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 사냥 대회 (2/25)

Chapter 1. 사냥 대회

기울어지는 세상을 마지막으로 눈앞이 번쩍였다. 아델이 천천히 눈을 떴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이 그녀를 입양한 양아버지, 비프타 공작의 말이라니.

‘끔찍한 마지막이었어.’

마지막에 떠오른 말이 하필 그것일 건 또 뭐람? 그가 처음 만난 날 했던 말은 평생 그녀의 꼬리표처럼 따라다녔고, 그녀의 족쇄로서 온몸을 옭아맸다.

‘지쳤어.’

죽음의 안식이 찾아왔다고 생각한 아델은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다행히 죽기까지는 생각했던 것보단 큰 고통이 없었다. 하지만 피폐해진 정신을 정상 범위로 되돌리는 덴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고로 그녀는 눈을 뜬 후에도 한참을 멍하니 허공을 올려봤다. 한참 만에 시선을 내린 아델이 아주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사후 세계는 내가 살던 곳과 비슷하게 만들어지는 건가?’

지독한 인생이었다. 길거리 고아로 태어나 죽은 공작 가문의 공녀와 닮았다는 이유로 입양됐다. 죽기 일주일 전에, 어머니처럼 생각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 저를 경멸하고 멸시했던 이유를 알게 됐다. 자신이 사생아였다는 사실을.

그 사실을 모른 채였지만, 그럼에도 사랑을 바라며 코피가 나도록 공부하고 애정을 갈구했고, 돌아온 건 ‘버림’이었다. 최소한의 관심도 사라진 것은 공작 부부에게 새 딸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나마도 적이 많은 공작 가문에 관심과 호위까지 없어진 양녀의 결말이란 우스울 정도로 간단했다. 평생을 헌신한 공작가에 버림받아 이름 모를 무뢰배 따위에게 목숨을 빼앗기는 것.

전복된 마차의 문에서 끌려 나왔던, 고통 속에서도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던, 그 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나마 팔이 꺾인 채 고통 속에서 더 헤엄치지 않고 한 번에 베어져서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 아델의 위안이었다.

‘이제 쉴 수 있나?’

죽는 순간, 아델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똑똑-.

갑작스럽게 들리는 정갈한 노크 소리에 아델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사후 세계에 방문자가 있던가?

‘저승사자라는 건가?’

저승이 특이하다.

죽은 자들이 가는 세계는 죄를 짓지만 않았으면 살기 좋은 세상에 떨어지게 해 준다고 하는데…….

‘그게 생전에 살던 집의 방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것도 고급스러운 것을 보니 입양된 후의 집이다.

뭐든 좋다. 이제는 깊은 잠에 푹 빠져서 쉬고 싶을 뿐이다.

똑똑-.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델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입을 연다. 절차든 뭐든 빨리 끝내고 자고 싶다.

“네.”

“카레나 아가씨, 벨라입니다.”

“……?”

벨라는 카레나를 연기하던 아델을 돌보는 시녀 중 한 명이었다. 요즘 저승사자들 콘셉트가 생전에 있었던 일 재현하는 건가?

알 게 뭔가. 아델이 열리는 문을 무심하게 바라봤다. 바라던 애정은 산산이 조각났고, 공작 부인에게 애초부터 가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는 진실을 들었을 때 아델은 모든 걸 놓아 버렸다. 그들에겐 더 이상 아델이 연기하는 ‘카레나 비프타’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딸이 모든 관심을 가져갔다.

“아가씨, 오늘은 다과회가 있는 날입니다.”

“……너 무슨 소리야?”

아델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그녀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델은 죽었고 눈앞에 있는 벨라는 저승사자여야만 했다.

왜냐? 자신은 죽었으니까!

‘설마 운이 좋게 살아남아서 다시 돌아왔나?’

아델이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치더라도 벨라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물론 저들이 언제 그녀의 신변을 신경을 써 줬던가? 그래도 정략결혼을 갔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시 돌아온 사람에게 다과회를 들이미는 건 문제가 많다. 애초에 어떻게 된 일인지에 대한 추궁이 먼저 들어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심하다는 눈초리도 함께였겠지.

“네? 오늘 아가씨의 일정은 유클리 후작 영애께서 주최하는 다과회에 참석하시는 거세요.”

벨라의 말에 아델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유클리 후작 영애라면 사고에 휘말려 죽은 영애였다. 장례식도 치러지지 않았으며, 유클리 후작은 작위를 박탈당하고 변방의 영지로 쫓겨났다. 겉으론 사고사라고 알려졌지만, 후작의 뜬금없는 작위 박탈과 조촐한 장례식조차 치르지 않은 모습 등으로 사교계엔 혹시 ‘칼럿병’에 걸려 죽은 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영애들 사이에서도 유클리 후작에 관한 이야기는 쉬쉬했다.

뭣보다 1년 전에 죽은 유클리 후작 영애의 다과회라니.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 것이나 벨라가 미친 게 아니라면 전혀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

아델이 제 허벅지를 힘껏 비틀어 꼬집었다. 세게 꼬집지 않았음에도 골을 울리는 통증에 그녀가 황급히 손을 놨다.

“혹시 이거 꿈인가?”

“아가씨……?”

“아니면 네가 미친 건가?”

“네?”

“벨라, 오늘 몇 년 몇 월 며칠이니?”

아델이 피곤함에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벨라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제국력 475년 3월 31일이에요.”

“……제국력 475년? 정신이 어떻게 된 건 아니지, 벨라?”

“네……? 오늘 신문에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었으니 확실해요.”

아델이 그제야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아델의 눈에 새하얀 색의 펜이 보였다.

‘저건 내가 2년 전쯤에 망가져서 버린 펜인데.’

아끼던 펜이었다. 둘째 망나니인 콰른 비프타가 망가뜨린 펜이기도 했다.

‘뭐야, 이 더러운 펜은?’

‘돌려주세요.’

‘싫은데?’

잔인한 웃음을 입가에 띤 채 오로지 손아귀 힘으로 반으로 뚝 부러뜨린 펜은 아직도 생생했다.

‘그러고 보니 벨라의 옷도 예전에 입던 거야.’

1년 전쯤 저택의 사용인들이 입는 제복을 새로 디자인해서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벨라의 기분이 무척 좋아서 유독 친절했으니 아직도 생생한 기억이었다. 하나둘 짜 맞춰지는 정상적이지 않은 일련의 사태에 머리가 아팠다.

아델이 피곤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정말 시간이라도 되돌아온 거야……?’

헛웃음이 입술 사이로 비죽 새어 나갔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시간을 되돌아온 것은 예상 밖이다. 그것도 한창 애정에 굶주려 있던 때로.

‘제국력 475년이면, 딱 3년 전이네. 내가 정략결혼을 위해 집을 떠난 게 3월 31일이었으니까.’

감정이 죽어 버리면 어느 순간부턴 어떤 일에도 그다지 큰 반응을 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아델은 제가 생각보다 놀라지 않았다는 걸 깨달으며 마른 웃음을 삼켰다.

‘그럼 이 집에 막내딸이 태어나는 게 내년의 일이겠고.’

아델은 그때까지만 해도 칭찬 한마디를 받기 위해 애를 썼었다. 결국은 정략결혼의 패로 사용되어 얼굴도 모르는 남편 될 사람에게 변변한 호위도 제대로 없이 가던 길에 암살을 당했지만. 제 삶이 얼마나 허무했는가를 죽는 도중에 깨달았다. 실체 없는 허깨비에게 애정을 갈구했다는 것도.

“벨라, 내가 오늘 좀 아파.”

“네?”

“열도 좀 나고 머리도 어지럽고 그러네. 오늘 다과회는 피치 못하게 가지 못하게 됐다고 전해 주렴.”

아델의 말에 벨라가 곤란한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아가씨…….”

“아픈 것까지 어떻게 하겠어? 혼이 난다면 내가 공작님과 공작 부인께 혼이 날 테니 유클리 후작 영애께 소식을 전하렴.”

“알겠습니다. 의원을 부를까요?”

의원을 부른다고? 공작에게 가서 허락을 받고 난 후에 부르려고? 그게 얼마나 걸릴 줄 알고?

아델이 조소를 머금었다.

예전에 심각한 열병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아파도 꾹꾹 참는 아델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날만큼은 너무 아파서, 결국 벨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지금은 공작 각하께서 계시질 않아서 허락을 받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그럼 어머니께라도…….’

‘여쭤는 볼게요.’

아델과 공작 부인의 사이를 익히 잘 알고 있는 벨라는 퍽 난감한 얼굴을 했지만, 거부하진 않았다. 물론, 공작 부인이 아델이 원하는 답을 내어 주지도 않았지만.

‘죄송해요. 제가 공작 각하가 오시면 여쭤 볼 테니 조금만 참으시겠어요?’

‘하지만…….’

‘열도 그렇게 심한 것 같진 않은데, 조금만 더 버텨 주세요.’

통보식으로 나온 벨라의 말에 아델이 덧붙일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리고 결국 그날 의원은 볼 수 없었다. 공작이 오후 늦게 돌아왔지만, 벨라는 말을 전하지 않았다. 그녀는 뒤늦게 다음 날 잊어버렸다고 말을 전해 왔다. 그것이 과연 실수였을지는, 이제 의심스러울 정도지만. 결국 사흘 밤낮을 끙끙 앓고서야 어느 정도 몸이 호전될 수 있었다.

‘위선자.’

아델이 차오른 말을 애써 삼켰다. 비죽 튀어나올 것 같은 웃음도 억눌렀다.

“아니, 됐어. 하루 푹 잠을 자면 나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전할게요.”

벨라는 그다지 걱정스러운 기색 없이 허리를 굽히고 물러났다.

아델이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공작가에서 오래 일한 사용인은 카레나 비프타가 큰 병에 걸렸다가 나아서 돌아왔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각에선 너무 건강하게 돌아온 카레나 비프타를 무척 꺼렸다. 다 죽어 가는 시체 같던 아가씨가 몇 년 만에 무척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니까.

게다가 공작 부인이 돌아온 딸을 대하는 히스테릭한 모습에 사용인 대부분은 아델을 무척 꺼렸다. 벨라같이 아주 오랜 시간 공작가에 충성을 맹세한 이들만이 진짜 카레나 비프타가 칼럿병에 걸려 죽었다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도 은연중에 아델을 무시하고 가볍게 여겼다.

‘어차피 사랑받았던 진짜가 될 순 없어.’

아델이 생각했다. 이 사실을 조금만 더 빨리 인정했다면, 그나마 주어진 것을 가지고 삶을 즐기면서 살았을 수도 있을 텐데. 이제 와서 후회가 되는 건 다시 한번 기회가 생겼기 때문일까?

벨라가 문을 닫고 나가자 아델은 곧장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차피 아무도 그녀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는 굳이 노력하지 않을 거다.

“셀리나가 태어나면 버려 주지 않으려나?”

아델이 작게 중얼거렸다.

가능하다면 그랬으면 좋겠다. 무언가 더러운 오명을 씌워도 좋으니 이 집안에서 나가고 싶다. 아니면, 전생에 필사적으로 배웠던 것 중에 써먹을 만한 것이 없으려나?

‘긴 여행을 떠난다는 것도 괜찮지.’

어차피 그들이 대역을 세운 이유는 ‘칼럿’이라는 독특한 유전으로 인해 생기는 불치병에 걸린 딸이 죽은 사실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칼럿이라는 불치병은 제국에선 악마의 병으로 유명했다. 어떻게 걸리는지, 누가 걸리는지, 왜 걸리는지도 모든 것이 의문에 휩싸인 병이었다. 다만, 발병하는 것에 원인도 전조 현상도 없었기 때문에 어떤 학자는 그저 유전적인 문제에 의한 병이라고 단정 지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그것이 유전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제국에서 그렇게 공표했기 때문에 쉬쉬하는 것뿐이었다. 칼럿병에 걸리면 온몸에 우둘투둘한 뭔가가 올라오다가 그 부분이 점점 딱딱해지기 시작한다. 피부의 색도 점점 어두워지다가 이윽고 회색빛을 띠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부위는 사람의 피부라고 하기엔 무척 거칠게 바뀐다. 마치 사람의 피부가 돌처럼 굳어가는 것과도 같았다. 실제로 보지 않는다면 결코 믿기지 않을 정도의 기묘한 증상이었다. 끔찍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물론, 이 병이 악마의 병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처음엔 한 부위로 시작되는 이상 현상은 점점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윽고 모든 부위로 퍼져 나가거나 장기에 병이 전이되면 몸은 생존 활동을 벌이지 못하고 죽는다. 그렇게 죽은 환자는 순식간에 온몸이 돌처럼 굳어지고 이윽고 죽어 나중에는 손만 대면 바스러지기까지 한다.

그 때문에 칼럿에는 기묘한 소문이 제법 많이 붙어 있었다. 그중에 가장 진짜 같은 정보는 칼럿에 걸리는 이유가 악마와 거래를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옛날, 신의 자손인 황제에게 반역하려던 어떤 가문이 악마의 손을 빌리려고 했다가 그 대가로 칼럿에 걸려 가문이 전부 사라졌다는 기록이 있기도 했다. 그 증거로 그 집안에는 악마를 소환하려던 흔적이나 악마 숭배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칼럿에 걸렸다는 소문이 퍼졌다간 여러모로 집안 기반은 물론 가문의 존속 자체가 위태로울 수가 있다.

그 때문에 공작은 대역이 필요했다. 그렇게 뽑힌 것이 카레나 비프타와 같은 눈동자와 머리색을 가졌던 아델이었다.

‘정말 닮았지.’

카레나의 초상화를 보며 솔직히 조금 놀랐다. 다른 부모 밑에서 태어나 전혀 다른 세계에서 자랐는데 이다지도 비슷한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그런데 그게 진짜였을 줄이야.”

아델이 헛웃음을 머금었다.

생각해 보면 여러모로 이상한 것이 많았다.

카레나와 그토록 닮은 자신을 공작가가 무척 손쉽게 찾아냈다는 것. 눈동자 색이나 머리색도 무척 닮았지만 눈매나 입꼬리도 꽤나 닮아 있었다는 것. 뭣보다 처음 만났을 때 이상하게 느껴지던 그리움과 기시감의 이유도.

조금만 더 머리를 써 봤어도 약간의 의심은 할 수 있었을 텐데. 아델이 생각하며 베개를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시간이 되돌아왔는데도 이상하게 기쁜 마음은 없다. 다시 살아난 것에 대한 기쁨도 없다. 다만, 다시는 같은 인생을 반복할 마음도 없었다. 더는 사랑받을 마음도 없었다. 그들의 애정을 위해 애를 쓰진 않을 거다. 짧은 시간, 시간이 돌아왔다는 걸 인정하면서 결심한 것은 아직 그것 하나뿐이었다.

“잠이 안 오네.”

침대 위에서 뒤척이던 아델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똑똑-.

아델이 고개를 들었다.

“네.”

“아가씨, 벨라입니다.”

“들어와.”

아델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문이 열리고 벨라가 들어왔다.

‘방금 잔다고 했던 것 같은데.’

크게 불만스러울 것도 없는 게 오래된 사용인들에겐 이 집안사람들의 명령이 우선이다. 아델의 말은 그다음이다. 그래도 일반적으로 고용된 사용인은 다행히 아델을 정말 ‘공녀님’으로 대해 준다. 사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모두가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하고 있었다. 눈을 가리고 아웅거리는 우습기만 한 연극이다.

“왜?”

“아가씨,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오늘은 펠리스 공자님께서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돌아오시는 날입니다. 만약 아가씨께서 다과회에 가지 않으신다면 공자님께 얼굴은 비추셔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 알겠어.”

괜한 입씨름을 하기보단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벨라가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많이 아프세요?”

벨라가 묻는다. 자신이 평소처럼 웃지 않고 다정했던 목소리도 전혀 없기 때문이겠지. 아델이 천천히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왜? 많이 아프면 그분의 마중을 나가지 않아도 되는 거니?”

“아뇨, 저기……. 그건 아니지만.”

“그래, 그렇겠지. 준비해 줘.”

벨라의 말을 끊은 아델이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라가 당황이 역력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옷시중과 목욕 시중을 들었다.

‘언제까지 이 연극에 장단을 맞춰 줘야 하는 거지?’

이 집안의 누구도 그녀를 진심으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녀를 속이고 이용한 거다.

‘그리고 죽였지.’

오점을 숨기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또 다른 오점. 원하고 갈구했던 애정을 받았던 기억은 단 한 번도 없다. 마지막이 그랬으니, 이제는 바라는 것도 없다.

‘1년, 1년만 장단을 맞춰 주자.’

지금은 아델에게 힘이 없었다. 그러니 도망갈 때라도 잘 잡아야 했다. 셀리나가 태어나면 그때가 도망치기 가장 좋을 때다. 그녀가 태어나면, 한동안 아무도 아델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사이엔 도망치는 것도 손쉬울 거다.

“준비 다 됐습니다.”

“그래.”

이제는 익숙한 복장에 익숙한 답답함이다. 잠깐의 인사를 위해 코르셋을 조이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제 발로 싸늘한 눈초리를 받으러 간다.

‘펠리스 오라버니! 오랜만에 봬요.’

최대한 말갛게 웃으며 건넨 인사는 정작 주인에겐 닿지도 못했다.

첫째인 펠리스 비프타는 아델을 완전히 무시했고, 둘째인 콰른 비프타는 차라리 무시해 줬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그녀를 지독히 괴롭혔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델이 양팔을 벅벅 문질렀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건 추태다.

난 대체 왜 그랬을까? 깨닫고 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아 얼굴을 들고 있기도 힘들어졌다.

‘그래, 그들이 원했던 건 대외적인 활동에서 카레나를 제대로 연기하라는 거였으니.’

굳이 집 안에서까지 사랑받을 필요가 있나? 아델은 그들의 관심이라도 끌어 보기 위해 외국어를 배웠고, 고대어도 공부하고 각종 책을 독파해 지식을 습득했다. 혹시나 도움이 될까 봐 약학서나 의학서도 읽었다. 물론 전-혀 소용없는 짓이었다.

‘과거의 나를 지워 버리고 싶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왜 그랬지 싶은 일뿐이다. 부끄럽다. 혼자서 들뜨고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지레짐작했었다. 아델이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벨라의 뒤를 따라 아치형의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붉은 융단이 깔린 계단은 푹신해서 안정감이 있었다.

아래에는 공작과 공작 부인이 있었다. 그녀의 양아버지와 양어머니다. 두 사람이 힐끗 그녀를 쳐다봤다. 아델을 본 공작 부인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싸늘하고 경멸스러운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그녀는 공작이 있을 땐 아델에게 함부로 굴지 않았지만, 공작이 없을 때는 언제나 아델을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도 더 못한 취급을 했다.

아델이 숨을 삼켰다.

두 사람 다 선남선녀라고 해도 부족할 정도로 아름답다. 둘의 아들인 펠리스 비프타의 앞으로 매년 청혼이 끊이지 않는 이유를 알 법도 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버지. 어머니.”

소름이 돋는 호칭이었지만, 아델이 애써 평정을 가장했다.

1년 정도만 장단에 맞추면 된다.

1년뿐이다.

게다가 지금은 보는 눈이 많다. 그녀는 최대한 무심하게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예전처럼 날씨를 묻거나 어떻게 지냈냐는 둥의 안부 인사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답은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더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을 거다.

아델이 서늘한 눈을 한 채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담백한 인사만을 건네고 무시하듯 시선을 돌리자 공작이 놀란 듯 그녀를 쳐다봤다. 공작 부인의 얼굴은 한층 더 불쾌함으로 일그러졌다. 옆에 있던 벨라는 입을 벌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아델은 무심한 표정으로 저택의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빨리하고 책이나 읽을까?’

예전에 읽지 못한 책도 많던 참이다. 시간이 생겼으니 떠나기 전에 책이나 전부 읽고 가는 것도 좋겠다. 아델은 예법에 어긋나지 않게 공손히 손을 앞으로 모으고 문을 묵묵히 바라봤다.

‘좀 열려라.’

그녀의 염원이 통했는지 다행히 짙은 남색의 커다란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빛이 스며들었다.

“펠리스!”

가장 먼저 달려간 것은 공작 부인이었다. 아델을 볼 때와 180도 다른 상냥한 표정이었다. 그 뒤를 비프타 공작이 따랐다. 멀거니 서 있는 것은 아델뿐이었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구나. 별일은 없었느냐?”

“네. 어머니도 아프신 곳은 없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나야 뭐, 늘 건강하지 않으냐.”

공작 부인이 상냥하게 웃으며 펠리스를 끌어안았다. 펠리스도 그녀를 마주 안으며 묵묵히 반가움을 표했다.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예.”

“자랑스럽구나, 아들아. 무사히 돌아온 걸 환영한단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는 일견 딱딱하게 들릴 법했다. 하지만, 그것이 서로에게 나름의 애정 표현인 거다.

아델은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세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렸다. 카레나 비프타를 연기하던 아델은 그에게 곧장 달려갔을 거다. 환하게 웃으면서 애정이 어린 한마디 말을 듣기 위해서.

진짜 카레나 비프타는 오라버니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들었으니까. 그래서 아델은 카레나 비프타가 되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 사실은 진짜 가족도 아닌 펠리스에게 정말로 애정을 느낄 정도로. 아니, 어쩌면 진짜 가족이었을지도 모른다. 공작이 아델을 사생아라는 사실을 밝히고 제대로 집안에 받아들여 줬다면.

죽기 직전, 공작 부인이 표독스럽게 말하기 전까지 아델도 몰랐을 정도니, 아델이 사생아라는 사실은 공작 부부 사이에서만 공유되는 비밀이었던 걸까.

이제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겠지만.

‘오래도 대화하네.’

아델은 묵묵히 제자리에 선 채 펠리스를 쳐다봤다. 독특한 보라색 머리카락과 황금빛의 눈동자. 황금빛 눈동자는 아델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다만, 아델의 머리카락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에메랄드를 닮은 녹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아델을 카레나 비프타의 대역으로 만들어 줬다.

“회포는 들어가서 풀자꾸나.”

“네.”

몸을 돌리던 펠리스의 시선과 아델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델이 말없이 그를 쳐다보다가 살짝 드레스를 붙잡아 들어 올리며 허리를 굽혔다.

“오랜만에 봬요, 펠리스 오라버니.”

“……그래.”

펠리스가 미간을 좁힌 채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아델이 굽혔던 허리를 폈다.

‘할 일은 끝났으니.’

벨라가 그녀를 데리고 나온 이유는 인사를 하라는 의미였을 거다. 아델은 그녀의 요구대로 인사를 했고, 이후에 아델이 낄 자리는 없었다.

예전의 아델이라면 말 한마디 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들의 식사 자리에 끼려고 아등바등 애를 썼겠지만.

“그럼 저는 몸이 좋지 않아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식사 자리에 참석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델이 허리를 굽혀 예를 갖췄다.

예상치 못한 말에 펠리스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공작과 공작 부인의 얼굴도 묘한 것을 보는 표정이 됐다. 벨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 태평한 것은 오직 아델 혼자뿐이었다. 그러나 아델은 그저 원래 그랬어야 했던 것을 원래 자리로 되돌리기로 했을 뿐이다.

그녀의 말에 대답이 따로 들려오진 않았지만, 아델로서도 따로 허락을 구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녀가 몸을 돌려 지친 표정으로 2층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이게 꿈인지, 지난 3년간이 꿈이었는지…….’

사실 분간이 잘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그저 그녀는 무척이나 피곤하다는 사실이었다.

다행히도 그녀를 붙잡는 목소리나 손길은 없었다. 계단을 반쯤 올라가서야 아델은 조금 힘을 풀고 걷는 속도를 늦출 수 있었다.

* * *

“혹시 저 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식당을 향하던 펠리스가 공작 부부에게 물었다.

무감정한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내용물이 텅 빈 꼭두각시 인형이라도 보는 줄 알았다. 언제나처럼 반가운 듯 코앞까지 다가와 재잘재잘 떠들 거로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다.

물론, 그런 친근함이 펠리스에게 기꺼웠던 건 아니지만. 죽은 제 여동생을 닮아서, 죽은 제 여동생이 남기고 간 오점을 숨기기 위해 데려온 또 하나의 오점.

여동생은 저렇게 밝지 않았다. 언제나 힘없이 눈꺼풀을 내리깔고 우울한 표정을 짓고 죽음이 다가올수록 짜증이 많아진 아이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

비프타 공작이 대답했다.

“그렇군요.”

펠리스가 담담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벨라.”

“네, 가주님.”

“그 아이가 아프더냐?”

비프타 공작의 물음에 벨라는 잠시 고민했다. 본인 스스로는 그렇다고 말을 했지만, 사실 벨라가 보기에 그녀는 아파 보이지 않았다. 표정은 없었지만, 혈색이 나쁘거나 옷을 입힐 때 열이 나진 않았으니까.

“아가씨께서 직접 아프다곤 말씀하셨습니다. 의원을 불러 드리냐고 여쭸지만, 자면 나을 테니 괜찮다고 하셨어요.”

흠. 비프타 공작이 낮은 침음을 삼켰다. 그가 가늘어진 눈으로 벨라를 쳐다봤다.

“혹시 모르니 의원을 불러 진찰해 보라고 해라.”

“네, 알겠습니다.”

비프타 공작이 간단히 말을 나누곤 벨라를 물렸다. 공작 부인의 표정이 잠시 딱딱하게 굳었다. 물러가는 벨라를 본 그가 다시 가족과 함께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애 분위기가 이상해졌군요.”

펠리스가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저건 됐으니, 이제 네 이야기를 좀 해 보거라.”

비프타 공작의 말에 펠리스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는 묵묵히 어깨를 으쓱였다.

“별거 없습니다. 애초에 반년 전에도 뵈지 않았습니까?”

“어머, 얘도 참. 자식 소식은 겨우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해도 알고 싶은 거란다.”

아들의 무뚝뚝한 대답에 공작 부인이 작게 타박했다.

그들이 식당으로 들어가자 순식간에 식사가 차려지고 코를 자극하는 냄새가 세 사람의 위장을 울렸다. 재차 이어지는 질문과 함께 세 사람이 식사를 시작했다.

* * *

“두 시간의 고생이 10분 만에 끝장났네.”

이 얼마나 허무하고 쓸모없는 시간 낭비인지. 이것들을 즐겁다고 했던 과거의 자신이 놀라울 정도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것에 흥미가 없는 자신도 놀라웠다. 아델은 사람이 이렇게까지 열정적이던 것에 무관심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생각했다.

바로 어제, 아니. 죽기 전까지만 해도 아주 조금의 기대를 하고 있었던 자신이 아니던가? 죽이지까진 않을 거라고. 얼마나 우스운 생각이었는지.

‘앞으론 대외 활동에서만 연기할까?’

사실 애초에 연기라고 할 것도 없다. 가문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공작 부부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 사교계에서 배척당해 미움 받지 않기 위해. 아델은 그런 것들을 위해서 본 적도 없는 착한 카레나 비프타가 된 것뿐이다.

“1년 뒤에는 그 애가 태어날 테고. 그때는 뭘 해 먹고 살지?”

여동생인지 뭔지가 태어나는 것까진 괜찮다. 예전엔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은 아프다는 것이 뭔지도 잊어버렸다. 무뎌진 통증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이용당하고 결국 처분당할 운명이야. 그 전에 내 살길을 찾아야 해.”

똑같은 일을 또 반복할 마음은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고통은 끔찍했고 죽음의 공포는 여전히 그녀의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공작은 내게 한 어떤 약속도 지켜 주지 않았어.’

카레나 비프타로 사는 대신에 주겠다고 했던 모든 것들을 주지 않았다. 평생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결국은 목숨까지 앗아 갔다. 그러니 아델 역시 더 이상 약속을 지킬 의리는 없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갈 생각이었다.

‘이런 것도 제대로 못 하다니, 한심하구나.’

종종 한 번씩 떠오르는 기억은 아델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그녀가 생각을 털어 내고 드레스 끈을 풀어 대충 벗었다. 아델은 비싼 드레스를 바닥에 그냥 둔 채 속치마만 입은 상태로 탁자에 앉았다. 원래대로라면 언제나 아델은 벨라를 위해서 드레스를 손수 옷걸이에 걸어 두곤 했다. 하지만 더는 그럴 필요도 없다.

‘그나저나 이맘때면…… 봄이라 한창 사교 파티가 밀려올 시즌이네.’

귀찮긴 하지만 아직은 어쩔 수 없다. 지금 당장 일을 터뜨리기엔 여러모로 무리가 있다. 아델은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셀리나라는 존재가 필요했다.

아델의 금안이 기묘하게 번뜩였다. 공작 부인은 곧 임신을 한 걸 알게 될 테고 그러면 공작가의 사람들이 제게 둔 관심이 사라질 거다.

“책이나 읽자.”

서고에 처박혀 있는 것이 괜한 사람들을 안 만나는 지름길이다.

아델은 속치마도 마저 벗고, 그것을 대충 바닥에 던졌다.

툭 떨어진 옷이 널브러졌다.

잠옷으로 입는 하늘하늘한 실크 원피스를 입은 아델은 방을 나섰다. 아치형 계단을 내려와 서고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돌아온 펠리스 때문인지 집 안은 시끌벅적했다.

아델이 분주한 사용인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쳤다. 그러고는 곧장 1층 구석에 있는 방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았다. 비프타 공작 저택의 서고는 지하에 있었다. 지하로 가는 계단은 아무나 찾을 수 없었다.

사용인들은 전부 알지만, 외부인은 절대 알 수 없는 곳. 비프타 공작가의 긴 역사가 적힌 책들도 보관되어 있어서 출입 권한은 직계 가족과 저택 관리인, 시녀장 정도에게만 있었다.

“조용해서 좋지.”

넓은 소파도 있고 책도 많다. 뭣보다 이곳에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종종 그녀가 도피처로 삼았던 곳이다.

아직 한낮이다. 밤까지는 이곳에서 계속 책을 읽을 생각이었다. 머릿속도 뒤죽박죽이라 조금 정리하고 싶기도 했고.

아델이 천천히 책장을 훑었다. 읽지 않은 책을 한 움큼 꺼낸 그녀가 소파가 있는 곳에 책을 쌓았다. 빨리 읽는 만큼 시간은 빨리 갈 테니까. 두툼한 책을 하나씩 옮겨 나른 아델이 소파에 엎드렸다. 그녀가 손을 뻗어 책을 펼쳤다.

팔랑팔랑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오랜 시간 계속됐다.

* * *

한참을 푹 빠져 글을 읽었다. 아델은 근육이 굳은 것처럼 찌뿌둥한 느낌에 기지개를 쫙 켰다.

“하루 만에 열 권은 무리였나?”

아직 읽지 못한 것이 세 권하고도 반이다.

‘아쉽지만…….’

내일부터는 책을 읽을 시간이 없을 거다. 기억하기로는 사냥 대회가 있어서 그곳에 참가하기 위해 이런저런 준비를 해야 했다. 아델 본인의 의지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굳이 내가 참여해야 하나?”

그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때도 아델이 한 것은 장신구를 고르고 옷을 고르는 것이었는데 솔직히 새로 살 필요는 없었다. 새로 살 필요가 없으면 사실 그녀가 참여할 필요도 없다.

‘애초에 그런 건 시녀가 하는 일이잖아.’

그때 바빴던 이유는 그녀가 시녀들이 하는 일을 도와주기 위해 빠듯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엔 그럴 일이 없다. 아델은 누구도 도와주지 않을 거고 제 할 일에 전념할 거다.

“그럼 내일도 와서 읽을 수 있겠구나.”

아델의 목소리에 한층 기대감이 깃들었다. 일주일 뒤의 사냥 대회에 따라가도 어차피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막사에 앉아 있거나 응원석에 앉아 있거나 마차에 앉아 있거나 하는 정도였다.

사냥 대회에 참가하는 공작과 펠리스에게 주기 위해 가져간 구슬에 여러 가닥의 실이 달린 술도 결국은 전해 주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펠리스에겐 다른 여식들이 매우 많이 전해 줬고 공작은 얼굴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워낙 공사다망하신 분들이어야 말이지. 그러니까 이번엔 굳이 술을 만들지도 사지도 않을 예정이었다.

‘내 머리 장식에 달 것만 하나 가져가야지.’

영애들은 사냥 대회에 참가하는 기사나 귀족 혹은 약혼자를 위해서 직접 진주나 유리로 만든 구슬에 형형색색의 실을 매달아 ‘술’을 만든다.

그것을 참가자들에게 건네면 그들은 몸 어딘가나 혹은 검에 매달고 참가를 한다. 그리고 영애들은 자신이 준 술과 한 쌍으로 만든 또 다른 술을 당당하게 머리 장식에 매달고 경기를 관람한다.

개중에서 가장 많은 사냥감을 잡은 사람과 가장 큰 사냥감을 잡은 사람, 두 사람이 각각 시상대에 올라 포상금과 금으로 만든 트로피를 받는다.

‘분명히 이번에 열리는 사냥 대회는 이례적으로 우승자가 한 명이었지.’

한 사람이 사냥감을 가장 많이 잡았고 또 그가 잡아 온 사냥감이 가장 컸다. 새까만 갑옷을 입고 머리까지 투구로 꽁꽁 감춘 탓에 아무도 그에게 술을 주지 않았었지.

“음. 그 사람한테나 줄까?”

어차피 사교계에 입지는 다져 놓아야 하고. 우승자는 아주 적당한 타깃이었다.

그때도 괴롭힘을 받았다. 줄 사람이 그렇게 없었냐며, 영애의 수치라고 말이다. 그 뒤에 여러 차례 따돌림이 있었다. 가족도 받아 주지 않은 불쌍한 술이라면서.

‘그건 좀 짜증 났지.’

구설수를 피하려면 누군가에게 주는 편이 낫다. 사실 그렇게 실력이 뛰어난데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는 게 놀라웠지.

“재료는 하나만 사 둬야겠네.”

이맘때쯤이면 어디를 가든 술의 재료는 다 떨어졌을 확률이 높지만.

‘내일은 시장에 다녀오자.’

집을 벗어날 좋은 기회다. 아델이 만족스럽게 생각을 마치곤 책을 정리했다. 그녀가 서재를 나왔다.

“이쪽도 없는 것 같습니다.”

집 안이 이상하게 어수선했다.

아델이 미간을 좁힌 채 빠져나온 문을 닫았다.

‘또 뭔 일이 있나?’

아델이 느릿하게 기억을 떠올렸다. 이맘때는 딱히 기억에 남는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아델은 제 방으로 향하기 위해 1층 로비를 가로질렀다. 언제나처럼 유유히 지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카레나 아가씨!”

눈이 마주친 벨라가 놀란 표정으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아델이 무심하게 벨라를 쳐다봤다.

“왜?”

“의원을 모시고 왔는데 없으셔서 놀랐어요. 말씀도 안 하시고 어딜 갔다 오신 거예요? 아무리 찾아도 안 계셔서…….”

따지는 듯한 목소리가 퍽 불쾌했다. 아델의 미간이 좁아졌다.

애초에 벨라가 걱정하는 게 정말 제 안위일까?

아델이 묵묵히 그녀를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서재에 있었어.”

“그래도 다음에 어디 가실 땐 꼭 말씀해 주고 가세요.”

“내 위치 파악은 네가 하렴, 벨라. 난 네가 모시는 아가씨가 아니었니?”

애써 차분하게, 그러나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벨라에겐 봐준 것이 많다. 애초에 사용인이 모시는 주인에게 따지는 듯한 말투를 쓰는 건 기본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게 벨라는 아델 이외의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절대로 저런 말투를 하지 않는다.

“네……?”

벨라가 입을 벌린 채 되물었다.

“내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아니, 대체 갑자기 왜 그러세요?”

벨라가 놀란 눈을 하면서 되묻는다. 꼿꼿하게 든 목은 주인에 대한 존경이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

“이렇게 마음대로 돌아다니시면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아델의 경고에도 벨라가 소리를 높였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치켜뜬 시선이 퍽 불경하다. 이 정도면 대놓고 무시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다. 사용인이 이런 데도 공작은 내게 카레나 비프타의 모든 것을 줬다고 할 셈인가?

‘내 말을 무시하던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생각해 보면 벨라가 이렇게 종종 무시하는 느낌을 주니, 사용인들이 자신을 만만하게 본 것도 있을 거다.

“내가 왜 마음대로 돌아다니면 안 되는데?”

“그거야 아가씨는……!”

입을 열려던 벨라가 주변 시선에 아차 싶었는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 위험하시니까요. 어쨌든 다음부턴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얼른 돌아가시고요.”

명령하는 듯한 말투에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뚝 끊어졌다. 거기에 더해 손목을 낚아채 끌고 들어가려고 하는 벨라의 모습에 아델이 힘을 줘 버티다 뿌리쳤다.

짜악-!

날카로운 소리가 중앙 홀에 울렸다.

벨라가 거세게 날아간 제 손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시선이 모였지만, 아델은 고개를 치켜든 채 벨라를 가만히 쳐다봤다.

벨라가 눈을 크게 떴다. 단 한 번도 아델은 벨라의 말을 거부하거나 이렇게 거센 반응을 한 적이 없었다.

“벨라, 입 다물고 이 악물어.”

벨라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드는 순간 아델의 손도 허공을 갈랐다.

짜악-!

벨라의 고개가 왼쪽으로 홱 돌아갔다.

아델이 얼얼한 손을 꾹 참으며 계속해서 치켜든 고개를 유지했다.

“꿇어.”

“네에?”

“꿇고 빌어. 아니면 넌 해고야.”

주변에서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아델은 수도의 슬럼가를 맨몸으로 뒹굴던 소녀였다. 환경의 영향으로 당연히 그리 성격이 좋진 않았다. 그저 카레나 비프타의 연기를 하며 조금이라도 관심을 받고 싶어서 지금껏 성격을 누르고 눌렀을 뿐이다.

“무…… 무슨……?”

“주인을 주인으로 알지 않는 개를 교육하기 위해선 제 위치를 알려 주는 게 제일이지. 왜? 불만 있니?”

벨라는 입을 뻐끔거리며 충격받은 표정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네 위치를 알아야지. 난 네 주인이고 넌 내 사용인이야.”

지금껏 아델이 숨을 삼키고 지낸 것은 공작가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 했고 누구에게도 미움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회는 한 번뿐이야. 마지막이야. 꿇고 빌어.”

벨라가 떨리는 시선으로 아델을 쳐다봤다. 아델의 차가운 눈빛에 진심임을 깨달은 벨라가 바들바들 떨리는 몸으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죄, 죄송합니다.”

“뭐가?”

“네?”

“뭐가 죄송한데?”

벨라가 벌겋게 달아오른 볼을 한 채 떨리는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아가씨.”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인 벨라가 말했다.

“주제를 안 것 같아 다행이구나.”

그 한마디만을 내뱉은 아델이 벨라를 스쳐 지났다. 그러면서도 느릿하게 주변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시녀 몇과 시종 몇이 아델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그들이 찾아다니던 건 자신인 모양이었다.

조금 질린 기분이 됐다.

‘이런 기분도 있구나.’

아델이 여유롭게 걸어 아치형의 계단으로 향하자 벨라가 볼을 부여잡으며 황급히 그녀의 뒤를 쫓아왔다.

“한 번만 더 내게 주인의 예를 갖추지 않으면 난 널 해고할 거야.”

“저는 단지…….”

“넌 네가 할 일만 잘하면 돼. 난 내가 할 일을 잘하고 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아델은 입을 다물었다.

이제 그녀는 공작 부인이 자신의 임신 사실을 빨리 알아채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공작 부인은 그때까지 건강해야 한다. 적어도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없어졌다고 들었는데…….”

계단 앞으로 다가가자 펠리스가 서 있었다.

평소에는 절대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긴,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모습이 보이면 쪼르르 다가가서 말을 걸던 건 언제나 카레나 비프타를 연기하던 아델이었으니까.

“서재에 있었어요. 제가 없어지기라도 바라셨어요?”

아델의 물음에 펠리스는 대답 없이 미간을 좁혔다. 아델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아델로서도 대답을 기대했던 건 아니다. 그녀는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곤 계단을 올랐다. 벨라가 허리를 깊게 숙여 펠리스에게 인사를 건네곤 아델의 뒤를 쫓았다. 펠리스는 아델을 붙잡지 않았다. 그저 팔짱을 낀 채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을 뿐.

2층으로 올라간 아델이 곧장 방으로 향했다.

“방까지 쫓아올 거니?”

“그…… 식사도 하지 않으셔서요.”

벨라가 위축된 표정으로 말했다. 살짝 눈꺼풀을 내리깐 것을 보니 꽤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불만은 내뱉지 못한다.

아델이 자유를 잃고 가진 카레나 비프타라는 이름의 권력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걸 멍청하게 썩히고 있었으니 사용인들이 우습게 보지 않았을 리가.

“시장하실 텐데 요깃거리를 따로 올리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오늘은 정말로 몸이 좋지 않아 입맛이 없어. 그리고 내일부터는 따로 부르지 않으면 아침에 깨우러 오지 않아도 돼.”

아델의 말에 벨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을 가만히 쳐다보던 아델이 다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오늘부터 일주일 일정을 말해 주면 내가 알아서 할게. 너는 다음 주에 일주일 일정을 정리해 오면 돼.”

“아가씨!”

벨라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델이 그녀를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자 벨라가 급히 고개를 숙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한 번 더 거슬리게 하면 정말 해고야, 벨라.”

“네…… 죄송합니다.”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차가운 아델의 목소리에 벨라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델이 느릿하게 눈꺼풀을 깔았다. 예전의 아델이었다면, 그저 넘어갔을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 아델은 그러지 않았다. 이것을 눈감아 준다면 그녀는 벨라가 잘못한 것이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되어 버리니까.

“다음 주에 사냥 대회가 있지?”

“네? 네에.”

“준비는 네가 알아서 해. 내가 할 일은 따로 없겠지?”

“…….”

앞서 호되게 혼난 벨라가 아델의 눈치를 보며 입을 꾹 다문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

“앞으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서고에서 보낼 거야. 물론 정말 중요하고 다급한 일이 아니면 서고에 찾아오는 것도 자제해 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벨라가 답답한 듯 발을 동동 구른다. 이제는 표정까지 울상이다. 그러면서도 차마 말은 못 하는 게 뺨 한 대의 효과를 보여 줬다. 예전이라면 안쓰럽다고 생각했을 표정인데, 어째서 이렇게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 건지 신기하기만 했다.

하긴, 죽고 살아났는데 여전히 남아 있는 애정이 있으면 그건 호구지.

“이걸 내가 네게 말해 주는 이유는 또 오늘처럼 소란을 피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야.”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아가씨…….”

벨라가 울상인 표정으로 말했다.

“내일 술을 만들 재료를 사러 나갈 거야. 저녁이 되기 전엔 돌아올 테니 없다고 소란 피우지 마.”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아델은 제 할 말을 했다.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아니, 괜찮아.”

아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벨라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울상인 표정은 그녀를 한층 더 가녀리게 했다.

“제발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아가씨.”

“내 앞에서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언성을 높이고 감히 주인인 나를 탓하며 따지는 듯한 말투에 내 일거수일투족을 공작 각하께 보고하고.”

아델이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끌어 올려 웃으며 조소했다.

“왜, 더 말해 줘?”

아델의 말에 벨라가 새하얗게 질렸다.

‘마지막 말은 떠본 거였는데 정말이었을 줄이야.’

아델이 속으로 짧은 한숨을 삼켰다.

“애초에 시작부터가 잘못되었지.”

“…….”

“할 말은 다 했는데, 이만 가 봐. 전담 시녀를 바꿔 주면 더 좋지. 기왕이면 속사정 모르는 쪽으로.”

아델이 에둘러 말했다.

벨라는 이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절대 물러설 기미가 없다. 아델은 조금 피곤한 기분에 미간을 좁혔다.

벨라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가? 항상 매달리는 쪽은 자신이었기 때문에 이런 끈질긴 면도 있는 줄은 몰랐다.

아델은 늘 벨라를 다정하게 대하려고 필사적이었다. 벨라에게라도 칭찬을 받고 싶어서 애를 썼다. 그녀는 아델보다 예닐곱 살 더 많았는데 아델이 이곳에 왔을 때부터 돌봐 줬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델은 충족되지 않는 애정을 그녀에게서라도 채우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나 벨라는 어쩌면 너무 당연하게도 사무적이었다.

아델은 언제나 ‘카레나 비프타’여야만 했다. 그저 그녀처럼 투정도 떼도 불만도 내뱉을 수 없는, 만들어진 카레나 비프타였지만.

“벨라, 내가 누구니?”

“카레나 비프타 아가씨세요…….”

“그래. 잘 알고 있네. 난 카레나 비프타고, 넌 한낱 시녀야. 정말 해고당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나가. 내 입에서 험한 말 나오기 전에.”

아델이 마지막으로 말을 하곤 몸을 돌렸다. 그녀가 미련 없이 벨라를 문 앞에 둔 채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으로 들어오자 그제야 주변이 조용해졌다.

‘카레나 비프타가 된 뒤로는 누구한테 나쁜 말이라도 하려 하면 심장이 무섭게 뛰었는데…….’

괜히 별것 아닌 것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두렵고 무서웠다. 시녀나 시종에게 한두 번쯤 밉보인다고 해서 무슨 큰일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

아델이 옷을 입은 채 그대로 이불 속에 몸을 뉘었다.

‘내일은 술의 재료를 사고 그 뒤부턴 서고에서 책이나 읽어야지.’

과일을 좀 사 와서 방이나 서고에서 식사를 간단하게 끝낼 수 있으면 이 집안사람들이랑 더 엮일 일도 없을 거다.

“잘래.”

예전에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지만, 이제는 마음대로 할 거다.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도 시장에 나가는 덴 문제없다.

아델이 푹신한 이불에 들어가 눈을 감았다. 피곤했는지 잠이 밀려들었다.

‘이게 꿈이면 어떡하지?’

마지막으로 든 걱정이 머릿속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 * *

햇살이 눈부셨다.

아델은 눈을 찡그렸다가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평소라면 일어났겠지만, 오늘은 영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색으로 술을 만들지?’

남아 있는 술도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어차피 의리로 주는 거긴 하고.”

보통은 마음에 둔 사람에게 주기도 하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의리로 주기도 한다. 아델은 한 사람에게 줄 거지만 당연히 의리였다.

“일어나자.”

아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잠그고 욕실에 들어가 욕조에 물을 받고 몸을 담근다. 옆에 벨라가 없으니 눈치를 볼 사람도 없어서 편했다.

여유롭게 씻고 난 후, 복잡한 드레스가 아닌 혼자서도 입기 편한 원피스 형식의 옷을 골라 입었다. 밥은 나가서 먹기로 결정했다.

‘돈도 많은데 맘 놓고 써 본 적도 없는 것 같아.’

아델은 늘 눈치를 봤다.

돈을 쓰는 것도 전전긍긍했고 씻는 것도 말을 한마디 하는 것도 전전긍긍했다. 아델이 연기하는 카레나 비프타는 무척이나 여리고 착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습다. 세상에 선하기만 한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아침 식사도 같이 먹는 게 필수긴 한데…….’

아침 식사에 늦지 않기 위해서 아델은 늘 일찍 일어났다. 그렇게 한 시간 넘게 꽃단장을 하고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불편한 식사 자리에 참여했다.

매번 체하기가 일쑤여서 나중엔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샐러드만 먹는 것이 당연하게 굳어질 정도로.

옷을 다 입은 아델이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벨라?”

문 앞에 벨라가 전전긍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델이 나오자 화들짝 몸을 떨며 그녀가 당황한 표정을 했다.

“여긴 무슨 일인데?”

“아, 식사…… 식사 시간이 다가와서 안내해 드리러 왔어요.”

“그래?”

모습을 보아하니 꽤 오래 서 있었던 것 같다.

‘식사 참석을 안 하면 또 잔소리를 할 테고. 귀찮은 건 질색이야.’

머릿속에 든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 곧 내려간다고 전해 주렴. 그리고 오후엔 외출할 거야.”

대충 식사를 하는 척이라도 하고 올라와야겠지.

그녀의 말에 벨라는 기쁜 듯 보였지만, 이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오후엔 혹시 시장 때문이신가요?”

“그래. 시장에 갈 예정이고 너는 따라오지 않아도 돼. 참고로 난 이게 준비를 다 한 거란다. 액세서리는 착용하지 않을 거야.”

아델이 말하자 벨라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델을 쳐다봤다.

“다음부터는 제가 도와드릴 수 있게 해 주세요…….”

벨라의 말에 아델이 말없이 웃었다. 예전에는 그렇게 귀찮아했으면서. 밥그릇이 사라져가는 듯한 모양새에 두려웠던 모양이다.

“내 할 말은 끝났는데, 이만 나가 보고 내가 말한 대로 알고 있으렴.”

아델은 식사를 마치고 바로 시장에 갈 요량이었다. 그래서 미리 챙겨 놓은 돈주머니를 소맷자락 안쪽 주머니에 넣고는 유유히 계단을 내려갔다.

벨라가 다급하게 쫓아오려고 했지만, 아델이 눈빛으로 그녀를 제지했다. 벨라는 다행히 뒤를 쫓아 나오진 않았다.

곧장 식당으로 갔다. 이미 다른 가족들은 모여서 식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자주 있었던 일이라 새삼스럽지도 않다.

“좋은 아침이어요. 아버지, 어머니.”

“그래.”

공작 부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혐오스러운 시선이 아델을 향했다. 아델은 묵묵히 그것을 받으며 펠리스를 쳐다봤다.

“그리고 오라버니.”

아델의 인사에 대답을 해 주는 건 그나마 비프타 공작뿐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게다가 어차피 그들은 먼저 식사를 끝내고 일어날 거다. 그리고 아델은 먹는 척만 할 예정이었다. 이 자리에서 먹는다고 식사가 잘될 것 같지도 않고. 체하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래. 나도 이만 일어나지.”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면 공작 부인도 자리에서 일어나기 마련이다.

“천천히 먹고 들어가거라. 카레나.”

공작이 형식적으로 말했다.

“네, 아버지.”

세 사람이 식당에서 나가자 샐러드를 끼적거리던 아델이 포크를 손에서 내려놨다. 넓은 식당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 있는 것도 우습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냅킨을 의자 위에 올려 뒀다. 그녀가 곧장 식당을 나서서 저택의 출입문으로 향했다.

아델을 발견한 문지기가 고개를 숙였다.

“외출하십니까, 아가씨? 마차를 내올까요?”

“아니, 됐어요. 조금 걸을 거라서. 저녁 전엔 돌아올 테니 신경 쓰지 마요.”

“그렇다면 호위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그것도 됐어요. 조용히 다녀오는 거니까. 로브를 쓰고 다닐 거니 눈에 띄지 않을 거예요.”

아델이 담담하게 고개를 내젓자 고민하던 기색의 병사가 허리를 굽혔다. 눈빛에 의뭉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원래라면 아델은 기사들 앞에선 늘 제대로 입도 열지 못했으니 당연하겠지만.

공작가의 사병은 돌아가면서 저택을 지키고 순찰을 한다. 유독 경비가 강한 이유는 공작가에는 적이 많기 때문이다. 비프타 공작은 소드 마스터인 데다가 전형적인 황제파의 인물이라서 적대적인 인물이 많다. 물론 함부로 덤빌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그리고 그것이 정략결혼을 하러 가던 아델이 죽은 이유기도 했다.

‘겉으로는 분명 황제와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혼약이었지.’

공작에게는 그것이 좋은 일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자신은 죽었다. 아마도 공작에게 사주를 받은 것처럼 보이는 자에게.

‘왜 날 죽였지?’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쓸모가 있었다면 죽일 필요가 있었을까?

의문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게다가…… 나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팔려 가듯 결혼하러 가다가 결국 죽는 운명이란. 비참하고 우습기 그지없다. 지금 생각해도 한 편의 극을 보는 기분이다.

아델이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공작가의 저택을 빠져나갔다.

* * *

저택을 나온 아델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저 안에만 있으면 얼굴이 절로 무표정이 되는데 밖에 나오니 기분이 달랐다.

아델은 상쾌한 기분을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공작 부인이 자기가 임신한 사실을 언제 알게 되더라?’

언젠가 식사 중에 입덧을 하던 날 알게 되는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그게 언제쯤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공작 부인이 셀리나를 가졌을 때, 아델도 무척이나 기뻤다. 여동생이 생길 거로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아델은 공작 부인에게 가까이조차 갈 수가 없었다.

‘공작 부인은 내가 다가가면 늘 불편한 기색을 보였으니까.’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정략결혼 이야기가 갑작스럽게 나와서 급하게 일이 진행됐던 것은.

“어차피 내 역할은 이미 끝난 거나 마찬가지니까.”

카레나 비프타는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아델은 그 사실만을 증명하면 됐다. 그리고 그녀는 지난 10년간 그것을 끊임없이 증명했다.

‘그동안 안 쓴 돈으로 먹고 싶은 거 먹고 사고 싶은 거나 사야지.’

따지고 보면 이건 아델에게 주어진 대가다. 10년간 카레나 비프타의 대역을 해 준 노동의 값. 당연히 그녀에게 주어진 것이 맞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게 맞다.

“식당을 차려도 좋고 아니면…… 여관도 괜찮겠네.”

여관은 방만 내주는 형식이니까 방 정리만 깨끗하게 하면 될 테고 말이다. 간단한 주점을 1층에서 같이 운영하면 훨씬 더 괜찮을 거다.

‘그 정도면 혼자 먹고살기엔 딱 좋지.’

그것도 아니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음유 시인도 괜찮다. 노래엔 큰 자신이 없으니 아마도 그냥 연주가가 되겠지만.

“그것도 아니면…… 어디 의원님의 제자로나 들어갈까?”

큰 도시나 큰 마을에 가면 약재상이나 의료소가 있다. 그 밑에 들어가면 숙식도 해결되고 월급도 받을 수 있다고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났다.

‘고고학자도 나쁘지 않고.’

고대어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그걸 번역하면서 세계 곳곳을 탐방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려면 모험가 집단에 들어가야 하는데.”

모험가 중에도 탐사를 목적으로 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학자들을 호위하면서 몬스터도 잡고 학자가 낸 논문이나 정보로 돈을 모아 함께 생활하기도 한다. 가족과 같은 거다.

으음.

팔짱을 낀 채 앞으로 걸어가는 아델의 표정에 곤란함이 섞여 들었다.

“할 줄 아는 게 많으니 뭘 할지도 고민이네.”

어릴 때부터 필사적으로 공부한 것들이 다행히도 그녀가 혈혈단신이 됐을 때 다 써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곱게 자라는 다른 영애들을 생각하면 뭐라도 해 먹고살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이 아델의 위안 중 하나였다.

사실 열 살 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삶은 시궁창이었다. 뒷골목에는 그런 애들이 많았다.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저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바쁜 아이들.

아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먹을 음식이 없어서 쓰레기장을 뒤지거나 구걸했던 적도 있다. 다 썩은 음식을 먹을 때도 있었다. 사실 뒷골목 쓰레기장은 대부분 그 일대의 힘 있는 아이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아델의 선택이란 대개 구걸이었다.

그리고 어느 비 오는 날, 아델은 비프타 공작에게 거둬졌다.

* * *

10년 전.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바닥엔 흙탕물이 가득하고, 지나가는 마차가 물웅덩이를 밟으며 지나가면 물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아델은 언제나처럼 비를 피하려고 구멍이 숭숭 뚫린 지푸라기 천막 아래에 몸을 작게 웅크리고 있었다. 막혀서 떨어지지 못하는 비가 반, 흘러내리는 비가 반, 그중에서 그녀의 몸에 떨어지는 게 그 반의반 정도였다.

‘배고파.’

여름인데도 춥고 배가 고팠다. 음식을 먹지 못한 지 벌써 이틀째였다. 비가 이틀째 주룩주룩 내렸다. 시장 근처에 자리를 잡았지만, 평소에는 맛있는 냄새에 이끌리는 사람도 지금은 없었다.

우기에는 비가 쉼 없이 내렸다. 음식을 구하는 것도 비 오는 날은 무척이나 어렵다. 쥐와 길고양이가 비가 오면 잘 나오지 않는 만큼 사람들도 밖으로 돌아다니질 않았다. 그러니 떨어지는 음식도 버려지는 음식도 그리 많지 않았다.

볼이 움푹 들어간 소녀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의 발걸음을 재촉하기에 바빴다.

그때쯤이었다.

이름 모를 로브를 뒤집어쓴 기사 둘이 그녀를 찾아온 것은.

“이거야?”

“확실히 돌아가신 아가씨를 닮았군.”

“뭐야!”

코앞에서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성인 남자에게 아델이 몸을 한껏 부풀리며 소리를 질렀다. 날카롭게 지르는 비명에 골목에 사는 몇몇 녀석들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누구도 도와주진 않았다. 아마도 그들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사이에 키득거리는 놈이 둘 있었다. 매번 심심하면 아델에게 치근덕대던 놈들이었다. 몇 번인가 다리 사이를 발로 차 쫓아냈던 적이 있었다.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든 생각이지만, 아델은 그날 그 자리에서 뒤를 돌아 도망갔어야 했고, 그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데리고 가지.”

그들이 그녀의 목을 틀어쥐었다. 제 나이 또래에 비해 한참이나 마른 몸의 아델이 단련에 단련을 거듭한 기사의 손아귀를 벗어나기란 애초에 무리였다.

발버둥을 치는 아델을 그들은 거칠게 다뤘다. 나중에 건너 건너 알게 된 사실에 따르면 손속에 자비를 두라는 말은 딱히 없었다고 했다.

아델의 뒷덜미를 쥔 기사는 아이를 안고 말에 올라탔다. 떨어지면 어딘가 하나 부러질 것 같은 높이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리고 아델은 태어나 난생처음, 온기로 달궈진 따뜻한 집 안에 발을 들였다.

밖처럼 춥지 않은 그저 공기만이 훈훈한 온기.

‘귀족?’

아델이 한껏 몸을 움츠렸다.

귀족은 위험했다. 귀족은 그들이 마차에 치여도 더러운 게 묻었다며 침을 뱉고 그대로 지나가는 족속이었다.

아델은 마차에 치인 놈들을 여러 번 봤다. 목이 기이하게 꺾여 죽기도 했고 누군가는 다리 한쪽을 완전히 잘라 내야 했다. 눈앞의 귀족을 보며 아델이 몸을 한껏 움츠렸다.

“뭐, 뭐예요……?”

“내가 너를 샀단다. 넌 오늘부터 내 딸로서 생활하게 될 거야.”

비프타 공작이 말했다. 무뚝뚝한 얼굴 위에 드러난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 사뭇 눈에 띄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이질적일 만큼 다정해서 아델은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쳐다봤다.

“……?”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길거리 고아인 자신을 누구에게서 샀는지, 어떻게 딸로서 생활하게 되는지. 그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도망갈 틈이라도……!’

“도망은 불가능하단다.”

비프타 공작이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무슨 개소리를……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요?”

“난 멍청한 걸 좋아하지 않는다. 앞으로 네가 부디 똑똑한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뒷골목을 전전하며 살아온 인간이 똑똑해 봐야 얼마나 똑똑할 수 있을까?

비프타 공작이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무슨……?”

“나는 네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것들한테서 널 구해 줬단다. 평생 밑바닥에서 버러지처럼 구를 널 구해 준 거지.”

비프타 공작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다정하게 말했다.

‘날 구해 줬다고?’

게다가 자신의 주인이라니 무슨 소리인가? 아델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다.

“나는 네가 누군지는 상관없단다. 비참한 생활이었지 않니?”

비프타 공작이 속삭이듯 말했다.

“이곳에선 편하게 살 수 있다. 네가 내 말에 잘 따른다면 나는 네게 내 딸이 누려야 했던 모든 것들을 주마.”

아델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네가 원하는 어떤 것이라도.”

비프타 공작은 장갑을 낀 채 아델의 볼을 살짝 쓸었다.

웃지 않는 눈과는 다른 다정한 목소리. 저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 소녀는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원한다면 언젠가 네게 자유를 돌려주도록 하마. 평생 일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돈도.”

“…….”

전혀 손해 볼 것 없는 이야기였다. 성장기를 편하게 보내고, 언젠가 돌아갈 수 있다면. 아델의 머릿속이 자기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할 수 있겠니?”

비프타 공작이 말했다.

아델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프타 공작이 웃었다.

“착하구나.”

가죽 장갑을 낀 손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정한 목소리와 다정한 손길. 싸늘한 눈은 그것이 거짓이란 걸 알게 했지만, 아델에게는 달콤한 마약 같은 생소함이었다. 위험하고 독이 될 것을 알지만, 끝없이 그것을 먹고 싶어서 갈망하게 될 것 같았다. 아델은 자신이 벗어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여기서 뿌리치고 도망가야 했다. 혹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태어나서 만난 인간이라곤 전부 그녀를 잡아 죽이거나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려는 어른들뿐이었다. 그러니까 아델에게 비프타 공작의 거짓된 다정함은 독이었다.

어린 소녀는 멀어져 가는 그의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소녀는 주어진 불친절한 설명에도 한순간의 미소에서 다정함을 느껴 버리고 말았다. 언젠가는 깨어져 부서질, 얇은 얼음판 위의 진실이라고 해도.

소녀가 어른이 되어 그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부터 네가 할 일은 ‘카레나 비프타’가 되는 것뿐이다.”

비프타 공작이 가죽 장갑을 벗어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말했다.

“아. 단, 한 가지만 경고하마. 우리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라. 너는 그저 조용히, 쥐 죽은 듯이 카레나의 대역만을 하면 된다. 그러면 비참한 생활로 돌아가지 않고 평생을 굶주릴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테니.”

싸늘한 내용과는 다르게 다정함을 가장한 목소리는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는 듯했다. 높으신 귀족의 집무실은 전혀 춥지도 않은데, 아델은 추운 듯 몸을 떨었다.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만한 능력이 되지 않는 머릿속에 과부하가 걸릴 만큼의 정보가 스며들었다.

그녀는 아무런 질문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다음에는 곧장 시녀들의 손에 팔이 붙잡혀 끌려 나갔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저걸 카레나로 대해라. 그리고 격식에 맞게 만들어 놓도록 해.”

아델이 끌려 나가자 커다랗게 보이는 문이 천천히 닫혔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 마지막으로 아델이 들을 수 있었던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문틈으로 새어 나온 말은 오래도록 아델에게서 잊히질 않았다.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것 같은 순간이었다.

‘내가 왜 고개를 끄덕였지?’

뒤늦게 아델이 입을 벌리며 경악했다.

“일단 몸이 더러우니 씻기겠습니다.”

아델이 몸을 움츠렸다. 그녀의 의지는 없다는 듯 흙탕물과 비에 젖어 축축했던 옷이 벗겨졌다. 비를 맞은 아델의 피부는 차가웠고 욕조에 담긴 물은 차가운 피부의 아델에겐 버거울 정도로 뜨거웠다. 시녀에게 안긴 아델이 그제야 멍한 꿈에서 벗어난 것같이 발버둥을 쳤다.

“내가 씻을 수 있어! 놓으라고!”

소녀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발버둥을 치자 시녀가 단단히 아델의 팔을 옭아맸다. 아델은 물건을 훔쳐 달아날 수 있는 잽싼 다리와 순발력은 있었지만, 아쉽게도 근력은 전혀 없었다.

“앞으론 그렇게 언성을 높이시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나는……!”

“자세한 이야기는 몸을 씻은 후에 집사장께서 해 주실 겁니다.”

단 한 번도 타인의 온기가 닿지 않았던 몸에 닿는 온기가 꺼림칙했다. 기분 나쁠 정도로 꿈틀거리며 몸을 간지럽혔다. 움찔움찔 온기가 닿을 때마다 떨리는 몸에 아델이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렸다. 시녀는 발버둥 치는 아델을 욕조에 넣고 몸을 씻겼다. 몸에 닿는 손길이 거칠진 않았지만 억세서 작은 몸으로 도망치기엔 무리가 있었다.

‘손만 놓으면……!’

잡힌 손만 놓으면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어려웠다.

‘지금이라도 도망을…….’

아델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녀의 손을 시녀는 놓치지 않았다.

‘착하구나.’

그때, 다정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아델이 멈칫하자 두 여인이 빠르게 움직였다. 성인 여자 둘이 아이 하나를 다루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듯했다. 낯선 공기와 낯선 사람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귀족들에게 고아의 취급이란 대개 이랬다. 아니, 어딜 가든 고아의 취급이란 다를 게 없었다. 언제 없어져도 언제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존재였다.

“카레나 아가씨, 뒤로 돌아 주세요.”

‘내가 카레나……?’

그런 건가?

‘네가 내 말에 잘 따른다면 나는 네게 내 딸이 누려야 했던 모든 것들을 주마.’

‘네가 원하는 어떤 것이라도.’

머릿속에 이상하게 자꾸 그 말이 맴돌았다.

‘내가 바라는 것…….’

그런 게 있던가?

그사이 몸을 더듬는 손길에 아델이 파드득 몸을 떨었다.

“옷 정도는 내가 입을 수 있다고 하잖아!”

“언성을 높이시면 안 됩니다.”

기계적으로 내뱉는 말에 아델이 얼굴을 구겼다. 그녀가 입을 꾹 다문 채 몸을 돌렸다. 아델은 뒷골목에서 구른 만큼 상황 파악이 빨랐다. 지금 그녀의 서열은 바닥이었다. 이곳에서 무사히 살아 나갈 수 있는 확률을 계산해 봤을 때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가장 확률이 높았다.

아델이 이윽고 몸을 씻고 난생처음 입는 비단으로 된 잠옷을 걸쳤을 때 그녀는 욕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시녀의 손은 여전히 아델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아델이 그녀의 걸음을 맞추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여러 개의 방을 지나 아델에게 주어진 것은 커다란 방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카레나 아가씨.”

연미복을 곱게 차려입은 집사가 아델에게 허리를 굽혔다.

집사장이라는 남자는 시녀들을 내보냈다. 그는 아델을 소파에 앉히곤 그녀가 공작에게 듣지 못한 것에 관해 이야기했다. 카레나 비프타라는 진짜가 ‘칼럿’이라는 이유 모를 불치병으로 죽었다는 것. 세간에 좋지 못한 병으로 알려져 대역이 필요했다는 것. 그것이 아델 자신이라는 것도.

“날 데려온 그 사람이 날 샀다고 했어요. 나는 고아인데 누구한테 샀다는 건데요?”

“듣기론 당신의 오라비들이라고 하더군요.”

“난 형제가 없……!”

아델의 머릿속에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뜨리던 놈들이 떠올랐다. 아델이 주먹을 쥐었다.

“그 새끼들!”

매번 음식을 구하면 굳이 그녀를 괴롭혀 물건을 뺏어 가던 질 나쁜 놈들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표적을 아델로 잡고는 시도 때도 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오죽하면 깡으로 버티던 아델이 골목을 옮겨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할 정도였다.

“지금부터 당신은 카레나 비프타 아가씨이니, 그에 맞는 교양을 배우셔야 합니다.”

아델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런 복잡한 일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난, 그런 거 못 해요. 못 들은 얘기로 할 테니까…….”

아델이 고개를 젓자 집사장이 일견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델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왜요! 아저씨, 저는 그런 거 못 해요. 그러니까……!”

“얘기를 들으셨으니 이미 발을 들이신 겁니다. 여기서 나가신다면 안타깝지만, 아가씨께선 살아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시진 못할 겁니다.”

아델이 몸을 굳혔다. 그들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 아델은 잘 알고 있었다. 죽이겠다는 협박이었다. 머리가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협박.

“하지만…….”

“불편한 건 없으실 겁니다. 다만, 귀족의 소양을 전부 몸에 익히실 때까진 저택에서 나가실 수 없습니다.”

갈 곳을 잃는다는 건 그들에게 무척이나 간단한 일이었다.

아델의 취급은 정말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카레나 비프타로 불렸고, 카레나 비프타처럼 대해 졌으며 누구도 골목길에서 빵을 훔치던 고아 아델로 그녀를 대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조금 우쭐했다고, 그녀도 순순히 인정했다.

갑작스럽게 바뀐 환경은 너무 따뜻하고 편안했다. 먹고 싶은 음식을 손으로 집어서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없었고, 식사 중에도 수없이 지적을 당했다. 매일매일 살인적일 정도의 교육을 받았지만, 뒷골목보단 낫다고 생각했다. 저택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고 그저 창밖으로 정원을 내다보는 것이 그녀의 일과였다.

하지만 굶지 않고 이불은 푹신하고 자신의 방도 있고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됐다. 비가 새는 지푸라기 밑에 웅크리지 않아도 된다는 건 길바닥을 전전해 왔던 열 살의 아델에겐 마치 천국과도 같았다.

처음에는 못마땅했던 비프타 공작이 세상에 없을 천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평생 믿지 않았던 신이 사실은 존재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일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교육을 3년쯤 배우자 아델도 그런 생활에 익숙해졌다. 귀족을 보면 몸을 움츠리던 소녀는 오랜 교육 끝에 이제 어깨를 당당히 펴고 다닐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아델이 3년간 대화를 나눈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나마도 개인적인 대화는 하지도 못했고 하더라도 받아 주지 않았다. 그리고 3년간 공작은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사실 아델에겐 지난 10년의 세월이 너무도 고되었기에 3년간의 교육과 저택에서 나갈 수 없는 정도의 불편함은 감수할 만했다.

아델이 처음으로 두 공자와 공작 부인을 만난 건 그때쯤이었다. 그때까지 아델은 저택과 조금 격리된 공간에서 지냈다. 어느 정도 교육이 끝나고서야 아델은 그들이 생활하는 저택으로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처음으로 식사에 초대되고 아델은 조금 기대감에 부풀었다. 무슨 기대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름 모를 기대감이었다.

“오랜만에 뵙…….”

식당에 들어서 배운 대로 고개를 숙이려는 아델의 귓가에 뒷골목에서나 듣던 말투가 꽂혔다.

“와, 아빠! 저게 가짜 동생? 미쳤다. 진짜 개별론데. 야, 너 고아라며?”

“아…….”

“이런 걸 어떻게 동생 취급을 하라고……. 아빠도 진짜 너무하네.”

아델이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주홍빛 머리카락에 번쩍이는 금빛 눈동자. 장난기 넘실거리는 눈에는 짙은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콰른, 이리 오너라. 이제부터 밖에선 미리 설명한 대로 하는 거다. 알겠니?”

“으아, 알겠어요. 몇 번째예요?”

툴툴거리는 콰른 비프타의 머리를 비프타 공작이 퍽 부드럽게 웃으며 쓰다듬었다.

‘뭐야, 저렇게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굳은 표정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앉거라.”

아델이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무심하게 말했다. 콰른을 보던 따뜻한 눈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 후였다.

그제야 아델은 그녀를 바라보던 공작의 눈이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야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했다.

'한 가지만 경고하마. 우리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라.'

그가 첫날 내뱉었던 의미심장한 말의 의미와 함께.

의미를 깨달은 아델은 이름조차 모를 갈망과 갈증을 느꼈다. 그녀는 타인이 누군가를 볼 때 따스한 눈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델이 지금 눈앞에서 느낀 것은 그녀가 지금껏 단 한 번도 닿아 보지 못한 종류의 온기였다.

‘착하구나.’

한마디가 여전히 뇌리에 꽂혔다.

그리고 그것은 뒷골목에선 결코 맛볼 수 없었던, 어쩌면 그녀가 알아서조차 안 됐을 감정이었다. 남아 있던 옅은 원망조차 지워 버릴 만큼 지독한 감정은 어린 소녀에게 열망만을 남기고 스치듯 사라졌다.

* * *

“수도에 이렇게 나와 본 게 얼마 만이지?”

아델은 다과회나 혹은 파티에 초대받지 않으면 대부분 집에서 나오는 일이 드물었다.

“밥부터 먹자.”

아델은 늘 마차를 타고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눈에 담았던 식당으로 향했다. 늘 냄새가 마차 안까지 들어와 아델의 코를 자극했었다.

“와, 아침부터 줄이 기네.”

유명한 식당인 모양이었다. 아델이 줄의 맨 뒤에 섰다.

따뜻한 봄 날씨에 불어오는 바람조차 기분이 좋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바람 속에 꽃향기도 섞여 있다. 그동안 이런 여유나 이런 바람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아델은 여태까지 늘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음식 하나를 얻기 위해 이를 악물고 주먹질을 하던 아델은 카레나 비프타가 되는 순간 전부 죽여 버렸다. 속에서 죽여서 참고 또 참았다. 꾹꾹 억눌러서 ‘착한’ 카레나 비프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자유의 억압이었다. 하늘이 이렇게 새파랗다는 것을 아델은 줄곧 잊고 있었다. 맛있는 음식점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이 이토록 기대되는 일이라는 것도 그녀는 몰랐다.

“다음 손님!”

고개를 젖히고 있는 동안 어느새 줄이 확 줄어 있었다. 아델이 황급히 앞으로 갔다.

“몇 분이세요?”

“한 명이에요.”

아델이 웨이트리스의 안내에 따라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넓은 식당 안은 테이블이 빈틈없이 꽉 차 있었다. 아델이 정리된 테이블에 착석했다.

“주문하시겠어요?”

“음. 여기서 가장 유명한 음식이랑 과일 주스 하나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주문을 받아 물러나는 웨이트리스를 보며 아델은 나무 팻말을 테이블에 올려 뒀다.

“진작 혼자 나와 볼 걸 그랬네.”

나와 보지 않은 것이 조금 아쉽다. 늘 식탁 앞에선 바른 자세를 고수하던 아델이 비스듬하게 턱을 괸 채 나른한 웃음을 머금었다.

‘놓아 버리니 이렇게 편한 것을.’

무엇을 그렇게 원해서 평생을 그들의 뒤만 쫓았을까?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아, 감사해요.”

아델이 비스듬하게 기대고 있던 몸을 식탁에서 떼며 말했다. 손바닥 대여섯 개는 겹쳐 놓은 것처럼 커다란 접시에 음식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가운데에는 윤기가 좔좔 흐르는 잘 익은 스테이크가 놓여 있고 오른쪽 위에는 파릇파릇한 채소로 만든 샐러드가 한 움큼 놓여 있었다. 코를 자극하는 버터 냄새는 랍스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빨갛게 잘 익은 랍스터는 반으로 나뉘어 있었고, 그 위에 고소한 버터가 통째로 놓여 살살 녹으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왼쪽에는 폭신폭신한 버터 빵이 놓여 있다. 방금 오븐에서 나온 듯 연갈색으로 먹음직스럽게 익은 빵은 따끈따끈한 연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입 안에 침이 고일 정도다. 이렇게까지 오감을 자극하는 요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함께 나온 수프는 고소한 냄새가 짙게 풍겼다. 위에 잘게 잘라 올린 바삭하게 구운 마늘빵의 풍미가 특히나 독특했다.

언제나처럼 칼과 포크를 들어 빵을 자르려던 아델의 눈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왔다. 모두가 양손으로 빵을 쭉 찢어 먹는다. 아델이 포크를 내려 두곤 그들을 따라 빵을 반으로 잘라 수프에 푹 찍었다.

“맛있어.”

아델이 눈을 크게 떴다.

‘맞아, 식사가 이렇게 맛있었지.’

매번 식사 예절과 가족, 아니 공작 부부의 눈치를 보느라 음식 맛을 제대로 느낀 적이 없었다.

음식을 다 비운 아델이 웃었다. 아델은 음식값과 팁을 넉넉하게 탁자에 올리고 식당을 나섰다.

그러고는 미리 알아 둔 술 재료를 파는 가게로 곧장 향했다. 바깥에서 보이는 진열장에 전시해 둔 술이 몇 개 없는 것을 보니 예상대로 이미 귀족 영애들이 털어 간 모양이다. 아델이 술 가게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술 재료를 좀 사러 왔는데요.”

“아……. 어쩌죠? 이미 술 재료는 대부분 팔려서, 예쁜 색상은 남아 있지 않아요.”

곱게 옷을 차려입은 가게 주인이 곤란한 듯 얼굴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남아 있는 색이라도 보여 주세요.”

어차피 뭔가 큰 의미가 있어서 만드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예쁜 색상은 필요 없을 거다.

“음……. 검은색이랑 회색, 그리고 고동색 같은 어두운 색상뿐이에요.”

아델이 장식장에 매달려 있는 술을 가만히 쳐다봤다.

‘검은색 갑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검은색이면 충분하겠지. 아델이 생각을 마치고 입술을 벌렸다.

“검은색으로 주세요.”

“검은색이요? 검은색은 연인에게 줄 술을 만들기엔 적합하지 않은 색이 아닐까요?”

“줄 사람이 검은색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 괜찮아요.”

큰 의미 없는 술이니 아델도 고민하지 않아도 되어 괜찮고. 도리어 그 검은색 갑옷에 분홍색이니 노란색이니 하는 술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검은색으로 두 뭉치만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아델이 단호하게 주문하자 주인도 더 이상 말리진 않았다.

“술 위에 달 장식은 유리구슬과 진주 중에 어느 쪽이 좋으십니까?”

“유리로 세공한 구슬이요.”

“네, 금방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주인의 친절한 응대에 아델은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진열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경하는 사이 가게 주인이 종이로 된 봉투에 물건을 담았다. 아델은 값을 치르고 물건을 넘겨받은 후 다소 홀가분한 기분으로 가게를 나섰다.

* * *

사냥 대회가 다가오는 내내 아델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벨라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고 식사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며, 미리 통보했던 대로 대부분의 시간을 서재에서 보냈다.

무척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아델은 뒤죽박죽이 된 생각을 정리하고 계획을 하나둘 세웠다.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얼마 만이지?’

‘카레나 비프타’의 대역이던 아델은 늘 바빴다. 어딘가를 돌아다니는 게 아닌데도 바빴다. 저택에 있을 때는 뭐라도 하려고 노력했고 지식을 한 자라도 더 배우려고 애를 썼다. 다과회의 초대장이란 초대장은 거절하지 않고 전부 받아들였다. 뒤로 도는 별명이 ‘호구’였을 정도다.

그만큼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아델을 이용하기 바빴다. 그네들은 아델을 ‘착하다’라고 평가했지만, 사실 사교계에서 그건 욕과 다름없었다.

“하-암.”

하품을 크게 한 아델이 기지개를 쫙 켜곤 책을 정리해 넣었다. 오늘부터는 아무리 귀족의 삶을 제쳐 두기로 마음먹은 그녀라고 하지만 조금은 시녀들과 부딪혀야 했다. 드레스와 장신구를 정해 주긴 해야 했으니까.

‘모레가 사냥 대회니까.’

술은 자기 전에 짬짬이 만들어 뒀다. 한 개는 머리 장식에 달아 뒀고 한 개는 작은 비단 주머니에 챙겨 뒀다.

서재의 계단이 있는 방을 나가자 문 앞에서 서성이는 사람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아델의 미간이 좁아졌다.

“여기서 뭐 해?”

“아가씨를 기다렸어요.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벨라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애처롭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가증스럽기만 했다.

“내 탓을 하는 거야?”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입을 드레스와 장신구는 알려 줄 테니 메모해서 가져가도록 해.”

아델의 차가운 말에 벨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가씨, 정말 제가 큰 잘못을 한 것 같아요. 전, 도저히…… 아가씨가 갑자기 왜 화가 나셨는지 모르겠어요.”

“이유는 저번에 설명해 줬을 텐데.”

아델은 계단을 올라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벨라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사슴 눈망울만큼이나 동그랗게 떠진 눈동자에는 당황이 엿보였다.

“……네?”

“너의 주인인 내 명령보다 항상 이 집 식구들의 명령이 우선이지. 내가 아프다고 해도 너는 괜찮냐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잖아. 널 종종 도와줘도 고맙다는 말은 한마디도 듣지 못했어.”

아델은 지금껏 있었던 일을 벨라에게 하나씩 읊어 줬다. 그동안 공작저에서 벨라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만큼 그녀와의 기억이 아주 많았다. 추억이라고 할 순 없는 그저 그런 기억 더미일 뿐이지만.

“내가 너한테 이런 이유를 더 늘어놓길 바라는 거야?”

“그건…….”

“너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는 아니?”

“아, 새…… 샐러드를…….”

벨라가 더듬더듬 입을 열어 대답했다.

10년을 함께한 시녀다. 미운 정이든 고운 정이든, 혹은 어쩔 수 없이 들어 버린 애증이든 간에 감정이 아예 없다곤 할 수 없었다.

아델은 옷장 문을 활짝 열었다. 커다란 옷장 안에 몇 벌의 드레스가 곱게 걸려 있었다.

“난 이쪽의 레이스가 좀 덜 들어간 드레스를 입고 갈 거야. 머리 장식은 이거. 목걸이는 이거랑 귀걸이는 이거. 팔찌는 이거면 되겠지.”

아델이 손가락으로 입고 갈 드레스를 가리켰다.

보석함을 열어 안에 든 장신구도 하나씩 일러 주었다.

“이건…….”

“이게 내가 좋아하는 드레스야. 이게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색이고, 좋아하는 장신구지.”

“하지만, 이건 한 번도…….”

“카레나 비프타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니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벨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애초에 나와는 안 어울렸어.’

듣기로 진짜 카레나 비프타는 화려하고 레이스가 가득 달린 장신구를 무척 좋아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더는 카레나 비프타를 연기하지 않을 거다. 아델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취향의 옷을 골랐다. 속이 시원했다.

“벨라.”

“네.”

“난 벨라가 참 좋아.”

아델이 예전에 카레나 비프타를 연기했던 때처럼 해맑게 웃으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벨라의 눈동자가 당황을 담은 채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줄곧 너에게 자주 했던 말이지. 기억해?”

“네, 그럼요.”

벨라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번도, 너에게서 그럴싸한 대답을 들은 적이 없지만.”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묵묵하게 대답하자 벨라의 웃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가씨, 그건…….”

벨라가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무슨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겠지. 저 입에서 나오는 것이 어떤 변명이든 간에 아델은 그것을 달가운 마음으로 들을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아델은 그녀의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먼저 입을 여는 쪽을 택했다.

“벨라, 그거 아니?”

“어떤 걸 말씀이신지…….”

“난 세상에서 샐러드가 제일 싫어.”

그럼에도 언제나 식사에서 샐러드 접시만을 비웠던 건 그게 아니면 아무것도 소화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편하게 먹을 수 있을 때가 아니면 늘 샐러드만 입에 댔다. 그것이 누군가에겐 샐러드를 좋아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가장 물렸고 그래서 가장 싫어했다.

누군가 물어봤다면 솔직하게 대답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평생 단 한 번도 누구 하나 ‘아델’이 좋아하는 걸 물어본 적이 없었다.

“얘기는 끝났어. 이만 나가 보렴.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난 너에게 화나지 않았어.”

다만 모든 일에 의욕이 없어졌다. 더 이상 기대가 되지 않아서인지 어떤 것에도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안 나가니?”

“아니에요……, 필요하시면 불러 주세요.”

벨라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아델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최근 들어 주변의 시녀와 시종들이 수군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가씨가 갑자기 달라졌다, 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걱정스럽게 묻는 이도 있긴 했다. 그러나 아델은 입을 닫았다.

“곧 사냥 대회인가.”

‘아버지와 오라버니께 드려야지.’

머릿속에 들뜬 어린 소녀의 음성이 맴돌았다. 그건 아델이 난생처음 참가할 수 있었던 사냥 대회 때의 일이었다.

열네 살, 사냥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레이디의 최소한의 나이. 공작의 허가가 있었고 아델도 첫 참가에 무척 들떠 있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나가서 가장 좋고 인기가 많다는 색상의 술을 샀다.

서툰 솜씨로 밤을 새워 가며 열심히 술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술은 누구의 손에도 전해지지 못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건넸지만, 공작은 그것을 보고도 무시했다. 펠리스 비프타는 관심 없다는 눈으로 방해된다는 한마디와 함께 몸을 돌렸다.

사냥 대회가 끝나고도 몇 달이고 버리지 못하고 갖고 있던 술은 결국 울면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아델은 그날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 * *

사냥 대회 아침이 밝았다.

아델은 간단히 목욕을 끝내고 벨라의 치장을 기다렸다. 술을 단 머리 장식을 머리에 꽂는 것으로 마지막 단장이 끝났다. 그렇게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수수하지도 않은 복장이었다.

그녀는 늘 화려하고 아름답게 치장하려고 노력했었다. 그것이 카레나 비프타로서 공작가에 누를 끼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준비 다 마쳤어요, 아가씨.”

‘역시 모험가 집단에 들어가서 고고학자가 되는 게 좋을까?’

고대어를 해석하며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 나름대로 공작가를 떠나는 명분도 생긴다. 어쩌면 이 나라에 평생 발을 붙이지 않아도 될지 몰랐다.

“아가씨?”

대답이 없는 아델을 벨라가 다시 한번 불렀다. 그제야 아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선명한 황금빛 눈동자.

잘 정돈된 밝은 에메랄드빛의 머리카락.

그와 어우러지는 옅은 색조의 드레스는 그녀의 미모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왜?”

“슬슬 내려가셔서 마차에 오르셔야 합니다.”

“……아, 그래.”

아델은 한숨을 내쉬었다.

‘숨 막혀 죽겠군.’

마차에는 대개 가족 전원이 모두 함께 탔다. 불편한 마음에 요 며칠 멀쩡했던 위가 욱신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델은 난간을 붙잡고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높은 굽의 구두가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여전히 불편했다. 계단을 내려오자 집사가 허리를 굽혔다.

“아가씨, 마차 문은 열려 있으니 올라타시면 됩니다.”

“그래.”

아델이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를 들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마차 안에는 이미 다른 가족들이 타고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인 듯했다.

“받침대를 밟고 올라가시면 돼요.”

뒤 따라온 벨라가 발 받침대를 아래에 놓아 줬다. 그러나 도와주겠다는 듯 손을 뻗는 벨라를 보고도 아델은 못 본 척 스스로 마차에 올라섰다. 굳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마차의 문을 단단히 붙잡고 올라서면 됐기 때문이다.

“공작 각하와 공작 부인, 오라버님을 뵙습니다.”

마차에서 꼿꼿하게 서 있을 순 없었다. 아델은 마차에 탄 채 간단히 허리를 굽히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마차 안에 다른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호칭은 원래대로 바꿨다.

세 쌍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아델은 그들의 시선을 모른 척 펠리스 옆에 앉은 후 열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쿵쿵쿵쿵.

쿵쿵쿵쿵.

갑자기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창 쪽으로 돌리고 먼 하늘을 바라봤다.

‘……심장이 왜 이렇게 빨리 뛰지?’

이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증상이었다. 적어도 그녀의 기억 속에 이런 증상을 겪었던 적은 없었다.

‘콰앙-!’

‘끼이이이익-!’

‘여기에 있다!’

머릿속에서 웅웅 울리는 수많은 소음에 아델이 눈을 번쩍 떴다.

‘아, 그랬었지.’

그녀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애써 모른 척했다.

그녀는 마차에서 죽을 뻔했다.

아니, 죽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지금은 잠시 시간을 되돌아온 것뿐.

그녀는 죽었었다. 마차에서 구르고 머리가 부딪혀 죽을 뻔했다. 질질 끌려 바닥을 기면서 검에 심장이 꿰뚫렸었다.

아델은 축축하게 젖는 손을 감추기 위해 무릎 위에 올린 손을 말없이 그러쥐었다.

“요즘 잘 보이지 않더군.”

비프타 공작의 말에 아델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표정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갈무리했지만 피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싸하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느릿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녀가 가장 잘하는 표정이었다. 눈꼬리를 휘어 한껏 내리며 웃으면 그녀는 어떤 힘든 일도 아무렇지 않게 숨길 수 있었다.

“조금 바빴습니다.”

“서고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고는 들었다.”

“네.”

아델이 웃음을 입가에 띤 채로 묵묵히 대답했다. 그러나 웃는 얼굴과는 다르게 상당히 메마른 목소리다. 그걸 쉽게 눈치채지 못할 비프타 공작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아무 일도 없습니다.”

“시녀들이 네가 뭔가 이상하다는 말을 하더구나.”

“시녀라면 벨라 말씀이신가요?”

“그래.”

“……도대체 벨라가 제 시녀인지 공작 각하의 소식통인지 잘 모르겠네요.”

아델이 싸늘하게 웃으며 조용히 대답했다. 그러자 화사했던 미소가 순식간에 물이 빠지듯 아델의 표정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미간을 좁힌 채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뭐?”

비프타 공작의 물음에 아델이 입을 다물었다.

‘너는 그저 조용히, 쥐 죽은 듯이 카레나의 대역만을 하면 된다. 그러면 비참한 생활로 돌아가지 않고 평생을 굶주릴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테니.’

공작이 했던 약속은 사실 여태까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비프타 공작은 아델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고 했으나 죽기 전의 아델은 그럼에도 기대하고 바라고 원했다.

그리고 비프타 공작 역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평생 굶주릴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해 준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었다.

그녀가 공작의 사생아라는 사실을 숨겼다.

그들은 자신을 한없이 비참하게 만들었다.

모든 사실을 알고 스스로가 얼마나 우스웠는지 모른다. 그리고 결국 그녀를 죽였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비프타 공작에게 대가를 받아 낼 예정이었다. 자신이 죽어 버린 미래에선 받아 낼 수 없으니 과거에서라도.

“정말 어디 아픈 건 아니냐? 아프면 일정에 지장이 생기니 의원을 불러 제대로 진찰을 받아 보거라.”

선심을 쓴다는 듯한 비프타 공작의 말에 아델은 눈살을 찌푸렸다.

“괜찮습니다. 아픈 데는 없어요.”

아델은 다시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도 않고 벨라처럼 이해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뒤늦은 반항기라도 온 거냐? 너답지 않구나.”

공작이 혀를 차며 말했다. 한심하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델이 울컥 치솟는 것을 꾹 내리눌렀다.

‘참자.’

여태 참았다. 지금껏 참았으니 저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이런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공작 각하, 저다운 게 어떤 건가요?”

아델이 담담함을 가장한 채 말했다. 속은 썩어 문드러지고 불타서 재가 되어 가고 있다고 해도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을 숨기고 웃을 자신이 있었다.

그녀에겐 감정을 숨기고 웃는 것은 이제 일도 아니었다. 아델이 비프타 공작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언제나 찡그려지던 미간을 기억한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불렀다. 그러면 언젠가 진짜로 받아들여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럴 거면 처음 만났던 날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지.’

* * *

비프타 공작은 손을 들어 주름진 미간을 꾹꾹 눌렀다.

‘도대체 이유를 알 수가 없군.’

제 오점이자, 오점임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오점을 막을 패로 사용하고 있는 딸의 대역은 갑작스럽게 어느 날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식사에 참석하던 것도 아침마다 인사를 건네러 오던 것도 전부 하지 않게 됐다.

사생아 따위, 찾을 생각도 없었다. 제 딸이 그런 식으로 죽지만 않았어도.

위로 있는 두 아들과 딸 하나.

기대에 어긋남 없이 자란 첫째와 망나니처럼 자랐지만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둘째. 그에 비해 하나밖에 없던 딸은 태어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죽었다.

장례식조차 치를 수 없을 만큼 끔찍한 모습으로. 신성을 중요시하는 나라에서 ‘칼럿’은 치료 방법이 없는 악마의 병이었다. 그것에 대한 소문이 나면 분명히 가문은 끝이었다. 공작 가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제 딸아이의 죽음을 물고 늘어질 것이었다.

그래서 들인 것이 눈앞의 아이였다. 잘 웃고 무엇이든 혼자 척척 해내고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가짜 딸. 그리고 그녀는 생각보다 훨씬 더 잘 소임을 마치고 있었다.

사랑을 바라는 듯했다. 그러나 그 기대를 철저하게 무시했다. 무시하면 무시할수록 그녀는 더욱 필사적이 됐다. 어쩌다 가끔씩 칭찬을 해 주면 그걸로 만족하는 듯했고,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 편했다.

자신이 사생아라는 사실도 모르는 가련한 꼭두각시는 딱 이용하기에 좋았다. 여러모로 무척 쓸모도 있었고. 그래서 앞으로도 그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이는 달라졌다. 맨날 인사를 하던 아이가 얼굴을 비추지 않게 된 지도 일주일이다. 일주일 만에 가까이서 본 아이는 어딘가 빠진 듯 텅 빈 것처럼 보였다.

‘저다운 게 뭐냐고?’

비프타 공작은 고민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지?

잘 웃는 모습?

언제나 착했던 모습?

7년 동안 변함없이 약속을 지켜 준 것?

아니, 가장 적절하다고 한다면 어떤 명령이든 제대로 따라 준다는 것이겠지.

그러나 어느 것도 입 밖으로 내기엔 적절치 않은 듯했다.

* * *

그사이 마차가 황성에 도착했다.

아델은 마차의 문이 열리자마자 가장 먼저 내렸다. 이곳에서 사냥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과 모이고, 다시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풀헤임 숲’으로 향한다.

풀헤임 숲은 굉장히 넓고 웅장한, 제국만큼이나 넓은 숲이었다. 각종 동식물이 어울려져 살기 때문에 사냥 대회가 열리기 좋았다.

황성에서 개최하는 이 사냥 대회는 풀헤임 숲에서 2년에서 4년마다 비정기적으로 열리곤 했다. 몇 년에 한 번씩 열리는 대회이다 보니 규모도 꽤 컸다.

수많은 귀족 영애와 영식, 그리고 기사들이 보였다. 귀족 작위를 받은 기사들도 제법 많았다.

‘검은 갑옷을 입은 남자는 어디 있지?’

아델은 천천히 기사들을 훑었다. 대부분의 기사들이 번쩍이는 은빛 갑주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검은 갑주는 분명히 다른 기사들에 비해 눈에 띌 거다.

어느 순간 아델의 눈이 한곳에 멈췄다.

‘찾았다.’

과거와 크게 다르게 일이 진행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아, 눈 마주쳤다.’

머리에 투구를 쓴 기사는 아델의 시선을 느낀 듯 아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델은 묵묵히 기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쪽으로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카레나.”

뒤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아델이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비프타 공작의 목소리였다. 그는 가볍게 손짓하며 그녀를 불렀다. 주변에 있는 다른 귀족을 보아하니 인사라도 시킬 모양이다.

“네, 아버지.”

아델이 활짝 웃으며 비프타 공작에게 친근하게 다가섰다. 비프타 공작의 한쪽 눈썹이 쓱 올라갔다.

“오펜 후작이란다. 인사드리거라.”

“오랜만에 봬요, 오펜 후작님.”

아델이 가볍게 치마를 들어 올리며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래, 오랜만이지. 카레나는 여전히 아름답구나. 변함없이 아름답게 자라고 있어.”

“감사합니다.”

위아래로 훑는 눈길이 퍽 기분 나쁘지만, 아델은 참았다. 어차피 잠시뿐이었다. 아무리 후작이라도 공녀에게 함부로 손을 대진 못했다. 다행히 아델의 예상대로 후작의 시선은 금세 떨어져 나갔다.

“자, 슬슬 출발하는 것 같으니 마차로 돌아가겠습니다.”

비프타 공작이 먼저 안녕을 고했다. 후작도 순순히 물러났다.

네 사람은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이번에는 수많은 마차 행렬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델이 다시 속이 울렁이는 기분에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놈은 언제 돌아온답니까, 아버지?”

“콰른 말이냐? 곧 돌아온다고 편지를 써 보냈더구나. 언제인지는 적지 않았지만.”

들리는 소리에 아델의 미간에 순간 짜증이 서렸다.

‘그 망나니 새끼가 돌아오는구나.’

콰른 비프타.

그는 비프타 공작 가문의 둘째 아들로 검과 마법에 모두 재능을 보여 드물디드문 마검사였다. 그리고 유일하게 아델을 대놓고 괴롭히던,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족속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맘때 놈이 돌아왔었다는 걸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나갈까?’

아델이 지친 표정으로 사뭇 진지하게 생각했다.

콰른 비프타는 귀족으로서의 책임감이나 소양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양아치 중의 양아치였다. 힘없는 양아치는 차라리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데, 콰른 비프타는 능력도 힘도 있는 양아치라서 누구도 휘어잡지 못하는 놈이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아델을 가장 많이 괴롭힌 것도 놈이었다. 오죽 괴롭혔으면 종종 도가 지나치다며 펠리스가 막아 줬을 정도다.

‘아. 그래서였나? 내가 펠리스에게 호감이 있었던 건.’

콰른을 막을 수 있는 건 그래도 비프타 공작과 펠리스 정도다. 그는 성격이 괴팍하고 다혈질인 데 더해 잔인하기까지 했다. 도적 토벌을 하러 다닌다며 그들의 사지를 조각조각 내곤 했는데, 한 번은 그 시체를 포대에 넣어 와 제 앞에 흩트려 놓은 적도 있었다.

‘휴양이나 떠나 있을까?’

기억하기로 놈이 잠깐 들렀다 가는 시기는 한 달 정도다. 그 시기만 잠깐 피해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별장엔 다른 사람도 없을 테고.

아델이 진지하게 고민했다.

‘분명히 사냥 대회가 끝나고…… 일주일쯤 뒤에 왔었는데.’

아델은 그날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바로 그날이 놈이 유유자적 피가 뚝뚝 떨어지는 포대를 들고 와 선물이라며 그녀 앞에 풀어 헤쳤던 날이었으니까.

“어느 도적단을 괴멸시켜서 사지를 분리해 놨다던가, 도적단의 보물창고를 다 털었다던가 하는 소문이 들리더군요.”

“상대가 도적이면 괜찮다. 그래도 아무 데나 검을 휘두르진 않아서 다행 아니냐.”

“그 정도 머리도 없으면 죽어야죠.”

펠리스가 차갑게 일갈했다.

작위 따위엔 관심 없다며 뛰쳐나간 콰른 비프타 덕에 펠리스는 일찍이 후계자의 위치를 굳건히 했다. 그래도 치고 다니는 사고는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마차 안에 적막이 흘렀다.

애초에 공작 부인을 제외하면 전부 말이 많은 편은 아니니 누군가 운을 떼지 않는 이상 조용할 때가 많았다. 아델도 조금 편한 기분으로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구경했다.

“도착했습니다.”

오랜 시간 흐른 적막 끝에 마차 문이 열리고 마부가 말했다.

사냥 대회는 총 7일의 일정으로 7일간 가장 많이, 가장 커다란 짐승을 잡은 각 한 명씩만이 영광스러운 시상대에 올라간다.

보통 참가자들은 둘 중 하나의 상만 노려서 가장 커다란 짐승을 찾거나 그리 크진 않지만 잡기 쉬운 녀석들을 노리는 두 파벌로 갈라지곤 했다.

“한 시간 뒤에 1일 차 사냥 대회를 시작할 테니 각자 막사에서 준비를 마치고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기사 하나가 나무로 만든 단상 위로 올라가 커다랗게 소리쳤다.

귀족들에게는 각자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막사가 하나씩 주어진다. 그리고 그들은 그 안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함께하는 일이 얼마 없는 귀족들이 일주일씩이나 함께 합숙하는 거다. 그래서 이 행사를 즐기는 귀부인도 제법 됐다.

이 행사가 내키지 않는 건 역시 아델뿐이었다.

“우리도 들어가지.”

비프타 공작이 앞장섰다. 아델이 가장 마지막으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막사 안으로 발을 들였다.

막사 안에는 침대 두 개와 탁자가 놓여 있었다.

‘막사가 좁아서 침대 두 개가 들어오니 꽉 차네.’

아델이 생각하며 입구 쪽에 선 채 가만히 서 있었다.

탁자 근처에 선 그녀가 갑옷으로 갈아입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두 사람 모두 검을 단련한 검사답게 몸 전체에 근육이 잘 잡혀 있었다. 웃옷을 벗고 있는 펠리스와 아델의 눈이 마주쳤다. 펠리스가 미간을 좁혔다.

“뭘 그렇게 봐?”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델이 순순히 굽혔다. 펠리스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경기가 시작하려면 시간이 걸릴 텐데 앉아 있는 게 어떠냐?”

비프타 공작이 불편하게 서 있는 아델을 보며 말했다.

아델은 의자에 앉아 있는 공작 부인을 힐끗 쳐다봤다. 아델은 말없이 고개를 막사의 입구 쪽으로 돌렸다가 입을 열었다.

“술을 주고 싶은 상대가 있어서요. 저는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다들 지금쯤 각자 마음에 둔 사람에게 술을 건네주고 있을 거다.

‘지금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전해 주지도 못하고.’

아델이 놀란 눈을 하는 식구들을 뒤로한 채 가볍게 묵례로 인사를 건네곤 막사를 벗어났다.

막사 밖으로 나오니 기웃거리는 한 영애가 보였다. 펠리스를 찾아 온 손님인 듯했다. 그녀는 아델을 발견하곤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델은 내색하지 않고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펠리스 오라버니는 안에 계시니 들어가 보세요.”

“흠흠. 고, 고마워요, 비프타 영애.”

촥, 부채를 펼친 영애가 얼굴에 오른 열기를 식히려는 듯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아델은 끝까지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이곤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없네.”

그러나 검은 기사는 눈에 띄지 않았다.

기사들과 딱히 친하지 않은 건가?

‘그러고 보니 이 검은 기사의 이름이 뭐였더라?’

오래전의 일이라서 그런지 제대로 기억나는 일이 없었다. 아델은 천천히 기사들 사이를 거닐며 검은 갑주를 찾아 연신 눈동자를 굴렸다.

기사들 사이로 들어와 보니 온도 차가 적나라하다. 기사 중 유망한 이들은 술을 여러 개나 받고 웃고 있었다. 그러나 역으로 한 개도 받지 못한 기사들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중에 줘야겠네.”

결국 검은 갑옷의 기사를 찾지 못했다.

아델은 볼을 긁적이며 몸을 돌려 다시 막사로 향했다. 지금쯤이면 공작 부인은 귀부인들과 있을 테고 아델은 그곳에 끼고 싶지 않았다.

‘불편해.’

공작 부인은 대놓고 싫은 티를 내진 않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몸을 굳히고 불편한 내색을 내비췄다. 자신을 불편해하는 사람의 옆에 굳이 자리를 잡고 싶진 않았다.

막사로 들어가려던 아델은 기사단 사이에 서 있는 펠리스와 공작을 발견했다. 그들은 멀리 서 봐도 사람을 홀릴 것처럼 반짝거렸다.

“아, 아가씨.”

그들을 피해 막사 안으로 들어오자 침구를 정돈 중인 벨라가 보였다.

“벨라, 난 어디를 써야 하지?”

“주인마님과 같은 침대를 쓰시면 됩니다.”

벨라의 말에 아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자신을 볼 때마다 혐오스러운 눈을 하는 사람의 옆에 누우라고?

그러나 벨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물론 이 좁은 곳에 침대를 세 개나 들여놓을 순 없었다. 아델은 짜증을 꾹 눌렀다.

“……알았어. 이불만 다른 걸 구해 줘.”

“네.”

드디어 아델이 무언가를 시키자, 벨라는 퍽 기쁜 표정으로 막사를 나섰다. 무심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델은 막사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지도?”

탁자 위에 지도가 놓여 있었다.

아델은 탁자로 다가섰다. 아마도 사냥을 할 때 들어 설 숲의 길을 확인하기 위한 지도인 것 같았다.

“이건 뭐지?”

지도에 중간중간 비석 같은 모양이 표시되어 있었다. 아델은 지도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빛에 몸을 돌렸다. 벨라가 따로 덮을 이불을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아델은 탁자에 턱을 괸 채 앉았다.

‘책이라도 갖고 올 걸 그랬나.’

무료한 시간이었다.

뒤늦게 책을 가져오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감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긴 했다. 다만 일주일 내내 이렇게 무료하게만 있어야 한다니 조금 끔찍하긴 했다.

‘고대어로 된 책을 가져왔다면 좋았을 텐데.’

고대어를 해독하는 것은 꽤 시간이 들었다. 하나하나 번역을 하다 보면 여기서 시간을 죽이기에는 완벽했을 것 같은데…….

차라리 벨라를 시켜 옷이라도 갈아입고 편하게 있을까 싶었지만 아직 하루가 많이 남아 있었다. 괜히 책을 잡혀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싶지는 않았다.

벨라는 얌전히 침구 정리를 마치고 아델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델은 막사를 나서는 벨라를 쳐다보며 냉정하게 생각했다.

‘지금은 저렇게 공손하게 행동하더라도 결국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공작에게 보고하겠지.’

아델의 입가가 비틀려 올라갔다.

‘산책이라도 갈까?’

사냥이 끝나는 시간은 오후 5시 정도였다. 그 전에만 막사로 돌아오면 아무도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수많은 영애와 귀족들을 기사들이 한 명씩 세는 것도 아닐 테니까. 물론 딱히 그녀에게 관심도 없겠지만.

아델은 밖으로 나가기 위해 탁자 위에 굴러다니는 펜과 종이를 소맷자락에 집어넣었다.

그 순간, 천막의 문이 젖혀졌다.

공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다른 귀부인들과 대화를 마치고 막사 안으로 돌아온 듯했다. 굳이 인사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가만히 서 있자 공작 부인의 아름다운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이제는 인사도 안 하는구나. 천박한 것 같으니라고.”

“……예전부터 제 인사는 받기 싫어하셨잖아요.”

아델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직하게 대답했다. 공작 부인의 표정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그녀는 아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더러운 년!”

“…….”

“천박한 핏줄. 할 줄 아는 거라곤 우리에게 거머리처럼 붙어서 피나 빨아먹는 일이지.”

“…….”

“차라리 네가 죽어 버리면 좋으련만.”

“…….”

아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몰랐던 때와 알아서 절망해 버렸을 때, 어느 쪽이 더 비참할까? 어느 쪽이든, 아델은 공작 부인이 싫었다.

그리고 동시에 무서웠다. 그녀는 제 기분이 상하면 언제든 아델에게 손찌검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곳에서는 입을 다무는 편이 맞았다. 조용히 그저 짜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속에서 울렁울렁 무언가 자꾸 치고 올라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카레나처럼 말인가요?”

그녀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뭐?”

“제가 죽어 버리면 좋겠다고 하셔서요. 카레나 비프타와 같은 방식으로 죽길 바라시는 건가요?”

손끝이 떨렸지만, 아델은 애써 주먹을 쥔 채 말을 이어 갔다.

“아, 그것도 아니면 마차 사고라도…….”

짜악-!

거센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골이 띵하게 울렸다.

“네년이 미쳤다 미쳤다 하니까 정말 미친 줄 아는구나.”

짜악-!

같은 뺨을 공작 부인이 한 번 더 내려쳤다.

“…….”

표독스러운 공작 부인의 시선이 여전히 아델을 향하고 있었다.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어머니.”

언제나처럼 아무렇지 않다는 듯 환하게 웃어 보인 아델이 고개를 숙였다. 아랫입술을 깨문 아델이 몸을 돌려 천막을 벗어났다.

‘……짜증 나.’

아델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디든 남들 눈이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속을 꽉 채운 짜증이 그녀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숲…….’

그녀의 눈에 광활한 숲이 들어왔다. 아델이 눈을 한 번 깜빡이곤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빨리 시간이 지나갔으면…….”

그녀가 중얼거렸다. 얼른 공작 부인이 셀리나를 임신한 사실을 알았으면 했다. 그래야 그 정신없는 틈을 타서 아델은 도망을 칠 수 있을 테니까.

이제 슬슬 자립하기 위한 초기 자금을 위해 은행 금고를 개설해야지. 그리고 돈을 빼돌려 계획대로 모험가 집단을 알아봐야겠다. 응응. 그렇지.

아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애썼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고 고개를 젖혔다. 열이 오르는 눈가를 주먹으로 꽉 눌렀다.

‘꼭 그러자.’

혹시나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이 자신을 결코 찾을 수 없게 말이다. 공작의 둘째 아들인 콰른 비프타. 모험가 집단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 희대의 망나니에 이어 괴짜 공녀라고 소문이 날지도 몰랐다.

하지만 최소한 죽지는 않겠지. 아델은 그간 죽은 진짜 카레나 비프타가 살아 있다는 걸 증명했다. 이제 어디에 있든지 아델은 살아 있기만 하면 됐다. 아델이 살아 있는 한 카레나 비프타는 ‘칼럿’으로 죽은 게 아니니까.

그걸 3년 후의 공작도 알았던 거겠지. 그들은 더는 아델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략결혼의 패로 이용했었다.

‘고고학자를 구하는 모험가 집단이 있으려나?’

모험가 집단에 들어가겠다는 사실을 사교계에 알린다면, 분명히 시끄러워질 것이다. 어쩌면 공작가는 반대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더 이상 카레나 비프타가 필요하지 않을 테니 신경 쓰지 않을 가능성도 컸다. 비프타 가문도 눈엣가시 같은 그녀가 사라진다면 기뻐할 것이다. 아델도 원하던 자유를 다시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럼 맥시온을 찾아가 봐야겠네.’

맥시온은 어릴 적에 뒷골목을 주름잡고 있던 대장 역할의 남자애였다. 끌려가듯 입양, 아니 대역으로 살게 된 후에는 만날 수도 없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뒷골목의 정보를 맥시온이 꽉 쥐고 있었으니 살아만 있다면 분명 좋은 정보꾼이 되어 줄 거다. 종종 음식을 구하지 못해서 굶어 죽을 것 같을 때 뒤에서 식사를 챙겨 주던 좋은 아이였다.

“7년이나 지나서 나를 알아볼지는 미지수지만.”

사실 자신을 알아보더라도 환대를 해 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델은 돈을 넉넉하게 들고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돈에는 장사 없을 테니까.

“영애, 이쪽은 위험합니다. 어딜 가십니까?”

숲 근처로 다가서자 보초를 서고 있던 기사가 길을 막았다.

“잠시 바람을 쐬고 싶어서요. 금방 돌아올 테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안 됩니다.”

아델이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녹록치 않다. 아델이 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기사의 손에 올렸다.

“그럼 이건 어떠세요? 경께서는 저를 못 본 거예요. 저는 당신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에 멋대로 빠져나간 거고요.”

다행히 보초를 서고 있는 경비는 한 명뿐이었다. 금화를 받은 기사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금화 하나는 꽤 큰돈이었다. 망설이던 기사는 금화를 손에 쥐었다.

“……제가 영애를 보지 못한 것으로 해 주십시오.”

“알겠어요. 저도 해가 지기 전까지 금방 돌아올 테니 걱정 마세요.”

아델은 그대로 기사를 지나쳐 그가 막고 있는 숲길로 들어갔다.

‘과거에도 돈을 이렇게 사용하면 좋았을걸.’

대역이지만 위치가 위치인 만큼 조금 더 세상을 편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었는데 왜 마다하면서 살았는지.

일직선으로 쭉 늘어진 숲길은 나무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를 가득 채우는 청량한 냄새에 아델의 입가가 절로 풀어졌다. 오솔길은 좁지만, 드레스를 입고도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협소하진 않았다는 얘기다. 한참을 정처 없이 걷던 이윽고 아델이 막다른 길에 섰다.

“어? 여긴 어디지……?”

그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수풀을 헤쳤다.

“대체 여기가 어디야?”

길을 잃어버렸다. 너무 생각도 안 하고 홧김에 막 걸어온 탓이었다. 아까 지도를 봤지만, 자세히 보지 않아서 길을 찾기는 어려울 듯했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수풀을 헤쳤다. 한참을 헤매던 아델의 시선에 나무 사이로 무언가 거대한 것이 보였다.

‘……저게 뭐지?’

아델은 그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빽빽한 나무 사이, 공터같이 넓은 공간에 커다란 비석이 있었다.

“비석?”

그녀의 키보다 1.5배는 더 커 보이는 오래된 비석이었다. 돌을 깎아 만든 비석에는 고대어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아델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그 지도에 있던 표식인가?’

기억을 더듬었다.

‘그 지도에 있는 표식에서 가장 가까운 비석은 안전 구역 쪽이었는데.’

지금까지 걸어온 거리를 생각하면 그렇게 멀리 떨어졌을 것 같진 않았다. 다행히 아직 안전 구역 내에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몬스터가 거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제야 아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이 비석 자세히 보니까 완전히 고대어로 가득하네.”

비석 전면에 빽빽하게 글씨가 적혀 있었다. 돌로 팬 글씨는 꽤 오래전에 적은 것이 분명했다. 커다란 돌을 어떻게 깎아서 어떻게 이렇게 세워 뒀는지 의문이었다.

뭣보다 앞뒤를 반질반질하게 깎아 둔 게 더 놀라웠다. 대체 얼마나 바윗덩이를 사포 따위로 문대야 이렇게 종이만큼이나 깔끔하게 만들었을까?

손을 뻗은 아델이 비석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매끈하고 부드럽다. 덕분에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글자가 선명해서 알아보기 쉬웠다.

“해독하다 보면 일주일은 훌쩍 가겠네.”

아델이 까치발을 떼 고개를 한껏 젖힌 채 중얼거렸다.

고대어를 처음 접한 것은 공작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교양 필수 과목으로 고대어도 배우게 됐는데 그것이 무척 신기했다. 고대어 선생님께 비석을 해독하거나 고대의 삶을 해독해 그것을 복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를 해독하는 것은 즐거웠다. 그래서 고대어를 가장 즐겁고 재밌게 배웠던 것 같다.

한때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꿨던 적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사는 것조차 힘겨워서 완전히 잊고 살았지만.

그런데 설마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아델이 감회가 새롭다는 표정으로 비석을 매만졌다.

‘돌아가기도 싫은데, 조금만 해독해 보자.’

어쩐지 비석 옆은 무척 포근하고 따스한 느낌이 들기도 했으니까.

그녀가 혹시 몰라 챙긴 펜과 노트를 꺼냈다. 어딘가에서 쉬면서 그림이라도 그릴 생각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사용할 줄은 몰랐네.’

그녀가 비석에 있는 맨 첫줄 고대어를 종이에 똑같이 옮겨 적었다. 비석에 안기듯 바싹 붙어 서야만 첫 줄이 아슬아슬 시야에 들어왔다.

아델이 한 글자 보고 한 글자 옮겨 적고 한 글자 보고 한 글자 옮겨 적길 반복했다.

‘한 줄씩 해독해 봐야지.’

고대어인 만큼 당연히 쉽지는 않았다. 고대어도 언어인 만큼 나름대로 쉬운 단어와 어려운 단어가 존재했다. 쉬운 단어라면 아델도 큰 고민 없이 쓱쓱 풀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앞뒤를 유추해서 맞혀야 하는 경우도 있다.

“오늘은 세 줄만.”

아델이 고대어를 세 줄 고스란히 옮겨 적었다.

옮겨 적고도 다시 확인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러곤 바닥에 가져온 종이 몇 장을 깔고 주저앉았다.

‘이런 비석이 여태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는 게 신기하네.’

해독을 위해 옮겨 적은 종이를 바닥에 내려놓은 아델이 미간을 좁혔다. 그 순간 그녀의 시야에 한쪽이 찢어진 드레스가 눈에 들어왔다.

“……아.”

머릿속에 영애들이 뒤에서 수군댈 것이 상상됐다.

신경 쓰지 말자고, 책잡혀도 괜찮다고. 어차피 떠날 것 아니냐고 생각해도 생각과 지금껏 몸에 밴 행동의 차이는 컸다.

사실 그들은 아델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아델이 공작가를 떠나면 더욱 그럴 테고. 머릿속으로는 이미 뼈저리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쉬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인상을 확 구긴 아델이 망설이다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다 고개를 번쩍 들어 좌우로 힘껏 내저었다.

제기랄, 알 게 뭔가?

제국에 둘밖에 없는 공작가다. 드레스 하나 더러워진다고 가계가 휘청할 리는 없고 영애들이 욕한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펜을 꽉 쥐고 손가락 끝으로 고대어를 천천히 더듬었다.

“……언제?”

아델이 읽히는 대로 천천히 따라 읊으며 종이 아래에 해독을 적기 시작했다.

“언제가…… 읽…….”

아델이 종이에 천천히 글을 써 내려갔다.

아델이 고개를 숙인 채 글씨를 쓰는 도중 비석이 옅은 빛을 뿜어냈다. 비석에서 빠져나온 옅은 빛무리가 아델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순간 눈앞이 번쩍이는 기분에 아델이 고개를 들었다.

‘잘못 봤나?’

그녀가 앞을 살폈지만, 빛이 날 만한 구석은 없다. 아델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가 이내 다시 종이를 내려다봤다.

‘이 단어 어디서 봤는데…….’

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 한동안 고대어에 관련된 책을 보지 않았더니 기억날 듯 말 듯한 단어도 있었다.

아델의 눈이 몇 번이고 그림처럼 생긴 고대어를 훑었다. 아델의 입가에 저도 모르는 미소가 번지고 펜이 움직이는 속도는 느렸지만 꾸준했다.

앉은 채로 허리를 굽히고 있던 아델이 뻐근함에 몸을 세웠다. 그새 하늘 높이 해가 떴는지 아델이 있는 곳까지 빛이 새어 들어왔다.

바로 전날 비가 내렸는지 약간은 축축한 땅 이곳저곳에 새싹이 돋아 있었다. 봄을 알리듯 파릇파릇하게 자란 새싹들에서 생기가 느껴졌다.

폐를 찌르는 것은 맑은 공기였다. 녹음이 가득한 숲은 지독히 오랜만이었다. 지금껏 너무 바쁘게 살아와서 주변을 둘러볼 시간이 없었다.

“숲의 나무는 길가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네.”

숲에 울리는 새소리가 이렇게 크다는 것도 다람쥐가 나무를 뛰어다니는 것도 처음 경험했다.

‘조금만 더 하고 가야지.’

느긋하게 구경을 마친 아델이 다시 펜을 쥐고 해독을 시작했다.

* * *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으아.”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인 아델이 바닥에 깔았던 종이와 해독본과 펜을 손에 쥐고 일어났다. 슬슬 노을이 지려고 하는 것을 보니 곧 해가 지기 시작할 거다. 사냥이 끝나기 전에는 돌아간다고 했으니 돌아가야지.

그래도 해독은 세 글자만을 남겨 두고 다 끝낼 수 있었다. 막사로 돌아가 정돈을 하면 그럴싸한 문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델이 올 때보다 한층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길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뗐다.

그리고…….

“큰일 났네…….”

아델이 낭패감에 짙은 표정을 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이나 길을 헤맸지만, 적당한 출구는 발견하지 못했다. 애초에 숲은 나무들의 생김새가 다르지 않아서 길을 찾는 것부터가 문제가 많았다.

‘안일했어.’

비석을 중점으로 길을 떠올렸지만, 방향조차 잡을 수가 없으니 길을 찾는 것도 무리였다. 그나마 비석이라는 길잡이가 있는 덕에 이상한 곳으로 더 깊게 들어가진 않았다.

“이번엔 이쪽으로…….”

그녀가 떨리는 몸을 꽉 붙잡은 채 숨을 삼켰다. 이런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공포감에 짓눌릴 것 같았다.

크르르릉-.

그 순간, 어디선가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델이 숨을 삼켰다. 이미 숲에는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아델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일단 돌아가자.’

비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편이 나을 듯했다. 이대로 갔다간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들 듯했다. 아델이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바스락-.

수풀을 헤치는 소리와 함께 짐승의 낮은 울음소리가 다시 들렸다.

“흡…….”

아델이 숨을 삼키며 다시 걸음을 빨리했다.

사삭, 사삭-.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무언가가 쫓아오는 건 분명했다. 그저 빠르게만 걷던 아델이 결국 뜀박질을 시작했다.

크와아앙-!

아델이 뛰기 시작하자 뒤쪽에서 알 수 없는 짐승이 크게 울부짖었다. 동시에 아델을 쫓던 그것들도 어둠 속에 숨어 수풀 사이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샛노란 눈동자가 수풀 사이로 번뜩였다.

“헉, 허억.”

아델이 거친 숨을 내쉬며 볼 것도 없이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드레스 자락이 방해되자 드레스를 손으로 쥐고 든 채 신발을 벗어 던졌다. 비싼 구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헉, 흑…….”

오랫동안 아가씨로 살아온 몸이라 체력이 바닥이었다. 설마 그걸 이런 숲속에서 통감하게 될 줄이야. 눈을 질끈 감고 그저 앞으로만 내달리던 아델의 앞으로 무언가가 확 튀어나왔다.

“꺄아아악!”

결국, 그녀가 꾹꾹 내리누르던 공포감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쿵, 아델이 누군가의 가슴팍에 이마를 찧었다.

‘……가슴?’

단단하지만, 짐승의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사람이 입은 갑옷과 더 닮은 것이었다. 누군가의 단단한 손이 아델의 허리를 받치며 바싹 끌어안았다.

“이제 괜찮습니다.”

무척 낮고 울림이 있는, 차갑지만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와 단단한 온기에, 겁에 질렸던 아델의 긴장이 풀렸다. 그녀가 바들바들 떨리는 몸으로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인 채 상대의 온기에 몸을 기댔다.

손을 들어 아델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은 사내가 그녀의 얼굴을 어깨에 기대게 한 채 검을 뽑았다. 그러고는 검을 한 차례 휘둘렀다. 무척 가볍고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동시에 비릿한 피 냄새가 아델의 코끝을 맴돌았다.

“뒤는 보지 마십시오.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아델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을 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카레나 비프타 영애.”

“……당신은?”

처음으로 고개를 든 아델이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떠오른 달빛 아래로 비쳐 보이는 사내는 온통 새까만 갑옷을 입고 있었다.

‘이번 대회의 우승자…….’

아델이 눈을 끔뻑였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아, 네…….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델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아래로 엉망진창이 된 드레스 자락이 보였다.

이건 고쳐 입지도 못할 것 같다.

“시간이 늦었는데 돌아오지 않으셔서 모두들 영애를 찾고 있습니다. 이 깊은 곳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정중한 목소리였지만, 약간의 안일함을 지적하는 듯한 말투가 섞여 있었다.

“잠시, 산책을 하고 싶어서…….”

“일탈을 하고 싶은 때는 언제나 있는 법이죠.”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사내가 말했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아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돌아가는 길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 길부턴 짐승이 없을 겁니다.”

“네. 같이, 돌아가진 않으시나요?”

“……나는 조금 더 주변을 둘러보고 가겠습니다.”

한순간 검은 갑옷을 입은 사내의 목소리가 억눌린 것처럼 들렸다.

“그렇군요.”

아델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 숲길을 또 혼자 걷고 싶진 않았는데.

“모습이 없어질 때까지 이곳에서 보고 있겠습니다.”

아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가 아델의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옆에 서서 눈높이를 맞춘 채 검지를 세워 팔을 뻗었다.

“이 길을 따라 똑바로 나가시면 막다른 길이 나옵니다. 그러면 거기서 왼쪽으로 백 걸음 정도만 가면 야영지입니다.”

“알겠어요.”

“착하군요.”

사내가 아델을 칭찬하며 가볍게 머리를 토닥였다. 아델이 조금 놀란 눈으로 머리를 살짝 매만졌다.

“가십시오. 보고 있겠습니다. 다음엔 야영지에서 뵙는 걸로.”

“네.”

아델이 몸을 돌렸다.

“아!”

그녀가 다시 몸을 돌려 사내를 쳐다봤다. 검은 갑옷의 사내의 투구가 살짝 기울어졌다.

아델이 소맷자락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내 내밀었다. 아델이 내민 주머니를 사내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건 뭔가요?”

“팔 떨어지겠어요.”

아델이 투정하듯 말하자, 사내가 그제야 팔장을 끼고 있던 팔을 풀고 제대로 섰다. 그가 천천히 손을 뻗어 아델의 손바닥에서 주머니를 가져갔다.

“술이군요.”

사내가 비단 주머니를 열어 보고는 말했다.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비단 주머니에서 술을 꺼냈다. 새까만 술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유리구슬 아래에서 바람에 휘날렸다.

“이걸 왜 제게?”

목소리엔 웃음기와 함께 의아함이 섞여 있었다. 물어보며 남자는 술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뜬금없기도 하겠지만.’

짐승한테서 구해 줬다고 갑자기 술을 내밀다니. 아델이 스스로의 행동을 생각하면서 볼을 긁적였다. 마땅히 이유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구해 주신 보답으로 할게요.”

“다른 분께 드릴 예정이었다면 괜찮습니다.”

사내가 술을 아델에게 도로 내밀었다.

“영애가 주는 술을 거부하는 건 좋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음.”

“그리고…….”

애초부터 당신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입을 열려고 했던 아델이 고개를 돌렸다.

“혹시나 우승했는데 술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면 서글플 것 같아서요.”

그녀의 입에서 솔직하지 못한 대답이 튀어 나갔다.

아델의 말에 사내는 갑옷 안에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시선이 적나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그렇군요.”

“네, 그러면 이번 대회 건승을 기원할게요.”

아델이 물러나기 위해 깔끔하게 인사를 건넸다.

몸을 돌리려는 아델을 보던 사내가 성큼 걸어가 그녀를 앞지르곤 그 앞에 우뚝 섰다.

졸지에 물러나려다 앞이 가로막힌 아델이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사내를 쳐다봤다.

“기왕 술을 주셨으니 달아 주고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네?”

“다른 영애들은 전부 달아 주는 것 같던데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낮에 영애들이 기사의 허리춤에 술을 달아 주고 있었다. 개중엔 얼굴을 붉힌 영애도 있었고 기사와 함께 어쩔 줄 모르는 영애도 있었다.

‘그런 풋풋한 얼굴은 할 줄 모르는데.’

물론, 달아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사내가 아델의 손을 펼쳐 그 위에 술을 올려 주고 다시 손등을 오므려 조심스럽게 술을 쥐게 했다. 그녀가 결국 허리를 굽혀 사내의 허리춤에 술을 가져다 댔다.

“저를 아십니까?”

“……아뇨.”

아델이 최대한 평정을 가장한 채 대답했다. 다행히 사내는 아델을 추궁하지 않았다. 그녀가 술을 묶고 물러나자 사내가 팔을 뻗었다.

“술을 받았으니…….”

사내가 아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답을 해야겠지요.”

아델이 말릴 새도 없이 그가 허리를 굽혔다.

“당신에게 승리를.”

사내의 투구가 손등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뿌우우우-!

뿔 나팔 소리가 들렸다. 기사의 맹세를 하듯 허리를 굽혔던 남자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다들 찾고 있습니다. 얼른 돌아가 보십시오.”

엉겁결에 등 떠밀린 아델이 바닥에 달라붙은 것 같은 발을 뗐다.

‘뭐지……?’

술을 받으면 하는 맹세인가?

아델이 슬쩍 뒤를 쳐다봤다. 멀리서 사내는 정말 이쪽을 똑바로 바라본 채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가 모습을 감출 때까지 계속.

* * *

“윽…….”

아델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사내가 나무를 붙잡으며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그는 힘겹게 나무를 붙잡은 채 숲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어느샌가 점점 인기척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무 사이로 숨어들어 그보다 더 깊은 수풀 사이로 들어간 그는 이내 범위 내에서 누구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걸음을 멈춰 섰다.

그가 투구를 벗고 이를 악물며 심장 부근을 꽉 부여잡았다. 숨을 쉬기가 버거워졌다. 검은색 머리카락이 땀에 젖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힘겨워하는 표정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이 빚었다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이질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사내였다.

그가 투구를 바닥에 던졌다. 무거운 투구가 바닥을 굴렀다. 심장께를 부여잡은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황급히 주머니를 뒤졌다. 주머니에서 작은 알약이 든 약병을 꺼내 드는데 약병과 아델이 건네 준 술이 얽혀 버렸다.

“큭…….”

사내가 황급히 손에 힘을 줬다. 술보다는 숨을 먼저 쉬어야 했다.

투둑-.

엉킨 것을 힘을 줘 뜯자 아델이 허리춤에 묶어 준 끈이 끊겨 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꽉 죄이는 심장의 통증에 이를 악물며 그가 허리를 숙여 약통을 든 손으로 술을 주웠다.

약통에서 약을 꺼내려는 순간, 술을 꽉 쥔 손에서 시원한 느낌이 들더니 심장을 찌르는 듯한 고통이 사라졌다.

“뭐지……?”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술과 약병을 쥔 손에서 힘을 풀자 다시 심장에 통증이 밀려왔다.

“커흑…….”

아까보다 통증이 강했다. 사내가 나무 기둥을 붙잡고 무너지면서도 다시 술과 약병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또다시 통증이 약해졌다. 이번엔 아예 사라진 건 아니고 아주 약간의 통증은 있었다.

‘이 술 때문인가?’

약해진 통증 사이로 제정신을 차린 그가 생각했다. 그가 다급히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사내는 알약 두 알을 꺼내 입에 털어 넣고는 우적우적 씹어 냈다. 입 안에 쓴맛이 돌았다.

“제길.”

나무를 주먹으로 거칠게 내리친 그가 이를 악물었다. 남자는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나저나, 이 술은 뭐지?”

눈을 가늘게 뜬 그가 제 손에 쥐어진 장식물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주 잠시 잠깐이었지만 통증을 완화했다. 이 약이 아니면 그 어떤 의사도 약사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고통을.

“카레나 비프타…….”

묘하게 어딘가 그리운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보는 순간, 끌어안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나저나 신기한 술이군.’

사내의 눈이 어둠 속에서 이질적으로 빛났다.

* * *

야영지는 횃불을 든 기사와 병사들로 가득했다.

“아가씨!”

아델이 돌아오자 벨라가 가장 먼저 뛰쳐나왔다. 자신을 걱정한 듯 보이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아델은 이제 알고 있었다.

“그래. 숲을 구경 갔다가 좀 늦었어. 옷도 좀 망가졌는데 여분의 드레스 있니?”

“네…… 여분으로 몇 벌 가지고 왔어요. 그것보다 공작 각하께서 무척 화가 나셨어요.”

벨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 알겠어. 내가 들어가 볼게. 그리고 내일부턴 드레스 안 입을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아델이 죽을 뻔했던 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녀는 이제 카레나 비프타로서 살아왔던 시간을 하나씩 내려놓을 거다. 그걸 위해선 지금까지와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있어야 했다.

“난 시상식 때 입을 드레스와 돌아갈 때 입을 드레스만 있으면 돼.”

아델이 막사 앞에 선 채로 말했다. 공작 각하가 화가 났다니, 들어가기 무서운 것도 사실이었다.

벨라가 당황한 듯 뒤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더 할 말 있니? 없으면 공녀는 돌아왔으니 찾지 않아도 된다고 전하렴.”

“네네……. 그런데 내일부터 드레스를 안 입는다는 게 어떤 말씀이신지…….”

“첫날은 배웅이 필수지만 내일부턴 아니잖아.”

“하지만 그래도 다들 참가하실 텐데요…….”

벨라가 드레스를 품에 끌어안은 채 말했다. 끈질긴 벨라의 말에 아델의 표정에 살짝 금이 갔다. 그녀가 말없이 벨라를 쳐다봤다.

“……알겠습니다.”

아무 말 없이 쳐다보는 아델의 모습에 당황한 벨라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하고는 물러났다.

아델이 길게 호흡하며 조심스럽게 막사의 문을 젖히며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에는 딱딱하게 굳은 공작이 매서운 눈을 한 채 탁자에 앉아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아델을 보며 팔짱을 끼고 있던 공작이 눈을 크게 떴다.

“너어……!”

공작의 노성에 아델이 숨을 삼켰다.

공작 부인이 퍽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탁자에 앉아 있었고 펠리스도 팔짱을 낀 채 무심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 나가!”

공작이 고성을 내지르며 막사 안의 사용인들을 전부 쫓아냈다.

“네년이 미쳤지!”

“잠시 산책을 갔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아델이 최대한 평정심을 가장하기 위해 노력했다. 공작은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냉철한 양아버지의 탈을 벗어던지기라도 한 듯, 노여운 얼굴이었다.

“이게 무슨 창피한 짓이냐! 공녀가 없어져서 기사들을 다 동원해 찾는다는 게 말이야!”

“…….”

아델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녀가 최대한 움츠러들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뼛속 깊이 박힌 공포와 풍화되어 사라진 애정의 잔재와 긴 시간 억눌려 왔던 시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이리 와라.”

공작이 명령했다.

아델이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자 공작의 손이 근처의 테이블을 더듬었다.

퍽-, 쨍그랑!

아델이 고개를 드는 순간, 공작의 손에 있던 찻잔 같은 것이 날아와 그녀의 볼을 치고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아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며 굳어졌다.

‘……정말 오늘 운수 최악이네.’

낮에는 공작 부인, 밤에는 공작 본인인가?

그가 왼손잡이여서 똑같은 부위를 두 번 맞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를 해야 하는 건가?

아델이 웃음이 비죽 튀어나오려는 걸 꾹 참아 냈다.

“하루 종일 보이지도 않고! 인사도 다니지 않았지.”

공작이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델이 욱신거리는 볼에 손을 대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고개를 마저 치켜들었다.

“네.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다른 걸 좀 했습니다.”

“이게 아직도……!”

공작이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아버지, 그 이상 때리면 다른 자들이 눈치챌 수도 있습니다.”

펠리스가 말했다.

그 한마디에 공작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가 한층 진정한 듯 호흡을 길게 뱉었다.

“네가 벨라를 혼냈다지. 해고를 하겠다고? 주제를 파악하라고? 정말 그걸 파악해야 할 쪽은 누구인지 잘 생각하도록 해라.”

아델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 와서 새삼 깨달은 것은, 아델이 반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 자신의 생활에 폭력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었다. 사랑받으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래도 그런 죽음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말 잘 듣는 개는 때릴 필요도 없으니까.’

아델의 숙인 얼굴에 조소가 떠올랐다. 스스로가 우습고 고귀한 척하는 공작이 역겨웠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제대로 활동하고.”

“아뇨. 거절하겠습니다.”

아델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비프타 공작이 퍽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치켜떴다.

“카레나 비프타, 대체 왜 내 말을 듣지 않지?”

그러곤 이번에는 퍽 부드러운 목소리로 회유하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속지 않았다. 아델은 언제나처럼 상냥한 미소를 흉내 내며 그린 듯이 웃었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하지만 여기서 또 물러나면 죽기 전과 달라질 게 없었다. 비프타 공작은 함부로 그녀에게 손대지 못할 것이다. 아델이 그들의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괜찮아.’

괜찮다. 어떤 말을 해도 도를 넘지만 않으면 큰 문제는 없을 거다. 아델이 심호흡을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차라리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하거라.”

“그럼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긍정의 대답을 내놓은 아델의 말에 비프타 공작이 그녀를 쳐다봤다. 비프타 공작의 시선에 아델이 망나니 둘째 공자를 떠올렸다.

“말해 보거라.”

“저는 10년 동안 공작 각하와의 약속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1년 뒤엔 집을 나갈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신다면 평범하게 출가를 하든지 아니면, 모험가 집단이나 의원의 밑으로 들어갈까 해요.”

말이 나온 김에 확실히 얘기를 해 두는 편이 좋다. 이런 건 서로 간에 어느 정도 생각과 준비가 필요한 일이니까.

아델의 말에 비프타 공작의 눈이 큼직하게 떠졌다. 그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확 좁힌 채 아델을 쳐다봤다.

아델이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소리냐?”

“……저는 카레나 비프타가 살아 있다는 걸 증명했습니다. 이제 아무도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그러니 이제 그만하고 제 삶을 찾고 싶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대가를 받을 차례다. 정략결혼의 패로는 사용되고 싶지 않다고, 아델은 그것을 에둘러 말했다. 적어도 지금 그 사실을 아델이 알고 있어선 안 됐으니까.

“네 말은 지금 집을 나가겠다는 거냐?”

“네.”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곤 담담하게 대답했다. 꾹꾹 눌러 뒀던 것을 드디어 입 밖에 내고 나자 한층 속이 편해졌다. 여전히 볼은 화끈거렸지만.

비프타 공작이 말없이 아델을 쳐다봤다. 그러나 찡그린 미간은 그의 심기가 편하지 않다는 걸 보여 줬다.

“허락할 수 없다.”

“허락해 주셔야 할 거예요.”

아델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면 저 역시 생각이 있습니다.”

“네가 감히 내게 협박을 하는 거냐?”

비프타 공작이 불쾌한 듯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가 아델을 한번 쳐다보고는 갑옷을 벗었다. 몸을 돌려 버린 그는 더 대화할 의지가 없는 듯했다.

“공작 각하.”

“네가 나가서 뭘 하겠다는 거지? 굶어 죽겠다는 거냐? 아니면 그때처럼 뒷골목에서 버려진 빵 하나를 먹겠다고 주먹질을 할 거냐?”

“…….”

“네 주제를 알아라. 지금처럼 살고 싶다면 가문의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해라.”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 가는 기분이었다.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데?’

아델은 이후에 공작가에게 버림받는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도리어 이 상황에 구역질이 났다.

“카레나는 살아 있다. 저는 그걸 충분히 지금까지 잘 증명했다고 생각하는데요.”

“닥치거라.”

“가문의 명예는 충분히 지켰습니다. 원하시던 대로.”

“또 주제 파악을 할 시간이 필요한 거라면 계속 그렇게 해 보거라.”

비프타 공작이 매섭게 아델을 쏘아붙였다.

움찔-.

아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옷자락을 손으로 꽉 쥐었다. 새하얗게 질린 아델이 고개를 숙였다. 새겨진 공포에 그녀의 몸이 잘게 떨렸다.

더러운 위선자.

순간 그런 생각만 들었다. 어차피 버릴 거면서. 그러니 차라리 그편이 훨씬 나았다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아델은 애써 울분을 삼켰다.

길어야 1년이다. 공작 부인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관심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대역이다.

대역이었다.

‘알고 있어.’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델은 어렸다. 난생처음 닿는 따스함에 그 이상의 것을 원했다. 그들에게 그녀는 광장에 서 있는 동상만큼이나 당연한 존재였다.

멋대로 기대했다는 건 안다. 그래서 기대도 하지 않고 애정도 바라지 않기로 했다. 당연하지만, 또다시 죽는 건 사양이었다. 그것만큼은 피하고자, 아델 역시 필사적인 것뿐이었다.

“이해했다면 이 얘기는 그만하자.”

비프타 공작이 피곤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델이 숨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꾹꾹 눌러쓴 노트가 보였다. 그녀가 욱신거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아.’

그래 봐야 공작은 제가 했던 말에 스스로 걸려 넘어지게 될 거다. 1년도 되지 않아서, 머지않아 알게 될 공작 부인의 임신 소식에 말이다. 아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물을 좀 먹고 오겠습니다.”

그녀가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뒤에서 갑옷을 벗고 있던 펠리스가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말 제가 없는 동안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없었다.”

“저것에는 그만 신경 써요. 펠리스, 너도.”

비프타 공작의 말에 공작 부인이 말을 덧붙였다.

“근데 무슨 애가 못 본 사이에 저렇게 변합니까?”

“내가 묻고 싶군.”

비프타 공작이 한결 가벼워진 차림으로 식탁에 앉았다. 공작 부인의 표정이 불쾌함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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