸다. 사냥 대회가 막바지로 다가갈수록 펠리스와 비프타 공작의 얼굴을 보는 것도 힘들어졌다.
“정말 예전이랑 다를 게 없어.”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죽기 전에 겪었던 3년간의 일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서 가끔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알고 있는 대로 흘러가는 삶은 아델에게 짙은 기시감을 선사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아델은 더욱더 사냥 대회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녀가 나갈 필요가 있는 것은 시상식 때뿐이었다.
그런고로 아델은 요즘 눈만 뜨면 비석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리기에 바빴다. 무슨 비석인가 했더니 숲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비석이었다.
어떤 방향으로 숲을 훑으면 되는지, 비석이 있는 곳에 서식하는 식물이나 약초, 독초, 몬스터와 동물에 대해서 자세히 적어 뒀다는 것과 주의사항이 적혀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네.’
남은 건 겨우 세 글자다.
오랜만에 보는 고대어라 처음에는 더듬더듬 해독했지만, 지금은 해독하는 시간이 반으로 확 줄어들었다. 하다 보니 비슷한 글자도 많고 익숙한 문장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뒤로 갈수록 술술 해독할 수 있었다. 비석 하나를 통째로 해독하는 데 오늘로 닷새.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비석에 기대어 고개를 한껏 젖혀야 했을 때와는 달리 이제는 바닥에 앉아 몸을 한껏 굽혀야 할 정도까지 왔다.
“술을 선물해 놓고 매번 얼굴도 비추지 않기에 어디서 뭘 하나 했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린 목소리에 아델의 몸이 파드득 떨리며 튕겨 올랐다. 그녀가 쥐고 있던 종이가 바닥으로 우수수 쏟아졌다. 떠오르는 공포에 아델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당신은……?”
꼿꼿하게 몸을 긴장했던 아델이 천천히 한숨을 뱉었다. 그녀가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앞에 있는 검은 갑주의 사내를 쳐다봤다.
“놀라게 해 드렸다면 미안합니다.”
“아니, 괜찮아요. 근데 경께선 사냥 대회 중이 아니던가요?”
“그 사냥 대회는 오늘이 끝이고 말이죠.”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끝내긴 이르지 않나요?”
“매번 사냥 대회 출발하기 전 영애께서 숲으로 들어가는 게 보여서 호기심이 더 컸나 봅니다.”
며칠 조급하게 숲으로 들어왔더니 그새 들킨 모양이다. 아델이 말을 잃고 입을 닫았다.
그가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왔다. 걸을 때마다 갑옷이 부딪쳐 철컥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델이 앉아 있던 자리까지 다가온 검은 갑주의 사내가 허리를 굽혀 종이를 주웠다.
“그건……!”
아델이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뻗었지만, 사내가 조금 더 빨랐다.
“고대어를 해독하시는군요.”
투구에 뚫린 가로로 긴 틈 사이로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제야 그의 눈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눈동자까지 검은색일 줄이야.’
새까만 색을 좋아할 만했다. 이러다 머리카락까지 새까만 색이면 솔직히 그를 검은색의 수호신과 같은 존재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기도 했다.
“흥미롭군요.”
“저도요.”
내 대답에 사내의 시선이 곧장 아델의 얼굴을 향했다.
“내가 흥미로운가요?”
“저 하나 보겠다고 영광스러운 시상대에 올라갈 기회를 발로 차 버린 게 흥미롭다면 흥미롭네요.”
“아. 영애께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는 열심히 했습니다.”
사내 특유의 방관자처럼 들리는 듯한 말투였다. 예전에도 그러더니 여전히 뭔가 별 관심 없다는 목소리였다. 사내가 아델의 손에 다시 종이와 펜을 쥐여 줬다. 조금도 흠집 나지 않은 것을 보아 힘을 줘 종이를 잡진 않은 모양이다.
아델이 조금 떨떠름한 기색으로 종이를 받아 쥐었다.
“방해했다면 사과드리죠. 하던 일 하십시오.”
사내는 그렇게 말하곤 몇 걸음 뒤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섰다. 그가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던 아델의 표정에 당황스러움이 서렸다.
“뭐 하세요?”
“비석을 구경할까 합니다.”
“……네?”
“숲 안쪽에도 이와 비슷한 것들이 몇 개 보이더니 고대어가 적혀 있는 비석일 줄은 몰랐습니다.”
사내의 말을 들으며 아델이 조심스럽게 다시 바닥에 앉았다.
다행히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델이 몸을 숙여 고대어를 천천히 옮겨 적었다. 푹신한 땅이 불편해서 비석에 종이를 대고 옮겨 적어야 하긴 했지만.
“이 비석, 지도에 표시되어 있던데요. 비석을 연구한 게 아니었나요?”
“아쉽게도요. 그저 방대한 숲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한 위치 표시를 해 둔 것뿐입니다.”
“그런 용도도 되겠네요.”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아델이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손과 눈은 쉴 새 없이 종이와 비석을 왔다 갔다 했다.
“영애께선 비프타 가문의 막내딸, 이시죠?”
“……네.”
아델이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석에 있는 고대어를 다 옮겨 적은 아델이 슬쩍 뒤를 돌았다. 등에 꽂히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적나라하게 느껴져서 더 부담스러웠다.
“비석 구경을 굳이 여기서 해야 하나요? 안쪽에도 많다면서요?”
“그렇군요.”
사내가 순순히 수긍했다.
“사실 비석 구경은 핑계입니다.”
“네?”
“당신이 하는 일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아, 네…….”
아델은 오늘의 평화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무척이나 글렀다. 서글플 정도로 글렀다. 그녀가 보이지 않게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불편합니까?”
“음…….”
아니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눈앞의 남자는 거짓말을 하면 어쩐지 간파해 낼 것 같았다. 말투는 정중한데 묘하게 어조가 명령 같은 느낌이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사내는 곧 입을 다물었다.
그가 이윽고 고개를 젓는다.
“아니면, 내가 다른 비석이 있는 곳에 데려다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비프타 공작 가문은 적이 많다. 아델도 이곳이 기사들이 우후죽순 넘쳐 나는 야영지가 아니었다면 굳이 혼자서 다니는 위험을 감행하지 않았을 거다. 수도를 다녀도 사람이 적은 곳으론 결코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에겐 이곳을 나가기 전, 그녀를 지켜 줄 수단이 필요했다.
‘왜?’
목까지 차오른 말을 아델이 애써 눌러 삼켰다.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사내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건 아쉽군요. 그럼 해독한 것을 읽어 주실 수 있습니까?”
“아직 해독하지 못했어요. 옮겨 적은 것뿐이라서.”
“지금까지 해독한 거라도 난 좋습니다.”
“이곳 첫 번째 비석을 기준으로 총 열두 개의 비석이 숲 곳곳에 퍼져 있고 그 비석에는 근처 숲의 생태에 대해서 적어 놨다는 것 정도요.”
아델이 짧게 요약해 대답했다.
날카롭게 쳐다보는 시선은 털을 바짝 세운 새끼 고양이가 경계하는 듯했다. 사내가 그녀를 요모조모 살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정체를 아는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그게 전부입니까?”
“숲의 가장 깊은 곳에는 정령의 샘이 있다든가 고대 종족이 숨겨 놓은 보물 창고가 있으니 보물찾기를 해도 충분히 즐거울 거라든가 드워프의 마을로 향하는 비밀의 문이 숨겨져 있다거나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였어요.”
해독하면서 깨달은 것은 아마도 이 비석을 만든 사람은 무척이나 심심했던 모양이라는 것 정도다. 그래도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오도록 유쾌하게 적은 글이 마음에 들어 끝까지 해독했다. 기회만 된다면 숲 안쪽까지 조사해 보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생각은 어디까지나 생각에만 그쳐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무채색인 듯했던 목소리에 색이 물들 듯 그의 말에서 감정이 느껴졌다. 엷은 감정이었지만 타인의 감정에 민감한 아델에겐 충분히 적나라했다.
“혹시 폐가 되지 않는다면 마지막 문장도 해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척 궁금합니다.”
“그…….”
이제 돌아갈 생각이라고 말하려던 아델이 입을 닫았다. 사실 수십 명의 귀찮은 사람보단 한 명의 조용한 사람이 낫다. 물론 그녀만의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공간에 사내는 침입자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녀는 기사에게 돈을 주고 나온 것이고 이 숲을 그녀가 전세를 낸 것도 아니다.
“조용히 계셔 주신다고 약속하면요.”
아델이 한 발짝 물러났다.
“맹세하지요.”
사내가 손을 들어 가볍게 가슴 위에 올렸다.
챙-.
철이 부딪치며 작은 울림을 냈다. 그가 그 상태로 허리를 살짝 굽힌다. 참으로 부담스러운 맹세였다.
종이에 옮겨 적은 고대어를 해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특히나 마지막에 있는 단어들은 이미 위에서 한두 번씩 나왔던 단어들이었다.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천천히 해석을 마친 아델이 종이 아래쪽에 해독한 문장을 적기 시작했다.
비석 위에서도 유려하게 움직이는 펜대에 그가 시선을 고정했다. 망설임 없이 움직이는 펜대는 틀릴 리 없다는 그녀의 자부심을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다 했어요.”
“빠르군요.”
그렇게 말한 사내가 회중시계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가 시간을 확인하더니 다시 뚜껑을 닫는다.
“다섯 줄에 15분.”
“시간을 쟀어요?”
“호기심입니다.”
그가 보고 있던 회중시계를 갑옷 안쪽에 넣으며 말했다. 그의 허리춤에는 아델이 첫날 달아 줬던 술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아델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그를 보다가 종이를 바라봤다. 아델이 팔을 뻗어 종이를 그에게 넘기려고 했지만, 그는 종이를 받지 않았다. 도리어 제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읽어 주십…….”
입술을 열던 그가 말을 멈춘 채 아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사내가 천천히 손을 뻗어 차가운 철로 된 장갑으로 아델의 볼을 어루만졌다.
“볼이 왜 이럽니까?”
“네?”
“가라앉긴 했지만, 맞은 흔적이 있습니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왼팔 대신 입으로 오른쪽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굳은살이 박인 커다란 손이 아델의 볼에 닿았다. 아직 조금 따끔한 기운이 남아 있어서 아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분명 그날 무사히 구해 드렸던 것 같은데…… 이건 뭐죠?”
어딘가 불쾌한 듯이 낮아진 목소리에 아델이 입을 다물었다.
“……그, 해독한 것을 읽어 드릴게요.”
“제가 읽겠습니다.”
“해독한 사람 본인이 읽어야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 것 같아요.”
아델은 고집을 부렸다. 이런 상처를 들켰다는 사실이 어쩐지 부끄러워서 아델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건, 제가 잘못 넘어져서 다친 것뿐이에요.”
그는 가만히 아델을 바라봤다. 잠시 후, 투구 안으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렇군요. 제가 너무 확대 해석을 한 모양입니다.”
사내는 모른 척 물러났다.
아델은 부끄러움에 달아오른 표정을 갈무리하며 종이를 다시 제 쪽으로 당겼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내용을 살폈다. 겨우 다섯 줄이긴 하지만, 사내의 앞에 서니 발표회나 시를 낭독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무척이나 긴장된다는 이야기다.
그를 힐끗 쳐다 본 아델은 해독한 글을 눈으로 따라가며 입을 열었다.
“이것을 끝까지 해독한 자는 내가 쓴 내용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숲 전체를 탐방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녀가 사내를 힐끗 쳐다보자 그는 시선을 느낀 듯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이명을 얻었지만, 가장 즐거웠던 것은 내가 아는 지식을 이 비석에 적어 넣을 때였다.”
무슨 이명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아 몇 번이고 다시 살펴보았지만, 어쨌든 해독은 제대로 한 듯했다. 잠시 말을 멈췄던 아델이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비석을 전부 찾으면 이 글을 보고 있는 그대는 분명 최고의 이야기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동화가 정말 동화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거나…….”
아델이 여운을 남기듯 말을 마쳤다. 그녀가 여운을 남긴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느낌으로 글이 적혀 있었다.
“신기한 비석이군요.”
“아직 더 있어요.”
“그렇습니까?”
그의 감탄 섞인 의문에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에 다른 글씨보다 조금 더 작게 팬 글씨가 있었다.
“덧붙이자면 숲의 주인을 화나게 하지 마라. 성격이 괴팍하니 건드리지 않기를 추천한다.”
혹시 비석을 만든 것이 동화 작가는 아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한 편의 소설을 보는 기분이었다.
“누가 적었는지는 쓰여 있지 않은가요?”
“아랫부분이 일부 부서졌어요. 깨진 지 좀 된 것 같아요. 아마 그 부분에 이름을 써 뒀던 것 같은데…….”
만약 비석을 만든 자가 학자였다면 그가 쓴 책이라도 사서 보고 싶을 정도였다. 첫 번째 비석이라 그런지 호기심만 왕성하게 자극했다. 마치 다음 권이 궁금해지는 소설처럼. 아델도 가능하다면 두 번째, 세 번째 비석을 찾아 해독을 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그럴 여유나 시간, 능력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혹시 모르지. 언젠가 또 기회가 있을지도.’
그 언제가 언제냐는 기약은 없겠지만. 아델은 천천히 고개를 젖혔다. 아직 하늘이 밝았다. 오늘이 대회의 마지막 날이고 내일은 시상식과 함께 큰 연회가 열릴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날은 이른 새벽부터 다시 수도로 출발하게 될 테지.
‘숲의 주인은 대체 뭘까?’
추신으로까지 적어 놓은 걸 보면 뭔가가 살기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동화 같은 걸 적어 놓은 것뿐일까?
“옛날엔 동화를 석판에…… 적지는 않았겠죠.”
말하는 순간,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델은 내뱉던 말을 냉큼 수정했다. 설령 석판에 적었다고 해도 저렇게 큰 비석을 만들었을 리는 없었다.
“지금껏 저 역시 그냥 길잡이 정도로만 생각했기에 들은 내용이 놀랍기만 하군요.”
“저는 지도에 표시되어 있기에 고대의 유물쯤 된다고 생각했어요.”
“고대에 만들어진 비석이니 고대의 유물도 맞겠지요.”
사내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수긍했다.
모든 정황을 살펴봤을 때 그녀가 추측한 것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 여겨졌다. 그도 이곳에 온 건 겨우 두 번째였지만, 비석의 정체를 알게 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두 사람의 사이로 또다시 적막이 찾아들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부푼 아델의 볼로 향해 있다.
“다치지 마십시오, 영애.”
“……실수였어요. 조심해야죠.”
아델이 떨리는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델이 검은 갑주의 그를 찾았던 이유는 단순히 술을 전해 주기 위함이었다. 과거에 아무에게도 술을 받지 못했던 그가 마치 자신처럼, ‘불쌍한 영애’ 따위의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렇게 계속 엮이게 될 줄은 몰랐어.’
사실은 조금 후회 중이었다.
굳이 왜 그에게 술을 줬을까?
아델은 해독한 종이를 소맷자락에 넣고 나머지는 펜과 함께 손에 챙겨 들었다. 슬슬 막사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해독도 다 끝났는데 숲에서 멀뚱거리며 있을 필요도 없고.
“이곳에 또 오고 싶다면 저와 한 달에 두 번 정도 이 숲에 오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네? 아뇨. 괜찮아요.”
아델은 사내의 물음에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얼굴밖에…… 아니,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무슨 뜬금없이 숲 속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잡는단 말인가? 아델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자 사내는 조용해졌다.
“너무하십니다.”
“칭찬으로 들을게요.”
아델이 그에 대해 아는 정보라곤 이번 사냥 대회에서 우승할 것이라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그나마도 오늘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으니 그 사실도 있으나 마나 한 정보가 됐다.
3년간의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뭐 무척 대단하거나 놀라운 힘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사교계에서 열리는 대부분의 파티에 참석했던 터라 이런저런 정보는 많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아델을 3년 후에도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줄 만큼 쓸모가 있지는 않았다. 아델은 다시 뒷골목으로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3년 뒤의 죽음을 막고, 공작저를 떠나고 싶었다. 이제는 새로운 자신만의 인생을 살고 싶어졌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그 정략결혼이 진행되는 것을 막고, 공작저를 떠나서도 잘 살 수 있도록 힘을 길러야 했다. 그녀는 새로운 미래에 위험 요소가 될 법한 것들은 최대한 배제하고 싶었다.
‘이 사람은 좀 특이한 기사지만.’
어쨌든 사냥 대회의 이례적인 우승자였던 만큼 그는 미래에 뭔가 높은 자리에 올라갈 확률이 있었고, 그녀는 더 이상 귀족들과 얽히는 것은 사양이었다.
“마음이 아프네요.”
“경께서는 거짓말도 뻔뻔히 잘하시네요.”
아델은 피부로 느껴지는 느낌을 그대로 읊었다.
사람의 감정은 눈빛이나 몸짓, 혹은 주변을 도는 분위기로 어떻게든 밖에 드러나게 되어 있다. 아델은 그 감정의 파편에 무척이나 민감한 편이었다.
그건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감정을 숨기는 것이 능숙한 것처럼 보였다.
“네, 솔직히 비석의 다음 내용이 궁금합니다.”
긴가 민가 하지만, 이 말도 사실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거짓말이네요.”
“음. 반입니다.”
“네?”
“거짓말 반, 진심 반이라는 말입니다.”
사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숲의 출구에 다다랐다. 아델은 대화를 끝맺기 위해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자신을 향해 몸을 돌리자 사내도 걸음을 멈추었다.
“저는 경께서 왜 제게 흥미가 있으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술은 원래 마음이 있는 상대에게 주는 게 아닙니까? 저는 그래서 영애가 저에게 주신 줄 알았는데요.”
“오해할까 봐 말씀드리자면, 마땅히 드릴 사람이 없어서 경에게 드린 거예요.”
아델은 사내에게 조금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더 이상 카레나 비프타로서 누군가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카레나 비프타라는 이름은 벗어 던져야 하는 허물에 지나지 않았다. 떠나는 것을 망설이게 만들 관계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미련을 갖고 싶지도 않았다.
“저런.”
아델은 문득 남자가 투구 밑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럼 얘기는 다 된 것으로 알겠습니다. 이만 들어가 볼게요.”
아델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곤 몸을 돌렸다.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영애.”
“네?”
아델이 그의 부름에 다시 몸을 반만 비스듬히 돌렸다.
“이미 오해를 해 버렸으면 어떡합니까?”
“……네?”
아델이 황당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미 오해를 해 버렸습니다. 기대감은 멋대로 부풀었는데, 이렇게 차일 줄은 몰랐군요.”
“이상한 소리를 참신하게 하시네요. 그냥 좀 외로워 보이셔서 드린 것뿐이에요.”
“연인이 없는 사내란 외로운 법이죠.”
그런 쪽의 외로움이 아니야!
순간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다. 억측의 황당하고 뻔뻔함에 절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분명히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내뱉는 말이 뻔뻔하다.
아델이 씰룩이는 입술을 애써 손가락으로 누르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아델이 여전히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대답했다. 조금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오해를 해 버렸다니. 이건 어딜, 어떻게, 누가 봐도 거짓말이 아닌가! 아델이 드물게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게 됐다.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을 그가 가만히 살폈다.
“저는 또 영애께서 제게 마음이 있으신 줄 알고 설렜는데 말이지요.”
“그때 분명히 답례라고도 했는데요.”
“그랬던가요? 아쉽네요.”
“경께서도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는 걸 아시잖아요.”
“하지만 보통 검은색으로 술은 만들지 않지 않습니까? 저는 절 겨냥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넘겨짚은 모양이군요.”
솔직히 찔렸다.
아델이 그 찔렸다는 사실을 표정에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제가 분명히 경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것도 그렇군요.”
사내는 순순히 인정했다. 훌쩍 물러난 그의 모습에 아델이 의심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다시 대화를 시작한 건 남자 쪽이었다.
“혹시 이 술, 어디서 난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남자가 가늘어진 눈으로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가끔 아뜰리에에 가면 술의 완성품도 팔기는 하지만, 보통의 영애는 술을 직접 만든답니다.”
“직접 만드셨다는 말입니까?”
사내가 다시금 물었다.
그로선 확실히 하고 싶었다. 술을 힘껏 쥐면 고통이 사그라든다. 술이 있다면 약 없이도 하루 이틀 정도는 버틸 만해졌다.
‘몸 상태가 점점 호전되는 것 같기도 했지.’
의원에게 검사를 받을 순 없으니 확신은 없다.
제 착각일 수도 있다. 그러니 그는 신중해지고 싶었다.
“네.”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술의 재료는 어디서……?”
“수도에 있는 적당한 가게에서 샀어요…….”
“근데 왜 자꾸 물어보시나요? 이상한 저주 같은 건 걸지 않았으니 걱정 마세요. 혹시 걱정된다면 그냥 다시 돌려주셔도…….”
아델이 손을 뻗자 그가 냉큼 뒤로 물러났다. 그 반사 신경이 어찌나 빠른지 아델의 눈이 커졌다. 그도 자신의 반사적인 행동에 당황한 듯 눈을 도르륵 굴리더니 이내 입술을 달싹였다.
“아닙니다. 저주라기보단…….”
사내가 말끝을 흐렸다. 저주라기보단 축복에 가깝다. 한계까지 참았다가 약을 비축해 둘 수도 있고.
“술을 받은 뒤부터 좋은 꿈을 꾸게 돼서 여쭌 것뿐입니다. 불쾌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래요……?”
좋은 의미라면 다행이지만. 술이 있다고 좋은 꿈을 꾸게 되나? 생각보다 마음에 든 거라면 다행이었다.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혹시 다른 비석을 해독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 대가로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네요.”
아델이 마저 대답했다.
아델의 대답에 사내가 고민하는 듯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은빛 갑주처럼 눈이 부시진 않지만 역시 갑옷이라 그런지 햇빛을 받은 검은 갑주가 반짝였다.
“난 강합니다. 내가 당신을 지켜도 어렵습니까?”
“그렇게 궁금하시면 다른 고고학자를 구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굳이 제가 저 비석을 해독할 필요는 없잖아요.”
“모험가 집단은 생각보다 귀찮고 이 숲은 안쪽이 위험해서 흔쾌히 와 주지 않을 겁니다.”
매정하게 딱 잘라 내는 목소리가 권태롭다. 끈질긴 타입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저도 위험한 건 싫다니까요.”
“영애라면 내가 지킬 수 있습니다.”
“……뭘 믿고요?”
“증거가 필요하다면 이번 사냥 대회의 우승은 어떻습니까?”
그러고 보니 지금쯤 우승을 하기 위해서 한창 사냥을 하고 있어야 하지 않던가? 하루를 통째로 날렸으니 우승은 이제 날아간 게 분명했다.
“그러기엔 제가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큰 것 같아요.”
“그럼, 제가 대회에서 우승한다면…… 제가 원할 때 한 번만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요?”
“네. 당신의 하루를 제게 주실 수 있겠습니까?”
퍽 진지한 목소리로 사내가 물었다.
아델이 잠시 고민하듯 고개를 젖혀 하늘을 쳐다봤다. 지금 뒤늦게 참가한다고 해도 길어야 한 시간이다. 다른 이들이 온종일 사냥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솔직히 무리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아침 9시부터 5시까지 무려 여덟 시간의 공백이다. 아무리 전날까지 열심히 했다고 해도 오늘의 공백을 메우긴 쉽지 않을 거다.
‘귀찮고…….’
그냥 알겠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그것도 좋겠네요.”
“약속하신 겁니다.”
“네.”
아델의 대답에 순간 그녀는 사내가 웃었다고 생각했다. 투구로 가려져 표정까지는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를 살짝 굽히며 먼저 숲을 빠져나갔다.
‘뭔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은데…….’
그러나 말을 되돌리기에 그는 이미 아델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 * *
“이번 우승자는 이미 정해졌군.”
“도대체 어느 집안의 기사야?”
“난 그 시체의 산을 도저히 눈 뜨고 볼 수가 없더군.”
식사 시간이 다가오기 전에 잠시 물을 뜨러 나왔던 아델의 귓가에 기사들의 대화가 들렸다.
‘한 시간……?’
묘하게 거슬리는 시간이었다. 아델이 사내에게 거론한 시간이 그 정도쯤 됐기 때문이다. 뒤가 찜찜했다. 물을 뜬 아델이 떨떠름한 표정과 걸음으로 막사에 돌아왔다.
안에는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막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가족끼리의 저녁 식사였다. 저택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래도 샐러드만 먹지 않기 위해서 아델은 꽤 노력하고 있었다. 눈치 보지 않고 음식을 먹기 위해서.
“앉거라.”
비프타 공작의 말에 아델이 묵묵히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둥근 식탁은 넷이 앉으니 꽉 찼다. 식탁 가득 식사가 차려졌다.
양념과 각종 고급스러운 향신료를 한껏 발라 잘 구워진 송아지의 앞다리 살이 노릇노릇하게 식탁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그 앞엔 고기와 당근 채소 등이 듬뿍 들어간 스튜가 놓여 있었고, 물기가 또르르 흐르는 과일과 바삭하게 구운 바게트를 빵칼로 자른 것이 작은 접시를 각각 한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쪽에는 큼직하게 자른 버터가 버터나이프와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발라 먹으면 분명 입 안 가득 고소함이 퍼질 거다.
각각 접시에는 잘 구운 계란 프라이와 두툼한 베이컨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옆에 반짝반짝 윤이 나는 와인 잔에는 제법 알코올의 향이 강한 독한 과실주가 있었다. 아델로선 못 먹진 않지만,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종류였다.
코를 자극하는 냄새부터 예쁘게 플레이팅한 음식은 시선마저 사로잡았다. 야영지에서도 호화롭게 차린 식사가 제법 놀라울 정도였다.
‘가축을 끌고 온 이유가 있었군.’
요 며칠 나온 식사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풍성했다.
‘사냥 대회 마지막 날이어서 그런가?’
비프타 공작이 먼저 식기를 들자 공작 부인과 펠리스가 뒤를 따랐다. 아델은 그들보다 한 박자 늦게 식기를 손에 쥐었다.
“요즘 낮에 계속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구나.”
“개인적으로 일이 좀 있었습니다.”
비프타 공작의 물음에 아델이 차분히 대답했다. 대답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러면 정말 유치한 반항 따위로 취급될 것 같았다. 아델이 속으로 한숨을 쉬며 식기를 움직였다.
가장 눈에 가는 건 반숙으로 잘 구운 계란 프라이였다. 반을 가르자 노른자가 톡 하고 터져 내용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델이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먹고 싶다고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지만 신선한 달걀은 무척이나 고소했다.
어릴 적, 운 좋게 주운 달걀을 먹었다가 크게 앓았던 때를 떠올리는 것은 지금도 끔찍했지만.
“개인적인 일?”
“네.”
“무슨 일이지?”
“사생활까지 말씀드리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처신은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델의 에둘러 대답했다.
공작의 미간이 좁아졌다. 식탁의 분위기가 금세 무거워졌다.
아델은 묵묵히 음식을 씹어 삼켰다. 주변의 분위기가 피부로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입 안에서 느껴지는 맛이 점점 죽어 가는 느낌이다. 잘 구운 송아지의 앞다리 살에 묻은 양념이 무척 달콤하고 짭조름했는데 차가워진 분위기에 순식간에 맛을 잃었다.
‘내가 말만 하면 이러네.’
생각한 아델이 식기를 꽉 쥐었다. 그러나 사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그의 말에 제대로 대답을 해 볼까 싶은 마음도 동시에 들었다. 집을 나가고 싶다는 마음도 다른 일을 해 보고 싶다는 마음에도 한 치의 거짓도 없다.
송아지 앞다리 살을 조금씩 잘라 넣던 아델이 결국 나이프를 손에서 놨다. 그녀가 그나마 소화가 잘되는 채소와 과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 그 검은 갑옷을 입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실력이 보통이 아니던데.”
펠리스가 던진 질문에 아델이 귀를 쫑긋 세웠다. 보통 그들의 대화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듣는 편인데 이번만큼은 그것이 어려웠다. 아델로서도 무척이나, 무척이나 궁금했으니까.
수프 그릇에 박을 듯 푹 숙이고 있던 아델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슬쩍 들고 비프타 공작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적으로 두면 안 될 사람이다. 심기를 거스르지 말거라.”
“친구로 두라는 겁니까?”
“아니. 넌 가까이하지 않도록 해라.”
비프타 공작이 충고하듯 덧붙였다.
그래서 그게 누군데?
아델이 목까지 차오른 질문을 꾹꾹 눌러 담았다. 궁금했다. 도대체 그 정체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녀가 애꿎은 사과를 포크로 찔러 꾹꾹 씹어 삼켰다.
무의식중에 비프타 공작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던지, 공작이 시선을 느끼고 아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네 머리 장식에 있던 술과 그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술이 같던데…….”
펠리스가 말했다.
하여튼 예전부터 눈치만 빠르다. 콰른 비프타, 그 망나니 새끼가 아델을 괴롭힐 때도 참지 못할 지경이 되면 그가 말없이 눈치채곤 놈에게 한마디씩 해 주곤 했다. 덕분에 어떻게든 지금껏 버텨 오긴 했다. 아니었으면 그 전에 목 놓아 울면서 다 때려치웠을지도 모르겠다.
펠리스가 띄운 운에 공작 부인마저 아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델이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그들에게 제대로 된 시선을 받아본 게 얼마 만이지?
“네가 줬나?”
운을 띄운 펠리스가 아델에게 물었다.
아델이 입술을 뻐끔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숨길 일도 아니고 숨겨서 될 일도 아니다. 어차피 그가 말한 대로 뻔히 증거가 머리 장식에 달려 있는데.
‘첫날 빼곤 어차피 달고 다니지도 않았지만.’
첫날 본 걸 용케도 기억한 모양이었다. 펠리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델이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사과를 찔러 입에 넣었다.
“그에게 마음이 있느냐?”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제대로 대답해 주고 싶지도 않아서 조금 심술궂게 대답했다. 사실 다른 의미의 관심이 있기는 했다. 내기에서 지면 어쩌나 싶은 쪽의 관심.
‘구해 주기도 했고.’
공포감에 질려 있던 자신을 단단하게 끌어안아 줬던 그 품을, 쉽게 잊지는 못할 듯했다.
‘따뜻했고.’
생각해 보면 차가운 철로 된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어디가 그렇게 따뜻했던 걸까? 고민에 빠져 있던 아델이 퍼뜩 얼굴을 들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델이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아델의 퉁명스러운 말에 불쾌한 표정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비프타 공작은 이상하게도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불쾌한 듯, 혹은 혐오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기는 했지만, 마치 기분이 좋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뭐지?’
착각인가? 아델이 생각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당연하게도, 그 말은 볼 것도 없이 절대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또 저렇게 신경 쓰고 있는 걸 보니 마음이 비틀렸다. 애초에 의리로 술을 주는 사람도 분명히 있는데 왜 자꾸 제 마음을 확인하려고 드는지…….
실제로 영애 중에는 괜찮다 싶은 기사들에게 술을 여러 개 만들어 가져다주는 사람도 있었다. 솔직히 그게 전부 호감의 표시는 아닐 것 아닌가?
“네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처음 보는군. 술을 줄 만큼 관심이 있는 건가?”
이번엔 펠리스가 덧붙였다.
“……제가-.”
아델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보는 눈이 좀 있고 답답해서 그런지 막사의 입구는 열려 있었다. 입을 벌렸던 아델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아니. 부끄러워서 이유까지 설명하고 싶진 않아요. 오라버니께선 이해해 주시겠죠?”
혹여나 그녀가 그를 좋아해서 술을 줬든 다른 의미가 있어서 줬든 적어도 펠리스 놈이 신경 쓸 일은 아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날 대체 왜 죽였는지 물어보고 싶네.’
비프타 공작은 아주 가끔이지만 아델을 칭찬하곤 했다. 그러니까 아델이 관심에 목말라 포기하기 직전이 되면 한 번씩 그녀를 칭찬했다. 물을 먹지 못해 갈증에 괴로워하는 아이에게 비웃듯 한 모금의 물을 내어주듯이.
그것이 일부러였다는 것을, 자신을 손아귀에서 쥐락펴락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도 관심을 두는 듯하지만, 그건 아델을 위해서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다. 그저 애정을 갈망하는 아델을 길들이기 위한 공작의 방법이었을 거다.
‘이젠 안 속지.’
그렇게 당했는데 또 속으면 그땐 정말 영혼째로 소각처리나 시켰으면 했다.
그런 건 둘째로 치더라도 이렇게 제 생각을 고스란히 표현해 본 것은 오랜만이다. 지독히도 오랜만이라서 조금 낯설 지경이다. 열 살 이후로는 기억에도 없는 것 같다. 열 살 이전에는 살기 위해서 그녀는 제 키보다 두 배는 더 큰 성인 남자에게도 주먹을 쥐고 덤벼들었다.
아델이 과일을 한 입 더 베어 물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검은 기사에 대해선 솔직히 궁금한데.’
아델이 잠시 망설였다. 만약, 예전이라면 식사 자리에서 그녀가 먼저 입을 여는 일은 없었을 거다. 망설이던 아델이 입을 열었다.
“각하.”
크지 않은 목소리의 부름에도 비프타 공작의 고개가 들렸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델이 마음을 굳게 먹었다고 해도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겨우, 질문을 한 번 하는 것조차 이렇게 긴장이 될 줄이야. 먹은 게 전부 얹힐 거 같다.
“한 가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괜찮을까요?”
물어볼 곳이 여기밖에 없다는 게 한이라면 한이지만.
비프타 공작이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은 믿을 만한 분이신가요?”
아델이 긴장에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아델은 그 남자와 내기를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녀가 질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든다. 그리고 그녀의 불안은 대개 들어맞는 편이었다.
결국, 아델은 그 사내의 정보를 잘 알고 있는 듯한 공작에게 질문함으로써 불안을 잠재워 보려고 했다.
“그 사람?”
“검은 갑주를 입으신 분이요.”
“어떤 의미에서 묻는 말인지 모르겠다.”
잠시 고민하듯 미간을 찡그린 비프타 공작이 턱을 몇 번 쓸며 대답했다. 아델이 잠시 검은 갑주의 사내를 떠올렸다가 다시 입을 연다.
“둘이 있어도 괜찮은 사람인가 해서요. 해를 끼치거나 위험한 부류의 사람은 아닐까 해서요.”
“네가 이렇게 질문하는 건 처음 보는구나.”
아델의 몸이 움찔 떨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려던 아델이 탁자 밑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제야 다짐하고 질문을 던지면서도 스스로가 얼마나 위축되어 있었는지 깨달았다.
“새삼스러운 말씀을 하시네요. 언제나 제가 낄 틈은 없었잖아요.”
아델이 입가에 띤 웃음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더는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열 살 때의 뒷골목을 전전하던 악동으로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아델의 말에 비프타 공작이 퍽 못마땅한 듯 미간을 좁혔지만, 순순히 입을 열어 왔다.
“그런 종류라면 문제는 없을 거다. 어차피 네 경우에는…….”
비프타 공작이 말을 하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곤 느릿하게 아델을 한번 보더니 이내 입을 닫았다.
“네?”
“아니다. 그는 심기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보통은 온화한 편이니까.”
아델의 미간이 좁아졌다.
‘내 경우에는 문제가 없다고?’
의미심장한 말이다. 또한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펠리스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자신의 경우엔 문제가 없다?
‘성별의 차이인가?’
성별로 차별할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아델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델이 궁금증을 삼켜 낸 채 담담히 대답했다. 적이 많은 비프타 공작 본인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위험한 쪽의 사람은 아니라는 거다.
경계를 조금 풀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에 관해 꼬치꼬치 캐물은 것을 제외하면 특별히 이상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안전한 사람이라는 말은 하질 않았네.’
아델이 노련하게 비프타 공작의 말을 파악했다. 심기만 건드리지 말라는 건 웬만해선 성질 긁지 말라는 얘기다. 오늘 같은 대화에선 크게 기분 나쁜 기색을 느끼지 못했다. 오늘 정도로만 대한다면 일신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다는 거다. 생각하던 아델은 순간 몸을 비틀고 싶은 충동을 참아 냈다.
‘아니, 대체 난 왜 당연히 그 남자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물론, 기사들의 이야기를 훔쳐 들은 게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근데 사실 이야기만 놓고 따지면 아델에게도 나쁜 건 아니었다.
‘가끔 기분 전환하기에도 적격일 것 같고.’
그녀는 마땅히 취미 생활이라는 걸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시간이 나면 뭐라도 하나 더 배우기 위해 공부를 하거나 벨라의 짐을 덜어 주기 위해 방 청소를 했다.
사교계의 대화에도 뒤처지면 안 되니 한창 유행인 연극은 빠짐없이 보려고 애썼고 다과회나 살롱 파티엔 반드시 참석했다.
정말 바쁜 인생이었다. 당연하게도 지금 생각하면 하나같이 쓸모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또 하나의 위안이 있다면 고대어를 해독해서 그 재미있는 비석의 내용을 알게 됐다는 것 정도였다.
‘그나저나 다음 내용이 궁금해.’
궁금해 죽겠다.
식사를 마친 아델이 정리하는 이들을 바라보다가 냉큼 탁자에 앉았다. 아델이 지금껏 해독했던 종이를 탁자 한쪽에 늘어놓고 등잔에 불을 붙였다.
‘한 장으로 정리해 놔야지.’
아델이 의자에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그리고 펜을 움직였다. 해독한 종이를 나열해 둔 채 천천히 그것을 옮겨 적기 시작했다.
글자 수가 많아 작은 글씨로 빼곡히 글을 적었다. 이윽고 그것을 한 장으로 정리했을 땐 하늘은 이미 한껏 어두워진 후였다.
모두가 취침하려는 분위기에 아델도 황급히 등잔의 불을 껐다. 그녀가 탁자 위에 해독한 종이 다발을 올려 두곤 조심스럽게 침대의 끄트머리에 누웠다. 거의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 버티고 있던 그녀가 자는 척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꺼림칙한 시선에 30분 정도 뒤척이던 아델이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조용히 막사 밖으로 빠져나갔다.
밤은 어둡고 무척 조용했다.
* * *
“이번 사냥 대회 우승자를 발표하겠습니다!”
“우오오오오!”
여기저기서 커다란 함성이 울려 퍼졌다. 기사들의 우렁찬 외침에 영애들은 하나같이 귀를 막으며 미간을 좁혔다. 당연하지만 아델도 마찬가지였다.
‘귀청 떨어지겠네.’
매일매일 소리를 지르며 연무장을 달리는 이들이니 저 정도 함성은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이번 사냥 대회 우승자는 겨우 단 한 명입니다! 단 한 명이 저기 보이는 맹수의 사체만큼이나 많은 사냥감을 잡았고 참가자 중의 누구보다 가장 커다란 몬스터의 사체를 가지고 왔습니다.”
좌중이 조용해졌다.
이 모습조차 기시감이 느껴진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 누군가는 꿈에서 봤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델은 실제로 본 것이었다. 실제로 본 모습이 또다시 눈앞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단 한 명의 우승자는, 헥시온 경입니다!”
“…….”
이름이 나오는 순간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
누구? 아델은 그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아니, 성이 없잖아. 다른 사람이겠지…….’
뭣보다 그는 대공이었다.
대공이 있을 리가 없잖아. 이런 사냥 대회에. 그는 지금 기사다. 대공이 기사일 리가 없지.
“아니, 죄송합니다.”
사회자가 황급히 두루마리를 다시 살피더니 고개를 젓고는 큰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정정하겠습니다. 우승자는 헥시온 대공 각하입니다! 단상으로 올라와 주십시오!”
정정하는 사회자의 목소리에 아델이 고개를 내저었다.
“……미쳤어.”
도대체 왜 자신은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인가? 3년 전에도 분명히 들었을 이름이었다. 기억하지 못한 것은, 아마…….
‘그때 온 신경이 다른 데 쏠려 있었기 때문이겠지.’
아델이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단상에 올라간 사내의 검은 투구가 반짝였다.
“약속은 지켰습니다.”
단상에 올라간 헥시온이 한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친 듯한 기분에 아델이 고개를 돌렸다.
“네? 무슨 약속 말입니까?”
시상식 사회자를 맡은 기사의 목소리가 한 번 더 그녀를 확인 사살했다. 아델은 말을 잃었다. 영애들이 뒤늦게 시선을 눈치채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영애들을 기점으로 기사들 사이에서도 시선이 오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행하시죠.”
다행히 그는 아델의 곤란함을 눈치챈 듯 기사의 호기심을 중간에서 끊어 냈다. 한층 건조해진 목소리에 기사가 황급히 트로피를 들고 왔다.
“풀헤임 숲 사냥 대회가 열린 후 역대 최초입니다! 시상대에 홀로 우뚝 선 헥시온 각하께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영애들이 앉아 있던 곳에서도 기사들이 서 있던 곳에도 모두 박수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아델도 떨떠름한 표정으로나마 손뼉을 마주쳤다. 헥시온이 황금으로 만든 트로피 두 개를 손에 쥔 채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곧장 영애들이 앉아 있는 천막 아래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오지 마.’
움찔, 살짝 떨린 아델의 몸이 절로 뒷걸음질 치고 싶어 멋대로 꿈틀거렸다.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왜 그렇게 부담스러운지 모르겠다.
‘오지 말라고!’
아델이 황급히 일어났다.
“비프타 영애?”
“갑자기…… 급히 소피가…….”
갑자기 일어난 아델을 이상하게 보는 다른 영애에게 어색한 설명을 덧붙인 아델이 몸을 돌렸다. 눈에 띄는 건 질색이었다. 거래에 대해선 둘째 치더라도 말이다. 하물며 대공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과 엮이는 건 더 싫었다.
“영애.”
“…….”
벌써 뒤까지 다가온 듯 목소리가 가까웠다.
수십 쌍, 수백 쌍에 가까운 시선이 모두 아델에게 향했다. 조금 더 정확히는 아델과 헥시온에게. 피부로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시선에 아델이 차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뒤를 돈 채 굳어 있었다.
“영애?”
“……네.”
헥시온이 한 번 더 그녀를 불렀다.
결국, 아델이 어색한 웃음을 입가에 띤 채 몸을 돌렸다.
겨우 세 걸음 남짓을 사이에 두고 다가온 남자는 여전히 검은 갑주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남자가 투구 안에서 웃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일까?
‘착각이겠지.’
착각이었으면 좋겠다.
그가 아델의 손등에 입을 맞추듯 허리를 굽혔다. 투구를 쓰고 있어서 진짜 입술이 닿진 않았지만, 뜨거운 태양에 달궈진 투구가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
“영애께서 주신 술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내가 두 개의 트로피를 얻을 수 있던 이유의 반은 당신이니…….”
헥시온이 두 개의 트로피 중 하나를 아델에게 내밀었다.
“하나는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아뇨,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목까지 차오른, 정확히는 목 끝까지 차서 혀끝에서 맴도는 말은 차마 수많은 시선에 입 밖으로 튀어 나가지 못했다. 눈앞의 사내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일부러 이러고 있는 게 아닐까?
만약, 그가 따로 뒤에서 트로피를 주겠다고 내밀었으면 절대 받지 않았을 거다. 헥시온이건 헥시온 밀라트리오건 아델은 엮이고 싶지 않았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영애들의 시선에 아델이 삐걱거리는 팔을 애써 들어 트로피를 두 손으로 받았다.
“감……사합니다.”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혀끝에 맴돌고 또 맴도는 수많은 의문을 전부 눌러 버린 아델이 웃었다. 입술 끝이 바들바들 떨리는 썩은 웃음에 가까웠지만.
주변 영애들의 시선이 매우 반짝거렸다. 부러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기사들의 표정도 하나같이 부러움에 가득 차 있었다.
‘펠리스 저 인간은 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야?’
웃고 있는 얼굴에 구멍이라도 날 것 같다.
“천만에요.”
아델의 영혼 없는 감사 인사를 헥시온이 흔쾌히 받았다. 목소리는 정말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고저의 변화가 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이 사람은 사실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책을 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사내는 다행히 더는 말을 건네지 않고 몸을 돌렸다. 단상으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아델이 멍하니 쳐다봤다. 아델이 고개를 숙여 그가 건네주고 간 황금 트로피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이걸 준 저의가 뭐야?’
한껏 입을 쩍 벌리고 웃는 표정의 기사가 황금으로 된 검을 높이 들고 있다. 그 아래로 몬스터의 사체로 보이는 것이 그득하니 쌓여 있고 기사는 그것을 밟고 서 있는 모양새였다.
‘보통 이런 걸 선물로 주던가?’
아마 트로피의 모양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절대 선물로 줄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가 정말 호감이 공중에 날아다니는 먼지 조각만큼이라도 있다면 말이다.
“비프타 영애는 좋겠어요. 저분께선 무려 대공 각하시잖아요.”
말하는 여자의 목소리에 기묘한 업신여김이 섞여 있다.
“말씀 감사합니다.”
아델이 무심하게 대답하곤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가 단상으로 돌아가자 아델에게 박혔던 시선은 다행히 대부분 떨어져 나갔다.
“영애께서 저 대공께 마음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언제나 손에 장갑을 끼고 다니는 건 저주받아서가 아니냐는 소문도 있던데.”
비꼬는 듯한 말투에 아델의 입꼬리가 한차례 바들 떨렸다.
“아, 물론 전 영애의 취향을 존중한답니다.”
못 들은 체하고 있던 이성이 뚝 끊겼다. 참던 아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영애께서 술을 준 기사분은 어떻게 되셨나요? 아예 보이지도 않는 것 같은데.”
아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예?”
아델이 옆에 앉은 영애가 듣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영애께서 얼마 전에 자기가 술을 줄 기사님은 당연히 최고이니 우승할 거라고 말씀하셨던 게 떠올라서요.”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지만, 아델에겐 생생했다. 그녀가 오죽 자랑을 하고 다녔어야지. 술을 주지 못한 아델을 비꼬듯 비웃었던 것도 눈앞에 있는 그녀였다.
“아, 그건…….”
당황한 표정을 흘끗 쳐다보곤 환하게 웃었다.
“아, 혹시 한 마리도 못 잡았다거나……?”
“한 마리도 못 잡았다뇨! 상을 받진 못했지만, 그분도 열심히 경쟁에 임했답니다.”
“이런, 제가 기분을 상하게 해 드린 모양이네요.”
아델이 빙긋 웃었다.
“우승은 제가 술을 드린 헥시온 각하께서 차지하셨죠. 잠시 깜빡했나 봐요. 미안해요.”
아델이 빙긋 웃었다. 붉어진 얼굴의 영애가 바들바들 몸을 떨며 주먹을 꽉 쥐었다.
“하긴, 그러니 제 위치도 모르시고 대공 각하의 험담을 제 앞에서 하시는 거겠죠.”
“뭐, 뭐라고요?!”
“아니면, 그런 대공께 선물을 받은 공녀인 나를 대놓고 무시하는 건가요?”
아델이 빙긋 웃자 영애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안 그래요? 영애.”
“아무리 대공께 술을 드렸다곤 하지만 너무 무례하신 것 아닌가요?!”
알리아 영애가 눈을 부릅떴다.
일을 크게 만들려는 그녀의 속셈에 아델이 빙긋 웃으며 그녀 쪽으로 허리를 굽혔다.
“바다 건너온 약은 효능이 뛰어난가요? 영애.”
아델이 속삭이듯 작게 말하자 영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무, 무스…… 무슨 소리를.”
딱, 딱 이를 부딪치며 그녀가 떨기 시작했다.
알리아 영애가 바다 건너 외국에서 웬 약을 들여오고 있다는 건 죽기 전의 아델이 안 사실이었다. 좋지 못한 경로로 입수한 약인데 1년 뒤쯤엔 그것에 중독돼서 제 가문의 재산을 박박 긁어다 쓰기 바빴다.
“1년 뒤에 집안 파산하게 하고 싶지 않으면 손 떼는 게 좋을 거예요.”
지금이야 아직 초반이니 멈추려고 한다면 멈출 수 있을 거다.
“내가 가만히 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아는 모양인데, 생각보다 그렇지 않으니 앞으론 입조심을 하실 거라고 믿어요.”
“…….”
“아시겠죠?”
아델의 말에 알리아 영애가 몇 차례 고개를 주억였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 새파랗게 질린 입술로 그녀는 벌벌 떨고 있었다.
‘쌤통이다.’
아델이 속으로 혀를 내밀며 다시 단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 결과적으로 도와준 거잖아.’
너무 겁에 질리게 한 건 아닌가 싶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녀는 겉으로는 친한 척 착한 척 구는 영애였지만, 뒤에서는 그녀의 험담을 하고 다니는 이중적인 사람이었다. 어차피 그녀는 아델이 뭘 해도 트집을 잡고 싫어할 게 뻔했다.
아델이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향한 신경을 차단하려고 애썼다. 예전에는 그녀가 사교계의 중심이라도 된다고 생각해 열심히 친해지려고 노력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런 아델을 우습게 여겼다.
‘하여튼, 잘해 주는 게 아니었어.’
잘해 줘도 어차피 그녀에게 등을 돌릴 사람은 전부 등을 돌릴 거다. 노력도 부질없는 것이다.
셀리나가 태어난 후, 모든 것이 다 바뀌게 된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노력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가 옆에 앉은 영애에 대해 단언하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결국 죽기 전에는 파산 직전이었지. 알리아 자작이 뒤늦게 알아서 수습해 보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그 뒤엔 아델 역시 죽었으니까.
‘장례식은 치르지 않았겠지.’
시간이 되돌아갔다는 가정하의 이야기지만.
만약 치렀다고 해도 과연 함께 어울렸던 영애들이 진심으로 애도나 표해 줬을까? 실제로 겪어 보지 않았으니 모를 일이지만.
단상으로 올라간 헥시온이 여전히 아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결국, 부담스러움에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인 건 아델이었다.
“헥시온 각하께서 수상 소감을 말하는 것으로 시상식을 끝맺겠습니다.”
기사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그가 기대감에 찬 얼굴로 헥시온을 쳐다봤다. 헥시온이 그를 한 번 보더니 다시 앞을 봤다.
“간단하군요.”
특유의 건조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내뱉은 헥시온이 단상을 내려갔다. 유유히 막사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사회자 역할의 기사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하. 헥시온 각하께선 많이 피곤하셨나 봅니다. 그럼, 시상식이 끝났으니 저녁부터 시작될 연회까지 모두 푹 휴식을 취하시길 바랍니다!”
기사가 빠르게 양피지를 읽어 내렸다.
“이상, 제3 기사단의 유리안이었습니다!”
호쾌한 성격의 기사가 황급히 단상에서 내려왔다. 파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아델도 영애 몇몇이 일어나자 적당히 그 뒤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 자리해 있던 비프타 공작과 펠리스도 공작 부인과 함께 막사로 다가왔다.
‘가기 싫다.’
아델의 걸음이 한껏 느려졌다. 그렇다고 해도 코앞에 있는 막사까지 가는 데 시간이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는 게 슬프다면 슬픈 일이었지만.
“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비프타 공작이 어쩐지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 아델은 입을 다물었다.
‘가문의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이 웬일이지?’
아델은 헥시온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더운 여름 날씨에도 답답하게 제복의 단추를 목 끝까지 단단히 잠가 매고, 장갑을 끼고 다닌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며 왠지 모르게 꺼림칙하다느니, 사실은 저주를 받은 흔적을 감추는 것이 아니냐느니 수군거렸다.
그런 이상한 사람인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놔둔다고?
다행히 아델이 대답하지 않아도 비프타 공작은 뭔가를 더 캐묻거나 하지 않았다. 아델로선 솔직히 3년 전에는 없었던 패턴이 당황스럽기 그지없을 뿐이었다.
‘똑같이 진행되길 바란 건 아니지만…….’
벌써부터 다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난 네가 헥시온 대공과 아는 사이일 줄은 몰랐는데.”
“술을 전해 주고 대화를 좀 나눈 것뿐이에요.”
아델이 순순히 대답했다.
솔직히 그녀도 몰랐다. 그놈이 그놈이었는지. 얼굴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옛 정략결혼 예정이었던 상대가 설마 검은 갑주의 사내였을 줄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잘못 엮였어.’
시작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대체 뭐가 문제였던 걸까?
‘……라고 생각해도 이유야 명명백백하니까.’
그녀가 원래는 줄 예정이 없던 술을 그에게 건넸고 그녀가 예전엔 하지 않았던 비석의 고대어 해독에 나섰기 때문이다.
“하아…….”
아델이 긴 한숨을 내뱉으며 터덜터덜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뭔가, 꼬여도 단단히 꼬였는데.’
어쨌든 아델이 예상했던 것보다 무척이나 극심할 정도로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조금 더 가면 심각해질 정도였다.
‘다시 정략결혼을 하게 되는…… 그런 건 아니겠지?’
누구보다 기뻐야 할 영광을 얻은 사람치고 그녀는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쉬는 아델을 보는 막사의 세 사람의 눈빛이 의아함에 잠겼다.
* * *
“손님?”
“헥시온 각하입니다.”
움찔, 아델의 몸이 크게 떨렸다. 비프타 공작의 시선이 잠깐 아델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가 투구를 마저 걸어 놓고 갑주를 벗고는 입을 열었다.
“들어오시라 전하게.”
막사의 천막이 젖히고 사내가 들어왔다. 저벅저벅 들어오는 발걸음 소리에 아델이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손님이 왔는데 주저앉아 있는 건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다른 분께 흥미가 있는 건 아닙니다.”
헥시온은 막사 안을 느릿하게 훑으며 말했다. 건방지다면 무척이나 건방졌으나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메말라서 그런 감정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델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채 애꿎은 벽을 노려봤다. 익숙한 목소리. 모를 리가 없었다. 이 특유의 목소리는 조금 전까지도 들었다.
“비프타 영애를 뵈러 왔습니다.”
제대로 지목을 당하고 나서야 아델이 다른 곳에 두었던 시선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가 내키지 않는 듯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누구세요?”
고개를 돌린 아델이 조금 멍청해 보일지도 모르는 질문을 입에 담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검은 갑주의 사내는, 그러니까 헥시온은 갑주와 투구를 전부 벗고 있었다. 목소리만 들었을 땐 헥시온인 걸 알겠지만,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전혀 알아볼 것 같지가 않았다. 헥시온은 갑주를 입고 있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런 걸 아름답다고 하나?’
비프타 공작과 공작 부인, 그리고 펠리스도 제법 외모가 월등히 뛰어나다고 생각했지만, 이 남자는 격이 달랐다. 그보다 한 단계 더 위에 존재하는 듯했다.
‘검은 갑주를 입고 다니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아.’
앞으로도 쭉 입고 있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도 같다. 사람을 묘하게 홀릴 것 같은 외모였다. 아델이 순간 말을 잃을 정도로.
“누구냐니. 제게 물으신 겁니까?”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인 헥시온이 물었다. 목소리는 익숙한데 목소리랑 얼굴이 연결되지 않는다.
아델이 알고 있던 목소리의 주인이 검은 갑주를 입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대충 짐작이 가는 상황이긴 했다. 그저 그녀가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
“속상합니다.”
헥시온이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짐짓 서운한 듯 말했다.
아름다운 얼굴 위로 내려오는 퍽 아련해 보이는 표정에 아델이 입을 떡 벌렸다. 그는 소문으로 들었던 대로 겨울에나 입을 법한 긴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검은색 장포의 끝은 바닥에 닿을 듯 말듯 아슬아슬했다. 양손에는 답답할 법도 한 새까만 장갑을 끼고 있었다.
‘덥지 않나?’
생각하던 아델이 비프타 공작의 눈치를 한번 보곤 입을 다물었다.
‘속상하기는 무슨…….’
일단, 목소리에 감정이나 집어넣고 얘기해 달라고 한마디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비프타 공작이 직접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고 했던 만큼 공작의 앞에서 그에게 따지고 드는 건 좋지 않을 것이다.
“갑주를 벗은 모습은 처음 봬서 잘 몰랐어요.”
아델이 처음의 모습과는 다르게 순순히 대답했다.
‘술을 아직 차고 있네?’
갑옷 부근에 달아 줬던 것인데 지금은 허리띠에 매고 있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헥시온의 한쪽 눈썹이 살짝 위로 쓱 올라갔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정말 머리카락까지 흑색일 줄이야.’
“저랑 잠시 나가시겠습니까?”
헥시온이 아델에게 물었다. 그의 질문에 아델이 반사적으로 비프타 공작을 쳐다봤다. 뒤늦게 그의 눈치를 봤다는 걸 깨달은 아델이 입술을 깨물었다.
“알겠어요.”
그녀가 비프타 공작의 대답이 나오기 전에 흔쾌히 수긍했다. 헥시온이 에스코트하듯 손을 뻗었다.
‘부담스러워.’
필요 없다고 쳐 내기엔 보는 눈이 많았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시종일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띤 채였다. 아델이 떨떠름함이 역력한 기색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럼 잠시 그녀와 대화하고 오겠습니다, 공작.”
“늦지 않게만 돌려보내 주시면 됩니다.”
“짧게 대화만 나눌 겁니다. 이왕이면 신경을 꺼 주시면 고맙겠군요.”
아델이 떡 벌어지려는 입을 애써 다물었다. 비프타 공작에게 이렇게 웃으며 막말을 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그의 정체가 정말 아델이 예상하는 대로라면 헥시온의 태도가 아예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정말 대공이야?’
기왕이면 아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헥시온이라는 특이한 이름이 흔하지 않은 것은 아델도 잘 아는 사실이긴 했다.
“당신, 정체가 뭐예요?”
“이제 내게 관심이 좀 생겼습니까?”
질문이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헥시온을 보고 있던 아델이 말을 잃었다. 관심이라기보단 확인에 가까웠다. 헥시온이 아델을 조용한 수풀 쪽으로 이끌었다.
“아뇨.”
“이런.”
“아버지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봐서요.”
“아.”
헥시온이 낮게 탄성을 흘렸다. 정말 놀랐다기보단 겨우 그게 궁금했냐는 식의 말투에 가까웠다.
“나는 그가 싫습니다. 그리고 싫은 사람을 존중할 만큼 그다지 대인배도 아니고요.”
처음에야 헥시온도 조심스럽게 대했지만, 그의 뒷모습을 알게 되고 조심스럽게 대하는 걸 관뒀다. 다행히도 황제는 그것을 알면서도 헥시온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하지 않아서 그는 타인이 없는 곳에서는 공작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딱히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본인이 그렇다는데 아델이 덧붙일 말은 없었다. 말문이 막혔던 아델이 결국 순순히 수긍했다.
그녀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기 위해 애써 왔다. 뒤늦게야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모양이었다.
“흠.”
헥시온이 불만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얼굴을 찡그리는 것조차도 마치 한 폭의 그림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아델이 잠시 넋을 잃었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 어감 별로 내키지 않네요.”
“네?”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간을 찡그린 아델에게 헥시온이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날 헥시온이라고 불러 주면 기쁠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헥시온 경.”
아델이 담담히 말했다. 헥시온이 낮게 웃음을 터뜨리곤 곧 고개를 끄덕인다.
“100점 만점에 80점 드리겠습니다.”
헥시온이 그녀의 호칭에 점수까지 매겼다. 농락당하는 기분에 아델의 표정이 또다시 구겨졌다.
“어쨌든 난 비프타 공작에게 별 흥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약속은 지켜 주실 겁니까?”
헥시온이 돌려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
“약속은 지켜요. 전 시간이 많으니 경께서 내키는 시간에 언질을 해 주세요.”
약속은 약속이니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뭣보다 시간을 때우기에도 한 번쯤 집 안에서 벗어날 핑계로도 그의 제안은 매력적이었다. 그가 대공이라는 정체를 몰랐더라면 말이다.
‘도대체 난 왜 까먹고 있었지? 검은 갑옷의 사내가 대공이라는 걸.’
그때도 제법 시끌시끌했는데.
사냥 대회 이후에도, 회귀하기 전에도 아델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죽기 전의 아델은 매일매일 피폐해지는 정신을 견디지 못했다.
태어난 것을 죄로 치지 않는다면 아무런 죄도 없는 셀리나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감정적으로 벼랑에 몰려 있었다.
무시는 점점 더 심해져 갔고 타인에게 무시당하는 것만큼 끔찍한 기억은 없었다. 차라리 원망을 받는 편이 더 나았을 지경이었다.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는 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과 같았다.
덕분에 그 시기의 기억은 흐릿한 게 많았다.
반면 결혼은 마치 모든 것이 전부 정해진 것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아마 결혼에 관한 얘기가 오간 건 조금 더 되지 않았던가 싶다. 물론 어디까지나 아델의 추측이지만.
‘우승을 했다고 했는데도 분위기가 싸했던 이유가 있었구나.’
그도, 자신처럼 박대받는 사람이었다. 그가 작위를 받을 때도 정체 모를 사람이 대공 작위를 받는다며 떠들썩했다. 그의 존재는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훌쩍 튀어나왔으니까.
황제의 사생아라느니 숨겨진 조카라느니 오래전 유배된 선황제의 늦둥이라느니 어쨌든 소문이란 소문은 다 돌았다.
그뿐이랴?
어쩔 수 없이 주는 대공 작위라느니, 허울뿐인 대공이라느니 생각해 보면 우스운 말도 많았다. 거기에 늘 두 팔 중에 한 팔만 사용하는 기묘한 행보까지.
그래서 아델이 척박한 북부의 땅을 하사받은 대공에게 팔리듯 결혼하게 됐을 때 그녀를 비웃는 영애도 꽤 있었다. 아델을 싫어했던 영애들이 특히나 그랬다.
동시에 대공이라는 작위를 가진 헥시온과 비프타 가문의 영애가 맺어져 공작가의 힘이 더 세지는 걸 내켜하지 않는 세력도 있었다.
아델의 죽음은 전적으로 공작가의 탓이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호위 기사의 수가 현저히 부족했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합니까?”
아델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요.”
“영애는 거짓말이 참 능숙한 사람이군요.”
“그 말 그대로 돌려드려도 될까요?”
그린 듯한 미소와는 조금 다른 웃음이었다. 이건 확실히, 피부로 그의 유쾌함이 전해졌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방금 공작이 있을 땐 왜 눈치를 봤는지 모르겠네요. 책잡힌 거라도 있나요?”
이 사람은 독심술이라도 쓰는 걸까? 이제 슬슬 조금 무서워질 지경이다.
헥시온이 꺼림칙함마저 느껴지는 아델의 시선에 결백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독심술을 쓸 리가 없잖아요.”
‘아니, 쓰는 것 같은데요.’
또다시 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대답하는 헥시온에 아델의 눈초리가 한층 더 의심을 담아 가늘어졌다.
“그럼 날짜는 다시 정해서 연락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네. 결정권을 경께 드렸으니 경이 결정하시는 것에 따를게요.”
“그거 반가운 말이군요.”
헥시온이 빙긋 웃었다.
“그나저나 나는 영애에게 이름을 알려 줬는데, 영애는 내게 이름을 부를 권한을 주지 않는 건가요?”
“…….”
아델이 입을 닫았다.
카레나 비프타,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질렸다. 이 모든 것은 카레나 비프타의 것이다. 카레나 비프타가 가져야 했던 것.
“원하시는 대로 부르세요.”
아델이 담담히 대답했다.
“그건 안타깝군요.”
“경의 목소리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지지 않아 저도 안타깝네요.”
“나는 언젠가 영애께서 직접 이름을 알려 주며 허락을 해 줄 날을 조용히 기다려야겠군요.”
아델이 그녀 스스로 카레나 비프타의 이름을 허락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건 지금까지도 줄곧 그래 왔던 것이고.
“이름 알고 계시잖아요.”
“그래도 직접 듣고 싶은 이유는 뭘까요?”
“그것도 그렇군요.”
정말 의미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솔직한 마음으론 싫진 않았다. 아델은 자신을 스스로 카레나라고 불러 달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마저 스스로 허락해 버리면 ‘아델’이라는 사람은 영영 사라질 것 같았다. 그것만큼은 줄곧 거부해 왔던 일이었다.
이제 누구도 그녀를 아델이라고 불러 주지 않겠지만, 스스로라도 그 이름만큼은 기억하고 있고 싶었다. 뒷골목 고아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자신밖에 없을 테니까.
비프타 공작은 자신을 데리고 와 놓고 그녀의 진짜 이름을 묻지도 않았다. 누구도 그녀의 원래 이름을 묻지 않았다.
저택 밖으론 나가지 못했고 콰른 비프타도 그때는 어렸으니 공작저로 거처를 옮긴 후 얼마간 같이 생활한 적이 있었다.
아델은 식사에 초대되었던 날 여러모로 충격을 받아서 책을 읽으며 최대한 방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콰른 비프타는 정말 망나니였다. 읽고 있던 아델의 책을 전부 찢어 버리곤 이름을 물어봤다.
‘야, 고아. 네가 진짜 카레나는 아니잖아? 원래 이름이 뭐냐?’
처음으로 진짜 자신을 봐준 듯했으나 착각이겠지. 지금 다시 생각해도 상대하고 싶지 않은 놈이었다.
“아, 나와 만날 때의 준비물은 종이와 펜.”
“알겠습…….”
“그리고 수제 도시락입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던 아델의 귀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끼어들었다.
“……네?”
사람을 홀릴 듯한 듣기 좋은 목소리에 오류가 난 모양이다.
“……도대체 왜요?”
“나들이엔 도시락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나들이였냐고 되묻고 싶은 말을 아델이 꾹꾹 눌러 참았다.
“전 요리할 줄 몰라요.”
“나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왜!
당당하게 나오는 대답에 아델의 동공이 흔들렸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아델의 눈을 보던 헥시온이 낮게 웃었다.
“안 해 봤으니까 해 보는 겁니다.”
“네?”
“해 보면 언젠가 도움이 되겠죠. 그러니까 해 보지 않은 일에 먼저 겁을 먹진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헥시온이 말했다.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해 보지 않은 일이니 도전해 보고 싶다는 이유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납득했다. 그러나 아델은 그럴 수 없었다.
‘뭣보다 이맘때면 콰른 비프타가 돌아올 테고.’
사냥 대회가 끝난 일주일 뒤쯤 돌아올 것이다. 생각하던 아델이 눈을 번쩍 떴다.
‘콰른 비프타…….’
그놈과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혹시 괜찮다면, 다음 주에는 어떠세요?”
아델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물론…… 경께서 괜찮으시다면요.”
헥시온이 물끄러미 아델을 내려다봤다. 눈에 깃든 공포를 읽은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애께서 원하신다면 나는 그 시간도 괜찮습니다.”
“그럼, 부디 다음 주로 부탁드려요. 가능하다면 정확히 7일 뒤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아델이 말을 덧붙였다. 그녀로선 정말로 오늘부터 시간이 가는 게 두려울 정도로 끔찍했다.
‘그래도 이 사람과 나가 있으면 시체는 보지 않을 수 있겠지.’
생각해 보니 아델은 싫다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도리어 꼭 일주일 뒤에 만나 달라고 빌어야 할 판이었다.
“그 대신, 따뜻한 차라면 준비해 갈게요.”
숲에 도착할 때까지 따뜻할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아델이 뒷말은 조용히 삼키며 헥시온의 새까만 동공과 눈을 맞췄다.
“하는 수 없군요. 그럼 도시락은 내가 만들어 가겠습니다.”
“정말 직접 만드시려고요?”
“맛이 없어도 먹어 줄 겁니까?”
헥시온의 물음에 아델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뒷골목에서 주워 먹고 죽을 뻔했던 썩은 달걀보단 나을 거다.
“네, 약속할게요.”
“그럼 최선을 다하죠.”
그가 가슴에 손을 얹고 살짝 허리를 굽혔다. 갑주를 입고 있지 않아 철이 부딪히는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아델은 순간 넋을 잃었다.
‘비프타 공작가에 적응해서 웬만한 외모는 눈에 차지도 않았는데…….’
이 사람은 예외였다. 외모도 외모지만 분위기 자체가 절로 시선을 끌어당겼다. 한곳에 시선을 억지로라도 고정해 두지 않으면 자꾸 보게 될 것 같았다. 아델이 애써 헥시온의 뒤에 있는 나무에 시선을 고정했다.
“알겠어요. 그럼 다음 주 같은 날 아침에 봬요.”
“내게 말하는 건가요?”
“여기 다른 사람은 없잖아요.”
“하도 뒤를 보고 있기에 뭔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혹시 내 등에 유령이라도 있습니까?”
아델이 그제야 삐걱거리는 시선을 옮겨 헥시온을 쳐다봤다.
“아뇨, 그럼 그런 거로 할게요.”
헥시온과 다시 눈을 마주친 아델이 말했다. 그러곤 그녀가 다시 곧장 헥시온의 뒤쪽 나무로 시선을 옮겼다.
“다음 주보다 조금 더 빨리 뵙게 될지도 모르겠지만요.”
헥시온이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델이 막사 쪽으로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더는, 안 돼.’
이 사람이 대공이라면 더욱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카레나 비프타의 이름으로 누군가와 인연을 맺고 싶지도 않았다. 단호하게 돌아선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헥시온의 눈꼬리가 둥근 호선을 그렸다.
“내 억지를 받아 줘서 고맙습니다. 그럼 저녁 연회 때 뵙겠습니다, 영애.”
헥시온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아델의 걸음이 멈췄다.
‘연회를 생각지 못했네.’
아델이 마저 걸음을 걸어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묘한 기분이었다.
* * *
“딱히 뭔가 눈에 보일 법한 특별한 능력은 없는 것 같은데.”
그가 중얼거렸다. 멀어져 사라진 아델의 뒷모습을 보며 헥시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이건 확실히 효과가 있어.”
그가 허리춤에 달린 술을 꽉 쥐었다. 매캐하게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 속을 누군가 청량한 물로 씻어 내리는 듯했다.
‘묘한 감각이야.’
게다가 최근에는 발작 주기가 조금 길어진 것 같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는 점점 짧아져 여섯 시간에 한 번은 약을 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여덟 시간 정도로 주기가 늘어났다. 그나마도 버틸 수 있는 수준의 발작이어서 이틀까지는 약 없이도 버틸 수 있었다. 그게 이 술을 받고 난 뒤에 생긴 변화라는 것은 확실했다.
“게다가 묘하게 그리운 사람이군.”
보면 볼수록 예전에 어딘가에서 만났던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슬슬…….’
시간이 된 듯했다.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크윽…….”
헥시온이 고통 어린 신음을 삼키며 숲 쪽으로 모습을 감췄다. 폐가 서서히 굳어 가는 듯 숨을 쉬는 것도 힘겨웠다. 그 와중에 헥시온이 허리춤에 달린 술을 힘껏 쥐었다. 그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역시…….”
뭔가 있다.
“카레나 비프타…….”
헥시온이 술을 손에 꽉 쥔 채 나무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헥시온은 한동안 약을 입에 넣지 않았다. 인적 드문 곳, 억눌린 신음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 * *
“돌아왔구나.”
“네.”
비프타 공작의 말에 아델이 무심하게 대답하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가 피곤한 기색으로 형식적인 인사만 건네고 침대에 앉았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더냐?”
아델이 감정 없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대화의 내용이야 실없는 것이었지만, 궁금해하니 또 말해 주긴 싫었다.
‘내가 뭘 하든 관심도 없었으면서.’
대공과 엮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잘 따르던 개가 주인을 무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버려진 개였다. 필요가 없어져 죽임당한 개. 그렇게 생각하면 비참한 마음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델이 마음을 다잡았다.
비프타 공작은 그가 대공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의 무례한 언사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대화를 나눈 자신에게도 관심을 가지는 것이고.
“헥시온 경과 약속한 것이 있어서 그것에 관해 얘기를 나눴습니다.”
“약속?”
“네, 개인적인 약속이었어요.”
아델이 묵묵히 대답했다. 사실 정말 별로 시답지 않은 얘기였다. 길게 서 있긴 했지만, 핵심 대화는 ‘다음엔 언제 볼래요?’ 하나뿐이었다. 그 외에는 차마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시답지 않은 얘기였다.
“그와 무슨 약속을 했느냐?”
“…….”
아델이 입을 닫았다. 그러곤 이내 빙긋 웃었다.
“제 개인적인 사생활까지 말하기엔 부끄러운 나이가 됐어요. 걱정이 많으신 건 알겠지만, 부디 이해해 주셨으면 하네요.”
아델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완벽에 가까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사실 뒤쪽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공작 각하라고 부르며 한소리 퍼부었을 거다.
관심을 바랐던 상대가 이토록 귀찮게 느껴질 줄이야. 그만큼 실망하고 상처받은 스스로를 아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 번도 궁금해했던 적이 없으셨으면서 왜 그러시는지 전 잘 모르겠네요.”
아델이 낮게 깐 목소리로 말했다. 노련한 비프타 공작은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아델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껏 아델이 영애들과 수십 번의 약속을 가졌어도 비프타 공작은 단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3년 뒤 죽기 전의 미래에도.
잘못 엮인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 아델이 제 입 안을 살짝 깨물었다. 천막을 청소하던 시녀가 나가고 천막 문이 닫혔다. 아델이 한층 긴장을 풀었다.
“심기만 건드리지 않으면 괜찮다고 하신 건 공작 각하신 걸로 기억해요. 그리고 헥시온 경께선 친절했고요.”
원래라면 그저 ‘네.’라는 한마디로 끝났을 텐데 아델은 굳으려는 몸을 애써 움직여 가며 제 생각을 내뱉었다.
“화나게 하지 말고 순순히 대답하도록 해라, 카레나 비프타.”
답답하다는 듯 비프타 공작이 엄한 투로 말했다. 늘 순순히 대답했다. 이렇게 바뀐 건 이제 2주일 남짓이다. 되돌아오기 전에는 순순히 굴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카레나 비프타.”
엄한 목소리에도 아델은 떨리는 심장을 애써 부여잡았다. 심장과 떨리는 손이 그녀의 불안감을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었다. 뼛속에 새겨진 공포와 당연했던 모든 것들을 부수는 시간은 무척 오래 걸렸다.
‘나는 그가 싫습니다. 그리고 싫은 사람을 존중할 만큼 그다지 대인배도 아니고요.’
순간, 그 남자의 말이 떠오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델이 숨을 삼켰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자신을 한 번도 존중해 준 적이 없는 사람을 굳이 존중해 줄 필요는 없었다.
아델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비프타 공작의 금안을 마주 봤다.
“저는 각하와의 약속을 완수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는 언젠가 자유를 주겠다고 했다. 원하는 모든 것을 주겠다고 했다. 카레나 비프타가 가질 수 있었던 것들을 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그리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약속을 지키려고 애를 썼는데, 아델은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도리어 목숨까지 전부 내주고 시간이 되돌아오는 이상한 현상까지 겪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제 일거수일투족을 각하께 보고드려야 할 이유는 되지 않아요.”
“대체 왜 이렇게 달라졌지? 마치 다른 사람 같아. 어느 날 갑자기 변했다기엔 너무 갑작스러운데.”
중간에 끼어든 펠리스의 말에 아델이 입을 닫았다.
대화조차도 피곤하게 느껴지는 건 이제야 눈에 씌워졌던 콩깍지가 벗겨지는 건가? 울컥울컥, 참아 왔던 다혈질적인 성격이 자꾸만 깨고 나왔다. 그동안 억눌러 쌓인 성격이 얼마인데. 그녀가 한쪽 입꼬리만 비스듬하게 올린 채 비웃음을 머금었다.
“왜요? 전 언제나 받아 주지 않는 인사를 웃으면서 해야 하고 묻는 말엔 꼬박꼬박 대답해 드려야 하나요?”
“너 말이 좀 심하구나.”
연회에 참가할 마음은 없었지만, 꼴을 보니 막사에서 나가야겠다. 어차피 이런 분위기도 연회에 곧 묻혀 사라질 테고.
“제 말이 심한가요?”
아델이 전혀 모르겠다는 눈으로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울컥,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순간 누가 누구의 아버지냐고 쏘아붙일 뻔했다.
아델이 말없이 미소 지었다.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자신 있는 웃음.
“저는 그래도 물어보면 대답은 꼬박꼬박 해 드리는데 이게 심한 거군요.”
중얼거리듯 말한 아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사가 작지 않다고 해도 한 막사를 넷이서 사용하니 어디에 있어도 편하질 않았다.
“만약 이게 심한 거라면 당신들은 제게 아주 끔찍한 일을 저지르신 거겠어요.”
“…….”
“머리가 좀 아파서 산책을 좀 하고 오겠습니다, 아버지.”
고개를 숙인 아델이 곧장 막사의 출입구로 향했다.
“곧 연회가 시작된다.”
뒤로 들리는 목소리에 아델의 표정이 구겨졌다. 아델이 막사의 천막을 확 걷었다.
“늦지 않게 올게요.”
언제나처럼 입가에 미소를 띤 아델이 열었던 천막을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경비를 서던 기사들이 아델을 보곤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비석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기사에게 금화 한 개를 쥐여 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어차피 쓸 곳도 없는 돈이었다. 심신의 평화를 위해서 자신에게 그 정도 투자는 할 수 있었다. 아니, 이제 할 수 있게 됐다.
예전에는 내 돈이 내 돈이 아닌 것 같아서 전혀 쓰지 못했지만, 카레나 비프타가 쓸 수 있었을 돈이니 자신이 쓸 수 있는 건 당연하겠지. 기사의 앞에서만 해도 미소를 띠고 있던 아델이 숲으로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표정을 굳혔다.
어슴푸레한 저녁의 숲은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냈다.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조금 스산하게도 느껴졌다. 그래도 나뭇잎이 부딪히며 사박거리는 소리가 그녀의 기분을 차분하게 했다.
사실 지금이 밤이어도 아델에겐 상관없었다. 그녀는 이제 비석까지 가는 길은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졌으니까.
그녀가 비석 앞에 있는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와…….”
아직 밖은 어슴푸레하지만, 숲 안쪽으로 들어오자 밤이 됐다. 완전히 캄캄하진 않지만 짙은 남빛에 시야가 한층 좁아졌다. 그리고 밤이 되자 비석의 진면모가 드러났다.
‘이게 뭐지?’
눈앞을 가득 메운 초록색의 빛에 아델이 시선을 빼앗겼다.
“글씨가 빛나고 있어.”
도리어 낮보다 밤이 훨씬 해독하기가 수월할 듯했다. 낮에는 투박한 글씨에 빛에 반사되고 멀리서 보면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밤의 비석은 확실히 달랐다. 멀리서 봐도 충분히 알아보기 쉬웠고 글자도 훨씬 더 명확했다. 아델이 가까이 다가가 비석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형광 도료를 발라 놓은 건가?’
그 시대에 형광 도료가 있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늦은 밤 이렇게 글씨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도 신기했다.
‘그 사람들한테 고마워할 일이 하나 생겼네.’
그녀가 여기까지 오게 해 준 것은 고마워할 일이었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아델은 연회가 시작되면 막사에서 나올 생각이 없었다.
이미 한 번 읽어 봤던 거지만 비석을 다시 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델이 다시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녀가 멍하니 비석의 첫 줄에 시선을 고정했다.
익숙할 거라고 생각했던 비석의 첫 줄을 읽던 아델이 눈을 크게 떴다.
뭔가 다르다.
아델이 해독한 것과 글자 모양이 달랐다.
아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가 결국 방금 앉았던 바위에서 일어났다.
“이 글을…… 보고 있……다는 건?”
아델이 첫 줄에 있는 몇 글자를 더듬더듬 읽어 갔다. 글자가 빛나고 있어서 한층 읽기가 편했다. 비석에 바싹 붙어야 했던 낮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밤이 내려 안아? 아, 내려앉은.”
바로바로 해독하려니 꽤 힘겨웠다. 아델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녀가 아주 천천히 눈으로 글자를 읽어 갔다.
“밤이 내려앉은 풀헤임……의 숲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 풀헤임의 숲에 들어왔다는 거겠지. 밤의 숲에 발을…… 디뎠다……는 건…….”
더듬더듬 읽어서 이제 한 줄이었다. 비석에 빼곡히 글이 적힌 것을 생각하면 이제 시작점에 불과했다.
아델의 머릿속엔 이제 막사에서 있었던 일은 완전히 잊힌 후였다.
* * *
“……이 밤에 숲은 왜 가는 거지?”
저 멀리 기사에게 뭔가를 쥐여 주곤 숲 안으로 들어가는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이 늦은 밤에 누가 숲으로 들어갔습니까, 도련님?”
올란도의 물음에 헥시온의 미간이 좁아졌다. 헥시온의 시선이 아델이 들어간 숲으로 향했다가 그 앞의 돈을 받고 그녀를 통과시킨 기사에게 고정됐다.
“한 번은 실수고 두 번도 자비로 봐주겠지만, 세 번째에도 고쳐지지 않는다면 그건 목을 잘라야지. 안 그런가, 올란도?”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난 잠시 어딜 다녀올 테니 자네는 쉬고 있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올란도가 대답했다. 헥시온이 올란도를 한번 쳐다보곤 곧장 숲으로 향했다. 보폭이 큰 걸음이었으나 헥시온의 움직임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유려한 걸음걸이로 헥시온은 순식간에 비석이 있는 숲의 입구까지 다다랐다.
“이곳은 지나가실 수 없습니다.”
헥시온의 앞이 창으로 가로막혔다.
그가 빙긋 웃었다. 부드럽게 올라간 미소가 사람을 홀릴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기사는 꺼림칙한 느낌을 받은 듯 몸을 떨었다. 한기가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오는 기분.
“내가 한 번은 넘어가 주고, 두 번째도 둘만 있을 기회를 받게 됐으니 눈을 감아 줬지.”
“무슨 소리를 하는…….”
“그러니 세 번째부터는 실수로 보지 않아도 되겠지.”
헥시온의 입가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커흑-!”
헥시온의 손이 기사의 목을 틀어쥐었다. 그는 겨우 한 손으로 갑옷으로 중무장한 기사의 목을 붙잡고 나무에 몰아붙였다.
“사, 살려…….”
발버둥을 치는 기사를 보던 헥시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 사달을 벌여 놓고 우습군. 내가 설마 죽이기라도 할 줄 알고? 아쉽게도 더러운 피는 묻히고 싶지 않아.”
기사가 서지도 못한 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쿨럭쿨럭-.”
“청렴결백해야 하는 황성의 기사가 돈에 눈이 멀다니. 통탄할 일이군.”
건조한 목소리로 헥시온이 말했다. 아델의 말대로 헥시온은 성격이 좋거나 착한 쪽은 결코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매일매일 고통과 통증과 싸워 온 사람의 성격이 좋을 수는 없는 법이다.
“커허억.”
목을 부여잡고 컥컥거리며 모자란 공기를 채우는 기사를 내려다보던 헥시온이 다시 빙긋 웃었다. 눈은 웃지 않고 입술 끝만 올라간 차가운 미소였다.
“이건 잠시 경고였고 네가 할 일은 아주 간단해.”
“……예?”
기사의 눈에 생리적인 눈물이 맺혀 있었다. 헥시온의 미간이 좁아졌다.
“황성으로 돌아가면 그 갑옷과 검을 반납하도록. 그게 네가 행할 마지막 명령이다.”
헥시온이 손을 뻗어 팔에 찬 기사의 완장을 붙잡고 확 뜯어냈다. 차가운 눈은 기사에게 정확히 향한 채다.
“알겠나?”
기사가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마디를 남긴 헥시온이 그대로 기사를 스쳐 지나 숲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기사가 멍하니 숲으로 들어가는 헥시온의 등을 쳐다봤다.
* * *
숲으로 발을 들인 헥시온의 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가 이 숲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델이 간 곳을 유추할 수 있었다.
헥시온이 느릿하면서도 큰 보폭으로 길을 걸어 들어갔다. 쭉 가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오른쪽으로 조금 걷다 보면 커다란 비석이 있었다.
‘빛?’
비석이 있는 곳에서 새어 나오는 낯선 빛에 헥시온의 걸음이 빨라졌다.
비석이 있는 곳에 도착한 헥시온이 조심스럽게 수풀을 헤쳤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아델은 듣지 못한 듯했다.
물론, 헥시온은 그 앞에 서서 뭔가를 더듬더듬 읽어 내려가고 있는 아델에게 더 시선이 갔지만.
“그러니까, 정리해 보자면…….”
아델이 혼자서 중얼거리며 비석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글을 보고 있다는 건 밤이 내려앉은 풀헤임의 숲에 들어왔다는 거겠지. 밤의 숲에 발을 디뎠다는 건 상당히 실력에 자신이 있다고 가정하고 이 글을 쓰겠네.”
아델이 해독한 내용을 다시 한번 읊었다.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녀가 잠시 숨을 멈추고 천천히 다음 줄로 시선을 내렸다.
“풀헤임의 숲은 낮보다 밤이 훨씬 더 위험하지. 아, 참고로 이 밤에만 보이는 글씨는 요정들의 진액을 빌려서 적은 글이네. 그들은 달빛을 받아 몸에 신비한 물질이 쌓인다네.”
아델이 낮게 웃었다. 솔직히 사실이라고는 믿기지 않지만, 동화나 소설의 한 종류라고 생각하면 다음이 궁금해지는 유쾌한 글이다.
“그리고, 다음은…….”
지금까지는 이미 해석한 것을 한 번 더 정리해 읊은 것이었다. 저 뒤의 내용은 아직 해석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 비석은 아직 반도 채 해석하지 못했다는 게 정답이었다.
“다음 이야기는 나도 듣고 싶네요.”
“꺄아악!”
뒤에서 예고도 없이 들린 목소리에 아델의 몸이 펄쩍 뛰었다. 이번엔 헥시온도 당황한 듯 다가오던 걸음을 멈춘다.
“헥, 헥시온 경?”
“미안합니다. 놀랐습니까?”
“여긴 어떻게 왔어요?”
“늦은 밤 숲으로 들어가는 위험천만한 일을 감행하는 영애를 발견하고 쫓아왔지요.”
아델의 표정에 낭패감이 번졌다. 다들 떠들썩하게 연회 준비 중이라고 했는데, 주변을 신경 쓰지 못한 게 패인이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짓궂은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퍽 당황한 표정을 했다.
“나도 들어도 괜찮을까요?”
“네, 뭐…….”
아델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근데 왜 이렇게 늦게 나와 있는 겁니까?”
“음…….”
“좋습니다. 내키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좋아요. 그래도 기왕 올 거면 저도 불러 주지 그랬습니까?”
“아.”
죄송하다고 말할 일은 아닌데, 왜 죄송하다고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일까?
아델이 떨떠름함이 가득한 눈으로 헥시온을 쳐다봤다.
“서운합니다.”
“헥시온 경은…….”
헥시온의 말을 묵묵히 듣던 아델이 입술을 뗐다. 그러자 헥시온이 지긋이 아델을 쳐다봤다.
“서운한 게 참 많으신 것 같네요.”
고민 끝에 내뱉은 아델이 말했다.
“…….”
“…….”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적막이 흘렀다. 여상한 표정으로 아델을 마주 보고 있던 헥시온이 문득 뒤를 돌았다.
그의 어깨가 곧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헥시온의 어깨가 계속 들썩인다. 정확히는 그의 오른쪽 어깨가 들썩였다.
처음 잠깐은 뭔가 싶었던 아델도 한참이나 계속되니 그가 웃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웃음이 계속되니 아델의 미간이 설핏 찡그려졌다.
분위기를 눈치챈 듯 뒤돌아서 있던 헥시온이 이내 몸을 다시 원래대로 돌렸다.
“왜 그런 표정입니까?”
헥시온이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헥시온의 움직이지 않는 팔에 아델의 시선이 닿았다. 만나고 단 한 번도 왼쪽 팔을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저 팔을 본 사람 중에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고 하던데.’
대공인 그의 소문이 좋지 못한 이유는 거기에도 있었다.
종종 행하는 이유 모를 포악한 행동.
‘죽기 전엔 저주를 받았다던 소문이 가장 강력했지…….’
사교계에선 이런저런 소문이 떠돌았지만, 실제로 확인한 사람이 없으니 어디까지나 소문으로만 이어진 것이었다. 생각하는 듯 의아한 표정을 한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헥시온이 한층 차분해진 분위기로 설핏 웃었다.
“팔을 움직이지 않는 게 신기합니까?”
“……그렇다고 하면 상처 받으실까요?”
“아뇨. 당신이라면, 그조차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헥시온이 말을 끌었다.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한차례 숨을 내쉰 그녀가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손가락 끝을 장갑을 낀 헥시온의 왼쪽 손에 가져다 댔다. 가죽으로 된 무척이나 차가운 감촉의 장갑이었다. 아델이 조심스럽게 장갑을 손으로 쓸었다.
헥시온이 그 기묘하고 이상한 광경을 그저 가만히 방치했다. 평소라면 제 몸에 손을 댄 자의 손을 잘라 버렸을 텐데, 아델에게는 그런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사냥 대회 일주일 전부터 꾸기 시작한 기묘한 꿈과 기묘한 기시감. 그것들은 아델의 앞에만 서면 한층 더 강해졌다.
헥시온이 느릿하게 오른쪽 장갑을 입술로 물고 빼더니 이내 왼쪽 장갑을 쓸고 있는 아델의 손을 꾹 잡아 뻣뻣하게 굳은 제 왼쪽 팔 위로 꾹 눌렀다.
기묘한 단단함이 손끝으로 느껴지자 아델의 눈이 크게 뜨였다. 형체 없던 소문의 실체를 설핏 엿보게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건, 내게는 저주와도 같은 겁니다. 두렵지 않습니까?”
“모르겠어요.”
“……이상하게도 나는 당신이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무척, 편안하고 안정감이 듭니다.”
“네?”
“아닙니다.”
싱거운 대답에 맥이 빠진 아델이 그를 한번 쳐다보곤 몸을 돌렸다.
“뒤에 있는 바위에 앉아 계세요.”
“물론이죠. 허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헥시온이 가슴에 오른손을 얹고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여전히 과하디과한 인사였다.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비석 쪽으로 몸을 돌리자 헥시온도 다시 장갑을 끼고는 바위에 걸터앉아 아델을 쳐다보았다.
‘뜨거워…….’
아델이 제 손을 가슴께에 올리고 꾹 눌렀다. 그의 손이 닿았던 부위가 무척 뜨겁다.
헥시온이 손을 들어 장갑에 숨겨진 제 왼쪽 손등을 쓸었다. 아주 순간이었지만, 죽어 버렸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마치, 그녀의 손길에 생명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헥시온이 검 끝의 술을 주먹으로 꽉 쥐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아델은 이상하게도 좀처럼 비석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불편함을 눈치챈 듯 헥시온이 자신의 기척을 지웠다. 그러자 한결 아델의 행동이 편안해졌다. 곧 헥시온이 있었다는 것도 잊은 듯 아델이 비석을 해독하는 데 집중했다.
“그들을, 걷…….”
아델이 손가락으로 천천히 비석의 글씨를 따라가며 중얼거렸다. 헥시온이 바위에 걸터앉아 팔을 세워 턱을 괴었다.
‘최근 고고학자는 거의 없으니.’
고대어가 남겨진 곳은 오래된 유적이나 혹은 숲처럼 지금은 인적이 드물어진 곳이 많았다. 그 때문에 위험성이 높은 데다가 최근 젊은 고고학자는 거의 없어서 직접 모험가와 이런 곳을 뛰어다니는 이들도 드물었다. 나이 많은 이들은 몸을 사리느라 바쁘니까.
제국의 고고학자도 엉덩이가 무거워 모험가들이 구해다 주는 물건이나 해독하고 있지 이런 곳에 오는 경우도 드물었다.
‘이곳에 고고학자가 온 적이 없으니 길잡이 비석 정도로 취급되고 있던 것이겠지만.’
지금 제국의 황제는 고대의 역사를 그다지 중요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인재를 새로 뽑지도 않고 남아 있는 고고학자들은 돈에 찌든 놈들뿐이었다.
“영애께선 종이와 펜이 없어도 해독할 수 있군요.”
헥시온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말을 걸었다.
“머리로 외우면 되긴 하지만 역시 있는 편이 편한 것 같네요.”
펜과 종이가 없으니 읽었던 것을 또 읽어야 했다. 조금 번거롭긴 했다. 헥시온이 아델이 하는 것을 가만히 쳐다봤다.
“아아.”
아델이 탄성을 흘리곤 작게 웃었다. 어느 정도 해석해서 내용을 읽은 듯했다.
“나도 궁금하네요.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혼자 너무하십니다.”
헥시온의 말을 하자 아델이 웃음기를 머금은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그래서 서운한가요?”
아델의 말에 헥시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였다. 그녀가 장난 섞인 목소리를 내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네, 서운합니다.”
헥시온이 맞장구치며 대답했다. 몇 번이고 들어 이제 유쾌해진 말에 아델이 웃음을 터뜨렸다. 헥시온이 웃는 아델을 말없이 쳐다봤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에 아델이 뒷덜미를 매만지며 시선을 돌렸다.
“부탁합니다.”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곤 비석을 향해 다시 몸을 돌렸다. 그녀가 천천히 해독한 비석의 글자를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그래서 요정들이 지난 길은 밝게 빛나지. 이 글을 읽고 있는 자네도 밤길을 지나다니며 풀이 빛나는 걸 본 적이 있을 거야.”
헥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비석을 다시 읽어 갔다.
“요정은 깊은 숲에서 나오지 않지만, 가끔 길을 잃는 녀석도 있어서 마을 근처에서도 볼 수 있지. 나는 그걸 요정의 길이라고 부른다.”
“이 비석을 적은 자는 참 사족이 많은 사람인 것 같군요.”
헥시온이 살짝 미간을 좁힌 채 말했다. 사실 동감하는 것은 재밌긴 한데 내용이 중구난방이긴 했다. 중점이 없다고 해야 하려나? 생각나는 것을 전부 비석에 옮겨 적은 느낌이었다.
“제가 생각해도 그런 것 같네요.”
“해독은 그게 전부입니까?”
“아뇨.”
아델이 다시 몸을 돌렸다. 고개를 젖힌 그녀가 천천히 글씨를 다시 읽어 내려갔다.
“풀헤임 숲의 초입의 ‘안전 구역’을 제외하면 밤의 숲은 모두가 그들의 영역이다. 달이 뜬 밤에는 엘프의 길이 열리고 숲의 주인이 눈을 뜬다.”
“숲의 주인, 계속 거론되는 이름이군요.”
“사실 믿기진 않는 이야기라서 고대 신화나 동화가 아닐까 싶지만요. 그래도 신기하고 좋네요.”
아델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공작과 있을 땐 꽤 날카로운 기운을 풍기더니.’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겉으로는 단란한 가족처럼 보여도 그녀의 분위기는 달랐다. 지금은 한층 안정된 분위기였다. 잔잔하고 담담한 기운이 헥시온은 마음에 들었다.
아델이 해석한 것을 다시 눈으로 읽어 내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이곳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한순간의 호기심에 그것을 세상에 놓아 버리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내용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방금까지는 몽글몽글한 동화 속 이야기였다면, 이건 무척 진지했다.
“그것을 찾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으나 나는 결국 그것을 찾지 못했다. 그러니 그것에 관한 기록을 이곳에 적어 내려갔다.”
아델이 묵묵히 읽어 내려갔다.
“밤의 비석에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을 것이다.”
즐겁게 읽어 내려가던 아델의 목소리가 조금씩 낮게 가라앉았다. 이야기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간다.
“이것은 세상에 내놓으면 위험할 이야기이며, 누군가가 알게 되면 그 목숨을 달리할 수도 있고 악용된다면 좋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궁금한 자는 밤의 풀헤임 숲으로 오라.”
듣고 있던 헥시온의 미간도 설핏 좁아졌다.
찡그려진 눈으로 그가 느릿하게 턱을 쓸었다.
“이 글을 읽는 자네가 강한 힘을 가진 악이라면 발길을 돌려라. 죽음을 자초할 뿐이니.”
아델이 헥시온을 살짝 살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혹여나 그렇지 않은 자라면 숲의 비석은 기꺼이 그대들을 환영할 것이다.”
해석할 때는 제대로 몰랐는데 이렇게 모아 읽어 보니 확실히, 놀라울 정도로 기묘한 내용이었다.
“이게 전부예요. 뒷내용은 한 줄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부서진 부분이 있어서 해독이 어려워요.”
“기묘한 내용이네요. 그리고 이상하게 신경 쓰이는군요.”
미간을 좁힌 헥시온이 제 미간 사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폈다.
“그나저나 고대어를 해독하는 게 그렇게 재밌습니까?”
“음. 왜요?”
“영애가 즐거워 보여서요.”
아델이 비석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즐겁다. 기계적으로 책에 있는 걸 해독할 땐 느끼지 못했던 즐거움이었다.
“그러네요. 저 지금 즐거운 것 같아요.”
지금까지 생각지도 못했다. 아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헥시온이 그녀를 가만히 쳐다봤다.
“왜요……?”
시선을 견디지 못한 아델이 결국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영애는 웃는 게 더 예쁩니다.”
“…….”
“혹시 뭐 잘못 먹었어요?”
“…….”
드물게 내뱉은 칭찬에 돌아온 취급이 너무했다. 헥시온이 작위적인 한숨을 푹 내쉬곤 고개를 저었다.
“이런 칭찬 보통 누구나 좋아하지 않나요?”
“너무 뜬금없지 않아요?”
“그런가요?”
헥시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연회도 끝나갈 테고.’
더 늦었다간 여러모로 좋지 않을 것이다. 다른 건 둘째치고 공작가의 여식과 자신이 없어졌으니 괜히 시끄러워지면 귀찮아진다.
“영애, 이만 돌아가야겠습니다.”
“그런가요?”
아델이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쉽지만, 시간이 더 늦어지는 건 좋지 않았다.
‘공작가에 피해를 주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해 뒀고.’
“나와 다음 주에 두 번째 비석을 찾으러 가면 되니 아쉬워는 마십시오. 기왕이면 밤의 비석 쪽도 신경 쓰이니 1박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요.”
헥시온이 아쉽다는 목소리를 낸 아델의 말에 반응했다.
“그럴까요?”
아델이 반색하며 물었다. 콰른 비프타를 하루라도 덜 만날 수 있다면 솔직히 한 달쯤 어디 갇혀 있어도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기왕이면 누가 한 달만 딱 납치해 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아델로서도 필사적이라고 한다면 필사적이었다. 솔직히 아직도 눈앞에서 굴러다니는 눈 뜬 시체의 머리는 끔찍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하기 싫은 장면에 아델이 이마를 짚었다.
“괜찮습니까?”
“허락을 받아야겠지만요.”
“흠.”
헥시온이 고민하듯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그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습니다. 그건 내가 공작께 얘기하지요.”
“네?”
“내가 공작께 따로 얘기할 테니 영애가 신경 쓸 건 없을 겁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녀가 괜한 오기를 부려 가며 말싸움을 하는 것보단 나을 거다.
‘수도로 돌아가면 뒷골목에 가야겠네.’
굳이 모험가 집단이 아니라도 정보를 얻을 수단은 있는 편이 좋았다. 여차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숨겨 둔 카드 한 장 정도는 있어야 했고.
‘특히 뒤에서 대공과의 결혼 얘기가 오가는지 아닌지도 알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종류의 의뢰를 받는 정보 길드도 있다고 들었다. 아마 뒷골목 소식을 쥐고 있다면 그것도 맥시온이 중간에 소개해 줄 수 있겠지.
“돌아가요.”
“그러죠.”
헥시온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그녀에게 손바닥을 내보였다. 에스코트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녀가 어색한 표정으로 그의 손바닥에 손을 올렸다.
헥시온과 아델이 숲을 빠져나왔다.
* * *
사냥 대회가 끝나고, 수도로 돌아온 아델이 침대에 늘어지듯 드러누웠다.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끔찍한 저택이고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공간이라고 해도 웬만해선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제 방만큼은 그녀의 소중한 안식처였다.
“뭔가 이상해.”
아델이 몸을 옆으로 누이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알고 있는 미래가 이상하게 비틀린 느낌이었다. 어쩌면, 예전에는 하지 않았던 행동을 자신이 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헥시온과는 이렇게 엮일 일이 없었어.’
예전에는 없었다. 아델은 술을 만들었지만, 그에게 주지 않았고 당연하게도 그가 아델에게 관심을 가지는 일도 없었다.
‘우승자가 헥시온 대공이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을 정도니.’
그때 여러모로 상처를 받아서 주변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탓도 있었다.
‘공작이라면 당연히 쓸데없는 구설수에 휘말린 남자와 만나는 건 내켜 하지 않을 텐데…….’
당연히 당장에 어울리지 말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도리어 책만 잡히지 말라는 둥, 심기만 거스르지 말라는 둥의 말만 했을 뿐 어울리는 것에 제재를 가하진 않았다.
가문에 조금이라도 피해가 올 것 같으면 단칼에 잘라 내는 걸 서슴지 않는 것이 바로 비프타 공작이었다. 유클리 후작의 딸이 죽고 후작가에 기묘한 소문에 휩싸였을 때도 가장 먼저 어울리지 말라는 말을 전해 온 것도 비프타 공작이었다.
공작인 그가 몸을 돌리자 유클리 후작가는 점점 고립되어 갔다. 그리고 어느 날, 귀족 계보에서 자취를 감췄다. 비프타 공작은 늘 그랬다. 가문에 누가 되거나 피해가 올 것 같거나 가문의 명예가 더럽혀질 것 같은 일은 사전에 차단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사람들이 꺼리고 싫어하는 헥시온 대공과 어울리는 아델을 현재의 비프타 공작으로선 싫어해야 옳았다.
3년 뒤에 정략결혼으로 얽히게 될지라도 그건 그때의 일이었다. 벌써부터 비프타 공작이 저주받은 대공이라는 이명을 가진 남자를 기꺼워할 리는 없었다. 퍼즐이 있다면 군데군데 조각이 빠진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가문에 누가 되면 안 된다고 그렇게 입이 닳도록 이야기한 사람인데.’
가문의 명예를 중시하는 집안이었다. 그러니까 소중한 막내딸도 장례조차 치러 주지 않고 대역을 입양했다. 사생아라는 다른 치부를 들이면서까지 조금 더 큰 치부를 가리고자 했다.
“저주받은…….”
아델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에는 결코,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뭣보다 목숨을 구해 준 소중한 은인이었다. 싫어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더 엮이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헥시온이 보고 있는 것은 ‘카레나 비프타’일 것이고 아델은 더 이상 그녀로 살고 싶지 않았다. 이제 계약과 약속의, 갈구했던 애정을 포기하고 족쇄를 끊어 내 자유가 되고 싶었다. 그런 이유에서 아델은 헥시온과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번에 약속이 마지막이 되겠지.’
한 번의 만남이 끝이 될 거다. 더는 그와 엮일 생각이 아델에겐 조금도 없었다.
“졸려.”
아델이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자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공존했다. 눈을 감으면, 종종 좁고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끄집어내지는 꿈을 꿨다. 아마도 그건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지기 전, 생전의 마지막 시간인 듯했다.
‘우리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라. 너는 그저 조용히, 쥐 죽은 듯이 카레나의 대역만을 하면 된다.’
점점 어두워지는 시야 사이로 이제는 외워서 질려 버린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호흡이 점점 느려지고 또 한 번의 죽음을 경험하듯 끔찍하고 긴 시간 속에 아델은 늘 던져졌다.
그리고 언제나,
‘아델!’
마지막은…….
아주아주 멀리서 들리는 흐릿하디흐릿한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 * *
“아가씨, 이만 일어나셔야 해요.”
몸이 흔들렸다. 아델이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오랜 시간 늪에 갇혀 있었던 것만큼 몸이 무거웠다. 축 처진 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녀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몸을 일으켰다.
“왜 허락도 없이 들어와? 내 명령이 우습니?”
“아니에요! 저는 노크를 했어요. 다만 계속 불러도 반응이 없으셔서…….”
“네가 계속 불렀는데도 내가 반응을 안 했다고?”
“네!”
고개를 든 아델이 풀어진 동공으로 벨라를 쳐다봤다. 억울한 표정의 벨라는 그래도 눈꺼풀을 살짝 내리깔고 있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믿기지는 않았다. 아델은 보통 작은 소리에도 늘 퍼뜩 반응하고 몸을 일으켰으니까.
“꿈이…….”
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둠이 온몸을 낚아채 그녀를 바닥으로 계속해서 가라앉히는 것 같았다. 꿈에서 점점 호흡이 막히는 듯했지만, 살기 위해 허우적거리며 발버둥을 치진 않았다. 그렇다고 죽고자 한 것은 아니지만.
“무슨 일이야?”
“아, 밖에 대공 각하께서…… 아가씨를 만나 뵙고자 한 시간 전부터 기다리고 계세요.”
“대공……?”
“네.”
이 나라에 대공이라 하면 한 사람밖에 없었다. 느릿하게 굴러가는 머리로도 아델은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헥시온 대공이? 여긴 갑자기 왜……?’
약속은 일주일 뒤가 아니었던가?
아델이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은인을 문전박대할 마음은 없었다.
“한 시간 전에 왔다면서 왜 미리 깨우질 않았어?”
“한 시간 전부터 계속 불렀지만, 반응이 없으셔서…… 그, 대공 각하께 말씀을 드리니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도 괜찮다고 하셔서.”
“그래서 대공 각하가 오셨는데도 이제야 깨우러 왔다?”
아무리 말을 그렇게 했어도 손님이 아니던가? 자신을 물 먹이려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깨웠어야지. 그게 시녀로서 벨라의 본분 아니던가. 오늘도 여느 때처럼 분명히 밖에서 몇 번인가 부르고 말았을 거다.
“준비를 도와.”
아델이 일어나자 벨라가 황급히 움직였다. 벨라의 도움을 받아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아델의 머릿속은 의아함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도대체 왜 왔지?’
아델이 고개를 기울였다.
‘다음 주보다 조금 더 빨리 뵙게 될지도 모르겠지만요.’
순간 아델의 머릿속에 헥시온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아차 싶은 얼굴로 입을 벌렸다.
‘그런 말도 했었지.’
그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이렇게 보니 확실히,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준비를 끝낸 아델이 드레스보다는 가벼운 차림으로 방을 나섰다.
저택은 평소보다 한층 긴장으로 가득했다.
“저주받은 공작이라며?”
“우리도 저주받으면 어떡해?”
“꺼림칙해…….”
“그러고 보면 제일 꺼림칙한 건 아가씨지.”
뒤돌아 대화를 나누며 일감을 가지고 가던 시녀들 셋이 보였다. 아델이 걸음을 멈췄다.
“어떤 개의 입이 이렇게 방정맞은지 모르겠는데.”
아델이 차갑게 가라앉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정 한 조각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헉, 아, 아가씨.”
“이건, 그러니까……!”
“벨라.”
“네.”
“시종장한테 말해서 전부 잘라.”
아델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손님이 너무 오래 기다렸고 괜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저희가 미쳤었나 봅니다! 아가씨!”
아델이 더 볼 것도 없이 몸을 돌렸다. 벨라가 곤란한 표정을 하면서도 순순히 그녀의 뒤를 막아섰다.
“처리하고 와. 먼저 갈 테니.”
“네.”
벨라의 대답을 들으며 아델이 천천히 아치형의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가 응접실로 다가가자 문에서 멀찍이 떨어져 경비를 서고 있는 기사가 보였다. 아델이 헛웃음을 삼켰다.
“요즘 경비는 백 미터쯤 떨어져서 하는 게 기본인가 보군요.”
아델의 지적에 기사들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너무도 익숙한 것이기에, 아델은 도리어 화가 났다.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집단이란 이렇게 무섭다.
“문 앞에 석상을 둔 게 아닐 텐데요.”
아델의 지적에 기사들이 황급히 다가와 문을 열어젖혔다. 그녀가 최대한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 안에는 바깥 상황과는 무척 다르게도 편안한 모습의 헥시온이 편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세상에서 동떨어진 것 같은 모습에 아델의 입에서 바람 빠진 웃음이 새어 나갔다.
“표정이 좋지 않은데, 잠이 부족하십니까?”
헥시온이 기척을 느꼈는지 반색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 무기질적인 조각상 같던 표정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후였다.
“아뇨.”
“아니면 오다가 나를 욕하는 말이라도 들었습니까?”
“…….”
정곡을 찔린 말에 아델이 입을 다물었다.
어깨를 으쓱인 헥시온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애초에 그는 눈을 감아 주는 것일 뿐,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들을 후회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곳까진 어쩐 일로 오셨어요?”
아델이 표정을 지우며 딱딱하게 물었다. 그녀는 그와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멀어지고 싶었다.
“영애.”
“네.”
“나와 결혼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뜬금없는 헥시온의 말에 아델이 눈을 크게 떴다. 장난인가 싶어 그녀가 그의 얼굴을 살폈지만, 장난처럼 보이진 않았다.
“……학대를 당하고 계시지요?”
헥시온의 말에 놀라움에 절로 벌어진 입을 그녀가 닫았다.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아니니까 괜한 짐…….”
헥시온의 손가락이 아델의 입술을 꾹 눌렀다. 아델의 입이 다시 닫혔다.
“비프타 공작을 보면 그대가 떠는 것 압니까?”
“…….”
“거기에 맞은 듯한 얼굴의 상처, 공작 부인의 시선…….”
헥시온이 말끝을 늘였다.
“영애께서 만날 날짜를 일주일 뒤로 해 달라고 말한 그때 자기가 떨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나요?”
손가락을 뗀 그가 느릿하게 아델의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런 놈들을 위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결혼을 한다면, 영애를 내가 보호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그가 팔을 뻗어 아델의 손을 붙잡았다.
손을 겹친 그가 아델의 손을 천천히 쥐게 했다. 아프지 않게 쥐어진 손을 내려다보던 아델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이 집에서 당신을 안전하게 지키겠습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말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헥시온 경…… 아니, 각하께 무슨 이득이 있죠?”
아델의 말에 헥시온이 말없이 웃었다.
“그저, 당신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비슷한 말을, 이전에도 들은 것 같다. 자신을 사랑하는 건가라는 멍청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와 자신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죄송합니다.”
아델이 시선을 피하며 그에게 붙잡힌 손을 뺐다. 순간 그가 탄식의 한숨을 낮게 내뱉었다.
“뭔가 다른 걸 원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당신은 자유롭게 지내도 좋습니다. 속박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죠.”
“아뇨.”
아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어요.”
그와 결혼하는 건 ‘아델’이 될 수 없다. 필연적으로 그녀는 ‘카레나 비프타’로서 살아야 한다. 그러면 과거와 달라지는 게 무엇인가? 결혼하는 연도가 조금 더 빨라진 것?
‘물론, 그가 날 지켜 줄 수도 있겠지.’
적어도 결혼식에 가다가 마차 사고를 당해 죽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은 도저히 짐작도 되지 않았다. 딱 한 가지 행동을 했을 뿐인데, 이토록 미래가 어긋났다.
이 이상 짐작할 수 없는 건 사양이었다. 카레나 비프타로도 살고 싶지 않았다. 그와의 결혼은 그녀가 카레나 비프타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족쇄가 될 거다.
“도움을 주겠다고 생각해 주신 건 감사합니다. 물론 뭔가 이유가 있어 보이긴 하지만.”
아델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대로도 충분해요.”
그녀가 깊게 숨을 들이켰다.
“뭣보다, 이런 식으로…… 대공 각하와 엮이고 싶지 않아요.”
아델이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제 괜찮습니다.’
누구도, 그녀를 위험 속에서 구해 준 적이 없었다. 어둠 속이든 고통 속이든 언제나 아델은 혼자서 헤쳐 나와야 했다. 그러니까, 그 온기만큼은…….
‘착하군요.’
장난처럼 던졌을지도 모르는 한마디의 칭찬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거다. 그렇기에 더 얽히고 싶지 않은 거다. 은인은, 계속해서 은인이었으면 했다. 감히 붙잡을 수 없는 꿈속의 허상처럼.
“생각해 주신 건 감사합니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이만 돌아가 주셨으면 해요.”
아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헥시온이 입을 다물었다. 떨고 있는 몸이 그의 시야에 잡혔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자신을 꾹꾹 억누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당장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닙니다. 내가 부담을 줬다면 미안합니다.”
성큼성큼 걸어온 헥시온이 아델의 앞에서 몸을 낮췄다.
“그러니 그런 표정 하지 마십시오.”
“……?”
아델이 고개를 숙인 채 아래에 한쪽 무릎을 꿇은 헥시온을 내려다봤다. 그가 손을 뻗어 아델의 눈가를 엄지로 살짝 쓸어 냈다.
“어쩐지, 무척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았던 것 같아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
“인사도 해 주시지 않다니, 서운합니다.”
한층 가벼운 목소리로 헥시온이 아델에게 말했다.
“……다음 주에 봬요.”
“물론이죠. 그 전에 뵐 수도 있을 것 같지만요.”
덧붙인 말에 아델이 고개를 치켜들며 몸을 홱 돌렸다. 헥시온은 어느새 아델의 바로 뒤에 있는 문을 열고 있었다.
헥시온이 말하고는 손을 뻗어 아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대답 없는 아델을 보며 싱긋 웃은 헥시온이 왼팔을 버릇처럼 한번 매만지곤 응접실을 나섰다. 그가 사라지자 아델이 힘이 풀린 다리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체…….”
아델이 손바닥에 제 얼굴을 묻었다.
“대체 뭐야?”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아델이 화끈거리는 제 손등을 붙잡았다.
* * *
“오늘도 좋은 아침입니다, 영애.”
다리를 꼰 채 당당히 신문을 읽고 있던 헥시온이 빙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내키지 않는 식사를 하러 내려왔던 아델이 체통도 지키지 못한 채 식당 입구에서 입을 떡하니 벌려 버렸다. 그녀의 입이 금붕어처럼 뻐끔거렸다.
“기다렸습니다. 앉으십시오, 영애.”
저기, 당신 눈에는 지금 불쾌함으로 가득 들어찬 비프타 공작가의 사람들이 안 보이나요?
비프타 공작은 물론 공작 부인, 거기에 펠리스도 식사에 손을 댄 흔적이 없었다. 물론, 대공인 그가 손을 대지 않는데 그들이 식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제 옆자리도 괜찮습니까?”
“아, 네. 네…….”
아델이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잠이 덜 깬 머리로 필사적으로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
그녀가 헥시온의 옆자리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럼 다들 식사하시죠. 기다려 주셔서 감사하군요.”
전혀 감사하지 않은 성의 없는 말과 함께 헥시온이 식기를 쥐었다. 그제야 식사가 시작됐다.
‘이 시간까지 식사를 안 한 적이 있던가?’
애초에 그들은 아델과 함께 식사를 하려고 기다려 준 적이 없었다. 황당하면서도 동시에 묘한 웃음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올 것 같아서 아델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 잘했습니까?”
몸을 바싹 붙인 헥시온이 무척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다른 식구가 듣지 못하게 하려는 듯했다. 아델이 눈치를 살짝 보면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요…….”
하지만 이렇게 눈에 띄고 싶진 않았다. 유쾌하고 상쾌하고 무척 통쾌하긴 했지만.
“그래서, 대공께선 이른 아침부터 여기까진 어쩐 일이신지요?”
공작 부인이 한껏 날이 선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아델이 있는 쪽을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델이 움찔 떨리려는 몸을 애써 다잡으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샐러드를 찍어 입에 넣었다.
헥시온이 공작 부인을 힐끗 쳐다보곤 고기를 잘라 아델의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샐러드만 드시면 몸에 좋지 않습니다. 고기가 제법 먹을 만하군요.”
“아, 감사합니다.”
아델이 손을 뻗어 헥시온의 포크를 붙잡고 고기를 먹은 후 포크를 그에게 돌려줬다. 헥시온이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나 더 드시겠습니까?”
“제 앞에도 있어요.”
아델이 고개를 저었다. 뭣보다 무시당한 공작 부인의 눈이 매섭기 그지없었다. 구멍이 뚫릴 듯했다. 후환이 조금 두려울 정도였다.
그는 아쉽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순순히 물러났다. 그런 후에야 헥시온이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하셨지요? 부인.”
“이른 아침부터 예의 없이 여기까진 어쩐 일이냐고 여쭸습니다.”
한층 더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공작 부인이 물었다.
“부인.”
공작이 공작 부인을 제지했다. 헥시온의 붉은 기가 도는 입술이 벌어졌다.
“쯧. 예의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정하는 거고.”
헥시온이 빙긋 웃었다.
“내가 어제 그녀에게 청혼을 거절당해서 다시 한번 청혼하러 왔습니다.”
“콜록-!”
콜록콜록!
아델이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헥시온이 조급 다급한 손길로 그녀의 손에 물이 담긴 잔을 쥐여 줬다.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아델의 등을 도닥였다.
아델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제야 숨통이 트인 그녀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영애, 괜찮습니까?”
“무슨…… 무슨 말, 을…….”
“나랑 결혼해 주세요, 영애.”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대공께선 지금 내 딸아이에게 청혼을 하러 오셨단 말입니까?”
내 딸아이? 아델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그렇지요.”
“싫어요.”
아델이 단칼에 잘랐다. 헥시온이 어깨를 으쓱이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거절이라니 어쩔 수 없군요.”
헥시온이 와인을 입에 머금었다.
“식사는 다 했습니까? 영애.”
아델이 고개를 저었다. 방금 상황으로 밥은 다 먹은 것 같았다.
“얼른 드십시오.”
공작가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묵묵히 막아 주는 헥시온 덕에, 아델은 이곳에 온 이래 난생처음으로 무척 편안하게, 그러면서도 유쾌하게 식사를 끝마칠 수 있었다.
“다음부턴 아침 식사에 찾아와서 이러지 마세요.”
식사를 다 끝낸 아델이 그를 배웅하며 말했다. 아델의 말에 헥시온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마차에 오르는 그를 보며 아델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돌린 아델이 저택으로 다시 들어왔다. 2층으로 올라가려는 아델의 발을 붙잡은 것은 벨라였다.
“아가씨.”
그녀가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주인마님께서 부르십니다.”
“……알겠어.”
여기에 있는 한 그들의 부름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공작 부인의 부름을 무시했다간, 후환이 끔찍했다.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며 성질을 풀어 주는 게 좋았다.
아델이 문을 두드렸다.
“어머니.”
그녀가 그런 부름을 싫어한다는 건 알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다 나가고 너는 들어와!”
아델이 순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짜악-!
들어가는 순간 아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아델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들었다. 안광을 번뜩이며 분에 찬 눈의 여자가 보였다.
‘이런 사람에게라도 사랑받고 싶었지.’
처음에는 다정했던 사람이었으니까.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녀의 태도는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아마도 그때, 공작 부인은 알았던 게 아닐까? 아델이 공작의 사생아라는 사실을.
“네년이 감히 날 무시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녀의 히스테리는 심해졌다. 그러다 손찌검을 하게 되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
“너 따윈 아무것도 아니야! 더러운 년. 더러운 핏줄. 더러운 새끼!”
공작 부인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흔들다가 밀쳤다. 그렇게 세진 않아서 아델은 넘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대공이라는 놈이 매달리니 눈에 뵈는 게 없어?! 네년이 갑자기 방자하게 구는 이유가 그 괴물 새끼 때문이야?”
“…….”
아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그녀는 들어 주지 않을 거다.
“네가 대공 작위만 가진 괴물 새끼와 결혼한다고 네 그 천한 태생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이라도 하나 보지?”
아델이 묵묵히 들었다. 이렇게 화내다 보면 그녀는 알아서 화를 풀곤 했다.
“은혜도 모르는 추한 년!”
아델은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니까 그러면 됐을 텐데.
“공작 부인.”
아델이 말했다.
“거울을 보세요. 정말 추한 쪽이 어느 쪽인지.”
아델은, 공작 부인을 동정했다.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적대적이었던 그녀의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그녀를 동정했다. 평생 한 사람에게 바쳤다고 생각한 것이 산산조각이 나서 지울 수도 없는 증거와 함께 나타났던 것일 테니까.
“이 일에서 정말 잘못한 건 누구일까요?”
“이년이……!”
공작 부인이 손을 높게 쳐들었다. 아델이 이번에는 내려치는 공작 부인의 손을 오른손으로 막았다. 아델이 그녀의 손목을 꽉 쥐었다. 공작 부인의 눈에서 불이 뚝뚝 떨어졌다.
“억지로 끌려와 입양된 저? 아니면 저를 받아들이고 알아선 안 될 사실을 알아 버린 공작 부인?”
“이익……!”
아델이 힘껏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근데, 여기서 정말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잖아요.”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 인생을 바친 한 여자의 비참함에 동정심이 생겨났다. 그렇다고 다시 좋아하게 되진 않았지만.
“흥분하지 마세요. 건강하셔야죠.”
아델이 입가에 그린 듯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잠시 공작 부인의 배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델이 공작 부인의 손목을 천천히 놨다.
탁-!
공작 부인이 아델의 손을 쳐 냈다.
“끔찍한 년.”
“그럼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어머니.”
문을 연 아델이 허리를 굽히곤 그녀의 방에서 빠져나왔다. 아델이 구역질이 날 것 같은 입을 가리고 황급히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러고는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 * *
“좋은 점심입니다, 영애.”
“…….”
“어제 분명히 제가…….”
“아침 식사에 오지 말라고 하셔서 점심 식사에 찾아왔습니다.”
그다음 날도,
“편안한 하루였습니까? 좋은 저녁이네요.”
“…….”
또 그다음 날도, 헥시온은 찾아왔다.
“벌써 내일이 약속의 날입니다.”
“……약속, 그거 이미 요 일주일간 어떻게든 된 거 아니에요?”
“약속은 약속입니다. 오늘은 결혼해 주실 마음이 생기셨습니까?”
“……아뇨.”
“그렇군요.”
일주일 내내 찾아온 헥시온은 오늘도 순순히 물러났다. 마치, 청혼이 목표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이제는 아델도 자연스럽게 그의 옆자리에 착석했다.
오늘도 식사 시간에 떡하니 자리 잡은 헥시온에 공작 부인이 위에 좋은 환약을 먹었다. 퍽 피곤한 표정이었다. 그는 일주일 내내 공작가를 괴롭히곤 유유히 떠나갔다.
물론, 오늘도 마찬가지였고. 덕분에 공작 부인의 얼굴은 나날이 나빠지고 있었다. 헥시온이 웃는 얼굴로 욕인지 칭찬일지 모를 독설을 날리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상처 입은 걸 본 뒤로 더 심해졌지.’
거의 오기 수준이었다.
“볼에 있던 부푼 빵이 드디어 자취를 감췄군요.”
헥시온이 그렇게 말하면서 공작 부인이 먹으려는 음식을 중간에 가로채 가져와 아델의 접시에 내려 줬다.
“이런 거 드셨다가 더 건강해질까 봐 걱정입니다, 공작 부인.”
“……뭐요?”
“그잖아도 제빵 실력이 아주 좋으신 것 같은데 거기서 더 건장해지시면 반죽이 큰일 날 것 같아서 말이죠.”
헥시온이 배배 꼬인 새끼줄처럼 말했다.
공작이 짧은 한숨을 삼켰다.
“안 그렇습니까, 공작?”
헥시온이 고개를 돌리며 공작에게 말했다. 순간 그의 눈에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덕분에 때리진 않게 됐지만.’
시선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것처럼 바뀌긴 했다. 아델이 이젠 익숙해진 얼굴로 음식을 입에 넣었다.
‘통쾌한 건 사실이고.’
아델이 그가 가져다준 고기를 입에 넣었다. 기묘하게도 편안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